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과
이성(理性)은, 진리에 관한 보편적이고 비(非)개인적인
기준에 대한 적용이라는 의미에서, 최고의 중요성을
지닌다 .., 이성이 쉽게 우세한 시대에서 뿐만 아니라,
그들이 동의할 수 없는 곳에서 살인을 할 수 있는
남성다움이 결여된 사람들의 헛된 꿈으로서 경멸당하고
거부당하는 저 불행한 시대에서도 또한.
버트런드 러셀
23 장 : 지식사회학
헤겔과 마르크스의 역사주의적 철학이 그들 시대의 특징적인 산물이라는 것은 의심의 대상이 될 수 없다 - 사회적 변혁기. 헤라클리투스(Heraclitus)와 플라톤의 철학처럼, 그리고 꽁트(Comte)와 밀(Mill), 라마르크(Lamarck)와 다윈(Darwin)의 철학처럼, 헤겔과 마르크스의 철학은 변화의 철학이며, 그 철학은 변하는 사회적 환경에 의하여 이 환경 속에서 사는 사람들의 생각에 각인된 거대하고 의심할 바 없이 다소 무서운 인상을 증언한다. 플라톤은 모든 변화를 중단시키려고 노력함으로써 이 상황에 대처했다. 더 현대적인 사회철학자들은, 변화를 수용하고 심지어 환영하기 때문에, 매우 다르게 반응하는 듯 보인다 ; 그러나 이 변화에 대한 사랑은 다소 상반되는 감정을 지닌 듯 나에게 느껴진다. 그 까닭은 그들이 변화를 중단시키려는 어떤 희망을 포기했다 할지라도, 역사주의자로서 그들은 변화를 예언하려고 노력하여 그리하여 변화를 이성적으로 억제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 그래서 이것은 분명히 변화를 길들이려는 시도처럼 보인다. 그리하여 역사주의자에게는 변화 자체가 지닌 공포를 변화는 완전히 버리지는 않은 듯이 보인다.
훨씬 더 급격한 변화가 일어나는 우리 시대에서, 우리는 변화를 예언할 뿐만 아니라, 집중화된 대규모 기획에 의하여 변화를 억제하려는 욕망을 발견하기조차 한다. 이 전체론적인 관점은 (내가 역사주의의 빈곤[The Poverty of Historicism]에서 비판했다) 타협을, 말하자면, 플라톤과 마르크스 이론 사이의 타협을 대표한다. 변화를 중지시키고자 하는 플라톤의 의지는, 변화의 불가피성에 관한 마르크스의 교설과 결합되어, 일종의 헤겔식 ‘합(合)’으로서, 변화는 완전히 중단될 수는 없기 때문에 그 권력이 거대하게 확대될 수 있는 국가에 의하여 최소한도 ‘기획’되고 통제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낳는다.
이와 같은 견해는, 처음 보기에, 일종의 이성주의로 보일지도 모른다 ; 그 견해는 그 속에서 사람이 최초로 자신의 운명에 대한 지배자가 되는 ‘자유의 영역’에 대한 마르크스의 꿈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그러나 사실상, 그 견해는, 우리 시대의 비이성주의적이고 황당한 조류와 충분히 일치하는 교설인, 이성주의에 분명히 반대가 되는 교설과 긴밀하게 연합하여 탄생한다 (그리고 특히 인류의 이성적 통합이라는 원칙과 반대가 되는 : 24장을 보라). 우리가 지닌 도덕적이자 과학적인 의견을 포함하여 우리가 지닌 의견은 계급 이해에 의하여, 보다 일반적으로 우리 시대의 사회적이자 역사적인 상황에 의하여, 결정된다는 마르크스주의적 교설을 나는 염두에 두고 있다. ‘지식사회학’이나 ‘사회학주의’라는 이름으로, 이 교설은 최근에 (특히 M. 쉘러[Scheler]와 K. 만하임[Mannheim]에 의하여) 과학적 지식의 사회적 결정 이론으로서 개발되었다.
지식사회학은 과학적 사고(思考)란, 그리고 특히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문제에 관한 사고(思考)는, 진공상태 속에서 진행하지 않고 사회적으로 조건지어진 환경 속에서 진행한다고 주장한다. 과학적 사고, 그리고 특히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문제에 관한 사고(思考)는 주로 무의식적이거나 잠재의식적인 요소에 의하여 영향을 받는다. 이 요소들은 사색가의 관찰하는 눈으로부터 숨겨져 남아있는데 그 이유는, 말하자면, 사색가가 살고 있는 바로 그 장소가 그의 사회적 서식처이기 때문이다. 사색가의 사회적 서식처는, 예를 들어 ‘모든 탁자는 탁자다’라는 문장처럼 사색가에게 논리적으로 사실로 그리고 하찮게 사실로 보이는 의견과 이론의 전체 체계를 결정한다. 이것이 사색가가 심지어 조금이라도 가정을 했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는 이유이다. 그러나 사색가가 가정을 했다는 것은 우리가 그를 매우 다른 사회적 서식처에 사는 사색가와 비교하면 알려질 수 있다 ; 그 까닭은 매우 다른 사회적 서식처에 사는 사색가 또한 분명히 의문의 여지가 없는 가정의 체계로부터, 그러나 매우 다른 체계로부터 출발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체계는 매우 달라서 이 두 체계 사이에는 어떤 지적(知的) 교량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며 어떤 타협도 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이 사회적으로 결정된 다른 가정 체계는 지식사회학자들에 의하여 이데올로기 총체라고 불린다.
지식사회학은 칸트의 인식론에 대한 헤겔식 이론으로 간주될 수 있다. 그 까닭은 지식사회학이 우리가 지식의 ‘수동주의적’ 이론이라고 지칭할 것에 대한 칸트의 비판 방향에서 계속되기 때문이다. 이것으로써 나는 흄(Hume)까지를 포함하는 경험론자들의 이론을 의미한다. 그 이론은 개략적으로 지식이 우리의 감각을 통하여 우리 속으로 흘러들어 온다고 주장하는 것으로, 그리고 오류는 감각에 주어진 자료를 우리가 방해하기 때문이라고 혹은 감각에 주어진 자료 내부에 발달한 연상(聯想) 때문이라고 주장하는 것으로 묘사될 것이다 ; 오류를 피하는 최상의 방법은 완전히 수동적이고 수용적으로 남아있는 것이다. 지식에 대한 이 용기설(容器說 : receptacle theory of knowledge)에 반대하여 (나는 보통 그 이론을 ‘생각의 양동이 이론’이라고 부른다), 칸트는 지식은 박물관인양 우리의 감각이 받아들여 생각 속에 저장하는 선물의 수집물이 아니라, 지식은 주로 우리 자신의 사고활동(思考活動)의 결과라고 주장했다 ; 우리가 지식을 얻고자 원한다면 매우 능동적으로 탐구, 비교, 통합, 일반화에 몰두해야 한다고. 우리는 이 이론을 지식의 ‘능동주의적’ 이론이라고 부를 것이다. 그와 관련하여, 칸트는 어떤 종류의 선입견도 없는 과학이라는 옹호될 수 없는 이상(理想)을 포기했다. (이 이상이 심지어 자기모순적이라는 것은 다음 장에서 밝혀질 것이다.) 그는 우리는 무(無)로부터 시작할 수 없다는 것과, 과학의 경험적 방법으로써 시험하지 않고 보유하고 있는 선입견의 체계를 우리는 지니고 우리의 임무에 접근해야 함을 철저히 분명히 했다 ; 그런 체계는 ‘범주적 장치’라고 불릴 것이다. 칸트는 한 가지 진실하고 변하지 않는 범주적 장치를 발견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믿었는데, 그 범주적 장치는 말하자면 우리가 지닌 지적(知的) 장비에 관한 틀림없이 불변하는 틀, 다시 말해서 인간 ‘이성(理性)’을 대표한다. 칸트가 주장하는 이론의 이 부분을 헤겔은 포기했는데, 그는, 칸트와 반대로, 인류의 통합을 신뢰하지 않았다. 그는 인간의 지적(知的) 장비는 부단히 변하며, 그 장비는 인간의 사회적 유산의 일부라고 가르쳤다 ; 따라서 인간이성의 발전은 인간 사회의, 다시 말해서 인간이 속한 민족의 역사적 발전과 틀림없이 일치한다. 헤겔의 이 이론과, 특히 모든 지식과 모든 진리는 역사에 의하여 결정된다는 의미에서 ‘상대적’이라는 그의 교설은, 때때로 ‘전통적 역사주의(historism)’라고 불린다 (앞 장에서 언급된 바와 같이, ‘역사법칙적 역사주의[historicism]’와 대조적으로). 지식사회학 즉, ‘사회학주의’는 분명히 전통적 역사주의와 매우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거나 거의 동일한데 유일한 차이점이 마르크스의 영향을 받아서 전통적 역사주의는 역사적 발전이 헤겔이 주장했던 바와 같이 한 가지 획일적인 ‘민족정신’을 낳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이데올로기 총체를 보유한 사람들의 계급 혹은 사회적 계층 혹은 사회적 서식처에 따라서 몇 가지 그리고 때때로 대립하는 ‘이데올로기 총체’를 낳는다고 강조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헤겔과의 유사점은 더 깊다. 나는 위에서 지식사회학에 따르면, 다양한 이데올로기 총체 사이의 지적(知的) 교량이나 타협은 가능하지 않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 급진적 회의주의는 실제로 느낌처럼 그렇게 완전히 심각한 의미가 아니다. 그 회의주의로부터 탈출구가 있으며, 그 탈출구는 철학사에서 헤겔에 앞섰던 갈등을 대체하는 헤겔식 방법과 유사하다. 불화(不和)하는 철학들의 소용돌이 위에서 자유롭게 균형을 잡았던 정신인 헤겔은 그 갈등 모두를 종합의 최고 경지의, 자기 자신이 만든 체계의 부품으로만 환원시켰다. 유사하게, 사회적 전통 속에 오직 느슨하게 고정된 지식인의 ‘자유롭게 균형 잡힌 지성’은 이데올로기 총체의 함정을 피할 수 있을 것이라고 지식사회학자들은 주장한다 ; 그 지성은 심지어 다양한 이데올로기 총체와 숨겨진 동기를, 그리고 그 이데올로기 총체와 숨겨진 동기를 고취하는 다른 결정인자들을 통찰할 수 있고 밝힐 수 있을 것이라고. 그리하여 지식사회학은 객관성의 최고도는 무의식 속에 있는 다양한 숨겨진 이데올로기와 그 이데올로기의 정착수단을 분석하는 자유롭게 균형 잡힌 지성에 의하여 도달될 수 있다고 믿는다. 진짜 지식으로 가는 길은 무의식적 상정(想定)을 밝히는 것으로 말하자면 일종의 정신적 치료이거나, 혹은 내가 그렇게 이름 붙인다면 사회적 치료이다. 사회적으로 분석된 사람, 혹은 자신을 사회적으로 분석한 사람과 이 사회적 고정관념으로부터, 다시 말해서 자신의 사회적 이데올로기로부터 해방된 사람만이 객관적 지식의 최고 종합에 도달할 수 있다.
앞 장에서, ‘통속적 마르크스주의’를 다루면서 나는 한 무리의 현대 철학 안에서 관찰될 수 있는 경향을, 우리의 행동 뒤에 있는 숨겨진 동기를 폭로하는 경향을 언급했다. 지식사회학은, 정신분석 및 자신들의 적의 신조가 ‘무의미함’을 밝히는 특정 철학들과 함께, 이 무리에 속한다. 이 견해의 인기는, 내가 믿는 바, 그 견해들이 적용될 수 있는 용이함과, 그 견해들이 사물을 통찰하며 계몽되지 못한 사람들의 어리석음을 통찰하는 사람들에게 공여하는 만족에 놓여있다. 이 즐거움은, 이 모든 개념들이 내가 ‘강화된 독단주의’라고 불렀던 것을 설정함으로써 토론의 지적(知的) 토대를 파괴하지 않는다면, 해롭지 않을 것이다. (정말로, 이것은 ‘이데올로기 총체’와 유사한 것이다.) 헤겔주의는 모순의 수용성과 심지어 풍요로움을 선언함으로써 토론의 지적(知的) 토대를 파괴한다. 그러나 모순을 피할 필요가 없다면 비판과 토론이 불가능해지는데 그 이유는 비판이 항상 비판되는 이론의 내부이거나, 혹은 그 이론과 경험적인 몇 가지 사실 사이의 모순을 지적하는 데 달려있기 때문이다. 정신분석에 관한 상황도 유사하다 : 정신분석학자는 반론이 비판자들을 억압하는 데 기인한다는 것을 밝힘으로써 항상 반론을 해명해버릴 수 있다. 그리고 의미를 다루는 철학자들은 다시 자신들의 적이 주장하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지적할 필요만 있는데, ‘무의미함’은 그렇게 정의되어 무의미함에 대한 토론은 정의(定義)에 의하여 의미가 없기 때문에 그것은 항상 사실일 것이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유사한 방식으로, 적(敵)의 계급편견으로 적의 불만을 설명하는 데 익숙해져 있고, 지식사회학자들은 적의 이데올로기 총체로 적의 불만을 설명하는 데 익숙해져 있다. 그런 방법들을 다루는 사람들에게 그런 방법 양쪽 모두는 다루기 쉽고 재미있다. 그러나 그런 방법들은 이성적 토론의 토대를 분명히 파괴하며, 궁극적으로 틀림없이 반(反)이성주의와 신비주의를 초래한다.
이러한 위험에도 불구하고, 나는 왜 내가 이 방식들을 다루는 즐거움을 완전히 삼가야 하는지 알지 못한다. 그 까닭은 정신분석이 가장 잘 적용되는 사람들인 정신분석자들과 꼭 마찬가지로, 사회분석가들은 자신의 방식을 자신에게 적용하기를 거의 억제할 수 없는 환대로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 까닭은 전통에 느슨하게 고정된 지식인에 대한 그들의 묘사가 그들 자신의 사회적 무리에 대한 매우 말끔한 묘사가 아닌가 ? 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데올로기 총체 이론이 옳다고 상정(想定)한다면, 자신의 그룹은 편견이 없었으며 그래서 진실로 홀로 객관성을 지닐 수 있는 선택된 사람들의 집단이었다고 믿는 것은 모든 이데올로기 총체의 한 부분이라는 것 또한 분명하지 않은가 ? 그러므로 항상 이 이론의 진실성을 상정(想定)한다면 그 이론을 지닌 사람들이 자신들이 지닌 견해의 객관성을 설정하기 위하여 이론에 수정을 가함으로써 자신들을 무의식적으로 기만할 것이 예상되지 않는가 ? 그렇다면 자신들의 사회학적 자기분석을 통하여 자신들이 더 높은 정도의 객관성에 도달했다는 그들의 주장을 우리는 진지하게 고려할 수 있을까 ; 그리고 사회적 분석이 이데올로기 총체를 추방할 수 있다는 그들의 주장을 ? 그러나 우리는 전체 이론이 이 특정 집단의 계급이해를 표현하는 것뿐이 아닌지 물을 수 있을 것이다 ; 헤겔의 말을 자신들의 모국어처럼 말하기에 충분히 단호하다 할지라도, 전통에 오직 느슨하게 고정된 지식계급의 계급이해를 표현하는 것뿐이 아닌지.
우리가 헤겔에 관련된 그들의 관계를 고찰한다면 지식사회학자들이 사회적 치료에서, 다시 말해서 그들 자신의 이데올로기 총체를 제거하는 데서 얼마나 성공하지 못했는지는 특히 명백할 것이다. 그 까닭은 자신들이 헤겔의 말을 반복하고 있을 뿐임을 그들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 반대로, 그들은 헤겔보다 더 발전했을 뿐만 아니라, 헤겔을 성공적으로 통찰했고 사회적으로 분석했다고 믿는다 ; 그래서 그들은 이제 특정 사회적 서식처로부터가 아니라, 우월한 지평으로부터 객관적으로 헤겔을 볼 수 있다고 믿는다. 자기분석에서 이 당연한 실패는 우리에게 충분한 설명을 해준다.
그러나 모든 농담을 제쳐놓고, 보다 심각한 반론들이 있다. 지식사회학은 스스로 파멸적일 뿐만 아니라, 사회적 분석의 다소 만족적 목표일뿐만 아니라, 그 주요 주제인 지식의 사회적 면(面), 즉 더 정확하게 과학적 방법의 사회적 면을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하는 놀라움을 드러낸다. 그 사회학은 과학이나 지식을 개별 과학자의 생각이나 ‘의식’ 속의 한 과정으로서, 혹은 아마도 그런 과정의 산물로서 간주한다. 이런 방식으로 고찰되면, 소위 과학적 객관성이란 정말로 완전히 이해불가능해지거나 심지어 불가능해진다 ; 게다가 계급이해와 유사한 숨겨진 동기가 역할을 할 사회 혹은 정치 과학에서 뿐만 아니라, 자연과학에서도 동일하게 그러하다. 자연과학사에 조금 지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누구나 자연과학에 관한 논증 중 많은 논증을 특징짓는 열정적인 끈기를 의식하고 있다. 정치적 편파성의 어떤 정도도 어떤 자연과학자들이 자신들의 지적(知的) 자식을 지지하여 표출하는 편파성보다 더 강력하게 정치적 이론에 영향을 끼칠 수 없다. 지식사회학적 이론이 순진하게 상정(想定)하는 바와 같이 과학적 객관성이 개별 과학자의 불편부당성 즉, 객관성을 토대로 설정된다면, 우리는 그 과학적 객관성에 이별을 고해야 할 것이다. 진정으로 우리는 지식사회학보다 어느 정도 더 급진적이 되어야 한다 ; 그 까닭은 우리 모두가 편견(혹은 이 용어가 선호된다면 ‘이데올로기 총체’)으로 된 우리 자신의 체계 아래서 고통을 당하고 있다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 우리 모두는 많은 것을 자명하다고 생각한다는 것, 우리는 많은 것을 무비판적으로 심지어 비판이 완전히 불필요하다는 순진하고도 자기만족적인 믿음으로써 생각한다는 것 ; 게다가 과학자들이 피상적으로 자신들의 특정 분야에서 자신들이 지닌 편견 몇 가지를 제거했을지라도 과학자들도 이 규칙에 예외가 아니다. 그러나 그들은 사회적 분석이나 유사한 방법으로 자신들을 정화하지 않았다 ; 그들은 자신들의 이념적 어리석음을 이해하고 사회적으로 분석하여 제거할 수 있는 더 높은 지평으로 오르려고 노력하지 않았다. 그 까닭은 자신들의 생각을 보다 ‘객관적’으로 만듦으로써 그들은 소위 ‘과학적 객관성’에 도저히 도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아니다, 이 용어로써 우리가 보통 의미하는 것은 다른 토대에 놓여있다. 그것은 과학적 방법의 문제이다. 게다가 매우 역설적으로, 객관성은 과학적 방법의 사회적 면과, 과학과 과학적 객관성은 개별 과학자가 ‘객관적’이 되려는 시도로부터가 아니라 많은 과학자들의 호의적-적대적 협조로부터 생긴다는 (생길 수 있다는) 사실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과학적 객관성은 과학적 방법에 관한 상호간 주관성으로서 묘사될 수 있다. 그러나 과학의 이 사회적 면은 자신을 지식사회학자로 부르는 사람들에 의하여 거의 전적으로 무시된다.
자연과학의 방법에 관한 두 가지 면은 이런 관계에서 중요성을 갖는다. 합쳐서 그것들은 내가 ‘과학적 방법의 공공성’이라고 칭하는 것을 구성한다. 첫째로, 자유비판에 근접하는 것이 있다. 과학자는 공격받을 수 없다는 완벽한 신념으로 자신의 이론을 제시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자신의 동료 과학자와 경쟁자들에게 감명을 주지 못한다 ; 오히려 그것은 동료 과학자와 경쟁자들에게 도전한다 : 그들은 과학적 자세가 모든 것을 비판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알고 있어서 심지어 권위에 의해서도 거의 제지당하지 않는다. 두 번째로, 과학자들은 오해를 일으키는 말을 피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나는 독자들에게 내가 자연과학에 대하여 말하고 있지만 현대 경제학의 일부가 포함될 것임을 상기시키겠다.) 그들은 다른 모국어를 사용한다 할지라도 동일한 언어를 말하려고 매우 진지하게 노력한다. 자연과학에서 이것은 경험을 자신들의 논증에 관한 공정한 중재자로서 인정함으로써 성취된다. ‘경험’에 관하여 말할 때 나는, 보다 ‘개인적인’ 심미적이거나 종교적인 의미의 경험과 반대로, 관찰과 실험과 같은 ‘공공적’ 특성을 지닌 경험을 염두에 두고 있다 ; 그리고 경험은 노력하는 사람이 반복할 수 있다면 ‘공공적’이다. 오해를 일으키는 말을 피하기 위하여, 과학자들은 자신의 이론을 실험될 수 있는 형태로, 다시 말해서 그런 경험에 의하여 반증되거나 (혹은 입증될 수 있도록) 설명하려고 노력한다.
이것이 과학적 객관성이다. 과학이론을 이해하고 실험하는 기법을 배운 사람은 누구나 스스로 그 실험을 반복할 수 있고 판단할 수 있다. 이것에도 불구하고, 편파적이거나 심지어 기묘한 판단을 하는 사람들이 항상 나타나는 경향이 있다. 이것은 어쩔 수 없고, 과학적 객관성과 비판을 촉진하려고 고안되었던 다양한 사회제도의 작동을 심각하게 방해하지는 않는다 ; 예를 들어 실험실들, 과학정기간행물들, 학술회의들. 전문가 동아리에 한정된다 할지라도 과학적 방법의 이 면(面)은 공공적(公共的) 통제를 가능하도록 고안된 제도에 의하여, 그리고 여론의 공개적 표현에 의하여 무엇이 성취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오직 정치권력만이, 자유비판을 억누르는 데 사용될 때, 혹은 자유비판을 보호하지 못할 때, 이 제도의 작동을 해칠 수 있는데 그 제도에 모든 과학적, 기술적, 그리고 정치적 진보가 궁극적으로 달려있다.
이 유감스럽게 무시된 과학적 방법의 면(面)을 한층 더 명백하게 하기 위하여, 우리는 과학을 그 결과보다는 방법으로써 특징짓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생각을 고찰할 것이다.
우선 천리안을 가진 사람이 꿈을 꾸면서, 혹은 자동적인 글쓰기에 의하여 책을 펴낸다고 상정(想定)하자.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몇 년 뒤 새롭고 혁명적인 과학적 발견의 결과로, (그 책을 본 적이 없는) 한 위대한 과학자가 똑같은 책 한 권을 저술한다고 상정(想定)하자. 혹은 달리 표현해서, 관련된 많은 발견이 당시 여전히 알려지지 않았다는 사실 때문에 과학자에 의하여 당시 편찬될 수 없었던 과학서적을 천리안을 가진 사람이 ‘보았다’고 우리는 상정(想定)한다. 우리는 이제 묻는다 : 천리안을 가진 사람이 과학서적을 저술했다고 말하는 것이 바람직한가 ? 당시 유능한 과학자들의 판단을 위하여 책이 제출된다면, 그 책은 부분적으로 이해불가능하고 부분적으로 환상적이라고 설명되었을 것이라고 우리는 상정(想定)한다 ; 그리하여 우리는, 그 책은 과학적 방법의 결과물이 아니기 때문에, 천리안을 가진 사람의 저작은 쓰였을 때 과학적 저작이 아니었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나는 그런 결과물을, 몇 가지 과학적 결과와 일치한다 할지라도 과학적 방법의 산물이 아니어서, ‘계시된 과학’의 한 편이라고 부를 것이다.
이 고찰을 과학적 방법의 공공성 문제에 적용하기 위하여, 로빈슨 크루소가 자신의 섬에 물리 및 화학 실험실과 천문대, 기타 등등을 세워서 전적으로 관찰과 실험을 토대로 수많은 논문을 썼다고 상정(想定)하자. 심지어 그는 자기 마음대로 쓸 수 있는 무한한 시간을 가지고 있고, 현대 우리들의 과학자에 의하여 수용된 결과와 실제로 일치하는 과학체계를 구축하고 설명하는 데 성공했다고 상정(想定)하자. 이 크루소식 과학의 특징을 고찰하여, 어떤 사람들은 첫눈에 보고 이것은 실제 과학이고 ‘계시된 과학’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경향을 지닐 것이다. 그래서 의심할 바 없이 그것은 천리안을 가진 사람에게 계시된 과학서적보다 훨씬 더 과학과 같은데, 그 까닭은 로빈슨 크루소가 많은 과학적 방법을 적용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이 크루소식 과학이 여전히 ‘계시된’ 종류라고 주장한다 ; 과학적 방법의 한 요소가 실종되어서 결과적으로 크루소가 우리들이 얻은 결과에 도달했다는 사실은 천리안을 가진 사람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거의 우연적이고 기적적이라고. 그 까닭은 자신이 얻은 결과를 검토할 사람은 자신을 제외하고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 그의 고유한 정신적 편력의 피할 수 없는 결과인 저 편견들을 교정할 사람은 자신을 제외하고 아무도 없다 ; 우리들이 얻은 결과들 대부분이 상대적으로 부적절한 접근방식을 통하여 습득된다는 사실의 결과물인 우리 자신이 얻은 결과들의 내재적 가능성에 관한 저 기묘한 맹목성을 제거하는 데 그를 도울 사람이 없다. 그래서 그의 과학적 논문에 관해서, 역시 과학적 방법의 한 부분인 명백하고 논리적으로 표현된 의사소통의 지침을 그가 습득할 수 있는 것은 그런 연구를 하지 않은 사람에게 자신의 저술을 설명하려는 시도에서만이다. 한 가지 점에서 - 비교적 하찮은 점에서 - 크루소식 과학의 ‘계시된’ 특성은 특히 명백하다 ; 자신의 천문 관찰에 영향을 미치는 특징적인 개인적 반응시간에 대한 자신의 ‘개인적 등식’을 크루소가 발견한 것을 (그 까닭은 우리는 그가 이것을 발견했다고 상정[想定]해야 하기 때문이다) 나는 의미한다. 물론 그가, 가령, 자신의 반응시간 안에서 변화를 발견해서, 이런 방식으로 자신의 반응시간을 감안하게 되었다고 상상될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반응시간에 관하여 발견하는 이 방식을 ‘공공적’ 과학에서 발견되던 방식과 - 다양한 관찰자가 얻은 결과 사이의 반박을 통하여 - 비교한다면, 로빈슨 크루소의 과학이 지니는 ‘계시된’ 특성은 분명해진다.
이 고찰들을 요약하면, 소위 ‘과학적 객관성’은 개별 과학자들이 지니는 불편부당성의 산물이 아니라 과학적 방법의 사회적 혹은 공공적 특성의 산물이라고 일컬어질 것이다 ; 그래서 개별 과학자의 불편부당성은, 그것이 존재한다면, 이 사회적으로 혹은 제도적으로 조직된 과학의 객관성의 근원이 아니고 오히려 결과이다.
칸트주의자들과 헤겔주의자 모두는 우리가 지닌 선입견들이 (그것들이, 우선, 의심할 바 없이 경험을 우리가 능동적으로 ‘만드는’ 데 우리에게 필요한 필수적인 도구이기 때문에) 결심에 의하여 변할 수도 없고 경험에 의하여 반박될 수도 없다고 생각하는 동일한 실수를 저지른다 ; 모든 사고(思考)의 기본적 선입견을 구성하기 때문에 선입견들은 이론을 실험하는 과학적 방법을 초월한다고. 그러나 과학에서 이론과 경험 사이의 관계를 오해하는 데 기초하여, 이것은 과장이다. 아인슈타인이 경험에 비추어, 모든 과학의 필수적 선입견이어서 그 과학의 ‘범주적 장치’에 속한다고 믿어져왔던 개념들인 심지어 공간과 시간에 관하여 우리가 지닌 선입견들도 우리가 의문시하고 수정할 것임을 밝혔을 때 우리 시대의 가장 위대한 업적 중 하나였다. 그리하여 지식사회학에 의하여 과학에 가해진 회의적 공격은 과학적 방법에 비추어서 무너진다. 경험적 방법은 스스로 완전히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음을 증명하였다.
그러나 우리가 지닌 편견을 일시에 제거함으로써 경험적 방법이 스스로 완전히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경험적 방법은 우리가 지닌 편견을 하나씩 제거할 수 있다. 이 점에 관한 고전적 본보기가 다시 시간에 관한 우리의 편견을 아인슈타인이 발견한 것이다. 아인슈타인은 편견을 발견하려고 시작하지 않았다 ; 그는 심지어 공간과 시간에 대한 우리의 개념을 비판하려고 시작하지도 않았다. 그가 지녔던 문제는 물리학의 구체적인 문제로 이론에 비추어 서로 모순이 되는 듯했던 다양한 실험 때문에 무너졌던 이론을 재구성하는 것이었다. 아인슈타인은 대부분의 물리학자들과 함께 이것은 이론이 틀렸음을 의미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모든 사람에 의하여 당시까지 자명하다고 믿어져서 그리하여 주목을 피해갔던 요점 속에서 우리가 그 이론을 수정한다면 난제가 제거될 수 있다는 것을 그는 발견했다. 다시 말해서, 그는 과학적 비판과 이론의 창안 및 제거라는, 시행착오라는 방법을 적용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이 방법도 우리가 지닌 모든 편견을 포기하는 결과를 초래하지는 않는다 ; 오히려, 우리는 오직 편견을 제거한 후에야 우리가 편견을 지니고 있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여하한 순간에도, 우리의 과학적 이론은 그 순간까지 행하여진 실험 기타 등등에 의존할 뿐만 아니라, 당연시되는 편견에도 의존하여 (특정 논리적 방법의 적용이 우리가 그 편견을 탐지한데 도움을 줄 것이라 할지라도) 우리는 그 편견을 의식하지 못했다고 틀림없이 인정되어야 한다. 아무튼 이 외피(外皮)와 관련하여 과학은 그 외피 얼마간을 배울 수도 있고 부술 수도 있다고 우리는 말할 수 있다. 그 과정은 완결되지 않을 것이지만, 그 과정이 앞에서 멈추어야 하는 고정된 장애물은 없다. 원칙적으로 여하한 상정(想定)도 비판을 받을 수 있다. 그리고 누구도 비판할 것임이 과학적 객관성이다.
