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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측과 논박 제 1장 과학

이윤진이카루스 2010. 7. 31. 19:24

                       추측

 

 

 

어떤 ... 이론의 가장 공정한 운명은 아마도, 보다 포괄적인 이론 안에서 제한적 경우로서 지속적으로 살아가면서, 그 포괄적인 이론에게 길을 열러주는 것이리라.

앨버트 아인슈타인

 

 

 

 

                    1

 

 

           과학: 추측과 논박

 

 

 

턴불 씨는 사악한 결과를 예언했으며, ... 자신의 예언을

증명하기 위하여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앤서니 트럴럽(Anthony Trollope)

 

 

 

 

1

내가 이 강연의 참석자 명단을 받고 철학관련 동료들에게 강연하는 요청을 받았음을 깨달았을 때, 잠시 망설이고 자문을 구한 다음에, 나의 관심을 가장 많이 끌었던 문제에 관하여, 그리고 내가 가장 익히 알고 있는 상황전개에 관하여 말하는 것을 여러분이 아마도 선호하리라고 나는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전에 한 적이 없는 일을 하기로 결심했다: ‘언제 이론은 과학적으로서 등급이 정해져야 하는가?’나 ‘이론의 과학적 특징이나 지위에 대한 기준이 있는가?’라는 문제와 내가 처음 씨름을 시작했던 1919년 가을 이래, 과학철학에서의 내 작업에 관한 보고를 여러분들에게 하는 것.

당시 나를 괴롭히던 문제는 ‘이론은 언제 사실인가?’도 아니고 ‘이론은 언제 수용될 수 있는가?’도 아니었다. 내가 가지고 있던 문제는 달랐다. 과학도 흔히 실수를 저지른다는 것과 사이비 과학도 우연히 진리를 발견할 것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과학과 사이비 과학을 구분하고 싶었다.

물론 나는 나의 문제에 대하여 가장 널리 수용되던 답변을 알고 있었다: 과학은 자체의 경험적 방법에 의하여 사이비 과학이나 ‘형이상학’과 구분되는데 경험적 방법은 관찰이나 실험으로부터 나오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귀납적이다. 반대로, 나는 나의 문제를 진정한 경험적 방법과 비(非)경험적이나 심지어 사이비-경험적 방법을 구분하는 문제로서 흔히 공식화했다 - 다시 말해서, 관찰과 실험의 도움을 받을지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학적 기준과 동등하지 않은 방법. 후자(後者)의 방법은 관찰에 토대를 둔 - 별자리와 전기(傳記)에 토대를 둔 - 엄청난 양의 경험적 증거로써, 점성술에 의하여 예시될는지도 모른다.

영국 문화 진흥회(British Council)에 의하여 기획된 현대 영국 철학의 발전과 경향에 관한 강연의 일부로서 1953년 여름 캠브리쥐의 피터하우스(Peterhouse)에서 행한 강연; 1957년 C. A. 메이스(Mace)가 편집한 금세기 중엽의 영국 철학(British Philosophy in Mid-century)에 원래 ‘과학철학: 개인적인 보고서’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음.

그러나 나의 문제로 나를 이끌어 갔던 것은 점성술이라는 사례가 아니었기 때문에 나는 아마도, 나의 문제가 출현했던 환경과 나의 문제가 자극을 받았던 사례들을 간단히 설명해야겠다. 오스트리아 제국이 붕괴한 다음에 오스트리아에는 혁명이 일어났다: 분위기는 혁명적 구호와 이념들과, 새롭고 흔히 격렬한 이론들로 가득 찼다. 나의 관심을 끌었던 이론들 가운데서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은 의심할 바 없이 단연코 가장 중요한 것이었다. 세 가지 다른 이론은 마르크스의 역사이론과 프로이트의 정신분석, 그리고 알프레드 아들러(Alfred Adler)의 소위 ‘개인 심리학’이었다. 이 이론들에 관하여, (심지어 오늘날에도 여전히 발생하는 바와 같이) 특히 상대성에 관하여 언급되는 인기 있는 많은 허튼소리가 있지만, 나를 이 이론의 연구로 소개했던 사람들 안에서 나는 운이 좋았다. 우리 모두는 - 내가 속했던 작은 학생단체 - 1919년에 아이슈타인의 중력이론을 최초로 중요하게 확증했던 에딩튼(Eddington)의 개기일식 관찰로 전율을 느꼈다. 그것은 우리들에게 훌륭한 경험이었고, 나의 지적(知的) 발전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친 경험이었다.

내가 언급한 세 가지 다른 이론들 또한 당시 학생들 사이에서 널리 토론되었다. 내 자신은 우연히 개인적으로 알프레드 아들러(Alfred Adler)와 접촉하게 되었고, 심지어 그가 사회 지도 진료소를 세웠던 비엔나의 노동계급 구역에 있는 아이들과 젊은이들 사이에서 그가 하는 사회사업에서 그와 협력하게 되었다.

내가 이 세 가지 이론에 - 마르크스의 역사이론, 정신분석, 그리고 개인 심리학 - 점점 더 불만족을 느끼기 시작한 것은 1919년 여름 동안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 이론들이 주장하는 과학적 지위에 관하여 의심하기 시작했다. 내가 지니고 있던 문제는 처음에는 아마도, ‘마르크스주의, 정신분석, 그리고 개인 심리학은 무엇이 잘못되었을까? 왜 그 이론들은 물리 이론과, 뉴튼의 이론과, 그리고 특히 상대성 이론과 다를까?’라는 간단한 형태를 띠고 있었다.

이 대비를 분명하게 하기 위하여 당시 우리가 아이슈타인의 중력이론이 지닌 진리를 믿었다고 말했던 사람은 거의 없다고 나는 설명해야 한다. 이것은 나를 괴롭혔던 것은 내가 저 다른 세 가지 이론들의 진리를 의심한 것이 아니라 다른 것이었음 보여준다. 그러나 이론의 사회학적이거나 심리학적 종류보다 수리 물리학이 더 정확하다고 내가 느꼈다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나를 괴롭혔던 것은, 적어도 그 단계에서, 진리의 문제도 아니고, 정확성이나 측정가능성의 문제도 아니었다. 나의 문제는 이 다른 세 가지 이론들이, 과학이라고 주장할지라도, 과학보다는 실제로 원시적 신화와 더 많은 것을 공유하고 있다고 내가 느꼈다는 점이다; 그 이론들이 천문학보다는 점성술을 닮았던 것.

마르크스, 프로이트, 그리고 아들러를 찬양하던 나의 친구들 몇몇은 이 이론들에게 공통적이던 몇 가지 요점에 의해서, 그리고 특히 그 이론들이 지니고 있던 피상적인 설명력(explanatory power)에 의하여 감명을 받았음을 나는 발견했다. 이 이론들은 자신들이 언급하는 분야 내부에서 발생한 모든 것을 실제로 설명할 수 있는 듯이 보였다. 아직 비결을 전수받지 못한 사람들에 감추어진 새로운 진리에 여러분의 눈을 뜨게 하면서, 이 이론들 중 어떤 이론을 연구하는 것은 지적(知的) 전환(intellectual conversion)이나 계시의 효과를 내는 듯하였다. 그렇게 여러분의 눈이 뜨이자말자 여러분은 도처에서 확증적인 사례를 보았다: 세상은 이론의 검증들로 가득 찼다. 발생하는 모든 것은 이론을 확증하였다. 그리하여 이론이 지닌 진리는 명백한 듯이 보였다; 그리고 그렇게 믿지 않는 사람들은 분명히 명백한 진리를 보고 싶지 않은 사람들이었다; 진리가 자신들의 계급의 이익에 반하기 때문이거나, 여전히 ‘분석되지 않아’서 처리를 소리 높이 요구하는 자신들이 받는 억압 때문에, 진리 보기를 거부하는 사람들.

이 상황에서 가장 특징적인 요소는 문제의 이론들은 ‘검증했던’ 확증의, 관찰의 끊임없는 흐름으로 나에게 느껴졌다; 그리고 이 요점은 그 이론들에 집착하는 사람들에 의하여 부단히 강조되었다. 마르크스주의자는 신문을 펼칠 때마다 자신의 역사 해석에 관한 확증적 증거를 발견할 수 있었다; 뉴스에서 뿐만 아니라 - 신문의 계급 편견을 드러냈던 - 뉴스의 기사화에서도 또한, 그리고 특히 물론 신문이 말하지 않았던 것에서도. 프로이트 분석가들은 자신들의 이론들이 자신들의 ‘임상 관찰’에 의하여 지속적으로 검증된다고 역설했다. 아들러(Adler)에 관해서, 나는 개인적 경험에 의하여 많은 감명을 받았다. 1919년에 한 번, 그가 아이를 본 적이 없을지라도, 특별히 그의 이론에 맞지 않는 듯이 나에게 보였지만 그가 어려움 없이 자신의 열등감 이론으로 분석했던 사례를 나는 아들러에게 보고했다. 약간 충격을 받고, 나는 어떻게 그가 그렇게 확신할 수 있는지를 그에게 물었다. ‘천 번이나 경험했기 때문이지’라고 그는 대답했다: 그 대답에 나는 이렇게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이 새로운 사례로써 당신의 경험은 천 번하고도 한 번이 더 되겠군요.’

내가 염두에 두고 있던 것은 그의 이전 관찰이 이 새로운 관찰보다 훨씬 더 완벽하지는 않았으리라는 것이었다; 각 관찰은 매번 ‘이전 경험’에 비추에 해석되었으며, 동시에 추가 확증으로 간주되었다는 것. 관찰은 무엇을 확증했다는 말인가? 하고 나는 자문했다. 이론에 비추어 한 사례가 해석될 수 있다는 것 이상이 아니다. 상상가능한 모든 사례가 아들러의 이론에 비추어서나, 혹은 동등하게 프로이트의 이론에 비추어 해석될 수 있기 때문에,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거의 없다고 나는 조심스럽게 생각했다. 인간의 행동에 관한 두 가지 매우 다른 보기로써 나는 이것을 예시할 것이다: 익사시키려는 의도로 물속으로 아이를 밀어 넣은 사람의 행동 보기; 그리고 아이를 구하려는 노력으로 자신의 삶은 희생하는 사람의 행동 보기. 이 두 경우 각각은 프로이트와 아들러의 이론에서 똑같이 쉽게 설명될 수 있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두 번째 사람은 승화(昇華)를 성취한 반면, 첫 번째 사람은 (가령, 프로이트가 주장하는 오디푸스 콤플렉스의 어떤 구성요소의) 억압으로 고통을 당했다. 아들러에 따르면 첫 번째 사람은 열등감으로 고통으로 당했다 (아마도 자신은 감히 범죄를 저지를 수 있음을 스스로에게 증명할 욕구를 초래하면서), 그리고 두 번째 사람도 그렇다 (그의 욕구는 자신이 감히 그 아이를 구함을 스스로에게 증명하는 것이었다). 나는 두 이론 중 한 이론으로써 해석될 수 없는 인간의 행동을 생각할 수 없었다. 그 이론들을 찬양하는 사람들의 눈 안에서 그 이론을 지지하는 강력한 주장을 구성했던 것은 바로 이 사실이었다 - 그 이론들이 항상 들어맞는다는 것, 그 이론들은 항상 확증된다는 것. 이 피상적인 힘이 실제로 그 이론들이 지닌 약점이라는 생각이 나에게 떠오르기 시작했다.

아인슈타인의 이론을 고찰하면 상황은 확연히 다르다. 에딩튼(Eddington)이 이끌던 탐사대의 발견에 의하여 당시에 확증된, 아인슈타인의 예측을 한 가지 전형적인 사례로 생각하라. 아이슈타인의 중력 이론은, 물체가 이끌리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빛도 틀림없이 (태양과 같은) 무거운 물체에 의하여 이끌린다는 결론을 낳았다. 결과적으로 보이는 위치가 태양에 가까운 먼 항성에서 나오는 빛은 그 별이 태양으로부터 다소 떨어진 듯이 보일 그런 방향으로부터 지구에 도달하는 것으로 계산될 수 있었다; 혹은 다시 말해서, 태양에 가까운 별들은 태양으로부터, 그리고 서로로부터 다소 떨어져서 움직였던 것처럼 보일 것이다. 그런 별들은 태양의 압도적인 빛에 의하여 대낮에는 보이지 않게 되기 때문에, 이것은 보통 관찰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일식 동안에는 그 별들의 사진을 찍는 것이 가능하다. 동일한 별자리가 밤에 촬영된다면 사람들은 두 장의 사진으로 거리를 측정하여, 예측된 효과를 조사할 수 있다.

이제 이 경우에서 인상적인 것은 이런 종류의 예측에 포함된 위험이다. 관찰로 인하여 예측된 효과가 명백하게 나타나지 않는 것으로 드러나면, 그 이론은 논박될 따름이다. 그 이론은 관찰로 인한 가능한 특정 결과와 양립할 수 없다 - 실제로 아인슈타인 이전에 모든 사람이 기대했을 결과와 양립할 수 없다.? 이것은, 문제의 이론들이 가장 분화적인 인간의 행동과 양립할 수 있어서 아마도 이 이론들의 검증이라고 주장될 수 없는 인간의 행동을 묘사하는 일이 실제로 불가능함이 판명되었을 때인, 내가 이전에 묘사했던 상황과 완전히 다르다. 이 고찰로 인하여 나는 1919-20년 겨울에 이제 내가 다음과 같이 공식화할 결론에 다다랐다.

(1) 거의 모든 이론에 관하여, 확증이나 검증을 얻어내는 일은 쉽다 - 우리가 확증을 찾는다면.

(2) 확증은 오직 위험한 예측의 결과라면 중요하다; 다시 말해서, 문제의 이론에 의하여 밝혀지지 못하여 이론과 양립할 수 없는 사건을 - 이 이론을 논박했을 사건 - 우리가 기대했어야 한다면.

(3) 모든 ‘훌륭한’ 과학이론은 금지(prohibition)이다: 훌륭한 과학 이론은 특정 사건이 발생하는 것을 금지한다. 이론이 많이 금지할수록, 그 이론은 더욱 훌륭하다.

(4) 상상될 수 있는 사건에 의하여 논박될 수 없는 이론은 비(非)과학적이다. 논박불가능성은 (사람들이 자주 생각하는 바와 같이) 이론의 장점이 아니라 단점이다.

(5) 이론에 대한 모든 참된 시험은 그 이론을 반증하려는, 즉 그 이론을 논박하려는 노력이다. 시험가능성은 논박가능성이다 ; 그러나 시험가능성의 정도(程度)가 있다: 어떤 이론들은 다른 이론들보다 더 시험이 가능하고, 더 논박에 노출되어 있다; 그 이론들은, 말하자면, 큰 위험을 안고 있다.

(6) 확증적 증거(confirming evidence)는 이론의 실제 시험의 결과일 때를 제외하고 중요시되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이것은 그 증거가 이론을 반증하려는 진지하지만 실패한 시도로서 제시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나는 지금 그런 경우에 ‘입증적 증거(corroborating evidence)’에 관하여 말한다 [성균관 대학의 이한구 교수는 confirm을 ‘입증’으로, corroborate를 ‘확증’이나 ‘확인’으로 번역하지만 이한구 교수와 반대로 번역함이 옳을 듯싶다. 즉 confirm을 ‘확증’이나 ‘확인’으로, corroborate를 ‘입증’으로 번역함이 더 나을 것이다. - 역자 주.].)

 

? 이것은 다소 과도한 단순화인데, 그 까닭은 아인슈타인 효과의 약 절반이, 우리가 빛의 탄도학적 이론(a ballistic theory of light[성균관 대학 이한구 교수는 빛의 입자설로 번역하는데 ‘빛의 탄도학적 이론’을 역자로서는 알 수 없다. - 역자 주.])을 상정(想定)한다면, 고전적 이론으로부터 유래할 것이기 때문이다.

 

(7) 진정으로 시험 가능한 몇몇 이론들은, 거짓으로 밝혀졌을 때, 그 이론을 신봉하는 사람들에 의하여 여전히 지지를 받는다 - 예를 들어 특별히 어떤 부수적 상정(想定)을 소개함으로써, 혹은 이론이 논박을 피하는 방식으로 이론을 특별히 재해석함으로써. 그런 과정은 항상 가능하지만, 이론의 과학적 지위를 파괴하거나 적어도 낮추는 대가를 치르고서야 논박으로부터 이론을 구해낸다. (나는 나중에 그런 구조 작전을 ‘관습적 왜곡[conventional twist]’나 ‘관습적 계략[conventional stratagem]’으로서 묘사했다.)

우리는 이론이 지니는 과학적 지위에 대한 기준은 그 이론의 반증가능성이나, 논박가능성이나, 시험가능성이라고 말함으로써 이 모든 것을 요약할 수 있다.

II

나는 아마도 이제까지 언급된 다양한 이론들의 도움을 받아 이것을 예시할 것이다. 아인슈타인의 중력 이론은 분명히 반증가능성이라는 기준을 충족시켰다. 당시 우리가 지니고 있던 측정 도구로써 우리가 완벽하게 확신하며 시험 결과를 선언할 수 없었다 할지라도, 그 이론을 논박할 가능성은 분명히 있었다.

점성술은 시험을 통과하지 못했다. 점성가들은 자신들이 확증적 증거라고 믿었던 것에 의하여 감명을 받았고, 오도되었다 - 불리한 증거에 의하여 그들이 철저히 감명을 받지 못하는 그런 정도로. 게다가, 자신들의 해석과 예언을 충분히 애매모호하게 만들어서, 이론과 예언이 더 정확했더라면 아마도 그 이론의 논박이었을 여하한 것도 그들은 설명해낼 수 있었다. 반증을 피하기 위하여 그들은 자신들의 이론에 관한 시험가능성을 없앴다. 사건을 매우 모호하게 예언해서 예언이 거의 실패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전형적인 점쟁이들의 계략이다: 예언들이 논박될 수 없도록 하는 것.

마르크스의 역사 이론은, 그 창시자와 추종자들 몇몇의 진지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궁극적으로 이 점술적 관행을 채택했다. 그 이론의 초기 공식 몇 가지에는 (예를 들어 마르크스의 ‘다가오는 사회혁명’의 특징 분석에서) 그 공식의 예측은 시험 가능했고, 실제로 반증되었다. ? 그러나 반증을 수용하는 대신에 마르크스의 추종자들은 이론과 증거가 일치되도록 만들기 위하여 이론과 증거를 재해석했다. 이런 방식으로 그들은 이론을 논박으로부터 구해냈다; 그러나 그들은 이론을 논박 불가능하게 만드는 장치를 채택하는 대가를 치르고서 그렇게 했다. 그리하여 그들은 이론에 ‘관습적 왜곡’을 부여했다; 그리하여 이 계략으로써 그들은 그 이론이 지녔던 많이 선전된 과학적 지위에 대한 주장을 파괴했다.

두 가지 정신분석 이론들은 다른 등급에 속했다. 그 이론들은 단지 시험될 수 없었고 논박이 불가능했다. 그 이론들을 반대할 수 있었던 상상 가능한 인간의 행동은 없었다. 이것은 프로이트와 아들러(Adler)가 어떤 일들을 바르게 보고 있지 않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나는 개인적으로 그들이 말하는 많은 것이 상당한 중요성을 지녀서, 시험될 수 있는 심리학적 과학에서 어느 날 그 역할을 하리라는 것을 의심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은 분석가들이 자신들의 이론을 확증한다고 순진하게 믿는 저 ‘임상 관찰’은, 점성가들이 자신들의 관행에서 발견하는 일상적인 확증 이상의 역할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정말로 의미한다 (이 문장의 원문은 But it does mean that those 'clinical observations' which analysts naïvely believe confirm their theory cannot do this any more than the daily confirmations which astrologers find in their practice인데 not ~ any more than의 구문으로 보면 this의 의미가 분명치 않다. - 역자 주.).?

 

? 보기로써 나의 저서 열린사회와 그 적들 15장 3부와 주석 13-14 참조.

 

그리고 프로이트의 자아(Ego), 초자아(Super-ego), 그리고 이드(Id)라는 서사시에 관해서, 호머가 올림푸스에서 수집한 이야기들 이상의 과학적 지위를 더 강력하게 본질적으로 주장하는 것은 없다. 이 이론들은 어떤 사실들을 묘사하지만, 신화의 형태로서 이다. 그 이론들은 매우 흥미로운 심리학적 암시를 포함하고 있지만, 시험 가능한 형식으로가 아니다.

동시에 나는 그런 신화(神話)들은 개발되어, 시험가능하게 될 것임을 깨달았다; 역사적으로 말해서 모든 - 혹은 거의 모든 - 과학 이론들은 신화에서 유래함을, 그리고 신화에는 과학 이론에 대한 중요한 전단계가 담겨있음을. 보기는 엠페도클레스(Empedocles)의 시행착오에 의한 진화 이론이거나, 그 안에서 아무 것도 심지어 발생하지 않으며, 우리가 또 다른 차원을 보탠다면, 아인슈타인의 구역 우주(block universe)가 되는 (그 안에서도, 4차원적으로 말해서, 모든 것이 결정되어 시초부터 정착되었기 때문에, 아무 것도 발생하지 않는) 파메니데스(Parmenides)의 항구적 구역 우주(block universe)이다 (성균관 대학의 이한구 교수는 block universe를 닫힌 우주로 번역한다. - 역자 주.). 그리하여 어느 이론이 비과학적이거나 ‘형이상학적’으로 (아마도 우리가 말하는 바와 같이) 밝혀지면, 그 이론은 그리하여 중요하지 않거나 의미가 하찮거나 ‘무의미하다’고 밝혀지지 않는다고 나는 느꼈다.? 그러나 이론은 과학적 의미에서 경험적 증거에 의하여 지지를 받는다고 주장할 수 없다 - 어떤 발생론적 의미에서, 이론이 쉽게 ‘관찰의 결과’라 할지라도.

(이 과학 이전 특성이나 사이비 과학적 특성을 지닌 아주 많은 다른 이론들이 있었고, 그 이론들 중 몇몇은 불행히도 마르크스주의적 역사 해석만큼 영향력을 지녔다; 예를 들어, 허약한 정신에 계시처럼 작용하는 저 장엄하고 모든 것을 설명하는 이론 중 또 다른 이론인 종족적 역사 해석.)

 

? ‘임상 관찰’은, 다른 모든 관찰처럼, 이론들을 참고한 해석이다 (아래 4부 이하 참조.); 그래서 이런 이유만으로 그 관찰은, 참고하여 관찰들이 해석되는 저 이론들을 뒷받침하는 듯이 보이기 쉽다. 그러나 실제적인 지지는 시험으로서 수행되는 관찰로부터만 얻어질 수 있다 (‘시도된 반증’에 의하여); 그래서 이 목적을 위하여 논박의 기준이 미리 정해져야 한다: 어떤 관찰 가능한 상황들이, 실제로 관찰되면, 이론이 반증된다는 것을 의미하는지 합의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어떤 종류의 임상적 반응이 특정 분석적 진단뿐만 아니라 정신분석 자체를 또한 분석가의 만족 하에 반증할 것인가? 그리고 그런 기준은 분석가들에 의하여 논의되었거나 합의되었는가? 반대로 ‘반대 감정 병존(ambivalence)’과 같은 분석적 개념의 전체 무리가 있어서, (나는 반대 감정 병존과 같은 그런 것이 있다고 의견을 내는 것이 아니다) 그 무리가 그런 기준에 합의하는 것을, 불가능은 아니라할지라도, 어렵게 만드는 것은 아닌지? 게다가, 분석가가 지닌 (의식적이거나 무의식적인) 기대와 이론이 환자의 ‘임상적 반응’에 영향을 미치는 정도에 관한 문제를 조사함에 있어서, 얼마나 진전이 이록되었는지? (환자에게 해석을 제시하거나 기타 등등으로써 환자에게 영향을 미치려는 의식적 시도에 관해서는 말할 것도 없고) 몇 년 전에 나는 이론이나 기대나 예측이 예측하거나 묘사하는 사건에 미치는 영향을 설명하기 위하여 ‘오디푸스 효과’라는 용어를 도입했다: 오디푸스의 부친살해에 이르는 인과적 일련의 사건들은 신탁(神託)의 이 사건 예언에 의하여 촉발되었음이 기억될 것이다. 이것은 그런 신화들의 특징적이고 반복적인 주제이지만, 아마도 비우연적으로 분석가들의 관심을 끄는 데 실패했던 듯싶다. (정신분석가가 제시하는 확증적 꿈의 문제는 프로이트에 의하여, 예를 들어, 그의 전집(Gesammelte Schriften) 3권 314쪽, 1925년 에서 이렇게 토론된다: ‘분석에서 사용될 수 있는 꿈의 대부분이 ... 그 근원을 [분석가의] 암시에서 찾는다 해도, 분석적 이론의 관점에서 반발이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이 사실에는 아무 것도 없다’, 그는 놀랍게도 부연하여, ‘우리가 얻은 결과의 신뢰성을 훼손할 것이.’)

? 점성술의 경우는, 오늘날 전형적 사이비 과학인데, 이 요점을 예시할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들과 다른 이성주의자들에 의하여 뉴튼의 시대까지, 행성이 지구상의 (‘달 아래의’) 사건들에 ‘영향(influence)’을 끼친다는, 지금은 인정을 받고 있는 주장 때문에 점성술은 공격을 받았다. 사실상 뉴튼의 중력 이론, 그리고 특히 조수(潮水)와 관계된 달에 관한 이론은 역사적으로 말해서 점성술적 지식의 소산이었다. 뉴튼은 예를 들어 ‘독감(influenza)’이라는 전염병이 별의 ‘영향(influence)’ 때문이라는 이론과 동일한 무리에서 유래한 이론을 채택하는 데에 매우 망설였던 듯하다. 그리고 갈릴레오는, 의심할 바 없이 동일한 이유로 인하여, 조수(潮水)와 관계된 달에 관한 이론을 실제로 배격했다; 그래서 케플러(Kepler)에 대한 그의 의심은 점성술에 대한 그의 의심으로써 쉽게 설명될 것이다.

 

 

그리하여 반증가능성의 기준을 제시함으로써 내가 해결하고자 했던 문제는 유의미나 중요성의 문제가 아니요, 진리나 수용 가능성의 문제도 아니었다. 그 문제는 서술들 사이나, 서술들의 체계들 사이나, 경험 과학들의 체계 사이나, 모든 다른 서술 체계들 사이에서 (가능한 한 잘) 선을 긋는 문제였다 - 그것들이 종교적 특징이나 형이상학적 특징을 가지고 있거나, 또는 단지 사이비 과학이든 간에. 몇 년 후 - 틀림없이 1928년 혹은 1929년이었다 - 나는 내가 가지고 있는 이 첫 번째 문제를 ‘구획의 문제(problem of demarcation)’라고 불렀다. 반증가능성의 기준은 이 구획의 문제에 대한 해결책인데, 그 까닭은 서술이나 서술의 체계는, 과학적 지위에 오르기 위해서, 가능하거나 상상 가능한 관찰과 갈등을 일으킬 수 있어야 한다고 그 기준이 말하기 때문이다.

