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철학적 문제들의 본질과
과학에서의 그 문제들의 뿌리
1
나의 출발점으로서 영국 철학의 현재 위치를 생각하기로 결정한 것은 좀 망설인 다음이었다. 그 까닭은 과학자나 철학자의 역할이 그가 다른 철학자들이 하고 있거나 아마도 할 것에 대하여 말하는 것이라기보다는 과학적이거나 철학적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라고 내가 믿기 때문이다. 과학적이거나 철학적인 문제를 해결하려는 시도는, 정직하고 헌신적인 시도라면, ‘무엇이 과학인가?’나 ‘무엇이 철학인가?’와 같은 그런 문제를 토론하는 것보다 더 중요하게 나에게 느껴진다. 그리고 우리가 후자(後者) 질문을, 우리가 그래야 하는 바와 같이, ‘철학적 문제의 특징은 무엇인가?’라는 다소 더 나은 형태로 표현한다 할지라도, 나는 한 사람으로서 그것에 관하여 관심이 없다; 나는 그것이, 심지어 모든 토론이나 모든 비판은 논증을 초월하는 ‘상정(想定)’이나 ‘가정(假定)’으로부터 항상 출발해야 하는지의 문제와 같은 그런 사소한 철학 문제와 비교하여도, 거의 무게가 없다고 틀림없이 느낀다.?
‘철학적 문제의 특징은 무엇인가?’를 ‘무엇이 철학인가?’라는 다소 더 나은 형태로서 묘사할 때 나는 철학의 본질에 관한 현재의 논란의 무의미성에 대한 이유 한 가지를 암시하고 싶었다: ‘철학’이나 ‘철학적 활동’과 같은 실재가 있다는, 그리고 그것은 어떤 특징이나 본질이나 ‘본성’ 가지고 있다는, 순진한 믿음. 물리학이나 생물학이나 고고학 같은 그런 것이 있다는, 그리고
? 나는 이것을 사소한 문제라고 부르는데 그 이유는, 그 문제를 야기하는 (‘상대주의적’) 교설을 논박함으로써, 그것이 쉽게 해결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 문제에 대한 답변은 부정적이다. 나의 저서 열린사회와 그 적들 2권, 1962년 4판에 추가된 부록 참조.)
1952년 4월 28일 모임에서 영국 과학사학회 과학 철학부회(지금은 영국 과학 철학회)에서 발표한 의장 연설; 영국 과학 철학 저널(The British Journal for the Philosophy of Science), 3, 1952년에 최초로 실렸음.
이 ‘학문들’이나 ‘학문의 분야들’은 그것들이 탐구하는 주제에 의하여 구별이 가능하다는 믿음은, 이론이 그 자체의 주제에 대한 정의(定義)로부터 나와야 한다고 사람들이 믿었던 시절의 잔재로 나에게 보인다.? 그러나 주제는, 혹은 사물의 종류는, 학문의 분야들을 구분하기 위한 토대를 구성하지 않는다고 나는 주장한다. 학문의 분야들은 부분적으로 역사적인 이유들과 (가르침과 임용의 조직과 같은) 행정적 편리에 관한 이유들 때문에, 그리고 부분적으로 우리가 지닌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하여 우리가 구축하는 이론들은 자라서 통합된 체계가 되는 경향을? 띠기 때문에, 구분된다. 그러나 이 모든 분류와 구분은 비교적 중요하지 않고 피상적인 일이다. 우리는 어떤 주제를 탐구하는 학생들이 아니라 문제를 탐구하는 학생들이다. 그리고 문제들은 주제나 학문의 분야의 경계선들을 뚫고 들어올지도 모른다.
이 사실이 어떤 사람들에게 명백하게 보일지라도, 이 사실은 우리의 현재 토론에 매우 중요하여, 보기로서 그 사실을 예시할 가치가 있다. 어떤 지역에서 석유나 우라늄의 매장량을 발견하는 가능성을 평가하는 것과 같은 그런 지질학자의 문제가 보통 수학적이고 물리학적이고 화학적으로서 분류되는 이론과 기술의 도움을 받아 해결되어야 한다는 언급을 할 필요는 나에게 없다. 그러나 핵물리학과 같은 심지어 더 ‘기초적인’ 과학이, 그 가장 추상적이고 근본적인 이론들 중 한 가지에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지질학적 탐사와 지질학적 이론 및 기술을 이용해야 할 것임은 덜 명백하다; 예를 들어 홀수나 짝수의 원자수를 지닌 원자의 상대적 안정성이나 불안정성에 관한 예측을 시험하는 문제.
나는 많은 문제들이, 그 문제들의 해답에 가장 다양한 학문의 분야들이 포함되어 있다 할지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의미에서 전통적 학문분야의 한 가지에 ‘속한다’는 것을 인정할 준비가 완전히 되어 있다; 방금 언급된 두 가지 문제들은 분명히 각각 지질학과 물리학에 ‘속한다’. 이것은 그 문제들 각자가 논의되고 있는 학문분야에 특징적인 토론으로부터 발생하기 때문이다. 각 문제는 어떤 이론에 대한 토론으로부터, 혹은 이론과 관련된 경험적 시험으로부터 발생한다; 그래서 이론들은, 주제와 반대로, (도전과 변화와 성장을 겪고 있는 다소 느슨한 이론의 집단으로서 아마도 묘사될) 학문의 분야를 구성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학문의 분야로 분류하는 것이 상대적으로 중요하지 않다는, 그리고 우리는 학문의 분야를 탐구하는 학생들이 아니라 문제들을 탐구하는 학생들이라는, 나의 요점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그러나 철학적 문제들이 있는가? 나의 출발점인 영국 철학의 현재 위치는, 내가 믿기에, 어떤 문제도 없다는 고(故) 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Ludwig Wittgenstein) 교수의 교설에서 유래한다; 모든 진정한 문제는 과학적 문제라는 교설; 주장되는 철학의 문제는 사이비-문제라는 교설; 주장되는 철학의 제언이나 이론들은 사이비-제언이거나 이론들이라는 교설; 그것들은 거짓이
? 이 관점은 내가 ‘본질주의(essentialism)'이라고 불렀던 관점의 한 부분이다. 예를 들어 나의 저서 열린사회와 그 적들 2장과 11장, 혹은 역사주의의 빈곤 10부 참조.
? 이 경향은 이론적 설명은 그 설명들이 독립적 증거에 의하여 잘 지지를 받을수록 더 만족스럽다는 원리에 의하여 설명될 수 있다. 그 까닭은 상호적으로 독립적인 증거에 의하여 지지를 받기 위하여, 이론은 포괄적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아니라 (그것들이 거짓이라면 그것들의 부정[否定]은 참인 제언이거나 참인 이론이리라) 엄밀하게 의미 없는 단어의 결합으로?, 바르게 말하기를 아직 배우지 못한 아이의 조리 없는 지껄임처럼 의미가 없다?.
결과적으로, 철학은 어떤 이론도 담을 수 없다. 철학의 참된 본질은, 비트겐슈타인(Wittgenstein)에 따르면, 이론의 본질이 아니라 활동(activity)의 본질이다. 모든 진정한 철학의 과제는 철학적 횡설수설을 폭로하는 것이고, 사람들에게 의미 있는 말을 하도록 가르치는 것이다.
나의 계획은 비트겐슈타인의 이 교설을? 나의 출발점으로 잡는 것이다. 나는 그것을 (iii부에서) 설명하도록 노력할 것이다; 어느 정도 그 교설을 옹호하려고 노력할 것이다; 그리고 (iii부에서) 그 교설을 비판하려고 노력할 것이다. 그리고 나는 이 모든 것을 (iv부에서 xi부까지) 과학적 개념의 역사에서 나온 몇 가지 사례들로써 예시할 것이다.
그러나 이 계획을 실행하기 전에 철학자는 철학화(philosophize)해야 한다는 나의 신념을 재확인하고 싶다; 철학자는 철학에 관해서 말하기 보다는 철학적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비트겐슈타인(Wittgenstein)의 교설이 옳다면, 내가 의미하는 바에서 아무도 철학화를 할 수 없다. 이것이 나의 견해라면, 나는 철학을 포기할 것이다. 그러나 우연히도 나는 특정 철학적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나는 그 철학적 문제들이 ‘철학적 문제들’이라고 ‘올바르게’ 지칭되는지에 그다지 개의치 않는다), 내가 - 적고, 힘든 작업을 통해서 만이라 할지라도 - 그 문제들의 해결에 기여할 것이라는 희망에 의하여 고무되기도 한다. - 철학화를 하는 대신에 - 여기서 철학에 관하여 말하는 것에 대하여 내가 지닌 유일한 구실은, 이 연설을 위하여 나의 계획을 실행하면서 결국 다소 철학화를 하기 위하여 기회가 나타나리라는 나의 희망이다.
? ‘모든 동물은 평등하지만 어떤 동물은 다른 동물들보다 더 평등하다’는, (요점이 없다[pointless]는 의미에서) 오웰(Orwell)이 쓴 동물농장(Animal Farm)의 문맥에서 분명히 결코 의미가 없다는 것은 아닐지라도, 러셀과 비트겐슈타인의 전문적 의미에서 ‘무의미’할 표현의 탁월한 보기이다. 나중에 오웰이, 비트겐슈타인의 전문적 의미에서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가 무의미하게 되어버릴, 언어사용을 강요하면서 그 언어도입 가능성을 고려했던 것은 흥미롭다.
? 비트겐슈타인이 자신의 논리 철학 논고(Tractatus)를 무의미하다고 묘사했기 때문에 (다음 주석 또한 참조) 그는, 적어도 암시적으로, 폭로적이거나 중요한 무의미한 말과 가치 없거나 하찮은 무의미한 말을 구별한다. 그러나 이것은 내가 논의하고 있는 그의 주요 교설인 철학적 문제의 부재(non-existence)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비트겐슈타인의 다른 교설에 관한 토론은 나의 저서 열린사회와 그 적들의 주석에서, 특히 11장의 주석 26, 46, 51과 52에서 발견될 수 있다.)
? 이 교설의 약점을 즉시 발견하는 일은 쉽다: 그 교설 자체는, 사실이어서 무의미하지 않다고 주장하면서, 철학적 이론이라고 일컬어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비판은 아마도 다소 싸구려이다. 그 비판은 아마도 적어도 두 가지 점에서 반박될 것이다. (1) 그 교설은 정말로 활동(activity)으로서가 아니라 교설로서 무의미하다고 사람들은 아마도 말할 것이다 (이것은 비트겐슈타인의 견해인데, 그는 자신의 논리 철학 논고(Tractatus Logico-Philosophicus)의 말미에서 그 책을 이해한 사람은 누구나 마지막에 그 책 자체가 무의미해서, 바라는 높이에 도달하기 위하여 사용한 다음에 사다리처럼 틀림없이 버릴 것을 틀림없이 깨닫는다고 말했다.) (2) 그 교설이 철학적이 아니라 경험적이 교설이라고 아마도 사람들은 말할 것이다; 그 교설은 철학자들에 의하여 제시된 모든 겉으로 보이는 ‘이론들’은 실제로 비문법적이라는 역사적 사실을 서술한다고; 그 이론들은 형식화되어 보이는 저 언어들에 내재한 규칙들에 사실상 일치하지 않는다고; 그 교설은 이 결점을 교정하지 못할 것으로 판명될 것이라고; 그리고 그 이론들은 바르게 표현하려는 모든 시도는 그 이론들이 지닌 철학적 특성의 실종을 초래했다고 (그래서, 예를 들어, 그 이론들을 경험적 상투어나 거짓 서술로서 폭로했다). 이 두 가지 반론은, 내가 믿기에, - 비트겐슈타인의 용어를 사용해서 - 이 주석에서 언급된 비판의 종류에 의하여 이런 방식으로 정말로 ‘공격불가능’이 되는, 그 교설이 지닌 위협받는 일관성을 정말로 구해낸다. (다음 두 번째 주석 또한 참조.)
II
헤겔 철학의 발흥 이래 과학과 철학 사이에는 위험한 분열이 있었다. 철학자들은 - 내가 믿기에 타당하게 - ‘사실에 대한 지식 없이 철학화 하는 것’에 대하여 비난을 받았고, 그들의 철학은 ‘단지 환상, 심지어 우둔한 환상’으로서 묘사되었다.? 헤겔 철학이 영국과 유럽 대륙에서 중요한 영향을 끼치고 있었지만, 그 철학에 대한 반대와 그 철학이 지닌 자만에 대한 경멸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헤겔 철학의 몰락은 자신에 앞선 라이프니츠(Leibniz), 버클리(Berkeley), 그리고 칸트(Kant)처럼 과학에 대하여, 특히 수학에 대하여 충분한 지식을 지니고 있었던 한 철학자에 의하여 초래되었다. 나는 버트런드 러셀(Bertrand Russell)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러셀(Russell)은 자신의 유명한 유형 이론과 밀접하게 연관된 분류법(classification)의 저자이기도 한데, 그 이론은 철학에 대한 비트겐슈타인(Wittgenstein)의 관점의 토대이다: 언어의 표현을 다음과 같이 분류한다.
(1) 참인 서술
(2) 거짓 서술
(3) 무의미한 표현들, 그중에는 단어들의 서술 같은 나열인 소위 ‘사이비-서술들’이 있다.
러셀(Russell)은 자신이 발견한 논리적 역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이 구분을 사용했다. 그의 해결책을 위하여 특히 (2)와 (3)을 더욱 특별하게 구분하는 일이 필수적이었다. 평범한 말로 ‘3 곱하기 4는 173이다,’나 ‘모든 고양이는 암소이다’와 같은 표현들은 무의미하다고 우리는 아마도 말할 것이다. 그러나 러셀은 ‘3 곱하기 4는 암소다,’나 ‘모든 고양이는 173이다’와 같은 그런 표현들에 대하여 ‘무의미하다’는 용어를 사용했는데, 다시 말해서 거짓 서술로서 묘사하지 않는 것이 더 나은 종류의 표현들에 대해서이다. 유의미하지만 거짓인 서술의 부정(否定)은 항상 사실인 경향이 있기 때문에 그런 표현들은 묘사되지 않는 것이 더 낫다. 그러나 ‘모든 고양이는 173이다’라는 사이비-서술의 표면적인 부정(否定)은 ‘어떤 고양이들은 173이 아니다’이고, 이것은 원래 서술만큼 불만족스러운 사이비-서술이 따름이다. (참이거나 거짓인) 합당한 서술의 부정(否定)이 (각각, 거짓이거나 참인) 합당한 서술인 것과 꼭 마찬가지로 사이비-서술의 부정(否定)은 다시 사이비-서술이다.
이 구분으로 인하여 러셀(Russell)은 (그가 말하는 바, 무의미한 사이비-서술이었던) 역설(逆說)들을 제거할 수 있었다. 비트겐슈타인(Wittgenstein)은 더 멀리 나아갔다. 철학자들이, 특히 헤겔주의 철학자들이 말하는 것이 논리학의 역설(逆說)과 다소 유사하다는 느낌에 의하여 영향을 받아, 모든 철학이 엄밀하게 무의미하다고 비난하기 위하여 그는 러셀(Russell)의 구분을 사용했다.
결과적으로 진정한 철학적 문제는 있을 수가 없었다. 주장되는 철학적 문제들 전부는 네 갈래로 분류될 수 있었다:? (1) 논리적이거나 수학적
? 두 가지 인용구는 과학적 비판가의 말이 아니라, 반어적으로, 그의 선두주자이자 한 때 친구였던 쉘링(Schelling)의 자연철학에 대한 헤겔 자신의 특징짓기이다. 나의 저서 열린사회와 그 적들 12장 주석 4와 원문 참조.
? 비트겐슈타인은 내가 그를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 (내가 ‘철학적 문제들은 있는가? 에 관한 논문을 읽던 때인, 캠브리쥐 도덕학 클럽의 격렬한 모임을 주재하고 있던, 1946년에) 여전히 여기에 묘사된 형태로 철학적 문제가 부재한다는 교설을 유지했다. 그의 제자 몇 명에 의하여 사사롭게 유통되던 그의 미출간 원고를 내가 보지 못했기 때문에, 나는 여기서 내가 그의 ’교설‘이라고 부르는 것을 그가 수정했는지 의아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가르침의 가장 근본적이고 영향력이 있는 부분인 이점에 관하여 그의 견해가 변하지 않았음을 나는 발견했다.
제언에 의하여 답변이 될, 순전히 논리적이거나 수학적이어서 철학적이 아닌 문제들; (2) 경험적 과학에 속하는 어떤 서술에 의하여, 사실적이어서 다시 철학적이 아닌 문제들; (1)과 (2)의 결합이어서, 다시 철학적이 아닌 문제들; 그리고 (4) ‘모든 고양이는 173인가?’나, ‘소크라테스는 동일한가?’나, ‘보이지 않고, 만져지지 않으며 분명히 완전히 알 수 없는 소크라테스가 존재하는가?’와 같은 무의미한 사이비-문제들.
러셀(Russell)의 유형 이론을 채택하는 도움을 받아서 철학을 (그리고 신학[神學]) 제거하는 비트겐슈타인의 생각은 교묘하고 독창적이었다 (그리고 그 생각과 밀접하게 닮은 콩트[Comte]의 실증주의보다 훨씬 더 급진적이었다).? 이 생각은, 진정한 철학적 문제란 없다는 그래서 철학자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전통적 철학에 의하여 제시된 언어적 수수께끼를 밝혀서 해체하는 것이라는 그의 믿음을 계승한, 언어 분석가들의 강력한 현대적 학파의 영감이 되었다.
그 문제에 대한 나의 관점은, 해결할 진정한 철학적 문제를 내가 가지고 있기만 하면 나는 지속적으로 철학에 관심을 가질 것이라는 것이다. 나는 문제없이 철학의 매력을 이해하지 못한다. 물론 나는 많은 사람들이 횡설수설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의 횡설수설을 폭로하는 것이 사람들의 임무가 (불쾌한 임무) 되어야 한다는 것은 상상이 가능한데, 그 이유는 그 횡설수설이 위험한 말이 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이 그다지 훌륭한 의미가 아니면서, 분명히 훌륭한 문법이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우 흥미롭고 자극적이며, 아마도 다른 사람들이 말하는 훌륭한 의미보다 더 들을 가치가 있는 말들을 했다고 나는 믿는다. 특히 그 초기 형태에서 의심할 바 없이 비트겐슈타인(Wittgenstein)의 (그리고 다른) 기준에 의하여 완전히 반어적이고 터무니없는 미적분학을 나는 언급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수백 년 동안의 위대한 수학적 노력의 결과로 합당하게 잘 기초가 잡혔다; 그러나 그 기초는 심지어 바로 이 순간에도 여전히 밝혀질 필요가 있고 밝혀지는 과정에 있다.?? 이런 상황에서 비트겐슈타인(Wittgenstein)의 초기 추종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 것은 수학이 지닌 분명한 절대적 정확성과 철학적 언어의 모호함 및 부정확성 사이의 대조였음을 우리는 아마도 기억할 것이다.
? 나의 저서 열린사회와 그 적들 11장의 주석 51 (2) 참조
?? 나는 단조롭게 진행된 유리수열을 G. 크라이젤(Kreisel)이 구성한 것을 (기호 논리학 저널 17, 1952년, 57)언급하고 있는데, 그 수열의 모든 항은 실제로 계산될 수 있지만 계산 가능한 한계를 가지지 않는다 - 볼차노(Bolzano)와 바이어슈트라스(Weierstrass)의 고전적 정리(定理: theorem)의 표면적 해석으로 보이는 것과 대조적이지만, 이 정리(定理: theorem)에 대한 브루워(Brouwer)의 의심과는 일치하는 듯 보인다.
그러나 자신의 무기를 미적분학의 선구자들에 대항하여 사용하는 비트겐슈타인(Wittgenstein)이라는 사람이 있어서 그 선구자들의 동시대적 비판자들이 (근본적으로 옳았던 버클리[Berkeley]와 같은) 실패한 그 선구자들의 횡설수설을 제거하는 데에 성공했다면, 그는 사상사(思想史)에서 가장 매혹적이고 가장 철학적으로 중요한 발전들 중 하나를 질식사시켰을 것이다. 비트겐슈타인(Wittgenstein)은 예전에 이렇게 썼다: ‘사람이 말할 수 없는 곳에서는, 그곳에 대하여 그 사람은 침묵해야 한다.’ 내가 옳게 기억하다면 다음과 같이 대답한 사람은 어윈 슈뢰딩거(Erwin Schrödinger)였다: ‘그러나 말이 가치를 갖게 되는 것은 여기뿐이다.’??a 미적분의 - 그리고 아마도 슈뢰딩거 자신의 이론의 - 역사는?? 그를 지지한다.
의심할 바 없이 우리 모두는 가능한 한 명확하게, 정확하게, 간단하게, 그리고 직접적으로 말하도록 우리 자신을 훈련시켜야 한다. 그러나 과학의 고전이나 수학의 고전이나, 정말로 언어 분석의 기술을 솜씨 있게 적용함으로써, 많은 무의미한 사이비-제언들과 어떤 사람들이 아마도 ‘동어반복’이라고 부를 것들을 포함하고 있는 것으로 밝혀질 수 없는 읽을 가치가 있는 책은 없다고 나는 믿는다.
게다가, 심지어 비트겐슈타인(Wittgenstein)이 러셀의 이론을 처음 채택했을 때 논리적 실수에 근거했다고 나는 믿는다. 현대 논리학의 관점에서 보면, 관습과 문법에 대한 전통적 규칙이 준수된다면 평범하고 자연적으로 성장한 언어 내부에는 (인위적인 계산 체계와 반대로) 사이비 서술들이나 유형 착오들이나 범주-오류들에 관한 언급이 더 이상 정당화될 수 없는 듯하다. 비밀 단체에 가입한 태도로 우리가 무의미한 말을 사용한다거나 우리가 터무니없는 말을 한다고 우리에게 말하는 실증주의자는 자신이 무엇을 말하는지 엄밀하게 알지 못한다고 사람들은 심지어 말할 것이다 - 그는 역시 알지 못하는 사람들로부터 들었던 것을 반복할 따름이다. 그러나 이것은 내가 여기서 다룰 수 없는 기술적인 문제를 제기한다. (그러나 그것은 아래 11장부터 14장에서 다루어진다.)
III
나는 비트겐슈타인(Wittgenstein)의 견해를 방어하여 말을 하겠다고 약속했다. 우선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무의미한 장광설로서 옳게 비판될 많은 철학적 글이 (특히 헤겔학파 안에) 있다는 것이다; 두 번째로, 이런 종류의 무책임한 글은, 적어도 당분간, 비트겐슈타인(Wittgenstein)과 언어 분석가들의 영향에 의하여 억제 당했다 (이런 점에서 가장 훌륭한 영향력은 러셀[Russell]이 본보기였을 개연성이 있는데, 그는 자신의 글이 지닌 비견될 수 없는 매력과 명징성에 의하여 내용의 미묘함은 문체의 명료성 및 겸손함과 양립할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그러나 나는 더 많은 것을 인정할 준비가 되어 있다. 비트겐슈타인(Wittgenstein)의 관점을 부분적으로 방어하여, 나는 다음 두 가지 명제를 채택할 준비가 되어 있다.
나의 첫 번째 명제는 모든 철학은, 특히 모든 철학 ‘학파’는 그들의 문제들이 실제로 사이비-문제들과 구분이 불가능해져서 그들의 불성실한 말이, 따라서, 무의미한 횡설수설과 구분될 수 없게 되는 정도로 퇴보하기 쉽다는 것이다. 이것은, 내가 증명하려고 노력할 것인데, 철학적 근친교배의 결과이다. 또한 철학 학파의 퇴보는 철학 밖에서 출현하는 문제들에 의하여 - 예를 들어 수학이나, 우주론이나, 정치학이나, 종교나, 사회생활에서 - 강제적으로 철학화 하지 않고도 사람은 철학화 할 수 있다는 그릇된 믿음의 결과이다.
??a 이 논문이 최초로 발간된 후에 슈뢰딩거는 자신이 이렇게 말한 것을 기억하지 못한다고, 그리고 자신이 그렇게 말한 것을 믿을 수 없다고 나에게 말했다; 그러나 그는 그 말을 좋아했다. (1964년에 추가: 그 후 나는 그 글을 쓴 사람이 나의 오랜 친구인 프란츠 우어바흐[Franz Urbach]였음을 발견했다.)
?? 막스 보른(Max Born)이 자신의 유명한 확률 해석을 제시하기 전에, 슈뢰딩거의 파동 방정식은 무의미했다고 어떤 사람들은 아마도 주장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나의 견해가 아니다.)
다시 말해서 나의 첫 번째 명제는 이것이다. 진정한 철학적 문제는 항상 철학 외부의 시급한 문제에 뿌리박고 있어서, 이 뿌리들이 썩으면 그 문제들도 죽는다. 그 문제들을 해결하려는 노력에서 철학자들은 철학적 방법이나 기술이나 철학적 성공으로 향하는 확실한 열쇠처럼 보이는 것을 추구하기 쉽다.?? 그러나 그런 방법이나 기술은 존재하지 않는다; 철학에서 방법은 중요하지 않다; 이성적으로 토론될 수 있는 결과를 낳는다면 어떤 방법도 합당하다. 중요한 것은 방법이나 기술이 아니라 문제들에 대한 감수성과 그 문제들에 대한 격렬한 정열; 혹은 그리스인들이 말한 바와 같이, 경이(驚異)에 관한 재능 (the gift of wonder).
이 사람들은 문제를 해결하려는 충동을 느끼는, 그들이 자신들의 체계로부터 제거해야 하는 무질서와 같이 그들에게 문제가 사실적이 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스스로를 특정 방법이나 기술에 묶어둔다 할지라도 기여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런 충동을 느끼지 않는, 심각하고 시급한 문제를 가지고 있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행하는 방식으로 적용을 하며 그들에게 철학은 탐구(search)라기보다는 (여러분이 원하는 여하한 통찰이나 기술의) 응용(application)인 다른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철학을 사이비-문제들과 언어적 수수께끼들이라는 수렁으로 유혹한다; 사이비-문제들을 사실적 문제들로 우리들에게 제시함으로써 이거나 (비트겐슈타인[Wittgenstein]이 보았던 위험), 그들이 올바르거나 그르게 사이비-문제들이나 ‘수수께끼들’로 여기는 것을 폭로하는 끊임없고 무의미한 임무에 집중하도록 우리를 설득함으로써 (비트겐슈타인[Wittgenstein]이 빠진 함정).
