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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류판정과 검증은 어떻게 다른가

이윤진이카루스 2026. 4. 9. 0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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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류판정과 검증은 어떻게 다른가

 

22. 오류판정과 검증 사이의 불균형.

과학적 발견의 논리(L.Sc.D.)에서 지적된 바와 같이 경험적 오류판정과 검증 사이에 근본적인 논리적 불균형이 있다. 나를 비판하는 사람 중 몇몇 사람은 이 불균형의 존재를 부인했을지라도, 그들의 논증은 나의 저서 과학적 발견의 논리에서 예상되었고 완벽하게 답변되었다.

이 근본적 불균형은, 진지하게 부인될 수 없다고 내가 생각한다: 단칭 관찰명제의 (내가 지칭하는 바와 같이, ‘기초명제[basic statements]’) 집합이 간혹 보편법칙을 오류로 판정하거나 반증할 것이다; 그러나 그 집합은, 법칙을 확립한다는 의미에서 법칙을 도저히 검증할 수 없다. 정확하게 동일한 사실이, 그 집합은 (보편법칙을 오류로 판정하는 의미) 존재명제를 검증할 수 있지만 그 존재명제를 반증할 수 없다고 말함으로써, 표현될 것이다. 이것은 근본적으로 논리적 상황이다; 그리고 이것에 의하여 현저한 불균형이 밝혀진다.

이 불균형이 존재한다는 나의 주장에 반대하여 ㅡ 그리하여 내가 주장하는 구획설정의 기준에 반대하여 ㅡ 제기되었던 다양한 반론 가운데서 첫눈에 보기에 가장 현저하게 보이는 것은 다음 반론이다. 우리가 명제를 오류로 판정할 때마다 우리는 그리하여 자동적으로 그 명제의 부정(否定: negation)을 검증하는데 이유인즉 명제 α에 대한 오류판정이 그 명제의 부정인 비-α(non-α)의 검증으로서 항상 해석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가 원하면 항상 오류판정 대신 검증을 우리가 말할 수 있고 반대의 경우도 말할 수 있다: 사물을 표현하는 이 두 가지 방식 사이의 차이점은 단지 언어적이고 그리하여 그 두 가지 방식은, 논리적 이유로, 완전히 균형적이다.

예를 들어 경험적 시험, 오류판정 시도로서 혹은 부정적 사례의 (명제 α에 대한) 탐색으로서 우리가 기술할 수 있다면 또한 그 시험을 검증 시도로서 혹은 긍정적 사례의 (명제 비-α에 대한) 탐색으로서 우리가 기술할 수 있다. 유사하게, 명제 α의 검증에 대한 장애물도 논리적 이유로 인하여, 틀림없이 명제 비-α의 오류판정에 대한 장애물이고 반대의 경우도 성립한다. 그래서 영원한 운동 기계가 존재하다라는 것과 같은, 다시 말해서 자체의 환경으로부터 에너지를 언제나 흡수하지 않고 에너지를 계속 내뿜는 기계와 같은 존재명제를 검증하기가 어려운데 왜냐하면 우리가 그런 기계를 찾기 위하여 전 세계를 아마도 뒤져야 할 터이기 때문이라고 (그리고 부언하여 무한한 기간에 그런 기계 각각을 조사해야 할 터이기 때문이라고) 언급된다; 그러나 분명히, 이 존재명제의 부정을 ㅡ 다시 말해서 에너지를 계속 내뿜는 모든 기계는 틀림없이 유한한 시간 이후에 자체의 환경으로부터 에너지를 흡수한다라는 전칭명제 ㅡ 오류로 판정하기가 틀림없이 꼭 그만큼 어렵다. 이유인즉 한 명제에 대한 검증이 다른 한 명제에 대한 오류판정일 따름이기 때문이다.

