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측과 논박
과학적 지식의 성장
칼. R. 포퍼 著
루틀리쥐 출판사
런던과 뉴욕
F. A. 폰 하이에크에게
경험이란 모든 사람들이 자신들의 실수에 붙이는 이름이다.
오스카 와일드
우리가 지닌 전체 문제는 가능한 한 실수를 빨리 하는 것이다 ...
죤 아치볼드 휠러
서문
이 책을 구성하는 논문과 강의는 한 가지 매우 간단한 주제를 - 우리는 우리 자신의 실수로부터 배울 수 있다는 논제(論題) - 변형시킨 것이다. 그 논문과 강의는 지식에 관한 이론과 지식의 성장에 관한 이론을 전개한다. 우리가 지닌 문제를 해결하려는 우리의 흔히 잘못된 시도를 비판하는 겸손하지만 중요한 역할을, 이성적 논쟁에, 맡기는 것은 이성에 관한 이론이다. 그리고 우리가 저지르는 실수를 발견하는 데에서 우리에게 도움을 줄 동등하게 겸손하고 거의 동등하게 중요한 시험 역할을 우리의 관찰에 맡기는 것은 경험에 관한 이론이다. 그 이론이 우리가 지닌 오류가능성을 강조할지라도 회의론을 감내하지는 않는데, 그 까닭은 그 이론이 우리가 우리의 실수로부터 배울 수 있기 때문에 지식은 성장할 수 있다는 것과 과학이 진보할 수 있다는 것을 사실을 또한 강조하기 때문이다.
지식이, 특히 우리의 과학적 지식이 진보하는 방식은, 정당화되지 않은 (그리고 정당화될 수 없는) 기대에 의해서, 상상에 의해서, 우리가 지닌 문제에 대한 잠정적 해결책에 의해서, 추측에 의해서이다. 이 추측들은 비판에 의하여 통제된다; 다시 말해서, 시도된 논박에 의해서인데 그 논박에는 심하게 비판적인 시험이 포함된다. 추측들은 이 시험을 통과하여 살아남을 것이다; 그러나 추측들은 확실하게 설명될 수는 없다: 추측들은 확실하게 사실적으로 확립될 수도 없고 심지어 (확률 계산의 의미에서도) ‘개연성이 있는’ 것으로 확립될 수 없다. 우리가 지닌 추측에 대한 비판은 결정적인 중요성을 지닌다: 우리의 실수를 적시(摘示)함으로써 그 비판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해결하려고 노력하는 문제의 난점을 이해하도록 만든다. 이것이 우리가 우리의 문제를 더 잘 알게 되며, 더 성숙한 해결책을 제시할 수 있는 방법이다: 바로 이론에 대한 논박은 - 다시 말해서, 우리가 지닌 문제에 대한 진지한 잠정적 해결책에 대한 논박 - 항상 우리를 진리에 더 가깝게 데려가는 진보적 단계이다. 그래서 이것이 우리의 실수로부터 우리가 배울 수 있는 방법이다.
우리는 알지 못할지라도 - 다시 말해서, 확실하게 알지 못할지라도 - 우리가 우리의 실수로부터 배우기 때문에 우리의 지식은 성장한다. 우리의 지식이 성장할 수 있기 때문에, 여기서 이성(理性)에 대하여 절망할 이유가 없다. 그리고 우리가 확실하게 알 수 없기 때문에, 여기서 권위를 주장할 권위가, 우리가 지닌 지식에 관한 자만(自慢)에 대한 권위가, 혹은 자부심에 대한 권위가 있을 수 없다.
비판에 고도로 저항적임이 밝혀지는, 그리고 우리에게 특정 시점에서 알려진 다른 이론들보다 더 진리에 근접하여 보이는 우리의 이론들 중의 저 이론들이, 그 이론들의 시험 보고서와 함께, 당시의 ‘과학’으로서 묘사될 것이다. 그 이론들 중 어느 것도 확실하게 설명될 수 없기 때문에, 과학의 합리성을 구성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그 이론들이 지닌 결정적이고도 진보적인 특성이다 - 우리가 지닌 문제들을 다른 경쟁 이론들보다 더 잘 해결하는 그 이론들의 주장에 관하여 우리가 논쟁할 수 있다는 사실.
이것이 요컨대 이 책에서 전개된 근본적인 명제(命題)이며, 자연과학과 사회과학에 관한 철학 및 역사의 문제에서 역사적 및 정치적 문제에 이르기까지, 많은 주제에 적용된다.
나는 이 책에 통일성을 부여하기 위하여 나의 중심 명제(命題)에 의존했으며, 몇 개의 장(章)이 하찮게 중복되는 것을 수용될 수 있도록 만들기 위하여 나의 주제의 다양성에 의존했다. 나는 대부분의 장(章)을 수정하고 확충하고 다시 썼지만, 강좌와 방송 강좌의 독특한 특성을 바꾸는 일을 삼갔다. 강사(講師)의 속내를 드러내는 문체를 없애기는 수월했을 것이지만, 나는 나의 독자들이 저자의 확신을 수용하지 못했다고 느끼기보다는 그 문체를 참작하리라고 생각했다. 나는 몇 가지 반복되는 것을 내버려두어 이 책의 모든 장(章)이 자족적이 되도록 했다.
예상되는 논평가들에 대한 지침으로 나는 또한 논평을 포함시켰다 - 심하게 비판적인 논평; 그 논평은 이 책의 마지막 장(章)을 형성하며, 이 책 다른 곳에서 언급되지 않은 나의 주장의 필수적인 부분을 담고 있다. 나는 논리, 확률이론, 기타 등등의 분야에서 독자 편에서 작은 세부사항에 익숙함을 상정(想定)하는 저 모든 논문을 제외시켰다. 그러나 부록에서 나는 작은 세부사항에 관심을 갖게 된 사람들에게 유용할 몇 가지 전문적 기록을 결합시켜 놓았다. 부록과 4개의 장(章)은 여기서 처음으로 발간되었다.
오해를 피하기 위하여 나는 내가 ‘자유주의자(liberal)’, ‘자유주의(liberalism)’, 기타 등등의 용어를 (아마도 미국에서는 아닐지라도) 영국에서 여전히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의미로 항상 사용한다는 것을 완전히 명백하게 하고 싶다: 자유주의자(liberal)로써 나는 한 정당에 동조하는 사람이 아니라 개인적 자유를 귀중하게 여기고 모든 형태의 권력과 권위에 내재한 위험을 인식하는 사람만을 의미한다.
버클리(Berkeley), 캘리포니아(California) 1962년 봄 K. R. P.
감사의 말
여기에 수집된 논문들의 최초 출간 장소와 날짜는 각 논문의 경우에 첫 번째 장(章) 첫 번째 쪽 하단에 언급된다. 나에게 이 책에 이 논문들을 포함시키도록 허락한 것에 대하여 다양한 정기간행물의 편집자들에게 나는 감사를 표하고 싶다.
나는 다양한 방식으로 리처드 곰브리취(Richard Gombrich), 랜 프리드(Lan Freed), 줄리어스 프리드(Julius Freed) 박사, J. W. N. 와트킨스(Watkins), 윌리엄(William) W. 바틀리(Bartley) 박사, 이언 자비(Ian Jarvie) 박사, 브라이언 매지(Brian Magee), 그리고 A. E. 머스그레이브(Musgrave)에 의하여 원문 수정, 교정과 색인 준비에서 도움을 받았다. 나는 그들의 도움에 대하여 그들 모두에게 크게 의지했다. 내가 제일 큰 빚을 진 사람은 나의 아내이다. 나의 아내는 나보다 더 열심히 이 책을 위해서 노력했으며, 내 아내의 날카로운 비판은 무수한 개선을 낳았다.
K. R. P.
제 2 판본의 서문
이 새 판본은, 원문의 일반적인 수정은 차치하고, 초판본이 인쇄된 이래 축적된 상당한 양의 역사적 자료를 담고 있다. 가능한 한 나는 쪽수 매기기를 그대로 두어 초판본에 대한 참조사항이 거의 모든 경우에 두 번째 판본과 일치하도록 했다. 5장 말미에는 추가사항이 있으며, 이 책의 말미에는 새 부록 (6)이 붙었다. 앨런 머스그레이브(Alan Musgrave)는 색인을 완전히 수정했으며, 책의 활자를 개선하는 데 나를 크게 도왔다.
내가, 첫 번째 서문에서, 나의 - 우리는 우리의 실수로부터 배울 수 있다는 - 명제를 한 문장으로 요약하려고 노력한 다음에, 나는 아마도 여기서 그 서문에 한 두 마디를 여기서 덧붙일 것이다. 우리의 모든 지식은 우리가 저지르는 실수를 수정함을 통해서만 성장한다는 것은 나의 논제(論題)의 한 부분이다. 예를 들어, 오늘날 소위 ‘부정적 피드백(negative feed back)'은 우리의 실수로부터 배우는 일반적인 방법의 적용일 뿐이다 - 시행착오의 방법.
이제 이 방법을 적용하기 위하여 우리는 이미 어떤 목표를 분명히 가지고 있는 듯이 보인다: 우리가 이 목표로부터 벗어난다면 우리는 실수를 저지른다. (피드백 온도계가 분명히 미리 선정된 어떤 목표에 달려있다 - 어떤 분명한 온도.) 그러나 이런 방식으로 어떤 목표가 시행착오 방식의 특정 사례에 선행(先行)한다 할지라도, 이것은 우리의 목표들이 그 자체의 입장에서 반대로 이 방식에 종속되지 않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어떤 특정한 목표도 시행착오로써 변경될 수 있으며, 많은 목표들이 그렇게 변경되었다. (우리는 어떤 목표를 - 다른 수준의 목표- 더 잘 충족시키는 조절장치를 시행착오로 선정하면서, 우리의 온도계 위에 붙은 조절장치를 바꿀 수 있다.) 그래서 우리가 지닌 목표의 체계는 변할 뿐만 아니라, 그 체계는 또한 우리의 지식이 성장하는 방식과 밀접하게 유사한 방식으로 성장할 수 있다.
펜실베이니아, 버킹엄셔, 1065년 1월 K. R. P.
제 3 판본의 서문
많은 사소한 수정은 차치하고 몇 가지 추가사항이 본문에 덧붙여졌고, 그 중에는 타스키(Taski)의 진실 이론에 (223쪽 6절) 관한 나의 관점을 더 명확하게 서술한 것이 있다. 또한 몇 가지 부록이 새로 추가되었다.
펜실베이니아, 버킹엄셔, 1968년 4월 K. R. P.
서론
그러나 나보다 더 훌륭한 사람이 진실을 상상하기 위하여, 그리고 그의 작업에서 나의 실수를 증명하고 비난하도록 하기 위하여 나는 내가 배운 작은 적은 것을 대낮 속으로 보낸다. 이것을 보고 그것으로써 내가 그런 진실이 밝혀질 원인이었음에 나는 기뻐할 것이다.
알브레흐트 뒤러(ALBRECHT DÜRER)
나는 이제 심지어 간직했던 이론이 반증되는 데에 기뻐할 수 있는데, 그 이유는 심지어 이것이 과학적 성공이기 때문이다.
죤 커루 에클즈(JOHN CAREW ECCLES)
지식의 근원과 무지의 근원에 관하여
그러므로 진리는 스스로 드러낸다고 생각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
베네딕투스 데 스피노자(BENEDICTUS DE SPINOZA)
모든 사람은 현상으로부터 진실을 ... 구별하는 ... 기준을 자신의 주변에 지닌다.
죤 로크(JOHN LOCKE)
... 우리가 어떤 것에 대하여 생각하는 것은 불가능한데, 그것은 우리가 전에 우리의 외부 혹은 내부 감각에 의해서 느끼지 못한 것이다.
데이비드 흄(DAVID HUME)
이 강좌의 제목은, 내가 우려하는 바, 몇몇 비판적 귀를 거스를 것 같다. 그 까닭은 ‘지식의 근원’이 정리되어 있고, ‘오류의 근원’이 정리되어 있다 할지라도, ‘무지(無知)의 근원’이라는 표현은 또 다른 문제이기 때문이다. ‘무지(無知)는 부정적인 것이다: 무지(無知)는 지식의 부재(不在)이다. 그러나 도대체 어떻게 어떤 것의 부재(不在)가 근원을 가질 수 있는가?’? 이 질문은
? 데카르트와 스피노자는 한층 더 나아가서 무지뿐만 아니라 오류 또한 ‘부정적인 것’ - 지식의 결여, 그리고 심지어 우리의 자유의 합당한 사용이 결여된 것 - 이라고 주장했다. (데카르트의 철학원리[Principles], 1부 33-42절, 명상[Meditations] 3편과 4편, 그리고 스피노자의 윤리학[Ethics] 2부 정리 25 및 주석 그리고 그의 데카르트의 철학원리[Principles of Descartes' Philosophy] 1주 정리 15 및 주석 참조.)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리스토텔레스가 형이상학(Metaphysics) 1046a30-35에서 (또한 형이상학 1008b35, 1009a6, 1052a1, 토피카[Topica] 147b29, 분석론 후서[Posterior Analytics] 79b23, 그리고 범주론[Categories] 12a26-13a35도 참조)에서 서술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데카르트와 스피노자 또한 허위의 (혹은 오류의) ‘원인’에 대하여 말한다 (예를 들어 윤리학[Ethics] 2부 정리 41).
1960년 1월 29일 영국 학술원에서 발표한 연례 철학 강좌. 1960년 영국 학술원 회보에 처음 실렸고 1961년 옥스퍼드 대학 출판부에 의하여 따로 발간되었다.
내가 이 강좌를 위하여 선택한 제목을 내 친구에게 털어놓았을 때 그 친구가 나에게 던진 것이다. 답변에 몹시 궁했던 나는, 제목의 기묘한 언어적 효과가 실제로 의도된 것이라고 내 친구에게 설명하면서, 합리화를 급조하고 있었다. 나는 그에게, 이 제목의 표현을 통하여, 내가 몇 가지 기록되지 않은 철학적 교설에, 그 교설 중에서 (진리는 명백하다는 교설은 차치하고) 특히 무지(無知)를 단순한 지식결핍으로서가 아니라 우리의 정신을 도착(倒錯)시키고 우리의 정신에 독극물을 주입하며 우리 내부에서 지식에 저항하는 버릇을 주입하는 어떤 흉악한 힘의 작업으로서 해석하는 무지(無知)에 관한 음모론에, 주위를 환기시키고 싶었다고 말했다.
이 설명이 내 친구의 의구심을 덜었는지 나는 완전히 확신하지는 못하지만 나의 설명으로 인하여 그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여러분은 현재 나와 토론을 할 수 없는 규칙에 의하여 말을 하지 못하기 때문에 여러분의 경우는 다르다. 그래서 내가 나의 이야기를 다른 끝에서 - 무지의 근원보다는 지식의 근원으로써 - 시작하는 것을 허용하기 위하여, 내가 여러분의 의구심을, 당분간, 충분하게 덜었기를 나는 희망할 수 있을 따름이다. 그러나 나는 곧 무지의 근원으로, 그리고 또한 이 근원들에 대한 음모론으로 돌아오겠다.
I
내가 이 강좌에서 새롭게 검토하고자 하며, 내가 검토뿐만 아니라 해결하고자 하는 문제는 아마도 영국과 유럽대륙의 철학파 사이의 오래된 논쟁의 한 면(面)으로 묘사될 것이다 - 베이컨(Bacon), 로크(Locke), 버클리(Berkeley), 흄(Hume), 그리고 밀(Mill)의 고전적 경험론과 데카르트(Descartes), 스피노자(Spinoza), 그리고 라이프니찌(Leibniz)의 고전적 이성주의 혹은 주지주의 사이의 논쟁. 이 논쟁에서 유럽대륙 학파는 모든 지식의 궁극적 근원은 분명하고 뚜렷한 개념들에 대한 지적(知的) 직감이라고 주장한 반면, 영국학파는 모든 지식의 궁극적 근원이 관찰이라고 주장했다.
이 문제들의 대부분은 아직도 매우 생생하게 살아있다. 아직도 영국에서 지배적인 원칙인 경험론은 미국을 점령하였지만, 이제는 과학적 지식에 대한 진정한 이론으로서 유럽대륙에서조차 널리 수용된다. 데카르트적 주지주의는, 슬프게도, 현대 비이성주의의 다양한 형태를 띤 이런저런 것으로 너무 자주 왜곡되었다.
이 강좌에서 나는 경험주의와 이성주의 두 개 학파에 관하여 그들의 차이점은 그들의 유사성보다 훨씬 더 작다는 것과, 두 개 학파 모두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노력하겠다. 내 자신이 경험주의자이자 이성주의자 같은 것이라 할지라도 나는 경험주의와 이성주의 모두가 틀렸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관찰과 이성이 각각 중요한 역할을 지니고 있다 할지라도, 이 역할들은 그 역할들을 고전적으로 방어하는 사람들이 관찰과 이성에서 기인한다고 생각하는 그 역할과는 닮지 않았다고 나는 믿는다. 더욱 특히, 나는 관찰도 이성도, 오늘날까지 지식의 근원이라고 주장되었던 의미에서, 지식의 근원으로서 묘사될 수 없다는 것을 밝히려고 노력하겠다.
II
우리들의 문제는, 가장 추상적이며 동떨어져서 완전히 무관한 순수 철학의 영역이라고 여겨지는, 지식론 즉, 인식론에 속한다. 예를 들어 이 분야에서 가장 탁월한 사상가 중 한 사람인 흄(Hume)은, 자기가 얻은 결과 중 몇 가지의 동떨어짐과 추상성과 실생활에 대한 무관성 때문에, 자신의 글을 읽는 독자 누구도 한 시간 이상 동안 그 결과를 신뢰하지 않을 것이라고 예언했다.
칸트의 견해는 달랐다. 그는 ‘내가 무엇을 알 수 있는가?’라는 문제가 인간이 질문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세 가지 질문 중의 하나라고 생각했다. 버트런드 러셀(Bertrand Russell)은, 철학적 기질에서 흄(Hume)에 보다 가까움에도 불구하고, 이 문제에서 칸트의 편을 드는 듯싶다. 그래서 러셀이 과학, 윤리학, 그리고 심지어 정치에 관한 실제적 결과가 인식론에 기인한다고 생각했을 때 그가 옳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 까닭은 그가 인식론적 상대주의 즉, 객관적 진리와 같은 그런 것은 없다는 개념과 인식론적 실용주의 즉, 진리는 실용성과 동일하다는 개념은 권위주의적이자 전체주의적인 생각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사람들로 하여금 사고하게 하라, 1941년 77쪽 이하 참조.)
러셀의 견해는 물론 논쟁의 대상이 된다. 최근 몇몇 철학자들은 모든 참된 철학에 대하여, 그리하여 사람들이 상상할 수 있는 바, 인식론에 대하여, 근본적으로 무력하여 실생활과 무관하다는 교설을 전개했다. 철학은 자체의 본성으로써 중대한 결과를 가질 수 없어서 과학이나 정치에 영향을 미칠 수 없다고 그들은 말한다. 그러나 아이디어들이란 위험하고도 강력한 것이라고, 그리고 심지어 철학들도 때때로 아이디어들 만들어낸다고 나는 생각한다. 정말로, 모든 철학의 무능에 관한 이 새로운 교설은 사실에 의하여 충분히 논박된다는 데에 나는 의심하지 않는다.
상황은 실제로 매우 단순하다. 자유주의자의 신념은 - 법치(法治)의, 기본권의, 그리고 자유로운 사회의 가능성에 대한 신념 - 판사들이란 전지(全知)하지 않아서 사실에 관하여 실수를 저지를 수 있다는, 그래서 실제로 절대적인 정의(正義)는 특정 법률사건에서 완벽하게 실현되지는 않는다는 인정을 넘어 쉽게 살아남을 수 있다. 그러나 이 특정 경우에서 뿐만 아니라 다른 경우에서도 또한, 법치(法治)의, 정의(正義)의, 그리고 자유의 가능성에 대한 신념은 객관적인 사실은 없다고 가르치는 인식론 수용을 넘어 살아남을 수는 없다; 그리고 판사는 올바를 수 없는 것처럼 사실에 관하여 틀릴 수도 없기 때문에 사실에 관한 실수를 저질렀을 리가 없다는 것을 가르치는 인식론 수용을 넘어 살아남을 수 없다.
III
문예부흥(Renaissance)에 시작되어 개혁의 많은 변천과 종교 및 혁명전쟁을 통과하여, 영어권 사람들이 살아갈 특권을 지닌 자유로운 사회를 낳은 위대한 자유 운동인 이 운동은 유례없는 인식론적 낙관론에 의하여 철저히 고무되었다: 진리를 분별하여 지식을 얻는 인간의 능력에 대한 매우 난관적인 관점에 의하여.
지식의 가능성에 관한 이 새로운 낙관적 관점의 중심에는 진리는 명백하다는 교설이 놓여있다. 진리는 아마도 베일에 가려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진리는 스스로 드러날 것이다.? 그리고 진리가 스스로 드러나지 않는다면, 진리는 우리에 의하여 밝혀질 것이다. 베일을 벗겨내는 일이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적나라한 진리가 베일이 벗겨진 채 우리의 눈앞에 선다면, 우리에게는 그 진리를 볼, 그 진리를 거짓과 구분할, 그리고 그것이 진리이다는 것을 알, 능력이 있다.
? 이 장 제목 아래의 좌우명 참조: 스피노자의 하느님과 인간과 인간의 행복에 관하여(Of God, Man, and Human Happiness) 15장 (같은 구절은 윤리학[Ethic] 2부 정리 43의 주 ‘진실로 빛이 자체와 어둠을 드러내듯이, 진리도 그러하다: 진리는 자체의 척도이며, 거짓의 척도이다.’ 지성 개조론(De intell, em.) 35, 36절 서한 76[74], 문단의 말미 5[7]이다); 로크의 오성의 지침(Cond. Underst.) 3장. (또한 로마서[Romans] 1:19와 아래 이 책의 17장을 참조.)
현대과학과 현대기술의 탄생은, 그 주요 대변인이 베이컨(Bacon)과 데카르트(Descartes)인 이 낙관적 인식론에 의하여 고무되었다. 각자는 자신의 내부에 지식의 근원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진리의 문제에서 권위자에게 호소할 필요가 없다고 그들은 가르쳤다; 자신이 자연을 신중하게 관찰하기 위하여 사용할 자신이 지닌 감각적 지각(sense-perception)에서나, 혹은 지성에 의하여 명백하고 뚜렷하게 감지되는 않는 아이디어 수용을 거부함으로써 거짓으로부터 진리를 구분하기 위하여 자기가 사용할 자신이 지닌 지적(知的) 직감력에서.
사람은 알 수 있다: 그리하여 사람은 자유로울 수 있다. 이것이 인식론적 낙관론과 자유주의의 개념 사이의 연결을 설명하는 공식이다.
이 연결은 그 반대 연결에 의하여 일치된다. 인간의 이성에 대한, 진리를 분별할 인간의 능력에 대한, 불신(不信)은 거의 변함없이 인간에 대한 불신(不信)과 연결되어 있다. 그리하여 인식론적 비관론은, 역사적으로, 인간의 타락이라는 교설과 연결되어, 인간을 자신의 어리석음과 사악함으로부터 구할 강력한 전통의 확립과 강력한 권위의 설정을 요구하게 된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 나오는 종교재판관의 이야기 속에는 권위주의에 관한 이 이론의 두드러진 묘사와, 권위에 빠진 사람들의 지닌 부담에 대한 묘사가 있다.)
인식론적 비관론과 낙관론 사이의 대조는 근본적으로 인식론적 전통주의와 인식론적 이성주의 사이의 대조와 동일하다고 일컬어질 것이다. (나는 후자의 용어를 비이성주의에 반대가 되는, 그리고 이성주의가 데카르트적 주지주의뿐만 아니라 경험주의를 또한 포함하는, 보다 넓은 의미에서 사용하고 있다.) 그 까닭은 우리가 전통주의를 객관적이고 식별 가능한 진리가 없는 상태에서 전통의 권위와 혼란을 수용하는 선택에 직면하는 믿음으로서 해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성주의는, 물론, 어떤 전통과 어떤 권위도 철저한 비이성이나 편견이나 우연에 근거한 것으로 비판하고 거부할 이성의 권한과 경험적 과학의 권한을 항상 주장했던 반면.
IV
심지어 순수 인식론 같은 추상적인 연구도 사람들이 아마도 생각할 것처럼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가 믿었던 것처럼) 그렇게 순수하지 않고 그 개념들이, 크게는, 정치적 희망과 유토피아적 꿈에 의하여 동기화되고 무의식적으로 고취될지도 모른다는 것은 당혹스러운 사실이다. 이것은 인식론자에게 경고되어야 한다. 인식론자는 그것에 대하여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인식론자로서 나는 단 한 가지 관심을 가지고 있다 - 이 진리가 나의 정치적 개념에 들어맞든 아니든, 인식론의 문제에 관하여 진리를 발견하는 것. 그러나 나는 무의식적으로 나의 정치적 희망과 신념에 의하여 영향을 받기 쉽지 않을까?
