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권
제 6장 지혜와 덕행의 구별
앞장까지의 논의에서는, 지덕(智德: 지혜와 덕행)의 두자를 숙어로 사용하여, 문명의 진보는 세상 사람들의 일반적인 지혜와 덕행의 발생에 관련되는 것으로의 순서를 서술하였어도, 이제 이 장(章)에서는 지혜와 덕행을 구별하여 그 내용이 다른 바를 밝힐 것이다.
덕(德)이라는 것은 덕의(徳義: 도덕상의 의무: 도덕)라고 할 수 있는 것이어서, 서양의 언어에서「모럴(moral)」이라고 한다.「모럴(moral)」이라는 것은 마음의 예절이라고 하는 것이다. 개인의 마음 가운데 만족하여 누가 보지 않은 곳에서도 부끄러움이 없는 것이다. 지(智)라는 것은 지혜라고 하는 것인데 (이 표현은 이와나미 문고본<岩波文庫本>에는 智とは智惠ということにて로 되어 있는데 본 인터넷 본에서는 智とは智徳と云ふことにて로 표현되어 ‘지[智]라는 것은 지덕[智徳]이라는 것인데’의 의미이어서 이와나미 문고본으로 해석함. 역자), 서양의 언어로「인텔렉트(intellect)」라고 한다. 사물을 고찰하고 사물을 이해하여 사물을 납득하는 행위이다. 또 이 덕의(徳義: 도덕상의 의무: 도덕)에서도 지혜에서도 각각 두 종류의 구별이 있는데, 첫 번째는 지조, 결백, 겸손, 의리 등과 같이 하나의 마음 안에 속하는 것을 사덕(私德: 사사로운 덕)이라고 하고, 두 번째로 염치, 공평, 불평부당, 용기 등과 같이 외부의 물체에 대하여 인간사교 상에서 나타나는 바의 행위를 공덕(公德: 공공의 덕)이라고 칭한다. 또 세 번째로 사물의 이치를 연구하여 그것에 상응하는 행위를 사사로운 지혜라고 칭하고, 네 번째로 사람에 관한 일의 가볍고 무거움과 크고 작음을 구별하여 가볍고 작은 것을 뒤로 하고 무겁고 큰 것을 우선하여 그 시기와 장소를 살피는 행위를 공공의 지혜라고 한다. 그러므로 사사로운 지혜 혹은 이것을 궁리하는 작은 지혜라고 하는 것도 가능하다. 공공의 지혜 혹은 이것을 총명한 커다란 지혜라고 하는 것도 가능하다. 그런데 이 네 가지 것 안에서 최고로 중요한 것은 네 번째 조목의 커다란 지혜이다. 생각건대 총명과 뛰어난 지혜의 작용이 없으면 사사로운 덕행과 사사로운 지혜를 확대하여 공공의 덕행과 공공의 지혜로 할 수 없고, 혹은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이 서로 어긋나 서로 해치는 일도 있을 수 있다. 옛날부터 명확하게 이 네 가지 조목을 내걸어 논의한 일이 없어도, 학자의 논의에서도 속세의 일상적인 이야기에서도, 능히 그 뜻이 있는 곳을 음미하면 역시 이 구별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맹자에 측은(惻隱: 불쌍히 여김), 수오(羞惡: 악을 미워함), 사양(辭讓), 시비(是非: 옳고 그름을 가림)는 사람 마음의 네 가지 근본이고, 이것을 확대할 때는 불이 비로소 타오르고 샘물이 비로소 흐르기 시작하는 것과 같이, 능히 이것을 채우면 사해(四海: 온 세상)을 보전할 수 있고, 이것을 채우지 못하면 부모를 봉양하기에 부족하다고 되어있다. 생각건대 사사로운 덕행을 확대해서 공공의 덕행에 다다른다는 뜻일 것이리라. 또 지혜가 있다할지라도 시세에 편승하는 것만 못하고, 호미가 있다하더라도 때를 기다리는 것만 못하다고 한다 (『맹자』공손추상1). 생각건대 시세의 완급을 살펴서 사사로운 지혜를 확대하여 공공의 지혜로 된다는 뜻이리라. 또 세간의 이야기에 아무개는 세간에 내세워 부족함이 없는 인물이어서, 공무를 향해서는 최상이어도 한 몸의 품행에 이르러서는 언어도단이라고 하는 일이 있다. 프랑스의 재상「리슐리외<Richelieu>」와 같은 것이 이것이다. 생각건대 공공의 지혜와 공공의 덕행에 결점이 없으면서 사사로운 덕행에서 부족하다는 의미이다. 또 아무개는 바둑, 장기, 주판은 물론, 어떤 일에서도 궁리가 능숙해도, 소위 바둑의 지혜, 수의 계산에서, 아무튼 무분별한 인물이라고 말하는 일이 있다. 생각건대 사사로운 지혜는 있고 공공의 지혜가 없는 것을 평하는 것이다. 앞에서와 같이 지혜와 덕행의 네 가지 구분은, 학자도 세인도 함께 허용하는 바의 일이므로 이것을 보편적인 구분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우선 이 구분을 정하고 그 다음에 그 작용을 논하는 것은 다음과 같다.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이 총명과 뛰어난 지혜의 작용이 없으면 사사로운 지혜를 확대하여 공공의 지혜로 할 수는 없다. 비유컨대 바둑, 카드놀이, 구슬놀이 등의 기예도 사람의 궁리한 것이고, 물리학과 기계 등의 기술도 역시 사람이 궁리한 것이어서, 평균적으로 정신을 피로하게 만드는 일이지만, 그 사정의 경중과 대소를 살펴서 중대한 방향에 따라서 세상에 도움을 준다면, 그 지혜가 작용하는 바, 점점 커진다고 할 수 있다. 혹은 또 스스로 그 일에 손을 대지 않아도, 사물의 이해(利害)와 득실을 살피는 일,「아담 스미스」가 경제의 법칙을 논하는 것과 같아서, 스스로 천하의 인심을 인도하여 일반적으로 부유의 원천을 깊게 하는 일이 있으면, 지혜의 작용이 최고조에 이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아무튼 얕은 지혜에서 진보하여 큰 지혜에 이르는 것에는 총명과 뛰어난 지식을 보지 않고는 가능하지 않다. 또 학식이 높은 사람의 말투에, 천하를 청소하여도 앞뜰은 뒤돌아볼 필요가 없다는 등하여, 나라를 다스리고 천하를 평정하는(치국평천하: 治國平天下) 수단을 구하여 크게 소득이 있어도, 한 몸과 한 가정의 안을 다스리는 일이 능하지 않은 자가 있다. 혹은 한 마음 일편단심으로 의리를 지켜 집밖의 일을 모르고, 심하게는 몸을 죽여서 세상에 이익을 주지 않는 자가 있다. 어느 쪽이든 모두 총명의 작용이 결핍되어 사물의 관계를 그르치고, 대소와 경중을 구별할 수 없어서 덕(德)을 닦는 균형을 잃은 자들이다. 이것에 따라서 생각하면 총명과 뛰어난 지식의 작용은 흡사 지혜와 덕행을 지배하는 것이기에, 덕의(徳義: 도덕상의 의무: 도덕)에 관하여 논할 때는 이것을 큰 덕행이라고 할 수 있어도, 여기에 천하의 일반적인 인심에 따라서 문자의 의미가 쓰인 유래에 의거하면 이것을 덕행이라고 불러야 하는 이유가 있다. 생각건대 옛날부터 우리나라의 인심에 관하여 덕의(徳義: 도덕상의 의무: 도덕)라고 칭하는 것은, 오로지 한 사람의 사사로운 덕행에만 이름을 부여한 글자이므로, 그 생각이 있는 곳을 살피건대, 옛날 책에 온순하고 공손하고 겸손하다(温良恭謙譲)고 하고, 무위(無爲)로서 다스린다고 하고, 성인(聖人)에게는 꿈이 없다고 하고, 덕망이 높은 군자는 어리석은 것처럼 보인다고 하고, 인자한 사람은 산과 들판과 같다고 하는 등, 모두 이런 취지로써 본래의 취지로 하여, 결국, 밖으로 나타나는 작용보다도 내부에 있는 것을 덕의(徳義: 도덕상의 의무: 도덕)라고 부를 따름이어서, 서양 언어에서「수동적[passive]」이라 하여, 나로부터 행동하지 않아서 사물에 대하여 수동적인 자세가 되어, 다만 이기심을 풀어놓는다는 한 가지 일로써 근본을 삼는 것과 같다. 경서(經書)를 생각건대 그 주장하는 바 모두가 수동적인 덕행만을 논하는 것이 아니라, 혹은 활발한 곳의 절묘한 곳이 있은 것 같기는 하여도, 유감스럽게도 책 안의 전체 기풍에서 그 인심에 감동하는 바를 보면 다만 인내와 비굴의 취지를 권장하는 것에 불과하다. 기타 신도(神道)와 불교에서도 덕(德)을 닦는 한 단계에 이르는 데는 대동소이할 따름이다. 이 가르침으로 길러진 우리나라의 국민이기에, 일반적인 인심에 따를 때는 덕(德) 자의 뜻이 매우 좁아서, 소위 총명과 뛰어난 지식 등의 작용은 이 글자의 뜻 가운데 포함되는 일이 없다. 대체로 문자의 뜻을 해석하는 것에는, 학자가 정한 글자의 뜻에 구애되지 않고 천하 여러 사람의 마음을 살펴서, 그 여러 사람의 마음에 생각하는 바의 의미를 취하는 것을 가장 확실한 것으로 한다. 