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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지식에 관한
세 가지 견해
1. 갈릴레오의 과학과 그 과학에 대한 최근의 배반
옛날에 그 이름이 갈릴레오 갈릴레이인 유명한 과학자가 있었다. 그는 종교재판에 회부되어, 자신의 가르침을 철회하라는 강요를 받았다. 이 사건은 커다란 파장을 낳았다; 그리고 250년이 넘게 지나는 동안 이 사건은 계속해서 분노와 흥분을 야기했다 - 여론이 승리를 거두고 가톨릭교회가 과학을 용인하게 된 후 오랫동안.
그러나 이것은 지금쯤 매우 오래된 이야기어서 그 이야기가 자체의 흥미를 잃었을까봐 나는 두렵다. 그 까닭은 갈릴레오의 과학에는 남은 적(敵)이 없는 듯 하기 때문이다: 이제부터 그 과학의 삶은 안전하다. 오래전에 얻는 승리는 최종적이었고, 이 전선(戰線)에서 이상은 없다. 그래서 마침내 역사적으로 생각하는 것을 배우고, 논란의 양쪽 면을 이해하는 것을 배우고 우리는 오늘날 사건에 관하여 공평한 관점을 가진다. 그리고 아무도 오래된 억울함을 잊지 못하여 피곤하게 만드는 사람의 말을 듣고 싶어 하지 않는다.
결국 이 오래된 사건은 무엇에 관한 것이었던가? 그 사건은, 다른 것들에 덧붙여, 오직 분명한 것으로서, 그리고 우리 자신이 사는 지구 자전의 원인으로서 태양의 일주(日周) 운동을 설명하는 코페르니쿠스가 주장한 ‘세상 체계’의 지위에 관한 것이었다.? 가톨릭교회는 새로운 체계가 구체계보다 더 간단하다는 것을 인정한 준비가 철저히 되어 있었다: 새로운 체계가 천문학적 측정을 위하여, 그리고 예측을 위하여 더 편리한 도구였다는 것. 그래서 교황 그레고리(Gregory)의 달력 개혁은 그 체계를 완전히 실용적으로 이용했다. 갈릴레오가 수학적 이론의 가치는 단지 도구적임을 분명히 하는 한 갈릴레오의 수학적 이론에 대한 반대는 없었다; 벨라르미노(Bellarmino)
? 나는 여기서 그것이 여호수아서(Joshua) 10장, 12장 6절과 충돌하는 일주(日周) 운동 이론이기 때문에, 그리고 태양의 일주(日周) 운동을 지구의 움직임으로써 설명하는 것이 다음에 이어지는 것에서 나의 주요 보기 중 하나가 될 것이기 때문에, 태양의 연간 운동에 반대되는 것으로서 일주(日周)를 강조한다. (이 설명은, 물론, 코페르니쿠스보다 훨씬 더 오래되었고 - 아리스타쿠스[Aristarchus]보다도 훨씬 더 오래되었다 - 반복적으로 재발견되었다; 예를 들어 오렘[Oresme]에 의하여.)
H. D. 루이스(Lewis)에 의하여 1956년에 편집된 현대 영국 철학, 세 번째 총서에 최초로 실림.
추기경이 표현하는 바와 같이 그것이 ‘가정(supposition)’일 따름이라는 것;? 혹은 ‘수학적 가설’ - 일종의 수학적 기교로 ‘계산을 단축하고 쉽게 하기위하여 고안되고 가정된’.? 다시 말해서 코페르니쿠스의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De revolutionibus)의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던 안드레아스 오지안더(Andreas Osiander)의 말에 갈릴레오가 순응할 준비가 되어있는 한 반대는 없었다: ‘이 가설들이 사실일 필요는 없으며, 심지어 조금이라도 진리와 닮을 필요도 없다; 오히려, 그 가설들에는 한 가지 일만으로 충분하다 - 그 가설들이 관찰과 일치하는 계산을 산출해야 하는 것.’
갈릴레오 자신은 물론 코페르니쿠스의 체계가 지닌 우수성을 계산의 도구로서 강조할 준비가 잘 되어 있었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그것이 세상에 대한 진정한 기술(記述)이라고 추측했고, 심지어 믿었다; 그래서 그에게는 (가톨릭교회에게처럼) 이것이 문제에 관한 단연코 가장 중요한 모습이었다. 그에게는 그 이론의 진실성을 믿을만한 충분한 이유가 정말로 있었다. 그는 자신의 망원경으로 목성과 목성의 위성들이 코페르니쿠스적 태양계의 (그 태양계에 따라서 혹성들은 태양의 위성이었다) 축소 모형을 이루고 있음을 보았다. 게다가, 코페르니쿠스가 옳다면 내부의 위성들은 (그리고 그 위성들만), 지구에서 관측되었을 때, 달과 같은 여러 모습을 보일 것이다; 그리고 갈릴레오는 자신의 망원경으로 금성의 여러 모습을 관찰했다.
가톨릭교회는 구약성서 속의 구절을 부인하는 것처럼 보였던 세상에 관한 새로운 체계가 지닌 진실을 심사숙고하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것이 주요 이유는 아니었다. 더 깊은 이유는 약 100년 후에 버클리(Berkeley) 주교에 의하여 뉴튼에 대한 그의 비판 속에 명백하게 진술되었다.
버클리(Berkeley) 주교 시대에 코페르니쿠스의 세상에 대한 체계는 뉴튼의 중력 이론으로 발전하였고, 버클리(Berkeley)는 그 속에서 종교에 대한 심각한 도전을 보았다. 그는 ‘자유-사상가들’에 의한 새로운 과학의 해석이 논박되지 않는다면 새로운 과학으로부터 신앙심과 종교적 권위의 쇠퇴가 일러나리라고 보았다; 그 까닭은 ‘자유-사상가들’이 새로운 과학의 성공 속에서, 하느님의 계시의 도움을 받지 않고, 우리가 사는 세상의 비밀을 - 세상의 표면 뒤에 숨겨진 실재 - 밝히는 인간의 지성이 지닌 능력에 대한 증거를 보았기 때문이다.
버클리(Berkeley)가 느끼기에 이것은 새로운 과학을 잘못 해석하는 것이었다. 그는 뉴튼의 이론을 철저히 솔직하게 그리고 철학적으로 매우 명석하게 분석하였다; 그래서 뉴튼의 개념을 비판적으로 조사하여 그는 이 이론이
? ‘... 갈릴레오는 신중하게 행동할 것이다’라고 벨라르미노 추기경은 썼다 (그 추기경은 지오다노 브루노[Giordano Bruno]를 심판한 종교재판관의 한 명이었다) ‘... 만약 그가 가정으로부터(ex suppositione) 가설적으로 말을 하려고 한다면...: 우리가 이심원(eccentrics: 離心圓)과 주전원(epicycles: 周轉圓)을 사용한다면 우리가 내놓을 수 있는 것보다 더 좋은 현상들에 대한 설명을, 지구가 움직이고 태양이 정지해 있다고 가정함으로써, 내놓는 것은 올바르게 말하는 것이다; 그 속에는 위험이 없고, 그것은 수학자가 요구하는 유일한 것이다.’ H. 그리사르(Grisar)의 갈릴레이 연구(Gelileistudien), 1882년, 부록 ix 참조. (이 구절이 벨라르미노를 오지안더(Osiander)가 얼마 전에 제안했던, 그리고 내가 ‘도구주의[instrumentalism]'로 지칭할, 인식론의 설립자 한 명으로 만들지라도, 벨라르미노는 - 버클리(Berkeley)와 달리 - 이 편지의 다른 구절들이 밝히는 바와 같이, 자신이 확신하는 도구주의자는 전혀 아니었다. 그는 도구주의 속에서 불편한 과학적 가설들을 다루는 합당한 방법 중 한 방법을 보았을 뿐이다. 오지안더(Osiander)에 관해서도 아마도 동일할 것이다. 아래 주석 6 또한 참조.)
? 인용구는 새로운 논리학(Novum Organum) II, 36에서 베이컨이 코페르니쿠스를 비판한 것에서 따왔다. 다음 인용구에서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De revolutionibus]로부터 나온) 'verisimilis'라는 용어를 ‘진실과 닮은’으로써 나는 해석했다. 그 용어는 여기서 의심할 바 없이 ‘개연적(probable)’으로 해석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 까닭은 여기에서 전체 요점은 코페르니쿠스의 체계가 구조상 세상과 유사한지 아닌지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그 체계가 진실과 유사한지 즉, 진실과 같은지. 확실성의 정도 문제 즉, 확률은 나타나지 않는다. 중요한 진실과의 유사성 즉, 박진성(verisimilitude: 迫眞性)의 문제에 관해서, 아래 10장 특히, 3부, 10부, 그리고 14부와 부록 6 또한 참조 (10장은 아직 번역되지 않음. - 역자 주).
‘수학적 가설’ 즉, 현상이나 표면을 계산하고 예측하는 데 쓰이는 편리한 도구 외에 다른 것이 도저히 될 수 없다고 확신했다; 이 이론이 사실적인 것에 대한 진정한 기술(記述)로서는 도저히 생각될 수 없다고.?
버클리(Berkeley)의 비판은 물리학자들에 의하여 주목을 받지 못했다; 그러나 그 비판은 철학자들에 의하여 종교적일 뿐만 아니라 회의적으로서 취급되었다. 무기로서 그 비판은 부메랑임이 밝혀졌다. 흄(Hume)의 손 안에서 그 비판은 모든 신념에 대하여 - 인간적이든 계시된 것이든, 모든 지식에 대하여 - 위협이 되었다. 하느님과 뉴튼 과학의 진실 모두를 굳건히 믿었던 칸트의 손 안에서, 그 비판은 하느님에 대한 이론적 지식은 불가능하다는, 그래서 뉴튼의 과학은 표면의 세상 뒤에 있는 실재적 세상을 발견했다는 자체의 주장을 포기함으로써 진실을 지니고 있다는 자체의 인정에 대하여 대가를 치려야 한다는, 학설로 발전했다: 그것은 자연에 대한 진정한 과학이었지만, 자연은 정확하게 단지 현상의 세상, 우리가 지닌 흡수하는 생각에 출현하는 것으로서의 세상이었다. 나중에 어떤 실용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전체 철학을 ‘순수한’ 지식은 오류라는 관점에 기초하였다; 도구적인 지식의 의미 외에는 다른 의미로 지식이 있을 수 없다는 관점. 지식은 힘이고, 진실은 쓸모라는 관점.
물리학자들은 (몇몇 탁월한 예외들과 함께?) 이 모든 철학적 논쟁들에 참가하지 않았는데, 그 논쟁들은 완전히 미해결이었다. 갈릴레오에 의하여 만들어진 전통에 충실하여 그들은, 갈릴레오가 이해하는 바와 같이, 진리 탐구에 몰두하였다.
혹은 매우 최근까지 그들은 그렇게 했다. 그 까닭은 이 모든 것이 지금은 과거 역사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오지안더(Osiander), 벨라르미노 추기경(Cardinal Bellarmino), 그리고 버클리 주교(Bishop Berkeley)?에 의하여 세워진 물리 과학에 대한 관점은 총 한번 쏘지 않고 전투에서 승리했다.
? 아래 6장 또한 참조.
? 그들 중 가장 중요한 사람들은 마흐(Mach), 키르초프(Kirchhoff), 헤르츠(Hertz), 뒤앙(Duhem), 푸앵카레(Poincaré), 브리쥐먼(Bridgman), 그리고 에딩튼(Eddington)으로 모두 다양한 정도에서 도구주의자들이다.
? 뒤앙(Duhem)은, 자신의 유명한 논문집 ‘현상을 구하는 것(Sōzein to phainómena)' (Ann. de philos, chrétienne, anneé 79, 6권, 1908, nos. 2 to 6)에서, 도구주의에 대하여 증거에 의하여 정당화되는 것보다 훨씬 더 오래되고 훨씬 더 유명한 전통을 주장했다. 그 까닭은 우리가 지닌 인과적 가설들로써 우리는 ‘관찰된 사실들을 우리의 이론에 짜 넣거나 짜 맞추려고 노력함으로써 그 사실들에 폭력을 행사하기’보다는 ‘관찰된 사실들을 설명하여야’ 한다는 공리(公理)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천체론[De Caelo], 293a25; 296b6; 297a4, b24이하; 형이상학[Met.], 1073b37, 1074a1) (우리가 지닌 이론들이 사실을 설명할 수 없다는) 도구주의적 주장과 관계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공리(公理)는 우리가 ‘현상들을 보전하거(preserve the phenomena)’나 현상들을 ‘구조해야(save)’ 한다는 것과 ([dia-]sōzein ta phainomena) 본질적으로 동일하다. 그 표현은 플라톤 학파의 전통적 천문학적 분야와 연결되어 있는 듯 보인다. (플루타크의 달의 궤도의 형태에 대하여[De Facie in Orbe Lunae], 923a에서의 아리스타쿠스에 대한 가장 흥미로운 구절을 참조할 것; 현상에 의한 ‘원인의 확증’에 대한 933a, 그리고 플루타크의 이 책을 자신이 편집한 편집본 168쪽에 관한 체르니스[Cherniss]의 주석 a를 또한 참조; 게다가, 그 표현이 나타나는 천체에 관하여[De Caelo]에 대한 심플리시우스[Simplicius]의 비평, 예를 들어 천체에 관하여[De Caelo] 293a4와 292b10에 관한 비평에서 하이버그[Heiberg] 판본의 497쪽 1.21, 506쪽 1.10, 그리고 488쪽 1.23 이하.) 유독서스(Eudoxus)가 플라톤의 영향을 받아서 혹성 움직임의 관찰 가능한 현상을 설명하기 위하여, 자신이 물리적 실체를 귀속시키지 않았던 회전하는 천체에 대한 추상적인 기하학적 체계를 진화시키는 임무를 자신에게 부과했다는 심플리시우스의 보고를 우리는 수용할 것이다. (이 프로그램과 에피노미스[Epinomis], 990-1의 프로그램 사이에는 어떤 유사점이 있는 듯한데, 에피노미스[Epinomis], 990-1에서 추상기하 연구는 - 무리수에 대한 이론 연구, 990d-991b - 혹성 이론에 대한 필수적인 예비 연구로서 기술(記述)된다; 또 다른 그런 예비 연구는 숫자 연구 - 예를 들어 홀수와 짝수, 990c - 이다.) 그러나 심지어 이것도 플라톤이나 유독서스[Eudoxus]가 도구주의적 인식론을 수용했음을 의미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의식적으로 (그리고 현명하게) 예비적 문제에 자신들을 국한시켰을 것이다.
철학적 문제에 대한 진전된 논쟁 없이, 새로운 논증을 만들어내지 않고, (내가 그것을 지칭할 것과 같이) 도구주의적 견해(instrumentalist view)는 수용된 독단적 교설이 되었다. 그것은 물리학의 주요 이론가들 대부분에 의하여 수용되기 때문에 (아인슈타인과 슈뢰딩거[Schrödinger]는 수용하지 않을지라도) 지금은 물리 이론의 ‘공식적 견해’라고 불릴 것이다. 그리고 그 견해는 물리학에 관한 현대적 가르침의 한 부분이 되었다.
2. 걸려있는 문제
이 모든 것은 물리학자들의 ‘순진한 실재론’에 대한 철학적인 비판적 사고의 커다란 승리처럼 보인다. 그러나 나는 이 해석이 옳은지 의심한다.
벨라르미노(Bellarmino) 추기경과 버클리(Berkeley) 주교의 도구적 관점을 이제 수용했던 물리학자들 중 자신들이 철학적 이론을 수용했다는 것을 깨닫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들은 또한 갈릴레오식 전통과 결별했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반대로, 그들 대부분은 자신들이 철학을 피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들 대부분은 조금도 신경을 쓰지 않는다. 그들이, 물리학자로서, 지금 신경을 쓰는 것은 (a) 수학적 형식 체계를, 다시 말해서 도구를 장악하는 것이고 (b) 그 형식 체계를 적용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다른 것들에게 신경을 쓰지 않는다. 그리고 그들은 그렇게 다른 모든 것들을 제외함으로써 자신들이 드디어 모든 철학적 횡설수설을 제거했다고 생각한다. 바로 이 거칠고 횡설수설을 참지 못하는 자세 때문에 그들은 과학에 대한 갈릴레오의 견해를 찬성하거나 반대하는 철학적 논증을 심각하게 고려하지 않는다 (그들이 의심할 바 없이 마흐[Mach]에 관하여 들을 것이라 할지라도? [역자 주 - 19세기 말 E. 마흐는 뉴튼이 절대운동을 가정한 것을 비판하여 상대운동만이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따르면 만유인력의 법칙은 우주 전체의 물질의 양과 분포에 의존한다. 이 원리는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 확립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또, 과학적 사유의 원칙으로서 사유 경제설을 제창하여 과학적 사실의 기술에는 되도록 최소의 개념을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함.]). 그리하여 도구주의적 철학의 승리는 그 자체의 논증이 지닌 완전함 때문이 아니다.
그렇다면 그 승리는 어떻게 발생했는가? 내가 알 수 있는 한, (a) 양자론의 형식 체계를 해석하는 난제들과, (b) 그것을 적용하는 데에 관련된 장대한 실용적 성공이라는 두 가지 요인의 우연의 일치를 통해서이다.
(a) 1927년에 원자물리학 분야에서 위대한 사상가 한 사람인 닐스 보어(Niels Bohr)는 소위 상보성의 원리(principle of complementarity)를 원자물리학에 소개했는데, 그것은 원자 이론을 어떤 것에 대한 기술(記述)로서 설명하려는 시도를 ‘포기하는 것’과 동일했다. 그런 상태로서의 형식 체계가 스스로 일관적이라고, 그리고 그 형식 체계의 적용에 관한 각 사례가 (혹은 사례의 각 종류가) 그 형식 체계와 일치한다고, 우리 자신에게 상기시킴으로써만 우리가 (형식 체계와 그 다양한 해석 사이에서 발생하려고 위협하는) 특정한 모순을 피할 수 있었다고 보어(Bohr)는 지적했다. 모순은 한 가지 해석 안에 그 실험적 적용의 한 가지 사례 이상이나 사례의 종류 한 가지 이상과 함께 형식 체계를 포함시키려는 시도를 통하여 출현하였을 따름이다. 그러나 보어(Bohr)가 지적한 바와 같이 이 상충하는 적용 두 가지는 물리적으로 한 가지 실험에서 결합되어질 수 없었다. 그리하여 모든 한 가지 실험의 결과는 이론과 일치하였으며, 그 이론에 의하여 명백하게 기술(記述)되었다. 이것이 우리가 얻을 수 있었던 유일한 것이라고 그는 말했다. 더 많은 것을 얻으려는 주장을, 심지어 더 많은 것을 얻으려는 희망을, 우리는 포기해야 한다; (a) 형식 체계를 숙달하는 것을, 그리고 (b) 실제적으로
? 그러나 마흐가 자신의 도구주의에 영향을 받아 원자론에 대항하여 싸웠다는 것을 - 아래 5부의 주제인 도구주의의 몽매주의(obscurantism)에 관한 전형적인 사례 - 그들은 잊은 듯이 보인다.
실현가능한 적용의 경우 각각에 그 이론들을 분리하여 연관시키는 것을 초월하여, 그 이론들을 해석하거나 이해하려고 우리가 노력하지 않는다는 조건에서만 물리학은 모순이 없게 된다.?
그리하여 도구주의 철학은 이론이 위협을 당하는 특정 모순들로부터 이론을 위한 도피처를 제공하기 위하여 여기서 특별한 목적을 위하여 만들어져 사용되었다. 그 이론은 방어적 풍조로 - 현존하는 이론을 구제하기 위하여 - 사용되었다; 그래서 상보성의 원리는 (이런 이유 때문이라고 나는 믿는다) 물리학 내에서 완전히 쓸모없는 것으로 남았다. 27년 동안에 그 원리는 몇 가지 철학적 토론과, 비판자들을 (특히 아인슈타인) 혼란시키는 데에 관한 몇 가지 논증을 제외하고는 아무 것도 생산하지 못했다.