나의 두 번째 명제는 철학을 가르치는 표면적 방법으로 보이는 것이 비트겐슈타인(Wittgenstein)의 묘사에 답하는 철학을 초래하기 쉽다는 것이다. 내가 ‘철학을 가르치는 표면적 방법’으로 의미하는 것은, 그리고 유일한 방법으로 보일 것은 (정치에 관해서 뿐만 아니라 과학의 수학적, 우주론적, 그리고 다른 아이디어의 역사를 의식하지 못한다고 우리가 생각하는) 초보자들에게 읽을 위대한 철학자들의 작품을 주는 방법이다; 가령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데카르트(Descartes)와 라이프니츠(Leibniz), 로크(Locke), 버클리(Berkeley), 흄(Hume), 칸트(Kant) 그리고 밀(Mill)의 작품들. 그런 독서 과정의 효과는 무엇일까? 놀라울 정도로 미묘하고 방대한 추상들의 새로운 세상이 독자 앞에 펼쳐진다; 극도로 높고 어려운 수준의 추상들. 때때로 이해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독자가 그 추상들이 무엇과 관련되는지를 알 수 없어서 독자에게 무관한 듯 보이기도 하는 사고(思考)와 논증이 독자 앞에 놓인다. 그러나 이들이 위대한 철학자라는 것을, 이것이 철학의 길이라는 것을 학생은 알고 있다. 그리하여 학생은 그 사람들의 사고방식이라고 자신이 믿는 (우리가 알게 될 것과 같이 그릇되게) 것에 자신들의 생각을 맞추는
?? 모방자들에게 항상 ‘스승’은 비밀스러운 방법이나 속임수의 도움을 받아서 자신의 일을 한다고 믿는 경향이 있었다는 것은 매우 흥미롭다. J. S. 바흐(Bach)의 시대에 어떤 음악가들은 바흐가 푸가 주제를 구성하는 데에 비밀스런 공식을 소유하고 있다고 믿었다고 보고된다.
(내가 아는 한) 유행했던 모든 철학들이 자체의 지식 분야에 철학적 결과를 낳는 일종의 방법을 제공했음을 주목하는 일 또한 흥미롭다. 이것은 그 신봉자인 우리들에게 모든 것의 - 영혼, 우주, 그리고 대학 - 본질이나 특성이나 개념에 관한 논문을 작성하라고 가르치는 헤겔의 본질주의에 대해서도 사실이다; 그것은 후설(Husserl)의 현상학에 대해서도, 실존주의에 대해서도, 또한 언어 분석에 대해서도 사실이다.
?? 길버트 라일(Gilbert Ryle) 교수의 말을 언급하고 있는데, 그는 자신의 저서 생각의 개념(Concept of Mind) 10쪽에서 이렇게 말한다: ‘주로 나는 내 체계에서 몇 가지 무질서를 제거하려노력 중이다.’
노력을 기울이는 경향이 있다. 학생은 그 철학자들의 기이한 언어를 사용하려고, 그 철학자들이 하는 논증의 비틀린 나선에 일치하여 심지어 자신을 그 나선의 기묘한 매듭에 묶어 놓으려고 노력하는 경향이 있다. 어떤 사람들은 이런 기교를 피상적인 방법으로 배울 것이고, 다른 사람들은 진정으로 매혹당한 중독자기 되기 시작할 것이다. 그러나 자신이 노력하여 궁극적으로 비트겐슈타인(Wittgenstein)의 결론으로서 묘사될 것에 도달한 사람을 우리는 존경해야 한다고 나는 느낀다: ‘나는 누구만큼 허튼 소리를 잘 배웠다. 그 소리는 교묘하고 매혹적이다. 사실상 그 소리는 위험스럽게 매혹적이다; 그 까닭은 그 문제에 관한 단순한 진실은 그 소리가 하찮은 것에 관한 야단법석이기 때문이다 - 많은 횡설수설일 뿐.’
나는 이제 그런 결론이 매우 잘못되었다고 믿는다; 그러나 그 결론은 여기에 묘사된 철학을 가르치는 표면적 방법의 거의 불가피한 결과라고 나는 주장한다. (특별히 재능이 있는 어떤 학생들이 위대한 철학자들의 작품 속에서 내 말이 지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 그리고 자기기만에 빠지지 않고 - 발견할는지도 모른다는 것을 물론 나는 부인하지 않는다.) 그 까닭은 이 위대한 철학자들을 고무시켰던 철학 외적인 문제들을 (수학적, 과학적, 도덕적, 그리고 정치적 문제들) 발견할 학생이 지닌 기회는 정말로 매우 적기 때문이다. 대체로 이 문제들은 예를 들어 과학적 개념들의 역사를, 특히 문제시되는 시기 동안의 수학과 과학 속의 문제 상황을 연구함으로써만 발견될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은 반대로 수학과 과학에 상당한 조예가 있음을 상정(想定)한다. 위대한 철학자들을 연구하는 학생이 과학 속에서 동시대의 문제-상황을 이해한다는 조건에서만 그 철학자들이 시급하고 구체적인 문제들을 해결하려고 노력했음을 이해할 수 있다; 그 철학자들이 제거될 수 없다고 생각한 문제들. 그리고 이것을 이해한 후에만 위대한 철학들에 대한 다른 생각에 도달할 수 있다 - 겉으로 보이는 무의미한 말을 이해하는 생각.
두 가지 사례의 도움을 받아서 나는 나의 두 명제를 확립하려고 노력할 것이다; 그러나 그 사례들로 선회하기 전에 나는 나의 명제들을 요약하여 비트겐슈타인(Wittgenstein)과 결산을 하고 싶다.
나의 두 가지 명제는, 철학이 비(非)철학적 문제들에 깊이 뿌리박고 있기 때문에 자체의 비(非)철학적 뿌리를 잊은 철학들에 관한 한 비트겐슈타인(Wittgenstein)의 철학이 대체로 옳다는 주장과 동일하다; 그리고 비(非)철학적 문제들의 압력에 의하여 어쩔 수 없이 철학에 들어간 대신에, 철학을 ‘공부하는’ 철학자들에 의하여 이 뿌리가 쉽게 잊힌다는 주장.
비트겐슈타인(Wittgenstein)의 교설에 대한 나의 관점은 다음과 같이 요약될 것이다. ‘순전한’ 철학적 문제들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대체로 아마도 사실이다; 그 까닭은 정말로 철학적 문제가 순전해질수록 그 문제의 원래 중요성은 더 많이 없어지고, 그 문제에 대한 토론은 무의미한 장광설로 더 많이 퇴보하기 쉽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으로 진정한 과학적 문제들이 존재할 뿐만 아니라 진정한 철학적 문제들도 존재한다. 분석으로 이 문제들이 사실적 요소를 지니고 있다고 밝혀진다 할지라도 과학에 속하는 것으로 분류될 필요는 없다. 그리고 그 문제들이, 가령, 순전히 논리적 방법으로 해결되어야 한다 할지라도 순전히 논리적이거나 동어 반복적으로 분류될 필요는 없다. 유사한 상황이 물리학에서도 출현한다. 예를 들어 (원자 구조에 관한 가설의 도움을 받아서) 분광선(分光線: spectral lines)의 연속을 설명하는 문제는 순전히 수학적 계산에 의해서만 해결될 수 있는 것으로 밝혀질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다시 그 문제가 물리학보다는 순수 수학에 속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어떤 문제의 해결에 사용되어진 방법이 순전히 수학적으로 밝혀진다 할지라도 문제가 (물체의 구조 문제와 같은) 물리학자들에 의하여 전통적으로 토론된 문제들과 이론들과 연관되어 있다면 우리는 그 문제를 ‘물리적’이라고 부르는 데에 완전히 정당화된다. 우리가 본 바와 같이, 문제들의 해결책은 많은 과학들의 경계선을 뚫고 들어올 것이다. 유사하게 어떤 문제가, 가령, 원자 이론과 연관되어 발생했다 할지라도, 오늘날 물리학자들에 의하여 다루어지는 이론들보다는 철학자들에 의하여 토론되던 문제들 및 이론들과 더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음을 우리가 발견한다면, 그 문제는 ‘철학적’이라고 합당하게 불릴 것이다. 그래서 다시 그런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우리가 어떤 종류의 방법을 사용하는지는 조금도 중요하지 않다. 예를 들어 우주론은 우주론이 지닌 방식 중 어떤 방식에서 아마도 ‘물리학’으로 더 낫게 불릴 것과 밀접하게 연관된다 할지라도 항상 커다란 철학적 흥미를 자아내는 경향을 지닌다. 그 문제가 사실적 문제를 다루기 때문에 틀림없이 철학보다는 과학에 속한다고 말하는 것은 현학적일 뿐만 아니라 분명히 인식론적이어서 철학적인 독단의 결과이기도 하다. 유사하게 논리적 방법으로 해결될 수 있는 문제에게 ‘철학적’이라는 수식어가 거부되어야 할 이유는 없다. 그 문제는 전형적으로 철학적이거나 물리적이거나 생물학적일 것이다. 논리적 분석은 아인슈타인의 특수 상대성 이론에서 상당한 역할을 했다; 그래서 그 이론을 철학적으로 흥미롭게 만들었으며, 그 이론과 연관된 넓은 범위의 철학적 문제들을 야기했던 것은 부분적으로 이 사실이었다.
비트겐슈타인(Wittgenstein)의 교설은 모든 진정한 서술은 (그리하여 모든 진정한 문제들) 두 가지 예외적 등급 중 한 등급으로 분류될 수 있다는 명제의 결과로 판명된다: 사실적 서술들로 (경험적으로 종합적인), 순전히 형식적 논리나 순수 수학에 속한다. 이 단순한 이분법은, 개략적 탐색을 위해서는 매우 가치가 많을지라도, 여러 목적을 위해서는 너무 단순하다고 판명된다.?? 그러나 그것이, 말하자면 철학적 문제들의 존재를 제외하도록 특별히 고안되었다 할지라도, 이 목적에는 크게 미치지 못한다; 그 까닭은
?? 1934년의 나의 저서 과학적 발견의 논리(L. Sc. D.)에서 나는 뉴튼의 이론과 같은 이론은 사실적 정의(定義)나 함축적 정의(定義)를 구성하는 것으로서 (푸앙카레[Poincaré]와 에딩튼[Eddington]의 의미에서) 해석될지도 모른다는 것과, 물리학자가 채택하는 해석은 자신이 말하는 것 속으로보다는 자신의 이론에 반하는 시험을 향하는 자신의 자세 속에서 드러난다는 것을 지적하였다. 실험가능하지 않지만 (그래서 후험적이 아닌) 과학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던 비(非)분석적 이론들이 있다는 것을 나는 또한 지적하였다. (사례들은 초기 원자이론이나 접촉 작용에 관한 초기 이론이다.) 나는 그런 시험 불가능한 이론들을 ‘형이상학적’이라고 불렀고, 그 이론들이 무의미하지는 않다고 주장했다. 단순한 이분법이라는 독단은 매우 다양한 활동분야에서 F. H. 하이네만(Heinemann)에 의하여 (제 10회 국제 철학회 회보[Proc. of the Xth Intern. Congress of Philosophy], Fasc. 2, 629, Amsterdam, 1949), W. V. 쿠인(Quine)에 의하여, 그리고 모튼(Morton) G. 화이트(White)에 의하여 최근에 공격을 받았다. 다시 다양한 관점으로부터 이분법은 정확한 의미에서 공식화된 언어에만 적용되어서 공식화 이전에 우리가 말해야 하는, 다시 말해서 모든 전통적 문제들이 말로 표현되던 저 언어들에 대해서는 부서지기 쉽다는 것이 언급될 것이다.
우리가 이분법을 수용한다 할지라도, 사실적이거나 논리적이거나 혼합된 문제들이 어떤 환경에서 철학적으로 판명될 것이라고 우리는 여전히 주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IV
이제 나는 나의 첫 번째 사례로 선회한다: 플라톤과 초기 그리스 원자론 속의 위기.
여기서 나의 명제는 플라톤의 중심적인 철학적 교설인 소위 형상이나 이데아론이 철학 외적 관계에서를 제외하고 올바르게 이해될 수 없다는 것이다;?? 더욱 특히 2의 평방근이 무리수임을 발견한 (√2 = 1.414∙∙∙∙∙∙ 임을 의미한다. - 성균관대 이한구 교수 역주) 결과로서 전개된 그리스 과학에서의 (주로 물질에 관한 이론에서의) 비판적인 문제 상황의 관계??에서. 나의 명제가 옳다면, 플라톤의 이론은 지금까지 완전히 이해되지 않았다. (‘완전한’ 이해가 실현될 수 있는지는, 물론, 매우 의심쩍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결과는 앞부분에서 묘사된 표면적 방법에 따라서 훈련을 받은 철학자들에 의하여 그 이론은 이해될 수 없다는 것이다 - 물론, 그 철학자들이 특별히 그리고 특정하게 관련된 사실들을 알고 있지 않다면. (이 사실들을 그 철학자들은 권위로써 수용해야 할 것이다 - 이것은 위에 묘사된 철학을 가르치는 표면적 방법의 포기를 의미한다.)
플라톤의 형상 이론은 출처나 내용 양쪽에서 모두 만물은 근본적으로 숫자라는 피타고라스의 이론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개연성이 보인다??. 이 연관성의 세부사항과, 원자론과 피타고라스 이론 사이의 연관성은 아마도 그다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므로 나는, 내가 그 연관성을 지금 보는 바와 같이, 여기서 간단하게 그 이야기를 하겠다.
피타고라스 교단이나 학파의 설립자는 두 가지 발견에 의하여 깊은
?? 나의 저서 열린사회와 그 적들에서 나는 동일한 교설의 또 다른 철학 외적인 뿌리를 - 그 정치적 뿌리 - 좀 자세하게 설명하려고 노력했다. 나는 또한 그곳에서 (1962년 제4 수정판의 6장 주석 9에서) 다소 다른 각도에서지만 현재의 부(部)에서 내가 관련되어 있는 문제를 토론하였다. 언급된 주석과 현재의 부(部)는 다소 겹친다; 그러나 그것들은 주로 서로 보완한다. 여기에서 생략된 관련 참고사항이 (특히 플라톤과 관련하여) 그곳에서 발견될 것이다.
?? ‘과학’이라는 용어가 16세기나 심지어 17세기 이전의 상황전개에 올바르게 적용될 수 있음을 부인하는 역사가들이 있다. 그러나 표찰에 관한 논란들은 피해야 한다는 사실과 완전히 별도로, 오늘날 가령 갈릴레오와 아르키메데스 혹은 코페르니쿠스와 플라톤 혹은 케플러와 아리스타쿠스(Aristarchus: ‘고대의 코페르니쿠스’)의, 동일성은 말할 것도 없고, 목적과 흥미와 활동과 논증과 방법이 지니는 놀라운 유사성에 대한 의심은 더 이상 있을 수 없다고 나는 믿는다. 그리고 과학적 관찰과 관철에 기초한 신중한 계산의 극단적인 시대에 관한 의심은 고대 천문학의 역사에 관한 새로운 증거 발견으로써 쫓겨났다. 우리는 이제 티고(Tycho)와 히파르쿠스(Hipparchus) 사이뿐만 아니라, 한센(Hansen; 1857년)과 칼데아의 키데나스(Cidenas; 기원전 314년) 사이의 유사점을 비교할 수 있는데, 키데나스의 ‘태양과 달의 운동에 관한 상수’의 계산은 예외 없이 정밀성에서 19세기 최고의 천문학자들의 계산과 비견될 수 있다. “교점으로부터의 태양 운동에 관한 ‘키데나스’ 수치는 (0.5초 너무 크다), 브라운(Brown)의 수치보다는 열세이지만, 가장 널리 사용되는 현대 수치의 하나보다는 우수하다”고 J. K. 포더링엄(Fotheringham)은 1928년 자신의 탁월한 기고문 ‘그리스가 칼데아 천문학에 진 빚’에서 (천문대[The Observatory], 1928년, 51, No. 653) 기술했는데, 측량 천문학 시대에 관한 나의 주장은 그 기고문에 근거하고 있다. (앞 문장에서 ~우수하다’의 따옴표 시작이 원문에 없다. 내용상 교점으로부터의~에서 따옴표가 시작되어야 할 것이다. - 역자 주)
?? 우리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신의 저서 형이상학(Metaphysics) 속의 그의 유명한 설명을 믿는다면.
인상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첫 번째 것은 음악적 화음과 같은 표면적으로 순전히 질적인 현상이, 본질적으로, 순전히 숫자적 비율인 1:2; 2:3; 3:4에 기초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예를 들어 잎사귀를 두 번 접어 십자가를 만들어서 얻어질 수 있는) ‘직각’ 즉, ‘수직’은 순전히 숫자적 비율 3:4:5나 5:12:13 (직각삼각형의 변)과 연관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이 두 가지 발견으로 인하여 피타고라스는 만물은, 본질적으로, 숫자이거나 숫자의 비율이라는 다소 환상적인 일반화에 이르렀던 것으로 보인다; 혹은 숫자는 사물이나 사물의 실제적 본성의 이성적 본질인 비율(ratio: logos = 이성[reason])이라는 일반화.
이 개념은 환상적일지라도, 여러 가지 면에서 결실이 있는 것으로 판명되었다. 그 개념의 가장 성공적인 적용 하나는 사각형, 직각삼각형과 이등변삼각형과 같은 간단한 기학학적 도형들과, 피라미드와 같은 어떤 단순한 입체에 대한 것이었다. 이 기하학적 문제 몇 가지를 다루는 것이 소위 그노몬(gnōmōn: 평행 사변형이나 정사각형의 한 각을 포함하는 그 닮은꼴을 떼어낸 나머지 부분)에 기초하였다.
이것은 다음과 같이 설명될 수 있다. 우리가 사각형을 네 개의 점으로 지시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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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위편 왼쪽에 있는 한 점에 세 개의 점을 덧보탠 결과로서 이것을 해석할 것이다. 이 세 개의 점이 최초의 그노몬(gnōmōn)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그것을 다음과 같이 지시할 것이다:
다섯 개의 추가점으로 구성된 두 번째 그노몬(gnōmōn)을 추가함으로써, 우리는 다음 것을 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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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수 1, 3, 5, 7 ...,의 수열의 모든 숫자가 사각형의 그노몬(gnōmōn)을 형성한다는 것과, 1, 1 + 3, 1 + 3 + 5, 1 + 3 + 5 + 7, ...의 합이 정사각형 안의 점들의 수라는 것과 (“정사각형 안의 점들의 수”는 성균관대 이한구 교수의 번역임. - 역자 주), n이 사각형의 면 (속에 있는 점의 숫자)이라면 그 면적 (점의 전체 숫자 = n²)은 처음부터 n항까지의 홀수들의 (“처음부터 n항까지의”는 성균관대 이한구 교수의 번역임. - 역자 주) 합계와 같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각형을 다룸과 마찬가지로 정삼각형을 다루는 것도 같다. 아래 그림은 늘어나는 삼각형의 대표하는 것으로 간주될 것이다 - 늘 새로운 점의 수평선을 추가함으로써 아래로 늘어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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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각 그노몬(gnōmōn)은 점의 마지막 수평선이며 수열 1, 2, 3, 4, . . .의 각 요소는 그노몬(gnōmōn)이다. ‘삼각형 숫자들’은 1 + 2; 1 + 2 + 3; 1 + 2 + 3 + 4, 기타 등등의 합계인데, 다시 말해서, 처음부터 자연수 n까지의 (“처음부터 자연수 n까지 합계이다”는 성균관대 이한구 교수의 번역임. - 역자 주). 그런 삼각형 두 개를 나란히 놓음으로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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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n(n + 1)을 포함하는 수평면 n + 1와 다른 면 n을 지닌 평행사변형을 얻는다. 그 평행사변형이 두 개의 이등변삼각형으로 구성되기 때문에 그 수는 2(1 + 2 + . . . + n)이어서 우리는 다음 방정식을 얻는다.
(1) 1 + 2 + . . . + n = ½n(n + 1)
그리하여
(2) d(1 + 2 + . . . + n
이것으로부터 등차급수의 합계에 관한 일반적 공식을 얻기는 쉽다.
우리는 장방형수인 2 + 4 + 6 . . .과 함께 ‘장방형수’, 다시 말해서 그 가장 간단한 모양이 다음과 같은 장방 도형수를 또한 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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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사각형의 그노몬(gnōmōn)은 짝수이며, 장방형수들은 짝수의 합이다.
이 고찰들은 입체에도 확대되었다; 예를 들어, 최초의 삼각형수들을 합산함으로써 피라미드 숫자가 얻어졌다. 그러나 주요 적용은 평면체나 형체나 ‘형상들(Forms)’에게 되었다. 이것들은 적당한 수열에 의하여, 그리하여 수열의 연속적 숫자의 수적 비율에 의하여 특징지어진다고 믿어졌다. 다시 말해서, ‘형상들(Forms)’은 숫자이거나 숫자의 비율이다. 다른 한편으로, 사물의 형태뿐만 아니라 화음이나 ‘곧음(straightness)'과 같은 추상적인 특징도 숫자들이다. 이런 방식으로 숫자는 만물의 합리적 본질이라는 일반론에 다다른다.
이 관점의 전개가 점-도표의 사자자리나 전갈자리나 처녀자리 같은 별자리의 도표와의 유사성에 의하여 영향을 받았을 개연성이 있는 듯하다. 사자자리가 점들의 배열이라면 숫자를 틀림없이 지니고 있다. 이런 방식으로 피타고라스주의는 숫자나 ‘형상들(Forms)’은 만물의 천상의 형태라는 믿음과 연결되어 있는 듯싶다.
V
이 초기 이론의 주요 요소 중 한 요소는 홀수와 짝수를 근본적으로 구분하는 데에 기초한 소위 ‘대칭표’이다. 그 대칭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을 포함하고 있다
하나 다수
홀수 짝수
남성 여성
정지(존재) 변화(생성)
확정적 불확정적
정사각형 직사각형
직선 곡선
오른쪽 왼쪽
빛 어둠
선(善) 악(惡)
이 기묘한 대칭표를 읽어나가면서 사람들은 피타고라스의 정신이 작동하는 것에 대하여, 왜 ‘형상들(Forms)’이나 기하학적 모양의 형태들뿐만 아니라 정의(正義)와 두말할 것 없이 조화(調和)와 건강, 미(美)와 지식 같은 추상적인 개념들 또한 본질적으로 숫자로 여겨졌는지에 대하여 조금 알 수 있다. 그 대칭표는 거의 수정되지 않고 플라톤에 의하여 수용되었기 때문에 또한 흥미롭다. 유명한 플라톤의 ‘형상’이나 ‘이데아’론의 초본은, 다소 개략적으로, 대칭표의 ‘좋은’ 편이 만물의 불변하며 일정한 ‘형상들’의 (비가시적) 우주인 고차적인 실재의 우주를 구성한다는 교설로서 정말로 묘사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그 안에서 살고 죽는 변화와 유전(流轉)의 가시적 세상인 생성과 소멸의 세상이자 경험의 세상은 저 실제적 세상(Real World)에 대한 일종의 반영이나 모방일 따름인 반면, 진실하고 확실한 지식(epistēmē = scientia = science)은 이 불변적이고 실제적인 우주만의 것이 될 수 있다는 교설로서. 진실하고 확실한 지식이 얻어질 수 없는 것은 오직 현상의 세상(a world of appearance)이다. 참된 지식(epistēmē)을 대신해서 얻어질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오류를 저지를 수 있는 인간들이 지닌 그럴 듯하지만 불확실하고 편향된 견해(doxa)이다.?? 대칭표를 자신이 해석하면서 플라톤은 파메니데스(Parmenides)에 의하여 영향을 받았는데, 파메니데스(Parmenides)의 도전으로 데모크리투스(Democritus)의 원자론이 발전했다.
VI
피타고라스의 이론은, 자체의 점-도표와 함께, 의심할 바 없이 매우 원시적인 원자론에 대한 암시를 담고 있다. 데모크리투스(Democritus)의 원자론이 피타고라스의 이론에 의하여 얼마나 영향을 받았는지는 평가하기 어렵다. 그 원자론은 주요 영향을, 확실하게 보이는 바, 엘레아학파에서 받았다: 파메니데스(Parmenides)로부터 그리고 제노(Zeno)로부터. 이 학파와 데모크리투스(Democritus)가 지니고 있던 근본적 문제는 변화를 이성적으로 이해하는 문제였다. (나는 여기서 콘포드[Cornford] 및 다른 사람들과 의견을 달리한다.) 이 문제가 헤라클리투스(Heraclitus)로부터, 그리하여 피타고라스의 사고라기보다는 이오니아의 사고로부터 시작된다고,?? 그리고 그 문제가 여전히 자연철학의 근본적인 문제로 남아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파메니데스(Parmenides)가 아마도 (그의 위대한 이오니아 선배들과 달리) 물리학자는 아니었다 할지라도, 그는 내가 믿는 바 이론 물리학을 창안한 것으로 설명될 것이다. 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초의 가설적-연역 체계였던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했던 바와 같이 비[非]물리적이라기보다는) 반(反)물리적인?? 이론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그것은 그런 물리이론 체계의 긴 연속물의 시작이었는데, 연속물 각각은 앞의 물리이론 체계를 개선한 것이었다. 앞의 체계가 특정한 경험적 사실들에 의하여 반증되었음이 이해되었기 때문에 대체로 개선은 필요하다고 알려졌다. 연역적 체계의 결과들을 그렇게 경험적으로 논박하여 그 체계를 재건하려는 노력은, 그리하여 대체로 명백하게 논박하는 경험에 관해서 뿐만 아니라 그 족보에 관한, 옛 이론에 관한 흔적을 지니고 있는 새롭고 개선된 이론을 낳는다.
?? 플라톤의 구분은 (지식 대 견해[epistēmē vs. doxa]) 파메니데스를 통하여 제노파네스(Xenophanes)에게서 (진리 대 추측 혹은 외관[truth vs. conjecture or seeming]) 나왔다. 플라톤은 현상의 변하는 세상인 가시적 세상의 모든 지식은 견해(doxa)로 구성된다는 것을 분명히 깨달았다; 그 세상이 불변하는 ‘형상들’과 순수 수학인 지식(epistēmē)을 최대한으로 이용한다할지라도 불확실성으로 물든다는 것; 그리고 그것이 비가시적 세상의 이론의 도움을 받아 가시적 세상을 해석한다할지라도. 크라틸로스(Cratylus) 439b 이하, 국가(Republic) 476d 이하 참조; 특히 티마이오스(Timaeus) 29b 이하에는 우리가 오늘날 ‘물리학’이나 ‘우주론’이나, 더 일반적으로, ‘자연 과학’이라고 불러야 하는 플라톤 자신의 이론의 저 부분들에 적용된다. 플라톤이 말하기를 그것들은 견해(doxa)의 영역에 속한다 (과학[science] = scientia = epistēmē이라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아래 20장에서 이 문제에 관한 나의 말 참조). 파메니데스에 대한 플라톤의 관계에 관한 다른 관점에 대하여 데이비드 로스 경(Sir David Ross)의 플라톤의 이데아론(Plato's Theory of Ideas), 옥스퍼드, 1951, 164쪽 참조.