과학적 결과는 그 결과가 과학적 발전의 특정 단계에 속하는 결과물이어서 과학적 진보과정에서 대체될 수 있는 한에서만 (이 용어가 사용될 수 있다면) ‘상대적’이다. 그러나 이것이 진실이 ‘상대적’이라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한 주장이 사실이면 그 주장은 영원히 사실이다. 그것은 단지 대부분의 과학적 결과물이 가설의, 다시 말해서 그 진술에 대하여 증거가 불확정적이어서 어느 때고 수정될 수 있는 진술의, 특성을 지니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 고찰은 (내가 다른 곳에서 보다 자세하게 다루었다), 사회학자들을 비판하는 데는 필요하지 않을지라도, 사회학자들의 이론에 대한 이해를 촉진하는 데 아마도 도움을 줄 것이다. 이 고찰은 또한, 나의 주요 비판으로 돌아와서, 과학적 비판과 과학적 진보에서 협력, 상호주관성, 그리고 방법의 공공성이 담당하는 중요한 역할을 어느 정도 밝혀준다.
사회과학이 아직도 방법에 관한 이 공공성에 도달하지 못한 것은 사실이다. 이것은 부분적으로 지성을 파괴하는 아리스토텔레스와 헤겔의 영향 때문이고, 또한 부분적으로 과학적 객관성이라는 사회적 도구를 그들이 이용하지 못한 이유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실제로 ‘이데올로기 총체’였는데, 혹은 다르게 표현하여, 몇몇 사회과학자는 공동의 언어로 말할 수 없고 심지어 그 언어로 말하려고 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이유는 계급이해가 아니며, 치료법은 헤겔의 변증법적 종합도 아니요, 자기분석도 아니다. 사회과학에 열려있는 유일한 과정은 말장난에 관하여 완전히 잊고 우리 시대가 지닌 실제 문제를 모든 과학에서 근본적으로 동일한 이론적 방법의 도움을 받아 처리하는 것이다. 시행착오의, 실제로 실험될 수 있는 가설을 고안하여 그 가설들은 실제로 실험에 부치는, 방법을 나는 의미한다. 그 결과가 점진적 사회공학으로 실험될 수 있는 사회적 기술이 필요하다.
사회과학을 위하여 여기에 제시된 치료법은 지식사회학들에 의하여 제시된 치료법과 완전히 반대다. 사회학주의는 이 과학들의 방법론적 난제를 야기하는 것은 그 과학들의 비실제적 특성이 아니라 오히려 실제적이고 이론적인 문제들이 사회적 및 정치적 지식 분야에서 너무 많이 얽혀있다는 사실이라고 믿는다. 그리하여 우리는 지식사회학에 관한 주요 저술에서 다음과 같은 글을 읽을 수 있다 : ‘정치적 지식의 특이성은, “정확한” 지식과 반대로, 지식과 의지, 혹은 이성적 요소와 비이성적인 것의 범위가 불가분하게 그리고 본질적으로 얽혀있다는 사실에 놓여있다.’ 이것에 대하여 ‘지식’과 ‘의지’는, 어떤 의미에서, 항상 불가분하다 ; 그리고 이 사실은 어떤 위험한 혼효(混淆)도 초래할 필요가 없다고 우리는 대답할 수 있다. 어떤 과학자도 노력하지 않고, 흥미를 지니지 않고, 지식을 얻을 수는 없다 ; 그리고 그의 노력에는 보통 심지어 특정 양의 사리(私利)가 포함된다. 기술자는 주로 실용적 관점에서 사물을 연구한다. 농부도 마찬가지다. 실습은 이론적 지식의 적이 아니라 가장 귀한 대안이다. 어느 정도의 초연함이 과학자에게 어울릴 것이지만, 과학자가 그렇게 무관심한 것이 항상 중요하지는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많은 사례들이 있다. 그러나 과학자가 현실과, 실습과 접촉하고 있다는 것은 중요한데, 그 까닭은 현실을 간과하는 과학자들은 학풍고집에 빠짐으로써 대가를 치러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발견한 것을 실제로 적용하는 것은 그러므로 그것으로 우리가 사회과학으로부터 비이성주의를 축출할, 그리고 ‘의지’로부터 지식을 분리하려는 어떤 시도도 축출하지 않는, 수단이다.
이것과 반대로, 지식사회학은 사회과학자로 하여금 무의식적으로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사회적 힘과 이데올로기들을 의식하게 만들어서 사회과학을 개혁하기를 희망한다. 그러나 편견에 관한 주요 골칫거리는 편견을 제거하는 그런 직접적인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그 까닭은 어떻게 우리가 편견을 우리 자신으로부터 제거하려는 노력에서 진보를 이룩했는지 알 수 있을까 ? 이기 때문이다. 자신들의 편견을 없앴다고 가장 확신했던 사람들이 가장 편견적이었던 것은 흔한 경험이 아닌가 ? 편견에 관한 사회학적 혹은 심리학적 혹은 인류학적 혹은 다른 연구가 편견을 우리 자신으로부터 제거하는 데 우리에게 도움을 줄 것이라는 생각은 완전히 틀린 것이다 ; 그 까닭은 이 학문들을 추구하는 많은 사람들이 편견으로 가득차있기 때문이다 ; 그리고 자기분석은 우리가 우리의 견해를 무의식적으로 결정하는 것을 극복하는 데 도움을 주지 않을 뿐 아니라, 자주 자기분석은 훨씬 더 미묘한 자기기만(自己欺瞞)을 초래한다. 그리하여 우리는 지식사회학에 관한 동일한 저술에서 그 자체의 행동을 아래와 같이 언급하는 것을 읽을 수 있다 : ‘우리가 지금까지 무의식적으로 지배를 당하던 요인들을 의식하도록 만드는 경향이 증가하고 있다 ... 결정요인에 대하여 우리가 지닌 증가하는 지식이 우리의 결정을 마비시키고 “자유”를 위협하리라고 두려워하는 사람들은 걱정을 거두어야 한다. 그 까닭은 가장 본질적인 결정요인은 알지 못하지만 자신에게 알려지지 않은 결정인자의 압력을 받아서 즉각적으로 행동하는 사람만이 진정으로 결심하기 때문이다.’ 엥겔스가 다음과 같이 말했을 때 이제 이것은 명백하게 엥겔스가 순진하게 복창한 헤겔이 애용하던 개념의 반복일 뿐이다 : ‘자유는 필연을 깨닫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반동적인 편견이다. 그 까닭은 잘 알려진 결정인자의, 예를 들어, 정치적 독재체제의 압력 하에서 행동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지닌 지식으로써 자유롭게 되지 않는가 ? 이기 때문이다. 헤겔만이 그런 이야기를 우리에게 말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지식사회학이 이 특정 편견을 보존한다는 것은 우리의 이데올로기를 제거하는 합당한 지름길이 없다는 것을 충분히 명백하게 보여준다. (한번 헤겔주의자이면 영원히 헤겔주의자.) 자기분석은 비판적 사고의 자유를, 그래서 과학의 진보를 유일하게 보증할 수 있는 민주주의적 제도를 설립하는 데 필수적인 저 실제적 행동에 대한 대체물이 아니다.
24 장 : 예언철학, 그리고 이성에 대한 반역
마르크스는 이성주의자였다. 소크라테스와 함께, 그리고 칸트와 함께, 그는 인간의 이성을 인류통합의 토대로서 신뢰했다. 그러나 우리의 견해가 계급이해에 의하여 결정된다는 그의 교설은 이 신뢰의 쇠퇴를 재촉했다. 우리가 지닌 아이디어는 민족적 이해(利害)와 전통에 의하여 결정된다는 헤겔의 교설처럼, 마르크스의 교설에도 이성에 대한 이성주의적 신뢰를 해치는 경향이 있었다. 그리하여 역사주의적 예언과 예언적 비이성주의가 직접적인 공격을 가해왔을 때, 우파와 좌파 양쪽으로부터 위협을 받고, 사회적 및 경제적 문제에 대한 이성주의적 관점은 저항할 수 없었다. 이것이 이성주의와 비이성주의 사이의 갈등이 우리 시대의 가장 중요한 지적(知的), 그리고 아마도 심지어 도덕적 문제가 된 이유이다.
I
‘이성’과 ‘이성주의’라는 용어가 모호하기 때문에, 그 용어들이 이곳에서 사용되는 방식을 개략적으로 설명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우선, 그 용어들은 넓은 의미에서 사용된다 ; 그 용어들은 지적(知的) 행동뿐만 아니라, 관찰과 실험을 포함하여 사용된다. ‘이성’과 ‘이성주의’는 ‘비이성주의’에 대한 반대가 아니라 ‘경험주의’에 대한 반대로 다양하고 더 좁은 의미로 자주 사용되기 때문에, 이 말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 이런 식으로 사용된다면, 이성주의는 관찰과 실험보다 지성을 찬양하며, 그래서 아마도 ‘주지주의(intellectualism)’로 더 잘 설명될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내가 ‘이성주의’를 언급할 때, 나는 그 단어를 항상 ‘주지주의’뿐만 아니라 ‘경험주의’ 또한 포함하는 의미에서 사용한다 ; 과학이 사고(思考)뿐만 아니라 실험 또한 이용하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둘째로, 감정이나 열정의 도움을 받아서라기보다는, 이성 다시 말해서 명료한 사고(思考)와 경험의 도움을 받아서 가능한 한 많은 문제를 해결하려는 자세를 개략적으로 지칭하기 위하여 나는 ‘이성주의’라는 말을 사용한다. 이 설명은, 물론, 그다지 만족스럽지 못한데 그 이유는 ‘이성’이나 ‘열정’같은 모든 용어들이 모호하기 때문이다 ; 우리는 특정 신체기관, 예를 들어, 뇌나 혹은 심장을 우리가 소유하는 의미로, 혹은 특정 ‘기능’ 예를 들어 말하는 능력 혹은 이빨을 부딪치는 능력을 우리가 소유하는 의미로 ‘이성’이나 ‘열정’을 소유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조금 더 정확해지기 위하여, 이성주의를 실제 자세나 행동으로써 설명하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성주의는 비판적 주장을 듣고 경험으로부터 배우려는 용의의 자세라고 우리는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성주의는 근본적으로 ‘내가 틀리고 당신이 옳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노력하여 우리가 진실에 더 가까이 갈 수 있을 것이다’를 수용하는 자세이다. 이성주의는 논증과 세심한 관찰과 같은 그런 수단을 통하여 사람들은 많은 중요한 문제에 관하여 어떤 종류의 합의에 이를 것이라는 희망을 가볍게 포기하지 않는 자세이다 ; 그리고 심지어 사람들의 요구와 이해관계가 충돌하는 곳에서도, 다양한 요구와 제안에 관하여 논증을 벌여, 그 공정성 때문에, 모두 사람은 아니라도 대부분의 사람에게 수용될 수 있는 타협에 - 아마도 중재에 의하여 - 도달하는 것이 흔히 가능하다는 것. 요컨대, 이성주의적 태도는, 혹은 내가 이름을 붙인다면, ‘합리성의 태도’는, 과학적 태도와, 진실을 탐색하는 데 우리는 협조가 필요하며, 논증의 도움으로, 우리가 조만간 객관성과 같은 중요한 것에 도달할 수 있다는 믿음과, 매우 유사하다.
이 합리성의 태도와 과학의 태도 사이의 이 유사점을 더 충실하게 분석하는 것은 좀 흥미롭다. 앞 장에서, 나는 과학적인 로빈슨 크루소라는 허구의 도움을 받아서 과학적 방법의 사회적인 면을 설명하려고 노력했다. 정확하게 유사한 고찰이, 지적(知的) 재능과 반대로, 합리성의 혹은 영리함의 사회적 특성을 보여줄 수 있다. 이성은, 언어처럼, 사회적 생활의 산물로 일컬어질 수 있다. (매우 어린 시절에) 버려진 로빈슨 크루소 같은 사람은 아마도 충분히 영리해서 많은 어려운 상황을 극복할 것이다 ; 그러나 그는 언어나 논증기법을 창안하지는 않을 것이다. 인정되는 바와 같이, 우리는 우리 자신과 자주 논증한다 ; 그러나 우리는 다른 사람과 논증하는 것을 배웠고, 이런 방식으로 우리가 논증하는 사람보다는 논증이 중요하다는 것을 배웠다는 이유로만 우리는 우리 자신과 논증하는 것에 익숙해져 있다. (이 마지막 고찰은, 물론, 우리가 우리 자신과 논증할 때, 결정적인 요인이 될 수 없다.) 그리하여 우리는 우리가 지닌 이성이, 우리의 언어와 같이, 다른 사람과의 교제에 기인한다고 말할 수 있다.
이성주의적 태도가 논증하는 사람보다는 논증을 생각한다는 사실은 폭넓은 중요성을 띤다. 그 사실은 우리가 함께 의사소통하는 모든 사람을 논증의 그리고 합리적인 정보의 잠재적 근원으로서 인정해야 한다는 견해를 낳는다; 그리하여 그 사실은 ‘인류의 이성적 통합’으로 묘사될 것을 설정한다.
어떤 정도로는, 우리가 ‘이성’을 분석한 것은 헤겔과 헤겔주의자들이 이성을 분석한 것과 다소 닮았다고 언급될지도 모르는데, 그들은 이성을 사회적 산물로서 그리고 진정으로 사회의 (예를 들어, 민족이나 계급의) 영혼이나 정신의 일종의 부서로서 간주하며, 버크(Burke)의 영향을 받아서 우리가 지닌 사회적 유산에 대하여 우리가 진 빚과 그 유산에 우리가 전적으로 의존함을 강조한다. 인정되는 바와 같이, 약간의 유사점은 있다. 그러나 매우 큰 차이점들이 또한 존재한다. 헤겔과 헤겔주의자들은 집단주의자들이다. 그들은, 우리가 ‘사회’에 - 혹은 민족과 같은 특정 결사에 - 우리의 이성을 빚지고 있기 때문에, ‘사회’는 전부요 개인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주장한다 ; 혹은 개인이 소유한 모든 가치는 모든 가치를 실제로 운반하는 것인 집단으로부터 나온다고. 이것과 반대로, 이곳에 제시된 견해는 집단의 존재를 상정(想定)하지 않는다 ; 예를 들어, 내가 우리는 이성을 ‘사회’에 빚지고 있다고 말한다면, 우리는 이성을 특정한 구체적인 개인들에게 - 아마도 상당한 숫자의 익명의 개인들에게라 할지라도 - 그리고 그들과의 지적(知的) 교류에, 우리가 빚지고 있음을 나는 항상 의미한다. 그러므로 이성에 관한 (혹은 과학적 방법에 관한) ‘사회적’ 이론에 관하여 말하면서, 나는 더 정확하게 이론은 상호개인적인 것임을 의미하며 이론이 집단주의적 이론이라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틀림없이 우리는 전통에 많은 빚을 지고 있으며, 전통은 매우 중요하지만, ‘전통’이라는 용어는 또한 분석되어 구체적인 개인적 관계가 되어야 한다. 그래서 우리가 이렇게 한다면, 우리는 모든 전통을 성스러운 것으로, 혹은 본질적으로 귀중한 것으로 여기는 자세를 버릴 수 있으며 경우에 따라서 그리고 전통이 개인에게 미치는 영향에 따라서 이 자세를 귀중하거나 해롭다고 여기는 자세로 대체할 수 있다. 그리하여 우리 각자는 (보기와 비판을 통하여) 그런 전통의 성장이나 억제에 기여할 것임을 우리는 깨달을 것이다.
여기서 채택된 견해는, 매우 다양한 정도로 다양한 사람에 의하여 소유되고 개발될, 이성을 일종의 ‘기능’으로서 보는 대중적이고 원래 플라톤적인 관점과 매우 다르다. 인정되는 바와 같이, 지적(知的) 재능은 이런 방식으로 다양할 것이고, 합리성에 기여할 것이다 ; 그러나 그 재능이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 영리한 사람은 매우 비이성적일는지도 모른다 ; 그들은 자신들의 편견에 매달릴 것이고 타인으로부터 가치 있는 것을 듣는다는 기대를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관점에 따르면, 다른 사람으로부터 우리의 이성이 기인할 뿐만 아니라, 우리는 권위 소유를 확립할 방식으로 우리들이 지닌 합리성에서 타인들 능가할 수 없다 ; 권위주의와 우리가 의미하는 이성주의는, 비판을 포함하는 논증과 비판을 청취하는 기법이 합리성의 토대이기 때문에, 타협할 수 없다. 우리가 의미하는 이 이성주의는 그 속에서 이성의 성장이 어떤 우수한 이성에 의하여 통제되고 ‘기획’될 멋진 신세계에 대한 모든 현대적 저 플라톤식 꿈과 완전히 반대가 된다. 이성은, 과학처럼, 상호비판을 통하여 성장한다 ; 이성의 성장을 ‘기획하는’ 유일하게 가능한 방법은 이 비판의 자유를, 다시 말해서, 사고(思考)의 자유를 보장하는 저 제도들을 개발하는 것이다. 플라톤은, 그의 이론이 권위적이어서 (특히 8 장에서 밝혀진 바와 같이) 자신이 주장하는 수호자에게서 인간 이성의 성장을 엄격히 통제할 것을 요구한다 할지라도, 자신의 글 쓰는 방식을 통하여, 우리가 주장하는 이성에 관한 상호 인간적 이론에 찬사를 보낸다 ; 그 까닭은 그의 초기 대화 대부분이 매우 합리적인 정신으로 수행되는 논증을 묘사하기 때문이다.
‘이성주의’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나의 방식은, 아마도 우리가 진정한 이성주의와 거짓 혹은 사이비-이성주의를 구분한다면, 조금 더 분명해질 것이다. 내가 ‘진정한 이성주의’로 부를 것은 소크라테스의 이성주의이다. 소크라테스의 이성주의는 자신의 한계에 대한 깨달음, 자신들이 얼마나 자주 잘못을 저지르는지, 그리고 심지어 이 지식을 얻기 위해서도 얼마나 많이 자신들이 타인에게 의존하는지를 아는 사람들의 지적(知的) 겸손이다. 그것은 우리가 이성으로부터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해서는 안 된다는 깨달음이다 ; 논증이 배움을 위한 유일한 수단이라 할지라도, 논증은 문제를 거의 해결하지 못하는데, 분명하게 보는 것이 아니라, 전보다 더 분명히 보는 것이다.
내가 ‘사이비-이성주의’로 부를 것은 플라톤의 지적(知的) 직관주의이다. 플라톤의 지적(知的) 직관주의는 비결을 알고 있다는 주장, 확신하여 그래서 권위적으로 안다는 것으로 사람의 우월한 지적(知的) 재능을 뻔뻔스럽게 믿는 것이다. 플라톤에 따르면, 견해는 - 우리가 티마에오스(Timaeus)에서 읽을 수 있는 바와 같이, 심지어 ‘진정한 견해(true opinion)’는 - ‘신(神)들에 의해서만, 극소수의 사람에 의해서만, 공유된다’. 이 권위적인 주지주의, 발견에 대한 무오류의 도구를 소유하고 있다는 이 믿음, 인간이 지닌 지적(知的) 능력과 인간이 아마도 알거나 이해할 수 있는 모든 것에 관하여 인간이 타인에게 진 빚을 구분하지 못함, 이 사이비-이성주의는 간혹 ‘이성주의’로 불리지만, 우리가 이 이름으로 부르는 것과 완전히 반대가 된다.
이성주의적 자세에 대한 나의 분석은 의심할 바 없이 매우 불완전하고, 다소 모호하다고 나는 기꺼이 인정한다 ; 그러나 나의 분석은 우리가 지닌 목적에는 충분할 것이다. 유사한 방식으로 나는 이제 동시에 어떻게 비이성주의자가 비이성주의를 옹호할 것인지를 지적하면서, 비이성주의를 설명하겠다.
비이성주의적 자세는 다음 방향을 따라서 전개될 것이다. 우리가 사물을 피상적으로 다루기를 원한다면 충분히 잘 작동할 도구로서, 어떤 비이성적 목표에 부합할 수단으로서, 아마도 이성과 과학적 논증을 인정한다 할지라도, 비이성주의자에게는 ‘인간의 본성’은 주로 이성적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경향이 있다. 사람은 이성적 동물 이상이기도 하고 또한 이하이기도 하다라고 비이성주의자는 주장한다. 인간이 이성주의자 이하라는 것을 알기 위하여, 우리에게는 논증을 할 수 있는 사람의 숫자가 얼마나 작은지를 고찰할 필요만 있다 ; 이것이, 비이성주의자의 주장에 따라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들이 지닌 이성의 도움을 받아서라기보다는 그들이 지닌 감정과 열정의 도움을 받아서 항상 취급되어야 할 이유이다. 그러나 사람의 삶에서 실제로 문제가 되는 모든 것은 이성을 초월하기 때문에, 사람은 또한 단순한 이성적 동물 이상이다. 심지어 이성과 과학을 진지하게 생각했던 극소수의 과학자도 그들이 지닌 이성적 자세를 사랑했기 때문에 그 이성적 자세에 매여 있다. 그리하여 심지어 이 드문 사례에서도, 인간의 자세를 결정하는 것은 인간의 감정적 결합이지 그가 지닌 이성이 아니다. 게다가, 위대한 과학자를 만드는 것은 그의 이성사용이라기보다는 그가 지닌 직관, 그가 지닌 사물의 본성을 신비롭게 통찰하는 힘이다. 그리하여 이성주의는 심지어 과학자가 지니는 명백하게 이성적인 행동에 대해서도 적절한 해석을 내놓을 수가 없다. 그러나 과학적 분야가 예외적으로 이성주의적 해석에 도움에 되기 때문에, 우리는 이성주의가 인간행동의 다른 분야를 다루려고 할 때 훨씬 더 뚜렷하게 실패할 것이라고 틀림없이 기대한다. 그리고 이 기대는, 그렇게 비이성주의는 자신의 주장을 계속할 것인데, 완전히 정확한 것으로 판명된다. 인간본성의 낮은 면은 차치하고, 우리는 인간본성의 최고 모습 중 하나인 사람이 창조적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주목할 것이다. 실제로 중요한 것은 사람의 작은 창조적 소수이다 ; 예술이나 사상의 작품을 창조하는 사람들, 종교 창시자들, 위대한 정치가들. 이 극소수의 예외적 개인들로 인하여 우리는 인간의 진정한 위대성을 엿본다. 그러나 이 인류의 지도자들이 자신들이 지닌 목적을 위하여 어떻게 이성을 사용할지를 안다 할지라도, 그들은 이성을 지닌 인간이 아니다. 그들의 뿌리는 더 깊은 곳에 놓여있다 - 그들의 본능과 충동 속 깊이, 그리고 그들이 부분을 이루고 있는 것의 사회의 본능과 충동에 놓여있다. 창조력은 전적으로 비이성적인, 신비로운 능력이다 ...
II
이성주의와 비이성주의 사이의 문제는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다. 희랍철학이 의심할 바 없이 이성주의적 탐구로 시작되었다 할지라도, 심지어 초창기에는 신비주의적 색채가 있었다. (10 장에서 암시된 바와 같이) 근본적으로 이성적인 접근방식 내부의 이 신비주의적 요소 속에서 드러나는 것은 종족주의의 잃어버린 통합과 피난처에 대한 열망이다. 그리고 이성주의와 비이성주의 사이의 공개적 갈등이 처음으로 스콜라철학과 신비주의 사이의 대립으로서 중세에 발생했다. (‘야만’ 국가 출신자들이 신비주의자들 사이에서 두각을 나타낸 반면, 이성주의가 이전 로마영토에서 번성했던 것은 아마도 흥미 없는 일은 아니다.) 이성주의의, 주지주의의, 그리고 ‘유물론’의 조류가 밀려오던 17세기, 18세기, 그리고 19세기에, 비이성주의자들은 그 조류를 주목해야 했고, 그 조류에 반대하는 주장을 펼쳐야 했다 ; 그리고 그 조류의 한계를 들춤으로써, 그리고 (우리가 의미하는 바의 이성주의와 그들이 구분하지 않았던) 사이비-이성주의의 건방진 주장과 위험을 폭로함으로써, 이 비판자들 몇 명, 특히 버크(Burke)는 모든 진정한 이성주의자들로부터 감사를 받았다. 그러나 이제 조류는 바꾸었고, (칸트가 표현하는 바와 같이) ‘몹시 의미심장한 암시 .. 그리고 비유’가 당시의 유행이 되었다. 예언적 비이성주의가 (특히 베르그송 및 대부분의 독일 철학자와 지식인과 함께) 이성주의자와 같은 그런 열등한 존재를 무시하거나 규탄하는 관습을 세웠다. 그들에게 이성주의자들과 - 혹은 그들이 자주 말하는 바와 같이 ‘유물론자들과 - 특히, 이성주의적 과학자는, 정신이 빈곤하여 영혼이 없고 주로 기계적인 활동을 추구하며 인간의 운명과 그 철학에 관한 더 깊은 문제를 완전히 의식하지 못한다. 그리고 이성주의자들은 보통 비이성주의를 완전한 헛소리로서 일축함으로써 응수한다. 이전에는 이 단절이 그렇게 철저하지 않았다. 그리고 철학자들의 사교적 관계의 단절은 후속으로 국가의 외교관계 단절이 왔을 때 그 심각성을 증명했다.
이 문제에서 나는 전적으로 이성주의 편을 든다. 이것은 대부분의 경우에 그러해서 심지어 이성주의가 너무 멀리 갔다고 내가 느낄 때도 나는 여전히 이성주의를 동정하는데 그런 방향으로의 지나침은 (플라톤의 사이비-이성주의가 지닌 지적[知的] 오만을 우리가 배제한다면) 다른 방향으로의 지나침과 비교하여 진정으로 해롭지 않다고 내가 주장하기 때문이다. 내 생각에, 지나친 이성주의가 해롭다고 판명될 것 같은 유일한 방식은 이성주의가 자신의 위치를 해치는 경향을 지녀 비성적주의적 반발을 촉진하는 경향을 띠는 것이다. 나에게 지나친 이성주의의 주장을 더 세밀하게 조사하도록, 그리고 특정 한계를 인정하는 겸손하고 자기비판적인 이성주의를 변호하도록 촉구하는 것은 이 위험뿐이다. 따라서 나는 다음에서 두 가지 이성주의적 견해를 구분하겠는데, 두 가지 이성주의적 견해에 나는 ‘비판적 이성주의’와 ‘무비판적 이성주의’ 혹은 ‘포괄적 이성주의’라는 이름표를 붙인다. (이 구분은, 비록 내가 의미하는 ‘진정한’ 이성주의가 비판적임을 제외하고 다른 것이 될 수 없다 할지라도, ‘진정한’과 ‘거짓’ 이성주의를 이전에 구분한 것과 별개이다.)
무비판적 혹은 포괄적 이성주의는 ‘논증이나 경험을 통하여 옹호될 수 없는 어떤 것도 나는 수용한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라고 말하는 사람의 자세로서 묘사될 수 있다. 우리는 이것을 논증에 의하여 혹은 경험에 의하여 지지받을 수 없는 여하한 상정(想定)도 포기되어야 한다는 원칙의 형태로 또한 표현할 수 있다. 이제 이 무비판적 이성주의의 원칙이 모순적임을 아는 것은 쉽다 ; 그 까닭은 무비판적 이성주의가, 자신의 차례가 되면, 논증이나 경험에 의하여 지지받을 수 없기 때문에, 그 이성주의 자체가 버려져야 함을 암시한다. (그것은 거짓말쟁이의 역설과, 다시 말해서 자체의 거짓됨을 주장하는 문장과 유사하다.) 무비판적 이성주의는 그러므로 논리적으로 옹호될 수 없다 ; 그리고 순전히 논리적인 주장이 이것을 증명할 수 있기 때문에, 무비판적 이성주의는 그 자체가 선택한 무기인 논증에 의하여 패배를 당할 수 있다.
이 비판은 일반화될 것이다. 모든 주장은 상정(想定)에서 틀림없이 유래하기 때문에, 모든 상정(想定)은 주장에 근거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분명히 불가능하다. 우리는 여하한 상정(想定)으로써 출발해서도 안 되고 ‘충분한 이유’에 관하여 어떤 것도 상정(想定)해서는 안 된다는 많은 철학자들에 의하여 제기된 요구사항과, 심지어 우리는 작은 수의 상정(想定) (‘범주 : categories’)으로써 시작해야 한다는 더 약한 주장도 양쪽 모두 이런 형식에서 모순적이다. 그 까닭은 그 주장들 자체가 극소수의 상정(想定)을 가지거나 상정(想定)없이 출발하여 가치 있는 결과를 습득한다는 것이 가능하다는 진정으로 거대한 상정(想定)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진정으로, 모든 상정[想定]을 피하는 이 원리는, 어떤 사람들이 생각하는 바와 같이, 완벽에 대한 충고가 아니라, 거짓말쟁이의 역설의 한 형태이다.)
이제 이 모든 것은 다소 추상적이다, 그러나 그것은 덜 형식적인 방식으로 이성주의에 관한 문제와 관련하여 다시 진술될 것이다. 이성주의적 태도는 그 태도가 논증과 경험에 붙이는 중요성에 의하여 특징이 지어진다. 그러나 논리적 논증이나 경험도 이성주의적 태도를 설정할 수 없다 ; 그 까닭은 논증과 경험을 고찰할 준비가 된, 그러므로 이런 자세를 이미 채택한 사람만, 논증과 경험에 의하여 깊이 영향을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논증이나 경험이 효과적이려면 이성주의적 태도가 먼저 채택되어야 하며, 그러므로 이성주의적 태도는 논증이나 경험에 근거할 수 없다. (그리고 이 고찰은 이성주의적 태도 채택에 도움을 주는 어떤 확신적인 이성적 논증이 존재하는지 존재하지 않는지의 문제와는 완전히 별개이다. 우리는 이것으로부터 이성적 태도를 채택하기를 원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어떤 이성적 주장도 이성적 효과를 미치지 못할 것이고 결론을 내려야 한다. 그러므로 포괄적 이성주의는 옹호를 받을 수 없다.
그러나 이것은 이성주의적 태도를 채택하는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의식적으로나 무의식적으로, 어떤 제안이나 결정 혹은 믿음이나 행동을 채택했기 때문에, 그렇게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 ‘비이성적’이라고 불리지도 모르는 채택. 이 채택이 일시적으로나 혹은 고착된 습관을 초래하든, 우리는 그것을 비이성적인 이성에 대한 신뢰로서 묘사할 것이다. 그래서 이성주의는 반드시 포괄적이거나 완결적이 아니다. 이것은, 비이성주의자들이 그 무기를 이성주의자들에게 겨냥하는 노력을 할 때마다, 자신을 자신의 분야에서 패배에 노출시키는 이성주의자들에 의하여 그리고 그 이성주의자들이 총애하는 무기에 의하여 자주 간과되었다 (이 문장에서 이성주의자들이 총애하는 무기는 논증을 의미한다. - 역자 주). 그리고 진정으로 사람은, 모든 종류든 혹은 특정 종류의 논증이든, 논증을 수용하는 것을 항상 거부할 수 있다는 것이 이성주의의 몇몇 적들의 주시를 피하지 못했다 ; 그리고 그런 자세는 논리적으로 모순적이면서도 성취될 수 있다는 것. 이로 인하여 몇몇 이성주의의 적들은 이성주의는 완결적이어서 논증으로 확립될 수 있다고 믿는 무비판적 이성주의자가 분명히 틀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비이성주의는 무비판적 이성주의보다 논리적으로 우수하다.
