형이상학적 실재론의 난제에 관하여 뉴튼, 아인슈타인, 칸트, 벤저민 리 워프(Benjamin Lee Worf)와 문화충돌
16. 형이상학적 실재론의 난제. 형이상학적 실재론자에 의한.
적어도 이 입장의 난제들을 암시하지 않고 형이상학적 실재론이라는 논제를 떠나면 잘못된 일일 터이다. 이 난제들은 중대하다. 내가 보기에 그 난제들로 인하여 해결될 수 없는 문제들이 제기된다. 그러나 실재론에 대한 나의 신뢰에 조금도 영향을 미치지 않는 특징이 그 난제들에 있다. 그 난제들은, 말하자면, 그 문제 및 논증에 의하여 내가 실재론에 대한 나의 신뢰를 뒷받침할 수 있는 그 문제 및 논증과 다른 수준 위에 있다. 그것은 아마도 덜 합리적인 수준이다 ㅡ 논증이 그 수준 위에서 다소 모호해져서 덜 다루어질 수 있는 수준.
뉴튼은 자신의 원격작용 이론에 의하여 우주가 하느님의 감각중추라는 소신에 이르렀다. 그 논증은 의심할 바 없이 다소 환상적이다; 그러나 그 논증에, 눈에 마주치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이 있다. 이유인즉 그 난제가 매우 실재적이기 때문이다. 우주에서 거리는 엄청나다. 원격작용은, 중력 효과가 하느님처럼 전 세계에 편재했다고 의미할 터이다. 뉴튼은 아인슈타인처럼 원격작용을, 자연의 역학에 있는 속성으로서 수용할 수 없다고 느꼈다. 그는 자연의 신비를 느꼈고 그 신비를 하느님에게 귀속시켰다.
아인슈타인은, 중력간섭(gravitational disturbances)을 광속으로 퍼지게 만드는 자기 이론에 의하여 이 문제를 해결했거나 해결한 듯이 보인다. 이 해결책은, 특히 앞 절에서 우리의 토론 관점으로부터 고도로 만족스럽다: 그 해결책은 빛 이론과 중력 이론의 통합 가능성을 가리키고, 빛과 중력간섭을 우주의, 우리 세상의 구조적 속성들에 ㅡ 장(場) 속성들 ㅡ 관하여 해석함에 의하여 그 통합 가능성을 가리킨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뉴튼의 문제와 직면한다. 이유인즉 우리 세상의 이 구조적 속성들 자체가 어떠하냐? 이기 때문이다. 그 속성들이 언제 어디서나 동일하다고 우리가 믿는다. 우리는 어떻게 이것을 이해할 수 있을까?
우리 세상의 구조적 속성들을 우리가 말할 때 세상을 마치 그 세상이 수정(水晶: crystal)이나 풍선 아니면 혹시 기계와 같이 사물인 양 우리가 적어도 은유적으로 말한다. 그러나 현재 물리 이론에 따르면 수정(水晶: crystal)이나 풍선 아니면 기계의 구조적 속성들은 그것들의 부품들 사이의 상호작용에 기인한다; 그리고 이 상호작용은 빛의 속도에 이르고 빛의 속도를 포함하여 유한한 속도를 포함한다. 상호작용으로 인하여 수정이 제 형태로 유지된다; 상호작용으로 인하여 풍선 속의 가스 압력이 결정된다; 상호작용으로 인하여 기계가 결합된다.
그러나 우리가 자연법칙에 의하여 기술하는 세상의 구조적 속성들은 그렇게 이해될 수 없다. 그 속성들이 모든 상호작용의 토대이기 때문에 상호작용에 기인하는 것으로서 설명될 수 없는 듯하다. 그 속성들은 ㅡ 이것은 그 속성들에 있는 가장 깊은 특징이다 ㅡ 언제 어디서나 세상을 통틀어 동일하다: 그 속성들은 모든 곳에 존재한다. 그래서 뉴튼의 문제가 다시 출현한다.