비유컨대 뱃놀이 산(舟遊山: 주유산)이라고 하는 문자와 같다. 하나하나 글자의 뜻을 규명하면 매우 부적절하지만, 세간에서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바에서는, 이 문자의 안에 산에서 논다고 하는 뜻을 포함하는 것이 없다. 덕(德)이라는 글자도 역시 이와 같다. 학자들에 따라서 뜻을 규명하면 그 의미가 매우 넓어도, 세상 사람들이 이해하는 바는 곧 그렇지 않고, 세속에서 욕심이 없는 산사(山寺)의 노승을 보면 그것을 높은 덕(德)을 지닌 고승이라고 존숭하여도, 세상에서 연구, 경제, 이론 등의 학문에 뛰어난 인물이 있으면, 이것을 덕행의 군자라고 하지 않고 재사(才士) 또는 지자(智者: 지혜로운 자)라고 칭하는 것은 틀림없다. 혹은 또 고금의 인물이 큰 사업을 성취하는 자가 있어서 그를 영웅호걸이라고 기리지만, 그 사람의 덕의(徳義: 도덕상의 의무: 도덕)에 관하여 칭하는 바는 다만 사사로운 덕행이라는 한 가지 일에 있을 따름이어서, 공공의 덕행이 더욱더 귀하게 여길 수 있는 것은 오히려 덕의(徳義: 도덕상의 의무: 도덕)의 항목에 덧붙이지 않고 가끔 잊어버리는 일이 있는 것과 같다. 세상 사람들이 이해하는 바에서 덕(德)의 글자의 뜻이 좁은 것으로써 알 수 있다. 생각건대 그 마음에 스스로 지혜와 덕행의 네 가지 구별을 알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도, 때로는 이것을 아는 것 같고 또 때로는 알지 못하는 것 같아서, 결국 세상의 일반적인 기풍에 제압되어 그 중점이, 사사로운 덕행의 한 편에 편중된 것이리라. 그런고로 나도 이 세상의 일반적인 인심에 따라서 글자의 뜻을 정한다면, 총명과 뛰어난 지혜의 작용은 지혜의 항목 중에 내걸고, 저 덕의(徳義: 도덕상의 의무: 도덕)라고 칭하는 것은 그 글자의 뜻의 영역을 축소하여 다만 수동적인 사사로운 덕행에 국한시키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제 6장과 7장에 기술한 바의 덕(德)이라는 글자는 모두 이 취지에 따라서 사용한 것이어서, 그 논의에 즈음하여, 지혜와 덕의(徳義: 도덕상의 의무: 도덕)를 비교하여, 지혜의 작용은 무거우면서 넓고, 덕행의 작용은 가벼우면서 좁고, 혹은 편집적(偏執的)인 것 같겠지만, 학자들이 혹시 여기에 기술하는 바의 취지를 잘 이해하면 이것에 당황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
대체로 미개의 상태에 있어서 사사로운 덕행을 가르침을 주장하여 국민도 역시 그 풍습에 복종하는 것은 오직 우리나라뿐만 아니고, 전 세계가 모두 그렇지 않은 것이 없다. 생각건대 국민의 정신이 아직 피어나지 않아서 금수(禽獸)를 벗어난 일이 멀지 않은 시대에서는, 우선 그 거칠고 잔혹한 행동을 억제하여 한 몸 안을 완화하여 인간의 편안한 마음을 구하는 데 바쁘게 되면, 인간 사교의 복잡한 관계에 관해서는 되돌아 볼 여유가 없다. 더욱 의식주라는 것에서도, 세상의 시작에서는 소위 손으로써 직접 먹고 살아야 하는 것이어서, 아직 가옥이나 의상의 일을 되돌아 볼 여유가 없는 것과 같다. 그런데 문명이 차츰 진보하면 사람의 일도 역시 번다해지고, 사사로운 덕행이라는 한 가지 기계로써 인간 세상을 지배할 이치는 결코 있을 수 없어도, 예로부터의 습관과 인간의 나태라는 천성으로 인하여 옛날을 흠모하고 지금에 만족하여, 한 편으로 치우쳐 균형을 잃어버린 것이다. 원래 그 사사로운 덕행의 항목은, 만세(萬世)에 전하여 변할 수가 없고, 세상 한 가운데 통용하여 다름이 있을 수 없고, 가장 단일(單一)하여 가장 훌륭한 것이기에, 후세로부터 개정할 수 없는 것을 물론이라 하더라고, 세상의 변천에 따라 그것을 활용하는 장소를 선택하고, 또 그것을 사용하는 방법을 궁리하지 않으면 안 된다. 비유건대 음식을 구하는 것은 만고불변이지만, 옛날에는 손으로써 직접 먹고 사는 한 가지 방법이 있었어도, 후세에 이르러서는 음식이라는 것에도 천태만상의 방식이 있는 것과 같다. 또 이것을 비유하면 사사로운 덕행을 갖춘 사람의 마음에 있어서는 이목구비를 갖춘 사람의 몸에 관해서와 같다. 본래 그 유용함과 무용함을 논할 수가 없다. 적어도 사람이라는 이름이 있다면 반드시 이것이 없을 수 없다. 이목구비가 있는지 없는지의 논의는 신체불구자들이 거주하는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이겠으나, 적어도 신체불구자 이상의 지위에 오르면 역시 재잘거리는 이야기를 낭비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대체로 신도(神道)와 유교와 불교든지, 또 기독교든지, 어떤 것도 오랜 옛날 문자가 없던 세상에 존재하여 흡사 신체불구자의 시대에 외치는 주장이기에, 그 시대에 있어서는 필수적인 것은 논할 필요도 없다. 후세의 오늘날에 이르기까지도 세계 중의 인구, 10에 8, 9가 신체불구자일 것이라면, 덕의(徳義: 도덕상의 의무: 도덕)을 가르치는 것도 역시 결코 등한시하기가 어렵다. 혹은 이것 때문에 재잘거리지 않을 수 없는 형세도 있으리라.《유교학자의 도[道]에는 성실을 존중하고, 신도[神道]와 불교의 가르침에는 일편단심을 권하는 등, 하층의 민간에 있어서는 최고로 요긴한 일이다. 비유컨대 지혜의 힘이 아직 피어나지 않은 어린이를 기르고, 혹은 지혜가 없고 재주가 없는 어리석은 사람을 대하여, 일률적으로 덕의(徳義: 도덕상의 의무: 도덕) 등은 인간의 형편에 존중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면, 결과적으로 오해를 낳아서, 덕행은 무시될 수 있고, 지혜는 존중될 수 있다고 납득하고, 그 지혜를 또 오해하여, 아름다운 덕행을 버리고 간사한 지혜를 구하는 폐단에 빠져, 홀연히 인간의 사교를 전복하는 우려가 없지 않아서, 이 무리를 향해서는 덕의(徳義: 도덕상의 의무: 도덕)에 붙여 재잘거리는 이야기가, 없을 수 없다하더라도, 정성스러운 마음 일편단심이라는 사사로운 덕행으로써 인류의 본분을 삼고, 그로써 세간의 만사를 지배하도록 하는 것과 같은 것은, 그 폐단도 역시 극히 우려할만한 것이다. 장소와 시기를 감안하여, 그 지향하는 바는 고상한 경지를 기하지 않을 수 없다.》그렇다하더라도 문명의 본래 취지는 많은 사건의 시간을 걸쳐 움직여 진보하는 데 있는 것이어서, 먼 옛날의 사건이 없음과 단순함에 만족할 수 없다. 현재의 사람으로 음식을 구하는 것에 손으로써 직접 먹을 것에 달하는 방법을 좋아하지 않고, 자신의 몸에 이목구비를 구비하는 것도 자랑할 만한 것이 아님을 알면, 사사로운 덕행의 한 편을 수양하는 것도 아직도 사람이 하는 일을 다 하지 않았다는 이치가 명백할 것이다. 문명사회에서 사람이 하는 일은 극히 번다해야 한다. 사람이 하는 일이 번다하면 그것에 응하는 마음의 작용도 역시 번다하지 않을 수 없다. 만약 사사로운 덕행 한 가지로써 만사에 응대할 수 있는 것으로 하면, 현재 여성의 덕행을 보고 그것에 만족하는 것도 이치가 없다고 할 수 없다. 중국과 일본에서 풍속이 올바른 가문의 부녀자에게, 온순하고 겸손한 덕행을 갖추고, 말이 믿음직스럽고, 행동에 인정이 많고 공손하여, 충분히 가정의 일을 다스리는 재주가 있는 사람이 드물지 않을지라도, 이 부녀자를 세간의 공무(公務)에 채용할 수 없는 것은 왜인가? 인간의 일을 처리하는 데는 사사로운 덕행만으로써 충분하지 않다는 증거이다. 결국 나의 소견은 사사로운 덕행을 인생의 자질구레한 행위로서 염두에 두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옛날부터 우리나라 사람들의 마음에 느끼는 것과 같이, 다만 이 한 방향으로 치우쳐 논의의 기준을 정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것이다. 사사로운 덕행이 필요 없다고 하여 버리는 것은 아니더라도, 이것을 애쓰는 것 외에 또 소중한 지혜와 덕행의 기능이 있다는 것을 지적하고자 할 따름이다.
