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포퍼 원전+번역문

과학은 확실하고 증명될 수 있는 지식이 아니다

이윤진이카루스 2026. 5. 22. 1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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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학은 확실하고 증명될 수 있는 지식이 아니다

 

이것으로 이 절에서 주요하고도 최종적 요점에 ㅡ 귀납적 확률에 대한 소신의 일반적인 철학적 배경 ㅡ 내가 도달한다.

이 소신이 출현하는 과학에 대한 견해는 근본적으로 대문자 ‘S’로 시작하는 과학에 대한 옛 견해이다. 그것은 scientia 혹은 epistēmē로서 ㅡ 확실하고, 증명될 수 있는 지식으로서 ㅡ 과학이라는 견해이다. 물론 이 견해는 지금 다소 수정되었다: 모든 사람이, ‘귀납적이라고 불리는 과학들에서 완벽한 확실성이 도달될 수 없다고 이제 깨닫는다. 그러나 귀납이 일종의 (약화된) 연역의 일반화라고 간주되기에 옛 이상(理想)이 겨우 약간 수정되었다.

이 옛 이상(理想), 그러나 완벽히 폐기되어야 한다. 우리가 순수 연역 체계를 고찰할지라도 그 이상(理想)은 폐기되어야 한다. 자체의 진리가 매우 확실한 (혹은 자명하거나, 의심의 여지가 없는) ‘공리들(公理: axioms)’로부터 정리(定理)들을 연역함으로써 연역 체계에 있는 정리(定理)들의 진리를 확립하는 체계로서 연역 체계를 우리가 더 이상 간주하지 않는다; 오히려 연역 체계의 다양한 전제가 낳는 결과들을 체계적으로 산출함으로써 그 체계의 다양한 전제를 합리적으로 그리고 비판적으로 우리가 논증할 수 있는 체계로서 연역 체계를 우리가 간주한다. 연역은 결론을 증명하는 목적들로만 사용되지 않는다; 오히려 연역은 합리적 비판의 도구로서 사용된다. 순수 수학적 이론 내부에서, 우리의 공리들(公理: axioms)에 있는 위력과 결실성을 조사하기 위하여 우리가 결론들을 연역한다. 그리고 물리 이론에 내부에서 우리는 도출된 결론들을 비판하여, 그리고 특히 그 결론들을 시험하여 우리의 가설들을 시험하기 위하여 결론들을 도출한다: 통상적으로 우리의 결론들을 확립하려는 의도가 우리에게 없다.

우리 지식에 대한 우리 소신이나 신뢰성에 대한 합리성의 척도로서 귀납적 확률을 간주함으로써, 개연적 귀납에 헌신하는 사람은 자신이 베이컨(Bacon)처럼 지식(epistēmē)에 대한 약화된 이상(理想)에 여전히 집착할 수 있다고 확신한다. 그는 자신의 증거성 서술 e, 우리의 정리들(定理: theorems)증명하기로 예상되는 자명한 공리들(公理: axioms)이 수행하는 역할과 유사한 역할을 수행하는 것으로서 상상한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가설 h, 그 정리들(定理: theorems)의 진리가 공리들(公理: axioms)부터 연역에 의하여 확실해지는 정리들(定理: theorems)의 역할과 유사한 역할을 수행한다고 상상한다; 귀납이 연역보다 약하기에 우리가 이제 단지 대용(Ersatz) 확실성을 얻는다는 것을 제외하고 그렇게 상상한다: 확률이 확실성에 대한 대체물이나 대용물로 ㅡ 바람직하지 않은 것이지만 적어도 부차적으로 최고의 것이고 아무튼 확실성에 근접하는 것 ㅡ 들어온다.

이 모든 것은 수용될 수 없다. 증거성 서술 e 자체가 전혀 확실하지 않다. (나는 항상 이 요점을 강조했다; 그러나 그 요점은, 오류판정과 검증 사이의 불균형이라는 나의 교설에 반대하는 논증으로서 귀납주의자들에 의하여 이용되었다; 22절과 비교하라. 그러나 e 자체가 불확실하여 혹시 오직 개연적일 때 p(h,e)’를 어떻게 해석할지를 설명한 귀납주의자는 없었다.) 또한 이 증거성 서술들은 우리에게 ㅡ 신()에 의하여 혹은 자연에 의하여 또는 우리의 감각에 의하여 ㅡ 주어지지도 않는다. 모든 관찰과, 훨씬 높은 정도까지 모든 관찰 서술 자체는 이미 우리의 이론에 비춘 해석이다. 그러나 이 사실이 매우 중요할지라도 내가 여기서 비판하고 싶은 것과 비교하면 사소한 쟁점을 제기한다: 내가 비판하고 싶은 일반적 태도; 내가 비판하고 싶은 일반적 과학철학; 어디에서 과학이 자체의 확실성, 자체의 합리적 신뢰성을, 자체의 유효성을 혹은 자체의 권위를 도출하는지를 설명하는 문제로 철학의 주요 문제를 만드는 철학. 이유인즉 과학에 확실성도, 합리적 신뢰성도, 유효성도, 권위도 없다고 내가 믿기 때문이다. 우리가 과학에 대하여 말할 수 있는 최고의 것은, 과학이 우리 자신의 추측들로, 우리 자신의 억측들로 구성될지라도 우리는 그 추측들이나 억측들을 시험하려고 최선을 다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 추측들이나 억측들을 비판하여 반증하려고 최선을 다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귀납적 철학은 과학에 권위를 귀속시킬 뿐 아니라, 또한 (아마도 전혀 의식하지 못하고) 우리의 실재적 절차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신중하면서도 정말로 소심한 접근방식을 귀속시킨다. 이 철학은, 과학 이론에 대하여 고도의 확률을 획득하는 것을 과학의 목표로 간주하면서, 다음과 같은 규칙에 따라서 과학이 진행한다고 암시한다: ‘당신이 얻은 증거 e를 초월하지 말라!’. 이유인즉 우리의 가설 h의 내용이, p(h,e)0에 매우 가까운 값으로 환원하지 않고 증거 e를 초월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e를 특정 종류의 사건에 대한 많은 기술(記述)의 연접으로 하라: 확률계산에 따라서 p(h,e)를 매우 작게 만들기 위하여, e에 포함되지 않는 많은 추가 사건을 h가 주장할 필요가 없다. 이것으로 인하여 높은 확률은, 거의 말하지 않거나 전혀 말하지 않는 것에 대한 의심스러운 보상이라고 밝혀진다. 다시 말해서 높은 확률을 획득하라!’라는 규칙은 임시방편적 가설에 보상한다.

이 모든 것에 의하여 과학에 대하여 매우 고무적이지 못한 그림이 ㅡ 게다가 원본을 조금도 닮지 않는 그림 ㅡ 제시된다. 정말로 원본을 그렇게 고무적으로 만드는 것은 원본의 대담함이다; 원본이 대담하게 상상한 가설들, 모든 종류의 비판에 ㅡ 우리 상상력의 도움을 받아서 우리가 고안할 가장 진지한 시험들을 포함하여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모든 반박에 ㅡ 대담하게 제출된 가설들이다. 처음에 좁은 우리 상상력의 한계 그리고 일상언어의 한계를 우리가 초월하는 데 도움을 주는 것은 이 대담함이다.

ㅡ 칼 포퍼, ‘실재론과 과학의 목적(Realism and the Aim of Science’, 2000, 222-3쪽 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