게다가 우리가 언급한 다양한 물체의 구조들은 법칙을 통하여 이해되거나 설명될 수 있다. 그러나 세상의 구조는, 법칙이 설명한다기보다 기술하는(describe) 것이기 때문에 다르다. 그러나 이 난제는 덜 심각하다. 이유인즉 우리가 더 깊은 법칙에 의하여 법칙을 ㅡ 그리하여 세상의 구조를 ㅡ 설명할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궁극적 설명이라는 본질주의적 이론을 포기하면 도움이 된다. 게다가 이것은 우리가 우리 자신의 은유에 의하여 희생되어서는 안 된다고 우리 자신에게 상기시킬 장소일 따름이다; ‘우리 세상의 구조’는, 법칙이 기술하는 것을 상상하는 데 우리를 돕도록 고안된 은유일 따름이라고 우리 자신에게 상기시킬 장소일 따름이다; 그 은유가 어느 곳에서 붕괴하기 마련이라고 우리 자신에게 상기시킬 장소일 따름이다; 그리고 그 은유가 정말로 붕괴하는 장소를 발견했다는 것이 매우 만족스럽다고 우리 자신에게 상기시킬 장소일 따름이다.
이 모든 것은 기억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것에 의하여 뉴튼의 난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우리가 자연법칙의 존재를 수용해야 한다고 내가 믿는다; 그러나 아인슈타인 이래 아마도 훨씬 더 관통될 수 없게 된 수수께끼로서 우리가 자연법칙의 존재를 수용해야 하므로 내가 우려한다; 이유인즉 아인슈타인에 따라서 어떤 효과도 초광속으로 퍼질 수 없다고 상정하는 자연법칙 자체로 인하여, 모든 곳에 존재하는 세상의 구조적 동질성이 이해 불가능하게 되기 때문이다.
우주 팽창론이 여기서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러나 0의 순간으로부터 1초 (또는 1초의 일부) 내에 세계의 반경에 많은 광년의 질서가 있다고 상상되면 우주 팽창론은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이 경우 우리가 ‘열평형[thermal equilibrium]’을 말할 수 있을 터라는 것이 적어도 나에게 매우 명백해 보인다.)
ㅡ 비트겐슈타인의 말을 이용하여 ㅡ ‘세계가 어떠한가가 아니라 세계가 그렇다는 것이 신비롭다’라고 흔히 언급되었다. 그러나 우리의 토론으로 인하여 세계가 어떠한가가 ㅡ 세계에 구조가 있다는 것 혹은 세계의 엄청나게 먼 지역들이 모두 동일한 구조적 법칙에 종속되어 있다는 것 ㅡ 우리가 신비롭다(mystical)는 용어를 사용하고 싶어 한다면 원칙적으로 설명될 수 없어서 ‘신비롭다(mystical)’고 밝혀진다. 이것은 아무튼 실재론자가 자신이 빠져있다고 발견하는 곤경인 듯하다. 관념론자는 이것으로부터 출구를 ㅡ 그가 설명을 통하여 이 수수께끼를, 세계의 순전한 존재에 관한 수수께끼로 환원시킬 설명 ㅡ 지닐 것이다. 이유인즉 칸트(Kant)와 함께 그가 우리의 지성이 자체의 법칙을 자연에 부과한다고 말할 것이기 때문이다; 또는 비트겐슈타인의 말로 ‘단지 법칙-같은 연결이 생각될 수 있다’라고 말할 것이기 때문이다. 실재론자가 적어도 부분적으로 이 견해들에 동의할지라도 그 견해들은, 세계가 있다면 왜 그 세계가 법칙에 의하여 통제되어 생각될 수 있는 세계이어야 ㅡ 어떤 지성에 이해될 수 있는 세계 ㅡ 하는지를 그가 설명하거나 이해하는 데 전혀 도움을 주지 않는다; 생명체가 살아갈 수 있는 세계.
