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4.11.27 18:46 수정 : 2014.11.27 2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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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홍준 명지대 미술사학과 석좌교수 |
일본의 고대문명은 ‘죄다 우리가 해 준 것’이라는 생각이 퍼져 있다. 일본은 고대사 콤플렉스 때문에 역사를 왜곡하고, 한국은 근대사 콤플렉스 때문에 일본을 무시한다. 우리는 일본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일본은 과거사 문제를 깨끗이 정리해야 한다.
요즘 일본으로부터 들려오는 소식이라곤 아베 정권의 삐뚤어진 정치적 행태와 극우들이 벌이는 혐한론뿐이다. 듣자하니 불쾌하기 짝이 없는데 그런 와중에 내가 <일본 답사기>를 4권으로 펴내자 저들이 왜 저러는지 내게 물어오는 일이 많다.
사실 일본에 대한 나의 전문성이란 문화유산에 국한된 것이고 내가 일본 답사기를 쓴 것은 일본을 잘 알아서가 아니라 나부터 일본을 너무 모르는 것에 대한 반성에서 시작한 것이었다.
우리는 일본의 역사에 대하여 거의 무지인 상태이면서도 일본의 고대 사회에 한반도가 끼친 영향에 대해서만은 명확히 인식하고 있다. 쌀농사, 철기문화, 문자, 불교, 도자기 등이 모두 한반도로부터 들어갔다. 그래서 일본의 고대 문명은 ‘죄다 우리가 해 준 것’이라는 생각이 널리 퍼져 있다.
그러나 그 문명의 영향을 받아 일본이 독자적인 문화를 이루어간 성과에 대해서는 좀처럼 인정하지 않고 또 잘 알아보려고 하지도 않는다. 일본의 입장에선 그것이 억울하고 한국의 입장에선 그런 일본한테 식민지 지배를 받았다는 것이 분하게 느껴질 뿐이다. 그 결과 한일 양국은 서로가 서로를 왜곡하고 있다. 단적으로 말해서 일본은 고대사 콤플렉스 때문에 역사를 왜곡하고 한국은 근대사 콤플렉스 때문에 일본을 무시하고 있다.
일본의 현대 사회에 대해서도 막연히 우리보다 먼저 서구화되었겠거니 이해하는 경향이 있다. 일본이라는 나라가 근대화의 과정을 거치면서 세계 굴지의 문명국으로 우뚝 서 있음은 맞다. 세계 3위의 국가 경제력만 봐도 그렇고, 노벨상 수상자가 22명에 달한다는 사실이 이를 말해준다.
그러나 일본의 정치와 시민의식은 봉건적 잔재를 면치 못한 면이 많다. 일본은 시민들이 피를 흘리며 자력으로 자유와 평등과 민주주의를 쟁취한 역사적 경험이 없다. 일본의 민주주의는 심하게 말해서 제2차 세계대전 후 맥아더 사령부가 낙하산으로 떨어트려놓은 정치 제도이다.
일본은 19세기 중엽, 메이지 유신 때 무사 계급의 막부정치를 무너트리면서 봉건시대를 청산하고 근대화의 길을 걸었다. 서구 문명의 충실한 생도였던 일본은 20세기 초가 되면 이를 소화하여 일본화·토착화시켰다. 이를 ‘다이쇼(大正) 데모크라시’라고 칭송한다.
그러나 일본은 이내 군국주의로 치달려갔다. 그들이 말한 다이쇼 데모크라시란 결과적으로 책상머리에서 얘기한 민주주의였을 뿐이다. 그리고 패전 후 미국은 전쟁의 주범 격인 천황 제도를 그대로 둔 채로 민주주의를 이식시켰다. 그것은 일본이 소련 공산주의의 영향권에 들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 남겨놓은 장치였다는 것이 정설이다.
이 때문에 일본의 정치는 이상한 형태의 대의정치 제도로 출발되어 파벌이 판을 치고 ‘세습 의원’이라는 봉건적 습성까지 나타나고 있다. 시민들도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데 미숙하다. 4·19혁명, 5·18 민주화운동, 6월민주항쟁 같은 시민운동이 없었다. 때문에 군국주의 시대 관제적 데모를 연상케 하는 혐한론이 횡행하지만 건강하고 용기있고 영향력 있는 재야세력을 찾아보기 힘들다.
오늘날 일본엔 양심적인 지식인이 아주 많다. 그러나 그들은 제도의 틀 안에서만 자신들의 생각을 개진하고 있기 때문에 행동으로는 잘 드러나지 않는다. 이런 갑갑한 상황 때문에 소수의 행동파 젊은이들이 극단에 빠져 1960년대에는 적군파가 등장했고, 오늘날 대학가에는 중핵(中核)이라는 집단이 남아 있다.
그런 일본이 어떻게 세계 굴지의 부강한 나라, 문명국으로 갈 수 있었을까? 그것은 일본이라는 나라를 이끄는 동력이 정치가 아니라 사회 구조의 힘이 그만큼 강했기 때문인 것으로 진단되고 있다.