그렇다면 왜 비이성주의를 왜 채택하지 않는가 ? 이성주의자로서 출발하였지만 너무 포괄적인 이성주의는 스스로 패배하는 것을 발견하고 환멸을 느꼈던 많은 사람들은 정말로 실제로 비이성주의에 굴복했다. (이것은, 내가 완전히 틀리지 않다면, 화이트헤드[Whitehead]에게 일어난 일이다 [화이트헤드는 영국의 수학자이자 철학자로 버트런드 러셀과 공저를 남기고 있다. - 역자 주]). 그러나 그런 비이성적 행동은 완전히 바람직하지도 않고 필요하지도 않다. 무비판적이고 포괄적인 이성주의가 논리적으로 옹호를 받을 수 없다 할지라도, 그리고 포괄적 비이성주의가 논리적으로 옹호를 받을 수 있다 할지라도, 이것이 우리가 후자를 채택해야 할 이유는 아니다. 그 까닭은 다른 옹호될 수 있는 자세가 있기 때문인데 특히 근본적인 이성주의적 태도는 (적어도 일시적인) 신념의 행동으로부터 - 이성에 대한 신념으로부터 - 나온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비판적 이성주의의 자세가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의 선택은 열려있다. 우리는 어떤 형태의 비이성주의, 심지어 어떤 급진적이거나 포괄적인 형태를 선택할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자유롭게 자신의 근원이 비이성적 결정에 있음을 솔직하게 인정하는 (그리고, 그 정도까지, 비이성주의의 특정적 우선순위를 인정하는) 비판적 이성주의의 형태 하나를 선택한다.
III
우리 앞에 놓인 선택은 단순히 지적(知的) 문제, 혹은 기호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5 장의 의미에서) 도덕적 결정이다. 그 까닭은 우리가 어떤 다소 급진적 비이성주의 채택할 것인지, 혹은 내가 ‘비판적 이성주의’라고 부르는 저 비이성주의를 최소한도로 양보하는 것을 채택할 것인지의 문제는 타인을 향하여, 그리고 사회생활의 문제를 향하여 우리가 지닌 전체 태도에 깊은 영향을 미칠 것이기 때문이다. 이성주의는 인류의 통합에 대한 믿음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고 이미 언급되었다. 비이성주의는, 일관성에 관한 여하한 규칙으로도 묶여있지 않은데, 인간의 형제애를 포함한 어떤 종류의 믿음과 결합될 것이다; 그러나 비이성주의가 쉽게 매우 다른 믿음과 결합될 것이라는 사실과, 특히 비이성주의가 선택된 무리의 존재에 대한, 인간을 지도자와 피지도자로 분할하는 데 대한, 자연적인 주인과 자연적인 노예로 분할하는 데 대한 낭만적 믿음을 지지하는 데 수월하게 적당하다 사실은 도덕적 결정이 비이성주의와 비판적 이성주의 사이의 선택에 관련됨을 명백하게 보여준다.
전에 (5 장에서), 그리고 이제 다시 이성주의의 무비판적 종류에 대한 우리의 분석에서 우리가 본 바와 같이, 논증은 그런 근본적인 도덕적 판단을 결정할 수 없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의 선택이 여하한 종류의 논증에 의해서도 도움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암시하지는 않는다. 반대로, 우리가 보다 추상적인 종류의 도덕적 결정에 직면할 때마다, 우리가 선택해야 하는 대안 사이에서 발생할 결과들을 신중하게 분석하는 것이 매우 도움이 된다. 그 까닭은 우리가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방식으로 이 결과들을 볼 수 있을 때만, 우리는 실제로 우리의 결정이 무엇에 관련되어 있는지를 알기 때문이다 ;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맹목적으로 결정한다. 이 요점을 예시하기 위하여, 나는 쇼(Shaw)의 작품 성 조안(Saint Joan)에서 한 구절을 인용할 것이다. 화자(話者)는 목사이다 ; 그는 조안의 죽음을 고집스럽게 요구했다 ; 그러나 그가 화형장에 있는 조안을 볼 때, 그는 무너진다 : ‘나에게는 해를 입힐 의도가 없었다. 나는 이럴 줄 몰랐다 .. 나는 내가 무슨 짓을 하는지 몰랐다 .. 내가 알았더라면, 나는 그녀를 그 사람들의 손에서 떼어놓았을 것이다. 당신들은 모른다. 당신들은 보지 못했다 : 알지 못할 때 말하는 것은 매우 쉽다. 당신들은 말로써 당신들 자신을 미치게 만든다 .. 그러나 당신들이 완전히 이해할 때 ; 당신들이 한 짓을 당신들이 볼 때 ; 당신의 코를 질식시키고, 당신의 심장을 찢으면서 당신의 눈을 멀게 할 때, 그 때 - 그 때 - 오 하느님, 이 광경을 나로부터 거두소서 !’ 물론, 쇼(Shaw)의 연극에는 자신들이 하는 일을 정확하게 알았지만 그것을 하겠다고 결정한 다른 인물들이 있었다 ; 그리고 나중에 그 일을 후회하지 않았던 다른 인물들. 어떤 사람들은 자신들의 동료 인간이 화형장에서 불타는 것을 보기 싫어하고, 다른 사람들은 싫어하지 않는다. (많은 빅토리아 시대의 낙관주의자들에 의하여 무시된) 이 요점은, 결정의 결과에 대한 이성적 분석이 그 결정을 이성적이 되도록 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에, 중요하다 ; 결과는 우리의 판단을 결정하지 않는다 ; 결정을 하는 것을 항상 우리들이다. 그러나 구체적인 결과에 대한 분석과, 소위 우리들의 ‘상상’ 속에서 그 결과들이 명백하게 실현되는 것은 맹목적인 결정과 눈을 뜨고 내린 결정을 구별한다 ; 그리고 우리가 우리의 상상력을 매우 적게 사용하기 때문에, 우리는 너무나 흔히 맹목적으로 결정을 내린다. 쇼(Shaw)의 표현을 사용해서, 우리 자신을 말로써 미치게 만드는 가장 강력한 수단 하나인 예언철학에 의하여 우리가 도취된다면 이것은 특히 그러하다.
도덕이론의 결과에 대한 이성적이고 상상적인 분석은 과학적 방법에서 어떤 유사점을 지닌다. 그 까닭은 과학에서도 또한, 이론이 본질적으로 확신을 준다는 이유로 우리는 추상적인 이론을 수용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 우리는 오히려 실험에 의하여 보다 직접적으로 실험될 수 있는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결과를 우리가 조사한 다음에 그 이론을 수용하던지 거부하기로 결정한다. 그러나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과학적 이론의 경우에, 우리의 결정은 실험의 결과에 의존한다. 이 결과들이 이론을 확증하면, 우리는 더 나은 이론을 발견할 때까지 그 이론을 수용할 것이다. 그 결과들이 이론과 일치하지 않으면, 우리는 그 이론을 거부한다. 그러나 도덕 이론의 경우에, 우리는 다만 우리의 양심으로 그 이론의 결과와 마주할 수 있다. 그리고 실험의 결과가 우리 자신에게 의존하지 않은 반면, 우리의 양심의 결과는 우리 자신에게 달려있다.
어떤 의미에서 결과분석이 우리의 판단을 결정하지 않고 우리의 판단에 영향을 미칠는지를 내가 명백하게 밝혔기를 나는 희망한다. 그리고 우리가 결정해야 하는 두 가지 대안의 결과를 제시하면서, 나는 편파적일 것임을 독자에게 경고한다. 지금까지, 우리 앞에 놓인 도덕적 결정의 두 가지 대안을 제시하면서 - 그 결정은, 여러 가지 면에서, 윤리 분야에서 가장 근본적인 결정이다 - 내가 지닌 동정심을 숨기지 않았지만 불편부당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이제 나는 나에게 가장 중요하게 보이는, 그리고 그것들에 의하여 내 자신이 비이성주의를 배격하고 이성에 대한 신뢰를 수용하는 데 영향을 받은, 두 가지 대안들의 결과들에 대한 저 고찰을 제시하고자 한다.
우선 비이성주의의 결과를 검토하자. 비이성주의자는 이성보다는 감정과 열정이 인간 행동의 동기라고 주장한다. 그렇다 할지라도, 우리는 그것을 치료하기 위하여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하며, 우리는 가능한 한 큰 역할을 이성이 하도록 만들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이성주의자의 대답에, 비이성주의자는 이 자세가 절망적으로 비현실적이라고 (비이성주의자가 토론에 응한다면) 대답할 것이다. 그 까닭은 이 자세가 ‘인간 본성’의 취약점, 대부분의 인간이 지닌 허약한 지적(知的) 속성과 그 사람들이 지닌 감정과 열정에 대한 의존성을 고려하지 않기 때문이다.
감정과 열정에 대한 이 비이성적 강조가 궁극적으로 내가 범죄로서 오직 묘사할 수 있는 것을 초래한다는 것은 나의 확고한 신념이다. 이 견해에 대한 한 가지 이유는 이 자세가, 기껏해야 인간 존재의 비이성적 본성을 향한 유보의 자세이고 최악의 경우에는 인간 이성에 대한 경멸의 자세인데, 틀림없이 어떤 논증에서도 궁극적 중재자로서 폭력과 잔인한 힘의 도움을 초래한다는 것이다. 그 까닭은 논증이 발생하면, 원칙적으로 논증을 극복하는 데 도움을 줄 보다 건설적인 저 감정들과 열정들인 존경, 사랑, 공동의 대의에 대한 헌신, 기타 등등이 스스로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다면, 다르면서 덜 건설적인 감정들과 열정들인 공포, 증오, 질시 그리고 궁극적으로 폭력의 도움을 받는 것을 제외하고 비이성주의자에게 무엇이 남는가 ? 이 경향은 내가 생각하기에 비이성주의에 역시 내재한 또 다른 그리고 아마도 훨씬 더 중요한 자세, 다시 말해서, 인간의 불평등성에 대한 강조에 의하여 매우 크게 강화된다.
물론, 인간 개인은, 우리 세상 속의 다른 것들처럼, 매우 많은 면에서 매우 불평등하다는 것은 부인될 수 없다. 또한 이 불평등이 매우 중요하며 심지어 여러 면에서 매우 바람직하다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대량생산과 집단화의 발전이 인간이 지닌 불평등과 개성을 파괴함으로써 인간에게 반응할 것이라는 우려는 우리 시대의 악몽 중 하나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단지 우리가 인간을, 특히 정치적 문제에서, 평등하게 혹은 가능한 한 평등하게 취급하기로 결정해야 하는지 아닌지에 관한 문제와 관계가 없다 ; 다시 말해서, 평등한 권리와 평등한 대우에 대한 평등한 주장으로서 ; 그리고 이것은 우리가 정치적 제도를 거기에 따라서 구축해야 하는지의 질문과 관계가 없다. ‘법 앞에서의 평등’은 사실이 아니라 도덕적 결정에 기초한 정치적 요구이다 ; 그리고 그것은 - 아마도 거짓인 -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태어난다’는 이론과 완전히 별개이다. 이제 나에게는 불편부당성에 관한 이 인도주의적 자세를 채택하는 것이 이성주의를 지지하는 결정의 직접적인 결과라고 말하려는 의도는 없다. 그러나 불편부당성을 향한 경향은 이성주의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어서, 이성주의적 신조로부터 배제될 수 없다. 다시, 나에게는 비이성주의자가 평등주의적이거나 불편부당한 자세를 일관적으로 채택할 수 없다고 말하려는 의도가 없다 ; 그리고 비이성주의자가 일관적으로 그렇게 할 수 없다 할지라도, 그에게 일관적이어야 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나는 비이성주의적 태도는 평등주의에 반대되는 자세와 얽히게 됨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싶다. 이 사실은 비이성주의가 감정과 열정을 강조함과 관련되어 있다 ; 그 까닭은 우리는 모든 사람을 향하여 동일한 감정을 느낄 수 없기 때문이다. 감정적으로, 우리 모두는 사람을 우리에게 가까운 사람과 우리로부터 먼 사람으로 나눈다. 인류를 친구와 적으로 나누는 것은 매우 두드러진 감정적 분할이다 ; 그리고 이 분할은 ‘너의 적을 사랑하라 !’는 기독교 계명에서 심지어 인정된다. 심지어 이 계명에 따라서 사는 최고의 기독교도도 (‘유물론자’와 ‘이교도’를 향한 평균적인 훌륭한 기독교도의 태도에 의하여 밝혀지는 바와 같이 많지 않다), 모든 사람에 대하여 동등한 사랑을 느낄 수는 없다. 우리는 실제로 ‘추상적으로’ 사랑을 할 수는 없다 ; 우리는 우리가 알고 있는 사람만을 사랑할 수 있다. 그리하여 심지어 우리가 지닌 최고의 감정인 사랑 그리고 자비심의 도움은 단지 인류를 다양한 범주로 구분하는 경향을 지닐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은 더 낮은 단계의 감정과 열정의 도움을 받는다면 더 사실적일 것이다. 우리의 ‘자연스런’ 반응은 인류를 친구와 적으로 구분하는 것이리라 ; 우리 종족에, 우리의 정서적 공동체에 속하는 사람들과, 그 공동체 밖에 있는 사람들로 ‘ 신자(信者)와 불신자(不信者)로 ; 동포와 외국인으로 ; 계급 동지와 계급 적(敵)으로 ; 그리고 지도자와 피지도자로.
나는 전에 우리의 사고(思考)와 견해가 우리의 계급 상황에, 혹은 우리의 자연적인 이해관계에 달려있다는 이론이 틀림없이 비이성주의를 초래한다고 언급했다. 이제 나는 그 반대 또한 진실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싶다. 이성주의적 태도를, 이성과 논증과 다른 사람의 관점에 대한 존중을, 포기하는 것, 인간 본성의 ‘더 깊은’ 층에 대한 강조, 이 모든 것은 사고(思考)란 단지 이 비이성적인 심층부 속에 놓여있는 것을 다소 피상적으로 표명하는 것이라는 관점을 틀림없이 초래한다. 내가 믿는 바, 그것은 틀림없이 거의 항상 그의 사고(思考) 대신에 사고가(思考家)인 인간을 고찰하는 태도를 낳는다. 그것은 틀림없이 ‘우리는 우리의 혈액으로써 생각한다’, 혹은 ‘우리의 민족적 유산으로써’, 혹은 ‘우리 계급으로써’라는 믿음을 야기한다. 이 관점은 유물론적 형태나 고도로 정신적인 양상으로 제시될는지도 모른다 ; 우리는 ‘우리들의 인종으로써 생각한다’라는 아이디어는 아마도 ‘하느님의 은총으로써 생각하는’ 선택되거나 영감을 받은 아이디어에 의하여 대체될 것이다. 나는, 도덕적 근거로써, 이 차이점에 의하여 감동받기를 거부한다 ; 그 까닭은 이 모든 지적(知的)으로 건방진 관점 사이의 결정적인 유사점은 그 관점들이 사고(思考)를 그 자체의 장점에 기초하여 판단하지 않는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이성을 배격함으로써, 그 관점들은 인류를 친구와 적으로 분리한다 ; (플라톤이 말하는 바와 같이) 신(神)들과 함께 이성에 참여하는 소수와, 그렇지 못한 다수로 ; 가까이 있는 소수와 멀리 있는 다수로 ; 우리 자신이 지닌 감정과 열정을 해석할 수 없는 언어로 말하는 사람들과 우리의 말이 아닌 말을 지닌 사람들로. 우리가 이 짓을 하자마자, 정치적인 평등주의는 실제로 불가능해진다.
이제 정치적 생활에서, 다시 말해서 인간이 인간을 지배하는 힘과 관련된 문제의 분야에서, 반(反)평등주의적 자세를 채택하는 것은 내가 범죄적이라고 불러야 할 것일 뿐이다. 그 까닭은 그 채택이 다양한 범주의 사람들이 다양한 권리를 가지고 있다는 태도를 정당화시키기 때문이다 ; 주인은 노예를 노예화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지고 있다는 태도 ;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들을 자신들의 도구로서 사용할 권리를 가지고 있다는 태도. 궁극적으로, 그 채택은, 플라톤에게서와 같이, 살인을 정당화하는 데 사용될 것이다.
나는 인류를 사랑하는 비이성주의자들이 있다는, 모든 형태의 비이성주의가 범죄성을 초래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간과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성이 아니라 사랑이 지배해야 한다고 가르치는 사람은 증오에 의하여 통치하는 사람들 위한 길을 열어놓는다고 나는 주장한다 (내가 믿는 바, 소크라테스는 논증을 불신하거나 증오하는 것은 사람을 불신하거나 증오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고 자신이 제안했을 때, 이런 점을 보았다.) 이 점을 즉각 보지 못하는, 감정적 사랑의 직접 통치를 신뢰하는 사람들은 사랑은 그런 상태로 틀림없이 불편부당성을 촉진하지 않는다는 것을 고려해야 한다. 그리고 그런 사랑은 갈등을 없애지도 못한다. 그런 상태로의 사랑이 갈등을 해소할 수 없을 것임은 해롭지 않은 시험 사례를 고찰함으로써 증명될 수 있는데, 그 사례는 보다 심각한 사례의 대표적 사례로서 수용될 것이다. 톰은 극장을 좋아하고 딕은 춤추기를 좋아한다. 딕은 톰을 위하여 극장에 가기를 원하는 반면, 톰은 무도회에 가기를 사랑스럽게 주장한다. 이 갈등은 사랑에 의하여 해소될 수 없다 ; 오히려, 사랑이 커질수록, 갈등이 커지는 경향이 있다. 단지 두 가지 해결책이 있다 ; 하나는 감정의, 궁극적으로 폭력의 사용이고, 다른 하나는 이성을, 불편부당성을, 이성적 타협을 사용하는 것이다. 이 모든 것에는 내가 사랑과 증오의 차이를 알지 못한다는 것이나, 내가 삶은 사랑 없이도 살 가치가 있으리라고 생각한다는 것을 지적하려는 의도가 없다. (그리고 나는 사랑에 대한 기독교적 개념이 순전히 감정적 방식으로 의미하는 것이 아님을 인정할 준비가 철저히 되어있다.) 그러나 어떤 감정도, 심지어 사랑도, 이성에 의하여 통제되는 제도의 지배를 대체할 수 없다고 나는 주장한다.
이것은, 물론, 사랑의 지배에 대한 개념에 반대하는 유일한 주장이 아니다.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그를 행복하게 만들려는 소망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것은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가 내린 사랑의 정의[定義]이다.) 그러나 모든 정치적 이상(理想) 중에서, 사람을 행복하게 만들려는 이상이 아마도 가장 위험한 이상이다. 그 이상은,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의 행복을 위하여 우리들에게 가장 중요하게 보이는 것을 깨닫게 하기 위하여, 우리가 지닌 ‘더 높은’ 가치를 다른 사람에게 부과하려는 시도를 변함없이 불러온다 ; 말하자면, 그들의 영혼을 구하기 위하여. 그 이상은 유토피아주의와 낭만주의를 초래한다. 우리 모두는 모든 사람이 우리의 꿈으로 된 아름답고 완벽한 공동체 속에서 행복하리라고 확신한다. 그리고 의심할 바 없이, 우리 모두가 서로 사랑할 수 있다면 지구상에는 천국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9 장에서) 전에 말한 바와 같이, 지구상에 천국을 만들려는 시도는 변함없이 지옥을 만들어낸다. 그 시도는 불인(不仁)을 낳는다. 그 시도는 종교전쟁과, 종교재판을 통한 영혼구원을 낳는다. 그리고 내가 믿는 바, 그 시도는 우리가 지닌 도덕적 의무를 완전히 오해하는 데에 근거한다.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돕는 것은 우리의 의무이다 ; 그러나 다른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드는 것은, 우리에게 달려있지 않기 때문에 그리고 우리가 그 사람들에 대하여 그런 우호적 의도를 지닌 그 사람들의 개인생활을 침범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우리의 의무가 될 수 없다. (유토피아적과 반대로) 점진적 방법에 관한 정치적 요구는 고통에 대항하는 싸움은, 다른 사람들의 행복을 돌볼 권한은 그들의 친구라는 가까운 무리에 국한된 특권으로 여겨져야 하는 반면, 의무로 여겨져야 한다는 판단과 일치한다. 친구들의 경우에, 우리는 아마도 우리가 지닌 가치 기준을 - 예를 들어, 음악에 관한 우리의 선호를 - 부과하려고 노력할 특정 권리를 가지고 있을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가 믿는 바, 그들의 행복에 그렇게 많이 기여할 수 있는 가치의 세상을 그들에게 열어주는 것이 우리의 의무라고 느끼기조차 할지도 모른다.) 우리들이 지닌 이 권리는 그 사람들이 우리를 배척할 수 있다는 조건으로만, 그리고 그 이유로만 존재한다 ; 그 까닭은 우정이 끝장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지닌 가치 척도를 타인들에게 부과하는 정치적 수단의 사용은 매우 다른 문제이다. 아픔, 고통, 불의(不義), 그리고 이것들의 예방, 이런 것들은 공공 도덕의 영원한 문제이며, (벤담[Bentham]이 말했을 바와 같이) 공공 정책의 ‘의제’이다. ‘더 높은’ 가치는 거의 대부분 ‘비(非)의제’로서 간주되어서, 자유방임의 영역에 맡겨져야 한다. 그리하여 우리는 아마도 다음과 같이 말할 것이다 : 여러분의 적을 도우라 ; 그들이 당신을 증오할지라도 고민에 쌓인 사람들을 도우라 ; 그러나 여러분의 친구들만을 사랑하라.
이것은 비이성주의에 반대하는 경우의, 나로 하여금 그 반대 태도 다시 말해서 비판적 이성주의를 채택하도록 이끌었던 결과들의, 한 부분일 따름이다. 논증과 경험을 강조하는 이 후자의 자세는, ‘내가 틀릴지도 모르고 당신이 옳을지도 모르며, 노력하여 우리는 진실에 더 다가갈 것이다’라는 그 장치와 함께, 이전에 언급된 바와 같이, 과학적 자세와 밀접하다. 그 자세는 모든 사람은 실수를 저지르기 쉽다는 개념과 연관되어 있는데, 그 개념은 본인에 의하여, 혹은 다른 사람들에 의하여 혹은 다른 사람들의 비판의 도움을 받아서 본인에 의하여 발견될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그 자세는 불편부당성에 대한 개념을 제시한다. (이것은 앞 장에서 분석된 바와 같은 ‘과학적 객관성’이라는 개념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그 자세가 지닌 이성에 대한 신뢰는 우리 자신의 이성에 대한 신뢰일 뿐만 아니라, 또한 - 그리고 훨씬 더 - 다른 사람이 지닌 이성에 대한 신뢰이다. 그리하여 이성주의자는, 자신이 지적(知的)으로 타인들보다 우월하다고 믿을지라도, 자신의 지성이 타인들이 지닌 지성보다도 우월하다면 (이것은 자신이 판단하기 어렵다) 자신과 타인들의 실수로부터 뿐만 아니라 비판으로부터 자신이 배울 수 있는 한에서만 그렇다는 것과, 사람은 이런 의미에서 다른 사람들과 그들의 주장을 진지하게 고려하면 배울 수 있다는 것을, 의식하고 있기 때문에 권위에 대한 모든 주장을 거부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성주의는 타인도 자신의 말이 경청될 권리와, 자신의 주장을 옹호할 권리를 가지고 있다는 생각과 관련되어 있다. 그러므로 이성주의는 적어도 스스로 불인(不仁)하지 않은 모든 사람들이 지닌 관용에 대한 주장을 인정함을 의미한다. 사람은 다른 사람이 자신의 주장을 처음에 들을 자세를 취할 때 살인을 하지 않는다. (칸트는 ‘황금률’을 이성이라는 개념에 근거했을 때 옳았다. 확실히, 어떤 윤리적 원칙의 옳음을 증명한다는 것, 혹은 심지어 우리가 과학적 진술을 지지하여 우리가 주장하는 바로 그 방식으로 윤리적 원칙을 지지하여 주장을 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윤리는 과학이 아니다. 그러나 윤리에 대한 ‘이성적인 과학적 토대’가 없을지라도, 과학에 대한 그리고 이성주의에 대한 윤리적 토대는 있다.) 또한 불편부당이라는 개념은 책임이라는 개념을 낳는다 ; 우리는 주장에 귀를 기울여야 할 뿐만 아니라, 우리의 행동이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는 곳에서 응해야 할, 대답해야 할 의무를 지니고 있다. 궁극적으로, 이런 방식으로, 이성주의는 비판의 자유, 사고(思考)의 자유, 그리고 그리하여 인간의 자유를 보호할 사회제도의 필요성을 인정하는 것과 연관되어 있다. 그래서 이성주의는 이 제도를 뒷받침하는 도덕적 의무 같은 것을 설정한다. 이것이 이성주의가, 자유를 위하여 그리고 자유를 이성으로 통제하기 위하여 사회의 이성화를 요구하며, 인도주의적 의미에서, 실용적인 사회공학을 - 물론, 점진적 공학을 - 정치적으로 요구하는 것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는 이유이다 ; ‘과학’에 의해서가 아니라, 플라톤적 사이비-이성적 권위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체의 한계를 깨달아서 그리하여 다른 사람을 존중하고 - 심지어 행복 속으로도 - 타인을 강요하려고 열망하지 않는 소크라테스적 이성에 의하여 (이 문장에서 저자는 ‘과학’이라고 인용부호를 사용하여 표기함으로써 많은 비이성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거짓 ‘과학’을 암시적으로 비판하고 있다. - 역자 주). 게다가, 이성주의를 채택함은 의사소통과 관련한 공동의 매체인 이성에 관한 공동의 언어가 있음을 의미한다 ; 이성주의를 채택함으로써 그 언어를 향한 도덕적 의무 같은 것, 그 언어가 지니는 명료성의 기준을 유지하고 그 언어의 기능을 논증의 도구로서 보유할 수 있는 그런 방식으로 언어를 사용할 의무가 확립된다. 다시 말해서, 그 언어를 분명하게 사용하는 것 ; 그 언어를, 우리들의 교육자 대부분이 쓰는 사악한 낭만적 횡설수설이 의미하는 바와 같이 ‘자기표현’의 수단으로서 라기보다는, 이성적 의사소통의, 의미 있는 정보의 도구로서 사용하는 것. (그 횡설수설이 ‘이성’에 관한 헤겔의 집단주의를 ‘감정’에 관한 과도한 개인주의와 결합시키는 것은 현대 낭만적 발작증상의 특징이다 ; 그리하여 의사소통 대신에 자기표현의 수단으로서 언어를 강조한다. 물론 양자 모두는 이성에 대한 반역의 일부이다.) 그리고 이성주의를 채택함은 우리들의 다양한 모국어가 이성적인 한, 서로 통역될 수 있다는 사실에 의하여 인류가 통합되어 있음을 인정하는 것을 의미한다.
보통 ‘상상력’이라고 불리는 것을 사용할 준비된 자세에 대한 이성주의적 자세의 관계에 관하여 몇 마디 말이 추가될 것이다. 상상력은 감정과 밀접한 관계가 있어서 비이성주의와도 긴밀하다고, 이성주의에는 오히려 비상상적인 무미건조한 학풍고집으로 향하는 경향이 있다고 자주 상정(想定)된다. 나는 그런 관점이 어떤 심리학적 토대를 지니고 있는지 알지 못해서 오히려 그 관점을 의심한다. 그러나 나의 흥미는 심리학적이라기보다는 제도적이어서, (방법적 관점에서 뿐만 아니라) 제도적 관점에서 고찰하면, 비이성주의가 틀림없이 상상력 사용을 위축시키는 반면, 이성주의는 상상력이 필요하기 때문에 상상력 사용을 틀림없이 조장하는 듯이 보인다. 비이성주의가 독단주의로 향하는 반면 (독단주의에는 논증이 없고, 전부 수용이나 전부 거부를 제외하고 남아있는 것이 없다), 이성주의가 비판적이라는 바로 그 사실은 이 방향으로 통한다. 독단주의는 상상력을 억압하는 반면, 비판은 항상 어느 정도의 상상력을 요구한다. 유사하게, 과학적 탐구와 기술적 건설과 발명은 상상력을 매우 많이 사용하지 않고는 상상될 수 없다 ; 사람은 (인상적인 말의 끝없는 반복이 의도를 이룩하는 듯 보이는 예언적 철학 분야와 반대로) 이 분야에서 새로운 것을 제공해야 한다. 적어도 동등하게 중요한 것은 평등주의를 그리고 불편부당성을 실제로 적용하는 데서 상상력이 하는 역할이다. ‘내가 틀렸고 당신이 옳은지도 모른다’는 이성주의자가 지니는 기본적 자세는, 실제로 사용될 때, 그리고 인간의 갈등이 포함될 때, 우리가 지닌 상상력이 실제로 노력할 것을 요구한다. 나는 사랑과 동정심의 감정이 때때로 유사한 노력을 야기할 것임을 인정한다. 그러나 우리가 수많은 사람들을 사랑하고 그들과 함께 고통을 당한다는 것은 인간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나는 주장한다 ; 그리고 그것이 우리가 지닌 돕는 능력이나 바로 이 감정들의 강도를 궁극적으로 파괴할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도 나에게 그다지 바람직해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상상력의 뒷받침을 받는 이성의 덕택으로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들, 우리가 보지 못할 사람들이 우리 자신과 같다는 것과, 그들 서로의 관계가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에 대한 우리의 관계와 같다는 것을, 우리는 이해할 수 있다. 추상적인 인류 전체를 향한 직접적인 감정적 자세는 나에게 가능할 것 같지 않게 보인다. 우리는 어떤 구체적인 개인 속에서만 인류를 사랑할 수 있다. 그러나 사고(思考)와 상상력을 사용함으로써, 우리는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모든 사람을 도울 준비가 될 것이다.