나는 경험주의자 및 이성주의자 같은 사람일 뿐만 아니라 (그 용어의 영국적 의미에서) 자유주의자이기도 하다; 그러나 내가 자유주의자라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다양한 자유주의 이론을 탐색하며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거의 없다고 나는 느낀다.
내가 이런 종류의 비판적 검토에 몰두해 있는 동안 나는 특정 인식론적 이론들이 자유주의적 개념들을 전개하는 데에 한 역할을 발견하였다; 그리고 특히 다양한 형태의 인식론적 낙관론이 한 역할. 그리고 나는, 인식론자로서, 이 인식론적 이론들이 옹호될 수 없는 것으로서 거부해야 한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나의 이 경험은 우리의 꿈과 우리의 희망이 반드시 우리가 얻은 결과를 통제할 필요는 없다는, 그리고 진리를 탐색함에서, 우리가 가장 애착을 갖는 믿음들을 비판함으로써 시작하는 것이 우리가 지닌 최선의 계획일 것이라는, 요점을 예시할 것이다. 이것은 어떤 사람들에게 도착(倒錯)된 계획으로 보일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진리를 발견하고자 원하고 진리를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그렇게 느껴지지 않을 것이다.
V
특정 자유주의 개념에 내재된 낙관적 인식론을 검토하면서, 암묵적으로 자주 수용된다 할지라도 내가 알기로는 철학자들과 역사가들에 의하여 명시적으로 토론되지도 심지어 주목받지도 못한 한 무리의 교설을 나는 발견하였다. 그 교설들 중 가장 근본적인 교설이 내가 이미 언급한 것이다 - 진리는 명백하다는 교설. 그 교설 중에서 가장 이상한 교설은 무지(無知)에 관한 음모론인데, 그 이론은 명백한 진리의 교설에서 기이하게 생겨난 것이다.
진리는 명백하다는 교설로써 나는, 여러분은 기억할 것이다, 진리는 우리 앞에 적나라하게 놓인다면 항상 진리로서 인식될 수 있다는 낙관적 견해를 의미한다. 그리하여 진리는, 스스로 드러나지 않는다면, 베일이 벗겨져 덮개가 제거되기만 하면 된다. 이것이 이룩될 때 더 이상 논쟁의 필요성은 없다. 우리에게는 진리를 볼 눈이 주어졌고 그 진리를 볼 이성의 ‘자연적인 빛(natural light)’이 주어졌다.
이 교설은 데카르트와 베이컨 모두의 가르침의 핵심에 있다. 데카르트는 자신의 낙관론적 인식론을 신(神)의 진실성(veracitas dei)라는 중요한 이론에 근거한다. 우리가 진실하다고 명백하고 뚜렷하게 보는 것은 정말로 진실하다; 그 까닭은 그렇지 않다면 신(神)이 우리를 속이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신(神)의 진실성은 틀림없이 진리를 명백하기 만든다.
베이컨(Bacon)에게서 우리는 유사한 교설을 가진다. 그 교설은 자연의 진실성(vericitas naturae: truthfulness of Nature)이라는 교설로서 아마도 묘사될 것이다. 자연은 열려있는 책이다. 그 책을 순수한 생각으로 읽은 사람은 잘못 읽을 리가 없다. 오직 그의 정신이 편견에 의하여 오염되었다면 그는 오류에 빠질 수 있다.
이 마지막 말은 진리는 명백하다는 교설이 거짓을 설명할 필요를 창출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진리를 소유하는 것인 지식은 설명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진리가 명백하다면 어떻게 우리는 오류에 빠질 수 있는가? 대답은: 우리 자신이 죄에 가득 차서 명백한 진리 보기를 거부하기 때문이다; 혹은 우리의 정신이 교육과 전통, 혹은 우리가 원래 지닌 순수하고 무구한 정신을 도착(倒錯)시켰던 다른 사악한 영향력에 의하여 고착된 편견들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무지(無知)는 우리를 무지(無知)에 묶어두려고, 우리의 생각을 거짓으로 채움으로써 독약을 주입시키려고, 그리고 명백한 사실을 볼 수 없도록 우리의 눈을 가리려고, 음모를 꾸미는 세력들의 하는 일일 것이다. 그런 편견들과 그런 세력들은, 그러므로, 무지(無知)의 근원이다.
무지(無知)에 관한 음모론은 진실을 도착(倒錯)시키고 억압하며 노동자들의 생각을 거짓 이데올로기로 채우는 자본주의 언론의 음모로서 그 마르크스의 형태에서 꽤 잘 알려져 있다. 이 이데올로기 중에서 두드러진 것은 종교에 관한 교설들이다. 이 마르크스주의적 이론이 얼마나 비독창적인지를 발견하면 놀랍다. 사람들을 무지(無知)에 가두어 두는 사악하고 기만적인 사제(司祭)는 18세기의 평균적인 인물이어서, 내가 우려하는 바, 자유주의에 대한 영감을 준 사람이다. 그것은 로마 가톨릭 교회의 음모에 대한 신교도의 믿음까지, 그리고 또한 영국 성공회에 대하여 유사한 관점을 지녔던 성공회 반대파의 믿음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다른 곳에서 나는 이 신념의 이전 역사를 플라톤의 삼촌 크리티아스[Critias]까지 추적하였다; 나의 저서 열린사회와 그 적들 8장 ii부 참조.)
음모에 대한 이 기묘한 신념은, 진리에게 공평한 기회만 주어진다면 진리와 그러므로 선(善)은 틀림없이 승리한다는 낙관적 믿음의 거의 불가피한 결과이다. ‘진리와 거짓이 대결하도록 하라; 자유롭고 공개된 대결에서 누가 불리함에 놓인 진리를 보았던가?’ (죤 밀튼[John Milton]의 아레오파지티카[Areopagitica]. 프랑스 격언 진리는 항상 승리한다[La vérité triomphe toujours]와 비교하라.) 그래서 밀튼의 진리가 불리해졌을 때, 필요한 추리는 대결이 자유로우면서 공개적이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명백한 진리가 승리하지 않는다면, 그 진리는 틀림없이 악의적으로 억압되었다. 진리의 승리에 대한 낙관적인 신념에 토대를 둔 관용의 자세가 쉽게 흔들릴 것임을 사람들은 알 수 있다. (1959년 1월 22일 자 청취자[The Listener]에 실린 J. W. 와트킨스[Watkins]의 밀튼에 관한 글을 참조할 것.) 그 까닭은 진리의 승리에 대한 낙관적 신념은 관용의 자세와 화해하기 어려울 음모론으로 변하기 쉽기 때문이다.
나는 이 음모론에 일말의 진실도 없었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그러나 주로 음모론은, 그 음모론이 성장해 나왔던 명백한 진리의 이론이 신화(神話)였던 것과 꼭 마찬가지로, 신화(神話)였다.
그 까닭은 간단한 사실이 진리란 자주 손에 넣기가 어렵다와, 발견되어지자마자 진리는 쉽게 다시 실종된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릇된 신념은 경험에 대항하여 수천 년 동안을 음모의 도움이 있거나 없거나 생존하는 놀라운 힘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과학이론이, 그리고 특히 의학이론이 몇 가지 좋은 사례를 우리에게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 한 가지 사례는, 정말로, 일반적인 음모론 자체이다. 사악한 일이 발생할 때마다 그 일은 틀림없이 사악한 힘의 사악한 의지 때문이라는 그릇된 견해를 나는 의미한다. 이 견해의 다양한 형태가 우리 시대까지 생존해왔다.
그리하여 베이컨(Bacon)과 데카르트(Descartes)의 낙관적 인식론은 사실일 리가 없다. 그러나 아마도 이 이야기에서 가장 이상한 것은 이 잘못된 인식론이 역사에서 유례가 없는 지적(知的) 및 도덕적 혁명에 대한 주요 영감이었다는 것이다. 이 인식론은 사람들로 하여금 스스로 생각하도록 격려했다. 이 인식론은 지식을 통하여 사람들이 자신들과 다른 사람들을 노예상태와 비참함으로부터 아마도 해방시킬 것이라는 희망을 사람들에게 주었다. 이 인식론은 현대과학이 가능하도록 만들었다. 이 인식론은 언론검열과 자유로운 사고의 억압에 대항하는 투쟁의 토대가 되었다. 이 인식론은 영국 성공회 반대파적 양심의, 개인주의의, 인간의 존엄에 대한 새로운 의미의, 토대가 되었다; 보편적인 교육에 대한 요구의, 그리고 자유로운 사회에 대한 새로운 꿈의 토대가 되었다. 이 인식론으로 인하여 사람들은 자신들과 다른 사람들에게 책임을 느끼고 그들의 상황뿐만 아니라 동료 인간들의 상황을 개선하려고 열중하게 되었다. 이 인식론은 많은 훌륭한 이념을 고취하는 나쁜 이념의 사례이다.
VI
그러나 이 잘못된 인식론도 역시 파멸적 결과를 초래했다. 진리는 명백하다는 이론인 - 진리는 모든 사람이 보기를 원하기만 하면 모든 사람이 보도록 그곳에 있다는 - 이 이론은 거의 모든 종류의 광신(狂信)의 근간이다. 그 까닭은 오직 가장 타락한 사악함만이 명백한 진리 보기를 거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진리를 두려워할 이유를 지닌 사람들만이 진리를 억압하려고 음모를 꾸민다.
그러나 진리는 명백하다는 이론은 광신자(狂信者)들을 - 명백한 진리를 보지 못하는 모든 사람들은 틀림없이 악마에 의하여 지배당했다는 신념에 의하여 지배당한 사람들 - 낳을 뿐만 아니라, 아마도 비관적 인식론보다 덜 직접적이라 할지라도, 권위주의를 또한 초래할 것이다. 이것은 단지 일반적으로 진리는 명백하지 않기 때문에 그렇다. 주장되는 명백한 진리는 그러므로 해석과 확인이 끊임없이 필요할 뿐만 아니라, 재해석과 재확인이 끊임없이 필요하기도 하다. 권위는 거의 매일같이 명백한 진리가 될 수 있는 것을 선언하고 서술하도록 요구를 받으며, 권위는 그렇게 하기를 자의적이고 냉소적으로 배울 것이다. 그리고 실망한 많은 인식론자들은 자신들의 이전 낙관론에서 돌아서서 비관적 인식론을 토대로 빛나는 권위적인 이론을 세울 것이다. 모든 인식론자 중에서 가장 위대한 인식론자인 플라톤이 이 비극적 상황발전을 예시하는 것처럼 나에게 보인다.
VII
플라톤은 신(神)의 진실성이라는 데카르트의 교설 - 신(神)은 진실하여 우리를 기만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우리의 지적(知的) 직감은 우리를 기만하지 않는다는 교설, 혹은 다시 말해서 신(神)이 지식의 근원이기 때문이 우리의 지성이 지식의 근원이라는 교설 - 이전 역사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이 교설은 적어도 호머(Homer)와 헤시오드(Hesiod)까지 쉽게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 긴 역사를 가지고 있다.
우리들에게, 자신이 가지고 있는 근원에 대해서 언급하는 습관은 학자나 역사가에서 자연스럽게 보일 것이고, 그래서 이 습관이 시인들에게서 나오는 것을 발견하는 것은 아마도 다소 놀랍다. 그러나 그 습관은 시인들에게서 나온다. 그리스 시인들은 자신들이 지닌 지식의 근원에 대하여 언급한다. 그 근원들은 신적(神的)이다. 그 근원들은 뮤즈(Muse) 신들이다. ‘ ... 그리스 음유시인들은 소위 그들의 영감뿐만 아니라, 그들이 지닌 사실에 관한 실제적 지식이 뮤즈(Muse) 신들에서 기인한다고 생각한다. 뮤즈(Muse) 신들은 “실재하며 모든 것들을 안다” ... 헤시오드(Hesiod)는 ... 자신이 지닌 지식에 대하여 뮤즈(Muse) 신들에 의지한다고 항상 설명한다. 지식의 다른 근원들도 정말로 인정된다 .... 그러나 그는 뮤즈(Muse) 신들에게 가장 자주 자문을 구한다 .... 호머(Homer)도 그리스 군대의 편성목록 같은 그런 주제에 관하여 그렇게 한다.’라고 길버트 머레이(Gilbert Murray)는 말한다 (그리스 서사시의 발흥[The Rise of the Greek Epic], 3판 1924년 96쪽).
이 인용문이 보여주는 바와 같이, 시인들에게는 영감의 신적(神的) 근원뿐만 아니라, 지식의 신적(神的) 근원도 - 자신들의 이야기의 진실에 대한 신적(神的) 보증자 - 주장하는 습관이 있었다.
정확하게 동일한 두 가지 주장이 철학자 헤라클리투스(Heraclitus)와 파메니데스(Parmenides)에 의하여 제기되었다. 헤라클리투스는 자신을 ‘신이 들려 ... 미친 듯한 입으로 말하는’ 예언자로서 보는 듯하다 - 모든 지혜의 근원인 제우스(Zeus)에 의하여 신이 들린 (DK,? B 92, 32 그리고 93, 41, 64, 50을 참조). 그리고 파메니데스(Parmenides)는 한 편에는 호머와 헤시오드와 다른 편에는 데카르트 사이의 빠진 고리를 형성한다고 우리는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파메니데스의 길잡이이자 영감의 근원은 헤라클리투스에 의하여 (DK, B 28) 진실의 수호자로서 묘사되는 여신(女神) 디케(Dikē)이다.
? DK는 딜스- 크란츠(Diels-Kranz)의 저서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의 단편들(Fragmente der Vorsokratiker)의 약어이다.
파메니데스는 그 여신을 진실의 열쇠를 수호하는 사람과 보관하는 사람으로서, 그래서 자신이 지닌 모든 지식의 근원으로서 묘사한다. 그러나 파메니데스와 데카르트는 신적(神的) 진실성이라는 교설보다 더 많은 것을 공유하고 있다. 예들 들어 파메니데스는 자신의 신적(神的) 진실 보증자로부터 진실과 거짓을 구분하기 위하여, 시각, 청각, 그리고 미각을 배제하고 자신이 지성에만 의존해야 한다는 말을 듣는다. (헤라클리투스 B 54, 123 참조. B 88, 126은 관찰될 수 있는 대립자를 낳는 관찰될 수 없는 변화를 암시한다.) 그리고 심지어 데카르트처럼, 자신의 지식에 관한 주지주의적 이론 위에 자신이 세우는 파메니데스의 물리이론의 원리는 데카르트에 의하여 채택된 원리와 동일하다: 그 원리는 텅 빔의 불가능성이요 세계는 반드시 충만하다는 것이다.
플라톤의 이온(Ion)에서는 신적(神的) 영감과 - 시인의 신적(神的) 열광 - 진정한 지식의 신적(神的) 근원은 뚜렷이 구분된다. (이 주제는 파이드로스[Phaedrus], 특히 259e 이하에서 더 상세하게 전개되며, 해롤드 처니스[Harold Cherniss]가 필자에게 지적하였듯이 275b, 275c에서 심지어 플라톤은 근원의 문제와 진실의 문제를 구분할 것을 주장한다.) 플라톤은 시인들이 영감을 받는다는 것을 인정하지만, 시인들의 주장하는 사실에 관한 지식에 대하여 시인들에게 어떤 신적(神的) 권위를 거부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지닌 지식의 신적(神的) 근원이라는 교설은, 어느 정도 각자에게 지식의 신적(神的) 근원의 소유를 어느 정도 인정하는 플라톤의 유명한 상기설(theory of anamnēsis)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이 이론에서 말하는 지식은 특정한 역사적 사실에 관한 지식이라기보다는 사물의 본질이나 특성에 관한 지식이다.) 플라톤의 메논(Meno) (81b-81d)에 따르면 우리가 태어나기 이전에 우리의 불멸의 영혼이 알지 못하는 것은 없다. 그 까닭은 모든 본질은 비슷하고 동질인 것과 같이, 우리의 영혼도 틀림없이 모든 본질과 동질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영혼은 모든 본질을 알고 있다: 영혼은 모든 것을 알고 있다. (동종관계와 지식에 관하여 파이돈[Phaedo]의 79d, 국가[Republic]의 611d, 법률[Laws]의 899d 참조.) 태어나면서 우리는 망각한다; 그러나 우리는 비록 부분적일지라도, 우리의 기억과 우리의 지식을 회복할 것이다: 우리가 진리를 다시 보기만 한다면 우리는 진리를 알아볼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지식은 재인지(再認知: re-cognition)이다 - 우리가 예전에 알고 있던 본성이나 진정한 특성을 회상하거나 기억하는 것. (파이돈[Phaedo] 72e 이하, 75e와 비교.)
이 이론은 우리의 영혼이 태어나기 전에 이데아나 본질이나 본성이라는 신적(神的) 세상에 거주하면서 참여한다면 전지(全知)의 신적(神的) 상태에 놓여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람의 출생은 은총으로부터의 몰락이다; 사람의 출생은 지식의 자연적이거나 신적(神的) 상태로부터의 몰락이다; 그래서 사람의 출생은 사람이 지닌 무지(無知)의 근원이자 원인이다. (여기에 무지는 죄악이거나 적어도 죄악과 관련되어 있다는 개념의 씨앗이 있을지도 모른다; 파이돈[Phaedo]의 76d 참조.)
이 상기론(想起論: theory of anamnēsis)과 우리가 지닌 지식의 신적(神的) 근원이나 출처라는 교설 사이에는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은 분명하다. 동시에 상기론(想起論: theory of anamnēsis)과 명백한 진리의 교설 사이에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심지어 우리가 지닌 망각이라는 타락한 상태에서도, 우리가 진리를 본다면, 우리는 그것을 진리로서 인정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상기(想起: anamnēsis)의 결과로서, 진리는 망각되지 않았고 숨겨지지 않은 (alēthēs) 것의 상태로 복원된다: 그것이 명백한 것이다.
메논(Meno)의 한 아름다운 구절에서 소크라테스는 피타고라스 정리라는 특별한 경우의 증명을 ‘상기하도록’, 교육을 받지 못한 어린 노예를 도와줌으로써 이것을 입증한다. 여기에 정말로 데카르트 철학의 뿌리인 낙관적 인식론이 있다. 메논(Meno)에서 플라톤은 자신의 이론이 지닌 고도로 낙관적인 특성을 인식하고 있었던 듯 보이는데, 그 까닭은 플라톤이 자신의 이론을 사람들로 하여금 열심히 배우고 탐구하고 발견하도록 만드는 교설로서 묘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틀림없이 실망이 플라톤에게 찾아왔다; 그 까닭은 국가(Republic)에서 (그리고 파이드로스[Phaedrus]에서도 또한) 우리는 비관적 인식론의 단초를 발견하기 때문이다. 유명한 동굴 속에 갇힌 사람들의 이야기에서 (514 이하) 그는 우리가 지닌 경험의 세계가 실제 세상의 그림자이자 반영일 뿐임을 밝힌다. 그리고 그는 갇힌 사람들 중 한 사람이 동굴로부터 탈출하여 실제 세상을 대면한다 할지라도, 그는 실제 세상을 보고 이해하는 데에서 거의 극복 불가능한 난관을 경험할 것이다 - 뒤에 남은 사람들을 이해하도록 만드는 데에서 그가 겪을 난관은 말할 것도 없고. 실제 세상을 이해하는 길에 놓인 난관들은 거의 초인적이어서, 있다면 극소수만 실제 세상을 이해하는 신적(神的) 상태에 도달할 수 있다 - 진정한 지식의 즉, 에피스테메(epistēmē)의 신적(神的) 상태.
이것이 모든 사람에 관해서는 아니라 할지라도, 거의 모든 사람들에 관한 비관적 이론이다. (그 까닭은 진리는 소수 즉, 선택된 자에 의해서만 도달될 수 있을 것이라고 이것이 가르치기 때문이다. 이 소수 즉, 선택된 자에 관해서 이 비관적인 이론은 심지어 진리는 명백하다는 교설보다 더 격렬하게 낙관적이라고 사람들은 아마도 말할 것이다.) 이 비관적 이론의 권위주의적이고 전통주의적인 결과들이 법률(Laws)에 완전하게 부연되어 있다.
그리하여 우리는 낙관적 인식론에서 비관적 인식론으로의 최초 이전을 플라톤에게서 발견한다. 이 인식론 각각은 국가와 사회에 관한 두 가지 철저히 반대가 되는 철학 중 하나를 위한 토대를 형성한다: 한편으로는 데카르트 종류의 반(反)전통주의적이고 반(反)권위주의적이고 혁명적이며 유토피아적인 이성주의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권위주의적인 전통주의.
이 상황전개는 인간의 인식론적 몰락이라는 개념이 상기(想起: anamnēsis)라는 낙관적 교설의 의미에서 뿐만 아니라 비관적 의미에서도 해석될 수 있다는 사실과 연결되어 있을 것이다.
후자의 해석에서, 인간의 몰락은 모든 인간을 - 혹은 거의 모든 인간을 - 무지(無知)로 몰아넣는다. 사람들은 동굴의 이야기 속에서 (그리고 아마도, 뮤즈[Muse] 신들과 그들의 신적[神的] 가르침이 무시당했을 때, 도시의 몰락 이야기 속에서도 또한; 국가[Republic] 546d 참조) 이 개념의 흥미로운 옛 형태에 관한 반향을 감지할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사람들의 견해는 기만이며, 오도된 관습의 결과라는 파메니데스(Parmenides)의 교설을 나는 염두에 두고 있다. (이것은 모든 인간의 지식이 어림짐작이라는, 그리고 인간 자신의 이론은 기껏해야 진리에 흡사할 따름이라는 제노파네스[Xenophanes]의 교설에서 유래할 것이다.?) 오도된 관습이란 언어적인 관습이다: 그 관습은 존재하지 않는 것에 이름을 부여하는 데에 달려있다. 인간의 인식론적 타락이라는 개념은, 칼 라인하르트(Karl Reinhardt)가 제시한 바와 같이, 진리의 길에서 기만적인 견해의 길로의 전이(轉移)를 주시하는 여신(女神)의 말들에서 아마도 발견될 수 있다.?
그러나 너희들 또한 저 기만적인 견해가 어떻게 사실적으로
수용되어 만물을 통과하여 길을 내었는지 알게 되리라 ...
이제 그렇게 정비되어 진리처럼 철저하게 보이는 세상에 대하여
나는 너희들에게 말하리라;
그렇게 되면 너희들은 인간의 개념에 의하여 미혹되는 일이
더 이상 없으리라.
그리하여 인간의 타락이 모든 인간에게 영향을 미칠지라도, 진리는 은총에 의하여 선택된 자들에게만 밝혀질 것이다 - 심지어 인간들이 지닌 기만, 견해, 관습적 개념과 결정의 비실제적 세상에 관한 진리도: 실제적으로 수용되어 인정받을 현상에 관한 비실제적 세상.?
? 여기서 언급된 제노파네스(Xenophanes)의 단편은 DK, B 35로 이 책에서는 아래 5장 12부에 인용되어 있다. 진리유사함(truthlikeness)의 - 사실에 부분적으로 일치하는 교설의 (그리고 파메네데스[Parmenides]가 여기서 말하는 바와 같이, 그래서 ‘실제적으로 수용’될) - 개념에 대해서는 박진성[迫眞性:verisimilitude]이 확률(probability)과 대비되는 236쪽 6절 이하와 부록 3, 4, 6, 7을 특히 참조.
? 칼 라인하르트(Karl Reinhardt)의 파메니데스(Parmenides) 2판 26쪽 참조; 파메니데스의 원문을 위해서는 이 책의 5-11쪽 참조, 여기서 인용된 첫 번째 2행은 DK B 1: 31-32임. 세 번째 행은 파메니데스(Parmenides) DK B 8:60이며 제노파네스(Xenophanes) B 35 참조. 네 번째 행은 파메니데스(Parmenides) DK B 8:61임.
? 오류의 필연성에 관한 이 비관적 견해를 데카르트의 낙관론이나, ‘사실적 개념과 흡사한 (veris similes) 거짓 개념으로 우리를 고무시키는 불순한 정신을 꿈꾸는’ 사람들을 비웃는 스피노자의 (서한 76[74], 5[7]문단) 낙관론과 대비시키는 것은 흥미롭다; 아래 10장 14부와 부록 6 참조.
파메니데스(Parmenides)가 받은 계시와, 영원한 실재의 불변하는 세상과 박진성(迫眞性: verisimilitude)과 기만의 비실제적이고 변화하는 세상 모두에 관한 확실성에 소수가 도달할 것이라는 그의 신념은, 플라톤 철학의 주요 영감 중 두 가지였다. 그것은, 희망과 절망과 유보 사이를 오락가락하면서, 플라톤이 영원히 회귀하던 주제였다.