이제 오류판정과 검증을 혹은 오류판정 가능성과 검증가능성을 구분하는 것이나, ‘오류로 판정될 수 있거나’ ‘시험될 수 있는명제들의 집합을 과학적으로서 구획 설정하여 오류로 판정될 수 없는 또 다른 (혹시 일방적으로 검증될 수 있을지라도) 형이상학적으로 지칭되는 ㅡ 명제들의 집합으로부터 그 명제들을 구분하면 순전히 논리적 이유로 쓸모가 없다는 것이 이 명백한 전제들로부터 귀결된다고 나를 비판하는 사람들이 결론을 내린다. 그리하여 모든 백조가 희다라는 명제가 오류로 판정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오류판정주의자는, 이 전칭명제에 대한 모든 오류판정이나 반증이 희지 않은 백조가 존재한다라는 존재명제에 대한 검증 및 수용과 대등할 것이라고 인정해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보편명제를 과학적으로, 그리고 존재명제를 형이상학적으로 지칭하면 틀림없이 틀렸다. (이것으로부터 통상적으로 도출되는 교훈은, 과학적 명제와 형이상학적 명제 사이의 구분이 시험가능성과 같은 것들에 ㅡ 다시 말해서 명제들 사이의 관계에 ㅡ 의존한다는 것이 아니라 명제들 안에서 발생하는 개념들에 ㅡ 관찰될 수 있거나 또는 다른 방식으로 ㅡ 의존한다는 것이다.)

이 비판에 대한 답변으로 나를 비판하는 사람들의 전제 모두를 내가 참으로서 ㅡ 정말로 하찮게 참으로서 ㅡ 수용한다고 내가 말하고 싶다; 그러나 그들의 결론 모두를 (마지막 문단에 서술된) 내가 거부하는데, 그 결론 중 어떤 결론도 부수적으로 나를 비판하는 사람들의 전제로부터 귀결되지 않는다.

먼저 나는 한 가지 요점을 ㅡ 나를 비판하는 사람들의 전제에 속하기 때문에 내가 동의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해를 드러내는 한 가지 요점 ㅡ 제거하고 싶다. 나를 비판하는 사람들의 결론 부분에 있는, ‘영원한 운동 기계가 존재한다와 같은 순수 존재명제를 검증하는 데 간혹 방해되는 걸림돌이나 난제에 대한 언급을 내가 의미한다. 물론 나를 비판하는 사람들이 말하는 것은 참이다 ㅡ 이 명제에 대한 경험적 검증이 분명한 이유로 (그 명제의 부정인 보편법칙에 대한 경험적 오류판정만큼) 정확하게 어렵거나 정확하게 쉽다. 그러나 이 난제에 대하여 내가 결코 걱정하지 않아서 그 난제를 언급한 적이 없고 그 난제로부터 결론을 도출한 적도 없다. 그 명제가 검증하기 어렵기때문에 고립된 순수 존재명제를 형이상학적으로 내가 지칭하지 않고 경험적으로 그 명제를 오류로 판정하거나 시험하기가 논리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에 형이상학적으로 지칭한다. 그래서 이런 종류의 존재명제를 오류로 판정하는 논리적 가능성이 그 명제에 대한 보편적 부정을 검증하는 논리적 불가능성과 정확하게 동일하다고 내가 물론 항상 강조했다. 그러므로 나를 비판하는 사람들이 장애물이나 난제에 대하여 언급하는 것은 무관하다. 게다가 그들의 언급은 검증주의적 태도를 드러내는 듯하다: 검증주의자들은 순수 존재명제를 검증하는 난제와 별도로, 그 명제에 대하여 여하한 난제도 상상할 수 없는 듯하다.

장애물이나 난제에 대한 그 요점은 그리하여 무관한 것으로서 배척될 것이다; 그래서 다르고 아마도 더 유관한 요점들로 내가 나아갈 수 있다.

의심할 바 없이 오류판정과 검증의 문제들이 특정 국면에서 균형적이라고 우리가 말할 수 있다. 특정 균형들이 있다는 사실로 인하여 여기서 ㅡ 양수(positive number)와 음수(negative number) 사이에서 영향력이 큰 균형의 존재로 인하여 정수(整數: integer) 체계의 근본적 불균형이 막히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ㅡ 근본적 불균형의 존재가 막히지 않는다: 예를 들어 음수에 실제곱근(real square root)이 없는 반면 양수에 실제곱근(real square root)이 있다는 사실로 인하여.

그리하여 오류로 판정될 수 있는 명제의 부정이 틀림없이 검증될 수 있고 반대 경우도 성립한다는 의미에서, 오류판정 가능성과 검증가능성이 균형적이라고 우리가 확실히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사실은, 나의 저서 과학적 발견의 논리에서 (그곳에서 나는 심지어 전칭명제를 부정적 존재명제로서 기술했다) 내가 반복해서 강조했고 나를 비판하는 사람들이 그들의 전제에서 내세우는 유일한 사실인데, 내가 지적한 근본적 불균형의 존재이지만 그 불균형에 반대하는 논증이 아니다.