내가 믿는 바, 이 모든 고찰은 이성주의와 인도주의 사이의 연관성은 매우 긴밀하다는 것과, 틀림없이 비이성주의가 반(反)평등주의 및 반(反)인도주의적 자세와 상응하게 얽혀있는 것보다 훨씬 더 긴밀하다는 것을 증명한다. 가능한 한 넓게 이 결과는 경험에 의하여 입증된다고 나는 믿는다. 이성주의적 태도는 근본적으로 평등주의적이며 인도주의적인 관점과 결합되어 있는 듯이 보인다 ; 다른 한편으로, 비이성주의는 대부분의 경우에 적어도, 가끔 인도주의와 또한 결합된다 할지라도, 묘사된 반(反)평등주의적 경향 몇 가지를 드러낸다. 내가 주장하는 요점은 후자의 결합이 결코 확고하지 않다는 것이다.
IV
내가 행동하는 대로 결정하도록 만들었던 이성주의와 비이성주의의 저 결과들을 나는 분석하려고 노력했다. 이 결심이 주로 도덕적 결심이었음을 나는 반복해서 말하고 싶다. 그것은 논증을 진지하게 생각하려고 노력하는 결심이다. 이것은 그 두 가지 관점 사이의 차이점이다 ; 그 까닭은 비이성주의 또한 이성을 사용하지만, 어떤 의무감도 없기 때문이다 ; 비이성주의에는 자기가 원하는 대로 이성을 사용하거나 배격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내가 도덕적으로 올바르다고 생각할 수 있는 유일한 자세는 우리가 타인과 우리 자신을 이성적으로 대우하는 것이 타인들에게 기인함을 인정하는 자세라고 나는 믿는다.
이런 방식으로 고찰되면, 비이성주의에 대한 나의 반격은 도덕적인 공격이다. 우리가 지닌 이성주의가 자신의 취향에 너무 진부한 것이라고 아는, 그리고 최신의 신비로운 지적(知的) 유행을 탐색하는 지식인은, 그 유행을 중세의 신비주의를 찬양하는 데서 발견하는데, 동료 인간들에게 자신의 의무를 수행하지 않고 있다고 사람들은 우려한다. 그는 자신과 자신이 지닌 미묘한 취향이 우리의 ‘과학적 시대’보다, 그 어리석은 노동 분업과 그 ‘기계화’와 ‘물질화’를 심지어 인간의 사고(思考) 분야까지 운반하는 ‘산업화의 시대’보다, 우수하다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자신에게는 현대 과학 속에 내재한 도덕적 힘을 감상할 능력이 없음을 그는 드러낼 따름이다. 내가 공격하는 자세는 아마도 내가 A. 켈러(Keller)에게서 가져오는 다음 구절에 의하여 예시될 수 있다 ; 과학에 대한 이 낭만적 적대감의 전형적 표현으로 나에게 보이는 구절 : ‘인간의 영혼이 자신의 신비롭고도 종교적인 능력을 되찾고 있으며, 새로운 신화를 창조함으로써, 삶의 물질화와 기계화에 대하여 항의하고 있는 새로운 시대를 우리는 시작하고 있는 듯싶다. 정신은 기술자로서, 운전수로서 인류에 봉사해야 했을 때 고통을 당했다; 정신은, 지식적 지혜와 과학적 프로그램만큼 완전히 현명하고 신뢰성이 있어 보이지만 지식적 지혜와 과학적 프로그램보다 더 영감을 주며 자극적으로 보이는 꿈의 명령과 지도에 복종하면서, 시인과 예언자로 다시 깨어나고 있다. 혁명의 신화는 부르주아 사회와 낡고 맥 빠진 문화의 상상력이 없는 진부성과 자기만족적 자족(自足)에 대항하는 반발이다. 그 신화는 모든 안전을 상실하여, 구체적인 사실 대신에, 꿈을 시작하는 사람들의 모험이다.’ 이 구절을 분석하면서, 나는 먼저, 그러나 다만 지나가는 길에, 그 글이 지니는 전형적인 역사주의적 특징과 그 글의 도덕적 미래주의 (‘새로운 시대에 들어간다’, 낡고 맥 빠진 문화’, 기타 등등 [앞에서 저자는 A. 켈러의 글에서 ‘새로운 시대를 시작한다 즉, entering upon a new era로 인용하고 여기서는 새로운 시대에 들어간다 즉, entering a new era라고 인용한다. 다소 단어의 의미라 달라진다. 역자 주].)에 주목하고 싶다. 그러나 그 구절이 사용하는 언어-마술의 기교를 깨닫기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은 그 구절이 말하는 바가 사실인지를 질문하는 것이다. 우리의 영혼이 우리 생활의 물질화와 기계화에 대하여 항의한다는 것, 우리의 영혼이 중세기를 특징짓는 굶주림과 질병을 통한 무수한 고통에 대한 싸움에서 우리가 추진했던 과정에 대하여 항의한다는 것은 사실인가 ? 정신이 기술자로서 인류에 봉사해야 했을 때 고통을 받았다는 것은 사실이며, 정신은 농노(農奴)나 노예로서 일하는 것이 더 행복했을까 ? 순전히 기계적인 일이라는, 의미가 없는 것처럼 느껴지고 노동자의 창조적 능력을 파괴하는 고역이라는 매우 심각한 문제를 과소평가할 의도가 나에게는 없다 ; 그러나 유일하게 실제적인 희망은, 노예제도와 농노제도에로의 회귀가 아니라, 기계류로 하여금 이 기계적인 고역을 떠맡도록 하는 데 달려있다. 증가된 생산성은 인간화하는 노동의, 한층 더 노동일(勞動日)을 감축하는 유일하게 합당한, 희망이라고 주장하는 데서 마르크스는 옳았다. (게다가, 정신이 기술자로서 인류에 봉사해야 할 때 항상 고통을 겪는다고 나는 생각하지 않는다 ; 아주 흔히, 훌륭한 발명가과 훌륭한 과학자를 포함하는 ‘기술자들’이 그 봉사를 오히려 즐겼으며, 그들도 신비주의자만큼 모험적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리고 우리의 동시대인 예언자들, 몽상가들, 그리고 지도자들이 꾼 것과 같은 ‘꿈의 명령과 지도’가 실제로 ‘지식적 지혜와 과학적 프로그램과 완전히 동일하게 현명하고 신뢰할 수’ 있다고 누가 믿겠는가 ? 그러나 우리가 여기서 무엇을 마주보고 있는지를 알기 위하여, 우리에게는 ‘혁명의 신화’에게로 돌아설 필요만 있다. 혁명의 신화는 (내가 10 장에서 묘사한 바와 같이) 종족의 해체에 의하여 그리고 문명의 긴장에 의하여 초래된 낭만적 발작증세와 급진주의의 전형적인 발로이다. 기독교적 책임의 대체물로서 신화창조를 권유하는 이런 종류의 ‘기독교’는 종족적 기독교이다. 그것은 인간적이라는 십자가를 지니기를 거부하는 기독교이다. 이 거짓 예언자들을 경계하라 ! 그들이, 깨닫지도 못하고, 추구하는 것은 종족주의가 지녔던 잃어버린 통합이다. 그리고 그 거짓 예언가들이 옹호하는 닫힌사회로의 회귀는 둥지로의, 그리고 동물로의 회귀다.
이런 종류의 낭만주의에 매달리는 사람들이 그런 비판에 어떻게 반응할지를 고찰하는 것이 유용할 것이다. 논증은 제시되지 않는 경향이 있다 ; 이성주의자와 그렇게 깊은 문제를 토론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가장 개연성이 있는 반응은, 그 영혼이 아직 ‘그들의 신비적인 능력을 얻지’ 못한 사람들과, 그리고 그 영혼이 그런 능력을 소유한 사람들에게 공통적인 언어는 없다는 주장과 함께, 위압적인 태도로 물러서는 것이리라. 이제 이 반응은 (앞 장에서 언급된) 적들의 주장에 답변을 함으로써가 아니라 적들의 억압 때문에 자기가 정신분석을 수용할 수 없다고 지적함으로써 자신의 적들을 무찌르는 정신분석가의 반응과 유사하다. 그 반응은 또한 자신의 적들은 자기들의 이데올로기 총체 때문에 지식사회학을 수용하지 못한다고 지적하는 사회분석가의 반응과 비슷하다. 이 방식은, 내가 전에 인정한 바와 같이, 그 방식을 실제로 사용하는 사람들에게는 훌륭한 재미거리이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그 방식이 인간을 우리 가까이 있는 사람들과 우리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들로 비이성적으로 분할하는 것을 틀림없이 초래할 것임을 보다 명백하게 알 수 있다. 이 분할은 모든 종교에서 나타나지만, 모하메드교, 기독교, 혹은 이성적인 신앙 속에서 비교적 해롭지 않으며, 그 종교들 모두는 모든 사람에게서 잠재적인 개종자를 보며, 동일한 것이 정신분석에 대해서도 진술될 것인데 정신분석은 모든 사람에게서 치료의 잠재적 대상을 본다 (마지막의 경우에 치료를 위한 비용이 삼각한 걸림돌이 된다는 것뿐이다). 그러나 그 분할은 우리가 지식사회학으로 나아갈 때 점점 더 해로워진다. 사회분석가는 특정 지식인만이 자신들이 지닌 이데올로기 총체를 없앨 수 있어서 ‘자신들의 계급으로써 생각하기’로부터 해방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 그리하여 그는 인간의 잠재적이며 이성적인 통합이라는 아이디어를 포기하여 자신을 완전히 비이성주의에게 맡겨버린다. 그리고 이 상황은 우리가 이 이론의 생물학적 혹은 자연주의적 해석으로, 우리는 ‘우리의 피로써 생각한다’나 우리는 ‘우리의 인종으로써’ 생각한다는 종족적 교설로 나아갈 때 훨씬 더 악화된다. 그러나 더 미묘하기 때문에 적어도 동등하게 위험한 것은 종교적 신비주의의 옷을 입고 나타날 때의 동일한 생각이다 ; 시인이나 음악가의 신비주의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자신과 자신의 추종자들에게 자신들의 사고(思考)는 특별한 은총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소유하지 못한 ‘신비적이고 종교적인 능력’을 부여받았다고 설득하며, 그리하여 자신들은 ‘하느님의 은총으로써 사고한다’고 주장하는 헤겔화하는 지식인들의 신비주의로 나타난다. 하느님의 은총을 받지 못한 사람들을 부드럽게 암시하는 이 주장은, 인류의 잠재적인 정신적 통합에 대한 이 공격은, 내가 생각하기에, 그것이 스스로를 겸손하며 경건하고 기도교적이라 믿는 만큼 건방지고 불경스러우며 반(反)기독교적이다.
꿈속으로 도망치는 신비주의의 그리고 허장성세 속으로 도망치는 예언적 철학의 지적(知的) 무책임과 반대로, 현대 과학은 우리의 지성에게 실제 실험이라는 규율을 부과한다. 과학적 이론은 그 이론의 실제 결과로써 실험될 수 있다. 과학자는, 자신의 분야에서, 자기가 말하는 것에 책임을 진다 ; 여러분은 과학자가 거두는 열매로써 과학자를 알 수 있으며, 그리하여 그 과학자를 거짓 예언자와 구분한다. 과학의 이 면(面)을 알아보았던 소수의 사람 중 한 명이 기독교 철학자 J. 맥머레이(Macmurray)였다 (다음 장에서 밝혀질 것과 같이, 역사적 예언에 관한 그의 견해에 나는 크게 동의하지 않는다) : 그는 말한다, ‘과학 자체는, 탐구라는 고유한 분야에서, 이론과 실제라는 분리된 통합을 복원하는 일에 관한 방법을 사용한다.’ 내가 믿는 바, 이것이 신비주의의 눈에는 왜 그렇게 거슬리는지의 이유인데, 신비주의는 대신에 신화를 만들어냄으로써 실제를 회피한다. ‘과학은, 자신의 분야에서, 기독교의 산물이며 지금까지 기독교의 가장 합당한 표현이다 ; .. 인종이나 국적이나 성(性)의 국경이 없는 협동적 진보를 위한 과학의 능력, 예언하는 과학의 능력과 통제하는 과학의 능력은 유럽에서 기독교에 대한 가장 풍부한 표현이다’라고 맥머레이는 다른 곳에서 말한다. 나는 이 말에 전적으로 동의하는데 그 까닭은 우리의 서구문명이 그 이성주의를, 인간의 이성적 통합과 열린사회에 대한 서구문명의 믿음을, 특히 서구문명의 과학적 전망을, 모든 인간의 형제애에 대한, 그리고 지적(知的) 정직성과 책임에 대한 고대 소크라스테스적이고 기독교적인 믿음에 빚지고 있다고 나는 또한 믿기 때문이다. (과학의 도덕성에 반대하는 흔한 주장은 과학의 많은 열매가 나쁜 목적으로, 예를 들어, 전쟁에서 쓰인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주장은 진지한 고찰을 받을만하지 않다. 태양 아래는 오용될 수 없는 것이 없고, 오용되지 않은 것도 없다. 심지어 사랑도 살인의 도구가 될 수 있다 ; 그리고 평화주의도 공격적 전쟁의 무기 중 하나가 될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 모든 민족적 적대감과 공격에 대하여 책임이 있는 것은 이성주의가 아니라 비이성주의라는 것은 너무나 명백하다. 십자군 전후로 너무나 많은 종교적인 침공이 있었고, ‘과학적’ 목적 때문에 과학자들에 의하여 고무되어 촉발된 어떤 전쟁도 나는 알지 못한다.)
인용된 구절에서, 맥머레이는 자신이 높이 평가하는 것은 ‘탐구와 관련된 그 자체의 고유한 분야에서의’ 과학이라는 것을 강조함이 관찰되었을 것이다. 이 강조가 특히 귀중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 까닭은 보통 에딩튼(Eddington)과 진즈(Jeans)의 신비주의와 관련하여, 현대과학은 19세기의 과학과 반대로 이 세상의 신비를 지금 인정하기 때문에 더 겸손해졌다고 오늘날 사람들은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견해는, 내가 믿는 바, 완전히 빗나간 것이다. 예를 들어, 다윈(Darwin)과 파라데이(Faraday)는 어떤 사람만큼 겸손하게 진리를 추구했고, 그들이 언급된 두 명의 위대한 동시대 천문학자보다 훨씬 더 겸손했다는 것을 나는 의심치 않는다. 그 까닭은 이들이 ‘탐구와 관련된 그 자체의 고유한 분야에서’ 위대하다 할지라도, 그들은 자신들의 활동을 철학적 신비주의의 영역까지 확대함으로써 자신이 지녔던 겸손을 증명하지 않는다고 내가 믿기 때문이다. 더 일반적으로 말해서, 그러나, 정말로 사실은 과학자들이, 과학의 진보는 주로 오류의 발견을 통해서이기 때문에, 그리고 일반적으로 우리가 더 많이 알수록 우리는 더 분명하게 우리가 알지 못하는 것을 깨닫기 때문에, 점점 더 겸손해지고 있다는 것이리라. (과학의 정신이란 소크라테스의 정신이다.)
나는 주로 이성주의와 비이성주의 사이의 갈등에 관한 도덕적 면을 다루고 있지만, 내가 그 문제에 관한 더 ‘철학적’ 면을 간단하게 다루어야 한다고 나는 느낀다 ; 그러나 나는 내가 이 면을 여기서는 하찮다고 여긴다는 것을 분명히 하고 싶다. 내가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비판적 이성주의자는 다른 방식으로 비이성주의자에게 또한 역공을 가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세상의 더 심오한 신비에 대한 자신의 존경과 (변죽만 울리는 과학자와 반대로) 그 신비를 자신이 이해함을 자랑하는 비이성주의자가 실제로 세상의 신비를 존경하지도 않고 이해하지도 못하며, 값싼 합리화로 자신을 만족시킨다고 이성주의자는 주장할는지도 모른다. 그 까닭은 비이성적인 것을 이성화하려는 시도가 아니라면 신화라는 것이 무엇이라는 말인가 ?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누가 신화에 더 큰 존경을 보내는가, 항상 사실에 복종할 준비가 되어있고 심지어 자신의 가장 과감한 업적도 후배들을 위한 디딤돌에 지나지 않을 것임을 항상 인식하고 있으면서 신화를 한걸음씩 밝히는데 헌신하는 과학자인가, 아니면 어떤 실험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자유롭게 아무 것이나 주장하는 신비주의자인가 ? 그러나 이 의심스러운 자유에도 불구하고, 신비주의자들은 끊임없이 똑같은 일을 반복한다. (그것은 잃어버린 종족적 천국에 대한 신화로 문명의 십자가를 지니기를 발작적으로 거부하는 것이다.) 신비적 시인인 F. 카프카(Kafka)가 절망적으로 쓴 바와 같이, 모든 신비주의자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이해될 수 없다고, 그리고 우리는 전에 알고 있었다고 .. 말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비이성주의자는 이성화될 수 없는 것을 이성화하려고 노력할 뿐만 아니라, 완전히 오류에 빠져있기도 하다. 그 까닭은 이성적인 방법으로 접근될 수 없는 것은 독특하고 고유하고 구체적인 개체이지 추상적인 보편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과학은 풍경의, 예를 들어, 인간의 일반적인 형태를 묘사할 수 있지만, 한 가지의 개별 풍경, 즉 단 한 명의 개별 인간을 모두 설명할 수는 없다. 보편적인 것, 전형적인 것은, 과학적 추상의 산물인 한, 이성의 영역일 뿐만 아니라, 주로 이성의 산물이기도 하다. 그러나 독특한 개인과 그의 독특한 행동과 경험과 다른 개인에 대한 관계는 완전히 이성화될 수 없다. 그래서 인간관계를 중요하게 만드는 것은 독특한 개성의 바로 이 비이성적 영역인 것으로 보인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예를 들어, 그들 자신과 그들의 삶이 어떤 의미에서도 독특하지 않고 모든 면에서 한 계급 사람들의 전형적인 것으로 그들이 이 계급이 속하는 모든 사람들의 모든 행동과 경험을 정확하게 반복한다면, 자신들의 삶을 살아갈 가치가 있게 만드는 것이 크게 파괴될 것이라고 느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의 삶을 살아갈 가치가 있게 만드는 것은 우리 경험의 독특함으로, 풍경에 대한, 석양에 대한, 인간 얼굴의 표현에 대한 독특한 경험이다. 그러나 플라톤 시대 이후, 독특한 개인이 지닌 비이성에 관한 이 느낌과, 개별인간에 대한 우리의 독특한 관계에 관한 이 느낌을 다른 분야, 즉 과학의 분야에 고유하게 속하는 분야인 추상적인 보편적인 것들의 분야로 신비주의가 이전시킨 것은 모든 신비주의의 특징이었다. 신비주의자가 이전시키려고 노력하는 것은 이 감정이라는 것은 의심할 바 없다. 신비주의가 쓰는 용어인, 신비적인 결합, 아름다움에 대한 신비적인 직감, 신비적인 사랑은 항상 개별 인간들 사이의 영역으로부터, 그리고 특히 성적(性的) 사랑의 경험으로부터 차용되었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이 느낌이 신비주의에 의하여 추상적인 보편적인 것으로, 본질로, 형상이나 이데아로 이전된다는 것 또한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 신비적 자세 뒤에 서있는 것은 다시 종족의 잃어버린 통합이요 가부장적 가정이라는 피난처 속으로 돌아가서 그 피난처의 경계를 우리 세상의 경계로 만들려는 소망이다. ‘제한된 전체로서 세상에 대한 느낌은 신비적인 느낌이다’라고 비트겐슈타인(Wittgenstein)은 말한다. 그러나 이 전체주의적이고 보편주의적인 비이성주의는 위치가 잘못되었다. ‘세계’ 그리고 ‘전체’ 그리고 ‘자연’, 이 모든 것은 추상이며 우리가 지닌 이성의 산물이다. (이것이 신비적인 철학자와 이성화하지 않는, 추상을 사용하지 않고 자신의 상상 속에서 구체적인 개인과 독특한 경험을 창조하는 예술가를 구분한다.) 요컨대, 신비주의는 비이성적인 것을 이성화하려고 시도한다, 그리고 동시에 신비주의는 잘못된 장소에서 신비를 구한다 ; 그리고 신비주의는 집단을, 그리고 선택된 자들의 융합을 꿈꾸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데 그 이유는 모든 개별 인간은 본질적으로 목적이라는 것을 깨닫는 사람들이 직시해야 하는 어렵고 실제적인 임무를 신비주의가 감히 직시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과학과 종교 사이의 19세기 갈등은 대체된 것으로 나에게 보인다. ‘무비판적인’ 이성주의가 모순적이기 때문에, 문제는 지식과 신앙 사이의 선택이 될 수 없고 두 종류의 신앙 사이의 선택이 될 수 있을 따름이다. 새로운 문제는 : 어느 것이 올바른 신앙이고 어느 것이 잘못된 신앙인가 ? 내가 보여주려고 했던 것은 우리가 직면한 선택은, 이성과 인간 개인에 대한 신념과 신비적인 능력으로써 집단에 결합된 인간의 신비적인 능력에 대한 신념 사이에 있다는 것이다 ; 그리고 이 선택은 동시에 인류의 통합을 인정하는 자세와 인간을 친구와 적으로, 주인과 노예로 나누는 자세 사이의 선택이라는 것.
현재 목표를 위해서, 이성주의를 지지하기로 결정한 나의 동기와 현재 매우 유행하는 비이성주의와 신비적인 지식주의 속에서 내가 우리 시대의 미묘한 지적(知的) 질병을 보는 이유뿐만 아니라 ‘이성주의’와 ‘비이성주의’라는 용어를 설명하기 위하여 충분한 언급이 있었다. 그것은 너무 진지하게 고찰될 필요가 없는 질병이며, 피상적 이상이 아니다. (과학자들은, 극소수의 예외와 함께, 특별이 이 질병이 없다.) 그러나 그 피상성에도 불구하고, 사회적 및 정치적 사상의 분야에서의 그 영향력 때문에, 그것은 위험한 질병이다.
V
그 위험을 예시하기 위하여, 나는 우리 시대의 가장 영향력이 있는 비이성주의적 권위 중에서 두 가지를 간단하게 비판하겠다. 첫째는 A. N. 화이트헤드(Whitehead)인데 수학에서의 그의 업적으로, 그리고 가장 위대한 동시대의 이성주의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Bertrand Russell)과의 협력으로 유명하다. 화이트헤드는 역시 자신을 이성주의 철학자로 여긴다 ; 그러나 헤겔도 그랬는데, 화이트헤드는 헤겔에게서 많은 것을 빌려왔다 ; 정말로, 그는 자신들이 얼마나 많이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뿐만 아니라) 헤겔에게서 빌려왔는지를 알고 있는 소수의 신(新)헤겔주의자의 한 명이다. 의심할 바 없이, 화이트헤드는, 칸트의 열렬한 항의에도 불구하고, 논증을 당당하게 경멸하는 장엄한 형이상학 체계를 구축하는 용기를 지녔다.
먼저 화이트헤드 자신의 저서 과정과 실재(Process and Reality)에 의하여 제시되는 소수의 이성적인 주장 중 하나인 자신의 사변적인 철학적 방법을 (그가 ‘이성주의’라고 부르는 방법) 방어하는 주장을 고찰하자. 그는 이렇게 쓴다, ‘너무 야망적이라는 것이 사변적 철학에 대한 반박이었다. 이성주의는 그것에 의하여 특정 과학의 한계 안에서 진보가 만들어지는 방법이라고 인정된다. 그러나 이 제한적인 성공은 사물의 일반적인 특성을 표현하는 야심 찬 기획을 공식화하는 시도를 부추겨서는 안 된다고 주장된다. 이 비판에 대한 한 가지 주장되는 정당화는 바람직하지 못한 성공이다 ; 유럽 사상은 포기되고 화해가 이루어지지 않은 형이상학적 문제로 뒤덮여있는 것으로 제시된다 .. (그러나) 동일한 기준이 과학에 바람직하지 못한 성공을 붙일 것이다. 우리가 17세기의 물리학을 지니고 있지 않은 것과 같이 우리는 그 세기의 데카르트 철학도 지니고 있지 않다 .. 합당한 시험은 완결성에 대한 시험이 아니라 진보에 대한 시험이다.’ 이제 이것은 그 자체로 분명히 완벽하게 합리적이고 심지어 그럴싸한 주장이다 ; 그러나 그것은 유효한가 ? 그것에 대한 분명한 반박은 물리학이 진보하는 반면 형이상학은 진보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물리학에는, ‘진보에 대한 합당한 시험’, 즉 실험에 관한, 실용에 관한 시험이 있다. 우리는 왜 현대 물리학이 17세기 물리학보다 더 우수한지를 말할 수 있다. 현대 물리학은 다른 체계를 완전히 패퇴시킨 많은 실제적 시험을 견디어낸다. 그리고 사변적 형이상학 체계에 대한 분명한 반박은 그 체계가 주장하는 진보가 그 체계 주변의 다른 어떤 것만큼 상상적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이 반박은 매우 오래되었다 ; 이 반박은 베이컨(Bacon), 흄(Hume), 그리고 칸트(Kant)에게로 거슬러 올라간다. 우리는, 칸트의 형이상학 서설(Prolegomena)에서, 형이상학에 대하여 주장되는 진보에 관한 다음 말을 읽는다 : ‘의심할 바 없이 이 주제에 관하여 오랫동안 발간된 그렇게 많은 아름다운 것들에도 불구하고 이 과학이 손가락 넓이만큼도 진보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없었던 내 자신과 같은 많은 사람들이 있다. 인정되는 바와 같이, 우리는 정의(定義)를 예리하게 만들려는, 혹은 절름발이 증거에 새로운 목발을 제공하여 형이상학의 누더기 이불을 기우려는, 혹은 그 이불에 새로운 무늬를 부여하려는, 시도를 발견할 것이다 ; 그러나 이것은 세상이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형이상학적 주장에 신물이 났다. 우리는 그것을 이용하여 진리로부터 .. 변증법적 환상을 구별하는 분명한 기준을 가지질 원한다.’ 화이트헤드는 아마도 이 고전적이면서 명백한 반론을 인식하고 있다 ; 그래서 앞에 인용된 문장 다음 문장에서 이렇게 글을 쓸 때 그는 그 반론을 기억하는 듯싶다 : ‘그러나 16세기부터 유래하고 프랜시스 베이컨(Francis Bacon)으로부터 최종적 표현을 받는 주요 반론은 철학적 사변의 무용성(無用性)이다.’ 베이컨이 반대했던 것은 철학에 관한 실험적이고 실용적인 무용성(無用性)이기 때문에, 화이트헤드는 여기서 우리의 요점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끝까지 추적하지 않는다. 이 실용적 무용성(無用性)이 사변적 철학은, 과학처럼, 그 철학이 이룩하는 진보에 의하여 정당화된다는 자신의 요점을 파괴한다는 명백한 반론에 그는 대답하지 않는다. 대신에 그는 완전히 다른 문제, 즉 ‘사실에 관한 냉혹하고 독립적인 문제는 없다는’, 그리고 모든 과학은 사실을 일반화하고 해석해야 하기 때문에 사고(思考)를 이용해야 한다는 잘 알려진 문제로 옮겨감으로써 만족한다. 이 고찰에 그는 자신의 형이상학적 체계에 대한 방어를 기초한다: ‘그리하여 직접적인 냉혹한 사실에 대한 이해는 그 이해의 형이상학적 해석을 필요로 한다 ..’ 이제 이것은 그럴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그가 시작했던 주장과 틀림없이 완전히 다른 주장이다. 철학에서 뿐만 아니라 과학에서도, ‘고유한 시험은 .. 진보이다’ : 이것이 우리가 처음에 화이트헤드로부터 들은 것이다. 그러나 칸트의 반론에 대해서는 대답이 없다. 대신에 화이트헤드의 주장은, 일단 보편성과 일반성의 문제에 관한 길로 들어서면, (플라톤식) 집단주의적 도덕성 이론과 같은 그런 문제로 빠져버린다 : ‘관점의 도덕성은 관점의 일반성과 불가분하게 결합되어 있다. 일반적인 선(善)과 개인적인 이해 사이의 대립은 개인의 이해가 일반적인 선(善)일 그런 것일 때만 폐지될 수 있다 ..’
이제 이것은 이성적 논증의 표본이었다. 그러나 이성적 논증은 진정으로 드물다. 화이트헤드는 사변적 철학이 절름발이 증거에 대하여 새로운 목발을 제공할 따름이라는 칸트의 비판을 피하는 방법을 헤겔로부터 배웠다. 이 헤겔식 방법은 매우 간단하다. 우리는 증거와 논증을 전부 피한다면 목발을 쉽게 피할 수 있다. 헤겔식 철학은 논증을 하지 않는다 ; 그 철학은 명령을 내린다. 헤겔과 반대로, 화이트헤드는 최종적 진리를 제공하는 척하지 않는다는 것은 인정되어야 한다. 화이트헤드는 자신의 철학을 논증의 대상이 될 수 없는 독단으로 제시한다는 의미에서 독단적 철학자가 아니다 ; 그는 심지어 자신의 철학이 지니는 결점을 강조한다. 그러나 모든 신(新)헤겔주의자들처럼, 그는 자신의 철학을 논증 없이 선언하는 독단적 방법을 채택한다. 우리는 그 철학을 수용하거나 버릴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철학을 토론할 수는 없다. (우리는 진정으로 ‘냉혹한 사실’과 직면하고 있다 ; 베이컨식의 경험에 관한 냉혹한 사실이 아니라, 인간의 형이상학적 영감에 관한 냉혹한 사실과.) 이 ‘수용하거나 버리는 방법’을 예시하기 위하여, 나는 과정과 실재(Process and Reality)의 한 구절을 인용하겠다 ; 그러나 내가 그 구절을 공정하게 선택하려고 노력했다 할지라도, 내 책을 읽는 독자들은 그 책 자체를 읽지 않고 의견을 가져서는 안 된다고 나는 내 책을 읽는 독자들에게 경고해야 한다.