VIII
그러나 여기에서 우리의 흥미를 끄는 것은 플라톤의 낙관적 인식론으로 메논(Meno)에 나오는 상기설(想起說: theory of anamnēsis)이다. 그 설에는, 내가 믿는 바, 데카르트의 주지주의의 씨앗뿐만 아니라 아리스토텔레스와 특히 베이컨의 귀납이론이 담겨있다.
그 까닭은 메논(Meno)에 나오는 노예가, 자신의 영혼이 전지(全知)라는 탄생 이전의 상태에서 소유하고 있던 망각된 지식을 기억해내거나 되찾는 소크라테스의 사려 깊은 질문에 의하여, 도움을 받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는 귀납법의 창시자였다고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했을 때 (형이상학[Metaphysics] 1078b17-33; 또한 987b1 참조) 아리스토텔레스가 언급했던 것은, 내가 믿는 바, 테아이테토스(Theaetetus)에서 산파술(the art of midwifery or maieutic)이라고 불렸던 이 유명한 소크라테스식 방법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리고 베이컨 또한, ‘귀납법’으로써 특정 관찰된 사례로부터 보편적 법칙을 추론한다기보다는 사물의 본질이나 진정한 본성을 우리가 직감하고나 감지할 수 있는 지점까지 우리가 안내를 받는 방법을 의미했다고 나는 제안하고 싶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가 본 바와 같이, 정확하게 소크라테스의 산파법(maieutic)이 지닌 목표이다: 그 목표는 우리를 돕거나 이끌어 상기(想起: anamnēsis)에 다다르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상기(想起: anamnēsis)는 우리가 태어나기 전에, 우리가 은총으로부터 몰락하기 전에 우리가 알고 있던 본성이나 본질인 사물의 진정한 본성이나 본질을 보는 능력이다. 그리하여 산파법(maieutic)과 귀납법 두 가지 방법의 목표는 동일하다. (그런데 아리스토텔레스는 귀납법의 결과가 - 본질에 대한 직감 - 그 본질의 정의[定義]에 의하여 표현될 수 있다고 가르쳤다.)
? 아리스토텔레스는 ‘귀납법(epagōgē)’으로써 자신이 가끔 서로 연결하는 적어도 두 가지 다른 것을 의미했다. 하나는 우리가 ‘일반적인 원리를 직감하도록 유도’되는 방법이다 (메논[Meno]에 나오는 상기[想起: anamnēsis]에 관하여 분석론 전서[Anal. Pr.] 67a 22f; 분석론 후서[An. Post.] 71a 7). 다른 하나는 (토피카[Topics] 105a 13, 156a 4, 157a 34; 분석론 후서[Anal. Posteriora] 78a 35; 81b 5 이하.) (특정) 증거를 제시하는 방법이다 - 비판적 증거(critical evidence)나 반례(counter-examples)보다는 긍정적 증거. 첫 번째 방법은 더 오래되어서 소크라테스와 비판 및 반례에 관한 그의 산파법에 더 관련이 있을 수 있는 방법으로 나에게 보인다. 두 번째 방법은 귀납법을 논리적으로 체계화하려는 시도에서, 혹은 아리스토텔레스가 표현하는 바와 같이 (분석론 후서 68b 15 이하.), 유효한 ‘귀납법에서 유래하는 삼단 논법’을 구축하려는 시도에서, 시작되는 듯 나에게 느껴진다; 이것은, 유효하기 위하여, 틀림없이 물론 완전하거나 철저한 귀납법의 삼단 논법이다 (사례의 철저한 열거); 그래서 두 번째 방법의 의미에서 평범한 귀납법은 이 유효한 삼단 논법의 약화된 (그래서 무효한) 형태일 따름이다. (나의 저서 열린사회와 그 적들의 11장 주석 33과 비교.)
이제 두 가지 과정을 더 세밀하게 관찰하자. 소크라테스의 산파술은, 본질적으로, 편견을 파괴하려고 고안된 질문을 하는 데에 의존한다; 흔히 전통적이거나 유행하는 믿음인 그릇된 신념; 무지한 자만(自慢)의 정신에서 주어지는 그릇된 답변. 소크라테스 자신은 아는 체 하지 않았다. 그의 자세는, ‘소크라테스는 질문을 제시했지만 해답을 내놓지는 않았다; 그 까닭은 그가 알지 못한다고 고백했기 때문이다’라는 말에서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여 묘사된다. (소피스트[Sophist El.] 183b7; 테아이테토스[Theaetetus] 150c, 150d, 159c, 161b와 비교) 그리하여 소크라테스의 산파술(maieutic)은 어떤 신념을 가르칠 목적인 기법이 아니라, 영혼으로부터 영혼이 지니고 있는 거짓 신념, 표면적인 지식, 편견을 정화하거나 청소하는 기술이다 (테아이테토스[Theaetetus]의 암피드로미아[Amphidromia]에 관한 언급 참조; 파이돈[Phaedo] 67b, 69b, 69c와 비교). 소크라테스의 산파술은 우리가 지닌 신념을 의심하도록 우리에게 가르침으로써 이것을 이룩한다.
근본적으로 동일한 과정이 베이컨의 귀납법의 일부이다.
IX
베이컨의 귀납법의 틀은 이와 같다. 그는 과학의 신논리학(Novum Organum)에서 옳은 방법과 거짓 방법을 구분한다 (신논리학은 원래 신기관으로 예전에 번역되었으나 성균관 대학의 이한구 교수는 새로운 논리학 즉, 신논리학으로 번역한다. - 역자 주). 그가 옳은 방법에 붙인 이름인 ‘interpretatio naturae’는 보통 ‘자연의 해석(interpretation of nature)’으로, 거짓 방법에 붙인 이름인 ‘anticipatia mentis’는 ‘정신의 기대(anticipation of mind)’로 번역된다. 이 번역은 분명하게 보일지라도, 잘못된 것이다. ‘interpretatio naturae’로써 베이컨이 의미하는 것은 자연의 책을 읽기 혹은, 훨씬 더 낫게, 자연의 책을 상술하는 것이라고 나는 제시한다. (갈릴레이는 마리오 붕게[Mario Bunge]가 친절하게도 나에게 상기시켜준 갈릴레이 자신의 저서 황금 계량자[Il saggiatore] 6부의 유명한 구절에서, ‘우리 눈앞에 놓인 저 위대한 책 - 나는 우주를 의미한다’라고 말한다; 데카르트의 방법 서설[Discourse], 1부 참조.)
현대 영어에서 ‘해석(interpretation)’이라는 용어는 결정적으로 주관주의적이나 상대주의적 색조를 지닌다. 우리는 루돌프 세르킨(Rudolf Serkin)이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5번 황제 협주곡(Emperor Concerto)을 해석하는 것에 대하여 말할 때, 우리는 다양한 해석들이 있지만 이 해석은 세르킨의 해석임을 암시한다. 우리는 물론 세르킨의 해석이 가장 훌륭하지 않고 진실되지 않으며 베토벤의 의도에 가장 근접하지 않았다는 것을 암시하고 싶지 않다. 그러나 우리는 더 훌륭한 해석이 있다는 것을 상상할 수 없을지라도, ‘해석’이라는 용어를 사용함으로써 이 다른 읽기들 중 몇 가지가 동등하게 참일 것인지 아닌지의 의문은 열어놓은 채 우리는 다른 해석들이나 읽기들이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나는 여기서 ‘읽기(reading)’라는 단어를 ‘해석(interpretation)’과 동의어로서 사용했는데, 그 이유는 두 가지 의미가 매우 흡사할 뿐만 아니라 ‘읽기(reading)’와 ‘읽는다(to read)’가, ‘읽기’의 경우에 두 가지 의미 모두가 아직도 철저하게 사용된다는 것을 제외하고, ‘해석(interpretation)’과 ‘해석하다(to interpret)’의 수정과 비슷한 수정을 겪었기 때문이다. ‘나는 죤의 편지를 읽었다(I have read John's letter)’라는 표현에서, 우리는 평범하고 비(非)주관주의적인 의미를 지닌다. 그러나 ‘나는 죤의 편지의 이 구절을 완전히 다르게 읽었다’나 아마도 ‘이 구절에 대한 나의 읽기는 매우 다르다’는 ‘읽기’라는 단어의 나중 의미인 주관적이고 상대적인 의미를 예시할 것이다.
나는 원래 의미가 - 아마도 ‘스스로 읽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높은 소리로 읽기’ - 실제로 실종되었다는 것을 제외하고, ‘해석하다(interpret)’의 의미가 (‘번역하다[translate]의 의미에서가 아니라 할지라도) 똑같은 방식으로 변했다고 주장한다. 오늘날 ‘판사는 법을 해석해야 한다’는 표현조차도 판사에게는 법을 해석할 어떤 자유재량이 있음을 의미한다; 베이컨 시대에는 판사에게는 법을 있는 그대로 해석하여 단 한 가지 올바른 방식으로 상술하여 적용하는 의무가 있음을 그것이 의미했을지라도. 법 해석(Interpretatio juris [또는 legis])은 이것을 의미하거나 법을 비전문가에게 상세하게 설명하는 것을 의미한다. (베이컨의 학문의 존엄성과 진보에 관하여[De Augmentis] xlvi와 T. 맨리[Manley]의 해석자: ... 영국의 법률에서 사용되는 애매한 말과 용어들[The interpreter: ... Obscure Words and Terms used in the Lawes of this Realm], 1672 참조.) 그것으로 인하여 법률 해석가에게는 자유재량이 없다; 아무튼 법률 서류를 번역하는 선서한 해석가에게는 더 이상의 것이 허용되지 않을 것이다.
그리하여 ‘자연 해석’이라는 번역은 잘못된 것이다; 그 번역은 ‘자연에 대한 (올바른) 읽기’와 같은 것으로 대체되어야 한다; ‘법에 대한 (올바른) 읽기’와 비슷하게. 그래서 ‘자연의 책을 있는 그대로 읽기’ 혹은 훨씬 더 낫게 ‘자연의 책을 상술하는 것’이 베이컨이 의미했던 것이라고 나는 제안한다. 요점은 그 표현이 틀림없이 현대적 의미에서의 모든 해석을 피하는 것을 제시한다는 것과, 그 표현은 더욱 특히 명백하지 않은 원인이나 가설을 고려하여 자연에서 명백한 것을 해석하는 시도에 대한 제안을 담고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 까닭은 이 모든 것이 베이컨이 의미하는 바, 정신의 기대(anticipatio mentis)이기 때문이다. (가설들이 - 혹은 추측들 - 베이컨의 귀납법으로부터 나올 것이라는 가르침이 베이컨에 기인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오류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 까닭은 베이컨의 귀납법은 추측이라기보다는 확실한 지식을 낳기 때문이다.)
‘정신의 기대’의 의미에 관해서 우리는 로크(Locke)의 말만 인용하면 된다: ‘사람들은 자신의 정신의 최초 기대에 스스로를 던져버린다’ (인간 오성론[Conduct Underst.], 26). 이것은 실제로 베이컨으로부터 번역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기대(anticipatio)’가 ‘편견’이나 심지어 ‘미신’을 의미함을 매우 분명히 한다. 우리는 또한 제신(諸神)에 관하여 순진하거나 원시적이거나 미신적인 관점을 품고 있음을 의미하는 ‘anticipatio deorum’라는 표현에 관하여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문제를 훨씬 더 분명하게 하기 위하여: ‘편견’은 (데카르트의 철학원리[Princ.] I, 50 참조) 법률용어에서 파생되며, 옥스퍼드 영어사전에 따르면 ‘미리 판단하다(to prejudge)’라는 동사를 ‘미리 반대로 판단하다’의 - 다시 말해서, 판사의 의무를 위반하여 - 의미로 영어에 소개한 사람은 베이컨이었다.
그리하여 두 가지 방법은 (1) 지식 즉, epistēmē을 초래하며 ‘자연이라는 열린 책을 상술하는 것’과 (2) doxa 즉, 단지 짐작과 자연이라는 책의 오독(誤讀)을 초래하는 ‘자연을 틀리게 미리 판단하고 아마도 잘못 판단하는 정신의 편견’이다. 후자의 방법은 베이컨에 의하여 거부되었는데 사실상, 그 단어의 현대적 의미에서, 한 가지 해석 방법이다. 그것은 추측 혹은 가설의 방법이다 (그런데 내가 우연히도 확신하여 옹호자가 된 방법).
우리는 자연이라는 책을 올바르거나 진실하게 읽도록 어떻게 우리 자신을 대비할 수 있는가? 베이컨의 대답은: 우리의 정신으로부터 모든 기대나 추측이나 상상이나 편견을 정화함으로써 이다 (과학의 신논리학[Nov. Org.] i 68, 60 끝). 그렇게 우리의 정신을 정화하기 위하여 해야 할 일이 다양하다. 우리는 모든 종류의 ‘우상들’이나, 일반적으로 지닌 거짓 신념을 제거해야 한다; 그 까닭은 이것들이 우리의 관찰을 왜곡시키기 때문이다 (과학의 신논리학[Nov. Org.] i 97). 그러나 소크라테스처럼, 우리는 또한 우리가 발견하고 싶어하는 올바른 본질이나 본성의 사물의 종류에 관하여 우리가 지닌 편견을 파괴할 모든 종류의 반례(反例: counter-instances)에 신경을 써야 한다. 소크라테스처럼, 우리는 우리의 지성을 순화함으로써 우리의 영혼이 본질이나 본성의 영원한 빛을 대면하도록 준비시켜야 한다 (성 아우구스티누스[St Augustine]의 신의 나라[Civ. Dei] VIII 3 참조): 우리가 지닌 불순한 편견은 반례(反例: counter-instances)를 거울삼아 추방되어야 한다 (과학의 신논리학[Nov. Org.] ii 16 이하).
이런 방식으로 우리의 영혼이 깨끗해진 다음에만 우리는 자연이라는 열린 책인 명백한 진리를 열심히 상술하는 작업을 시작할는지도 모른다.
이 모든 것을 고려하여 베이컨의 (그리고 또한 아리스토텔레스의) 귀납법은 근본적으로 소크라테스의 산파법과 동일하다고 나는 의견을 낸다; 다시 말해서 정신으로 하여금 명백한 진리를 알아볼 수 있도록 만들기 위하여, 혹은 자연이라는 열린 책을 읽을 수 있도록 만들기 위하여 우리의 정신으로부터 편견을 제거함으로써 준비시키는 것. 방법론적 회의라는 데카르트의 방법도 또한 근본적으로 동일하다: 그 방법은 자명한 진리라는 움직일 수 없는 토대에 도달하기 위하여 정신이 지닌 모든 거짓 편견을 타파하는 방법이다.
무지의 상태는 사람이 은총에서 타락하면서 순진무구한 눈이 겪은 상처에 그 근원을 두고 있는 반면, 이 낙관적 인식론 안에서 어떻게 지식의 상태가 사람의 자연적이거나 순수한 상태로 진리를 볼 수 있는 순진무구한 눈의 상태인지를 우리는 이제 더 분명하게 볼 수 있다; 순화과정에 의하여 부분적으로 치유될 수 있는 상처. 그래서 우리는 왜 이 인식론이, 데카르트의 형태에서 뿐만 아니라 베이컨의 형태에서도, 근본적으로 모든 지식의 근원이 신적(神的) 권위인 종교적 교리인지를 더 분명하게 볼 수 있다.
플라톤의 신적(神的) ‘본질’이나 신적(神的) ‘본성’에 의하여, 그리고 자연의 진실성과 사람이 만든 전통의 기만성 사이의 전통적 그리스식 대립에 의하여 격려를 받아 베이컨은, 자신의 인식론에서, ‘신(神)’을 ‘자연’으로 갈음한다고 사람들은 아마도 말할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여신(女神) Natura에게 다가가기 전에 우리 자신을 정화해야 하는 이유일지도 모른다: 우리가 우리의 정신을 정화했을 때, 심지어 우리가 지닌 때때로 신뢰할 수 없는 감각들이 (플라톤에 의하여 절망적으로 불순하다고 생각되는) 순수해질 것이다. 지식의 근원은, 불순이 무지의 근원이 될는지도 모르기 때문에, 순수한 상태로 지켜져야 한다.
X
그들이 지녔던 인식론의 종교적 특징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신중하지 못하게, 혹은 무모하게 품고 있는 편견에 대한, 그리고 전통적 신념에 대한 베이컨과 데카르트의 공격은 분명히 반(反)권위적이고 반(反)전통주의적이다. 그 까닭은 그것들로 인하여 우리는 우리 스스로 그 진리를 감지한 신념들을 제외하고 모든 신념들을 버려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들의 공격은 확실히 권위와 전통에 대한 공격으로 의도되었다. 그것들은 시대의 유행이 수행하는 권위에 대항하는 전쟁, 아리스토텔레스의 권위와 학교의 전통에 대항하는 전쟁의 일부였다. 스스로 진리를 감지할 수 있다면 사람들에게는 그런 권위가 필요하지 않다.
그러나 베이컨과 데카르트가 자신들의 인식론을 권위로부터 해방시키는 데 성공했다고 나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이 종교적 권위인 자연이나 신(神)의 도움을 받았기 때문이라기보다는 훨씬 더 깊은 이유 때문에.
그들이 지닌 개인주의적 경향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감히 우리들이 지닌 비판적 판단력의 - 당신이나 나의 판단력 - 도움을 받지 않았다; 아마도 그들은 이것이 아마도 주관주의를 초래하여 독단을 불러올지도 모른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이유가 무엇이었든지, 그들이 그렇게 하기를 많이 원했다 할지라도 그들은 분명히 권위와 관련된 생각을 포기할 수 없었다. 그들은 한 가지 권위를 - 아리스토텔레스와 성경의 권위 - 또 다른 권위로 갈음할 수 있었을 뿐이다. 그들은 각자 새로운 권위의 도움을 받았다; 전자(前者)는 감각의 권위 후자(後者)는 지성의 권위.
이것은 그들이 커다란 문제를 해결하는 데 실패했음을 의미한다: 동시에 우리가 지닌 지식이 모두 개인적인 변덕이자 독단임을 암시하지 않고 어떻게 우리가 지닌 지식이 인간적인 - 너무나 인간적인 - 일임을 우리가 인정할 수 있는가?
그러나 이 문제는 오래 전에 목격되었고 해결되었다; 첫째로 제노파네스(Xenophanes)에 의하여 그 다음에 데모크리투스(Democrtitus)의 의하여 그리고 소크라테스에 의하여 (메논보다는 변명[Apology]에 등장하는 소크라테스). 해답은 우리 모두가 단독으로 그리고 집단적으로 실수를 저지를 것이고 흔히 정말로 실수를 저지르지만, 실수와 인간의 실수가능성에 관한 바로 이 생각이 또 다른 생각을 - 객관적 진리에 대한 생각 - 포함하고 있다는 깨달음에 놓여있다: 우리가 미치지 못할는지도 모르는 기준. 그러므로 실수가능성의 원리는 비관적 인식론의 일부로 간주되어서는 안 된다. 이 원리는, 자주 우리가 커다란 격차로 진리를 놓친다 할지라도, 우리가 진리를, 객관적 진리를 탐구할 것임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 원리는 우리가 진리를 존중한다면 우리의 실수를 끈질기게 찾음으로써 그 진리를 탐구해야함을 의미한다: 지칠 줄 모르는 이성적 비판, 그리고 자기비판에 의하여.
로테르담의 에라스무스(Erasmus of Rotterdam)는 이 소크라테스의 원리를 부활시키려고 시도했다 - 신중할지라도 중요한 원리인 ‘네 자신을 알라, 그리하여 얼마나 적게 네가 아는지를 네 자신에게 인정하라!’ 그러나 이 원리는 진리가 명백하다는 믿음에 의하여, 그리고 루터(Luther)와 칼빈(Calvin), 베이컨과 데카르트에 의하여 다른 방식으로 예시되고 가르쳐진 새로운 자기 확신에 의하여 파괴되었다.
이와 관련하여 데카르트의 회의(懷疑)와 소크라테스나 에라스무스나 몽테뉴(Montaigne)의 회의(懷疑) 사이의 차이점을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 소크라테스는 인간의 지식이나 지혜를 의심하여 지식이나 지혜를 소유하고 있다는 주장을 단호하게 거부한 반면, 데카르트는 모든 것을 의심했다 - 그러나 절대적으로 확실한 지식을 소유하고 끝났을 따름이다; 그 까닭은 자신의 보편적 의심으로 인하여 신(神) 진실성을 의심하게 될 것인데 그것이 터무니없다는 것을 그가 발견하기 때문이다. 보편적 의심은 터무니없음을 증명한 다음에, 우리는 안전하게 알 수 있다고, 우리는 현명할 수 있다고 그는 결론을 내린다 - 이성을 자연스럽게 고찰하여, 그 근원이 신(神)인 분명하고도 두드러진 생각과 그 근원이 우리 자신의 불순한 상상인 모든 다른 생각을 구분함으로써. 데카르트의 의심은, 우리가 보는 바, 진리의 기준을, 그리고 그 기준과 함께 지식과 지혜를 확보하는 방법을 확립하기 위한 산파법적 도구일 뿐이다. 그러나 변명(Apology)에 나오는 소크라테스에게, 지혜는 자신의 한계를 인식하는 데 놓여있었다; 우리 각자는 얼마나 적게 알고 있는지를 아는 데.
쿠사의 니콜라스(Nicolas of Cusa)와 로테르담의 에라스무스(Erasmus of Rotterdam)가 (그는 소크라테스에 대하여 언급한다) 부활시켰던 것이 본질적인 인간의 실수가능성에 관한 이 원리였다; 그리고 니콜라스와 에라스무스, 몽테뉴와 로크와 볼테르, 그 후에는 죤 스튜어트 밀(John Stuart Mill)과 버트런드 러셀이 관용에 관한 원리의 토대를 만든 것은 이 ‘인도주의적’ 원리였다 (밀튼이 의지했던 낙관적 교설인 진리는 승리할 것이라는 교설과 대비되는). ‘관용이란 무엇인가?’라고 볼테르는 자신의 철학 사전(Philosophical Dictionary)에서 묻는다; 그리고 그는 대답한다: ‘관용은 우리가 지닌 인간성의 필연적 결과이다. 우리 모두는 오류를 범할 수 있으며 실수하기 쉽다; 그러므로 서로의 어리석음을 용서하자. 이것이 자연권의 첫째 원리이다.’ (최근 실수가능성에 관한 원리가 정치적 자유의 이론에 대한 토대가 되었다; 다시 말해서, 강압으로부터의 자유. F. A. 하이에크[Hayek]의 자유의 헌법[The Constitution of Liberty], 특히 22쪽과 29쪽 참조.)
XI
베이컨과 데카르트는 관찰과 이성을 새로운 권위로서 정립했는데, 그들은 모든 개별인간 내부에 그것들을 정립했다. 그러나 그렇게 하면서 그들은 인간을 진리에 관하여 권위를 지닌 높은 부분과 - 베이컨의 관찰, 데카르트의 지성 - 낮은 부분의 두 부분으로 나누었다. 우리들의 평범한 자아인 우리들 내부의 인간의 약점을 구성하는 것은 이 낮은 부분이다. 그 까닭은 진리가 명백하다면, 오류에 대해서 홀로 책임이 있는 사람은 항상 ‘우리 우리자신’이기 때문이다. 비난을 받아야 하는 사람은 우리의 편견, 우리의 태만, 우리의 고집과 함께 우리다; 우리가 지닌 무지(無知)의 근원은 우리 우리자신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인간적 부분인 우리 자신, 즉 우리가 지닌 실수 가능한 견해(doxa)의, 우리가 지닌 결점의, 그리고 우리가 지닌 무지(無知)의 근원인 부분; 그리고 감각이나 지성과 같은 초인간적 부분인 우리를 지배하는 그 권위가 거의 신적(神的)인 진정한 지식(epistēmē)의 근원으로 분리된다.
그러나 이것으로 충분하지 않을 것이다. 그 까닭은 데카르트의 물리학이, 여러 면에서 찬탄을 받을만하다 할지라도, 틀렸음을 우리가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데카르트의 물리학은, 데카르트가 생각하기에, 명백하고 뚜렷하여 틀임없이 진실인 개념에만 근거하고 있었다. 그리고 지식의 근원으로서의 감각의 권위에 관하여, 감각이 신뢰받을만하지 못하다는 사실은 심지어 파메니데스(Parmenides) 이전 고대인들에게, 예를 들어 제노파네스(Xenophanes)와 헤라클리투스에게 알려져 있었다; 그리고 물론 데모크리투스(Democritus)와 플라톤에게도. (이 책의 164쪽 여섯째 줄 이하 참조.)