그 난제에 대한 어떤 추가 예시가 혹시 도움이 될 것이다. 우리는 꽁트(Comte)와 밀(Mill)의 용어사용법을 채택할 것이고 그들은 두 종류의 법칙이나 규칙성을 ㅡ 계승의 규칙성과 공존(共存: co-existence)의 규칙성 ㅡ 구분한다. 계승의 법칙(law of succession)은 시간이 본질적 역할을 수행하는 저 ‘인과’율로 예를 들어 체계의 상태 변화를 (가속과 같은) 결정하는 법칙이다. 공존의 법칙(laws of co-existence)은 예를 들어 동물이나 분자 또는 원자의 해부학적이거나 구조적 규칙성을 기술하는 법칙이다.
이제 동물이나 분자 또는 심지어 원자의 공존에 대한 구조적 법칙은 원칙적으로 ‘인과’율로 ㅡ 저 인과율에 따라서 이 구조들이 생성되어 얼마 동안 (상대적으로) 안정된 상태를 유지하는 저 인과율 ㅡ 환원될 것이다. 우리는 적어도 원칙적으로 예를 들어 공명 이론(the theory of resonance)의 도움받아 분자의 안정 상태를 이해할 수 있는 듯하다; 다시 말해서 구성적 부분들의 인과적 상호작용의 안정 상태를 이해할 수 있는 듯하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까지 구조적 법칙이나 공존의 법칙을, 전자전하(電子電荷)나 전자질량의 절대적 불변성으로서 이해하지 못한다; 혹은 더 일반적으로, 기초입자들의 속성들에 대한 절대적인 정성적(定性的: qualitative) 및 정량적(quantitative: 定量的) 정체를 이해하지 못한다. 이것들은 상호작용에 기인하는 것으로서 이해될 수 없는 듯하다: 일반상대성에 따르면 그 거리가 몇 광년으로 측정될 동시적 전자전하들 사이에 동질화 상호작용(equalizing interaction)이 있을 리가 없다.
그러나 어느 날 우리는 전자와 다른 기초입자의 평형 상태를, 우리가 분자의 평형 상태를 설명하는 방식과 표면적으로 전혀 다르지 않은 방식으로 아마도 도출하여 설명할 터이다; 다시 말해서 인과적 ‘계승의 법’에 ㅡ 가령 이산형 해의 스펙트럼(a spectrum of discrete solutions)을 결정하는 장방정식(場方程式: field equations) ㅡ 관하여 아마도 도출하여 설명할 터이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가 계승의 법칙과 공존의 법칙 사이의 이원론을, 후자(後者)를 전자(前者)로 환원함으로써 초월했다고 의미할 터인가? 전혀 그렇지 않다; 이유인즉 우리의 방대한 세계 안에 있는 모든 전자가, 서로 인과적으로 영향을 미치지 않고, 동일한 전하(電荷)를 절대적으로 지니는 듯이 보인다는 사실의 ㅡ 구조적 법칙 ㅡ 설명 불가능성에 대하여 우려하는 대신 우리의 방대한 세상의 모든 부분이 전자전하(電子電荷)의 정체를 결정하는 동일한 법칙에 의하여 통제된다는 사실에 대하여 이제 우리가 우려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구조적 사실은 ㅡ 비록 다르게 표현될지라도 분명히 이전과 동일한 ㅡ 언제나 인과적으로 설명되는 여하한 희망을 아주 분명하게 초월하는듯한데 왜냐하면 여하한 인과적 설명도 틀림없이, 그 보편적 타당성을 우리가 설명하고 싶어 하고 이해하고 싶어 하는 법칙과 꼭 같은 법칙에 관해서일 터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공간을 (그리고 시간) 통한 우리의 인과적 법칙에 있는 보편성이나 불변성에 대한 주장은 구조적 규칙성을 ㅡ 인과적 법칙 즉, 계승의 법칙에 의하여 설명될 수 없기 때문에 원칙적으로 설명될 수 없는 듯이 보이는 공존의 규칙성 ㅡ 주장하는 것에 해당한다. 정말로, 우리가 계승의 법칙에 대하여 말한다면 모든 공존하는 계승을 포함하여 모든 계승이 동일한 규칙성, 동일한 구조가 드러낸다고 말할 의도가 우리에게 있다. 그리하여 세계의 구조적 동질성이, 여하한 ‘더 깊은’ 설명에 저항하는 듯이 보인다고 우리가 한 번 더 안다: 그 동질성은 수수께끼로 남는다.