순전히 논리적이고 또한 방법론적이거나 발견 학습적 면이 이 불균형에 있다.

(일방적으로 오류로 판정될 수 있는) 보편명제의 논리적 면에 관해서 보편명제가 대응하는 (일방적으로 검증될 수 있는) 존재명제보다 논리적으로 훨씬 더 강력하다는 데 의심의 여지가 있을 리 없다. 이유인즉 다음과 같은 것이 잘 알려진 논리적 규칙이기 때문이다.

(1) 모든 사물에 속성 P가 있다는 보편명제로부터, 특정 종류의 모든 사물과 관련하여 혹은 비어있지 않은(non-empty) 특정 담론 우주의 모든 요소와 관련하여, 이 종류나 우주에 속하는 개체 α에 대하여 우리가

(2) 사물 α에 속성 P가 있다를 도출할 수 있다;

그리고 (2)로부터 반대로, 우리는

(3) 속성 P가 있는 사물이 존재한다를 도출할 수 있다.

그리하여 (1)(2)(3)을 수반하고, (2)(3)을 수반한다. 그러나 (3)(1)이나 (2)를 수반하지 않으며, (2)(1)을 수반하지 않는다.

즉 단어로 표현하면, (1)은 논리적으로 (2)(3)보다 더 강력하고, (2)(3)보다 논리적으로 더 강력하다.

이것은, 일방적으로 오류로 판정될 수 있는 전칭명제와 일방적으로 검증될 수 있는 존재명제의 경우 중요한 불균형의 근원이다; 그리고 그 상황은 더 복잡한 명제에도 동일하다. (24절 참조.)

보편명제는 자체의 논리적 힘(power) 때문에 설명적 가설(explanatory hypotheses)로서 중요할 것이다; 보편명제는 (특히 단칭 초기조건[singular initial conditions]과 연접하여) 단칭 사건이나 명제를 설명할 것이다. 다른 한편 고립되거나 심지어 단칭명제와 연접된 순수 존재명제는 통상적으로 너무 허약해서 어떤 것도 설명할 수 없다.

이것이 과학자들이 (고립된) 존재가설보다 보편가설에 흥미를 두는 이유이다.

이것으로 인하여 우리가 그 불균형의 방법론적이거나 발견 학습적인 면에 ㅡ 비판적이거나 오류판정주의적 태도와 검증주의적 태도 사이의 차이점에 ㅡ 다다른다.

과학에 대한 검증주의자의 관점은 다소 이것과 같다: 이념적으로 과학은 모두 참인 명제로 구성된다. 우리가 이 명제 모두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과학은 틀림없이 적어도 우리가 검증한 (혹은 아마도 확인하거[confirmed]’개연적[probable]’으로 밝힌) 모든 명제로 구성된다. 그리하여 검증된 존재명제는, 이 이유로, 틀림없이 과학에 속한다.

오류판정주의자의 태도는 다르다. 오류판정주의자에게 과학은 대담한(daring) ㅡ 가설들이 그렇게 많이 주장해서 가설들이 쉽게 거짓으로 판명될 것이라는 의미에서 대담한(daring)’ ㅡ 설명적 가설들로 구성된다. 그래서 오류판정주의자는, 설명적 이론의 위상을 위하여 그릇된 가설을 발견하여 제거하려고 소망하고 그리하여 또한 다른 통찰을 얻으려고 소망하기 때문에, 가설들에 대하여 흠을 잡으려고 최선을 다한다. 순수 존재명제에 대하여 오류판정주의자는, 그 명제의 약점 때문에 그리고 그 명제가 이론체계의 필수적 부분을 형성하지 않으면 오류로 판정될 수 없기 때문에 그 명제에 흥미를 두지 않는다. 존재명제가 수용된 기초명제(basic statement)에 의하여 수반된다면 오류판정주의자는 존재명제를 과학 속으로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다; 그러나 심지어 그 경우에도 존재명제에 대한 흥미가, 존재명제의 수용이 그 명제에 대한 보편적 부정을 배척하는 것과 대등하다는 사실에만 놓인다.