그 책의 마지막 부분은, ‘최종적 해석’으로 제목이 붙었는데, ‘이상적 반대자’와 (여기서는 예를 들어 플라톤의 체계에서 나온 유명한 잡동사니 작품인 ‘영원과 변화’가 나타난다 ; 우리는 이것을 ‘변화와 정지’라는 이름으로 다루었다), ‘하느님과 세계’의 두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나는 이 후자의 장으로부터 인용한다. 그 구절은 두 문장으로 소개된다 : ‘최종 요약문은 한 무리의 반론으로써 표현될 수 있을 따름인데, 그 반론의 명백한 자기모순은 존재의 다양한 범주를 무시한 것에 달려있다. 각 반론 안에는 반대를 대조로 변화시키는 의미의 변화가 있다.’ 이것이 시작이다. 그것으로 인하여 우리는 ‘명백한 모순’에 대비하게 되며, 우리는 이것이 어떤 무시한 것에 ‘달려있다’는 말을 듣는다. 이것은 그 무시한 것을 피함으로써 우리는 모순을 피할는지도 모른다는 것을 지적하는 듯싶다. 그러나 이것이 어떻게 이룩될 수 있는지, 혹은 더 정확하게 저자(著者)의 머리 속에 무엇이 있는지 우리는 듣지 못한다. 우리는 다만 그것을 수용하던지 버려야한다. 이제 나는 역시 일말의 논증도 없이 진술되는 선언된 ‘반론들’이나 ‘명백한 자기모순들’ 중에서 처음 두 가지를 인용한다 : ‘세계는 영원하고 하느님은 유동적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하느님은 영원하고 세계는 유동적이라고 말하는 것도 사실이다. - 세계는 하나고 하느님은 다수라고 말하는 것처럼 하느님은 하나고 세계는 다수라고 말하는 것은 사실이다.’ 이제 나는 이 희랍 철학적 환상의 메아리를 비판하지 않겠다 ; 우리는 진정으로 후자처럼 전자가 꼭 ‘같이 사실적’이라는 것을 당연히 여길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명백한 자기모순’을 약속받았다 ; 그래서 나는 이곳에서 모순이 나타나는 곳을 알고 싶다. 그 까닭은 나에게는 심지어 모순의 출현도 명백하지 않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자기모순은 이런 문장이리라 : ‘플라톤은 행복하고 플라톤은 행복하지 않다’, 그리고 동일한 ‘논리적 형태’의 모든 문장들 (다시 말해서, ‘플라톤’에 고유명사를 대체하고 ‘행복한’에 속성어를 대체함으로써 앞의 것으로부터 얻어지는 모든 문장들). 그러나 다음 문장은 분명히 모순이 아니다 : ‘플라톤이 오늘 불행하다고 말하는 것처럼 플라톤이 오늘 행복하다고 말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 까닭은 플라톤이 죽었기 때문에 전자가 정말로 후자처럼 ‘동일하게 사실적’이기 때문이다) ; 그래서 똑같거나 유사한 형태의 다른 문장은, 우연히 거짓이라 할지라도, 자기 모순적이라고 불릴 수 없다. 이것은 내가 왜 이 문제의 순전히 논리적인 면인 ‘명백한 자기모순들’에 관하여 당황하고 있는지를 보여줄 수 있을 뿐이다. 그리고 나는 그 책 전부에 관해서도 그런 방식의 느낌을 갖는다. 나는 저자가 무엇을 전하고자 원하는지 이해를 하지 못할 따름이다. 매우 개연적으로, 이것은 나의 잘못이지 저자의 잘못은 아니다. 나는 선택된 자들의 숫자에 속하지 못하고, 나는 많은 타인들도 같은 위치에 있다고 우려한다. 이것이 내가 그 책의 방법이 비이성적이라고 주장하는 바로 그 이유이다. 그 책의 방법은 인류를 작은 숫자의 선택된 자들과 큰 숫자의 길 잃은 자들의 두 부분으로 나눈다. 그러나 내가 길을 잃었다 할지라도, 내가 보는 바에 따라서 신(新)헤겔주의가 칸트에 의하여 그렇게 생생하게 묘사된 저 몇 개의 새로운 헝겊을 덧댄 낡은 넝마 이불처럼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고 나는 말할 수 있을 따름이다 ; 오히려 신(新)헤겔주의는 그 이불로부터 떨어져나간 낡은 넝마조각들의 더미처럼 이제 보인다.
신(新)헤겔주의가 자체의 ‘고유한 시험’을 견디어냈는지, 그 정체(停滯)에 대하여 칸트가 불평했던 형이상학적 체계와 비교하여 신(新)헤겔주의가 진보를 보여주는지를 결정하는 일을 나는 화이트헤드의 책을 정독하는 학생에게 맡긴다 ; 그 학생이 그런 진보를 판단할 기준을 발견할 수 있다는 조건으로. 그리고 형이상학에 관한 칸트의 또 다른 말로써 이 말들을 끝내는 합당성을 판단하는 일을 나는 같은 학생에게 맡길 것이다 : ‘일반적인 형이상학에 관하여, 그리고 내가 그것들의 가치에 관하여 표현한 관점들에 대하여, 나는 나의 서술들이 이곳저곳에서 불충분하게 조건적이고 조심스러울 것임을 인정한다. 그러나 내가, 오늘날 유행하는 것처럼, 지혜로 가득 찬 이 모든 책들의 자만적인 건방짐을 혐오와 심지어 증오 같은 것으로써 생각할 수 있을 뿐이라는 사실을 나는 숨기고 싶지 않다. 그 까닭은 틀린 방법이 선택되었다는 것에 내가 완전히 만족하기 때문이다 ; 수용된 방법은 틀림없이 이 어리석음과 실수를 끝없이 증가시킨다는 것에 ; 그리고 심지어 이 환상에 가득 찬 업적 모두가 완전히 파멸됨도 그 저주받은 풍요로움을 지닌 이 가짜 과학만큼 도저히 그렇게 해로울 수 없을 것에.’
내가 여기서 다루고자 하는 동시대 비이성주의의 두 번째 사례는 A. J. 토인비(Toynbee)의 역사의 연구(A Study of History)이다. 나는 내가 이것을 매우 두드러지고 흥미로운 책으로 간주한다는 것과, 내가 알고 있는 모든 다른 동시대 비이성주의적이고 역사주의적인 작품들에 대한 그 책의 우수성 때문에 내가 그 책을 선택했다는 것을 분명하게 하고 싶다. 나에게는 역사학자로서 토인비의 장점을 판단할 능력이 없다. 그러나 다른 동시대의 역사주의적이고 비이성주의적 철학자들과 반대로, 그에게는 매우 자극적이고 도전적인 말할 것이 많이 있다 ; 나는 적어도 그를 그렇게 알고 있고, 나는 많은 귀중한 제안을 그에게서 가져온다. 나는 역사적 연구에 관한 그의 분야 속에서 비이성주의로 그를 비난하지 않는다. 그 까닭은 특정 역사적 해석을 지지하거나 반대하여 증거를 비교하는 문제가 있는 곳에서, 그가 주저하지 않고 논증에 관하여 근본적으로 이성적인 방법을 사용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나는, 그 연구의 부정적 결과와 함께, 역사적 기록으로서의 복음의 진실성에 대한 그의 비교 연구를 염두에 두고 있다 ; 나에게는 그가 제시하는 증거를 판단할 능력이 없을지라도, 방법의 합리성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고, 이것은 한층 더 감탄을 받을만한데 그 이유는 기독교 정통성에 대하여 토인비가 가졌던 일반적인 동정심 때문에 토인비가, 최소한도로 말해서, 비정통적인 관점을 옹호하는 것이 아마도 힘들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의 저서 속에서 표현된 정치적 경향 중 많은 경향에, 그리고 현대 민족주의와 그 민족주의와 연결된 종족주의적이자 ‘복고주의적’, 다시 말해서 문화적으로 반동적인 경향들에 대한 그의 공격에 매우 강하게 또한 동의한다.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그 작품이 비이성적이라고 선언하기 위하여, 내가 토인비의 기념비적인 역사주의적 작품을 골라내는 이유는 그런 장점을 지닌 작품 속에서 이 독소의 영향을 우리가 볼 때만 우리가 그 위험을 완전히 알아본다는 것이다.
토인비의 비이성주의로 내가 묘사해야 하는 것은 다양한 방식으로 표출된다. 한 가지 방식은 그가 우리 시대의 널리 퍼져있고 위험한 유행에 굴복한다는 것이다. 논증의 표면적 가치로도, 적어도 임시적으로, 논증을 진지하게 수용하지 않고 논증 속에서 더 깊은 비이성적 동기들과 경향들이 표출되는 방식만을 보는 유행을 나는 의미한다. 그것은 앞 장에서 비판된 사회적 분석의 자세이다 ; 먼저 주장 자체의 유효성을 검토하는 대신에, 주장하는 사람의 사회적 서식처 속에서의 무의식적 동기와 결정인자를 즉시 찾는 자세이다.
이 자세는, 내가 앞의 두 장에서 증명하려고 노력한 바와 같이, 어느 정도까지는 정당화될지도 모르겠다 ; 그리고 논증을 제시하지 않는, 혹은 주장이 명백하게 조사할 가치가 없는 저자의 경우에 특별히 그러하다. 그러나 진지한 주장을 진지하게 고찰하려는 노력이 없다면, 우리는 비이성주의라는 비난을 하는 데에 정당화된다고 나는 믿는다 ; 게다가, 그 과정에 대하여 같은 자세를 채택함으로써, 심지어 보복하는 데에서 우리는 정당화된다. 그리하여 나는, 진지한 주장을 진지하게 고찰하지 않는 토인비의 태만이 종교적 신비주의 속으로 도피함으로써 이성에 대한 그리고 우리 사회의 문제를 이성적으로 해결하는 것에 대한 환멸이나 심지어 절망을 표현하는 20세기 주지주의를 대표한다는 사회 분석적 진단을 할 모든 권리가 우리에게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진지한 주장을 진지하게 고찰하기를 거부하는 본보기로서, 나는 토인비가 마르크스를 취급하는 것을 고른다. 이 선택에 대하여 내가 지니고 있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로, 마르크스는 이 책의 독자들뿐만 아니라 내 자신에게도 익숙한 주제이다. 둘째로, 마르크스는 그 실제적인 면 대부분에서 내가 토인비와 의견일치를 이루는 주제이다. 마르크스가 지닌 정치적 및 역사적 영향력에 대한 토인비의 주요 판단은 내가 보다 진부한 방법으로써 도달한 결과와 매우 흡사하다 ; 그리고 진정으로 마르크스는 토인비가 다룸으로써 토인비의 훌륭한 역사적 직감이 드러나는 주제의 하나이다. 그리하여 내가 토인비와 비교하여 마르크스의 합리성을 옹호한다면, 나는 마르크스의 변호자라는 혐의를 받지 않을 것이다. 그 까닭은 다음 것이 내가 동의하지 않는 요점이기 때문이다 : 토인비는 (그가 모든 사람을 다루는 바와 같이) 마르크스를 이성적인 존재로서, 자신이 가르치는 것에 대하여 논증을 하는 사람으로서 취급하지 않는다. 정말로, 마르크스와 마르크스의 이론을 그렇게 다루는 것은, 논증은 말의 하찮은 양태라는, 그리고 인류의 역사는 감정과 열정과 종교와 비이성적인 철학과 아마도 예술 및 시(詩)의 역사라는, 토인비의 저작에 의하여 전달되는 일반적인 인상을 본보기로 내놓을 따름이다 ; 그래서 인류의 역사는 인간의 이성이나 인간의 과학의 역사와 어떤 관련도 없다는 토인비의 저작에 의하여 전달되는 일반적인 인상 (앞의 절에서 “그래서 인류의 역사는 ~ ” 중 그래서는 원문에 “그러나[but]”으로 표현되어 있으나 의미상 “그래서[and]"로 쓰는 것이 옳아서 원문을 교정 번역하였다. - 역자 주). (갈릴레오[Galileo]와 뉴튼[Newton], 하베이[Harvey]와 파스퇴르[Pasteur]같은 이름은 문명의 생명주기에 대한 토인비의 역사주의적 연구의 최초 6권 안에서 어떤 역할도 하지 않는다.)
마르크스에 대한 토인비와 나의 일반적인 관점 사이의 유사점의 요점에 관하여, 1 장에서 선택된 사람들과 선택된 계급 사이의 유사점을 내가 언급한 것을 나는 독자들에게 상기시킬 것이다 ; 그리고 다른 여러 곳에서, 나는 역사적 필연에 관한, 특히 사회혁명의 불가피성에 관한 마르크스의 교설에 대하여 비판적으로 언급했다. 이 개념들은 토인비에 의하여 자신의 일상적인 탁월함과 함께 연결된다 : 그는 이렇게 쓴다, ‘마르크스주의에 관한 현저하게 유태인적인 .. 영감은 그것이 하느님 자신의 .. 명령이기 때문에 불가피한, 그리고 이 세상의 왕국에서 최하위 위치에서 최고의 위치로 한번 도약하여 선택된 사람들을 운반할 수 있는 역할의 반전 .. 속에서 프롤레타리아와 지배적 소수의 현재 역할을 뒤집을 수 있는, 폭력적 혁명에 대한 종말론적 통찰력이다. 마르크스는 자신의 전능한 신(神)을 위하여 야훼(Yahweh)의 자리에 “역사적 필연”이라는 여신(女神)을 수용했고, 유태인 자리에 현대 서구세계의 내부 프롤레타리아를 수용했다 ; 그래서 그의 구세주적 왕국은 프롤레타리아 독재로서 생각된다. 그러나 전통적인 유태적 묵시록의 두드러진 특징은 이 낡은 변장을 뚫고 돌출하며, 우리의 철학자 감독이 현대 서구 의상을 입혀 제시하고 있는 것은 실제로 랍비 이전의 마카비적 유대주의이다 ..’ 이제 그 구절에 흥미로운 유추 이상의 어떤 것에 대한 의도가 없다면, 내가 동의하지 않는 이 탁월하게 표현된 구절 속에는 틀림없이 많은 것이 없다. 그러나 그 구절에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진지한 분석(혹은 그 분석의 한 부분)으로서의 의도가 있다면, 나는 항의를 해야 한다 ; 그것들 대부분이 교체되었다 할지라도, 마르크스가 자본론(Capital)을 썼으며, 자유방임적 자본주의를 연구했으며 사회과학에 진지하고 매우 중요한 공헌을 했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그리고 정말로, 토인비가 쓴 구절에는 진지한 분석의 의도가 있다 ; 그는 자신의 유추와 비유가 마르크스를 진지하게 평가하는 데 기여한다고 믿는다 ; 그 까닭은 이 구절에 대한 부록에서 (나는 그 구절에서 중요한 부분만을 인용했다) 그는, ‘마르크스주의, 사회주의, 그리고 기독교’라는 제목 아래서, 이 ‘마르크스 철학에 관한 설명’에 대하여 마르크스주의자가 내놓는 반박일 것으로 자신이 생각하는 것을 다루기 때문이다. 이 부록 자체에는 또한 의심할 바 없이, 첫 번째 문단이 ‘마르크스주의를 변호하는 사람들은 아마도 .. 라고 항의할 것이다’라는 말로써 시작하며 두 번째 문단은 ‘이것들과 같은 그런 움직임에 대한 마르크스식의 항의에 답변하려는 시도에서 .. ’라는 말로써 시작한다는 사실에 의하여 밝혀질 수 있는 바와 같이, 마르크스주의를 진지하게 토론하려는 의도가 있다. 그러나 우리가 더 세밀하게 이 토론을 조사하면, 검토되는 것은 차치하고 마르크스주의에 관한 이성적 논증이나 주장 하나도 심지어 언급도 되지 않는 것을 우리는 발견한다. 마르크스의 이론들에 대하여 그리고 그 이론들이 사실인지 혹은 거짓인지의 문제에 대하여 우리는 한 마디 말도 듣지 못한다. 부록에서 제기된 한 가지 추가적인 문제는 다시 역사적 근원을 지닌 문제이다 ; 그 까닭은 토인비에 의하여 그려지는 마르크스주의적 반론자는, 토인비가 의미하는 어떤 마르크스주의자도 항의할 것처럼, 옛 이념인 사회주의를 새로운 즉, 이성적이고 과학적인 토대 위에 근거했던 것은 마르크스의 주장이라고 항의하지 않는다 ; 대신에 ‘마르크스의 철학을 다소 요약한 설명 안에서 .. 우리는 마르크스가 주장하는 요점의 가장 중요한 특징적인 .. 부분에 대하여 한 마디 말도 하지 않고 이것을 분석하여 헤겔적이며 유태적이며 기독교적인 구성요소로 만드는 가식적인 태도를 취했다 ... 사회주의는 마르크스적 삶의 방식의 본질이라고 마르크스주의자는 우리에게 말할 것이다 ; 헤겔적이거나 기독교적이거나 유태적이거나 다른 마르크스 이전의 근원까지 거슬러 올라 갈 수 없는 것은 마르크스적 체계 속의 근원적 요소이다’라고 그 반론자는 ‘항의한다’ (나는 토인비의 말을 인용하고 있다). 마르크스주의자가 공산당 선언(Manifesto)에 관하여 읽은 것이 없다 할지라도, 마르크스 자신은 이미 1847년에 사회주의의 7내지 8가지 다른 ‘마르크스 이전의 근원들’을 구분해서, 그 근원들 사이에 또한 마르크스가 ‘사제적(司祭的)’ 혹은 ‘기독교적’ 사회주의로 이름을 붙인 것들이 있으며, 마르크스가 사회주의를 발견했음을 꿈꾸지 않았고 다만 사회주의를 합리화했다는 것을 어떤 마르크스주의자도 틀림없이 알지만 이것이 토인비가 어느 마르크스주의자의 입으로 표현하는 항변이다 ; 혹은 엥겔스가 표현하는 바와 같이, 마르크스가 유토피아적 개념에서 과학으로 사회주의를 발전시켰다는 것. 그러나 토인비는 그 모든 것을 무시한다. ‘이것들과 같은 그런 방향에 대한 마르크스의 항변에 답변하려는 시도로, 우리는 이 이상(理想)이 마르크스의 “이데올로기” 속에서 하는 역할의 중요성뿐만 아니라, 사회주의가 지지하는 이상이 지닌 인도적임과 건설적임을 기꺼이 인정할 것이다 ; 그러나 우리는 사회주의는 마르크스의 창의적 발견이라는 마르크스적 주장을 수용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 편에서, 우리는 마르크스의 사회주의가 들려오기 전에 설교되었을 뿐만 아니라 실천되었던 기독교적 사회주의가 있다고 지적할 것이다 ; 그리고, 우리가 공격할 차례가 오면, 우리는 마르크스의 사회주의가 기독교적 전통에서 유래한다고 주장 .. 할 것이다 ..’라고 그는 쓴다. 이제 나는 이 유래를 틀림없이 부인하지 않으리라, 그리고 모든 마르크스주의자가 그의 신조를 조금도 희생하지 않고 이 유래를 인정할 수 있음은 절대적으로 분명하다 ; 그 까닭은 마르크스주의의 신조는 마르크스가 인도적이고 건설적인 이상을 창안한 사람이 아니라 마르크스가 순전히 이성적인 수단으로 사회주의가 도래할 것임을, 그리고 어떤 방식으로 사회주의가 도래할 것인지를 보여준 과학자라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묻는다, 마르크스의 이성적 주장과는 어떤 관련도 없는 방향에서 토인비가 마르크스주의를 논한다는 것은 어떻게 설명될 수 있는가 ? 내가 알 수 있는 유일한 설명은 합리성에 관한 마르크스주의적 주장은 토인비에게 어떤 의미도 갖지 못한다. 그는 오직 마르크스주의가 종교로서 어떻게 유래되었는가라는 질문에 흥미를 가진다. 이제 나는 마르크스주의의 종교적 특징을 전혀 부인하지 않는다. 그러나 철학이나 종교를 완전히 그것들의 역사적 근원과 환경에 대한 관점을 고찰하여 다루는 방법은 (역사법칙적 역사주의[historicism]와 구분될) 전통적 역사주의(historism)로 앞 장에서 묘사된 자세인데, 최소한도로 말해서도, 매우 편파적이다 (historicism은 역사결정론적 역사주의나 역사법칙적 역사주의로 번역되는데, 전통적 역사주의[historism]가 역사를 중심으로 한 연구태도를 의미하는 반면, 역사결정론적 혹은 역사법칙적 역사주의는 과거 역사에서 역사발전 법칙을 발견해서 현재와 미래의 역사에 적용할 수 있다는 매우 독단적인 역사주의를 의미한다. 이 서적의 번역에서 전통적 역사주의로 표기되는 않는 역사주의는 모두 역사결정론적 혹은 역사법칙적 역사주의이다. - 역자 주) ; 그리고 이 방법이 얼마나 많이 비이성주의를 초래할 것인지는 우리가 여기서 이성적으로 묘사했던 저 인간 삶의 중요한 영역에 대한 토인비의 경멸이 아니라면, 토인비의 태만으로부터 알려질 수 있다.
마르크스의 영향을 평가하면서, 토인비는 ‘역사의 판결은 기독교의 사회적 양심의 부활이 칼 마르크스의 한 가지 위대한 긍정적 업적이었다는 것으로 밝혀질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이 평가에 반대하여, 나에게는 말할 것이 틀림없이 많지 않다 ; 아마도 나 또한 기독교에 끼친 마르크스의 도덕적 영향을 강조했음을 독자는 기억할 것이다. 최종적 평가로서, 피착취자들은 착취자들의 편에서 자선의 행동이 나오기를 기다리는 대신에 스스로를 해방시켜야 한다는 훌륭한 도덕적 개념을 토인비가 충분하게 고려한다고 나는 생각하지 않는다 ; 그러나 이것은, 물론, 견해 차이일 뿐이고, 나는 토인비 자신의 견해에 대한 토인비의 권리에 시비를 걸 꿈도 꾸지 않을 것이며, 그렇게 하는 것이 내 생각에 매우 공평하다. 그러나 나는, 그 함축된 역사주의적 도덕론과 심지어 도덕적 미래주의와 함께, ‘역사의 판결이 밝힐 것이다’라는 구절에 주의를 환기시키고 싶다. 그 까닭은 우리는 그런 문제에서 우리 스스로 결정하는 것을 피할 수도 없고 피해서도 안 된다고 나는 주장하기 때문이다 ; 그리고 우리가 판결을 내릴 수 없다면, 역사 또한 판결을 내릴 수 없을 것이고.
토인비가 마르크스를 다루는 것에 대해서는 이만큼만 하자. 그의 전통적 역사주의나 역사적 상대주의에 대한 더 일반적인 문제에 관하여, 그가 모든 사고(思考)를 역사적으로 결정하는 일반적인 원리로서가 아니라 단지 역사적 사고(思考)에 적용이 가능한 제한된 원칙으로서 그 문제를 공식화할지라도, 그는 그 문제를 잘 인식하고 있다고 언급될 것이다 ; 그 까닭은 그가 이렇게 설명하기 때문이다. 그는 ‘모든 역사적 사고(思考)는 사고자(思考者) 자신의 시대와 장소의 특정 환경에 불가피하게 관련되어 있다는 원리를 .. 출발점으로서’ 수용한다. ‘이것은 어떤 인간의 천재성도 제외될 수 없는 인간 본성의 법칙이다.’ 이 전통적 역사주의가 지식사회학과 흡사함은 다소 명백하다 ; 그 까닭은 ‘사고자(思考者) 자신의 시대와 장소’는, 지식사회학에 의하여 묘사된 ‘사회적 서식처’와 비슷함으로써, 분명히 그의 ‘역사적 서식처’로 불린 것의 묘사일 따름이기 때문이다. 차이점이라면 토인비는 자신의 ‘인간 본성의 법칙’을 역사적 사고(思考)에 제한시킨다는 것인데, 그것은 다소 이상하고 아마도 심지어 비의도적 제한으로 나에게 보인다 ; 그 까닭은 일반적인 사고(思考)에 대해서가 아니라 단지 역사적 사고(思考)에 대하여 유효한 ‘어떤 인간의 천재성도 제외될 수 없는 인간 본성의 법칙’이 틀림없이 있다는 것은 다소 개연성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 전통적 역사주의나 사회학주의에 포함된 부인될 수 없지만 다소 사소한 진실의 일면(一面)은 내가 앞의 두 장에서 다루었다, 그래서 내가 여기에서 말한 것을 반복할 필요는 나에게 없다. 그러나 비판에 관해서, 토인비가 쓴 문장이 역사적 사고(思考)에 제한된 것으로부터 풀려나면 ‘원리’로 여겨질 수 없고 그 이유는 그 원리가 모순적일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은 지적할 가치가 있을 것이다. (그것은 거짓말쟁이의 역설의 또 다른 형태일 것이다 ; 그 까닭은 어떤 천재성도 자신의 사회적 서식처의 유행을 표현하는 것으로부터 제외되지 않는다면 이 주장 자체는 그 저자의 사회적 서식처의 유행에 대한, 다시 말해서 우리 시대의 상대주의적 유행에 대한 표현일 뿐일 것이기 때문이다.) 이 말에는 형식논리적 중요성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 까닭은 이 말이 전통적 역사주의나 역사분석이 전통적 역사주의 자체에 적용될 수 있음을 보여주며, 이것은 정말로 아이디어가 이성적 논증을 통하여 비판을 받은 후에 아이디어를 다루는 허용 가능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전통적 역사주의는 그렇게 비판을 받았기 때문에, 이제 나는 위험을 무릅쓰고 역사분석적 진단을 하여, 전통적 역사주의는 다소 낡았다 할지라도 전형적인 우리 시대의 산물이라고 말할 것이다 ; 혹은 더 정확하게, 우리 시대 사회과학의 전형적 후진성의 산물이라고. 전통적 역사주의는 간섭주의에 대한 그리고 이성화와 산업적 협력의 기간에 대한 전형적인 반응이다 ; 역사상 다른 것보다 더 많이 사회적 문제에 이성적 방법의 실제적 적용을 요구하는 기간. 이 요구를 완전히 충족시킬 수 없는 사회과학은 그러므로 그런 문제에 대한 과학의 적용가능성을 정교하게 공격함으로써 자신을 방어하는 경향을 지닌다. 나의 역사분석적 진단을 요약하여, 나는 토인비의 전통적 역사주의가 이성에 대한 절망으로부터 탄생하여 미래에 대한 예언 속으로 뿐만 아니라 과거 속으로 도피하려고 시도하는 변명적 반(反)이성주의라고 감히 제시한다. 그렇다면 전통적 역사주의라는 것은 역사적 산물로 이해되어야 한다.
이 진단은 토인비 저술의 많은 특징에 의하여 입증된다. 한 가지 보기는 이 세상의 흐름에 영향을 미칠 행동에 우선하는 내세(來世)의 우월성에 대한 그의 강조이다. 예를 들어 그는 예언자에게 자체를 제공하는 이 세상 속에서 행동을 취하는 기회는 ‘그 예언자의 정신이 응수하지 못했던 도전’이었다고 말하면서 모하메드(Mohammed)의 ‘비극적인 세속적 성공’에 관하는 토인비는 그렇게 말한다. ‘수용하면서 .. 모하메드는 고귀하게 명예로운 예언자의 숭고한 역할을 거부하고 있었으며 탁월하게 성공적인 정치가의 흔해빠진 역할에 만족하고 있었다.’ (다시 말해서, 모하메드는 예수가 저항한 유혹에 굴복했다.) 이그나티우스 로욜라(Ignatius Loyola)는 따라서 군인에서 성인(聖人)으로 변신하여 토인비의 승인을 받는다. 그러나 이 성인(聖人) 역시 성공적인 정치가가 되지 않았던지 ? 사람들은 물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예수회[Jesuitism]에 관한 문제라면, 모든 것이 달라지는 듯싶다 : 이런 형태의 정치가 신분은 충분히 내세적[來世的]이다.) 오해를 피하기 위하여, 나는 내가 알고 있는 대부분이나 혹은 거의 모든 정치가들보다 많은 성인(聖人)들을 내 자신이 더 높이 평가한다는 것을 분명히 하고 싶은데 그 이유는 내가 정치적인 성공에 의하여 일반적으로 감동을 받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이 구절을 나의 역사분석적 진단에 대한 입증으로서만 인용한다 : 현대 역사적 예언가에 관한 이 전통적 역사주의가 도피의 철학이라는 것.
토인비의 반(反)이성주의는 많은 다른 장소에서 두드러진다. 예를 들어, 관용에 관한 이성주의적 개념을 공격하면서, 그는 논증 대신에 ‘비천함’과 반대가 되는 것으로서 ‘고귀함’ 같은 범주를 사용한다. 그 구절은 이성적 근거에서의 단지 ‘부정적으로’ 폭력 피하기와 내세의 참된 비폭력 사이의 대립을 다루며 이 둘은 ‘서로 실제로 정반대 .. 인 .. 의미’의 보기들이라고 암시한다. 여기에 내가 염두에 두고 있는 구절이 있다 : ‘그 최저점에서 비폭력 실천은 이전에 지겹게 실천된 .. 폭력에 .. 대한 냉소적 환멸보다 더 고귀하고 더 건설적인 것을 표현하지 못할 것이다 ... 도덕적으로 향상되지 않는 이런 종류의 비폭력에 관한 악명 높은 보기는 17세기부터 .. 우리 시대까지 서구세계 속의 종교적 관용이다.’ 토인비 자신의 용어를 써서 이 서구의 민주주의적인 종교적 관용에 대한 도덕적으로 향상되는 공격이 이성에 대한 냉소적 환멸보다 더 고귀하고 더 건설적인 것을 표현하는지를 질문함으로써, 보복하고 싶은 유혹을 참는다는 것은 어렵다 ; 그 공격이 우리 서구세계 속에서 유행했고, 훨씬 더 불행하게 지금도 유행하며 특히 헤겔 시대부터 우리 시대까지 지겹게 실천되었던 저 반(反)이성주의에 관한 악명 높은 사례가 아닌지 ?
물론, 토인비에 대한 나의 역사적 분석은 진지한 비판이 아니다. 나의 분석은 보복하는, 전통적 역사주의에 보복하는 한 가지 불친절한 방식일 따름이다. 나의 근본적인 비판은 매우 다른 방향을 지향하며, 전통적 역사주의를 비전문적으로 다루어서 이 싸구려 방법을 이미 유행하는 것보다 더 유행하게 만든 것에 대하여 내가 책임을 져야 한다면 나는 틀림없이 사과해야 한다.