물리학자들이 그 원리를 특별한 목적을 위하여 만들어졌다거나, 혹은 그 원리가 철학적 원리라고 - 벨라르미노(Bellarmino)와 버클리(Berkeley)의 물리학에 관한 도구주의적 철학의 한 부분 - 이해했더라면 물리학자들은 그렇게 특별한 목적을 위하여 만들어진 원리를 수용했었으리라고 나는 믿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은 그보다 앞서고 매우 효과적인 보어(Bohr)의 ‘대응의 원리(principle of correspondence)’를 기억하면서 유사한 결과를 얻기를 (헛되이) 희망했다.
(b) 상보성의 원리로 인한 결과 대신에 원자론에 관한 다르고 더 실용적인 결과들이 획득되었는데, 그 결과들 중 몇몇은 빅뱅을 지녔다. 의심할 바 없이 물리학자들이 이 성공적인 적용들을 자신들의 이론을 입증하는 것으로서 해석하는 데서 완전히 옳았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들은 그 성공적인 적용들은 도구주의적 신념을 확증하는 것으로서 생각했다.
당시 이것은 명백한 오류였다. 갈릴레오의 견해는 이론들이 도구일 뿐만 아니라 - 그리고 주로 - 세상에 대한 혹은 세상의 어떤 모습에 대한 기술(記述)이기도 하다는 것인 반면, 도구주의적 관점은 이론들이 도구일 따름이라고 주장한다. 이 불협화음 속에서 심지어 이론들이 도구라는 것을 밝히는 증거도 (그 증거가 그런 것을 ‘증명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가정하여), 양 편이 이 요점에 관하여 동의하였기 때문에, 논쟁과 관련된 양 편 중 한 편을 지원하는 것으로 진지하게 주장될 수 없었다.
상황에 대한 나의 설명에서 내가 옳다면, 아니면 심지어 개략적으로라도 내가 옳다면, 철학자들 심지어 도구주의적 철학자들에게는 자신들의 승리를 자랑스러워할 이유가 없다. 반대로, 그들은 자신들의 논증을 다시 검토해야 한다. 그 까닭은 적어도 내 자신과 같이 도구주의적 관점을 수용하지 않는 사람들의 눈에도 이 문제에는 걸려있는 것이 많기 때문이다.
그 문제는, 내가 보는 바와 같이, 이러하다.
우리 서구문명의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는 우리가 그리스인들로부터 물려받은 내가 ‘이성적 전통’이라고 부를 것이다. 그 요소는 비판적 토론의 전통이다 - 비판적 토론의 전통을 위한 것이 아니고 진실을 탐구하는 관심이다. 그리스 과학은, 그리스 철학처럼, 이 전통의 산물 중 하나였고?,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을 이해하려는 충동의 산물 중 하나였다; 그리고 갈릴레오에 의하여 세워진 전통은 그 비판적 토론의 전통의 부활이었다.
? 여러 해 동안 노력을 들여서 나는 보어의 ‘상보성의 원리’를 내가 이해하는 바와 같이 설명하였다. 의심할 바 없이 나는 그 원리에 대한 나의 자세한 설명이 만족스럽지 못하는 말을 들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면 나는 다른 사람과 같은 상황에 처한다; 그 까닭은 아인슈타인이 그 원리를 ‘그 원리에 내가 쏟아 부은 많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내가 도달할 수 없었던 ... 날카로운 공식화인 보어의 상보성의 원리’로서 언급하기 때문이다. 앨버트 아인슈타인: 철학자-과학자, P. A. 슐맆(Schlipp) 편집, 1949년, 674쪽.
? 아래 4장 참조 (4장은 아직 번역되지 않음. - 역자 주).
이 이성주의적 전통 속에서 과학은 그 실용적 업적 때문에, 틀림없이, 귀하게 취급된다; 그러나 과학은 과학이 지닌 지식을 주는 내용 때문에, 우리의 정신을 낡은 신념으로부터, 낡은 편견으로부터, 낡은 확신으로부터, 해방시키어 그것들의 자리에 새로운 추측들과 과감한 가설들은 제공하는 능력 때문에, 훨씬 더 귀중하게 취급된다. 과학은 과학이 지닌 해방적 영향력 - 인간의 자유를 향하여 전진하는 가장 위대한 힘 중 하나로서 - 때문에 소중하게 취급된다.
내가 여기서 옹호하려고 하는 과학에 관한 관점에 따라서, 이것은 과학자들이 (탈레스[Thales], 데모크리투스[Democritus], 플라톤의 저서 티마이오스[Timaeus}, 그리고 아리스타쿠스[Aristarchus] 이래) 신화(神話)나 추측이나 이론들을 과감하게 만들어내려고 했던 사실 때문인데, 그것들은 공통적인 경험의 일상적인 세상에는 뚜렷이 대비되지만, 공통적인 경험의 이 세상에 대한 몇 가지 모습을 설명할 수 있다. 정확히 그들이 우리들의 감각과 관련된 이 알려진 세상을 초월하여 과감히 넘어갔기 때문에 갈릴레오는 아리스타쿠스(Aristarchus)와 코페르니쿠스(Copernicus)에게 경의를 표한다: ‘그들 자신이 지녔던 감각의 증거에 격렬하게 반대하여..., [태양중심 체계]를 상상하여 그것이 사실이라고 믿었던... 이 사람들이 지닌 정신의 위대함에 대한 나의 무한한 찬사를 나는 충분히 강하게 표현할 수 없다’고 그는 쓴다.?? 이것이 과학이 지닌 해방적 힘에 대한 갈릴레오의 증언이다. 그런 이론들은 설사 우리들의 상상력을 위한 연습에 지니지 않을지라도 중요하리라. 그러나 그 이론들은, 그 이론들로부터 공통으로 경험하는 알려진 세상에 대한 규칙성 몇 가지를 연역하려고 함으로써 - 다시 말해서 이 규칙성을 설명하려고 노력함으로써 - 우리가 그 이론들을 엄격한 시험에 부친다는 사실로부터 밝혀질 수 있는 바와 같이, 이것 이상이다. 그리고 미지의 것으로써 알려진 것을 설명하려는 이 노력들은 (내가 다른 곳에서 그것들을 설명한 바와 같이??) 알려진 것의 영역을 측정될 수 없을 정도로 넓혔다. 그것들은 우리들의 일상적 세상이 지닌 사실들에 비가시적 공기, 지구 정반대 쪽에 있는 두 지점(the antipodes), 혈액순환, 망원경과 현미경으로 보는 세상, 전기의 세상, 그리고 생명이 있는 몸체 속에서의 물질의 움직임을 상세하게 우리에게 보여주는 추적 원자들의 세상을 추가했다. 이 모든 것들은 단순히 도구로서 존재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그것들은 우리의 정신으로써 우리의 세상을 지적(知的)으로 정복하는 데에 대한 증거이다.
이 문제들을 보는 또 다른 방식이 있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과학이 아직도 찬양받는 배관작업이고 찬양받는 기계장치 만들기에 - ‘기술자들’ - 지나지 않는다; 매우 유용하지만 (셰익스피어의 ‘기계와 같은 인간들[mechanicals]’이라는) 거의 문맹인 자들의 지배로 우리를 위협하는, 진정한 문화에 대한 위험. 과학은 문학이나 예술이나 철학과 동일한 암시로 언급되어서는 안 된다. 과학이 주장하는 발견들은 기계적인 발명들이고, 과학의 이론들은 도구들 - 다시 기계장치들, 혹은 아마도 초(超)기계장치들 - 이다. 과학은 우리들이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현상의 세상 뒤에 있는 새로운 세상들을 우리에게 드러낼 수도 없고 드러내지도 않는다; 그 까닭은 물리적 세상은 표면일 따름이기 때문이다: 물리적 세상에는 깊이가 없다. 세상은 존재하는 것으로 보이는 것일 따름이다. 오직 과학적 이론들만이 자체들이 존재하는 것으로 보이는 것이 아니다. 과학적 이론은 세상을 설명하지도 기술(記述)하지도 않는다; 그 이론은 도구에 지니지 않는다.
?? 살비아티(Salviati)는 언어적 변화 없이, 두 가지 중요 체계(The Two Principal Systems)의 세 번째 날에 관해서 여러 번 그렇게 말한다.
?? 위의 부록 1장의 요점 (10)과, 아래 6장의 마지막에서 두 번째 문단 참조 (6장은 아직 번역되지 않음. - 역자 주).
내가 생각하기에 이것이 현대적 도구주의가 지닌 원래 철학적 배경의 한 부분에 대한 공정한 개요라 할지라도, 나는 이것을 현대적 도구주의에 대한 완벽한 기술(記述)로서 제시하지는 않는다. 오늘날 그것의 훨씬 더 중요한 부분은 현대적 ‘기술자’, 즉 엔지니어의 발흥과 자기주장임을 나는 충분히 인식하고 있다.?? 그렇지만 문제는, 비판적이고 모험적인 이성주의와 - 발견의 정신 -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것보다 더 많이 우리의 세상에 대하여 우리가 알 수도 없고 알 필요도 없고 이해할 수도 없고 이해할 필요도 없다는 편협하고 방어적인 신조 사이에, 놓여있는 것이 틀림없이 보인다고 나는 믿는다. 게다가 과학을 인간 정신의 가장 위대한 업적 하나로서 평가하는 일과 양립할 수 없는 신조.
그런 것들이 내가, 이 논문에서, 적어도 도구주의적 관점에 반대하는 갈릴레오가 지닌 과학에 관한 견해의 한 부분을 지지하려고 노력할 이유이다. 그러나 나는 그 견해 모두를 지지할 수는 없다. 그 견해의 한 부분은 내가 믿기에 도구주의자들이 공격하기에 옳았다. 과학에서 우리는 본질들에 의한 궁극적 설명을 목표로 할 수도 있고 얻을 수도 있다는 견해를 나는 의미한다. 도구주의의 힘과 철학적 관심이 놓여있는 곳은 (내가 ‘본질주의’라고 불렀던??) 이 아리스토텔레스의 관점에 도구주의가 반대한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인간 지식에 대한 두 가지 견해를 - 본질주의와 도구주의 - 논의하고 비판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 두 가지 견해에 내가 세 번째 견해라고 부를 것을 대조시킬 것이다 - 본질주의를 제거한 후에, 혹은 더 정확하게 도구주의적 공격에서 정당화된 것에 관하여 참작이 된 후에, 갈릴레오의 견해에서 남는 것.
3. 첫 번째 견해: 본질에 의한 궁극적 설명
과학적 이론에 관한 세 가지 견해들 중 첫 번째인 본질주의는 과학에 관한 갈릴레오 철학의 한 부분이다. 이 철학의 내부에서 우리와 관련되는 세 가지 요소나 원리가 여기서 구분될 것이다. 본질주의는 (우리들의 ‘첫 번째 견해’) 내가 지지하기를 원치 않는 갈릴레오 철학의 그 부분이다. 본질주의는 원리 (2)의 (3)의 결합으로 구성된다.
이것들이 세 가지 원리이다:
(1) 과학자는 세상에 대한 (그리고 특히 세상의 규칙성이나 ‘법칙들’에 대한) 진정한 이론이나 기술(記述)을 발견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데, 그 이론이나 기술(記述)은 관찰될 수 있는 사실에 대한 설명이기도 할 것이다. (이 사실들에 대한 기술[記述]은 틀림없이 어떤 서술들과 연결된 이론인 소위 ‘초기 조건들’로부터 연역 가능할 것임을 의미한다.)
이것은 내가 지지하고 싶은 원리이다. 그 원리는 우리들이 지닌 ‘세 번째 견해’의 한 부분을 형성할 수 있다.
(2) 과학자는 모든 합당한 의심을 초월하여 그런 이론들의 진리를 최종적으로 확립하는 데에 성공할 수 있다.
이 두 번째 원리에는, 내가 생각하기에, 수정할 필요가 있다. 과학자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내 생각에, 자신의 이론들을 시험하여 자신이 고안할 수 있는 가장 엄격한 시험을 견디지 못하는 모든 이론들을 제거하는 것이다.
?? 자연과학은 의심할 바 없는 참된 지식(epistémé: scientia)이 아니라는 깨달음으로 인하여 자연과학은 technē(기교, 솜씨, 기술[technique, art, technology])라는 견해가 출현했다; 그러나 타당한 견해는, 내가 믿는 바, 자연과학은, 실험적인 technē에 의해서 뿐만 아니라 비판적 토론에 의해서 억제되어, doxai(견해, 추측[opinions: conjectures])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이다. 아래 20장 참조 (20장은 아직 번역되지 않음. - 역자 주).
?? 나의 저서 역사주의 빈곤(Poverty of Historicism)의 10부와, 열린사회와 그 적들 1권 3장 6부 및 2권 11장 1-2부 참조.
그러나 새로운 시험들로 (혹은 심지어 이론적 토론) 인하여 그가 자신의 이론을 수정하거나 버리게 될지를 그는 완전히 확신할 수 없다. 이런 의미에서 모든 이론은 가설이고, 가설로 남는다: 모든 이론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참된 지식(epistémé)과 반대로서 추측(doxa)이다.
(3) 가장 뛰어나고, 진정으로 과학적인 이론들은 사물들의 - 현상 뒤에 놓여있는 실재들인 - ‘본질들’이나 ‘본질적 본성들’을 기술(記述)한다. 그런 이론들에는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하지도 않고 그런 이론들은 더 이상의 설명을 허용하지도 않는다: 그런 이론들은 최종적 설명이어서, 그 설명들을 찾는 것이 과학자의 최종적 목표이다.
이 세 번째 원리는 (두 번째 원리와 연결하여) 내가 ‘본질주의’라고 불렀던 원리이다. 두 번째 원리처럼 세 번째 원리도 오류라고 나는 믿는다.
이제 버클리(Berkeley)부터 마흐(Mach), 뒤앙(Duhem), 그리고 푸앵카레(Poincaré)에 이르는 과학의 도구주의 철학자들이 공통으로 지닌 것은 이러하다. 그들 모두는 물리학이 ‘사물의 숨겨진 본질’을 발견할 수 없기 때문에, 설명이 물리학의 목표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 주장은 그들이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이 내가 최종적 설명이라고 부른 것임을 보여준다.?? 그들 중 마흐(Mach)와 버클리(Berkeley)같은 사람들은 물리적인 것의 본질과 같은 것이 있다고 믿지 않기 때문에 이 견해를 유지한다: 마흐(Mach)는 본질을 조금도 신뢰하지 않기 때문에 이 견해를 유지한다; 버클리(Berkeley)는 자신이 영혼적 본질만을 신뢰하여, 세상에 대한 유일한 본질적 설명은 하느님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 견해를 유지한다. 뒤앙(Duhem)은 본질은 있지만 그 본질들이 (우리가, 어느 정도로든, 그 본질들을 향하여 움직일지라도) 인간의 과학에 의하여 발견될 수 없다고 (칸트를 기억나게 하는 개념들로??) 생각하는 듯하다; 버클리(Berkeley)처럼, 그는 본질들이 종교에 의하여 밝혀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모든 철학자들은 (최종적인) 과학적 설명은 불가능하다는 데에 동의한다. 그래서 과학적 이론들이 기술(記述)할 수 있었던 숨겨진 본질의 부재를 고찰하여 그들은 (우리들이 공동으로 경험하는 평범한 세상을 분명히 기술[記述]하지 않는) 이 이론들이 아무 것도 기술(記述)하지 않는다고 결론을 내린다. 그리하여 그 이론들은 단순히 도구이다.?? 그래서 이론적 지식의 성장으로서 나타날 것은 단순히 도구의 개선이다.
그러므로 도구주의 철학자들은 세 번째 원리, 다시 말해서 본질의 원리를 배척한다. (나 또한 그 원리를 배척하지만 다소 다른 이유들 때문이다.) 동시에 그들은 두 번째 원리를 거부하며, 그 원리를 거부하게 되어 있다; 그 까닭은 이론이 도구라면, 이론은 사실일 리가 없기 때문이다 (단지 편리하고, 간단하고, 경제적이고, 강력한, 기타 등등이다). 이론들은 심지어 ‘가설’이라고 자주 그들은 지칭한다; 그러나 그들은, 물론, 이것으로 내가 의미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론은 사실이라고 추측되는 것임을, 이론은 아마도
?? 이 문제는 (최종적) 설명에 대한 도구주의적 비판이 공식의 도움을 받아서 어떤 사람들에 의하여 표현되었다는 사실에 의하여 자주 혼동되었다: 과학의 목적이 설명이라기보다는 기술(記述)이다라는 공식. 그러나 여기에서 ‘기술(記述)’에 의하여 의미되는 것은 일상적인 경험의 세상에 대한 기술(記述)이며, 간접적으로 그 공식이 표현한 것은 이런 의미로 기술(記述)하지 않는 저 이론들은 설명 또한 하지 않지만, 평범한 현상들을 기술(記述)하는 데서 우리에게 도움을 주는 편리한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 사물의 (예를 들어 물질의) ‘진정한 본질’이나 ‘본성’이 인간의 지식에는 접근될 수 없다고 일컬어지는 라인홀트(Reinhold)에게 보낸 1789년 12. 5일자 칸트의 편지 참조.
?? 아래 6장 참조 (6장은 아직 번역되지 않음. - 역자 주).
거짓 서술이라 할지라도 기술적(記述的)이라는 것임을; 이론들은 불확실하다고 그들에게는 말할 의도가 있다 할지라도: 오지안더(Osiander)는 (자신의 서문 끝에) 이렇게 쓴다, ‘가설의 유용성에 대하여 아무도 천문학으로부터 출현하는 확실한 것을 기대해서는 안 되는데, 그 까닭은 그런 종류의 것은 천문학으로부터 나올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제 (항상 반박될지도 모르는) 이론들에 관하여 확실성이 없다는 데에 나는 완전히 동의한다; 그리고 이것이 이론들에 관하여 확실성이 있을 수 없는 이유라는 데에 내가 동의하지 않을지라도, 이론들이 도구라는 데에 나는 동의하기조차 한다. (올바른 이유는 우리들의 시험이 완벽할 수가 없다는 것일 따름이라고 나는 믿는다.) 그리하여 나의 도구주의자 적(敵)과 내 자신 사이에는 두 번째 및 세 번째 원리에 관하여 상당한 일치가 있다. 그러나 첫 번째 원리에 관해서는 완전히 일치하지 않는다.
이 불일치로 나는 나중에 돌아오겠다. 현재는 (3), 과학의 본질주의적 원리를 내가 수용할 수 없는 도구주의의 논증과 다소 다른 개요로써 나는 비판하려고 노력할 것이다. 그 까닭은 ‘숨겨진 본질들’이 있을 리가 없다는 도구주의의 논증은 숨겨진 어떤 것도 있을 리가 없다는 (혹은 숨겨진 것이 있다면 그것은 신적[神的] 계시에 의해서 알려질 수 있을 따름이라는) 신념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이다. 앞의 부에서 내가 말한 것을 고찰하면 지구의 회전이나 원자핵이나 우주 복사, ‘전파별(radio stars)’을 발견했다는 과학의 주장을 배척하는 논증을 내가 수용할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할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많은 것이 우리로부터 숨겨져 있다는 것과, 숨겨져 있는 것의 많은 것이 발견될 것임을 본질주의에 기꺼이 인정한다. (비트겐슈타인[Wittgenstein]의 말 ‘수수께끼는 존재하지 않는다’의 정신에 나는 크게 동의하지 않는다.) 그리고 나에게는 심지어 ‘세상의 본질’을 이해하려고 애쓰는 사람들을 비판하려는 의도도 없다. 내가 대항하여 싸우고 있는 본질주의적 원리는 오직 과학은 최종적 설명을 목표로 한다는 교설이다; 다시 말해서, (본질적으로, 혹은 자체의 바로 그 본성에 의하여) 더 이상 설명될 수 없고,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하지 않은 설명.
그리하여 본질주의에 대한 나의 비판은 본질의 부재(不在)를 확정하려는 목적이 아니다; 나의 비판은 과학에 대한 갈릴레오의 철학에서 (본질들을 믿는 경향을 지니고 있었지만 그의 업적이 이 믿음을 파괴했던 맥스웰[Maxwell]까지) 본질들에 대한 개념에 의해서 수행되는 역할의 몽매주의적(obscurantist) 특성을 폭로하는 것을 목표로 할 따름이다. 다시 말해서 나의 비판은 본질들이 존재하든 아니든 본질들에 대한 믿음은 어떤 정도로든 우리에게 도움을 주지 않아서 정말로 우리를 저애할 것임을 증명하려고 노력한다; 그래서 과학자들에게는 본질들의 존재를 가정해야 할 이유가 없다.??