III

오늘날 물론 이 구획의 기준이 - 시험가능성이나 반증가능성이나 논박가능성 - 결코 분명하지 않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그 까닭은 심지어 지금도 그 기준의 중요성이 거의 이해되지 않기 때문이다. 1920년 그 때에, 그 기준이 나를 깊이 괴롭혔던 지적(知的) 문제와, 또한 (예를 들어, 정치적인 결과들인) 명백한 실제적 결과들을 지니고 있던 한 가지 지적(知的) 문제를 나를 대신해서 해결했다 할지라도, 그 기준은 나에게 거의 하찮게 보였다. 그러나 나는 아직도 그 기준이 가지고 있던 함축적 의미나 철학적 중요성을 깨닫지 못했다. 내가 그 기준을 수학과의 동료 학생에게 (지금은 영국에서 유명한 수학자) 설명했을 때, 그는 내가 그 기준을 출판해야 한다고 제의했다. 당시 나는 이것이 터무니없다고 생각했다; 그 까닭은 내가 가지고 있던 문제가, 나에게 매우 중요했기 때문에, 내 수중에 있던 다소 명백한 해결책에 분명히 도달했던 많은 과학자들과 철학자들을 틀림없이 흥분시켰다고 나는 확신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다는 것을 나는 비트겐슈타인의 글로부터, 그 글이 환영받는 것으로부터 알았다; 그래서 나는 13년 후에 비트겐슈타인의 유의미의 기준을 비판하는 형태로 내가 얻은 결과를 출판했다.

비트겐슈타인은, 여러분 모두가 알다시피, 논리 철학 논고(Tractatus)에서 (예를 들어 그의 제언 6.53; 6.54와 5 참조) 소위 모든 철학적이거나 형이상학적인 제언이 실제로 제언이 아니거나 사이비 제언임을 증명하려고 노력했다: 그것들이 터무니없고 무의미함을. 모든 진정한 (혹은 의미 있는) 제언은 ‘원자적(原子的) 사실들’을 - 다시 말해서, 원칙적으로 관찰에 의하여 발견될 수 있는 사실들 - 묘사하는 기초적이거나 원자적(原子的) 제언의 진리 함수이었다. 다시 말해서, 의미 있는 제언들은, 사건들의 가능한 상태를 묘사하는 간단한 서술이었던, 그리고 원칙적으로 관찰에 의하여 확립되거나 거부될 수 있었던 기초적이거나 원자적(原子的) 제언으로 완전히 환원될 수 있었다. 서술이 실제적 관찰을 서술한다는 조건뿐만 아니라 서술이 관찰될지도 모르는 어떤 것을 서술한다는 조건으로도 우리가 서술을 ‘관찰 서술’이라고 부른다면, 모든 진정한 제언은 틀림없이 관찰 서술의 진리-함수이어서 그러므로 관찰 서술로부터 환원될 수 있다고 우리는 (논리 철학 논고[Tractatus] 5와 4.52에 따라서) 말해야 할 것이다. 다른 모든 분명한 제언들은 무의미한 사이비 제언이 될 것이다; 실제로 그것들은 터무니없는 헛소리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이 개념은 비트겐슈타인에 의하여, 철학과 반대로, 과학 특징짓기에 사용되었다. 우리는 (예를 들어 자연과학이 철학의 반대편에 선다고 생각되는 4.11에서) 다음 글을 읽는다: ‘진실한 제언의 전체는 전체 자연과학이다 (혹은 자연과학의 전체).’ 이것은 과학에 속하는 제언들이 진실한 관찰 서술로부터 환원될 수 있는 제언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 제언들은 진실한 관찰 서술에 의하여 증명될 수 있는 저 제언들이다. 우리가 모든 진실한 관찰 서술들을 알 수 있다면, 우리는 자연과학에 의하여 주장될 모든 것을 또한 알 수 있을 텐데. 이것은 구획(demarcation)에 관한 조악한 증명가능성 기준과 동일하다. 그 기준을 다소 덜 조악하게 만들기 위하여, 이와 같이 수정될 수 있을 것이다: ‘아마도 과학의 영역에 들 서술들은 아마도 관찰 서술에 의하여 검증될 서술들이다; 그래서 이 서술들은, 다시 모든 진정하거나 의미 있는 서술의 등급과 일치한다.’ 그래서 이러한 접근방식에 관하여, 검증가능성, 유의미함, 그리고 과학적 특징 모두가 일치한다.

나는 개인적으로 소위 의미의 문제에 관심을 가진 적이 없다; 반대로, 그 문제는 언어적 문제, 전형적인 사이비 문제로 나에게 보였다. 나는 구획의 문제에, 다시 말해서 이론의 과학적 특징에 관한 기준을 발견하는 데만 나는 관심을 가졌다. 비트겐슈타인이 주장한 의미의 검증가능성 기준에는 구획의 기준의 역할도 할 의도가 있음을 내가 즉각 알아챈 것은 바로 이 관심 때문이었다; 그리고 의미의 의심스러운 개념에 관한 모든 의혹을 밀쳐놓는다 할지라도, 그런 상태로 비트겐슈타인의 기준이 전적으로 부적당함을 내가 알아챈 것. 그 까닭은 비트겐슈타인의 구획 기준(criterion of demarcation)이 - 이런 문맥에서 내 자신의 용어를 사용해서 - 검증가능성이거나, 관찰 서술로부터의 연역(演繹)가능성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기준은 너무 좁다 (동시에 너무 넓다): 그 기준은 (실제로 점성술을 제외하는 데 실패하는 반면) 사실상 그 기준의 특징적인 모든 것을 실제로 과학으로부터 제외시킨다. 어떤 과학적 이론도 관찰 서술로부터 연역되거나, 관찰 서술의 진리 기능으로서 묘사될 수 없다.

이 모든 것을 나는 여러 번 비트겐슈타인주의자들과 비엔나 학파의 회원들에게 지적하였다. 1931-32년에 나는 나의 생각을 상당히 큰 책에 요약하였다 (몇몇 비엔나 학파 회원들이 읽었으나 발간되지는 않았다; 일부가 나의 저서 과학적 발견의 논리에 포함되었지만); 그리고 1933년에 그 안에서 구획과 귀납의 문제에 대한 나의 생각을 두 쪽에 압축하려고 노력했던 편지를 인식(Erkenntnis)의 편집자에게 나는 보냈다.? 이 편지와 다른 곳에서 나는 의미의 문제를, 구획의 문제와 대조하여, 사이비 문제로 묘사했다. 그러나 나의 기고는 비엔나 학파의 회원들에 의하여 의미의 검증가능성 기준을 의미의 반증가능성 기준으로 갈음하는 제안으로서 분류되었다 - 그것은 효과적으로 나의 관점을 어불성설(語不成說)로 만들었다.? 그들이 지니고 있던 의미에 관한 사이비 문제가 아니라, 구획에 관한 문제를 해결하려고 내가 노력하고 있었다는 나의 항의는 소용이 없었다.

? 나의 저서 과학적 발견의 논리(Logic of Scientific Discovery)는 (1959, 1960, 1961년), 여기서 보통 L.Sc.D.로 지칭되는데, 1933년 인식(Erkenntnis) 3, 426쪽 6행에 최초로 발행된 원문에 언급된 인식(Erkenntnis)의 편집자 수신인 편지를 포함하여, 몇 가지 추가 주석과 부록과 함께, 1934년의 탐구의 논리(Logik der Forschung)의 번역본이다.

여기 원문에 언급된 나의 미출간 서적에 관해서는 R. 카르납(Carnap)이 223-8쪽에서 나의 이론에 대한 개요를 설명하고 수용하는 인식(Erkenntnis) 3, 1932년 215-28쪽에 실린 그의 논문 ‘프로토콜 문장에 관하여(Ueber Protokollsätze [On Protocol-Sentences])’를 참조. 그는 나의 이론을 ‘B 과정’으로 부르며 224쪽 위에서 이렇게 말한다: (카르납이 223쪽에서 ‘A 과정’으로 지칭하는 것을 전개했던) ‘노이라트(Neurath)의 관점과 다른 관점에서 시작하여, 포퍼는 자신의 체계의 한 부분으로서 B 과정을 전개했다.’ 그리고 나의 시험 이론을 자세하게 묘사한 다음에, 카르납은 자신의 견해를 228쪽에서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여기서 논의된 다양한 주장을 저울질한 후에, B 과정을 통한 두 번째 언어 형태가 - 다시 말해서 여기서 묘사된 형태로 - 지식 이론 ... 안에서 ... 현재 옹호되는 과학적 언어의 형태들 중에서 가장 적당한 형태로 나에게 보인다.’ 카르납의 이 논문에는 나의 비판적 시험 이론에 관한 최초로 발간된 보고서가 포함되어 있었다. (1932년이 1933년으로 잘못된 과학적 발견의 논리 104쪽 29부의 주석 1과, 11장 아래 주석 39의 원문에서 나의 비판적 언급 또한 참조.)

? 터무니없는 사이비 제언에 관한 비트겐슈타인의 보기는: ‘소크라테스는 동일하다’. 분명히, ‘소크라테스는 동일하지 않다’는 틀림없이 또한 무의미하다. 그리하여 어떤 무의미한 말의 부인(否認)은 무의미할 것이고, 의미 있는 서술의 부인(否認)은 유의미할 것이다. 처음에는 나의 저서 과학적 발견의 논리 38쪽 6행에서 그리고 나중에는 나를 비판하는 사람들에 의하여 지적된 바와 같이, 그러나 시험될 수 있는 (혹은 반증될 수 있는) 서술의 부인(否認)은 시험가능적이 될 필요가 없다. 시험가능성을 구획이라기보다는 의미의 기준으로서 말함으로써 야기되는 혼란은 쉽게 상상될 수 있다.

그러나 검증에 대한 나의 공격은 얼마간의 효과를 내었다. 그 공격은 곧 의미와 무의미에 관한 검증주의 철학자들의 진영에 커다란 혼란을 야기했다. 의미에 대한 기준으로서의 증명가능성의 최초 제안은 적어도 분명하고 간단하고 힘이 있었다. 당시 도입되었던 수정(修正)과 변경은 정반대였다.? 이것을 이제는 심지어 참가자들도 안다고 나는 주장한다. 그러나 나도 그들의 한 명으로 보통 인용되기 때문에, 내가 이 혼란을 초래했을지라도 나는 그 혼란에 연루된 적이 없다고 다시 말하고 싶다. 나는 의미의 기준으로 반증가능성이나 시험가능성을 제안하지 않았다; 그리고 내가 두 용어를 토론에 소개한 죄를 인정할지라도, 그 용어들을 의미의 이론에 소개한 것은 내가 아니었다.

내가 주장한 견해에 대한 비판은 광범위했고 매우 성공적이었다. 나는 아직도 나의 견해에 대한 비판을 맞이해야 한다.? 그러는 동안, 실험가능성은 구획의 가능성으로서 광범위하게 수용되고 있었다.

? 이 문제의 역사가 오해되는 방식의 최근 사례는 A. R. 화이트(White)의 ‘의미와 검증에 관한 기록’, 정신, 63, 66쪽 이하, 1954년이다. 화이트가 비판하는 J. L. 에반스(Evans)의 논문 정신, 62, 1953년은 나의 생각에 탁월하며 특별한 이해력을 지니고 있다. 충분히 이해가 되지만, 두 저술가는 이야기를 완전히 재구성하지는 못한다. (몇 가지 암시가 나의 저서 열린사회와 그 적들의 11장의 주석 46, 51, 52에서 발견될 것이다; 그리고 더 세부적인 분석은 이 책의 11장에서 발견될 것이다.)

? 과학적 발견의 논리에서 나의 답변을 참고하지 않고 정말로 나중에 제기된 몇 가지 개연적인 반론을 나는 논의하였고 답변했다. 그것들 중 하나가 자연법칙의 반증은 자연법칙의 검증만큼 불가능하다는 주장이다. 답변은 (아무리 자주 반복된다 할지라도, 검산이 우리가 실수를 간과했다는 것을 철저히 확인할 수 없기 때문에 수학적 증명은 불가능하다는 반론처럼) 이 반론이 두 가지 완전히 다른 수준의 분석을 혼동한다는 것이다. 첫 번째 수준에는 논리적 비대칭성이 있다: 하나의 단칭 명제는 - 가령 수성(水星)의 태양 근접거리에 관한 - 형식적으로 케플러(Kepler)의 법칙을 반증할 수 있다; 그러나 케플러의 법칙들은 어떤 숫자의 단칭 명제들에 의해서도 형식적으로 검증될 수 없다. 이 비대칭성을 최소화하려는 시도는 혼란을 초래할 수 있을 따름이다. 또 다른 수준에서, 우리는 어떤 서술도, 심지어 가장 단순한 관찰 서술도 수용하기를 망설일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모든 서술에는 이론들을 참고한 해석이 포함되어 있으며, 그러므로 모든 서술은 불확실하다고 지적할 것이다. 이것은 근본적인 비대칭성에 영향을 미치지 않지만 중요하다; 하베이(Harvey) 이전의 심장해부학자 대부분은 잘못된 것들을 관찰했다 - 자신들이 보기를 기대했던, 것들. 잘못된 해석의 위험이 없는, 완전히 안전한 관찰과 같은 것을 있을 수가 없다. (이것이 귀납 이론이 효과를 내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이다.) ‘경험적 토대’는 주로 (‘재생 가능한 효과들’이라는) 낮은 정도의 보편성을 지닌 이론들의 혼합체로서 구성된다. 그러나 탐구자가 (자신의 위험을 무릅쓰고) 수용할 모든 토대와 관련하여, 자신의 이론을 논박하려고 노력함으로써만 탐구자는 자신의 이론을 시험할 수 있다는 사실은 남는다.

나는 구획의 문제에 대한 해결이 과학 철학의 근본적인 문제 대부분의 열쇠라고 믿기 때문에 구획의 문제를 토론했다. 나는 나중에 이 다른 문제들 몇몇의 목록을 여러분들에게 제공할 예정이지만, 그 문제 중 오직 한 문제만 - 귀납의 문제 - 여기서 상세하게 논의될 수 있다.

나는 1923년에 귀납의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이 문제는 구획의 문제와 매우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할지라도, 나는 약 5년 동안 그 연관성을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했다.

나는 흄(Hume)을 통하여 귀납의 문제에 접근했다. 흄은, 내가 느끼기에, 귀납법은 논리적으로 정당화될 수 없다고 지적하는 데서 완전히 옳았다. 그는 우리가 ‘우리가 경험을 지니지 못한 사례들이 우리가 경험을 지닌 사례들을 닮았다’고 입증할 유효한 논리적? 주장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결과적으로 ‘심지어 잦거나 부단한 사물의 결합을 관찰한 후에도, 우리에게는 우리가 경험을 지녔던 대상들을 초월하여 대상에 관한 추론을 도출할 근거가 없다’. 그 까닭은 ‘우리가 경험을 지니고 있다고 언급된다면’?? - 특정 다른 대상들과 부단히 결합된 대상들은 계속해서 그렇게 결합된다고 우리를 가르치는 경험 - 흄은 말한다, ‘나는 나의 질문, 왜 우리는 이 경험으로부터, 우리가 경험을 지니지 않은 저 과거의 사례를 초월하여 결론을 형성하는가를 새롭게 던지겠다’. 이 ‘새롭게 던져진 질문’은 경험의 도움으로 귀납 관행을 정당화하려는 시도는 틀림없이 무한 소급을 초래함을 가리킨다. 결과적으로 이론은 관찰 서술로부터 추론될 수 없다거나 그 서술로써 이성적으로 정당화될 수 없다고 우리는 말할 수 있다.

? 흄은 ‘논리적(logical)’이라고 말하지 않고 ‘논증적(demonstrative)’라고 말하는데, 내가 생각하기에 다소 오해를 낳을 용어 사용이다. 아래 두 인용구는 인성론 1권 3부 6절 및 12절에서 나왔다. (이탤릭체는 모두 흄의 것임)

10 이것과 다음 인용구들은 인성론 3부 6절에서 나왔다. 흄의 인간 오성에 관한 연구 2부 4절과, 1938년에 J. M. 케인즈(Keynes)와 P. 스라파(Sraffa)에 의하여 편집되었고 과학적 발견의 논리 새 부록 vii 주석 6의 원문에 인용된 그의 인성론 발췌(Abstract) 15쪽 역시 참조.

나는 귀납적 추론에 대한 흄의 논박이 분명하고 결정적임을 발견했다. 그러나 나는 귀납법을 습관이나 버릇으로써 그가 심리학적으로 설명하는 데에 완전히 불만족스럽게 느꼈다.

흄의 이 설명이 철학적으로 그다지 만족스럽지 못하다는 것이 자주 지적되었다. 흄은, 그러나, 틀림없이 그 설명을 철학적 이론이라기보다는 심리학적 이론으로서 염두에 두었다; 그 까닭은 그 설명이 심리학적 사실에 대한 인과적 설명을 하려고 노력하기 때문이다 - 우리가 법칙을, 규칙성이나 부단히 결합된 사건의 종류들을 주장하는 서술을, 신뢰한다는 사실. 흄은 그것이 습관이나 버릇에 기인한다고 (다시 말해서 부단히 습관과 버릇과 결합되어) 주장함으로써 이 사실을 설명한다. 그러나 심지어 흄의 이론에 관하여 이렇게 재공식화된 것도 수용될 수 없다; 그 까닭은 내가 방금 ‘심리학적 사실’이라고 지칭한 것 자체가 습관이나 버릇으로 묘사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 법칙이나 규칙성을 신뢰하는 우리의 습관이나 우리의 버릇. 그러한 습관이나 버릇이 (비록 다른 습관이나 버릇이라 할지라도) 습관이나 버릇에 기인하는 것으로, 혹은 습관이나 버릇과 결합된 것으로 설명될 수 있다는 말을 듣는 것은 놀라운 일도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다. ‘습관’과 ‘버릇’이라는 말이, 평범한 언어에서처럼, 규칙적인 행태를 묘사하기 위해서 뿐만 아니라 오히려 (빈번한 반복 탓으로 생각되는) 그 행태의 근원에 대하여 이론화하기 위하여 흄에 의하여 사용됨을 우리가 기억할 때만, 우리는 그의 심리학적 이론을 보다 만족스러운 정도로 다시 공식화할 수 있다. 그렇다면 흄의 이론은, 다른 버릇들처럼 법칙을 신뢰하는 우리의 버릇은 빈번한 반복의 - 특정 종류의 사물들은 또 다른 종류의 사물들과 부단히 결합된다는 반복되는 관찰의 - 산물이다라는 주장이 된다.

지적된 바와 같이, 이 발생론적-심리학적 이론은 평범한 언어 속에 포함되어 있고, 그리하여 흄이 생각했던 만큼 그렇게 혁명적이지 않다. 그 이론은 의심할 바 없이 매우 인기 있는 심리학적 이론이라고 - ‘상식’의 일부 - 사람들은 아마도 말할 것이다. 그러나 내가 상식과 흄을 매우 좋아함에도 불구하고, 이 심리학적 이론은 틀렸다고 나는 확신했다; 그리고 그 이론은 순전히 논리적 근거로써 사실상 논박될 수 있다고.

흄의 심리학은, 인기 있는 심리학인데, 적어도 세 가지 다른 것에 관하여 틀렸다고 나는 느꼈다: (a) 반복의 전형적인 결과; (b) 버릇의 발생; 그리고 특히 (c) ‘법칙에 대한 신뢰’나 ‘사건들의 법칙 같은 연속의 기대’로서 묘사될 저 경험들이나 행동 양태들의 특징.

(a) 반복의 전형적인 결과는 - 가령, 피아노로 어려운 악절을 반복하는 것의 - 처음에는 주의가 필요했던 운동들이 종국적으로는 주의하지 않고도 수행된다는 것이다. 과정이 급격하게 단축되어 의식적이지 않게 된다고 우리는 아마도 말할 것이다. 과정은 자동화되어, ‘생리화’된다. 그런 상황전개는, 법칙 같은 연속에 대한 의식적 기대나 법칙에 대한 신뢰를 야기하기는커녕, 반대로 의식적인 믿음으로써 시작하여 그 믿음을 과잉으로 만듦으로써 제거할 것이다. 자전거 타기를 배우면서 우리는 넘어진다고 위협하는 방향으로 조정하면 우리는 넘어지는 것을 피할 수 있다는 믿음으로써 시작할 것이고, 이 믿음은 우리의 움직임을 이끄는 데에 유용할 것이다. 충분히 연습한 다음에 우리는 규칙을 잊는다; 아무튼 우리에게 그 규칙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 다른 한 편으로, 반복이 무의식적인 기대를 초래할 것이 사실이라 할지라도, 이 기대들은 무엇인가 잘못된다는 조건에서만 의식적이 된다 (우리는 시계가 똑딱거리는 소리를 들지 못하겠지만, 우리는 시계가 멈춘 것은 들을 것이다).

(b) 대체로 습관이나 버릇은 반복에서 시작되지 않는다. 심지어 걷는 버릇이나, 말하는 버릇이나, 특정 시간에 먹는 버릇은 반복이 어떤 역할이라도 하기 전에 시작된다. 반복이 (a) 아래서 묘사된 전형적인 역할을 한 후에만, 그것들이 ‘버릇’이나 ‘습관’으로 불릴 자격이 있다고 우리는 원한다면 말할 것이다; 그러나 논의되고 있는 관행은 많은 반복의 결과로서 시작되었다고 우리는 말해서는 안 된다.

(c) 법칙에 대한 믿음은, 사건에 관한 법칙 같은 연속에 대한 기대를 보여주는 행태와 완전히 동일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이 두 가지는 충분히 밀접하게 결합되어 함께 취급된다. 그것들은, 아마도, 예외적인 경우에, 감각 인상(sense impressions)의 반복에서만 유래할 것이다 (멈추는 시계의 경우에서처럼). 나는 이것을 인정한 준비가 되어 있었지만, 나는 일반적으로, 그리고 대부분의 관심사의 경우에, 그 믿음과 그 기대가 그렇게 설명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흄이 인정하는 바와 같이, 심지어 단 한 가지의 두드러진 관찰이 믿음이나 기대를 만들어내기에 충분할 것이다 - 그가, 삶의 초기에 경험된 많은 긴 반복적 연속물의 결과로서 형성된, 귀납적 버릇에 기인하는 것으로서 설명하려고 노력하는 사실.?? 그러나 이것은 자신의 이론을 위협했던 비우호적인 사실들을 설명해치우려는 그의 시도일 따름이었다고 나는 주장했다; 이 비우호적인 사실들이 매우 어린 동물이나 아기에서 - 정말로, 우리가 원하는 만큼 그렇게 일찍 - 관찰될 수 있었기 때문에, 성공하지 못한 시도. ‘불이 붙은 담배가 강아지들의 코 가까이에 잡혔다. 강아지들은 담배의 냄새를 한 번 맡고, 꼬리를 돌리자 아무도 강아지를 그 냄새의 근원으로 데려와 다시 냄새를 맡도록 하려 하지 않았다. 며칠 후, 강아지들은 담배를 보기만 하거나 심지어 말은 흰 종이를 보기만 해도, 뛰어 도망치거나 재채기를 함으로써 반응했다’고 F. 베게(Bäge)는 보고한다.?? 훨씬 더 어린 나이에 일어났던 많은 긴 반복적 연속물을 전제함으로써 우리가 이와 같은 경우들을 설명하려고 한다면, 우리는 허구를 이야기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영리한 강아지의 짧은 삶 속에는 틀림없이 반복을 위한 공간과 많은 기이한 것을 위한 공간 또한 있어서 결과적으로 비(非)반복을 위한 공간도 있다는 것을 망각하고 있다.

그러나 특정 경험적 사실들이 흄을 뒷받침하지 않는다는 것만이 아니다; 그의 심리학적 이론에 반하는 순전히 논리적인 특성을 지닌 결정적인 주장들이 있다.

흄의 심리학적 이론의 핵심 개념은 유사성에 기초한, 반복의 개념이다. 이 개념은 매우 비(非)비판적인 방식으로 사용된다. 우리는 바위에 구멍을 내는 물방울에 대하여 생각하라고 유도를 받는다: 시계소리가 그러한 것처럼, 우리에게 서서히 자체를 강요하는 의심할 바 없이 같은 사건들의 연속에 대하여. 그러나 흄의 것과 같은 심리학적 이론 안에서는, 우리를-위한-유사성(similarity-for-us)에 기초한 우리를-위한-반복(repetition-for-us)만이 우리에게 모든 영향을 미치도록 허용될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깨달아야 한다. 우리는 상황들이 동등한 것처럼 상황에 대응해야 한다; 상황들이 유사한 것으로 생각하라; 상황들을 반복들로서 해석하라. 이런 방식으로 상황들은 우리들에게 기능적으로 동등하게 된다. 영리한 강아지들은 자신들의 반응인 자신들의 행동이나 반응의 방식으로써 자신들이 두 번째 상황을 첫 번째 상황의 반복으로서 인지했거나 해석했음을 보여주었다고 우리는 상정(想定)할 것이다: 강아지들이 그 주요 요소인 지겨운 냄새가 나리라고 기대했음을. 강아지들이 이전 상황과의 유사함을 기대함으로써 그 상황에 반응했기 때문에 그 상황은 그들을-위한-반복(repetition-for-them)이었다.

분명히 심리학적인 이 비판은 다음과 같은 간단한 주장으로 요약될 순전히 논리적 토대를 지니고 있다. (그 비판은 우연히도 내가 처음으로 나의 비판을 시작했던 것이다.) 흄이 머리로 그렸던 종류의 반복은 완벽할 수 없다; 그가 염두에 두고 있는 경우들은 완벽한 동일함의 경우일 리가 없다; 그 경우들은 단지 유사함을 지닌 경우들이다. 그리하여 그 경우들은 특정 관점에서만 반복이다. (나에게 반복의 효과를 미치는 것은 그 효과를 거미에게는 미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논리적인 이유 때문에, 반복이 있을 수 있기 전에 - 기대나 예상이나 상정(想定)이나 관심의 체계 같은 - 관점이 틀림없이 항상 존재함을 의미한다; 그 관점은, 결과적으로, 단지 반복의 결과일 리가 없다. (나의 저서 과학적 발견의 논리 부록 x, (1) 또한 참조)

그리하여 우리는, 우리가 지닌 믿음들의 근원에 관한 심리학적 이론을 목적으로, 유사사건들에 관한 순진한 개념을 그 사건들을 유사한 것으로 해석함으로써 우리가 반응하는 사건들에 관한 개념으로 갈음해야 한다. 그러나 그렇다면 (나는 피할 수 없는 일로 알고 있다) 귀납법에 관한 흄의 심리학적 이론은, 흄 자신에 의하여 발견되어 그에 의하여 귀납법의 논리적 이론을 반증하는 데에 사용된 저 다른 무한 소급과 정확하게 유사한, 무한 소급을 초래한다. 그 까닭은 우리가 무엇을 설명하기를 원하는가?이기 때문이다. 강아지들의 보기에서 우리는 또 다른 상황으로서 한 상황을 인식하거나 해석하는 것으로서 묘사될 행태를 설명하고 싶어 한다. 분명히, 초기 반복들이 틀림없이 역시 그들을-위한-반복들(repetitions-for-them)이어서 정확하게 동일한 문제가 다시 발생한다는 것을 우리가 깨닫자마자, 우리는 초기 반복들의 도움을 받아서 이것을 설명하기를 바랄 수 없다: 또 다른 상황의 반복으로서 한 가지 상황을 인식하거나 해석하는 문제.

더 축약해서 표현하여, 우리들을-위한-유사성(similarity-for-us)은 (부적절할지도 모르는) 해석들과 (충족되지 못할지도 모르는) 예상들이나 기대들을 포함하는 반응의 산물이다. 그러므로 흄에 의하여 제시되는 바와 같이 예상들이나 기대들을 많은 반복에서 야기되는 것으로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 까닭은 심지어 첫 번째의 우리를-위한-반복(repetition-for-us)도 틀림없이 우리들을-위한-유사성(similarity-for-us)에 근거하여 - 정확하게 우리가 설명하고 싶어 하는 종류의 것인 - 기대들에 근거하기 때문이다. (기대는 틀림없이, 반복들에 앞서서 먼저 온다.)