?? 칼 라인하르트(Karl Reinhardt)는 자신의 저서 파메니데스(Parmenides: 1916; 제 2판 1959, 220쪽)에서 다음과 같이 매우 강조하여 말한다: ‘철학의 역사는 철학이 지닌 문제의 역사이다. 여러분이 헤라클리투스를 설명하고 싶으면, 먼저 그가 지녔던 문제가 무엇이었던 지를 우리에게 말해라.’ 나는 전적으로 동의한다; 그리고 라인하르트에 반대하여, 나는 헤라클리투스가 지니고 있었던 문제는 변화에 관한 문제였다고 - 즉 더 정확하게, 변화 동안의 변하는 것의 자기-정체 (그리고 비[非]정체)에 관한 - 나는 믿는다. (나의 저서 열린사회와 그 적들 2장 또한 참조.) 우리가 헤라클리투스와 파메니데스 사이의 밀접한 관계에 대한 라인하르트의 증거를 수용한다면, 헤라클리투스가 지녔던 문제에 대한 이 견해는 파메니데스의 철학체계를, 변화를 비현실적으로 만듦으로써 변화에 관한 역설(逆說: paradoxes)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시도로 만든다. 이것과 반대로, 콘포드(Cornford)와 그의 제자들은 파메니데스가 피타고라스에게 (반기를 든) 회원이었다는 버넷(Burnet)의 교설을 따른다. 이것은 사실이겠지만 그 사실을 뒷받침하는 증거는 그가 이오니아인 스승을 또한 가지고 있지 않았음을 보여주지 않는다. (아래 5장 또한 참조.)
?? 플라톤의 테아이테투스(Theaetetus) 181a와 섹스투스 엠피리쿠스(Sextus Empiricus)의 독단주의자들에 반대하여(Adv. Mathem. [“독단주의자들에 반대하여”는 성균관대 이한구 교수의 번역임. - 역자 주]) (베커[Bekker]) X. 46, 485쪽, 25 참조.
이 경험들이나 관찰들은 처음에 매우 조악하였으나, 이론들이 더 조악한 관찰들을 점점 더 설명할 수 있게 됨에 따라서 점점 정교해졌다. 파메니데스(Parmenides)의 이론의 경우에 관찰과의 충돌이 매우 명백하여 그 이론을 최초의 물리학적인 가설적-연역적 철학 체계로서 묘사하는 것은 아마도 공상적으로 보이리라. 그러므로 우리는 그 이론을 최후의 물리학 이전의 연역적 철학 체계로서 그 체계의 논박이나 반증이 물질에 관한 최초의 물리학적 이론인 데모크리투스(Democritus)의 원자론적 이론을 낳았던 것으로서 묘사할 것이다.
파메니데스(Parmenides)의 이론은 단순하다. 그는 변화나 움직임을 이성적으로 이해한다는 것이 불가능함을 알고, 실제로 변화란 없다고 - 혹은 변화는 단지 겉보기라고 - 결론을 내린다. 그러나 우리가 그렇게 희망이 없는 비현실적 이론에 직면하여 우월감에 몰입하기 전에, 우리는 이곳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 것을 먼저 깨달아야 한다. 물체 X가 변한다면, 그것은 분명히 더 이상 X와 동일한 것이 아니다. 다른 한편으로 X가 변화 동안에 지속된다고 암시하지 않고는 X가 변한다고 우리는 말할 수 없다; 그것이 변화의 시작과 끝에서 동일한 것인 X라고 말할 수 없다. 그리하여 우리는 모순에 이르는 듯이 보이고, 변하는 사물에 대한 개념과 그리하여 변화에 대한 개념은 불가능한 듯이 보인다.
이 모든 것은 매우 철학적이자 추상적으로 들리는데, 사실이 그렇다. 그러나 이곳에서 지적된 난제가 끊임없이 물리학의 발달에서 스스로를 느껴지도록 만들었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아인슈타인의 장이론(場理論: the field theory)과 같은 결정론적 체계는 파메니데스(Parmenides)의 불변하는 3차원 우주의 4차원적 해석으로서 아마도 심지어 묘사될 것이다. 그 까닭은 어떤 의미에서 아인슈타인의 4차원적 덩어리-우주(four-dimensional block-universe [앞에서 block-universe를 구역 우주로 번역했으나 내용에 비추어 덩어리 우주가 올바른 번역임. - 역자 주])에서는 어떤 변화도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만물은 그곳 4차원적 위치에서 있는 그대로이다; 변화는 일종의 ‘겉으로 드러나는’ 변화이다; 말하자면 자신의 세계-선(線)을 따라서 활주하여 이 세계-선(線)을 따라가는 다양한 위치들을 연속적으로 의식하게 되는 사람은 ‘오직’ 관찰자이다; 다시 말해서, 자신의 공간적-시간적 환경을 연속적으로 의식하게 되는...
이 새로운 파메니데스(Parmenides)로부터 이론 물리학의 더 오래된 조상으로 돌아가서, 우리는 그의 연역적 이론을 개략적으로 다음과 같이 다시 표현할 것이다.
(1) 오직 존재하는 것만 존재한다.
(2) 없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3) 비존재, 다시 말해서, 허공은 존재하지 않는다.
(4) 세상은 충만하다.
(5) 세상에는 부분이 없다; 세상은 하나의 거대한 덩어리이다 (세상은
충만하기 때문에).
(6) 움직임은 불가능하다 (그 안에서 어떤 것이 움직일 수 있는 빈
공간이 없기 때문에).
?? 이것은 물리학적 이론의 발전에 관한 가장 흥미로운 철학적 연구 중 하나인 에밀 메이어슨(Emile Meyerson)의 정체와 실재(Identity and Reality)로부터 밝혀질 것이다. 헤겔은 (헤라클리투스나, 아리스토텔레스가 하는 헤라클리투스에 대한 설명을 따라서) 세상 속에서의 모순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하여, 그리하여 ‘모순의 법칙’을 논박하기 위하여 (자신이 자기-모순적이라고 간주하던) 변화의 사실을 수용한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이론은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모순을 피해야 한다는 원리. 헤겔과 그의 추종자들은 (특히 엥겔스, 레닌, 그리고 다른 마르크스주의자들) 세상 도처에서 ‘모순들’을 보기 시작하여, 모순의 법칙을 ‘형이상학적’으로 지지하는 모든 철학을 비난했는데, ‘형이상학적’이라는 용어를 이 철학들이 세상은 변한다는 사실을 무시한다는 것을 암시하기 위하여 그들은 사용하였다. 아래 15장 참조.
결론 (5)와 (6)은 명백하게 사실에 의하여 부인된다. 그리하여 데모크리투스(Democritus)는 결론의 거짓에서 전제의 거짓까지 논증한다:
(6') 움직임이 있다 (그리하여 움직임은 가능하다).
(5') 세상에는 부분들이 있다; 세상은 하나가 아니고 다수이다.
(4') 그리하여 세상은 충만할 리가 없다.??
(3') 허공 (혹은 비존재)은 존재한다.
당시까지 이론은 수정되어야 했다. 존재에, 혹은 (공간과 반대로) 다수의 존재하는 사물에 대하여, 데모크리투스(Democritus)는 그것들이 부분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파메니데스(Parmenides)의 이론을 채택했다. 그 부분들은, 충만하기 때문에, 그 부분들에는 내부에 공간이 없었기 때문에, 비가시적이었다 (원자들).
이 이론에 관한 요점은 이 이론이 변화에 대하여 이성적인 설명을 내놓는다는 것이다. 세상은 안에 원자들이 들어있는 빈 공간(허공)으로 구성되어 있다. 원자들은 변하지 않는다; 원자들은 소형의 파메니데스(Parmenides)식 불가분의 덩어리 우주들이다.?? 모든 변화는 공간에서의 원자들의 재배치에 기인한다. 따라서 모든 변화는 움직임이다. 이러한 관점으로 발생할 수 있는 유일한 종류의 새로운 사건은 배치와 관련된 새로운 사건이기 때문에,?? 우리가 모든 원자들의 움직임을 (혹은 현대적인 언어사용으로 모든 질량-점들) 예언하는 데에 성공한다면 원칙적으로 세상 속에서 발생하는 모든 미래의 변화를 예언하는 것이 가능하다.
데모크리투스(Democritus)의 변화론은 물리 과학의 발전에 관하여 엄청난 중요성을 지니고 있었다. 그 이론은 부분적으로 플라톤에 의하여 수용되었는데, 플라톤은 변화를 변하지 않지만 움직이는 원자들로써 뿐만 아니라 변화나 움직임에 종속되지 않는 다른 ‘형상들(Forms)'로써 설명하면서 원자론을 많이 지켰다. 그러나 그 이론은 대신에 모든 변화는 본질적으로 불변하는 실체들의 내재적 잠재력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가르쳤던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여 비난을 받았다. 변화에 관한 주제들로서의 실체들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은 우세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 이론은 무효로 판명되었다;?? 그래서 모든 변화는 움직임에 의하여 설명되어야 한다는 데모크리투스(Democritus)의 형이상학적 이론이 오늘날까지 물리학에서 암묵적으로 수용된 작동 프로그램이 되었다. 그 이론은 물리학 자체가 그 이론보다 더 성장했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생물학과 사회과학은 말할 것도 없고) 아직도 물리학에 관한 철학의 한 부분이다. 그 까닭은 움직이는 질량-점들에 덧보태어 뉴튼과 함께 변하는 강도(强度) (그리고 방향)의 힘(forces)이 등장하기
?? 움직임의 존재로부터 공간의 존재로의 추론은 효력이 없는데 그 까닭은 세상의 충만으로부터 움직임의 불가능으로의 파메니데스의 추론이 효력이 없기 때문이다. 플라톤은 단지 희미하게라 할지라도 충만한 세상에서는, 세상에 액체-같은 매체가 있다면, 원형적(circular: 圓形的)이거나 소용돌이-같은 움직임이 가능하다는 것을 본 최초인이었던 것 같다. (찻잎은 찻잔 속에서 차의 소용돌이와 함께 움직일 수 있다.) 이 개념은, (공간이 ‘충만된’, 52e) 티마이에오스(Timaeus)에서 처음에는 주저하며 제시되었는데, 데카르트 철학의 기초와 1905년까지 유지된 바와 같이 ‘발광성 에테르(luminiferous ether)' 이론의 기초가 된다. (아래 주석 44 또한 참조.)
?? 데모크리투스의 이론은 커다란 덩어리-원자들(block-atoms)을 또한 인정하지만, 그가 주장하는 원자들 대부분은 보이지 않게 작다.
?? 역사주의 빈곤(The Poverty of Historicism) 3부와 비교.
?? 플라톤의 티마이오스(Timaeus) 55에 의하여 고취되는데, 그곳에서 원소들의 가능태가 상응하는 입체들의 기하학적 특성 (그리하여 실체적 형태들)에 의하여 설명된다.
?? 실체에 관한 ‘본질주의적(essentialist)' (위의 주석 2 참조) 이론의 불모성은 그 이론이 지닌 신인동성론(神人同性論: anthropomorphism)과 관련되어 있다; 그 까닭은 실체들은 (로크[Locke]가 본 바와 같이) 자신의 합당성을 자신과 동일하지만 변화하고 드러내는 자아의 경험으로부터 받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아리스토텔레스가 주장하는 실체가 물리학으로부터 사라졌다는 사실을 환영한다 할지라도, 하이에크(Hayek) 교수가 말하는 바와 같이 인간에 대하여 신인동성론(神人同性論: anthropomorphically)으로 생각하는 데는 잘못된 것이 없다; 그리고 그것이 심리학으로부터 사라져야 하는 철학적이거나 선험적 이유가 없다.
때문이다. 사실 뉴튼적인 힘의 변화는 움직임에 기인하거나, 움직임에 의존하는 것으로서 설명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입자들의 변하는 위치에. 그러나 그것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입자들의 위치 속의 변화들과 동일하지는 않다; 역제곱 법칙 때문에 그 의존은 심지어 선형적인 것이 아니다. 그리고 파라데이(Faraday) 및 맥스웰(Maxwell)과 함께, 변화하는 힘의 장(場)은 물질적 원자 입자만큼 종요해진다. 우리가 알고 있는 현대의 원자들이 복합체로 밝혀진다는 것은 사소한 문제이다; 데모크리투스(Democritus)의 관점에서 고찰하면 우리가 아는 원자들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가 아는 기초적인 입자들이 실제적 원자들이리라 - 이것들 역시 변하기 쉬운 것으로 밝혀진다는 것을 제외하고. 그리하여 우리에게는 매우 흥미로운 상황이 있다. 변화의 철학은, 변화를 이성적으로 이해하는 난제에 대처하려고 고안되었는데, 수천 년 동안 과학에 봉사하지만 궁극적으로 과학 자체의 발전에 의하여 갈음된다; 그리고 이 사실은 철학적 문제의 존재를 분주하게 부인하는 철학자들에 의하여 실제로 주목받지 못하고 간과된다.
데모크리투스(Democritus)의 이론은 탁월한 업적이었다. 그 이론은 압축가능성, 강도(剛度) 및 신축성의 정도, 희박화(稀薄化)와 농축성, 결합과 분해, 연소, 그리고 많은 다른 것들과 같은 물질에 관하여 경험적으로 알려진 특질들 (이미 이오니아인들에 의하여 토론된) 대부분을 설명하는 이론적 틀을 제공했다. 그러나 그 이론은 경험한 현상에 대한 설명으로서만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첫째로 그 이론은 연역적 이론이나 설명은 ‘현상을 구해야(save the phenomena)’ 한다는 방법론적 원칙을 설정했다;?? 다시 말해서, 경험과 일치해야 한다. 두 번째로 그 이론은 이론이란 사변적이어서, 논증적 사고(思考)로서 이해되어야 하는 세상은 표면적인 경험의 세상과, 보이고 들리고 냄새나고 맛보고 접촉되는 세상과 다른 것으로 판명된다는 근본적인 (파메니데스적[Parmenidean]) 원칙에 근거함을 증명하였다;?? 그리고 그러한 사변적인 이론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자들과 같은) 비가시적인 것들에?? 관한 이론의 수용이나 거부를 결정하는 것은 가시적인 것이라는 경험주의적 ‘기준’을 수용할 것임을 증명하였다. 이 철학은 물리학의 전체 발전에 근본적으로 남았으며, 모든 ‘상대주의적’ 및 ‘실증주의적’ ?? 철학 경향과 지속적으로 갈등을 일으켰다.
게다가 데모크리투스(Democritus)의 이론은 (적분법의 선조인) 착출법(搾出法: 입체를 잘게 나누어 모든 가능한 부분들을 합해서 넓이와 부피를 구하는 방법. - 성균관대 이한구 교수 역주)에 대한 최초의 성공을 낳았는데, 아르키메데스(Archimedes) 자신이 데모크리투스(Democritus)가 원뿔과 각뿔의 용적에 대한 이론을 구성한 최초인이라고 인정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마도 데모크리투스(Democritus)의 이론이 지닌 가장 매혹적인 요소는
?? 아래 3장의 주석 6과 비교.
?? 딜즈(Diels)가 편집한 단편 11 데모크리투스 참조 (딜즈가 편집한 단편 21 아낙사고라스[Anaxagoras] 참조; 단편 7 또한 참조).
?? 섹스투스 엠피리쿠스(Sextus Empiricus)의 독단주의자들에 반대하여[Adv. mathem.] (베커[Bekker]), vii,* 140, 221쪽, 23B 참조.
?? 철학적 상대주의의 의미에서 ‘상대주의적’, 예를 들어 프로타고라스(Protagoras)의 인간 척도론(homo mensura) 교설. 불행히도 아이슈타인의 이론에는 이 철학적 상대주의와 공통적인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 아직도 필요하다.
베이컨의 경향이 그러했던 것처럼 ‘실증주의적’; 초기 왕립 협회의 (그러나 불행히도 실제가 아니고) 이론에 관하여; 그리고 (원자론에 반대했던) 마흐(Mach)가 살던 우리 시대와 감각-자료 이론가들이 살던 우리 시대에.
?? 아르키메데스에 (하이베르그[Heiberg]엮음, II?, 428쪽 이하) 비추어 해석되어야 할 딜즈(Diels)가 편집한 단편 155 참조. S. 루리아(Luria)의 가장 중요한 논문 '고대 원자론자의 무한소의 방법[Die Infinitesimalmethode der antiken Atomisten]' (Quellen & Studien zur Gesch. d. Math., B., 2, Heft 2, 1932, 142쪽) 참조.
시공의 수량화에 대한 원리이다. 최단의 거리와 최소의 시간 간격이 있다는 이제는 광범위하게 논의되는 원리??를 나는 염두에 두고 있다; 다시 말해서 시공에는 거리가 있어서 (데모크리투스[Democritus]의 원자들과 대비되는 데모크리투스[Democritus]의 아메레스[amerēs]??인 길이와 시간의 요소들) 더 작은 것들은 가능하지 않다는 원리.
VII
데모크리투스(Democritus)의 원자론은 그의 엘레아학파 선배들인, 파메니데스(Parmenides)와 그 제자인 제노(Zeno)의 상세한 논증에 대한 요점 대(對) 요점의 답변으로서?? 전개되었고 설명되었다. 특히 원자의 거리와 시간 간격에 대한 데모크리투스(Democritus)의 이론은 제노(Zeno)의 논증의, 더 정확하게, 제노(Zeno)가 내린 결론들에 대한 배격의 직접적인 결과이다. 그러나 우리가 제노(Zeno)에 관하여 알고 있는 것 어디에도 우리의 이야기에 대하여 결정적인 중요성을 지닌 무리수의 발견에 대한 암시가 없다.
우리는 √2에 관한 무리수적 성질이 증명된 날짜와, 그 발견이 공개적으로 알려지게 된 날짜를 알지 못한다. 그 날짜를 피타고라스(Pythagoras: 기원전 6세기)에게 돌리는 전통이 존재했다 할지라도, 그리고 어떤 저술가들은?? 그것을 ‘피타고라스 정리’라고 부를지라도, 그 발견은 기원전 450년 전에는 이룩되지 않았고, 틀림없이 공개적으로 알려지지 않았다는 것과 기원전 420년 전에는 아마도 이룩되지도 않았고, 공개적으로 알려지지 않았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언제 데모크리투스(Democritus)가 그것에 관하여 알았는지는 불확실하다. 이제 나는 그가 몰랐다고 믿고 싶다; 그리고 데모크리투스(Democritus)가 저술한 실종된 책 두 권의 제목인 Peri alogōn grammōn kai nastōn이 ‘비논리적 선(線)과 충만한 몸체에 관하여 (원자들) (On Illogical Lines and Full Bodies (Atoms)’라고,?? 그리고 이 두 권의 책에는 무리수적 성질의 발견에 관한 어떤 언급도 포함되어 있지 않다고.??
?? A. 마치(March), 자연과 인식(Natur und Erkenntnis), 비엔나, 1948 193쪽 이하 참조.
?? S. 루리아(Luria)의 전게서 특히 148쪽 이하, 172쪽 이하 참조. A. T. 니콜스(Nicols)양은 ‘불가분적 선(Indivisible Lines)'에서 (계간 고전[Class. Quarterly], xxx, 1936, 120쪽 이하.) 플루타크에서 한 구절과 심플리시우스(Simplicius)에서 한 구절, 두 구절은 왜 데모크리투스가 ’불가분적 선을 신뢰할 수 없었는지‘를 보여준다고 주장한다; 그녀는 그러나 1932년의 루리아의 반대 견해를 토론하지 않는데, 데모크리투스가 제노(Zeno)에게 답변하려고 노력했다는 것을 우리가 특히 기억한다면 (다음 주석 참조) 루리아의 반대 의견은 내가 아는 바 훨씬 더 설득력이 있다. 그러나 불가분적이거나 원자적 거리에 관한 데모크리투스의 견해가 무엇이든 간에, 데모크리투스의 원자론은 무리수들의 발견을 고려하여 수정될 필요가 있다고 플라톤은 생각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히스(Heath)는 (심플리시우스와 아리스토텔레스를 언급하는 그리스 수학[Greek Mathematics] 1, 1921년 181쪽) 데모크리투스가 불가분적 선의 존재를 가르치지 않았다고 또한 믿는다.
?? 이 요점 대(對) 요점의 답변은 1910년에 I. 해머 젠센(Hammer Jensen)에 의하여 최초로 데모크리투스의 것으로 확인된 매우 중요한 구절이며 파메니데스와 제노(Zeno)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 루리아(Luria)에 (전게서 135) 의하여 신중하게 토론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세대와 부패에 관하여(On generation and Corruption) 316a 14 이하에 보존되어 있다: ‘데모크리투스는 그들의 연역적 논증을 빌려오지만, 반대 결론에 도달한다.’
?? 플라톤의 테아이테투스(Theaetetus)에 보고된 바와 같이, 데오도러스(Theodorus)의 증거에 관한 매우 흥미로운 역사적 언급이 발견될 G. H. 하디(Hardy)와 E. M. 라이트(Wright)의 숫자론 입문(Introduction to the Theory of Numbers) 1938년 39쪽 42쪽 참조. 내가 알고 있는 그 주제에 관한 가장 훌륭한 토론인 A. 바서슈타인(Wasserstein)의 논문인 ‘테아이테투스와 수이론의 역사(Theaetetus and the History of the Theory of Numbers)' 계간 고전(Classical Quarterly), 8, N. S., 1958, 165-79쪽 또한 참조.
?? 내가 그것을 나의 저서 열린사회와 그 적들 (제 2판)의 6장 주석 9에서 번역한 것과 같이 불합리한 선과 원자들에 관해서(On Irrational Lines and Atoms)보다, (다음 주석에 언급된 플라톤의 구절을 고려하여) 아마도 그 제목에 의하여 의미되는 것은, 내가 생각하기에, ‘괴상한 선(線)과 원자들에 관하여(On Crazy Lines and Atoms)’로 매우 훌륭하게 제시될 것이다. H. 포크트(Vogt)의 Bibl. Math., 1910. 10, 147 (히스[Heath]는 그에 대항하여 전게서 156쪽 이하에서 논증하지만 내가 생각하기에 완전히 성공적이지 못하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Arist.])의 불가분선에 대해(De insec, lin.), 968b 17 및 플루타크(Plutarch)의 공통 감각에 대하여(De comm. notit.), 38. 2, 1078쪽 이하에 데모크리투스 작품의 흔적이 포함되어 있다고 설득력 있게 제시되는 S. 루리아(Luria)의 전게서 168쪽 이하 참조. 이 출처에 따르면 데모크리투스의 논증은 이렇다. 만약 선(線)들이 무한히 나누어질 수 있다면 그 선들은 궁극적 단위의 무한으로 구성되어 따라서 모든 것은 ∞ : ∞처럼 관계를 맺고 있다, 다시 말해서, 그것들 모두는 ‘비교불가능’하다 (비율이 없다). 정말로 선(線)들이 점(點)들의 집합으로 여겨진다면, 한 선(線)의 점(點)들의 계량‘수’(cardinal 'number': 가능치[potency])는, 현대적 관점에 따라서, 선(線)들이 유한하든 무한하든 모든 선(線)에 관하여 동일하다. 이 사실은 (예를 들어 볼차노[Bolzano]에 의하여) ‘역설적’으로 묘사되어 아마도 데모크리투스에 의하여 ‘괴상하다(crazy)’고 설명되었다. 브루워(Brouwer)에 따르면 심지어 연속체에 대한 르베그 측도론(Lebesgue measure of a continuum)에 관한 고전적 이론도 근본적으로 동일한 결과를 낳는다; 그 까닭은 브루워(Brouwer)가 모든 고전적 연속체는 0의 측정치(zero measure)를 지니고 있어서 비율의 부재가 여기서 0 : 0으로 표현된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데모크리투스가 얻은 결과는 (그리고 그의 아메레스[amerēs] 이론) 기하학인 피타고라스의 산술적 방법(arithmetical method)에, 다시 말해서 점(點)을 세는 것에 기초한다면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 이것은 열린사회와 그 적들에서 인용된 주석에서 언급된, 'alogos'라는 술어가 오직 훨씬 뒤에 ‘불합리한’으로 쓰였던 것으로 보인다는 것과, 데모크리투스의 표제를 언급하는 (국가 534d) 플라톤이, 거기서 'alogos'를 ‘괴상하다(crazy)'의 의미로 사용할 것이라는 사실과 합치되리라; 그는 내가 아는 한 그것을 ‘말할 수 없다(arrhētos)’의 동의어로 사용하지 않는다.
데모크리투스(Democritus)가 무리수에 관한 문제를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나의 믿음은 이 발견으로부터 그의 이론이 받은 공격에 대항하여 그의 이론을 방어하려는 흔적이 없다는 사실에 근거한다. 그러나 그 공격은 피타고라스의주의에 치명적이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원자론에도 치명적이었다. 두 개의 이론은 모든 측정이, 궁극적으로, 자연적인 단위를 세는 것이어서 모든 측정이 틀림없이 순수한 숫자로 환원될 수 있다는 교설에 기초를 두고 있었다. 그러므로 두 개의 원자의 지점은 원자의 거리에 관한 어떤 숫자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하여 모든 거리는 틀림없이 같은 단위로 잴 수 있다(commensurable). 그러나 자체의 대각선 d를 자체의 변 a와 같은 단위로 잴 수 없기 때문에, 심지어 정사각형의 모서리 사이의 거리라는 단순한 경우에도 이것은 불가능한 것으로 판명된다.
영어 술어 ‘같은 단위로 잴 수 없는(incommensurable)’은 다소 거칠다. 의미되는 것은, 오히려, 자연수의 비율의 부재이다; 예를 들어, 단위 정사각형의 대각선의 경우에 증명될 수 있는 것은 그 일정량 n/m이 단위 정사각형의 대각선과 동일한 두 개의 자연수 n과 m이 존재하는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같은 단위로 잴 수 없음(incommensurability)’은 기하학적 방법이나 측정(measurement)으로써 비교불가능성(incomparability)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수의 비율(ratios)을 비교하는 특징적인 피타고라스의 방법을 포함하여 그리고 물론 길이의 (혹은 ‘넓이’의) 단위의 계산을 포함하여, 세는 것이라는 산술적 방법들로써 혹은 자연수로써의 비교불가능성(incomparability)을 의미한다.