나는 오해를 받고 싶지 않다. 나는 종교적 신비주의에 적대감을 느끼지 않으며 (오직 호전적인 반[反]이성주의적 지식주의[intellectualism]에만 적대감을 느낀다) 나는 틀림없이 종교적 신비주의를 억압하려는 어떤 시도와 먼저 나서서 싸운다. 종교적 불인(不仁)을 옹호하는 사람은 내가 아니다. 그러나 이성, 혹은 이성주의, 혹은 인도주의, 혹은 인본주의에 대한 믿음은 인간사의 개선에, 특히 국제범죄 억제와 평화정착에 기여할 다른 믿음과 동일한 권리를 가진다고 나는 주장한다. ‘인도주의자는 인간사를 인간이 통제하도록 하는 .. 데 자신의 모든 주의와 노력을 의도적으로 기울인다. 그러나 .. 인류의 통합은 인류가 한 부분인 초인적인 전체의 통합의 틀 안에서를 제외하고는 사실상 확립될 수 없다 .. ; 게다가 우리 현대 서구의 인도주의자 집단은 지구상의 토대 위에 거대한 바벨탑을 세움으로써 하늘에 도달하려는 계획에서, 고집스럽게 정도(正道)를 벗어났을 뿐만 아니라 기묘했다 ..’라고 토인비는 쓴다. 내가 그를 올바르게 이해한다면, 토인비의 주장은 인도주의자에게는 국제문제를 인간의 이성이 통제하도록 할 기회가 없다는 것이다. 베르그송(Bergson)의 권위의 도움을 받아, 그는 초인적인 전체에 대한 충성만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고, 그것으로써 종족적 민족주의가 대체될 수 있는 인간의 이성을 위한 길인, 그가 표현하는 바와 같이 ‘지구상의 길’은 없다고 그는 주장한다. 우리는 지구상에서 천국을 만들 수 없다는 것이 정말로 이성주의적 정치의 원칙이기 때문에, 이제 나는 이성에 대한 인도주의적 신념을 ‘지구상의’로서 특징짓는 것을 꺼려하지 않는다. 그러나 인도주의는 행동으로 스스로를 증명한, 아마도 다른 신념만큼 그렇게 스스로를 잘 증명한 신념임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대부분의 인도주의자들과 함께, 기독교는 하느님의 부성(父性)을 가르침으로써 인간의 형제애를 설정하는데 크게 기여했다고 내가 생각할지라도, 이성에 대한 인간의 믿음을 파괴하는 사람들은 이 목적에 기여하지 못할 것이라고 나는 또한 생각한다.
- “열린사회와 그 적들, 2권 헤겔과 마르크스”, 칼 포퍼 -
THE AFTERMATH
Rationality, in the sense of an appeal to a universal and impersonal standard of truth, is of supreme importance .., not only in ages in which it easily prevails, but also, and even more, in those less fortunate times in which it is despised and rejected as the vain dream of men who lack the virility to
kill where they cannot agree.
BERTRAND RUSSELL.
CHAPTER 23 : THE SOCIOLOGY OF KNOWLEDGE
It can hardly be doubted that Hegel's and Marx's historicist philosophies are characteristic products of their time - a time of social change. Like the philosophies of Heraclitus and Plato, and like those of Comte and Mill, Lamarck and Darwin, they are philosophies of change, and they witness to the tremendous and undoubtedly somewhat terrifying impression made by a changing social environment on the minds of those who live in this environment. Plato reacted to this situation by attempting to arrest all change. The more modern social philosophers appear to react very differently, since they accept, and even welcome, change ; yet this love of change seems to me a little ambivalent. For even though they have given up any hope of arresting change, as historicists they try to predict it, and thus to bring it under rational control ; and this certainly looks like an attempt to tame it. Thus it seems that, to the historicist, change has not entirely lost its terrors.
In our own time of still more rapid change, we even find the desire not only to predict change, but to control it by centralized large-scale planning. These holistic views (which I have criticized in The Poverty of Historicism) represent a compromise, as it were, between Platonic and Marxian theories. Plato's will to arrest change, combined with Marx's doctrine of its inevitability, yield, as a kind of Hegelian 'synthesis', the demand that since it cannot be entirely arrested, change should at least be 'planned', and controlled by the state whose power is to be vastly extended.
An attitude like this may seem, at first sight, to be a kind of rationalism ; it is closely related to Marx's dream of the 'realm of freedom' in which man is for the first time master of his own fate. But as a matter of fact, it occurs in closest alliance with a doctrine which is definitely opposed to rationalism (and especially to doctrine of the rational unity of mankind ; see chapter 24), one which is well in keeping with the irrationalist and mystical tendencies of our time. I have in mind the Marxist doctrine that our opinions, including our moral and scientific opinions, are determined by class interest, and more generally by the social and historical situation of our time. Under the name of 'sociology of knowledge' or 'sociologism', this doctrine has been developed recently (especially by M. Scheler and K. Mannheim) as a theory of the social determination of scientific knowledge.
The sociology of knowledge argues that scientific thought, and especially thought on social and political matters, does not proceed in a vacuum, but in a socially conditioned atmosphere. It is influenced largely by unconscious or subconscious elements. These elements remain hidden from the thinker's observing eye because they form, as it were, the very place which he inhabits, his social habitat. The social habitat of the thinker determines a whole system of opinions and theories which appear to him as if they were logically and trivially true, such as, for example, the sentence 'all tables are tables'. This is why he is not even aware of having made any assumptions at all. But that he has made assumptions can be seen if we compare him with a thinker who lives in a very different social habitat ; for he too will proceed from a system of apparently unquestionable assumptions, but from a very different one ; and it may be so different that no intellectual bridge may exist and no compromise be possible between these two systems. Each of these different socially determined systems of assumptions is called by the sociologists of knowledge a total ideology.
The sociology of knowledge can be considered as a Hegelian version of Kant's theory of knowledge. For it continues on the lines of Kant's criticism of what we may term the 'passivist' theory of knowledge. I mean by this the theory of the empiricists down to and including Hume, a theory which may be described, roughly, as holding that knowledge streams into us through our senses, and that error is due to our interference with the sense-given material, or to the associations which have developed within it ; the best way of avoiding error is to remain entirely passive and receptive. Against this receptacle theory of knowledge (I usually call it the 'bucket theory of the mind'), Kant argued that knowledge is not a collection of gifts received by our senses and stored in the mind as if it were a museum, but that it is very largely the result of our own mental activity ; that we must most actively engage ourselves in searching, comparing, unifying, generalizing, if we wish to attain knowledge. We may call this theory the 'activist' theory of knowledge. In connection with it, Kant gave up the untenable ideal of a science which is free from any kind of presuppositions. (That this ideal is even self-contradictory will be shown in the next chapter.) He made it quite clear that we cannot start from nothing, and that we have to approach our task equipped with a system of presuppositions which we hold without having tested them by the empirical methods of science ; such a system may be called a 'categorial apparatus'. Kant believed that it was possible to discover the one true and unchanging categorial apparatus, which represents as it were the necessarily unchanging framework of our intellectual outfit, i.e. human 'reason'. This part of Kant's theory was given up by Hegel, who, as opposed to Kant, did not believe in the unity of mankind. He taught that man's intellectual outfit was constantly changing, and that it was part of his social heritage ; accordingly the development of man's reason must coincide with the historical development of his society, i.e. of the nation to which he belongs. This theory of Hegel's, and especially his doctrine that all knowledge and all truth is 'relative' in the sense of being determined by history, is sometimes called 'historism' (in contradistinction to 'historicism', as mentioned in the last chapter). The sociology of knowledge or 'sociologism' is obviously very closely related to or nearly identical with it, the only difference being that, under the influence of Marx, it emphasizes that the historical development does not produce one uniform 'national spirit', as Hegel held, but rather several and sometimes opposed 'total ideologies' within one nation, according to the class, the social stratum, or the social habitat, of those who hold them.
But the likeness to Hegel goes further. I have said above that according to the sociology of knowledge, no intellectual bridge or compromise between different total ideologies is possible. But this radical scepticism is not really meant quite as seriously as it sounds. There is a way out of it, and the way is analogous to the Hegelian method of superseding the conflicts which preceded him in the history of philosophy. Hegel, a spirit freely poised above the whirlpool of the dissenting philosophies, reduced them all to mere components of the highest of syntheses, of his own system. Similarly, the sociologists of knowledge hold that the 'freely poised intelligence' of an intelligentsia which is only loosely anchored in social traditions may be able to avoid the pitfalls of the total ideologies ; that it may even be able to see through, and to unveil, the various total ideologies and the hidden motives and other determinants which inspire them. Thus the sociology of knowledge believes that the highest degree of objectivity can be reached by the freely poised intelligence analysing the various hidden ideologies and their anchorage in the unconscious. The way to true knowledge appears to be the unveiling of unconscious assumptions, a kind of psycho-therapy, as it were, or if I may say so, a socio-therapy. only he who has been socio-analysed or who has socio-analysed himself, and who is freed from this social complex, i.e. from his social ideology, can attain to the highest synthesis of objective knowledge.
In a previous chapter, when dealing with 'Vulgar Marxism' I mentioned a tendency which can be observed in a group of modern philosophies, the tendency to unveil the hidden motives behind our actions. The sociology of knowledge belongs to this group, together with psycho-analysis and certain philosophies which unveil the 'meaninglessness' of the tenets of their opponents. The popularity of these views lies, I believe, in the ease with which they can be applied, and in the satisfaction which they confer on those who see through things, and through the follies of the unenlightened. This pleasure would be harmless, were it not that all these ideas are liable to destroy the intellectual basis of any discussion, by establishing what I have called a 'reinforced dogmatism'. (Indeed, this is something rather similar to a 'total ideology'.) Hegelianism does it by declaring the admissibility and even fertility of contradictions. But if contradictions need not be avoided, then any criticism and any discussion becomes impossible since criticism always consists in pointing out contradictions either within the theory to be criticized, or between it and some facts of experience. The situation with psycho-analysis is similar : the psycho-analyst can always explain away any objections by showing that they are due to the repressions of the critics. And the philosophers of meaning, again, need only point out that what their opponents hold is meaningless, which will always be true, since 'meaninglessness' can be so defined that any discussion about it is by definition without meaning. Marxists, in a like manner, are accustomed to explain the disagreement of an opponent by his class bias, and the sociologists of knowledge by his total ideology. Such methods are both easy to handle and good fun for those who handle them. But they clearly destroy the basis of rational discussion, and they must lead, ultimately, to anti-rationalism and mysticism.
In spite of these dangers, I do not see why I should entirely forgo the fun of handling these methods. For just like the psycho-analysts, the people to whom psycho-analysis applies best, the socio-analysts invite the application of their own methods to themselves with an almost irresistible hospitality. For is not their description of an intelligentsia which is only loosely anchored in tradition a very neat description of their own social group ? And is it not also clear that, assuming the theory of total ideologies to be correct, it would be part of every total ideology to believe that one's own group was free from bias, and was indeed that body of the elect which alone was capable of objectivity ? (이 문장에서 분사구문 assuming the theory of total ideologies to be correct의 주어가 that절 속의 가주어 it이 될 수가 없으므로 이 분사구문은 if one assumed the theory of total ideologies to be correct로 쓰는 것이 옳다. 문법적 오류이다. - 역자 주) Is it not, therefore, to be expected, always assuming the truth of this theory, that those who hold it will unconsciously deceive themselves by producing an amendment to the theory in order to establish the objectivity of their own views ? (이 문장에서 분사구문 always assuming the truth of this theory의 주어가 가주어 It이나 진주어 that절이 될 수 없으므로 이 분사구문은 if they always assume the truth of this theory로 써야 한다. 문법적 오류이다. - 역자 주) Can we, then, take seriously their claim that by their sociological self-analysis they have reached a higher degree of objectivity ; and their claim that socio-analysis can cast out a total ideology ? But we could even ask whether the whole theory is not simply the expression of the class interest of this particular group ; of an intelligentsia only loosely anchored in tradition, though just firmly enough to speak Hegelian as their mother tongue.
How little the sociologists of knowledge have succeeded in socio-therapy, that is to say, in eradicating their own total ideology, will be particularly obvious if we consider their relation to Hegel. For they have no idea that they are just repeating him ; on the contrary, they believe not only that they have outgrown him, but also that they have successfully seen through him, socio-analysed him ; and that they can now look at him, not from any particular social habitat, but objectively, from a superior elevation. This plausible failure in self-analysis tells us enough.
But, all joking apart, there are more serious objections. The sociology of knowledge is not only self-destructive, not only a rather gratifying object of socio-analysis, it also shows an astounding failure to understand precisely its main subject, the social aspects of knowledge, or rather, of scientific method. It looks upon science or knowledge as a process in the mind or 'consciousness' of the individual scientist, or perhaps as the product of such a process. If considered in this way, what we call scientific objectivity must indeed become completely ununderstandable, or even impossible ; and not only in the social or political sciences, where class interests and similar hidden motives may play a part, but just as much in the natural sciences. Everyone who has an inkling of the history of the natural sciences is aware of the passionate tenacity which characterizes many of its quarrels. No amount of political partiality can influence political theories more strongly than the partiality shown by some natural scientists in favour of their intellectual offspring. If scientific objectivity were founded, as the sociologistic theory of knowledge naively assumes, upon the individual scientist's impartiality or objectivity, then we should have to say good-bye to it. Indeed, we must be in a way more radically sceptical than the sociology of knowledge ; for there is no doubt that we are all suffering under our own system of prejudices (or 'total ideologies', if this term is preferred) ; that we all take many things as self-evident, that we accept them uncritically and even with the naive and cocksure belief that criticism is quite unnecessary ; and scientists are no exception to this rule, even though they may have superficially purged themselves from some of their prejudices in their particular field. But they have not purged themselves by socio-analysis or any similar method ; they have not attempted to climb to a higher plane from which they can understand, socio-analyse, and expurgate their ideological follies. For by making their minds more 'objective' they could not possibly attain to what we call 'scientific objectivity'. No, what we usually mean by this term rests on different grounds. It is a matter of scientific method. And, ironically enough, objectivity is closely bound up with the social aspect of scientific method, with the fact that science and scientific objectivity do not (and cannot) result from the attempts of an individual scientist to be 'objective', but from the friendly-hostile co-operation of many scientists. Scientific objectivity can be described as the inter-subjectivity of scientific method. But this social aspect of science is almost entirely neglected by those who call themselves sociologists of knowledge.
Two aspects of the method of the natural sciences are of importance in this connection. Together they constitute what I may term the 'public character of scientific method'. First, there is something approaching free criticism. A scientist may offer his theory with the full conviction that it is unassailable. But this will not impress his fellow-scientists and competitors ; rather it challenges them : they know that the scientific attitude means criticizing everything, and they are little deterred even by authorities. Secondly, scientists try to avoid talking at cross-purposes. (I may remind the reader that I am speaking of the natural sciences, but a part of modern economics may be included.) They try very seriously to speak one and the same language, even if they use different mother tongues. In the natural sciences this is achieved by recognizing experience as the impartial arbiter of their controversies. When speaking of 'experience' I have in mind experience of a 'public' character, like observations, and experiments, as opposed to experience in the sense of more 'private' aesthetic or religious experience ; and an experience is 'public' if everybody who takes the trouble can repeat it. In order to avoid speaking at cross-purposes, scientists try to express their theories in such a form that they can be tested, i.e. refuted (or else corroborated) by such experience.
This is what constitutes scientific objectivity. Everyone who has learned the technique of understanding and testing scientific theories can repeat the experiment and judge for himself. In spite of this, there will always be some who come to judgements which are partial, or even cranky. This cannot be helped, and it does not seriously disturb the working of the various social institutions which have been designed to further scientific objectivity and criticism ; for instance the laboratories, the scientific periodicals, the congresses. This aspect of scientific method shows what can be achieved by institutions designed to make public control possible, and by the open expression of public opinion, even if this is limited to a circle of specialists. only political power, when it is used to suppress free criticism, or when it fails to protect it, can impair the functioning of these institutions, on which all progress, scientific, technological, and political, ultimately depends.
In order to elucidate further still this sadly neglected aspect of scientific method, we may consider the idea that it is advisable to characterize science by its methods rather than by its results.
Let us first assume that a clairvoyant produces a book by dreaming it, or perhaps by automatic writing. Let us assume, further, that years later as a result of recent and revolutionary scientific discoveries, a great scientist (who has never seen that book) produces one precisely the same. Or to put it differently, we assume that the clairvoyant 'saw' a scientific book which could not then have been produced by a scientist owing to the fact that many relevant discoveries were still unknown at that date. We now ask : is it advisable to say that the clairvoyant produced a scientific book ? We may assume that, if submitted at the time to the judgement of competent scientists, it would have been described as partly ununderstandable, and partly fantastic ; thus we shall have to say that the clairvoyant's book was not when written a scientific work, since it was not the result of scientific method. I shall call such a result, which, though in agreement with some scientific results, is not the product of scientific method, a piece of 'revealed science'.
In order to apply these considerations to the problem of the publicity of scientific method, let us assume that Robinson Crusoe succeeded in building on his island physical and chemical laboratories, astronomical observatories, etc., and in writing a great number of papers, based throughout on observation and experiment. Let us even assume that he had unlimited time at his disposal, and that he succeeded in constructing and in describing scientific systems which actually coincide with the results accepted at present by our own scientists. Considering the character of this Crusonian science, some people will be inclined, at first sight, to assert that it is real science and not 'revealed science'. And, no doubt, it is very much more like science than the scientific book which was revealed to the clairvoyant, for Robinson Crusoe applied a good deal of scientific method. And yet, I assert that this Crusonian science is still of the 'revealed' kind ; that there is an element of scientific method missing, and consequently, that the fact that Crusoe arrived at our results is nearly as accidental and miraculous as it was in the case of the clairvoyant. For there is nobody but himself to check his results ; nobody but himself to correct those prejudices which are the unavoidable consequence of his peculiar mental history ; nobody to help him to get rid of that strange blindness concerning the inherent possibilities of our own results which is a consequence of the fact that most of them are reached through comparatively irrelevant approaches. And concerning his scientific papers, it is only in attempts to explain his work to somebody who has not done it that he can acquire the discipline of clear and reasoned communication which too is part of scientific method. In one point - a comparatively unimportant one - is the 'revealed' character of the Crusonian science particularly obvious ; I mean Crusoe's discovery of his 'personal equation' (for we must assume that he made this discovery), of the characteristic personal reaction-time affecting his astronomical observations. Of course it is conceivable that he discovered, say, changes in his reaction-time, and that he was led, in this way, to make allowances for it. But if we compare this way of finding out about reaction-time, with the way in which it was discovered in 'public' science - through the contradiction between the results of various observers - then the 'revealed' character of Robinson Crusoe's science becomes manifest.
To sum up these considerations, it may be said that what we call 'scientific objectivity' is not a product of the individual scientist's impartiality, but a product of the social or public character of scientific method ; and the individual scientist's impartiality is, so far as it exists, not the source but rather the result of this socially or institutionally organized objectivity of science.
Both Kantians and Hegelians make the same mistake of assuming that our presuppositions (since they are, to start with, undoubtedly indispensable instruments which we need in our active 'making' of experiences) can neither be changed by decision nor refuted by experience ; that they are above and beyond the scientific methods of testing theories, constituting as they do the basic presuppositions of all thought. But this is an exaggeration, based on a misunderstanding of the relations between theory and experience in science. It was one of the greatest achievements of our time when Einstein showed that in the light of experience, we may question and revise our presuppositions regarding even space and time, ideas which had been held to be necessary presuppositions of all science, and to belong to its 'categorial apparatus'. Thus the sceptical attack upon science launched by the sociology of knowledge breaks down in the light of scientific method. The empirical method has proved to be quite capable of taking care of itself.
But it does so not by eradicating our prejudices all at once ; it can eliminate them only one by one. The classical case in point is again Einstein's discovery of our prejudices regarding time. Einstein did not set out to discover prejudices ; he did not even set out to criticize our conceptions of space and time. His problem was a concrete problem of physics, the re-drafting of a theory that had broken down because of various experiments which in the light of the theory seemed to contradict one another. Einstein together with most physicists realized that this meant that the theory was false. And he found that if we alter it in a point which had so far been held by everybody to be self-evident and which had therefore escaped notice, then the difficulty could be removed. In other words, he just applied the methods of scientific criticism and of the invention and elimination of theories, of trial and error. But this method does not lead to the abandonment of all our prejudices ; rather, we can discover the fact that we had a prejudice only after having got rid of it.
But it certainly has to be admitted that, at any given moment, our scientific theories will depend not only on the experiments, etc., made up to that moment, but also upon prejudices which are taken for granted, so that we have not become aware of them (although the application of certain logical methods may help us to detect them). At any rate, we can say in regard to this incrustation that science is capable of learning, of breaking down some of its crusts. The process may never be perfected, but there is no fixed barrier before which it must stop short. Any assumption can, in principle, be criticized. And that anybody may criticize constitutes scientific objectivity.
Scientific results are 'relative' (if this term is to be used at all) only in so far as they are the results of a certain stage of scientific development and liable to be superseded in the course of scientific progress. But this does not mean that truth is 'relative'. If an assertion is true, it is true for ever. It only means that most scientific results have the character of hypotheses, i.e. statements for which the evidence is inconclusive, and which are therefore liable to revision at any time. These considerations (with which I have dealt more fully elsewhere), though not necessary for a criticism of the sociologists, may perhaps help to further the understanding of their theories. They also throw some light, to come back to my main criticism, on the important role which co-operation, intersubjectivity, and the publicity of method play in scientific criticism and scientific progress.
It is true that the social sciences have not yet fully attained this publicity of method. This is due partly to the intelligence-destroying influence of Aristotle and Hegel, partly perhaps also to their failure to make use of the social instruments of scientific objectivity. Thus they are really 'total ideologies', or putting it differently, some social scientists are unable, and even unwilling, to speak a common language. But the reason is not class interest, and the cure is not a Hegelian dialectical synthesis, nor self-analysis. The only course open to the social sciences is to forget all about the verbal fireworks and to tackle the practical problems of our time with the help of the theoretical methods which are fundamentally the same in all sciences. I mean the methods of trial and error, of inventing hypotheses which can be practically tested, and of submitting them to practical tests. A social technology is needed whose results can be tested by piecemeal social engineering.
The cure here suggested for the social sciences is diametrically opposed to the one suggested by the sociology of knowledge. Sociologism believes that it is not their unpractical character, but rather the fact that practical and theoretical problems are too much intertwined in the field of social and political knowledge, that creates the methodological difficulties of these sciences. Thus we can read in a leading work on the sociology of knowledge : 'The peculiarity of political knowledge, as opposed to "exact" knowledge, lies in the fact that knowledge and will, or the rational element and the range of the irrational, are inseparably and essentially intertwined.' To this we can reply that 'knowledge' and 'will' are, in a certain sense, always inseparable ; and that this fact need not lead to any dangerous entanglement. No scientist can know without making an effort, without taking an interest ; and in his effort there is usually even a certain amount of self-interest involved. The engineer studies things mainly from a practical point of view. So does the farmer. Practice is not the enemy of theoretical knowledge but the most valuable incentive to it. Though a certain amount of aloofness may be becoming to the scientist, there are many examples to show that it is not always important for a scientist to be thus disinterested. But it is important for him to remain in touch with reality, with practice, for those who overlook it have to pay by lapsing into scholasticism. Practical application of our findings is thus the means by which we may eliminate irrationalism from social science, and not any attempt to separate knowledge from 'will'.
As opposed to this, the sociology of knowledge hopes to reform the social sciences by making the social scientists aware of the social forces and ideologies which unconsciously beset them. But the main trouble about prejudices is that there is no such direct way of getting rid of them. For how shall we ever know that we have made any progress in our attempt to rid ourselves from prejudice ? (이 문장에서 rid ourselves from prejudices는 rid ourselves of prejudices로 써야 한다. 어법이 틀렸다. - 역자 주.) Is it not a common experience that those who are most convinced of having got rid of their prejudices are most prejudiced ? The idea that a sociological or psychological or an anthropological or any other study of prejudices may help us to rid ourselves of them is quite mistaken ; for many who pursue these studies are full of prejudices ; and not only does self-analysis not help us to overcome the unconscious determination of our views, it often leads to even more subtle self-deception. Thus we can read in the same work on the sociology of knowledge the following references to its own activities : 'There is an increasing tendency towards making conscious the factors by which we have so far been unconsciously ruled ... Those who fear that our increasing knowledge of determining factors may paralyse our decisions and threaten "freedom" should put their minds at rest. For only he is truly determined who does not know the most essential determining factors but acts immediately under the pressure of determinants unknown to him.' Now this is clearly just a repetition of a pet idea of Hegel's which Engels naively repeated when he said : 'Freedom is the appreciation of necessity.' And it is a reactionary prejudice. For are those who act under the pressure of well-known determinants, for example, of a political tyranny, made free by their knowledge ? only Hegel could tell us such tales. But that the sociology of knowledge preserves this particular prejudice shows clearly enough that there is no possible short-cut to rid us of our ideologies. (Once a Hegelian, always a Hegelian.) Self-analysis is no substitute for those practical actions which are necessary for establishing the democratic institutions which alone can guarantee the freedom of critical thought, and the progress of science.
CHAPTER 24 : ORACULAR PHILOSOPHY AND THE
REVOLT AGAINST REASON
Marx was a rationalist. With Socrates, and with Kant, he believed in human reason as the basis of the unity of mankind. But his doctrine that our opinions are determined by class interest hastened the decline of this belief. Like Hegel's doctrine that our ideas are determined by national interests and traditions, Marx's doctrine tended to undermine the rationalist belief in reason. Thus threatened both from the right and from the left, a rationalist attitude to social and economic questions could hardly resist when historicist prophecy and oracular irrationalism made a frontal attack on it. This is why the conflict between rationalism and irrationalism has become the most important intellectual, and perhaps even moral, issue of our time.
I
Since the terms 'reason' and 'rationalism' are vague, it will be necessary to explain roughly the way in which they are used here. First, they are used in a wide sense ; they are used to cover not only intellectual activity but also observation and experiment. It is necessary to keep this remark in mind, since 'reason' and 'rationalism' are often used in a different and more narrow sense, in opposition not to 'irrationalism' but to 'empiricism' ; if used in this way, rationalism extols intelligence above observation and experiment, and might therefore be better described as 'intellectualism'. But when I speak here of 'rationalism', I use the word always in a sense which includes 'empiricism' as well as 'intellectualism' ; just as science makes use of experiments as well as of thought. Secondly, I use the word 'rationalism' in order to indicate, roughly, an attitude that seeks to solve as many problems as possible by an appeal to reason, i.e. to clear thought and experience, rather than by an appeal to emotions and passions. This explanation, of course, is not very satisfactory, since all terms such as 'reason' or 'passion' are vague ; we do not possess 'reason' or 'passions' in the sense in which we possess certain physical organs, for example, brains or a heart, or in the sense in which we possess certain 'faculties', for example, the power of speaking, or of gnashing our teeth. In order therefore to be a little more precise, it may be better to explain rationalism in terms of practical attitudes or behaviour. We could then say that rationalism is an attitude of readiness to listen to critical arguments and to learn from experience. It is fundamentally an attitude of admitting that 'I may be wrong and you may be right, and by an effort, we may get nearer to the truth'. It is an attitude which does not lightly give up hope that by such means as argument and careful observation, people may reach some kind of agreement on many problems of importance ; and that, even where their demands and their interests clash, it is often possible to argue about the various demands and proposals, and to reach - perhaps by arbitration - a compromise which, because of its equity, is acceptable to most, if not to all. In short, the rationalist attitude, or, as I may perhaps label it, the 'attitude of reasonableness', is very similar to the scientific attitude, to the belief that in the search for truth we need co-operation, and that, with the help of argument, we can in time attain something like objectivity.
It is of some interest to analyse this resemblance between this attitude of reasonableness and that of science more fully. In the last chapter, I tried to explain the social aspect of scientific method with the help of the fiction of a scientific Robinson Crusoe. An exactly analogous consideration can show the social character of reasonableness, as opposed to intellectual gifts, or cleverness. Reason, like language, can be said to be a product of social life. A Robinson Crusoe (marooned in early childhood) might be clever enough to master many difficult situations ; but he would invent neither language nor the art of argumentation. Admittedly, we often argue with ourselves ; but we are accustomed to do so only because we have learned to argue with others, and because we have learned in this way that the argument counts, rather than the person arguing. (This last consideration cannot, of course, tip the scales when we argue with ourselves.) Thus we can say that we owe our reason, like our language, to intercourse with other men.
The fact that the rationalist attitude considers the argument rather than the person arguing is of far-reaching importance. It leads to the view that we must recognize everybody with whom we communicate as a potential source of argument and of reasonable information ; it thus establishes what may be described as the 'rational unity of mankind'.
In a way, our analysis of 'reason' may be said to resemble slightly that of Hegel and the Hegelians, who consider reason as a social product and indeed as a kind of department of the soul or the spirit of society (for example, of the nation, or the class) and who emphasize, under the influence of Burke, our indebtedness to our social heritage, and our nearly complete dependence upon it. Admittedly, there is some similarity. But there are very considerable differences also. Hegel and the Hegelians are collectivists. They argue that, since we owe our reason to 'society' - or to a certain society such as a nation - 'society' is everything and the individual nothing ; or that whatever value the individual possesses is derived from the collective, the real carrier of all values. As opposed to this, the position presented here does not assume the existence of collectives ; if I say, for example, that we owe our reason to 'society', then I always mean that we owe it to certain concrete individuals - though perhaps to a considerable number of anonymous individuals - and to our intellectual intercourse with them. Therefore, in speaking of a 'social' theory of reason (or of scientific method), I mean more precisely that the theory is an inter-personal one, and never that it is a collectivist theory. Certainly we owe a great deal to tradition, and tradition is very important, but the term 'tradition' also has to be analysed into concrete personal relations. And if we do this, then we can get rid of that attitude which considers every tradition as sacrosanct, or as valuable in itself, replacing this by an attitude which considers traditions as valuable or pernicious, as the case may be, according to their influence upon individuals. We thus may realize that each of us (by way of example and criticism) may contribute to the growth or the suppression of such traditions.
The position here adopted is very different from the popular, originally Platonic, view of reason as a kind of 'faculty', which may be possessed and developed by different men in vastly different degrees. Admittedly, intellectual gifts may be different in this way, and they may contribute to reasonableness ; but they need not. Clever men may be very unreasonable ; they may cling to their prejudices and may not expect to hear anything worth while from others. According to our view, however, we not only owe our reason to others, but we can never excel others in our reasonableness in a way that would establish a claim to authority ; authoritarianism and rationalism in our sense cannot be reconciled, since argument, which includes criticism, and the art of listening to criticism, is the basis of reasonableness. This rationalism in our sense is diametrically opposed to all those modern Platonic dreams of brave new worlds in which the growth of reason would be controlled or 'planned' by some superior reason. Reason, like science, grows by way of mutual criticism ; the only possible way of 'planning' its growth is to develop those institutions that safeguard the freedom of this criticism, that is to say, the freedom of thought. It may be remarked that Plato, even though his theory is authoritarian, and demands the strict control of the growth of human reason in his guardians (as has been shown especially in chapter), pays tribute, by his manner of writing, to our inter-personal theory of reason ; for most of his earlier dialogues describe arguments conducted in a very reasonable spirit.
My way of using the term 'rationalism' may become a little clearer, perhaps, if we distinguish between a true rationalism and a false or a pseudo-rationalism. What I shall call the 'true rationalism' is the rationalism of Socrates. It is the awareness of one' limitations, the intellectual modesty of those who know how often they err, and how much they depend on others even for this knowledge. It is the realization that we must not expect too much from reason ; that argument rarely settles a question, although it is the only means for learning - not to see clearly, but to see more clearly than before.