고대의 이 가르침이, 현상론자들과 실증주의자들을 포함하여, 현대 경험주의자들에 의하여 거의 무시될 수 있다는 것은 이상하다; 그러나 이 가르침은 실증주의자들과 현상론자들이 제기하는 문제들 대부분에서, 그리고 그들이 제시하는 해답에서, 무시된다. 이유는 이러하다; 실수를 저지르는 것은 우리의 감각이 아니라, 우리의 감각에 의하여 우리에게 ‘주어진’ 것을 우리가 해석하는 데서 실수를 저지르는 것은 항상 ‘우리 자신’이라고 그들은 믿는다. 우리의 감각은 진리를 말하지만, 우리가, 예를 들어, 우리의 감각이 우리에 말하는 것을 언어로 - 관습적이고 인공적이며 불완전한 언어 - 표현하려고 노력할 때 우리는 실수를 저지를 것이다. 편견으로 물들어 있을 것이기 때문에 결점이 있는 것은 우리의 언어적 묘사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쓰는 인공적인 언어가 틀렸다. 그러나 그렇다면, 중요한 의미에서, 우리의 언어도 또한 우리에게 ‘주어졌다’는 것이 발견되었다: 우리의 언어가 여러 세대의 지혜와 경험을 구체화했다는 것과, 그래서 우리가 우리의 언어를 오용한다면 우리의 언어는 비난을 받아서는 안 된다는 것. 그래서 언어 또한 우리를 속일 수 없는 진실한 권위가 되었다. 우리가 유혹에 빠져서 언어를 헛되게 사용한다면, 뒤따르는 문제에 대하여 비난을 받아야 하는 사람은 우리다. 그 까닭은 언어가 질투하는 신(神)이어서 자신의 말을 헛되게 수용하는 사람을 죄가 없다고 생각하지 않고 암흑과 혼동 속으로 내던질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와 우리의 언어를 (혹은 언어의 오용[誤用]) 비난함으로써, 감각의 (그리고 심지어 언어의) 신적(神的) 권위를 지지하는 것이 가능하다. 그러나 그것은 이 권위와 우리 자신 사이의 격차를 넓히는 대가를 치르고서만 가능하다: 우리가 진실한 여신(女神)인 자연에 관한 권위적 지식을 얻을 수 있는 순수한 근원과, 우리가 지닌 죄진 불순한 자아 사이의: 신(神)과 인간 사이의. 전에 지적된 바와 같이, 내가 믿는 바, 베이컨에게서 찾아 볼 수 있는 자연의 진실성이라는 이 개념은 그리스인들로부터 유래한다; 그 까닭은 그 개념이, 플라톤에 따르면 핀다르(Pindar)에게서 비롯되는 자연과 인간 관습 사이의 고전적 대립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파메니데스(Parmenides)에게서 찾아볼 자연과 인간 관습 사이의 고전적 대립의 일부; 그리고 파메니데스에 의하여, 그리고 몇몇 소피스트에 의하여 (예를 들어, 히피아스[Hippias]에 의하여) 그리고 부분적으로 플라톤 자신에 의하여서도 신적(神的) 진리와 인간적인 실수, 혹은 심지어 거짓 사이의 대립과 동일시된다. 베이컨 이후에 그의 영향을 받아서 자연은 신성하고 진실하다는, 그리고 모든 오류나 거짓은 우리 자신이 지닌 인간적 관습의 기만성에 기인한다는 생각은, 철학과 과학 그리고 정치의 역사에서 뿐만 아니라 시각예술의 역사에서도 계속해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예를 들어 이 생각은 E. H. 곰브리취(Gombrich)의 예술과 환상(Art and Illusion)에서 인용된 자연, 진실성, 편견 그리고 관습에 관한 컨스터블(Constable)의 매우 흥미로운 이론으로부터 밝혀질 것이다 (죤 컨스터블은 영국의 화가로 자연에 대한 섬세한 묘사를 특징으로 그림을 그렸다. - 역자 주). 그 생각은 문학의 역사에서, 그리고 심지어 음악의 역사에서 또한 중요한 역할을 했다.
XII
어떤 서술에 관한 진실은 그 서술의 근원을 - 다시 말해서 그 서술의 기원 - 탐구함으로써 결정될 것이라는 이상한 견해는 아마도 해소될 어떤 논리적 실수에 기인하는 것으로서 설명될 수 있을까? 혹은 우리는 그것을 종교적 신앙과 관련하여 또는 심리학적 관계로 - 아마도 부모의 권위를 언급하면서 - 설명하는 것보다 더 잘 할 수 없을까? 우리의 말이나 용어나 개념의 의미와 우리의 서술이나 표현의 진실 사이의 밀접한 흡사함과 연결된 논리적 실수를 여기서 인식하는 것이 정말로 가능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반대편의 도표 참조. [원문으로는 반대편이지만 이 번역에서는 아래에 위치함. - 역자 주])
우리가 쓰는 말의 의미가 그 말의 역사나 근원과 어떤 관계가 있다는 것은 알기 쉽다. 말이란, 논리적으로 고찰되면, 관습적 부호이다; 심리학적으로 고찰되면, 말은 그 의미가 용법이나 관습이나 연상 작용에 의하여 확립되는 부호이다. 논리적으로 고찰되면, 말의 의미는 최초의 결정에 의하여 - 최초의 정의(定義)나 관습 같은 것, 일종의 본래의 사회계약 - 정말로 확립된다; 그리고 심리학적으로 고찰되면, 말의 의미는 우리가 최초로 그 말의 사용을 배웠을 때, 우리가 최초로 우리의 언어적 버릇과 연상 작용을 형성했을 때, 확립되었다. 그리하여 학생들이 영어는 고통을 ‘pain’이라고 부르며 빵을 ‘bread’라고 부르는데 훨씬 더 자연스럽고 정직하다고 느끼는 반면, ‘pain’이 빵을 의미하는 프랑스어의 불필요한 인위성에 대해서는 불평을 하는 데에 일리가 있다. 학생들은 사용과 관련된 관습성을 철저하게 잘 이해할 것이지만, 원래의 관습에는 - 그에게는 원래인 - 구속력이 없어야 하는지 이유가 없다는 느낌을 표현한다. 그래서 그의 실수는 똑같이 구속력이 있는 몇 가지 원래 관습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망각한 데에 놓여있을 따름일 것이다. 그러나 누가, 은연중에, 동일한 실수를 저지르지 않았는가? 우리들 대부분은 프랑스에서는 심지어 어린 아이들도 프랑스어를 유창하게 말하는 것을 발견할 때 우리 자신이 충격감에 빠져있는 것을 발견했다. 물론 우리는 우리 자신의 순진성에 대하여 미소를 짓는다; 그러나 ‘새뮤엘 죤스’라고 불리는 사람의 진짜 이름이 ‘죤 스미스’였음을 발견하는 경찰관에 관해서 우리는 미소를 짓지 않는다 - 그의 진짜 이름에 대한 지식을 습득함으로써 우리가 사람이나 신(神)이나 정신을 지배하는 힘을 얻는다는 마술적 믿음의 마지막 흔적이 여기에 의심할 바없이 있다 할지라도: 그의 진짜 이름을 부름으로써 우리가 그를 소환할 수 있다.
그리하여 용어의 ‘진정한’이나 ‘고유한’ 의미가 그 용어의 원래 의미인, 논리적으로 방어 가능할 뿐만 아니라 친숙한 의미가 정말로 있다; 그리하여 우리가 그 용어를 이해한다면, 우리가 그 용어를 - 참된 권위로부터, 그 언어를 알고 있는 사람으로부터 - 바르게 배웠기 때문에 이해한다. 이것은 말의 의미라는 문제가 정말로 우리가 사용하는 것과 관련된 권위적 근원이나 시초의 문제와 결부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그것은 사실 서술인 명제의 진실성에 관한 문제와는 다르다. 그 까닭은 누구나 - 심지어 자신의 나이나 자신이 지금 이 순간 분명하고도 뚜렷이 감지하는 사물의 색깔과 같은, 자신이 틀림없이 권위자인 문제에서도 - 사실과 관련된 실수를 저지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기원에 관해서, 서술이
관념은
지칭어이나 용어나 서술이나 명제나 개념이다 이론이다 다음으로 공식화될 수 있다 단어들 주장들 이것들은 다음일 수 있다 의미 있는 것 참 그리고 그것들의 의미는 진리는 다음에 의해 환원될 것인데 정의(定義)들 추론들 다음 것으로 정의되지 않은 개념들 원초적 명제들 |
이 수단으로써 그것들의 의미 진리 를 (환원하기 보다는) 확립하려는 시도는 무한 소급을 초래한다. |
처음에 만들어져서 처음으로 적절하게 이해되었을 때 쉽게 거짓이었을는지도 모른다. 다른 한편으로, 단어는 이해되자마자 올바른 의미를 틀림없이 지니고 있었다.
그리하여 우리가 단어의 의미와 서술의 진실성이 그들의 기원과 연관된 방식 사이의 차이점을 숙고한다면, 기원의 문제가 지식이나 진리의 문제와 많은 관련이 있다고 생각하려는 유혹을 우리는 거의 받지 않는다. 그러나 의미와 진리 사이에는 깊은 유사성이 있다; 그리고 - 내가 그것을 ‘본질주의’라고 불렀다 - 의미와 진리를 매우 긴밀하게 연결하려고 노력하여 양쪽 모두를 동일한 방법으로 취급하려는 유혹이 거의 불가항력적이 되는 철학적 관점도 있다.
이것을 간단하게 설명하기 위하여, 표의 양편 사이의 관계를 주시하면서 우리는 한 번 더 앞의 관념표를 살펴볼 것이다.
이 표의 양편은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가? 표의 왼편을 보면, 우리는 거기서 ‘정의(定義: Definitions)’라는 단어를 발견한다. 그러나 정의(定義)는 일종의 서술이나 이론이나 명제이며 그래서 표의 오른편에 있는 저것들 중의 하나이다. (이 사실은, 그런데, 관념표의 균형을 망치지 않는다; 그 까닭은 추론 역시 ‘추론’이라는 단어가 출현하는 편에 있는 - 서술, 기타 등등 - 것의 특징을 초월하기 때문이다: 정의[定義]가 단어에 의해서라기보다는 특수한 종류의 단어들의 순서에 의하여 공식화되듯이 추론도 한 가지 서술에 의해서라기보다는 특수한 종류의 서술들의 순서에 의하여 공식화된다.) 표의 왼편에 출현하는 정의(定義)들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술들이라는 사실은 어떤 방식으로든 정의(定義)들이 표의 왼편과 오른편 사이에서 고리를 형성할 것임을 암시한다.
정의(定義)들이 이런 일을 한다는 것은, 정말로, 내가 ‘본질주의’라는 이름을 부여한 저 철학적 교설의 한 부분이다. 본질주의에 따르면 (특히 아리스토텔레스의 해석) 정의(定義)는 사물의 내재적 본질이나 본성에 관한 서술이다. 동시에 정의(定義)는 단어의 - 본질을 가리키는 이름의 - 의미를 서술한다. (예를 들어, 데카르트 그리고 칸트 역시 ‘물체’라는 단어는 본질적으로 연장되는 어떤 것을 가리킨다고 생각한다.)
게다가 아리스토텔레스와 다른 모든 본질주의자들은 정의(定義)는 ‘원리’다라고 생각했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다른 명제들로부터 도출될 수 없으며, 모든 증명의 토대를 형성하거나 토대의 일부인, 원초적 명제들을 (보기: ‘모든 물체는 연장된다’) 만들어낸다. 그리하여 그것들이 모든 과학의 토대를 형성한다. (나의 열린사회와 그 적들, 특히 11장의 주석 27-33 참조.) 이 특수한 원리는, 본질주의적 신조의 중요한 부분이지만, ‘본질’에 대한 언급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 주목되어야 한다. 이것은 왜 그 원리가 홉스(Hobbes)나, 가령, 슐릭(Schlick)같은 본질주의에 대한 유명론적(唯名論的) 반대자에 의하여 수용되었는지를 설명한다. (슐릭의 인식론[Erkenntnislehre] 2판, 1925년 62쪽 참조.)
이제 우리는 근원 문제가 사실적 진실에 관한 문제를 결정할 것이라는 관점에 관한 논리를 설명할 수 있는 수단을 우리 수중에 우리가 가지고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 까닭은 근원이 용어나 단어의 진정한 의미를 결정할 수 있다면, 근원이 중요한 개념의 진정한 정의(定義)를 결정할 수 있으며, 그리하여 사물의 본질이나 본성에 대한 묘사이며, 우리가 하는 증명과 결과적으로 우리들이 지닌 과학적 지식의 기초를 이루는 기본적 ‘원리들’ 중 적어도 몇 가지를 결정할 수 있다. 그리하여 그 때에 우리가 지닌 지식의 권위적 근원이 있는 듯 보일 것이다.
그러나 본질주의는 정의(定義)가 우리가 지닌 사실에 대한 지식을 증가시킬 수 있다고 제시함에서 잘못되었음을 우리는 깨달아야 한다 (관습에 관한 결정으로서 정의[定義]가 우리가 지닌 사실에 관한 지식에 의하여 영향을 받을지라도, 그리고 정의[定義]가 반대로 우리가 지닌 이론의 형성에 영향을 미쳐 그리하여 우리가 지닌 사실에 대한 지식의 진화에도 영향을 미친다 할지라도). 정의(定義)가 ‘자연’에 관하여,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 어떤 사실적 지식도 주지 못한다는 것을 우리가 알자마자, 근원의 문제와 몇몇 본질주의적 철학자들이 주조하려고 노력했던 사실적 진실의 문제 사이의 논리적 고리가 부서짐을 우리는 또한 안다.
XIII
이제 나는 주로 역사적인 이 고찰을 밀어놓고, 문제 자체와 그 문제들의 해결로 선회할 것이다.
나의 강연의 이 부분은 예를 들어 흄(Hume)의 다음과 같은 고전적 서술에서 공식화된 바와 같이, 경험주의(empiricism)에 대한 공격으로 아마도 묘사될 것이다: ‘내가 여러분에게 왜 특정한 사실의 문제를 믿느냐고 묻는다면 ..., 여러분은 나에게 어떤 이유를 말해야 한다; 그리고 이 이유는 어떤 다른 사실일 것이고 그 사실과 연결되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여러분은 이런 방식으로 모방하여 무한정 진행할 수 없기 때문에 종국적으로 어떤 사실에서 끝나야 하는데, 그 사실은 여러분의 기억이나 감각에 출현한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여러분의 믿음이 완전히 근거가 없음을 인정해야 한다.’ (인간 오성에 관한 연구[Enquiry Concerning Human Understanding] 1부 5절; 셀비-비기[Selby-Bigge]판 46쪽; 내가 1부 7절 62쪽에서 인용한 이 장 앞머리의 좌우명 참조.)
경험주의의 타당성에 관한 문제는 개략적으로 다음과 같이 표현될 것이다: 관찰은 자연에 대하여 우리가 지닌 지식의 궁극적 근원인가? 그리고 아니라면, 무엇이 우리가 지닌 지식의 근원인가?
내가 베이컨에 관하여 무엇이라고 말하든지, 그리고 내가 비평한 그의 철학의 저 부분들을 베이컨주의자들과 다른 경험주의자들에게 다소 매력이 없게 만드는 데에 내가 성공했다 할지라도, 이 문제들은 남는다.
우리가 지닌 지식의 근원에 관한 문제는 최근에 다음과 같이 다시 서술되었다. 우리가 주장을 한다면, 우리는 그 주장을 정당화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다음 질문에 답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어떻게 당신은 아는가? 당신이 하는 주장의 근원은 무엇인가?’
이것은 반대로, ‘어떤 관찰이 (혹은 관찰의 기억) 당신이 하는 주장의 기초를 이루는가?’
나는 이 일련의 질문이 완전히 불만족스러움을 발견한다.
무엇보다도, 우리의 주장 대부분은 관찰이 아니라 모든 종류의 다른 근원에 기초를 둔다. ‘나는 그것을 더 타임즈에서 읽었다’나 아마도 ‘나는 그것을 대영백과사전에서 읽었다’가 ‘나는 그것을 관찰했다’나 ‘나는 지난해 내가 한 관찰로부터 그것을 안다’보다 ‘당신은 어떻게 아는가?’라는 물음에 더 개연성이 있고 더 분명한 대답이다.
‘그러나 당신 생각에 어떻게 더 타임즈나 대영백과사전이 그 정보를 얻었다고 생각하는가? 라고 경험론자는 대답할 것이다. 틀림없이, 당신이 충분히 길게 조사를 지속할 수만 있다면, 당신은 (때때로 “프로토콜 명제”나 - 당신 자신에 의하여 - “기본적 서술”이라 불리는) 목격자의 관찰 보고서로 끝날 것이다. 틀림없이’, 경험론자는 계속할 것이다, ‘책은 주로 다른 책으로부터 만들어진다, 물론, 예를 들어 역사학자에게는 서류로부터 작업을 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이 다른 책들은, 혹은 이 서류들은, 틀림없이 관찰에 기초하고 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것들은 증거로서가 아니라 시(詩)나 허구나 거짓말로 묘사되어야할 것이다. 우리들 경험론자들이 관찰이 우리가 지닌 지식의 궁극적 근원이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이런 의미에서이다.’
여기에 우리는, 나의 실증주의자 친구들 몇몇에 의하여 아직도 표현되는 바와 같이, 경험론자의 입장을 가지고 있다.
이 입장이 베이컨의 입장처럼 거의 효력이 없다는 것을 나는 증명하려고 노력할 것이다; 지식의 근원에 관한 문제의 해답은 경험론자와 반대가 된다는 것; 그리고 마지막으로 궁극적 근원에 관한 - 사람들이 상급 법원이나 상급 권위에게 아마도 도움을 구할 것처럼 사람들이 도움을 구한 근원 - 전체 문제는 오류에 기초한 것으로 거부되어야 한다는 것.
첫째로 그들이 지닌 지식의 근원에 관하여 당신이 더 타임즈와 그 기자들을 실제로 계속해서 심문한다면, 당신은 경험론자들이 그 존재를 신뢰하는 목격자들에 의한 관찰에 실제로 전혀 도달하지 못할 것임을 나는 증명하고 싶다. 당신은 오히려 당신이 취하는 모든 조치로써 한 걸음 더 나아간 조치의 필요가 눈 덩이 같은 모양으로 증가함을 발견할 것이다.
합리적인 사람들이 ‘나는 더 타임즈에서 그것을 읽었다’라는 대답을 충분하다고 아마도 수용할 뿐인 그런 종류의 주장을 보기로 들라; ‘수상(首相)이 일정보다 며칠 앞서서 런던으로 귀환하기로 결정했다’는 주장을 말하자. 이제 어떤 사람이 이 주장을 의심하거나 그 주장의 진실성을 조사할 필요를 느낀다고 잠시 동안 상정(想定)하라. 그는 어떻게 할까? 그의 친구가 수상(首相) 집무실에 있다고 하면, 가장 간단하고도 가장 직접적인 방법은 그 친구에게 전화를 거는 것이리라; 그리고 이 친구가 그 요점을 입증한다면, 그것으로 문제는 해결된다.
다시 말해서, 조사자는, 가능하면, 정보의 근원을 추적하기보다는 주장되는 사실 자체를 검토하거나 조사하려고 할 것이다. 그러나 경험주의적 이론에 따르면, ‘나는 그것을 더 타임즈에서 읽었다’는 주장은 궁극적 근원을 추적하는 데에 놓여있는 정당화 과정에서 첫 단계일 뿐이다. 다음 단계는 무엇인가?
적어도 두 가지 다음 단계가 있다. 하나는 ‘나는 그것을 더 타임즈에서 읽었다’가 또한 주장이라는 것과, 우리는 아마도 ‘가령 더 타임즈와 매우 유사하게 보이는 신문에서가 아니고 더 타임즈에서 당신이 그것을 읽었다는 당신이 지닌 지식의 근원은 무엇인가?’라고 물을 것임을, 숙고하는 것이리라. 다른 하나는 더 타임즈에게 그 지식의 근원을 요구하는 것이다. 첫 번째 질문에 대한 답변은, 우리가 추구하지 않을 근원에 관한 한 무리의 진척된 질문을 초래하는 ‘그러나 우리는 더 타임즈만 구독하여 우리는 아침에 그 신문을 받는다’일 것이다. 두 번째 질문은 더 타임즈의 편집자로부터 다음 답변을 끌어낼 것이다: ‘우리는 수상 집무실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이제 경험론적 과정에 따라서, 우리는 이 단계에서 다음 질문을 해야 한다: ‘전화를 받은 사람은 누구인가?’ 그리고 그 다음에 그의 관찰보고서를 얻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전화를 받은 사람에게 질문을 해야 할 것이다: ‘당신이 들은 목소리가 수상 집무실의 관리로부터 왔다는 당신의 지식의 근원은 무엇인가?’, 기타 등등.
이 피곤한 질문의 순서가 왜 만족스런 종착점에 도달하지 않는지 간단한 이유가 있다. 그 이유는 이렇다. 모든 목격자는, 자신의 보고서에서, 항상 틀림없이 자신의 지식이나 인물, 장소, 물체, 언어 사용법, 사회적 관습, 기타 등등을 충분히 이용한다. 특히 그의 보고서가 정당화할 가치가 있는 주장을 정당화하는 데에 소용이 되려면, 그는 자신의 눈이나 귀에만 의존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 사실은 물론 틀림없이 즉각적으로 관찰적이지 못한 자신이 지닌 지식의 저 요소들의 근원에 관하여 새로운 질문을 항상 제기한다.
이것이 관찰에서 모든 지식의 궁극적 근원까지 그 지식을 추적하는 프로그램을 수행하기가 논리적으로 불가능한 이유이다: 그것은 무한 소급을 초래한다. (진리는 명백하다는 교설은 이 소급을 차단한다. 이것은 저 교설의 매력을 설명하는 데에 도움을 줄 것이기 때문에 흥미롭다.)
나는 이 주장이 또 다른 주장에 - 모든 관찰에는 우리의 이론적 지식에 비추어진 해석이 포함되어 있다는?, 혹은 이론에 의하여 오염되지 않은, 순수한 관찰적 지식은, 조금이라도 가능하다면, 철저히 무능하고 무익하다는 주장 -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고 부언하고 싶다.
? 나의 저서 과학적 발견의 논리(Logic of Scientific Discovery) 25부의 마지막 문단 및 새 부록 x, (2) 참조. 나의 타임즈 주장과 관련된 마크 트웨인(Mark Twain)에 의한 기대에 대하여, 아래 414쪽 참조.
근원을 묻는 관찰주의적 프로그램에 관한 가장 괄목한 것은 - 그 지루함은 차치하고 - 그 프로그램이 상식을 철저히 위반한다는 것이다. 그 까닭은 우리가 주장에 대하여 의심을 하면, 정상적인 절차는 그 주장의 근원을 묻는 것이라기보다는 그 주장을 시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가 독립적인 확증을 발견하면, 우리는 근원에 관하여 조금도 신경 쓰지 않고 그 주장을 흔히 수용할 것이다.
물론 상황이 다른 경우도 있다. 역사적 주장을 시험하는 것은 항상 근원으로 돌아감을 포함한다; 그러나 보통 목격자의 보고서로 돌아가는 것은 아니다.
분명히 어떤 역사가도 서류 증거를 비판 없이 수용하지는 않을 것이다. 진실성의 문제가 있으며, 편견의 문제가 있으며, 또한 초기 자료의 재구성과 같은 문제들이 있다. 이 사건들이 발생했을 때 기록자는 그 자리에 있었는가? 와 같은 문제들 또한 물론 있다. 그러나 이것이 역사가가 지닌 특징적인 문제의 하나가 아니다. 역사가는 보고서의 신뢰성에 대하여 근심할 것이지만, 그는 이 사건이 관찰될 수 있는 특성을 지니고 있었다고 상정(想定)조차 하면서도 서류의 작성자가 문제 사건의 목격자였는지 아니었는지에 관하여 거의 걱정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어제 이 문제에 관하여 나의 생각을 바꾸었다’라고 쓰인 편지는, 생각 바꾸기가 관찰될 수 없다 할지라도 (그리고 우리가 다른 증거를 고찰하여 글쓴이가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고 추측할지라도), 매우 귀중한 역사적 증거가 될지도 모른다.
목격자들에 관하여, 그들은 반대심문을 받을 수 있는 법정에서 거의 독점적으로 중요하다. 대부분의 법률가들이 알고 있는 바와 같이, 목격자들도 자주 실수를 저지른다. 이것은, 가장 괄목할만한 결과와 함께, 실험적으로 조사되었다. 사건을 발생한 바와 같이 묘사하고자 매우 조바심하는 목격자들은, 특히 어떤 자극적인 사건이 급하게 발생하면, 다수의 오류를 저지르기 쉽다; 그리고 사건이 어떤 유혹적인 해석을 암시하면, 이 해석에는 흔히 실제로 관찰된 것을 왜곡하는 일이 허용된다.