잠시 동안 이 자연수와 그 숫자들의 비율에 관한 방법의 특징을 돌아보자. 숫자에 관한 피타고라스의 강조는 과학적 개념의 발전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결실이 있었다. 이것은 피타고라스 학파원들이 숫자로 된 과학적 측정을 처음 도입했다고 말함으로써 흔히 그러나 다소 부정확하게 표현된다. 이제 내가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이 모든 것이 피타고라스 학파원들에게는 측정이라기보다는 세는 것이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숫자들을, 작은 점(點)들 숫자였던 보이지 않는 본질들이나 ‘본성들(Natures)’을 세는 것이었다. 그들은 이 작은 점(點)들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우리가 직접 셀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우리는 실제로 숫자들이나 자연적인 단위들을 세는 것이 아니라, 측정한다는 것, 다시 말해서 임의적인 가시적 단위들을 센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측정의 중요성을 자연적 단위들이나 자연수의 진정한 비율들을 간접적으로 밝히는 것으로서 해석하였다.
그리하여 소위 ‘피타고라스 공식’을 증명한 유클리드(Euclid)의 방법은 (유클리드, 1, 47), 그 자체에 따라, a가 b와 c 사이의 직각에 대하여 반대가 되는 삼각형의 한 면이라면,
(1) a? = b? + c?,는
피타고라스의 수학 정신에는 이질적인 것이었다. 그 공식이 바빌로니아인들에게 알려져 그들에 의하여 기하학적으로 증명되었다는 것은 이제 인정되는 듯싶다. 그러나 피타고라스도 플라톤도 (공통의 밑변과 높이를 지닌 다양한 삼각형들을 사용하는) 유클리드(Euclid)의 기하학적 증거를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그 까닭은 그들이 해답을 제시했던 문제인 직각삼각형의 변들에 대한 정수 분해를 발견하는 산술적 문제가, (1)이 알려진다면, 다음 공식에 의하여 (m과 n인 자연수이고 m > n)
(2) a = m? + n?; b = 2mn; c = m? - n?
쉽게 해결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식 (2)는 분명히 피타고라스에게 알려지지 않았고 심지어 플라톤에게도 알려지지 않았다. 이것은 그에 따라서 피타고라스가 (m = n + 1을 대입함으로써 (2)로부터 얻어진) 공식을 제시한 전통??으로부터 출현한다.
(3) a = 2n(n +1) + 1; b = 2n(n + 1); c = 2n + 1
은 정사각형 수의 그노몬(gnōmōn)으로부터 읽혀질 수 있지만, 예를 들어, 17: 8: 15에 대해서는 실패하기 때문에 (2)보다 덜 일반적이다. 피타고라스의 공식 (3)을 개선했다고 보고되는?? 플라톤에게서 아직도 일반적인 해답 (2)가 부족한 또 다른 공식이 기인한다고 일컬어진다.
피타고라스의 즉, 산술적 방법과 기하학적 방법 사이의 차이점을 밝히기 위해서, 단위 정사각형의 (다시 말해서, 변 1과 넓이 1의 영역을 갖는 정사각형) 대각선 위에 있는 정사각형은 단위 정사각형의 (다시 말해서, 넓이 2의 영역) 2배의 영역을 갖는다. 그것은 다음 대각선을 갖는 정사각형을 그리는 특징을 지닌다.
½ ½ |
그리고 그 다음에 그림을 다음과 같이 확장할 것을 보여주는 특징을 지닌다
½ ½ |
그 그림으로부터 우리는 세기(counting)로써 결과를 획득한다. 그러나 처음에서 두 번째 것으로의 전환은 점(點)들의 산술에 의하여 유효한 것으로 도저히 증명될 수 없고 심지어 비율의 방법으로도 밝혀질 수 없다.
이것이 진실로 불가능하다는 것이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여 잘 알려진 것으로 상정(想定)된 대각선의, 다시 말해서, √2의 무리수적
?? G. Friedlein ed., Procli Diadochi in primum Euclids Elementorum librum commentarii, Leipzig, 1873, 487, 7-21쪽.
?? 프로클러스(Proclus), 전게서, 428쪽, 21에서 429쪽 8.
성질이라는 유명한 증거에 의하여 확립된다. 그것은 다음 가정(假定)을 증명하는 특징을 지닌다.
(1) √2 = n/m
다시 말해서, √2가 두 자연수 n과 m의 어느 수의 비율과 동일하다는 것은 불합리를 낳는다.
우리는 먼저 다음을 가정할 수 있다는 데에 주목한다.
(2) 두 자연수 n과 m 중 하나 이상은 짝수가 아니다.
그 까닭은 두 수 모두가 짝수라면, 다른 두 자연수 n' 와 m'를 얻기 위하여 우리는 항상 인수 2로 약분되어 n/m = n'/m'이 되며, 기껏해야 두 수 n' 와 m' 중 하나가 짝수이리라. 이제 (1)을 제곱함으로써 우리는 다음을 얻는다.
(3) 2 = n?/m?
그리고 이것으로부터
(4) 2m? = n?를 얻고
그리하여
(5) n은 짝수이다.
그리하여 자연수 a가 틀림없이 존재하여
(6) n = 2a이며
우리는 (3)과 (6)으로부터
(7) 2m? = n? = 4a?을 얻고
그리하여
(8) m? = 2a?이다.
그러나 이것은
(9) m이 짝수임을 의미한다.
(5)와 (9)가 (2)와 모순이 됨은 분명하다. 그리하여 그 비율이 √2인 두 자연수 n과 m이 존재한다는 가정(假定)은 불합리한 결론을 초래한다. 그러므로 √2은 비율이 아니라, 그것은 ‘무리수(irrational)’이다.
이 증명은 자연수의 산술만을 사용한다. 그러므로 그 증명은 순전히 피타고라스의 방법을 사용하여, 그 증명이 피타고라스학파 내에서 발견되었다는 전통은 의문시될 필요가 없다. 그러나 그 발견이 피타고라스에 의하여 이룩되었거나 매우 일찍 이룩되었다는 개연성은 없다: 제노(Zeno)는 그것을 알고 있지 않는 듯하고, 데모크리투스(Democritus) 또한 알고 있지 않은 듯하다. 게다가 그것이 피타고라스주의의 논거의 기초를 파괴하기 때문에, 그 학파가 최고의 영향력을 발휘하게 되고 오래 지나서야 그 발견이 일어났다고 가정하는 것이 타당하다; 적어도 그 교단이 제대로 확립되기 전에는 발견되지 않았다; 그 까닭은 그 발견이 그 교단의 쇠퇴를 촉진했던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 발견이 학파 내부에서 일어났지만 비밀로 유지되었다는 전설은 나에게 합당하게 보인다. 그 전설은 ‘불합리하다’에 대한 옛 술어가 - 'arrhētos'로 ‘언급될 수 없는(unutterable혹은 unmentionable)’ - 언급될 수 없는 비밀을 암시하였음을 고려함으로써 지지를 받을 것이다. 전설에 따르면 비밀을 누설했던 그 학파의 회원은 자신의 배신 때문에 살해되었다고 한다.?? 이것이 어떠하든 간에, 불합리한 크기들이 (그것들은 물론 숫자들로서 인정되지 않았다) 존재했다는 것과, 그것들의 존재가 증명될 수 있었다는 깨달음이 피타고라스학파에 대한 믿음을 손상시켰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것은 자연수의 산술로부터, 우주론이나 심지어 기하학을 도출하는 희망을 파괴했다.
VIII
이 사실을 깨닫고, 그 함축성을 판단하지 못한 데에 대하여 동포들을 비난하면서 법률(Laws)에서 그 중요성을 가장 강한 용어로 강조한 사람은 플라톤이었다. 그의 전체 철학, 그리고 특히 ‘형상’이나 ‘이데아’의 이론은 그것에 의하여 영향을 받았다고 나는 믿는다.
플라톤은 엘레아학파뿐만 아니라 피타고라스학파와도 가까웠다; 그리고 그는 데모크리투스(Democritus)를 매우 싫어했던 것으로 보일지라도 그 자신이 일종의 원자론자였다. (원자론적 가르침은 그 아카데미의 학파 전통의 하나로 남았다.??) 이것은 피타고라스의 아이디어와 원자론적 아이디어 사이의 밀접한 관계를 고찰하면 놀라운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무리수들의 발견으로써 위협을 받았다. 과학에 관한 플라톤의 주요 기여는 무리수의 문제를 그가 깨달은 것으로부터, 그리고 재앙적 상황으로부터 과학을 구하기 위하여 그가 떠맡았던 피타고라스주의와 원자론의 수정으로부터, 유래했다고 나는 제안한다.
그는 자연에 관한 순전히 산술적 이론은 패배 당했고, 세상을 묘사하고 설명하기 위한 새로운 수학적 방법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하여 그는 자주적인 기하학적 방법의 발전을 고취하였다. 그 방법은 플라톤주의적 유클리드(Euclid)의 ‘기하학 원론(Elements)'에서 자체의 성취를 이룩했다.
사실은 무엇인가? 나는 그 사실들 모두를 조합하기 위하여 잠시 노력할 것이다.
(1) 피타고라스주의와 데모크리투스(Democritus)적 형태의 원자론은 양쪽 모두 근본적으로 산술에 바탕을 두었다; 다시 말해서 세는 것(counting)에.
(2) 플라톤은 무리수의 발견이 지닌 재앙적 특성을 강조하였다.
(3) 그는 아카데미의 문 위에 새겼다: ‘기하학에서 훈련을 받지 않은 사람은 나의 학당에 들어오지 못한다’. 그러나 기하학은, 유클리드(Euclid)뿐만 아니라 플라톤의 직계 제자였던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홀수와 짝수’를 (다시 말해서 정수[整數:integers]들과 그들의 관계를) 다루는 산수와 대조적으로, 전형적으로 같은 단위로 잴 수 없는 것이나 무리수를 다룬다.
(4) 플라톤의 사망 후 곧 그의 학파는, 유클리드(Euclid)의 기하학 원론(Elements)에서, 그 요점 하나가 같은 단위로 나누어질 가능성이나 유리수의 ‘산술적’ 가정으로부터 수학을 해방시킨 것이었던 작품을 만들어냈다.
(5) 플라톤 자신은 이 발전에, 특히 입체 기하학의 발전에 기여했다.
(6) 더욱 특히, 그는 티마이오스(Timaeus)에서 전에는 순전히 산술적인
?? 그 이야기는 다소 실체가 없는 인물인 히파수스(Hippasus)라는 사람에 관하여 언급된다; 그는 바다에서 사망하였다고 전해진다 (딜즈?, 4 참조). 위의 주석 35에 언급된 A. 바서슈타인(Wasserstein)의 논문 또한 참조.
?? S. 루리아, 특히 플루타크에 대한 전게서 참조.
?? 분석론 후서(An. Post.), 76b9; 형이상학(Metaph.), 983a20, 1061b1. 에피노미스(Epinomis), 990d 또한 참조.
원자론에 특별히 기하학적인 해석을 내놓았다; 무리수인 √2와 √3을 빗변으로 하는 (“빗변으로 하는”은 성균관대 이한구 교수의 번역임. - 역자 주) 삼각형들로부터 소립자를 (유명한 플라톤적 물체) 구성해낸 해석. (아래 참조.) 거의 모든 다른 면에서 그는 데모크리투스(Democritus)의 가장 중요한 개념 중 몇 가지뿐만 아니라 피타고라스의 개념도 보전했다.?? 동시에 그는 데모크리투스(Democritus)의 허공을 제거하려고 노력했다; 그 까닭은 움직임이 액체 속에서의 소용돌이의 특성을 지닌 것으로 생각된다면, 심지어 ‘충만한’ 세상에서도 움직임이 가능하다는 것을 그가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는 파메니데스(Parmenides)의 가장 근본적인 개념 몇 가지를 보유했다.??
(7) 플라톤은 세상의 기하학적 모형 구축을, 특히 혹성의 움직임을 설명하는 모형 구축을 촉진시켰다. 그리고 유클리드(Euclid)의 기하학은 (지금 보통 가정되는 바와 같이) 순수 기하학에서 연습용으로 의도된 것이 아니라, 우주론의 방법론적 원리로서 의도되었다. 이 관점에 따르면 ‘기하학 원론(Elements)’은 ‘기하학의 교과서’가 아니라 플라톤의 우주론이 지녔던 주요 문제를 체계적으로 해결하려는 시도였다. 이것은 많은 성공을 거두며 실행되었기 때문에, 문제들이 해결되어 사라졌고 거의 잊혀졌다; ‘어떤 사람들은 (유클리드[Euclid]의) 다양한 서적들의 주제가 우주와 관련되고, 그것들이 우주를 우리가 관조하는 데에, 그리고 우주에 관하여 이론을 만드는 데에 우리를 도울 의도를 지니고 있다’고 쓰는 프로클루스(Proclus)에게 흔적이 남아 있다 할지라도 (위의 전게서 주석 38, 플로클루스[Proclus] II, 71, 2-5쪽). 그러나 심지어 프로클루스(Proclus)도 이런 상황에서 주요 문제를 - 무리수의 문제 (물론 그는 다른 곳에서 그 문제를 언급한다) - 언급하지 않는다; ‘기하학 원리(Elements)’가 ‘우주적’이거나 ‘플라톤적’ 다면체의 구축과 동시에 최고점에 이른다고 그가 올바르게 지적한다 할지라도. 플라톤과 유클리드(Euclid) 이전이 아니라 그 이후?? (산술이라기보다는) 기하학이,
?? 플라톤은 더욱 특히 데모크리투스의 소용돌이 이론을 인계 받는다 (딜즈[Diels]가 편집한 단편 167, 164; 딜즈[Diels]의 단편 9, 12, 13, 아낙사고라스[Anaxagoras] 참조; 다음 두 가지 각주 또한 참조) 그리고 우리가 오늘날 중력 현상이라고 부를 것에 관한 그의 이론은 (딜즈[Diels] 164, 데모크리투스; 12, 13, 15와 2, 아낙사고라스[Anaxagoras] ) -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여 다소 수점된 이론 - 궁극적으로 갈릴레오에 의하여 배척된다.
?? 가장 분명한 구절은 티마이오스(Timaeus) 80c인데 그곳에서 (마찰된) 호박의 경우에서나 ‘헤라클리투스의 돌’ (자석)의 경우에도 실제적인 인력이 없다고 언급된다; ‘공간은 없고 이것들은, 하나가 다른 것 위에 놓여, 자신들을 여러 곳으로 민다’. 다른 한 편으로 플라톤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천체론(De Caelo), 306b5에서 관찰한 바와 같이, 자신의 기본 입자들이 (정육면체와 각뿔 제외) 자기들 사이에 (빈?) 공간을 남기지 않고는 묶일 수 없기 때문에, 이 점에 관해서 별로 분명하지 않다.
?? 플라톤이 원자론과 충만 이론을 (‘자연은 공간을 혐오한다’) 조화시킨 것은 오늘날까지 물리학의 역사에 대하여 가장 큰 중요성을 지니게 되었다. 그 까닭은 그 행위가 데카르트에게 강력한 영향을 미쳐서 에테르와 빛에 관한 이론의 기초가 되었으며, 그리하여 궁극적으로 호이겐스(Huyghens)와 맥스웰(Maxwell)을 거쳐 드 브로글리(de Broglie)와 슈뢰딩거(Schrödinger)의 파장 역학 이론의 기초가 되었기 때문이다. Atti d. Congr. Intern. di Filosofia (1958), 2, 1960, 367 쪽 이하의 나의 보고서 참조.
?? 예외는 양자론에서, 예를 들어 파울리(Pauli)의 배타 원리에 기초한 주기적 체계의 전자 껍질 이론에서 산술적 방법의 재출현이다; 산술을 기하화하는 플라톤의 경향을 뒤집는 것 (아래 참조).
간혹 ‘기하학의 산술화(arithmetization of geometry)’로 불리는 것을 향한 현대적 경향에 (기하학에 관한 모든 현대적 작업의 특징이 전혀 아닌 경향) 관하여, 자연수의 집합이나 수열이 자연수 자체라기보다는 그것의 주요 도구이기 때문에 그것이 피타고라스의 접근방식과 거의 유사함을 보여주지 않음이 주목되어야 한다. 숫자 이론에 관하여 ‘건설적’이나 ‘유한적’이나 ‘직관주의적’ 방법에 자신들을 국한시키는 사람들만은 - 집합-이론적 방법과 반대로 - 기하학을 숫자로 환원시키려는 자신들의 노력이 산술화(arithmetization)와 관련된 피타고라스나 플라톤 이전의 개념들과 닮았다고 아마도 주장할 것이다. 이런 방향으로의 커다란 진전이 독일 수학자 E. 드 베테(de Wette)에 의하여 이룩된 듯싶다.
우주론에 뿐만 아니라 물질에 관한 이론에서도, 모든 물리학적 설명들과 묘사들에 관한 근본적인 도구로서 보인다.??
IX
이것들은 역사적 사실들이다. 그것들은 내가 믿기에 나의 주요 주장을 성립시키는 데에 큰 공헌을 한다: 철학 가르치기와 관련된 표면적 방법이라고 내가 지칭했던 것은 플라톤을 고무시켰던 문제들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것. 그것은 또한 그의 가장 위대한 철학적 업적으로 합당하게 불릴 세계에 대한 기하학적 이론을 평가할 수 없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플라톤으로 방향을 전환했던 르네상스 시대의 위대한 물리학자들은 - 코페르니쿠스, 갈릴레오, 케플러, 길버트(Gilbert) - 이 움직임으로써 아리스토텔레스의 질적 실체(qualitative substances) 즉, 잠세태(potentialities)를 우주론에 관한 기하학적 방법으로 대체하고자 했다. 진정으로, 그것이 (과학에서) 르네상스가 주로 의미했던 것이다: 기하학적 방법의 부활로, 그 부활은 유클리드, 아리스타쿠스(Aristarchus), 케플러, 갈릴레오, 데카르트, 뉴튼, 맥스웰, 그리고 아인슈타인이 이룬 업적의 기초였다.
그러나 이 업적은 철학적으로서 합당하게 묘사될까? 그 업적은 오히려 물리학에 - 사실적 과학 - 속하지 않을까; 그리고 순수 수학에 - 비트겐슈타인(Wittgenstein) 학파가 주장하는 바와 같이, 동어 반복적 논리의 한 분야인 - 속하지 않을까?
우리는 이 단계에서 왜 플라톤의 업적이 (그 업적에는 의심할 바 없이 그 물리적이고, 그 논리적이고, 그 혼합되고 그 황당한 구성요소가 있다 할지라도) 철학적 업적이었는지를 상당히 명백하게 볼 수 있다고 나는 믿는다; 적어도 왜 자연과 물리학에 관한 그의 철학의 한 부분이 지속되었고, 내가 믿기에, 지속될 것인지.
플라톤과 그의 선배들에게서 우리가 발견하는 것은 세상을 향한 그리고 세상에 대한 지식을 향한 새로운 접근방식을 의식적으로 구축하고 발명한 것이다. 이 접근방식은 원래 신학적인 개념인 논거로 정해진 비가시적 세상으로써 가시적 세상을 설명하는 개념을?? 이론적 과학이라는 근본적인 도구로 바꾼다. 그 개념은 아낙사고라스(Anaxagoras)와 데모크리투스(Democritus)에 의하여 물질이나 물체의 성질을 조사하는 원리로서 명시적으로 공식화되었다; 가시적 물질은 비가시적인 것들에 관한, 너무 작아서 보이지 않는 비가시적 구조에 관한 가설들에 의하여 설명될 수 있었다. 플라톤과 함께 이 개념은 의식적으로 수용되고 일반화된다; 변화하는 가시적 세상은 불변하는 ‘형상들(Forms)’의 (혹은 실체나 본질이나 ‘본성’; 다시 말해서, 내가 더 자세히 밝히려고 노력할 것과 같이, 기하학적 모양이나 형태) 비가시적 세상에 의하여 궁극적으로 설명될 것이다.
물질의 비가시적 구조에 관한 이 개념은 물리학적 개념일까 혹은 철학적 개념일까? 물리학자가 이 이론에 근거하여 행동한다면, 물리학자가 아마도
?? 플라톤과 유클리드의 영향에 관한 유사한 관점에 관하여 G. H. 헤멘스(Hemens)의 Proc. of the Xth Intern. Congress of Philosophy (Amsterdam, 1949), Fasc. 2, 847 참조.
?? 올림푸스라는 비가시적 세상의 도움을 받아서 트로이(Troy) 주변의 가시적 세상을 호머(Homer)가 설명하는 것 참조. 그 개념은 데모크리투스와 함께 (아낙사고라스에게는 덜 그러할지라도 파메니데스에게는 여전히 강력한) 신학적 특색 중 몇 가지를 잃어버리지만 플라톤과 함께 회복하였다가 나중에 곧 다시 잃어버린다.
?? 위 주석 27과 딜즈-크란츠(Diels-Kranz)의 단편 B4와 17, 아낙사고라스 참조.
무의식적으로, 이 주제의 전통적 문제들을 자신이 직면한 문제-상황에 의하여 제공된 것으로서 수용함으로써 그가 그것을 수용한다면; 그리고 그가, 그렇게 행동하면서, 물질의 구조에 관한 새로운 특정 이론을 만들어낸다면, 나는 그를 철학자로 불러서는 안 된다. 그러나 그가 그것을 숙고하여, 이론적이고 다소 신학적인 접근방식보다 현상학적이거나 실증주의적 물리학을 선호하기 때문에, (버클리[Berkeley]나 마흐[Mach]처럼) 그것을 배척한다면, 그는 철학자로 불릴 것이다. 유사하게, 의식적으로 이론적 접근방식을 추구했고, 그 방식을 구축했고, 그 방식을 명시적으로 공식화해서 이론적이고 연역적인 방법을 신학(神學)에서 물리학으로 전환시켰던 사람들은, 그들이 자신들의 행동지침에 근거하여 행동하여 물질의 비가시적 구조에 관한 실제적 이론을 만들어내려고 노력한 한 물리학자들이었다 할지라도, 철학자들이었다.
그러나 나는 더 이상 ‘철학’이라는 표찰을 올바르게 붙이는 문제를 추구하지 않겠다; 그 까닭은 이 문제가, 비트겐슈타인(Wittgenstein)의 문제인데, 언어적 용법의 문제로 분명히 밝혀지기 때문이다; 그 문제는 정말로 사이비-문제이며, 지금은 틀림없이 나의 청중들에게 따분한 일로 퇴락중이다. 그러나 나는 플라톤의 형상이나 이데아의 이론에, 즉 더 정확하게는, 위에 주어진 역사적 사실의 목록 속의 요점 (6)에 몇 마디를 보태고 싶다 (원문에는 마침표가 없다. 문맥상으로 여기에 마침표를 넣는 것이 옳다 - 역자 주).
물질의 구조에 대한 플라톤의 이론은 티마이오스(Timaeus)에서 발견될 수 있다. 그것은 적어도 그것들을 결정체로서 해석하는 현대적 고체론과 피상적인 유사성을 지닌다. 그의 물리적 물체는, 형태가 가시적 물질의 거시적 속성에 책임을 지면서, 다양한 형태의 비가시적인 기초적 입자로 구성되어 있다. 기초적 입자의 형태는 그 다음에 그들의 면(面)을 구성하는 평면체의 형태에 의하여 결정된다. 그리고 이 평면체들은, 그 다음에, 궁극적으로 모두 두 가지 기초적인 삼각형으로 구성된다: √2를 한 변으로 하는 반(半)-정사각형 (즉 직각 이등변) 삼각형과 √3을 한 변으로 하는 반(半)-등변 직각 삼각형으로, √2와 √3 모두가 무리수이다.
이 삼각형들은 그 다음에 불변하는 ‘형상들’이나 ‘이데아’의 복제품들??로서 묘사되는데, 그 ‘형상들’이나 ‘이데아’는 특수하게 기하학적인 ‘형상들(Forms)’이 피타고라스식의 산술적 형상-숫자들의 천국으로 수용됨을 의미한다.
이 구상의 동기는 무리수들을 세상이 구성된 마지막 요소들에 포함시킴으로써 원자론의 위기를 해결하려는 시도라는 데에 의문의 여지가 없다. 이것이 행해지면 무리수의 거리의 존재로부터 발생하는 난제가 극복된다.
그러나 왜 플라톤은 이 두 가지 삼각형만을 선택했을까? 나는 다른 곳에서?? 플라톤이 √2와 √3의 배수를 유리수에 보탬으로써 모든 다른 무리수들이 얻어질지도 모른다고 믿었다는 추측??으로서의 견해를 표명했다.
?? 삼각형들이 공간(‘어머니’) 밖으로 이데아(‘아버지’)에 의하여 찍히는 과정에 대하여, 나의 저서 열린사회와 그 적들의 6장 주석 9 뿐만 아니라 3장 주석 15와 주어진 참고사항을 참조. 무리수 삼각형들을 신적(神的) 형상들의 이 천국으로 수용하면서 플라톤은 피타고라스주의자들의 의미에서 ‘결정될 수 없는’ 것, 다시 말해서 대칭표에서 ‘나쁜’ 쪽에 속하는 것을 수용한다. '나쁜‘ 것들이 수용되어야 할 것은 플라톤의 글 파메니데스, 130b-e에 최초로 서술된 듯하다; 그 수용은 파메니데스 자신의 입에서 표현된다.
?? 나의 저서 열린사회와 그 적들의 마지막으로 인용된 주석.
?? 이것은 모든 기하학적 거리가 (크기) 1: √2: √3로 관련된 세 가지 ‘길이’ 중 하나와 (혹은 그것들 중 둘이나 세 가지 모두와) 같은 단위로 측정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모든 기하학적 크기가 두 가지 길이, 다시 말해서 1과 √2 중 하나와 같은 단위로 측정될 수 있다고 심지어 믿었던 것 같다. 그 까닭은 그가 (형이상학[Metaphysics], 1053a17) 이렇게 쓰기 때문이다: ‘정사각형의 대각선과 변과 모든 기하학적 크기는 두 가지 (척도)에 의하여 측정된다.’ (이 구절에 관한 로스[Ross]의 주석 참조.)
나는 이제 티마이오스(Timaeus)에 있는 결정적인 구절이 (유클리드[Euclid]가 나중에 증명한 바와 같이, 잘못된) 이 원리를 정말로 암시한다는 것을 더욱 확신한다. 그 까닭은 문제의 구절에서 플라톤은 철저하게 명백히, ‘모든 삼각형은 각각 직각을 갖는 두 개의 삼각형에 유래한다’고 말하고 그 두 개의 삼각형을 반정사각형과 반등변으로 명기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맥에서 이것은 모든 삼각형은 어떤 방식으로든 이 둘로부터 유래한다는 것을 의미할 수 있을 따름이다. 이것은 유리수와 √2와 √3의 합계로 모든 무리수를 상대적으로 같은 단위로 측정 가능할 것이라는 틀린 이론을 암시하는 듯하다.??