흄의 심리학적 이론 속에 포함된 무한 소급이 있음을 우리는 안다.

흄은 자신의 논리적 분석이 지닌 전체 힘을 인정하지 않았다고 나는 느꼈다. 귀납법에 관한 논리적 개념을 논박한 다음에 그는 다음 문제에 직면했다: 귀납법이 논리적으로 효력이 없고 이성적으로 정당화될 수 없다면, 우리는 어떻게 실제로 우리의 지식을 심리학적 사실의 문제로서 얻는가? 두 가지 가능한 답변이 있다: (1) 우리는 우리의 지식을 비(非)귀납적 과정으로써 얻는다. 이 답변으로 인하여 흄은 한 가지 형태의 이성주의를 지니게 되었으리라. (2) 우리는 우리의 지식을 반복과 귀납법으로써, 그리하여 논리적으로 효력이 없고 이성적으로 정당화될 수 없는 과정으로써 얻으므로 모든 그럴듯한 지식은 일종의 믿음일 뿐이다 - 버릇에 근거한 믿음. 이 답변은 심지어 과학적 지식도 비이성적이어서 이성주의가 터무니없고 따라서 배격되어야함을 암시할 것이다. (지금 다시 유행하는, 우리가 ‘논리’로써 ‘연역적 논리’와 동일한 것을 의미한다면 물론 귀납법은 논리적으로 효력이 없을지라도 그 자체의 기준으로써와 귀납적 논리가 인정하는 바와 같이 그것이 비(非)이성적이 아니라고 주장함으로써 난제로부터 빠져나오려는 한 세기 동안이나 낡은 시도들을 나는 여기서 토론하지 않겠다. 이것에 대항하여, 사실의 문제인 quid facti?와 정당화나 유효성의 문제인 quid juris?를 무비판적으로 동일시함을 깨뜨린 것은 흄의 위대한 업적이었다. [현재 장의 부록 13번을 아래서 참조.]) (원문에는 대괄호가 닫히지 않는다. 원문의 오류로 보이면, 문맥을 참조하여 여기서 대괄호를 닫는다. - 역자 주.)

흄은 첫 번째 대안을 심각하게 고찰하지 않은 듯싶다. 반복에 의한 귀납법적 논리 이론을 추방한 다음에 그는, 심리학적 사실을 가장하여 온순하게 반복에 의한 귀납법의 재도입을 허용하면서, 상식(常識)과 흥정을 했다. 나는 흄의 이 이론에 반격할 것을 제안한다. 규칙성을 기대하는 우리가 지닌 경향을 반복의 결과로서 설명하는 대신에, 나는 우리를-위한-반복(repetition-for-us)을, 규칙성을 기대하여 그 규칙성을 탐색하는 우리가 지닌 경향의 결과로서 설명할 것을 제안했다.

그리하여 나는 순전히 논리적 고찰에 의하여 귀납법의 심리학적 이론을 다음 관점으로 갈음하게 되었다. 반복이 우리에게 규칙성을 각인하거나 강요하기를 수동적으로 기다리지 않고, 우리는 규칙성을 능동적으로 세상에 강요하려고 노력한다. 우리는 세상 속의 유사성을 발견하여 우리에 의하여 창안된 법칙으로써 그 세상을 해석하려고 한다. 전제를 기다리지 않고 우리는 결론으로 도약한다. 관찰에 의하여 결론이 틀렸음이 증명되는 결론들은 나중에 배격되어야 할 것이다.

이것이 시행착오의 이론이다 - 추측과 논박의 이론이다. 이 이론으로 인하여 해석을 세상에 강요하는 우리의 시도가 왜 논리적으로 유사점 관찰보다 앞서는지를 이해할 수 있다. 이 과정 배후에 논리적 이유들이 있었기 때문에, 나는 이 과정이 과학 분야에도 또한 적용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과학 이론들은 관찰의 요약이 아니라 창작품이라고 - 관찰과 충돌한다면 제거될, 시행을 목적으로 과감하게 제시된 추측들; 거의 우연이 아니지만, 가능하다면 결정적인 논박을 습득함으로써 이론을 시험하려는 분명한 의도를 지니고 대개 수행되는 관찰과 충돌한다면 제거될.

V

과학이 관찰에서부터 이론으로 진행된다는 믿음은 아직도 매우 폭넓고 매우 굳건하게 유지되어서 내가 그 믿음을 부인하면 믿을 수 없다는 반응이 나타난다. 나는 심지어 불성실하다는 의심을 받았다 - 누구도 자신의 상식으로 의심할 수 없는 것을 부인한다는 의심.

그러나 사실상 우리가 순수한 관찰만으로써, 이론적 특성은 아무 것도 없이, 시작할 수 있다는 믿음은 터무니없다; 자신의 일생을 자연과학에 바쳐서, 자신이 관찰할 수 있었던 모든 것을 기록하여 귀납적 증거로서 사용되도록 무한한 가치를 지닌 자신의 관찰 수집물을 영국 왕립 협회에 유산으로 남겼던 사람의 이야기로 예시될 것과 같이. 이 이야기는 틀림없이, 풍뎅이는 도움이 되도록 채집될 것이지만 관찰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우리에게 증명한다.

25년 전 나는 다음 지시사항으로써 강연을 시작함으로써 비엔나에 있는 한 무리의 물리학도들에게 이 요점을 철저히 깨닫도록 하려고 노력했다: ‘연필과 종이를 들라; 세심하게 관찰하라, 그리고 여러분이 관찰한 것을 기록하라!’ 물론 학생들은 자신들이 무엇을 관찰하기를 내가 원하는지 물었다. 분명히 ‘관찰하라!’는 지시는 터무니없다.?? (그 지시는, 타동사의 목적어가 이해된 것으로 간주되지 않는다면, 심지어 관용 어법에도 어긋난다.) 관찰은 항상 선택적이다. 관찰에는 선택된 대상이, 분명한 임무가, 흥미가, 관점이, 문제가 필요하다. 그래서 관찰이 하는 묘사는, 속성어(屬性語)와 함께, 기술적 언어(記述的 言語: descriptive language)를 전제로 한다; 관찰이 하는 기술(記述)은 유사성과 분류를 전제로 하고, 유사성과 분류는 흥미와 관점과 문제를 전제로 한다. ‘굶주린 동물은 환경을 먹을 수 있는 것과 먹을 수 없는 것으로 나눈다. 도망치는 동물은 도망치는 길과 숨을 곳을 본다 .... 일반적으로 말해서, 동물의 욕구에 따라서 ... 대상물은 변한다.’라고 카츠(Katz)는 쓴다.?? 오직 이런 방식으로 대상물은 분류될 수 있으며, 유사하거나 유사하지 않게 될 수 있다고 우리는 부언할 것이다 - 욕구와 흥미에 관련됨으로써.

?? 과학적 발견의 논리 30부 참조

?? 카츠, 앞의 책, 인용된 곳

이 규칙은, 동물뿐만 아니라 과학자에도 적용된다. 동물에게는 관점이 동물이 지닌 욕구, 당시의 할일, 그리고 동물의 기대에 의하여 제공된다; 과학자들에게는 과학자가 지닌 이론적 관심, 조사 중인 특별한 문제, 그의 추측과 예상, 그리고 그가 일종의 배경으로서 수용하는 이론들에 의하여 제공된다: 그가 참고하는 틀, 그가 지닌 ‘기대의 지평’.

‘어느 것이 먼저 오는가, 가설(H)인가 혹은 관찰인가(O)?하는 문제는 해결될 수 있다; ’어느 것이 먼저인가, 암탉(H)인가 혹은 달걀(O)인가?의 문제가 그러한 것처럼. 후자(後者)에 대한 답변은, ‘더 앞선 종류의 달걀’이다; 전자(前者)에 대한 답변은, ‘더 앞선 종류의 가설’이다. 우리가 선택하는 어떤 특정한 가설에는 관찰들이 앞선다는 것은 - 예를 들어 그 가설이 고안되어 설명할 관찰들 - 완전히 사실이다. 그러나 이 관찰들은, 참고의 틀을 채택하는 일을 전제로 했다: 기대의 틀이자 이론의 틀. 관찰들에 의미가 있다면, 그 관찰들이 설명할 필요를 낳아서 가설을 만들게 되었다면, 그 관찰들이 옛 이론적 틀인 옛 기대의 한계 내부에서 설명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무한 소급의 위험이 없다. 점점 더 원시적인 이론과 신화(神話)로 돌아가면서, 우리는 결국 무의식적이고 태생적인 기대를 발견할 것이다.

태생적 개념들이라는 이론은 내가 생각하기에 터무니없다; 그러나 모든 유기체는 태생적 반응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그 반응 가운데에는 임박한 사건에 따라 수정된 반응이 있다. 이 반응을 우리는, 이 반응이 의식적이라고 암시하지 않고, ‘기대’로서 묘사할 것이다. 갓 태어난 아기는, 이런 의미에서, 젖이 먹여지기를 ‘기대한다’ (그리고, 보호되고 사랑받기를 기대한다고 사람들은 심지어 주장할 수 있을 것이다). 기대와 지식 사이의 밀접한 관계를 고려하여 우리는 완전히 합당한 의미에서 ‘태생적 지식’에 대하여 말할 것이다. 그러나 이 ‘지식’은 선험적으로 유효하지는 않다; 태생적 기대는, 아무리 강력하고 특별하다 할지라도, 오류일지도 모른다. (갓 태어난 아이는 버려져서 굶주릴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우리는 기대와 함께 태어난다; 선험적으로 유효하지는 않을지라도, 심리학적으로나 유전학적으로 선천적인, 다시 말해서 모든 관찰적 경험에 앞서는 ‘지식’과 함께. 이 기대의 가장 중요한 것 한 가지는 규칙성을 발견하는 저 기대이다. 그 기대는, 우리가 이 욕구를 충족시키는 아이의 기쁨으로부터 볼 것과 같이, 규칙성을 찾으려는 태생적 경향과, 혹은 규칙성을 발견하려 욕구와 관련되어 있다.

규칙성을 발견하는 이 ‘본능적’ 기대는, 심리학적으로 선천적인데, 칸트가 우리의 정신적 도구여서 선험적으로 유효하다고 믿었던 ‘인과율’과 거의 일치한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칸트가 심리학적으로 선천적인 사고방식 즉, 반응 방식과 선험적으로 유효한 믿음을 구별하지 못했다고 말하려는 경향을 보인다. 그러나 나는 칸트의 실수가 완전히 그렇게 조악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 까닭은 규칙성을 발견하려는 기대는 심리학적으로 선천적일 뿐만 아니라, 논리적으로도 선험적이기 때문이다: 그 기대는 논리적으로 모든 관찰적 경험에 선행하는데, 그 까닭은 우리가 본 바와 같이 그 기대가 어떤 유사성의 인지(認知)보다 선행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모든 관찰에는 유사성의 (혹은 비[非]유사성의) 인지(認知)가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이런 의미에서 논리적으로 선험적임에도 불구하고 기대는 선험적으로 유효하지는 않다. 그 까닭은 기대가 실패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우리는 쉽게, 우리의 평범한 환경과 비교하여, 매우 혼란스러워서 우리가 규칙성을 찾는 데에 완전히 실패할 환경을 (그것은 치명적인 환경이리라) 구축할 수 있다. (모든 자연 법칙은 유효한 상태로 남을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종류의 환경은 다음 부에서 언급된 동물 실험에서 사용되었다.)

그리하여 흄에 대한 칸트의 답변은 옳을 뻔했다; 그 까닭은 선험적으로 유효한 기대와, 유전적으로 동시에 논리적으로 관찰에 앞서는 기대를 구별하는 것이 정말로 다소 미묘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칸트는 너무 많은 것을 증명했다. 어떻게 지식이 가능한지를 증명하려고 노력하면서 그는 우리의 지식 추구가 틀림없이 반드시 성공한다는 불가피한 결과를 지녔던 이론을 제시했는데, 그것을 분명히 오류였다. 칸트가, ‘우리의 지성은 그 법칙을 자연으로부터 도출하는 것이 아니라 그 법칙을 자연에 부과한다’고 말했을 때, 그는 옳았다. 그러나 이 법칙들이 반드시 사실이라고, 혹은 우리가 그 법칙들을 자연에 부과하는 데서 반드시 성공한다고, 생각하면서 그는 오류를 저질렀다.?? 자연은, 우리가 지닌 법칙들을 논박된 것으로서 포기할 것을 우리에게 강요하면서, 철저히 성공적으로 매우 빈번히 저항한다; 그러나 우리가 살아간다면 우리는 다시 시도할지도 모른다.

흄이 주장하는 귀납법의 심리학에 대한 이 논리적 비판을 요약하기 위하여 우리는 귀납법 기계를 구축하는 아이디어를 생각해볼지도 모르겠다. 단순화된 ‘세상’ 속에 (예를 들어, 천연색 모조 화폐가 연속적으로 늘어서 있는 세계) 놓여서 그런 기계는 반복을 통해서 자신의 ‘세상’ 속에서 유효한 연속에 관한 법칙을 ‘배우’거나, 심지어 ‘공식화’할 것이다. 그런 기계가 구축될 수 있다면 (그리고 나는 그런 기계가 구축될 수 있다는 데 의심하지 않는다), 아마도 나의 이론이 분명히 틀렸다고 주장될지도 모르겠다; 그 까닭은 기계가 반복에 기초하여 귀납법을 실행할 수 있다면, 우리가 똑같은 일을 하는 것을 막는 논리적인 이유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 주장은 확실하게 들리겠지만 틀린 것이다. 귀납법 기계를 구축하면서 기계 설계가인 우리는 무엇이 그 기계의 ‘세상’을 구성하는지, 어떤 것들이 유사하거나 동일한 것으로 생각되어야 하는지를 선험적으로 결정해야 한다; 그리고 기계가 어떤 종류의 ‘법칙들’을 기계의 ‘세상’ 속에서 ‘발견’할 수 있기를 우리가 바라는지를. 다시 말해서 우리는 기계의 세상 속에서 관계가 있거나 흥미로운 것을 결정하는 얼개를 기계 속으로 구축해 넣어야 한다: 그 기계는 자신의 ‘태생적’ 선택 원리를 지니고 있을 것이다. 유사성에 관한 문제들은, 기계를 대신해서 그렇게 ‘세상’을 해석했던 기계 제작자에 의하여 기계를 대신해서 해결되어 있을 것이다.

?? 칸트는 뉴튼의 역학이 선험적으로 유효하다고 믿었다. (순수 이성 비판의 첫째 판과 둘째 판 사이에 출간된 칸트의 저서 자연 과학의 형이상학적 토대 참조.) 그러나 그가 생각했던 바와 같이, 우리가 우리의 지성은 자체의 법칙을 자연에 부과한다는 사실로써 뉴튼의 이론이 지닌 유효성을 설명할 수 있다면 우리가 지닌 지성은 이것에서 틀림없이 성공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타당하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그러나 그러면 뉴튼의 지식과 같은 선험적 지식이 왜 습득하기 어려워야 하는지를 이해하기 어렵다, 이 비판에 대한 다소 더 완전한 서술은 이 책의 2장, 특히 10부에서, 그리고 이 책의 7장과 8장에서 발견될 수 있다.

규칙성을 찾아서 법칙들을 자연에 부과하는 우리가 지닌 경향은 독단적 사고라는, 혹은 더 일반적으로 독단적 행태라는, 심리학적 현상을 초래한다: 우리는 도처에서 규칙성을 기대하고 심지어 규칙성이 없는 곳에서도 규칙성을 찾으려고 시도한다; 이 시도에 복종하지 않는 사건들을 우리는 일종의 ‘배경 소음(騷音)’으로서 취급하려는 경향을 지닌다; 그래서 우리는 패배를 인정해야 한다. 이 독단주의는 어느 정도 필요하다. 그 독단주의는 우리의 추측을 세상에 강요함으로써 다루질 수 있을 따름인 상황에 의하여 요구된다. 게다가, 이 독단주의로 인하여 우리는 근사치에 의해서 단계 속에 있는 훌륭한 이론에 접근할 수 있다: 우리가 패배를 너무 쉽게 수용한다면, 우리는 우리가 매우 근접하게 옳았다는 것을 발견하지 못하도록 우리 자신을 막을지도 모른다.

독단적 자세가, 그것으로 인하여 우리는 첫인상에 매달리게 되는데, 강력한 믿음을 표시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비판적 자세는, 자체의 원리를 수정할 준비가 되어 있으며 의심을 수용하여 시험을 요구하는데, 보다 약한 믿음을 표시하는 반면. 이제 흄의 이론과, 인기 있는 이론에 따라서, 믿음의 힘은 반복의 산물이어야 한다; 그리하여 그 힘은 항상 경험으로써 성장하여, 항상 덜 원시적인 사람들에게서 더 커야 한다. 그러나 규칙성을 부과하려는 억제되지 않은 소망이며, 그런 상태로 의식(儀式)에서 그리고 반복에서 명백한 쾌락인, 독단적 사고는 원시인들과 어린이들의 특징이다; 그래서 증가하는 경험과 성숙성은 독단주의의 자세라기보다는 신중과 비판의 자세를 낳는다.

여기서 나는 정신분석과 일치하는 한 가지 요점을 아마도 언급할 것이다. 정신 분석학자들은 신경증 환자들 및 다른 사람들이 쉽게 포기되지 않으며 흔히 초기 어린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 개인적인 고정된 유형(pattern)과 일치하여 세상을 해석한다고 주장한다. 삶의 매우 이른 시기에 채택된 유형이나 조직적 체계는 시종일관 유지되며, 모든 새로운 경험은 그 유형이나 조직적 체계에 의하여 해석된다; 말하자면 그 유형이나 조직적 체계를 검증하고 그 유형이나 조직적 체계의 경직성에 기여를 하면서. 이것이, 비판적 자세와 구별되는 것으로서, 내가 독단적 자세라고 불렀던 것에 대한 묘사인데, 비판적 자세는 독단적 자세와 함께 기대의 도식(圖式: schemata)을 - 신화(神話), 아마도 혹은 추측이나 가설 - 재빨리 채택하지만 그 도식(圖式:schemata)을 수정할, 그 도식(圖式: schemata)을 교정할, 그리고 심지어 그 도식(圖式: schemata)을 배격할 준비가 되어 있다. 나에게는 대부분의 신경증이 부분적으로 중단된 비판적 자세의 발전에 기인할 것이라고 제안하는 경향이 있다; 자연스러운 독단주의라기보다는 중단된 독단주의에 기인할 것이라고. 특정 도식적(圖式的) 해석과 반응을 수정하고 조정하는 요구에 저항하는 데 기인할 것이라고. 이 저항은 반대로, 어떤 의미에서, 사지(四肢)의 상처 때문에 우리가 사지(四肢)를 움직이는 것을 두려워하여 사지(四肢)가 뻣뻣해지는 방식과 비슷하게, 두려움을 초래하고 확신과 확실성에 관한 증가된 욕구를 초래하면서 상처나 충격에 기인하는 것으로서 아마도 해석될 것이다. (사지[四肢]의 경우는 독단적 반응과 유사할 뿐만 아니라 그 반응의 한 가지 사례라고 아마도 심지어 주장될는지도 모른다.) 여하한 구체적인 경우에 대한 설명도 필요한 조정을 하는 데에 포함된 어려움의 - 특히 복잡하고 변화하는 세상에서, 상당할 어려움 - 무게를 참작해야 할 것이다: 동물에 대한 실험으로부터 다양한 정도의 신경증적 행태가 상응하는 다양한 어려움에 의하여 멋대로 생겨날 수 있을 것임을 우리는 안다.

지식에 관한 심리학과 흔히 그 심리학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고 여겨지는 심리학적 분야들 사이의 많은 다른 고리를 나는 발견했다 - 예를 들어 예술과 음악에 관한 심리학이다; 사실상, 귀납법에 관한 나의 생각은 서양 대위법의 진화에 관한 추측에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여러분들에게 이 이야기를 하지는 않겠다.

VII

흄의 심리학적 이론에 대한 나의 논리적 비판과, 그 이론에 연결된 고찰은 (그것들 대부분은 내가 1926-7년 사이에 ‘버릇과 규칙에 대한 믿음에 관하여’라고 제목이 붙은 논문에서 상술했다??) 과학 철학의 분야에서 다소 떨어져 있는 듯이 보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독단적 사고와 비판적 사고 사이의, 혹은 독단적 자세와 비판적 자세 사이의 구분은 우리를 바로 우리의 핵심적 문제로 데려간다. 그 까닭은, 비판적 자세는 법칙과 도식(圖式: schemata)을 기꺼이 변경하는 - 법칙과 도식(圖式: schemata)을 시험하는, 논박하는, 가능하면 반증하는 - 자세인 반면, 독단적 자세는 분명히 우리가 지닌 법칙과 도식(圖式: schemata)을 적용하여 확인하려고 노력함으로써 그 법칙과 도식(圖式: schemata)을 검증하려는 경향과 관련되어 있다; 이것은 우리가 비판적 자세를 과학적 자세와, 독단적 자세를 우리가 사이비 과학으로 묘사한 자세와 동일시함을 가리킨다. 발생론적으로 말해서 사이비 과학적 자세는 과학적 자세보다 더 원시적이며 앞선다는 것을 그것은 한 걸음 더 나아가 가리킨다: 사이비 과학적 자세가 과학 이전의 자세라는 것을. 그리고 이 원시성이나 시간적 앞섬에는 논리적인 면(面)이 또한 있다. 그 까닭은 비판적 자세가 독단적 자세에 반대가 된다기보다는 독단적 자세 위에서 부과되기 때문이다: 비판은 비판적 수정이 필요한 현존하며 영향력 있는 믿음을 - 다시 말해서, 독단적 믿음 - 향해야 한다. 비판적 자세는 자체의 원료로서, 말하자면, 다소 독단적으로 보유된 이론이나 믿음을 필요로 한다.

그리하여 과학은 신화(神話)와, 그리고 신화에 대한 비판으로써 시작되어야 한다; 수집된 관찰로써도 아니고, 실험의 발명으로써도 아니고, 신화를 그리고 마술적 기술(技術: techniques)과 관행을 비판적으로 토론함으로써. 과학적 전통은 두 개의 층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과학 이전의 전통과 구분된다. 후자(後者)처럼, 과학적 전통도 자체의 이론들을 전수한다; 그러나 과학적 전통은 이론들을 향한 비판적 자세를 전하기도 한다. 이론들은, 독단으로서가 아니라, 오히려 독단을 토론하고 향상시키는 도전과 함께 전해진다. 이 전통은 고대 그리스의 것이다: 그 전통은 주로 독단의 보존에 관여하지 않았던 최초의 학파 (나는 ‘최초의 철학 학파’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최초의 학파’만을 의미한다) 창시자인 탈레스(Thales)까지 거슬러 올라갈 것이다.??

?? 'Gewohnheit und Gesetzerlebnis'라는 제목으로 1927년 비엔나 시 교육청에 제출된 논문. (미출간)

?? 이 상황전개에 관한 추가 논평은 아래 4장과 5장에서 발견될 것이다.

이론들이 지닌 약점을 발견하여 이론들이 개선되도록 하려는 목적을 지니고 이론을 자유롭게 토론하는 비판적 자세는 합당성의, 합리성의 자세이다. 비판적 자세는 언어적 주장과 관찰 양쪽 모두를 - 그러나, 논쟁을 위한 관찰을 - 광범위하게 이용한다. 비판적 방법을 그리스인들이 발견하여 그 방법이 오래된 중대한 문제 모두에 대한 해결책을 낳으리라는 잘못된 희망이 처음에는 생겨났다. 그 방법이 확실성을 확립하리라는 희망; 그 방법이 우리가 가진 이론을 증명하는 데에, 그 이론을 정당화하는 데에, 도움을 줄 것이라는 희망. 그러나 이 희망은 독단적 사고방식의 잔재였다; 사실상 아무것도 정당화되거나 증명될 수 없다 (수학과 논리 밖에서). 과학에서 합리적인 증거를 요구함은 합리성의 넓은 영역과 합리적 확실성의 좁은 영역을 구분하는 데에 실패했음을 가리킨다: 그 요구는 지지를 받을 수 없고, 불합리한 요구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논리적 논증의, 연역적인 논리적 추론의 역할은 비판적 접근을 위하여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그 역할로 인하여 우리가 우리의 이론들을 증명할 수 있거나, 관찰 서술로부터 그 이론들을 추론할 수 있기 때문이 아니라, 오직 순전히 연역적 추론으로써만 우리의 이론들이 의미하는 것을 우리가 발견하여 그 이론들을 효과적으로 비판할 수 있기 때문이다. 비판은 이론 속에 있는 약점을 발견하려는 시도이며, 이 약점들은 대개 이론으로부터 도출될 수 있는 더 멀리 떨어진 논리적 결과들 속에서만 발견될 수 있다. 순전히 논리적인 추론이 과학에서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는 곳은 여기이다.

흄은 우리가 사실이라고 알 수 있는 것으로부터 - 관찰로부터도 다른 어떤 것으로부터도 안 된다 - 우리의 이론이 유효하게 추론될 수 없다고 강조하는 데서 옳았다. 그는 이것으로부터 우리들의 이론에 대한 우리의 믿음이 불합리하다고 결론을 내렸다. ‘믿음(belief)’이 여기서 우리가 지닌 자연 법칙과 자연적인 규칙성의 일관성을 의심할 능력이 우리에게 없음을 의미한다면, 흄은 다시 옳다: 이런 종류의 독단적 믿음은 이성적 토대라기보다는 생리적 토대를 가진다고 사람들은 아마도 말할 것이다. 그러나 ‘믿음’이라는 용어가 과학 이론을 우리가 비판적으로 수용하는 것을 포함한다고 여겨지면 - 이론이 통과할 수 없는 시험을 우리가 고안하는 데 성공한다면 이론을 수정할 용의와 연결된 잠정적 수용 - 흄은 오류를 저질렀다. 이론을 그렇게 수용하는 데는 비이성적인 것이 없다. 실용적인 목적으로 잘 시험된 이론에 의지하는 데는 심지어 비이성적인 것이 없는데, 그 까닭은 더 많은 이성적 행동 과정이 우리에게 열려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 우리들의 미지의 세상에서 사는 것을 우리가 의도적으로 우리의 임무로 만들었다고 상정(想定)하라; 가능한 한 잘 우리 자신을 그 세상에 알맞게 조절하는 것; 우리가 그 세상 속에서 발견할 수 있는 기회를 이용한다는 것; 그리고 가능하다(가능하다고 상정[想定]할 필요가 우리에게 없다), 그리고 가능한 넓게, 법칙과 설명적 이론의 도움을 받아 그 세상을 설명하는 것. 우리가 이것을 우리의 임무로 만든다면, 시행착오의 - 추측과 논박의 - 방법보다 더 이성적인 절차는 없다: 과감하게 이론을 제시하는 방법; 이론들이 틀렸음을 증명하려고 최선을 다하는, 그리고 우리의 비판적 노력이 성공을 거두지 못하면 이론을 잠정적으로 수용하는, 방법.