문화유산의 입장에서 내가 본 일본의 가장 큰 장점은 장인정신과 직업윤리의식이다. 이 전통의 뿌리는 아주 깊고 오랜 것이다. 1200년 전, 헤이안 시대에 천태종을 일으킨 최징(最澄·사이초)이라는 승려가 세운 연력사(延曆寺·엔랴쿠지)에는 그가 말한 경구가 큰 비석에 이렇게 새겨져 있다.
“조천일우 차즉국보”(照千一隅 此則國寶), 천 가지 중 오직 하나를 잘하면 그것이 국보라는 뜻이다. 한 가지 일에 충실하면 그것이 인생의 보람이고, 사회로부터 인정받고, 나라에 기여하는 길이라는 신념을 말해주는 표어다. 그런 정신에서 장인을 존중하는 사회로 성장했고 직업윤리의식이 형성되었다.
그래서 일본엔 대대로 내려오는 가업을 이어가는 오래된 점포가 많다. 이를 일본에선 노포(老鋪), 일본말로 시니세라고 하는데 한자리에서 건물의 형태도 바꾸지 않고 변함없이 이어가는 상점들을 말한다. 이마미야 신사 앞에는 1천년 전에 개업하여, 25대째 내려오는 떡집이 있다. 11대 당주가 경영하는 300년 전통의 다와라야 여관은 어떤 특급호텔보다도 높은 명성을 갖고 있다.
장관을 지낸 사람이 퇴직 후 집안에 내려오는 시니세의 당주로 일하기도 하고, 대기업 전무가 부친이 돌아가시자 사표를 내고 점포 주인이 되었다는 예는 수도 없이 많다. 시니세는 집안의 자부심이고 그것을 지키는 것은 자손 된 자의 의무라는 인식이 뿌리박혀 있는 것이다.
2002 한일월드컵 당시 일본 쪽 조직위원장은 오카노 슌이치로 일본축구협회장이었다. 당시 한국 쪽 조직위원 중 한 명이었던 유병진 명지대 총장에게 들은 얘기다. 조직위원회 업무차 오카노 위원장을 만나러 도쿄 우에노에 있는 그의 사무실을 찾아갔는데 놀랍게도 우리나라 붕어빵 비슷한 ‘다이야키’라는 도미빵 가게 2층에 있더라는 것이었다.
사무실로 올라가니 오카노 위원장 하는 말이, 이 점포는 대대로 내려오는 시니세로 현재는 자신이 당주라는 것이다. 소박하기 그지없는 응접실 한쪽엔 가훈이 걸려 있는데 이렇게 쓰여 있더란다. “머리부터 꼬리까지 앙꼬(팥소).”
내가 일본에서 가장 배우고 싶은 문화는 바로 이것이었다. 일본의 장인정신은 모든 제품에서 디테일이 아주 강하다는 미덕을 낳았다. 빈틈없이 깔끔하게 마무리하는 것은 일본 제품의 가장 큰 장점이자 성공의 비결이기도 하다.
나는 일본 답사기를 쓰면서 가는 곳마다 그들의 특징이 무엇인가를 살피면서 거의 본능적으로 우리의 경우와 비교하곤 했다. 대표적인 예로 일본의 정원을 보면 우리 정원의 특징이 오히려 잘 보인다. 일본은 나무를 일일이 가위질하며 인공미를 극대화하고 한국은 자연미를 더 존중한다.
대구 삼격동에 사는 한 사업가는 일본과의 거래가 많아 아래 윗집에 한국식 정원과 일본식 정원을 꾸며놓고 손님을 맞이하고 있다기에 한번 이 댁을 답사 가서 주인에게 정원 만들 때 얘기를 들어보니 두 나라 정원사는 돌 다루는 자세부터 확연히 다르더라는 것이다.
정원에 돌 10개를 깔아놓는다면 일본 정원사는 9개를 반듯이 놓고 나서 1개를 약간 비스듬히 틀어놓으려고 궁리하는데, 한국 정원사는 9개는 아무렇게 놓고 나서 1개를 반듯하게 놓으려고 애쓰더라는 것이다. 일본은 인공미, 한국은 자연미를 그렇게 구현하는 것이다.
일본과 우리는 같은 문화권에 있으면서 이렇게 다르다. 한일 두 나라가 이룩한 각자의 문화적 결실은 중국의 그것과 함께 동아시아 문화의 내용을 이룬다. 그 다양한 문화적 성취는 동아시아의 세계적 위상을 그만큼 더 높여주는 것이다.
이미 두 나라의 경제적 협력관계는 떼려야 뗄 수 없게 되어 있다. 문화적 교류도 한류가 말해주듯 아주 깊이 흘러갔다. 내년은 한일협정 50주년을 맞는 해이다. 이제 우리는 일본을 있는 그대로 인정할 줄 알아야겠고, 일본은 혐한론을 멈추고, 갈등의 원인인 과거사 문제를 깨끗이 정리하여 두 나라가 공존과 공생의 길로 나아갈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유홍준 명지대 미술사학과 석좌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