그러나 플라톤은 자신이 문제의 이론에 대한 증거를 지니고 있는 체하지 않았다. 반대로, 그는, ‘그럴듯한 추측을 필연과 결합하는 설명에 따라서’, 자신이 두 가지 삼각형을 원리로서 상정(想定)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잠시 후에, 반등변 삼각형을 자신의 두 번째 원리로서 생각한다고 설명한 다음에, 그는 ‘이유가 너무 길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이 문제를 조사하여 이 특질이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면’ (나는 다른 모든 삼각형들이 이 두 가지로 구성될 수 있다는 특질을 생각한다) ‘우리의 모든 선의(善意)와 함께 그는 상을 받게 된다.’??고 말한다. 언어가 다소 모호하여, 그럴듯한 이유는 플라톤 자신이 이 두 가지 삼각형에 대한 자신의 (잘못된) 추측에 관한 증거가 부족함을 의식하고 그 증거가 다른 사람에 의하여 제시되어야 한다고 느꼈다는 것이다.
구절의 모호성으로 인하여 무리수들을 자신이 주장하는 형상의 세계에 도입하는 플라톤의 철저히 명백하게 진술된 삼각형들의 선택이, 다른 장소에서의 무리수의 문제에 관한 플라톤의 강조에도 불구하고, 플라톤의 글을 읽는 독자들과 비평자들 대부분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 그리고 이것은 다시 아마도 왜 플라톤의 형상 이론이 아리스토텔레스에게 피타고라스의 형식-숫자 이론??과 근본적으로 동일한 것으로 보였는지, 그리고 왜 플라톤의
?? 위에 언급된 나의 저서 열린사회와 그 적들 6장 주석 9에서 π에 대한 √2 +
√3의 근사치가 플라톤을 그의 그릇된 이론에서 고무시켰음을 또한 나는 추측했다.
?? 두 인용은 티마이오스 53c/d와 54a/b에서 나온다.
?? 우리가 고찰하면 플라톤의 유명한 두 가지 ‘원리’ - ‘1’과 ‘불확정적인 2’ - 의 문제가 어느 정도 밝혀진다고 나는 믿는다. 아래 해석은 반 데어 빌렌(van der Wielen)에 의하여 제시되고 (De Ideegetallen van Plato, 1941, 132쪽 이하.) 반 데어 빌렌의 비판에 대하여 로스(Ross)에 의하여 훌륭하게 옹호된 (플라톤의 이데아론[Plato's Theory of Ideas], 201쪽) 제안을 전개한다. 우리는 ‘불확정적인 2’가 직선이나 거리로, 단위 거리로서 혹은 조금이라도 지금까지 측정된 것으로서 해석될 수 없다고 상정(想定)한다. 한 점(한정, 모나스[monas], 1)이 어떤 자연수 n에 관한, 비율 1: n에 따라 불확정적인 2를 분할하는 그런 위치에 차례로 놓인다고 우리는 상정(想定)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숫자의 ‘생성’을 다음과 같이 묘사할 수 있다. n = 1이면, 불확정적인 2는 그 비율이 1:1인 두 부분으로 나뉜다. 이것은, 우리가 불확정적인 2를 두 가지 동등한 부분으로 나누었기 때문에, 하나임(1:1 = 1)과 불확정적인 2에서 둘임(Twoness)이 ‘생성됨’으로서 해석될 것이다. 그렇게 숫자 2를 ‘생성’하고, 우리는 불확정적인 2를 1:2의 비율에 따라서 나누고 (그리고 뒤따르는 부분에서 더 큰 선분을, 전과 같이, 1:1의 비율에 따라서 나눈다), 그리하여 세 가지 동등한 부분과 숫자 3을 생성한다; 일반적으로, 숫자 n의 생성은 불확정적인 2를 1:n의 비율로 분할하게 되고, 이것과 함께, 숫자 n +1의 생성을 초래한다. (그리고 각 단계에서 ‘1’은 새로운 숫자를 창조하기 위하여, 그렇지 않으면 ‘불확정적인’ 2 속으로 한계나 형태나 척도를 도입하는 점으로서 개입한다; 이 말은 반 데어 빌렌의 주장에 반대하는 로스[Ross]의 주장을 강화시켜줄 것이다. Quellen & Studien z. Gesch. d. Math., I, 1931년에 실린 퇴플리츠[Toeplitz]와 슈텐첼[Stenzel], 그리고 베커[Becker]의 논문과 또한 비교할 것. 그러나 그들 중 누구도 - 476쪽 이하의 도면에도 불구하고 - 산술의 기하학화에 대하여 시사하지 않는다.)
이제 이 과정이 (적어도 최초의 사례에서) 자연수의 수열만을 ‘생성한다’ 할지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하학적 요소를 - 처음에는 동등한 두 부분으로 선을 분할하고, 그 다음에는 특정 비율인 1:n에 따라서 두 부분으로 - 포함하고 있다는 것은 주시되어야 한다. 두 종류의 분할 모두에는 기하학적 방법이 필요하고, 두 번째 분할은 더욱 특히, 에우독서스(Eudoxus)의 비례 이론과 같은 방법이 필요하다. 이제 플라톤이 왜 자신이 불확정적인 2를 또한 1: √2와 1: √3의 비율로 분할해서는 안 되는지 자문하기 시작했다고 나는 의견을 낸다. 이것은 자연수가 생성되는 방식으로부터 이탈이라고 그는 틀림없이 느꼈다; 그것은 훨씬 덜 ‘산술적’이고, 더욱 특별히 ‘기하학적인’ 방법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그것은, 자연수 자리에, 1: √2와 1: √3의 비율인 선(線)의 요소들을 ‘생성하는’데, 그 요소들은 원자의 삼각형들이 구축되는 ‘원자의 선(線)들’ (형이상학[Metaphysics], 992a19)과 동일할 것이다. 동시에 불확정적인 2를 ‘불확정적’으로서 특징짓는 것은, 무리수를 향한 피타고라스의 자세를 (딜즈[Diels]가 편집한 단편 2와 3 필로라오스[Philolaos] 참조) 고찰하여, 매우 합당해질 것이다. (아마도 ‘대와 소[The Great and the small]라는 이름은, 유리비 뿐만 아니라 무리비가 생성되었을 때, ‘불확정적인 2’에 의하여 갈음되기 시작했다.)
이 관점이 옳다고 상정(想定)하기 때문에, 우리는 플라톤이 서서히 (a) 무리수들이 숫자들에게 비교될 수 있기 때문에 (형이상학[Met.], 1021a 4 이하.), 그리고 (b) 자연수와 무리수들 양쪽 모두가 유사하고 본질적으로 기하학적인 과정에 의하여 ‘생성’되기 때문에, 무리수들은 숫자라는 관점에 도달한다고 (대 히피아스[Hippias Major]에서 시작하기 때문에 그리하여 국가[Republic] 훨씬 이전에 - 로스[Ross]가 한 말과 반대로, 전게서 56쪽 첫머리) 우리는 아마도 추측할 것이다. 그러나 이 관점이 이룩되자마자 (그리고 내가 믿고 싶은 바와 같이 그 작품이 플라톤의 것이든 아니든, 그 관점은 최초로 에피노미스[Epinomis], 990d-e에서 이룩되는 듯하다), 심지어 티마이오스(Timaeus)의 무리수 삼각형들이 ‘숫자들’이 된다 (다시 말해서 불합리하다 할지라도 숫자의 비율에 의하여 특징지어져). 그러나 이 지점에서 플라톤의 색다른 공헌과, 그와 피타고라스 이론 사이의 차이점이, 분별 불가능해질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왜 심지어 (‘기하학화’와 ‘산술화’ 양쪽 모두를 의심했던)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해서 그 차이점이 목격되지 않았던 지를 설명할 것이다.
원자론이 아리스토텔레스에게 단지 데모크리투스(Democritus)의 원자론에 관한 비교적 사소한 변형으로 보였는지를 설명할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산술과 홀수 및 짝수의 결합과 기하학의 무리수와의 결합 양쪽 모두를 당연시했음에도 불구하고, 무리수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했던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플라톤의 공간을 물질과 동일시했던 티마이오스(Timaeus)로부터 그가 출발한다 할지라도, 그는 기하학에 대한 플라톤의 개혁 프로그램을 당연시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아카데미에 들어가기 전에 에우독서스(Eudoxus)에 의하여 부분적으로 실행되었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수학에 피상적으로만 관심을 가졌다. 그는 아카데미 문 위의 명문을 언급하지 않는다.
요컨대, 플라톤의 형상 이론과 그의 물질에 대한 이론 양쪽 모두, 무리수로 인하여 기하학이 산술보다 우선해야 한다는 그의 깨달음을 고찰하여, 그의 선배인 피타고라스 학파원들과 데모크리투스(Democritus) 각자의 이론을 재진술한 것일 개연성이 있어 보인다. 이러한 해방을 고취함으로써 플라톤은 구축된 가장 중요하고 영향력이 있는 연역이론인 유클리드(Euclid) 체계의 발전에 기여했다. 기하학을 세상에 대한 이론으로서 채택함으로써 그는 아리스타쿠스(Aristarchus), 뉴튼, 그리고 아인슈타인에게 그들의 지적(知的) 도구상자를 제공했다. 그리스 원자론의 몰락은 그리하여 중요한 업적으로 탈바꿈되었다. 그러나 플라톤의 과학적 관심은 부분적으로 잊혀졌다. 그의 철학적 문제를 초래했던 과학에서의 문제-상황은 거의 이해되지 않는다. 그래서
?? 이것이 아리스토텔레스의 견해라는 것은 루리아(Luria)에 의하여 지적되었다, 전게서.
그의 가장 위대한 업적인 세상에 대한 기하학적 이론은 우리가 지닌 세상-그림에 크게 영향을 미쳐 우리는 그 그림을 숙고하지 않고 당연시한다.
X
한 가지 사례로는 충분하지 않다. 많은 흥미로운 가능성 중에서 나는 칸트(Kant)를 선택한다. 그의 저서 순수 이성 비판(Critique of Pure Reason)은 가장 난해한 책 중의 하나이다. 칸트는 매우 서둘러서 책을 썼고,?? 내가 나중에 밝힐 것인 해결이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잘못 생각된 문제에 관하여 책을 썼다. 그러나 그것은 사이비-문제가 아니라, 과학에서의 현대적 상황에서 출현하는 피할 수 없는 문제였다. 그의 책은 뉴튼의 천체 역학에 조예가 깊은 사람들과 적어도 그의 선배들의 - 코페르니쿠스, 티코 브라헤(Tycho Brahe), 케플러와 갈릴레오 - 생각을 지니고 있었던 사람들을 위하여 저술되었다.
우리가 과학적 성공이라는 화려함에 의하여 타락하고 싫증이 났다 할지라도 뉴튼의 이론이 칸트(Kant)뿐만 아니라 18세기 사상가들에게도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우리 시대의 지식인들이 이해한다는 것은 아마도 어렵다. 고대인들이 우주의 수수께끼와 씨름을 한 유례없는 용기 후에 부패와 회복의 긴 기간이 찾아왔고, 그 다음에 커다란 성공이 찾아왔다. 뉴튼은 오랫동안 탐색되던 비밀을 발견했다. 그의 기하학적 이론은, 유클리드(Euclid)에 기초를 두고 모방되었는데, 처음에는 심지어 그 이론의 창시자에 의해서도 매우 의심스럽게 받아들여졌다.?? 이유는 만유인력이 ‘불가사의하게’ 느껴졌거나, 적어도 설명을 필요로 하는 것으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합당한 설명이 발견되지 않았다 할지라도 (그리고 뉴튼은 특수한 가설들에 의지하는 것을 경멸하였다)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Principia)가 발간된 후 78년, 칸트(Kant)가 뉴튼의 이론에 자신의 중요한 공헌??을 하기 오래 전에 모든 의혹은 사라졌다. 그 상황에 대하여 자격을 갖춘 어떤 판단자도?? 뉴튼의 이론이 사실이라는 것을 더 이상 의심할 수 없었다. 그 이론은 가장 정밀한 측정으로 시험되었으며, 그 이론은 항상 옳았다. 그 이론은 케플러의 법칙으로부터의 작은 이탈을 예언했으며, 새로운 발견을 낳았다. 피카딜리(Piccadilly)가의 버스가 오가듯이 이론들이 오가는, 그리고 뉴튼은 오랫동안 아인슈타인에 의하여 갈음되었다고 모든 학생들이 들은 우리 시대와 같은 때에는 뉴튼의 이론이 고취했던 확신감이나, 혹은 자신만만함이나 해방의 감정을 다시 지닌다는 것은 어렵다. 독특한 사건이 사상사(思想史)에서 일어났는데, 그 사건은 반복될 수 없는 것이다: 우주에 관한 절대적 진리를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발견한 것. 한 시대나 지속된 꿈이 실현되었다. 인간은 지식, 실제적이고 확실하며 의심의 여지가 없고 증명될 수 있는 지식을 - 인간의 지식인 단순한 억측(doxa)이 아니라 신적(神的)인 지식(scientia) 즉, 참된 지식(epistémé) - 획득했다.
?? 그는 자신의 일을 마치기 전에 죽을까봐 두려워했다.
?? 벤틀리(Bentley)에게 보낸 뉴튼의 서한, 1693년 참조. (아래 3장의 주석 20 참조.)
?? 1755년 칸트에 의하여 발간된 소위 칸트-라플라스 가설.
?? 매우 관련성이 짙은 비판이 (특히 버클리와 라이프치히에 의한) 있었지만 그 이론의 성공을 고찰하여 비판자들은 어떤 방식으로든 그 이론의 요점을 놓쳤다 것이 - 내가 옳게 믿는다 - 느껴졌다. 심지어 오늘날에도, 몇 가지 사소한 수정과 함께, 그 이론은 훌륭한 최초의 근사치로서 (혹은, 케플러를 생각하여, 아마도 두 번째 근사치로서) 아직도 남아있음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된다.
그리하여 칸트(Kant)에게는 뉴튼의 이론이 사실일 따름이었으며, 그 이론의 진리에 대한 믿음은 칸트의 사망 후 1세기 동안 흔들림 없이 남아있었다. 칸트(Kant)는 자신과 다른 사람들이 사실로서 생각했던 것인 지식(scientia) 즉, 참된 지식(epistēmē)의 획득을 끝까지 수용했다. 처음에 그는 그 이론을 의심 없이 수용했다. 이 상태를 그는 자신의 ‘독단적 수면(垂面)’이라고 불렀다. 그는 흄(Hume)에 의하여 그 이론으로부터 깨어났다.
흄(Hume)은 보편적 법칙의 확실한 지식, 즉 참된 지식(epistēmē)과 같은 그런 것은 있을 수 없다고 가르쳤다; 우리가 알고 있던 유일한 것은 색다른 (혹은 특수한) 사례들에 관한 것일 수만 있는 관찰의 도움을 받아서 획득될 수 있어서, 모든 이론적 지식은 불확실하다고. 그의 논증은 설득력이 있었다 (그리고 그는, 물론, 옳았다). 그러나 사실이 있었다, 혹은 사실로서 보이던 것이 있었다 - 뉴튼의 참된 지식(epistēmē) 획득.
흄(Hume)은 칸트(Kant)가 사실이라고 의심하지 않았던 것이 터무니없음에 가깝다는 것을 깨닫도록 칸트(Kant)를 일깨웠다. 여기에 배제될 수 없었던 문제가 있었다. 어떻게 사람이 그런 지식을 소유할 수 있었을까? 유클리드(Euclid)의 기하학처럼, 일반적이고, 정확하고, 수학적이며, 증명될 수 있으며 의심할 수 없지만 관찰된 사실에 대하여 인과적 설명을 내놓을 수 있는 지식을?
그리하여 순수 이성 비판(Critique)의 핵심적 문제가 출현했다: ‘순수한 자연과학은 어떻게 가능한가?’ ‘순수한 자연과학’으로써 - 지식(scientia), 참된 지식(epistēmē) - 칸트는 단지 뉴튼의 이론을 의미했다. (불행히도, 이것을 그는 말하지 않는다; 그래서 1781년과 1787년에 간행된 순수 이성 비판[Critique] 초판을 읽는 학생이 어떻게 알아낼 수 있었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그러나 칸트가 뉴튼의 이론을 염두에 두고 있다는 것은 자연과학의 형이상학적 기초[Metaphysical Foundations of Natural Science], 1786년을 고찰하면 분명한데, 그 책에서 칸트는 뉴튼이 이론에 관하여 선험적 연역을 내놓는다; 부록, 특히 문단 2의 부록 2, 주석 1과 함께, 2부의 8가지 정리를 특히 참조. 칸트는, 마지막 ‘현상학에 관한 일반적 주석[General Note on Phenomenology]’의 다섯 번째 문단에서, 뉴튼의 이론을 ‘별이 빛나는 하늘’과 관련짓는다. 그것은 실천 이성 비판(Critique of Practical Reason), 1788년의 ‘결론’을 고찰하여도 분명한데, 그 부분에서 두 번째 문단 끝의 새로운 천문학의 선험적 특성을 언급함으로써 ‘별이 빛나는 하늘’에 대한 매력이 설명된다.??
순수 이성 비판(Critique)이 나쁘게 쓰였다 할지라도, 그리고 나쁜 문법이 그 책 안에 많다 할지라도, 이 문제는 언어적 수수께끼가 아니었다. 여기에 지식이 있었다. 뉴튼은 어떻게 그 지식을 얻을 수 있었을까? 그 의문은 피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 문제는 또한 해결될 수 없었다. 그 까닭은 참된 지식(epistēmē) 획득이라는 피상적인 사실은 사실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제는 아는 바와 같이, 혹은 우리가 안다고 믿는 바와 같이, 뉴튼의 이론은 탁월한 추측인 놀라울 정도로 훌륭한 근사치에 지나지 않는다; 진정으로 독특하지만, 신적(神的) 진리로서가 아니라 겨우 인간이 지닌 창조성의 독특한 발명품으로서; 참된 지식(epistēmē)이 아니라 억측(doxa)의 영역에 속하는 것. 이것으로써 ‘어떻게 순수한 자연과학이 가능한가’라는 칸트의 문제는 무너지며, 그가 지녔던 가장 당황스러운 문제가 사라진다.
자신이 지녔던 해결 불가능한 문제에 대하여 칸트가 제안한 해결책은
?? 뉴튼은 ‘우주의 구조에 대한’ 매우 분명한 ‘통찰력을’ 우리에게 주어서 ‘그 통찰력은 언제나 불변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통찰력이 지속적인 관찰을 통하여 항시 성장할 것이라는 희망이 있을지라도, 위축을 걱정할 필요는 없다’고 칸트는 그곳에서 말한다.
?? 푸앙카레는 1909년에 여전히 그것에 의하여 크게 고통을 받았다.
자신이 지녔던 지식의 문제에 관한 ‘코페르니쿠스적 혁명’으로 자신만만하게 불렀던 것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지식은 - 참된 지식(epistēmē) - 우리가 감각 자료를 수동적으로 받는 사람들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소화시키는 사람들이 때문에 가능했다. 감각 자료들은 소화시키고 흡수함으로써 우리는 우주, 자연의 우주 속으로 그 자료들을 형성하고 구성한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우리의 감각에게 주어진 재료에게 우리가 지닌 소화적이고 조직적인 작동방식의 일부인 수학적 법칙을 부과한다. 그리하여 우리가 지닌 지성은 자연 속에서 보편적인 법칙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지성 자체의 법칙을 처방하여 자연에 부과한다.
이 이론은 불합리와 진실을 기묘하게 혼합한 것이다. 그 이론은 그 이론이 해결하려고 노력하는 잘못된 문제만큼 불합리하다; 그 까닭은 그 이론이, 너무 많은 것을 증명하도록 고안되었기 때문에, 너무 많은 것을 증명하기 때문이다. 칸트(Kant)의 이론에 따르면, ‘순수한 자연과학’은 가능할 뿐만이 아니다: 그가 이것을 항상 인식하지는 않는다 할지라도, 그것은, 그의 의도와 반대로, 우리가 지닌 정신적 장비의 필연적인 결과가 된다. 그 까닭은 참된 지식(epistēmē)을 우리가 획득한 사실이 우리가 지닌 지성이 자연에 대하여 법칙을 정하여 그 자체의 법칙들을 자연에 부과한다는 사실에 의하여 조금이라도 설명될 수 있다면, 두 번째 사실이 조건적이지 아니한 것처럼 두 가지 사실 중 첫 번째 사실도 조건적일 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 문제는 어떻게 뉴튼이 자신의 발견을 이룩했는가가 더 이상 아니고 어떻게 다른 사람들 모두가 그 발견을 하지 못했을 수 있을까 이다. 우리의 소화 작동방식(digestive mechanism)이 이전에 작동하지 않았다는 것은 어떻게 된 일일까?
이것은 칸트(Kant)의 생각이 낳은 명백하게 불합리한 결과이다. 그러나 그 결과를 무심코 버린다는 것, 그리고 그의 문제를 사이비-문제로서 버린다는 것은 상당히 옳지 못하다. 그 까닭은 우리가 그가 지녔던 문제를 그 문제의 고유한 차원으로 환원한 후에 그의 생각 속에서 우리는 진리의 요소를 (그리고 어떤 흄[Hume]의 견해에 관하여 많이 필요한 수정)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지금 알거나 우리가 안다고 믿는 그의 의문점은 틀림없이 이러했을 것이다: ‘어떻게 성공적인 추측이 가능할까?’ 그리고 그가 말하는 코페르니쿠스적 혁명의 정신으로 우리의 답변은 아마도 다음과 같은 것이리라고 나는 제안한다: 당신이 말한 바와 같이, 우리는 감각 자료들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아니라, 능동적인 생명체이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환경에 항상 본능적으로만 반응하는 것이 아니고, 때때로 의식적이고 자유롭게 반응하기 때문에. 우리는 신화(神話), 이야기, 이론들을 발명할 수 있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설명에 대한 갈증, 채워질 수 없는 호기심, 알고자 하는 소망이 있기 때문에. 우리가 이야기나 이론들을 발명할 뿐만 아니라 그것들을 시험하여 작동하는지 그리고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보기 때문에. 크게 노력하여, 열심히 노력하고 많은 실수를 저지름으로써 우리는 때때로, 운이 좋다면, ‘현상들을 구조하는(which saves the phenomena)’ 이야기 즉, 설명을 발명해낼지도 모른다; 아마도 비가시적인 것을 설명하는 원자나 중력과 같은, ‘비가시적인 것들’에 관한 신화(神話)를 구성함으로써. 지식은 아이디어의 모험이기 때문에. 이 생각들이 우리들에 의하여 만들어지고, 우리들 주위의 세상에 의하여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 생각들이 반복되는 감정들이나 자극들 또는 기타 등등의 흔적만은 아니다; 여기에서 당신은 옳았다. 그러나 우리는 당신이 믿었던 것보다 더 능동적이고 자유롭다; 그 까닭은 유사한 관찰들이나 유사한 환경적 상황들이, 당신의 이론이 암시한 바와 같이, 다양한 사람들에게서 유사한 설명을 만들어내지 않기 때문이다.
?? 지식에 관한 합당한 이론을 충족시켜야 하는 결정적인 요구사항은 그 이론이 너무 많이 설명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왜 특정 발견이 출현했어야 했는가를 설명하는 비(非)역사적 이론은 왜 다소 더 일찍 그 발견이 출현하지 않았는지를 도저히 설명할 수 없었기 때문에 틀림없이 실패한다.
또한 우리가 우리의 이론들을 창조하여 그 이론들은 세상에 부과한다는 사실은, 당신이 믿었던 바와 같이, 그 이론들의 성공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다??. 그 까닭은 우리들이 만들어내는 이론들, 우리가 자유롭게 발명한 생각들, 중 압도적인 다수가 성공을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 이론들은 탐색적 시험을 견디지 못하여, 경험에 의하여 반증된 것으로서 폐기된다. 그 이론들 중 극소수만이, 잠시 동안, 생존을 위한 경쟁적 싸움에서 성공한다.??
XI
칸트(Kant)의 후계자 중에서 칸트의 작품을 낳았던 정확한 문제-상황을 분명하게 이해했던 것으로 보이는 사람은 거의 없다. 칸트(Kant)에게는 두 가지 그런 문제가 있었다: 뉴튼의 천체 역학, 그리고 프랑스 혁명가들이 도움을 구했던 인간의 형제애와 정의라는 절대적인 기준들; 혹은 칸트가 표현하는 바와 같이, ‘내 머리 위에 있는 별이 빛나는 하늘, 그리고 내 안에 있는 도덕율’. 그러나 칸트의 ‘별이 빛나는 하늘’은 실제로 그 자체로서 거의 인식되지 않는다: 뉴튼에 대한 언급.?? 피히테(Fichte)에서 시작하여 계속,?? 많은 사람들이 칸트의 ‘방법’과 그의 저서 순수 이성 비판(Critique)의 부분적인 난해한 문체를 모방했다. 그러나 이 모방자들 대부분은, 칸트가 지녔던 원래 관심과 문제들을 깨닫지 못한 채, 칸트 자신의 잘못은 아니라 할지라도 칸트가 자신을 묶였던 고르디오스(Gordius)의 매듭을 조이거나 설명해서 빠져나가려고 분주히 애를 썼다 (고르디오스 매듭[Gordiam knot]은 프리지아의 왕이 묶은 매듭으로 알렉산더가 칼로 끊어 풀었다. 난제를 의미한다. - 역자 주).
우리는 모방자들이 지닌 거의 무의미하고 핵심이 없는 난해함을 선구자이 지닌 시급하고 진실한 문제로 착각하는 일을 경계해야 한다. 그가 지녔던 문제가, 평범한 의미에서 경험적인 문제는 아니라 할지라도, 겉으로 드러나지만 존재하지 않는 지식(scientia) 즉, 참된 지식(epistēmē)의 사례에서 출현했기 때문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기치 않게 어떤 의미에서 사실적으로 (칸트는 그런 사실들을 ‘선험적[transcendental]이라고 불렀다) 밝혀졌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칸트의 답변이, 그 답변이 지닌 부분적 모순에도 불구하고, 진정한 과학 철학의 핵심을 담고 있다는 제안을 심각하게 고려해야 한다고 나는 주장한다.
?? 주석 63을 적용하여, 어떤 이론도 왜 설명적 이론에 대한 우리의 탐구가 성공적인지를 설명할 수 없다. 성공적인 설명은, 어떤 유효한 이론에 관해서도, 인간에 의하여 아마도 고안될 모든 가설들에 대한 ‘성공적인’ 설명적 가설들의 비율에 의하여 개략적으로 이 확률을 우리가 측정한다고 가정하여, 0의 확률을 틀림없이 지닌다.
?? 이 ‘답변’에 대한 개념들은 나의 저서 과학적 발견의 논리 (L.Sc.D.) (1934년, 1959년 판본과 그 이후 판본들)에 상술되어 있다.
?? 위의 주석 61과 원문 참조.
?? 나의 저서 열린사회와 그 적들 12장 주석 58 참조.