여기에서 전개된 관점을 참작하여 모든 법칙과 모든 이론은, 심지어 우리가 더 이상 그것들에게 의심을 느낄 수 없을 때에도, 본질적으로 잠정적이거나 추측성이거나 가설적이다. 이론이 논박되기 전에 우리는 그 이론이 어떤 방식으로 수정되어야 하는지를 알 수 없다. 태양이 24시간 내에 뜨고 질 것임은 ‘합당한 의심을 초월하는 귀납법에 의하여 확립된’ 법칙처럼 여전히 속담 같은 것이다. 이 사례가 아리스토텔레스와 - 얼어붙은 바다와 한밤중의 태양의 나라인 툴레(Thule) 대한 자신의 이야기 때문에 거짓말쟁이라고 여러 해 동안 불렸던 - 마살리아(Massalia)의 피테아스(Pytheas)의 시대에 충분히 잘 역할을 했었다 할지라도, 아직도 사용된다는 것은 기묘하다 (툴레[Thule]는 그리스인들이 유럽의 북쪽 끝을 지칭하던 이름이고 피테아스[Pytheas]는 그리스의 여행가. - 역자 주.).

시행착오의 방법은, 물론, 과학적이거나 비판적인 접근방식과 동일하지만은 않다 - 추측과 논박의 방법과. 시행착오의 방법은 아인슈타인에 의하여 적용될 뿐만 아니라, 더 독단적 양상으로는 아메바에 의해서도 적용된다. 차이점은 시행에 놓여 있다기보다는 착오를 향한 비판적이고 건설적인 자세에 놓여 있다; 자신의 이론과 재주가 고안하도록 허용하는 가장 심한 실험적 시험의 도움을 포함하여, 자신의 이론을 탐구적 논증으로써 논박하기 위하여 과학자가 밝히려고 의식적이고 신중하게 노력하는 착오.

비판적 자세는 우리의 이론이, 우리의 추측이, 적자생존을 위한 투쟁에서 우리를 대신해서 고통을 당하도록 만들려는 의식적인 시도의 결과로서 아마도 묘사될 것이다. 그 자세는 부적당한 가설이 제거되는 데서 살아남을 기회를 우리에게 제공한다 - 더 독단적인 자세는 우리를 살해함으로써 부적당한 가설을 배격할 때. (호랑이의 생명을 포함하여, 생명의 신성함을 믿었기 때문에 사라졌던 한 인도 사회에 관한 인상적인 이야기가 있다.) 우리는 그리하여 덜 적당한 이론들을 제거함으로써 우리의 능력 범위 내에서 가장 적합한 이론을 얻는다. ‘적합성’으로써 나는 ‘유용성’만이 아니라 진실을 의미한다; 아래 3장과 10장 참조.) 이 과정이 비이성적이거나 더 이성적 정당화가 필요하다고 나는 생각하지 않는다.

VIII

이제 경험의 심리학에 대한 우리의 논리적 비판에서 우리가 지닌 실제적 문제인 과학의 논리에 대한 문제로 선회하자. 내가 말한 것들 중에서 몇 가지가, 그것들이 귀납법을 선호하는 특정 심리학적 편견을 제거했을 한, 여기서 우리에게 도움을 줄 것이라 할지라도, 귀납법의 논리적 문제를 내가 다루는 것은 이 비판으로부터, 그리고 모든 심리학적 고찰로부터, 완전히 독립적이다. 우리가 귀납적 추리를 한다고 주장되는 심리학적 사실을 여러분들이 독단적으로 신뢰하지 않는다면, 여러분은 두 가지 논리적 요점을 제외하고 나의 전체 이야기를 잊을 것이다: 구획의 기준으로서 시험가능성이나 반증가능성에 관한 나의 논리적 언급; 그리고 귀납법에 대한 흄의 논리적 비판.

내가 말한 것을 고찰하면 당시 나의 흥미를 끌었던 두 가지 문제 사이에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구획과, 귀납법이나 과학적 방법. 과학의 방법은 비판, 다시 말해서 시도된 반증이라는 것을 알기는 쉬웠다. 그러나 구획과 귀납법의 두 가지 문제가 어떤 의미에서 하나라는 것을 알아채는 데는 나에게 몇 년이 걸렸다.

왜 그렇게 많은 과학자들이 귀납법을 신뢰할까?라고 나는 물었다. 자연 과학은 귀납적 방법에 의하여 특징지어진다고 그들이 믿었기 때문에 그들이 그렇게 했음을 나는 발견했다 - 관찰과 실험의 긴 연속에서 출발하고 관찰과 실험의 긴 연속에 의존하는 방법에 의하여. 진짜 과학과 형이상학적이거나 사이비 과학적 사색 사이의 차이점은 귀납적 방법이 사용되는지 아닌지에만 의존한다고 그들은 믿었다. (내 자신의 용어 사용법으로 표현해서) 귀납적 방법만이 만족스러운 구획 기준을 제공할 수 있다고 그들은 믿었다.

나는 최근에 한 위대한 물리학자가 쓴 괄목할만한 철학 서적에서 이 믿음에 대한 흥미로운 공식화를 우연히 발견하였다 - 막스 보른(Max Born)의 원인과 우연에 관한 자연 철학(Natural Philosophy of Cause and Chance).?? 그는 이렇게 쓴다, ‘귀납법으로 인하여 우리는 몇 가지 관찰을 일반적인 법칙으로 일반화할 수 있다: 낮 다음에 밤이 오고 밤 다음에 낮이 온다는 것 ... 그러나 일상생활에는 귀납법의 유효성에 대한 분명한 기준이 없는 반면, ... 과학은 자체의 적용을 위하여, 규범을, 즉 일의 규칙을 이룩했다.’ 보른(Born)은 (그의 표현 방법이 보여주는 바와 같이, ‘귀납법의 유효성에 대한 분명한 기준’을 담고 있는) 이 귀납적 규범의 내용을 어디에서도 밝히지 않는다; 그러나 그 규범의 수용을 위한 ‘논리적 주장은 없다’고 그는 강조한다: ‘그것은 신념의 문제다’; 그리하여 그는 ‘귀납법을 기꺼이 형이상학적 원리로 부르려’ 한다. 그러나 왜 그는 그런 유효한 귀납적 규칙에 대한 규범이 틀림없이 존재한다고 믿는가? 그가 ‘과학의 법칙을 모르고 그 법칙을 거부하는 사람들의 거대한 집단, 그 집단 가운데는 반(反)예방접종 협회의 회원들과 점성술을 믿는 사람들이 있다’고 말할 때 이것은 분명해진다. ‘그들과 논쟁을 한다는 것은 쓸모가 없다; 나는 그들을 강제로 내가 신뢰하는 유효한 귀납법의 동일한 기준을 수용하도록 할 수 없다: 과학적 규칙의 규범을.’ 이것으로 인하여 ‘유효한 귀납법에는 여기서 과학과 사이비-과학 사이에서 구획의 기준의 역할을 할 의도가 있었음’이 분명해진다.

그러나 ‘유효한 귀납법’의 이 규칙이나 재주는 심지어 형이상학적이지도 않다는 것은 명백하다: 그런 규칙이나 재주는 존재하지 않을 따름이다. 아무리 자주 반복된다 할지라도, 진정한 관찰로부터 추론된 일반화가 사실임을 어떤 규칙도 보증할 수 없다. (보른[Born] 자신은 뉴튼의 물리학이 귀납법에 근거하고 있다고 믿었을지라도, 그 물리학이 거둔 성공에도 불구하고 그 물리학의 진실성을 신뢰하지 않았다.) 그래서 과학의 성공은 귀납법의 규칙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라, 행운과 독창력과 비판적 논증의 순전히 연역적 규칙에 근거한다.

나는 나의 결론 몇 가지를 다음과 같이 요약할 것이다:

(1) 귀납법, 다시 말해서 많은 관찰에 근거를 둔 추론은 신화(神話)이다 (저자는 신화[神話]라는 말을 허구나 비과학적 상상으로 사용한다. - 역자 주.). 그 추론은 심리학적 사실도 아니고 평범한 삶의 사실도 아니요 과학적 과정의 사실도 아니다.

(2) 과학의 실제 과정은 추측으로써 작동하는 것이다: 결론으로 도약하는 것 - (예를 들어 흄과 보른[Born]에 의하여 주시된 바와 같이) 흔히 단 한 번의 관찰 후에.

(3) 반복된 관찰과 실험은 과학에서 우리의 추측과 가설에 대한 시험으로서 기능한다, 다시 말해서 시도된 논박으로서.

(4) 귀납법에 대한 잘못된 믿음은, 전통적이지만 잘못 믿어진, 귀납적 방법만이 제공할 수 있는 구획의 기준에 대한 필요에 의하여 강화된다.

(5) 그런 귀납적 방법에 대한 개념은, 증명가능성의 기준처럼, 그릇된 구획을 의미한다.

(6) 우리가 귀납법은 이론들을 확실하다기보다는 개연적으로 만든다고 말한다 해도 나의 논지는 조금도 변하지 않는다. (특히 아래 10장 참조.)

?? 막스 보른(Max Born), 원인과 우연에 관한 자연 철학(Natural Philosophy of Cause and Chance), 옥스퍼드, 7쪽, 1949.

IX

내가 제시한 바와 같이, 귀납법의 문제가 구획 문제의 한 가지 사례이거나 한 가지 국면일 뿐이라면, 구획 문제에 대한 해답은 귀납법 문제에 해답을 틀림없이 우리에게 제공한다. 이것이 즉각적으로 명백하지는 않을지라도 실제 경우라고 나는 믿는다.

귀납법 문제의 간단한 공식화를 위하여 우리는 보른(Born)에게 다시 선회할 수 있는데, 그는 이렇게 쓴다: ‘... 아무리 확장된다 할지라도, 관찰이나 실험은 제한된 숫자의 반복 이상을 내놓을 수는 없다’; 그러므로, ‘법칙에 관한 서술은 - B는 A에 의존한다 - 항상 경험을 초월한다. 그러나 이런 종류의 서술은 도처에서 항시 만들어질 수 있고, 때때로 빈약한 재료로부터 만들어질 수 있다.’??

다시 말해서, 귀납법의 논리적 문제는 (a) 법칙은 ‘경험을 초월하기’ 때문에 관찰이나 실험에 의하여 정당화하는 일이 불가능하다는 (보른[Born]에 의하여 그렇게 잘 표현된) 흄의 발견으로부터 출현한다. (흄처럼, 보른[Born]도 ‘빈약한 재료’에 깊은 인상을 받는데, 다시 말해서 법칙이 근거할 극소수의 관찰된 사례들.) 이것에 우리는 (c) 과학에서 관찰과 실험만이, 법칙들과 이론들을 포함하여, 과학적 서술의 수용이나 배격을 결정할 것이라고 주장하는 경험주의의 교설을 추가해야 한다.

이 (a), (b), 그리고 (c)의 세 가지 원칙은 처음 보기에 충돌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 표면적인 충돌이 귀납법의 논리적 문제를 구성한다.

이 충돌에 직면하여, 보른(Born)은 자신이 ‘형이상학적 원칙’이라고 지칭하는 것을 위하여 (버트런드 러셀을 포함하여, 칸트와 많은 다른 사람들이 그에 앞서서 그랬던 바와 같이) (c), 경험주의의 교설을 포기한다; 그 ‘형이상학적 원칙’은 그가 심지어 공식화하려고 시도하지도 않고, 그가 ‘일의 규범이나 규칙’으로서 모호하게 묘사하며; 심지어 희망적으로 보였고 명백하게 옹호될 수도 없지 않은, 그 원칙에 관한 어떤 공식화도 나는 본 적이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실제로 원칙 (a)와 (c)는 충돌하지 않는다. 과학에 의한 법칙이나 이론 수용은 잠정적일 뿐임을 우리가 깨닫는 순간 우리는 이것을 알 수 있다; 모든 법칙과 이론은 추측이나 (내가 때때로 ‘가설주의’라고 불렀던 관점인) 잠정적 가설들이라고, 그리고 원래 우리로 하여금 법칙이나 이론을 수용하도록 만들었던 이전 증거를 반드시 배격하지 않고도 새로운 증거에 근거하여 그 법칙이나 이론을 우리가 거부할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

경험주의 교설인 (c)는, 이론의 운명인 이론의 수용이나 배격이 - 시험 결과로써 - 관찰과 실험에 의하여 결정되기 때문에, 완전히 보전될 수 있다. 이론이 우리가 고안할 수 있는 가장 엄격한 시험을 견딜 수 있다면, 그 이론은 수용된다; 그 이론이 그 시험을 견디지 못하면, 그 이론은 배격된다. 그러나 이론은 어떤 의미에서도 경험적 증거로부터 추론되지는 않는다. 심리학적

?? 원인과 우연에 관한 자연 철학, 6쪽.

?? 이론이란 잠정적으로만 수용된다는 것을 보른(Born)과 다른 많은 사람들이 동의할 것을 나는 의심하지 않는다. 그러나 널리 퍼져있는 귀납법에 대한 믿음은 이 관점이 지닌 폭넓은 의미가 거의 보이지 않음을 드러낸다.

귀납도 논리적 귀납도 없다. 오직 이론의 거짓됨만 경험적 증거로부터 추론될 수 있으며, 이 추론은 순전히 연역적 추론이다.

흄은 관찰 서술로부터 이론을 추론하는 것이 가능하지 않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것은 관찰 서술로써 이론을 논박하는 가능성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이 가능성을 완벽하게 인식하면 이론과 관찰 사이의 관계를 철저하게 분명해진다.

이것으로 인하여 원리 (a), (b), 그리고 (c) 사이에 발생한다고 주장되는 충돌의 문제와, 그 문제와 함께 흄의 귀납법 문제가 해결된다.

X

그리하여 귀납법의 문제는 해소된다. 그러나 한 세기나 된 철학적인 문제에 대한 간단한 해답이 무엇보다 급한 것처럼 보인다. 비트겐슈타인과 그의 학파는 진정한 철학적 문제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그 철학적 문제들은 해결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 분명히 타당하다. 나의 동시대인들 가운데서 다른 사람들은 철학적 문제들이 있다고 믿으며, 그 문제들을 존중한다; 그러나 그들은 그 문제들을 너무 중시하는 것같다; 그들은 그 문제들이, 금기(taboo)가 아니라 할지라도 해결될 수 없다고 믿는 듯싶다; 그래서 그 문제 어느 것에도 간단하고 말끔하고 투명한 해결책이 있다는 주장에 의하여 그들은 충격을 받고 두려움을 느낀다. 해답이 있다면 그 해답은 틀림없이 심오하거나 적어도 복잡하다고 그들은 느낀다.

이것이 어떠하든지, 내가 1933년에 인식(Erkenntnis)??의 편집자에게 보낸 편지에서 처음으로 발표했고, 나중에 과학적 발견의 논리(The Logic of Scientific Discovery)에서 출간했던 해답에 대한 간단하고 말끔하고 투명한 비판을 나는 아직도 기다리고 있다.

물론 사람은, 내가 공식화하여 해결했던 것과는 다른, 귀납법에 관한 새로운 문제들을 창안할 수 있다. (그 문제의 공식화는 절반이 해결된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아직도 그 해결책이 나의 이전 해결책으로부터 쉽게 얻어질 수 없는 문제의 재(再)공식화를 보아야 한다. 나는 이제 이 재(再)공식화 몇 가지를 논의할 예정이다.

던져질 질문 한 가지는 이것이다: 어떻게 우리는 실제로 관찰 서술에서 이론으로 도약하는가?

이 문제가 철학적이라기보다는 심리학적으로 보인다 할지라도, 사람들은 심리학을 불러오지 않고도 그 문제에 관하여 긍정적인 것을 말할 수 있다. 사람들은 먼저 도약은 관찰 서술로부터가 아니라 문제 상황으로부터라고, 그리고 이론으로써 우리는 틀림없이 문제를 초래한 관찰들을 설명한다고 (다시 말해서, 소위 초기 조건인 다른 수용된 이론들에 의하여, 그리고 다른 관찰 서술들에 의하여 강화된 이론으로부터 관찰들 연역하기) 말할 수 있다. 이로 인하여 방대한 숫자의 가능한 이론들이 좋은 것과 나쁜 것으로 남는다; 그리하여 우리의 질문이 답변이 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것으로 인하여 우리가 우리의 질문을 했을 때 우리 염두에는 ‘관찰 서술로부터 어떻게 우리는 이론으로 도약하는가?’보다 더 많은 것이 있었다는 것은 상당히 분명해진다. 우리가 염두에 두고 있던 질문은 ‘어떻게 우리는 관찰 서술에서 좋은 이론으로 도약하는가?’였던 것으로 지금 보인다. 그러나 이것에 대한 답변은: 처음에 아무 이론으로 도약해서 그 이론을 시험함으로써 그 이론이 좋은 것인지 아닌지를 알아냄으로써 이다; 다시 말해서

?? 비트겐슈타인은 1946년에도 이 믿음을 여전히 지니고 있었다; 아래 2장의 주석 8 참조.

?? 위 주석 5 참조.

비판적 방법을 적용하여, 많은 나쁜 이론들을 제거하고 많은 새로운 이론들을 창안하면서. 모든 사람이 이것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다른 방법은 없다.

다른 질문들이 때때로 제시되었다. 귀납법의 원래 문제는 귀납법을 정당화하는, 다시 말해서 귀납적 추론을 정당화하는 문제라고 일컬어졌다. 소위 ‘귀납적 추론’은 항상 무효이며 그래서 분명히 정당화될 수 없다고 말함으로써 여러분이 이 문제에 답변을 한다면, 다음과 같은 새로운 문제가 틀림없이 출현한다: 어떻게 여러분은 여러분의 시행착오 방법을 정당화하는가? 답변: 시행착오의 방법은 관찰 서술에 의하여 잘못된 이론들을 제거하는 방법이다; 그리고 이것에 대한 정당화는, 우리가 단칭 명제들의 진실을 수용한다면 우리로 하여금 일반 명제들이 지닌 거짓을 주장하도록 허용하는 연역가능성의 순전히 논리적 관계이다.

때때로 제시되는 또 다른 문제는 이것이다: 반증된 서술보다 반증되지 않은 서술을 선호하는 것은 왜 합당한가? 이 질문에 대하여 몇 가지 복잡한 답변이 제시되었는데, 예를 들어 실용적 답변들이다. 그러나 실용적 관점에서, 틀린 이론들이 흔히 충분히 잘 작동하기 때문에, 질문이 나타나지 않는다: 공학(engineering)이나 운항(navigation)에서 사용되는 대부분의 공식은, 탁월한 근사치이고 취급하기가 쉬울지라도, 거짓임이 밝혀져 있다; 그리고 그 공식들은 거짓임을 알고 있는 사람들에 의하여 확신적으로 이용된다.

유일한 올바른 답변은 정직한 답변이다: 우리는 진리를 탐구하기 때문에 (우리가 진리를 발견했다는 것을 우리는 확신할 수 없다 할지라도), 그리고 반증이 되지 않은 이론들은 여전히 사실일지도 모르는 반면 반증된 이론들은 거짓으로 알려지거나 믿어지기 때문에. 게다가, 우리는 반증되지 않는 이론 모두를 선호하지는 않는다 - 비판에 비추어, 경쟁하는 이론보다 더 낫게 보이는 이론만을 선호한다: (다른 일시적으로 수용된 이론들을 고려하여) 우리가 지닌 문제를 해결하고, 잘 시험되며, 그리고 그 이론이 더 많은 시험을 견디어낼 것이라고 우리가 생각하거나 추측하거나 희망하는 이론.

귀납법의 문제는, ‘미래가 과거와 같을 것이라고 믿는 것은 왜 합당한가?’라고, 그리고 이 문제에 대한 만족스러운 대답은 그런 믿음이 사실상 합당하다는 것을 분명하게 만들 것이라고 또한 언급되었다. 나의 답변은 많은 매우 중요한 면에서 미래는 과거와 매우 다를 것이라고 믿는 것이 합당하다는 것이다. 틀림없이 미래는, 여러 면에서, 과거와 같으리라는, 그리고 (우리에게는 근거를 두고 행동할 더 나은 상정[想定]이 없기 때문에) 충분히 시험된 법칙들이 지속적으로 유효하리라는, 상정(想定)에 근거하여 행동함이 완전히 합당하다; 그러나 우리가 지금 의존하는 몇 가지 법칙이 쉽게 신뢰할 수 없는 것으로 판명될 것이기 때문에 그런 행동 과정이 간혹 우리를 심각한 난관으로 이끌어 가리라고 믿는 것이 또한 합당하다. (한밤중의 태양을 기억하라!) 과거의 경험으로부터, 그리고 우리가 지닌 일반적인 과학적 지식으로부터 판단하여, 미래가 그럴 것이라고 말할 사람들이 염두에 두고 있는 아마도 대부분의 모습에서 미래는 과거와 같지 않을 것이라고 사람들은 아마도 심지어 말할지도 모른다. 물은 때때로 갈증을 해소시키지 못할 것이고, 공기는 숨 쉬는 사람들을 질식시킬 것이다. 피상적인 탈출구는 자연 법칙들이 변하지 않을 것이라는 의미에서 미래가 과거와 같을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지만, 이것은 논점을 회피하는 것이다. 우리 앞에 변하지 않는 규칙성을 우리가 지니고 있다고 우리가 생각한다는 조건으로만 우리는 ‘자연 법칙’에 대하여 말한다; 그리고 우리가 그 법칙이 변하는 것을 발견하면 우리는 계속해서 그 법칙을 ‘자연 법칙’이라고 부르지 않을 것이다. 물론 우리의 자연 법칙 탐색은 우리가 그 법칙 찾기를 희망한다는 것과, 우리가 자연 법칙이 있다고 믿는다는 것을 가리킨다; 그러나 특정 자연 법칙에 대한 우리의 믿음에는 그 자연 법칙을 논박하는 데에 성공하지 못한 우리의 비판적 시도보다 더 안전한 토대가 있을 리가 없다.

귀납법의 문제를 우리가 지닌 믿음의 합당성으로 표현하는 사람들은, 그들이 흄의 혹은 흄 이후의 이성에 대한 회의적 절망에 만족하지 못한다면, 완전히 옳다. 우리는 과학에 대한 믿음이 원시적 마술에 대한 믿음만큼 비이성적이라는 관점을 정말로 배격해야 한다 - 두 가지 모두가 신념에 근거한 관습이나 전통인 ‘전체적 이데올로기(total ideology)’를 수용하는 문제라는 견해를. 그러나 우리가, 흄과 함께, 우리의 문제를 우리가 지닌 믿음들의 합당성에 관한 문제로서 공식화한다면 우리는 신중해야 한다. 우리는 이 문제를 세 가지로 분리해야 한다 - 우리의 오래된 구획의, 즉 어떻게 과학과 원시적 마술을 구분하는가의 문제; 과학적이거나 비판적인 과정의 합리성 문제, 그리고 그 과정 내부에서 관찰의 역할 문제; 그리고 마지막으로 과학적이고 실용적인 목적들을 위한 우리의 이론 수용에 관한 합리성 문제. 이 세 가지 문제 모두에 대한 해결책이 여기에 제시되었다.

사람들은 또한 과학적 과정과 이 과정의 - 다시 말해서 과학적 이론들 - 결과에 대한 (잠정적) 수용의 합당성 문제를 합리성의 즉, 달리 이 과정이 성공할 것이라는 믿음의 문제와 혼동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실제로 실용적인 과학적 탐구에서, 더 나은 대안이 없기 때문에 이 믿음은 의심할 바 없이 불가피하고 합당하다. 그러나 그 믿음은, 내가 (5부에서) 주장한 바와 같이, 이론적 의미에서 확실히 정당화될 수 없다. 게다가, 일반적인 논리적 근거로써 과학적 추구는 성공할 것 같음을 우리가 증명할 수 있다면, 사람들은 우리의 세상에 대하여 더 많은 것을 알려는 긴 인간의 역사 속에서 성공 같은 것이 왜 그렇게 드물었는지 이해할 수 없으리라.

그러나 귀납법 문제를 표현하는 또 다른 방법은 확률을 통해서이다. t를 이론(theory)으로, e를 증거(evidence)로 하라: 우리는 P(t,e)를 요구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e가 주어진 t의 확률. 귀납법의 문제는 그리하여 다음과 같이 표현될 수 있다고 흔히 믿어진다: 우리로 하여금 어떤 이론 t를 위하여, 주어진 경험적 증거 e와 관련하여, 그 확률이 무엇인지를 계산하도록 하는 확률 계산을 구성하라; 그리고 보강 증거의 축적과 함께 P(t,e)가 증가함을 - 아무튼 값이 ½ 이상 - 증명하라.

과학적 발견의 논리(The Logic of Scientific Discovery)에서 나는 문제에 대한 이 접근방식이 왜 근본적으로 틀렸다고 내가 생각하는지를 설명했다.?? 이것을 분명히 하기 위하여 나는 거기서 확률입증이나 확증의 정도를 구분하여 도입했다. (‘확증[confirmation]’이라는 용어는 최근 많이 사용되고 오용되어서 나는 그 용어를 검증주의자들에게 넘기고 나의 목적들 위해서는 ‘입증[corroboration]’만을 쓰기로 결심했다.

?? 과학적 발견의 논리 (위의 주석 5 참조), 10장, 특히 80-83부, 또한 34부 이하. 또한 ‘확률을 위한 독립적 공리들의 체계(A Set of Independent Axioms for Probability)’, 정신, N.S. 47, 1938년, 275쪽 참조. (이 주석은 수정되어 과학적 발견의 논리 새 부록 ii에 재수록되어 있다. 또한 이 장의 두 번째 주석도 참조.)

‘확률’이라는 용어는, 예를 들어 케인즈(Keynes)와 제프리즈(Jeffreys) 그리고 내 자신에 의하여 공리화(公理化)되어, 잘 알려진 확률 계산을 충족시키는 여러 의미 중 몇 가지 의미에서 가장 잘 사용된다; 그러나 우리가 입증의 정도가 틀림없이 확률이라고 - 다시 말해서 입증의 정도가 틀림없이 확률 계산을 충족시킨다 - 비판 없이, 상정(想定)하지 않는다면, 물론 아무 것도 말의 선택에 의존하지 않는다).

나의 책에서 나는 왜 우리가 높은 입증도를 지닌 이론에 흥미를 갖는지 설명했다. 그리고 이것으로부터 우리가 높은 확률을 지닌 이론들에 우리가 관심을 갖는 것이 왜 잘못인지를 나는 설명했다. 서술의 (혹은 서술의 집합의) 확률은 항상, 서술이 적게 말할수록, 더 크다는 것을 나는 지적했다; 서술이 지닌 확률은 서술이 지닌 내용이나 연역적 능력에 반비례하며, 그리하여 서술이 지닌 설명력에 반비례한다. 따라서 모든 흥미롭고 강력한 서술은 틀림없이 낮은 확률을 지닌다; 그래서 반대의 경우도 성립한다: 높은 확률을 지닌 서술은, 말하는 것이 거의 없어서 설명력이 없기 때문에, 과학적으로 흥미를 끌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높은 입증도를 지닌 이론들을 구할지라도, 과학도로서 우리는 높은 확률의 이론이 아니라 설명을 구한다; 다시 말해서 강력하고 확률이 낮은 이론들.?? 반대 견해는 - 과학은 높은 확률을 목표로 한다는 - 검증주의의 특징적 상황전개이다: 당신이 이론을 검증할 수 없거나, 귀납법으로 이론을 확실히 할 수 없음을 발견한다면, 당신은 귀납법이 적어도 그만큼을 산출해낼 것이라는 희망에서 확실성에 대한 일종의 ‘대용물(Ersatz)’로서 확률을 찾을지도 모른다.

