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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사회와 그 적들 제 25장 역사에는 의미가 있는가?

이윤진이카루스 2010. 7. 31. 19:07

25 장 : 역사에는 의미가 있는가 ?

I

이 책의 종점에 다가가면서, 나는 이 여러 장에서는 역사주의에 대한 전체 역사와 같은 것으로 의도된 것은 없음을 다시 독자에게 상기시키고 싶다 ; 그 여러 장은 그런 역사에 대하여 산재한 하찮은 기록일 뿐이며 게다가 다소 개인적인 기록이다. 그 여러 장이, 게다가, 사회와 정치의 철학에 대하여 일종의 비판적인 소개를 형성한다는 것은, 그 장의 이 특징과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는데, 그 까닭은 역사주의가 사회적이고 정치적이며 도덕적인 (혹은, 내가 말할 것과 같이, 비도덕적인) 철학이기 때문이며, 우리 문명이 시작된 이래 그런 상태로 매우 영향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회, 정치, 그리고 도덕에 관한 근본적인 문제를 토론하지 않고 역사주의의 편력에 관하여 의견을 말하는 것이 가능하지 않다. 그러나 그런 토론에는, 역사주의가 토론을 인정하든지 아니든지 간에, 틀림없이 항상 강력한 개인적인 요소가 있다. 이것은 이 책에 있는 많은 것이 순전히 견해의 문제임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 도덕적이고 정치적인 문제에서 내가 나의 개인적인 제안이나 결정을 설명하는 소수의 경우에, 나는 항상 그 제안이나 결정이 지니는 개인적인 특성을 분명히 했다. 그것은 오히려 다루어지는 주제를 선정하는 일이 가령, 과학적 논문에서보다 훨씬 더 큰 정도로 개인적 선택의 문제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어떤 면에서, 이 차이점은 정도의 문제이다. 심지어 과학도 단순히 ‘사실의 덩어리’는 아니다. 과학은, 최소한도, 수집물이며 그런 상태로 과학은 수집자의 관심에, 관점에 의존한다. 과학에서, 이 관점은 보통 과학적 이론에 의하여 정해진다 ; 다시 말해서, 우리는 사실의 무한한 다양성으로부터, 그리고 사실이 지닌 모습의 무한한 다양성으로부터, 다소 미리 상정(想定)된 어떤 과학적 이론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흥미로운 저 사실들과 저 모습들을 선택한다. 과학적 방법에 관한 특정 철학자들의 학파는 이런 고찰로부터 과학은 항상 순환으로 논증한다고, 그래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꼬리를 좇고 있는 우리 모습을 발견하다고, 에딩튼(Eddington)이 표현하는 바와 같이 결론을 내렸는데, 그 까닭은 우리의 사실적 경험으로부터 우리 자신이 그 경험 속에 넣은 것을 우리 이론의 형태로 꺼낼 수 있을 따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옹호될 수 있는 주장이 아니다. 미리 상정(想定)된 어떤 이론과 관계가 있는 사실만을 우리가 선택한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완전하게 맞는 말이라 할지라도, 우리가 이론을 확증하는 그런 사실만을 선택해서, 말하자면, 그 이론을 반복한다는 것은 맞는 말이 아니다 ; 과학의 방법은 오히려 이론을 부정할 사실을 주시하여 찾는 것이다. 이것이 소위 이론 시험이다 - 우리가 그 이론 속의 오류를 발견할 수 없는지를 보는 것. 그러나 사실이란 이론에 눈을 두고 수집되며, 그 이론이 이 시험들을 견딘다면 그 이론을 확증할지라도, 사실이란 일종의 미리 상정(想定)된 이론의 공허한 반복 이상이다. 사실은 이론이 하는 예언을 뒤집는 데 실패한 노력의 결과이며 그리하여 이론을 지지하는 효과적인 증거라는 조건에서만 이론을 확증한다. 그래서 이론을 시험하는 가능성을, 그리하여 이론의 과학적 특징을, 구성하는 것은 그 이론을 뒤집는 가능성, 즉 이론의 반증가능성(falsifiability)이라고 나는 주장한다 ; 그래서 이론에 관한 모든 시험은 그 이론의 도움을 받아서 도출된 예언에 시도되는 반증이라는 사실이, 과학적 방법에 실마리를 제공한다. 과학적 방법에 대한 이 견해는 과학의 역사에 의하여 입증되는데, 그 역사는 과학이론은 흔히 실험에 의하여 전복된다는 것과 이론이 전복되는 것은 진정으로 과학적 진보의 수단이라는 것을 증명한다. 과학은 순환적이라는 주장은 지지를 받을 수 없다.

그러나 이 주장의 한 가지 요소는 사실이다 ; 즉, 사실에 대한 모든 과학적 묘사는 고도로 선택적이라는 것, 그 묘사는 항상 이론에 의존한다는 것. 그 상황은 탐조등과 (내가 ‘정신의 양동이 이론’과 구별하여 보통 부르는 바와 같이, ‘과학의 탐조등 이론’) 비교하여 가장 잘 설명될 수 있다. 탐조등을 가시적으로 만드는 것은 탐조등의 위치에, 탐조등을 비추는 우리의 방식에, 탐조등의 강도(强度), 색깔, 기타 등등에 의존할 것이다 ; 유사하게, 물론 그것은 탐조등에 의하여 비추어지는 사물에 매우 크게 또한 의존할지라도, 과학적 묘사는 주로 우리의 관점에, 우리의 이해관계에 의존할 것인데, 그 관점과 이해관계는 보통 우리가 시험하기를 원하는 이론이나 가설(假說)과 연결되어 있다 ; 비록 그 묘사가 묘사되는 사실에도 의존할 것이라 할지라도. 정말로, 이론이나 가설(假說)은 관점의 결정화(結晶化)로서 묘사될 수 있으리라. 그 까닭은 우리가 우리의 관점을 공식화하려고 시도한다면, 이 공식화는, 보통, 사람들이 작업가설(working hypothesis)이라고 간혹 부르는 것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 다시 말해서, 그 기능이 우리가 사실을 선택하고 조직하는데 도움을 주는 것인 임시적 가정(假定). 그러나 이런 의미에서 작업가설이 아닌, 작업가설로 남아있지 않는 이론이나 가설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해야 한다. 그 까닭은 어떤 이론도 최종적이지 않고, 모든 이론은 우리가 사실을 선택하고 조직하는 데 도움을 주기 때문이다. 모든 서술의 이 선택적 특징은 어떤 의미에서 이론을 ‘상대적’으로 만든다 ; 그러나 우리의 관점이 다양하다면, 우리가 이것이 아니라 또 다른 서술을 제공할 것이라는 의미에서만. 이 선택적 특징은 또한 서술의 진실성에 대한 우리의 믿음에 영향을 미칠 것이다 ; 그러나 이 선택적 특징은 서술에 관한 진위(眞僞) 문제에는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 진실은 이런 의미에서 ‘상대적’이지 않다.

모든 서술이 선택적인 이유는, 개괄적으로 말해서, 세상의 사실들에 대하여 가능한 모습들이 지니는 무한한 풍요로움과 다양함 때문이다. 이 무한한 풍요로움을 묘사하기 위하여, 단어들의 유한한 연속물의 유한한 숫자만을 우리는 수중에 지니고 있다. 그리하여 우리는 원하는 만큼 길게 묘사할 것이다: 우리의 서술은 항상 서술을 위하여 출현하는 사실들에 대하여 불완전하고, 단지 선택이며 작은 선택일 것이다. 이것은 선택적 관점을 피하는 것이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그렇게 시도하는 것이 전적으로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 또한 보여준다 ; 그 까닭은 우리가 선택적 관점을 피할 수 있다면, 우리는 더 ‘객관적인’ 서술을 얻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연결되지 않은 서술 더미만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물론 관점은 불가피하다 ; 그리고 관점을 피하려는 순진한 시도는 자기기만(自己欺瞞)과, 무의식적 관점의 무비판적 적용만을 초래할 따름이다. 이 모든 것은 쇼펜하우어가 지칭하는 바와 같이 자체의 ‘무한한 주제’와 함께, 역사적 서술의 경우에, 가장 강조해서, 사실이다. 그리하여 과학에서 못지않게 역사에서, 우리는 관점을 피할 수 없다 ; 그리고 우리가 관점을 피할 수 있다는 믿음은 틀림없이 자기기만(自己欺瞞)과 비판적 생각의 결핍을 초래한다. 물론 이것은 무엇이든지 반증하는 일이나 진실문제를 가볍게 생각하는 일이 우리에게 허용됨을 뜻하지는 않는다. 사실에 대한 특정한 역사적 서술은, 그 서술의 진실성이나 허위성을 결정하는 것이 아무리 어려울지라도, 단지 사실이거나 거짓일 것이다.

지금까지, 역사의 위치는 자연과학의 위치, 예를 들어 물리학의 위치와 비슷하다. 그러나 역사에서 ‘관점’이 하는 역할을 물리학에서 ‘관점’이 하는 역할과 우리가 비교한다면, 우리는 커다란 차이점을 발견한다. 물리학에서, 우리가 본 바와 같이, ‘관점’은 보통 새로운 사실을 탐색함으로써 시험될 수 있는 물리 이론에 의하여 제시된다. 역사에서, 문제는 완전히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II

먼저 물리학 같은 자연과학에서 이론이 하는 역할을 다소 더 세밀하게 고찰하자. 여기에서, 이론들은 몇 가지 연결된 임무를 지닌다. 이론들은 과학을 통합하는데 도움을 주며, 그래서 이론들은 사건을 예언할 뿐만 아니라 설명하는 데도 도움을 준다. 설명과 예언에 관하여, 나는 아마도 내 자신의 저술 한 권으로부터 인용할 것이다 : ‘특정 사건에 인과적 설명을 부여한다는 것은, 우리가 초기 조건(initial conditions)라고 부를 특정 단칭 혹은 고유한 문장과 함께 몇 가지 보편적 법칙(universal laws)을 사용하여, 그 사건을 묘사하는 서술을 연역적으로 도출하는 것을 (예측[prognosis]이라고 불릴 것이다) 의미한다. 예를 들어, 우리가 이 실에 1 파운드만을 매달 수 있었는데 2 파운드의 무게가 그 실에 매달렸음을 안다면, 우리는 특정 실이 끊어지는 것에 대한 인과적 설명을 내놓았다고 말할 수 있다. 우리가 이 인과적 설명을 분석한다면, 우리는 그 속에 두 가지 다른 구성요소가 포함되어 있음을 발견한다. (1) 우리는 자연에 대한 보편적 법칙의 특징을 지닌 몇 가지 가설(假說)을 상정(想定)한다 ; 이 경우에는, 아마도 : “특정 실은 자체에게 특징적인 어떤 최대치의 장력을 초과하는 장력을 경험할 때마다, 끊어지는 경향이 있다.” (2) 우리는 지금 토론되는 특정 사건과 관련된 몇 가지 특정 서술을 (초기 조건) 상정(想定)한다 ; 이 경우에, 우리는 두 가지 서술을 지닐 것이다 : “이 실에 대하여, 실이 끊어질 것 같은 특징적인 최대치의 장력은 1 파운드의 무게와 동일하다”와 “이 실에 매달렸던 무게는 2 파운드의 무게였다.” 그리하여 우리는 합쳐서 완벽한 인과적 설명을 낳은 두 가지 다른 종류의 서술을 지닌다, 다시 말해서 : (1) 자연 법칙의 특징에 대한 보편적 서술과, (2) 토론되는 특정한 경우와 연관되는 특정 서술인 초기 조건. 이제 보편적 법칙 (1)로부터, 우리는 초기조건 (2)의 도움을 받아 다음 특정 서술 (3)을 연역할 수 있다 : “이 실은 끊어질 것이다.” 이 결론 (3)을 우리는 또한 특정한 예측(specific prognosis)이라고 부를 것이다. - 초기 조건은 (혹은 더 정확하게, 그 조건에 의하여 묘사되는 상황) 보통 토론되는 사건의 원인이라고 일컬어지며, 예측은 (혹은 더 정확하게, 예측에 의하여 묘사되는 사건) 결과라고 일컬어진다 : 예를 들어, 1 파운드만을 매달 수 있는 실에 2 파운드의 무게를 매단 것이 실이 끊어진 원인이었다고 우리는 말한다.’

인과적 설명에 관한 이 분석을 고찰하여, 우리는 몇 가지 일을 알 수 있다. 하나는 우리가 원인과 결과를 절대적인 방식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한 가지 사건이 또 다른 사건의 원인인데, 또 다른 사건의 원인은 그 결과로, 어떤 보편적 법칙과 관련해서 또 다른 사건의 원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 보편적 법칙들은 매우 흔히 아주 하찮아서 (위 보기에서처럼) 일반적으로 그 보편적 법칙들을 의식적으로 사용하는 대신에, 우리가 그 법칙들을 당연하게 여긴다. 두 번째 요점은 어떤 특정 사건을 예언하는 목적으로 이론을 사용하는 것은 그런 사건을 설명하는 목적으로 그 이론을 사용하는 또 다른 면(面)이다. 그래서 예언된 사건들을 실제로 관찰되는 사건들과 비교함으로써 우리가 이론을 시험하기 때문에, 우리의 분석은 어떻게 이론들이 시험될 수 있는지를 또한 보여준다. 우리가 이론을 설명하려는 목적으로, 혹은 예언하려는 목적으로, 혹은 시험하려는 목적으로 사용하는지는 우리의 관심과, 어떤 명제를 우리가 주어진 것으로 혹은 상정(想定)된 것으로 수용하느냐에 달려있다.