이 수수께끼가, 일종의 논리적 필연성에 의하여 세계가 지금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함에 의하여 해결될 수 있다고 내가 생각하지 않는다. 자연과학을 논리로 환원하려는 소망은 내가 보기에 터무니없고 역겹다. 그 수수께끼가 관념론에 의하여 해결될 수 있다고도 내가 생각하지 않는다. 관념론은 자체의 다양한 형태로, 특히 규약주의(規約主義: conventionalism)와 도구주의 모두가 해결책을 제시한다; 그러나 이 해결책은 분명히 참이 아닌 듯이 보여서 거짓 해결책에 의하여, 특히 그 거짓 해결책이 천박하다면 수수께끼로부터 도망치려고 시도하는 것보다 수수께끼와 대면하는 것이 낫다.
칸트의 독창적 해결책을 ㅡ 우리의 이성은 자연이라는 열린 책에서 법칙을 읽지 않고 자체의 법칙을 자연에 부과한다는 ㅡ 참고하라. 이것은 어느 정도까지 참이다; 우리의 이론은 우리 자신이 만든 것이어서 경험적 사실을, 우리의 이론과 (혹은 아마도 우리의 무의식적 기대와) 관련하여 해석하지 않고 우리가 언제나 기술할 수 없다. 그러나 이것은, 칸트가 믿었던 바와 같이, 뉴튼의 이론과 같은 자연법칙이 선험적으로 타당하여 반증될 수 없다고 의미하지 않는다 ㅡ 반증을 위하여 우리가 도움을 청해야 할 터인 바로 저 경험적 사실에, 우리가 그 법칙을 부과하는 것이 참일지라도. 반대로, 우리의 지성이 적어도 잠정적으로 대안적 이론들을 형성할 것이라고 우리가 아인슈타인으로부터 배웠다; 우리의 지성이 이 새로운 이론들 각각에 관하여 사실들을 대안적으로 재해석할 것이라고; 이 이론들의 경합에서 우리가 이 이론들의 깊이를 재고 우리의 시험을 포함하여 우리가 실행하는 비판 결과의 중요성을 재서 자유롭게 결정할 수 있다고; 그리고 오직 이런 방식으로만 우리가 진리에 더 근접하기를 희망할 수 있다고 우리가 아인슈타인으로부터 배웠다.
