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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구주의 비판

이윤진이카루스 2026. 3. 14. 0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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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구주의 비판

 

12. 도구주의에 대한 비판. 도구주의와 귀납의 문제.

내가 생각하기에 비록 버클리에게 형세를 역전시키는 데 그리고 도구주의에 대한 그의 증거를 그의 의미론에 대한 반증으로 변형시키는 데 내가 성공했을지라도 나는 도구주의의 교설과 같은 것을 지금까지 반증하지 않았다; 이유인즉 버클리의 해석과 다른 해석들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뉴튼이나 아인슈타인 혹은 슈뢰딩거의 과학이론과 같은 과학이론이, 미래 사건을 (특히 측정) 예언하여 연역하기 위한 도구로서 그리고 다른 실용적 적용을 위한 도구로서 그리고 도구만으로서 해석되어야 하는 교설을 내가 도구주의에 의하여 의미한다; 그리고 더욱 특히 과학적 이론이 세계의 구조에 대한 진짜 추측으로서, 혹은 우리 세계의 특정 면모를 기술하는 진짜 시도로서 해석되어서는 안 된다는 교설을 내가 도구주의에 의하여 의미한다. 도구주의적 교설은 과학적 이론이 많거나 적게 유용하여 많거나 적게 효율적일 수 있다고 시사한다; 그러나 도구주의적 교설은, 과학적 이론이 기술적(記述的) 서술처럼 참이거나 거짓일 수 있다는 것을 부인한다.

도구주의와 관련된 전체 쟁점은 다만(nothing but)’이라는 단어 주위에서 핵심을 이룬다. 이유인즉 과학적 이론이 세계에 관한 진짜 추측이라고 믿는 사람은, 과학적 이론이 예언의 연역을 위한 도구 그리고 다른 응용을 위한 도구로서 또한 간주될 것이라는 데 이의를 제기하지 않을 터이기 때문이다.

나는 과학적 발견의 논리에서 이 명칭에서는 아닐지라도 특정 형태의 도구주의를 이미 토론했다. 그 도구주의는 슐릭(Schlick)에 의하여 토론되고 슐릭에 의하여 비트겐슈타인에게 귀속된 견해이다. (과학적 발견의 논리, 4, 주석4 7, 그리고 원문 참조.) 이 형태의 도구주의는, 과학적 이론이 무의미하다는 버클리의 교설과 일치하는 한, 버클리의 도구주의와 비슷하다. (슐릭에 의하면 과학적 이론은 검증될 수없으므로 무의미하다. 도구주의와 다소 연관된 교설은, 과학적 이론에서 경험에 의하여 시험될 추측이라기보다 유용한 규약(規約: conventions)을 보는 푸앵카레[Poincaré]와 뒤엠[Duhem]의 규약주의[規約主義: conventionalism]이다. 내가 과학적 발견의 논리에서 이 교설을 또한 어느 정도 상세하게 비판했기 때문에 나는 그 교설을 현재 장()에서 고찰하자고 제안하지 않는다. 그러나 나의 현재 토론은, 몇 가지를 변경하여, 그 교설에 적용될 터이다.)

나는 도구주의에 대한 비판을 다른 곳에서 간략하게 개괄했다. 그러나 그 주제가 현재 문맥에서 중요하기 때문에 나는 이제 이 비판을 다소 더 완전하게 전개할 예정이다.

비판에 대한 나의 관념은 이렇다. 응용과학과 기술(技術: technology)에서 계산규칙(computation rules)(내가 그것을 지칭하자고 제안하는 바와 같이) 많이 이용된다. 그런 계산규칙의 사례는 항해에서 사용되는 규칙과 도표이거나 사진술에서 노출 횟수를 계산하는 데 (노출계[exposure meter]가 없는 사람들에게) 이용되는 규칙과 도표이다. 이 계산규칙은 정말로 다만(nothing but) 도구이다; 다시 말해서 이 계산규칙은 세계에 대한 정보성 기술(記述: descriptions)이라기보다 유용한 도구로서 의도되고 구매되어서 판매된다.

이제 도구주의가 참이라면 모든 과학적 이론이 다만 계산규칙이다. 결과적으로 뉴튼의 역학과 같은 소위 순수과학과, 우리가 응용과학 및 공학 도처에서 조우하는 저 기술적(技術的) 계산규칙 사이에 근본적 차이점이 있을 수 없을 터이다.