그리하여 (물리학, 생물학, 사회학, 기타 등등.) 소위 이론적 혹은 일반화하는 과학에서 우리는 보편적 법칙이나 가설에 특별히 관심을 갖는다. 우리는 그 법칙이나 가설들이 진실인지를 알고 싶고, 우리가 그 법칙이나 가설들의 진실성을 직접적으로 확신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거짓된 법칙이나 가설을 제거하는 방법을 채택한다. 특정 사건에 대한 우리의 관심은, 예를 들어 초기 조건과 예측에 의하여 설명되는 실험에 대한 관심은 다소 제한적이다 ; 특정 목표에 대한 수단으로서, 우리가 보편적 법칙들을 시험할 수 있는 수단으로서 우리는 주로 실험에 흥미를 가지고 있다. 그 수단들은 본질적으로 흥미롭게 생각되며, 우리가 지닌 지식을 통합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이 해석문의 원문은 we are interested in them mainly as means to certain ends, means by which we can test the universal laws, which latter are considered as interesting in themselves, and as unifying our knowledge인데 마지막 부분 which latter are considered as interesting in themselves, and as unifying our knowledge의 의미가 모호하다. 관계대명사 which의 선행사가 means인데 latter가 문법적으로 하는 역할이 없다. 역자의 생각으로는 이 마지막 부분이 by which the latter are considered as interesting in themselves, and as unifying our knowledge로 표현되어 the latter가 the universal laws를 지칭함이 옳을 것으로 생각된다. - 역자 주).

응용과학의 경우에, 우리의 흥미는 다르다. 교량을 건설하기 위하여 물리학을 이용하는 기술자는 예측에 크게 관심을 갖는다 : (초기 조건으로써) 묘사된 특정 종류의 교량이 특정 하중을 견딜 것인지 아닌지. 그에게, 보편적 법칙들은 목표에 대한 수단이어서 당연하게 여겨진다.

따라서, 순수하고 일반화하는 과학과 응용되고 일반화하는 과학은 각각 보편적 가설을 시험하는 데에, 그래서 특정 사건을 예언하는 데 흥미를 갖는다. 그러나 한 걸음 더 나아간 흥미인 특정 혹은 고유한 사건을 설명하는 데 대한 흥미이다. 우리가 그런 사건, 예를 들어, 어떤 교통사고를 설명하고 싶어 한다면, 우리는 보통 (뼈는 특정 충격을 받으면 부러진다, 혹은 특정 방향으로 인간의 몸과 충돌하는 자동차는 뼈를 부러뜨리기에 충분한 충격을 가할 것이다. 기타 등등과 같은 그런) 많은 다소 사소한 보편적 법칙들을 암묵적으로 상정하여, 이 사소한 보편적 법칙들과 함께, 토론되는 사건을 설명할 초기 조건이나 원인에 크게 흥미를 갖는다. 그래서 우리는 보통 특정 초기 조건을 가설적(假說的)으로 상정(想定)하여, 이 가설적으로 상정된 초기 조건이 사실인지 아닌지를 알아내기 위하여 몇 가지 추가 정보를 발견하려고 노력한다 ; 다시 말해서, 우리는 그 가설들로부터 (몇 가지 다르고 보통 동일하게 사소한 보편적 법칙들의 도움을 받아서) 관찰될 수 있는 사실과 대면될 수 있는 새로운 예언을 도출함으로써 이 특정 가설들을 시험한다.

매우 드물게 우리는 그런 설명에 포함된 보편적 법칙에 관하여 걱정을 해야 하는 위치에 빠진다. 그런 위치는 우리가 예기치 않은 화학반응과 같은 그런 새롭고 기묘한 종류의 사건을 관찰할 때만 발생한다. 그런 사건이 새로운 가설의 틀을 만들어 시험하는 경우를 야기하면, 그것은 주로 어떤 일반화하는 과학의 관점에서 흥미롭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우리가 특정 사건과 그 사건들의 설명에 흥미를 가진다면, 우리는 우리에게 필요한 많은 보편적 법칙 모두를 당연한 것으로 여긴다.

이제 특정 사건과 그 사건들의 설명에 이런 흥미를 지닌 과학들은, 일반화하는 과학들과 대조적으로, 역사과학(historical sciences)이라고 불릴 것이다. 역사에 관한 이 관점은 왜 그렇게 많은 과학도와 역사의 방법이 자신들에게 흥미를 주는 것은, 소위 보편적 역사법칙이 아니라, 특정 사건임을 주장하는지를 분명히 한다. 그 까닭은 우리의 관점에서 판단하면 역사법칙이 없기 때문이다. 일반화는 흥미의 다른 방향에만 속하여, 역사에 관한 일인 특정 사건과 그 사건들의 인과적 설명에 대한 저 흥미와 뚜렷하게 구별된다. 법에 관심을 갖는 사람들은 일반화하는 과학에서 (예를 들어, 사회학에서) 도움을 구해야 한다. 우리의 관점은 왜 역사가 그렇게 자주 ‘실제로 발생했던 과거의 사건들’로서 묘사되는지를 분명히 해야 한다. 이 묘사는, 우리가 그 역사 학도의 특정 관심에 반대하는 어떤 반론을 제기해야 할지라도, 일반화하는 과학도와 반대로 역사 학도의 특정 관심을 완벽하게 잘 드러낸다. 그래서 우리의 관점은 왜 역사에서 우리가, 일반화하는 과학에서보다 훨씬 더 많이, 역사의 ‘무한한 주제’라는 문제와 마주보고 있는지를 설명한다. 그 까닭은 일반화하는 과학의 이론들이나 보편적 법칙들은 ‘관점’뿐만 아니라 통합 또한 소개하기 때문이다 ; 그 이론들이나 보편적 법칙들은, 모든 일반화하는 과학을 위하여, 그 과학의 연구, 논리적 구성과 제시의 중심점뿐만 아니라, 관심의 중심점과 문제를 창조한다. 그러나 역사에서 우리는 그런 통합하는 이론들을 지니고 있지 않다 ; 혹은 더 정확하게, 우리가 이용하는 많은 사소한 보편적 법칙들은 당연하게 여겨진다 ; 그 법칙들에는 실제로 흥밋거리가 없으며, 그 법칙들이 주제에 질서를 가져오는 일은 완전히 불가능하다. 우리가, 예를 들어, 폴란드가 러시아와 프러시아와 오스트리아의 연합세력에 도저히 저항할 수 없었다는 것을 지적함으로써 1772년의 폴란드의 첫 번째 분할을 설명한다면, 우리는 암묵적으로 다음과 같은 어떤 사소한 보편적 법칙을 사용하고 있다 : ‘거의 똑같이 잘 무장되고 지휘를 받는 두 무리의 군대 중에서 한 무리의 군대가 사람 수에서 엄청난 우위를 지니고 있다면, 다른 편은 이기지 못한다.’ (여기서 우리가 ‘못한다[never]’나 ‘거의 못한다[hardly ever]’라고 말하는 것은, 우리의 목적에 관하여, 군함 피나포어[H.M.S. Pinafore]의 함장에게 관하여 그렇게 하는 것과 비교하여 그렇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군함 피나포어 H.M.S. Pinafore는 영국 극작가 윌리엄 쉬엥크 길버트William Schwenck Gilbert의 작품이며 이 문장의 의미는 이 작품의 내용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생각되나 역자로서는 자세히 알 수 없다. - 역자 주].) 그런 법칙은 군사력에 관한 사회학의 법칙으로서 아마도 묘사될 것이다 ; 그러나 사회학도를 위하여 그렇게 심각한 문제를 제기하는 것, 혹은 사회학도의 주시를 환기시키는 것은 역시 너무 하찮은 일이다. 혹은 가령, 우리가 자신의 야망과 에너지에 의하여 루비콘 강을 건너는 시저의 결심을 설명한다면, 우리는 심리학자의 주시를 일깨우기 어려울 몇 가지 매우 하찮은 심리학적 일반화를 사용하고 있다. (사실상, 대부분의 역사적 설명은, 하찮은 사회학적이고 심리학적인 법칙이라기보다는 내가 14 장에서 상황논리라고 불렀던 것을, 암묵적으로 이용한다 ; 다시 말해서, 당사자에게 이용 가능한 정보와 같은 그런 개인적 이해관계와 목적과 다른 상황적 요인들을 묘사하는 초기조건에 덧붙여, 대부분의 역사적 설명은 제정신을 가진 사람은 일반적으로 다소 이성적으로 행동한다는 하찮은 일반적인 법칙을, 일종의 최초 근사치로서, 암묵적으로 상정[想定]한다.)

III

그러므로 역사적 설명이 이용하는 저 일반적인 법칙들은 선택적이면서 통합하는 원리들을, 역사에 관한 ‘관점’을, 제공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매우 제한된 의미에서 그런 관점은 역사를 어떤 것에 대한 역사로서 한정시킴으로써 제공될는지도 모른다 ; 보기는 권력 정치나 경제관계나 기술이나 혹은 수학에 관한 역사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우리에게는 한 걸음 더 나아간 선택적 원칙들인, 동시에 관심의 중심부인 관점들이 필요하다. 이것들 몇 가지는, 역사에게 중요한 것은 ‘위대한 사람들’의 특성이나 ‘민족적 특성’이나 도덕적 개념이나 경제적 조건, 기타 등등과 같은 어느 정도로 보편적 법칙들을 닮은 선입견에 의하여 제공된다. 이제 많은 ‘역사 이론들’은 (이 이론들은 ‘유사-이론들’로서 아마도 더 잘 묘사될 것이다) 그 이론들의 특징에서 과학이론들과 크게 다름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그 까닭은 역사에서 (지질학과 같은 역사관련 자연과학을 포함하여) 우리 수중에 있는 사실들은 흔히 심하게 제한되어 있어서 우리 의지대로 반복되거나 실행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사실들은 미리 상정(想定)된 관점에 따라서 수집되었다 ; 소위 역사의 ‘출처들’은 기록하기에 충분히 흥미롭게 보였던 그런 사실들만을 기록하여, 그 출처들은 흔히 미리 상정(想定)된 이론에 들어맞는 그런 사실만을 담고 있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그 이상의 사실이 없으면, 이 이론이나 다른 후속 이론을 시험하는 일이 흔히 가능하지 못한 경향이 있다. 그런 시험 불가능한 역사이론은 그리하여, 그 비난이 과학이론에 대하여 올바르지 않게 적용되었다는 의미에서, 순환적이라고 마땅하게 비난을 받을 수 있다. 나는 그런 역사이론들을, 과학이론과 대조적으로, ‘일반적 해석’이라고 부를 것이다.

해석은 관점을 대표하기 때문에 중요하다. 그러나 우리는 관점이 항상 불가피하다는 것과, 역사에서 시험될 수 있어서 과학적 특성을 지닌 이론은 드물게 획득될 수 있을 뿐임을 보았다. 그리하여 일반적 해석이 우리가 지닌 모든 기록과 심지어 일치함으로써 확증될 수 있다고 우리가 생각해서는 안 된다 ; 그 까닭은 동일한 기록과 일치하는 몇 가지 다른 (그리고 아마도 양립할 수 없는) 해석들이 항상 있다는, 그리고 우리는 물리학에서 결정적인 실험들이 그러한 것처럼 작동할 수 있는 새로운 자료를 거의 얻을 수 없다는, 사실뿐만 아니라 그 일반적 이론의 순환성을 우리가 기억해야 하기 때문이다. 역사가들은 자주 자신들의 해석만큼 사실에 잘 맞는 다른 해석을 보지 못한다 ; 그러나 심지어 물리학의 분야에서도 그 분야의 더 크고 더 신뢰할만한 사실의 축적량에도 불구하고, 낡은 실험들이 두 가지 모두 상충되어 양립할 수 없는 이론들과 일치하기 때문에 새로운 결정적인 실험들이 자꾸 필요하다면 (중력에 관한 뉴튼과 아인슈타인의 이론 중 하나를 결정하는 데 필요한 일월식[日月蝕]-실험을 고려하라), 우리는 어떤 분명한 역사적 기록 한 건이 한 가지 방식으로만 해석될 수 있다는 순진한 믿음을 포기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물론 이것은 모든 해석이 동등한 장점을 지닌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첫째로, 인정된 기록과 실제로 일치하지 않는 해석이 항상 있다 ; 두 번째로, 그 해석들이 기록에 의하여 반증되는 것을 피하려면 몇 가지 다소 합당한 보조 가설이 필요한 해석들이 있다 ; 다음으로, 또 다른 해석이 연결할 수 있어서, 그 정도까지는 ‘설명’할 수 있는 몇 가지 사실들을 연결할 수 없는 몇 가지 해석들이 있다. 따라서 심지어 역사해석의 분야에서도 상당한 양의 진보가 있을 것이다. 게다가, 다소 보편적인 ‘관점들’과 위에 언급된 저 특별하거나 개별적인 가설들 사이에는 모든 종류의 중간 단계들이 있을 것이며, 그 특별하거나 개별적인 가설들은 역사적 사건들을 설명하는 데서 보편적 법칙의 역할보다는 가설적 초기 조건의 역할을 한다. 아주 흔히, 이것들은 꽤 잘 시험될 수 있어서 그리하여 과학이론과 비견될 수 있다. 그러나 이 특별한 가설 몇 가지는 내가 해석이라고 불렀던 저 보편적 유사-이론들과 밀접하게 닮아서, 따라서 ‘특수 해석’으로서 이것들과 함께 등급이 매겨질 것이다. 그 까닭은 그런 특수 해석을 뒷받침하는 증거는 매우 흔히 어떤 보편적 ‘관점’을 뒷받침하는 증거만큼 특징에서 순환적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우리의 유일한 권위자는 자신의 특정 해석에 들어맞는 어떤 사건에 관한 바로 그 정보를 우리에 줄 것이다. 우리가 시도할 이 사실들에 대한 대부분의 특수 해석들은 사실의 최초 선택에서 사용되었던 그 해석과 틀림없이 들어맞는다는 의미에서 그렇다면 순환적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런 자료에 우리의 권위자에 의하여 채택된 것에서 근본적으로 벗어나는 해석을 부여할 수 있다면 (그리고 이것은, 예를 들어 플라톤의 작품을 우리가 해석함에서 틀림없이 그러하다), 우리의 해석이 지니는 특성은 과학적 가설(假說)의 특성과 어떤 유사점을 아마도 띠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우리의 해석이 지니는 특성이 쉽게 적용될 수 있으며, 그 해석이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것을 설명한다는 것도 특정 해석을 뒷받침하는 매우 의심스러운 주장임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 그 까닭은 우리가 반대 사례를 주시할 때만 이론을 시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요점은 거의 항상 다양한 ‘폭로성[unveiling] 철학들’을 찬양하는 사람들에 의하여, 특히 심리적, 사회적, 그리고 역사적 분석가들에 의하여 거의 항상 간과된다 ; 그들은 자신들의 이론들이 어느 곳에서나 적용될 수 있는 용이함에 의하여 흔히 유혹에 넘어간다.)