What I shall call 'pseudo-rationalism' is the intellectual intuitionism of Plato. It is the immodest belief in one's superior intellectual gifts, the claim to be initiated, to know with certainty, and with authority. According to Plato, opinion - even 'true opinion', as we can read in the Timaeus - 'is shared only by the gods, and by very few men'. This authoritarian intellectualism, this belief in the possession of an infallible instrument of discovery, or an infallible method, this failure to distinguish between a man's intellectual powers and his indebtedness to others for all he can possibly know or understand, this pseudo-rationalism is often called 'rationalism', but it is diametrically opposed to what we call by this name.
My analysis of the rationalist attitude is undoubtedly very incomplete, and, I readily admit, a little vague ; but it will suffice for our purpose. In a similar way I shall now describe irrationalism, indicating at the same time how an irrationalist is likely to defend it.
The irrationalist attitude may be developed along the following lines. Though perhaps recognizing reason and scientific argument as tools that may do well enough if we wish to scratch the surface of things, or as means to serve some irrational end, the irrationalist will insist that 'human nature' is in the main not rational. Man, he holds, is more than a rational animal, and also less. In order to see that he is less, we need only consider how small is the number of men who are capable of argument ; this is why, according to the irrationalist, the majority of men will always have to be tackled by an appeal to their emotions and passions rather than by an appeal to their reason. But man is also more than just a rational animal, since all that really matters in his life goes beyond reason. Even the few scientists who take reason and science seriously are bound to their rationalist attitude merely because they love it. Thus even in these rare cases, it is the emotional make-up of man and not his reason that determines his attitude. Moreover, it is his intuition, his mystical insight into the nature of things, rather than his reasoning which makes a great scientist. Thus rationalism cannot offer an adequate interpretation even of the apparently rational activity of the scientist. But since the scientific field is exceptionally favourable to a rationalist interpretation, we must expect that rationalism will fail even more conspicuously when it tries to deal with other fields of human activity. And this expectation, so the irrationalist will continue his argument, proves to be quite accurate. Leaving aside the lower aspects of human nature, we may look to one of its highest, to the fact that man can be creative. It is the small creative minority of men who really matter ; the men who create works of art or of thought, the founders of religions, and the greatest statesmen. These few exceptional individuals allow us to glimpse the real greatness of man. But although these leaders of mankind know how to make use of reason for their purposes, they are never men of reason. Their roots lie deeper - deep in their instincts and impulses, and in those of the society of which they are parts. Creativeness is an entirely irrational, a mystical faculty ...
II
The issue between rationalism and irrationalism is of long standing. Although Greek philosophy undoubtedly started off as a rationalist undertaking, there were streaks of mysticism even in its first beginnings. It is (as hinted in chapter 10) the yearning for the lost unity and shelter of tribalism which expresses itself in these mystical elements within an fundamentally rational approach. And open conflict between rationalism and irrationalism broke out for the first time in the Middle Ages, as the opposition between scholasticism and mysticism. (It is perhaps not without interest that rationalism flourished in the former Roman provinces, while men from the 'barbarian' countries were prominent among the mystics.) In the seventeenth, eighteenth, and nineteenth centuries, when the tide of rationalism, of intellectualism, and of 'materialism' was rising, irrationalists had to pay some attention to it, to argue against it ; and by exhibiting its limitations, and exposing the immodest claims and dangers of pseudo-rationalism (which they did not distinguish from rationalism in our sense), some of these critics, notably Burke, have earned the gratitude of all true rationalists. But the tide has now turned, and 'profoundly significant allusions .. and allegories' (as Kant puts it) have become the fashion of the day. An oracular irrationalism has established (especially with Bergson and the majority of German philosophers and intellectuals) the habit of ignoring or at best deploring the existence of such an inferior being as a rationalist. To them the rationalists - or the 'materialists', as they often say - and especially, the rationalist scientist, are the poor in spirit, pursuing soulless and largely mechanical activities, and completely unaware of the deeper problems of human destiny and of its philosophy. And the rationalists usually reciprocate by dismissing irrationalism as sheer nonsense. Never before has the break been so complete. And the break in the diplomatic relations of the philosophers proved its significance when it was followed by a break in the diplomatic relations of the states.
In this issue, I am entirely on the side of rationalism. This is so much the case that even where I feel that rationalism has gone too far I still sympathize with it, holding as I do that an excess in this direction (as long as we exclude the intellectual immodesty of Plato's pseudo-rationalism) is harmless indeed as compared with an excess in the other. In my opinion, the only way in which excessive rationalism is likely to prove harmful is that it tends to undermine its own position and thus to further an irrationalist reaction. It is only this danger which induces me to examine the claims of an excessive rationalism more closely and to advocate a modest and self-critical rationalism which recognizes certain limitations. Accordingly, I shall distinguish in what follows between two rationalist positions, which I label 'critical rationalism' and 'uncritical rationalism' or 'comprehensive rationalism'. (This distinction is independent of the previous one between a 'true' and a 'false' rationalism, even though a 'true' rationalism in my sense will hardly be other than critical.)
Uncritical or comprehensive rationalism can be described as the attitude of the person who says 'I am not prepared to accept anything that cannot be defended by means of argument or experience'. We can express this also in the form of the principle that any assumption which cannot be supported either by argument or by experience is to be discarded. Now it is easy to see that this principle of an uncritical rationalism is inconsistent ; for since it cannot, in its turn, be supported by argument or by experience, it implies that it should itself be discarded. (It is analogous to the paradox of the liar, i.e. to a sentence which asserts its own falsity.) Uncritical rationalism is therefore logically untenable ; and since a purely logical argument can show this, uncritical rationalism can be defeated by its own chosen weapon, argument.
This criticism may be generalized. Since all argument must proceed from assumptions, it is plainly impossible to demand that all assumptions should be based on argument. The demand raised by many philosophers that we should start with no assumption whatever and never assume anything about 'sufficient reason', and even the weaker demand that we should start with a very small set of assumptions ('categories'), are both in this form inconsistent. For they themselves rest upon the truly colossal assumption that it is possible to start without, or with only a few assumptions, and still to obtain results that are worth while. (Indeed, this principle of avoiding all presuppositions is not, as some may think, a counsel of perfection, but a form of the paradox of the liar.)
Now all this is a little abstract, but it may be restated in connection with the problem of rationalism in a less formal way. The rationalist attitude is characterized by the importance it attaches to argument and experience. But neither logical argument nor experience can establish the rationalist attitude ; for only those who are ready to consider argument or experience, and who have therefore adopted this attitude already, will be impressed by them. That is to say, a rationalist attitude must be first adopted if any argument or experience is to be effective, and it cannot therefore be based upon argument or experience. (And this consideration is quite independent of the question whether or not there exist any convincing rational arguments which favour the adoption of the rationalist attitude.) We have to conclude from this that no rational argument will have a rational effect on a man who does not want to adopt a rational attitude. Thus a comprehensive rationalism is untenable.
But this means that whoever adopts the rationalist attitude does so because he has adopted, consciously or unconsciously, some proposal, or decision, or belief, or behaviour ; an adoption which may be called 'irrational'. Whether this adoption is tentative or leads to a settled habit, we may describe it as an irrational faith in reason. So rationalism is necessarily far from comprehensive or self-contained. This has frequently been overlooked by rationalists who thus exposed themselves to a beating in their own field and by their own favourite weapon whenever an irrationalist took the trouble to turn it against them. And indeed it did not escape the attention of some enemies of rationalism that one can always refuse to accept arguments, either all arguments or those of a certain kind ; and that such an attitude can be carried through without becoming logically inconsistent. This led them to see that the uncritical rationalist who believes that rationalism is self-contained and can be established by argument must be wrong. Irrationalism is logically superior to uncritical rationalism.
Then why not adopting irrationalism ? Many who started as rationalists but were disillusioned by the discovery that a too comprehensive rationalism defeats itself have indeed practically capitulated to irrationalism. (This is what has happened to Whitehead, if I am not quite mistaken.) But such panic action is entirely uncalled for. Although an uncritical and comprehensive rationalism is logically untenable, and although a comprehensive irrationalism is logically tenable, this is no reason why we should adopt the latter. For there are other tenable attitudes, notably that of critical rationalism which recognizes the fact that the fundamental rationalist attitude results from an (at least tentative) act of faith - from faith in reason. Accordingly, our choice is open. We may choose some form of irrationalism, even some radical or comprehensive form. But we are also free to choose a critical form of rationalism, one which frankly admits its origin in an irrational decision (and which, to that extent, admits a certain priority of irrationalism).
III
The choice before us is not simply an intellectual affair, or a matter of taste. It is a moral decision (in the sense of chapter 5). For the question whether we adopt some more or less radical form irrationalism, or whether we adopt that minimum concession to irrationalism which I have termed 'critical rationalism', will deeply affect our whole attitude towards other men, and towards the problems of social life. It has already been said that rationalism is closely connected with the belief in the unity of mankind. Irrationalism, which is not bound by any rules of consistency, may be combined with any kind of belief, including a belief in the brotherhood of man ; but the fact that it may easily be combined with a very different belief, and especially the fact that it lends itself easily to the support of a romantic belief in the existence of an elect body, in the division of men into leaders and led, into natural masters and natural slaves, shows clearly that a moral decision is involved in the choice between it and a critical rationalism.
As we have seen before (in chapter 5), and now again in our analysis of the uncritical version of rationalism, arguments cannot determine such a fundamental moral decision. But this does not imply that our choice cannot be helped by any kind of argument whatever. on the contrary, whenever we are faced with a moral decision of a more abstract kind, it is most helpful to analyse carefully the consequences which are likely to result from the alternatives between which we have to choose. For only if we can visualize these consequences in a concrete and practical way, do we really know what our decision is about ; otherwise we decide blindly. In order to illustrate this point, I may quote a passage from Shaw's Saint Joan. The speaker is the Chaplain ; he has stubbornly demanded Joan's death ; but when he sees her at the stake, he breaks down : 'I meant no harm. I did not know what it would be like .. I did not know what I was doing .. If I had known, I would have torn her from their hands. You don't know. You haven't seen : it is so easy to talk when you don't know. You madden yourself with words .. But when it is brought home to you ; when you see the thing you have done ; when it is blinding your eyes, stifling your nostrils, tearing your heart, then - then - O God, take away this sight from me !' There were, of course, other figures in Shaw's play who knew exactly what they were doing, and yet decided to do it ; and who did not regret it afterwards. Some people dislike seeing their fellow men burning at the stake, and others do not. This point (which was neglected by many Victorian optimists) is important, for it shows that a rational analysis of the consequences of a decision does not make the decision rational ; the consequences do not determine our decision ; it is always we who decide. But an analysis of the concrete consequences, and their clear realization in what we call our 'imagination', makes the difference between a blind decision and a decision made with open eyes ; and since we use our imagination very little, we only too often decide blindly. This is especially so if we are intoxicated by an oracular philosophy, one of the most powerful means of maddening ourselves with words - to use Shaw's expression.
The rational and imaginative analysis of the consequences of a moral theory has a certain analogy in scientific method. For in science, too, we do not accept an abstract theory because it is convincing in itself ; we rather decide to accept or reject it after we have investigated those concrete and practical consequences which can be more directly tested by experiment. But there is a fundamental difference. In the case of a scientific theory, our decision depends upon the results of experiments. If these confirm the theory, we may accept it until we find a better one. If they contradict the theory, we reject it. But in the case of a moral theory, we can only confront its consequences with our conscience. And while the verdict of experiments does not depend upon ourselves, the verdict of our conscience does.
I hope I have made it clear in which sense the analysis of consequences may influence our decision without determining it. And in presenting the consequences of the two alternatives between which we must decide, rationalism and irrationalism, I warn the reader that I shall be partial. So far, in presenting the two alternatives of the moral decision before us - it is, in many senses, the most fundamental decision in the ethical field - I have tried to be impartial, although I have not hidden my sympathies. But now I am going to present those considerations of the consequences of the two alternatives which appear to me most telling, and by which I myself have been influenced in rejecting irrationalism and accepting the faith in reason.
Let us examine the consequences of irrationalism first. The irrationalist insists that emotions and passions rather than reason are the mainsprings of human action. To the rationalist's reply that, though this may be so, we should do what we can to remedy it, and should try to make reason play as large a part as it possibly can, the irrationalist would rejoin (if he condescends to a discussion) that this attitude is hopelessly unrealistic. For it does not consider the weakness of 'human nature', the feeble and intellectual endowment of most men and their obvious dependence upon emotions and passions.
It is my firm conviction that this irrational emphasis upon emotion and passion leads ultimately to what I can only describe as crime. one reason for this opinion is that this attitude, which is at best one of resignation towards the irrational nature of human beings, at worst one of scorn for human reason, must lead to an appeal to violence and brutal force as the ultimate arbiter in any dispute. For if a dispute arises, then this means that those more constructive emotions and passions which might in principle help to get over it, reverence, love, devotion to a common cause, etc., have shown themselves in capable of solving the problem. But if that is so, then what is left to the irrationalist except the appeal to other and less constructive emotions and passions, to fear, hatred, envy, and ultimately, to violence ? This tendency is very much strengthened by another and perhaps even more important attitude which also is in my opinion inherent in irrationalism, namely, the stress on the inequality of men.
It cannot, of course, be denied that human individuals are, like all other things in our world, in very many respects very unequal. Nor can it be doubted that this inequality is of great importance and even in many respects highly desirable. (The fear that the development of mass production and collectivization may react upon men by destroying their inequality or individuality is one of the nightmares of our times.) But all this simply has no bearing upon the question whether or not we should decide to treat men, especially in political issues, as equals, or as much like equals as is possible ; that is to say, as possessing equal rights, and equal claims to equal treatment ; and it has no bearing upon the question whether we ought to construct political institutions accordingly. 'Equality before the law' is not a fact but a political demand based upon a moral decision ; and it is quite independent of the theory - which is probably false - that 'all men are born equal'. Now I do not intend to say that the adoption of this humanitarian attitude of impartiality is a direct consequence of a decision in favour of rationalism. But a tendency towards impartiality is closely related to rationalism, and can hardly be excluded from the rationalist creed. Again, I do not intend to say that an irrationalist could not consistently adopt an equalitarian or impartial attitude ; and even if he could not do so consistently, he is not bound to be consistent. But I do wish to stress the fact that the irrationalist attitude can hardly avoid becoming entangled with the attitude that is opposed to equalitarianism. This fact is connected with its emphasis upon emotions and passions ; for we cannot feel the same emotions towards everybody. Emotionally, we all divide men into those who are nearer to us, and those who are far from us. The division of mankind into friend and foe is a most obvious emotional division ; and this division is even recognized in the Christian commandment, 'Love thy enemies !' Even the best Christian who really lives up to this commandment (there are not many, as is shown by the attitude of the average good Christian towards 'materialists' and 'atheists'), even he cannot feel equal love for all men. We cannot really love 'in the abstract' ; we can love only those whom we know. Thus the appeal even to our best emotions, love and compassion, can only tend to divide mankind into different categories. And this will be more true if the appeal is made to lesser emotions and passions. Our 'natural' reaction will be to divide mankind into friend and foe ; into those who belong to our tribe, to our emotional community, and those who stand outside it ; into believers and unbelievers ; into compatriots and aliens ; into class comrades and class enemies ; and into leaders and led.
I have mentioned before that the theory that our thoughts and opinions are dependent upon our class situation, or upon our national interests, must lead to irrationalism. I now wish to emphasize the fact that the opposite is also true. The abandonment of the rationalist attitude, of the respect for reason and argument and the other fellow's point of view, the stress upon the 'deeper' layers of human nature, all this must lead to the view that thought is merely a somewhat superficial manifestation of what lies within these irrational depths. It must nearly always, I believe, produce an attitude which considers the person of the thinker instead of his thought. It must produce the belief that 'we think with our blood', or 'with our national heritage', or 'with our class'. This view may be presented in a materialist form or in a highly spiritual fashion ; the idea that we 'think with our race' may perhaps be replaced by the idea of elect or inspired souls who 'think by God's grace'. I refuse, on moral grounds, to be impressed by these differences ; for the decisive similarity between all these intellectually immodest views is that they do not judge a thought on its own merits. By thus abandoning reason, they split mankind into friends and foes ; into the few who share in reason with the gods, and the many who don't (as Plato says) ; into the few who stand near and the many who stand far ; into those who speak the untranslatable language of our own emotions and passions and those whose tongue is not our tongue. once we have done this, political equalitarianism becomes practically impossible.
Now the adoption of an anti-equalitarian attitude in political life, i.e. in the field of problems concerned with the power of man over man, is just what I should call criminal. For it offers a justification of the attitude that different categories of people have different rights ; that the master has the right to enslave the slave ; that some men have the right to use others as their tools. Ultimately, it will be used, as in Plato, to justify murder.
I do not overlook the fact that there are irrationalists who love mankind, and that not all forms of irrationalism engender criminality. But I hold that he who teaches that not reason but love should rule opens the way for those who rule by hate (Socrates, I believe, saw something of this when he suggested mistrust or hatred of argument is related to mistrust or hatred of man.) Those who do not see this connection at once, who believe in a direct rule of emotional love, should consider that love as such certainly does not promote impartiality. And it cannot do away with conflict either. That love as such may be unable to settle a conflict can be shown by considering a harmless test case, which may pass as representative of more serious ones. Tom likes the theatre and Dick likes dancing. Tom lovingly insists going to a dance while Dick wants for Tom's sake to go to the theatre. This conflict cannot be settled by love ; rather, the greater the love, the stronger will be the conflict. There are only two solutions ; one is the use of emotion, and ultimately of violence, and the other is the use of reason, of impartiality, of reasonable compromise. All this is not intended to indicate that I do not appreciate the difference between love and hate, or that I think that life would be worth living without love. (And I am quite prepared to admit that the Christian idea of love is not meant in a purely emotional way.) But I insist that no emotion, not even love, can replace the rule of institutions controlled by reason.
This, of course, is not the only argument against the idea of a rule of love. Loving a person means wishing to make him happy. (This, by the way, was Thomas Aquinas' definition of love.) But of all political ideals, that of making the people happy is perhaps the most dangerous one. It leads invariably to the attempt to impose our scale of 'higher' values upon others, in order to make them realize what seems to us of greatest importance for their happiness ; in order, as it were, to save their souls. It leads to Utopianism and Romanticism. We all feel certain that everybody would be happy in the beautiful, the perfect community of our dreams. And no doubt, there would be heaven on earth if we could all love one another. But, as I have said before (in chapter 9), the attempt to make heaven on earth invariably produces hell. It leads to intolerance. It leads to religious wars, and to the saving of souls through the inquisition. And it is, I believe, based on a complete misunderstanding of our moral duties. It is our duty to help those who need our help ; but it cannot be our duty to make others happy, since this does not depend upon us, and since it would only too often mean intruding on the privacy of those towards whom we have such amiable intentions. The political demand for piecemeal (as opposed to Utopian) methods corresponds to the decision that the fight against suffering must be considered a duty, while the right to care for the happiness of others must be considered a privilege confined to the close circle of their friends. In their case, we may perhaps have a certain right to try to impose our scale of values - our preferences regarding music, for example. (And we may even feel it our duty to open to them a world of values which, we trust, can so much contribute to their happiness.) This right of ours exists only if, and because, they can get rid of us ; because friendships can be ended. But the use of political means for imposing our scale of values upon others is a very different matter. Pain, suffering, injustice, and their prevention, these are the eternal problems of public morals, the 'agenda' of public policy (as Bentham would have said). The 'higher' values should very largely be considered as 'non-agenda', and should be left to the realm of laissez-faire. Thus we might say : help your enemies ; assist those in distress, even if they hate you ; but love only your friends.
This is only part of the case against irrationalism, and of the consequences which induce me to adopt the opposite attitude, that is, a critical rationalism. This latter attitude with its emphasis upon argument and experience, with its device 'I may be wrong and you may be right, and by an effort we may get nearer to the truth', is, as mentioned before, closely akin to the scientific attitude. It is bound up with the idea that everybody is liable to make mistakes, which may be found out by himself, or by others, or by himself with the assistance of the criticism of others. It therefore suggests the idea of impartiality. (This is closely related to the idea of 'scientific objectivity' as analysed in the previous chapter.) It's faith in reason is not only a faith in our own reason, but also - and even more - in that of others. Thus a rationalist, even if he believes himself to be intellectually superior to others, will reject all claims to authority since he is aware that, if his intelligence is superior to that of others (which is hard for him to judge), it is so only in so far as he is capable of learning from criticism as well as from his own and other people's mistakes, and that one can learn in this sense if one takes others and their arguments seriously. Rationalism is therefore bound up with the idea that the other fellow has a right to be heard, and to defend his arguments. It thus implies the recognition of the claim to tolerance, at least of all those who are not intolerant themselves. one does not kill a man when adopts the attitude of first listening to his arguments. (Kant was right when he based the 'Golden Rule' on the idea of reason. To be sure, it is impossible to prove the rightness of any ethical principle, or even to argue in its favour in just the manner in which we argue in favour of a scientific statement. Ethics is not a science. But although there is no 'rational scientific basis' of ethics, there is an ethical basis of science, and of rationalism.) Also the idea of impartiality leads to that of responsibility ; we have not only to listen to arguments, but we have a duty to respond, to answer, where our actions affect others. Ultimately, in this way, rationalism is linked up with the recognition of the necessity of social institutions to protect freedom of criticism, freedom of thought, and thus the freedom of men. And it establishes something like a moral obligation towards the support of these institutions. This is why rationalism is closely linked up with the political demand for practical social engineering - piecemeal engineering, of course - in the humanitarian sense, with the demand for the rationalization of society, for planning for freedom, and for its control by reason ; not by 'science', not by a Platonic, a pseudo-rational authority, but by that Socratic reason which is aware of its limitations, and which therefore respects the other man and does not aspire to coerce him - not even into happiness. The adoption of rationalism implies, moreover, that there is a common medium of communication, a common language of reason ; it establishes something like a moral obligation towards that language, the obligation to keep up its standards of clarity and to use it in such a way that it can retain its function as the vehicle of argument. That is to say, to use it plainly ; to use it as an instrument of rational communication, of significant information, rather than as a means of 'self-expression', as the vicious romantic jargon of most of our educationists has it. (It is characteristic of the modern romantic hysteria that it combines a Hegelian collectivism concerning ‘reason' with an excessive individualism concerning 'emotions' : thus the emphasis on language as a means of self-expression instead of a means of communication. Both attitudes, of course, are parts of the revolt against reason.) And it implies the recognition that mankind is united by the fact that our different mother tongues, in so far as they are rational, can be translated into one another. It recognizes the unity of human reason.
A few remarks may be added concerning the relation of the rationalist attitude to the attitude of readiness to use what is usually called 'imagination'. It is frequently assumed that imagination has a close affinity with emotion and therefore with irrationalism, and that rationalism rather tends towards an unimaginative dry scholasticism. I do not know whether such a view may have some psychological basis, and I rather doubt it. But my interests are institutional rather than psychological, and from an institutional point of view (as well as from that of method) it appears that rationalism must encourage the use of imagination because it needs it, while irrationalism must tend to discourage it. The very fact that rationalism is critical, whilst irrationalism must tend towards dogmatism (where there is no argument, nothing is left but full acceptance or flat denial), leads in this direction. Criticism always demands a certain degree of imagination, whilst dogmatism suppresses it. Similarly, scientific research and technical construction and invention are inconceivable without a very considerable use of imagination ; one must offer something new in these fields (as opposed to the field of oracular philosophy where an endless repetition of impressive words seems to do the trick). At least as important is the part played by imagination in the practical application of equalitarianism and of impartiality. The basic attitude of the rationalist, 'I may be wrong and you may be right', demands, when put into practice, and especially when human conflicts are involved, a real effort of our imagination. I admit that the emotions of love and compassion may sometimes lead to a similar effort. But I hold that it is humanly impossible for us to love, or to suffer with, a great number of people ; nor does it appear to me very desirable that we should, since it would ultimately destroy either our ability to help or the intensity of these very emotions. But reason, supported by imagination, enables us to understand that men who are far away, whom we shall never see, are like ourselves, and that their relations to one another are like our relations to those we love. A direct emotional attitude towards the abstract whole of mankind seems to me hardly possible. We can love mankind only in certain concrete individuals. But by the use of thought and imagination, we may become ready to help all who need our help.
All these considerations show, I believe, that the link between rationalism and humanitarianism is very close, and certainly much closer than the corresponding entanglement of irrationalism with the anti-equalitarian and anti-humanitarian attitude. I believe that as far as possible this result is corroborated by experience. A rationalist attitude seems to be usually combined with a basically equalitarian and humanitarian outlook ; irrationalism, on the other hand, exhibits in most cases at least some of the anti-equalitarian tendencies described, even though it may often be associated with humanitarianism also. My point is that the latter connection is anything but well founded.
IV
I have tried to analyse those consequences of rationalism and irrationalism which induce me to decide as I do. I wish to repeat that the decision is largely a moral decision. It is the decision to try to take argument seriously. Thisis the difference between the two views (Thisis는 This is로 원문의 띄어쓰기 오류이다. - 역자 주) ; for irrationalism will use reason too, but without any feeling of obligation; it will use it or discard it as it pleases. But I believe that the only attitude which I can consider to be morally right is one which recognizes that we owe it to other men to treat them and ourselves as rational.
Considered in this way, my counter-attack upon irrationalism is a moral attack. The intellectualist who finds our rationalism much too commonplace for his taste, and who looks out for the latest esoteric intellectual fashion, which he discovers in the admiration of medieval mysticism, is not, one fears, doing his duty by his fellow men. He may think himself and his subtle taste superior to our 'scientific age', to an 'age of industrialization' which carries its brainless division of labour and its 'mechanization' and 'materialization' even into the field of human thought. But he only shows that he is capable of appreciating the moral forces inherent in modern science. The attitude I am attacking can perhaps be illustrated by the following passage which I take from A. Keller ; a passage that seems to me a typical expression of this romantic hostility towards science : 'We seem to be entering upon a new era where the human soul is regaining its mystical and religious faculties, and protesting, by inventing new myths, against the materialization and mechanization of life. The mind suffered when it had to serve humanity as technician, as chauffeur ; it is reawakening again as poet and prophet, obeying the command and leadership of dreams which seem to be quite as wise and reliable as, but more inspiring and stimulating than, intellectual wisdom and scientific programmes. The myth of revolution is a reaction against the unimaginative banality and conceited self-sufficiency of bourgeois society and of an old tired culture. It is the adventure of men who have lost all security and are embarking on dreams instead of concrete facts.' In analysing this passage I wish first, but only in passing, to draw attention to its typical historicist character and to its moral futurism ('entering a new era', 'old and tired culture', etc.). But more important even than to realize the technique of the word-magic which the passage uses is to ask whether what it says is true. Is it true that our soul protests against the materialization and mechanization of our life, that it protests against the process we have made in the fight against the untold suffering through hunger and pestilence which characterized the Middle Ages ? Is it true that the mind suffered when it had to serve humanity as a technician, and was it happier to serve as a serf or a slave ? I do not intend to belittle the very serious problem of purely mechanical work, of a drudgery which is felt to be meaningless, and which destroys the creative power of the workers ; but the only practical hope lies, not in a return to slavery and serfdom, but in an attempt to make machinery take over this mechanical drudgery. Marx was right in insisting that increased productivity is the only reasonable hope of humanizing labour, and of further shortening the labour day. (Besides, I do not think that the mind always suffers when it has to serve humanity as a technician ; I suspect that often enough, the 'technicians', including the great inventors and the great scientists, rather enjoyed it, and that they were just as adventurous as the mystics.) And who believes that the 'command and leadership of dreams', as dreamt by our contemporary prophets, dreamers, and leaders, are really 'quite as wise and reliable as intellectual wisdom and scientific programmes' ? But we need only turn to the 'myth of revolution', etc., in order to see more clearly what we are facing here. It is a typical expression of the romantic hysteria and the radicalism produced by the dissolution of the tribe and by the strain of civilization (as I have described it in chapter 10). This kind of 'Christianity' which recommends the creation of myth as a substitute for Christian responsibility is a tribal Christianity. It is a Christianity that refuses to carry the cross of being human. Beware of these false prophets ! What they are after, without being aware of it, is the lost unity of tribalism. And the return to the closed society which they advocate is the return to the cage, and to the beasts.
It may be useful to consider how the adherents of this kind of romanticism are likely to react to such criticism. Arguments will hardly be offered ; since it is impossible to discuss such profundities with a rationalist, the most likely reaction will be a high-handed withdrawal, combined with the assertion that there is no language common to those whose souls have not yet 'regained their mystical faculties', and those whose souls possess such faculties. Now this reaction is analogous to that of the psycho-analyst (mentioned in the last chapter) who defeats his opponents not by replying to their arguments but by pointing our that their repressions prevent him from accepting psycho-analysis. It is analogous also to that of the socio-analyst who points out that the total ideologies of his opponents prevent them from accepting the sociology of knowledge. This method, as I admitted before, is good fun for those who practise it. But we can see here more clearly that it must lead to the irrational division of men into those who are near to us and those who are far from us. This division is present in every religion, but it is comparatively harmless in Mohammedanism, Christianity, or the rationalist faith, which all see in every man a potential convert, and the same may be said of psycho-analysis, which sees in every man a potential object of treatment (only that in the last case the fee for conversion constitutes a serious obstacle). But the division is getting less harmless when we proceed to the sociology of knowledge. The socio-analyst claims that only certain intellectuals can get rid of their total ideology, can be freed from 'thinking with their class' ; he thus gives up the idea of a potential rational unity of man, and delivers himself body and soul to irrationalism. And this situation gets very much worse when we proceed to the biological or naturalist version of this theory, to the racial doctrine that we 'think with our blood' or that we 'think with our race'. But at least as dangerous, since more subtle, is the same idea which when it appears in the cloak of a religious mysticism ; not in the mysticism of the poet or musician, but in that of the Hegelianizing intellectuals who persuades himself and his followers that their thoughts are endowed, because of special grace, with 'mystical and religious faculties' not possessed by others, and who thus claim that they 'think by God's grace'. This claim with its gentle allusion to those who do not possess God's grace, this attack upon the potential spiritual unity of mankind, is, in my opinion, as pretentious, blasphemous and anti-Christian, as it believes itself to be humble, pious, and Christian.