그러나 이것은 그렇지 않다: 이론과 단지 기술적(技術的: technological) 계산규칙 사이에 큰 차이점이 있다. 도구주의가 이 계산규칙을 완벽하게 기술할 수 있는 반면, 도구주의는 이 차이점을 전혀 설명할 수 없다. 이론가가 자기 접근방법의 고유한 특징을 밝히기 위하여 아마도 언급할 것을, 도구주의적 언어로 번역하라고 도구주의자에게 허용할 터인 번역규칙과 같은 것을 확립함으로써 나의 논증이 혹시 반박될 터이다. 그러나 도구주의에 대한 그런 방어는 성공하지 못할 터이다. 이유인즉 이 방법으로 인하여 도구주의적 논지의 내용이 비어서 현재 그 논지에 있는 흥밋거리가 없어질 터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실제로 태도의 차이가 있다; 예를 들어 도구주의자는 궁극적인 실용적 목적에 대한 자기 범위가 상당히 확정적으로 제한된다고 정말로 상정한다. 도구주의자는, 모든 것이 어느 날 자기 논지로부터 내용을 비우지 않고 아마도 어떤 목적에 부합할 것이라는 견해를 그다지 잘 수용할 수 없다. 다른 한편 이론가는, 이론의 미래 유용성에 대한 고찰과 매우 독립적으로, 이론이 본질적으로 흥미롭다고 발견할 것이다.

나는 여기서 이론가의 접근방법과 도구주의자의 접근방법 사이의, 그리고 이론과 계산규칙 사이의 차이점을 조명할 열 가지 요점을 언급하겠다.

(1) 이론의 논리적 구조는, 계산규칙의 논리적 구조와 다르다. 두 가지 이상의 이론체계 사이의 논리적 관계는, 두 가지 이상의 계산규칙 체계 사이의 논리적 관계와 다르다. 그리고 한편 이론과 다른 한편 계산규칙 사이의 관계는 대칭적이 아니다.

이 요점을 완벽하게 토론하지 않으면, 이론은 언제 어디서나 성립한다고 추측적으로 주장되는 연역적 체계라고 언급될 것이다. 계산규칙은 도표형식으로 제시되어 제한된 실용적 목표를 염두에 두고 작성된다. 그리하여 느린 선박에 유용할 항해 규칙은 빠른 항공기에 쓸모가 없을 것이다. 계산규칙은, (예를 들어 항해에 관한) 어떤 이론도 계산규칙에 근거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이론에 (예를 들어 뉴튼의 이론) 근거할 것이다.

그러나 이 논증은 아직 결정적이 아니다: 이론 자체는 미화(美化)된 계산규칙과 같은 것이라고 ㅡ 더 특별한 계산규칙을 작성하는 데 사용될 초-규칙(-規則: super-rules) ㅡ 아마도 여전히 언급될 것이다.

(2) 계산규칙은 자체의 유용성 때문에만 선택된다. 이론은 거짓으로 밝혀질지도 모르지만, 계산을 목적으로 여전히 유용할 것이다. 예를 들어 뉴튼의 이론이나, 뉴튼의 이론을 맥스웰(Maxwell)(헤르츠[Hertz]) 무선파 이론과 연접한 것이 오류로 판정되었다고 우리가 상정할 것이다. 그러나 항해에서 사용되는 계산규칙이 (항해 레이더를 포함하여) 두 가지 이론 모두에 지속적으로 근거해서는 안 되는 근거가 전혀 없다.

(3) 이론들을 시험하면서 우리는 그 이론들을 오류로 판정하려고 시도해야 한다. 도구를 시험하면서 우리는 도구의 적용 가능성 한계를 알기만 하면 된다. 우리가 이론을 오류로 판정하면 우리는 항상 나은 이론을 찾는다. 그러나 도구는 자체의 적용 가능성에 한계가 있다는 이유로 배척되지 않는다: 우리는 그런 한계의 발견을 기대한다. 항공기의 기체(機體)시험되어 파괴로 이어진다면 우리가 그 기체를 파괴하는 데 성공했다는 이유로 나중에 우리가 그 기체를 배척하지 않는다; 우리는 기체의 적용 가능성 한계가 또 다른 기체의 적용 가능성 한계보다 좁다는 이유로 그 기체를 배척하겠지만 단지 그 기체에 그런 한계가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우리가 이 이유만으로 보편적 이론을 배척할 것인 반면) 그 기체를 배척하지 않는다.