나는 구획과 귀납법의 두 문제를 꽤 상세하게 논의하였다. 그러나 이 강연에서 내가 이 분야에서 한 작업에 관한 일종의 보고를 여러분에게 하기 시작했기 때문에, 나는 부록의 형태로 1934년과 1953년 사이에 내가 연구하던 몇 가지 다른 문제에 대하여 몇 마디 말을 보태겠다. 구획과 귀납법의 두 가지 문제에 대한 해답의 결과를 생각해내려고 노력함으로써 나는 이 문제들 대부분에 도달하게 되었다. 그러나 시간 때문에 나는 나의 말을 계속하여, 내가 지녔던 옛 문제로부터 새로운 문제가 어떻게 출현하는지 여러분에게 설명할 수 없다. 이제 진척된 문제들에 대한 토론을 내가 심지어 시작도 할 수 없기 때문에, 나는 여기저기서 몇 마디 설명을 하면서 나는

?? 확률에 관한 (다음 주석 참조) 나의 저서 과학적 발견의 논리 82-83 부에 표시된 요구를 충족시키는 C(t,e)의, 다시 말해서, 입증도의 (증거 e에 관한 이론 t의) 정의(定義)는 다음과 같다:

C(t,e) = E(t,e)(1+P(t)P(t.e)),

여기서 E(t,e) = (P(e,t) - P(e))/(P(e,t) +P(e))는 e에 관한 t의 설명력의 (비부가적) 척도이다. C(t,e)가 확률이 아님을 주목하라: 그것은 - 1 (e에 의한 t의 논박)과 C(t,t) ≼+1 사이의 값이었을 것이다. 법칙과 같아서 검증이 불능한 서술 t는 경험적 증거 e로써 C(t,e) = C(t,t)에 도달하지 못한다. C(t,t)는 t입증도이며 t시험가능도, t내용과 동일하다. 위의 1부 끝에 있는 요점 (6) 속에 함축된 요구 때문에, 나는 그러나 입증의 (혹은, 내가 전에 말하곤 하던 바와 같이, 확증의) 개념을 완전히 공식화하여 내놓은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1955년 이 논문의 초고에 추가:)

나의 글 ‘확인도’, 영국 과학 철학, 5, 1954년 143쪽 이하 또한 참조. (또한 5, 334쪽 참조) 그 후 나는 이 정의(定義)를 다음과 같이 간소화했다 (영국 과학 철학, 1955년, 5, 359쪽:)

C(t,e) = (P(e,t) - P(e))/(P(e,t) - P(et) + P(e))

그 이상의 개선점에 대해서는 영국 과학 철학 6, 1955년 56쪽 참조.

여러분들에게 그 문제들의 목록만 제공하는 데 그쳐야만 할 것이다. 그러나 그 목록만으로도 유용할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 목록은 접근방식의 풍요로움에 관한 아이디어를 내놓는 데에 도움이 될 것이다. 그 목록은 우리들이 지닌 문제가 어떠한지를 예시하는 데에 도움을 줄 것이다; 그래서 그 목록은 문제가 얼마나 있는지를 밝혀서, 철학적 문제들이 존재하는지 혹은 실제로 무슨 철학적 문제가 관련되어 있는지의 문제에 대하여 근심할 필요가 전혀 없다는 것을 여러분에게 확신시킬 것이다. 그래서 이 목록에는, 이성적 논증의 도움을 받아서 문제를 해결하려는 옛 전통과 단절하지 않으려는 나의 마음에 대한, 그리하여 현대 철학의 발전과 조류와 움직임에 흔쾌히 참여하지 않으려는 나의 마음에 대한, 사과가 함축적으로 담겨있다.

부록: 과학 철학 속의 몇 가지 문제점

추가 문제의 목록 속의 나의 최초 세 가지 항목은 확률 계산과 연결되어 있다.

(1) 확률의 빈도 이론. 과학적 발견의 논리(The Logic of Scientific Discovery)에서 나는 과학에서 사용되는 것처럼 일관적인 확률 이론을 개발하는 데에 관심이 있었다; 그것은 확률의 통계학적이거나 빈도 이론을 의미한다. 그러나 나는 내가 ‘논리적 확률’이라고 불렀던 또 다른 개념을 사용하여 거기서 작업을 했다. 그러므로 나는 일반화의 - 다른 해석들을 허용하는 확률의 형식적 이론의 - 필요를 느꼈다: (a) 주어진 증거와 관련된 서술의 논리적 확률의 이론으로서; 절대적인 논리적 확률에 대한, 다시 말해서 0인 증거와 관련한 서술의 확률 척도에 대한, 이론을 포함하여; (b) 사건들의 주어진 전체(ensemble)에 (혹은 ‘집합’) 관련된 한 사건의 확률 이론으로서. 이 문제를 해결하면서 나는 몇 가지 추가 해석을 허용하는 간단한 이론을 획득했다: 그 이론은 내용의 계산이나 연역적 체계의 계산으로, 혹은 집합의 계산 (부울 대수)으로서 혹은 명제의 계산으로서 해석될 것이다; 그리고 또한 성향의 계산으로서.??

?? 정신인용된 곳의 나의 주석 참조. 그곳에서 기초적인 (다시 말해서 비연속적인) 확률을 위하여 주어진 공리계는 다음과 같이 단순화될 수 있다 (‘x(_)’는 x의 보집합을 의미한다; ‘xy’는 xy의 교집합 또는 연접을 나타낸다):

(A1) P(xy)≽P(yx) (교환)

(A2) P(x(yz))≽P((xy)z) (결합)

(A3) P(xx)≽P(x) (동어반복)

(B1) P(x)≽P(xy) (단조)

(B2) P(xy) + P(xy(_)) = P(x) (덧셈)

(B3) (x)(Ey)(P(y) ≠ O이고 P(xy) = P(x)P(y)) (독립 [원문은 Independence로 표현되어 있고 이한구 교수는 곱셈으로 번역함. - 역자 주])

(C1) If P(y) ≠ O이면, P(x,y) = P(xy)/P(y) (상대 확률의 정의[定義])

(C2) If P(y) = O이면, P(x,y) = P(x,x) = P(y,y) (상대 확률의 정의[定義])

공리 (C2)는, 이런 형태로, 유한수의 이론에만 유효하다; 상대 확률에 관한 정리(定理)들 대부분에서 P(y) ≠ O와 같은 조건을 우리가 인내할 준비가 되어 있다면 그 공리는 생략될 것이다. 상대 확률에 대하여, (A1) - (B2), (C1) - (C2), 그리고 (B3) '이고'까지가 충분하다. 절대 확률에 대해서는, (A1) - (B3)이 필요하고 충분하다; (B3)가 없으면 우리는, 예를 들어, 상대 확률을 통한 절대 확률의 정의(定義)인

P(x) = P(x, xx(_))를

도출할 수 없고

그 약화된 추론인

(x)(Ey) (P(y) ≠ O이고 P(x) = P(x,y))를

도출할 수도 없다. 이 식에서 (B3)가 즉시 귀결된다 ('P(x,y)'에 그 정의항을 대입함으로써). 그리하여 (B3)는, 아마도 (C2)를 제외하고 모든 다른 공리처럼, 관련된 개념들의 의도된 의미의 한 부분을 표현하며, 우리는, (B3)과 함께 혹은 (C1) 및 (C2)과 함께, (B1)에서 도출될 수 있는 ≽P(x)나 1≽P(x,y)를 (카르납[Carnap]과 다른 사람들이 제안한 바와 같이) ‘비본질적 협약’으로 간주해서는 안 된다.

(1955년 이 논문의 초고에 추가됨; 아래 주석 31 또한 참조.)

그 후 나는 유한 무한 체계에 유효한 (그리고 그 안에서 절대 확률이 위의 마지막에서 첫 번째 공식에서처럼 정의될 수 있는) 상대 확률을 위한 공리계를 개발했다. 그 공리군은:

(B1) P(x,z)≽P(xy,z)

(B2) If P(y,y) ≠ P(u,y)이면 P(x,y) + P(x(_),y) = P(y,y)

(B3) P(xy,z) = P(x,yz)P(y,z)

(C1) P(x,x) = P(y,y)

(D1) ((u)P(x,u) = P(y,u))이면 P(w,x) = P(w,y)

(E1) (Ex) (Ey) (Eu) (Ew) P(x,y) ≠ P(u,w)

이것은 내가 영국 과학 철학 6, 1955년 56쪽 6행에 편찬한 체계에 대하여 약간 수정한 것이다; ‘공리 3’은 여기서 ‘D1'으로 지칭된다. (인용된 서적 176쪽 하단을 또한 참조. 덧붙여, 57쪽의 마지막 문단의 3행에서 단어 ‘모두[all]’ 앞의 괄호 안에 '그리고 그 한계가 존재한다[and that the limit exists]'가 삽입되어야 한다.)

(1961년 이 책의 초고에 참가됨.)

이 문제 모두에 대한 상당히 완전한 설명이 과학적 발견의 논리의 새 부록에서 발견될 것이다.

나는 이 주석을 초판에서처럼 남겨두었는데 그 이유는 다양한 장소에서 내가 그 주석을 언급했기 때문이다. 이 주석과 앞의 주석에서 다루어진 문제는 그 후 과학적 발견의 논리의 새 부록에서 더 자세하게 다루어졌다. (1961년도 미국판에 나는 단지 세 가지 공리의 체계를 덧보탰다; 이 책의 부록 2 또한 참조.)

(2) 확률의 성향 해석에 관한 이 문제는 양자 이론에 대한 나의 흥미로부터 나왔다. 양자 이론은 통계적으로 해석되어야 한다고 보통 믿어지며, 그래서 의심할 바 없이 통계학은 양자 이론의 경험적 시험에 필수적이다. 그러나 내가 믿기에 이것은 의미에 대한 시험가능성 이론의 위험이 분명해지는 요점이다. 이론의 시험은 통계적이라 할지라도, 그리고 이론이 (가령, 슈뢰딩거[Schrödinger]의 방정식) 통계적 결과를 암시한다 할지라도, 이론에 통계적 의미가 있을 필요는 없다: 그리고 사람들은 (일반화된 힘과 같은 것인) 객관적 성향에 대한, 그리고 성향의 범위에 대한 보기를 내놓을 수 있는데, 그것들은 자체가 통계적이 되지 않고도 통계적 방법으로 측정될 수 있다. (주석 35와 함께, 아래 3장의 마지막 문단을 또한 참조.)

(3) 그런 경우에 통계를 사용함은 주로 순전히 통계적이 될 필요가 없는 이론들에 대한 경험적 시험을 제공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 나의 저서 과학적 발견의 논리 1934년도 판에서 내가 만족하도록 다루어지지 않았던 - 통계적 서술의 논박가능성의 문제를 제기한다. 그러나 나중에 나는 만족스러운 해결책을 구축하기 위한 모든 요소들이 그 책 속에서 사용될 준비가 된 채 놓여있는 것을 발견했다; 내가 제시했던 특정 보기들은, 어떤 의미에서, 자신들의 부류의 최단 계열(the shortest sequence)인 한 무리의 무한한 우연 같은 계열에 대한 수학적 특징화를 허용한다.?? 통계적 서술은 이 ‘최단 계열’과 비교하여 시험될 수 있다고 이제 일컬어질 것이다; 시험된 전체의 통계적 속성이 이 ‘최단 계열’의 초기 마디의 통계적 속성과 다르면 그 서술은 논박된다.

(4) 양자론의 형식체계를 해석함과 관련된 몇 가지 추가적 문제들이 있다. 과학적 발견의 논리의 한 장에서 나는 ‘공식적’ 해석을 비판했으며, 여전히 나는 나의 비판이 한 가지 요점을 제외하고 모든 점에서 유효하다고 생각한다: (77부에서) 내가 사용한 보기는 틀렸다. 그러나 내가 그 부분을 쓴 이래 아인슈타인과 포돌스키(Podolsky)와 로젠(Rosen)은, (결정론적인) 자신들의 경향이 나의 경향과 완전히 다르다 할지라도, 내가 내놓은 보기를 대체할 수 있는 사고(思考)-실험(thought-experiment)을 발표했다. 결정론에 대한 아인슈타인의 믿음은 (나는 그 문제를 그와 토론할 기회를 가졌다), 내가 생각하기에, 근거가 없고 또한 불행한 것이다: 그 믿음으로 인하여 아인슈타인은 자신의 비판의 많은 힘을 빼앗겨버려서, 그의 많은 비판이 그의 결정론과 별개임이 강조되어야 한다.

(5) 결정론 자체의 문제에 관하여, 나는 심지어 고전적 물리학도, 언뜻 보이는 의미에서 결정론적인데, 라플라스(Laplace)의 의미에서 물리적 세계의 결정론적 관점을 지지하는 데에 사용된다면 잘못 해석된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노력했다,

(6) 이와 관련하여, 나는 단순성의 문제(the problem of simplicity)를 또한 언급할 것이다 - 이론의 단순성으로, 내가 이론의 내용과 연결할 수 있었다. 보통 이론의 단순성이라고 불리는 것은, 흔히 상상되었던 바와 같이, 이론의 확률이 아니라 이론의 비개연성과 관련되어 있다. 이것으로 인하여 정말로 우리는, 위에 개괄된 과학 이론으로부터, 왜 먼저 가장 간단한 이론을 시험하는 것이 항상 이로운지를 추론할 수 있다. 가장 간단한 이론들은 우리에게 그 이론들은 혹심한 시험에 넘기는 최상의 기회를 제공한다: 더 간단한 이론은 항상 보다 복잡한 이론보다 더 높은 시험도(試驗度)를 지닌다.?? (그러나 나는 이것이 단순성에 관한 모든 문제를 해결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아래 10장의 18부 참조.)

(7) 이 문제와 밀접하게 관련된 것은 가설이 지닌 특수한(ad hoc) 특징에 관한, 그리고 이 특수한(ad hoc) 특징의 (내가 그렇게 지칭한다면, ‘특수함[ad hocness]’의) 정도에 관한, 문제이다. 과학의 목적이 가능한 한 특수하지 않은 설명적 이론들을 얻는 것이라고 우리가 상정(想定)한다면, 사람들은 과학의 방법론이 (그리고 과학의 역사 또한) 세부적으로 이해될 수 있게 됨을 밝힐 수 있다: ‘나쁜’ 이론은 특수한 반면, ‘훌륭한’ 이론은 특수하지 않다. 다른 한 편으로 귀납법의 확률 이론들은, 비의도적이지만 반드시, 수용될 수 없는 규칙을 의미함을 사람들은 밝힐 수 있다: 항상 가장 특수한, 다시 말해서 이용 가능한 증거를 가능한 한 적게 초월하는, 이론을 사용하라. (아래 주석 28에 언급된 나의 논문 ‘과학의 목적’ 또한 참조.)

(8) 한 가지 중요한 문제는 우리가 더 발전된 이론적 과학에서 발견하는 설명적 가설의 층()들에 관한, 그리고 이 ()들 사이의 관계에 관한,

?? 과학적 발견의 논리 163쪽 (55부) 참조; 특히 새로운 부록 *vi 참조.

?? 같은 책, 41-46부. 그러나 아래 10장 18부 또한 참조.

문제이다. 뉴튼의 이론은 케플러(Kepler)와 갈릴레오(Galileo)의 이론으로부터 귀납되거나 심지어 연역될 수 있다고 흔히 주장된다. 그러나 뉴튼의 이론은 (그의 절대 공간 이론을 포함하여) 엄밀하게 말해서 케플러의 이론과 (우리가 2체의 문제[to the two-body problem]만?? 다루고 혹성 사이의 상호 인력을 무시한다 할지라도) 또한 갈릴레오의 이론을 부인한다; 이 두 이론 사이의 근사치가, 두말할 것 없이, 뉴튼의 이론으로부터 연역될 수 있다 할지라도. 그러나 연역적 추론이나 귀납적 추론도 일관적인 전제들로부터 그 전제들과 모순이 되는 결론을 초래할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 이 고찰들로 인하여 우리는 (a) 이론 x는 이론 y의 근사치라는, 그리고 (b) 이론 x는 ‘사실에 대한 충분한 근사치’이다의 두 가지 의미에서, 이론들의 ‘층(層)들’ 사이의 논리적 관계와 근사치의 개념을 또한 분석할 수 있다. (아래 10장 또한 참조.)

(9) 한 무리의 흥미로운 문제들이 이론적 개념들은 측정하는 조작들에 의하여 정의(定義)되어야 한다는 교설인 조작주의(operationalism)에 의하여 제기된다. 이 관점에 대항하여, 측정이 이론들을 상정(想定)한다고 제시될 수 있다. 이론 없이는 측정이 없고, 비이론적 관계로 만족스럽게 묘사될 수 있는 조작도 없다. 그렇게 하려는 시도는 항상 순환적이다; 예들 들어, 길이 측정(the measurement of length)을 묘사하는 데는 열(熱)과 온도측정의 (기초적인) 이론이 필요하다; 그러나 이것들은 반대로 길이 측정을 포함하고 있다.

조작주의를 분석하면 측정에 대한 일반적인 이론에 관한 필요성이 드러난다; 순진하게 측정 관행을 ‘주어진 것’으로 간주하지 않고, 과학적 가설을 시험하는 데서 그 관행의 기능을 분석함으로써 그 관행을 설명하는 이론. 이것은 시험도(試驗度)라는 교설의 도움을 받아서 수행될 수 있다.

조작주의와 관련되어 있으며 밀접하게 유사한 것은 행동주의의 교설인데 다시 말해서, 모든 시험-서술들은 행동을 묘사하기 때문에, 우리의 이론들도 역시 가능한 행동으로써 서술되어야 한다는 교설이다. 그러나 그 추론은, 모든 시험-서술들이 관찰적이기 때문에 이론들 또한 가능한 관찰로써 서술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현상주의의 교설만큼 효력이 없다. 이 모든 교설들은 의미에 관한 검증 이론의 형태들이다; 다시 말해서, 귀납주의의.

조작주의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는 것은 도구주의인데, 다시 말해서 과학적 이론들을 임박한 사건들에 대한 예언과 같은 그런 목적들을 위한 실용적 도구나 연장으로서 해석하는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이론들이 이용될

?? 원문의 문장에 언급된 모순들은 P. 뒤앙(Duhem), 물리 이론의 목적과 구조(The Aim and Structure of Physical Theory) (1906년; P. P. 위너[Wiener]의 영역본, 1954년)에 의하여 다체 문제(many-body problem)의 경우를 위하여 지적되었다. 2체 문제(two-body problem)의 경우에, 모순이 케플러의 제 3법칙과 관련하여 나타나는데, 이 케플러의 법칙은 2체 문제를 위하여 다음과 같이 재공식화 될 수 있을 것이다. ‘S를 각 쌍의 물체가 태양의 질량을 갖도록 물체의 쌍의 집합'으로 하라; 그렇다면 S 안의 어떤 쌍에게도 a³/T² = 일정하다.’ 분명히 이것은 뉴튼의 이론을 부인하는데, 뉴튼의 이론은 적절하게 선정된 단위들에 대하여 a³/T² = m0 + m₁(m0는 태양의 질량과 동일하고 일정하며, m₁는 제 2물체의 질량으로 이 물체에 따라 다르다)을 산출한다. 그러나 물론 ‘a³/T² = 일정하다’는, 제 2물체의 변화하는 질량들이 태양의 질량과 비교하여 모두 무시할 수 있다면, 탁월한 근사치이다. (나의 논문 ‘과학의 목적[The Aim of Science]’, 비율, 1, 1957년 24쪽 이하와 나의 저서 과학적 발견의 논리후기(後記) 15부 참조.)

것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도구주의는 이론들이 도구로서 가장 잘 이해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것이 오류임을 나는 응용과학과 순수과학의 공식이 지닌 다양한 기능들을 비교함으로써 증명하려고 노력했다. 이런 관계에서 예언의 이론적 (다시 말해서 비실용적) 기능에 관한 문제가 또한 해결될 수 있다. (아래 3장 5부 참조.)

동일한 관점으로부터 언어의 기능을 - 도구로서 - 분석한다는 것은 흥미롭다. 이 분석에서 즉각적으로 발견할 수 있는 한 가지 일은 우리가 세상에 관하여 말하기 위하여 기술적 언어(descriptive language)를 사용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실재론(realism)을 옹호하는 새로운 주장을 제공한다.

조작주의와 도구주의는, 내가 그렇게 지칭할 수 있다면, ‘이론주의(theoreticism)’에 의하여 갈음되어야 한다고 나는 믿는다: 우리는 항상 복잡한 이론의 틀 속에서 일을 하고 있다는, 그리고 우리는 단순히 상관관계를 목표로 하는 것이 아니고 설명을 목표로 한다는, 사실을 인정함으로써.

(10) 설명 자체의 문제. 과학적 설명은 미지의 것을 알려진 것으로 환원하는 것이라고 흔히 일컬어졌다. 순수과학이 의도라면, 아무 것도 진리로부터 멀리 나아갈 수 없으리라. 과학적 설명이란, 반대로, 알려진 것을 미지의 것으로 환원하는 것이라고 역설(逆說)없이 언급될 수 있다. 순수과학에서, 순수과학을 ‘주어진 것’이나 ‘알려진 것’으로서 여기는 응용과학과 반대로, 설명은 항상 가설들을 더 높은 수준의 보편성을 지닌 다른 가설들로 논리적으로 환원하는 것이다; 우리가 아직 거의 알지 못하며, 아직도 시험되어야 하는 상정(想定)에게 ‘알려진’ 사실들과 ‘알려진’ 이론들의 논리적 환원. 설명력(說明力)의 정도에 대한 분석과, 진짜와 가짜 설명 사이 및 설명과 예언 사이의 관계에 대한 분석이 이런 관계에서 크게 흥미로운 문제의 보기들이다.

(11) 이리하여 나는 자연과학에서의 설명과 역사적 설명 사이의 관계에 관한 문제에 (이상하게도 순수과학과 응용과학에서의 설명 문제와 논리적으로 유사한 문제) 도달한다; 사회과학의 방법론에서 문제의 광대한 분야에, 특히 역사적 예언의 문제에 도달한다; 역사주의역사적 결정론; 그리고 역사적 상대주의. 이 문제들은, 다시, 언어적 상대주의를 포함하여, 결정론과 상대주의의 더 일반적 문제와 연결되어 있다.??

(12) 흥미를 끄는 추가적인 문제는 소위 ‘과학적 객관성’의 분석이다. 나는 이 문제를 여러 곳에서, 특히 소위 ‘지식의 사회학’에 대한 비판과 관련하여 다루었다.??

(13) 귀납법 문제의 해결에 대해 경고하기 위하여, 여기서 다시 귀납법 문제에 대한 해결책의 한 가지 유형이 (위의 4부 참조) 언급되어야 한다. (이런 종류의 해결책들은, 일반적으로, 그 해결책들이 해결하기로 된 문제를 분명하게 형성하지 않고도 제시된다.)

?? 나의 저서 역사주의의 빈곤(Poverty of Historicism), 1957년, 28부 주석 30-32 참조; 또한 나의 저서 열린사회와 그 적들 2권 부록 I (1962년도 제 4판에 추가됨) 참조.

?? 역사주의의 빈곤, 32부; 과학적 발견의 논리 8부; 열린사회와 그 적들 2권 23장과 2권의 부록 (제 4판). 이 구절들은 상호 보완적이다.

내가 염두에 두고 있는 관점은 다음과 같이 묘사될 것이다. 우리가, 실제로, 귀납적 방법을, 그것도 성공적인 귀납적 방법을 사용함을 아무도 심각하게 의심하지 않는다는 것은 우선 당연시된다. (이것이 신화라는, 그리고 더 신중하게 분석되면 귀납법의 겉으로 분명한 경우들이 시행착오라는 방법의 경우들로 밝혀진다는, 나의 제안은 이것에 대한 철저히 불합리한 제안이 당연히 받아야 하는 경멸을 받으며 취급된다.) 그 다음에 귀납이론의 과제는 우리의 귀납적 정책이나 과정을 묘사하여 분류하는 것과, 아마도 그것들 중 어느 것이 가장 성공적이어서 신뢰할 수 있는 것이며 어느 것이 덜 성공적이어서 신뢰할 수 없는지를 지적하는 것이라고 언급된다; 그래서 정당화에 관하여 진척된 질문은 잘못된 것이라고. 그리하여 내가 염두에 두고 있는 관점은, 어떻게 우리가 귀납적으로 논증하는가? (quid facti?)를 묘사하는 사실적 문제와 우리의 귀납적 논증에 관한 정당화 문제 (quid juris?) 사이의 구별이 잘못 놓인 구별이라는 주장에 의하여 특징지어진다. 연역적 논증이 ‘유효’할 동일한 의미에서 귀납적 논증이 ‘유효’하리라 우리는 기대할 수 없기 때문에, 요구된 정당화는 비합리적이라고 또한 일컬어진다: 귀납법은 연역법이 아닐 뿐이다, 그래서 귀납법에게 논리적 - 다시 말해서, 연역적 - 유효성의 기준에 맞추라고 요구하는 것은 부당하다. 우리는 그러므로 귀납법을 합당성에 관한 그 자체의 기준으로써 - 귀납적 기준으로써 - 판단해야 한다.

귀납법의 이 방어는 틀렸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 방어는 신화(神話)를 사실로서, 그리고 주장되는 사실을 합리성의 기준으로서 생각하여 신화(神話)가 합리성의 기준이 되는 결과를 낳을 뿐만 아니라; 이런 방식으로, 여하한 비판에 대항하는 여하한 독단도 옹호하는 데에 사용될 교설을 전파하기도 한다. 게다가 그 방어는 형식적 즉, ‘연역적’ 논리의 지위를 오해한다. (그 방어는 그 지위를 우리의 사실적, 다시 말해서, 심리학적 ‘사고[思考]의 법칙들’의 체계화로서 보았던 사람들만큼 그 지위를 오해한다.) 그 까닭은, 내가 주장하는 바, 우리가 연역법의 규칙들을 기준으로서 채택하기로 결정하거나 그 규칙들이 수용될 것으로 포고하기 때문에 연역법이 유효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진실이 (논리적으로 더 강력한) 전제들에서부터 (논리적으로 더 약한) 결론들로 전달되는, 그리고 거짓이 결론들로부터 전제들로 다시 전달되는, 규칙을 연역법이 채택하여 통합하기 때문에 연역법은 유효하다. (이 거짓의 재전달이 형식적 논리를 이성적 비판의 원칙으로 만든다 - 다시 말해서, 논박의 원칙.)

내가 여기서 비판하고 있는 관점을 지닌 사람들에게 시인될 한 가지 요점은 이것이다. 전제들로부터 결론으로 논증하면서 (혹은 ‘연역적 방향’이라고 불릴 것에서), 우리는 전제들의 진실성이나 확실성이나 확률로부터 상응하는 결론의 속성으로 논증한다; 우리가 결론으로부터 전제들로 (그리하여 우리가 ‘귀납적 방향’이라고 불렀던 것 속으로) 논증한다면, 우리는 결론의 거짓이나 불확실성이나 불가능성이나 비개연성으로부터 상응하는 전제들의 속성으로 논증하는 반면; 따라서 더욱 특별히 연역적 방향으로 논증에 적용되는 확실성과 같은 그런 기준들은 귀납적 방향으로 논증에 또한 적용되지 않는다고 우리는 정말로 시인해야 한다. 그러나 심지어 나의 이 시인도 결국에는 내가 여기서 비판하고 있는 관점을 지닌 사람들에게 반대가 되고 만다; 그 까닭은 우리들이 귀납적 방향으로 확실성이 아니라 우리의 ‘일반화’의 확률을 향하여 논증할 것이라고 그들이 틀리게 상정(想定)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제시되었던 직관적인 확률 개념에도 불구하고 이 상정(想定)은 틀렸다.