?? 나의 이 비판은 그리하여 솔직히 공리주의적(utilitarian)이어서, 도구주의적으로 아마도 묘사될 것이다; 그러나 나는 여기서 항상 목적에 대한 수단의 적합성에 관한 문제인 방법의 문제에 관심을 갖는다.
본질주의에 대한 - 다시 말해서 최종적 설명이라는 교설에 대한 - 나의 공격은 내 자신이 (아마도 무의식적으로) 과학의 본질에 (혹은 인간 지식의 본질에) 대한 개념으로써 일을 하기 때문에 나의 논증은, 언명되면, 다음과 같이 되리라는 논평으로 때때로 반격을 받았다: ‘우리가 본질이나 본성과 같은 것들을 알 수도 없고 탐색할 수도 없다는 것은 인간의 과학의 (혹은 인간의 지식의) 본질이나 본성과 관련되어 있다.’ 그러나 나는 이 특정 반대 의견을 나의 저서 과학적 발견의 논리(L. Sc. D.)에서 어느 정도 상세하게 암시적으로 답변했고 (9부 및 10부, ‘방법에 관한 자연주의적 견해’) 그 반대 의견이 제기되기 전에도 - 사실상 내가 본질주의를 묘사하여 공격하게 되기 전 - 나는 그렇게 했다. 게다가, 사람들은 우리들 자신이 만든 것들이 - 시계 같은 것들 - ‘본질들’을, 다시 말해서 그것들의 ‘목적들’을 (그리고 그것을 이 ‘목적들’에 부합하도록 만드는 것) 지니고 있다고 언급될 것이라는 관점을 아마도 수용할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적이고 목적을 지닌 활동으로서의 (혹은 방법으로서의) 과학은, 그 사람들이 자연적인 대상물들에는 본질이 있다는 것을 거부할지라도, ‘본질’을 지니고 있다고 어떤 사람들에 의하여 아마도 주장될 것이다. (이 부정은, 그러나, 본질주의에 대한 나의 비판에는 함축되어 있지 않다.)
이것은, 내가 생각하기에, 단순한 보기의 - 뉴튼의 중력 이론 - 도움을 받아서 가장 잘 증명될 수 있다.
뉴튼의 이론에 대한 본질주의적 해석은 로저 코트(Roger Cotes)에 기인한다??. 그에 따르면 뉴튼은 물질의 모든 입자에는 중력이, 다시 말해서 다른 물질을 끌어들이는 내재적인 힘이 주어져 있다. 물질의 모든 입자에는 또한 관성이 - 자체의 운동 상태에서 변화를 거부하는 (혹은 자체의 움직임의 방향과 속도를 유지하려는) 내재적 힘 - 주어져 있다. 중력과 관성 모두가 물질의 각 입자 속에 내재하기 때문에 그 둘은 틀림없이 물체의 질량에 정확하게 비례하고 그러므로 서로에게도 정확하게 비례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그리하여 관성과 중력의 질량에 관한 정비례 법칙이 탄생한다. 중력은 각 입자로부터 방사되기 때문에 우리는 인력의 제곱 법칙을 얻는다. 다시 말해서, 뉴튼의 운동 법칙은 물질의 내재적 특성으로 인한 사건의 상태를 수학적 언어로 기술(記述)할 따름이다: 뉴튼의 법칙은 물질의 본질적 본성을 기술(記述)한다.
이런 방식으로 뉴튼의 이론이 물질의 본질적 본성을 기술(記述)했기 때문에 그는 그 이론의 도움을 받아서 수학적 연역으로써 물질의 행태를 설명할 수 있었다. 그러나 뉴튼의 이론은, 코트(Cotes)에 따르면 그 자체로 - 적어도 물리학 내부에서 - 더 이상의 설명을 할 수도 없고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하지도 않다. (아마도 유일하게 가능한 더 이상의 설명은 하느님이 물질에게 이 본질적 특성을 부여했다는 것이다.??)
뉴튼의 이론이 지닌 이 본질적 관점은 대체로 19세기의 마지막 수 십년까지 인정된 관점이었다. 그 이론은 몽매주의적(obscurantist)이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 이론으로 인하여 ‘중력의 원인은 무엇인가?’ 혹은 더 완전히, ‘뉴튼의 이론을 연역함으로써, 혹은 그 이론의 충분한 근사치를 연역함으로써, (독립적으로 시험될 수 있어야 하는) 보다 일반적인 이론으로부터 우리는 중력을 아마도 설명할 수 있을까?’와 같은 유효한 질문들이 제기될 수 없었다.
이제 뉴튼 자신이 (관성이 본질적이라고 생각했고 또한, 데카르트[Descartes]와 함께 외연[extension]을 생각했다 할지라도) 중력을 물질의 본질적 특성으로서 여기지 않았다는 것을 알면 이해에 도움이 된다. 그는 데카르트(Descartes)로부터 물체의 속성은 관계적 속성, 다시 말해서 중력처럼 한 물체와 다른 물체들 사이의 관계들을 (공간에서의 상호작용) 결정하는 속성이 아니라 외연(extension)이나 물체가 움직이는 상태에서 변화에 저항하는 힘과 같은, 물체의 진정한 혹은 절대적인 속성이 (다시 말해서 다른 물체들의 존재에 의존하지 않는 속성) 틀림없다는 견해를 계승했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그는 이 이론의 불완전성과, 중력을 설명할 필요를 강하게 느꼈다. ‘중력이 틀림없이 물질에 천부적이고 내재적이고 필수적이어서 한
?? 뉴튼의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Principia)의 두 번째 판에 대한 R. 코트(Cotes)의 서문.
?? 뉴튼 자신에 기인하는 (물질에 관한 이 이론과 유사한) 시공에 관한 본질주의적 이론이 있다.
물체가 다른 물체에 조금 떨어져서도 영향을 줄 것이라는 것은... 나에게는 매우 큰 어불성설이어서, 철학적 문제에서 사고에 관한 유능한 기능을 지닌 사람은 그 속에 빠질 리가 없다고 나는 믿는다.’라고 그는 썼다??.
여기서 뉴튼이 자신의 주요 추종자들을 미리 비난하는 것을 보면 흥미롭다. 비록 뉴튼에게는, 그의 데카르트적 배경과 함께, 동일한 속성들이 설명될 필요가 있게 (그리고 정말로 거의 역설적으로) 보였다 할지라도, 그 추종자들에게, 사람들은 그 추종자들이 학교에서 배웠던 속성들은 본질적으로 (심지어 자명하게) 보였다고 말하고 싶은 유혹을 느낀다.
그러나 뉴튼 자신은 본질주의자였다. 그는 기계적인 밀치기(mechanical push)를 - 밀치기만이 모든 물체의 본질적 속성인 외연(extension)에 의하여 설명될 수 있기 때문에 데카르트(Descartes)가 허용한 유일한 종류의 인과적 행동 - 가정함으로부터 인력의 법칙을 연역하려고 노력함으로써 수용될 수 있는 중력에 관한 최종적 설명을 발견하려고 열심히 노력했다.?? 그러나 그는 실패했다. 그가 성공했더라면 그가 지녔던 문제가 최종적으로 해결되었다고 - 그가 중력에 관한 최종적 설명을 발견했다고 - 그는 생각했었으리라고 우리는 확신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그는 틀렸던 것이리라. ‘왜 물체는 서로를 밀치는가?’라는 질문은 (라이프니츠[Leibniz]가 본 바와 같이) 가능하고, 그 질문은 심지어 매우 유용한 질문이다. (우리는 이제 어떤 반발성 전기력 때문에 물체들이 서로를 밀친다고 믿는다.) 그러나 데카르트(Descartes)와 뉴튼의 본질주의 때문에, 특히 뉴튼이 자신이 시도한 중력 설명에서 성공했더라면, 아마도 이 질문은 제기되지 않았을 것이다.
이 보기들은, 내가 생각하기에, 본질에 대한 믿음이 (사실이든 거짓이든) 사고에 대하여 - 새롭고 유용한 문제들을 제시하는 데에 대하여 - 장애물을 초래하기 쉽다는 것을 분명히 한다. 게다가, 그 믿음은 과학의 일부가 될 수 없다 (그 까닭은 우리가 행운에 의하여 우연히 본질을 기술[記述]하는 이론을 떠올린다 할지라도, 우리는 그것을 확신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몽매주의를 초래할 것 같은 신조는 확실히 과학자가 수용할 필요가 있는 저 과학 외적 믿음들 (비판적 토론의 힘에 대한 신념과 같은) 중의 하나는 아니다.
이것으로 본질주의에 대한 나의 비판을 마친다.
4. 두 번째 견해: 도구로서의 이론
도구주의적 견해는 커다란 매력을 지녔다. 그 견해는 겸손하고, 그 견해는, 특히 본질주의와 비교되면, 매우 간단하다.
?? 리차드 벤틀리(Richard Bentley)에게 보낸 편지, 1692-3년 (즉, 1693년) 2월 25일; 1월 17일자 편지 또한 참조.
?? 뉴튼은 (소멸 거리에서의 작용[an action at vanishing distances]의 선구자인) 데카르트식 접촉에 의한 행동(action by contact)으로써 중력을 설명하려고 노려하였다: 그의 저서광학(Opticks), 물음 31은 그가 ‘내가 인력이라고 부르는 것이 충격에 의하여 나타날 것인지’를 (쏟아지는 입자들 속에서 우산으로서 르사즈[Lesage]가 중력을 설명한 것에 앞서서) 정말로 고려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물음 21, 22, 그리고 28은 그가 뒤쪽 창문에 걸쳐진 바람막이에 가해지는 치명적인 과잉 충격을 의식하고 있었음을 암시한다.
?? 뉴튼은 자신에게 중력이 최종적 설명으로서 수용될 수 없는 본질주의자였다; 그러나 그는 너무 비판적이어서 중력을 설명하는 자신의 시도도 인정하지 않았다. 데카르트는, 이 상황에서, 자신이 ‘가설’이라고 불렀던 것을 제시하면서, 어떤 밀치기 추동력(push mechanism)의 실재를 가정하였으리라. 그러나 뉴튼은, 데카르트를 비판적으로 언급하면서, 그가 ‘[자의적이거나 특별한 목적을 위하여 만들어진] 가설들인 체하지 않고 현상들을 고찰하여 논증할’ 예정이었음을 강조했다 (질문 28). 물론, 그는 가설들을 항시 사용할 수밖에 없었고, 그의 저서 광학(Opticks)은 대담한 생각으로 넘친다. 그러나 그가 명시적이고도 반복적인 가설의 방법을 거부한 것은 지속적인 인상을 남겼다; 그리고 뒤앙(Duhem)은 그것을 도구주의를 지지하는 데에 사용했다.
본질주의에 따라서 우리는 (i) 본질적 실재의 우주, (ii) 관찰될 수 있는 현상의 우주, 그리고 (iii) 기술적(記述的) 언어나 상징적 재현(representation: 再現)의 우주를 구분해야 한다. 나는 이것들 각각이 정사각형에 의하여 대표되는 것으로 생각할 것이다.
E |
||||
a
b |
A
B |
ε
α ↘β | ||
(ii) (i) (iii)
이론의 기능은 여기서 다음과 같이 기술(記述)될 것이다.
a, b는 현상들(phenomena)이다; A, B는 이 현상들(appearances)의 뒤에 있는 상응하는 실재들이다; 그리고 α, β는 이 실재들을 기술(記述)한 것이거나 상징적 재현이다. E는 A, B의 본질적 속성들이고, ε는 E를 기술(記述)하는 이론이다. 이제 ε와 α로부터 우리는 β를 연역할 수 있다; 이것은, 우리가 지닌 이론의 도움을 받아서 왜 a가 b를 초래하거나 b의 원인인지를 우리가 설명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도구주의의 재현은 이 도식으로부터 단지 (i)를, 다시 말해서 다양한 현상들(appearances) 뒤에 있는 실재들의 우주를 생략함으로써 얻어질 수 있다. 그렇다면 α는 직접적으로 a를 기술(記述)하고, β는 b를 직접적으로 기술(記述)한다; 그리고 ε는 어떤 것도 기술(記述)하지 않는다 - ε는 우리가 α로부터 β를 연역하는 데에 도움을 주는 도구일 따름이다. (이것은 - 비트겐슈타인[Wittgenstein] 다음에 슐릭[Schlick]이 그랬던 바와 같이 - 보편적 법칙이나 이론은, 고유한 서술이 아니라 ‘다른 단칭 명제에서 단칭 명제를 도출하기 위한 규칙이나 한 벌의 지침들이라고 말함으로써 표현될 것이다.??)
이것이 도구주의적 견해이다. 그 견해를 더 잘 이해하기 위하여 우리는 다시 뉴튼의 역학을 보기로서 들 것이다. a와 b는 빛의 (혹은 화성의 두 지점) 두 지점으로 생각될 것이다; α와 β는 형식 체계의 상응하는 공식이다; 그리고 ε는 태양계에 대한 일반적인 기술(記述)로써 (혹은 태양계의 ‘모형’으로써) 강화된 이론이다. 세상에서 (우주 ii에서) ε와 일치하는 것은 없다: 예를 들어 인력과 같은 것은 없을 따름이다. 뉴튼이 말하는 힘은 물체의 가속을 결정하는 실체가 아니다: 그 힘은 그 기능으로 인하여 우리가 α로부터 β를 연역할 수 있는 수학적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의심할 바 없이 우리는 여기서 매력적인 단순화인 오캄의 면도칼(Ockham's razor: 역자 주 [네이버 지식에서 인용] - 오캄의 면도칼은, 절약의 원리[principle of parsimony]라고도 불려진다. 최근에는 '설명은 단순한 것일수록 뛰어나다', '불필요한 가정을 늘이지 마라' 등의 의미로 해석되고 있다. 어쨌든, 오캄의 면도칼은 존재론의 밖에서도 빈번하게 쓰이고 있다. 예를 들어, 과학철학자는 비슷한 정도로 정확해 보이는 가설이 여러 개 있을 경우, 가장 적합한 가설을 골라내는데 오캄의 면도날을 사용한다. 무언가를 설명하기 위해 가정을 할 경우, 불필요하게 복잡한 가정을 세워서는 안된다)의 철저한 적용을 경험한다. 그러나 이 단순화가 많은 사람들을
?? 이 견해의 분석과 비판에 대하여 나의 저서 과학적 발견의 논리(L. Sc. D.), 특히 4부의 주석 7과 열린사회와 그 적들 11장 주석 51을 참조. 보편적 서술은 이런 방식으로 작동할 것이라는 생각은 밀(Mill)의 논리학(Logic) 2권 3 장, 3에서 발견될 수 있다: ‘모든 추론은 특수 명제에서 특수 명제로 향한다.’ 동일한 견해에 대한 더 신중하고 비판적인 공식화에 관해서는 G. 라일(Ryle)의 생각의 개념(The Concept of Mind) (1949) 5장 121쪽 이하 참조.
도구주의자로 전향시켰다 할지라도 (예를 들어 마흐[Mach]), 결코 도구주의를 위하는 가장 강력한 논증은 아니다.
도구주의를 위한 버클리(Berkeley)의 가장 강력한 논증은 언어에 대한 그의 유명론적(唯名論的: nominalistic) 철학에 기초를 두었다. 이 철학에 따르면 ‘인력(force of attraction)’이라는 표현은, 관찰될 수 없기 때문에, 틀림없이 의미 없는 표현이다. 관찰될 수 있는 것은, 움직임들의 숨겨진 소위 ‘원인들’이 아니라, 움직임이다. 이것은, 언어에 대한 버클리(Berkeley)의 관점으로, 뉴튼의 이론이 정보성이나 기술적(記述的) 내용을 지니고 있을 리가 없다는 것을 증명하기에 충분하다.
이제 버클리(Berkeley)의 이 논증은 아마도, 그 논증이 암시하는 의미에 관한 너무나 협소한 이론 때문에, 비판을 받을 것이다. 그 까닭은 부단히 적용된다면 그 논증은 모든 의향적 말에는 의미가 없다는 주장과 같을 것이기 때문이다. 뉴튼의 ‘인력’에 의미가 없을 뿐만 아니라, 그런 평범한 의향적 말과 표현은 (‘파괴된[broken]’과 반대로) ‘파괴될 수 있[breakable]’거나 (‘전기를 유도하는[conducting electricity]’과 반대로) ‘전기를 유도할 수 있는[capable of conducting electricity]’이기도 하리라. 이것들은 관찰될 수 있는 것들의 이름이 아니다, 그래서 그것들은 뉴튼의 힘과 동일하게 취급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표현들은 의미 없는 것으로 분류하는 것은 어색할 것이고, 도구주의의 관점에서 고찰하여 그렇게 하는 것이 완전히 불필요하다: 오직 필요한 것은 의향적 용어와 의향적 서술의 의미를 분석하는 것이다. 이것은 그것들이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폭로할 것이다. 그러나 도구주의적 관점에서 보면 그것들은 (비[非]의향적 용어들과 서술들처럼) 기술적(記述的) 의미를 지니고 있지 않다. 그것들의 기능은 세상 속의 사건을 보고하거나, 사실들을 기술(記述)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들의 의미는 어떤 사실의 문제에서 다른 사실의 문제로 추론을 내리거나 논증하기 위하여 그것들이 우리에게 주는 허락이나 승낙 속에서 끝난다. 사실에 관하여 관찰될 수 있는 문제들을 기술(記述)하는 비(非)의향적 서술들은 (‘이 다리는 부러졌다[this leg is broken]’) 말하자면, 현금 가치를 지닌다; 의향적 서술들은, 그것들에게 과학의 법칙들이 속하는데, 현금과 같지 않고 오히려 현금화하는 권리를 창조하는 합법적 ‘도구들’과 같다.
비판하기가 불가능하지는 않을지라도 매우 어려운 도구주의적 논증에 도달하기 위하여, 사람들은 동일한 방향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갈 필요만 있는 듯이 보인다; 그 까닭은 우리가 지닌 전체 문제가 - 과학이 기술적(記述的)이든 도구적이든 간에 - 여기서 사이비-문제로 노출되기 때문이다.??
문제의 단계는, 의미를 - 도구적 의미 - 의향적 술어에 허용하는 데에 놓여 있을 뿐만 아니라, 일종의 기술적(記述的) 의미를 허용하는 데에도 놓여있다. ‘부서질 수 있는(breakable)’과 같은 의향적 단어는 분명히 어떤 것을 기술(記述)한다고 일컬어질 것이다; 그 까닭은 어떤 것에 대하여 그것이 부서질 수 있다나, 용해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그것이 부서졌다나
?? 나는 지금까지 글에서 도구주의적 논증의 이 특정 형태를 만나지 못했다; 그러나 우리가 표현의 의미와 관련된 문제들과 서술의 진실성에 관련된 문제들 사이의 유사성을 기억한다면 (보기로서 위 12부의 서론에 있는 표 참조), 우리는 이 논증이 윌리암 제임스(William James)가 ‘진실’을 ‘실용성’으로 정의한 것과 밀접하게 상응함을 알 수 있다.
그것을 다른 방식으로 용해되었다고 말하는 것과 다른 정도나 다른 방법으로, 그것을 기술(記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접미어 ‘able’을 써서는 안 된다. 차이점은 바로 이것이다 - 의향적 단어들을 사용함으로써, 우리는 사물에 (어떤 상황에서) 일어날 것을 기술(記述)하는 일. 따라서, 의향적 기술(記述)은 기술(記述)들이다, 그러나 그것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순전히 도구적 기능을 지니고 있다. 그들의 경우에, 지식은 힘이다 (예견하는 힘). 갈릴레오(Galileo)가 지구에 대하여 ‘그러나 지구는 움직인다’고 말했을 때, 그는 의심할 바 없이 기술적(記述的) 서술을 발언했다. 그러나 이 서술의 기능이나 의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순전히 도구적으로 판명된다: 그것은 특정한 비(非)의향적 서술들을 연역하는 데에 주는 도움 속에서 끝난다.
그리하여 이론들은 자체의 도구적 의미에 덧붙여 기술적(記述的) 의미를 지니고 있음을 증명하려는 시도는, 이 논증에 따라서, 잘못 생각된 것이다; 그래서 전체 문제는 - 갈릴레오(Galileo)와 가톨릭교회 사이의 문제 - 사이비-문제로 판명된다.