지혜와 덕의(徳義: 도덕상의 의무: 도덕)는 흡사 사람의 마음을 양쪽으로 나누어 각각 그 한 편을 지배하는 것이므로, 어느 쪽을 중시하고 어느 쪽을 경시할 이유가 없다. 양쪽을 겸비하는 것이 아니라면 완벽한 인간이라고 할 수 없다. 그런데 옛날부터 학자들이 논하는 바를 보면, 10중 8, 9는 덕의(徳義: 도덕상의 의무: 도덕)의 한 쪽을 주장하여 사실을 그르치고, 그 그르침이 심한 것에 이르러서는 완전히 지혜라는 것을 쓸데없다고 하는 자가 없지 않다. 세상을 위해 최고로 우려할만한 폐해지만, 이 폐해를 변호하는 것을 맞아 한 가지 난관이 있다. 왜냐하면 현재의 세상에 있어 지혜와 덕의(徳義: 도덕상의 의무: 도덕)와의 구분을 논하여 옛날의 폐해를 바로잡고자 하는 것에는, 우선 이 두 가지의 경계를 분명히 하여, 그로써 그 작용하는 소재를 밝히는 일이라면, 사상이 얕은 사람의 안목으로써 볼 때는, 혹은 그 논의는 덕행을 경시하고 지혜를 중시하여 공연히 덕의(徳義: 도덕상의 의무: 도덕)의 영역을 침범하는 일이 있어 불평을 품는 자도 있으리라. 혹은 그 논의를 가볍게 간과하여, 덕의(徳義: 도덕상의 의무: 도덕)는 인간에게 쓸모없다고 오해하는 자도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대체로 세상의 문명을 위해서 지혜와 덕행이 함께 필요한 것은, 역시 사람의 몸을 기르기에는 채소와 곡식과 생선과 육류 양쪽 모두를 빼놓을 수 없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지금 지혜와 덕행의 작용을 밝혀 지혜를 등한시할 수 없는 것을 논하는 것은, 자신의 건강을 돌보지 않는 채식주의를 향해 육식을 권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육식을 권하는 것에는 반드시 고기의 효능을 주장하여 채소과 곡식의 폐해를 설명하고, 채소와 고기를 함께 이용하는 데 양쪽이 모두 서로 거스르지 않는 이치를 명확히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이 채식주의자라는 사람은, 한쪽 편의 말을 믿어, 단호히 채소와 곡식을 금지하고 생선과 고기만을 먹고자 하는 일이 있으면, 미혹이 심한 것이다. 이것을 오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가만히 생각건대 옛날과 오늘날의 지식인도 지혜와 덕행의 구분을 알지 못한 것이 아니라도, 다만 이 오해에서 오는 폐해를 우려하여 말을 하지 않았던 것이 아닌가? 그렇다하더라도 알고도 이것을 말하지 않으면 한계가 없을 것이다. 어떤 일에서도 도리에만 합당한 일이라면, 열 사람은 열 사람 모두 오해하는 것이 아니다. 혹은 가끔 10에 두, 셋의 오해가 있는 것도 더욱 말하지 않는 것이 훌륭했다. 두, 셋의 오해를 꺼려 7, 8의 식견을 막을 도리가 없다. 마침내 세상 사람들의 오해를 두려워하여 말할 수 있는 논의도 숨기려하고, 혹은 그 논의를 가장하여 애매한 때에 사람을 유도하려고 하여, 소위 자리를 보고 법을 말하는 (그 장소의 분위기에 맞추기) 방책을 운용하는 것은, 같은 무리들의 생생한 기운을 멸시하는 행동이라 할 수 있다. 세상 사람들이 어리석다할지라도 흑백은 구별하는 것이다. 같은 무리의 인간에 극심한 지혜와 어리석음은 있을 수 없다. 그런데 나의 생각으로 사람들의 어리석음을 살펴, 그 오해를 억측하여 사태의 진실을 알리지 않는 것은, 존경하고 사랑하는 도리를 잃어버린 것이 아닌가? 군자가 할 수 없는 일이다. 적어도 내게 옳다고 하는 바의 것이 있으면 그대로 그것을 말하여 숨기는 일이 없고, 그 가부의 판단은 남에게 맡길 수 있다. 이것이 곧 내가 감히 구별을 좋아하여 지혜와 덕행의 구분을 논하는 이유이다.
덕의(徳義: 도덕상의 의무: 도덕)는 한 사람의 마음 안에 있는 것으로 남에게 보이기 위한 작용이 아니다. 수신(脩身)이라고 하건 신독(慎独)이라 하건 모두 바깥 사물과 관계가 없는 것이다. 예컨대 무욕(無慾)과 정직(正直)은 덕의(徳義: 도덕상의 의무: 도덕)이지만 인간의 비방을 두려워하고 세간의 악평을 꺼려 욕심이 없고 정직한 행동에 힘쓰는 것은, 그것을 진정한 무욕과 정직이라고 할 수 없다. 악평과 비방은 외부의 것이다. 바깥의 사물 때문에 움직이는 것은 덕의(徳義: 도덕상의 의무: 도덕)라고 할 수 없다. 만약 그것을 덕의(徳義: 도덕상의 의무: 도덕)라 한다면 일시적인 사정으로 세간의 질책을 피할 수 있을 때에는 탐욕스럽고 부정(不正)한 일을 해도 덕의(徳義: 도덕상의 의무: 도덕)에 있어 방해가 되지 않을 것이다. 이와 같다면 즉 가짜 군자(偽君子) 진짜 군자(真君子)의 차별이 있을 수 없다. 따라서 덕의(徳義: 도덕상의 의무: 도덕)란 모두 외부의 사물의 변화에 구애되지 않으며, 세간의 비난과 칭찬을 고려하지 않고, 권위나 무력도 굴복시킬 수 없고, 가난과 천함도 빼앗을 수 없으며, 확고부동(確乎不抜)하여 내부에 존재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지혜는 다르다. 바깥의 사물과 접하여 그 이해득실(利害得失)을 생각하고 그 일을 행하여 불편하면 저 방법을 사용하고, 나에게 편리하다고 생각하더라도 여러 사람이 그것을 불편하다고 하면 곧바로 또 그것을 고치고, 한번 편리해진 것이라도 다시 더 편리한 것이 있으면 그것을 취하지 않을 수 없다. 예컨대 마차는 가마보다 편리하지만, 증기력의 유용함을 알면 다시 증기차를 만들지 않을 수 없다. 이 마차를 고안하고 증기차를 발명하여, 그 이해(利害)을 살펴서 그것을 사용하는 것이 지혜의 작용이다. 이와 같이 바깥의 사물에 접하여 임기응변(臨機応変)으로써 일처리를 하는 것이므로 그 생각이 완전히 덕의(徳義: 도덕상의 의무: 도덕)와 상반되어 그것을 외부의 작용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덕(德)이 있는 군자가 홀로 집에 있으면서 침묵하고 앉아 있으면 그것을 악인이라고 할 수 없을지라도, 지혜로운 사람이 만약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서 바깥의 사물에 대응하는 일이 없다면, 그것을 바보로 부르는 것도 가능하다.