역사적 지식에 관한 흄(Hume)의 관점은 달랐다: 인성론(Treatise) 1권 3부 4절 셀비-비기판 83쪽에서 그는 이렇게 쓴다, ‘ ... 우리는 시저가 상원에서 3월 15일에 살해당했다는 것을 믿는데 ... 그 이유는 이 사실이 역사가들의 만장일치 증언을 기초로 확정되어 있고 그 역사가들은 이 정확한 시점과 장소를 그 사건에 적용하기로 동의하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우리의 기억이나 감각에 출현하는 특정 부호들이나 문자들이 있다; 우리는 그 부호들이 특정 개념의 표시로서 사용되어졌음을 똑같이 기억한다; 그리고 그 개념들은 그 행동에 즉각적으로 출현한 그런 생각 속에 있어서 그 개념들을 그 행위의 발생으로부터 직접적으로 받았거나; 혹은 그 개념들은, 우리가 사건의 목격자였고 관람자였던 사람들에게 도달하기까지, 다른 사람들의 증언에서 나왔고 그 증언은 다시 또 다른 증언으로부터 나왔다.’ (인간 오성에 관한 연구[Enquiry] 10부 셀비-비기판 111쪽 이하 참조)
이 관점은 틀림없이 위에 설명된 무한 소급을 초래하는 듯 나에게 느껴진다. 그 까닭은 문제가 물론 ‘역사가들의 만장일치 증언’이 수용되어야 하는지, 또는 역사가들이 흔하지만 가짜 출처에 의존한 결과로서 거부되어야 하는지 때문이다. ‘우리의 기억과 우리의 감각에 출현한 문자들’에 의한 도움이란 이것이나 역사서술에 관한 다른 문제와 관련이 있을 리가 없다.
XIV
그렇다면 우리가 지닌 지식의 근원은 무엇인가?
내가 생각하기에 대답은 이것이다: 우리가 지닌 지식에 관해서는 모든 종류의 근원이 있다; 그러나 어떤 근원에도 권위는 없다.
더 타임즈나 대영백과사적이 지식의 근원일 수 있다고 우리는 말할는지도 모른다. 물리학에서 문제에 관한 물리학 평론에 난 특정 논문이 더 타임즈나 대영백과사전에 난 동일한 문제에 관한 기사보다 더 권위를 가지고 있고 근원에 관한 특성을 더 많이 지니고 있다고 우리는 말할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물리학 평론에 난 기사의 근원이 틀림없이 전적으로 혹은 심지어 부분적으로 관찰이었다고 말하는 것은 완전히 틀린 것이리라. 근원은 또 다른 논문에 실린 모순의 발견이거나, 가령, 또 다른 논문에 제시된 가설이 이런저런 실험으로써 시험될 수 있다는 사실의 발견일 수도 있다; 이 모든 비(非)관찰적 발견은 그 발견 모두가 우리의 지식을 확대시킨다는 의미에서 ‘근원’이다.
물론 나는 실험이 또한 우리의 지식을, 그것도 매우 중요한 방식으로, 확대시킬 것을 부인하지 않는다. 그러나 궁극적 의미에서 그것은 근원이 아니다. 실험은 항상 검사를 받아야 한다: 더 타임즈에 난 뉴스의 사례에서처럼 우리는 보통 실험의 목격자를 문제 삼지 않지만, 우리가 결과에 의심이 가면, 우리는 실험을 재현하거나 어떤 사람으로 하여금 그 실험을 재현하도록 요청할 것이다.
우리가 지닌 지식에 관한 궁극적 근원이라는 철학적 이론에 의하여 저질러지는 근본적인 실수는 그 이론이 근원의 문제와 유효성의 문제를 충분히 분명하게 구분하지 않는 것이다. 틀림없이, 역사 서술의 경우에, 이 두 가지 문제는 간혹 일치할는지도 모른다. 역사적 주장의 유효성에 관한 문제는 오직, 혹은 주로, 특정 자료의 출처를 고찰하여 시험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두 가지 문제는 다르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우리는 그 근원이나 출처를 추적함으로써 주장이나 정보의 유효성을 시험하지 않지만, 주장된 것을 - 주장된 사실 자체들을 - 비판적으로 조사함으로써 훨씬 더 직접적으로 주장이나 정보를 시험한다.
그리하여 ‘당신은 어떻게 아는가? 당신 주장의 근원은 무엇인가?’라는 경험론적 질문은 잘못 표현된 것이다. 그 질문은 부정확하거나 난잡한 방식으로 공식화된 것은 아니지만 전적으로 잘못 생각되었다. 그 질문들은 권위적 대답을 구하는 질문이다.
XV
인식론의 전통적 체계는 우리가 지닌 지식의 근원에 관한 질문에 대한 예-대답이나 아니오-대답으로부터 유래한다고 언급될 것이다. 그 체계는 이 질문에 도전하지도 않고, 그 질문의 합당성을 문제 삼지도 않는다; 그 질문들은 완전히 자연스러운 것으로 수용되어, 아무도 그 질문 속에 있는 독소를 보지 못하는듯하다.
이것은 매우 흥미로운 일인데, 그 까닭은 그 질문들이 정신적으로 분명히 권위적이기 때문이다. 그 질문들은 ‘최고로 훌륭한 자’나 ‘가장 현명한 자’나 ‘민중’이나 ‘다수’ 같은 권위적 답변을 요구하는 ‘누가 통치해야 하는가?’라는 정치이론에 관한 저 전통적 질문과 비교될 수 있다. (그런데 그것은 ‘지식의 궁극적 근원은 무엇인가: 지성인가 아니면 감각인가?’와 유사하게, ‘누가 우리의 통치자가 되어야 하는가: 자본가인가 아니면 노동자인가?’와 같은 어리석은 대안을 제시한다.) 이 정치적 질문은 잘못 표현되었으며 그 질문이 이끌어내는 답변은 역설적이다 (나의 저서 열린사회와 그 적들 7장에서 내가 밝히려고 노력했던 바와 같이). 그 질문은 ‘(우리가 뽑으려고 노력해서는 안 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아마도 그렇게 쉽게 뽑을) 사악하거나 무능한 지도자들이 너무 많은 해코지를 할 수 없도록 어떻게 우리가 정치 제도를 조직할 수 있는가?’와 같이 완전히 다른 질문으로 갈음되어야 한다. 우리의 질문을 이런 방식으로 바꿈으로써만 우리는 정치제도에 관한 합리적인 이론을 향하여 우리가 나아가기를 희망할 수 있다고 나는 믿는다.
우리가 지닌 지식의 근원에 관한 질문은 유사한 방식으로 갈음될 수 있다. 그 질문은 ‘우리가 지닌 지식의 가장 훌륭한 근원은 무엇인가 - 가장 신뢰할만한 근원들로, 우리를 오류에 빠뜨리지 않고, 의심이 들 경우에, 우리가 최고법정으로서 도움을 바랄 수 있고 도움을 구해야 하는 근원들?’ 대신에 이상적인 통치자들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그런 이상적인 근원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그리고 모든 ‘근원’은 때때로 우리를 오류에 빠뜨리기 쉽다고, 상정(想定)하려는 의도가 나에게 있다. 그러므로 나는 우리가 지닌 지식의 근원에 관한 문제를 완전히 다른 질문으로 갈음하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다: ‘어떻게 우리는 오류를 발견하여 제거하기를 희망할 수 있을까?’
우리가 지닌 지식의 근원에 관한 문제는, 그렇게 많은 권위적 질문처럼, 발생론적 질문이다. 그 문제는, 지식은 자체의 유래에 의하여 자체를 합법화할 것이라는 믿음에서, 우리가 지닌 지식의 출발점을 요구한다. 가능한 한 신(神)으로부터, 최고의 권위로부터 유래하는 지식인 오염되지 않은 지식으로 종족적으로 순수한 지식의 고귀함: 이것이 그 문제의 뒤에 존재하는 (흔히 무의식적인) 형이상학적 생각이다. 내가 수정한 문제인 ‘어떻게 우리는 오류를 탐지하기를 바랄 수 있을까?’는 그런 순수하고 오염되지 않으며 확실한 근원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그리고 근원이나 순수성의 문제는 유효성이나 진실의 문제와 혼동되어서는 안 된다는, 관점으로부터 유래한다고 언급될 것이다. 이 관점은 제노파네스(Xenophanes)만큼 오래되었다고 일컬어질 것이다. 제노파네스는, 다음 자신의 시(詩)에서 밝혀지는 바와 같이, 우리의 지식이 짐작, 견해임을 - epistēmē이라기보다는 doxa - 알고 있었다 (DK, B, 18과 34):
제신(諸神)은 처음부터 밝히지 않는다,
모든 것을 우리들에게;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탐구를 통하여 우리는 배울 것이고 사물을 더욱 잘 알리라.
그러나 확실한 진리에 대해서는, 아무도 알지 못했고,
앞으로도 알지 못할 것이다; 제신(諸神)에 대해서도,
내가 말하는 모든 것에 대해서도.
그리고 누가 우연히 완벽한 진리를 말한다 할지라도,
자신은 그 진리를 알지 못하리라;
모든 것은 상상으로 짜여진 그물일 따름이니.
그러나 지식의 권위적 근원에 대한 전통적 질문은 심지어 오늘날에도 반복된다 - 더구나 자신들이 권위에 저항한다고 믿는 실증주의자들과 다른 철학자들에 의하여 매우 자주.
‘어떻게 우리는 오류를 탐지해서 제거하기를 바랄까?’라는 나의 질문에 합당한 답변은, 내가 생각하기에, ‘다른 사람들의 이론이나 상상을 비판함으로써 이며 - 우리가 우리 자신을 그렇게 훈련시킬 수 있다면 - 우리 자신의 이론이나 상상을 비판함으로써 이다. 이 답변은 내가 ‘비판적 이성주의(critical rationalism)’라고 부르려는 자세를 요약한다. 그것은 우리가 그리스인들에게 빚지고 있는 관점이자 자세요, 전통이다. 비판적 이성주의는 데카르트와 그의 학파가 주장하는 ‘이성주의’나 ‘주지주의(intellectualism)’와 매우 다르며, 심지어 칸트의 인식론과도 매우 다르다. 그러나 윤리학의, 도덕적 지식의 분야에서, 비판적 이성주의는 칸트에 의하여 칸트의 자율성의 원리(principle of autonomy)로써 근접된다. 이 원리는 우리는 권위자의 명령을, 아무리 고양되어 있다 할지라도, 윤리의 기초로서 수용해서는 안 된다는 칸트의 깨달음을 표현한다. 그 까닭은 우리가 권위자에 의한 명령을 대면할 때마다, 그 명령이 복종하기에 도덕적이거나 비도덕적인지는 우리가 비판적으로 판단하기 때문이다. 권위자는 자신의 명령을 강요할 힘을 지니고 있을지도 모르고, 우리에게는 저항할 함이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에게 선택과 관련한 물리적 힘이 있다면, 궁극적 책임은 우리에게 남는다. 명령에 복종할지는 우리 자신의 비판적 결정이다; 권위자에게 복종할지는.
칸트는 이 개념을 종교 분야에까지 과감하게 가지고 간다: ‘... 어떤 방식으로 신(神)이 당신에게 밝혀지든, 그리고 ... 신(神)이 자신을 당신에게 드러낸다 할지라도: 당신이 신(神)을 믿고 숭배하도록 허용되는지를 당신이 판단해야 한다’? 라고 그는 쓴다.
? 이마누엘 칸트의 순수 이성의 한계 내에서의 종교(Religion within the Limits of Pure Reason) 2판 (1794년) 4장 2부 1절 첫 번째 주석 참조. (1793년도 초판에는 없는) 구절이 이 책의 7장 주석 22에서 더 길게 인용되었다.
이 과감한 서술을 고찰할 때, 칸트가 자신의 과학철학에서 오류를 비판적으로 탐색하는 동일한 비판적 이성주의의 자세를 취하지 않은 것은 이상하다. 칸트가 그렇게 하지 못했던 것은 뉴튼의 우주론이 지닌 권위를 - 가장 엄격한 시험들을 거의 믿을 수 없이 성공적으로 통과한 결과 - 그가 수용했을 따름이었다고 나는 확신한다. 칸트에 대한 이 해석이 옳다면, 내가 옹호하는 비판적 이성주의는 (그리고 비판적 경험론 또한) 칸트 자신의 비판적 철학을 마무리할 뿐이다. 그리고 이것은 아인슈타인에 의하여 가능해졌는데, 아인슈타인은 뉴튼의 이론이 압도적인 성공을 거두었음에도 불구하고 잘못되었을 것임을 우리에게 가르쳤다.
그래서 ‘어떻게 당신은 아는가? 당신 주장의 근원이나 토대는 무엇인가? 어떤 관찰로 인하여 당신은 그것에 이르렀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나의 답변은: ‘나는 알지 못한다: 나의 주장은 상상일 뿐이다. 나의 주장이 유래할 근원이나 근원들에 대해서는 신경을 쓰지 말라 - 가능한 근원이 수없이 많아서 나는 그 근원들의 절반도 인식하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어떤 경우에도 출처나 유래는 진실과 거의 관계가 없다. 그러나 내가 나의 잠정적 주장으로써 해결하려고 노력하는 문제에 당신이 관심이 있으며, 가능한 한 엄격하게 나의 잠정적 주장을 비판함으로써 당신은 나를 도울 것이다; 그리고 당신이 생각하기에 나의 주장을 반박할는지도 모르는 어떤 실험적 시험을 당신이 고안할 수 있다면, 나는 나의 주장을 당신이 반박하도록 기쁘게 그리고 나의 최선을 다하여 도울 것이다.’
이 답변은??, 엄밀하게 말해서, 질문이 역사적 주장과 구분되는 것으로서 과학적 주장에 관해서만 나온다면 적용된다. 나의 추측이 역사와 관련된 추측이라면, 근원들은 (궁극적이 아닌 의미에서) 물론 그 유효성을 비판적으로 토론하는 데로 들어올 것이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나의 답변은, 우리가 본 바와 같이, 동일할 것이다.
?? 이 답변과 현재 15부의 거의 전체 내용은 1959년 인도 철학 저널(The Indian Journal of Philosophy)의 창간본에 최초로 실렸던 나의 논문을 약간 수정하여 실은 것이다.
XVI
이제 이 논의의 인식론적 결과를 공식화하기 알맞은 때라고 나는 생각한다. 나는 그 결과를 10가지 논제의 형식으로 표현할 것이다.
1. 지식에 대한 궁극적 근원은 없다. 모든 근원과 모든 제안이 환영을 받는다; 그리고 모든 근원과 모든 제안은 비판적 검토를 기꺼이 수용해야 한다. 역사에서는 제외하고, 우리는 보통 우리가 지닌 정보의 근원보다는 사실 자체를 조사한다.
2. 합당한 인식론적 질문은 근원에 관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완성된 서술이 사실인지를 묻는다 - 다시 말해서, 서술이 사실과 일치하는지. (이율배반에 빠지지 않고, 사실과 상응이라는 의미에서의 객관적 진리라는 개념으로써 우리가 활동할 것임은 알프레드 타스키[Alfred Tarski]의 업적으로 밝혀졌다.) 그래서 우리는 주장 자체를 조사하거나 시험함으로써 가능한 한 잘 이것을 알아내려고 노력한다; 직접적인 방식으로가 아니면 주장의 결과를 조사하거나 시험함으로써.
3. 이 조사와 연결하여 모든 종류의 논증이 관련될 것이다. 전형적인 과정은 우리의 이론이 우리의 관찰과 일치하는지를 조사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예를 들어 우리가 지닌 역사 관련 근원들이 상호적으로 그리고 내부적으로 모순이 없는지를 또한 조사할 것이다.
4.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우리가 지닌 지식의 단연코 가장 중요한 근원은 - 선천적인 지식은 차치하고 - 전통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대부분의 것들은 본보기에 의해서, 남으로부터 말을 듣고, 독서로써, 비판하는 방법과 비판을 받아서 수용하는 방법 그리고 진실을 존중하는 방법을 습득함으로써, 우리는 배웠다.
5. 우리가 지닌 지식의 근원 대부분이 전통적이라는 사실은 반(反)전통주의를 무효하다고 선언한다. 그러나 이 사실이 전통주의적 자세를 지지하는 것으로 생각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가 지닌 전통적 지식의 모든 편린은 (그리고 심지어 우리의 선천적인 지식도) 비판적 검토를 기꺼이 받아야 해서 전복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전통이 없으면 지식도 불가능하리라.
6. 지식은 무(無)에서 시작할 수 없으며 - 백지 상태(tabula rasa)에서 - 관찰에서도 시작할 수 없다. 지식의 진보는 주로 이전 지식의 수정에 달려있다. 간혹 우리가, 예를 들어 고고학에서, 우연한 관찰을 통하여 진보한다 할지라도, 발견의 중요성은 보통 우리의 이전 이론을 수정하는 발견의 능력에 의존할 것이다.
7. 비관적 그리고 낙관적인 인식론은 거의 동일하게 틀린 것이다. 플라톤의 비관적 동굴 이야기는 진실한 이야기이지만, 그의 낙관적인 상기론(想起論: story of anamnēsis)은 진실한 이야기가 아니다 (모든 다른 동물들처럼, 모든 사람과 심지어 모든 식물도 선천적인 지식을 소유하고 있음을 우리가 인정해야 할지라도). 그러나 출현하는 세상이 정말로 우리가 사는 동굴의 벽에 비친 그림자만의 세상이라 할지라도, 우리 모두는 끊임없이 그 세상을 넘어 간다; 그리고 데모크리투스(Democritus)가 말한 바와 같이 진실은 깊은 곳에 숨겨져 있다 할지라도, 우리는 깊은 곳을 조사할 수 있다. 우리 수중에는 진실에 대한 기준이 없고, 이 사실은 비관론을 뒷받침한다. 그러나 우리에게 행운이 있다면, 우리가 오류와 거짓을 인식하도록 허용할 기준을 우리는 정말로 소유하고 있다. 명백함과 뚜렷함은 진실에 관한 기준이 아니지만, 모호함이나 혼동 같은 것은 오류를 가리킬는지도 모른다. 유사하게 일관성은 진실을 확립할 수는 없지만, 일관성의 결여와 불일치는 거짓을 정말로 확증한다. 그래서 그런 것들이 인식되면, 우리가 처한 동굴의 암흑 밖으로 길을 더듬어 나가는 데에 우리 자신이 지닌 오류가 우리를 돕는 희미한 붉은 빛을 제공한다.
8. 관찰이나 이성은 권위가 아니다. 지적(知的) 직관과 상상력은 매우 중요하지만, 그것들은 신뢰를 받을만하지 않다: 그것들은 우리에게 사물을 매우 분명하게 보여줄는지는 모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은 우리를 오도할지도 모른다. 그것들은 우리가 지닌 이론의 주요 근원으로서 필수불가결하다; 그러나 우리의 이론 대부분은 어떤 정도로든 거짓이다. 관찰과 추론의, 그리고 심지어 직관과 상상의 가장 중요한 기능은, 우리가 미지의 세계를 탐사하는 수단인 저 과감한 추측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데에서 우리를 돕는 것이다.
9. 명백함은 본질적으로 귀중하다 할지라도, 정확함이나 정밀함은 그렇지 않다: 우리가 지닌 문제에 필요한 것보다 더 정확해지려고 노력하는 것은 쓸모가 있을 수 없다. 언어적 정밀성은 허깨비이며, 말의 의미나 정의(定義)와 연관된 문제들은 중요하지 않다. 그리하여 (19쪽의 [번역으로 쪽수가 달라질 수 있다. - 역자 주]) 관념표에는, 그 표의 대칭에도 불구하고, 중요한 편과 사소한 편이 있다: 왼편은 (단어와 그 단어의 의미) 사소한 반면, 오른편은 (이론과 그 이론의 진실성과 관련된 문제들) 매우 중요하다. 말은 이론을 구성하기 위한 도구로서만 중요하고, 언어적 문제는 피곤하다: 그 문제는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피해야 한다.
10. 문제의 모든 해결은 해결되지 않은 새로운 문제를 제기한다; 원래 문제가 심층적이고 그 해결책이 과감할수록 더욱 그러하다. 세상에 대하여 우리가 더 많이 배워서 우리의 학식이 더 깊어질수록, 우리가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한 지식인, 우리의 무지(無知)에 대한 우리의 지식은 더욱 의식적이 되고 더욱 세밀해지고 더욱 분명해진다. 그 까닭은 이것이 진정으로 우리가 지닌 무지(無知)의 주요 근원이기 때문이다 - 우리의 무지(無知)는 틀림없이 반드시 무한한 반면, 우리의 지식은 오직 유한할 수 있다는 사실.
우리는 하늘의 방대함을 관조할 때 우리가 지닌 무지(無知)의 거대함을 잠깐 볼 수 있을 것이다: 우주의 단순한 규모는 우리가 지닌 무지(無知)의 가장 깊은 원인이 아니라 할지라도, 그 규모는 우리가 지닌 무지(無知)의 원인 중 하나이다. ‘내가 친구 몇몇과 다른 듯한 곳은 물리적 규모에 중요성을 부여하지 않은 데에 있다. 나는 하늘의 방대함 앞에서 조금도 초라한 느낌을 가지지 않는다. 별들은 크겠지만 별들은 생각도 할 수도 없고 사랑을 할 수도 없다; 그리고 이것들이 규모보다 훨씬 더 많이 나에게 감명을 주는 특성이다. 거의 17 스톤의 (약 107kg - 역자 주) 몸무게가 나간다는 것으로 나는 명예를 얻지는 못한다’라고 F. P. 램지(Ramsey)는 자신의 저서 수학의 기초(Foundations of Mathematics) 291쪽의 매력적인 구절에 썼다. 램지의 친구들이 단순한 물리적 규모의 무의미성에 관하여 램지의 의견에 동의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리고 그 친구들이 하늘의 방대함 앞에서 초라함을 느꼈다면 이것은 그들이 하늘의 방대함 속에서 자신들이 지닌 무지(無知)의 상징을 보았기 때문이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렇게 노력하다가 우리가 별로 아는 게 없다는 것을 우리가 배우기만할지라도 세상에 관하여 무엇인가를 배우려고 노력할 가치가 있을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이 박식한 무지(無知)의 상태는 아마도 우리가 지닌 많은 문제에서 도움이 될 것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다양한 작은 지식 편린 속에서 크게 다르다 할지라도, 우리가 지닌 무한한 무지(無知)에서 우리 모두는 동등하다는 것을 우리 모두가 기억하는 것이 아마도 좋을 것이다.
XVII
내가 제기하고 싶은 마지막 질문이 있다.
우리가 찾기만 한다면 우리는, 거짓으로 거부되어야 하는 철학적 이론 속에서, 보존될 가치가 있는 진정한 아이디어를 자주 발견할 수 있다. 우리가 지닌 지식의 궁극적 근원에 관한 이론 중 한 이론에서 이것과 같은 아이디어를 우리는 발견할 수 있을까?
나는 우리가 발견할 수 있다고 믿는다; 우리가 지닌 모든 지식의 근원은 초자연적이라는 교설의 기초를 이루는 것은 두 가지 주요 아이디어 중 하나라고 나는 제안한다. 내가 믿기에 이 아이디어들 중 두 번째 것은 참인 반면, 첫 번째 것은 거짓이다.
거짓 아이디어인 첫 번째 것은 우리가 우리의 지식이나 우리의 이론을 긍정적인 이유로써, 다시 말해서, 우리의 지식이나 이론을 확증할 수 있거나 적어도 매우 개연적으로 만들 수 있는 이유로써, 정당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아무튼 우리의 지식이나 이론이 지금까지 비판을 견뎌냈다는 것보다 더 나은 이유로써. 이 아이디어는 우리가 진정한 지식에 관한 어떤 궁극적이거나 권위적인 근원의 도움을 받아야 함을 암시한다고 나는 제안한다; 그러나 이 아이디어로써 그 권위의 특징은 미결된 상태로 남는다 - 그 특징이 관찰이나 이성처럼 인간적이든 초인간적이든 (그리하여 초자연적이든).
두 번째 아이디어는 - 그 필수적 중요성이 러셀에 의하여 강조되었다 - 어떤 인간의 권위도 명령으로써 진실을 확립할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진리에 복종해야 한다는 것; 진리는 인간 권위를 초월한다는 것.
함께 고찰되면 이 두 가지 아이디어는 우리의 지식이 유래하는 근원은 틀림없이 초인간적이라는 결론을 거의 즉시 낳는다; 독선과, 신적(神的) 진리를 보지 않으려는 사람들에 대한 폭력 사용을 부추기는 경향이 있는 결론.
합당하게 이 결론을 배척하는 어떤 사람들은 불행히도 첫 번째 아이디어를 - 지식의 궁극적 근원의 존재에 대한 믿음 - 배척하지 않는다. 대신에 그들은 두 번째 아이디어를 - 진리는 인간의 권위를 초월한다는 주장 - 배척한다. 그리하여 그들은 지식의 객관성이라는, 비판이나 합리성의 공통 기준이라는, 개념을 위험에 빠뜨린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지식에 관한 궁극적 근원이라는 개념을 포기하고, 모든 지식은 인간적임을 인정하는 것이라고 나는 제안한다; 모든 지식은 우리의 실수와 우리의 편견과 우리의 꿈과 우리의 희망과 섞여있다는 것;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진리가 우리의 손에 닿지 않는 곳에 있다 할지라도 진리를 더듬어 찾는 것이라는 것. 우리의 암중모색이 자주 영감을 받지만 우리는, 아무리 깊이 느껴질지라도, 우리가 받는 영감이 신적(神的)이나 다른 방식으로 어떤 권위라도 지닌다는 믿음을 우리는 경계해야 함을 우리는 인정할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의 지식이 미지의 세계 속으로 아무리 멀리 관통했다 할지라도, 우리가 지닌 지식의 전체 영역 안에서 발견될 비판을 초월하는 권위는 없다는 것을 우리가 인정한다면, 우리는 진리가 인간의 권위를 초월한다는 생각을 위험 없이 지닐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생각을 지녀야 한다. 그 까닭은 그 생각이 없으면 탐구의 객관적 기준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의 추측에 대한 비판이 없다; 미지의 세계에 대한 암중모색이 없다; 지식 추구가 없다.