갈릴레오(Galileo)가 사이비-문제를 위하여 고통을 당했다는 견해를 지지하여, 논리적으로 더 진보된 물리학 체계에 비추어 갈릴레오(Galileo)의 문제는 실제로 용해되어 해체되었다고 주장되었다. 아인슈타인(Einstein)의 일반 상대성 이론은 심지어 자전의 경우에도 절대적 움직임에 관하여 말하는 것이 무의미함을 분명하게 한다고 사람들은 자주 듣는다; 그 까닭은 우리가 (상대적으로) 정지 상태에 놓이기를 원하는 어떤 체계도 우리는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갈릴레오(Galileo)가 지녔던 문제는 사라진다. 게다가, 그 문제는 정확하게 위에 주어진 이유들 때문에 사라진다. 천문학적 지식은 별들이 어떻게 행동하는 지에 대한 지식 외에 어떤 지식도 될 수 없다; 그리하여 그 지식은 우리들의 관찰을 기술(記述)하여 예언하는 힘 외에는 어떤 것도 될 수가 없다; 그리고 이것들은 틀림없이 우리가 좌표계를 자유롭게 선택하는 것과 독립되어 있기 때문에, 왜 갈릴레오(Galileo)의 문제가 도저히 실재적이 될 수 없었는지를 우리는 이제 더 명확하게 알 수 있다.
나는 이 부분에서 도구주의를 비판하지도 않을 것이고, 맨 마지막 논증을 제외하고 - 일반 상대성으로부터 나온 논증 - 도구주의의 논증에 답변도 하지 않겠다. 이 논증은 오류에 근거하고 있다. 일반 상대성의 관점에서 고찰되면, 지구가 회전한다고 말하는 것에는 매우 훌륭한 의미가 - 심지어 절대적 의미 - 있다: 지구는 정확하게 자전거 바퀴가 회전하는 그 의미로 회전한다. 지구는 회전한다, 다시 말해서, 여하한 선정된 관성적 체계와 관련하여. 정말로 상대성은 그런 방식으로 태양계를 묘사하기 때문에, 이 기술(記述)로부터 우리는 충분하게 멀리서 자유롭게 움직이는 물체에 (달이나, 혹은 또 다른 혹성이나, 태양계 밖의 별과 같은 것) 위치한 여하한 관찰자도 지구가 회전하는 것을 볼 수 있으리라고 연역할 수 있으며, 이 관찰로부터 그 주민에게는 태양의 외견상의 일주(日周) 운동이 있을 것이라고 연역할 수 있으리라. 그러나 이것이 정확하게 문제시되던 ‘지구가 돈다(it moves)’라는 말의 의미라는 것은 분명하다; 그 까닭은 문제의 한 부분이 태양계가 목성과 그 위성들의 체계와 같은 체계이고 단지 규모만 더 큰 지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태양계가, 외부에서 관찰되면, 이 체계와 같을 것인지. 이 모든 문제에 관하여 아이슈타인(Einstein)은 갈릴레오(Galileo)를 지지한다.
나의 논증은 전체 문제가 관찰의, 혹은 가능한 관찰의 문제로 환원될 수 있다는 인정으로서 해석되어서는 안 된다. 틀림없이 갈릴레오(Galileo)와 아인슈타인 두 사람 모두에게는, 다른 것들 중에서, 관찰자나 가능한 관찰자가 볼 것을 연역할 의도가 있다. 그러나 이것이 그들이 지녔던 주요 문제는 아니다. 두 사람은 물리적 체계와 그 체계의 움직임을 조사한다. 자신들이 토론했던 것이나, 토론하기를 ‘실제로 의도했던’ 것이 물리적 체계가 아니라 단지 가능한 관찰들의 결과들이었다고 강조하는 사람은 오직 도구주의적 철학자이다; 그리고 그들의 소위 ‘물리적 체계들’, 그것들은 그들의 연구 목표로 보였는데, 실제로 관찰을 예언하기 위한 도구일 뿐이라고 주장하는.
5. 도구주의적 견해에 대한 비판
버클리(Berkeley)의 논증은 처음에는 확신적이지만 반드시 사실은 아닌 특정 철학적 언어를 채택함에 달려있음을 우리는 보았다. 게다가, 그 논증은 자체의 모호함으로 악명이 높아 해결의 희망을 내놓지 못하는 의미의 문제??에 의거한다. 앞의 부(部)에서 개괄된 것처럼, 우리가 버클리(Berkeley)의 논증에 대한 더 최근의 전개상황을 고려한다면 그 위치는 훨씬 더 절망적이 된다. 그러므로 나는 다른 접근방식으로써 - 언어 분석이라기보다는 과학 분석을 통하여 - 우리의 문제에 관하여 명확한 결정을 내리려고 노력할 것이다.
과학적 이론들의 도구주의적 견해에 대한 나의 비판은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도구주의는 과학적 이론들은 - 소위 ‘순수한’ 과학들의 이론들 - 계산 규칙들 (혹은 추론 규칙들)에 지나지 않는다는 주장으로서 공식화될 수 있다; 기본적으로, 소위 ‘응용’ 과학의 계산 규칙들과 동일한 특징을 지닌. (사람들은 아마도 ‘순수’ 과학은 오칭[誤稱]이며, 모든 과학은 ‘응용’이라는 주장으로서 심지어 그것을 공식화할 것이다.)
이제 도구주의에 대한 나의 답변은 ‘순수’ 이론들과 기술적인 계산 규칙들 사이에 현격한 차이점들이 있다는 것과, 도구주의는 이 규칙들을 완벽하게 기술(記述)할 수 있지만 그것들과 이론들 사이의 차이점을 설명할 수는 전혀 없다는 것을 증명하는 데에 놓여있다. 그리하여 도구주의는 무너진다.
계산 규칙들과 (가령 항해를 위한) 과학적 이론들 (뉴튼의 것과 같은) 사이의 다수의 기능적 차이점을 분석하는 것인 도구주의는 매우 흥미로운 작업이지만, 결과에 대한 짧은 목록이 여기서는 틀림없이 충분하다. 이론들과 계산 규칙들 사이에서 유효할 논리적 관계들은 대칭적이 아니다; 그래서 그것들은 다양한 이론들 사이에서 유효할 관계들과, 그리고 또한 다양한 계산 규칙들 사이에서 유효할 관계들과 다르다. 계산 규칙들이 시험되는 방식은 이론들이 시험되는 방식과 다르다; 그래서 계산 규칙의 적용에서 요구되는 기술들은 그 규칙들의 (이론적) 토론에, 그 규칙들의 적용 한계에 관한 (이론적) 결정에, 필요한 기술과 완전히 다르다. 이것들은 극소수의 암시들이지만, 논증의 방향과 힘을 지시하는 데에 충분할 것이다.
나는 이제 이 요점들 중 하나를 다소 더 상세하게 설명하겠는데, 그
?? 이 문제에 관하여 여기 주석 23에 언급된 나의 저서 두 권과 본서의 1, 11, 13 및 14장을 참조.
이유는 그 요점이 내가 도구주의에 반대하여 사용했던 요점 하나와 다소 유사한 논증을 낳기 때문이다. 내가 토론하고 싶은 것은 이론들이란, 계산의 기술적인 규칙의 경우에는 다음 사실에 엄밀하게 상응하는 것이 없는 반면, 그 이론들을 반증하려는 시도들에 (우리가 많은 것을 배울 시도들) 의하여 시험된다는 사실이다.
이론은 그 이론을 적용함으로써나 그 이론을 시험함으로써만 시험되는 것이 아니라, 매우 특별한 경우들에 - 그 이론이 없었더라면, 혹은 다른 이론들에 비추어 우리가 기대했어야 하는 결과들과는 다른 결과들을 그 이론이 낳는 경우들 - 그 이론을 적용함으로써 시험된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우리의 시험을 위하여, 그 이론이 사실이 아니라면 그 이론이 실패하기를 우리가 기대해야 하는 저 결정적인 경우들을 선택하려고 노력한다. 그런 경우들은 베이컨(Bacon)의 의미에서 ‘결정적(crucial)'이다; 그 경우들은 두 가지 (혹은 그 이상의) 이론들 사이의 교차점들을 가리킨다. 그 까닭은 문제의 이론이 없었다면 우리가 다른 결과를 기대했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아무리 희미하게 우리가 이 사실을 인식하고 있었다 할지라도, 우리의 기대가 어떤 다른 (아마도 더 오래된) 이론의 결과였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베이컨(Bacon)은 결정적인 실험이 이론을 확증하거나 검증할 것이라고 믿었던 반면, 우리는 그 실험이 기껏해야 이론을 반박하거나 반증할 수 있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그 실험은 이론을 반박하려는 시도이다; 그래서 그 실험이 문제의 이론을 반박하는 데에 성공하지 못한다면 - 오히려 그 이론이 자체의 예기치 않은 예측에 대하여 성공적이라면 - 우리는 그 이론이 실험에 의하여 입증된다고(corroborated) 말한다. (실험의 결과가 덜 기대되었거나 확률이 적었을수록, 그 이론은 더 잘 입증된다[corroborated]??.)
이곳에서 전개된 견해에 반대하여 사람들은 아마도 모든 시험에서 포함되는 것은 검토를 받고 있는 이론뿐만 아니라, 우리가 지닌 이론과 가정(假定)의 전체 체계이기도 해서 - 사실상, 다소 우리가 지닌 지식의 전체 - 우리는 이 모든 가정(假定) 중 어느 것이 반박되는지를 확신할 수 없다고 반대하려는 (뒤앙[Duhem]을 따라서??) 유혹을 받는다. 그러나 이 비판은, 정말로 우리가 그렇게 해야 하는 것처럼 우리가 이 배경 지식 모두와 함께 두 가지 이론 각각을 수용한다면 (그 두 가지 이론들 사이에서 결정적 실험이 결정해야 한다), 우리는 문제되어 있는 두 가지 이론들에 관해서만 달라지는 두 가지 체계 사이에서 결정을 한다는 사실을, 간과한다. 그러나 그 이론은 더 나아가서, 우리는 그런 상태로서의 이론에 대한 반박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그 배경 지식과 함께 이론에 대한 반박을 주장한다는 사실을, 간과한다; 그 배경 지식의 부분들은, 다른 결정적인 실험들이 고안될 수 있다면, 정말로 어느 날 실패에 대한 책임을 짐으로서 거부될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검토되고 있는 이론을, 아무리 모호하게라 할지라도, 우리가 그 체계에 대하여 대안을 염두에 두고 있으며, 우리가 결정적인 시험을 고안하려고 노력하는 거대한 체계의 그 부분으로서 심지어 특징지을 것이다.)
이제 도구들이나 계산 규칙들의 경우에 그런 시험과 충분히 유사한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도구는, 확실히, 부서지거나 낡은 것이 될지도 모른다.
?? 뒤앙(Duhem)은, 결정적인 실험들에 대한 자신의 유명한 비판에서 (그의 저서 물리 이론의 목표와 구조[Aim and Structure of Physical Theory]에서), 결정적 실험들이 이론을 확립할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하는 데에 성공한다. 그는 결정적인 실험들이 이론을 반박할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하는 데에는 실패한다.
?? 그러므로 입증의 정도는 입증하는 경우들의 비개연성 (혹은 내용)과 함께 증가할 것이다. 지금은 나의 저서 과학적 발견의 논리의 새 부록 가운데 있으며 본서의 10장 (부록 포함)에 있는 나의 글 ‘확증도(Degree of Confirmation)’, 영국 과학 철학(Brit. Jour. Phil. Sci.), 5, 143쪽 이하 참조.
?? 주 26 참조.
그러나 우리가 고안할 수 있는 가장 엄격한 시험을 도구가 견디지 못한다면 그 도구를 배격하기 위하여 우리는 그 엄격한 시험에 도구를 부친다고 말하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예를 들어 모든 기체(機體: air frame)는 ‘파괴될 때까지 시험’될 수 있지만, 이 엄격한 시험은 파괴될 때 모든 기체(機體: air frame)를 배격하기 위하여 수행되는 것이 아니라 그 기체(機體: air frame)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하여 (다시 말해서 그 기체[機體: air frame]에 대한 이론을 시험하기 위하여) 수행되어, 그 기체(機體: air frame)의 적용가능성 (혹은 안전) 내무에서 사용되도록 하는 것이다.
실용적 적용이라는 도구적 목적을 위하여 이론은, 그 적용가능성의 한계 내부에서, 심지어 이론이 반박된 후에도 지속적으로 사용될지도 모른다: 뉴튼의 이론이 거짓으로 판명되었다고 믿는 천문학자는 그 이론의 형식 체계를 그 이론의 적용가능성의 한계 안에서 주저하지 않고 적용할 것이다.
우리는 때때로 도구가 지닌 적용가능성의 범위가 처음에 우리가 기대했던 것보다 더 작은 것을 발견한고 실망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것으로 인하여 우리는 도구로서의 도구를 배격하지는 않는다 - 그것이 이론이든 다른 것이든 간에. 다른 한 편으로 이런 종류의 실망은 이론에 대한 반박을 통하여 우리가 새로운 정보를 획득했음을 의미한다 - 도구를 의미했던 이론이 더 넓은 범위에 걸쳐서 적용 가능했다는 것을.
도구들은, 심지어 이론들이 도구인 한에서 이론들은, 우리가 본 바와 같이 반박될 수 없다. 도구주의적 해석은 그러므로 실제적 시험을 설명할 수 없을 것인데, 실제적 시험은 시도된 반박이어서 다양한 이론들에는 다양한 범위의 적용이 있다는 주장을 넘어서지는 못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그렇다면 도구주의적 해석은 도저히 과학적 진보를 설명할 수 없다. 아인슈타인의 이론을 반증하는 데에 실패한 결정적인 실험에 의하여 뉴튼의 이론이 반증되었다고, 그래서 아인슈타인의 이론이 뉴튼의 이론보다 더 낫다고 말하는 대신에 (내가 그렇게 말해야 하는 바와 같이), 일관된 도구주의자는 자신의 ‘새로운’ 관점을 참고하여 하이젠버그(Heisenberg)처럼 말해야 할 것이다: ‘우리가 더 이상 다음과 같이 말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이 합당하다: 뉴튼의 역학은 거짓이다.... 오히려 우리는 지금 다음 공식을 사용한다: 고전적인 역학은.... 그 개념이 적용될 수 있는 곳 도처에서 정확하게 “옳다(right)”.’??
‘옳다(right)’가 여기서는 ‘적용 가능한(applicable)’을 의미하기 때문에, 이 주장은 ‘고전적인 역학은 그 개념이 적용될 수 있는 곳에서 적용 가능하다’라는 말에 해당된다 - 그 말은 말하는 것이 별로 없다. 그러나 이 주장이 그렇다 할지라도, 요점은 반증을 무시하고, 적용을 강조함으로써, 도구주의는 본질주의만큼 몽매주의적 철학으로 증명된다는 것이다. 그 까닭은 과학이 배워서 전진하기를 희망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반박을 탐색하는 데에서이기 때문이다. 과학이 더 나은 이론과 더 나쁜 이론을 구분할 수 있어서 진보에 관한 기준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은 과학의 다양한 이론들이 어떻게 시험들을 견디어내는지를 고려하는 데에만 있다. (아래 10장 참조.)
그리하여 예측을 위한 도구에 지나지 않으면 반증될 수 없다. 우리에게 처음에 그 도구의 반증으로 보일 것은 그 도구의 제한된 적용가능성에 대하여 우리에게 주의를 주는 추가 조항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밝혀진다. 이것이 도구주의적 관점이, 보어(Bohr)에 의하여 그렇게 되었던 것처럼 (ii부에
?? 변증법(Dialectica), 2, 1948, 333쪽 이하에서의 W. 하이젠버그(Heisenberg) 참조. 하이젠버그(Heisenberg) 자신의 도구주의는 결코 일관적이 아니고, 그는 명예롭게도 많은 반(反)도구주의적 말을 한다. 그러나 여기에 인용된 이 논문은 그의 양자론이 반드시 도구주의적 철학을 초래하여, 물리적 이론은 통합될 수도 없고 심지어 일관적으로 만들어질 수도 없다는 결과를 초래함을 증명하는 철저한 노력으로서 기술(記述)될 것이다.
주어진 그의 상보성[相補性: complementarity]에 관한 나의 해석에서 내가 옳다면), 모순에 의하여 위협을 받는 물리 이론을 구원하는 특별한 목적을 위하여 만들어져 사용될 이유이다. 이론들이 예측에 관한 도구들에 지나지 않는다면 특정 이론의 형식 체계에 대한 일관된 물리적 해석이 존재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그 특정 이론을 배격할 필요가 우리에게는 없다.
요컨대 도구주의는 진실과 거짓에 대하여 순수 과학자가 갖는 흥미를 설명할 수 없기 때문에, 순수 과학의 이론들이 심지어 가장 멀리 떨어진 암시들을 엄격하게 시험하는 순수 과학에 대한 중요성을 설명할 수 없다고 우리는 말할 것이다. 순수 과학에서 필수적인 고도로 비판적인 자세와 대조적으로, 도구주의의 자세는 (응용과학의 자세처럼) 응용을 성공시킨 데에서 자만하는 자세이다. 그리하여 도구주의의 자세는 양자론에서의 최근 침체에 책임이 있을 것이다. (이것은 반전성[反轉性: parity]이 반박되기 전에 기술되었다.) (역자 주 [네이버 백과사전에서 인용] - 반전성[反轉性]은 우기성[偶奇性]이라고도 한다. 자연현상이 일어나는 방식이 공간의 구별 없이 동등성을 가지는 것을 보증하는 양이다. 예를 들면 오른나사와 왼나사에 물리적 우열을 찾아볼 수 없는 것처럼 현상은 공간의 좌우에 관계없이 동등하게 일어날 수 있는 경우에 패리티가 보존된다고 한다. 그 전까지는 소립자반응에 대해서도 패리티는 어떤 경우이든 보존된다는 것이 암암리에 인정되어 왔으나 중국 출신의 미국 과학자 리정다오[李政道]와 양전닝[楊振寧]이 소립자가 붕괴될 때는 패리티가 보존되지 않는다는 이론을 K중간자[中間子]의 붕괴와 관련시켜 1956년 발표하였다.
그 후 이 제안은 원자핵의 β붕괴에 대하여 검증되고 나서 종전의 자연관[自然觀]을 변경시키는 것이라고 하여 주목을 받았다. 오늘날 많은 소립자반응이 패리티를 보존하지만 마지막에 붕괴하는 경우에 한하여 한번 그 바탕이 되는 약한 상호작용만으로는 패리티가 보존되지 않는다는 점이 알려져 있다.)
6. 세 번째 견해: 추측, 사실, 그리고 실재
베이컨(Bacon)도 버클리(Berkeley)도 지구가 자전한다고 믿지 않았지만, 오늘날 모든 사람이, 물리학자들을 포함하여, 그것을 믿는다. 도구주의는 보어(Bohr)와 하이젠버그(Heisenberg)에 의하여 양자론에서 발생한 특별한 난제들로부터 빠져나가기 위한 방식으로서만 포용되었다.
그 동기는 충분하지 않다. 최신 이론들을 해석하는 일은 항상 어렵고, 그 이론들은 때때로, 뉴튼에게 발생한 바와 같이, 그 이론을 만들어 낸 사람들조차 당황하게 만든다. 맥스웰(Maxwell)은 처음에 자신의 이론을 도구주의적으로 해석하는 데로 기울었다: 궁극적으로 본질주의의 쇠퇴에 다른 이론보다도 더 많이 기여했던 이론. 그리고 아인슈타인은 처음에, 다른 어떤 것보다도 도구주의에 대한 현재의 유행에 많이 기여했던 동시성의 개념에 대하여 일종의 조작적 분석을 내놓으면서, 상대성을 도구주의적으로 해석하는 데로 기울었다; 그러나 그는 나중에 뉘우쳤다.??
나는 물리학자들이 상보성(相補性: complementarity) 원리가 특별한 목적을 위하여 만들어졌다는 것과, (더 중요한 것은) 그 원리가 지닌 유일한 기능은 비판을 피하고, 물리적 해석에 대한 토론을 막는 것임을 곧 깨닫게 되리라고 믿는다; 어떤 이론을 재구성하는 데에 비판과 토론이 시급하게 필요하다 할지라도. 그 경우에 물리학자들은 도구주의가 현대적 물리이론의 구조에 의하여 자신들에게 강요된다고 더 이상 믿지 않을 것이다.