이것이 내가 여러분들에게 말하려고 했던 이야기의 두 가지 풍요롭고 근본적인 문제들을 추구하면서 도달했던 과학 철학의 몇 가지 문제만의 목록이다.??

?? (13)은 1961년에 추가되었다. 이 강연을 하던 1953년과 내가 교정을 검토하던 1955년 이래, 이 부록에 넣은 목록이 매우 늘어났다, 그리고 여기 목록에 들어있지 않은 문제들을 다루는 몇 가지 더 최근의 기고문이 이 책과 (특히 아래 10장 참조) 다른 책에서 (나의 저서 과학적 발견의 논리의 새 부록과, 내가 1962년의 4판에 추가했던 나의 저서 열린사회와 그 적들 2권의 새 부록을 특히 참조) 발견될 것이다. 특히 나의 논문 ‘확률 마술, 무지로부터의 지식’, 변증법(Dialectica), 11, 1957년, 354-374쪽 참조.

(1989년에 추가.) 데이비드 밀러(David Miller)와 내가 증명할 수 있었던 바와 같이, 확률적인 귀납적 지지가 존재한다면 항상 부정적이라는 것은 흥미롭다; 다시 말해서, 반대지지(countersupport). 우리의 논문 ‘왜 확률적 지지는 귀납적이 아닌가?’, 런던 왕립협회 철학회보, 연속물 A, 321, 1987년, 569-596쪽 참조.

- “추측과 논박, 과학적 지식의 성장”, 칼 포퍼 -

CONJECTURES

There could be no fairer destiny for any ... theory than that it should point the way to a more comprehensive theory in which it lives on, as limiting case.

ALBERT EINSTEIN

1

SCIENCE: CONJECTURES AND

REFUTATIONS

Mr. Turnbull had predicted evil consequences, ... and

was now doing the best in his power to bring about

the verification of his own prophecies.

ANTHONY TROLLOPE

I

WHEN I received the list of participants in this course and realized that I had been asked to speak to philosophical colleagues I thought, after some hesitation and consultation, that you would probably prefer me to speak about those problems which interest me most, and about those developments with which I am most intimately acquainted. I therefore decided to do what I have never done before: to give you a report on my own work in the philosophy of science, since the autumn of 1919 when I first began to grapple with the problem, 'When should a theory be ranked as scientific?' or 'Is there a criterion for the scientific character or status of a theory?'(이 문장에서는 since가 [~ 이래]의 의미로 쓰였기 때문에 완료시제가 와야 한다. 문법적 오류이다. 역자 주)

The problem which troubled me at the time was neither, 'When is a theory true?' nor, 'When is a theory acceptable?' My problem was different. I wished to distinguish between science and pseudo-science; knowing very well that science often errs, and that pseudo-science may happen to stumble on the truth.

I knew, of course, the most widely accepted answer to my problem: that science is distinguished from pseudo-science - or from 'metaphysics' - by its empirical method, which is essentially inductive, proceeding from observation or experiment. But this did not satisfy me. on the contrary, I often formulated my problem as one of distinguishing between a genuinely empirical method and a non-empirical or even a pseudo-empirical method - that is to say, a method which, although it appeals to observation and experiment, nevertheless does not come up to scientific standards. The latter method may be exemplified by astrology, with its stupendous mass of

A lecture given at Peterhouse, Cambridge, Summer 1953, as part of a course on developments and trends in contemporary British philosophy, organized by the British Council; originally published under the title 'Philosophy of Science: a Personal Report' in British Philosophy in Mid-Century, ed. C. A. Mace, 1957.

empirical evidence based on observation - on horoscopes and on biographies.

But as it was not the example of astrology which led me to my problem I should perhaps briefly describe the atmosphere in which my problem arose and the examples by which it was stimulated. After the collapse of the Austrian Empire there had been a revolution in Austria: the air was full of revolutionary slogans and ideas, and new and often wild theories. Among the theories which interested me Einstein's theory of relativity was no doubt by far the most important. Three others were Marx's theory of history, Freud's psycho-analysis, and Alfred Adler's so-called 'individual psychology'.

There was a lot of popular nonsense talked about these theories, and especially about relativity (as still happens even today), but I was fortunate in those who introduced me to the study of this theory. We all - the small circle of students to which I belonged - were thrilled with the result of Eddington's eclipse observations which in 1919 brought the first important confirmation of Einstein's theory of gravitation. It was a great experience for us, and one which had a lasting influence on my intellectual development.

The three other theories I have mentioned were also widely discussed among students at that time. I myself happened to come into personal contact with Alfred Adler, and even to co-operate with him in his social work among the children and young people in the working-class districts of Vienna where he had established social guidance clinics.

It was during the summer of 1919 that I began to feel more and more dissatisfied with these three theories - the Marxist theory of history, psychoanalysis, and individual psychology; and I began to feel dubious about their claims to scientific status. My problem perhaps first took the simple form, 'What is wrong with Marxism, psycho-analysis, and individual psychology? Why are they so different from physical theories, from Newton's theory, and especially from the theory of relativity?'

To make this contrast clear I should explain that few of us at the time would have said that we believed in the truth of Einstein's theory of gravitation. This shows that it was not my doubting the truth of those other three theories which bothered me, but something else. Yet neither was it that I merely felt mathematical physics to be more exact than the sociological or psychological type of theory. Thus what worried me was neither the problem of truth, at that stage at least, nor the problem of exactness or measurability. It was rather that I felt that these other three theories, though posing as sciences, had in fact more in common with primitive myths than with science; that they resembled astrology rather than astronomy.

I found that those of my friends who were admirers of Marx, Freud, and Adler, were impressed by a number of points common to these theories, and especially by their apparent explanatory power. These theories appeared to be able to explain practically everything that happened within the fields to which they referred. The study of any of them seemed to have the effect of an intellectual conversion or revelation, opening your eyes to a new truth hidden from those not yet initiated. once your eyes were thus opened you saw confirming instances everywhere: the world was full of verifications of the theory. Whatever happened always confirmed it. Thus its truth appeared manifest; and unbelievers were clearly people who did not want to see the manifest truth; who refused to see it, either because it was against their class interest, or because of their repressions which were still 'un-analysed' and crying out for treatment.

The most characteristic element in this situation seemed to me the incessant stream of confirmations, of observations which 'verified' the theories in question; and this point was constantly emphasized by their adherents. A Marxist could not open a newspaper without finding on every page confirming evidence for his interpretation of history; not only in the news, but also in its presentation - which revealed the class bias of the paper - and especially of course in what the paper did not say. The Freudian analysts emphasized that their theories were constantly verified by their 'clinical observations'. As for Adler, I was much impressed by a personal experience. once, in 1919, I reported to him a case which to me did not seem particularly Adelerian, but which he found no difficulty in analysing in terms of his theory of inferiority feelings, although he had not even seen the child. Slightly shocked, I asked him how he could be so sure. 'Because of my thousandfold experience', he replied: whereupon I could not help saying: 'And with this new case, I suppose, your experience has become thousand-and-one-fold.'

What I had in mind was that his previous observations may not have been much sounder than this new one; that each in its turn had been interpreted in the light of 'previous experience', and at the same time counted as additional confirmation. What, I asked myself, did it confirm? No more than that a case could be interpreted in the light of the theory. But this meant very little, I reflected, since every conceivable case could be interpreted in the light of Adler's theory, or equally of Freud's. I may illustrate this by two very different examples of human behaviour: that of a man who pushes a child into the water with the intention of drowning it; and that of a man who sacrifices his life in an attempt to save the child. Each of these two cases can be explained with equal ease in Freudian and in Adlerian terms. According to Freud the first man suffered from repression (say, of some component of his Oedipus complex), while the second man had achieved sublimation. According to Adler the first man suffered from feelings of inferiority (producing perhaps the need to prove to himself that he dared to commit some crime), and so did the second man (whose need was to prove to himself that he dared to rescue the child). I could not think of any human behaviour which could not be interpreted in terms of either theory. It was precisely this fact - that they always fitted, that they were always confirmed - which in the eyes of their admirers constituted the strongest argument in favour of these theories. It began to dawn on me that this apparent strength was in fact their weakness.

With Einstein's theory the situation was strikingly different. Take one typical instance - Einstein's prediction, just then confirmed by the findings of Eddington's expedition. Einstein's gravitational theory had led to the result that light must be attracted by heavy bodies (such as the sun), precisely as material bodies were attracted. As a consequence it could be calculated that light from a distant fixed star whose apparent position was close to the sun would reach the earth from such a direction that the star would seem to be slightly shifted away from the sun; or, in other words, that stars close to the sun would look as if they had moved a little away from the sun, and from one another. This is a thing which cannot normally be observed since such stars are rendered invisible in daytime by the sun's overwhelming brightness; but during an eclipse it is possible to take photographs of them. If the same constellation is photographed at night one can measure the distances on the two photographs, and check the predicted effect.

Now the impressive thing about this case is the risk involved in a prediction of this kind. If observation shows that the predicted effect is definitely absent, then the theory is simply refuted. The theory is incompatible with certain possible results of observation - in fact with results which everybody before Einstein would have expected.? This is quite different from the situation I have previously described, when it turned out that the theories in question were compatible with the most divergent human behaviour, so that it was practically impossible to describe any human behaviour that might not be claimed to be a verification of these theories.

These considerations led me in the winter of 1919-20 to conclusions which I may now reformulate as follows.

(1) It is easy to obtain confirmations, or verifications, for nearly every theory - if we look for confirmations.

(2) Confirmations should count only if they are the result of risky predictions; that is to say, if, unenlightened by the theory in question, we should have expected an event which was incompatible with the theory - an event which would have refuted the theory.

(3) Every 'good' scientific theory is a prohibition: it forbids certain things to happen. The more a theory forbids, the better it is.

(4) A theory which is not refutable by any conceivable event is non-scientific. Irrefutability is not a virtue of a theory (as people often think) but a vice.

(5) Every genuine test of a theory is an attempt to falsify it, or to refute it. Testability is falsifiability; but there are degrees of testability: some theories are more testable, more exposed to refutation, than others; they take, as it were, great risks.

(6) Confirming evidence should not count except when it is the result of a genuine test of the theory; and this means that it can be presented as a serious but unsuccessful attempt to falsify the theory. (I now speak in such cases of 'corroborating evidence'.)

? This is a slight oversimplification, for about half of the Einstein effect may be derived from the classical theory, provided we assume a ballistic theory of light.

(7) Some genuinely testable theories, when found to be false, are still upheld by their admirers - for example by introducing ad hoc some auxiliary assumption, or by re-interpreting the theory ad hoc in such a way that it escapes refutation. Such a procedure is always possible, but it rescues the theory from refutation only at the price of destroying, or at least lowering, its scientific status. (I later described such a rescuing operation as a 'conventional twist' or a 'conventional stratagem'.)

One can sum up all this by saying that the criterion of the scientific status of a theory is its falsifiability, or refutability, or testability.

II

I may perhaps exemplify this with the help of the various theories so far mentioned. Einstein's theory of gravitation clearly satisfied the criterion of falsifiability. Even if our measuring instruments at the time did not allow us to pronounce on the results of the tests with complete assurance, there was clearly a possibility of refuting the theory.

Astrology did not pass the test. Astrologers were greatly impressed, and misled, by what they believed to be confirming evidence - so much so that they were quite unimpressed by any unfavourable evidence. Moreover, by making their interpretations and prophecies sufficiently vague they were able to explain away anything that might have been a refutation of the theory had the theory and the prophecies been more precise. In order to escape falsification they destroyed the testability of their theory. It is a typical soothsayer's trick to predict things so vaguely that the predictions can hardly fail: that they become irrefutable.

The Marxist theory of history, in spite of the serious efforts of some of its founders and followers, ultimately adopted this soothsaying practice. In some of its earlier formulations (for example in Marx's analysis of the character of the 'coming social revolution') their predictions were testable, and in fact falsified.? Yet instead of accepting the refutations the followers of Marx re-interpreted both the theory and the evidence in order to make them agree. In this way they rescued the theory from refutation; but they did so at the price of adopting a device which made it irrefutable. They thus gave a 'conventional twist' to the theory; and by this stratagem they destroyed its much advertised claim to scientific status.

The two psycho-analytic theories were in a different class. They were simply non-testable, irrefutable. There was no conceivable human behaviour which could contradict them. This does not mean that Freud and Adler were not seeing certain things correctly: I personally do not doubt that much of what they say is of considerable importance, and may well play its part one day in a psychological science which is testable. But it does mean that those 'clinical observations' which analysts naïvely believe confirm their story cannot do this any more than the daily confirmations which

? See, for instance, my Open Society and Its Enemies, ch. 15, section iii, and notes 13-14

astrologers find in their practice.? And as for Freud's epic of the Ego, the Super-ego, and the Id, no substantially stronger claim to scientific status can be made for it than for Homer's collected stories from Olympus. These theories describe some facts, but in the manner of myths. They contain most interesting psychological suggestions, but not in a testable form.

At the same time I realized that such myths may be developed, and become testable; that historically speaking all - or very nearly all - scientific theories originate from myths, and that a myth may contain important anticipations of scientific theories. Examples are Empedocles' theory of evolution by trial and error, or Parmenides' myth of the unchanging block universe in which nothing even happens and which, if we add another dimension, becomes Einstein's block universe (in which, too, nothing ever happens, since everything is, four-dimensionally speaking, determined and laid down from the beginning). I thus felt that if a theory is found to be non-scientific, or 'metaphysical' (as we might say), it is not thereby found to be unimportant, or insignificant, or 'meaningless', or 'nonsensical'.? But it cannot claim to be backed by empirical evidence in the scientific sense - although it may easily be, in some genetic sense, the 'result of observation'.

(There were a great many other theories of this pre-scientific or

? 'Clinical observations', like all other observations, are interpretations in the light of theories (see below, section iv ff.); and for this reason alone they are apt to seem to support those theories in the light of which they were interpreted. But real support can be obtained only from observations undertaken as tests (by 'attempted refutations'); and for this purpose criteria of refutation have to be laid down beforehand: it must be agreed which observable situations, if actually observed, mean that the theory is refuted. But what kind of clinical responses would refute to the satisfaction of the analyst not merely a particular analytic diagnosis but psycho-analysis itself? And have such criteria even been discussed or agreed upon by analysts? Is there not, on the contrary, a whole family of analytic concepts, such as 'ambivalence' (I do not suggest that there is no such thing as ambivalence), which would make it difficult, if not impossible, to agree upon such criteria? Moreover, how much headway had been made in investigating the question of the extent to which the (conscious or unconscious) expectations and theories held by the analyst influence the 'clinical responses' of the patient?(To say nothing about the conscious attempts to influence the patient by proposing interpretations to him, etc.) Years ago I introduced the term 'Oedipus effect' to describe the influence of a theory or expectation or prediction upon the event which it predicts or describes: it will be remembered that the causal chain leading to Oedipus' parricide was started by the oracle's prediction of this event. This is a characteristic and recurrent theme of such myths, but one which seems to have failed to attract the interest of the analysts, perhaps not accidentally. (The problem of confirmatory dreams suggested by the analyst is discussed by Freud, for example in Gesammelte Schriften, III, 1925, where he says on p. 314: 'If anybody asserts that most of the dreams which can be utilized in an analysis ... owe their origin to [the analyst's] suggestion, then no objection can be made from the point of view of analytic theory. Yet there is nothing in this fact', he surprisingly adds, 'which would detract from the reliability of our results.')

? The case of astrology, nowadays a typical pseudo-science, may illustrate this point. It was attacked, by Aristotelians and other rationalists, down to Newton's day, for the terrestrial ('sublunar') events. In fact Newton's theory of gravity, and especially the lunar theory of the tides, was historically speaking an offspring of astrological lore. Newton, it seems, was most reluctant to adopt a theory which came from the same stable as for example the theory that 'influenza' epidemics are due to an astral 'influence'. And Galileo, no doubt for the same reason, actually rejected the lunar theory of the tides; and his misgivings about Kepler may easily be explained by his misgivings about astrology.

pseudo-scientific character, some of them, unfortunately, as influential as the Marxist interpretation of history; for example, the racialist interpretation of history - another of those impressive and all-explanatory theories which act upon weak minds like revelations.)

Thus the problem which I tried to solve by proposing the criterion of falsifiability was neither a problem of meaningfulness or significance, nor a problem of truth or acceptability. It was the problem of drawing a line (as well as this can be done) between the statements, or systems of statements, of the empirical sciences, and all other statements - whether they are of a religious or of a metaphysical character, or simply pseudo-scientific. Years later - it must have been in 1928 or 1929 - I called this first problem of mine the 'problem of demarcation'. The criterion of falsifiability is a solution to this problem of demarcation, for it says that statements or systems of statements, in order to be ranked as scientific, must be capable of conflicting with possible, or conceivable, observations.

III

Today I know, of course, that this criterion of demarcation - the criterion of testability, or falsifiability, or refutability - is far from obvious; for even now its significance is seldom realized. At that time, in 1920, it seemed to me almost trivial, though it solved for me an intellectual problem which had worried me deeply, and one which also had obvious practical consequences (for example, political ones). But I did not yet realize its full implications, or its philosophical significance. When I explained it to a fellow student of the Mathematics Department (now a distinguished mathematician in Great Britain), he suggested that I should publish it. At the time I thought this absurd; for I was convinced that my problem, since it was so important for me, must have agitated many scientists and philosophers who would surely have reached my rather obvious solution. That this was not the case I learnt from Wittgenstein's work, and from its reception; and so I published my results thirteen years later in the form of a criticism of Wittgenstein's criterion of meaningfulness.

Wittgenstein, as you all know, tried to show in the Tractatus (see for example his propositions 6.53; 6.54 and 5) that all so-called philosophical or metaphysical propositions were actually non-propositions or pseudo-propositions: that they were senseless or meaningless. All genuine (or meaningful) propositions were truth functions of the elementary or atomic propositions which described 'atomic facts' - i. e., facts which can in principle be ascertained by observation. In other words, meaningful propositions were fully reducible to elementary or atomic propositions which were simple statements describing possible states of affairs, and which could in principle be established or rejected by observation. If we call a statement an 'observation statement' not only if it states an actual observation but also if it states anything that may be observed, we shall have to say (according to the Tractatus, 5 and 4.52) that every genuine proposition must be a truth-function of, and therefore deducible from, observation statements. All other apparent propositions will be meaningless pseudo-propositions; in fact they will be nothing but nonsensical gibberish.

This idea was used by Wittgenstein for characterization of science, as opposed to philosophy. We read (for example in 4.11, where natural science is taken to stand in opposition to philosophy): 'The totality of true propositions is the total natural science (or the totality of the natural sciences).' This means that the propositions which belong to science are those deducible from true observation statements; they are those propositions which can be verified by true observation statements. Could we know all true observation statements, we should also know all that may be asserted by natural science. This amounts to a crude verifiability criterion of demarcation. To make it slightly less crude, it could be amended thus: 'The statements which may possibly fall within the province of science are those which may possibly be verified by observation statements; and these statements, again, coincide with the class of all genuine or meaningful statements.' For this approach, then, verifiability, meaningfulness, and scientific character all coincide.

I personally was never interested in the so-called problem of meaning; on the contrary, it appeared to me a verbal problem, a typical pseudo-problem. I was interested only in the problem of demarcation, i. e. in finding a criterion of the scientific character of theories. It was just this interest which made me see at once that Wittgenstein's verifiability criterion of meaning was intended to play the part of a criterion of demarcation as well; and which made me see that, as such, it was totally inadequate, even if all misgivings about the dubious concept of meaning were set aside. For Wittgenstein's criterion demarcation - to use my own terminology in this context - is verifiability, or deducibility from observation statements. But this criterion is too narrow (and too wide): it excludes from science practically everything that is, in fact, characteristic of it (while failing in effect to exclude astrology). No scientific theory can ever be deduced from observation statements, or be described as a truth-function of observation statements.

All this I pointed out on various occasions to Wittgensteinians and members of the Vienna Circle. In 1931-2 I summarized my ideas in a largish book (read by several members of the Circle but never published; although part of it was incorporated in my Logic of Scientific Discovery); and in 1933 I published a letter to the Editor of Erkenntnis in which I tried to compress into two pages my ideas on the problems of demarcation and induction.? In this letter and elsewhere I described the problem of meaning as a pseudo-problem, in contrast to the problem of demarcation. But my contribution was classified by members of the Circle as a proposal to replace the verifiability criterion of meaning by a falsifiability criterion of meaning - which effectively made nonsense of my views.? My protests that I was trying to solve, not their pseudo-problem of meaning, but the problem of demarcation, were of no avail.

? My Logic of Scientific Discovery 1959, 1960, 1961), here usually referred to as L.Sc.D., is the translation of Logik der Forschung (1934), with a number of additional notes and appendices, including (on pp. 312-14) the letter to the Editor of Erkenntnis mentioned here in the text which was first published in Erkenntnis, 3, 1933, pp. 426 f.

Concerning my never published book mentioned here in the text, see R. Carnap's paper 'Ueber Protokollsätze' (On Protocol-Sentences), Erkenntnis, 3, 1932, pp. 215-28 where he gives an outline of my theory on pp. 223-8, and accepts it. He calls my theory 'procedure B', and says (p. 224 top): 'Starting from a point of view different from Neurath's' (who developed what Carnap calls on p. 223 'procedure A'), 'Popper developed procedure B as part of his system.' And after describing in detail my theory of tests, Carnap sums up his views as follows (p. 228); 'After weighing the various arguments here discussed, it appears to me that the second language form with procedure B - that is in the form here described - is the most adequate among the forms of scientific language at present advocated ... in the ... theory of knowledge (이 문장에서 분사구문 After weighing the various arguments here discussed의 주어가 주문장의 주어인 [가주어 it, 진주어 that절의 문장임] it이 될 수 없으므로 분사구문으로 쓸 수 없고 절로 표현해야 한다. 문법적 오류이다. - 역자 주.).' This paper of Carnap's contained the first published report of my theory of critical testing. (See also my critical remarks in L.Sc.D., note 1 to section 29, p. 104, where the date '1933' should read '1932'; and ch. 11, below, text to note 39.)

? Wittgenstein's example of a nonsensical pseudo-proposition is: 'Socrates is identical'. Obviously, 'Socrates is not identical' must also be nonsense. Thus the negation of any nonsense will be nonsense, and that of a meaningful statement will be meaningful. But the negation of a testable (or falsifiable) statement need not be testable, as was pointed out, first in my L.Sc.D., (e.g. pp. 38 f.) and later by my critics. The confusion caused by taking testability as a criterion of meaning rather than of demarcation can easily be imagined.

My attacks upon verification had some effect, however. They soon led to complete confusion in the camp of the verificationist philosophers of sense and nonsense. The original proposal of verifiability as the criterion of meaning was at least clear, simple, and forceful. The modifications and shifts which were now introduced were the very opposite.? This, I should say, is now seen even by the participants. But since I am usually quoted as one of them I wish to repeat that although I created this confusion I never participated in it. Neither falsifiability nor testability were proposed by me as criteria of meaning; and although I may plead guilty to having introduced both terms into the discussion, it was not I who introduced them into the theory of meaning.

Criticism of my alleged views was widespread and highly successful. I have yet to meet a criticism of my views.? Meanwhile, testability is being widely accepted as a criterion of demarcation.

? The most recent example of the way in which the history of this problem is misunderstood is A. R. White's 'Note on Meaning and Verification', Mind, 63, 1954, pp. 66 ff. J. L. Evans's article, Mind, 62. 1953, pp. 1 ff., which Mr. White criticizes, is excellent in my opinion, and unusually perceptive. Understandably enough, neither of the authors can quite reconstruct the story. (Some hints may be found in my Open Society, notes 46, 51 and 52 to ch. 11; and a fuller analysis in ch. 11 of the present volume.)

? In L.Sc.D. I discussed, and replied to, some likely objections which afterwards were indeed raised, without reference to my replies. one of them is the contention that the falsification of a natural law is just as impossible as its verification. The answer is that this objection mixes two entirely different levels of analysis (like the objection that mathematical demonstrations are impossible since checking, no matter how often repeated, can never make it quite certain that we have not overlooked a mistake). on the first level, there is a logical asymmetry: one singular statement - say about the perihelion of Mercury - can formally falsify Kepler's laws; but these cannot be formally verified by any number of singular statements. The attempt to minimize this asymmetry can only lead to confusion. on another level, we may hesitate to accept any statement, even the simplest observation statement; and we may point out that every statement involves interpretation in the light of theories, and that it is therefore uncertain. This does not affect the fundamental asymmetry, but it is important: most dissectors of the heart before Harvey observed the wrong things - those, which they expected to see. There can never be anything like a completely safe observation, free from the dangers of misinterpretation. (This is one of the reasons why the theory of induction does not work.) The 'empirical basis' consists largely of a mixture of theories of lower degree of universality (of 'reproducible effects'). But the fact remains that, relative to whatever basis the investigator may accept (at his peril), he can test his theory only by trying to refute it.

I have discussed the problem of demarcation in some detail because I believe that its solution is the key to most of the fundamental problems of the philosophy of science. I am going to give you later a list of some of these other problems, but only one of them - the problem of induction - can be discussed here at any length. I had become interested in the problem of induction in 1923. Although this problem is very closely connected with the problem of demarcation, I did not fully appreciate the connection for about five years.

I approached the problem of induction through Hume. Hume, I felt, was perfectly right in pointing out that induction cannot be logically justified. He held that there can be no valid logical? arguments allowing us to establish 'that those instances, of which we have had no experience, resemble those, of which we have had experience'. Consequently 'even after observation of the frequent or constant conjunction of objects, we have no reason to draw any inference concerning any object beyond those of which we have had experience'. For 'shou'd it be said that we have experience'?? - experience teaching us that objects constantly conjoined with certain other objects continue to be so conjoined - then, Hume says, 'I wou'd renew my question, why from this experience we form any conclusion beyond those past instances, of which we have had experience'. This 'renew'd question' indicates that an attempt to justify the practice of induction by an appeal to experience must lead to an infinite regress. As a result we can say that theories can never be inferred from observation statements, or rationally justified by them.

? Hume does not say 'logical' but 'demonstrative', a terminology which, I think, is a little misleading. The following two quotations are from the Treatise of Human Nature, Book I, Part III, section vi and xii. (The italics are all Hume's)

?? This and the next quotation are from loc. cit., section vi. See also Hume's Enquiry Concerning Human Understanding, section IV, Part II, and his Abstract, edited 1938 by J. M. Keynes and P. Sraffa, p. 15, and quoted in L.Sc.D., new appendix *vii, text to note 6.

I found Hume's refutation of inductive inference clear and conclusive. But I felt completely dissatisfied with his psychological explanation of induction in terms of custom or habit.

It has often been noticed that this explanation of Hume's is philosophically not very satisfactory. Hume, however, without doubt intended it as a psychological rather than a philosophical theory; for it tries to give a causal explanation of a psychological fact - the fact that we believe in laws, in statements asserting regularities or constantly conjoined kinds of events. Hume explains this fact by asserting that it is due to (i. e. constantly conjoined with) custom or habit. But even this reformulation of Hume's theory is unacceptable; for what I have just called a 'psychological fact' may itself be described as a custom or habit - our custom or our habit of believing in laws or regularities. It is neither surprising nor enlightening to hear that such a custom or habit can be explained as due to custom or habit, or conjoined with a custom or habit (even though a different one). only when we remember that the words 'custom' and 'habit' are used by Hume, as they are in ordinary language, not merely to describe regular behaviour, but rather to theorize about its origin (ascribed to frequent repetition), can we reformulate his psychological theory in a more satisfactory way. Hume's theory becomes then the thesis that, like other habits, our habit of believing in laws is the product of frequent repetition - of the repeated observation that things of a certain kind are constantly conjoined with things of another kind.