(4) 이론의 적용은 시험으로서 간주될 것이고 기대되는 결과를 산출하지 못하면 그 이론의 배척으로 이어질 것이다. 이것은, 대부분, 계산규칙과 다른 도구의 경우에 그렇지 않다: 여하한 결함으로 인하여 (가령 항공기 운항에서 전통적 운항 규칙의 결함) 그 규칙이 특정 분야에서 적용될 수 있을 터라는 우리의 이론적 추측을 우리가 배척할 것이지만 그 규칙은 다른 분야에서 지속적으로 이용될 것이다. (외바퀴 손수레는 트랙터와 나란히 계속 존재할 것이다.)

(5) 한편 점점 더 일반적인 이론을 향한 확고한 경향이 있고 다른 한편 점점 더 전문화된 도구를 (컴퓨터를 포함하여) 향한 확고한 경향이 있다. 두 번째 경향은 도구주의와 관련하여 설명될 수 있다: 실용적 관점에서 당장 해야 할 특수한 목적을 위하여 매우 편리한 도구를 우리가 원한다. 그리하여 이론가의 관심과 목표는 컴퓨터 기술자의 관심과 목표와 다를 것으로 보인다.

(6) 한 가지 흥미로운 경우는, 예견될 수 있는 실용적 적용에 관한 한, 당장 구분이 불가능한 두 가지 이론을 우리 앞에서 우리가 지니는 경우일 터이다. 이유인즉 도구와 계산규칙이 주어진 적용 분야를 위해 고안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도구주의자는, ‘적용의 편의와 같은 다른 것들이 동등하기에 두 가지 이론이 저 분야 안에서 동일한 결과를 초래한다면, 두 가지 이론이 동등하게 유용하다고 말하기 마련이다. 이론가는 다르게 생각한다: 두 가지 이론이 논리적으로 다르면, 이론가는 두 가지 이론이 다른 결과를 낳는 적용 분야를 발견하려고 시도할 것이다 ㅡ 아무도 이전에 그 분야에 관심을 두지 않았을지라도. 이론가는, 그 경우 두 가지 이론 중 한 가지 이론을 오류로 판정하는 결정적 실험을 얻을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할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새로운 경험 분야들이 ㅡ 아무도 이전에 생각하지 않았던 분야들 ㅡ 이론에 의하여 개척될 것이다. 이론의 이 탐구적 (그리고 지적[知的]) 기능은, 이론이 탐구 도구라고 (탐구자의 선박이나 현미경처럼) 말함에 의하여 설명되어 치워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렇다면 우리는 탐구될 실재가 있다고 우리가 틀림없이 인정해야 한다: 그래서 그렇다면 그 실재는 참이나 거짓으로 기술될 수 있다 ㅡ 이것이 정확히 버클리적 도구주의자가 부인하고 싶어 하는 것이다. (도구주의가 또한 형이상학적 실재론, 그리고 심지어 유물론과도 결합될 것이 분명하므로 나는 버클리적 도구주의라고 말한다. 예를 들어 이론이 실재를 기술한다는 것을 우리가 아마도 부인할 터이지만, 우리의 이론에 의하여 우리가 결코 기술하지 못할지라도 우리의 이론을 포함하는 우리의 도구에 의하여 더 많거나 더 적게 성공적으로 작동될 본질적 물체들이 ㅡ 심지어 본질적인 물질적 물체들 ㅡ 있다고 우리가 아마도 주장할 터이다.)

(7) 이것으로 인하여, 그 차이점이 겉으로 보기에, 도구주의자들에 의하여 인정될 수 없는 두 가지 유형의 예언을 (혹은 예언이라는 용어의 두 가지 의미) 중요하게 구분하는 데 내가 다다른다. 한 가지 유형은, 가령, 다음 일식이나 월식에 대한 예언이다 ㅡ 일식이나 월식의 시간, 가시권, 기타 등등, 혹은 멘델의 육종 실험에서 다양한 색깔의 콩 숫자에 대한 예언: 일반적으로 말해서 알려진 종류의 사건에 대한 예언. 다른 한 가지 유형은, 새로운 이론이 짜이기 전에 진지하게 고려된 적이 없는 종류의 사건에 대한 예언이다; 그 가능성을 우리가, 말하자면, 이론으로부터 배우는 사건. 이 두 번째 유형의 사례는 일식에 관한 아인슈타인의 예언이다; 혹은 질량의 에너지 변환에 관한 그의 예언이다. 이 종류의 예언은 흔히 예언자 스스로가 놀라는 새로운 이론으로부터 나타나는데 예언자의 유일한 의도는 당시 존재하던 이론의 난제 중 몇 가지를 제거하는 것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런 종류의 예언은 새롭고 의심되지 않은 사실의 세계를 ㅡ 혹은 아마도 우리의 예전 세계의 새로운 면모를 ㅡ 파헤친다; 그래서 고민 없이 이 상황을 도구주의적 참고 구조에 맞추는 것이 어려울 터이다.