나는 전에 해석들은 양립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 그러나 해석들을 관점의 결정화(結晶化)로서만 생각한다면, 해석들은 양립할 수 없는 것이 아니다. 예를 들어, 사람은 꾸준히 진보한다는 (열린사회를 향하여 혹은 어떤 다른 목적을 향하여) 해석은 사람은 꾸준히 뒤로 미끄러진다는 즉, 퇴보한다는 해석과 양립할 수 없다. 그러나 인간의 역사를 진보의 역사로 간주하는 사람의 ‘관점’은 인간의 역사를 퇴보의 역사로 간주하는 사람의 관점과 반드시 양립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 다시 말해서, 우리는 자유를 향한 인간 진보의 역사를 (예를 들어 노예제도에 대항하는 싸움에 관한 이야기를 포함하는) 쓸 수 있으며 인간의 퇴보와 압제에 관한 또 다른 역사를 (아마도 백인종이 유색인종에게 미친 충격과 같은 그런 일들을 포함하는) 쓸 수 있다 ; 그리고 이 두 가지 역사는 상충될 필요가 없다 ; 오히려, 그 두 가지 역사는, 다른 지점에서 관찰된 동일한 풍경에 대한 두 가지 관점이 그럴 것처럼, 서로 상보적일는지도 모른다. 이 고찰은 상당한 중요성을 지닌다. 그 까닭은 각 세대가 자신의 고통과 문제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그리하여 자신의 이해관계와 자신의 관점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각 세대는 역사를 자신의 방식으로 바라보고 재해석할 권리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합리적인데, 그 방식은 앞 세대의 방식과 상보적이다. 우리는 역사에 흥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리고 아마도 우리가 지닌 문제들에 대하여 중요한 것을 배우고 싶어 하기 때문에, 우리는 역사를 배운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그러나 역사는, 객관성이라는 적용 불가능한 개념의 영향을 받아서 우리가 우리의 관점으로부터 역사적 문제를 제시하기를 주저한다면, 이 두 가지 목적 어느 것에도 부합할 수 없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의 관점이, 의식적으로 그리고 비판적으로 문제에 적용된다면, 자신은 해석을 하지 않으면서 ‘과거의 사건들이 발생한 것처럼 그 사건들을’ 제시하도록 자신에게 허용하는 객관성의 수준에 자기가 도달했다고 순진하게 믿는 저술가의 관점보다, 열등하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이것이 심지어 이 책에서 발견될 수 있는 그런 인정되는 바와 같이 개인적인 언급이, 그 언급이 역사적 방법과 일치하기 때문에, 정당화된다고 내가 믿는 이유이다.) 요점은 자신의 관점을 의식해서 비판적이 되는 것인데, 다시 말해서, 이것이 가능한 한, 사실 제시에서 무의식적이어서 무비판적인 편견을 피하는 것이다. 다른 모든 면에서, 해석은 스스로 말을 해야 한다 ; 그리고 해석의 장점들은 그 해석의 주제와 관련된 흥미와, 당시의 문제를 명시(明示)하는 해석의 능력뿐만 아니라, 해석이 지닌 풍요로움인 역사의 사실들을 명시(明示)하는 능력이다.

요컨대, ‘실제로 발생했던 것과 같은 과거’의 역사는 있을 수 없다 ; 역사적 해석만 있을 수 있으며, 그 해석 어느 것도 최종적이지 않다 ; 그래서 모든 세대는 자신의 해석을 구성할 권리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모든 세대는 자신의 해석을 구성할 권리를 가질 뿐만 아니라, 그렇게 할 일종의 의무를 또한 지니고 있다 ; 그 까닭은 답변되어야 할 화급한 필요가 정말로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문제가 어떻게 과거와 연관되어 있는지 우리는 알고 싶고, 우리의 주요 임무라고 느끼고 선택하는 것에 대한 해결책을 향하여 우리가 나아갈 방향을 우리는 보고 싶다. 이성적이고 공정한 방식에 의해서 답변이 되지 않는다면, 역사주의적 해석을 초래하는 것은 이 요구이다. 그 요구의 압력을 받아서, 역사주의자는 ‘우리의 가장 시급한 문제들로서 우리는 무엇을 선택해야 하는가, 그 문제들은 어떻게 대두되었으며, 우리가 그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하여 어떤 길을 따라서 우리는 나아가야 하는가 ?’라는 이성적 문제를 ‘어느 길로 우리는 가고 있는가 ? 본질적으로 역사가 우리에게 운명지어준 역할은 무엇인가 ?’라는 비이성적이고 겉보기에 사실적인 질문으로 바꾼다.

그러나 역사주의자에게 그 자신의 방식으로 역사를 해석할 권리를 거부하면서 나는 정당화될까 ? 누구나 그런 권리를 지니고 있다고 나는 조금 전에 선언하지 않았던가 ? 이 질문에 대한 나의 답변은 역사주의적 해석은 기묘한 종류라는 것이다. 필요하고 정당화되고, 어느 것 하나를 우리가 채택해야하는, 저 해석들은 탐조등에 비교될 수 있다고 나는 말했다. 우리는 탐조등이 우리의 과거를 비추도록 하고, 우리는 그 탐조등의 반사로써 현재를 조명하기를 희망한다. 이것과 반대로, 역사주의적 해석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비추는 탐조등에 비교될 것이다. 그 해석은 우리의 환경의 어떤 것을 보는 일을 불가능이 아니라면 어렵게 만들어서, 우리의 행동을 마비시킨다. 이 은유를 번역하면, 역사주의자는 역사의 사실들을 선택하고 조직하는 것은 우리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역사 자체’나 ‘인류의 역사’가 그 내재적 법칙들에 의하여 우리 자신과 우리의 문제와 우리의 미래와 심지어 우리의 관점을 결정한다고 믿는다. 역사적 해석이 우리를 마주하고 있는 실제적 문제와 판단으로부터 출현하는 요구에 답을 해야 한다는 것을 인정하는 대신에, 역사주의자는, 우리가 지닌 역사적 해석 갈망에서, 우리가 역사를 관조함으로써 비결인 인간 운명의 본질을 발견할 것이라는 심오한 직감이 드러난다고 믿는다. 역사주의는 인류가 운명적으로 걸을 길을 발견하려고 노력 중이다 ; 역사주의는 (J. 맥머레이[Macmurray]가 지칭하는 바와 같이) 역사의 실마리를 즉, 역사의 의미를 발견하려고 노력 중이다.

IV

그러나 그런 실마리가 있는가 ? 역사에는 의미가 있는가 ?

나는 여기서 ‘의미’의 뜻에 관한 문제를 시작하고 싶지 않다 ; 대부분의 사람들이 ‘역사의 의미’에 대하여 혹은 ‘삶의 의미나 목적’에 대하여 말할 때 자신들은 무엇을 의미하는지 충분히 명백하게 알고 있음을 나는 당연하게 여긴다. 그래서 이런 의미에서, 역사의 의미에 관한 질문이 던져지는 의미에서, 나는 대답한다 : 역사에는 의미가 없다.

이 견해에 대하여 이유를 대기 위하여, 나는 먼저 사람들이 역사에 의미가 있는지를 물을 때 염두에 두고 있는 ‘역사’에 관한 것을 말해야 한다. 지금까지, 나는 마치 설명이 필요 없는 양 ‘역사’에 관하여 내 자신이 말했다. 그것은 더 이상 가능하지 않다 ; 그 까닭은 내가 대부분의 사람들이 역사에 대하여 말하는 의미로서의 ‘역사’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하고 싶기 때문이다 ; 그리고 이것은 적어도 내가 역사에는 의미가 없다고 말하는 한 가지 이유이다.

어떻게 대부분의 사람들은 ‘역사’라는 용어를 사용하게 될까 ? (나는 우리가 어떤 책에 대하여 그 책이 유럽의 역사에 관한 것이라고 말하는 의미에서의 ‘역사’를 의미한다 - 우리가 그 책이 유럽의 역사이다라고 말하는 의미에서가 아니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역사에 대하여 학교와 대학에서 배운다. 그들은 그 역사에 관한 책을 읽는다. 그들은 ‘세계의 역사’나 ‘인류의 역사’라는 이름의 책 속에서 취급된 것을 보며, 그것을 사실에 관한 다소 분명한 연속물로서 간주하는 데 익숙해진다. 그리고 이 사실들이 인류의 역사를 구성한다고 그들은 믿는다.

그러나 사실의 영역은 무한히 풍요롭다는 것과, 선택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보았다. 우리의 이해관계에 따라서, 우리는 예를 들어 예술의 역사에 관하여 글을 쓸 수 있을 것이다 ; 혹은 언어의 역사에 관하여; 혹은 식생활 습관에 관하여 ; 혹은 발진티푸스에 관하여 (진서[Zinsser]의 쥐, 이, 그리고 역사[Rats, Lice, and History]를 보라). 틀림없이 이것들 어느 것도 인류의 역사는 아니다 (그리고 그것들 모두를 함께 생각해도 인류의 역사는 아니다). 사람들이 인류의 역사에 관하여 말할 때 염두에 두는 것은, 더 정확하게, 우리 시대까지, 이집트와 바빌로니아와 페르시아와 마케도니아와 로마 제국의 역사이다. 다시 말해서 : 사람들은 인류의 역사에 관하여 말하지만, 그들이 의미하는 것과, 그들이 학교에서 배운 것은 정치권력의 역사이다.

인류의 역사란 없다, 단지 인간 삶의 모든 면(面)에 관한 무한한 숫자의 역사들이 있다. 그리고 이 역사 중의 하나가 정치권력의 역사다. 이것이 세계의 역사로 승격되어 있다. 그러나 이것은 인류에 대한 모든 합당한 개념에 반하는 범죄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것은 횡령 혹은 강탈 혹은 독살(毒殺)의 역사를 인류의 역사로서 취급하는 것보다 나을 게 없다. 그 까닭은 정치권력의 역사는 국제범죄와 집단학살의 (사실상 그 범죄를 억제하려는 노력 몇 가지를 포함하여) 역사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역사가 학교에서 가르쳐지고, 가장 흉악한 범죄자 몇 명은 그 역사의 영웅으로 칭송된다.

그러나 인류에 대한 구체적 역사라는 의미에서의 보편적 역사와 같은 것을 실제로 없을까 ? 하나도 있을 수 없다. 이것이, 내가 믿는 바, 모든 인도주의자의, 그리고 특별히 모든 기독교도의 답변이어야 한다. 인류의 대한 구체적 역사는, 있다면, 모든 사람에 대한 역사여야 할 것이다. 그 역사는 모든 인간의 희망과 투쟁과 고통의 역사이어야 할 것이다. 그 까닭은 다른 사람보다 더 중요한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분명히, 이 구체적 역사는 기술(記述)될 수 없다. 우리는 추상화를 해야 하고, 우리는 무시를 해야 하고, 선택해야 한다. 그러나 이렇게 하여 우리는 많은 역사에 도달한다 ; 그리고 그 역사 가운데, 인류의 역사로서 광고된 국제범죄와 집단학살에 우리는 도달한다.

그러나 왜 권력의 역사만 선택되었고, 예를 들어, 종교나 시(詩)의 역사는 아닐까 ? 몇 가지 이유가 있다. 한 가지 이유는 권력은 우리 모두에게 영향을 미치고 시(詩)는 소수에게만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또 다른 이유는 사람에게는 권력을 숭배를 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권력숭배는 인간우상 숭배의 최악의 종류 하나로 감옥인 인간 노예 시대의 유물이다. 권력숭배는 두려움에서 태어나는, 당연히 경멸되어야 하는 감정이다. 정치권력이 ‘역사’의 핵심으로 만들어진 세 번째 이유는 권력을 쥔 사람들이 숭배 받기를 원해서 자기들의 바람을 강요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많은 역사가는 황제와 장군(將軍), 그리고 독재자들의 감독을 받으며 역사를 썼다.

이 관점이, 몇몇 기독교 옹호자들을 포함하여, 많은 방면으로부터 가장 강력한 반론을 맞이할 것임을 나는 알고 있다 ; 그 까닭은 신약성서에는 이 학설을 뒷받침하는 것이 없을지라도, 하느님은 역사 속에서 드러난다는 것은 기독교 교리의 일부로 흔히 여겨지기 때문이다 ; 역사에는 의미가 있다는 것 ; 그리고 역사의 의미는 하느님의 목적이라는 것. 역사주의는 그리하여 종교의 필수적 요소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나는 이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나는 이 관점이, 이성주의적이거나 인도주의적 관점에서 뿐만 아니라 기독교적 관점 자체로부터도 또한, 순전히 우상숭배이며 미신이라고 주장한다.

이 유신론적 역사주의의 뒤에 무엇이 있는가 ? 헤겔과 함께, 그 역사주의는 역사를 - 정치역사 - 무대로서, 혹은 더 정확하게, 일종의 긴 섹스피어의 연극으로서 간주한다 ; 그리고 관중은 ‘위대한 역사적 인물들’을, 혹은 추상적으로서의 인류를 그 연극의 영웅으로서 상상한다. 그 다음에 그들은, ‘누가 이 연극을 썼는가 ?’라고 묻는다. 그리고 그들은 ‘하느님’이라고 대답할 때 성스러운 답변을 한다고 믿는다. 그러나 그들은 틀렸다. 그들의 답변은 순전히 신성모독인데, 그 까닭은 그 연극이 하느님에 의하여 쓰인 것이 아니라 (그들은 그것을 알고 있다), 장군(將軍)과 독재자들의 감독을 받으며, 역사 교수들에 의하여 기술(記述)되었기 때문이다.