This genetic-psychological theory is, as indicated, incorporated in ordinary language, and it is therefore hardly as revolutionary as Hume thought. It is no doubt an extremely popular psychological theory - part of 'common sense', one might say. But in spite of my love of both common sense and Hume, I felt convinced that this psychological theory was mistaken; and that it was in fact refutable on purely logical grounds.

Hume's psychology, which is the popular psychology, was mistaken, I felt, about at least three different things: (a) the typical result of repetition; (b) the genesis of habits; and especially (c) the character of those experiences or modes of behaviour which may be described as 'believing in a law' or 'expecting a law-like succession of events'.

(a) The typical result of repetition - say, of repeating a difficult passage on the piano- is that movements which at first needed attention are in the end executed without attention. We might say that the process becomes radically abbreviated, and ceases to be conscious: it becomes automatized, 'physiological'. Such a development, far from creating a conscious expectation of law-like succession, or a belief in a law, may on the contrary begin with a conscious belief and destroy it by making it superfluous. In learning to ride a bicycle we may start with the belief that we can avoid falling if we steer in the direction in which we threaten to fall, and this belief may be useful for guiding our movements. After sufficient practice we may forget the rule; in any case, we do not need it any longer. on the other hand, even if it is true that repetition may create unconscious expectations, these become conscious only if something goes wrong (we may not have heard the clock tick, but we may hear that it has stopped).

(b) Habits or customs do not, as a rule, originate in repetition. Even the habit of walking, or of speaking, or of feeding at certain hours, begins before repetition can play any part whatever. We may say, if we like, that they deserve to be called 'habits' or 'customs' only after repetition has played its typical part described under (a); but we must not say that the practices in question originated as the result of many repetitions.

(c) Belief in a law is not quite the same thing as behaviour which betrays an expectation of a law-like succession of events; but these two are sufficiently closely connected to be treated together. They may, perhaps, in exceptional cases, result from a mere repetition of sense impressions (as in the case of the stopping clock). I was prepared to concede this, but I contended that normally, and in most cases of any interest, they cannot be so explained. As Hume admits, even a single striking observation may be sufficient to create a belief or an expectation - a fact which he tries to explain as due to an inductive habit, formed as the result of a vast number of long repetitive sequences which had been experienced at an earlier period of life.?? But this, I contended, was merely his attempt to explain away unfavourable facts which threatened his theory; an unsuccessful attempt, since these unfavourable facts could be observed in very young animals and babies - as early, indeed, as we like. 'A lighted cigarette was held near the noses of the young puppies', reports F. Bäge. 'They sniffed at it once, turned tail, and nothing would induce them to come back to the source of the smell and to sniff again. A few days later, they reacted to the mere sight of a cigarette or even of a rolled piece of white paper, by bounding away, and sneezing.'?? If we try to explain cases like this by postulating a vast number of long repetitive sequences at a still earlier age we are not only romancing, but forgetting that in the clever puppies' short lives there must be room not only for repetition but also for a great deal of novelty, and consequently of non-repetition.

But it is not only that certain empirical facts do not support Hume; there are decisive arguments of a purely logical nature against his psychological theory.

The central idea of Hume's psychological theory is that of repetition, based upon similarity (or 'resemblance'). This idea is used in a very uncritical way. We are led to think of the water-drop that hollows the stone: of sequences of unquestionably like events slowly forcing themselves upon us, as does the tick of the clock. But we ought to realize that in a psychological theory such as Hume's, only repetition-for-us, based upon similarity-for-us, can be allowed to have every effect upon us. We must respond to situations as if they were equivalent; take them as similar; interpret them as repetitions. In this way they become for us functionally equal. The clever puppies, we may assume, showed by their response, their way of acting or of reacting, that they recognized or interpreted the second situation as a repetition of the first: that they expected its main element, the objectionable smell, to be present. The situation was a repetition-for-them because they responded to it by anticipating its similarity to the previous one.

This apparently psychological criticism has a purely logical basis which may be summed up in the following simple argument. (It happens to be the one from which I originally started my criticism.) The kind of repetition envisaged by Hume can never be perfect; the cases he has in mind cannot be cases of perfect sameness; they can only be cases of similarity. Thus they are repetitions only from a certain point of view. (What has the effect upon me of a repetition may not have this effect upon a spider.) But this means that, for logical reasons, there must always be a point of view - such as a system of expectations, anticipations, assumption, or interest - before there can be any repetition; which point of view, consequently, cannot be merely the result of repetition. (See now also appendix *x, (1), to my L.Sc.D.)

We must thus replace for the purpose of a psychological theory of the origin of our beliefs, the naïve idea of events which are similar by the idea of events to which we react by interpreting them as being similar. But if this is so (and I can see no escape from it) then Hume's psychological theory of induction leads to an infinite regress, precisely analogous to that other infinite regress which was discovered by Hume himself, and used by him to explode the logical theory of induction. For what do we wish to explain? In the example of the puppies we wish to explain behaviour which may be described as recognizing or interpreting a situation as a repetition of another. Clearly, we cannot hope to explain this by an appeal to earlier repetitions, once we realize that the earlier repetitions must also have been repetitions-for-them, so that precisely the same problem arises again: that of recognizing or interpreting a situation as a repetition of another.

To put it more concisely, similarity-for-us is the product of a response involving interpretations (which may be inadequate) and anticipations or expectations (which may never be fulfilled). It is therefore impossible to explain anticipations, or expectations, as resulting from many repetitions, as suggested by Hume. For even the first repetition-for-us must be based upon similarity-for-us, and therefore upon expectations - precisely the kind of thing we wished to explain. (Expectation must come first, before repetitions.)

We see that there is an infinite regress involved in Hume's psychological theory. .

Hume, I felt, had never accepted the full force of his own logical analysis. Having refuted the logical idea of induction he was faced with the following problem: how do we actually obtain our knowledge, as a matter of psychological fact, if induction is a procedure which is logically invalid and rationally unjustifiable? There are two possible answers: (1) We obtain our knowledge by a non-inductive procedure. This answer would have allowed Hume to retain a form of rationalism. (2) We obtain our knowledge by repetition and induction, and therefore by a logically invalid and rationally unjustifiable procedure, so that all apparent knowledge is merely a kind of belief - belief based on habit. This answer would imply that even scientific knowledge is irrational, so that rationalism is absurd, and must be given up. (I shall not discuss here the age-old attempts, now again fashionable, to get out of the difficulty by asserting that though induction is of course logically invalid if we mean by 'logic' the same as 'deductive logic', it is not irrational by its own standards, and as inductive logic admits; as may be seen from the fact that every reasonable man applies it as a matter of fact. As against this, it was Hume's great achievement to break this uncritical identification of the question of fact - quid facti? - and the question of justification or validity - quid juris?. (See below, point (13) of the appendix to the present chapter.)

It seems that Hume never seriously considered the first alternative. Having cast out the logical theory of induction by repetition he struck a bargain with common sense, meekly allowing the re-entry of induction by repetition, in the guise of a psychological fact. I propose to turn the tables upon this theory of Hume's. Instead of explaining our propensity to expect regularities as the result of repetition, I proposed to explain repetition-for-us as the result of our propensity to expect regularities and to search for them.

Thus I was led by purely logical considerations to replace the psychological theory of induction by the following view. Without waiting, passively, for repetitions to impress or impose regularities upon us, we actively try to impose regularities upon the world. We try to discover similarities in it, and to interpret it in terms of laws invented by us. Without waiting for premises we jump to conclusions. These may have to be discarded later, should observation show that they are wrong.

This was a theory of trial and error - of conjectures and refutations. It made it possible to understand why our attempts to force interpretations upon the world were logically prior to the observation of similarities. Since there were logical reasons behind this procedure, I thought that it would apply in the field of science also; that scientific theories were not the digest of observations, but

that they were inventions - conjectures boldly put forward for trial, to be eliminated if they clashed with observations; with observations which were rarely accidental but as a rule undertaken with the definite intention of testing a theory by obtaining, if possible, a decisive refutation.

V

The belief that science proceeds from observation to theory is still so widely and so firmly held that my denial of it is often met with incredulity. I have even been suspected of being insincere - of denying what nobody in his senses can doubt.

But in fact the belief that we can start with pure observations alone, without anything in the nature of a theory, is absurd; as may be illustrated by the story of the man who dedicated his life to natural science, wrote down everything he could observe, and bequeathed his priceless collection of observations to the Royal Society to be used as inductive evidence. This story should show us that though beetles may profitably be collected, observations may not.

Twenty-five years ago I tried to bring home the same point to a group of physics students in Vienna by beginning a lecture with the following instructions: 'Take pencil and paper; carefully observe, and write down what you have observed!' They asked, of course, what I wanted them to observe. Clearly the instruction, 'Observe!' is absurd.?? (It is not even idiomatic, unless the object of the transitive verb can be taken as understood.) Observation is always selective. It needs a chosen object, a definite task, an interest, a point of view, a problem. And its description presupposes a descriptive language, with property words; it presupposes similarity and classification, which in their turn presuppose interests, points of view, and problems. 'A hungry animal', writes Katz,?? 'divides the

?? See section 30 of L.Sc.D

?? Katz, loc. cit.

environment into edible and inedible things. An animal in flight sees roads to escape and hiding places .... Generally speaking, objects change ... according to the needs of the animal.' We may add that objects can be classified, and can become similar or dissimilar, only in this way - by being related to needs and interests. This rule applies not only to animals but also to scientists. For the animal a point of view is provided by its needs, the task of the moment, and its expectations; for the scientist by his theoretical interests, the special problem under investigation, his conjectures and anticipations, and the theories which he accepts as a kind of background: his frame of reference, his 'horizon of expectations'.

The problem 'Which comes first, the hypothesis (H) or the observation (O)?' is soluble; as is the problem, 'Which comes first, the hen (H) or the egg (O)?'. The reply to the latter is, 'An earlier kind of egg'; to the former, 'An earlier kind of hypothesis'. It is quite true that any particular hypothesis we choose will have been preceded by observations - the observations, for example, which it is designed to explain. But these observations, in their turn, presupposed the adoption of a frame of reference: a frame of expectations: a frame of theories. If they were significant, if they created a need for explanation and thus gave rise to the invention of a hypothesis, it was because they could not be explained within the old theoretical framework, the old horizon of expectations. There is no danger here of an infinite regress. Going back to more and more primitive theories and myths we shall in the end find unconscious, inborn expectation.

The theory of inborn ideas is absurd, I think; but every organism has inborn reactions or responses; and among them, responses adapted to impending events. These responses we may describe as 'expectations' without implying that these 'expectations' are conscious. The new-born baby 'expects', in this sense, to be fed (and, one could even argue, to be protected and loved). In view of the close relation between expectation and knowledge we may even speak in quite a reasonable sense of 'inborn knowledge'. This 'knowledge', however, is not valid a priori; an inborn expectation, no matter how strong and specific, may be mistaken. (The newborn child may be abandoned, and starve.)

Thus we are born with expectations; with 'knowledge' which, although not valid a priori, is psychologically or genetically a priori, i. e. prior to all observational experience. one of the most important of these expectations is that expectation of finding a regularity. It is connected with an inborn propensity to look out for regularities, or with a need to find regularities, as we may see from the pleasure of the child who satisfies this need.

This 'instinctive' expectation of finding regularities, which is psychologically a priori, corresponds very closely to the 'law of causality' which Kant believed to be part of our mental outfit and to be a priori valid. one might thus be inclined to say that Kant failed to distinguish between psychologically a priori ways of thinking or responding and a priori valid beliefs. But I do not think that his mistake was quite as crude as that. For the expectation of finding regularities is not only psychologically a priori, but also logically a priori: it is logically prior to all observational experience, for it is prior to any recognition of similarities, as we have seen; and all observation involves the recognition of similarities (or dissimilarities). But in spite of being logically a priori in this sense the expectation is not valid a priori. For it may fail: we can easily construct an environment (it would be a lethal one) which, compared with our ordinary environment, is so chaotic that we completely fail to find regularities. (All natural laws could remain valid: environments of this kind have been used in the animal experiments mentioned in the next section.)

Thus Kant's reply to Hume came near to being right; for the distinction between an a priori valid expectation and one which is both genetically and logically prior to observation, but not a priori valid, is really somewhat subtle. But Kant proved too much. In trying to show how knowledge is possible, he proposed a theory which had the unavoidable consequence that our quest for knowledge must necessarily succeed, which is clearly mistaken. When Kant said, 'Our intellect does not draw its laws from nature but imposes its laws upon nature', he was right. But in thinking that these laws are necessarily true, or that we necessarily succeed in imposing them upon nature, he was wrong.?? Nature very often resists quite successfully, forcing us to discard our laws as refuted; but if we live we may try again.

To sum up this logical criticism of Hume's psychology of induction we may consider the idea of building an induction machine. Placed in a simplified 'world' (for example, one of sequences of coloured counters) such a machine may through repetition 'learn', or even 'formulate', laws of succession which hold in its 'world'. If such a machine can be constructed (and I have no doubt that it can) then, it might be argued, my theory must be wrong; for if a machine is capable of performing inductions on the basis of repetition, there can be no logical reasons preventing us from doing the same.

The argument sounds convincing, but it is mistaken. In constructing an induction machine we, the architect of the machine, must decide a priori what constitutes its 'world'; what things are to be taken as similar or equal; and what kind of 'laws' we wish the machine to be able to 'discover' in its 'world'. In other words we must build into the machine a framework determining what is relevant or interesting in its world: the machine will have its 'inborn' selection principles. The problems of similarity will have been solved for it by its makers who thus have interpreted the 'world' for the machine.

?? Kant believed that Newton's dynamics was a priori valid. (See his Metaphysical Foundations of Natural Science, published between the first and the second editions of the Critique of Pure Reason.) But if, as he thought, we can explain the validity of Newton's theory by the fact that our intellect imposes its laws upon nature, it follows, I think, that our intellect must succeed in this; which makes it hard to understand why a priori knowledge such as Newton's should be so hard to come by. A somewhat fuller statement of this criticism can be found in ch. 2, especially section x, and chs, 7 and 8 of the present volume.

Our propensity to look out for regularities, and to impose laws upon nature, leads to the psychological phenomenon of dogmatic thinking or, more generally, dogmatic behaviour: we expect regularities everywhere and attempt to find them even where there are none; events which do not yield to these attempts we are inclined to treat as a kind of 'background noise'; and we ought to accept the defeat. This dogmatism is to some extent necessary. It is demanded by a situation which can only be dealt with by forcing our conjectures upon the world. Moreover, this dogmatism allows us to approach a good theory in stages, by way of approximations: if we accept defeat too easily, we may prevent ourselves from finding that we were very nearly right.

It is clear that this dogmatic attitude, which makes us stick to our first impressions, is indicative of a strong belief; while a critical attitude, which is ready to modify its tenets, which admits doubt and demands tests, is indicative of a weaker belief. Now according to Hume's theory, and the popular theory, the strength of a belief should be a product of repetition; thus it should always grow with experience, and always be greater in less primitive persons. But dogmatic thinking, an uncontrolled wish to impose regularities, a manifest pleasure in rites and in repetition as such, are characteristic of primitives and children; and increasing experience and maturity sometimes create an attitude of caution and criticism rather than of dogmatism.

I may perhaps mention here a point of agreement with psycho-analysis. Psycho-analysts assert that neurotics and others interpret the world in accordance with a personal set pattern which is not easily given up, and which can often be traced back to early childhood. A pattern or scheme which was adopted very early in life is maintained throughout, and every new experience is interpreted in terms of it; verifying it, as it were, and contributing to its rigidity. This is a description of what I have called the dogmatic attitude, as distinct from the critical attitude, which shares with dogmatic attitude the quick adoption of a schema of expectations - a myth, perhaps, or a conjecture or hypothesis - but which is ready to modify it, to correct it, and even to give it up. I am inclined to suggest that most neuroses may be due to a partially arrested development of the critical attitude; to an arrested rather than a natural dogmatism; to resistance to demands for the modification and adjustment of certain schematic interpretations and responses. This resistance in its turn may perhaps be explained, in some cases, as due to an injury or shock, resulting in fear and in an increased need for assurance or certainty, analogous to the way in which an injury to a limb makes us afraid to move it, so that it becomes stiff. (It might even be argued that the case of the limb is not merely analogous to the dogmatic response, but an instance of it.) The explanation of any concrete case will have to take into account the weight of the difficulties involved in making the necessary adjustments - difficulties which may be considerable, especially in a complex and changing world: we know from experiments on animals that varying degrees of neurotic behaviour may be produced at will by correspondingly varying difficulties.

I found many other links between the psychology of knowledge and psychological fields which are often considered remote from it - for example the psychology of art and music; in fact, my ideas about induction originated in a conjecture about the evolution of Western polyphony. But you will be spared this story.

VII

My logical criticism of Hume's psychological theory, and the considerations connected with it (most of which I elaborated in 1926-7, in a thesis entitled 'on Habit and Belief in Laws'??) may seem a little removed from the field of the philosophy of science. But the distinction between dogmatic and critical thinking, or the dogmatic and the critical attitude, brings us right back to our central problem. For the dogmatic attitude is clearly related to the tendency to verify our laws and schemata by seeking to apply them and to confirm them, even to the point of neglecting refutations, whereas the critical attitude is one of readiness to change them - to test them; to refute them; to falsify them, if possible. This suggests that we may identify the critical attitude with the scientific attitude, and the dogmatic attitude with the one which we have described as pseudo-scientific.

It further suggests that genetically speaking the pseudo-scientific attitude is more primitive than, and prior to, the scientific attitude: that it is a prescientific attitude. And this primitivity or priority also has its logical aspect. For the critical attitude is not so much opposed to the dogmatic attitude as super-imposed upon it: criticism must be directed against existing and influential beliefs in need of critical revision - in other words, dogmatic beliefs. A critical attitude needs for its raw material, as it were, theories or beliefs which are held more or less dogmatically.

Thus science must begin with myths, and with the criticism of myths; neither with the collection of observations, nor with the invention of experiments, but with the critical discussion of myths, and of magical techniques and practices. The scientific tradition is distinguished from the pre-scientific tradition in having two layers. Like the latter, it passes on its theories; but it also passes on a critical attitude towards them. The theories are passed on, not as dogmas, but rather with the challenge to discuss them and improve upon them. This tradition is Hellenic: it may be traced back Thales, founder of the first school (I do not mean 'of the first philosophical school', but simply 'of the first school') which was not mainly concerned with the preservation of a dogma.??

The critical attitude, the tradition of free discussion of theories

?? A thesis submitted under the title 'Gewohnheit und Gesetzerlebnis' to the Institute of Education of the City of Vienna in 1927. (Unpublished.)

?? Further comments on these development may be found in chs, 4 and 5 below.

with the aim of discovering their weak spots so that they may be improved upon, is the attitude of reasonableness, of rationality. It makes far-reaching use of both verbal argument and observation - of observation in the interest of argument, however. The Greeks' discovery of the critical method gave rise at first to the mistaken hope that it would lead to the solution of all the great old problems; that it would establish certainty; that it would help to prove our theories, to justify them. But this hope was a residue of the dogmatic way of thinking; in fact nothing can be justified or proved (outside of mathematics and logic). The demand for rational proofs in science indicates a failure to keep distinct the broad realm of rationality and the narrow realm of rational certainty: it is an untenable, an unreasonable demand.

Nevertheless, the role of logical argument, of deductive logical reasoning, remains all-important for the critical approach; not because it allows us to prove our theories, or to infer them from observation statements, but because only by purely deductive reasoning is it possible for us to discover what our theories imply, and thus to criticize them effectively. Criticism, I said, is an attempt to find the weak spots in a theory, and these, as a rule, can be found only in the more remote logical consequences which can be derived from it. It is here that purely logical reasoning plays an important part in science.

Hume was right in stressing that our theories cannot be validly inferred from what we can know to be true - neither from observations nor from anything else. He concluded from this that our belief in them was irrational. If 'belief' means here our inability to doubt our natural laws, and the constancy of natural regularities, then Hume is again right: this kind of dogmatic belief has, one might say, a physiological rather than a rational basis. If, however, the term 'belief' is taken to cover our critical acceptance of scientific theories - a tentative acceptance combined with an eagerness to revise the theory if we succeed in designing a test which it cannot pass - then Hume was wrong. In such an acceptance of theories there is nothing irrational. There is not even anything irrational in relying for practical purposes upon well-tested theories, for no more rational course of action is open to us.

Assume that we have deliberately made it our task to live in this unknown world of ours; to adjust ourselves to it as well as we can; to take advantage of the opportunities we can find in it; and to explain it, if possible (we need not assume that it is), and as far as possible, with the help of laws and explanatory theories. If we have made this our task, then there is no more rational procedure than the method of trial and error - of conjecture and refutation: of boldly proposing theories; of trying our best to show that these are erroneous; and of accepting them tentatively if our critical efforts are unsuccessful.

From the point of view here developed all laws, all theories, remain essentially tentative, or conjectural, or hypothetical, even when we feel unable to doubt them any longer. Before a theory has been refuted we can never know in what way it may have to be modified. That the sun will always rise and set within twenty-four hours is still proverbial as a law 'established by induction beyond reasonable doubt'. It is odd that this example is still in use, though it may have served well enough in the days of Aristotle and Pytheas of Massalia - the great traveller who for centuries was called a liar because of his tales of Thule, the land of the frozen sea and the midnight sun.

The method of trial and error is not, of course, simply identical with the scientific or critical approach - with the method of conjecture and refutation. The method of trial and error is applied not only by Einstein but, in a more dogmatic fashion, by the amoeba also. The difference lies not so much in the trials as in a critical and constructive attitude towards errors; errors which the scientist consciously and cautiously tries to uncover in order to refute his theories with searching arguments, including appeals to the most severe experimental tests which his theories and his ingenuity permit him to design.

The critical attitude might be described as the result of a conscious attempt to make our theories, our conjectures, suffer in our stead in the struggle for the survival of the fittest. It gives us a chance to survive the elimination of an inadequate hypothesis - when a more dogmatic attitude would eliminate it by eliminating us. (There is a touching story of an Indian community which disappeared because of its belief in the holiness of life, including that of tigers.) We thus obtain the fittest theory within our reach by the elimination of those which are less fit. (By 'fitness' I do not mean merely 'usefulness' but truth; see chapters 3 and 10, below.) I do not think that this procedure is irrational or in need of any further rational justification.

VIII

Let us now turn from our logical criticism of the psychology of experience to our real problem - the problem of the logic of science. Although some of the things I have said may help us here, in so far as they may have eliminated certain psychological prejudices that favour induction, my treatment of the logical problem of induction is completely independent of this criticism, and of all psychological considerations. Provided you do not dogmatically believe in the alleged psychological fact that we make inductions, you may now forget my whole story with the exception of two logical points: my logical remarks on testability or falsifiability as the criterion of demarcation; and Hume's logical criticism of induction.

From what I have said it is obvious that there was a close link between the two problems which interested me at that time: demarcation, and induction or scientific method. It was easy to see that the method of science is criticism, i. e. attempted falsifications. Yet it took me a few years to notice that the two problems - of demarcation and induction - were in a sense one.

Why, I asked, do so many scientists believe in induction? I found they did so because they believed natural science to be characterized by the inductive method - by a method starting from, and relying upon, long sequences of observations and experiments. They believed that the difference between genuine science and metaphysical or pseudo-scientific speculation depended solely upon whether or not the inductive method was employed. They believed (to put it in my own terminology) that only the inductive method could provide a satisfactory criterion of demarcation.

I recently came across an interesting formulation of this belief in a remarkable philosophical book by a great physicist - Max Born's Natural Philosophy of Cause and Chance.?? He writes: 'Induction allows us to generalize a number of observations into a general rule: that night follows day and day follows night ... But while everyday life has no definite criterion for the validity of an induction, ... science has worked out a code, or rule of craft, for its application.' Born nowhere reveals the contents of this inductive code (which, as his wording shows, contains a 'definite criterion for the validity of an induction'); but he stresses that 'there is no logical argument' for its acceptance: 'it is a question of faith'; and he is therefore 'willing to call induction a metaphysical principle'. But why does he believe that such a code of valid inductive rules must exist? This becomes clear when he speaks of the 'vast communities of people ignorant of, or rejecting, the rule of science, among them the members of anti-vaccination societies and believers in astrology. It is useless to argue with them; I cannot compel them to accept the same criteria of valid induction in which I believe: the code of scientific rules.' This makes it quite clear that 'valid induction' was here meant to serve as a criterion of demarcation between science and pseudo-science.

But it is obvious that this rule or craft of 'valid induction' is not even metaphysical: it simply does not exist. No rule can ever guarantee that a generalization inferred from true observation, however often repeated, is true. (Born himself does not believe in the truth of Newtonian physics, in spite of its success, although he believes that it is based on induction.) And the success of science is not based upon rules of induction, but depends upon luck, ingenuity, and the purely deductive rules of critical argument.

I may summarize some of my conclusions as follows:

(1) Induction, i. e. inference based on many observation, is a myth. It is neither a psychological fact, nor a fact of ordinary life, nor one of scientific procedure.

(2) The actual procedure of science is to operate with conjectures: to jump to conclusions - often after one single observation (as noticed for example by Hume and Born).

(3) Repeated observations and experiments function in science as tests of our conjectures or hypotheses, i. e. as attempted refutations.

(4) The mistaken belief in induction is fortified by the need for a criterion of demarcation which, it is traditionally but wrongly believed, only the inductive method can provide.

(5) The conception of such an inductive method, like the criterion of verifiability, implies a faulty demarcation.

(6) None of this is altered in the least if we say that induction makes theories only probable rather than certain. (See especially

?? Max Born, Natural Philosophy of Cause and Chance, Oxford, 1949, p. 7.

chapter 10, below.)

IX

If, as I have suggested, the problem of induction is only an instance or facet of the problem of demarcation, then the solution to the problem of demarcation must provide us with a solution to the problem of induction. This is indeed the case, I believe, although it is perhaps not immediately obvious.

For a brief formulation of the problem of induction we can turn again to Born, who writes: '... no observation or experiment, however extended, can give more than a finite number of repetitions'; therefore, 'the statement of a law - B depends on A - always transcends experience. Yet this kind of statement is made everywhere and all the time, and sometimes from scanty material.'??

In other words, the logical problem of induction arises from (a) Hume's discovery (so well expressed by Born) that it is impossible to justify a law by observation or experiment, since it 'transcends experience'; (b) the fact that science proposes and uses laws 'everywhere and all the time'. (Like Hume, Born is struck by the 'scanty material', i. e. the few observed instances upon which the law may be based.) To this we have to add (c) the principle of empiricism which asserts that in science, only observation and experiment may decide upon the acceptance or rejection of scientific statements, including laws and theories.

These three principles, (a), (b), and (c), appear at first sight to clash; and this apparent clash constitutes the logical problem of induction.

Faced with this clash, Born gives up (c), the principle of empiricism (as Kant and many others, including Bertrand Russell, have done before him), in favour of what he calls a 'metaphysical principle'; a metaphysical principle which he does not even attempt to formulate; which he vaguely describes as a 'code or rule of craft'; and of which I have never seen any formulation which even looked promising and was not clearly untenable.

