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4.11.27 20:49 수정 : 2014.11.27 20:49
강명관의 고금유사
소문이 뜨르르한 영화 <명량>을 보았다. 개봉하고 한참 지난 뒤다. 익히 알고 있는 것처럼 이순신을 주인공으로 하는 영웅서사시였다. 또 늘 그래 왔듯이 사람들은 열두척의 배로 수백척 왜선을 물리치는 것을 보고 감탄해 마지않았다. 이순신을 주인공으로 삼은 이 통쾌한 이야기로 우리는 보통 임진왜란을 기억한다. 다시 말해 임진왜란이란 단어를 듣는 순간 우리는 절로 이순신을 떠올리는 것이다. 하지만 정작 이 전쟁의 이면을 들추어 보면 속내는 복잡하기 짝이 없다.
임진왜란이 나자 선조는 재빨리 평안도 의주로 내뺐다. 압록강이 코앞이었다. 여차하면 요동 땅으로 튈 심산이었다. 자신이 해야 할 일은 왕자들에게 떠맡겼다. 광해군이 분조(分朝)를 맡아 평안도와 강원도, 호남·영남을 돌며 인심도 위무하고 군사도 모았다. 광해군의 활동은 성공적이었다. 임해군과 순화군 역시 같은 임무를 띠고 함경도로 갔다. 그런데 희한한 사건이 일어났다. 회령부의 아전 국경인이란 자가 임해군·순화군과 그를 따랐던 신하 김귀영·황정욱·황혁(황정욱의 아들)을 잡아 함경도로 진군한 가등청정(가토 기요마사)에게 넘기고 항복했던 것이다.
국경인은 원래 전주 출신으로 회령으로 귀양을 갔다가 아전이 된 자다. 조정에 불만이 많았을 것이다. 하지만 일개 아전인 국경인 혼자 반란을 일으킬 수는 없는 노릇이다. 국경인이 난을 일으킬 때 동원한 병사는 기갑병만 500명이었다. 거기에 수많은 백성들이 호응했다. 국경인의 난은 실로 백성들이 일으킨 것이었던 셈이다. 이들이 전쟁 통에 국경인에게 호응하고 왕자를 잡아 왜군에게 넘긴 이유는 간단치 않을 것이다.
황정욱의 아들 황혁은 순화군의 장인이었다. 임금 선조와는 사돈지간이다. 황정욱은 또 당대 최고의 문인으로 이름을 날린 사람이었다. 말하자면 당시 조선의 0.01% 안에 드는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전쟁 중에 어떤 일을 했던가? <선조실록>은 이렇게 말한다.
“황혁은 강원도에서 함경도로 들어갈 때 임금의 어려움을 생각하지 않고 또 부탁하신 무거운 임무를 잊어버리고 하는 짓거리가 모두 도리에 어긋나고 사나웠다. 고을에서 접대하고 바치는 것이 조금이라도 제 뜻에 차지 않으면 채찍질, 매질을 한도 없이 해댔다. 지나는 곳마다 소동이 일어나 마치 난리를 겪은 것 같았다. 원망한 백성들이 반란을 일으켜 마침내 회령의 변고가 일어난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전쟁을 예견했다. 하지만 왕과 조정의 관료들, 사족들은 대비하지 않았고 결국 전쟁의 참극을 겪고 말았다. 그 참극의 책임은 당연히 지배층이 져야 할 것이었다. 하지만 전쟁 중에도 그들은 백성을 사정없이 쥐어짜고 있었다. 찾아보면 전쟁 중에 반란을 일으킨 사람은 국경인만이 아니다. 양주의 이능수, 이천의 현몽, 부여의 송유진·이몽학 등 수많은 백성들이 반란을 일으켰던 것이다. 이들의 반란 이유 역시 국경인을 따른 회령의 백성들과 다르지 않았다.
이순신은 훌륭한, 존경할 만한 분이다. 하지만 임진왜란을 이순신을 중심으로 기억하는 방식은 곱씹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것은 혹 선조와 황혁과 황정욱의 행패는 물론 국경인을 따랐던 백성들의 고통을 영원히 기억 속에서 지워버리는 작업을 수행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명량>을 보고 영화관을 나오며 문득 국경인과 그들을 따랐던 백성들을 생각했다. 지금 국경인과 백성들이 반란을 일으킨다 해도 누가 그들에게 돌을 던질 수 있을 것인가?
강명관 부산대 한문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