칸트의 인식론이, 그 인식론이 좁은 한계 안에서만 고도로 성공적이라는 바로 그 사실에 의하여 또한 반증된다고 내가 믿는다. 우리에게 정신적 도구가, 심리적이고 아마도 생리적 소화 체계가 제공된다고 칸트가 믿었는데 그 체계로 인하여 우리가 외부 세계로부터 우리의 감각에 도달하는 자극을 소화할 수 있으며, 그 자극을 소화하고 완전히 이해하여 흡수함으로써 우리가 그 체계의 구조적 특징을 그 자극에 부과한다고 칸트가 믿었다; 다시 말해서 세계에 관하여 선험적으로 타당한 진리를 낳는 것은, 우리의 정신을 자극에 각인하는 것이다. 이제 그런 유전적으로 선험적인 진리가 있다는 것은 부인될 수 없다. 그러나 그 진리는 기묘하게도 중요하지 않다. 이유인즉 우리가 물체의 세계를 물체와 관련하여 해석하도록 강요당하지 않기 때문이다; 반대로, 우리는 물체의 주관적 특징을 쉽게 인식하게 되어 물체의 현재 상태로서 물체를 다룬다. 이 칸트적 작동구조의 탁월한 사례는, 특정 규칙적이고 불가피한 시각적 망상에 의하여 제공된다. 또 다른 사례는 색깔의 순서에 의하여 제공된다; 다시 말해서 빨간색은 초록색보다 오렌지, 노랑, 자주 그리고 푸른색에 더 유사하다고 우리가 경험하는 사실에 의하여 제공된다; 노랑은 푸른색보다 초록색과 빨간색에 더 유사하다는 사실; 기타 등등.... 이것들은 선험적으로 진리이다: 우리가 정말로 색깔을 감지한다는 ㅡ 우리가 색맹이 아니라는 ㅡ 것은 경험적 사실일 것이다; 우리의 색깔 감지 작동구조가 빨강-파랑과 노랑-초록 요소보다 빨강-초록과 노랑-파랑 요소에 근거한다는 것도 역시 경험적 사실일 것이다 (이 문장에서 나는 감지에 대해서라기보다 파장[wave-lengths]에 대하여 색깔 명칭을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이 작동구조의 도움을 받아서 색깔들을 보자마자 그 색깔들은 유사성과 비-유사성의 이 관계에 의하여 필연적으로 그리고 내재적으로 정돈된다.
이 모든 것에 대한 설명은, 의심할 바 없이 우리에게 부여된 칸트식 심리-생리적 소화 작동구조(digestive mechanism)이다. 우리의 생리로 인하여 이 유사성들이 설명된다. 빨강-초록과 노랑-파랑 요소의 도움을 받아서 우리가 눈으로 본다; 그리고 그것 중 하나가 없다면 우리는 색맹이 ㅡ 빨강-초록이거나 노랑-파랑 색명 ㅡ 된다. 빨강은 생리학적으로 초록과 섞일 수 없고 또한 노랑은 파랑과 섞일 수 없다. 그리하여 그 색깔들은 반대 색깔이 된다. 다른 색깔들은 섞일 수 있고 한 가지 색깔은 색조에 의하여 또 다른 색깔로 변할 수 있는데 왜냐하면 두 가지 요소가 동시에 독립적으로 자극될 수 있기 때문이다.
칸트는 이것에 관하여 옳았다. 그러나 요점은 비교적 사소한 것으로 밝혀진다. 색깔들 사이의 선험적으로 타당한 이 관계에 의하여 오도되어 대응하는 법칙을 자연에, 색깔이 있는 사물의 세계에 아무도 부과하지 않는다. 물리적으로 고찰되면 빨간 사물에, 초록색 사물에 대해서보다 노랑이나 파란색 사물에 대해서 더 큰 친화력이 있다고도 우리가 또한 믿지 않는다; 우리는 여기에 발견될 자연법칙이 ㅡ 물론 우리 자신의 심리학과 생리학의 법칙을 제외하고 ㅡ 있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칸트에 따르면 우리 자신의 소화적인(digestive) 정신적 기구의 이 법칙들이, 우리가 감지하는 사물에 대한 ‘객관적’ 법칙이 되기 마련이라는 의미에서, 우리에 의하여 세계에 부과된다.
시각적 착각은 동일한 범주에 속한다. 그래서 실재적 사물들에 대한 우리의 소신이 유사하게 생리적으로 설립된 것이라고 아마도 추측될 터이다. 그러나 이 경우에 생리적 작동구조와 그 구조로부터 발생하는 소신은 (두 가지 모두가 긴 진화와 적응의 결과라고 우리가 추측할 것이다) 비판을 견디고 다른 이론들과의 경합에서 승리하는 듯이 보인다. 그리고 그 작동구조와 그 소신으로 인하여 영화에서와 같이 ㅡ 특히 만화에서 ㅡ 우리가 정말로 오도될 때, 그것들에 의하여 어른들이 영향을 받아 우리가 앞에 사물의 세계를 두고 있다고 진지하게 주장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우리는 (칸트와 흄이 또한 생각했던 바와 같이) 우리의 심리학이나 생리학과 관련하여 우리의 ‘인간 본성’이나 우리의 정신적 소화 장치의 희생물이 아니다. 우리는 영원히 우리 정신의 포로가 아니다. 우리 자신을 비판하는 것을 우리가 배울 수 있어서 우리 자신을 초월할 수 있다. 우리는 정말로 우리의 한계를 지닌다; 그러나 칸트가 생각했던 것보다 우리는 더 자유롭다.