아무튼, 도구주의는, 내가 밝히려고 노력한 바와 같이, 본질주의가 그러한 것처럼 수용될 수 없다. 도구주의나 본질주의를 수용할 필요도 없는데, 그 까닭은 세 번째 견해가 있기 때문이다.??
이 ‘세 번째 견해’는 그다지 놀랍거나 심지어 경악할만한 것도 아니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 견해는 과학자는 세상에 대한, 혹은 세상의 모습 몇 가지에 대한 기술(記述)을 목표로 하여, 관찰될 수 있는 사실들을 진실로 설명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는 갈릴레오식(Galilean) 원칙을 유지한다; 그리고 그 견해는 이 원칙을, 이것이 과학자의 목표로 남지만, 그가 때때로 이론이 틀렸다는 것을 상당히 확실하게 입증한다고 할지라도, 과학자는 자신이 발견한
?? 교정시에 첨부된 주석. 이 논문이 인쇄되었을 때 앨버트 아인슈타인은 아직 살아있어서, 나는 그에게 논문이 인쇄되자마자 한 부를 보내려고 마음을 먹었다. 나의 말은 우리가 그 주제에 관하여 1950년에 가졌던 대화에 대한 것이다.
?? 아래 6장의 5부 참조 (6장은 아직 번역되지 않음. - 역자 주).
것이 확실히 사실인지를 알 수가 없다는 비(非)갈릴레오식 원칙과 결합한다.??
사람들은 과학적 이론들이 진짜 추측들이라고 - 검증될 수는 (다시 말해서 사실로 증명될 수는) 없을지라도 엄격한 비판적 시험에 부쳐질 수 있는 세상에 대하여 고도로 많은 정보를 제공하는 추측들 - 말을 함으로써 과학적 이론에 대한 이 ‘세 번째 견해’를 간단하게 공식화할 것이다. 과학적 이론들은 진실을 발견하는 진지한 노력이다. 이런 면에서 과학적 가설들은 숫자 이론에서의 골드바흐(Goldbach)의 유명한 추측과 정확하게 닮았다. 골드바흐(Goldbach)는 그 이론이 아마도 사실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이론은, 그 이론이 사실인지 아닌지를 우리가 알지 못하고, 아마도 영원히 알지 못할 것이라 할지라도, 실제로 사실일 것이다.
나는 내가 말하는 ‘세 번째 견해’의 몇 가지 모습과, 그 견해를 본질주의 및 도구주의로부터 구분하는 그런 모습만을 언급하는 데에 내 자신을 국한시킬 것이다; 그래서 나는 먼저 본질주의를 들겠다.
본질주의는 우리들의 평범한 세상을, 표면의 뒤에서 본질주의가 실재 세상을 발견하는 표면만으로서 간주한다. 우리의 이론 각각이 말하는 세상이, 나중에, 심층적 이론에 - 추상에 관하여, 보편성에 관하여, 그리고 시험 가능성에 관하여 더 높은 수준을 지닌 이론들 - 의하여 기술(記述)되는 심층적 세상들에 의하여 설명될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가 깨닫게 되자마자 이 견해는 배척되어야 한다. 본질적이거나 궁극적 실재에 관한 교설은 궁극적 설명에 관한 교설과 함께 붕괴한다.
우리의 세 번째 견해에 따라서 새로운 과학적 이론들은, 옛 과학적 이론들처럼, 진짜 추측이기 때문에, 이 이론들은 이 심층적 세상들을 묘사하는 진짜 시도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우리들의 평범한 세상을 포함하여, 이 모든 세상들을 동등하게 사실적으로서 생각하도록 영향을 받는다; 혹은 더 낫게, 아마도, 실재 세상의 동등하게 실재적인 모습들이나 층(層)들로서. (현미경을 들여다보면서 우리가 현미경의 배율을 바꾼다면, 우리는, 모두 동등하게 실재적인, 동일한 물체의 완전히 다른 다양한 모습들이나 층(層)들을 볼 것이다.) 그리하여 피아노의 소위 분자들과 원자들이 ‘논리적 구성물’에 (혹은 그것들의 비실재를 가리킬 다른 어떤 것) 지나지 않는 반면, 나의 피아노가, 내가 그 피아노를 알고 있는 바와 같이, 사실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나의 일상적인 세상의 피아노가 표면뿐임을 원자론이 증명한다고 말하는 것이 - 우리가 원자들이, 수량화된 힘의 (혹은 확률의) 장(場)에서 아마도 교란이나 교란의 구조들로서 설명될 것임을 우리가 알자마자 분명히 만족스럽지 못한 교설 - 틀린 것과 꼭 마찬가지로. 이 모든 추측들은, 그들 중 몇 가지는 다른 추측들보다 더 추측성이라 할지라도, 실재를 기술(記述)한다는 자체의 주장에서 동등하다.
그리하여 우리는, 예를 들어, 소위 물체의 ‘제 1성질(primary quality)’을 (물체의 기하학적 형태와 같은 것) 실재적으로 기술(記述)하여, 본질주의자들이 옛날에 그랬던 것과 같이, 그 물체의 비실재적이어서 단지 표면적인 ‘제 2성질(secondary quality)’과 (색깔들과 같은 것) 대조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 까닭은 물체의 외연(extension)과 심지어 형태도 그 이후 더 높은 수준의 이론들을 통한 설명의 목표물이 되었기 때문이다; 본질주의자들에 의하여
?? 위 5부와 과학적 발견의 논리(L. Sc. D.) (여러 곳)에서 이 요점에 대한 토론 참조; 또한 위 1 장과, 아래 5 장의 끝 부분에 인용된 제노파네스의 단편들 (5장은 아직 번역되지 않음. - 역자 주).
이것들이 제 2성질과 연관되어 있다고 믿어졌던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제 1성질들에 연관되어 있는 더 나아가고 더 깊은 실재의 층(層)을 - 힘과 힘의 장(場) - 기술(記述)하는 이론들을 통한; 그리고 색깔들과 같은 제 2성질들은 제 1성질들과 꼭 마찬가지로 실재적이다 - 우리가 지닌 색깔 경험들은, 우리가 지닌 기하학적-형태-경험들이 물리적 물체들의 기하학적-형태-속성들로부터 구분되어야 하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물리적 물체들의 색깔-속성들로부터 구분되어야 할지라도. 우리의 관점으로 보면 두 가지 종류의 성질 모두는 동등하게 실재적이다 - 다시 말해서, 실재적으로 추측된다; 그리고 의심받지 않는 가설적이거나 추측적인 특징에도 불구하고, 힘이나 힘의 장(場)도 그러하다.
‘실재적(real)’이라는 단어의 한 의미에서 이 모든 다양한 수준들이 동등하게 실재적이라 할지라도, 그러나 우리가 그 의미로 더 높고 더 추측적인 수준들이 더 실재적 수준들이라고 아마도 말할 밀접하게 관련된 또 다른 의미가 있다 - 그것들이 더 추측적이라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은, 우리들의 이론들에 따라서, 탁자나 나무 혹은 별이 그것의 모습 어떤 것보다도 더 실재적이라는 의미에서 더 실재적이다 (의도에서 더 안정되고, 더 영구적).
그러나 우리들이 지닌 이론들이 지닌 이 추측적이거나 가설적인 특징이, 그 이론들에 의하여 기술(記述)되는 세상들에서 실재성이 기인한다고 우리가 생각해서는 안 되는 이유가 아닐까? (버클리[Berkeley]의 명제 ‘존재하는 것은 지각되는 것이다[to be is to be perceived]’는 너무 편협하다고 우리가 안다고 할지라도) 거짓으로 밝혀질 추측에 의해서라기보다는 오히려, 우리는 진실한 서술들에 의하여 기술(記述)되는 사건들의 저 상태들만을 ‘실재적’이라고 불러야 하는 것이 아닐까? 이 문제들로써 우리는 도구주의적 교설을 토론하는 데로 선회하는데, 그 교설에는 이론들은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는 주장으로써, 실재 세상과 같은 것이 이론들에 의하여 기술(記述)된다는 주장을 부인하는 의도가 있다.
나는, 사태를 기술(記述)하는 서술이 사실이라면, 사실이기만 하다면, 사태를 ‘실재적’이라고 불러야 한다는 (진실의 고전적인 진리 이론 또는 진리 대응설??에 함축된) 견해를 수용한다. 그러나 이것으로부터 이론의 불확실성, 다시 말해서 이론이 지닌 가설적이거나 추측적 특징이 실재적인 것을 묘사한다는 이론의 함축적인 주장을 어떤 정도로든 위축시킨다고 결론을 내린다는 것은 중대한 실수이리라. 그 까닭은 s라는 모든 서술은 s가 사실이라고 주장하는 서술과 대등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추측인 s에 대하여, 우리는 무엇보다도 추측이 사실이어서 사건의 실재적 상태를 묘사할지도 모른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두 번째로, 추측이 거짓이라면, 추측은 (그 사실적 부정[否定]에 의하여 기술[記述]된) 사건의 실재적 상태를 부인한다. 게다가, 우리가 우리의 추측을 시험하여 그 추측을 반증하는 데에 성공한다면, 실재가 - 추측이 충돌할 수 있던 것 - 있었음을 우리는 매우 분명하게 안다.
그리하여 우리의 반증은, 말하자면, 우리가 실재를 접촉했던 지점들을 가리킨다. 그래서 우리들이 지닌 최신이며 최선의 이론은, 반증을 가장
?? 진실에 대한 개념에 (Der Wahrheitsbegriff, etc., Studia Philosophica, 1935, 주석 1의 본문: ‘참 = 실재와 일치’) 관한 A. 타스키(Tarski)의 업적 참조. (A. 타스키[Tarski]의 영어 번역본 논리, 의미론, 수학[Logic, Semantics, Metamathematics], 1956, 153쪽 참조; 그 번역본에는 내가 ‘일치한다[in agreement]’로 번역한 것을 ‘대응한다[corresponding]’로 말한다. 아래 말은 (그리고 이 주석이 부록으로 붙은 문단 앞에서 끝에서 두 번째 문단 또한) 알렉상드르 코이레(Alexander Koyré) 교수에 의하여 나에 개인적으로 전달된 우정 어린 비판에 답변하려는 시도로 추가되었는데, 나는 그에게 큰 빚을 지고 있음을 느낀다.
나는, ‘실재와의 일치(in agreement with reality)’와 ‘참(true)’이 동일하다는 제안을 수용한다면, 우리가 관념론으로 가는 길로 인도되는 위험에 심각하게 노출되어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나는 이 동일성의 도움을 받아서 ‘실재적’을 정의(定義)하자고 제안하지 않는다. (그리고 내가 그렇게 제안했다고 할지라도, 정의(定義)되는 술어의 존재론적 지위를 정의(定義)가 반드시 결정한다고 믿을 이유는 없다.) 이 동일성이 우리가 보는 것을 틀림없이 돕는 것은, 서술이 지닌 가설적 특징이 - 다시 말해서 서술의 진실성에 대하여 우리가 지닌 불확실성 - 우리가 실재에 관하여 추측을 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간단한 방법으로 설명함으로써, 항상 이 분야에서 발견되는 모든 반증을 통합하는 시도이다; 그리고 이것은 (내가 과학적 발견의 논리[The Logic of Scientific Discovery], 31 -46부에서 밝히려고 노력했던 바와 같이) 가장 시험 가능한 방식을 통함을 의미한다.
틀림없이, 우리가 어떻게 이론을 시험하는지를 모른다면, 그 이론에 의하여 기술(記述)되는 어떤 종류의 (또는 수준) 어떤 것이 있는지를 우리는 의심할 것이다; 그래서 그 이론이 시험될 수 없음을 우리가 확신적으로 안다면, 우리의 의심은 커질 것이다; 우리는 그 이론이 신화(神話)나 동화에 지나지 않는다고 믿을 것이다. 그러나 이론이 시험될 수 있다면, 그 이론은 어떤 종류의 사건들이 일어날 수 없음을 의미한다; 그래서 그 이론은 실재에 관하여 중요한 것을 주장한다. (이 점이 이론이 많이 추측될수록 그 이론이 지닌 시험 가능성의 정도가 더 높아야 한다고 우리가 요구하는 이유이다.) 시험될 수 있는 추측이나 상상은, 어쨌든, 그리하여 실재에 관한 추측이나 상상이다; 그것들의 불확실하거나 추측성 특징을 고찰하여, 그것들이 기술(記述)하는 실재에 관한 우리의 지식은 불확실하거나 추측성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합당할 따름이다. 그래서 확실하게 알려질 수 있는 것만이 확실하게 실재적이라 할지라도, 확실하게 실재적으로 알려진 것만이 실재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우리는 전지(全知)하지 않아서, 의심할 바 없이, 우리 모두에게 알려지지 않은 많은 것이 실재적이다. 그러므로 여전히 도구주의의 기초를 이루는 것은 정말로 오래된 버클리적인(Berkeleian) 오류이다 (‘존재하는 것은 알려지는 것[to be is to be known]’이라는 형태로).
이론들은 우리들이 만든 것이자 우리 자신의 아이디어이다; 이론들은 우리들에게 강요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스스로 만든 사고(思考)의 도구이다: 이것은 관념론자들에게 의하여 명백하게 목격되었다. 그러나 우리들이 지닌 이 이론들 중 몇 가지는 실재와 충돌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들의 아이디어가 잘못되었으리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상기시킨다. 그래서 이 점이 실재론자들이 옳은 이유이다.
그래서 나는 과학은 실재적 발견을 할 수 있다는 본질주의의 관점에서, 그리고 심지어 새로운 세상들을 발견하면서 우리의 지성이 우리의 감각 경험을 이긴다는 관점에서, 본질주의와 의견을 같이한다. 그러나 나는 파메니데스(Parmenides)의 오류에 빠지지 않는다 - 우리들의 세계에서 색깔이 있고, 다양하고, 개별적이고, 비결정적이면서 기술(記述)될 수 없는 모든 것에게 실재성을 부인하는 오류.
과학은 실재적 발견을 할 수 있다고 내가 믿기 때문에 나는 갈릴레오(Galileo)와 함께 도구주의에 반대하는 자세를 취한다. 나는 우리들의 발견이 추측성이라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이 점은 심지어 지리적 탐사에 관해서도 사실이다. 자신이 발견했던 것에 대한 콜럼버스(Columbus)의 추측은 사실상 잘못된 것이었다; 그리고 피어리(Peary)는 자신이 북극점에 도달했다는 것을 추측할 수만 있었다 - 이론들에 근거하여. 그러나 이 추측의 요소들은 그들의 발견을 덜 실재적으로도, 덜 중요하게도 만들지 않는다.
두 종류의 과학적 예언 사이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그리고 도구주의가 할 수 없는 중요한 구분인 과학적 발견의 문제와 연관된 구분이 있다. 한편으로 월식이나 일식 혹은 폭풍우와 같은, 알려진 종류의 사건들에 대한 예언과, 다른 한편으로 무선 전파나 0점 에너지, 혹은 이전에는 자연에서 발견되지 않은 새로운 원소의 인공적 축적을 야기했던 예측과 같은 (물리학자들이 ‘새로운 효과들’이라고 부르는) 새로운 종류의 사건들에 대한 예언 사이의 구분을 나는 염두에 두고 있다.
도구주의가 첫 번째 종류의 예언을 설명할 수 있을 따름임은 나에게 분명해 보인다: 이론들이 예언을 위한 도구라면, 다른 도구들에 관해서와 같이, 우리는 이론들의 목적이 미리 결정되어야 한다고 가정해야 한다. 두 번째 종류의 예언은 발견으로서만 완전히 이해될 수 있다.
이론들이 ‘관찰로 인한’ 발견의 결과라기보다는, 대부분의 다른 경우들에서처럼 이 경우들에서 우리들의 발견들이 이론에 의하여 안내를 받는다는 것이 나의 믿음이다; 그 까닭은 관찰 자체가 이론에 의하여 안내를 받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지리적 발견조차도 (콜럼버스[Columbus], 프랭클린[Frankin], 노르덴시욀드(Nordenskjöld) 부자, 난센(Nansen), 베게너[Wegener], 그리고 헤이에르달(Heyerdahl)의 콘티키(Kon-Tiki] 탐험) 흔히 이론을 시험할 목적으로 수행된다. 예언을 제시하는데 만족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새로운 종류의 시험을 위한 새로운 상황을 만들어내기 위해서: 이것이 도구주의의 주요 원리를 포기하지 않고는 도구주의가 설명할 수 없는 이론들이 지닌 한 가지 기능이다.
그러나 아마도 ‘세 번째 견해’와 도구주의 사이의 가장 흥미로운 대조는 추상적인 단어들과, 의향-단어들의 기술적(記述的) 기능을 후자(後者)가 부인하는 것과 연관되어 발생한다. 이 원리는, 그런데, 도구주의 내부에서의 본질주의적 경향을 드러낸다 - (직접적으로 관찰 가능한) 사건들이 틀림없이, 어떤 의미에서, (직접적으로 관찰이 가능하지 않은) 의향들보다 더 실재적이라는 믿음.
이 문제에 관한 ‘세 번째 견해’는 다르다. 대부분의 관찰들이 다소 간접적이고, 직접적으로 관찰 가능한 사건들과 간접적으로만 관찰 가능한 모든 것들 사이의 구분이 우리에게 어떤 소득을 가져다주는지는 의심스럽다고, 나는 생각한다. 나는 뉴튼의 힘을 (‘가속의 원인들’) 신비스러운 것으로 비난하여 가속을 위하여 그 힘을 배척하려고 (제안된 바와 같이) 노력하는 것은 오류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 까닭은 가속이 힘처럼 직접적으로 관찰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가속은 그 만큼 의향적일 뿐이다: 물체의 속도가 가속된다는 서술은 물체의 속도가 지금부터 다음 순간에 그 물체의 현재 속도를 능가할 것이라고 우리에게 말한다.
내 생각에 모든 일반 개념들(all universals)은 의향적이다. 예를 들어 뼈가 부러졌는지 아닌지를 의사가 어떻게 결정하는지를 고려하여, ‘부서질 수 있는(breakable)’이 의향적이면, ‘부서진(broken)’도 그러하다. 유리잔의 조각들이 붙여지는 순간 그 조각들이 용해된다면 우리는 그 유리잔을 ‘부서진(broken)’으로 불러서는 안 된다: 부서진 상태에 대한 기준은 특정 상태 하에서의 행태이다. 유사하게, ‘붉은(red)’는 의향적이다: 어떤 물체가 특정한 종류의 빛을 반사할 수 있다면 그 물체는 붉다 - 그 물체가 특정 상황에서 ‘붉게 보인다’면. 그러나 심지어 ‘붉게 보이는(looking red)’도 의향적이다. 그 말은 그 물체가 붉게 보인다고 구경꾼들로 하여금 동의하도록 만드는 사물의 의향을 기술(記述)한다.
의심할 바 없이 의향적 특징에 관한 정도(程度: degrees)가 있다: ‘전기를 유도할 수 있는(able to conduct electricity)’은 여전히 고도로 의향적인 ‘지금 전기를 유도하는(conducting electricity now)’보다 더 높은 정도로 의향적이다. 이 정도들(程度: degrees)은 이론들이 지닌 추측성 즉, 가설적 특징의 정도들(程度: degrees)과 상당히 밀접하게 상응한다. 그러나 의향들에게 실재성을 거부하는 것은 쓸모가 없는데, 심지어 우리가, 사건들을 포함하여, 모든 일반 개념들과 사건의 모든 상태에게 실재성을 거부하여, 평범한 용법의 관점에서 가장 좁고 가장 안전한 ‘실재적(real)'이라는 말의 의미를 사용하는 데에 우리 자신을 국한시킨다 할지라도 의미가 없다: 물리적 물체만을, 그리고 너무 작지도 너무 크지도 너무 멀지도 않아서 쉽게 보이어 다루어질 수 있는 것만을 ‘실재적’으로 부르는 것.
그 까닭은 심지어 그 때에 우리는 (내가 20년 전에 쓴 것과 같이??)