덕의(徳義: 도덕상의 의무: 도덕)는 한 사람의 행위로서 그 효능이 미치는 곳은 우선 한 가정의 안에 있다. 주인의 행실이 정직하면 집안의 사람들은 자연히 정직으로 향하고, 부모의 언행이 온순하면 자식들의 마음도 스스로 온순해지는 것은 당연하다. 혹은 친척과 친구들 간에 서로 덕행을 채근하여 덕행의 문에 들어가는 것이 가능하다고 하더라도 (맹자 이루하[離婁下] 31), 결국 충고에 따라서 사람을 선행으로 이끄는 범위는 매우 좁다. 이른바 집집마다 타이를 수 없고 사람마다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 곧 이것이다. 지혜는 그렇지 않다. 한번 사물의 이치를 발명하여 그것을 사람들에게 알리면 순식간에 한 나라의 인심을 움직여, 혹은 그 발명이 커지는 데 이르러서는, 한 사람의 힘이 전 세계의 모습을 완전히 변화시키는 경우가 있다.「제임스 와트」가 증기기관을 고안하여 세계 중심의 공업이 이것 때문에 생각하는 방향을 완전히 바꾸고, 「아담 스미스」가 경제의 원칙을 발명하여 세계 중심의 상업이 이것 때문에 입장을 바꾸었다. 이것을 사람들에게 전했구나, 혹은 말로써 하고 혹은 글로써 할 수 있다. 한번 그 말을 듣고 그 글을 보고 이것을 실제로 시행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은 틀림없이「와트」와「스미스」와 다르지 않다. 그러므로 어제의 바보는 오늘의 지혜로운 자가 되어, 세계 가운데 몇 천 만의「와트」와「스미스」를 낳을 수 있다. 그 교습의 속도로서 그 행하는 바의 영역을 확대하는 것은, 저 한 사람의 덕의(徳義: 도덕상의 의무: 도덕)로써 가족과 친구에 충고하는 종류가 아니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토마스 클락슨」이 전념하여 세상의 노예 악법을 없애고,「존 하워드」<John Howard>가 연구하여 감옥에서 벌어지는 폐습을 일소한 것은, 덕의(徳義: 도덕상의 의무: 도덕)의 작용이므로, 그 공적이 미치는 바가 역시 지극히 크고 무한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고. 답변하여 말하는 바, 정말 옳다, 이 두 사람의 선비는 사사로운 덕행을 확대하여 공공의 덕행을 만들어, 그 공적이 지극히 크고 무한하도록 만든 것이다. 생각건대 두 명의 선비가 일을 시행하는 것을 맞아, 천신만고를 꺼리지 않고 궁리하여, 혹은 책을 저술하고 혹은 재산을 소비해서, 어려움을 견디고 위험을 무릅써, 세간의 사람 마음을 움직여, 마침내 충분히 그 대업을 이룬 것은, 곧 사사로운 덕행의 공로가 아니라, 소위 총명과 뛰어난 지혜의 작용이라고 기릴 수 있는 것이다. 두 선비의 공적이 크다 하더라도, 세상 사람들의 마음에 따라 덕(德)이라는 글자를 해석하여, 덕의(徳義: 도덕상의 의무: 도덕)라는 한 편에 관하여 그것을 보면, 살신성인한 것 밖에 아무것도 아니다. 이제 여기에 인자한 사람이 있어, 아이가 우물에 빠지는 것을 보고 그것을 구하고자 하여 함께 몸을 잃은 것도,「존 하워드」가 수만 명의 사람을 구하고 마침내 목숨을 잃은 것도, 그 측은한 마음을 비교하면 어느 것도 깊고 얕음의 구별이 있을 수 없다. 다만 전자(前者)는 아이를 위해서고, 후자(後者)는 수만 명의 사람을 위해서니, 전자(前者)는 한 때의 선행을 베풀고, 후자(後者)는 만대에 선행을 남기는 차이점이 있을 따름이다. 몸을 희생하는 단계에 이른 것은 전자(前者)와 후자(後者)와의 사이에 덕의(徳義: 도덕상의 의무: 도덕)의 경중이 없다. 그 수만 명의 사람을 구하여 만대 후에 공적을 남겼던 것은,「하워드」가 총명과 뛰어난 지혜로써 그 사사로운 덕행을 크게 사용하여, 그리하여 공적이 미치는 바를 넓혔던 것이다. 그런고로 인자한 사람이란 사사로운 덕행을 지녔으면서 공공의 덕행과 공공의 지혜가 부족한 자이다. (앞의 마침표는 이와나미 문고본에 표기되어 있고 본 인터넷 본에는 쉼표로 표시되어 있는데 이와나미 문고본을 따랐다. 역자)「하워드」는 공(公)과 사(私) 모두 이것을 지닌 자이다. 이것을 비유건대 사사로운 덕행은 바탕 쇠(鐵)와 같고 총명한 지혜는 세공(細工)과 같다. 바탕 쇠(鐵)에 세공을 입히지 않으면 쇠도 다만 무거우면서 단단할 뿐인 물체가 되지만, 이것에 조금 세공을 입혀 망치도 되고 솥도 되면, 곧 망치와 솥의 효능이 있다. 또 조금 궁리하여 작은 칼로 되고 톱이 되면, 곧 작은 칼과 톱의 효능이 생긴다. 더욱 그 세공을 교묘하게 하면 거대한 것은 증기기관으로 될 수 있고, 정밀한 것은 시계의 용수철로 될 수 있다. 지금 세간에서 큰 솥과 증기기관과를 비교하면, 누가 기관의 효능을 크다고 하여 그것을 귀중하게 여기지 않는 자가 있을까? 이것을 귀중하게 여기는 것은 어째서인가? 큰 솥과 기관의 바탕 쇠의 다름이 아니라, 다만 그 세공을 귀중하게 여기는 것이다. 그러므로 쇠로 된 기계를 보고 그 바탕 쇠(鐵)를 논할 때는, 솥과 기관과 망치와 작은 칼이 정말로 한결같아도, 이 여러 제품 안에서 귀한 것과 천한 것의 구별이 생기는 것은, 그것에 세공을 입히는 것의 많고 적음에 달렸다. 지혜와 덕행의 균형도 역시 이와 같다. 저 아이를 구하고자 한 인자한 사람도「존 하워드」도, 그 덕행이라는 바탕 쇠(鐵)에 관하여 볼 때는 경중(輕重)과 대소(大小)의 차이가 없다할지라도, 「하워드」는 이 덕행에 세공을 입혀 그 효능을 성대하게 한 사람이다. 그리고 그 세공을 입힌 것은 곧 지혜의 작용이기에,「하워드」의 사람됨은 그것을 평가하여 다만 덕행의 군자라고만 할 수 없다. 지혜와 덕행을 겸비하고 게다가 그 총명한 지혜의 힘은 고금에 뛰어난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만약, 이 사람으로 하여금 지혜의 힘이 없도록 했더라면, 일생동안, 벌레의 움직임으로서 집안에 거주하면서, 한 권의 경서를 읽고 생을 마감하며, 그 덕의(徳義: 도덕상의 의무: 도덕)로써 충분히 처자를 감화시키는 일을 할 수 있을까, 혹은 그것을 할 수 없는 일도 있을 수 있다. 어찌 이 큰 일을 기획하여 유럽 모든 고을의 나쁜 풍속을 제거할 수 있으랴. 그러므로 말하는 바, 사사로운 덕행의 효능은 좁고 지혜의 작용은 넓다. 덕의(徳義: 도덕상의 의무: 도덕)는 지혜의 작용에 따라 그 영역을 넓히고 그 빛을 발하는 것이다.