유사한 고찰이, 우리 사회적 무리의 가치판단과 소신 그리고 독단을 수용하는 경향과 같은 인간 굴레의 다른 형태에 적용된다. 강력하고 또한 생리학적 토대가 이 경향에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 경향으로부터 탈피할 수 있다. 탈피하기 위하여 우리에게 아마도 문화충돌이나 생각 전환의 자극이 처음에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나중에 우리는 탐구적이고 비판적이며 합리적 토론의 습관을 발전시킬 것이다. 합리적 토론과 비판적 사고는, 세상을 해석하는 더 원시적인 이론체계와 같지 않다; 그것들은 우리가 지향하여 묶인 테두리가 아니다. 반대로, 그것들은 감옥을 부수고 탈출하는 ㅡ 우리 자신을 해방하는 ㅡ 수단이다.
인간의 근본적 소신은 인간이 초월할 수 없고 복종하기 마련인 비합리적으로 습득된 습관일 따름이라고 흄이 가르쳤다. 칸트는, 자신이 말한 ‘코페르니쿠스적 혁명’이 이 비관적 관념에 낙관론적 방향 전환을 부여했을지라도, 어떤 의미에서 이 비관론적 관념을 수용했다. 객관적 경험 세상이 우리의 경험하는 지성에 (심지어 감지의 수준에서 자체의 역할을 실행하는) 의하여 형성된 세상이기 때문에 이 세상에 관한 우리의 소신이 객관적으로 참이고 합리적일 수 있다고 칸트가 가르쳤다: 비록 그 소신이 혹시 습관으로서 기술될지라도, 우리의 이성이 바로 우리의 감각이나 우리의 연상만큼 그 소신의 형성에서 역할을 실행했기 때문에 그 소신은 습관만이 아니었다. 이 사유의 노선이 추가로 발전하면 지식 성장의 본질이 근본적으로 우리의 소신을 비판적으로 수정하는 것이라는 사실이 틀림없이 주목된다; 흄과 칸트가 상상했던 정도까지 우리의 근본적 소신에 우리가 구속되지 않는다고 규명하는 사실이 틀림없이 주목된다. 그 사실에 의하여 또한 흄과 칸트 두 사람 모두가 부분적으로 옳았다고 규명된다. 흄은 우리 소신의 타당성에 대하여 회의적이어서 옳았다: 이것은, 우리의 소신 중 몇 가지를 우리가 초월했다는 사실에 (그 사실은 우리가 다른 소신들을 초월할 것이라는 가능성을 암시한다) 의하여 밝혀진다. 그러나 비록 칸트가 위대한 비판자이었을지라도, 정확히 비판을 통하여 우리의 소신을 초월하는 우리 능력의 중요성을 간과한 데서 그가 틀렸다. 그리고 칸트는 흄에 반대하여 추론이 우리의 소신을 ㅡ 심지어 우리의 습관적 소신을 ㅡ 형성하는 데 관여한다고 지적하는 데서 옳았다. 게다가 그는 우리의 지식 성장의 중요성을 지적하는 데서 옳았고 지식 성장에 틀림없이 선행하는 이론적 구조가 필요하다고 가르치는 데서 옳았다. 그러나 그는 이 구조가 또한 도저히 초월될 수 없어서 선험적으로 타당하다고 믿은 데서 틀렸다. 우리의 이야기를 계속하기 위하여 헤겔이 그 구조도 성장에 종속되어 초월될 수 있다고 지적한 데서 (우리가 그의 모호한 가르침을 그렇게 해석한다면) 옳았다고 우리가 아마도 말할 것이다. 그러나 진리가 어떤 구조와 본질적으로 상대적이라고 제안하는 데서 그리고 우리의 관념이나 소신을 바꾸도록 강제하는 것이 우리의 능동적 비판, 우리의 모순 발견, 반증 발견이 아니라 이 관념들이 스스로 초월하여 이 관념들이 우리에, 우리의 합리적 비판에 의존하기보다 우리가 진화하는 관념들에 의존한다고 제안하는 데서 (다시 우리가 그의 가르침을 그렇게 해석한다면) 그가 틀렸다. 이것으로 인하여 우리의 비판은 역사적으로 계승되는 구조에 의존하여 다시 상대주의를 ㅡ 역사관련 상대주의 ㅡ 낳는다.