- “추측과 논박, 과학적 지식의 성장”, 제 5판, 1989년 루트리쥐, 칼 포퍼 -
CONJECTURES
AND REFUTATIONS
The Growth of Scientific Knowledge
by
KARL R. POPPER
ROUTLEDGE
LONDON AND NEW YORK
TO
F. A. von HAYEK
Experience is the name every one gives to their mistake.
OSACAR WILDE
Our whole problem is to make the mistakes as fast as
possible ...
JOHN ARCHBALD WHEELER
PREFACE
THE ESSAYS and lectures of which this book is composed are variations upon one very simple theme - the thesis that we can learn from our mistakes. They develop a theory of knowledge and of its growth. It is a theory of reason that assigns to rational arguments the modest and yet important role of criticizing our often mistaken attempts to solve our problems. And it is a theory of experience that assigns to our observations the equally modest and almost equally important role of tests which may help us in the discovery of our mistakes. Though it stresses our fallibility it does not resign itself to scepticism, for it also stresses the fact that knowledge can grow, and that science can progress - just because we can learn from our mistakes.
The way in which knowledge progresses, and especially our scientific knowledge, is by unjustified (and unjustifiable) anticipation, by guesses, by tentative solutions to our problems, by conjectures. These conjectures are controlled by criticism; that is, by attempted refutations, which include severely critical tests. They may survive these tests; but they can never be positively justified: they can be established neither as certainly true nor even as 'probable' (in the sense of the probability calculus). Criticism of our conjectures is of decisive importance: by bringing out our mistakes it makes us understand the difficulties of the problem which we are trying to solve. This is how we become better acquainted with our problem, and able to propose more mature solutions : the very refutation of a theory - that is, of any serious tentative solution to our problem - is always a step toward that takes us nearer to the truth. And this is how we can learn from our mistakes.
As we learn from our mistakes our knowledge grows, even though we may never know - that is, know for certain. Since our knowledge can grow, there can be no reason here for despair of reason. And since we can never know for certain, there can be no authority here for any claim to authority, for conceit over our knowledge, or for smugness.
Those among our theories which turn out to be highly resistant to criticism, and which appear to us at a certain moment of time to be better approximations to truth than other known theories, may be described, together with the reports of their tests, as 'the science' of that time. Since none of them can be positively justified, it is essentially their crucial and progressive character - the fact that we can argue about their claim to solve our problems better than their competitors - which constitutes the rationality of science.
This, in a nutshell, is the fundamental thesis developed in this book and applied to many topics, ranging from problems of the philosophy and history of the physical sciences and of the social sciences to historical and political problems.
I have relied upon my central thesis to give unity to the book, and upon the diversity of my topics to make acceptable the marginal overlapping of some of the chapters. I have revised, augmented, and re-written most of them, but I have refrained from changing the distinctive character of the lectures and broadcast addresses. It would have been easy to get rid of the tell-tale style of the lecturer, but I thought that my readers would rather make allowances for that style than feel that they had not been taken into the author's confidence. I have let a few repetitions stand so that every chapter of the book remains self-contained.
As a hint to prospective reviewers I have also included a review - severely critical one ; it forms the last chapter of the book, and contains an essential part of my argument which is not stated elsewhere in it. I have excluded all those papers which presuppose acquaintance on the part of the reader with technicalities in the field of logic, probability theory, etc. But in the Addenda I have put together a few technical notes which may be useful to those who happen to be interested in these things. The Addenda and four of the chapters are published here for the first time.
To avoid misunderstandings I wish to make it quite clear that I use the terms 'liberal', 'liberalism', etc., always in a sense in which they are still generally used in England (though perhaps not in America): by a liberal I do not mean a sympathizer with any one political party but simply a man who values individual freedom and who is alive to the dangers inherent in all forms of power and authority.
Berkeley, California, Spring 1962 K. R. P.
ACKNOWLEDGEMENTS
THE PLACE and date of the first publication of the papers here collected are mentioned in each case at the bottom of the first page of each chapter. I wish to thank the editors of the various periodicals for giving me permission to include these papers in the present book.
I have been helped in various ways with the revision of the text, the reading of the proofs, and the preparation of the index, by Richard Gombrich, Lan Freed and Dr. Julius Freed, J. W. N. Watkins, Dr. William W. Bartley, Dr. Ian Jarvie, Bryan Magee, and A. E. Musgrave. I am greatly indebted to all of them for their help. My greatest indebtedness is to my wife. She has worked on the book even harder than I, and her acute criticism has led to innumerable improvements.
K. R. P.
PREFACE TO THE SECOND EDITION
THIS NEW edition contains, apart from a general revision of the text, a considerable amount of historical material which accumulated since the first edition was printed (이 문장에서 since는 ~한 이래의 의미로 쓰였기 때문에 which has accumulated로 완료시제를 사용해야 한다. 문법적 오류이다 - 역자 주). As far as possible I have tried to leave the pagination unchanged so that references to the first edition will in almost all cases agree with the second edition. There is also an addition to the end of chapter 5, and a new Addendum (6) at the end of the book. Alan Musgrave has completely revised the indexes, and has also given me much help with improvements to the body of the book.
Having tried, in my first Preface, to sum up my thesis in one sentence - that we can learn from our mistakes - I may perhaps add to it a word or two here. It is part of my thesis that all our knowledge grows only through the correcting of our mistakes. For example, what is called today 'negative feed back' is only an application of the general method of learning from our mistakes - the method of trial and error.
Now it appears that in order to apply this method we must already have some aim: we err if we stray from this aim. (A feedback thermostat depends on some aim - some definite temperature - which must be selected in advance.)
Yet though in this way some aim must precede any particular instance of the trial and error method, this does not mean that our aims are not in their turn subject to this method. Any particular aim can be changed by trial and error, and many are so changed. (We can change the setting on our thermostat, selecting by trial and error one that better satisfies some aim - an aim of a different level.) And our system of aims not only changes, but it can also grow in a way closely similar to the way in which our knowledge grows.
Penn, Buckinghamshire, January 1965 K. R. P.
PREFACE TO THE THIRD EDITION
APART FROM a great number of minor revisions several additions have been made to the text, among them a clearer statement of my views on Taski's theory of truth (pp. 223 f.) (이 문장에서 among them은 among which로 표현하여 관계대명사 which의 선행사가 several additions로 해야 문법에 맞을 것 같다. - 역자 주). There are also some new Addenda.
Penn, Buckinghamshire, April 1968 K. R. P.
INTRODUCTION
But I shall let the little I have learnt go forth into the day in order that someone better than I may guess the truth, and in his work may prove and rebuke my error. At this I shall rejoice that I was yet a cause whereby such truth has come to light.
ALBRECHT DÜRER
I can now rejoice even in the falsification of a cherished theory, because even this is a scientific success.
JOHN CAREW ECCLES
ON THE SOURCES OF KNOWLEDGE
AND OF IGNORANCE
It follows, therefore, that truth manifests itself ...
BENEDICTUS DE SPINOZA
Every man carries about him a touchstone ... to distinguish ... truth from appearances.
JOHN LOCKE
... it is impossible for us to think of anything, which we have not antecedently felt, either by our external or internal senses.
DAVID HUME
THE TITLE of this lecture is likely, I fear, to offend some critical ears. For although 'Sources of Knowledge' is in order, and 'Sources of Error' would have been in order too, the phrase 'Sources of Ignorance' is another matter. 'Ignorance is something negative: it is the absence of knowledge. But how on earth can the absence of anything have sources?'? This question was put to me by a friend
? Descartes and Spinoza went even further, and asserted that not only ignorance but also error is 'something negative' - a 'privation' of knowledge, and even of the proper use of our freedom. (See Descartes' Principle, Part I, 33-42, and the Third and Fourth Mediations ; also Spinoza's Ethics, Part II, propos. 35 and schol. ; and his Principles of Descartes' Philosophy, Part I, propos. 15 and schol.) Nevertheless, they speak (e.g. Ethics, Part II, propos. 41) also of the 'cause' of falsity (or error), as does Aristotle, Met. 1046a30-35 ; see also 1008b35 ; 1009a6 ; 1052a1 ; Top. 147b29 ; An. Post 79b23 ; and Cat. 12a26-13a35.
Annual Philosophical Lecture read before the British Academy on January 29th, 1960. First published in the Proceedings of the British Academy, 46, 1960, and separately by Oxford University Press, 1961.
when I confided to him the title I had chosen for this lecture. Hard pressed for a reply I found myself improvising a rationalization, and explaining to my friend that the curious linguistic effect of the title was actually intended. I told him that I hoped to direct attention, through the phrasing of this title, to a number of unrecorded philosophical doctrines and among them (apart from the doctrine that truth is manifest) especially to the conspiracy theory of ignorance which interprets ignorance not as a mere lack of knowledge but as the work of some sinister power, the source of impure and evil influences which pervert and poison our minds and instil in us the habit of resistance to knowledge.
I am not quite sure whether this explanation allayed my friend's misgivings, but it did silence him. Your case is different since you are silenced by the rules of the present transactions. So I can only hope that I have allayed your misgivings sufficiently, for the time being, to allow me to begin my story at the other end - with the sources of knowledge rather than with the sources of ignorance. However, I shall presently come back the sources of ignorance, and also to the conspiracy theory of these sources.
I
The problem which I wish to examine afresh in this lecture, and which I hope not only to examine but to solve, may perhaps be described as an aspect of the old quarrel between the British and the Continental schools of philosophy - the quarrel between the classical empiricism of Bacon, Locke, Berkeley, Hume, and Mill, and the classical rationalism or intellectualism of Descartes. Spinoza, and Leibniz (이 문장에서 Descartes 뒤의 마침표는 쉼표로 바뀌어야 한다. 원문의 오류로 보인다. - 역자 주). In this quarrel the British school insisted that the ultimate source of all knowledge was observation, while the Continental school insisted that it was the intellectual intuition of clear and distinct ideas.
Most of these issues are still very much alive. Not only has empiricism, still the ruling doctrine in England, conquered the United States, but it is now widely accepted even on the European Continent as the true theory of scientific knowledge. Cartesian intellectualism, alas, has been only too often distorted into one or another of the various forms of modern irrationalism.
In this lecture I shall try to show of the two schools of empiricism and rationalism that their differences are much smaller than their similarities, and that both are mistaken. I hold that they are mistaken although I am myself an empiricist and a rationalist of sorts. But I believe that, though observation and reason have each an important role to play, these roles hardly resemble those which their classical defenders attributed to them. More especially, I shall try to show that neither observation nor reason can be described as a source of knowledge, in the sense in which they have been claimed to be sources of knowledge, down to the present day.
II
Our problem belongs to the theory of knowledge, or to epistemology, reputed to be the most abstract and remote and altogether irrelevant region of pure philosophy. Hume, for example, one of the greatest thinkers in the field, predicted that, because of the remoteness and abstractness and practical irrelevance of some of his results, none of his readers would believe in them for more than an hour.
Kant's attitude was different. He thought that the problem 'What can I know?' was one of the three most important questions a man could ask. Bertrand Russell, in spite of being closer to Hume in philosophic temperament, seems to side in this matter with Kant. And I think Russell is right when he attributes to epistemology practical consequences for science, ethics, and even politics. For he says that epistemological relativism, or the idea that there is no such thing as objective truth, and epistemological pragmatism, or the idea that truth is the same as usefulness, are closely linked with authoritarian and totalitarian ideas. (Cf. Let the People Think, 1941, pp. 77 ff.)
Russell's views are of course disputed. Some recent philosophers have developed a doctrine of the essential impotence and practical irrelevance of all genuine philosophy, and thus, one can assume, of epistemology. Philosophy, they say, cannot by its very nature have any significant consequences, and so it can influence neither science nor politics. But I think that ideas are dangerous and powerful things, and that even philosophers have sometimes produced ideas. Indeed, I do not doubt that this new doctrine of the impotence of all philosophy is amply refuted by the facts.
The situation is really very simple. The belief of a liberal - the belief in the possibility of a rule of law, of equal justice, of fundamental rights, and a free society - can easily survive the recognition that judges are not omniscient and may make mistakes about facts and that, in practice, absolute justice is never fully realized in any particular legal case. But the belief in the possibility of a rule of law, of justice, and of freedom, can hardly survive the acceptance of an epistemology which teaches that there are no objective facts; not merely in this particular case, but in any other case; and that the judge cannot have made a factual mistake because he can no more be wrong about the facts than he can be right.
III
The great movement of liberation which started in the Renaissance and led through the many vicissitudes of the reformation and the religious and revolutionary wars to the free societies in which the English-speaking peoples are privileged to live, this movement was inspired throughout by an unparalleled epistemological optimism: by a most optimistic view of man's power to discern truth and to acquire knowledge.
At the heart of this new optimistic view of the possibility of knowledge lies the doctrine that truth is manifest. The truth may perhaps be veiled. But it may reveal itself.? And if it does not
? See my mottoes: Spinoza, Of God, Man, and Human Happiness, ch. 15 (parallel passages are: Ethics, ii, scholium to propos. 43: 'Indeed, as light manifests itself and darkness, so with truth: it is its own standard, and that of falsity.' De intell, em., 35, 36; letter 76[74], end of para. 5[7]; Locke, Cond. Underst., 3. (Cp. also Romans, i, 19, and see ch. 17, below.)
reveal itself, it may be revealed by us. Removing the veil may not be easy. But once the naked truth stands revealed before our eyes, we have the power to see it, to distinguish it from falsehood, and to know that it is truth.
The birth of modern science and modern technology was inspired by this optimistic epistemology whose main spokesmen were Bacon and Descartes. They taught that there was no need for any man to appeal to authority in matters of truth because each man carried the sources of knowledge in himself; either in his power of sense-perception which he may use for the careful observation of nature, or in his power of intellectual intuition which he may use to distinguish truth from falsehood by refusing to accept any idea which is not clearly and distinctly perceived by the intellect.
Man can know: thus he can be free. This is the formula which explains the link between epistemological optimism and the ideas of liberalism.
This link is paralleled by the opposite link. Disbelief in the power of human reason, in man's power to discern the truth, is almost invariably linked with distrust of man. Thus epistemological pessimism is linked, historically, with a doctrine of human depravity, and it tends to lead to the demand for the establishment of powerful traditions and the entrenchment of a powerful authority which would save man from his folly and his wickedness. (There is a striking sketch of this theory of authoritarianism, and a picture of the burden carried by those in authority, in the story of The Grand Inquisitor in Dostoievsky's The Brothers Karamazov.)
The contrast between epistemological pessimism and optimism may be said to be fundamentally the same as that between epistemological traditionalism and rationalism. (I am using the latter term in its wider sense in which it is opposed to irrationalism, and in which it covers not only Cartesian intellectualism but empiricism also.) For we can interpret traditionalism as the belief that, in the absence of an objective discernible truth, we are faced with the choice accepting the authority of tradition, and chaos; while rationalism has, of course, always claimed the right of reason and of empirical science to criticize, and to reject, any tradition, and any authority, as being based on sheer unreason or prejudice or accident.
IV
It is a disturbing fact that even an abstract study like pure epistemology is not as pure as one might think (and as Aristotle believed) but that its ideas may, to a large extent, be motivated and unconsciously inspired by political hopes and by Utopian dreams. This should be a warning to the epistemologist. What can he do about it? As an epistemologist I have only one interest - to find out the truth about the problems of epistemology, whether or not this truth fits in with my political ideas. But am I not liable to be influenced, unconsciously, by my political hopes and beliefs?
It so happens that I am not only an empiricist and a rationalist of sorts but also a liberal (in the English sense of this term); but just because I am a liberal, I feel that few things are more important for a liberal than to submit the various theories of liberalism to a searching critical examination.
While I was engaged in a critical examination of this kind I discovered the part played by certain epistemological theories in the development of liberal ideas; and especially by the various forms of epistemological optimism. And I found that, as an epistemologist, I had to reject these epistemological theories as untenable. This experience of mine may illustrate the point that our dreams and our hopes need not necessarily control our results, and that, in searching for the truth, it may be our best plan to start by criticizing our most cherished beliefs. This may seem to some a perverse plan. But it will not seem so to those who want to find the truth and are not afraid of it.
V
In examining the optimistic epistemology inherent in certain ideas of liberalism, I found a cluster of doctrines which, although often accepted implicitly, have not, to my knowledge, been explicitly discussed or even noticed by philosophers or historians. The most fundamental of them is one which I have already mentioned - the doctrine that truth is manifest. The strangest of them is the conspiracy theory of ignorance, which is a curious outgrowth from the doctrine of manifest truth.
By the doctrine that truth is manifest I mean, you will recall, the optimistic view that truth, if put before us naked, is always recognizable as truth. Thus truth, if it does not reveal itself, has only to be unveiled, dis-covered. once this is done, there is no need for further argument. We have been given eyes to see the truth, and the 'natural light' of reason to see it by.
This doctrine is at the heart of the teaching of both Descartes and Bacon. Descartes based his optimistic epistemology on the important theory of the veracitas dei. What we clearly and distinctly see to be true must indeed be true; for otherwise God would be deceiving us. Thus the trustfulness of God must make truth manifest.
In Bacon we have a similar doctrine. It might be described as the doctrine of the veracitas naturae, the truthfulness of Nature. Nature is an open book. He who reads it with a pure mind cannot misread it. only if his mind is poisoned by prejudice can he fall into error.
This last remark shows that the doctrine that truth is manifest creates the need to explain falsehood. Knowledge, the possession of truth, need not be explained. But how can we ever fall into error if truth is manifest? The answer is: through our own sinful refusal to see the manifest truth; or because our minds harbour prejudices inculcated by education and tradition, or other evil influences which have perverted our originally pure and innocent minds. Ignorance may be the work of powers conspiring to keep us in ignorance, to poison our minds by filling them with falsehood, and to blind our eyes so that they cannot see the manifest truth. Such prejudices and such powers, then, are sources of ignorance.
The conspiracy theory of ignorance is fairly well known in its Marxian form as the conspiracy of a capitalist press that perverts and suppresses truth and fills the workers' minds with false ideologies. Prominent among these, of course, are the doctrines of religion. It is surprising to find how unoriginal this Marxist theory is. The wicked and fraudulent priest who keeps the people in ignorance was a stock figure of the eighteenth century and, I am afraid, one of the inspirations of liberalism. It can be traced back to the protestant belief in the conspiracy of the Roman Catholic Church, and also to the beliefs of those dissenters who held similar views about the Established Church. (Elsewhere I have traced the pre-history of this belief back to Plato's uncle Critias; see chapter 8, section ii, of my Open Society.)
This curious belief in a conspiracy is the almost inevitable consequence of the optimistic belief that truth, and therefore goodness, must prevail if only truth is given a fair chance. 'Let her and falsehood grapple; who ever knew Truth put to the worse, in a free and open encounter?' (Areopagitica. Compare the French proverb, La vérité triomphe toujours.) So when Milton's Truth was put to the worse, the necessary inference was that the encounter had not been free and open: if the manifest truth does not prevail, it must have been maliciously suppressed. one can see that an attitude of tolerance which is based upon an optimistic faith in the victory of truth may easily be shaken. (See J. W. N. Watkins on Milton in The Listener, 22nd January 1959.) For it is liable to turn into a conspiracy theory which would be hard to reconcile with an attitude of tolerance.
I do not assert that there was never a grain of truth in this conspiracy theory. But in the main it was a myth, just as the theory of manifest truth from which it grew was a myth.
For the simple truth is that truth is often hard to come by, and that once found it may easily be lost again. Erroneous beliefs may have an astonishing power to survive, for thousands of years, in defiance of experience, with or without the aid of any conspiracy. The theory of science, and especially of medicine, could furnish us with a number of good examples. one example is, indeed, the general conspiracy theory itself. I mean the erroneous view that whenever something evil happens it must be due to the evil will of an evil power. Various forms of this view have survived down to our own day.
Thus the optimistic epistemology of Bacon and of Descartes cannot be true. Yet perhaps the strangest thing in this story is that this false epistemology was the major inspiration of an intellectual and moral revolution without parallel in history. It encouraged men to think for themselves. It gave them hope that through knowledge they might free themselves and others from servitude and misery. It made modern science possible. It became the basis of the fight against censorship and the suppression of free thought. It became the basis of the nonconformist conscience, of individualism, and of a new sense of man's dignity; of a demand for universal education, and of a new dream of a free society. It made men feel responsible for themselves and for others, and eager to improve not only their own condition but also that of their fellow men. It is a case of a bad idea inspiring many good ones.
VI
This false epistemology, however, has also led to disastrous consequences. The theory that truth is manifest - that it is there for everyone to see, if only he wants to see it - this theory is the basis of almost every kind of fanaticism. For only the most depraved wickedness can refuse to see the manifest truth; only those who have reason to fear truth conspire to suppress it.
Yet the theory that truth is manifest not only breeds fanatics - men possessed by the conviction that all those who do not see the manifest truth must be possessed by the devil - but it may also lead, though perhaps less directly than does a pessimistic epistemology, to authoritarianism. This is so, simply, because truth is not manifest, as a rule. The allegedly manifest truth is therefore in constant need, not only of interpretation and affirmation, but also of re-interpretation and re-affirmation. An authority is required to pronounce upon, and lay down, almost from day to day, what is to be the manifest truth, and it may learn to do so arbitrarily and cynically. And many disappointed epistemologists will turn away from their own former optimism and erect a resplendent authoritarian theory on the basis of a pessimistic epistemology. It seems to me that the greatest epistemologist of all, Plato, exemplifies this tragic development.
VII
Plato plays a decisive part in the pre-history of Descartes' doctrine of the veracitas dei - the doctrine that our intellectual intuition does not deceive us because God is truthful and will not deceive us; or in other words, the doctrine that our intellect is a source of knowledge because God is a source of knowledge. This doctrine has a long history which can easily be traced back at least to Homer and Hesiod.
To us, the habit of referring to one's sources would seem natural in a scholar or an historian, and it is perhaps a little surprising to find that this habit stems from the poets; but it does. The Greek poets refer to the sources of their knowledge. The sources are divine. They are the Muses. ' ... the Greek bards', Gilbert Murray observes (The Rise of the Greek Epic, 3rd edn., 1924, p.96), 'always owe, not only what we should call their inspiration, but their actual knowledge of facts to the Muses. The Muses "are present and know all things" ... Hesiod ... always explains that he is dependent on the Muses for his knowledge. Other sources of knowledge are indeed recognized .... But most often he consults the Muses .... So does Homer for such subjects as the Catalogue of the Greek army.'
As this quotation shows, the poets were in the habit of claiming not only divine sources of inspiration, but also divine sources of knowledge - divine guarantors of the truth of their stories.
Precisely the same two claims were raised by the philosophers Heraclitus and Parmenides. Heraclitus, it seems, sees himself as a prophet who 'talks with raving mouth,... possessed by the god' - by Zeus, the source of all wisdom (DK,? B 92, 32;cf.93, 41, 64, 50). And Parmenides, one could almost say, forms the missing link between Homer or Hesiod on the one side and Descartes on the other. His guiding star and inspiration is the goddess Dikē, described by Heraclitus (DK, B 28) as the guardian of truth. Parmenides describes her as the guardian and keeper of the keys of truth, and as the source of all his knowledge. But Parmenides and Descartes have more in common than the doctrine of divine veracity. For example, Parmenides is told by his divine guarantor of truth that in order to distinguish between truth and falsehood, he must rely upon the intellect alone, to the exclusion of the senses of sight, hearing, and taste. (Cf. Heraclitus, B 54, 123; 88 and 126 hint at unobservable changes yielding observable opposites.) And even the principle of his physical theory which, like Descartes, he founds upon his
? DK = Diels-Kranz, Fragmente der Vorsokratiker.
intellectualist theory of knowledge, is the same as that adopted by Descartes: it is the impossibility of a void, the necessary fullness of the world.