But in fact the principles (a) to (c) do not clash. We can see this the moment we realize that the acceptance by science of a law or of a theory is tentative only; which is to say that all laws and theories are conjectures, or tentative hypotheses (a position which I have sometimes called 'hypotheticism'); and that we may reject a law or theory on the basis of new evidence, without necessarily discarding the old evidence which originally led us to accept it.??

The principle of empiricism (c) can be fully preserved, since the fate of a theory, its acceptance or rejection, is decided by observation and experiment - by the result of tests. So long as a theory stands up to the severest tests we can design, it is accepted; if it does not, it is rejected. But it is never inferred, in any sense, from the empirical evidence. There is neither a psychological nor

?? Natural Philosophy of Cause and Chance, p. 6.

?? I do not doubt that Born and many others would agree that theories are accepted only tentatively. But the widespread belief in induction shows that far-reaching implications of this view are rarely seen.

a logical induction. Only the falsity of the theory can be inferred from empirical evidence, and this inference is a purely deductive one.

Hume showed that it is not possible to infer a theory from observation statements; but this does not affect the possibility of refuting a theory by observation statements. The full prediction of this possibility makes the relation between theories and observations perfectly clear.

This solves the problem of the alleged clash between the principles (a), (b), and (c), and with it Hume's problem of induction.

X

Thus the problem of induction is solved. But nothing seems less wanted than a simple solution to an age-old philosophical problem. Wittgenstein and his school hold that genuine philosophical problems do not exist;?? from which it clearly follows that they cannot be solved. Others among my contemporaries do believe that there are philosophical problems, and respect them; but they seem to respect them too much; they seem to believe that they are insoluble, if not taboo; and they are shocked and horrified by the claim that there is a simple, neat, and lucid, solution to any of them. If there is a solution it must be deep, they feel, or at least complicated.

However this may be, I am still waiting for a simple, neat and lucid criticism of the solution which I published first in 1933 in my letter to the Editor of Erkenntnis,?? and later in The Logic of Scientific Discovery.

Of course, one can invent new problems of induction, different from the one I have formulated and solved. (Its formulation was half its solution.) But I have yet to see any reformulation of the problem whose solution cannot be easily obtained from my old solution. I am now going to discuss some of these re-formulations.

One question which may be asked is this: how do we really jump from an observation statement to a theory?

Although this question appears to be psychological rather than philosophical, one can say something positive about it without invoking psychology. One can say first that the jump is not from an observation statement, but from a problem-situation, and that the theory must allow us to explain the observations which created the problem (that is, to deduce them from the theory strengthened by other accepted theories and by other observation statements, the so-called initial conditions). This leaves, of course, an immense number of possible theories, good and bad; and it thus appears that our question has not been answered.

But this makes it fairly clear that when we asked our question we had more in mind than, 'How do we jump from an observation statement to a theory?' The question we had in mind was, it now appears, 'How do we jump from an observation statement to a good theory?' But to this the answer is: by jumping first to any theory and then testing it, to find whether it is good or not; i. e. by repeatedly

?? Wittgenstein still held this belief in 1946; see note 8 to ch. 2, below.

?? See note 5 above.

applying the critical method, eliminating many bad theories, and inventing many new ones. Not everybody is able to do this; but there is no other way.

Other questions have sometimes been asked. The original problem of induction, it was said, is the problem of justifying induction, i. e. of justifying inductive inference. If you answer this problem by saying that what is called an 'inductive inference' is always invalid and therefore clearly not justifiable, the following new problem must arise: how do you justify your method of trial and error? Reply: the method of trial and error is a method of eliminating false theories by observation statements; and the justification for this is the purely logical relationship of deductibility which allows us to assert the falsity of universal statements if we accept the truth of singular ones.

Another question sometimes asked is this: why is it reasonable to prefer non-falsified statements to falsified ones? To this question some involved answers have been produced, for example pragmatic answers. But from a pragmatic point of view the question does not arise, since false theories often serve well enough: most formulae used in engineering or navigation are known to be false, although they may be excellent approximations and easy to handle; and they are used with confidence by people who know them to be false.

The only correct answer is the straightforward one: because we search for truth (even though we can never be sure we have found it), and because the falsified theories are known or believed to be false, while the non-falsified theories may still be true. Besides, we do not prefer every non-falsified theory - only one which, in the light of criticism, appears to be better than its competitors: which solves our problems, which is well tested, and of which we think, or rather conjecture or hope (considering other provisionally accepted theories), that it will stand up to further tests.

It has also been said that the problem of induction is, 'Why is it reasonable to believe that the future will be like the past?', and that a satisfactory answer to this question should make it plain that such a belief is, in fact, reasonable. My reply is that it is reasonable to believe that the future will be very different from the past in many vitally important respects. Admittedly it is perfectly reasonable to act on the assumption that it will, in many respects, be like the past, and that well-tested laws will continue to hold (since we can have no better assumption to act upon); but it is also reasonable to believe that such a course of action will lead us at times into severe trouble, since some of the laws upon which we now heavily rely may easily prove unreliable. (Remember the midnight sun!) one might even say that to judge from past experience, and from our general scientific knowledge, the future will not be like the past, in perhaps most of the ways which those have in mind who say that it will. Water will sometimes not quench thirst, and air will choke those who breathe it, An apparent way out is to say that the future will be like the past in the sense that the laws of nature will not change, but this is begging the question. We speak of a 'law of nature' only if we think that we have before us a regularity which does not change; and if we find that it changes then we shall not continue to call it a 'law of nature'. Of course our search for natural laws indicates that we hope to find them, and that we believe that there are natural laws; but our belief in any particular natural law cannot have a safer basis than our unsuccessful critical attempts to refute it.

I think that those who put the problem of induction in terms of the reasonableness of our beliefs are perfectly right if they are dissatisfied with a Humean, or post-Humean, sceptical despair of reason. We must indeed reject the view that a belief in science is as irrational as a belief in primitive magical practices - that both are a matter of accepting a 'total ideology', a convention or a tradition based on faith. But we must be cautious if we formulate our problem, with Hume, as one of the reasonableness of our beliefs. We should split this problem into three - our old problem of demarcation, or of how to distinguish between science and primitive magic; the problem of the rationality of the scientific or critical procedure, and of the role of observation within it; and lastly the problem of the rationality of our acceptance of theories for scientific and for practical purposes. To all these three problems solutions have been offered here.

One should also be careful not to confuse the problem of the reasonableness of the scientific procedure and the (tentative) acceptance of the results of this procedure - i. e. the scientific theories - with the problem of the rationality or otherwise of the belief that this procedure will succeed. In practice, in practical scientific research, this belief is no doubt unavoidable and reasonable, there being no better alternative. But the belief is certainly unjustifiable in a theoretical sense, as I have argued (in section v). Moreover, if we could show, on general logical grounds, that the scientific quest is likely to succeed, one could not understand why anything like success has been so rare in the long history of human endeavours to know more about our world.

Yet another way of putting the problem of induction is in terms of probability. Let t be the theory and e the evidence: we can ask for P(t,e), that is to say, the probability of t, given e. The problem of induction, it is often believed, can then be put thus: construct a calculus of probability which allows us to work out for any theory t what its probability is, relative to any given empirical evidence e; and show that P(t,e) increases with the accumulation of supporting evidence, and reaches high values - at any rate values greater than ½.

In The Logic of Scientific Discovery I explained why I think that this approach to the problem is fundamentally mistaken.?? To make this clear, I introduced there the distinction between probability and degree of corroboration or confirmation. (The term 'confirmation' has lately been so much used and misused that I have decided to surrender it to the verificationists and to use for my own purposes 'corroboration' only. The term 'probability' is best used in some of

?? L.Sc.D. (see note 5 above), ch. x, especially sections 80 to 83, also section ?? ff. See also my note 'A Set of Independent Axioms for Probability', Mind, N.S. 47, 1938, p. 275. (This note has since been reprinted, with correction, in the new appendix *ii of L.Sc.D. See also the next note but one to the present chapter.)

the many senses which satisfy the well-known calculus of probability, axiomatized, for example, by Keynes, Jeffreys, and myself; but nothing of course depends on the choice of words, as long as we do not assume, uncritically, that degree of corroboration must also be a probability - that is to say, that it must satisfy the calculus of probability.)

I explained in my book why we are interested in theories with a high degree of corroboration. And I explained why it is a mistake to conclude from this that we are interested in highly probable theories. I pointed out that the probability of a statement (or set of statements) is always the greater the less the statement says: it is inverse to the content or the deductive power of the statement, and thus to its explanatory power. Accordingly every interesting and powerful statement must have a low probability; and vice versa: a statement with a high probability will be scientifically uninteresting, because it says little and has no explanatory power. Although we seek theories with a high degree of corroboration, as scientists we do not seek highly probable theories but explanations; that is to say. powerful and improbable theories.?? The opposite view - that science aims at high probability - is a characteristic development of verificationism: if you find that you cannot verify a theory, or make it certain by induction, you may turn to probability as a kind of 'Ersatz' for certainty, in the hope that induction may yield at least that much.

I have discussed the two problems of demarcation and induction at some length. Yet since I set out to give you in this lecture a kind of report on the work I have done in this field I shall have to add, in the form of an Appendix, a few words about some other problems on which I have been working, between 1934 and 1953. I was led to most of these problems by trying to think out the consequences of the solutions to the two problems of demarcation and induction. But time does not allow me to continue my narrative, and to tell you how my new problems arose out of my old ones. Since I cannot even start a discussion of these further problems now, I shall have to

?? A definition, in terms of probabilities (See the next note), of C(t,e), i. e. of the degree of corroboration (of a theory t relative to the evidence e) satisfying the demands indicated in my L.Sc.D., section 82 to 83, is the following:

C(t,e) = E(t,e)(1+P(t)P(t.e)),

where E(t,e) = (P(e,t) - P(e))/(P(e,t) +P(e)) is a (non-additive) measure of the explanatory power of t with respect to e. Note that C(t,e) is not a probability: it may have values between - 1 (refutation of t by e) and C(t,t) ≼+1. Statements t which are lawlike and thus non-verifiable cannot even reach C(t,e) = C(t,t) upon empirical evidence e. C(t,t) is the degree of corrobability of t, and is equal to the degree of testability of t, or to the content of t. Because of the demands implied in point (6) at the end of section I above, I do not think, however, that it is possible to give a complete formalization of the idea of corroboration (or, as I previously used to say, of confirmation).

(Added 1955 to the first proofs of this paper:)

See also my note 'Degree of Confirmation', British Journal for the Philosophy of Science, 5, 1954, pp. 143 ff. (See also 5, pp. 334.) I have since simplified this definition as follows (B.J.P.S., 1955, 5, p. 359:)

C(t,e) = (P(e,t) - P(e))/(P(e,t) - P(et) + P(e))

For a further improvement, see B.J.P.S. 6, 1955, p. 56.

confine myself to giving you a bare list of them, with a few explanatory words here and there. But even a bare list may be useful, I think. It may serve to give an idea of the fertility of the approach. It may help to illustrate what our problems look like; and it may show how many there are, and so convince you that there is no need whatever to worry over the question whether philosophical problems exist, or what philosophy is really about. So this list contains, by implication, an apology for my unwillingness to break with the old tradition of trying to solve problems with the help of rational argument, and thus for my unwillingness to participate wholeheartedly in the developments, trends, and drifts, of contemporary philosophy.

APPENDIX: SOME PROBLEMS IN THE

PHILOSOPHY OF SCIENCE

My first three items in this list of additional problems are connected with the calculus of probabilities.

(1) The frequency theory of probability. In The Logic of Scientific Discovery I was interested in developing a consistent theory of probability as it is used in science; which means, a statistical or frequency theory of probability. But I also operated there with another concept of which I called 'logical probability'. I therefore felt the need for a generalization - for a formal theory of probability which allows different interpretations: (a) as a theory of the logical probability of a statement relative to any given evidence; including a theory of absolute logical probability, i. e. of the measure of the probability of a statement relative to zero evidence; (b) as a theory of the probability of an event relative to any given ensemble (or 'collective') of events. In solving this problem I obtained a simple theory which allows a number of further interpretations: it may be interpreted as a calculus of contents, or of deductive systems, or as a class calculus (Boolean algebra) or as propositional calculus; and also as a calculus of propensities.??

?? See my note in Mind, loc. cit. The axiom system given there for elementary (i. e. non-continuous) probability can be simplified as follows ('x(_)' denotes the complement of x; 'xy' the intersection or conjunction of x and y):

(A1) P(xy)≽P(yx) (Commutation)

(A2) P(x(yz))≽P((xy)z) (Association)

(A3) P(xx)≽P(x) (Tautology)

(B1) P(x)≽P(xy) (Monotony)

(B2) P(xy) + P(xy(_)) = P(x) (Addition)

(B3) (x)(Ey)(P(y) ≠ O and P(xy) = P(x)P(y)) (Independence)

(C1) If P(y) ≠ O, then P(x,y) = P(xy)/P(y) (Definition of relative

(C2) If P(y) = O, then P(x,y) = P(x,x) = P(y,y) Probability)

Axiom (C2) holds, in this form, for the finitist theory only; it may be omitted if we are prepared to put up with a condition such as P(y) ≠ O in most of the theorems on relative probability. For relative probability, (A1) - (B2), (C1) - (C2), and (B3) up to 'and' suffices. For absolute probability, (A1) - (B3) is necessary and sufficient: without (B3) we cannot for example, derive the definition of absolute in terms of relative probability, we cannot, for example, derive the definition of absolute in terms of relative probability (we cannot ~ probability의 절이 이중으로 들어간 문장의 오류로 보인다. - 역자 주.),

P(x) = P(x, xx(_))

nor its weakened corollary

(x)(Ey) (P(y) ≠ O and P(x) = P(x,y))

from which (B3) results immediately (by substituting for 'P(x,y)' its definiens). Thus (B3), like all other axioms with the possible exception of (C2), expresses part of the intended meaning of the concepts involved, and we must not look upon 1≽P(x) or 1≽P(x,y), which are derivable from (B1), with (B3) or with (C1) and (C2), as 'inessential conventions' (as Carnap and others have suggested).

(Added 1955 to the first proofs of this paper; see also note 31, below.)

I have since developed an axiom system for relative probability which holds for finite and infinite systems (and in which absolute probability can be defined as in the penultimate formula above). Its axioms are:

(B1) P(x,z)≽P(xy,z)

(B2) If P(y,y) ≠ P(u,y) then P(x,y) + P(x(_),y) = P(y,y)

(B3) P(xy,z) = P(x,yz)P(y,z)

(C1) P(x,x) = P(y,y)

(D1) If ((u)P(x,u) = P(y,u)) then P(w,x) = P(w,y)

(E1) (Ex) (Ey) (Eu) (Ew) P(x,y) ≠ P(u,w)

This is a slight improvement on a system which I published in B.J.P.S., 6, 1955. pp. 56 f.; 'Postulate 3' is here called 'D1'. (See also vol. cit., bottom of p. 176. Moreover, in line 3 of the last paragraph on p. 57, the words 'and that the limit exists' should be inserted, between brackets, before the word 'all'.)

(Added 1961 to the proofs of the present volume.)

A fairly full treatment of all these questions will now be found in the new appendices to L.Sc.D.

I have left this note as in the first publication because I have referred to it in various places. The problem dealt with in this and the preceding note have since been more fully treated in the new appendices to L.Sc.D. (To its 1961 American Edition I have added a system of only three axioms; see also Addendum 2 to the present volume.)

(2) This problem of a propensity interpretation of probability arose out of my interest in Quantum Theory. It is usually believed that Quantum Theory has to be interpreted statistically, and no doubt statistics is essential for its empirical tests. But this is a point where, I believe, the dangers of the testability theory of meaning become clear. Although the tests of the theory are statistical, and although the theory (say, Schrödinger's equation) may imply statistical consequences, it need not have a statistical meaning: and one can give examples of objective propensities (which are something like generalized forces) and of fields of propensities, which can be measured by statistical methods without being themselves statistical. (See also the last paragraph of chapter 3, below, with note 35.)

(3) The use of statistics in such cases is, in the main, to provide empirical tests of theories which need not be purely statistical; and this raises the question of the refutability of statistical statements - a problem treated, but not to my full satisfaction, in the 1934 edition of my The Logic of Scientific Discovery. I later found, however, that all the elements for constructing a satisfactory solution lay ready for use in that book; certain examples I had given allow a mathematical characterization of a class of infinite chance-like sequences which are, in a certain sense, the shortest sequences of their kind.?? A statistical statement may now be said to be testable by comparison with these 'shortest sequences'; it is refuted if the statistical properties of the tested ensembles differ from the statistical properties of the initial sections of these 'shortest sequences'.

(4) There are a number of further problems connected with the interpretation of the formalism of a quantum theory. In a chapter of The Logic of Scientific Discovery I criticized the 'official' interpretation, and I still think that my criticism is valid in all points but one: one example which I used (in section 77) is mistaken. But since I wrote that section, Einstein, Podolsky, and Rosen have published a thought-experiment which can be substituted for my example, although their tendency (which is deterministic) is quite different from mine. Einstein's belief in determinism (which I had occasion to discuss with him) is, I believe, unfounded, and also unfortunate: it robs his criticism of much of its force, and it must be emphasized that much of his criticism is quite independent of his determinism.

(5) As to the problem of determinism itself, I have tried to show that even classical physics, which is deterministic in a certain prima facie sense, is misinterpreted if used to support a deterministic view of the physical world in Laplace's sense.

(6) In this connection, I may also mention the problem of simplicity - of the simplicity of a theory, which I have been able to connect with the content of a theory. It can be shown that what is usually called the simplicity of a theory is associated with its logical improbability, and not with its probability, as has often been supposed. This, indeed, allows us to deduce, from the theory of science outlined above, why it is always advantageous to try the simplest theories first. They are those which offer us the best chance to submit them to severe tests: the simpler theory has always a higher degree of testability than the more complicated one.?? (Yet I do not think that this settles all problems about simplicity. See also chapter 10, section xviii, below.)

(7) Closely related to this problem is the problem of the ad hoc character of a hypothesis, and of degrees of this ad hoc character (of 'ad hocness', if I may so call it). one can show that the methodology of science (and the history of science also) becomes understandable in its details if we assume that the aim of science is to get explanatory theories which are as little ad hoc as possible: a 'good' theory is not ad hoc, while a 'bad' theory is. on the other hand one can show that the probability theories of induction imply, inadvertently but necessarily, the unacceptable rule: always use the theory which is the most ad hoc, i. e. which transcends the available evidence as little as possible. (See also my paper 'The Aim of Science', mentioned in note 28 below.)

(8) An important problem is the problem of the layers of explanatory hypothesis which we find in the more developed theoretical sciences, and of the relations between these layers. It is

?? See L.Sc.D., p. 163 (section 55); see especially the new appendix *vi.

?? Ibid., sections 41 to 46. But see now also ch. 10, section xviii below.

often asserted that Newton's theory can be induced or even deduced from Kepler's and Galileo's laws. But it can be shown that Newton's theory (including his theory of absolute space) strictly speaking contradicts Kepler's (even if we confine ourselves to the two-body problem?? and neglect the mutual attraction between the planets) and also Galileo's; although approximations to these two theories can, of course, be deduced from Newton's. But it is clear that neither a deductive nor an inductive inference can lead, from consistent premises, to a conclusion which contradicts them. These considerations allows us to analyse the logical relations between 'layers' of theories, and also the idea of an approximation, in the two senses of (a) The theory x is an approximation to the theory y; and (b) The theory x is 'a good approximation to the facts'. (See also chapter 10, below.)

(9) A host of interesting problems is raised by operationalism, the doctrine that theoretical concepts have to be defined in terms of measuring operations. Against this view, it can be shown that measurements presuppose theories. There is no measurement without a theory and no operation which can be satisfactorily described in non-theoretical terms. The attempts to do so are always circular; for example, the description of the measurement of length needs a (rudimentary) theory of heat and of temperature-measurement; but these, in turn, involve measurements of length.

The analysis of operationalism shows the need for a general theory of measurement; a theory which does not, naïvely, take the practice of measuring as 'given', but explains it by analysing its function in the testing of scientific hypothesis. This can be done with the help of the doctrine of degrees of testability.

Connected with, and closely parallel to, operationalism is the doctrine of behaviourism, i. e. the doctrine that, since all test-statements describe behaviour, our theories too must be stated in terms of possible behaviour. But the inference is as invalid as the phenomenalist doctrine which asserts that since all test-statements are observational, theories too must be stated in terms of possible observations. All these doctrines are forms of the verifiability theory of meaning; that is to say, of inductivism.

Closely related to operationalism is instrumentalism, i. e. the interpretation of scientific theories as practical instruments or tools for such purposes as the prediction of impending events. That

?? The contradictions mentioned in the sentence of the text were pointed out, for the case of the many-body problem, by P. Duhem, The Aim and Structure of Physical Theory (1906; trans. by P. P. Wiener, 1954). In the case of the two-body problem, the contradictions arise in connection with Kepler's third law, which may be reformulated for the two-body problem as follows. Let S be any set of pairs of bodies such that one body of each pair is of the mass of our sun; then a³/T² = constant, for any pair in S.’ Clearly this contradicts Newton's theory, which yields for appropriately chosen units a³/T² = m? + m₁(where m? = mass of the sun = constant, and m₁= mass of the second body, which varies with this body). But ‘a³/T² = constant’ is, of course, an excellent approximation, provided the varying masses of the second bodies are all negligible compared with that of our sun. (See also my paper 'The Aim of Science', Ratio, 1, 1957, pp. 24 ff., and section 15 of the Postscript to my Logic of Scientific Discovery.)

theories may be used in this way cannot be doubted; but instrumentalism asserts that they can be best understood as instruments; and that this is mistaken, I have tried to show by a comparison of the different functions of the formulae of applied and pure science. In this context the problem of the theoretical (i. e. non-practical) function of predictions can also be solved. (See chapter 3, section 5, below.)

It is interesting to analyse from the same point of view the function of language - as an instrument. one immediate finding of this analysis is that we use descriptive language in order to talk about the world. This provides new arguments in favour of realism.

Operationalism and instrumentalism must, I believe, be replaced by 'theoreticism', if I may call it so: by the recognition of the fact that we are always operating within a complex framework of theories, and that we do not aim simply at correlations, but at explanations.

(10) The problem of explanation itself. It has often been said that scientific explanation is reduction of the unknown to the known. If pure science is meant, nothing could be further from the truth. It can be said without paradox that scientific explanation is, on the contrary, the reduction of the known to the unknown. In pure science, as opposed to an applied science which takes pure science as 'given' or 'known', explanation is always the logical reduction of hypotheses to others which are of a higher level of universality; of 'known' facts and 'known' theories to assumptions of which we know very little as yet, and which have still to be tested. The analysis of degrees of explanatory power, and of the relationship between genuine and sham explanation and between explanation and prediction, are examples of problems which are of great interest in this context.

(11) This brings me to the problem of the relationship between explanation in the natural sciences and historical explanation (a problem that, strangely enough, is logically analogous to the problem of explanation in the pure and applied sciences); and to the vast field of problems in the methodology of the social sciences, especially the problems of historical prediction; historicism and historical determinism; and historical relativism. These problems are linked, again, with the more general problems of determinism and relativism, including the problems of linguistic relativism.??

(12) A further problem of interest is the analysis of what is called 'scientific objectivity'. I have treated this problem in several places, especially in connection with a criticism of the so-called 'sociology of knowledge'.??

(13) one type of solution of the problem of induction should be mentioned here again (see section iv, above), in order to warn against it. (Solutions of this kind are, as a rule, put forth without a clear formulation of the problem which they are supposed to solve.)

?? See my Poverty of Historicism, 1957, section 28 and note, 30 to 32; also the Addendum I to vol. ii of my Open Society (added to the 4th edition 1962).

?? Poverty of Historicism, section 32; L.Sc.D., section 8; Open Society, ch. 23 and Addendum to vol. ii (Fourth Edition). The passages are complementary.

The view I have in mind may be described as follows. It is first taken for granted that nobody seriously doubts that we do, in fact, make inductions, and successful ones. (My suggestion that this is a myth, and that the apparent cases of induction turn out, if analysed more carefully, to be cases of the method of trial and error, is treated with the contempt which an utterly unreasonable suggestion of this deserves.) It is then said that the task of a theory of induction is to describe and classify our inductive policies or procedures, and perhaps to point out which of them are the most successful and reliable ones and which are less successful or reliable; and that any further question of justification is misplaced. Thus the view I have in mind is characterized by the contention that the distinction between the factual problem of describing how we argue inductively (quid facti?), and the problem of the justification of our inductive arguments (quid juris?) is a misplaced distinction. It is also said that the justification required is unreasonable, since we cannot expect inductive arguments to be 'valid' in the same sense in which deductive ones may be 'valid': induction simply is not deduction, and it is unreasonable to demand from it that it should conform to the standard of logical - that is, deductive - validity. We must therefore judge it by its own standards - by inductive standards - of reasonableness.

I think that this defence of induction is mistaken. It not only takes a myth for a fact, and the alleged fact for a standard of rationality, with the result that a myth becomes a standard of rationality; but it also propagates, in this way, a principle which may be used to defend any dogma against any criticism. Moreover, it mistakes the status of formal or 'deductive' logic. (It mistakes it just as much as those who saw it as the systematization of our factual, that is, psychological, 'laws of thought'.) For deduction, I contend, is not valid because we choose or decide to adopt its rules as standard, or decree that they shall be accepted; rather, it is valid because it adopts, and incorporates, the rules by which truth is transmitted from (logically stronger) premises to (logically weaker) conclusions, and by which falsity is re-transmitted from conclusions to premises. (This re-transmission of falsity makes formal logic the Organon of rational criticism - that is, of refutation.)

One point that may be conceded to those who hold the view I am criticizing here is this. In arguing from premises to the conclusion (or in what may be called the 'deductive direction'), we argue from the truth or the certainty or the probability of the premises to the corresponding property of the conclusion; while if we argue from the conclusion to the premises (and thus in what we have called the 'inductive direction'), we argue from the falsity or the uncertainty or the impossibility or the improbability of the conclusion to the corresponding property of the premises; accordingly, we must indeed concede that standards such as, more especially, certainty, which apply to arguments in the deductive direction, do not also apply to arguments in the inductive direction. Yet even this concession of mine turns in the end against those who hold the view which I am criticizing here; for they assume, wrongly, that we may argue in the inductive direction, though not to the certainty, yet to the probability of our 'generalizations'. But this assumption is mistaken, for all the intuitive ideas of probability which have ever been suggested.

This is a list of just a few of the problems of the philosophy of science to which I was led in my pursuit of the two fertile and fundamental problems whose story I have tried to tell you.??

?? (13) was added in 1961. Since 1953, when this lecture was delivered, and 1955, when I read the proofs, the list given in this appendix has grown considerably, and some more recent contributions which deal with problems not listed here will be found in this volume (see especially ch. 10, below) and in my other books (see especially the new appendices to my L.Sc.D., and the new Addendum to vol. ii of my Open Society which I have added to the fourth edition, 1962). See especially also my paper 'Probability Magic, or Knowledge out of Ignorance', Dialectica, 11, 1957, pp. 354-374.

(Added 1989.) It is interesting that, as David Miller and I have been able to show, if probabilistic inductive support exists, it is always negative; that is, countersupport. See our paper 'Why Probabilistic Support Is Not Inductive', Philosophical Transactions of the Royal Society of London, series A, 321, 1987, pp. 569-596.

- "CONJECTURES AND REFUTATIONS, The Growth of Scientific Knowledge", Karl. R. Popper -

1장___과학__-__추측과_논박.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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