역사를 다른 관점에서 해석하는 것만큼 역사를 기독교적 관점에서 해석하는 것은 정당화될 수 있음을 나는 부인하지 않는다 ; 그래서 예를 들어 우리가 기독교의 영향에 우리 서구적 목표와, 인도주의, 자유, 평등을 얼마나 많이 빚지고 있는지는 틀림없이 강조되어야 한다. 그러나 동시에, 심지어 자유의 역사를 향하여 유일하게 기독교적일 뿐만 아니라 유일하게 이성적인 자세는, 우리가 우리의 삶으로부터 만들어내는 것에 책임을 진다는 의미에서, 우리 자신이 그 역사에 책임을 진다는 것과, 우리의 세속적 성공이 아니라 우리의 양심만이 우리를 재판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역사 속에서 하느님이 드러나며 당신의 판결을 드러낸다는 이론은 세속적 성공이 최종심의 판사이며 우리 행동의 정당화라는 이론과 구별이 될 수 없다 ; 그 이론은 역사가 판결할 것이라는, 다시 말해서, 미래가 아마도 정의일 것이라는 교설과 동일하다 ; 그 이론은 내가 ‘도덕적 미래주의’라고 부른 것과 동일하다. 하느님은 보통 ‘역사’라고 불리는 것에서, 국제범죄와 집단학살의 역사 속에서, 드러난다고 주장하는 것은 진정으로 신성모독이다 ; 그 까닭은 인간 삶의 영역 속에서 실제로 발생하는 것은 이 잔인하고 동시에 유치한 일에 의하여 간단하게 취급되지도 않기 때문이다. 잊혀진, 알려지지 않은 개별 인간의 삶 ; 그의 슬픔과 그의 기쁨, 그의 고통과 죽음, 이것이 여러 세기를 내려오는 인간 경험의 실제 내용이다. 그것이 역사에 의하여 언급될 수 있다면, 하느님의 손가락을 역사 속에서 보는 것이 신성모독이라고 나는 말해서는 틀림없이 안 된다. 그러나 그런 역사는 존재하지도 않고 존재할 수도 없다 ; 그리고 존재하는 모든 역사, 위대한 자들과 강력한 자들에 대한 우리의 역사는 기껏해야 천박한 희극이다 ; 그 역사는 현실 뒤에 있는 권력에 의하여 공연되는 소극(笑劇) 오페라이다 (인간의 투쟁 장면 뒤에 있는 올림푸스 신들에 관한 호머의 소극[笑劇]오페라에 비견될 수 있는). 그 역사는 우리들이 지닌 최악의 본능 중 하나인 권력에 대한, 성공에 대한 우상적 숭배를 우리로 하여금 실제적이라고 믿도록 유도한 것이다. 그래서 심지어 인간이 만든 것도 아니고 인간이 날조한 ‘역사’ 속에서, 몇몇 기독교도들은 하느님의 손을 감히 본다 ! 그들은 자신들이 지닌 하찮은 역사해석이 하느님에게서 나온다고 할 때 하느님이 무엇을 의도하는지 자신들이 감히 이해하고 안다 ! ‘반대로, 우리가 “하느님”이라고 말할 때 우리가 안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은 하느님에게 도달하지도 않고 하느님을 이해하는 것도 아니며 .., 그것이 “정신”이든 “자연”이든“운명”이든 “이데아”이든 .., 항상 우리 자신이 지닌 스스로 상정(想定)되고 스스로 만든 우상들 중 하나임을 .. 인정함으로써 우리는 시작해야 한다’라고 신학자인 K. 바스(Barth)는 자신의 저서 사도신경(Credo)에서 말한다. (바스[Barth]가 ‘역사 속에서의 하느님의 현시[顯示]에 관한 신[新]프로테스탄트적 교리’를 ‘인정될 수 없는’으로서 그리고 ‘그리스도의 왕좌’에 대한 침범으로서 특징짓는 것은 이 자세와 일치한다). 그러나 기독교적 관점에서, 그런 시도의 기초를 이루고 있는 것은 오만뿐만이 아니다 ; 그것은, 더 특별하게, 반(反)기독교적 자세이다. 그 까닭은 기독교가 세속적 성공은 결정적이 아니라고 가르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본디오 빌라도 밑에서 고난을 당하셨다’. 나는 다시 바스(Barth)의 말을 인용한다 : ‘어떻게 본디오 빌라도는 사도신경 속에 들어가는가 ? 간단한 대답이 즉각 주어질 수 있다 : 그것은 날짜 문제이다’. 그리하여 성공했던, 당시의 역사적 힘을 대표하는, 사람은 언제 이 사건들이 발생했는지를 가리키는 순전히 기술적(技術的 : technical) 역할을 여기서 한다. 그리고 이 사건들은 무엇이었던가 ? 그 사건들은 권력-정치적 성공과, ‘역사’와, 관련이 없었다. 그 사건들은 로마 정복자들에 대항하는 유태민족의 성공하지 못한 (간디풍의) 비폭력적 민족주의의 혁명에 관한 이야기조차 아니었다. 그 사건들은 한 인간의 고난에 지나지 않았다. 바스(Barth)는 ‘고난을 당하다(suffers)’라는 말이 그리스도의 죽음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며 그리스도 삶의 전체를 이야기한다고 주장한다 ; 그는 말한다 : ‘예수는 고난을 당한다. 그러므로 그는 정복하지 않는다. 그는 승리하지 않는다. 그에게는 성공이 없다 .. 그는 자신이 십자가에서 처형당한 것을 .. 제외하고는 아무 것도 이룩하지 않았다. 그의 민족에 대한 그리고 그의 사도에 대한 그의 관계에도 똑같은 것이 언급될 수 있으리라.’ 바스(Barth)의 말을 인용하는 나의 의도는 역사적 성공에 대한 숭배가 기독교 정신과 양립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이는 나의 ‘이성주의적’ 혹은 ‘인도주의적’ 관점이 유일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것이다. 기독교에 문제가 되는 것은 강력한 로마 정복자들의 역사적 행위가 아니라 (키에르케고르의 표현을 사용해서) ‘몇 명의 어부가 세상에 준 것’이다. 그러나 역사에 대한 모든 유일신적 해석은 기록된 바로서의 역사 속에서, 다시 말해서 권력의 역사 속에서, 그리고 역사적 성공 속에서, 하느님 의지의 현시(顯示)를 보려고 애를 쓴다.

‘역사 속에서의 하느님의 현시(顯示)라는 교설’에 대한 이 공격에, 지상에서의 성공하지 못한 그리스도의 삶이 마침내 가장 위대한 정신적 승리로서 인류에게 계시된 것은 성공, 그의 죽음 뒤의 그의 성공이다라고 아마도 답변될 것이다 ; 그 승리를 증명하고 정당화했으며 그에 따라서 ‘나중 된 자가 먼저 되고 먼저 된 자가 나중 된다’라는 예언이 증명된 성공, 예수 가르침의 열매였다는 것. 다시 말해서, 하느님의 의지가 드러나는 것은 기독교 교회의 역사적 성공이었다는 것. 그러나 이것은 매우 위험한 방어 방향이다. 교회의 세속적 성공은 기독교를 지지하는 주장이라는 암시는 신앙의 결핍을 명백하게 폭로한다. 초기 기독교도에게는 이런 종류의 세속적 미끼가 없었다. (그들은 양심이 권력을 판결해야지, 그 반대는 아니라고 믿었다.) 기독교적 가르침의 성공에 대한 역사가 하느님의 의지를 드러낸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이 성공이 실제로 기독교 정신의 성공인지를 스스로 물어야한다 ; 그리고 이 정신이 교회가 승리했을 때보다는 교회가 박해를 받았을 때 승리하지 않았던지. 어느 교회가 이 정신을 더 순수하게 구체화했는가, 순교자의 교회였던가 아니면 종교재판을 하는 승승장구하던 교회인가 ?

기독교의 요점은 온유한 사람들에게 관련된다고 주장할지라도, 이것을 많이 인정할, 그러나 여전히 이 요점이 역사주의의 하나라고 믿는, 많은 사람들이 있는 것 같다. 이 관점의 두드러진 대표자는 J. 맥머레이(Macmurray)인데, 그는 역사의 실마리(The Clue to History)에서 역사적 예언 속의 기독교 가르침의 본질을 발견하며, 그 설립자 속에서 ‘인간본성’에 관한 변증법적 법칙의 발견자를 본다. 맥머레이는, 이 법칙에 따라서, 정치역사는 불가피하게 ‘세계의 사회주의적 연방’을 틀림없이 초래한다고 생각한다. ‘인간본성에 관한 근본적 법칙은 무너질 수 없다 .. 세상을 물려받을 사람은 온유한 자이다.’ 그러나 이 역사주의는, 희망을 확신으로 대체함으로써, 틀림없이 도덕적 미래주의를 초래한다. ‘법칙은 무너질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심리학적 근거를 토대로, 우리가 하는 모든 것은 동일한 결과를 초래할 것임을 확신할 수 있다 ; 그리하여 최종 결과는 우리의 도덕적 결심에 달려있지 않아서, 우리의 책임에 대하여 걱정할 필요가 없다. 과학적 근거를 토대로, 우리가 ‘나중 된 자가 먼저 되고 먼저 된 자가 나중 된다’를 확신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우리가 들으면, 이것은 양심을 역사적 예언으로 대체하는 것 외에 다른 무엇인가 ? 이 이론은 다음 훈계에 위험스럽게 가까이 (틀림없이 그 주장자의 의도에 반하여) 다가가지 않는가 : ‘현명하게 처신하여 기독교의 설립자가 당신에게 말하는 것을 명심하라, 그 까닭은 그가 인간본성에 관한 위대한 심리학자였고 역사에 관한 위대한 예언가였기 때문이다. 때에 맞추어 온유한 자들이 타고 가는 마차에 동승하라 ; 그 까닭은 인간본성에 관한 냉엄한 과학적 법칙에 따라서, 이것이 정상에 이르는 가장 확실한 길이기 때문이다 !’ 그런 역사에 대한 실마리는 성공숭배를 의미한다 ; 그것은 온유한 자가 승자의 편에 있기 때문에 정당화될 것임을 의미한다. 그것은 마르크스주의와, 특히 내가 마르크스의 역사주의적 도덕론으로 묘사했던 것을 인간본성에 관한, 그리고 종교적 예언에 관한 언어로 번역한다. 그것은 암시에 의해서 기독교의 설립자가 헤겔의 선두주자였다는 사실에서 기독교의 가장 큰 업적을 보는 해석이다 - 인정되는 바와 같이 더 우월한 선두주자.

성공이 숭배되어서는 안 된다는, 성공은 우리의 재판관이 될 수 없다는, 그리고 우리는 성공에 의하여 현혹되어서는 안 된다는 나의 주장과, 특히 이 자세에서 내가 기독교의 진정한 가르침이라고 믿는 것을 보여주려는 나의 노력은 오해를 받아서는 안 된다. 그러한 나의 주장과 나의 노력에는 내가 앞 장에서 비판한 ‘내세적(來世的)인’ 자세를 지지하려는 의도가 없다. 기독교가 내세적(來世的)인지 나는 모르지만, 자신의 신앙을 증명하는 유일한 길은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실제적인 (그리고 세속적인) 도움을 제공함으로써 이다라고 기독교는 확실하게 가르친다. 그리고 권력과 영예와 부(富)의 의미에서의 세속적 성공을 향한 최고의 유보적 태도와 심지어 경멸의 태도를, 이 세상에서 최선을 다하려는 그리고 그 목적들이 성취되도록 만들려는 분명한 목적과 함께 자신이 채택하기로 결정한 그 목적들을 추진하는 노력과 결합하는 것은, 틀림없이 가능하다 ; 성공이나 역사에 의한 자신의 정당화를 위해서가 아니라, 그 목적들을 위하여.

이 관점 몇 가지에 대한, 그리고 특히 역사주의와 기독교의 양립불가능성에 대한 강력한 뒷받침이 헤겔에 대한 키에르케고르의 비판에서 발견될 수 있다. 키에르케고르는 자신이 교육받은 헤겔적 전통에서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했다 할지라도, 헤겔적 역사주의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보다 더 명백하게 인식했던 사람은 없었다. 키에르케고르는 이렇게 썼다, ‘헤겔 이전에 역사를 .. 설명하려고 노력했던 철학자들이 있었다. 그리고 신(神)은 이 시도들을 보았을 때 미소만 지을 수 있었다. 그러나 신(神)은 노골적으로 웃지는 않았는데, 그 까닭은 그 시도들에는 인도적이고 정직한 성실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헤겔 - ! 여기에서 나에게는 호머의 언어가 필요하다. 신(神)들은 얼마나 폭소를 터트렸던가 ! 존재하는 어떤 것의 그리고 모든 것의 필요성을 통찰하기만 한, 그리고 이제 자신의 손풍금으로 만사를 연주하는, 그렇게 지겨운 작은 교수 : 올림푸스의 신(神)들이여, 들으시라 !’ 그리고 기독교의 변호자 헤겔을 무신론적 쇼펜하우어가 공격하는 것을 언급하면서, 키에르케고르는 계속한다 : ‘쇼펜하우어를 읽고 나는 내가 표현할 수 있는 것 이상의 기쁨을 받았다. 그가 말하는 것은 완벽하게 옳다 ; 그래서 - 독일인들에게 딱 어울린다 - 그는 오직 독일인만 건방질 수 있는 만큼 건방지다.’ 그러나 키에르케고르 자신의 표현은 거의 쇼펜하우어의 표현만큼 퉁명스럽다 ; 그 까닭은 키에르케고르가 계속해서 말하기를 자신이 ‘이 찬란한 부패 정신’이라고 부르는 헤겔 철학은 ‘태만의 모든 형태 중에서 가장 역겨운 형태’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 그리고 그는 헤겔 철학이 지닌 ‘허장성세의 곰팡이’, 그 철학의 ‘지적(知的) 방탕’, 그리고 ‘타락의 사악한 찬란함’에 관하여 말한다.

그리고 정말로 우리의 윤리 교육뿐만 아니라 지식 교육도 부패했다. 그 교육은 찬란함에 대한, 사물에 대하여 언급되는 방식에 대한 찬사에 의하여 도착(倒錯)되었는데 그 찬사는 언급되는 사물들에 (그리고 행하여지는 것들) 대한 비판적 평가의 자리를 차지한다. 그 교육은 우리가 배우인 역사의 무대가 지닌 광휘라는 낭만적 개념에 의하여 도착(倒錯)된다. 우리는 그 무대의 관람석에 눈을 두고 행동하도록 교육을 받는다.