 

불균형에 반대해서 흔히 제기되는 또 다른 반론은 이렇다: 우리가 수용하는 기초명제가 참이라고 우리가 결코 완벽하게 확신할 수 없다는 사실 때문에 어떤 오류판정도 절대적으로 확실할 리가 없다. 내가 이것을 나의 저서 과학적 발견의 논리경험적 근거(empirical basis)’라는 장에서 (V) 철저히 토론해서, 다른 인식론이 나의 인식론만큼 그것을 고찰했다고 내가 생각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귀납 이론가들은 이 문제를 결코 철저하게 토론하지 않는다 ㅡ 그들의 경험적 근거가 확고하지 못한 것으로 판명되면 그들의 이론들이 무너진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이 사실에 의하여 오류판정과 검증 사이의 불균형이 반증된다는 주장에 관하여, 상황은 실제로 매우 단순하다. 한 가지 기초명제나 기초명제들의 유한집합을 고찰하라. 그 명제들이 참인지 아닌지는 영원히 열린 문제로 남는다. 우리가 그 명제들을 참으로 수용하면 우리는 실수를 저질렀을 것이다. 그러나 그 명제들이 참이건 아니면 그 명제들이 거짓이건, 보편법칙이 그 명제들로부터 도출되지 않을 것이다. 그 명제들이 참이라고 우리가 확실하게 알고 있을지라도 보편법칙은 여전히 그 명제들로부터 도출될 수는 없을 터이다.

그러나 그 명제들이 참이라고 우리가 전제하면, 보편법칙은 그 명제들에 의하여 오류로 판정될 것이다.

그리하여 그 불균형은, 기초명제들의 유한집합이 참이라면 그 집합에 의하여 보편법칙이 오류로 판정될 것이라는 점이다; 반면 어떤 조건에서도 그 집합에 의하여 보편법칙이 검증될 수 없을 터이다: 기초명제들의 유한집합에 의하여 보편법칙이 오류로 판정될 수 있을 상황이 존재하지만, 그 집합에 의하여 보편법칙이 검증될 수 있을 상황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가 여기 이 백조는 검다라는 명제를 참으로 수용한다면, 우리가 모든 백조는 희다라는 보편적 이론을 반증했다고 우리가 논리에 의하여 인정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우리가 이 행성이 한 달 전보다 태양으로부터 지금 더 멀다라는 명제를 참으로 수용하면 모든 행성이 태양을 자체의 공통 중심으로 하여 원을 그리며 돈다라는 이론을 우리가 반증했다고 논리에 의하여 우리는 인정하기 마련이다. 이제 우리가 문제의 단칭명제를 수용했을 때 우리가 오류를 저질렀을 것은 ㅡ 특히 두 번째의 경우에 ㅡ 참이다; 그래서 그런 이유로 이론에 대한 오류판정은 절대적으로 확실하지않다. 그러나 우리가 수용한 이론을 부정하는 단칭명제를 (‘기초명제’) 수용하 우리가 틀림없이 어느 곳에서 오류를 ㅡ 교정되어야 하는 오류 ㅡ 저질렀다는 것은 절대적으로 확실하다. 그래서 우리가 시험하고 있는 이론을 부정하는 기초명제를 우리가 수용하면 이 이론을 오류로 판정된 것으로서 우리가 배척해야 한다는 것은 절대적으로 확실하다. 그리하여 우리가 여하한 기초명제를 수용할 때마다 몇몇 이론이 그리하여 오류로 판정된 것으로 함축적으로 선언되어 결과적으로 우리가 그 이론들을 논리적으로 배척해야 한다는 것은 또한 절대적으로 확실하다 (모든 기초명제가 몇몇 이론을 부정하기 때문에). 그러나 어떤 이론도 검증되지 않았다: 우리가 참으로 수용해야 하는 이론은 없다. 그리하여 불균형이 있다.

사실상 그 불균형은 지금까지 지적된 것보다 훨씬 더 강력하다. 내가 인정하는 경험주의의 전통적 원칙은, 이론이 관찰 증거에 비추어 판정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가 적어도 간혹 어떤 기초명제를 수용하기로 결심해야 한다는 것을 ㅡ 오직 잠정적으로만, 그리고 많은 시험과 숙고를 거친 후에 ㅡ 의미한다. 그리고 우리가 그 기초명제를 수용하자마자, 우리가 안 바와 같이 어떤 이론을 우리가 논리적으로 배척하기 마련이다. 이론의 수용에 관한 한, 혹은 이론의 검증에 관한 한 이것과 유사한 것은 없다.