- “추측과 반박, 과학적 지식의 성장”, 칼 R. 포퍼 -
2
THE NATURE OF
PHILOSOPHICAL PROBLEMS AND THEIR ROOTS IN SCIENCE
1
IT WAS After some hesitation that I decided to take as my point of departure the present position of English philosophy. For I believe that the function of a scientist or of a philosopher is to solve scientific or philosophical problems, rather than to talk about what he or other philosophers are doing or might do. Any unsuccessful attempt to solve a scientific or philosophical problem, if it is an honest and devoted attempt, appears to me more significant than a discussion of such a question as 'What is science?' or 'What is philosophy?' And even if we put this latter question, as we should, in the slightly better form, 'What is the character of philosophical problem?', I for one should not bother much about it; I should feel that it had little weight, even compared with such a minor problem of philosophy as the question whether every discussion or every criticism must always proceed from 'assumptions' or 'suppositions' which themselves are beyond argument.?
When describing 'What is the character of philosophical problems?' as a slightly better form of 'What is philosophy?' I wished to hint at one of the reasons for the futility of the current controversy concerning the nature of philosophy: the naïve belief that there is an entity such as 'philosophy', or perhaps 'philosophical activity', and that it has a certain character or essence or 'nature'. The belief that
? I call this a minor problem because I believe that it can easily be solved, by refuting the ('relativistic') doctrine which gives rise to the question. (Thus the answer to the question is negative. See the Addendum to vol. ii of my Open Society, added to the fourth edition of 1962.)
The Chairman's address, delivered at the meeting of 28th April 1952, to the Philosophy of Science Group of the British Society for the History of Science (now the British Society for the Philosophy of Science); first published in The British Journal for the Philosophy of Science, 3, 1952.
there is such a thing as physics, or biology, or archeology, and that these 'studies' or 'disciplines' are distinguishable by the subject matter which they investigate, appears to me to be a residue from the time when one believed that a theory had to proceed from a definition of its own subject matter.? But subject matter, or kinds of things, do not, I hold, constitute a basis for distinguishing disciplines. Disciplines are distinguished partly for historical reasons and reasons of administrative convenience (such as the organization of teaching and of appointments), and partly because the theories which we construct to solve our problems have a tendency? to grow into unified systems. But all this classification and distinction is a comparatively unimportant and superficial affair. We are not students of some subject matter but students of problems. And problems may cut right across the borders of any subject matter or discipline.
Obvious as this fact may appear to some people, it is so important for our present discussion that it is worth while illustrating it by an example. I need hardly mention that a geologist's problem such as assessing the chances of finding deposits of oil or uranium in a certain district has to be solved with the help of theories and technique usually classified as mathematical, physical and chemical. It is however less obvious that even a more 'basic' science such as atomic physics may have to make use of a geological survey, and of geological theories and techniques, to solve a problem in one of its most abstract and fundamental theories; for example the problem of testing predictions about the relative stability or instability of atoms of an even or odd atomic number.
I am quite ready to admit that many problems, even if their solution involves the most diverse disciplines, nevertheless 'belong' in some sense to one or another of the traditional disciplines; the two problems just mentioned clearly 'belong' to geology and physics respectively.
This is because each of them arises out of a discussion characteristic of the tradition of the discipline in question. Each arises out of the discussion of some theory, or out of empirical tests bearing upon a theory; and theories, as opposed to subject matter, may constitute a discipline (which might be described as a somewhat loose cluster of theories undergoing challenge, change, and growth). But this does not affect my point that the classification into disciplines is comparatively unimportant, and that we are students not of disciplines but of problems.
But are there philosophical problems? The present position of English philosophy - my point of departure - originates, I believe, in the late Professor Ludwig Wittgenstein's doctrine that there are none; that all genuine problems are scientific problems; that the alleged problems of philosophy are pseudo-problems; that the alleged propositions or theories of philosophy are pseudo-propositions or
? This view is part of what I have called 'essentialism'. Cf. for example my Open Society, chs. 2 and 11, or The Poverty of Historicism, section 10.
? This tendency can be explained by the principle that theoretical explanations are the more satisfactory the better they can be supported by independent evidence. For in order to be supported by mutually independent pieces of evidence, a theory must be sweeping.
pseudo-theories; that they are not false (if they were false, their negations would be true propositions or theories) but strictly meaningless combinations of words,? no more meaningful than the incoherent babbling of a child who had not yet learned to speak properly.?
As a consequence, philosophy cannot contain any theories. Its true nature, according to Wittgenstein, is not that of a theory, but that of an activity. The task of all genuine philosophy is to unmask philosophical nonsense, and to teach people to talk sense.
My plan is to take this doctrine? of Wittgenstein's as my starting point. I shall try to explain it (in section ii); to defend it, to some extent; and to criticize it (in section iii). And I shall illustrate all this (in section iv to xi) by some examples from the history of scientific ideas.
But before proceeding to carry out this plan I wish to reaffirm my conviction that a philosopher should philosophize: he should try to solve philosophical problems, rather than talk about philosophy. If Wittgenstein's doctrine is true, then nobody can philosophize, in my sense. Were this my opinion I would give up philosophy. But it so happens that I am not only deeply interested in certain philosophical problems (I do not much care whether they are 'rightly' called 'philosophical problems'), but inspired by the hope that I may contribute - if only a little, and only by hard work - to their solution. My only excuse for talking here about philosophy - instead of philosophizing - is my hope that in carrying out my programme for this address an opportunity may turn up to do a little philosophizing after all.
? 'All animals are equal but some are more equal than others' is an excellent example of an expression which would be 'meaningless' in the technical sense of Russell and Wittgenstein, though clearly far from meaningless (in the sense of pointless) in the context of Orwell's Animal Farm. It is interesting that later Orwell considered the possibility of introducing a language, and enforcing its use, in which 'All men are equal' would become meaningless in Wittgenstein's technical sense.
? Since Wittgenstein described his own Tractatus as meaningless (see also the next footnote) he distinguished, at least by implication, between revealing or important and worthless or unimportant nonsense. But this does not affect his main doctrine which I am discussing, the non-existence of philosophical problems. (A discussion of other doctrines of Wittgenstein's can be found in the Notes to my Open Society, especially notes 26, 46, 51, and 52 to ch. 11.)
? It is easy to detect at once one flaw in this doctrine: the doctrine, it may be said, is itself a philosophic theory, claiming to be true, and not to be meaningless. This criticism, however, is perhaps a little cheap. It might be countered in at least two ways. (1) one might say that the doctrine is indeed meaningless qua doctrine, but not qua activity. (This is the view of Wittgenstein, who said at the end of his Tractatus Logico-Philosophicus that whoever understood the book must realize at the end that it was itself meaningless, and must discard it like a ladder, after having used it to reach the desired height.) (2) one might say that the doctrine is not philosophical but an empirical one; that it states the historical fact that all apparent 'theories' proposed by philosophers are in fact ungrammatical; that these do not, in fact, conform to the rules inherent in those languages in which they appear to be formulated; that it turns out to be impossible to remedy this defect; and that every attempt to express them properly has led to the loss of their philosophic character (and revealed them as, for example, empirical truisms, or as false statements). These two counter arguments do, I believe, rescue the threatened consistency of the doctrine, which in this way indeed becomes 'unassailable' - to use Wittgenstein's term - by the kind of criticism referred to in this note (See also the next note but one.)
II
Ever since the rise of Hegelianism there has existed a dangerous gulf between science and philosophy. Philosophers were accused - rightly, I believe - of 'philosophizing without knowledge of fact', and their philosophies were described as 'mere fancies, even imbecile fancies'.? Although Hegelianism was the leading influence in England and on the Continent, opposition to it, and contempt of its pretentiousness, never died out completely. Its downfall was brought about by a philosopher who like Leibniz, Berkeley, and Kant before him had a sound knowledge of science, and especially of mathematics. I am speaking of Bertrand Russell.
Russell is also the author of the classification, closely related to his famous theory of types, which is the basis of Wittgenstein's view of philosophy: the classification (criticized below on p. 309) of the expressions of a language into
(1) True statements
(2) False statements
(3) Meaningless expressions, among which there are statement-like sequences of words, the so-called 'pseudo-statements'.
Russell used this distinction to solve the problem of the logical paradoxes which he discovered. For his solution it was essential to distinguish more especially between (2) and (3). We might say, in ordinary speech, that a false statement like, '3 times 4 equals 173,' or, 'All cats are cows', is meaningless. Russell, however, reserved the term 'meaningless' for expressions such as, '3 times 4 are cows,' or, 'All cats equal 173', that is for expressions of a sort which it is better not to describe as false statements. They are better not described as false because the negation of a meaningful but false statement will always be true. But the prima facie negation of the pseudo-statement, 'All cats equal 173', is, 'Some cats do not equal 173', and this is just as unsatisfactory a pseudo-statement as the original statement. Negations of pseudo-statements are again pseudo-statements, just as negations of proper statements (true or false) are proper statements (false or true, respectively).
This distinction allowed Russell to eliminate the paradoxes (which, he said, were meaningless pseudo-statements). Wittgenstein went further. Led perhaps by the feeling that what philosophers, especially Hegelian philosophers, were saying was somewhat similar to the paradoxes of logic, he used Russell's distinction in order to denounce all philosophy as strictly meaningless.
As a result there could be no genuine philosophical problems. All alleged philosophical problems could be classified under four heads:?
? The two quotations are not the words of a scientific critic but, ironically enough, Hegel's own characterization of the Natural Philosophy of his forerunner and one-time friend Schelling. Cf. my Open Society, note 4 (and text) to ch. 12.
? Wittgenstein still upheld the doctrine of the non-existence of philosophical problems in the form here described when I saw him last (in 1946, when he presided over a stormy meeting of the Moral Sciences Club in Cambridge, on the occasion of my reading a paper on 'Are there Philosophical Problems?'). Since I had never seen any of his unpublished manuscripts which were privately circulated by some of his pupils I had been wondering whether he had modified what I here call his 'doctrine'; but on this, the most fundamental and influential part of his teaching, I found his views unchanged.
(1) those which are purely logical or mathematical, to be answered by logical or mathematical propositions, and therefore not philosophical; (2) those which are factual, to be answered by some statement belonging to empirical science, and therefore again not philosophical; (3) those which are combinations of (1) and (2), and therefore again not philosophical; and (4) meaningless pseudo-problems such as, 'Do all cats equal 173?' or, 'Is Socrates identical?' or, 'Does an invisible, untouchable, and apparently altogether unknowable Socrates exist?'.
Wittgenstein's idea of eradicating philosophy (and theology) with the help of an adaptation of Russell's theory of types was ingenious and original (and more radical even than Comte's positivism, which it resembles closely).? This idea became the inspiration of a powerful modern school of language analysts who have inherited his belief that there are no genuine philosophical problems, and that all a philosopher can do is to unmask and dissolve the linguistic puzzles which have been proposed by traditional philosophy.
My own view of the matter is that only as long as I have genuine philosophical problems to solve shall I continue to take an interest in philosophy. I fail to understand the attraction of a philosophy without problems. I know, of course, that many people talk nonsense; and it is conceivable that it should become one's task (an unpleasant one) to unmask somebody's nonsense, for it may be dangerous nonsense. But I believe that some people have said things which were not very good sense, and certainly not very good grammar, but which were all the same highly interesting and exciting, and perhaps more worth listening to than the good sense of others. I may mention the differential and integral calculus which, especially in its early forms, was no doubt completely paradoxical and nonsensical by Wittgenstein's (and other) standards; which became, however, reasonably well founded as the result of some hundred years of great mathematical efforts; but whose foundations even at this very moment are still in need, and in the process, of clarification.?? We might
? Cf. note 51 (2) to ch. 11 of my Open Society
?? I am alluding to G. Kreisel's recent construction (Journal of Symbolic Logic, 17, 1952, 57) of a monotone bounded sequence of rational's every term of which can be actually computed, but which does not possess a computable limit - in contradiction to what appears to be the prima facie interpretation of the classical theorem of Bolzano and Weierstrass, but in agreement, it seems, with Brouwer's doubts about this theorem.
remember in this context that it was the contrast between the apparent absolute precision of mathematics and the vagueness and imprecision of philosophical language which deeply impressed the earlier followers of Wittgenstein. But had there been a Wittgenstein to use his weapons against the pioneers of the calculus, and had he succeeded in eliminating their nonsense where their contemporary critics (such as Berkeley, who was fundamentally right) failed, he would have strangled one of the most fascinating and philosophically important developments in the history of thought. Wittgenstein once wrote: 'Whereof one cannot speak, thereof one must be silent.' It was, if I remember rightly, Erwin Schrödinger who replied: 'But it is only here that speaking becomes worth while.'??a The history of the calculus - and perhaps of Schrödinger's own theory?? - bears him out.
No doubt we should all train ourselves to speak as clearly, as precisely, as simply, and as directly, as we can. Yet I believe that there is not a classic of science, or of mathematics, or indeed a book worth reading that could not be shown, by a skilful application of the technique of language analysis, to contain many meaningless pseudo-propositions and what some people might call 'tautologies' (이 문장은 Yet I don't believe that there is a classic of science, or of mathematics, or indeed a book worth reading that could not be shown, by a skilful application of the technique of language analysis, to contain many meaningless pseudo-propositions and what some people might call 'tautologies'로 표현해야 올바른 표현이 된다. - 역자 주.).
Moreover, I believe that even Wittgenstein's original adaptation of Russell's theory rests upon a logical mistake. From the point of view of modern logic there no longer appears to be any justification for speaking of pseudo-statements or type mistakes or category-mistakes within ordinary, naturally grown languages (as opposed to artificial calculi) so long as the conventional rules of custom and grammar are observed. one may even say that the positivist who tells us with the air of the initiated that we are using meaningless words, or that we are talking nonsense, literally does not know what he is talking about - he simply repeats what he has heard from others who also did not know. But this raises a technical question which I cannot deal with here. (It is dealt with, however, in chapters 11 to 14, below.)
III
I have promised to say something in defence of Wittgenstein's views. What I wish to say is, first, that there is much philosophical writing (especially in the Hegelian school) which may justly be criticized as meaningless verbiage; secondly, that this kind of irresponsible writing was checked, for a time at least, by the influence of Wittgenstein and the language analysts (although it is likely that the most wholesome influence in this respect was the example of Russell who, by the incomparable charm and clarity of his writings, established the fact that subtlety of content is compatible with lucidity and unpretentiousness of style).
But I am prepared to admit more. In partial defence of Wittgenstein's views, I am prepared to adopt the following two theses.
My first thesis is that every philosophy, and especially every philosophical 'school', is liable to degenerate in such a way that its problems become practically indistinguishable from pseudo-problems, and its cant, accordingly, practically indistinguishable from meaningless babble. This, I shall try to show, is a consequence of philosophical inbreeding. The degeneration of philosophical schools in its turn is the consequence of the mistaken belief that one can philosophize without having been compelled to philosophize by
??a After this paper was first published Schrödinger told me that he could not remember saying this, and that he did not believe that he ever said it; but he liked the remark. (Added 1964: I have found since that its real author was my old friend Franz Urbach.)
?? Before Max Born proposed his famous probability interpretation, Schrödinger's wave equation was, some might contend, meaningless. (This is not, however, my opinion.)
problems which arise outside philosophy - in mathematics, for example, or in cosmology, or in politics, or in religion, or in social life. In other words my first thesis is this. Genuine philosophical problems are always rooted in urgent problems outside philosophy, and they die if these roots decay. In their efforts to solve them, philosophers are liable to pursue what looks like a philosophical method or technique or an unfailing key to philosophical success.?? But no such methods or techniques exist; in philosophy methods are unimportant; any method is legitimate if it leads to results capable of being rationally discussed. What matters is not methods or techniques but a sensitivity to problems, and a consuming passion for them; or, as the Greeks said, the gift of wonder.
These are those who feel the urge to solve a problem, those for whom a problem becomes real, like a disorder which they have to get out of their system.?? They may make a contribution even if they bind themselves to a particular method or a technique. But there are others who do not feel this urge, who have no serious and pressing problem but who nevertheless produce exercises in fashionable methods, and for whom philosophy is application (of whatever insight or technique you like) rather than search. They are luring philosophy into the bog of pseudo-problems and verbal puzzles; either by offering us pseudo-problems for real ones (the danger which Wittgenstein saw), or by persuading us to concentrate upon the endless and pointless task of unmasking what they rightly or wrongly take for pseudo-problems or 'puzzles' (the trap into which Wittgenstein fell).
My second thesis is that what appears to be the prima facie method of teaching philosophy is liable to produce a philosophy which answers Wittgenstein's description. What I mean by 'prima facie method of teaching philosophy', and what would seem to be the only method, is that of giving the beginner (whom we take to be unaware of the history of mathematical, cosmological, and other ideas of science as well as of politics) the works of the great philosophers to read; the works, say, of Plato and Aristotle, Descartes and Leibniz, Locke, Berkeley, Hume, Kant and Mill. What is the effect of such a course of reading? A new world of astonishingly subtle and vast abstractions opens itself before the reader; abstractions on an extremely high and difficult level. Thoughts and arguments are put before his mind which sometimes are not only hard to understand, but which seem to him irrelevant because he cannot find out what they may be relevant to. Yet the student knows that these are the great philosophers, that this is the way of philosophy. Thus he will
?? It is very interesting that the imitators were always inclined to believe that the 'master' did his work with the help of a secret method or a trick. It is reported that in J. S. Bach's days some musicians believed that he possessed a secret formula for the construction of fugue themes.
It is also interesting to note that all the philosophies which have become fashionable (so far as I am aware) have offered their disciplines a kind of method for producing philosophical results. This is true of Hegelian essentialism which teaches us its adherents to produce essays on the essence or nature or idea of everything - the soul, the universe, or the University; it is true of Husserl's phenomenology; of existentialism; and also of language analysis.
?? I am alluding to a remark by Professor Gilbert Ryle, who says on page 9 of his Concept of Mind: 'Primarily I am trying to get some disorders out of my own system.'
make an effort to adjust his mind to what he believes (mistakenly, as we shall see) to be their way of thinking. He will attempt to speak their queer language, to match the tortuous spirals of their argumentation, and perhaps even tie himself up in their curious knots. Some may learn these tricks in a superficial way, others may begin to become genuinely fascinated addicts. Yet I feel that we ought to respect the man who having made his effort comes ultimately to what may be described as Wittgenstein's conclusion: 'I have learned the jargon as well as anybody. It is very clever and captivating. In fact, it is dangerously captivating; for the simple truth about the matter is that it is much ado about nothing - just a lot of nonsense.'
Now I believe such a conclusion to be grossly mistaken; yet it is the almost inescapable outcome, I contend, of the prima facie method of teaching philosophy here described. (I do not deny, of course, that some particularly gifted students may find very much more in the works of the great philosophers than this story indicates - and without self-deception.) For the student's chance of discovering the extra-philosophical problems (mathematical, scientific, moral, and political problems) which inspired these great philosophers is very small indeed. As a rule, these problems can be discovered only by studying the history of, for example, scientific ideas, and especially the problem-situation in mathematics and the sciences during the period in question; and this in turn presupposes a considerable acquaintance with mathematics and science. Only if he understands the contemporary problem-situation in the sciences can the student of the great philosophers understand that they tried to solve urgent and concrete problems; problems which they found could not be dismissed. And only after understanding this can the student attain a different picture of the great philosophies - one which makes sense of the apparent nonsense.
I shall try to establish my two theses with the help of examples; but before turning to these examples, I wish to summarize my theses, and to balance my account with Wittgenstein.
My two theses amount to the contention that as philosophy is deeply rooted in non-philosophical problems, Wittgenstein's negative judgment is correct, by and large, so far as philosophies are concerned which have forgotten their extra-philosophical roots; and that these roots are easily forgotten by philosophers who 'study' philosophy, instead of being forced into philosophy by the pressure of non-philosophical problems.
My view of Wittgenstein's doctrine may be summed up as follows. It is perhaps true, by and large, that 'pure' philosophical problems do not exist; for indeed the purer a philosophical problem becomes the more is lost of its original significance, and the more liable is its discussion to degenerate into empty verbalism. on the other hand there exist not only genuine scientific problems, but genuine philosophical problems. Even if, upon analysis, these problems turn out to have factual components, they need not be classified as belonging to science. And even if they should be soluble by, say, purely logical means they need not be classified as purely logical or tautological. Analogous situations arise in physics. For example, the problem of explaining series of spectral lines (with the help of a hypothesis concerning the structure of atoms) may turn out to be soluble by purely mathematical calculations. But this again does not imply that the problem belonged to pure mathematics rather than to physics. We are perfectly justified in calling a problem 'physical' if it is connected with problems and theories which have been traditionally discussed by physicists (such as the problem of the constitution of matter) even if the means used for its solution turn out to be purely mathematical. As we have seen, the solution of problems may cut through the boundary of many sciences. Similarly, a problem may rightly be called 'philosophical' if we find that although originally it arose in connection with, say, atomic theory it is more closely connected with the problems and theories which have been discussed by philosophers than with theories nowadays treated by physicists. And again, it does not matter in the least what kind of interest even though in some of its methods it has become closely allied with what is perhaps better called 'physics'. To say that since it deals with factual issues it must belong to science rather than to philosophy is not only pedantic but clearly the result of an epistemological, and thus of a philosophical, dogma. Similarly, there is no reason why a problem soluble by logical means should be denied the attribute 'philosophical'. It may well be typically philosophical, or physical, or biological. Logical analysis played a considerable part in Einstein's special theory of relativity; and it was partly this fact which made the theory philosophically interesting, and which gave rise to a wide range of philosophical problems connected with it.
Wittgenstein's doctrine turns out to be the result of the thesis that all genuine statements (and therefore all genuine problems) can be classified into one of two exclusive classes: factual statements (synthetic a priori), which belong to pure formal logic or pure mathematics. This simple dichotomy, although extremely valuable for a rough survey, turns out to be for many purposes too simple.?? But although it is specially designed, as it were, to exclude the existence of philosophical problems, it falls considerably short of this
?? Already in my L. Sc. D. of 1934 I had pointed out that a theory such as Newton's may be interpreted either as factual or as consisting of implicit definitions (in the sense of Poincaré and Eddington), and that the interpretation which a physicist adopts exhibits itself in his attitude towards tests which go against his theory rather than in what he says. I also pointed out that there are non-analytical theories which are not testable (and therefore not a posteriori) but which had a great influence on science. (Examples are the early atomic theory, or the early theory of action by contact.) I called such untestable theories 'metaphysical', and asserted that they were not meaningless. The dogma of the simple dichotomy has been recently attacked, on very different lines, by. F. H. Heinemann (Proc. of the Xth Intern. Congress of Philosophy, Fasc. 2, 629, Amsterdam, 1949), by W. V. Quine, and by Morton G. White. It may be remarked, again from a different point of view, that the dichotomy applies in a precise sense only to a formalized language, and therefore is liable to break down for those languages in which we must speak prior to any formalization, i. e. in those languages in which all the traditional problems were conceived.
aim; for even if we accept the dichotomy we can still claim that factual or logical or mixed problems may turn out, in certain circumstances, to be philosophical.
IV
I now turn to my first example: Plato and the Crisis in Early Greek Atomism.
My thesis here is that Plato's central philosophical doctrine, the so-called Theory of Forms or Ideas, cannot be properly understood except in an extra-philosophical context;?? more especially in the context of the critical problem situation in Greek science?? (mainly in the theory of matter) which developed as a result of the discovery of the irrationality of the square root of two. If my thesis is correct, Plato's theory has not so far been fully understood. (Whether a 'full' understanding can ever be achieved is, of course, most questionable.) But a more important consequence would be that it can never be understood by philosophers trained in accordance with the prima facie method described in the foregoing section - unless, of course, they are specially and ad hoc informed of the relevant facts. (These they may have to accept on authority - which means abandoning the prima facie method of teaching philosophy described above.)
It seems likely?? that Plato's Theory of Forms is both in origin and in content closely connected with the Pythagorean theory that all things are in essence numbers. The details of this connection and the connection between Atomism and Pythagoreanism are perhaps not so well known. I will therefore briefly tell the story here, as I see it at present.
It appears that the founder of the Pythagorean order or sect was
?? In my Open Society and Its Enemies I have tried to explain in some detail another extra-philosophical root of the same doctrine - its political root. I also discussed there (in note 9 to ch. 6 of the revised 4th edn., 1962) the problem with which I am concerned in the present section, but from a somewhat different angle. The note referred to and the present section overlap a little; but they largely supplement each other. Relevant references (especially to Plato) omitted here will be found there.
?? There are historians who deny that the term 'science' can be properly applied to any development which is older than the sixteenth or even the seventeenth century. But quite apart from the fact that controversies about labels should be avoided, there can, I believe, no longer be any doubt nowadays about the astonishing similarity, not to say identity, of the aims, interests, activities, arguments and methods of, say, Galileo and Archimedes, or Copernicus and Plato, or Kepler and Aristarchus (the 'Copernicus of antiquity'). And any doubt concerning the extreme age of scientific observation and of careful computations based upon observation has been dispelled by the discovery of new evidence concerning the history of ancient astronomy. We can now draw a parallel not only between Tycho and Hipparchus, but even between Hansen (1857) and Cidenas the Chaldean (314 B.C.), whose computations of the 'constants for the motion of Sun and Moon' are without exception comparable in precision to those of the best nineteenth-century astronomers. 'Cidenas' value for the motion of the Sun from the Node (0"·5 too great), although inferior to Brown's, is superior to at least one of the most widely used modern values', wrote J. K. Fotheringham in 1928, in his admirable article 'The Indebtedness of Greek to Chaldean Astronomy' (The Observatory, 1928, 51, No. 653), upon which my contention concerning the age of metrical astronomy is based.
?? If we may trust Aristotle's famous account in his Metaphysics.
deeply impressed by two discoveries. The first was that a prima facie purely qualitative phenomenon such as musical harmony was, in essence, based upon the purely numerical ratios 1:2; 2:3; 3:4. The second was that the 'right' or 'straight' angle (obtainable for example by folding a leaf twice so that the two folds form a cross) was connected with the purely numerical ratios 3:4:5, or 5:12:13 (the sides of rectangular triangles). These two discoveries, it appears, led Pythagoras to the somewhat fantastic generalization that all things are, in essence, numbers or ratios of numbers; or that number is the ratio (logos = reason), the rational essence, of things, or their real nature.
Fantastic as this idea was, it proved fruitful in many ways. one of its most successful applications was to simple geometrical figures such as squares, rectangular and isosceles triangles, and also to certain simple solids such as pyramids. The treatment of some of these geometrical problems was based upon the so-called gnōmōn.
This can be explained as follows. If we indicates a square by four dots,
. .
. .
we may interpret this as the result of adding three dots to the one dot on the upper left corner. These three dots are the first gnōmōn; we may indicate it thus:
. .