‘모든 기술(記述)은... 일반 개념들을 이용한다; 모든 서술은 이론, 가설의 특징을 지닌다. “여기에 물 한잔이 있다”는 서술은 감각-경험에 의하여 (완전히) 검증될 수는 없는데, 그 까닭은 그 서술 속에서 출현하는 일반 개념들이 특정 감각-경험과 연계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즉각적인 경험들”은 단지 한번만 “즉각적으로 주어진” 것이다; 그것은 독특하다.) “유리잔”이라는 단어로써, 예를 들어, 우리는 어떤 법칙과 같은 행태를 보이는 물리적 물체를 의미한다; 그리고 “물”이라는 단어도 마찬가지이다.’를
깨달아야 하기 때문이다.
나는 일반 개념들이 없는 언어가 작동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리고 일반 개념들을 사용함으로써 우리는 의향의 실재를 주장하고, 그리하고 (적어도) 추측한다 - 궁극적이고 설명될 수 없는 의향들, 다시 말해서, 본질들의 실재는 아니라 할지라도. 어떤 술어들은 다른 술어들보다 더 이론적이라 할지라도 모든 술어들은 어느 정도까지는 이론적이기 때문에, 우리는 ‘관찰적 술어들(observational terms)’ (혹은 ‘비이론적 술어들[non-theoretical terms]’)과 이론적 술어들 사이의 습관적 구분은 오류라고 말함으로써 이 모든 것을 표현할 것이다; 어떤 이론들은 다른 이론들보다 더 추측성이라 할지라도, 모든 이론들은 추측성이라고 우리가 말했던 것과 꼭 마찬가지로.
그러나 우리가 힘의 실재를, 그리고 힘의 장(場)의 실재를 추측하기로 약속되어 있거나 적어도 준비되어 있다면, 주사위에 한 면이나 다른 한 면으로 떨어질 분명한 성향 (혹은 의향)이 있다고 추측해서는 안 될 이유가 없다; 이 성향이 실림으로써 변할 수 있다고; 이런 종류의 성향들은 지속적으로 변하리라고; 그리고 성향의 장(場)들이나, 성향을 결정하는 존재들의 장(場)으로써 우리는 작업을 하리라고. 이런 방향으로의 확률 해석으로 인하여 우리는 아마도 양자론에 새로운 물리적 해석을 부여할 것이다 - 확률 서술은 통계적으로만 시험될 수 있다고 보른(Born)에도 동의하는 반면, 보른(Born) 때문에, 순전히 통계적 해석과는 다른 해석.?? 그리고 이 해석은 아마도 오늘날 갈릴레오의 전통을 위협하는 듯한 양자론에서의 저 위중하고 도전적인 난제들을 해결하려는 우리의 노력에서 조금 도움이 될 것이다.??
?? 나의 저서 과학적 발견의 논리(L. Sc. D.) 25부 끝 부분 참조; 또한 본서의 새로운 부록 *x, (1)에서 (4)와 1부 참조; 또한 11장 5부의 주석 58-62의 원문 참조 (본서의 새로운 부록과 11장은 아직 번역되지 않음. - 역자 주).
?? 확률에 관한 성향 이론에 대해서, S. 쾨르너(Körner)가 1957년에 편집한 관찰과 해석(Observation and Interpretation)의 65쪽 이하에서의, 그리고 1959년의 영국 과학 철학(B. J. P. S.) 25쪽 이하에서의 나의 논문 참조.
?? (1980년에 추가.) 내 기억이 옳다면, 이 문단은 내가 출판한 성향 해석에 관한 최초의 서술이다 (1956년에 발표되었지만 1953년에 쓰였다, 주석 35는 이 장의 원본에는 물론 없었지만).
- “추측과 논박, 과학적 지식의 성장”, 칼 R. 포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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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REE VIEWS CONCERNING HUMAN KNOWLEDGE
1. THE SCIENCE OF GALILEO AND ITS MOST RECENT BETRAYAL
ONCE upon a time there was a famous scientist whose name was Galileo Galilei. He was tried by the Inquisition, and forced to recant his teaching. (원문에는 마침표가 없으나 내용상으로 여기가 마침표가 놓일 자리이기 때문에 역자가 넣었음. - 역자 주) This caused a great stir; and for well over two hundred and fifty years the case continued to arouse indignation and excitement - long after public opinion had won its victory, and the Church had become tolerant of science.
But this is by now a very old story, and I fear it has lost its interest. For Galilean science has no enemies left, it seems: its life hereafter is secure. The victory won long ago was final, and all is quiet on this front. So we take a detached view of the affair nowadays, having learned at last to think historically, and to understand both sides of a dispute. And nobody cares to listen to the bore who can't forget an old grievance.
What, after all, was this old case about? It was about the status of the Copernican 'System of the World' which, besides other things, explained the diurnal motion of the sun as only apparent, and as due to the rotation of our own earth.? The Church was very ready to admit that the new system was simpler than the old one: that it was a more convenient instrument for astronomical calculations, and for predictions. And Pope Gregory' reform of the calendar made full practical use of it. There was no objection to Galileo's teaching the mathematical theory, so long as he made it clear that its value was instrumental only; that is was nothing but a 'supposition', as Cardinal
? I emphasize here the diurnal as opposed to the annual motion of the sun because it was the theory of the diurnal motion which clashed with Joshua 10, 12 f., and because the explanation of the diurnal motion of the sun by the motion of the earth will be one of my main examples in what follows. (This explanation is, of course, much older than Copernicus - older even than Aristarchus - and it has been repeatedly re-discovered; for example by Oresme.)
First published in Contemporary British Philosophy, 3rd series, ed. H. D. Lewis, 1956.
Bellarmino put it;? or a 'mathematical hypothesis' - a kind of mathematical trick, 'invented and assumed in order to abbreviate and ease the calculations'.? In other words there were no objections so long as Galileo was ready to fall into line with Andreas Osiander who had said in his preface to Copernicus' De revolutionibus: 'There is no need for these hypotheses to be true, or even to be at all like the truth; rather, one thing is sufficient for them - that they should yield calculations which agree with the observations.'
Galileo himself, of course, was very ready to stress the superiority of the Copernican system as an instrument of calculation. But at the same time he conjectured, and even believed, that it was a true description of the world; and for him (as for the Church) this was by far the most important aspect of the matter. He had indeed some good reasons for believing in the truth of the theory. He had seen in his telescope that Jupiter and his moons formed a miniature model of the Copernican solar system (according to which the planets were moons of the sun). Moreover, if Copernicus was right the inner planets (and they alone) should, when observed from the earth, show phases like the moon; and Galileo had seen in his telescope the phases of Venus.
The Church was unwilling to contemplate the truth of a New System of the World which seemed to contradict a passage in the Old Testament. But this was hardly its main reason. A deeper reason was clearly stated by Bishop Berkeley, about a hundred years later, in his criticism of Newton.
In Berkeley's time the Copernican System of the World had developed into Newton's Theory of gravity, and Berkeley saw in it a serious competitor to religion. He saw that a decline of religious faith and religious authority would result from the new science unless its interpretation by the 'free-thinkers' could be refuted; for they saw in its success a proof of the power of the human intellect, unaided by divine revelation, to uncover the secrets of our world - the reality hidden behind its appearance.
This, Berkeley felt, was to misinterpret the new science. He analysed Newton's theory with complete candour and great philosophical acumen; and a critical survey of Newton's concepts convinced him that this theory could not possibly be anything but a
? '... Galileo will act prudently', wrote Cardinal Bellarmino (who had been one of the inquisitors in the case against Giordano Bruno) '... if he will speak hypothetically, ex suppositione ...: to say that we give a better account of the appearances by supposing the earth to be moving, and the sun at rest, than we could if we used eccentrics and epicycles is to speak properly; there is no danger in that, and it is all that the mathematician requires.' Cf. H. Grisar, Gelileistudien, 1882, Appendix ix. (Although this passage makes Bellarmino one of the founding fathers of the epistemology which Osiander had suggested some time before and which I am going to call 'instrumentalism', Bellarmino - unlike Berkeley - was by no means a convinced instrumentalist himself, as other passages in this letter show. He merely saw in instrumentalism one of the possible ways dealing with inconvenient scientific hypotheses. The same might well be true of Osiander. See also note 6 below.)
? The quotation is from Bacon's criticism of Copernicus in the Novum Organum, II, 36. In the next quotation (from De revolutionibus) I have translated the term 'verisimilis' by 'like the truth'. It should certainly not be translated here by 'probable'; for the whole point here is the question whether Copernicus' system is, or is not, similar in structure to the world; that is, whether it is similar to the truth, or truthlike. The question of degrees of certainty or probability does not arise. For the important problem of truthlikeness or verisimilitude, see also ch. 10 below, especially sections iii, x and xiv; and Addendum 6.
'mathematical hypothesis', that is, a convenient instrument for the calculation and prediction of the phenomena or appearances; that it could not possibly be taken as a true description of anything real.?
Berkeley's criticism was hardly noticed by the physicists; but it was taken up by philosophers, sceptical as well as religious. As a weapon it turned out to be a boomerang. In Hume's hands it became a threat to all belief - to all knowledge, whether human or revealed. In the hands of Kant, who firmly believed both in God and in the truth of Newtonian science, it developed into the doctrine that theoretical knowledge of God is impossible, and that Newtonian science must pay for the admission of its claim to truth by the renunciation of its claim to have discovered the real world behind the world of appearance: it was a true science of nature, but nature was precisely the world of mere phenomena, the world as it appeared to our assimilating minds. Later certain Pragmatists based their whole philosophy upon the view that the idea of 'pure' knowledge was a mistake; that there could be no knowledge in any other sense but in the sense of instrumental knowledge; that knowledge was power, and that truth was usefulness.
Physicists (with a few brilliant exceptions?) kept aloof from all these philosophical debates, which remained completely inconclusive. Faithful to the tradition created by Galileo they devoted themselves to the search for truth, as he had understood it.
Or so they did until very recently. For all this is now past history. Today the view of physical science founded by Osiander, Cardinal Bellarmino, and Bishop Berkeley,? has won the battle without another shot being fired. Without any further debate over the philosophical issue, without producing any new argument, the
? See also ch. 6, below.
? The most important of them are Mach, Kirchhoff, Hertz, Duhem, Poincaré, Bridgman, and Eddington - all instrumentalists in various ways.
? Duhem, in his famous series of papers, 'Sōzein to phainómena' (Ann.de philos, chrétienne, anneé 79, tom 6, 1908, nos. 2 to 6), claimed for instrumentalism a much older and much more illustrious ancestry than is justified by the evidence. For the postulate that, with our casual hypotheses, we ought to 'explain the observed facts', rather than 'do violence to them by trying to squeeze or fit them into our theories' (Aristotle, De Caelo, 293a25; 296b6; 297a4, b24ff; Met. 1073b37, 1074a1) has little to do with the instrumentalist thesis (that our theories cannot explain the facts). Yet this postulate is essentially the same as that we ought to 'preserve the phenomena' or 'save' them ([dia]sōzein ta phainomena). The phrase seems to be connected with the astronomical branch of the Platonic School tradition. (See especially the most interesting passage on Aristarchus in Plutarch's De Facie in Orbe Lunae, 923a; see also 933a for the 'confirmation of the cause' by the phenomena, and Cherniss' note a on p. 168 of his edition of this work of Plutarch's; furthermore, Simplicius' commentaries on De Caelo where the phrase occurs e. g. on pp. 497 1.21, 506 1.10, and 488 1.23 f, of Heiberg's edition, in commentaries on De Caelo 293a4 and 292b10.) We may well accept Simplicius' report that Eudoxus, under Plato's influence, in order to account for the observable phenomena of planetary motion, set himself the task of evolving an abstract geometrical system of rotating spheres to which he did not attribute any physical reality. (There seems to be some resemblance between this programme and that of the Epinomis, 990-1, where the study of abstract geometry - of the theory of the irrationals, 990d-991b - is described as a necessary preliminary to planetary theory; another such preliminary is the study of number - i. e. the odd and the even, 990c.) Yet even this would not mean that either Plato or Eudoxus accepted an instrumentalist epistemology: they may have consciously (and wisely) confined themselves to a preliminary problem.
instrumentalist view (as I shall call it) has become an accepted dogma. It may well now be called the 'official view' of physical theory since it is accepted by most of our leading theorists of physics (although neither by Einstein nor by Schrödinger). And it has become part of the current teaching of physics.
2. THE ISSUE AT STAKE
All this looks like a great victory of philosophical critical thought over the 'naïve realism' of the physicists. But I doubt whether this interpretation is right.
Few if any of the physicists who have now accepted the instrumentalist view of Cardinal Bellarmino and Bishop Berkeley realize that they have accepted a philosophical theory. Nor do they realize that they have broken with the Galilean tradition. on the contrary, most of them think that they have kept clear of philosophy; and most of them no longer care anyway. What they now care about, as physicists, is (a) mastery of the mathematical formalism, i. e. of the instrument, and (b) its applications; and they care for nothing else. And they think that by thus excluding everything else they have finally got rid of all philosophical nonsense. This very attitude of being tough and not standing any nonsense prevents them from considering seriously the philosophical arguments for and against the Galilean view of science (though they will no doubt have heard of Mach?). Thus the victory of the instrumentalist philosophy is hardly due to the soundness of its arguments.
How then did it come about? As far as I can see, through the coincidence of two factors, (a) difficulties in the interpretation of the formalism of the Quantum Theory, and (b) the spectacular practical success of its applications.
(a) In 1927 Niels Bohr, one of the greatest thinkers in the field of atomic physics, introduced the so-called principle of complementarity into atomic physics, which amounted to a 'renunciation' of the attempt to interpret atomic theory as a description of anything. Bohr pointed out that we could avoid certain contradictions (which threatened to arise between the formalism and its various interpretations) only by reminding ourselves that the formalism as such was self-consistent, and that each single case of its application (or each kind of case) remained consistent with it. The contradictions only arose through attempt to comprise within one interpretation the formalism together with more than one case, or kind of case, of its experimental application. But, as Bohr pointed out, any two of these conflicting applications were physically incapable of ever being combined in one experiment. Thus the result of every single experiment was consistent with the theory, and unambiguously laid down by it. This, he said, was all we could get. The claim to get more, and even the hope of ever getting more, we must renounce; physics remains
7 But they seem to have forgotten that Mach was led by his instrumentalism to fight against atomic theory - a typical example of the obscurantism of instrumentalism which is the topic of section 5 below.
consistent only if we do not try to interpret, or to understand, its theories beyond (a) mastering the formalism, and (b) relating them to each of their actually realizable cases of application separately.?
Thus the instrumentalist philosophy was used here ad hoc in order to provide an escape for the theory from certain contradictions by which it was threatened. It was used in a defensive mood - to rescue the existing theory; and the principle of complementarity has (I believe for this reason) remained completely sterile within physics. In twenty-seven years it has produced nothing except some philosophical discussions, and some arguments for the confounding of critics (especially Einstein).
I do not believe that physicists would have accepted such an ad hoc principle had they understood that it was ad hoc, or that it was a philosophical principle - part of Bellarmino's and Berkeley's instrumentalist philosophy of physics. But they remembered Bohr's earlier and extremely fruitful 'principle of correspondence' and hoped (in vain) for similar results.
(b) Instead of results due to the principle of complementarity other and more practical results of atomic theory were obtained, some of them with a big bang. No doubt physicists were perfectly right in interpreting these successful applications as corroborating their theories. But strangely enough they took them as confirming the instrumentalist creed.
Now this was an obvious mistake. The instrumentalist view asserts that theories are nothing but instruments, while the Galilean view was that they are not only instruments but also - and mainly - descriptions of the world, or of certain aspects of the world. It is clear that in this disagreement even a proof showing that theories are instruments (assuming it possible to 'prove' such a thing) could not seriously be claimed to support either of the two parties to the debate, since both were agreed on this point.
If I am right, or even roughly right, in my account of the situation, then philosophers, even instrumentalist philosophers, have no reason to take pride in their victory. on the contrary, they should examine their arguments again. For at least in the eyes of those who like myself do not accept the instrumentalist view, there is much at stake in this issue.
The issue, as I see it, is this.
One of the most important ingredients of our western civilization is what I may call the 'rationalist tradition' which we have inherited from the Greeks. It is the tradition of critical discussion - not for its own sake, but in the interests of the search for truth. Greek science, like Greek philosophy, was one of the products of this tradition,? and of the urge to understand the world in which we live; and the tradition founded by Galileo was its renaissance.
? I have explained Bohr's 'Principle of Complementarity' as I understand it after many years of effort. No doubt I shall be told that my formulation of it is unsatisfactory. But if so I am in good company; for Einstein refers to it as 'Bohr's principle of complementarity, a sharp formulation of which ... I have been unable to attain despite much effort which I have expended on it.' Cf. Albert Einstein: Philosopher-Scientist, ed. by P. A. Schlipp, 1949, p. 674.
? See ch, 4, below.
Within this rationalist tradition science is valued, admittedly, for its practical achievement; but it is even more highly valued for its informative content, and for its ability to free our minds from old beliefs, old prejudices, and old certainties, and to offer us in their stead new conjectures and daring hypotheses. Science is valued for its liberalizing influence - as one of the greatest of the forces that make for human freedom.
According to the view of science which I am trying to defend here, this is due to the fact scientists have dared (since Thales, Democritus, Plato's Timaeus, and Aristarchus) to create myths, or conjectures, or theories, which are in striking contrast to the everyday world of common experience, yet able to explain some aspects of this world of common experience. Galileo pays homage to Aristarchus and Copernicus precisely because they dared to go beyond this known world of our senses: ' I cannot', he writes,?? 'express strongly enough my unbounded admiration for the greatness of mind of these men who conceived [the heliocentric system] and held it to be true..., in violent opposition to the evidence of their own senses....' This is Galileo's testimony to the liberalizing force of science. Such theories would be important even if they were no more than exercises for our imagination. But they are more than this, as can be seen from the fact that we submit them to severe tests by trying to deduce from them some of the regularities of the known world of common experience - i. e. by trying to explain these regularities. And these attempts to explain the known by the unknown (as I have described them elsewhere??) have immeasurably extended the realm of the known. They have added to the facts of our everyday world the invisible air, the antipodes, the circulation of the blood, the worlds of the telescope and the microscope, of electricity, and of tracer atoms showing us in detail the movements of matter within living bodies. All these things are far from being mere instruments: they are witness to the intellectual conquest of our world by our minds.
But there is another way of looking at these matters. For some, science is still nothing but glorified plumbing, glorified gadget-making - 'mechanics'; very useful, but a danger to true culture, threatening us with the domination of the near-illiterate (of Shakespeare's 'mechanicals'). It should never be mentioned in the same breath as literature or the arts or philosophy. Its professed discoveries are mere mechanical inventions, its theories are instruments - gadgets again, or perhaps super-gadgets. It cannot and does not reveal to us new worlds behind our everyday world of appearance; for the physical world is just surface: it has no depth. The world is just what it appears to be. only the scientific theories are not what they appear to be. A scientific theory neither explains nor describes the world; it is nothing but an instrument.
?? Salviati says so several times, with hardly a verbal variation, on the Third Day of The Two Principal Systems.
?? See the Appendix, point (10) to ch. 1, above, and the penultimate paragraph of ch. 6, below.
I do not present this as a complete picture of modern instrumentalism, although it is a fair sketch, I think, of part of its original philosophical background. Today a much more important part of it is, I am well aware, the rise and self-assertion of the modern 'mechanic' or engineer.?? Still, I believe that the issue should be seen to lie between a critical and adventurous rationalism - the spirit of discovery - and a narrow and defensive creed according to which we cannot and need not learn or understand more about our world than we know already. A creed, moreover, which is incompatible with the appreciation of science as one of the greatest achievements of the human spirit. (앞의 문장은 동사가 없는 불완전한 문장이다. A creed 앞의 마침표가 콜론이나 세미콜론이 되어야 할 것이다. - 역자 주.)
Such are the reasons why I shall try, in this paper, to uphold at least part of the Galilean view of science against the instrumentalist view. But I cannot uphold all of it. There is a part of it which I believe the instrumentalists were right to attack. I mean the view that in science we can aim at, and obtain, an ultimate explanation by essences. It is in its opposition to this Aristotelian view (which I have called?? 'essentialism') that the strength and the philosophical interest of instrumentalism lies. Thus I shall have to discuss and criticize two views of human knowledge - essentialism and instrumentalism. And I shall oppose to them what I shall call the third view - what remains of Galileo's view after the elimination of essentialism, or more precisely, after allowance has been made for what was justified in the instrumentalist attack.