In Plato's Ion a sharp distinction is made between divine inspiration - the divine frenzy of the poet - and the divine sources or origins of true knowledge. (The topic is further developed in the Phaedrus, especially from 259c on; and in 275b-c Plato even insists, as Harold Cherniss pointed out to me, on the distinction between questions of origin and of truth.) Plato grants that the poets are inspired, but he denies to them any divine authority for their alleged knowledge of facts. Nevertheless, the doctrine of the divine source of our knowledge plays a decisive part in Plato's famous theory of anamnēsis which in some measure grants to each man the possession of divine sources of knowledge. (The knowledge considered in this theory is knowledge of the essence or nature of a thing rather than of a particular historical fact.) According to Plato's Meno (81b-d) there is nothing which our immortal soul does not know, prior to our birth. For as all natures are kindred and akin, our soul must be akin to all natures. Accordingly it knows them all: it knows all things. (On kinship and knowledge see also Phaedo, 79d; Republic, 611d; Laws, 899d.) In being born we forget; but we may recover our memory and our knowledge, though only partially: only if we see the truth again shall we recognize it. All knowledge is therefore re-cognition - recalling or remembering the essence or true nature that we once know. (Cp. Phaedo, 72e ff.; 75e.)
This theory implies that our soul is in a divine state of omniscience as long as it dwells, and participates, in a divine world of ideas or essences or natures, prior to being born. The birth of a man is his fall from grace; it is his fall from a natural or divine state of knowledge; and it is thus the origin and cause of his ignorance. (Here may be the seed of the idea that ignorance is sin, or at least related to sin; cp. Phaedo, 76d.)
It is clear that there is a close link between this theory of anamnēsis and the doctrine of the divine origin or source of our knowledge. At the same time, there is also a close link between the theory of anamnēsis and the doctrine of manifest truth: if, even in our depraved state of forgetfulness, we see the truth, we cannot but recognize it as the truth. So, as the result of anamnēsis, truth is restored to the status of that which is not forgotten and not concealed (alēthēs): it is that which is manifest.
Socrates demonstrates this in a beautiful passage of the Meno by helping an uneducated young slave to 'recall' the proof of a special case of the theorem of Pythagoras. Here indeed is an optimistic epistemology, and the root of Cartesianism. It seems that, in the Meno, Plato was conscious of the highly optimistic character of his theory, for he describes it as a doctrine which makes men eager to learn, to search, and to discover.
Yet disappointment must have come to Plato; for in the Republic (and also in the Phaedrus) we find the beginnings of a pessimistic epistemology. In the famous story of the prisoners in the cave (514 ff.) he shows that the world of our experience is only a shadow, a reflection, of the real world. And he shows that even if one of the prisoners should escape from the cave and face the real world, he would have almost insuperable difficulties in seeing and understanding it - to say nothing of his difficulties in trying to make those understand who stayed behind. The difficulties in the way of an understanding of the real world are all but super-human, and only the very few, if anybody at all, can attain to the divine state of understanding the real world - the divine state of true knowledge, of epistēmē.
This is a pessimistic theory with regard to almost all men, though not with regard to all. (For it teaches that truth may be attained by a few - the elect. With regard to these it is, one might say, more wildly optimistic than even the doctrine that truth is manifest.) The authoritarian and traditionalist consequences of this pessimistic theory are fully elaborated in the Laws.
Thus we find in Plato the first transition from an optimist to a pessimistic epistemology. Each of these forms a basis for one of two diametrically opposed philosophies of the state and of society: on the one hand an anti-traditionalist, anti-authoritarian, revolutionary and Utopian rationalism of the Cartesian kind, and on the other hand an authoritarian traditionalism.
This development may well be connected with the fact that the idea of an epistemological fall of man can be interpreted not only in the sense of the optimistic doctrine of anamnēsis, but also in a pessimistic sense.
In this latter interpretation, the fall of man condemns all mortals - or almost all - to ignorance. I think one can discern in the story of the cave (and perhaps also in the story of the fall of the city, when the Muses and their divine teaching are neglected; see Republic, 546d) an echo of an interesting older form of this idea. I have in mind Parmenides' doctrine that the opinions of mortals are delusions, and the results of a misguided convention. (This may stem from Xenophanes' doctrine that all human knowledge is guesswork, and that his own theories are, at best, merely similar to the truth.?) The misguided convention is a linguistic one: it consists in giving names to what is nonexistent. The idea of an epistemological fall of man can perhaps be found, as Karl Reinhardt suggested, in those words of the goddess that mark the transition from the way of truth to the way of delusive opinion.?
? Xenophanes' fragment here alluded to is DK, B 35, quoted here in ch. 5, section xii, below. For the idea of truthlikeness - of a doctrine that partly corresponds to the facts (and so may be 'taken for real', as Parmenides has it here) - see especially pp. 236 f., below, where verisimilitude is contrasted with probability, and the Addenda 3, 4, 6, and 7.
? See Karl Reinhardt, Parmenides, 2nd ed., p. 26; see also pp. 5-11 for the text of Parmenides, DK, B 1: 31-32. which are the first two lines quoted here. My third line is Parmenides, DK, B 8:60, cf. Xenophanes, B 35. My fourth line is Parmenides, DK, B 8:61.
But you also shall learn how it was that delusive opinion,
Bound to be taken for real, was forcing its way through
all things...
Now of this world thus arranged to seem wholly like truth
I shall tell you;
Then you will be nevermore led astray by the notions
of mortals.
Thus though the fall affects all men, the truth may be revealed to the elect by an act of grace - even the truth about the unreal world of the delusions, opinions, conventional notions and decisions, of mortals: the unreal world of appearance, destined to be accepted, and to be approved of, as real.?
? It is interesting to contrast this pessimistic view of the necessity of error with the optimism of Descartes, or of Spinoza who scorns (letter 76[74], paragraph 5[7]) those 'who dream of an impure spirit inspiring us with false ideas which are similar to true ones (veris similes)'; see also ch. 10, section xiv, and Addendum 6, below.
The revelation received by Parmenides, and his conviction that a few may reach certainty about both the unchanging world of eternal reality and the unreal and changing world of verisimilitude and deception, were two of the main inspirations of Plato's philosophy. It was a theme to which he was for ever returning, oscillating between hope, despair, and resignation.
VIII
Yet what interests us here is Plato's optimistic epistemology, the theory of anamnēsis in the Meno. It contains, I believe, not only the germs of Descartes' intellectualism, but also the germs of Aristotle's and especially of Bacon's theories of induction.
For Meno's slave is helped by Socrates' judicious questions to remember or recapture the forgotten knowledge which his soul possessed in its pre-natal state of omniscience. It is, I believe, this famous Socratic method, called in the Theaetetus the art of midwifery or maieutic, to which Aristotle alluded when he said (Metaphysics, 1078b17-33; see also 987b1) that Socrates was the inventor of the method of induction.
Aristotle, and also Bacon, I wish to suggest, meant by 'induction' not so much the inferring of universal laws from particular observed instances as a method by which we are guided to the point whence we can intuit or perceive the essence or the true nature of a thing.? But this, as we have seen, is precisely the aim of Socrates' maieutic: its aim is to help or lead us to anamnēsis; and anamnēsis is the power of seeing the true nature or essence of a thing, the nature or essence with which we were acquainted before the birth, before our fall from grace. Thus the aims of the two, maieutic and induction, are the same. (Incidentally, Aristotle taught that the result of an induction - the intuition of the essence - was to be expressed by a definition of that essence.)
? Aristotle meant by 'induction' (epagōgē) at least two different things which he sometimes links together. one is a method by which we are 'led to intuit the general principle' (Anal. Pr. 67a 22f., on anamnēsis in the Meno; An. Post., 71a 7). The other (Topics 105a 13, 156a 4; 157a 34; Anal. Posteriora 78a 35; 81b 5 ff.) is a method of adducing (particular) evidence - positive evidence rather than critical evidence or counter-examples. The first method seems to me the older, and the one which can be better connected with Socrates and his maieutic method of criticism and counter-examples. The second method seems to originate in the attempt to systemize induction logically or, as Aristotle (Anal. Priora, 68b 15 ff.). puts it, to construct a valid 'syllogism which springs out of induction'; this, to be valid, must of course be a syllogism of perfect or complete induction (complete enumeration of instances); and ordinary induction in the sense of the second method here mentioned is just a weakened (and invalid) form of this valid syllogism. (Cp. my Open Society, note 33 to ch. 11.)
Now let us look more closely at the two procedures. The maieutic art of Socrates consists, essentially, in asking questions designed to destroy prejudices; false beliefs which are often traditional or fashionable beliefs; false answers, given in the spirit of ignorant cocksureness. Socrates himself does not pretend to know. His attitude is described by Aristotle in the words, 'Socrates raised questions but gave no answers; for he confessed that he did not know.' (Sophist. El., 183b7; cp. Theaetetus, 150c-d, 157c, 161b.) Thus Socrates' maieutic is not an art that aims at teaching any belief, but one that aims at purging or cleansing (cf. the allusion to the Amphidromia in Theaetetus 160e; cp. Phaedo 67b, 69b/c) the soul of its false beliefs, its seeming knowledge, its prejudices. It achieves this by teaching us to doubt our own convictions.
Fundamentally the same procedure is part of Bacon's induction.
IX
The framework of Bacon's theory of induction is this. He distinguishes in the Novum Organum between a true method and a false method. His name for the true method, 'interpretatio naturae' is ordinarily translated by the phrase 'interpretation of nature', and his name for the false method, 'anticipatio mentis', by 'anticipation of the mind'. Obvious as these translation may seem, they are misleading. What Bacon means by 'interpretatio naturae' is, I suggest, the reading of, or better still, the spelling out of, the book of Nature. (Galileo, in a famous passage of his Il saggiatore, section 6, of which Mario Bunge has kindly reminded me, speaks of 'that great book which lies before our eyes - I mean the universe'; cf. Descartes' Discourse, section 1.)
The term 'interpretation' has in modern English a decidedly subjectivistic or relativistic tinge. When we speak of Rudolf Serkin's interpretation of the Emperor Concerto, we imply that there are different interpretations, but that this one is Serkin's. We do not of course wish to imply that Serkin's is not the best, the truest, the nearest to Beethoven's intentions. But although we may be unable to imagine that there is a better one, by using the term 'interpretation' we imply that there are other interpretations or readings, leaving the question open whether some of these other readings may, or may not, be equally true.
I have here used the word 'reading' as a synonym for 'interpretation', not only because the two meanings are so similar but also because 'reading' and 'to read' have suffered a modification analogous to that of 'interpretation' and 'to interpret'; except that in the case of 'reading' both meanings are still in full use. In the phrase 'I have read John's letter', we have the ordinary, non-subjectivist meaning. But 'I read this passage of John's letter quite differently' or perhaps 'My reading of this passage is very different' may illustrate a later, a subjectivistic or relativistic, meaning of the word 'reading'.
I assert that the meaning of 'interpret' (though not in the sense of 'translate') has changed in exactly the same way, except that the original meaning - perhaps 'reading aloud for those who cannot read themselves' - has been practically lost. Today even the phrase 'the judge must interpret the law' means that he has a certain latitude in interpreting it; while in Bacon's time it would have meant that the judge had the duty to read the law as it stood, and to expound it and to apply it in the one and only right way. Interpretatio juris (or legis) means either this or else the expounding of the law to the layman (Cp. Bacon, De Augmentis VI, xlvi; and T. Manley, The Interpreter: ... Obscure Works and Terms used in the Lawes of this Realm, 1672.) It leaves the legal interpreter no latitude; at any rate no more than would be allowed to a sworn interpreter translating a legal document.
Thus the translation 'the interpretation of nature' is misleading; it should be replaced by something like 'the (true) reading of nature'; analogous to 'the (true) reading of the law'. And I suggest that 'reading the book of Nature as it is' or better still 'spelling out the book of Nature' is what Bacon meant. The point is that the phrase should suggest the avoidance of all interpretation in the modern sense, and that it should not contain, more especially, any suggestion of an attempt to interpret what is manifest in nature in the light of non-manifest causes or of hypotheses; for all this would be an anticipatio mentis, in Bacon's sense. (It is a mistake, I think, to ascribe to Bacon the teaching that hypotheses - or conjectures - may result from his method of induction; for Baconian induction results in certain knowledge rather than in conjecture.)
As to the meaning of 'anticipatio mentis' we have only to quote Locke: 'men give themselves up to the first anticipation of their minds' (Conduct Underst., 26). This is, practically, a translation from Bacon; and it makes it amply clear that 'anticipatio' means 'prejudice' or even 'superstition'. We can also refer to the phrase 'anticipatio deorum' which means harbouring naïve or primitive or superstitious views about the gods. But to make matters still more obvious: 'prejudice' (cp. Descartes, Princ. I, 50) derives from a legal term, and according to the Oxford English Dictionary it was Bacon who introduced the verb 'to prejudge' into the English language, in the sense of 'to judge adversely in advance' - that is, in violation of the judge's duty.
Thus the two methods are (1) 'the spelling out of the open book of Nature', leading to knowledge or epistēmē, and (2) 'the prejudice of the mind that wrongly prejudges, and perhaps misjudges, Nature', leading to doxa, or mere guesswork, and to the misreading of the book of Nature. This latter method, rejected by Bacon, is in fact a method of interpretation, in the modern sense of the word. It is a method of conjecture or hypothesis (a method of which, incidentally, I happen to be a convinced advocate.)
How can we prepare ourselves to read the book of Nature properly or truly? Bacon's answer is: by purging our minds of all anticipations or conjectures or guesses or prejudices (Nov. Org. i, 68, 60 end). There are various things to be done in order so to purge our minds. We have to get rid of all sorts of 'idols', or generally held false beliefs; for these distort our observations (Nov. Org. i, 97). But we have also, like Socrates, to look out for all sorts of counter-instances by which to destroy our prejudices concerning the kind of thing whose true essence or nature we wish to ascertain. Like Socrates, we must, by purifying our intellects, prepare our souls to face the eternal light of essences or natures (cf. St Augustine, Civ. Dei, VIII, 3): our impure prejudices must be exorcized by the invocation of counter-instances (Nov. Org. ii, 16 ff.)
Only after our souls have been cleansed in this way may we begin the work of spelling out diligently the open book of Nature, the manifest truth,
In view of all this I suggest that Baconian (and also Aristotelian) induction is the same, fundamentally, as Socratic maieutic; that is to say, the preparation of the mind by cleansing it of prejudices, in order to enable it to recognize the manifest truth, or to read the open book of Nature.
Descartes' method of systematic doubt is also fundamentally the same: it is a method of destroying all false prejudices of the mind, in order to arrive at the unshakable basis of self-evident truth.
We can now see more clearly how, in this optimistic epistemology, the state of knowledge is the natural or the pure state of man, the state of the innocent eye which can see the truth, while the state of ignorance has its source in the injury suffered by the innocent eye in man's fall from grace; an injury which can be partially healed by a course of purification. And we can see more clearly why this epistemology, not only in Descartes' but also in Bacon's form, remains essentially a religious doctrine in which the source of all knowledge is divine authority.
One might say that, encouraged by the divine 'essence' or divine 'natures' of Plato, and by the traditional Greek opposition between the truthfulness of nature and the deceitfulness of man-made convention, Bacon substitutes, in his epistemology, 'Nature' for 'God'. This may be the reason why we have to purify ourselves before we may approach the goddess Natura: when we have purified our minds, even our sometimes unreliable senses (held by Plato to be hopelessly impure) will be pure. The source of knowledge must be kept pure, because any impurity may become a source of ignorance.
X
In spite of the religious character of their epistemologies, Bacon's and Descartes' attack upon prejudice, and upon traditional beliefs which we carelessly or recklessly harbour, are clearly anti-authoritarian and anti-traditionalist. For they require us to shed all beliefs except those whose truth we have perceived ourselves. And their attacks were certainly intended to be attacks upon authority and tradition. They were part of the war against authority which it was the fashion of the time to wage, the war against the authority of Aristotle and the tradition of the schools. Men do not need such authorities if they can perceive the truth themselves.
But I do not think that Bacon and Descartes succeeded in freeing their epistemologies from authority; not so much because they appealed to religious authority - to Nature or to God - but for an even deeper reason.
In spite of their individualistic tendencies, they did not dare to appeal to our critical judgment - to your judgment, or to mine; perhaps because they felt that this might lead to subjectivism and to arbitrariness. Yet whatever the reason may have been, they certainly were unable to give up thinking in terms of authority, much as they wanted to do so. They could only replace one authority - that of Aristotle and the Bible - by another. Each of them appealed to a new authority; the one to the authority of senses, and the other to the authority of the intellect.
This means that they failed to solve the great problem: How can we admit that our knowledge is a human - an all too human - affair, without at the same time implying that it is all individual whim and arbitrariness?
Yet this problem had been seen and solved long before; first, it appears, by Xenophanes, and then by Democritus, and by Socrates (the Socrates of the Apology rather than of the Meno). The solution lies in the realization that all of us may and often do err, singly and collectively, but that this very idea of error and human fallibility involves another one - the idea of objective truth: the standard which we may fall short of. Thus the doctrine of fallibility should not be regarded as part of a pessimistic epistemology. This doctrine implies that we may seek for truth, for objective truth, though more often than not we may miss it by a wide margin. And it implies that if we respect truth, we must search for it by persistently searching for our errors: by indefatigable rational criticism, and self-criticism.
Erasmus of Rotterdam attempted to revive this Socratic doctrine - the important though unobtrusive doctrine, 'Know thyself, and thus admit to thyself how little thou knowest!' Yet this doctrine was swept away by the belief that truth is manifest, and by the new self-assurance exemplified and taught in different ways by Luther and Calvin, by Bacon and Descartes.
It is important to realize, in this connection, the difference between Cartesian doubt and the doubt of Socrates, or Erasmus, or Montaigne. While Socrates doubts human knowledge or wisdom, and remains firm in his rejection of any pretension to knowledge or wisdom, Descartes doubts everything - but only to end up with the possession of absolutely certain knowledge; for he finds that his universal doubt would lead him to doubt the truthfulness of God, which is absurd. Having proved that universal doubt is absurd, he concludes that we can know securely, that we can be wise - by distinguishing, in the natural light of reason, between clear and distinct ideas whose source is God, and all other ideas whose source is our own impure imagination. Cartesian doubt, we see, is merely a maieutic instrument for establishing a criterion of truth and, with it, a way to secure knowledge and wisdom. Yet for the Socrates of the Apology, wisdom consisted in the awareness of our limitations; in knowing how little we know, every one of us.
It was this doctrine of an essential human fallibility which Nicolas of Cusa and Erasmus of Rotterdam (who refers to Socrates) revived; and it was this 'humanist' doctrine (in contradiction to the optimistic doctrine on which Milton relied, the doctrine that truth will prevail) which Nicolas and Erasmus, Montaigne and Locke and Voltaire, followed by John Stuart Mill and Bertrand Russell, made the basis of the doctrine of tolerance. 'What is tolerance?' asks Voltaire in his Philosophical Dictionary; and he answers: 'It is a necessary consequence of our humanity. We are all fallible, and prone to error; let us then pardon each other's follies. This is the first principle of natural right.' (More recently the doctrine of fallibility has been made the basis of a theory of political freedom; that is, freedom from coercion. See F. A. Hayek, The Constitution of Liberty, especially pp. 22 and 29.)
XI
Bacon and Descartes set up observation and reason as new authorities, and they set them up within each individual man. But in doing so they split man into two parts, into a higher part which had authority with respect to truth - Bacon's observations, Descartes' intellect - and a lower part. It is this lower part which constitutes our ordinary selves, the old Adam in us. For it is always 'we ourselves' who are alone responsible for error, if truth is manifest. It is we, with our prejudices, our negligence, our pigheadedness, who are to blame; it is we ourselves who are the sources of our ignorance.
Thus we are split into a human part, we ourselves, the part which is the source of our fallible opinions (doxa), of our errors, and of our ignorances; and a super-human part, such as the senses or the intellect, the sources of real knowledge (epistēmē), whose authority over us is almost divine.
But this will not do. For we know that Descartes' physics, admirable as it was in many ways, was mistaken; yet it was based only upon ideas which, he thought, were clear and distinct, and which therefore should have been true. And as to the authority of the senses as sources of knowledge, the fact that the senses are not reliable was known to the ancients even before Parmenides, for example to Xenophanes and Heraclitus; and of course to Democritus and to Plato. (Cp. pp. 164 f., below.)
It is strange that this teaching of antiquity could be almost ignored by modern empiricists, including phenomenalists and positivists; yet it is ignored in most of the problems posed by positivists and phenomenalists, and in the solutions they offer. The reason is this: they believe that it is not our senses that err, but that it is always 'we ourselves' who err in our interpretation of what is 'given' to us by our senses. Our senses tell the truth, but we may err, for example, when we try to put into language - conventional, man-made, imperfect language - what they tell us. It is our linguistic description which is faulty because it may be tinged with prejudice.
(So our man-made language was at fault. But then it was discovered that our language too was 'given' to us, in an important sense: that it embodied the wisdom and experience of many generations, and that it should not be blamed if we misused it. So language too became a truthful authority that could never deceive us. If we fall into temptation and use language in vain, then it is we who are to blame for the trouble that ensues. For language is a jealous God and will not hold him guiltless that taketh His words in vain, but will throw him into darkness and confusion.)
By blaming us, and our language (or misuse of Language), it is possible to uphold the divine authority of the senses (and even of Language). But it is possible only at the cost of widening the gap between this authority and ourselves: between the pure sources from which we can obtain an authoritative knowledge of the truthful goddess Nature, and our impure and guilty selves: between God and man. As indicated before, this idea of the truthfulness of Nature which, I believe, can be discerned in Bacon, derives from the Greeks; for it is part of the classical opposition between nature and human convention which, according to Plato, is due to Pindar; which may be discerned in Parmenides; and which is identified by him, and by some Sophists (for example, by Hippias) and partly also by Plato himself, with the opposition between divine truth and human error, or even falsehood. After Bacon, and under his influence, the idea that nature is divine and truthful, and that all error or falsehood is due to the deceitfulness of our own human conventions, continued to play a major role not only in the history of philosophy, of science, and of politics, but also in that of the visual arts. This may be seen, for example, from Constable's most interesting theories on nature, veracity, prejudice, and convention, quoted in E. H. Gombrich's Art and Illusion. It also played a role in the history of literature, and even in that of music.
XII
Can the strange view that the truth of a statement may be decided upon by inquiring into its sources - that is to say its origin - be explained as due to some logical mistake which might be cleared up? Or can we do no better than explain it in terms of religious beliefs, or in psychological terms - referring perhaps to parental authority? I think that it is indeed possible to discern here a logical mistake which is connected with the close analogy between the meaning of our words, or terms, or concepts, and the truth of our statements or propositions. (See the table opposite.)
It is easy to see that the meaning of our words does have some connection with their history or their origin. A word is, logically considered, a conventional sign; psychologically considered, it is a sign whose meaning is established by usage or custom or association. Logically considered, its meaning is indeed established by an initial decision - something like a primary definition or convention, a kind of original social contract; and psychologically considered, its meaning was established when we originally learned to use it, when we first formed our linguistic habits and associations. Thus there is a point in the complaint of the schoolboy about the unnecessary artificiality of French in which 'pain' means bread, while English, he feels, is so much more natural and straightforward in calling pain 'pain' and bread 'bread'. He may understand the conventionality of the usage perfectly well, but he gives expression to the feeling that there is no reason why the original conventions - original for him - should not be binding. So his mistake may consist merely in forgetting that there can be several equally binding original conventions. But who has not made, implicitly, the same mistake? Most of us have caught ourselves in a feeling of surprise when we find that in France even little children speak French fluently. Of course, we smile about our own naïvety; but we do not smile about the policeman who discovers that the real name of the man called 'Samuel Jones' was 'John Smith' - though here is, no doubt, a last vestige of the magical belief that we gain power over a man or a god or a spirit by gaining knowledge of his real name: by pronouncing it we can summon or cite him.
Thus there is indeed a familiar as well as a logically defensible sense in which the 'true' or 'proper' meaning of a term is its original meaning; so that if we understand it, we do so because we learned it correctly - from a true authority, from one who knew the language. This shows that the problem of the meaning of a word is indeed linked to the problem of the authoritative source, or the origin, of our usage.
It is different with the problem of the truth of a statement of fact, a proposition. For anybody can make a factual mistake - even in matters on which he should be an authority, such as his own age or
IDEAS That is DESIGNATION OR TERMS or STATEMENTS or PROPOSITIONS CONCEPTS or THEORIES may be formulated in WORDS ASSERTIONS which may be MEANINGFUL TRUE and their MEANING TRUTH may be reduced, by way of DEFINITIONS DERIVATIONS to that of UNDEFINED CONCEPTS PRIMITIVE PROPOSITIONS |
the attempt to establish (rather than reduce) by these means their MEANING TRUTH leads to an infinite regress |
the colour of a thing which he has just this moment clearly and distinctly perceived. And as to origins, a statement may easily have been false when it was first made, and first properly understood. A word, on the other hand, must have had a proper meaning as soon as it was ever understood.
If we thus reflect upon the difference between the ways in which the meaning of words and the truth of statements is related to their origins, we are hardly tempted to think that the question of origin can have much bearing on the question of knowledge or of truth. There is, however, a deep analogy between meaning and truth; and there is a philosophical view - I have called it 'essentialism' - which tries to link meaning and truth so closely that the temptation to treat both in the same way becomes almost irresistible.