(8) 결정적 질문은 물론 이론이, 자체의 도구적 능력을 뛰어넘어, 정보성 내용을 담고 있는지 또는 아닌지이다. 이전 요점에 비추어 이것은 부인될 수 없는데 이유인즉 이론으로부터 알려지지 않은 종류의 사건들에 관하여 중요한 것을 우리가 배울 수 있다면, 이론은 틀림없이 이 사건들을 우리에게 기술할 수가 있기 (정말로 이론이 그렇게 하는 바와 같이) 때문이다. 그러나 더 직접적인 논증들이 있다. 코페르니쿠스의 이론이 우리 태양계의 (근사치) 구조를 기술한다는 것을 오늘날 누가 부인할 터인가? 그러나 코페르니쿠스의 생각을 편집한 사람인 코페르니쿠스의 체계에 대하여 도구주의적 해석을 제안했던 오지안더(Osiander)의 제안에 근거하여, 이것이 벨라르미노 추기경(Cardinal Bellarmino)에 의하여, 프란시스 베이컨에 의하여 그리고 버클리 주교에 의하여 부인되었다. 이 사람들이 부인한 것은, 정확하게 코페르니쿠스의 체계에 기술적(記述的)이거나 정보성 내용이 있다는 것이었다.

(9) 이론은, 계산규칙과 반대로 우리의 경험을 해석하는 데 우리를 돕는다. 한 가지 사례는 리제 마이트너(Lise Meitner)와 오토 프리슈(Otto Frisch)가 한(Hahn)의 관찰을 우라늄 핵분열의 관찰로서 해석한 것이다. 프리슈가, 매우 무거운 핵이 분열할 것이라고 예언한 핵의 액체 방울 이론(the drop theory of the nucleus)을 저술한 사람 중 한 명이었던 것은 물론 우연한 일이 아니다. (이 사실에 의하여 프리슈가 중성자 방출과 회수의 문제를 간과한 이유가 또한 설명될 것이다: 그 문제는 액체 방울 이론의 일부가 아니었다.) 그러나 여기 과학의 변경(邊境)에서 발생했던 것은 일상생활에서 지속적으로 발생한다. 이론의 도움을 받아서 우리의 경험을 우리가 부단히 해석한다. 나쁜 맛이나 냄새는 썩은 달걀 때문으로 해석된다; 그리고 차량의 미끄러짐(skid)으로 ㅡ 전적으로 이론적 용어 ㅡ 인하여 타이어와 도로 사이의 불충분한 마찰에서 기인하는 것으로서 특이하고 위험한 자동차의 움직임이 설명되거나 해석된다. (이것은, 일상언어와 이론적 언어 사이의 분할선이 ㅡ 만약 그런 것이 있다면 ㅡ 부단히 변하고 있는 방식에 대한 사례이다.)

(10) 예언은, 버클리 이래 줄곧 도구주의자에 의하여 과학의 주요 실용적 과제 중 한 가지 과제로서 간주되었다. 예언의 실용적 가치는 명백하여 도구주의가 그 가치를 정당화하라고 요구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론가는, 예언이 외부로부터 과학에 정해진 과제라고 전제하지 않고 과학에 관한 예언의 중요성을 자신의 용어로 설명할 수 있다. 이론가에게 예언은, 이론에 대한 예언의 관계 때문에 거의 배타적으로 중요하다; 이론가가 참인 이론을 찾는 데 흥미를 두고 있기 때문이고 예언이 시험으로서 역할을 수행하여 거짓 이론을 제거하는 기회를 제공할 것이기 때문이다.

위에 언급된 두 번째 종류의 예언으로 ㅡ 지금까지 의심되지 않은 사건에 대한 예언 ㅡ 인하여 이론에 대한 어느 정도의 참신성뿐 아니라 옛 이론에 대한 어느 정도 그 이론의 우월성과 그리하여 어느 정도 이룩된 진보를 우리가 얻는다. 새로운 이론이 어느 날 틀림없이 배척될지라도 그 이론으로 인하여 우리가 새로운 종류의 경험적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의심할 바 없이 열 가지 요점 모두가 확고한 도구주의자에 의하여 설명되어 치워질 수 있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위의 열 가지 요점에 의하여 도구주의가 충분히 정당하게 배척된다.

ㅡ 칼 포퍼, ‘실재론과 과학의 목적’, 2000, 111-7쪽 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