다른 사람들의 중요성과 연계하여 자신의 중요성을 합당하게 평가하도록 사람을 교육시키는 전체 문제가 명성에 관한 이 윤리에 의하여, 권력의 역사에 대한 낭만적 관점과 헤라클리투스(Heraclitus)에게로 거슬러 올라가는 낭만적인 종족적 도덕성을 지닌 고전문학에 아직도 근거한 교육체계를 지속하는 도덕성에 의하여, 완전히 뒤죽박죽이 되었다 ; 그 궁극적 토대가 권력숭배인 체계. (이 표찰을 다시 사용하여) 개인주의와 이타주의(利他主義)를 사려 깊게 결합하는 대신에 - 다시 말해서, ‘실제로 문제가 되는 것은 인간 개인들이지만, 이것이 매우 중요한 것은 나다를 의미한다고 나는 생각하지 않는다’와 같은 자세 대신에 - 이기주의와 집단주의의 낭만적인 결합이 당연시된다. 다시 말해서 자신, 자신이 지닌 감정적 삶과 자신이 내놓는 ‘자기표현’에 대한 중요성이 낭만적으로 과장된다 ; 그리고 그것과 함께, ‘개성’과 무리인 집단 사이의 긴장이 과장된다. 이것이 다른 개인인 다른 사람들의 자리를 차지하지만, 이성적인 개인 관계를 허용하지 않는다. ‘지배하라, 아니면 복종하라’가, 암시에 의하여, 이 자세의 명구(銘句)이다 ; 위대한 사람, 운명과 씨름하여 명성을 얻는 영웅이 되든지 (‘크게 쓰러질수록 명성도 크다’라고 헤라클리투스는 말한다), 아니면 ‘대중’에게 속하여 당신 자신을 지도력에 맡기어 당신이 속한 집단의 더 높은 대의명분에 맞추어 당신 자신을 희생하든지. 자신과 집단 사이의 긴장의 중요성에 대한 이 과장된 강조 속에는 신경쇠약증세적인, 발작증세적인 요소가 있어서, 나는 문명의 긴장에 대한 이 반응인 이 발작증세가 영웅숭배 윤리가 지니는, 지배와 복종 윤리가 지니는 강력한 감정적 마력의 비결임을 의심치 않는다.

이 모든 것의 밑바닥에 실제적이 난관이 놓여있다. (우리가 9장과 24장에서 본 바와 같이) 정치가는, 행복, 기타 등등과 같은 그런 ‘긍정적’이거나 ‘더 높은’ 가치를 위하여 싸우는 대신에, 사악한 일에 대항하여 싸우는 데 자신을 제한해야 하는 반면, 교사(敎師)는 원칙적으로 다른 위치에 놓여있다. 교사는 자신의 ‘더 높은’ 가치 기준을 학생들에게 강요해서는 안 될지라도, 그는 이 가치들에 대한 학생들의 흥미를 자극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교사는 학생들의 영혼을 걱정해야 한다. (소크라테스가 자신의 친구들에게 자신들의 영혼을 돌보라고 말했을 때, 그는 친구들을 걱정했다.) 그리하여 정치에 들어가서는 안 되는 그런 낭만적이거나 심미적(審美的) 요소 같은 것이 교육에는 있다. 그러나 이것이 원칙적으로 사실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우리의 교육체계에 적용이 불가능하다. 그 까닭은 그 요소가 교사와 학생 사이의 우정관계를, 24장에서 강조된 바와 같이 어느 상대방이 자유롭게 끝낼 수 있어야 하는 관계를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친구들을 선택했고, 그 친구들은 소크라테스를 선택했다.) 상정(想定)하기 때문이다. 바로 학생들의 숫자가 우리 학교에서 이 모든 것을 불가능하도록 만든다. 따라서 더 높은 가치를 부과하려는 노력이 성공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그 시도들이 해(害)를 - 목표로 정한 이상(理想)보다 훨씬 더 구체적이고 공적(公的)인 것 - 끼친다고 주장되어야 한다. 그래서 우리에게 맡겨진 사람들이 해(害)를 입어서는 안 된다는 원칙은 의술에서와 마찬가지고 교육에 대해서도 근본적인 것으로 인정되어야 한다. ‘해치지 말라’가 (그리하여 ‘우리들로부터 독립하기 위하여, 그리고 스스로 결정할 수 있게 되기 위하여, 젊은이들에게 그들이 가장 시급하게 필요한 것을 주어라’) 우리 교육체제를 위한 매우 가치 있는 목표일 것이며, 그 목표가 소박하게 들릴지라도 그 실현은 다소 요원하다. 대신에, ‘더 높은’ 목표가, ‘개성의 완전 개발’과 같은 그런 전형적으로 낭만적이고 정말로 터무니없는 목표가, 유행이다.

플라톤에 의하여 그랬던 것처럼 개인주의가 아직도 이기주의와 동일시되고, 이타주의는 집단주의와 (다시 말해서 개인주의적 이기주의를 집단 이기주의로 대체함과) 동일시되는 것은 그런 낭만적 생각의 영향을 받아서이다. 그러나 이것은 주요 문제인 다른 개인과 관련하여 자기 자신의 중요성에 대한 합리적인 평가를 어떻게 얻어내는지의 문제를 심지어 분명하게 형성하는 길을 차단한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초월하는 어떤 것을, 우리 자신을 헌신할 수 있는, 그리고 우리가 그것을 위해 희생할, 어떤 것을 목표로 해야 한다고 느껴지고 옳게 그렇기 때문에, 이것은 그 ‘역사적 임무’와 함께 집단이어야 한다는 결론이 내려진다. 그리하여 우리는 희생하라는 말을 들으며, 동시에,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탁월한 흥정을 할 것이라는 확신을 받는다. 우리는 희생을 할 것이라고 언급된다, 그러나 우리는 그리하여 명예와 명성을 얻게 될 것이다. 우리는 역사의 무대에서 ‘주요 배우’인 영웅이 될 것이다 ; 작은 위험으로 우리는 큰 보상을 받게 될 것이다. 이것이 겨우 작은 소수가 중요했던, 그리고 아무도 백성을 돌보지 않았던, 시기의 의심스러운 도덕성이다. 그것은, 정치적이거나 지적(知的) 귀족이었기 때문에, 역사 교과서 속으로 들어가는 기회를 가진 사람들의 도덕성이다. 그것은 정의(正義)와 평등주의를 선호하는 사람들의 도덕성이 도저히 될 수 없다 ; 그 까닭은 역사적 명성이란 정의로울 리가 없고 겨우 극소수에 의해서만 획득될 수 있기 때문이다. 동일하게 가치가 있거나 더 가치 있는 셀 수 없이 많은 숫자의 사람들은 항상 잊히는 경향이 있다.

더 높은 보상은 오직 자손만이 제공할 수 있는 것이라는 교설인 헤라클리투스의 윤리는 지금 보상을 찾아보라고 우리에게 가르치는 윤리교설보다 어떤 면에서 아마도 다소 우월하다고 아마도 인정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아니다. 우리에게는 성공과 보상을 무시하는 윤리가 필요하다. 그리고 그런 윤리는 창안될 필요가 없다. 그런 윤리는 새로운 것이 아니다. 그 윤리는 기독교에 의하여, 적어도 기독교 초기에, 설교되었다. 그것은, 다시, 우리 시대의 과학적 협력뿐만 아니라 산업적 협력에 의해서 교육된다. 명성에 관한 낭만적인 역사주의적 도덕성은 다행히도 쇠퇴하고 있는 듯하다. 무명용사(無名勇士)가 그것을 보여준다. 우리는 희생이, 익명으로 발생할 때, 그만큼 혹은 훨씬 더 많은 것을 의미할 것임을 깨닫기 시작하고 있다. 우리의 윤리교육도 그것을 뒤좇아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일을 하도록 교육을 받아야 한다 ; 칭찬을 받기 위해서나 비난을 피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 일을 위하여 우리가 희생하는 것. (우리 모두에게 어떤 격려, 희망, 칭찬, 그리고 심지어 비난이 필요하다는 사실은 완전히 다른 문제이다.) 우리는, 허구적인 ‘역사의 의미’ 속에서가 아니라, 우리의 일 속에서 우리의 정당화를 발견해야 한다.

역사에는 의미가 없다고 나는 주장한다. 그러나 이 주장은 정치권력의 역사에 관하여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 그 역사를 충격 속에서 바라보는 것을 의미하지도, 우리가 그 역사를 잔인한 농담으로서 간주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도 않는다. 그 까닭은 우리가, 우리 시대에 우리가 그 해결을 시도하려고 결심하는 권력정치의 저 문제들에 눈을 두고, 그 역사를 해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열린사회를 위한, 이성의 지배를 위한, 정의(正義)와 자유와 평등을 위한, 그리고 국제범죄를 억제하기 위한, 우리의 투쟁의 관점으로부터 권력정치의 역사를 해석할 수 있다. 비록 역사에는 목적이 없을지라도, 우리는 우리가 지닌 이 목적을 역사에 부과할 수 있다 ; 그래서 역사에는 의미가 없을지라도, 우리가 역사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우리가 여기서 다시 마주치는 것은 자연과 관습의 문제이다. 자연도 역사도 우리에게 무엇을 해야 하는지 말할 수 없다. 사실들은, 자연의 사실이든지 역사의 사실이든지, 우리를 대신해서 결정을 할 수 없다, 사실들은 우리가 선택할 예정인 목표를 결정할 수 없다. 자연과 역사에 목적과 의미를 도입하는 것은 우리다. 사람은 평등하지 않다 ; 그러나 우리는 평등한 권리를 위하여 싸우기로 결심할 수 있다. 국가와 같은 그런 인간의 제도는 이성적이지 않지만, 우리는 그 제도를 더 이성적으로 만들기 위하여 싸우기로 결심할 수 있다. 우리 자신과 우리의 평범한 언어는, 대체로, 이성적이라기보다는 감정적이다 ; 그러나 우리는 좀 더 이성적이 되려고 노력할 수 있고, 우리는 우리의 언어를 (우리들의 낭만적 교육자들이 말할 것과 마찬가지로) 자기표현의 도구가 아니라 이성적 대화소통의 도구로서 사용하도록 우리 자신을 훈련시킬 수 있다. 역사 자체에는 - 나는 물론 존재하지 않는 인류의 발전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권력정치의 역사를 의미한다 - 목적도 의미도 없지만, 우리는 그 역사에 목적과 의미를 부여할 결심을 할 수 있다. 우리는 역사를 열린사회를 위한 그리고 그 사회의 적들에게 대항하는 싸움으로 만들 수 있다 (열린사회의 적들은, 궁지에 몰린 때, 항상 파레토[Pareto]의 충고에 따라서 자신들의 인도주의적인 감정을 불평하면서 선언한다) ; 그래서 우리는 역사를 그에 따라서 해석할 수 있다. 궁극적으로, 우리는 ‘삶의 의미’에 관해서도 똑같이 말할 것이다. 삶에서 무엇이 우리의 목적이 될지는 결정하는 것, 우리의 목표를 결정하는 것은 우리에게 달려있다.

사실과 결정이라는 이 이원론은, 내가 믿는 바, 근본적이다. 그런 상태로의 사실에는 의미가 없다 ; 그런 사실들은 우리의 결심을 통해서만 의미를 얻을 수 있다. 역사주의는 이 이원론을 극복하려는 많은 시도의 하나일 따름이다 ; 역사주의는 두려움으로부터 탄생하는데, 그 까닭은 심지어 우리가 선택하는 기준에 대한 궁극적 책임을 우리가 진다는 것을 깨닫는 것으로부터 역사주의가 위축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행동은 보통 미신으로 묘사되는 것을 정확하게 대표하는 것으로 나에게 보인다. 그 까닭은 그 행동이 우리가 씨를 뿌리지 않은 곳에서 우리가 수확을 할 수 있다고 가정하기 때문이다 ; 그 행동은 우리가 오직 역사와 보조를 맞추면 만사가 제대로 될 것이고 분명히 제대로 된다고, 그래서 우리 편에서 어떤 근본적인 결심이 요구되지 않는다고 우리를 설득하려고 애를 쓴다 ; 그 행동은 우리의 책임을 역사에게, 그리하여 우리 자신의 뒤에 있는 악마적 힘의 연기(演技)에게 이전시키려고 애를 쓴다 ; 그 행동은 우리의 행동을 이 힘의 숨은 의도에 근거하려고 애를 쓰는데, 그 의도는 오직 신비적인 영감과 직감에서만 우리에게 계시될 수 있다 ; 그래서 그 행동은, 점괘와 꿈에 의하여 영감을 받아 복권에서 자신의 행운의 숫자를 고르는 사람의 도덕적 수준에 우리의 행동과 우리 자신을 올려놓는다. 도박처럼, 역사주의는 우리 행동에 대한 합리성과 책임에 우리가 절망하여 탄생한다. 역사주의는 타락한 희망이며 타락한 신념으로, 우리가 지닌 도덕적 열정에서 나오고 성공에 대한 경멸로부터 나오는 희망과 신념을 사이비-과학으로부터 나오는 확신으로 바꾸려는 시도이다 ; 명성이나 ‘인간 본성’이나 역사적 운명이라는 사이비-과학.

역사주의는 이성적으로 옹호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양심의 중요성을 가르치는 어떤 종교와도 상충된다고 나는 주장한다. 그 까닭은 그런 종교는 우리의 행동에 대하여, 그리고 그 행동이 역사의 과정에 미치는 반향에 대하여 우리가 지닌 최고의 책임을 강조하는 데에서 역사를 향한 이성주의적 태도와 틀림없이 일치하기 때문이다. 정말로, 우리에게는 희망이 필요하다 ; 희망 없이 행동하는 것, 사는 것은 우리의 힘을 벗어난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더 이상이 필요하지 않고, 우리에게 더 많은 것이 주어져서도 안 된다. 우리에게는 확실성이 필요하지 않다. 종교는, 특히, 꿈과 소원성취의 대체물이 되어서는 안 된다 ; 종교는 복권을 손에 쥐고 있거나 보험회사의 약관을 손에 쥐고 있는 것을 닮아서는 안 된다. 종교에서 역사주의적 요소는 우상의, 미신의 요소이다.