이 인간 굴레의 철학은 칸트 이후의 지식론에 기묘한 매혹을 발휘했다. (그 철학은 합리주의와 진보주의의 쇠퇴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흄을 수정하기 위하여 칸트가 실행했을 모든 노력이, 소신에 대한 우리의 습관이 ㅡ 우리의 가치판단, 우리의 태도, 우리의 독단, 그리하여 우리의 경험 세계 ㅡ 우리의 역사적 기간이나 우리의 사회적 무리에 의존한다는 교설에 (헤겔, 마르크스) 의하여 해체되었다. 현대 사회과학의 손에서 매우 유행하게 된 이 교설은, 물론 우리가 그 교설에 특별히 깊은 인식론적 중요성을 귀속시키지 않는다면 참이다. 우리의 양육과 우리의 소신 및 우리의 지식과 우리의 기대에 우리가 의존한다는 것은 참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것들에 완전히 의존하지 않는다는 것은 또한 참이다. 의심할 바 없이 우리는 이 굴레로부터 우리 자신을 서서히 그리고 부분적으로만 해방할 수 있다. 그러나 이 해방의 과정에, 지식의 성장에 자연적 한계가 없다. 우리의 지적 족쇄를 깨고 우리가 탈출할 수 있다는 것을 물론 부인할 수 있다: 우리가 2천 년 전 사람들보다 우리의 편견 구조에 덜 묶여있다고 우리가 믿는다면 우리가 스스로 기만한다고 ㅡ 그 구조, 유행은 변했지만 우리에게 미치는 그 힘은 변하지 않았다고 ㅡ 주장할 수 있다. 그 문제에 대하여 유행하는 이 견해가 논박될 수 없을지라도 그 견해는 거짓일 따름이다. 문예부흥 이래 비판적 태도가 매우 두드러지게 증가했다.
인간 굴레에 대한 이 철학의 특별한 형태가, 언어적 상대주의로 벤저민 리 워프(Benjamin Lee Worf)에 의하여 매우 강력하게 제시되었다. 우리의 현재 문맥에서 우리가 이 이념적 족쇄로부터 비판에 의하여 부수고 나올 수 없을 정도까지 인간 언어들이 자체의 구조에, 소신과 이론 그리고 기대를 포함할 것이라는 견해로서 그 형태가 언명될 것인데 왜냐하면 비판이 항상 언어를 이용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 언명에서 복수인 ‘언어들’의 사용은 이 굴레들을 부수고 나오는 방법을 가리킬 것이다: 그 굴레들은 우리가 혹시 생각할 것과 같이 그렇게 강력하지는 않은데 이유인즉 인간이 또 다른 언어로 (문화충돌) 한 가지 언어나 소신 체계를 비판함으로써 서로를 해방할 수 있기 때문이다.
ㅡ 칼 포퍼, ‘실재론과 과학의 목적’. 2000년, 149-157쪽 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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