그리하여 기초명제들과 이론들 사이의 논리적 관계와, 기초명제들의 불확실성이 서로 무효화한다기보다 강화한다: 두 가지 모두는 검증에 반대하여 작동한다; 그리고 두 가지 중 어느 하나도 오류판정에 반대하여 일방적으로 작동하지는 않는다.

경험적 토대의 불확실성 문제는, 기초명제들과 이론들 사이의 논리적 관계 문제와 전혀 다른 지평에 있다. 그 문제의 특징은, 우리가 항상 오류를 저지를 수 있다는 (심지어 수학적 증명에서도) 상투적인 말의 특징과 같다; 반면 이론에 대한 검증 불가능성의 특징은, 보편법칙의 진리를 확립하는 데 우리가 충분한 경험적 전제들을 결코 경험할 수 없다는 ㅡ 그 전제들이 참이라고 상정하기 때문에 ㅡ 더 흥미로운 말의 특징과 같다. 그래서 그 두 가지 문제는 분리해서 다루어져야 한다. 요컨대 심지어 오류판정도 결코 절대적이지 않고 절대적으로 확실하지 않다는 것은 참이다 ㅡ 나의 저서 과학적 발견의 논리에서 강조된 바와 같이; 그러나 이 불확실성에 관한 근거들은, 이론의 검증을 다소 의심스럽게 만들뿐 아니라 원칙적으로 불가능하게 만드는 근거들과 전혀 다르다. 경험주의의 원리 자체가 두 가지 모두를 암시한다: 이론들을 오류로 판정하는 불균형과 가능성.

이 모든 것은 매우 하찮아서, 오류판정과 검증 사이의 논리적 불균형의 존재가 나를 비판하는 실증주의자 대부분에 의하여 부단히 부인되지 않았다면 나는 그것을 다시 서술하지 않았을 터이다.

더 심한 것은 맥락의 문제(the problem of context), 내가 주장하는 구획설정의 기준이 맥락으로부터 나온 명제들에보다 이론들의 체계들에 적용된다는 사실과 밀접하게 관련된 반론이다. 이 반론은 다음과 같이 표현될 것이다. 단일가설이 오류로 판정될 수 없다고 언급될 것인데 왜냐하면 결론에 대한 모든 반증이, 반증된 결론을 도출하는 데 사용된 모든 전제의 집합의 단일전제와 부딪칠 것이기 때문이다. 이 전제들의 집합에 속하는 어떤 특정 가설에, 허위성을 귀속시키는 것은, 특히 모든 실험에 들어가는 커다란 숫자의 전제들을 우리가 고려하면, 그러므로 위험하다.

이 반론은, 개괄적일지라도 과학적 발견의 논리에서 (16, 마지막 문단, 특히 주석2에서; 그리고 18, 19, 20절 및 다른 곳에서) 토론된 반론들에 속한다. 그 답변은, 우리가 정말로 이론체계만을 오류로 판정할 수 있다는 것과 허위성을 그 체계 안의 특정 서술에 귀속시키면 항상 고도로 불확실하다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내가 지적한 근본적 불균형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그러나 복잡한 이론이나 이론들의 체계에 대한 오류판정의 책임을, 단일가설에 우리가 간혹 매우 성공적으로 귀속시킨다는 부인될 수 없는 사실을 설명하는 과제가 이것으로 인하여 나에게 남는다.

우리가 실행하는 실제적인 방법론적 절차들의 많은 면모가, 그런 귀속을 더 성공적으로 만드는 우리의 노력에서 기인하는 것으로서 이해될 수 있다. 먼저 우리 이론에 층들이 쌓인(layered) ㅡ 깊이와 보편성 및 정확의 층들(layers) ㅡ 구조가 있다. 이 구조로 인하여 우리 이론의 더 위험하거나 노출된 부분들과, 노출된 가설을 시험하면서 우리가 당연히 여길 ㅡ 상대적으로 말하면 ㅡ 다른 부분들을 우리가 구분할 수 있다. 그것으로 인하여, 시험에 포함된 나머지 이론들을 많거나 적게 문제가 없는 것으로서 ㅡ 일종의 배경지식(background knowledge)’으로서 ㅡ 취급하면서, 선택된 특정 가설을 보통 의식적으로 우리가 시험하는 사실이 설명된다. 이 배경지식은 보통 시험 동안 우리에 의하여 변하는, 이 사실은 아마도 배경지식에 포함된 오류를 없애는 경향을 띤다.