By adding a second gnōmōn, consisting of five more dots, we obtain
. . .
. . .
One sees at once that every number of the sequence of odd numbers, 1, 3, 5, 7 ..., forms the gnōmōn of a square, and that the sums 1, 1 + 3, 1 + 3 + 5, 1 + 3 + 5 + 7, ... are the square numbers, and that if n is the (number of dots in the) side of a square, its area (total number of dots = n²) will be equal to the sum of the first n odd numbers.
As with the treatment of squares, so with the treatment of equilateral triangles. The following figure may be regarded as representing a growing triangle - growing downwards through the addition of ever new horizontal lines of dots.
.
. .
. . .
. . . .
Here each gnōmōn is a last horizontal line of dots and each element of the sequence 1, 2, 3, 4, . . . is a gnōmōn. The 'triangular numbers' are the sums 1 + 2; 1 + 2 + 3; 1 + 2 + 3 + 4, etc., that is, the sums of the first n natural numbers. By putting two such triangles side by side
. . . . .
. . . . .
. . . . .
we obtain the parallelogram with the horizontal side n + 1 and the other side n, containing n(n + 1) dots. Since it consists of two isosceles triangles its number is 2(1 + 2 + . . . + n), so that we obtain the equation
(1) 1 + 2 + . . . + n = ½n(n + 1)
and thus
(2) d(1 + 2 + . . . + n
From this it is easy to obtain the general formula for the sum of an arithmetical series.
We also obtain 'oblong numbers', that is the numbers of oblong rectangular figures of which the simplest is
. . . . .
. . . . .
. . . . .
with the oblong numbers 2 + 4 + 6 . . . ; the gnōmōn of an oblong is an even number, and the oblong numbers are the sums of the even numbers.
These considerations were extended to solids; for example, by summing the first triangular numbers, pyramid numbers were obtained. But the main application was to plane figures, or shapes, or 'Forms'. These were believed to be characterized by the appropriate sequence of numbers, and thus by the numerical ratios of the consecutive numbers of the sequence. In other words, 'Forms' are numbers or ratios of numbers. On the other hand, not only shapes of things, but also abstract properties, such as harmony and 'straightness' are numbers. In this way the general theory that numbers are the rational essences of all things is arrived at.
It seems probable that the development of this view was influenced by the similarity of the dot-diagrams with the diagram of a constellation such as the Lion, or the Scorpion, or the Virgo. If a Lion is an arrangement of dots it must have a number. In this way Pythagoreanism seems to be connected with the belief that the numbers, or 'Forms', are heavenly shapes of things.
V
One of the main elements of this early theory was the so-called 'Table of Opposites', based upon the fundamental distinction between odd and even numbers. It contains such things as
ONE MANY
ODD EVEN
MALE FEMALE
REST(BEING) CHANGE (BECOMING)
DETERMINATE INDETERMINATE
SQUARE OBLONG
STRAIGHT CROOKED
RIGHT LEFT
LIGHT DARKNESS
GOOD BAD
In reading through this strange table one gets some idea of the working of the Pythagorean mind, and why not only the 'Forms' or shapes of geometrical figures were considered to be numbers, in essence, but also abstract ideas, such as Justice and, of course, Harmony and Health, Beauty and Knowledge.?? The table is interesting also because it was taken over, with very little alteration, by Plato. The earliest version of Plato's famous theory of 'Forms' or 'Ideas' may indeed be described, somewhat roughly, as the doctrine that the 'Good' side of the Table of Opposites constitutes an (invisible) Universe, a Universe of Higher Reality, of the Unchanging and Determinate 'Forms' of all things; and that True and Certain Knowledge (epistēmē = scientia = science) can be of this Unchanging and Real Universe only, while the visible world of change and flux in which we live and die, the world of generation and destruction, the world of experience, is only a kind of reflection or copy of that Real World. It is only a world of appearance of which no True and Certain Knowledge can be obtained. All that can be obtained in the place of Knowledge (epistēmē) are the plausible but uncertain and prejudiced opinions (doxa) of fallible mortals.?? In his interpretation of the Table of Opposites Plato was influenced by Parmenides, the man whose challenge led to the development of Democritus' atomic theory.
VI
The Pythagorean theory, with its dot-diagrams, contains no doubt the suggestion of a very primitive atomism. How far the atomic theory of Democritus was influenced by Pythagoreanism is difficult to assess. Its main influences came, so much seems certain, from the Eleatic School: from Parmenides and from Zeno. The basic problem of this school, and of Democritus, was that of the rational understanding of change. (I differ here from the interpretations of Cornford and others.) I think that this problem derives from Heraclitus, and thus from Ionian rather than from Pythagorean thought,?? and that it still remains the fundamental problem of Natural Philosophy.
Although Parmenides was perhaps not a physicist (unlike his great Ionian predecessors), he may be described, I believe, as having fathered theoretical physics. He produced an anti-physical?? (rather than a-physical, as Aristotle said) theory which, however, was the first hypothetico-deductive system. And it was the beginning of a long series of such systems of physical theories, each of which was an improvement on its predecessors. As a rule the improvement was found necessary because it was realized that the earlier system was falsified by certain facts of experience. Such an empirical refutation of the consequences of a deductive system leads to efforts at its reconstruction, and thus to a new and improved theory which as a rule clearly bears the marks of its ancestry, of the older theory as well as of the refuting experience.
?? Plato's distinction (epistēmē vs. doxa) is derived through Parmenides from Xenophanes (truth vs. conjecture or seeming). Plato clearly realized that all knowledge of the visible world, the changing world of appearance, consists of doxa; that it is tainted by uncertainty even if it utilizes the epistēmē, the knowledge of the unchanging 'Forms' and of pure mathematics, to the utmost; and even if it interprets the visible world with the help of a theory of the invisible world. Cf. Cratylus, 439b ff., Republic, 476d ff.; and especially Timaeus, 29b ff., where the distinction is applied to those parts of Plato's own theory which we should nowadays call 'physics' or 'cosmology', or, more generally, 'natural science'. They belong, Plato says, to the realm of doxa (in spite of the fact that science = scientia = epistēmē; cf. my remarks on this problem in ch. 20 below). For a different view concerning Plato's relation to Parmenides see Sir David Ross, Plato's Theory of Ideas, Oxford, 1951, p. 164.
?? Karl Reinhardt in his Parmenides (1916; second edition 1959, p. 220) says very forcefully: 'The history of philosophy is a history of its problems. If you want to explain Heraclitus, tell us first what his problem was.' I fully agree; and I believe, as against Reinhardt, that Heraclitus' problem was the problem of change - or more precisely, of the self-identity (and non-identity) of the changing thing during change. (See also my Open Society, ch. 2.) If we accept Reinhardt's evidence about the close link between Heraclitus and Parmenides, then this view of Heraclitus' problem makes of Parmenides' system an attempt to solve the problem of the paradoxes of change by making changes unreal. As against this, Cornford and his disciples follow Burnet's doctrine that Parmenides was a (dissident) Pythagorean. This may well be true, but the evidence in its favour does not show that he did not also have an Ionian teacher. (See also ch. 5, below.)
?? Cp. Plato, Theaetetus, 181a, and Sextus Empiricus, Adv. Mathem. (Bekker), X. 46, p.485, 25.
These experiences or observations were, we shall see, very crude at first, but they became more and more subtle as the theories became more and more capable of accounting for the cruder observations. In the case of Parmenides' theory the clash with observation was so obvious that it would seem perhaps fanciful to describe the theory as the first hypothetico-deductive system of physics. We may, therefore, describe it as the last pre-physical deductive system, whose refutation or falsification gave rise to the first physical theory of matter, the atomistic theory of Democritus.
Parmendes' theory is simple. He finds it impossible to understand change or movement rationally, and concludes that there is really no change - or that change is only apparent. But before we indulge in feelings of superiority in the face of such a hopelessly unrealistic theory we should first realize that there is a serious problem here. If a thing X changes, then clearly it is no longer the same thing X. on the other hand, we cannot say that X changes without implying that X persists during the change; that it is the same thing X, at the beginning and at the end of the change. Thus it appears that we arrive at a contradiction, and that the idea of a thing that changes, and therefore the idea of change, is impossible.
All this sounds very philosophical and abstract, and so it is. But it is a fact that the difficulty here indicated has never ceased to make itself felt in the development of physics.?? And a deterministic system such as the field theory of Einstein might even be described as a four-dimensional version of Parmenides' unchanging three-dimensional universe. For in a sense no change occurs in Einstein's four-dimensional block-universe. Everything is there just as it is, in its four-dimensional locus; change becomes a kind of 'apparent' change; it is 'only' the observer who as it were glides along his world-line and becomes successively conscious of the different loci along this world-line; that is, of his spatio-temporal surroundings...
To return from this new Parmenides to the older father of theoretical physics, we may paraphrase his deductive theory roughly as follows.
(1) only what it, is.
(2) What is not does not exist.
(3) Non-being, that is, the void, does not exist.
(4) The world is full.
(5) The world has no parts; it is one huge block (because it
is full).
(6) Motion is impossible (since there is no empty space within which anything could move).
21 This may be seen from Emile Meyerson's Identity and Reality, one of the most interesting philosophical studies of the development of physical theories. Hegel (following Heraclitus, or Aristotle's account of him) took the fact of change (which he considered self-contradictory) to prove the existence of contradictions in the world, and therefore to disprove the 'law of contradiction'; i. e. the principle that our theories must avoid contradictions at all cost. Hegel and his followers (especially Engels, Lenin, and other Marxists) began to see 'contradictions' everywhere in the world, and denounced all philosophies upholding the law of contradiction as 'metaphysical', a term which they used to imply that these philosophies ignore the fact that the world changes. See ch. 15, below.
The conclusions (5) and (6) were obviously contradicted by facts. Thus Democritus argued from the falsity of the conclusion to that of the premises:
(6') There is motion (thus motion is possible).
(5') The world has parts; it is not one, but many.
(4') Thus the world cannot be full.??
(3') The void (or non-being) exists.
So far the theory had to be altered. With regard to being, or to the many existing things (as opposed to the void), Democritus adopted Parmenides' theory that they had no parts. They were indivisible (atoms), because they were full, because they had no void inside.
The main point about this theory is that it gives a rational account of change. The world consists of empty space (the void) with atoms in it. The atoms do not change; they are Parmenidean indivisible block universes in miniature.?? All change is due to rearrangement of atoms in space. Accordingly all change is movement. Since the only kind of novelty which can arise on this view is novelty of arrangement,?? it will be possible, in principle, to predict all future changes in the world, provided we manage to predict the motion of all atoms (or, in modern parlance, all mass-points).
Democritus' theory of change was of tremendous importance for the development of physical science. It was partly accepted by Plato, who retained much of atomism, explaining change, however, not only by unchanging yet moving atoms but also by other 'Forms' which were subject neither to change nor to motion. But it was condemned by Aristotle who taught in its stead?? that all change was the unfolding of the inherent potentialities of essentially unchanging substances. Aristotle's theory of substances as the subjects of change became dominant; but it proved barren;?? and Democritus' metaphysical theory that all change must be explained by movement became the tacitly accepted programme of work in physics down to our own day. It is still part of the philosophy of physics, in spite of the fact that physics itself has outgrown it (to say nothing of the biological and social sciences). For with Newton, in addition to
?? The inference from the existence of motion to that of a void is not valid because Parmenides' inference from the fullness of the world to the impossibility of motion is not valid. Plato seems to have been the first to see, if only dimly, that in a full world circular or vortex-like motion is possible, provided that there is a liquid-like medium in the world. (Tea leaves can move with the vortex of tea in the cup.) This idea, first offered somewhat half-heartedly in the Timaeus (where space is 'filled', 52e) becomes the basis of Cartesianism and of the theory of the 'luminiferous ether' as it was held down to 1905 (become 앞에 쉼표가 필요함. 원문의 오류로 보임. - 역자 주). (See also note 44, below.)
?? Democritus' theory also admitted large block-atoms, but the vast majority of his atoms were invisibly small.
?? Cp. The Poverty of Historicism, section 3.
?? Inspired by Plato's Timaeus, 55, where the potentialities of the elements are explained by the geometrical properties (and thus the substantial forms) of the corresponding solids.
?? The barrenness of the 'essentialist' (cf. note 2 above) theory of substance is connected with its anthropomorphism; for substances (as Locke saw) take their plausibility from the experience of a self-identical but changing and unfolding self. But although we may welcome the fact that Aristotle's substance has disappeared from physics, there is nothing wrong, as Professor Hayek says, in thinking anthropomorphically about man; and there is no philosophical or a priori reason why it should disappear from psychology.
moving mass-points, forces of changing intensity (and direction) enter the scene. True, the changes of the Newtonian forces can be explained as due to, or dependent upon, motion; that is, upon the changing position of particles. But they are nevertheless not identical with changes in the position of particles; owing to the inverse square law the dependence is not even a linear one. And with Faraday and Maxwell, changing fields of forces become as important as material atomic particles. That our modern atoms turn out to be composite is a minor matter; from Democritus' point of view not our atoms but rather our elementary particles would be the real atoms - except that these too turn out to be liable to change. Thus we have a most interesting situation. A philosophy of change, designed to meet the difficulty of understanding change rationally, serves science for thousands of years, but is ultimately superseded by the development of science itself; and this fact passes practically unnoticed by philosophers who are busily denying the existence of philosophical problems.
Democritus' theory was a marvellous achievement. It provided a theoretical framework for the explanation of most of the empirically known properties of matter (discussed already by the Ionians), such as compressibility, degrees of hardness and resilience, rarefaction and condensation, coherence, disintegration, combustion, and many others. But the theory was important not only as an explanation of the phenomena of experience. First, it established the methodological principle that a deductive theory or explanation must 'save the phenomena';?? that is, be in agreement with experience. Secondly, it showed that a theory may be speculative, and based upon the fundamental (Parmenidean) principle that the world as it must be understood by argumentative thought turns out to be different from the world of prima facie experience, from the world as seen, heard, smelled, tasted, touched;?? and that such a speculative theory may nevertheless accept the empiricist 'criterion' that it is the visible that decides the acceptance or rejection of a theory of the invisible?? (such as the atoms). This philosophy has remained fundamental to the whole development of physics, and has continued to conflict with all 'relativistic' and 'positivistic'?? philosophical tendencies.
Furthermore, Democritus' theory led to the first successes of the method of exhaustion (the forerunner of the calculus of integration), since Archimedes himself acknowledged that Democritus was the first to formulate the theory of the volumes of cones and pyramids.?? But perhaps the most fascinating element in Democritus' theory is his
?? Cp. note 6 to chapter 3, below.
?? Cf. Democritus, Diels. fragm. 11 (cf. Anaxagoras, Diels, fragm. 21; see also fragm. 7).
?? Cf. Sextus Empiricus, Adv. mathem. (Bekker), vii,* 140, p. 221, 23B.
?? 'Relativistic' in the sense of philosophical relativism, e. g. of Protagoras' homo mensura doctrine. It is, unfortunately, still necessary to emphasize that Einstein's theory has nothing in common with this philosophical relativism.
'Positivistic' as were the tendencies of Bacon; of the theory (but unfortunately not the practice) of the early Royal Society; and in our time of Mach (who opposed atomic theory), and of the sense-data theorists.
?? Cf. Diels, fragm. 155, which must be interpreted in the light of Archimedes (ed. Heiberg) II?, p. 428f. Cf. S. Luria's most important article 'Die Infinitesimalmethode der antiken Atomisten' (Quellen & Studien zur Gesch. d. Math., B., 2, Heft 2, 1932, p. 142).
doctrine of the quantization of space and time. I have in mind the doctrine, now extensively discussed,?? that there is a shortest distance and a smallest time interval; that is to say, that there are distances in space and time (elements of length and time, Democritus' amerēs?? in contradistinction to his atoms) such that no smaller ones are possible.
VII
Democritus' atomism was developed and expounded as a point for point reply?? to the detailed arguments of his Eleatic predecessors, of Parmenides and his pupil Zeno. Especially Democritus' theory of atomic distances and time intervals is the direct result of Zeno's arguments, or more precisely, of the rejection of Zeno's conclusions. But nowhere in what we know of Zeno is there an allusion to the discovery of irrationals which is of decisive importance for our story.
We do not knows the date of the proof of the irrationality of the square root of two, or the date when the discovery became publicly known. Although there existed a tradition ascribing it to Pythagoras (sixth century B.C.), and although some authors?? call it the 'theorem of Pythagoras', there can be little doubt that the discovery was not made, and certainly not publicly known, before 450 B.C., and probably not before 420. When Democritus knew about it is uncertain. I now feel inclined to believe that he did not; and that the title of Democritus' two lost books, Peri alogōn grammōn kai nastōn, should be translated 'On Illogical Lines and Full Bodies (Atoms)',?? and that these two books do not contain any reference to the discovery of irrationality.??
?? Cf. A. March, Natur und Erkenntnis, Vienna, 1948, p. 193 f.
?? Cf. S. Luria, op. cit., especially pp. 148 ff., 172 ff. Miss A. T. Nicols in 'Indivisible Lines' (Class. Quarterly, xxx, 1936, 120 f.) argues that 'two passages, one from Plutarch, the other from Simplicius' show why Democritus 'could not believe in indivisible lines'; she does not however discuss Luria's opposing views of 1932, which I find much more convincing, especially if we remember that Democritus tried to answer Zeno (see next note). But whatever Democritus' views on indivisible or atomic distances, Plato appears to have thought that Democritus' atomism needed revision in the light of the discovery of the irrationals. Heath however (Greek Mathematics, 1, 1921, p. 181, referring to Simplicius and Aristotle) also believes that Democritus did not teach the existence of indivisible lines.
?? This point for point reply is preserved in Aristotle‘s On generation and Corruption, 316a, 14 ff., a very important passage first identified as Democritean by I. Hammer Jensen in 1910 and carefully discussed by Luria who says (op. cit., 135) of Parmenides and Zeno: 'Democritus borrows their deductive arguments, but he arrives at the opposite conclusion.'
?? Cf. G. H. Hardy and E. M. Wright, Introduction to the Theory of Numbers, 1938, pp. 39, 42, where a very interesting historical remark on Theodorus' proof, as reported in Plato's Theaetetus, will be found. See now also the article by A. Wasserstein, 'Theaetetus and the History of the Theory of Numbers', Classical Quarterly, 8, N. S., 1958, pp. 165-79, the best discussion of the subject known to me.
?? Rather than On Irrational Lines and Atoms, as I translated it in note 9 to ch, 6 of my Open Society (second edn.). What is probably meant by the title (considering Plato's passage mentioned in the next note) might, I think, be best rendered by 'On Crazy Lines and Atoms'. Cf. H. Vogt, Bibl. Math., 1910. 10, 147 (against whom Heath argues, op cit., 156 f., but not I think quite successfully) and S. Luria, op. cit., pp. 168 ff., where it is convincingly suggested that (Arist.) De insec, lin., 968b 17 and Plutarch, De comm. notit., 38. 2, p. 1078 f., contain traces of Democritus' work. According to these sources, Democritus' argument was this. If lines are infinitely divisible then they are composed of an infinity of ultimate units and are therefore all related like ∞ : ∞, that is to say, they are all 'non-comparable' (there is no proportion). Indeed, if lines are considered as classes of points, the cardinal 'number' (potency) of the points of a line is, according to modern views, equal for all lines, whether the lines are finite or infinite. This fact has been described as 'paradoxical' (for example, by Bolzano) and might well have been described as 'crazy' by Democritus. It may be noted that according to Brouwer even the classical theory of the Lebesgue measure of a continuum leads to fundamentally the same results; for Brouwer asserts that all classical continua have zero measure, so that the absence of a ratio is here expressed by 0 : 0. Democritus' result (and his theory of amerēs) appears to be inescapable as long as geometry is based on the Pythagorean arithmetical method, i. e. on the counting of dots.
?? This would be in keeping with the fact, mentioned in the note cited from the Open Society, that the term 'alogos' was, it seems, only much later used for 'irrational', and that Plato who alludes (Republic 534d) to Democritus' title, uses 'alogos' there in the sense of 'crazy'; he never uses it as a synonym for 'arrhētos'' as far as I know.
My belief that Democritus was unaware of the problem of irrationals is based on the fact that there are no traces of a defence of his theory against the blow which it received from this discovery. Yet the blow was as fatal to Atomism as it was to Pythagoreanism. Both theories were based on the doctrine that all measurement is, ultimately, counting of natural units, so that every measurement must be reducible to pure numbers. The distance between any two atomic points must, therefore, consist of a certain number of atomic distances; thus all distances must be commensurable. But this turns out to be impossible even in the simple case of the distances between the corners of a square, because of the incommensurability of its diagonal d with its side a.
The English term 'incommensurable' is somewhat unfortunate. What is meant is, rather, the non-existence of a ratio of natural numbers; for example, what can be proved in the case of the diagonal of the unit square is that there do not exist two natural numbers, n and m, whose ration, n/m, is equal to the diagonal of the unit square. 'Incommensurability' thus does not mean incomparability by geometrical methods, or by measurement, but incomparability by arithmetical methods of counting, or by natural numbers, including the characteristic Pythagorean method of comparing ratios of natural numbers and including, of course, the counting of units of length (or of 'measure').
Let us look back, for a moment, at the characteristics of this method of natural numbers and their ratios. Pythagoras' emphasis upon Number was fruitful from the point of view of the development of scientific ideas. This is often but somewhat loosely expressed by saying that the Pythagoreans initiated numerical scientific measurement. Now what I want to emphasize is that for the Pythagoreans all this was counting rather than measuring. It was the counting of numbers, of invisible essences or 'Natures' which were Numbers of little dots. They knew that we cannot count these little dots directly, since they are invisible, and that we actually do not count the Numbers or Natural Units, but measure, i. e. count arbitrary visible units. But they interpreted the significance of measurements as revealing, indirectly, the true Ratios of the Natural Units or of the Natural Numbers.
Thus Euclid's methods of proving the so-called 'Theorem of Pythagoras' (Euclid, 1, 47) according to which, if a is the side of a triangle opposite to its right angle between b and c,
(1) a? = b? + c?,
was foreign to the spirit of Pythagorean mathematics. It seems now accepted that the theorem was known to the Babylonians and geometrically proved by them. Yet neither Pythagoras nor Plato appear to have known Euclid's geometrical proof (which uses different triangles with common base and height); for the problem for which they offered solutions, the arithmetical one of finding the integral solutions for the sides of rectangular triangles, can, if (1) is known, be easily solved by the formula (m and n are natural numbers, and m > n)
(2) a = m? + n?; b = 2mn; c = m? - n?.
But formula (2) was apparently unknown to Pythagoras and even to Plato. This emerges from the tradition?? according to which Pythagoras proposed the formula (obtained from (2) by putting m = n + 1)
(3) a = 2n(n +1) + 1; b = 2n(n + 1); c = 2n + 1
which can be read off the gnōmōn of the square numbers, but which is less general than (2), since it fails, for example, for 17: 8: 15. To Plato, who is reported?? to have improved Pythagoras' formula (3), is attributed another formula which still falls short of the general solution (2).
In order to show the difference between the Pythagorean or arithmetical method and the geometrical method, Plato's proof that the square over the diagonal of the unit square (that is, the square with the side 1 and an area of measure 1) has an area of twice the unit square (that is, an area of measure 2) may be mentioned. It consists in drawing a square with the diagonal
½ ½ |
and then showing that we may extend the drawing thus
½ ½ |
from which we obtain the result by counting. But the transition from the first to the second of these figures cannot possibly be shown to be valid by the arithmetic of dots, and not even by the methods of ratios.
That this is, indeed, impossible, is established by the famous proof
?? Procli Diadochi in primum Euclids Elementorum librum commentarii, ed. G. Friedlein, Leipzig, 1873, p. 487, 7-21.
?? By Proclus, op. cit., pp. 428, 21, to 429, 8.
of the irrationality of the diagonal, that is, of the square root of 2, assumed as well-known by Plato and Aristotle. It consists in showing that the assumption
(1) √2 = n/m
that is, that √2 is equal to a ratio of any two natural numbers, n and m, leads to an absurdity.
We first note that we can assume that
(2) not more than one of the two numbers, n and m, is even.
For if both were even, then we could always cancel out the factor 2 so as to obtain two other natural numbers, n' and m', such that n/m = n'/m', and such that at most one of the two numbers, n' and m', would be even. Now by squaring (1) we get
(3) 2 = n?/m?
and from this
(4) 2m? = n?
and thus
(5) n is even.
Thus there must exist a natural number a so that
(6) n = 2a
and we get from (3) and (6)
(7) 2m? = n? = 4a?
and thus
(8) m? = 2a?
But this means
(9) m is even.
It is clear that (5) and (9) contradict (2). Thus the assumption that there are two natural numbers, n and m, whose ratio equals √2, leads to an absurd conclusion. Therefore √2 is not a ratio, it is 'irrational'.
This proof uses only the arithmetic of natural numbers. It therefore uses purely Pythagorean methods, and the tradition that it was discovered within the Pythagorean school need not be questioned. But it is improbable that the discovery was made by Pythagoras, or that it was made very early: Zeno does not seem to know it, nor does Democritus. Moreover, as it destroys the basis of Pythagoreanism, it is reasonable to assume that it was not made long before the order reached the height of its influence; at least not before it was well established; for it seems to have contributed to its decline. The tradition that it was made within the order but kept secret seems to me very plausible. It may be supported by considering that the old term for 'irrational' - 'arrhētos', 'unutterable', or 'unmentionable' - may well have hinted at an unmentionable secret. Tradition has it that the member of the school who gave away the secret was killed for his treachery.?? However this may be, there is little doubt that the realization that irrational magnitudes (they were, of course, not recognized as numbers) existed, and that their existence could be proved, undermined the faith of the Pythagorean order; it destroyed the hope of deriving cosmology, or even geometry, from the arithmetic of natural numbers.
VIII
It was Plato who realized this fact, and who in the Laws stressed its importance in the strongest possible terms, denouncing his compatriots for their failure to gauge its implications. I believe that his whole philosophy, and especially his theory of 'Forms' or 'Ideas', was influenced by it.
Plato was very close to the Pythagorean as well as to the Eleatic School; and although he appears to have felt antipathetic to Democritus he was himself a kind of atomist. (Atomist teaching remained as one of the school traditions of the Academy.??) This is not surprising in view of the close relation between Pythagorean and atomistic ideas. But all this was threatened by the discovery of the irrationals. I suggest that Plato's main contribution to science sprang from his realization of the problem of the irrational, and from the modification of Pythagoreanism and atomism which he undertook in order to rescue science from a catastrophic situation.
He realized that the purely arithmetical theory of nature was defeated, and that a new mathematical method for the description and explanation of the world was needed. Thus he encouraged the development of an autonomous geometrical method. It found its fulfilment in the 'Elements' of the Platonist Euclid.