사실과 결심이라는 이원론에 대한 이 강조는 또한 ‘진보’와 같은 그런 개념을 향한 우리의 자세를 결정한다. 역사가 진보한다고, 우리는 진보하게 되어 있다고 우리가 생각한다면, 역사에는 역사 속에서 발견될 수 있는 있어서 역사에 부여될 필요가 없는 의미가 있다고 믿는 사람들과 같은 실수를 우리는 저지른다. 그 까닭은 진보한다는 것은 어떤 종류의 목적을 향하여, 인간으로서의 우리를 위하여 존재하는 목적을 향하여 움직이는 것이기 때문이다. ‘역사’는 이것을 할 수 없다 ; 오직 우리, 개별 인간만이 그것을 할 수 있다; 우리는 자유와 그리고 그 자유와 함께 진보가 달려있는 저 민주주의적 제도를 방어하고 강화함으로써 그것을 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의 경계심으로써, 우리의 노력으로써, 우리의 목적에 대하여 우리가 지닌 개념의 명확성으로써, 그리고 목적 선택에 관한 현실감으로써, 진보는 우리에게 달려있다는 사실을 더욱 완전히 깨닫게 되면서 우리는 그것을 훨씬 더 잘 할 것이다.

예언자의 자세를 취하는 대신에 우리는 우리 운명의 창조가가 되어야 한다. 우리는 가능한 한 사물을 잘 처리하는 것과 우리의 실수를 헤아리는 것을 배워야 한다. 그래서 권력의 역사가 우리의 재판관이 될 것이라는 생각을 우리가 버릴 때, 역사가 우리를 정당화할 것인지 아닌지를 걱정하는 일을 포기할 때, 어느 날 아마도 우리는 권력을 통제하는 데 성공할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우리는 우리의 힘으로 역사를 심지어 정당화할 것이다. 역사에는 정당화가 절실하게 요구되고 있다.

-“열린사회와 그 적들, 2권 헤겔과 마르크스”, 칼 포퍼 -

CONCLUSION

CHAPTER 25 : HAS HISTORY ANY MEANING ?

I

In approaching the end of this book, I wish again to remind the reader that these chapters were not intended as anything like a full history of historicism ; they are merely scattered marginal notes to such a history, and rather personal notes to boot. That they form, besides, a kind of critical introduction to the philosophy of society and of politics, is closely connected with this character of theirs, for historicism is a social and political and moral (or, as I shall say, immoral) philosophy, and it has been as such most influential since the beginning of our civilization. It is therefore hardly possible to comment on its history without discussing the fundamental problems of society, of politics, and of morals. But such a discussion, whether it admits it or not, must always contain a strong personal element. This does not mean that much in this book is purely a matter of opinion ; in the few cases where I am explaining my personal proposals or decisions in moral and political matters, I have always made the personal character of the proposal or decision clear (이 문장에서 I have always made라는 구절의 시제가 현재완료로 되어 있기 때문에 I am explaining이라는 현재진행형의 시제는 I was explaining으로 쓰는 것이 옳을 것이다. 문법적 오류로 보인다. 역자 주). It rather means that the selection of the subject matter treated is a matter of personal choice to a much greater extent than it would be, say, in a scientific treatise.

In a way, however, this difference is a matter of degree. Even science is not merely a 'body of facts'. It is, at the very least, a collection, and as such it is dependent upon the collector's interests, upon a point of view. In science, this point of view is usually determined by a scientific theory ; that is to say, we select from the infinite variety of facts, and from the infinite variety of aspects of facts, those facts and those aspects which are interesting because they are connected with some more or less preconceived scientific theory. A certain school of philosophers of scientific method have concluded from considerations such as these that science always argues in a circle, and 'that we find ourselves chasing our own tails', as Eddington puts it, since we can only get out of our factual experience what we have ourselves put into it, in the form of our theories. But this is not a tenable argument. Although it is, in general, quite true that we select only facts which have a bearing upon some preconceived theory, it is not true that we select only such facts as confirm the theory and, as it were, repeat it ; the method of science is rather to look out for facts which may refute the theory. This is what we call testing a theory - to see whether we cannot find a flaw in it. But although the facts are collected with an eye upon the theory, and will confirm it as long as the theory stands up to these tests, they are more than merely a kind of empty repetition of a preconceived theory. They confirm the theory only if they are the results of unsuccessful attempts to overthrow its predictions, and therefore a telling testimony in its favour. So it is, I hold, that possibility of overthrowing it, or its falsifiability, that constitutes the possibility of testing it, and therefore the scientific character of a theory ; and the fact that all tests of a theory are attempted falsifications of predictions derived with its help, furnishes the clue to scientific method. This view of scientific method is corroborated by the history of science, which shows that scientific theories are often overthrown by experiments, and that the overthrow of theories is indeed the vehicle of scientific progress. The contention that science is circular cannot be upheld.

But one element of this contention remains true ; namely, that all scientific descriptions of facts are highly selective, that they always depend upon theories. The situation can be best described by comparison with a searchlight (the 'searchlight theory of science', as I usually call it in contradistinction to the 'the bucket theory of the mind'). What the searchlight makes visible will depend upon its position, upon our way of directing it, and upon its intensity, colour, etc. ; although it will, of course, also depend very largely upon the things illuminated by it. Similarly, a scientific description will depend, largely, upon our point of view, our interests, which are as a rule connected with the theory or hypothesis we wish to test ; although it will also depend upon the facts described. Indeed, the theory or hypothesis could be described as the crystallization of a point of view. For if we attempt to formulate our point of view, then this formulation will, as a rule, be what one sometimes calls a working hypothesis ; that is to say, a provisional assumption whose function is to help us to select, and to order, the facts. But we should be clear that there cannot be any theory or hypothesis which is not, in this sense, a working hypothesis, and does not remain one (이 문장은 we should be clear that절의 문장을 써서 보통 영어에서 쓰지 않는 구문을 썼다. 올바른 영어표현이 아니다. - 역자 주). For no theory is final, and every theory helps us to select and order facts. This selective character of all description makes it in a certain sense 'relative' ; but only in the sense that we would offer not this but another description, if our point of view were different. It may also affect our belief in the truth of the description ; but it does not affect the question of the truth or falsity of the description ; truth is not 'relative' in this sense.

The reason why all description is selective is, roughly speaking, the infinite wealth and variety of the possible aspects of the facts of our world. In order to describe this infinite wealth, we have at our disposal only a finite number of finite series of word. Thus we may describe as long as we like : our description will always be incomplete, a mere selection, and a small one at that, of the facts which present themselves for description. This shows that it is not only impossible to avoid a selective point of view, but also wholly undesirable to attempt to do so ; for if we could do so, we should get not a more 'objective' description, but only a mere heap of entirely unconnected statements. But, of course, a point of view is inevitable ; and the naive attempt to avoid it can only lead to self-deception, and to the uncritical application of an unconscious point of view. All this is true, most emphatically, in the case of historical description, with its 'infinite subject matter', as Schopenhauer calls it. Thus in history no less than in science, we cannot avoid a point of view ; and the belief that we can must lead to self-deception and to lack of critical care. This does not mean, of course, that we are permitted to falsify anything, or to take matters of truth lightly. Any particular historical description of facts will be simply true or false, however difficult it may be to decide upon its truth or falsity.

So far, the position of history is analogous to that of the natural sciences, for example, that of physics. But if we compare the part played by a 'point of view' in history with that played by a 'point of view' in physics, then we find a great difference. In physics, as we have seen, the 'point of view' is usually presented by a physical theory which can be tested by searching for new facts. In history, the matter is not quite so simple.

II

Let us first consider a little more closely the role of the theories in a natural science such as physics. Here, theories have several connected tasks. They help to unify science, and they help to explain as well as to predict events. Regarding explanation and prediction, I may perhaps quote from one of my own publication : 'To give a causal explanation of a certain event means to derive deductively a statement (it will be called a prognosis) which describes that event, using as premises of the deduction some universal laws together with certain singular or specific sentences which we may call initial conditions. For example, we can say that we have given a causal explanation of the breaking of a certain tread if we find that this thread was capable of carrying one pound only, and that a weight of two pounds was put on it. If we analyse this causal explanation, then we find that two different constituents are involved in it. (1) We assume some hypotheses of the character of universal laws of nature ; in our case, perhaps : "Whenever a certain thread undergoes a tension exceeding a certain maximum tension which is characteristic for that particular thread, then it will break." (2) We assume some specific statements (the initial conditions) pertaining to the particular event in question ; in our case, we may have the two statements : "For this thread, the characteristic maximum tension at which it is liable to break is equal to a one-pound weight" and "The weight put on this thread was a two-pound weight." Thus we have two different kinds of statements which together yield a complete causal explanation, viz. : (1) universal statements of the character of natural laws, and (2) specific statements pertaining to the special case in question, the initial conditions. Now from the universal laws (1), we can deduce with the help of the initial conditions (2) the following specific statement (3) : "This thread will break." This conclusion (3) we may also call a specific prognosis. - The initial conditions (or more precisely, the situation described by them) are usually spoken of as the cause of the event in question, and the prognosis (or rather, the event described by the prognosis) as the effect : for example, we say that the putting of a weight of two pounds on a thread capable of carrying one pound only was the cause of the breaking of the thread.'

From this analysis of causal explanation, we can see several things. one is that we can never speak of cause and effect in an absolute way, but that an event is a cause of another event, which is its effect, relative to some universal law. However, these universal laws are very often so trivial (as in our own example) that as a rule we take them for granted, instead of making conscious use of them. A second point is that the use of a theory for the purpose of predicting some specific event is just another aspect of its use for the purpose of explaining such an event. And since we test a theory by comparing the events predicted with those actually observed, our analysis also shows how theories can be tested. Whether we use a theory for the purpose of explanation, or prediction, or of testing, depends on our interest, and on what propositions we take as given or assumed.

Thus in the case of the so-called theoretical or generalizing sciences (Such as physics, biology, sociology, etc.) we are predominantly interested in the universal laws or hypotheses. We wish to know whether they are true, and since we can never directly make sure of their truth, we adopt the method of eliminating the false one. Our interest in the specific events, for example in experiments which are described by the initial conditions and prognoses, is somewhat limited ; we are interested in them mainly as means to certain ends, means by which we can test the universal laws, which latter are considered as interesting in themselves, and as unifying our knowledge.

In the case of applied sciences, our interest is different. The engineer who uses physics in order to build a bridge is predominantly interested in a prognosis : whether or not a bridge of a certain kind described (by the initial conditions) will carry a certain load. For him, the universal laws are means to an end and taken for granted.

Accordingly, pure and applied generalizing sciences are respectively interested in testing universal hypotheses, and in predicting specific events. But there is a further interest, that in explaining a specific or particular event. If we wish to explain such an event, for example, a certain road accident, then we usually tacitly assume a host of rather trivial universal laws (such as that a bone breaks under a certain strain, or that any motor-car colliding in a certain way with any human body will exert a strain sufficient to break a bone, etc.), and are interested, predominantly, in the initial conditions or in the cause which, together with these trivial universal laws, would explain the event in question. We then usually assume certain initial conditions hypothetically, and attempt to find some further evidence in order to find out whether or not these hypothetically assumed initial conditions are true ; that is to say, we test these specific hypotheses by deriving from them (with the help of some other and usually equally trivial universal laws) new predictions which can be confronted with observable facts.

Very rarely do we find ourselves in the position of having to worry about the universal laws involved in such an explanation. It happens only when we observe some new or strange kind of event, such as an unexpected chemical reaction. If such an event gives rise to the framing and testing of new hypotheses, then it is interesting mainly from the point of view of some generalizing science. But as a rule, if we are interested in specific events and their explanation, we take for granted all the many universal laws which we need.

Now the sciences which have this interest in specific events and in their explanation may, in contradistinction to the generalizing sciences, be called the historical sciences.

This view of history makes it clear why so many students of history and its method insist that it is the particular event that interests them, and not any so-called universal historical laws. For from our point of view, there can be no historical laws. Generalizing belongs simply to a different line of interest, sharply to be distinguished from that interest in specific events and their causal explanation which is the business of history. Those who are interested in laws must turn to the generalizing sciences (for example, to sociology). Our view also makes it clear why history has so often been described as 'the events of the past as they actually did happen'. This description brings out quite well the specific interest of the student of history, as opposed to a student of a generalizing science, even though we shall have to raise certain objections against it. And our view explains why, in history, we are confronted, much more than in the generalizing sciences, with the problems of its 'infinite subject matter'. For the theories or universal laws of generalizing science introduce unity as well as a 'point of view' ; they create, for every generalizing science, its problems, and its centres of interest as well as of research, of logical construction, and of presentation. But in history we have no such unifying theories ; or, rather, the host of trivial universal laws we use are taken for granted ; they are practically without interest, and totally unable to bring order into the subject matter. If we explain, for example, the first division of Poland in 1772 by pointing out that it could not possibly resist the combined power of Russia, Prussia, and Austria, then we are tacitly using some trivial universal law such as : 'If of two armies which are about equally well armed and led, one has a tremendous superiority in men, then the other never wins.' (Whether we say here 'never' or 'hardly ever' does not make, for our purposes, as such difference as it does for the Captain of H.M.S. Pinafore.) Such a law might be described as a law of the sociology of military power ; but it is too trivial ever to raise a serious problem for the students of sociology, or to arouse their attention. Or if we explain Caesar's decision to cross the Rubicon by his ambition and energy, say, then we are using some very trivial psychological generalizations which would hardly ever arouse the attention of a psychologist. (As a matter of fact, most historical explanation makes tacit use, not so much of trivial sociological and psychological laws, but of what I have called, in chapter 14, the logic of the situation ; that is to say, besides the initial conditions describing personal interests, aims, and other situational factors, such as the information available to the person concerned, it tacitly assumes, as a kind of first approximation, the trivial general law that sane persons as a rule act more or less rationally.)