아마도 이 절차에서 가장 중요한 국면은, 검토 중인 새로운 가설과 ㅡ 우리가 시험하려고 시도 중인 가설 ㅡ 다른 몇 가지 가설들 사이에서 결정적 시험들을 우리가 준비할 방법을 발견하려고 우리가 항상 시도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의 시험들이 반증 시도라는 사실의 결과이다; 가능하면 우리가 시험하고 싶은 이론을 반증할 목적으로 그 시험들이 고안된다는 ㅡ 어떤 경합하는 가설에 비추어 고안된다는 ㅡ 사실의 결과이다. 그래서 결정적 시험에서 가설들 각각과 관련하여 배경지식이 정확하게 동일한 역할을 실행하도록 ㅡ 이것이 가능한 한 ㅡ 만들려고 우리가 항상 시도하고 그 가설들 각각 사이에서 결정적 시험에 의하여 결정을 우리가 강제하려고 시도한다. (뒤엠[Duhem]은 결정적 실험들이, 그 실험들이 수행하기로 예상되는 바와 같이, 경합하는 가설 중 한 가설을 확립할 수도 없고 증명할 수도 없다고 밝히면서 그 실험들을 비판했다; 그러나 그가 반증을 토론했을지라도 ㅡ 또 다른 가설보다 한 가지 가설에 반증이 귀속된다고 지적하면서 ㅡ 내가 결정적 시험의 기능이라고 믿는 기능을 ㅡ 경합하는 이론 중에서 한 이론을 반증하는 기능 ㅡ 그는 토론한 적이 없다.)

이 모든 것은 분명히 오심(誤審)을 절대적으로 예방할 수는 없다: 결점이 없는 가설을 우리가 비판하는 일이 발생할지도 모른다. 내가 밝힌 바와 같이 (과학적 발견의 논리, 특히 19 20절에서, 그리고 또한 29절에서) 자유로운 선택과 결정의 요소는, 반증을 수용하는 것이나 그 반증을 또 다른 가설보다 한 가설에 귀속시키는 것에 항상 포함된다.

우리의 과학적 절차는 전적으로 규칙에 근거하는 적이 없다; 추측과 예감이 항상 포함된다: 우리는 과학으로부터 추측과 위험의 요소를 제거할 수 없다.

우리가 이 위험을 어떻게 축소할 수 있을까? 유망하게 보이는 모든 결정의 ㅡ 다시 말해서 우리의 이론에 대한 모든 조정의 ㅡ 결과들을 가능한 한 철저히 고려하려고 시도함으로써 우리가 이 위험을 축소할 수 있다. (말하자면, 우리가 모든 유망한 조합들[combinations]을 철저히 고려해야 한다.) 이런 면에서 상황은, 우리가 새로운 이론을 철저히 고려해야 하는 다른 경우에서와 동일하다: 이론의 특정 부분에 이론에 대한 반증을 귀속시키는 결정은, 정말로 가설의 채택에 해당한다; 그리고 내포된 위험은 똑같다. 그것을 충족시키기 위하여 독창성과 대담성이 ㅡ 그리고 얼마간의 행운 ㅡ 우리에게 필요하다.

그리하여 오류판정을, 이론체계의 특정 부분에 귀속시키는 문제를 해결하는 데 일상적 절차, 자동적 작동구조가 ㅡ 새로운 이론을 고안하는 데 일상적 절차가 없는 것과 꼭 같이 ㅡ 없다. 그러나 우리가 진리를 끝없이 탐구하는 데서 모든 것이 논리적이 아니라는 것은 사실이지만, 우리의 논증이 붕괴하는 장소와 우리의 논증이 멀리 도달하는 정도 두 가지 모두를 지적함으로써 우리가 가능한 한 많이 이 탐구를 많이 설명하기 위하여 논리를 이용해서는 안 되는 이유는 없다.

ㅡ 칼 포퍼, ‘실재론과 과학의 목적(Realism and the Aim of Science)’, 2000, 181-9쪽 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