덕의(徳義: 도덕상의 의무: 도덕)에 관한 일은 옛날부터 정해져 움직이지 않는다. 기독교의 10계명인 것을 들면, 첫 번째 하느님의 외에 신이 있다고 생각하지 말라, 두 번째 우상 앞에 무릎을 꿇지 말라, 세 번째 하느님의 이름을 헛되게 하지 말라, 네 번째 예배일을 모독하지 말라, 다섯 번째 네 부모를 공경하라, 여섯 번째 살인하지 말라, 일곱 번째, 부정한 언행과 생각을 피하라, 여덟 번째 가난할지라도 도둑질을 하지 말라, 아홉 번째 고의로 속이지 말라 또한 거짓을 즐기지 말라, 열 번째 다른 사람의 물건을 탐내지 말라, 이상 10개 조항이다. 공자의 도(道)의 오륜(五倫)이라는 것은, 첫째 부자유친(父子有親)이라 하여 부모와 자식이 서로 화목한 것이고, 둘째 군신유의(君臣有義)라 하여 임금과 신하 사이에는 의리에 얽매임을 지켜 부실한 행동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이고, 셋째 부부유별(夫婦有別)이라는 것은 남편과 아내도 지나치게 친밀하게 굴어서 볼썽사나운 상황에 빠질 수 없는 것이고, 넷째 장유유서(長幼有序)라 하여 젊은이는 어떤 일도 조심하여 어른을 공경해야 하는 것이고, 다섯 째 붕우유신(朋友有信)이라 하여 친구들 간에는 속이기를 행할 수 없는 것이다. 이 10계명과 오륜(五倫)은 성인(聖人)이 정한 가르침의 큰 근본 지침이어서 수 천 년 옛날부터 이것을 바꿀 수 없다. 수 천 년 옛날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높은 덕을 지닌 선비는 배출되었지만, 다만, 이 큰 기본방침에 관하여 주해를 실시할 뿐이고 특별히 한 가지 조항도 늘린 것이 없다. 송나라 시대에 유교가 번성했다하더라도 오륜(五倫)을 바꾸어 육륜(六倫)으로 만들 수는 없다. 덕의(徳義: 도덕상의 의무: 도덕)의 조항이 적어도 변혁할 수 없다는 것의 명확한 증거이다. 옛 성인(聖人)은 이 조항 모두를 몸소 실천했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가르쳤던 것이므로, 후세의 인물은 어떤 방법으로든 노력하고 고심하여도 결코 그보다 더 뛰어날 수가 없다. 이것을 비유건대 성인(聖人)은 눈을 희다고 하고 숯을 검다고 하는 것과 같다. 후세의 사람이 이것을 어떻게 할 수 있겠는가? 덕의(徳義: 도덕상의 의무: 도덕)의 길에 관해서는 흡사 옛 사람에게 전매권을 점령당해, 후세의 사람은 다만 거간의 일을 하는 것 외에 다른 수단이 없다. 이것이 곧 예수와 공자 이후에 성인(聖人)이 없는 이유이다. 그러므로 도덕적인 일은 후세에 이르러 진보할 수가 없다. 개벽 초기의 덕(德)과 오늘날의 덕(德)은 그 성질에서 다름이 없다. 지혜는 곧 그렇지 않다. 옛날 사람이 하나를 알면 오늘날 사람은 100을 알고, 옛날 사람이 두려워하는 바의 것은 오늘날의 사람이 그것을 경시하고, 옛날 사람이 괴이쩍게 여기는 바의 것은 오늘날의 사람이 빙긋이 웃고, 지혜의 항목이 날로 증가하여 그 발명이 많은 것은 옛날부터 일일이 셀 겨를이 없고, 차후의 진보도 역시 헤아릴 수 없다. 가령 옛날의 성인(聖人)으로 하여금 현대에 살도록 하여, 오늘날의 경제와 상업에 대한 설명을 듣게 하고, 혹은 현대의 증기선에 태워 대양을 파도를 건너고, 전신으로 만 리(萬里) 떨어진 곳의 새로운 소식을 순간에 듣도록 하는 등의 일이 있다면, 이것에 낙담하는 것은 물론 논할 필요도 없다. 혹은 이들을 놀라게 하기에 반드시 증기와 전신을 필요로 하지 않고, 종이를 만들어 글자를 쓰는 법을 가르치고, 혹은 목판조각 기술을 보이는 것도 더욱 이들을 탄복케 하기에 충분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 증기, 전신, 제지, 인쇄술은 모두 후세 사람들의 지혜로써 도달할 수 있었던 것이어서, 이 발명과 궁리를 하는 동안에 성인(聖人)의 말을 듣고 덕의(徳義: 도덕상의 의무: 도덕)의 길을 실제로 실천한 일이 없고, 옛날의 성인(聖人)은 꿈에도 이것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지혜로써 논하면 고대의 성현은 오늘날의 세 살배기 아이와 같은 것이다.
덕의(徳義: 도덕상의 의무: 도덕)와 관련된 일은 형체로서 가르칠 수 없다. 이것을 배워서 얻는 것과 얻지 못하는 것은 배우는 사람 마음의 노력에 달렸다. 비유건대 경서(經書)에 쓰인 극기복례(克己復礼)라는 네 글자를 보여 그 글자의 뜻을 알게 하는 것도, 물론 아직 도(道)를 전했다고 할 수 없다. 그러므로 이 네 글자의 의미를 더욱 상세하게 하여, 극기(克己)라는 것은 자신의 사욕을 억제하는 것이고, 복례(復礼)라는 것은 자신의 본심으로 돌아가 분수를 아는 것이라고, 공손하게 반복하여 이것을 설득해야 한다. 교사의 역할은 오직 이것까지이고, 달리 도(道)를 전하는 방법이 없다. 이 이상은 사람마다의 노력이어서, 혹은 옛 사람의 글을 읽고 혹은 현대인의 언행을 듣고 보아서 그 덕행을 따를 뿐이다. 이른바 이심전심(以心伝心)이라는 것이어서, 혹은 이것을 덕의(徳義: 도덕상의 의무: 도덕)의 감화라고 한다. 감화는 본디 형태가 없는 것이므로, 그 이것에 감화하는 것과 감화하지 않는 것에 관해서는 시험할 방법이 없다. 혹은 실제로 사욕을 마음대로 내면서 자신에게는 사욕을 억제한다고 생각하고, 혹은 분수에 넘치는 일을 하면서 자신에게는 분수를 안다고 생각하는 자도 있을 수 있다하더라도, 그 생각하는 것과 생각하지 않는 것은 가르치는 사람이 도저히 관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다만 이것을 배우는 사람의 마음의 노력에 달려있을 따름이다. 그러므로 극기복례(克己復礼)의 가르침을 듣고, 마음에 크게 계몽되는 자도 있고, 혹은 크게 오해하는 자도 있고, 혹은 이것을 멸시하는 자도 있고, 혹은 이것을 양해하는 것도 오히려 겉모양을 가장하여 사람을 속이는 자도 있다. 그 내용이 천태만상이어서, 진짜와 가짜를 구별하는 것이 매우 어렵다. 가령 이 가르침을 명시하는 자에게서도, 겉모양을 꾸며 사람을 속이든가, 혹은 이것을 오해하여 이것을 믿어, 진정한 극기복례가 아닌 것을 옳다고 하여 의심하지 않는 자가 있을 때는, 옆에서 이것을 어떻게도 할 수가 없다. 이때에 이르러서는 규칙으로써 증명할 수 있는 것이 없으므로, 혹은 이 사람에게 고하여 하늘을 무서워하라고 말하고, 혹은 스스로 마음에 물으라고 말하는 것 외에, 수단이 있을 수 없다. 하늘을 무서워하고 마음에 묻는 것은 한 몸 안의 일이어서, 진실로 하늘을 무서워하는 것도 거짓으로 하늘을 무서워하는 것도 남의 눈으로써 재빨리 간파할 수 있는 바가 아니다. 이것이 곧 세상에 가짜 군자인 자가 생기는 이유이다. 가짜 군자가 심하기에 이르러서는, 비단 도덕적인 일을 듣고 그 의미를 해석할 뿐만 아니라, 스스로 덕의(徳義: 도덕상의 의무: 도덕)의 교설을 주장하고, 혹은 경서(經書)의 주해를 저술하고, 혹은 하늘의 길과 종교의 일을 논하여, 그 논의가 아무튼 순수하여서, 그 저서만을 취하여 읽으면 후세에 또 한 명의 성인(聖人)을 출현시킨 것과 같은 존재가 있더라도, 물러서서 그 사람의 사적인 것에 관하여 보면 언행이 일치하지 않는 것이 실제로 놀랄만하고, 판단의 어리석음이 실제로 웃을만하다. 