As opposed to the intellectual irresponsibility of a mysticism which escapes into dreams and of an oracular philosophy which escapes into verbiage, modern science enforces upon our intellect the discipline of practical tests. Scientific theories can be tested by their practical consequences. The scientist, in his own field, is responsible for what he says ; you can know him by his fruits, and thus distinguish him from the false prophets. one of the few who have appreciated this aspect of science is the Christian philosopher J. Macmurray (with whose views on historical prophecy I widely disagree, as will be seen in the next chapter) : 'Science itself', he says, 'in its own specific fields of research, employs a method of understanding which restores the broken integrity of theory and practice.' This, I believe, is why science is such an offence in the eyes of mysticism, which evades practice by creating myths instead. 'Science, in its own field,' says Macmurray in another place, 'is the product of Christianity, and its most adequate expression so far ; .. its capacity for co-operative progress, which knows no frontiers of race or nationality or sex, its ability to predict, and its ability to control, are the fullest manifestations of Christianity that Europe has yet seen.' I fully agree with this, for I too believe that our Western civilization owes its rationalism, its faith in the rational unity of man and in the open society, and especially its scientific outlook, to the ancient Socratic and Christian belief in the brotherhood of all men, and in intellectual honesty and responsibility. (A frequent argument against the morality of science is that many of its fruits have been used for bad purposes, for instance, in war. But this argument hardly deserves serious consideration. There nothing under the sun which cannot be misused, and which has not been misused. Even love can be made an instrument of murder ; and pacifism can be made one of the weapons of an aggressive war. on the other hand, it is only too obvious that it is irrationalism and not rationalism that has the responsibility for all national hostility and aggression. There have been only too many aggressive religious wars, both before and after the Crusades, but I do not know of any war waged for a 'scientific' aim, and inspired by scientists.)
It will have been observed that in the passages quoted, Macmurray emphasizes that what he appreciates is science 'in its own specific fields of research'. I think that this emphasis is particularly valuable. For nowadays one often hears, usually in connection with the mysticism of Eddington and Jeans, that modern science, as opposed to that of the nineteenth century, has become more humble, in that it now recognizes the mysteries of this world. But this opinion, I believe, is entirely on the wrong track. Darwin and Faraday, for instance, sought for truth as humbly as anybody, and I do not doubt that they were much more humble than the two great contemporary astronomers mentioned. For great as these are 'in their own specific fields of research', they do not, I believe, prove their humility by extending their activities to the field of philosophical mysticism. Speaking more generally, however, it may indeed be the case that scientists are becoming more humble, since the progress of science is largely by way of the discovery of errors, and since, in general, the more we know, the more clearly we realize what we do not know. (The spirit of science is that of Socrates.)
Although I am mainly concerned with the moral aspect of the conflict between rationalism and irrationalism, I feel that I should briefly touch upon a more 'philosophical' aspect of the problem ; but I wish to make it clear that I consider this aspect as of minor importance here. What I have in mind is the fact that the critical rationalist can turn the tables upon the irrationalist in another way as well. He may contend that the irrationlist who prides himself on his respect for the more profound mysteries of the world and his understanding of them (as opposed to the scientist who just scratches its surface) in fact neither respects nor understands its mysteries, but satisfies himself with cheap rationalizations. For what is a myth if not an attempt to rationalize the irrational ? And who shows greater reverence for mystery, the scientist who devotes himself to discovering it step by step, always ready to submit to facts, and always aware that even his boldest achievement will never be more than a stepping-stone for those who come after him, or the mystic who is free to maintain anything because he need not fear any test ? But in spite of this dubious freedom, the mystics endlessly repeat the same thing. (It is always the myth of the lost tribal paradise, the hysterical refusal to carry the cross of civilization.) All mystics, as F. Kafka, the mystical poet, wrote in despair, 'set out to say .. that the incomprehensible is incomprehensible, and that we knew before'. And the irrationalist not only tries to rationalize what cannot be rationalized, but he also gets hold of the wrong end of the stick altogether. For it is the particular, the unique and concrete individual, which cannot be approached by rational methods, and not the abstract universal. Science can describe general types of landscape, for example, or of man, but it can never exhaust one single individual landscape, or one single individual man. The universal, the typical, is not only the domain of reason, but it is also largely the product of reason, in so far as it is the product of scientific abstraction. But the unique individual and his unique actions and experiences and relations to other individuals can never be fully rationalized. And it appears to be just this irrational realm of unique individuality which makes human relations important. Most people would feel, for example, that what makes their lives worth living would largely be destroyed if they themselves, and their lives, were in no sense unique but in all and every respect typical of a class of people, so that they repeated exactly all the actions and experiences of all other men who belong to this class. It is the uniqueness of our experiences which, in this sense, makes our lives worth living, the unique experience of a landscape, of a sunset, of the expression of a human face. But since the day of Plato, it has been a characteristic of all mysticism that it transfers this feeling of the irrationality of the unique individual, and of our unique relations to individuals, to a different field, namely, to the field of abstract universals, a field which properly belongs to the province of science. That it is this feeling which the mystic tries to transfer can hardly be doubted. It is well known that the terminology of mysticism, the mystical union, the mystical intuition of beauty, the mystical love, have in all times, been borrowed from the realm of relations between individual men, and especially from the experience of sexual love (in all times는 at all times로 써야 한다. 어법의 오류이다. - 역자 주). Nor can it be doubted that this feeling is transferred by mysticism to the abstract universals, to the essences, to the Forms or Ideas. It is again the lost unity of the tribe, the wish to return into the shelter of patriarchal home and to make its limits the limits of our world, which stands behind this mystical attitude. 'The feeling of the world as a limited whole is the mystical feeling', says Wittgenstein. But this holistic and universalistic irrationalism is misplaced. The 'world' and the 'whole' and 'nature', all these are abstractions and products of our reason. (This makes the difference between the mystical philosopher and the artist who does not rationalize, who does not use abstractions, but who creates, in his imagination, concrete individuals and unique experiences.) To sum up, mysticism attempts to rationalize the irrational, and at the same time it seeks the mystery in the wrong place ; and it does so because it dreams of the collective, and the union of the elect, since it dares not face the hard and practical tasks which those must face who realize that every individual is an end in himself.
The nineteenth-century conflict between science and religion appears to me to be superseded. Since an 'uncritical' rationalism is inconsistent, the problem cannot be the choice between knowledge and faith, but only between two kinds of faith. The new problem is : which is the right faith and which is the wrong faith ? What I have tried to show is that the choice with which we are confronted is between a faith in reason and in human individuals and a faith in the mystical faculties of man by which he is united to a collective ; and that this choice is at the same time a choice between an attitude that recognizes the unity of mankind and an attitude that divides men into friends and foes, into masters and slaves.
Enough has been said, for the present purpose, to explain the terms 'rationalism' and 'irrationalism', as well as my motives in deciding in favour of rationalism, and the reason why I see in the irrational and mystical intellectualism which is at present so fashionable the subtle intellectual disease of our time. It is a disease which need not be taken too seriously, and it is not more than skin-deep. (Scientists, with very few exceptions, are particularly free from it.) But in spite of its superficiality, it is a dangerous disease, because of its influence in the field of social and political thought.
V
In order to illustrate the danger, I shall briefly criticize two of the most influential irrationalist authorities of our time. The first of them is A. N. Whitehead, famous for his work in mathematics, and for his collaboration with the greatest contemporary rationalist philosopher, Bertrand Russell. Whitehead considers himself a rationalist philosopher too ; but so did Hegel, to whom Whitehead owes a great deal ; indeed, he is one of the few Neo-Hegelians who know how much they owe to Hegel (as well as to Aristotle). Undoubtedly, he owes it to Hegel that he has the courage, in spite of Kant's burning protest, to build up a grandiose metaphysical systems with a royal contempt for argument.
Let us consider first one of the few rational arguments offered by Whitehead in his Process and Reality, the argument by which he defends his speculative philosophical method (a method which he calls 'rationalism'). 'It has been an objection to speculative philosophy', he writes, 'that it is over-ambitious. Rationalism, it is admitted, is the method by which advance is made within the limits of particular sciences. It is, however, held that this limited success must not encourage attempts to frame ambitious schemes expressive of the general nature of things. one alleged justification of this criticism is ill-success ; European thought is represented as littered with metaphysical problems, abandoned and unreconciled .. (But) the same criterion would fasten ill-success upon science. We no more retain the physics of the seventeenth century than we do the Cartesian philosophy of the century .. The proper test is not that of finality, but of progress.' Now this is in itself certainly a perfectly reasonable and even plausible argument ; but is it valid ? The obvious objection against it is that while physics progresses, metaphysics does not. In physics, there is a 'proper test of progress', namely the test of experiment, of practice. We can say why modern physics is better than the physics of the seventeenth century. Modern physics stands up to a great number of practical tests which utterly defeat the older system. And the obvious objection against speculative metaphysical systems is that the progress they claim seems to be just as imaginary as anything else about them. This objection is very old ; it dates back to Bacon, Hume, and Kant. We read, for example, in Kant's Prolegomena, the following remarks concerning the alleged progress of metaphysics : 'Undoubtedly there are many who, like myself, have been unable to find that this science has progressed by so much as a finger-breadth in spite of so many beautiful things which have long been published on this subject. Admittedly, we may find an attempt to sharpen a definition, or to supply a lame proof with new crutches, and thus to patch up the crazy quilt of metaphysics, or to give it a new pattern ; but this is not what the world needs. We are sick of metaphysical assertions. We want to have definite criteria by which we may distinguish dialectical fancies .. from truth.' Whitehead is probably aware of this classical and obvious objection ; and it looks as if he remembers it when in the sentence following the one quoted last he writes : 'But the main objection dating from the sixteenth century and receiving final expression from Francis Bacon, is the uselessness of philosophic speculation.' Since it was the experimental and practical uselessness of philosophy to which Bacon objected, it looks as if Whitehead here had our point in mind. But he does not follow it up. He does not reply to the obvious objection that this practical uselessness destroys his point that speculative philosophy, like science, is justified by the progress it makes. Instead, he contents himself with switching over to an entirely different problem, namely, the well-known problem 'that there are no brute, self-contained matters of fact', and that all science must make use of thought, since it must generalize, and interpret, the facts. on this consideration he bases his defence of metaphysical system : 'Thus the understanding of the immediate brute fact requires its metaphysical interpretation ..' Now this may be so, or it may not be so. But it is certainly an entirely different argument from the one he began with. 'The proper test is .. progress', in science as well as in philosophy : this is what we originally heard from Whitehead. But no answer to Kant's obvious objection is forthcoming. Instead, Whitehead's argument, once on the track of the problem of universality and generality, wanders off to such questions as the (Platonic) collectivist theory of morality : 'Morality of outlook is inseparably conjoined with generality of outlook. The antithesis between the general good and the individual interest can be abolished only when the individual is such that its interest is the general good ..'
Now this was a sample of rational argument. But rational arguments are rare indeed. Whitehead has learned from Hegel how to avoid Kant's criticism that speculative philosophy only supplies new crutches for lame proofs. This Hegelian method is simple enough. We can easily avoid crutches as long as we avoid proofs and arguments altogether. Hegelian philosophy does not argue ; it decrees. It must be admitted that, as opposed to Hegel, Whitehead does not pretend to offer the final truth. He is not a dogmatic philosopher in the sense that he presents his philosophy as an indisputable dogma ; he even emphasizes its imperfections. But like all Neo-Hegelians, he adopts the dogmatic method of laying down his philosophy without argument. We can take it or leave it. But we cannot discuss it. (We are indeed faced with 'brute facts' ; not with Baconian brute facts of experience, but with the brute facts of a man's metaphysical inspiration.) In order to illustrate this 'method of take it or leave it', I shall quote just one passage from Process and Reality ; but I must warn my readers that, although I have tried to select the passage fairly, they should not form an opinion without reading the book itself.
Its last part, entitled 'Final Interpretations', consists of two chapters, 'The Ideal Opposites' (where, for instance, 'Permanence and Flux' occurs, a well-known patch from Plato's system ; we have dealt with it under the name 'Change and Rest'), and 'God and the World'. I quote from this latter chapter. The passage is introduced by the two sentences : 'The final summary can only be expressed in terms of a group of antitheses, whose apparent self-contradiction depends on neglect of the diverse categories of existence. In each antithesis there is a shift of meaning which converts the opposition into a contrast.' This is the introduction. It prepares us for an 'apparent contradiction', and tells us that this 'depends' on some neglect. This seems to indicate that by avoiding that neglect we may avoid the contradiction. But how this is to be achieved, or what is, more precisely, in the author's mind, we are not told. We have just to take it or leave it. Now I quote the first two of the announced 'antitheses' or 'apparent self-contradictions' which are also stated without a shadow of argument : 'It is as true to say that God is permanent and the World fluent as that the World is permanent and God fluent. - It is as true to say that God is one and the World many, as that the World is one and the God many.' Now I am not going to criticize these echoes of Greek philosophical fancies ; we may indeed take it for granted that the one is just 'as true' as the other. But we have been promised an 'apparent self-contradiction' ; and I should like to know where a self-contradiction appears here. For to me not even the appearance of a contradiction is apparent. A self-contradiction would be, for instance, the sentence : 'Plato is happy and Plato is not happy', and all the sentences of the same 'logical form' (that is to say, all sentences obtained from the foregoing by substituting a proper name for 'Plato' and a property word for 'happy'). But the following sentence is clearly not a contradiction : 'It is as true to say that Plato is happy to-day as it is to say that he is unhappy to-day' (for since Plato is dead, the one is indeed 'as true' as the other) ; and no other sentence of the same or a similar form can be called self-contradictory, even if it happens to be false. This is only to indicate why I am at a loss as to this purely logical aspect of the matter, the 'apparent self-contradictions'. And I feel that way about the whole book. I just do not understand what its author wished it to convey. Very likely, this is my fault and not his. I do not belong to the number of the elect, and I fear that many others are in the same position. This is just why I claim that the method of the book is irrational. It divides mankind into two parts, a small number of the elect, and the large number of the lost. But lost as I am, I can only say that, as I see it, Neo-Hegelianism no longer looks like that old crazy quilt with a few new patches, so vividly described by Kant (이 문장에서 so vividly described by Kant 앞의 쉼표는 불필요하다. 그 이유는 의미상 이 분사구문이 앞의 명사 that old crazy quilt with a few new patches를 수식하기 때문이다. - 역자 주) ; rather it looks now like a bundle of a few old patches which have been torn from it (이 문장에 두 개의 대명사 it은 의미상으로 동일하지 않다. 그러므로 앞의 it은 Neo-Hegelianism을, 뒤의 it은 that old crazy quilt with a few new patches를 가리킬 것이다. 따라서 대명사 it을 한 번만 쓰는 것이 옳다. 문법적 오류로 보인다. - 역자 주).
I leave it to the careful student of Whitehead's book to decide whether it has stoop up to its own 'proper test', whether it shows progress as compared with the metaphysical systems of whose stagnation Kant complained ; provided he can find the criteria by which to judge such progress. And I will leave it to the same student to judge the appropriateness of concluding these remarks with another of Kant's comments upon metaphysics : 'Concerning metaphysics in general, and the views I have expressed on their value, I admit that my formulations may here or there have been insufficiently conditional and cautious. Yet I do not wish to hide the fact that I can only look with repugnance and even with something like hate upon the puffed-up pretentiousness of all these volumes filled with wisdom, such as are fashionable nowadays. For I am fully satisfied that the wrong way has been chosen ; that the accepted methods must endlessly increase these follies and blunders ; and that even the complete annihilation of all these fanciful achievements could not possibly be as harmful as this fictitious science with its accursed fertility.'
The second example of contemporary irrationalism with which I intend to deal here is A. J. Toynbee's A Study of History. I wish to make it clear that I consider this a most remarkable and interesting book, and that I have chosen it because of its superiority to all other contemporary irrationalist and historicist works I know of. I am not competent to judge Toynbee's merits as a historian. But as opposed to other contemporary historicist and irrationalist philosophers, he has much to say that is most stimulating and challenging ; I at least have found him so, and I owe to him many valuable suggestions. I do not accuse him of irrationalism in his own field of historical research. For where it is a question of comparing evidence in favour of or against a certain historical interpretation, he uses unhesitatingly a fundamentally rational method of argument. I have in mind, for instance, his comparative study of the authenticity of the Gospels as historical records, with its negative results ; although I am not able to judge his evidence, the rationality of the method is beyond question, and this is the more admirable as Toynbee's general sympathies with Christian orthodoxy might have made it hard for him to defend a view which, to say the least, is unorthodox. I also agree with many of the political tendencies expressed in his work, and most emphatically with his attack upon modern nationalism, and the tribalist and 'archaist', i.e. culturally reactionary tendencies, which are connected with it.
The reason why, in spite of all this, I single out Toynbee's monumental historicist work in order to charge it with irrationality, is that only when we see the effects of this poison in a work of such merit do we fully appreciate its danger.
What I must describe as Toynbee's irrationalism expresses itself in various ways. one of them is that he yields to a widespread and dangerous fashion of our time. I mean the fashion of not taking arguments seriously, and at their face value, at least tentatively, but of seeing in them nothing but a way in which deeper irrational motives and tendencies express themselves. It is the attitude of socio-analysis, criticized in the last chapter ; the attitude of looking at once for the unconscious motives and determinants in the social habitat of the thinker, instead of first examining the validity of the argument itself.
This attitude may be justified to a certain extent, as I have tried to show in the two previous chapters ; and this is especially so in the case of an author who does not offer any arguments, or whose arguments are obviously not worth looking into. But if no attempt is made to take serious arguments seriously, then I believe that we are justified in making the charge of irrationalism ; and we are even justified in retaliating, by adopting the same attitude towards the procedure. Thus I think that we have every right to make the socio-analytical diagnosis that Toynbee's neglect to take serious arguments seriously is representative of a twentieth-century intellectualism which expresses its disillusionment, or even despair, of reason, and of a rational solution of our social problems, by an escape into a religious mysticism.
As an example of the refusal to take serious arguments seriously, I select Toynbee's treatment of Marx. My reasons for this selection are the following. First, it is a topic which is familiar to myself as well as to the reader of this book. Secondly, it is a topic on which I agree with Toynbee in most of its practical aspects. His main judgements on Marx's political and historical influence are very similar to results at which I have arrived by more pedestrian methods ; and it is indeed one of the topics whose treatment shows his great historical intuition. Thus I shall hardly be suspected of being an apologist for Marx if I defend Marx's rationality against Toynbee. For this is the point on which I disagree : Toynbee treats Marx (as he treats everybody) not as a rational being, a man who offers arguments for what he teaches. Indeed, the treatment of Marx, and of his theories, only exemplifies the general impression conveyed by Toynbee's work that arguments are an unimportant mode of speech, and that the history of mankind is a history of emotions, passions, and religions, irrational philosophies, and perhaps of art and poetry ; but that it has nothing whatever to do with the history of human reason or of human science (that 절 that it has nothing whatever to do ~ 앞의 접속사 but은 의미상 and로 쓰는 것이 옳다. 어법의 오류로 보인다. - 역자 주). (Names like Galileo and Newton, Harvey and Pasteur, do not play any part in the first six volumes of Toynbee's historicist study of the life-cycle of civilizations.)
Regarding the points of similarity between Toynbee's and my general views of Marx, I may remind the reader of my allusions, in chapter 1, to the analogy between the chosen people and the chosen class ; and in various other places, I have commented critically upon Marx's doctrines of historical necessity, and especially of he inevitability of the social revolution. These ideas are linked together by Toynbee with his usual brilliance : 'The distinctively Jewish .. inspiration of Marxism', he writes, 'is the apocalyptic vision of a violent revolution which is inevitable because it is the decree .. of God himself, and which is to invert the present roles of Proletariat and Dominant Minority in .. a reversal of roles which is to carry the Chosen People, at one bound, from the lowest to the highest place in the Kingdom of This World. Marx has taken the Goddess "Historical Necessity" in place of Yahweh for his omnipotent deity, and the internal proletariat of the modern Western World in place of Jewry ; and his Messianic Kingdom is conceived as a Dictatorship of the Proletariat. But the salient features of the traditional Jewish apocalypse protrude through this threadbare disguise, and it is actually the pre-Rabbinical Maccabaean Judaism that our philosopher-impresario is presenting in modern Western costume ..' Now there is certainly not much in this brilliantly phrased passage with which I do not agree, as long as it is intended as nothing more than an interesting analogy. But if it is intended as a serious analysis (or part of it) of Marxism, then I must protest ; Marx, after all, wrote Capital, studied laissez-faire capitalism, and made serious and most important contributions to social science, even if much of them has been superseded. And, indeed, Toynbee's passage is intended as a serious analysis ; he believes that his analogies and allegories contribute to a serious appreciation of Marx ; for in an Annex to this passage (from which I have quoted only an important part) he treats, under the title 'Marxism, Socialism, and Christianity', what he considers to be likely objections of a Marxist to this 'account of the Marxian Philosophy'. This Annex itself is also undoubtedly intended as a serious discussion of Marxism, as can be seen by the fact that its first paragraph commences with the words 'The advocates of Marxism will perhaps protest that ..' and the second with the words : 'In attempting to reply to a Marxian protest on such lines as these ..' But if we look more closely into this discussion, then we find that none of the rational arguments or claims of Marxism is even mentioned, let alone examined. Of Marx's theories and of the question whether they are true or false we do not hear a word. The one additional problem raised in the Annex is again one of historical origin ; for the Marxist opponent envisaged by Toynbee does not protest, as any Marxist in his senses would, that it is Marx's claim to have based an old idea, socialism, upon a new, namely a rational and scientific, basis ; instead, he 'protests' (I am quoting Toynbee) ‘that in a rather summary account of Marxian Philosophy .. we have made a show analysing this into a Hegelian and a Jewish and a Christian constituent element without having said a word about the most characteristic .. part of Marx's message ... Socialism, the Marxian will tell us, is the essence of the Marxian way of life ; it is an orignal element in the Marxian system which cannot be traced to a Hegelian or a Christian or a Jewish or any other pre-Marxian source'. This is the protest put by Toynbee into the mouth of a Marxist, although any Marxist, even if he has read nothing but the Manifesto, must know that Marx himself as early as in 1847 distinguished about seven or eight different 'pre-Marxian sources' of socialism, and among them also those which he labelled 'Clerical' or 'Christian' socialism, and that he never dreamt of having discovered socialism, but only claimed that he had made it rational ; or, as Engels expresses it, that he had developed socialism from a Utopian idea into a science. But Toynbee neglects all that. 'In attempting', he writes, 'to reply to a Marxian protest on such lines as these, we shall readily admit the humaneness and constructiveness of the ideal for which socialism stands, as well as the importance of the part which this ideal plays in the Marxian "ideology" ; but we shall find ourselves unable to accept the Marxian contention that Socialism is Marx's original discovery. We shall have to point out, on our part, that there is a Christian socialism which was practised as well as preached before the Marxian Socialism was ever heard of ; and, when our turn comes for taking the offensive, we shall .. maintain that the Marxian Socialism is derived from the Christian tradition ..' Now I would certainly never deny this derivation, and it is quite clear that every Marxist could admit it without sacrificing the tiniest bit of his creed ; for the Marxist creed is not that Marx was the inventor of a humane and constructive ideal but that he was the scientist who by purely rational means showed that socialism will come, and in what way it will come.
How, I ask, can it be explained that Toynbee discusses Marxism on lines which have nothing whatever to do with its rational claims ? The only explanation I can see is that the Marxist claim to rationality has no meaning whatever for Toynbee. He is interested only in the question of how it originated as a religion. Now I should be the last to deny its religious character. But the method of treating philosophies or religions entirely from the point of view of their historical origin and environment, an attitude described in the previous chapters as historism (and to be distinguished from historicism), is, to say the least, very one-sided ; and how much this method is liable to produce irrationalism can be seen from Toynbee's neglect of, if not contempt for, that important realm of human life which we have here described as rational.
In an assessment of Marx's influence, Toynbee arrives at the conclusion that 'the verdict of History may turn out to be that a re-awakening of the Christian social conscience has been the one great positive achievement of Karl Marx'. Against this assessment, I have certainly not much to say ; perhaps the reader will remember that I too have emphasized Marx's moral influence upon Christianity. I do not think that, as a final appraisal, Toynbee takes sufficiently into account the great moral idea that the exploited should emancipate themselves, instead of waiting for acts of charity on the part of the exploiters ; but this, of course, is just a difference of opinion, and I would not dream of contesting Toynbee's right to his own opinion, which I consider very fair. But I should like to draw attention to the phrase 'the verdict of history may turn out', with its implied historicist moral theory, and even moral futurism. For I hold that we cannot and must not evade deciding in such matters for ourselves ; and that if we are not able to pass a verdict, neither will history.
So much about Toynbee's treatment for Marx. Concerning the more general problem of his historism or historical relativism, it may be said that he is well aware of it, although he does not formulate it as a general principle of the historical determination of all thought, but only as a restricted principle applicable to historical thought ; for he explains that he takes 'as the starting point .. the axiom that all historical thought is inevitably relative to the particular circumstances of the thinker's own time and place. This is a law of Human Nature from which no human genius can be exempt.' The analogy of this historism with the sociology of knowledge is rather obvious ; for 'the thinker's own time and place' is clearly nothing but the description of what may be called his 'historical habitat', by analogy with the 'social habitat' described by the sociology of knowledge. The difference, if any, is that Toynbee confines his 'law of Human Nature' to historical thought, which seems to me a slightly strange and perhaps even unintentional restriction ; for it is somewhat improbable that there should be a 'law of Human Nature from which no human genius can be exempt' holding not for thought in general but only for historical thought.
With the undeniable but rather trivial kernel of truth contained in such a historism or sociologism I have dealt in the last two chapters, and I need not repeat what I have said here. But as regards criticism, it may be worth while to point out that Toynbee's sentence, if freed from its restriction to historical thought, could hardly be considered an 'axiom' since it would be paradoxical. (It would be another form of the paradox of the liar ; for if no genius is exempt from expressing the fashions of his social habitat then this contention itself may be merely an expression of the fashion of its author's social habitat, i.e. of the relativistic fashion of our own day.) This remark has not only a forma-logical significance. For it indicates that historism or historio-analysis can be applied to historism itself, and this is indeed a permissible way of dealing with an idea after it has been criticized by way of rational argument. Since historism has been so criticized, I may now risk a historio-analytical diagnosis, and say that historism is a typical though slightly obsolescent product of our time ; or more precisely, of the typical backwardness of the social sciences of our time. It is the typical reaction to interventionism and to a period of rationalization and industrial co-operation ; a period which, perhaps more than any other in history, demands the practical application of rational methods to social problems. A social science which cannot quite meet these demands is therefore inclined to defend itself by producing elaborate attacks upon the applicability of science to such problems. Summing up my historio-analytical diagnosis, I venture to suggest that Toynbee's historism is an apologetic anti-rationalism, born out of despair of reason, and trying to escape into the past, as well as into prophecy of the future. If anything then historism must be understood as an historical product.
This diagnosis is corroborated by many features of Toynbee's work. An example is his stress upon the superiority of otherworldliness over action which will influence the course of this world. So he speaks, for instance, of Mohammed's 'tragic worldly success', saying that the opportunity which offered itself to the prophet of taking action in this world was 'a challenge to which his spirit failed to rise. In accepting .. he was renouncing the sublime role of the nobly-honoured prophet and contenting himself with the commonplace role of the magnificently successful statesman.' (In other words, Mohammed succumbed to a temptation which Jesus resisted.) Ignatius Loyola, accordingly, wins Toynbee's approval for turning from a soldier into saint. one may ask, however, whether this saint did not become a successful statesman too ? (But if it is a question of Jesuitism, then, it seems, all is different : this form of statesmanship is sufficiently other-worldly.) In order to avoid misunderstandings, I wish to make it clear that I myself would rate many saints higher than most, or very nearly all, statesmen I know of, for I am generally not impressed by political success. I quote this passage only as a corroboration of my historio-analytical diagnosis : that this historism of a modern historical prophet is a philosophy of escape.
Toynbee's anti-rationalism is prominent in many other places. For instance, in an attack upon the rationalistic conception of tolerance he uses categories like 'nobleness' as opposed to 'lowness' instead of arguments. The passage deals with the opposition between the merely 'negative' avoidance of violence, on rational grounds, and the true non-violence of otherworldliness, hinting that these two are instances of 'meanings .. which are .. positively antithetical to one another'. Here is the passage I have in mind : 'At its lowest the practice of Non-Violence may express nothing more noble and more constructive than a cynical disillusionment with .. violence .. previously practised ad nauseam ... A notorious example of Non-Violence of this unedifying kind is the religious tolerance in the Western World from the seventeenth century .. down to our day.' It is difficult to resist the temptation to retaliate by asking - using Toynbee's own terminology - whether this edifying attack upon Western democratic religious tolerance expresses anything more noble or more constructive than a cynical disillusionment with reason ; whether it is not a notorious example of that anti-rationalism which has been, and unfortunately still is, fashionable in our Western World, and which has been practised ad nauseam, especially from the time of Hegel, down to our day ?
Of course, my historio-analysis of Toynbee is not a serious criticism. It is only an unkind way of retaliating, of paying historism back in its own coin. My fundamental criticism is on very different lines, and I should certainly be sorry if by dabbling in historism I were to become responsible for making this cheap method more fashionable than it is already.
I do not wish to be misunderstood. I feel no hostility towards religious mysticism (only towards a militant anti-rationalist intellectualism) and I should be the first to fight any attempt to oppress it. It is not I who advocate religious intolerance. But I claim that faith in reason, or rationalism, or humanitarianism, or humanism, has the same right as any other creed to contribute to an improvement of human affairs, and especially to the control of international crime and the establishment of peace. 'The humanist', Toynbee writes, 'purposely concentrates all his attention and effort upon .. bringing human affairs under human control. Yet .. the unity of mankind can never be established in fact except within a framework of the unity of the superhuman whole of which Humanity is a part .. ; and our Modern Western school of Humanists have been peculiar, as well as perverse, in planning to reach Heaven by raising a titanic Tower of Babel on terrestrial foundations ..' Toynbee's contention, if I understand him rightly, is that there is no chance for the humanist to bring international affairs under the control of human reason. Appealing to the authority of Bergson, he claims that only allegiance to a superhuman whole can save us, and that there is no way for human reason, no 'terrestrial road', as he puts it, by which tribal nationalism can be superseded. Now I do not mind the characterization of the humanist's faith in reason as 'terrestrial', since I believe that it is indeed a principle of rationalist politics that we cannot make heaven on earth. But humanism is, after all, a faith which has proved itself in deeds, and which has proved itself as well, perhaps, as any other creed. And although I think, with most humanists, that Christianity, by teaching the fatherhood of God, may make a great contribution to establishing the brotherhood of man, I also think that those who undermine man's faith in reason are unlikely to contribute much to this end.
- "The Open Society and Its Enemies, Vol II Hegel and Marx", Karl R. Poppe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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