3. THE FIRST VIEW: ULTIMATE EXPLANATION BY ESSENCES
Essentialism, the first of the three views of scientific theory to be discussed, is part of the Galilean philosophy of science. Within this philosophy three elements or doctrines which concern us here may be distinguished. Essentialism (our 'first view') is that part of the Galilean philosophy which I do not wish to uphold. It consists of a combination of the doctrines (2) and (3).
These are the three doctrines:
(1) The scientist aims at finding a true theory or description of the world (and especially of its regularities or 'laws'), which shall also be an explanation of the observable facts. (This means that a description of these facts must be deducible from the theory in conjunction with certain statements, the so-called 'initial conditions'.)
This is a doctrine I wish to uphold. It is to form part of our 'third view'.
(2) The scientist can succeed in finally establishing the truth of such theories beyond all reasonable doubt.
This second doctrine, I think, needs correction. All the scientist can do, in my opinion, is to test his theories, and to eliminate all those that do not stand up the most severe tests he can design. But
?? The realization that natural science is not indubitable epistémé (scientia) has led to the view that it is technē (technique, art, technology); but the proper view, I believe, is that it consists of doxai (opinions, conjectures), controlled by critical discussion as well as by experimental technē. Cf. ch. 20, below.
?? See section 10 of my Poverty of Historicism, and my Open Society and its Enemies, vol. I, ch. 3 section vi, and vol. II, ch. 11, sections i and ii.
he can never be quite sure whether new tests (or even a new theoretical discussion) may not lead him to modify, or to discard, his theory. In this sense all theories are, and remain hypotheses: they are conjecture (doxa) as opposed to indubitable knowledge (epistémé).
(3) The best, the truly scientific theories, describe the 'essences' or the 'essential natures' of things - the realities which lie behind the appearance. Such theories are neither in need nor susceptible of further explanation: they are ultimate explanations, and to find them is the ultimate aim of the scientist.
This third doctrine (in connection with the second) is the one I have called 'essentialism'. I believe that like the second doctrine it is mistaken.
Now what the instrumentalist philosophers of science, from Berkeley to Mach, Duhem, and Poincaré, have in common is this. They all assert that explanation is not an aim of physical science, since physical science cannot discover 'the hidden essences of things'. The argument shows that what they have in mind is what I call ultimate explanation.?? Some of them, such as Mach and Berkeley, hold this view because they do not believe that there is such a thing as an essence of anything physical: Mach, because he does not believe in essences at all; Berkeley, because he believes only in spiritual essences, and thinks that the only essential explanation of the world is God. Duhem seems to think (on lines reminiscent of Kant??) that there are essences but that they are undiscoverable by human science (though we may, somehow, move towards them); like Berkeley he thinks that they can be revealed by religion. But all these philosophers agree that (ultimate) scientific explanation is impossible. And from the absence of a hidden essence which scientific theories could describe they conclude that these theories (which clearly do not describe our ordinary world of common experience) describe nothing at all. Thus they are mere instruments.?? And what may appear as the growth of theoretical knowledge is merely the improvement of instruments.
The instrumentalist philosophers therefore reject the third doctrine, i. e. the doctrine of essences. (I reject it too, but for somewhat different reasons.) At the same time they reject, and are bound to reject, the second doctrine; for if a theory is an instrument, then it cannot be true (but only convenient, simple, economical, powerful, etc.). They even frequently call the theories 'hypotheses'; but they do not, of course, mean by this what I mean: that a theory is conjectured to be true, that it is a descriptive though possibly a false
?? The issue has been confused at times by the fact that the instrumentalist criticism of (ultimate) explanation was expressed by some with the help of the formula: the aim of science is description rather than explanation. But what was here meant by 'description' was the description of the ordinary empirical world; and what the formula expressed, indirectly, was that those theories which do not describe in this sense do not explain either, but are nothing but convenient instruments to help us in the description of ordinary phenomena.
?? Cf. Kant's letter to Reinhold, 12. 5. 1789, in which the 'real essence' or 'nature' of a thing (e. g. of matter) is said to be inaccessible to human knowledge.
?? See ch. 6, below.
statement; although they do mean to say that theories are uncertain: 'And as to the usefulness of hypotheses', Osiander writes (at the end of his preface), 'nobody should expect anything certain to emerge from astronomy, for nothing of the kind can ever come out of it.' Now I fully agree that there is no certainty about theories (which may always be refuted); and I even agree that they are instruments, although I do not agree that this is the reason why there can be no certainty about theories. (The correct reason, I believe, is simply that our tests can never be exhaustive.) There is thus a considerable amount of agreement between my instrumentalist opponents and myself over the second and third doctrines. But over the first doctrine there is complete disagreement.
To this disagreement I shall return later. In the present section I shall try to criticize (3), the essentialist doctrine of science, on lines somewhat different from the arguments of the instrumentalism which I cannot accept. For its argument that there can be no 'hidden essences' is based upon its conviction that there can be nothing hidden (or that if anything is hidden it can be only known by divine revelation). From what I said in the last section it will be clear that I cannot accept an argument that leads to the rejection of the claim of science to have discovered the rotation of the earth, or atomic nuclei, or cosmic radiation, or the 'radio stars'.
I therefore readily concede to essentialism that much is hidden from us, and that much of what is hidden may be discovered. (I disagree profoundly with the spirit of Wittgenstein's dictum, 'The riddle does not exist'.) And I do not even intend to criticize those who try to understand the 'essence of the world'. The essentialist doctrine I am contesting is solely the doctrine that science aims at ultimate explanation; that is to say, an explanation which (essentially, or by its very nature) cannot be further explained, and which is in no need of any further explanation.
Thus my criticism of essentialism does not aim at establishing the non-existence of essences; it merely aims at showing the obscurantist character of the role played by the idea of essences in Galilean philosophy of science (down to Maxwell, who was inclined to believe in them but whose work destroyed this belief). In other words my criticism tries to show that whether essences exist or not the belief in them does not help us in any way and indeed is likely to hamper us; so that there is no reason why the scientist should assume their existence.??
?? This criticism of mine is thus frankly utilitarian, and it might be described as instrumentalist; but I am concerned here with a problem of method which is always a problem of the fitness of means to ends.
My attacks upon essentialism - i. e. upon the doctrine of ultimate explanation - have sometimes been countered by the remark that I myself operate (perhaps unconsciously) with the idea of an essence of science (or an essence of human knowledge), so that my argument, if made explicit, would run: 'It is of the essence or of the nature of human science (or human knowledge) that we cannot know, or search for, such things as essences or natures.' I have however answered, by implication, this particular objection at some length in L. Sc. D. (section 9 and 10, 'The Naturalist View of Method') and I did so before it was ever raised - in fact before I ever came to describe, and to attack, essentialism. Moreover, one might adopt the view that certain things of our own making - such as clocks - may well be said to have 'essences', viz. their 'purpose' (and what makes them serve these 'purposes'). And science, as a human, purposeful activity (or a method), might therefore be claimed by some to have an 'essence', even if they deny that natural objects have essences. (This denial is not, however, implied in my criticism of essentialism.)
This, I think, can be best shown with the help of a simple example - the Newtonian theory of gravity.
The essentialist interpretation of Newtonian theory is due to Roger Cotes.?? According to him Newton discovered that every particle of matter was endowed with gravity, i. e. with an inherent power or force to attract other matter. It was also endowed with inertia - an inherent power to resist a change in its state of motion (or to retain the direction and velocity of its motion). Since both gravity and inertia inhere in each particle of matter it follows that both must be strictly proportional to the amount of matter in a body, and therefore to each other; hence the law of proportionality of inert and gravitating mass. Since gravity radiates from each particle we obtain the square law of attraction. In other words, Newton' laws of motion simply describe in mathematical language the state of affairs due to the inherent properties of matter: they describe the essential nature of matter.
Since Newton's theory described in this way the essential nature of matter, he could explain the behaviour of matter with its help, by mathematical deduction. But Newton's theory, in its turn, is neither capable of, nor in need of, further explanation, according Cotes - at least not within physics. (The only possible further explanation was that God has endowed matter with these essential properties.??)
This essential view of Newton's theory was on the whole the accepted view until the last decades of the nineteenth century. That it was obscurantist is clear: it prevented fruitful questions from being raised, such as, 'What is the cause of gravity?' or more fully, 'Can we perhaps explain gravity by deducing Newton's theory, or a good approximation of it, from a more general theory (which should be independently testable)?'
Now it is illuminating to see that Newton himself had not considered gravity as an essential property of matter (although he considered inertia to be essential, and also, with Descartes, extension). It appears that he had taken over from Descartes the view that the essence of a thing must be a true or absolute property of the thing (i. e. a property which does not depend on the existence of other things) such as extension, or the power to resist a change in its state of motion, and not a relational property, i. e. a property which, like gravity, determines the relations (interactions in space) between one body and other bodies. Accordingly, he strongly felt the incompleteness of this theory, and the need to explain gravity. 'That
?? R. Cotes' Preface to the second edition of Newton's Principia.
?? There is an essentialist theory of Time and Space (similar to this theory of matter) which is due to Newton himself.
gravity', he wrote,?? 'should be innate, inherent, and essential to matter, so that one body may act upon another at a distance... is to me so great an absurdity that I believe no man who has in philosophical matters a competent faculty of thinking can ever fall into it.'
It is interesting to see that Newton condemned here, in anticipation, the bulk of his followers. To them, one is tempted to remark, the properties of which they had learned in school appeared to be essential (and even self-evident), although to Newton, with his Cartesian background, the same properties had appeared to be in need of explanation (and indeed to be almost paradoxical).
Yet Newton himself was an essentialist. He had tried hard to find an acceptable ultimate explanation of gravity by trying to deduce the square law from the assumption of a mechanical push - the only kind of causal action which Descartes had permitted, since only push could be explained by the essential property of all bodies, extension.?? But he failed. Had he succeeded we can be certain that he would have thought that his problem was finally solved - that he had found the ultimate explanation of gravity.?? But here he would have been wrong. The question, 'Why can bodies push one another?' can be asked (as Leibniz first saw), and it is even an extremely fruitful question. (We now believe that they push one another because of certain repulsive electric forces.) But Cartesian and Newtonian essentialism, especially if Newton had been successful in his attempted explanation of gravity, might have prevented this question from ever being raised.
These examples, I think, make it clear that the belief in essences (whether true or false) is liable to create obstacles to thought - to the posing of new and fruitful problems. Moreover, it cannot be part of science (for even if we should, by a lucky chance, hit upon a theory describing essences, we could never be sure of it). But creed
which is likely to lead to obscurantism is certainly not one of those extra-scientific beliefs (such as a faith in the power of critical discussion) which a scientist need accept.
This concludes my criticism of essentialism.
4. THE SECOND VIEW: THEORIES AS INSTRUMENTS
The instrumentalist view has great attractions. It is modest, and it is very simple, especially if compared with essentialism.
?? Letter to Richard Bentley, 25th February 1692-3 (i. e. 1693); cf. also the letter of 17th January.
?? Newton tried to explain gravity by a Cartesian action by contact (forerunner of an action at vanishing distances): his Opticks, Qu. 31, shows that he did 'consider' that 'What I call Attraction may be performed by impulse' (anticipating Lesage's explanation of gravity as an umbrella effect in a rain of particles). Qu. 21, 22, and 28 suggest that he may have been aware of the fatal excess impulse on the windscreen over the rear window.
?? Newton was an essentialist for whom gravity was unacceptable as an ultimate explanation; but he was too critical to accept even his own attempts to explain it. Descartes, in this situation, would have assumed the existence of some push mechanism, proposing what he called a 'hypothesis'. But Newton, with a critical allusion to Descartes, stressed that he was 'to argue from Phaenomena without feigning [arbitrary or ad hoc] Hypotheses' (Qu. 28). Of course, he could not but use hypotheses all the time, and the Opticks overflows with bold speculations. But his explicit and repeated rejection of the method of hypotheses made a lasting impression; and Duhem used it in support of instrumentalism.
According to essentialism we must distinguish between (i) the universe of essential reality, (ii) the universe of observable phenomena, and (iii) the universe of descriptive language or of symbolic
representation. I will take each of these to be represented by a square.
E |
||||
a
b |
A
B |
ε
α ↘β | ||
(ii) (i) (iii)
The function of a theory may here be described as follows.
a, b are phenomena; A, B are the corresponding realities behind these appearances; and α, β the description or symbolic representations of these realities. E are the essential properties of A, B, and ε is the theory describing E. Now from ε and α we can deduce β ; this means that we can explain, with the help of our theory, why α leads to, or is the cause of, b.
A representation of instrumentalism can be obtained from this schema simply by omitting (i), i. e. the universe of the realities behind the various appearances. α then directly describes α, and β directly describes b; and ε describes nothing - it is merely an instrument which helps us to deduce β from α. (This may be expressed by saying - as Schlick did, following Wittgenstein - that a universal law or a theory is not a proper statement but rather 'a rule, or a set of instructions, for the derivation of singular statements from other singular statements'.??)
This is the instrumentalist view. In order to understand it better we may again take Newtonian dynamics as an example. α and b may be taken to be two positions of two spots of light (or two positions of the planet Mars); α and β are the corresponding formulae of the formalism; and ε is the theory strengthened by a general description of the solar system (or by a 'model' of the solar system). Nothing corresponds to ε in the world (in the universe ii): there simply are no such things as attractive forces, for example. Newtonian forces are not entities which determine the acceleration of bodies: they are nothing but mathematical tools whose function is to allow us to deduce β from α.
No doubt we have here an attractive simplification, a radical application of Ockham's razor. But although this simplicity has
?? For an analysis and criticism of this view see my L. Sc. D. especially note 7 to section 4, and my Open Society, note 51 to ch. 11. The idea that universal statements may function in this way can be found in Mill's Logic, Book II, ch. III, 3: 'All inference is from particulars to particulars.' See also G. Ryle, The Concept of Mind (1949), ch. v, pp. 121 ff., for a more careful and critical formulation of the same view.
converted many to instrumentalism (for example Mach) it is by no means the strongest argument in its favour.
Berkeley's strongest argument for instrumentalism was based upon his nominalistic philosophy of language. According to this philosophy the expression 'force of attraction' must be a meaningless expression, since forces of attraction can never be observed. What can be observed are movements, not their hidden alleged 'causes'. This is sufficient, on Berkeley's view of language, to show that Newton's theory cannot have any informative or descriptive content.
Now this argument of Berkeley's may perhaps be criticized because of the intolerably narrow theory of meaning which it implies. For if consistently applied it amounts to the thesis that all dispositional words are without meaning. Not only would Newtonian 'attractive forces' be without meaning, but also such ordinary dispositional words and expressions as 'breakable' (as opposed to 'broken'), or 'capable of conducting electricity' (as opposed to 'conducting electricity'). These are not names of anything observable, and they would therefore have to be treated on a par with Newtonian forces. But it would be awkward to classify all these expressions as meaningless, and from the point of view of instrumentalism it is quite unnecessary to do so: all that is needed is an analysis of the meaning of dispositional terms and dispositional statements. This will reveal that they have meaning. But from the point of view of instrumentalism they do not have a descriptive meaning (like non-dispositional terms and statements). Their function is not to report events, or occurrences, or 'incidents', in the world, or to describe facts. Rather, their meaning exhausts itself in the permission or licence which they give us to draw inferences or to argue from some matters of fact to other matters of fact. Non-dispositional statements which describe observable matters of fact ('this leg is broken') have cash value, as it were; dispositional statements, to which belong the laws of science, are not like cash, but rather like legal 'instruments' creating rights to cash.
One need only proceed one step further in the same direction, it appears, in order to arrive at an instrumentalist argument which it is extremely difficult, if not impossible, to criticize; for our whole question - whether science is descriptive or instrumental - is here exposed as a pseudo-problem.??
The step in question consists, simply, in not only allowing meaning - an instrumental meaning - to dispositional terms, but also a kind of descriptive meaning. Dispositional words such as 'breakable', it may be said, certainly describe something; for to say of a thing that it is breakable, or soluble, is to describe it in a different way, and by a
?? I have not so far encountered in the literature this particular form of the instrumentalist argument; but if we remember the parallelism between problems concerning the meaning of an expression and problems concerning the truth of a statement (see for example the table in the Introduction above, section xii), we see that this argument closely corresponds to William James' definition of 'truth' as 'usefulness'.
different method, from saying that it is broken or dissolved; otherwise we should not use the suffix 'able'. The difference is just this - that we describe, by using dispositional words, what may happen to a thing (in certain circumstances). Accordingly, dispositional descriptions are descriptions, but they have nevertheless a purely instrumental function. In their case, knowledge is power (the power to foresee). When Galileo said of the earth 'and yet, it moves', then he uttered, no doubt, a descriptive statement. But the function or meaning of this statement turns out nevertheless to be purely instrumental: it exhausts itself in the help it renders in deducing certain non-dispositional statements.
Thus the attempt to show that theories have a descriptive meaning besides their instrumental meaning is misconceived, according to this argument; and the whole problem - the issue between Galileo and the Church - turns out to be a pseudo-problem.
In support of the view that Galileo suffered for the sake of a pseudo-problem it has been asserted that in the light of a logically more advanced system of physics Galileo's problem has in fact dissolved into nothing. Einstein's general principle, one often hears, makes it quite clear that it is meaningless to speak of absolute motion, even in the case of rotation; for we can freely choose whatever system we wish to be (relatively) at rest. Thus Galileo's problem vanishes. Moreover, it vanishes precisely for the reasons given above. Astronomical knowledge can be nothing but knowledge of how the stars behave; thus it cannot be anything but the power to describe and predict our observation; and since these must be independent of our free choice of a co-ordinate system, we now see more clearly why Galileo's problem could not possibly be real.
I shall not criticize instrumentalism in this section, or reply to its arguments, except the very last one - the argument from general relativity. This argument is based on a mistake. From the point of view of general relativity, there is very good sense - even an absolute sense - in saying that the earth rotates: it rotates in precisely that sense in which a bicycle wheel rotates. It rotates, that is to say, with respect to any chosen local inertial system. Indeed relativity describes the solar system in such a way that from this description we can deduce that any observer situated on any sufficiently distant freely moving physical body (such as our moon, or another planet, or a star outside the system) would see the earth rotating, and could deduce, from this observation, that for its inhabitants there would be an apparent diurnal motion of the sun. But it is clear that this is precisely the sense of the words 'it moves' which was at issue; for part of the issue was whether the solar system was a system like that of Jupiter and his moons, only bigger; and whether it would look like this system, if seen from outside. on all these questions Einstein unambiguously supports Galileo.
My argument should not be interpreted as an admission that the whole question can be reduced to one of observations, or of possible observations. Admittedly both Galileo and Einstein intend, among other things, to deduce what an observer, or a possible observer, would see. But this is not their main problem. Both investigate physical systems and their movements. It is only the instrumentalist philosopher who asserts that what they discussed, or 'really meant' to discuss, were not physical systems but only the results of possible observations; and that their so-called 'physical systems', which appeared to be their objects of study, were in reality only instruments for predicting observations.
5. CRITICISM OF THE INSTRUMENTALIST VIEW
Berkeley's argument, we have seen, depends upon the adoption of a certain philosophy of language, convincing perhaps at first, but not necessarily true. Moreover, it hinges on the problem of meaning,?? notorious for its vagueness and hardly offering hope of a solution. The position becomes even more hopeless if we consider some more recent development of Berkeley's arguments, as sketched in the preceding section. I shall try, therefore, to force a clear decision on our problem by a different approach - by way of an analysis of science rather than an analysis of language.
My proposed criticism of the instrumentalist view of scientific theories can be summarized as follows.
Instrumentalism can be formulated as the thesis that scientific theories - the theories of the so-called 'pure' sciences - are nothing but computation rules (or inference rules); of the same character, fundamentally, as the computation rules of the so-called 'applied' sciences. (One might even formulate it as the thesis that 'pure' science is a misnomer, and that all science is 'applied'.)
Now my reply to instrumentalism consists in showing that there are profound differences between 'pure' theories and technological computation rules, and that instrumentalism can give a perfect description of these rules but is quite unable to account for the difference between them and the theories. Thus instrumentalism collapses.