한퇴지(韓退之: 당나라의 문장가 한유)가 불교 사리에 관한 표문을 상소하여 천자에게 간한 것은 아무튼 충신답고, 조주(潮州)에 좌천당한 때에는 시 등을 지어 충정에서 나온 분노의 기운을 흘리면서, 그 후, 먼 지방에서 서울의 권세가문에 편지를 보내, 더럽게 재차 벼슬길을 탄원한 것은, 이것이야말로 가짜 군자의 장본인이리니. 이런 부류를 열거하면 옛날과 현대의 중국에서도 일본에서도 서양에서도 한퇴지의 부하가 없는 것은 아니다. 아첨(교언영색: 巧言令色), 돈을 탐하는 자는 논어를 강독하는 자 안에 있다. 무지한 자를 기만하고 약소한 자를 위협하여 명성과 이익을 아우르면서 모두 취하려는 자는, 기독교를 신봉하는 서양인 안에 있다. 이런 소인배는, 형태가 없는 덕의(徳義: 도덕상의 의무: 도덕)에 시험의 규칙이 없는 것을 이용하여, 덕의(徳義: 도덕상의 의무: 도덕)의 문으로 출입하여 잠시라도 밀매행위를 하는 자라고 할 수 있다. 결국 덕의(徳義: 도덕상의 의무: 도덕)의 작용으로써 사람을 지배할 수 없다는 명확한 증거이다. 《서경[書経]에 금문[今文]과 고문[古文]의 구별이 있다. 진시황이 책을 불태워 서경[書経]도 함께 실종되고, 한나라가 흥하여 문제[文帝] 때에 제남[済南]의 노학자 복승[伏勝]이 충분히 29편을 암기하여 전한 것을 금문[今文]이라고 하고, 그 후 공자의 고택을 허물어 벽안에서 고서를 얻어 고문[古文]이라고 이름을 붙인다. 그러므로 지금의 서경[書経] 58편 안에 금문[今文] 29편과 고문[古文] 29편이 있다. 그런데 지금 이 금문[今文]과 고문[古文]의 글을 비교하는 데 완전히 그 양식을 달리하여, 금문[今文]은 어렵고, 고문[古文]은 평이하여, 그 문장의 의미와 어조가, 명백히 두 가지 모양으로 구분되어, 몇 명의 눈으로 보아도 진시황의 분서갱유 이전에 이루어진 동일한 책 가운데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반드시 그 하나는 위작임을 피할 수 없다. 특히 벽속의 고문[古文]이 세상에 유행했던 것은 진[晋] 시대이어서, 그 이전, 한대[漢代]에 책 가운데 일편진서[一篇秦誓]라 하여 여러 유교학자들이 인용하였던 것을, 진[晋] 시대에 가짜진서[위진서: 偽秦誓]라 지칭하여 폐지한 일이 있다. 어느 것도 서경[書経]의 유래는 불분명한 것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후세에 이르러서는 사람의 믿음이 더욱더 굳어져서, 오로지 이것을 성인[聖人]의 저서로 하여, 채침[蔡沈]이 서경집전[書経集伝]의 서문에서도, 성인[聖人]의 마음을 책에 표현한 것이라고 하였다. 의심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생각건대 채침[蔡沈]의 뜻은 금문[今文]과 고문[古文] 등의 구별을 논하지 않아도, 책 가운데 기록한 바, 성인[聖人]의 취지에 맞기 때문이라 하여 이것을 성인[聖人]의 저서라고 간주한 것이려니 할지라도, 금문[今文]과 고문[古文] 안에, 그 한 가지 글은 후세부터 성인[聖人]의 뜻에 영합하여 조작한 문장이기에, 이것을 가짜 성인의 저서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니까 세상의 가운데 가짜 군자가 많은 것은 물론, 혹은 가짜 성인[聖人]을 탄생시켜 가짜 성인[聖人]의 저서도 만들어낼 수 있는 것도 알 수 있다.》지혜는 즉 그렇지 않다. 세상에 지혜의 분량이 풍족하면, 가르치지 않고도 서로 이것을 배우고, 스스로 사람을 변화시켜 지혜의 영역에 들어오도록 하는 것, 더욱 저 덕의(徳義: 도덕상의 의무: 도덕)의 감화와 다르지 않다할지라도, 지혜의 힘은 반드시 감화에만 의하여 그 작용을 키우는 것이 아니다. 지혜는 그것을 배우는 데 형체로 하여금 명확하게 그 흔적을 볼 수 있다. 덧셈과 뺄셈과 곱셈과 나눗셈의 방식을 배우면, 곧바로 덧셈과 뺄셈과 곱셈과 나눗셈을 할 수 있다. 물을 끓게 하여 증기로 되게 할 수 있는 이치를 듣고, 기관을 제작하여 이 증기력을 이용하는 방법을 교습하면, 곧 증기기관을 만들 수 있다. 이미 이것을 만들면 그 효능은「와트」가 만든 기관과 다르지 않다. 이것을 형체가 있는 지혜 교육이라고 한다. 그 가르침에 형체가 있으면 이것을 시험하는 데도 형체가 있는 규칙이 있다. 그러므로 지혜의 방법을 사람에게 전수받았다할지라도, 이것을 실제로 실시하는 것에 관하여 여전히 불안한 마음의 항목이 있으면, 이것을 실제로 시험할 수 있다. 이것을 시험하여 아직 실제로 수행할 수 없는 사람이 있으면, 다시 실제로 수행하는 순서를 가르칠 수 있다. 어느 것도 모두 형체로써 가르칠 수 없는 것이 없다. 비유건대 여기에 수학교사가 있을 것이다. 12를 등분하여 6을 얻는 방법을 학생들에게 가르쳐, 이것을 실제로 수행할 수 있느냐 수행하지 못하느냐를 시험하는 것에는, 12개의 구슬을 주어 이것을 둘로 나누도록 하여, 분명히 그 방법을 얻느냐와 얻지 못하느냐를 증명할 수 있다. 학생이 만약 오해하여 이 구슬들을 둘로 나누어 8과 4가 되면, 아직 방법을 얻지 못한 것이다. 만약 그럴 때는 다시 재차 설명하여 이것을 시험하여, 이번에는 12개의 구슬을 등분하여 6과 6으로 할 수 있으면, 이 1단계의 교습은 끝나고, 그 배울 수 있는 방법이 뛰어남은 교사와 다른 것이 아니고, 흡사 천지간에 두 명의 교사를 탄생시키는 것과 같다. 그 교습이 신속하여 시험이 명백한 것은 실제로 눈과 귀로써 보고 들을 수 있다. 항해술을 시험하는 것에는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도록 할 수 있고, 상술을 시험하는 것에는 물건을 매매하도록 하여 그 손익을 볼 수 있고, 의술의 뛰어남과 열등함은 환자의 완치와 치료되지 못함을 보고 알 수 있고, 경제학의 뛰어남과 열등함은 집의 빈부로써 증명할 수 있다. 이와 같이 하나하나 증거를 보고 그 방법을 얻었는지 아닌지를 규명하는 것, 이것을 지혜로운 방법 및 유형의 시험법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지혜의 일에 관해서는 겉모양을 꾸며 세상을 속이는 방법이 없다. 덕(德)이 없는 자는 꾸며서 덕(德)이 있는 자의 겉모습을 보일 수 있다할지라도, 어리석은 자는 꾸며서 지혜로운 자의 흉내를 낼 수 없다. 이것이 곧 세상에 가짜 군자는 많고 가짜 지혜로운 자가 적은 이유이다. 혹은 저 경제가가 천하의 경제를 논하되 한 가정의 살림살이를 유지하는 법을 알지 못하고, 항해자가 논의는 뛰어나더라도 배에 타는 일이 능숙하지 않은 부류는, 세상에 그 사례가 적지 않다. 이와 같은 것은 소위 가짜 지혜로운 자와 비슷하더라도, 결국 세상의 물정에 있어서 논의와 실제가 서로 다를 수 있는 이유가 없다. 다만 도덕적인 일에 관해서는 이 논의와 실제의 서로 다름을 분명하게 할 규칙이 없을 따름이다. 지혜의 범위에 관해서는, 가령 이 가짜 지혜로운 자를 탄생시키는 것도 여전히 그 진위를 규명할 수 있는 수단이 있다. 그러므로 항해자가 배에 타는 것을 터득할 수 없고, 경제가가 살림살이에 서툰 일이 있으면, 그 사람은 반드시 아직 진짜 기량을 알지 못하는 자이거나, 또는 특별히 그 배울 수 있는 기량을 방해하는 원인이 있어 그런 것이다. 《비유건대 경제가가 사치를 좋아하고, 항해자가 신체 허약하여 그 기량이 뛰어나도 이것을 실제로 수행할 수 없는 부류를 말한다.》그리고, 그 기량이라고 하고 또 이것을 방해하는 바의 원인이라고 하고, 모두 이 형체가 있는 일이므로, 그 상황을 규명하여, 진실로 그 기량을 얻은 자인지, 그렇지 않은 자인지를 증명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이미 그 진위를 증명하는 때는, 또 옆에서 논의하여 이것을 가르치는 법도 있을 수 있고, 혹은 스스로 궁리하여 타인에게 배우는 길도 있을 수 있다. 결국 지혜의 세계에서는 가짜 지혜로운 자를 받아들일 수 있는 지위를 남기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말하는 바, 덕의(徳義: 도덕상의 의무: 도덕)는 형체로써 사람을 가르칠 수 없고, 형체로써 진위를 규명할 수 없고, 다만 형체가 없는 기회에 사람을 감화시킬 수 있을 뿐이다. 지혜는 형체로써 사람을 가르칠 수 있고, 형체로써 진위를 증명할 수 있고, 또 형체가 없는 기회에서 사람을 감화시킬 수 있다.