In order to explain this briefly, we may once more contemplate our table of Ideas, noting the relation between its two sides.
How are the two sides of this table connected? If we look at the left side of the table, we find there the word 'Definitions'. But a definition is a kind of statement or theory or proposition, and therefore one of those things which stand on the right side of our table. (This fact, incidentally, does not spoil the symmetry of our table of Ideas; for derivations also transcend the kind of thing - statements, etc. - which stand on the side where the word 'derivation' occurs: just as a definition is formulated by a special kind of sequence of words rather than by a word, so a derivation is formulated by a special kind of sequence of statements rather than by a statement.) The fact that definitions, which occur on the left side of our table, are nevertheless statements suggests that somehow they may form a link between the left and the right side of the table.
That they do this is, indeed, part of that philosophic doctrine to which I have given the name 'essentialism'. According to essentialism (especially Aristotle's version of it) a definition is a statement of the inherent essence or nature of a thing. At the same time, it states the meaning of a word - of the name that designates the essence. (For example, Descartes, and also Kant, hold that the word 'body' designates something that is, essentially, extended.)
Moreover, Aristotle and all other essentialists held that definitions are 'principles'; that is to say, they yield primitive propositions (example: 'All bodies are extended') which cannot be derived from other propositions, and which form the basis, or are part of the basis, of every demonstration. They thus form the basis of every science. (Cf. my Open Society, especially notes 27 to 33 to chapter 11.) It should be noted that this particular tenet, though an important part of the essentialist creed, is free of any reference to 'essences'. This explains why it was accepted by some nominalistic opponent of essentialism such as Hobbes or, say, Schlick. (See the latter's Erkenntnislehre, 2nd edition, 1925, p. 62.)
I think we have now the means at our disposal by which we can explain the logic of the view that questions of origin may decide questions of factual truth. For if origins can determine the true meaning of a term or word, then they can determine the true definition of an important idea, and therefore some at least of the basic 'principles' which are descriptions of the essences or natures of things and which underlie our demonstrations and consequently our scientific knowledge. So it will then appear that there are authoritative sources of our knowledge.
Yet we must realize that essentialism is mistaken in suggesting that definitions can add to our knowledge of facts (although qua decisions about conventions they may be influenced by our knowledge of facts, and although they create instruments which may in their turn influence the formation of our theories and thereby the evolution of our knowledge of facts). once we see that definitions never give any factual knowledge about 'nature', or about 'the nature of things', we also see the break in the logical link between the problem of origin and that of factual truth which some essentialist philosophers tried to forge.
XIII
I will now leave all these largely historical reflections aside, and turn to the problems themselves, and to their solution.
This part of my lecture might be described as an attack on empiricism, as formulated for example in the following classical statement of Hume's: 'If I ask you why you believe any particular matter of fact ..., you must tell me some reason; and this reason will be some other fact, connected with it. But as you cannot proceed after this manner, in infinitum, you must at last terminate in some fact, which is present to your memory or senses; or must allow that your belief is entirely without foundation.' (Enquiry Concerning Human Understanding, Section V, Part I; Selby-Bigge, p. 46; see also my motto, taken from Section vii, Part I; p. 62.)
The problem of the validity of empiricism may be roughly put as follows: is observation the ultimate source of our knowledge of nature? And if not, what are the sources of our knowledge?
These questions remain, whatever I may have said about Bacon, and even if I should have managed to make those parts of his philosophy on which I have commented somewhat unattractive for Baconians and for other empiricists.
The problem of the source of our knowledge has recently been restated as follows. If we make an assertion, we must justify it; but this means that we must be able to answer the following questions.
'How do you know? What are the sources of your assertion?'
This, the empiricist holds, amounts in its turn to the question,
'What observations (or memories of observations) underlie your assertion?'
I find this string of questions quite unsatisfactory.
First of all, most of our assertions are not based upon observations, but upon all kinds of other sources. 'I read it in The Times' or perhaps 'I read it in the Encyclopaedia Britannica' is a more likely and a more definite answer to the question 'How do you know?' than 'I have observed it' or 'I know it from an observation I made last year'.
'But', the empiricist will reply, 'how do you think that The Times or the Encyclopaedia Britannica got their information? Surely, if you only carry on your inquiry long enough, you will end up with reports of the observations of eyewitnesses (sometimes called "protocol sentences" or - by yourself - "basic statements"). Admittedly', the empiricist will continue, 'books are largely made from other books. Admittedly, a historian, for example, will work from documents. But ultimately, in the last analysis, these other books, or these documents, must have been based upon observations. Otherwise they would have to be described as poetry, or invention, or lies, but not as testimony. It is in this sense that we empiricists assert that observation must be the ultimate source of our knowledge.'
Here we have the empiricist's case, as it is still put by some of my positivist friends.
I shall try to show that this case is as little valid as Bacon's; that the answer to the question of the sources of knowledge goes against the empiricist; and, finally, that this whole question of ultimate sources - sources to which one may appeal, as one might to higher court or a higher authority - must be rejected as based upon a mistake.
First I want to show that if you actually went on questioning The Times and its correspondents about the sources of their knowledge, you would in fact never arrive at all those observations by eyewitnesses in the existence of which the empiricist believes. You would find, rather, that with every single step you take, the need for further steps increases in snowball-like fashion.
Take as an example the sort of assertion for which reasonable people might simply accept as sufficient the answer 'I read it in The Times'; let us say the assertion 'The Prime Minister has decided to return to London several days ahead of schedule'. Now assume for a moment that somebody doubts this assertion, or feels the need to investigate its truth. What shall he do? If he has a friend in the Prime Minister's office, the simplest and most direct way would be to ring him up; and if this friend corroborates the message, then that is that.
In other words, the investigator will, if possible, try to check, or to examine, the asserted fact itself, rather than trace the source of the information. But according to the empiricist theory, the assertion 'I have read it in The Times' is merely a first step in a justification procedure consisting in tracing the ultimate source. What is the next step?
There are at least two next steps. one would be to reflect that 'I have read it in The Times' is also an assertion, and that we might ask 'What is the source of your knowledge that you read it in The Times and not, say, in a paper looking very similar to The Times?' The other is to ask The Times for the sources of its knowledge. The answer to the first question may be 'But we have only The Times on order and we always get it in the morning' which gives rise to a host of further questions about sources which we shall not pursue. The second question may elicit from the editor of The Times the answer: 'We had a telephone call from the Prime Minister's Office.' Now according to the empiricist procedure, we should at this stage ask next: 'Who is the gentleman who received the telephone call?' and then get his observation report; but we should also have to ask that gentleman: 'What is the source of your knowledge that the voice you heard came from an official in the Prime Minister' office', and so on.
There is a simple reason why this tedious sequence of questions never comes to a satisfactory conclusion. It is this. Every witness must always make ample use, in his report, of his knowledge or persons, places, things, linguistic usages, social conventions, and so on. He cannot rely merely upon his eyes or ears, especially if his report is to be of use in justifying any assertion worth justifying. But this fact must of course always raise new questions as to the sources of those elements of his knowledge which are not immediately observational.
This is why the programme of tracing back all knowledge to its ultimate source in observation is logically impossible to carry through: it leads to an infinite regress. (The doctrine that truth is manifest cuts off the regress. This is interesting because it may help to explain the attractiveness of that doctrine.)
I wish to mention, in parenthesis, that this argument is closely related to another - that all observation involves interpretation in the light of our theoretical knowledge,? or that pure observational knowledge, unadulterated by theory, would, if at all possible, be utterly barren and futile.
? See my Logic of Scientific Discovery, last paragraph of section 25, and new appendix *x, (2). For an anticipation by Mark Twain of my Times argument, see p. 414 below.
The most striking thing about the observationalist programme of asking for sources - apart from its tediousness - is its stark violation of common sense. For if we are doubtful about an assertion, then the normal procedure is to test it, rather than to ask for its sources; and if we find independent corroboration, then we shall often accept the assertion without bothering at all about sources.
Of course there are cases in which the situation is different. Testing an historical assertion always means going back to sources; but not, as a rule, to the reports of eyewitnesses.
Clearly, no historian will accept the evidence of documents uncritically. There are problems of genuineness, there are problems of bias, and there are also such problems as the reconstruction of earlier sources. There are, of course, also problems such as: was the writer present when these events happened? But this is not one of the characteristic problems of the historian. He may worry about the reliability of a report, but he will rarely worry about whether or not the writer of a document was an eyewitness of the event in question, even assuming that this event was of the nature of an observable event (이 문장의 본문 분사구문은 even assuming that this event was of the nature of an observable event인데 assume이 상태동사이기 때문에 이유를 의미하는 분사구문이지만 그렇게 되면 문맥이 통하지 않기 때문에 동시 상황을 의미하는 분사구문으로 해석한다. 원문의 오류로 보인다. - 역자 주). A letter saying 'I changed my mind yesterday on this question' may be most valuable historical evidence, even though changes of mind are unobservable (and even though we may conjecture, in view of other evidence, that the writer was lying).
As to eyewitnesses, they are important almost exclusively in a court of law where they can be cross-examined. As most lawyers know, eyewitnesses often err. This has been experimentally investigated, with the most striking results. Witnesses most anxious to describe an event as it happened are liable to make scores of mistakes, especially if some exciting things happen in a hurry; and if an event suggests some tempting interpretation, then this interpretation, more often than not, is allowed to distort what has actually been seen.
Hume's view of historical knowledge was different: '... we believe', he writes in the Treatise (Book I, Part III, Section iv; Selby-Bigge, p. 83), 'that Caesar was kill'd in the Senate-house on the ides of March ... because this fact is establish'd on the unanimous testimony of historians, who agree to assign this precise time and place to that event. Here are certain characters and letters present either to our memory or senses; which characters we likewise remember to have been us'd as the signs of certain ideas; and these ideas were either in the minds of such as were immediately present at that action, and receiv'd the ideas directly from its existence; or they were deriv'd from the testimony of others, and that again from another testimony ... 'till we arrive at those who were eye-witnesses and spectators of the event.' (See also Enquiry, Section x; Selby-Bigge, pp. 111 ff.)
It seems to me that this view must lead to the infinite regress described above. For the problem is, of course, whether 'the unanimous testimony of historians' is to be accepted, or whether it is, perhaps, to be rejected as the result of their reliance on a common yet spurious source. The appeal to 'letters present to our memory or our senses' cannot have any bearing on this or on any other relevant problem of historiography.
XIV
But what, then, are the sources of our knowledge?
The answer, I think, is this: there are all kinds of sources of our knowledge; but none has authority.
We may say that The Times can be source of knowledge, or the Encyclopaedia Britannica. We may say that certain papers in the Physical Review about a problem in physics have more authority, and are more of the character of a source, than an article about the same problem in The Times or the Encyclopaedia. But it would be quite wrong to say that the source of the article in the Physical Review must have been wholly, or even partly, observation. The source may well be the discovery of an inconsistency in another paper or, say, the discovery of the fact that a hypothesis proposed in another paper could be tested by such and such an experiment; all these non-observational discoveries are 'sources' in the sense that they all add to our knowledge.
I do not, of course, deny that an experiment may also add to our knowledge, and in a most important manner. But it is not a source in any ultimate sense. It has always to checked: as in the example of the news in The Times we do not, as a rule, question the eyewitness of an experiment, but, if we doubt the result, we may repeat the experiment, or ask somebody else to repeat it.
The fundamental mistake made by the philosophical theory of the ultimate sources of our knowledge is that it does not distinguish clearly enough between questions of origin and questions of validity. Admittedly, in the case of historiography, these two questions may sometimes coincide. The question of the validity of an historical assertion may be testable only, or mainly, in the light of the origin of certain sources. But in general the two questions are different; and in general we do not test the validity of an assertion or information by tracing its sources or its origin, but we test it, much more directly, by a critical examination of what has been asserted - of the asserted facts themselves.
Thus the empiricist's questions 'How do you know? What is the source of your assertion?' are wrongly put. They are not formulated in an inexact or slovenly manner, but they are entirely misconceived: they are questions that beg for an authoritarian answer.
XV
The traditional systems of epistemology may be said to result from yes-answers or no-answers to questions about the sources of our knowledge. They never challenge these questions, or dispute their legitimacy; the questions are taken as perfectly natural, and nobody seems to see any harm in them.
This is quite interesting, for these questions are clearly authoritarian in spirit. They can be compared with that traditional question of political theory, 'Who should rule?', which begs for an authoritarian answer such as 'the best', or 'the wisest', or 'the people', or 'the majority'. (It suggests, incidentally, such silly alternatives as 'Who should be our rulers: the capitalist or the workers?', analogous to 'What is the ultimate source of knowledge: the intellect or the senses?') This political question is wrongly put and the answers which it elicits are paradoxical (as I have tried to show in the chapter 7 of my Open Society). It should be replaced by a completely different question such as 'How can we organize our political institutions so that bad or incompetent rulers (whom we should try not to get, but whom we so easily might get all the same) cannot do too much damage?' I believe that only by changing our question in this way can we hope to proceed towards a reasonable theory of political institutions.
The question about the sources of our knowledge can be replaced in a similar way. It has always been asked in the spirit of: 'What are the best sources of our knowledge - the most reliable ones, those which will not lead us into error, and those to which we can and must turn, in case of doubt, as the last court of appeal?' I propose to assume, instead, that no such ideal sources exist - no more than ideal rulers - and that all 'sources' are liable to lead us into error at times. And I propose to replace, therefore, the question of the sources of our knowledge by the entirely different question: 'How can we hope to detect and eliminate error?'
The question of the sources of our knowledge, like so many authoritarian questions, is a genetic one. It asks for the origin of our knowledge, in the belief that knowledge may legitimize itself by its pedigree. The nobility of the racially pure knowledge, the untainted knowledge, the knowledge which derives from the highest authority, if possible from God: these are the (often unconscious) metaphysical ideas behind the question. My modified question, 'How can we hope to detect error?' may be said to derive from the view that such pure, untainted and certain sources do not exist, and that questions of origin or of purity should not be confounded with questions of validity, or of truth. This view may be said to be as old as Xenophanes. Xenophanes knew that our knowledge is guesswork, opinion - doxa rather than epistēmē - as shown by his verses (DK, B, 18 and 34):
The gods did not reveal, from the beginning,
All things to us; but in the course of time,
Through seeking we may learn, and know things better.
But as for certain truth, no man has known it,
Nor will he know it; neither of the gods,
Nor yet of all the things of which I speak.
And even if by chance he were to utter
The perfect truth, he would himself not know it;
For all is but a woven web of guesses.
Yet the traditional question of the authoritative sources of knowledge is repeated even today - and very often by positivists and by other philosophers who believe themselves to be in revolt against authority.
The proper answer to my question 'How can we hope to detect and eliminate error?' is, I believe, 'By criticizing the theories or guesses of others and - if we can train ourselves to do so - by criticizing our own theories or guesses.' (The latter point is highly desirable, but not indispensable; for if we fail to criticize our own theories, there may be others to do it for us.) This answer sums up a position which I propose to call 'critical rationalism'. It is a view, an attitude, and a tradition, which we owe to the Greeks. It is very different from the 'rationalism' or 'intellectualism' of Descartes and his school, and very different even from the epistemology of Kant. Yet in the field of ethics, of moral knowledge, it was approached by Kant with his principle of autonomy. This principle expresses his realization that we must not accept the command of an authority, however exalted, as the basis of ethics. For whenever we are faced with a command by an authority, it is for us to judge, critically, whether it is moral or immoral to obey. The authority may have power to enforce its commands, and we may be powerless to resist. But if we have the physical power of choice, then the ultimate responsibility remains with us. It is our own critical decision whether to obey a command; whether to submit to an authority.
Kant boldly carried this idea into the field of religion: '... in whatever way', he writes, 'the Deity should be made known to you, and even ... if He should reveal Himself to you: it is you ... who must judge whether you are permitted to believe in Him, and to worship Him.'?
? See Immanuel Kant, Religion Within the Limits of Pure Reason, 2nd edition (1794), Fourth Chapter, Part II, § 1, the first footnote. The passage (not in the 1st edition, 1793) is quoted more fully in ch. 7 of the present volume, text to note 22.
In view of this bold statement, it seems strange that in his philosophy of science Kant did not adopt the same attitude of critical rationalism, of the critical search for error. I feel certain that it was only his acceptance of the authority of Newton' cosmology - a result of its almost unbelievable success in passing the most severe tests - which prevented Kant from doing so. If this interpretation of Kant is correct, then the critical rationalism (and also the critical empiricism) which I advocate merely puts the finishing touch to Kant's own critical philosophy. And this was made possible by Einstein, who taught us that Newton's theory may well be mistaken in spite of its overwhelming success.
So my answer to the question 'How do you know? What is the source or the basis of you assertion? What observations have led you to it?' would be 'I do not know: my assertion was merely a guess. Never mind the source, or the sources, from which it may spring - there are many possible sources, and I may not be aware of half of them; and origins or pedigrees have in any case little bearing upon truth. But if you are interested in the problem which I tried to solve by my tentative assertion, you may help me by criticizing it as severely as you can; and if you can design some experimental test which you think might refute my assertion, I shall gladly, and to the best of my powers, help you to refute it.'
This answer?? applies, strictly speaking, only if the question is asked about some scientific assertion as distinct from an historical one. If my conjecture was an historical one, sources (in the non-ultimate sense) will of course come into the critical discussion of its validity. Yet fundamentally, my answer will be the same, as we have seen.
?? This answer, and almost the whole of the contents of the present section XV, are taken with only minor changes from a paper of mine which was first published in The Indian Journal of Philosophy, 1, No. 1, 1959.
XVI
It is high time now, I think, to formulate the epistemological results of this discussion. I will put them in the form of ten theses.
1. There are no ultimate sources of knowledge. Every source, every suggestion, is welcome; and every source, every suggestion, is open to critical examination. Except in history, we usually examine the facts themselves rather than the sources of our information.
2. The proper epistemological question is not one about sources; rather, we ask whether the assertion made is true - that is to say, whether it agrees with the facts. (That we may operate, without getting involved in antinomies, with the idea of objective truth in the sense of correspondence to the facts, has been shown by the work of Alfred Tarski.) And we try to find this out, as well as we can, by examining or testing the assertion itself; either in a direct way, or by examining or testing its consequences.
3. In connection with this examination, all kinds of arguments may be relevant. A typical procedure is to examine whether our theories are consistent with our observations. But we may also examine, for example, whether our historical sources are mutually and internally consistent.
4. Quantitatively and qualitatively by far the most important source of our knowledge - apart from inborn knowledge - is tradition. Most things we know we have learnt by example, by being told, by reading books, by learning how to criticize, how to take and to accept criticism, how to respect truth.
5. The fact that most of the sources of our knowledge are traditional condemns anti-traditionalism as futile. But this fact must not be held to support a traditionalist attitude: every bit of our traditional knowledge (and even our inborn knowledge) is open to critical examination and may be overthrown. Nevertheless, without tradition, knowledge would be impossible.
6. Knowledge cannot start from nothing - from a tabula rosa - nor yet from observation. The advance of knowledge consists, mainly, in the modification of earlier knowledge. Although we may sometimes, for example in archaeology, advance through a chance observation, the significance of the discovery will usually depend upon its power to modify our earlier theories.
7. Pessimistic and optimistic epistemologies are about equally mistaken. The pessimistic cave story of Plato is the true one, and not his optimistic story of anamnēsis (even though we should admit that all men, like all other animals, and even all plants, possess inborn knowledge). But although the world of appearance is indeed a world of mere shadows on the walls of our cave, we all constantly reach out beyond it; and although, as Democritus said, the truth is hidden in the deep, we can probe into the deep. There is no criterion of truth at our disposal, and this fact supports pessimism. But we do possess criteria which, if we are lucky, may allow us to recognize error and falsity. Clarity and distinctness are not criteria of truth, but such things as obscurity or confusion may indicate error. Similarly coherence cannot establish truth, but incoherence and inconsistency do establish falsehood. And, when they are recognized, our own errors provide the dim red lights which help us in groping our way out of the darkness of our cave.
8. Neither observation nor reason is an authority. Intellectual intuition and imagination are most important, but they are not reliable: they may show us things very clearly, and yet they may mislead us. They are indispensable as the main sources of our theories; but most of our theories are false anyway. The most important function of observation and reasoning, and even of intuition and imagination, is to help us in the critical examination of those bold conjectures which are the means by which we probe into the unknown.
9. Although clarity is valuable in itself, exactness or precision is not: there can be no point in trying to be more precise than our problem demands. Linguistic precision is a phantom, and problems connected with the meaning or definition of words are unimportant. Thus our table of Ideas (on p. 19), in spite of its symmetry, has an important and an unimportant side: while the left-hand side (words and their meanings) is unimportant, the right-hand side(theories and the problems connected with their truth) is all-important. Words are significant only as instruments for the formulation of theories, and verbal problems are tiresome: they should be avoided at all cost.
10. Every solution of a problem raises new unsolved problems; the more so the deeper the original problem and the bolder its solution. The more we learn about the world, and the deeper our learning, the more conscious, specific, and articulate will be our knowledge of what we do not know, our knowledge of our ignorance. For this, indeed, is the main source of our ignorance - the fact that our knowledge can be only finite, while our ignorance must necessarily be infinite.
We may get a glimpse of the vastness of our ignorance when we contemplate the vastness of the heavens: though the mere size of the universe is not the deepest cause of our ignorance, it is one of its causes. 'Where I seem to differ from some of my friends', F. P. Ramsey wrote in a charming passage of his Foundations of Mathematics (p. 291), 'is in attaching little importance to physical size. I don't feel in the least humble before the vastness of the heavens. The stars may be large but they cannot think or love; and these are qualities which impress me far more than size does. I take no credit for weighing nearly seventeen stone.' I suspect that Ramsey' friends would have agreed with him about the insignificance of sheer physical size; and I suspect that if they felt humble before the vastness of the heavens, this was because they saw in it a symbol of their ignorance.
I believe that it would be worth trying to learn something about the world even if in trying to do so we should merely learn that we do not know much. This state of learned ignorance might be a help in many of our troubles. It might be well for all of us to remember that, while differing widely in the various little bits we know, in our infinite ignorance we are all equal.
XVII
There is a last question I wish to raise.
If only we look for it we can often find a true idea, worthy of being preserved, in a philosophical theory which must be rejected as false. Can we find an idea like this in one of the theories of the ultimate sources of our knowledge?
I believe we can; and I suggest that it is one of the two main ideas which underlie the doctrine that the source of all our knowledge is super-natural. The first of these ideas is false, I believe, while the second is true.
The first, the false idea, is that we must justify our knowledge, or our theories, by positive reasons, that is, by reasons capable of establishing them, or at least of making them highly probable; at any rate, by better reasons than that they have so far withstood criticism. This idea implies, I suggest, that we must appeal to some ultimate or authoritative source of true knowledge; which still leaves open the character of that authority - whether it is human, like observation or reason, or super-human (and therefore super-natural).
The second idea - whose vital importance has been stressed by Russell - is that no man's authority can establish truth by decree; that we should submit to truth; that truth is above human authority.
Taken together these two ideas almost immediately yield the conclusion that the sources from which our knowledge derives must be super-human; a conclusion which tends to encourage self-righteousness and the use of force against those who refuse to see the divine truth.
Some who rightly reject this conclusion do not, unhappily, reject the first idea - the belief in the existence of ultimate sources of knowledge. Instead they reject the second idea - the thesis that truth is above human authority. They thereby endanger the idea of the objectivity of knowledge, and of common standards of criticism or rationality.
What we should do, I suggest, is to give up the idea of ultimate sources of knowledge, and admit that all knowledge is human; that it is mixed with our errors, our prejudices, our dreams, and our hopes; that all we can do is to grope for truth even though it be beyond our reach. We may admit that our groping is often inspired, but we must be on our guard against the belief, however deeply felt, that our inspiration carries any authorities, divine or otherwise. If we thus admit that there is no authority beyond the reach of criticism to be found within the whole province of our knowledge, however far it may have penetrated into the unknown, then we can retain, without danger, the idea that truth is beyond human authority. And we must retain it. For without this idea there can be no objective standards of inquiry; no criticism of our conjectures; no groping for the unknown; no quest for knowledge.
-"Conjectures and Refutations, The Growth of Scientific Knowledge", Karl R. Popper -
'칼포퍼 원전+번역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추측과 논박 제 2장 철학적 문제들의 본질과 과학에서의 그 문제들의 뿌리 (0) | 2010.07.31 |
---|---|
추측과 논박 제 1장 과학 (0) | 2010.07.31 |
열린사회와 그 적들 제 25장 역사에는 의미가 있는가? (0) | 2010.07.31 |
열린사회와 그 적들 제 23장 지식사회학 24장 예언철학, 그리고 이성에... (0) | 2010.07.31 |
열린사회와 그 적들 제 22장 역사주의의 도덕론 (0) | 2010.07.3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