III

We see, therefore, that those universal laws which historical explanation uses provide no selective and unifying principle, no 'point of view' for history. In a very limited sense such a point of view may be provided by confining history to a history of something ; examples are the history of power politics, or of economic relations, or of technology, or of mathematics. But as a rule, we need further selective principles, points of view which are at the same time centres of interest. Some of these are provided by preconceived ideas which in some way resemble universal laws, such as the idea that what is important for history is the character of the 'Great Men', or the 'national character', or moral ideas, or economic conditions, etc. Now it is important to see that many 'historical theories' (they might perhaps be better described as 'quasi-theories') are in their character vastly different from scientific theories. For in history (including the historical natural sciences such as historical geology) the facts at our disposal are often severely limited and cannot be repeated or implemented at our will. And they have been collected in accordance with a preconceived point of view ; the so-called 'sources' of history record only such facts as appeared sufficiently interesting to record, so that the sources will often contain only such facts as fit in with preconceived theory. And if no further facts are available, it will often not be possible to test this theory or any other subsequent theory. Such untestable historical theories can then rightly be charged with being circular in the sense in which this charge has been unjustly brought against scientific theories. I shall call such historical theories, in contradistinction to scientific theories, 'general interpretations'.

Interpretations are important since they represent a point of view. But we have seen that a point of view is always inevitable, and that, in history, a theory which can be tested and which is therefore of scientific character can only rarely be obtained. Thus we must not think that a general interpretation can be confirmed by its agreement even with all our records ; for we must remember its circularity, as well as the fact that there will always be a number of other (and perhaps incompatible) interpretations that agree with the same records, and that we can rarely obtain new data able to serve as do crucial experiments in physics. Historians often do not see any other interpretation which fits the facts as well as their own does ; but if we consider that even in the field of physics, with its larger and more reliable stock of facts, new crucial experiments are needed again and again because the old ones are all in keeping with both of two competing and incompatible theories (consider the eclipse-experiment which is needed for deciding between Newton's and Einstein's theories of gravitation), then we shall give up the naive belief that any definite set of historical records can ever be interpreted in one way only.

But this does not mean, of course, that all interpretations are of equal merit. First, there are always interpretations which are not really in keeping with the accepted records ; secondly, there are some which need a number of more or less plausible auxiliary hypotheses if they are to escape falsification by the records ; next, there are some that are unable to connect a number of facts which another interpretation can connect, and in so far 'explain'. There may accordingly be a considerable amount of progress even within the field of historical interpretation. Furthermore, there may be all kinds of intermediate stages between more or less universal ‘points of view' and those specific or singular historical hypotheses mentioned above, which in the explanation of historical events play the role of hypothetical initial conditions rather than of universal laws. Often enough, these can be tested fairly well and are therefore comparable to scientific theories. But some of these specific hypotheses closely resemble those universal quasi-theories which I have called interpretations, and may accordingly be classed with these, as 'specific interpretations'. For the evidence in favour of such a specific interpretation is often enough just as circular in character as the evidence in favour of some universal 'point of view'. For example, our only authority may give us just that information regarding certain events which fits with his own specific interpretation. Most specific interpretations of these facts we may attempt will then be circular in the sense that they must fit in with that interpretation which was used in the original selection of facts. If, however, we can give to such material an interpretation which radically deviates from that adopted by our authority (and this is certainly so, for example, in our interpretation of Plato's work), then the character of our interpretation may perhaps take on some semblance to that of a scientific hypothesis. But fundamentally, it is necessary to keep in mind the fact that it is a very dubious argument in favour of a certain interpretation that it can be easily applied, and that it explains all we know ; for only if we can look out for counter examples can we test a theory. (This point is nearly always overlooked by the admirers of the various 'unveiling philosophies', especially by the psycho-, socio-, and historio-analysts ; they are often seduced by the ease with which their theories can be applied everywhere.)

I said before that interpretations may be incompatible ; but as long as we consider them merely as crystallizations of points of view, then they are not. For example, the interpretation that man steadily progresses (toward the open society or some other aim) is incompatible with the interpretation that he steadily slips back or retrogresses. But the 'point of view' of one who looks on human history as a history of progress is not necessarily incompatible with that of one who looks on it as a history of retrogression ; that is to say, we could write a history of human progress towards freedom (containing, for example, the story of the fight against slavery) and another history of human retrogression and oppression (containing perhaps such things as the impact of the white race upon the coloured races) ; and these two histories need not be in conflict ; rather, they may be complementary to each other, as would be two views of the same landscape seen from two different points. This consideration is of considerable importance. For since each generation has its own troubles and problems, and therefore its own interests and its own point of view, it follows that each generation has a right to look upon and re-interpret history in its own way, which is complementary to that of previous generations. After all, we study history because we are interested in it, and perhaps because we wish to learn something about our own problems. But history can serve neither of these two purposes if, under the influence of an inapplicable idea of objectivity, we hesitate to present historical problems from our point of view. And we should not think that our point of view, if consciously and critically applied to the problem, will be inferior to that of a writer who naively believes that he does not interpret, and that he has reached a level of objectivity permitting him to present 'the events of the past as they actually did happen'. (This is why I believe that even such admittedly personal comments as can be found in this book are justified, since they are in keeping with historical method.) The main thing is to be conscious of one's point of view, and critical, that is to say, to avoid, as far as this is possible, unconscious and therefore uncritical bias in the presentation of the facts. In every other respect, the interpretation must speak for itself ; and its merits will be its fertility, its ability to elucidate the facts of history, as well as its topical interest, its ability to elucidate the problems of the day.

To sum up, there can be no history of 'the past as it actually did happen' ; there can only be historical interpretations, and none of them final ; and every generation has a right to frame its own. But not only has it a right to frame its own interpretations, it also has a kind of obligation to do so ; for there is indeed a pressing need to be answered. We want to know how our troubles are related to the past, and we want to see the line along which we may progress towards the solution of what we feel, and what we choose, to be our main tasks It is this need which, if not answered by rational and fair means, produces historicist interpretations. Under its pressure the historicist substitutes for a rational question : 'What are we to choose as our most urgent problems, how did they arise, and along what roads may we proceed to solve them ?' the irrational and apparently factual question : 'Which way are we going ? What, in essence, is the part that history has destined us to play ?'

But am I justified in refusing to the historicist the right to interpret history in his own way ? Have I not just proclaimed that anybody has such a right ? My answer to this question is that historicist interpretations are of a peculiar kind. Those interpretations which are needed, and justified, and one or other of which we are bound to adopt, can, I have said, be compared to a searchlight. We let it play upon our past, and we hope to illuminate the present by its reflection. As opposed to this, the historicist interpretation may be compared to a searchlight which we direct upon ourselves. It makes it difficult if not impossible to see anything of our surroundings, and it paralyses our actions. To translate this metaphor, the historicist does not recognize that it is we who select and order the facts of history, but he believes that 'history itself', or the 'history of mankind', determines, by its inherent laws, ourselves, our problems, our future, and even our point of view. Instead of recognizing that historical interpretation should answer a need arising out of the practical problems and decisions which face us, the historicist believes that in our desire for historical interpretation, there expresses itself the profound intuition that by contemplating history we may discover the secret, the essence of human destiny. Historicism is out to find The Path on which mankind is destined to walk ; it is out to discover The Clue to History (as J. Macmurray calls it), or The Meaning of History.

IV

But is there such a clue ? Is there a meaning in history ?

I do not wish to enter here into the problem of the meaning of 'meaning' ; I take it for granted that most people know with sufficient clarity what they mean when they speak of the 'meaning of history' or of the 'meaning or purpose of life'. And in this sense, in the sense in which the question of the meaning of history is asked, I answer : History has no meaning.

In order to give reasons for this opinion, I must first say something about that 'history' which people have in mind when they ask whether it has meaning. So far, I have myself spoken about 'history' as if it did not need any explanation. That is no longer possible ; for I wish to make it clear that 'history' in the sense in which most people speak of it simply does not exist ; and this is at least one reason why I say that it has no meaning.

How does most people come to use the term 'history' ? (I mean 'history' in the sense in which we say of a book that it is about the history of Europe - not in the sense in which we say that it is a history of Europe.) They learn about it in school and at the University. They read books about it. They see what is treated in the books under the name 'history of the world' or 'the history of mankind', and they get used to looking upon it as a more or less definite series of facts. And these facts constitute, they believe, the history of mankind.

But we have already seen that the realm of facts is infinitely rich, and that there must be selection. According to our interests, we could, for instance, write about the history of art ; or of language ; or of feeding habits ; or of typhus fever (see Zinsser's Rats, Lice, and History). Certainly, none of these is the history of mankind (nor all of them taken together). What people have in mind when they speak of the history of mankind is, rather, the history of the Egyptian, Babylonian, Persian, Macedonian, and Roman empires, and so on, down to our own day. In other words : They speak about the history of mankind, but what they mean, and what they have learned about in school, is the history of political power.

There is no history of mankind, there is only an indefinite number of histories of all kinds of aspects of human life. And one of these is the history of political power. This is elevated into the history of the world. But this, I hold, is an offence against every decent conception of mankind. It is hardly better than to treat the history of embezzlement or of robbery or of poisoning as the history of mankind. For the history of power politics is nothing but the history of international crime and mass murder (including, it is true, some of the attempts to suppress them). This history is taught in schools, and some of the greatest criminals are extolled as its heroes.

But is there really no such thing as a universal history in the sense of a concrete history of mankind ? There can be none. This must be the reply of every humanitarian, I believe, and especially that of every Christian. A concrete history of mankind, if there were any, would have to be the history of all men. It would have to be the history of all human hopes, struggles, and sufferings. For there is no one man more important than any other. Clearly, this concrete history cannot be written. We must make abstractions, we must neglect, select. But with this we arrive at the many histories ; and among them, at that history of international crime and mass murder which has been advertised as the history of mankind.

But why has just the history of power been selected, and not, for example, that of religion, or of poetry ? There are several reasons. one is that power affects us all, and poetry only a few. Another is that men are inclined to worship power. But there can be no doubt that the worship of power is one of the worst kinds of human idolatries, a relic of the time of the cage, of human servitude. The worship of power is born of fear, an emotion which is rightly despised. A third reason why power politics has been made the core of 'history' is that those in power wanted to be worshipped and could enforce their wishes. Many historians wrote under the supervision of the emperors, the generals, and the dictators.

I know that these views will meet with the strongest opposition from many sides, including some apologists for Christianity ; for although there is hardly anything in the New Testament to support this doctrine, it is often considered a part of the Christian dogma that God reveals Himself in history ; that history has meaning ; and that its meaning is the purpose of God. Historicism is thus held to be a necessary element of religion. But I do not admit this. I contend that this view is pure idolatry and superstition, not only from the point of view of a rationalist or humanist but from the Christian point of view itself.

What is behind this theistic historicism ? With Hegel, it looks upon history - political history - as a stage, or rather, as a kind of lengthy Shakespearian play ; and the audience conceive either the 'great historical personalities', or mankind in the abstract, as the heroes of the play. Then they ask, 'Who has written this play ?' And they think that they give a pious answer when they reply, 'God'. But they are mistaken. Their answer is pure blasphemy, for the play was (and they know it) written not by God, but, under the supervision of generals and dictators, by the professors of history.

I do not deny that it is as justifiable to interpret history from a Christian point of view as it is to interpret it from any other point of view ; and it should certainly be emphasized, for example, how much of our Western aims and ends, humanitarianism, freedom, equality, we owe to the influence of Christianity. But at the same time, the only rational as well as the only Christian attitude even towards the history of freedom is that we are ourselves responsible for it, in the same sense in which we are responsible for what we make of our lives, and that only our conscience can judge us and not our worldly success. The theory that God reveals Himself and His judgement in history is indistinguishable from the theory that worldly success is the ultimate judge and justification of our actions ; it comes to the same thing as the doctrine that history will judge, that is to say, that future might is right ; it is the same as what I have called 'moral futurism'. To maintain that God reveals Himself in what is usually called 'history', in the history of international crime and of mass murder, is indeed blasphemy ; for what really happens within the realm of human lives is hardly ever touched upon by this cruel and at the same time childish affair. The life of the forgotten, of the unknown individual man ; his sorrows and his joys, his suffering and death, this is the real content of human experience down the ages. If that could be told by history, then I should certainly not say that it is blasphemy to see the finger of God in it. But such a history does not and cannot exist ; and all the history which exists, our history of the Great and the Powerful, is at best a shallow comedy ; it is the opera buffa played by the powers behind reality (comparable to Homer's opera buffa of the Olympian powers behind the scene of human struggles). It is what one of our worst instincts, the idolatrous worship of power, of success, has led us to believe to be real. And in this not even man-made, but man-faked 'history', some Christians dare to see the hand of God ! They dare to understand and to know what He wills when they impute to Him their petty historical interpretations ! 'on the contrary', says K. Barth, the theologian, in his Credo, 'we have to begin with the admission .. that all that we think we know when we say "God" does not reach or comprehend Him .., but always one of our self-conceived and self-made idols, whether it is "spirit" or "nature", "fate" or "idea" .. ' (It is in keeping with this attitude that Barth characterizes the 'Neo-Protestant doctrine of the revelation of God in history' as 'inadmissible' and as an encroachment upon 'the kingly office of Christ'.) But it is, from the Christian point of view, not only arrogance that underlies such attempts ; it is, more specifically, an anti-Christian attitude. For Christianity teaches, if anything, worldly success is not decisive. Christ 'suffered under Pontius Pilate'. I am quoting Barth again : 'How does Pontius Pilate get into the Credo ? The simple answer can at once be given : it is a matter of date.' Thus the man who was successful, who represented the historical power of that time, plays here the purely technical role of indicating when these events happened. And what were these events ? They had nothing to do with power-political success, with 'history'. They were not even the story of an unsuccessful non-violent nationalist revolution (a la Gandhi) of the Jewish people against the Roman conquerors. The events were nothing but the sufferings of a man. Barth insists that the word 'suffers' refers to the whole of the life of Christ and not only to the His death ; he says : 'Jesus suffers. Therefore He does not conquer. He does not triumph. He has no success .. He achieved nothing except .. His crucifixion. The same could be said of His relationship to His people and to His disciples.' My intention in quoting Barth is to show that it is not only my 'rationalist' or 'humanist' point of view from which the worship of historical success appears as incompatible with the spirit of Christianity. What matters to Christianity is not the historical deeds of the powerful Roman conquerers but (to use a phrase of Kierkegaard's) 'what a few fishermen have given the world' (이 문장에서 conquerors가 conquerers로 잘못 쓰였다. 원문의 오류다. - 역자 주). And yet all theistic interpretation of history attempts to see in history as it is recorded, i.e. in the history of power, and in historical success, the manifestation of God's will.