The analysis of the many functional differences between computation rules (for navigation, say) and scientific theories (such as Newton's) is a very interesting task, but a short list of results must suffice here. The logical relations which may hold between theories and computation rules are not symmetrical; and they are different from those which may hold between various theories, and also from those which may hold between various computation rules. The way in which computation rules are tried out is different from the way in which theories are tested ; and the skill which the application of computation rules demands is quite different from that needed for their (theoretical) discussion, and for the (theoretical) determination of the limits of their applicability. These are only a few hints, but they may be enough to indicate the direction and the force of the argument.
I am now going to explain one of these points a little more fully,
?? For this problem see my two books mentioned here in footnote 23, and chs. 1, 11, 13 and 14 of the present volume.
because it gives rise to an argument somewhat similar to the one I have used against essentialism.
What I wish to discuss is the fact that theories are tested by attempts to refute them (attempts from which we learn a great deal), while there is nothing strictly corresponding to this in the case of technological rules of computation or calculation.
A theory is tested not merely by applying it, or by trying it out, but by applying it to very special cases - cases for which it yields results different from those we should have expected without that theory, or in the light of other theories. In other words we try to select for our tests those crucial cases in which we should expect the theory to fail if it is not true. Such cases are 'crucial' in Bacon's sense; they indicate the cross-roads between two (or more) theories. For to say that without the theory in question we should have expected a different result implies that our expectation was the result of some other (perhaps an older) theory, however dimly we may have been aware of this fact. But while Bacon believed that a crucial experiment may establish or verify a theory, we shall have to say that it can at most refute or falsify a theory.?? It is an attempt to refute it; and if it does not succeed in refuting the theory in question - if, rather, the theory is successful with its unexpected prediction - then we say that it is corroborated by the experiment. (It is the better corroborated?? the less expected, or the less probable, the result of the experiment has been.)
Against the view here developed one might be tempted to object (following Duhem??) that in every test it is not only the theory under investigation which is involved, but also the whole system of our theories and assumptions - in fact, more or less the whole of our knowledge - so that we can never be certain which of all these assumptions is refuted. But this criticism overlooks the fact that if we take each of the two theories (between which the crucial experiment is to decide) together with all this background knowledge, as indeed we must, then we decide between two systems which differ only over the two theories which are at stake. It further overlooks the fact that we do not assert the refutation of the theory as such, but of the theory together with that background knowledge; parts of which, if other crucial experiments can be designed, may indeed one day be rejected as responsible for the failure. (Thus we may even characterize a theory under investigation as that part of a vast system for which we have, however vaguely, an alternative in mind, and for which we try to design crucial tests.)
Now nothing sufficiently similar to such tests exists in the case of instruments or rules of computation. An instrument may break
?? Duhem, in his famous criticism of crucial experiments (in his Aim and Structure of Physical Theory), succeeds in showing that crucial experiments can never establish a theory. He fails to show that they cannot refute it.
?? The degree of corroboration will therefore increase with the improbability (or the content) of the corroborating cases. See my 'Degree of Confirmation', Brit. Jour. Phil. Sci., 5, pp. 143 ff., now among the new appendices of my L. Sc. D., and ch. 10 of the present volume (including the Addenda).
?? See n. 26
down, to be sure, or it may become outmoded. But it hardly makes sense to say that we submit an instrument to the severest tests we can design in order to reject it if it does not stand up to them: every air frame, for example, can be 'tested to destruction', but this severe test is undertaken not in order to reject every frame when it is destroyed but to obtain information about the frame (i. e. to test a theory about it), so that it may be used within the limits of its applicability (or safety).
For instrumental purposes of practical application a theory may continue to be used even after its refutation, within the limits of its applicability: an astronomer who believes that Newton's theory has turned out to be false will not hesitate to apply its formalism within the limits of its applicability.
We may sometimes be disappointed to find that the range of applicability of an instrument is smaller than we expected at first; but this does not make us discard the instrument qua instrument - whether it is a theory or anything else. on the other hand a disappointment of this kind means that we have obtained new information through refuting a theory - that theory which implied that the instrument was applicable over a wider range.
Instruments, even theories in so far as they are instruments, cannot be refuted, as we have seen. The instrumentalist interpretation will therefore be unable to account for real tests, which are attempted refutations, and will not get beyond the assertion that different theories have different ranges of application. But then it cannot possibly account for scientific progress. Instead of saying (as I should) that Newton's theory was falsified by crucial experiments which failed to falsify Einstein's, and that Einstein's theory is therefore better than Newton's, the consistent instrumentalist will have to say, with reference to his 'new' point of view, like Heisenberg: 'It follows that we do not say any longer: Newton's mechanics is false.... Rather, we now use the following formulation: Classical mechanics... is everywhere exactly "right" where its concepts can be applied.'??
Since 'right' here means 'applicable', this assertion merely amounts to saying, 'Classical mechanics is applicable where its concepts can be applied' - which is not saying much. But be this as it may, the point is that by neglecting falsification, and stressing application, instrumentalism proves to be as obscurantist a philosophy as essentialism. For it is only in searching for refutations that science can hope to learn and to advance. It is only in considering how its various theories stand up to tests that it can distinguish between better and worse theories and so find a criterion of progress. (See chapter 10, below.)
Thus a mere instrument for prediction cannot be falsified. What may appear to us at first as its falsification turns out to be no more than a rider cautioning us about its limited applicability. This is why the instrumentalist view may be used ad hoc for rescuing a physical
?? See W. Heisenberg in Dialectica, 2, 1948, p. 333 f. Heisenberg's own instrumentalism is far from consistent, and he has many anti-instrumentalist remarks to his credit. But this article here quoted may be described as an out-and-out attempt to prove that his quantum theory leads of necessity to an instrumentalist philosophy, and thereby to the result that physical theory can never be unified, or even made consistent.
theory which is threatened by contradictions, as was done by Bohr (if I am right in my interpretation, given in section ii, of his principle of complementarity). If theories are mere instruments of prediction we need not discard any particular theory even though we believe that no consistent physical interpretation of its formalism exists.
Summing up we may say that instrumentalism is unable to account for the importance to pure science of testing severely even the most remote implications of its theories, since it is unable to account for the pure scientist's interest in truth and falsity. In contrast to the highly critical attitude requisite in the pure scientist, the attitude of instrumentalism (like that of applied science) is one of complacency at the success of applications. Thus it may well be responsible for the recent stagnation in quantum theory. (This was written before the refutation of parity.)
6. THE THIRD VIEW: CONJECTURES, TRUTH, AND REALITY
Neither Bacon nor Berkeley believed that the earth rotates, but nowadays everybody believes it, including the physicists. Instrumentalism is embraced by Bohr and Heisenberg only as a way out of the special difficulties which have arisen in quantum theory.
The movie is hardly sufficient. It is always difficult to interpret the latest theories, and they sometimes perplex even their own creators, as happened with Newton. Maxwell at first inclined towards an essentialist interpretation of his theory: a theory which ultimately contributed more than any other to the decline of essentialism. And Einstein inclined at first to an instrumentalist interpretation of relativity, giving a kind of operational analysis of the concept of simultaneity which contributed more to the present vogue for instrumentalism than anything else; but he later repented.??
I trust that physicists will soon come to realize that the principle of complementarity is ad hoc, and (what is more important) that its only function is to criticism and to prevent the discussion of physical interpretations; though criticism and discussion are urgently needed for reforming any theory. They will then no longer believe that instrumentalism is forced upon them by the structure of contemporary physical theory.
Anyway, instrumentalism is, as I have tried to show, no more acceptable than essentialism. Nor is there any need to accept either of them, for there is a third view.??
This 'third view' is not very startling or even surprising, I think. It preserves the Galilean a doctrine that the scientist aims at a true description of the world, or of some of its aspects, and at a true explanation of observable facts; and it combines this doctrine with the non-Galilean view that though this remains the aim of the scientist, he can never know for certain whether his findings are
?? Note added to the proofs. When this paper went to press Albert Einstein was still alive, and I intended to send him a copy as soon as it was printed. My remark referred to a conversation we had on the subject in 1950.
?? Cf. section v of ch. 6, below.
true, although he may sometimes establish with reasonable certainty that a theory is false.??
One may formulate this 'third view' of scientific theories briefly by saying that they are genuine conjectures - highly informative guesses about the world which although not verifiable (i. e. capable of being shown to be true) can be submitted to severe critical tests. They are serious attempts to discover the truth. In this respect scientific hypotheses are exactly like Goldbach's famous conjecture in the theory of numbers. Goldbach thought that it might possibly be true; and it may well be true in fact, even though we do not know, and may perhaps never know, whether it is true or not.
I shall confine myself to mentioning only a few aspects of my 'third view', and only such aspects as distinguish it from essentialism and instrumentalism; and I shall take essentialism first.
Essentialism looks upon our ordinary world as mere appearance behind which it discovers the real world. This view has to be discarded once we become conscious of the fact that the world of each of our theories may be explained, in its turn, by further worlds which are described by further theories - theories of a higher level of abstraction, of universality, and of testability. The doctrine of an essential or ultimate reality collapses together with that of ultimate explanation.
Since according to our third view the new scientific theories are, like the old ones, genuine conjectures, they are genuine attempts to describe these further worlds. Thus we are led to take all these worlds, including our ordinary world, as equally real; or better, perhaps, as equally real aspects or layers of the real world. (If looking through a microscope we change its magnification, then we may see various completely different aspects or layers of the same thing, all equally real.) It is thus mistaken to say that my piano, as I know it, is real, while its alleged molecules and atoms are mere 'logical constructions' (or whatever else may be indicative of their unreality); just as it is mistaken to say that atomic theory shows that the piano of my everyday world is an appearance only - a doctrine which is clearly unsatisfactory once we see that the atoms in their turn may perhaps be explained as disturbances, or structures of disturbances, in a quantized field of forces (or perhaps of probabilities). All these conjectures are equal in their claims to describe reality, although some of them are more conjectural than others.
Thus we shall not, for example, describe only the so-called 'primary qualities' of a body (such as its geometrical shape) as real, and contrast them as the essentialists once did, with its unreal and merely apparent 'secondary qualities' (such as colour). For the extension and even the shape of a body have since become objects of explanation in terms of theories of a higher level; of theories describing a further and deeper layer of reality - forces, and fields of forces - which are related to the primary qualities in the same way as these were believed by the essentialists to be related to the
?? Cf. the discussion of this point in section v, above, and L. Sc. D. (passim); also ch. 1 above, and Xenophanes' fragments quoted towards the end of ch. 5, below.
the secondary ones; and the secondary qualities, such as colours, are just as real as the primary ones - though our colour experiences have to be distinguished from the colour-properties of the physical things, exactly as our geometrical-shape-experiences have to be distinguished from the geometrical-shape-properties of the physical things. From our point of view both kinds of qualities are equally real - that is, conjectured to be real; and so are forces, and fields of forces, in spite of their undoubted hypothetical or conjectural character.
Although in one sense of the word 'real', all these various levels are equally real, there is another yet closely related sense in which we might say that the higher and more conjectural levels are the more real ones - in spite of the fact that they are more conjectural. They are, according to our theories, more real (more stable in intention, more permanent) in the sense in which a table, or a tree, or a star, is more real than any of its aspects.
But is not just this conjectural or hypothetical character of our theories the reason why we should not ascribe reality to the worlds described by them? Should we not (even if we find Berkeley's 'to be is to be perceived' too narrow) call only those states of affairs 'real' which are described by true statements, rather than by conjectures which may turn out to be false? With these questions we turn to the discussion of the instrumentalist doctrine, which with its assertion that theories are mere instruments intends to deny the claim that anything like a real world is described by them.
I accept the view (implicit in the classical or correspondence theory of truth??) that we should call a state of affairs 'real' if, and only if, the statement describing it is true. But it would be a grave mistake to conclude from this that the uncertainty of a theory, i. e. its hypothetical or conjectural character, diminishes in any way its implicit claim to describe something real. For every statement s is equivalent to a statement claiming that s is true. And as to s being a conjecture, we must remember that, first of all, a conjecture may be true, and thus describe a real state of affairs. Secondly, if it is false, then it contradicts some real state of affairs (described by its true negation). Moreover, if we test our conjecture, and succeed in falsifying it, we see very clearly that there was a reality - something with which it could clash.
Our falsifications thus indicate the points where we have touched reality, as it were. And our latest and best theory is always an
?? See A. Tarski's work on the Concept of Truth (Der Wahrheitsbegriff, etc., Studia Philosophica, 1935, text to note 1: 'true = in agreement with reality'). (See the English translation in A. Tarski, Logic, Semantics, Metamathematics, 1956, p. 153; the translation says 'corresponding' where I translated 'in agreement'.) The following remarks (and also the penultimate paragraph before the one to which this footnote is appended) have been added in an attempt to answer a friendly criticism privately communicated to me by Professor Alexander Koyré, to whom I feel greatly indebted.
I do not think that, if we accept the suggestion that 'in agreement with reality' and 'true' are equivalent, we are seriously in danger of being led up the path to idealism. I do not propose to define 'real' with the help of this equivalence. (And even if I did, there is no reason to believe that a definition necessarily determines the ontological status of the term defined.) What the equivalence should help us to see is that the hypothetical character of a statement - i. e. our uncertainty as to its truth - implies that we are making guesses concerning reality.
attempt to incorporate all the falsifications ever found in the field, by explaining them in the simplest way; and this means (as I have tried to show in The Logic of Scientific Discovery, section 31 to 46) in the most testable way.
Admittedly, if we do not know how to test a theory we may be doubtful whether there is anything at all of the kind (or level) described by it; and if we positively know that it cannot be tested, then out doubts will grow; we may suspect that it is a mere myth, or a fairy-tale. But if a theory is testable, then it implies that events of a certain kind cannot happen; and so it asserts something about reality. (This is why we demand that the more conjectured a theory is, the higher should be its degree of testability.) Testable conjectures or guesses, at any rate, are thus conjectures or guesses about reality; from their uncertain or conjectural character it only follows that our knowledge concerning the reality they describe is uncertain or conjectural. And although only that is certainly real which can be known with certainty, it is a mistake to think that only that is real which is known to be certainly real. We are not omniscient and, no doubt, much is real that is unknown to us all. It is thus indeed the old Berkeleian mistake (in the form 'to be is to be known') which still underlies instrumentalism.
Theories are our own inventions, our own ideas; they are not forced upon us, but are our self-made instruments of thought: this has been clearly seen by the idealist. But some of these theories of ours can clash with reality; and remind us of the fact that our ideas may be mistaken. And this is why the realist is right.
Thus I agree with essentialism in its view that science is capable of real discoveries, and even in its view that in discovering new worlds our intellect triumphs over our sense experience. But I do not fall into the mistake of Parmenides - of denying reality to all that is colourful, varied, individual, indeterminate, and indescribable in our world.
Since I believe that science can make real discoveries I take my stand with Galileo against instrumentalism. I admit that our discoveries are conjectural. But this is even true of geographical explorations. Columbus' conjectures as to what he had discovered were in fact mistaken; and Peary could only conjecture - on the basis of theories - that he had reached the Pole. But these elements of conjecture do not make their discoveries less real, or less significant.
There is an important distinction which we can make between two kinds of scientific prediction, and which instrumentalism cannot make, a distinction which is connected with the problem of scientific discovery. I have in mind the distinction between the prediction of events of a kind which is known, such as eclipses or thunderstorms on the one hand and, on the other hand, the prediction of new kinds of events (which the physicist calls 'new effects') such as the prediction which led to the discovery of wireless waves, or of zero-point energy, or to the artificial building up of new elements not previously found in nature.
It seems to me clear that instrumentalism can account only for the first kind of prediction: if theories are instruments for prediction, then we must assume that their purpose must be determined in advance, as with other instruments. Predictions of the second kind can be fully understood only as discoveries.
It is my belief that our discoveries are guided by theory, in these as in most other cases, rather than that theories are the result of discoveries 'due to observation'; for observation itself tends to be guided by theory. Even geographical discoveries (Columbus, Franklin, the two Nordenskjölds, Nansen, Wegener, and Heyerdahl's Kon-Tiki expedition) are often undertaken with the aim of testing a theory. Not to be content with offering predictions, but to create new situations for new kinds of tests: this is a function of theories which instrumentalism can hardly explain without surrendering its main tenets.
But perhaps the most interesting contrast between the 'third view' and instrumentalism arises in connection with the latter's denial of the descriptive function of abstract words, and of disposition-words. This doctrine, by the way, exhibits an essentialist strain within instrumentalism - the belief that events or occurrence or 'incidents' (which are directly observable) must be, in a sense, more real than dispositions (which are not).
The 'third view' of this matter is different. I hold that most observations are more or less indirect, and that it is doubtful whether the distinction between directly observable incidents and whatever is only indirectly observable leads us anywhere. I cannot but think that it is a mistake to denounce Newtonian forces (the 'causes of acceleration') as occult, and to try to discard them (as has been suggested) in favour of accelerations. For accelerations cannot be observed any more directly than forces; and they are just as dispositional: the statement that a body's velocity is accelerated tells us that the body's velocity in the next second from now will exceed its present velocity.
In my opinion all universals are dispositional. If 'breakable' is dispositional, so is 'broken', considering for example how a doctor decides whether a bone is broken or not. Nor should we call a glass 'broken' if the pieces would fuse the moment they were put together: the criterion of being broken is behaviour under certain conditions. Similarly, 'red' is dispositional: a thing is red if it is able to reflect a certain kind of light - if it 'looks red' in certain situations. But even 'looking red' is dispositional. It describes the disposition of a thing to make onlookers agree that it looks red.
No doubt there are degrees of dispositional character: 'able to conduct electricity' is dispositional in a higher degree than 'conducting electricity now' which is still very highly dispositional. These degrees correspond fairly closely to those of the conjectural or hypothetical character of theories. But there is no point in denying reality to dispositions, not even if we deny reality to all universals and to all states of affairs, including incidents, and confine ourselves to using that sense of the word 'real' which, from the point of view of ordinary usage, is the narrowest and safest: to call only physical bodies 'real', and only those which are neither too small nor too big nor too distant to be easily seen and handled.
For even then we should realize (as I wrote twenty years ago??) that
'every description uses... universals; every statement has the character of a theory, a hypothesis. The statement, "Here is a glass of water," cannot be (completely) verified by any sense-experience, because the universals which appear in it cannot be correlated with any particular sense-experience. (An "immediate experiences" is only once "immediately given"; it is unique.) By the word '"glass", for example, we denote physical bodies which exhibit a certain law-like behaviour; and the same holds of the word "water".'
I do not think that a language without universals could ever work; and the use of universals commits us to asserting, and thus (at least) to conjecturing, the reality of dispositions - though not of ultimate and inexplicable ones, that is, of essences. We may express all this by saying that the customary distinction between 'observational terms' (or 'non-theoretical terms') and theoretical terms is mistaken, since all terms are theoretical to some degree, though some are more theoretical than others; just as we said that all theories are conjectural, though some are more conjectural than others.
But if we are committed, or at least prepared, to conjecture the reality of forces, and of fields of forces, then there is no reason why we should not conjecture that a die has a definite propensity (or disposition) to fall on one or another of its sides; that this propensity can be changed by loading it; that propensities of this kind may change continuously; and that we may operate with fields of propensities, or of entities which determine propensities. An interpretation of probability on these lines might allow us to give a new physical interpretation to quantum theory - one which differs from the purely statistical interpretation, due to Born, while agreeing with him that probability statements can be tested only statistically.?? And this interpretation may, perhaps, be of some little help in our efforts to resolve those grave and challenging difficulties in quantum theory which today seem to imperil the Galilean tradition.??
?? See my L. Sc. D., end of section 25; see also new appendix *x, (1) to (4), and ch. 1 of the present volume; also ch. 11 section v, text to notes 58-62.
?? Concerning the propensity theory of probability, see my papers in Observation and Interpretation, ed. S. Körner 1957, pp. 65 ff., and in the B. J. P. S. 10, 1959, pp. 25 ff.
?? (Added 1980.) If my memory does not deceive me, then this paragraph is the first statement of the propensity interpretation that I published (in 1956; it was written in 1953, though footnote 35 was, not, of course, in the original version of this chapter).
- "Conjectures and Refutations, The Growth of Scientific Knowledge", Karl R. Poppe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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