덕의(徳義: 도덕상의 의무: 도덕)는 한 마음의 노력에 따라서 진퇴하는 것이다. 비유건대 여기에 두 명의 소년이 있어, 시골지방에서 태어나 천성이 근면하고 정직한 것, 두 사람은 전혀 차이가 없는 사람, 상업이든, 또는 학문을 위해 도회지로 나가, 그 초기에는 스스로 친구를 선택하여 사귀고, 스승을 선택하여 배우고, 도시의 인정이 경박한 것을 보고 몰래 탄식하는 정도의 일이 있지만, 반년이 지나고 일 년이 경과하는 사이에, 그 한 명은 종래의 시골 정신을 바꾸어 도시 안의 부질없는 사치를 배워 결국 방탕과 불량한 짓에 빠져 일생 몸을 망치고, 다른 한 명은 그러지 않고 더욱 몸을 닦아 그 품행이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 같아서 전혀 시골의 본심을 잃지 않아서, 두 사람의 덕행은 갑자기 하늘과 땅 차이가 되는 일이 있다. 그 사실은 오늘날 도쿄에 있는 학생을 보고도 알 수 있다. 만약 이 두 명의 소년으로 하여금 고향에 있도록 했다면, 두 사람 모두 근면하고 정직한 인물이서, 세월을 지내는 데 따라 유덕한 늙은 어른이 되었음이 당연하여, 중년에서 한 사람은 덕(德)보다 부덕(不德)에 빠지고, 다른 한 사람은 충분히 몸을 보전한 자이다. 이제 그런 이유를 찾는 데, 두 사람은 서로 천성이 다른 것이 아니고, 또 그 사귀는 사람들도 같아서 배우는 것도 같으므로, 교육의 좋고 나쁨에 의한 것이라고 할 수 없다. 그런데 그 덕행이 서로 동떨어진 것이 이와 같은 것은 왜인가? 그 한 사람의 덕의(徳義: 도덕상의 의무: 도덕)는 갑자기 내용을 바꾸어 퇴보하고, 다른 한 사람은 옛것을 지켜 잃어버리지 않은 것이어서, 외부 물체의 작용에 강약이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의 마음이 노력하는 데 움직임이 있고 움직임이 없고 차이가 있어, 하나는 퇴보하고 다른 하나는 진보한 증거이다. 또 소년 때부터 사치와 방탕을 일삼고, 물건을 훔치고 사람을 해쳐 악업에 이르지 않는 바가 없고, 친척과 친구를 사귀는 것도 실패하고, 거의 세상에 몸을 수용할 수 있는 지위가 없는 데 다다른 자도, 일단 활연히 마음가짐을 고쳐, 전일의 비행을 참회하고 장래의 화복을 숙고하여, 근신하고 공부하여 반생을 마치는 자가 있다. 그 생애의 심중을 보면 분명히 전후 두 단계로 나누어, 한 생애에 정말로 두 생애에 하는 일을 하여, 흡사 복숭아나무 바탕에 매화 싹을 접목하여, 어른 나무가 된 후에는 다만 매화만을 보고 그 뿌리가 복숭아나무인 것을 구별할 수 없는 것과 같다. 시험적으로 세상에 관하여 그 실제 증거를 구하면, 옛날의 노름꾼이 지금의 염불하는 자가 되고, 유명한 악한이 신용 있는 장사꾼이 된 부류는 드물지 않다. 이런 사람들은 모두 다른 사람의 지시에 따라 마음씨를 고친 것이 아니라, 전념의 노력에 의하여 마음을 바꾼 것이다. 옛날 구마가이 나오자네(熊谷直実)가 아츠모리(敦盛)를 토벌하고 부처에게 귀의하고, 혹은 사냥꾼이 새끼를 밴 원숭이를 쏘아 평생, 사냥을 그만두었다고 하는 것도 이런 부류일 것이다. 구마가이(熊谷)도 부처에게 귀의하여 곧 염불하는 행자가 되었으니 옛날의 사나운 무사가 아니고, 사냥꾼도 총포를 버리고 쟁기를 선택하여 곧, 기특한 농부여서 예전의 살인자가 아니다. 사나운 무사에서 염불하는 행자로 변하고, 살인자에서 농부로 변모한 일은, 타인의 교습을 필요하지 않는 전념의 노력으로써 순간에 실행할 수 있다. 덕(德)과 부덕(不徳)의 사이에 조금의 간격도 없는 것이다. 지혜에 관한 일에 이르러서는 크게 그 취지를 달리했다. 사람의 탄생은 무지하고, 배우지 않으면 진보할 수 없다. 갓 태어난 아이를 사람이 없는 산에 버렸다면, 다행히 죽지는 않아도 그 지혜는 거의 금수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혹은 꾀꼬리가 집을 짓는 것과 같은 뛰어난 재주는, 배우지 않은 인간이 평생 연구하여 할 수 없다. 사람의 지혜는 다만 가르침에 달려있을 따름이다. 이것을 가르치면 그 진보하는 일도 역시 제한이 있을 수 없다. 이미 진보하면 또 퇴보하는 일도 있을 수 없다. 두 소년의 천성이 서로 같으면, 이것을 가르쳐 역시 함께 진보할 수 있다. 혹은 쌍방의 진보에 더딤과 빠름이 있는 것은, 그 천성이 서로 다르거나, 그 가르침의 방식이 같지 않거나, 혹은 두 사람의 근면함과 태만함이 한 가지 모양이 아니어서 그런 것이다. 어떤 사정이 있어도 전념하여 노력하는 것으로써 갑자기 지혜를 여는 재주가 있을 수 없다. 어제의 노름꾼이 오늘의 염불하는 사람이 될 수 있다할지라도, 사람의 지혜와 어리석음은 외부의 물체와 접촉하지 않고 하루 사이에 변화할 수 없다. 또 작년의 근면하고 정직한 학생이 금년의 방탕아로 변하여 그 근면하고 정직한 흔적을 본다하여도, 사람이 이미 얻은 지혜는 건망증에 걸리지 않으면 이것을 잃어버릴 일이 없다. 맹자는 호연지기라고 하고, 송나라의 유학자의 주장에는 일단 활연(豁然: 돌연히 깨달음)하여 통하는 것이라 하고, 선가(禅家: 선종)에서는 오도(悟道: 도를 깨우침)라고 하는 것이 있어도, 모두 이 형체가 없는 마음에 형체가 없는 것을 연구하는 것뿐이어서 그 실적을 볼 수 없다. 지혜의 영역에 있어서는, 일단 활연(豁然: 돌연히 깨달음)하여 이것을 이해하여, 그 효능이 왕성한 것, 저 호연지기 같은 것이 있을 수 없다.「와트」가 증기기관을 발명하고,「아담 스미스」가 경제론을 주창한 것도, 침묵하며 홀로 앉아, 일단 활연(豁然: 돌연히 깨달음)하여 오도(悟道: 도를 깨우침)한 것이 아니라, 여러 해에 걸쳐 형체가 있는 자연과학을 연구하여 그 업적이 점차 실제로 나타난 것이다. 달마대사로 하여금 면벽하여 90년이 되도록 하여도 증기와 전신의 발명은 있을 수 없다. 지금의 유학자(儒學者) 부류로 하여금 일본과 중국의 경서(経書) 만권을 읽게 하여, 형체가 없는 은혜와 위엄으로써 하층민을 제어하는 묘법을 궁리하도록 하여도, 현재의 세상에 행하여지는 정치와 경제의 문에는 갑자기 도달할 수 없다. 그리하여 말하는 바, 지혜는 배워서 진보할 수 있고, 배우지 않으면 진보할 수 없으며, 이미 배워서 지혜를 얻으면 또 후퇴한 일이 있을 수 없다. 덕의(徳義: 도덕상의 의무: 도덕)는 가르치기 어렵고 또 배우기도 어려워, 혹시 전념하여 노력하여 갑자기 진퇴하는 일이 있는 것이다.