To this attack upon the 'doctrine of the revelation of God in history', it will probably be replied that it is success, His success after His death, by which Christ's unsuccessful life on earth was finally revealed to mankind as the greatest spiritual victory ; that it was the success, the fruits of His teaching which proved it and justified it, and by which the prophecy 'The last shall be first and the first last' has been verified. In other words, that it was the historical success of the Christian Church through which the will of God manifested itself. But this is a most dangerous line of defence. Its implication that the worldly success of the Church is an argument in favour of Christianity clearly reveals lack of faith. The early Christians had no worldly encouragement of this kind. (They believed that conscience must judge power, and not the other way round.) Those who hold that the history of the success of Christian teaching reveals the will of God should ask themselves whether this success was really a success of the spirit of Christianity ; and whether this spirit did not triumph at the time when the Church was persecuted, rather than at the time when the Church was triumphant. Which Church incorporated this spirit more purely, that of the martyrs, or the victorious Church of the Inquisition ?

There seem to be many who would admit much of this, insisting as they do that the message of Christianity is to the meek, but who still believe that this message is one of historicism. An outstanding representative of this view is J. Macmurray, who, in The Clue to History, finds the essence of Christian teaching in historical prophecy, and who sees in its founder the discoverer of a dialectical law of 'human nature'. Macmurray holds that, according to this law, political history must inevitably bring forth 'the socialist commonwealth of the world. The fundamental law of human nature cannot be broken .. It is the meek who will inherit the earth.' But this historicism, with its substitution of certainty for hope, must lead to a moral futurism. 'The law cannot be broken.' So we can be sure, on psychological grounds, that whatever we do will lead to the same result ; that even fascism must, in the end, lead to that commonwealth ; so that the final outcome does not depend upon our moral decision, and that there is no need to worry over our responsibilities. If we are told that we can be certain, on scientific grounds, that 'the last will be first and the first last', what else is this but the substitution of historical prophecy for conscience ? Does not this theory come dangerously close (certainly against the intentions of its author) to the admonition : 'Be wise, and take to heart what the founder of Christianity tells you, for he was a great psychologist of human nature and a great prophet of history. Climb in time upon the band-waggon of the meek ; for according to the inexorable scientific laws of human nature, this is the surest way to come out on top !' Such a clue to history implies the worship of success ; it implies that the meek will be justified because they will be on the winning side. It translates Marxism, and especially what I have described as Marx's historicist moral theory, into the language of a psychology of human nature, and of religious prophecy. It is an interpretation which, by implication, sees the greatest achievement of Christianity in the fact that its founder was a forerunner of Hegel - a superior one, admittedly.

My insistence that success should not be worshipped, that it cannot be our judge, and that we should not be dazzled by it, and in particular, my attempts to show that in this attitude I concur with what I believe to be the true teaching of Christianity, should not be misunderstood. They are not intended to support the attitude of 'other-worldliness' which I have criticized in the last chapter. Whether Christianity is other-worldly, I do not know, but it certainly teaches that the only way to prove one's faith is by rendering practical (and worldly) help to those who need it. And it is certainly possible to combine an attitude of the utmost reserve and even of contempt towards worldly success in the sense of power, glory, and wealth, with the attempt to do one's best in this world, and to further the ends one has decided to adopt with the clear purpose of making them succeed ; not for the sake of success or of one's justification by history, but for their own sake.

A forceful support of some of these views, and especially of the incompatibility of historicism and Christianity, can be found in Kierkegaard's criticism of Hegel. Although Kierkegaard never freed himself entirely from the Hegelian tradition in which he was educated, there was hardly anybody who recognized more clearly what Hegelian historicism meant. 'There were', Kierkegaard wrote, 'philosophers who tried, before Hegel, to explain .. history. And providence could only smile when it saw these attempts. But providence did not laugh outright, for there was a human, honest sincerity about them. But Hegel - ! Here I need Homer's language. How did the gods roar with laughter ! Such a horrid little professor who has simply seen through the necessity of anything and everything there is, and who now plays the whole affair on his barrel-organ : listen, ye gods of Olympus !’ And Kierkegaard continues, referring to the attack by the atheist Schopenhauer upon the Christian apologist Hegel : 'Reading Schopenhauer has given me more pleasure than I can express. What he says is perfectly true ; and then - it serves the Germans right - he is as rude as only a German can be.' But Kierkegaard's own expressions are nearly as blunt as Schopenhauer's ; for Kierkegaard goes on to say that Hegelianism, which he calls 'this brilliant spirit of putridity', is the 'most repugnant of all forms of looseness' ; and he speaks of its 'mildew of pomposity', its 'intellectual voluptuousness', and its 'infamous splendour of corruption'.

And, indeed, our intellectual as well as our ethical education is corrupt. It is perverted by the admiration of brilliance, of the way things are said, which takes the place of a critical appreciation of the things that are said (and the things that are done). It is perverted by the romantic idea of the splendour of the stage of History on which we are the actors. We are educated to act with an eye to the gallery.

The whole problem of educating man to a sane appreciation of his own importance relative to that of other individuals is thoroughly muddled by these ethics of fame and fate, by a morality which perpetuates an educational system that is still based upon the classics with their romantic view of the history of power and their romantic tribal morality which goes back to Heraclitus ; a system whose ultimate basis is the worship of power. Instead of a sober combination of individualism and altruism (to use these labels again) - that is to say, instead of a position like 'What really matters are human individuals, but I do not take this to mean that it is I who matter very much' - a romantic combination of egoism and collectivism is taken for granted. That is to say, the importance of the self, of its emotional life and its 'self-expression', is romantically exaggerated ; and with it, the tension between the 'personality' and the group, the collective. This takes the place of the other individuals, the other men, but does not admit of reasonable personal relations. 'Dominate or submit' is, by implication, the device of this attitude ; either be a Great Man, a Hero wrestling with fate and earning fame ('the greater the fall, the greater the fame', says Heraclitus), or belong to 'the masses' and submit yourself to leadership and sacrifice yourself to the higher cause of your collective. There is a neurotic, an hysterical element in this exaggerated stress on the importance of the tension between the self and the collective, and I do not doubt that this hysteria, this reaction to the strain of civilization, is the secret of the strong emotional appeal of the ethics of hero-worship, of the ethics of domination and submission.

At the bottom of all this there is a real difficulty. While it is fairly clear (as we have seen in chapters 9 and 24) that the politician should limit himself to fighting against evils, instead of fighting for 'positive' or 'higher' values, such as happiness, etc., the teacher, in principle, is in a different position. Although he should not impose his scale of 'higher' values upon his pupils, he certainly should try to stimulate their interest in these values. He should care for the souls of his pupils. (When Socrates told his friends to care for their souls, he cared for them.) Thus there is something like a romantic or aesthetic element in education, such as should not enter politics. But although this is true in principle, it is hardly applicable to our educational system. For it presupposes a relation of friendship between teacher and pupil, a relation which, as emphasized in chapter 24, each party must be free to end (Socrates chose his companions, and they him.) The very number of pupils makes all this impossible in our schools. Accordingly, attempts to impose higher values not only become unsuccessful, but it must be insisted that they lead to harm - to something much more concrete and public than the ideals aimed at. And the principle that those who are entrusted to us must, before anything else, not be harmed, should be recognized to be just as fundamental for education as it is for medicine. 'Do no harm' (and, therefore, 'give the young what they most urgently need, in order to become independent of us, and to be able to choose for themselves') would be a very worthy aim for our educational system, and one whose realization is somewhat remote, even though it sounds modest. Instead, 'higher' aims are the fashion, aims which are typically romantic and indeed nonsensical, such as 'the full development of the personality'.

It is under the influence of such romantic ideas that individualism is still identified with egoism, as it was by Plato, and altruism with collectivism. (i.e. with the substitution of group egoism for the individualist egoism). But this bars the way even to a clear formulation of the main problem, the problem of how to obtain a sane appreciation of one's own importance in relation to other individuals. Since it is felt, and rightly so, that we have to aim at something beyond our own selves, something to which we can devote ourselves, and for which we may make sacrifices, it is concluded that this must be the collective, with its 'historical mission'. Thus we are told to make sacrifices, and, at the same time, assured that we shall make an excellent bargain by doing so. We shall make sacrifices, it is said, but we shall thereby obtain honour and fame. We shall become 'leading actors', heroes on the Stage of History ; for a small risk we shall gain great rewards. This is the dubious morality of a period in which only a tiny minority counted, and in which nobody cared for the common people. It is the morality of those who, being political or intellectual aristocrats, have a chance of getting into the textbooks of history. It cannot possibly be the morality of those who favour justice and equalitarianism ; for historical fame cannot be just, and it can be attained only by a very few. The countless number of men who are just as worthy, or worthier, will always be forgotten.

It should perhaps be admitted that the Heraclitean ethics, the doctrine that the higher reward is that which only posterity can offer, may in some way perhaps be slightly superior to an ethical doctrine which teaches us to look out for reward now. But it is not what we need. We need an ethics which defies success and reward. And such an ethics need not be invented. It is not new. It has been taught by Christianity, at least in its beginnings. It is, again, taught by the industrial as well as by the scientific co-operation of our own day. The romantic historicist morality of fame, fortunately, seems to be on the decline. The Unknown Soldier shows it. We are beginning to realize that sacrifice may mean just as much, or even more, when it is made anonymously. Our ethical education must follow suit. We must be taught to do our work ; to make our sacrifice for the sake of this work, and not for praise or the avoidance of blame. (The fact that we all need some encouragement, hope, praise, and even blame, is another matter altogether.) We must find our justification in our work, in what we are doing ourselves, and not in a fictitious 'meaning of history'.

History has no meaning, I contend. But this contention does not imply that all we can do about it is to look aghast at the history of political power, or that we must look on it as a cruel joke. For we can interpret it, with an eye to those problems of power politics whose solution we choose to attempt in our time. We can interpret the history of power politics from the point of view of our fight for the open society, for a rule of reason, for justice, freedom, equality, and for the control of international crime. Although history has no ends, we can impose these ends of ours upon it ; and although history has no meaning, we can give it a meaning.

It is the problem of nature and convention which we meet here again. Neither nature nor history can tell us what we ought to do. Facts, whether those of nature or those of history, cannot make the decision for us, they cannot determine the ends we are going to choose. It is we who introduce purpose and meaning into nature and into history. Men are not equal ; but we can decide to fight for equal rights. Human institutions such as the state are not rational, but we can decide to fight to make them more rational. We ourselves and our ordinary language are, on the whole, emotional rather than rational ; but we can try to become a little more rational, and we can train ourselves to use our language as an instrument not of self-expression (as our romantic educationists would say) but of rational communication. History itself - I mean the history of power politics, of course, not the non-existent story of the development of mankind - has no end nor meaning, but we can decide to give it both. We can make it our fight for the open society and against its enemies (who, when in a corner, always protest their humanitarian sentiments, in accordance with Pareto's advice) ; and we can interpret it accordingly. Ultimately, we may say the same about the 'meaning of life'. It is up to us to decide what shall be our purpose in life, to determine our ends.

This dualism of facts and decisions is, I believe, fundamental. Facts as such have no meaning ; they can gain it only through our decisions. Historicism is only one of many attempts to get over this dualism ; it is born of fear, for it shrinks from realizing that we bear the ultimate responsibility even for the standards we choose. But such an attempt seems to me to represent precisely what is usually described as superstition. For it assumes that we can reap where we have not sown ; it tries to persuade us that if we merely fall into step with history everything will and must go right, and that no fundamental decision on our part is required ; it tries to shift our responsibility on to history, and thereby on to the play of demoniac powers beyond ourselves ; it tries to base our actions upon the hidden intentions of these powers, which can be revealed to us only in mystical inspirations and intuitions ; and it thus puts our actions and ourselves on the moral level of a man who, inspired by horoscopes and dreams, chooses his lucky number in a lottery. Like gambling, historicism is born of our despair in the rationality and responsibility of our actions. It is a debased hope and a debased faith, an attempt to replace the hope and the faith that springs from our moral enthusiasm and the contempt for success by a certainty that springs from a pseudo-science ; a pseudo-science of the stars, or of 'human nature', or of historical destiny.

Historicism, I assert, is not only rationally untenable, it is also in conflict with any religion that teaches the importance of conscience. For such a religion must agree with the rationalist attitude towards history in its emphasis on our supreme responsibility for our actions, and for their repercussions upon the course of history. True, we need hope ; to act, to live without hope goes beyond our strength. But we do not need more, and we must not be given more. We do not need certainty. Religion, in particular, should not be a substitute for dreams and wish-fulfilment ; it should resemble neither the holding of a ticket in a lottery, nor the holding of a policy in an insurance company. The historicist element in religion is an element of idolatry, of superstition.

This emphasis upon the dualism of facts and decisions determines also our attitude towards such ideas as 'progress'. If we think that history progresses, or that we are bound to progress, then we commit the same mistake as those who believe that history has a meaning that can be discovered in it and need not be given to it. For to progress is to move towards some kind of end, towards an end which exists for us as human beings. 'History' cannot do that ; only we, the human individuals, can do it ; we can do it by defending and strengthening those democratic institutions upon which freedom, and with it progress, depends. And we shall do it much better as we become more fully aware of the fact that progress rests with us, with our watchfulness, with our efforts, with the clarity of our conception of our ends, and with the realism of their choice.

Instead of posing as prophets we must become the makers of our fate. We must learn to do things as well as we can, and to look out for our mistakes. And when we have dropped the idea that the history of power will be our judge, when we have given up worrying whether or not history will justify us, then one day perhaps we may succeed in getting power under control. In this way we may even justify history, in our turn. It badly needs a justification.

- "The Open Society and Its Enemies, Vol II Hegel and Marx", Karl R. Poppe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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