What are the facts? I shall try briefly to put them all together.
(1) Pythagoreanism and atomism in Democritus' form were both fundamentally based on arithmetic; that is to say on counting.
(2) Plato emphasized the catastrophic character of the discovery of the irrationals.
(3) He inscribed over the gates of the Academy: 'Nobody Untrained in Geometry May Enter My House'. But geometry, according to Plato's immediate pupil Aristotle?? as well as Euclid, typically treats of incommensurables or irrationals, in contradistinction to arithmetic which treats of 'the odd and the even' (i. e. of integers and their relations).
(4) Within a short time after Plato's death his school produced, in Euclid's Elements, a work one of whose main points was that it freed mathematics from the 'arithmetical' assumption of commensurability or rationality.
(5) Plato himself contributed to this development, and especially to the development of solid geometry.
(6) More especially, he gave in the Timaeus a specially
?? The story is told of one Hippasus, a somewhat shadowy figure; he is said to have died at sea (cf. Diels?, 4). See also A. Wasserstein's article mentioned in note 35, above.
?? See S. Luria, especially on Plutarch, loc. cit.
?? An. Post., 76b9; Metaph., 983a20, 1061b1. See also Epinomis, 990d.
geometrical version of the formerly purely arithmetical atomic theory; a version which constructed the elementary particles (the famous Platonic bodies) out of triangles which incorporated the irrational square roots of two and of three. (See below.) In nearly all other respects he preserved Pythagorean ideas as well as some of the most important ideas of Democritus.?? At the same time he tried to eliminate Democritus' void; for he realized?? that motion remains possible even in a 'full' world, provided motion is conceived as of the character of vortices in a liquid. Thus he retained some of the most fundamental ideas of Parmenides.??
(7) Plato encouraged the construction of geometrical models of the world, and especially models explaining the planetary movements. And I believe that Euclid's geometry was not intended as an exercise in pure geometry (as is now usually assumed), but as an organon of a theory of the world. According to this view the 'Elements' is not a 'textbook of geometry' but an attempt to solve systematically the main problems of Plato's cosmology. This was done with such success that the problems, having been solved, disappeared and were almost forgotten; though a trace remains in Proclus who writes, 'Some have thought that the subject matter of the various books [of Euclid] pertains to the cosmos, and that they are intended to help us in our contemplation of, and theorizing about, the universe' (op. cit., note 38 above, Prologus, II, p. 71, 2-5). Yet even Proclus does not mention in this context the main problem - that of the irrationals (of course he does mention it elsewhere); though he points out, rightly, that the 'Elements' culminate with the construction of the 'cosmic' or 'Platonic' regular polyhedra. Ever since?? Plato and Euclid, but not before, geometry (rather than arithmetic) appears as the fundamental
?? Plato took over, more especially, Democritus' theory of vortices (Diels, fragm. 167, 164; cf, Anaxagoras, Diels, 9, and 12, 13; see also the next two footnotes) and his theory of what we nowadays would call gravitational phenomena (Diels, Democritus 164; Anaxagoras, 12, 13, 15, and 2) - a theory which, slightly modified by Aristotle (이 자리에 대쉬[-]가 있어야 할 것이다. 원문의 오류로 보인다. 번역문에는 역자가 삽입했다. - 역자 주), was ultimately discarded by Galileo.
?? The clearest passage is Timaeus, 80c, where it is said that neither in the case of (rubbed) amber nor of the 'Heraclean stone' (magnet) is there any real attraction; 'there is no void and these things push themselves around, one upon another'. on the other hand Plato was not too clear on this point, since his elementary particles (other than the cube and the pyramid) cannot be packed without leaving some (empty?) space between them, as Aristotle observed in De Caelo, 306b5. See also note 22 above (and Timaeus 52e).
?? Plato's reconciliation of atomism and the theory of the plenum ('nature abhors the void') became of the greatest importance for the history of physics down to our own day. For it strongly influenced Descartes, became the basis of the theory of ether and light, and thus ultimately, via Huyghens and Maxwell, of de Broglie's and of Schrödinger's wave mechanics. See my report in Atti d. Congr. Intern. di Filosofia (1958), 2, 1960, pp. 367 ff.
?? An exception is the reappearance of arithmetical methods in Quantum Theory, e. g. in the electron shell theory of the periodic system based upon Pauli's exclusion principle; an inversion of Plato's tendency to geometrize arithmetic (see below).
Concerning the modern tendency towards what is sometimes called 'arithmetization of geometry' (a tendency which is by no means characteristic of all modern work on geometry), it should be noted that it shows little similarity to the Pythagorean approach since sets, or infinite sequences, of natural numbers are its main instruments, rather than the natural numbers themselves.
Only those who confine themselves to 'constructive' or 'finitist' or 'intuitionist' methods of number theory - as opposed to set-theoretic methods - might claim that their attempts to reduce geometry to number theory resemble Pythagorean or pre-Platonic ideas of arithmetization. A great step in this direction has been achieved quite recently, it seems, by the German mathematician E. de Wette.
instrument of all physical explanations and descriptions, in the theory of matter as well as in cosmology.??
IX
These are the historical facts. They go a long way, I believe, towards establishing my main thesis: that what I have called the prima facie method of teaching philosophy cannot lead to an understanding of the problems that inspired Plato. Nor can it lead to an appreciation of what may be justly claimed to be his greatest philosophical achievement, the geometrical theory of the world. The great physicists of the Renaissance - Copernicus, Galileo, Kepler, Gilbert - who turned from Aristotle to Plato intended by this move to replace the Aristotelian qualitative substances or potentialities by a geometrical method of cosmology. Indeed, that is what the Renaissance (in science) largely meant: a renaissance of the geometrical method, which was the basis of the works of Euclid, Aristarchus, Archimedes, Copernicus, Kepler, Galileo, Descartes, Newton, Maxwell, and Einstein.
But is this achievement properly described as philosophical? Does it not rather belong to physics - a factual science; and to pure mathematics - a branch, as Wittgenstein's school would contend, of tautological logic?
I believe that we can at this stage see fairly clearly why Plato's achievement (although it has no doubt its physical, its logical, its mixed, and its nonsensical components) was a philosophical achievement; why at least part of his philosophy of nature and of physics has lasted and, I believe, will last.
What we find in Plato and his predecessors is the conscious construction and invention of a new approach towards the world and towards knowledge of the world. This approach transforms an originally theological idea, the idea of explaining the visible world by a postulated invisible world,?? into the fundamental instrument of theoretical science. The idea was explicitly formulated by Anaxagoras and Democritus?? as the principle of investigation into the nature of matter or body; visible matter was to be explained by hypotheses about invisibles, about an invisible structure which is too small to be seen. With Plato this idea is consciously accepted and generalized; the visible world of change is ultimately to be explained by an invisible world of unchanging 'Forms' (or substances, or essences, or 'natures'; that is, as I shall try to show in more detail, geometrical shapes or figures).
Is this idea about the invisible structure of matter a physical or a philosophical idea? If a physicist merely acts upon this theory, if he
?? For a similar view of Plato's and Euclid's influence, see G. H. Hemens, Proc. of the Xth Intern. Congress of Philosophy (Amsterdam, 1949), Fasc. 2, 847.
?? Cf. Homer's explanation of the visible world around Troy with the help of the invisible world of the Olympus. The idea loses, with Democritus, some of its theological character (which is still strong in Parmenides, although less so in Anaxagoras) but regains it with Plato, only to lose it again soon afterwards.
?? See note 27 above, and Anaxagoras, Fragments B4 and 17, Diels-Kranz.
accepts it, perhaps unconsciously, by accepting the traditional problems of this subject as furnished by the problem-situation with which he is confronted; and if he, so acting, produces a new specific theory of the structure of matter, then I should not call him a philosopher. But if he reflects upon it, and, for example, rejects it (like Berkeley or Mach), preferring a phenomenological or positivistic physics to the theoretical and somewhat theological approach, then he may be called a philosopher. Similarly, those who consciously sought the theoretical approach, who constructed it, and who explicitly formulated it, and thus transferred the hypothetical and deductive method from theology to physics, were philosophers, even though they were physicists in so far as they acted upon their own precepts and tried to produce actual theories of the invisible structure of matter.
But I shall not pursue the question of the proper application of the label 'philosophy' any further; for this problem, which is Wittgenstein's problem, clearly turns out to be one of linguistic usage; it is indeed a pseudo-problem, and one which by now must be rapidly degenerating into a bore to my audience. Yet I wish to add a few words on Plato's theory of Forms or Ideas, or, to be more precise, on point (6) in the list of historical facts given above.
Plato's theory of the structure of matter can be found in the Timaeus. It has at least a superficial similarity to the modern theory of solids which interprets them as crystals. His physical bodies are composed of invisible elementary particles of various shapes, the shapes being responsible for the macroscopic properties of visible matter. The shapes of the elementary particles are determined in their turn by the shapes of the plane figures which form their sides. And these plane figures, in their turn, are ultimately all composed of two elementary triangles: the half-square (or isosceles rectangular) triangle which incorporates the square root of two, and the half-equilateral rectangular triangle which incorporates the square root of three, both of them irrationals.
These triangles, in their turn, are described as the copies?? of unchanging 'Forms' or 'Ideas', which means that specifically geometrical 'Forms' are admitted into the heaven of the Pythagorean arithmetical Form-Numbers.
There is little doubt that the motive of this construction is the attempt to solve the crisis of atomism by incorporating irrationals into the last elements of which the world is built. once this has been done the difficulty arising from the existence of irrational distances is overcome.
But why did Plato choose just these two triangles? I have elsewhere?? expressed the view, as a conjecture, that Plato believed all other irrationals might be obtained by adding to the rationals multiples of the square roots of two and three.?? I now
?? For the process by which the triangles are stamped out of space (the 'mother') by the ideas (the 'fathers'), cf. my Open Society, note 15 to ch. 3, and the references there given, as well as note 9 to ch. 6. In admitting irrational triangles into this heaven of divine Forms Plato admits something 'indeterminable' in the sense of the Pythagoreans, i. e. something belonging to the 'Bad' side of the Table of Opposite. That 'bad' things may have to be admitted seems to be first stated in Plato's Parmenides, 130b-e; the admission is put into the mouth of Parmenides himself.
?? In the last quoted note of my Open Society.
?? This would mean that all geometrical distances (magnitudes) are commensurable with one of three 'measures' (or a sum of two or all of them) related as 1: √2: √3. It seems likely that Aristotle even believed that all geometrical magnitudes are commensurable with one of two measures, viz. 1 and √2. For he writes (Metaphysics, 1053a17): 'The diagonal and the side of a square and all (geometrical) magnitudes are measured by two (measures).' (Cp. Ross' note on this passage.)
feel more confident that the crucial passage in the Timaeus does not imply this doctrine (which was mistaken, as Euclid later showed). For in the passage in question Plato says quite clearly, 'All triangles originate from two, each having a right angle', going on to specify these two as the half-square and half-equilateral. But in the context this only can mean that all triangles originate somehow from these two. This seems to be a hint at the mistaken theory of the relative commensurability of all irrationals with sums of rationals and the square roots of two and three.??
But Plato did not pretend that he had a proof of the theory in question. on the contrary, he says that he assumes the two triangles as principles, 'in accordance with an account which combines likely conjecture with necessity'. And a little later, after explaining that he takes the half-equilateral triangle as the second of his principles, he says, 'The reason is too long a story; but if anybody should probe into this matter, and prove that it has this property' (I suppose the property that all other triangles can be composed of these two) 'then the prize is his, with all our good will'??. The language is somewhat obscure, and the likely reason is that Plato was conscious that he lacked a proof of his (mistaken) conjecture concerning these two triangles, and felt it should be supplied by somebody.
The obscurity of the passage had, it appears, the strange effect that Plato's quite clearly stated choice of triangles which introduce irrationals into his world of Forms escaped the notice of most of his readers and commentators in spite of Plato's emphasis upon the problem of irrationality in other places. And this in turn may perhaps explain why Plato's Theory of Forms could appear to Aristotle to be fundamentally the same as the Pythagorean theory of form-numbers,?? and why Plato's atomism appeared to Aristotle merely as a
?? In note 9 to ch. 6 of my Open Society, mentioned above, I also conjectured that the approximation of √2 + √3 to π encouraged Plato in his mistaken theory.
?? The two quotations are from the Timaeus, 53c/d and 54a/b.
?? I believe that our consideration may throw some light on the problem of Plato's famous two 'principles' - 'The one' and 'The Indeterminate Dyad'. The following interpretation develops a suggestion made by van der Wielen (De Ideegetallen van Plato, 1941, p. 132 f.) and brilliantly defended against van de Wielen's own criticism by Ross (Plato's Theory of Ideas, p. 201). We assume that the 'Indeterminate Dyad' is a straight line or distance, not to be interpreted as a unit distance, or as having yet been measured at all. We assume that a point (limit, monas, 'one') is placed successively in such positions that it divides the Dyad according to the ratio 1: n, for any natural number n. Then we can describe the 'generation' of the numbers as follows. For n = 1, the Dyad is divided into two parts whose ratio is 1:1. This may be interpreted as the 'generation' of Twoness out of oneness (1:1 = 1) and the Dyad, since we have divided the Dyad into two equal parts. Having thus 'generated' the number 2, we can divide the Dyad according to the ratio 1:2 (and the larger of the ensuing sections, as before, according to the ratio 1:1), thus generating three equal parts and the number 3; generally, the 'generation' of a number n gives rise to a division of the Dyad in the ratio 1:n, and with this, to the 'generation' of the number n + 1. (And in each stage the 'one' intervenes afresh as the point which introduces a limit or form or measure into the otherwise 'indeterminate' Dyad to create the new number; this remark may strengthen Ross' case against van der Wielen's. Cp. also Toeplitz's, Stenzel's, and Becker's papers in Quellen & Studien z. Gesch. d. Math., I, 1931. None of them, however, hint at a geometrization of arithmetic - in spite of the figures on pp. 476 f.)
Now it should be noted that this procedure, although it 'generates' (in the first instance, at least) only the series of natural numbers, nevertheless contains a geometrical element - the division of a line, first into two equal parts, and then into two parts according to a certain proportion 1:n. Both kinds of division are in need of geometrical methods, and the second, more especially, needs a method such as Eudoxus' Theory of Proportions. Now I suggest that Plato began to ask himself why he should not divide the Dyad also in the proportion of 1: √2 and of 1: √3. This, he must have felt, was a departure from the method by which the natural numbers are generated; it is less 'arithmetical' still, and it needs more specifically 'geometrical' methods. But it would 'generate', in the place of natural numbers, linear elements in the proportion 1: √2 and 1: √3, which may be identical with the 'atomic lines' (Metaphysics, 992a19) from which the atomic triangles are constructed. At the same time the characterization of the Dyad as 'indeterminate' would become highly appropriate, in view of the Pythagorean attitude (cf. Philolaos, Diels, fragm. 2 and 3) towards the irrational. (Perhaps the name 'The Great and the Small' began to be replaced by 'The Indeterminate Dyad' when irrational proportions were generated in addition to rational ones.)
Assuming this view to be correct, we might conjecture that Plato slowly approached (beginning in the Hippias Major, and thus long before the Republic - as opposed to a remark made by Ross, op. cit., top of p. 56) the view that the irrationals are numbers (a) since they are comparable with numbers (Met., 1021a 4 f.) and (b) since both the natural numbers and the irrationals are 'generated' by similar and essentially geometric processes. Yet once this view is reached (and it was first reached, it appears, in the Epinomis, 990d-e, whether or not this work is, as I am inclined to believe, Plato's), then even the irrational triangles of the Timaeus become 'numbers' (i. e. characterized by numerical, if irrational, proportions). But at this point the peculiar contribution of Plato, and the difference between his and the Pythagorean theory, may become indiscernible; which may explain why it has been lost sight of even by Aristotle (who suspected both 'geometrization' and 'arithmetization').
comparatively minor variation on that of Democritus.?? Aristotle, in spite of taking for granted both the association of arithmetic with the odd and even, and of geometry with the irrational, does not appear to have taken the problem of the irrationals seriously. Proceeding as he did from an interpretation of the Timaeus which identified Plato's Space with matter, he seems to have taken Plato's reform programme for geometry for granted; it had been partly carried out by Eudoxus before Aristotle entered the Academy, and Aristotle was only superficially interested in mathematics. He never alludes to the inscription over the Academy gates.
To sum up, it seems probable that Plato's theory of Forms and also his theory of matter were both restatements of the theories of his predecessors, the Pythagoreans and Democritus respectively, in the light of his realization that the irrationals demanded that geometry should come before arithmetic. By encouraging this emancipation Plato contributed to the development of Euclid's system, the most important and influential deductive theory ever constructed. By his adoption of geometry as the theory of the world he provided Aristarchus, Newton, and Einstein with their intellectual toolbox. The calamity of Greek atomism was thus transformed into a momentous achievement. But Plato's scientific interests are partly forgotten. The problem-situation in science which gave rise to his philosophical problems is little understood. And his greatest achievement, the
?? That this was Aristotle's view has been pointed out by Luria, op. cit.
Geometrical theory of the world, has influenced our world-picture to such an extent that we unreflectingly take it for granted.
X
One example never suffices. As my second example, out of a great many interesting possibilities, I choose Kant. His Critique of Pure Reason is one of the most difficult books ever written. Kant wrote in great haste,?? and about a problem which, I shall try to show, was not only insoluble but also misconceived. Nevertheless it was not a pseudo-problem, but an inescapable problem which arose out of the contemporary situation in science. His book was written for people who knew something about Newton's stellar dynamics and who had at least some idea of his forerunners - of Copernicus, Tycho Brahe, Kepler and Galileo.
It is perhaps hard for intellectuals of our own day, spoilt and blasé as we are by the spectacle of scientific success, to realize what Newton's theory meant, not just for Kant but for any eighteenth-century thinker. After the unmatched daring with which the Ancients had tackled the riddle of the Universe there had come long periods of decay and recovery, and then a staggering success. Newton had discovered the long sought secret. His geometrical theory, based on and modelled after Euclid, had been received at first with great misgivings, even by its own originator.?? The reason was that the gravitational force of attraction was felt to be 'occult', or at least something which needed an explanation. But although no plausible explanation was found (and Newton scorned recourse to ad hoc hypotheses) all misgivings had disappeared long before Kant made his own important contribution to Newtonian theory, 78 years after the Principia.?? No qualified judge?? of the situation could doubt any longer that Newton's theory was true. It had been tested by the most precise measurements, and it had always been right. It had led to the prediction of minute deviations from Kepler's laws, and to new discoveries. In a time like ours, when theories come and go like the buses in Piccadilly, and when every schoolboy has heard that Newton has long been superseded by Einstein, it is hard to recapture the sense of conviction which Newton's theory inspired, or the sense of elation, and of liberation. A unique event had happened in the history of thought, one which could never be repeated: the first and final discovery of the absolute truth about the universe. An age-old dream had come true. Mankind had obtained knowledge, real, certain, indubitable, and demonstrable knowledge - divine scientia or epistémé, and not merely doxa, human opinion.
?? He was afraid that he mights die before completing his work.
?? See Newton's letters to Bentley, 1693. (Cf. note 20 to ch. 3, below.)
?? The so-called Kant-Laplacean Hypothesis, published by Kant in 1755.
?? There had been some very pertinent criticism (especially by Leibniz and Berkeley) but in view of the success of the theory it was - I believe rightly - felt that the critics had somehow missed the point of the theory. We must not forget that even today the theory still stands, with only minor modifications, as an excellent first approximation (or, in view of Kepler, perhaps as a second approximation).
Thus for Kant Newton's theory was simply true, and the belief in its truth remained unshaken for a century after Kant's death. Kant to the end accepted what he and everybody else took for a fact, the attainment of scientia or epistēmē. At first he accepted it without question. This state he called his 'dogmatic slumber'. He was roused from it by Hume.
Hume had taught that there could be no such thing as certain knowledge of universal laws, or epistēmē; that all we knew was obtained with the help of observation which could be only of singular (or particular) instances, so that all theoretical knowledge was uncertain. His arguments were convincing (and he was, of course, right). Yet there was a fact, or what appeared as a fact - Newton's attainment of epistēmē.
Hume roused Kant to the realization of the near absurdity of what he never doubted to be a fact. Here was a problem which could not be dismissed. How could a man have got hold of such knowledge? Knowledge which was general, precise, mathematical, demonstrable, and indubitable, like Euclidean geometry, and yet capable of giving a causal explanation of observed facts?
Thus arose the central problem of the Critique: 'How is pure natural science possible?' By 'pure natural science' - scientia, epistēmē - Kant simply meant Newton's theory. (This he does not say, unfortunately; and I do not see how a student reading the first Critique, 1781 and 1787, could possibly find out. But that Kant has Newton's theory in mind is clear from the Metaphysical Foundations of Natural Science, 1786, where he gives an a priori deduction of Newton's theory; see especially the eight theorems of the Second Main Part, with its Additions, especially Addition 2, Note 1, paragraph 2. Kant relates Newton's theory, in the fifth paragraph of the final 'General Note on Phenomenology', to the 'starry heavens'. It is also clear from the 'Conclusion' of the Critique of Practical Reason, 1788, where the appeal to the 'starry heavens' is explained, at the end of the second paragraph, by a reference to the a priori character of the new astronomy.??)
Although the Critique is badly written, and although bad grammar abounds in it, this problem was not a linguistic puzzle. Here was knowledge. How could Newton ever attain it? The question was inescapable.?? But it was also insoluble. For the apparent fact of the attainment of epistēmē was no fact. As we now know, or believe we know, Newton's theory is no more than a marvellous conjecture, an astonishingly good approximation; unique indeed, but not as divine truth, only as a unique invention of a human genius; not epistēmē, but belonging to the realm of doxa. With this Kant's problem, 'How is pure natural science possible', collapses, and the most disturbing of his perplexities disappears.
Kant's proposed solution of his insoluble problem consisted of what he proudly called his 'Copernican Revolution' of the problem of
?? Kant says there that Newton gave us so clear 'an insight into the structure of the universe that it will remain unchanged in all time; and though there is hope that our insight will ever grow through continued observation, there never need be fear of a setback'.
?? Poincaré was still greatly troubled by it in 1909.
knowledge. Knowledge - epistēmē - was possible because we are not passive receptors of sense data, but their active digestors. By digesting and assimilating them we form and organize them into a Cosmos, the Universe of Nature. In this process we impose upon the material presented to our senses the mathematical laws which are part of our digestive and organizing mechanism. Thus our intellect does not discover universal laws in nature, but it prescribes its own laws and imposes them upon nature.
This theory is a strange mixture of absurdity and truth. It is as absurd as the mistaken problem it attempts to solve; for it proves too much, being designed to prove too much. According to Kant's theory, 'pure natural science' is not only possible: although he does not always realize this, it becomes, contrary to his intention, the necessary result of our mental outfit. For if the fact of our attainment of epistēmē can be explained at all by the fact that our intellect legislates for and imposes its own laws upon nature, then the first of these two facts cannot be contingent any more than the second.?? Thus the problem is no longer how Newton could make his discovery but how everybody else could have failed to make it. How is it that our digestive mechanism did not work much earlier?
This is a patently absurd consequence of Kant's idea. But to dismiss it offhand, and to dismiss his problem as a pseudo-problem, is not good enough. For we can find an element of truth in his idea (and a much needed correction of some Humean views) after reducing his problem to its proper dimensions. His question, we now know, or believe we know, should have been (이 문장에서 should have + 과거분사는 과거의 수행하지 못한 의무를 나타내는 표현이므로 문맥상 옳지 않다. must have + 과거분사로 써서 과거를 강하게 추측하여야 한다. - 역자 주): 'How are successful conjectures possible?' And our answer, in the spirit of his Copernican Revolution, might, I suggest, be something like this: Because, as you said, we are not passive receptors of sense data, but active organisms. Because we react to our environment not always merely instinctively, but sometimes consciously and freely. Because we can invent myths, stories, theories; because we have a thirst for explanation, an insatiable curiosity, a wish to know. Because we not only invent stories and theories, but try them out and see whether they work and how they work. Because by a great effort, by trying hard and making many mistakes, we may sometimes, if we are lucky, succeed in hitting upon a story, an explanation, which 'saves the phenomena'; perhaps by making up a myth about 'invisibles', such as atoms or gravitational forces, which explains the visible. Because knowledge is an adventure of ideas. These ideas, it is true, are produced by us, and not by the world around us; they are not merely the traces of repeated sensations or stimuli or what not; here you were right. But we are more active and free than even you believed; for similar observations or similar environmental situations do not, as your theory implied, produce similar explanations in different men. Nor is the fact that we create our theories, and that we attempt to impose them upon the
?? A crucial requirement which any adequate theory of knowledge must satisfy is that it must not explain too much. Any non-historical theory explaining why a certain discovery had to be made must fail because it could not possibly explain why it was not made somewhat earlier.
world, an explanation of their success,?? as you believed. For the overwhelming majority of our theories, of our freely invented ideas, are unsuccessful; they do not stand up to searching tests, and are discarded as falsified by experience. only a very few of them succeed, for a time, in the competitive struggle for survival.??
XI
Few of Kant's successors appear ever to have understood clearly the
precise problem-situation which gave rise to his work. There were two such problems for him: Newton's dynamics of the heavens, and the absolute standards of human brotherhood and justice to which the French revolutionaries appealed; or, as Kant puts it, 'the starry heavens above me, and the moral law within me'. But Kant's 'starry heavens' are seldom recognized for what they were: an allusion to Newton.?? From Fichte onward,?? many have copied Kant's 'method' and the difficult style of parts of his Critique. But most of these imitators, unaware of Kant's original interests and problems, busily tried either to tighten, or else to explain away, the Gordian knot in which Kant, through no fault of his own, had tied himself up.
We must beware of mistaking the well-nigh senseless and pointless subtleties of the imitators for the pressing and genuine problems of the pioneer. We should remember that his problem, although not an empirical one in the ordinary sense, nevertheless turned out, unexpectedly, to be in some sense factual (Kant called such facts 'transcendental', since it arose from an apparent, but non-existent, instance of scientia or epistēmē. And we should, I submit, seriously consider the suggestion that Kant's answer, in spite of its partial absurdity, contained the nucleus of a true philosophy of science.
?? Applying note 63, no theory can explain why our search for explanatory theories is successful. Successful explanation must retain, on any valid theory, the probability zero, assuming that we measure this probability, approximately, by the ratio of the 'successful' explanatory hypotheses to all hypotheses which might be designed by man.
?? The ideas of this 'answer' were elaborated in my L.Sc.D. (1934, 1959, and later editions).
?? See note 61 and text, above.
?? Cf. my Open Society, note 58 to ch. 12.
-"Conjectures and Refutations, The Growth of Scientific Knowledge", Karl R. Poppe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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