세상의 덕행을 주장하는 사람의 말에 이르기를,「덕의(徳義: 도덕상의 의무: 도덕)는 만사의 근본, 인간이 해야 하는 일, 덕(德)에 근거하지 않으면 이룰 수 있는 것이 없고, 한 몸의 덕(德)을 닦으면 이루지 못할 것이 없고, 그러므로 덕의(徳義: 도덕상의 의무: 도덕)는 가르치지 않을 수 없고, 배우지 않을 수 없으며, 인간의 만사 방치하여도 지장은 없고, 먼저 덕의(徳義: 도덕상의 의무: 도덕)를 닦고 그런 후에 도모할 수 있고, 세상에 덕(德)의 가르침이 없는 것은 더욱 어두운 밤에 등불을 잃는 것과 같아서, 사물의 방향을 볼 수 없고, 서양의 문명도 덕(德)의 가르침이 초래하는 바이고, 아시아가 반개(半開) 상태인 것도 아프리카가 야만 상태인 것도, 그 원인은 다만 덕의(徳義: 도덕상의 의무: 도덕)를 닦는 깊이와 얕음에 따르는 것이고, 덕의(徳義: 도덕상의 의무: 도덕)는 더욱 추위와 따뜻함과 같고 문명은 더욱 온도계와 같아서, 이에 증감이 있으면 홀연히 그에 응하여, 1도의 덕(德)이 올라갈 때는 1도의 문명을 진척시키는 것이다」하여, 사람의 부덕(不徳)을 슬퍼하고 사람이 착하지 못함을 우려하여, 혹은 기독교를 들어올 수 있게 한다고 하고, 혹은 신도(神道)가 쇠락한 것을 회복해야 한다고 말하고, 혹은 불교의 법(仏法)을 지속적으로 주장해야 한다고 하고, 유교학자에게도 주장이 있고, 국학자(国学者)에게도 논리가 있어, 서로 다른 주장과 논쟁이 구구하고 시끄럽고, 그 슬퍼하고 우려하고 탄식하는 상황이, 흡사 물과 불이 막 집을 삼키려는 것을 당하는 것과 같다. 왜 그것의 당황스러움이 심한가? 내 눈에는 스스로 또 달리 보는 바가 있다. 대체로 사물의 극단을 도출하는 것에 의하여 논의를 중단을 결정할 수는 없다. 지금 선하지 못하고 덕(德)이 없다하여 극단적인 상황을 기준으로 정하여, 다만 그 한 편을 구하겠다고 하는 것은 본디 매우 급한 것으로 보일지라도, 그 한 쪽이 부족할 뿐임을 보충한다 해서 지금까지 인간의 일을 완벽하게 했다고 말할 수 없다. 더욱 저 손으로써 직접 입에 도달하는 음식을 얻는 것도 인간 생계를 이룩했다고 할 수 없는 것과 같다. 만약 사물의 극단을 보고 논의를 정할 수 있는 것으로 하면, 덕행(德行)을 가르치는 것도 역시 무력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가령 지금 덕(德)을 가르치기만 함으로써 문명의 근본으로 하고, 세계 가운데 사람들로 하여금 모두 기독교 성경을 읽도록 하고, 이것을 읽는 것 외에 하는 일이 없도록 하면 어찌되는가? 선종(禪宗: 선가: 禅家)의 불립문자(不立文字: 불도의 진리는 마음으로 깨닫는 것이지 문자나 말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는 주장) 가르침을 번성하게 하여, 천하의 사람들이 문자를 잊는 데 이르면 어떻게 되는가? 고사기(古事記)와 5경(역경, 시경, 서경. 예기, 춘추)을 암송하여 충절과 몸을 수양하는(충의수신: 忠義脩身) 도를 배우면서 입에 풀칠하는 방법을 알지 못하는 자가 있으면, 이것을 문명인이라고 할 수 있는가? 다섯 가지 감각기관의 욕망을 버리고 고생을 감내하여 인간세상이 어떤 것인지를 알지 못하는 자가 있으면, 이것을 개화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가? 길가에 석상이 있어, 세 마리의 원숭이를 조각해서, 하나는 눈을 가리고, 다른 하나는 귀를 가리고, 나머지 하나는 입을 가렸다. 생각건대 보지 않고, 듣지 않고, 말하지 않는다는 비유이어서, 인내의 덕의(徳義: 도덕상의 의무: 도덕)를 표시한 것이리라. 이 취지에 따르면, 사람의 귀와 눈과 입은 부덕(不徳)의 매체여서, 하늘이 사람을 탄생시킨 것은 그것에 부여하는 것에 부덕(不徳)의 도구로써 하는 것과 같다. 귀와 눈과 입을 해롭다고 하면 손과 발도 역시 재앙의 수단이리라. 그러므로 장님과 귀머거리와 벙어리는 아직 완벽하게 선량한 사람이 아니고, 겸하여 사지의 움직임도 빼앗는 것이 상책이다. 혹은 이 불구의 생명체를 만들기보다는, 차라리 세상에서 인류가 없도록 하면 상책의 으뜸일 것이다. 이것을 천지의 약속이라 할 수 있는가? 나는 조금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기독교 성경을 염두에 두고, 불립문자(不立文字: 불도의 진리는 마음으로 깨닫는 것이지 문자나 말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는 주장)의 가르침에 귀의하고, 충절과 몸을 수양하는(충의수신: 忠義脩身)의 길을 존중하여, 다섯 가지 감각과 육체의 욕망을 떠난 자는, 도덕적 가르침을 믿어 의심하지 않는 것이다. 종교를 믿어 의심하지 않는 자는 가령 무지하다고 할지라도 이것을 악인이라 하여 탓할 이유는 없다. 무지를 탓하는 것은 지혜의 일이고, 덕의(徳義: 도덕상의 의무: 도덕)가 관련되는 바가 아니다. 그러므로 극단적으로 논하면, 덕의(徳義: 도덕상의 의무: 도덕)에 관해서는 사사로운 덕(德)이 결여된 자를 보고 일반적으로 이것을 악인으로 하고, 가르침의 목적은 다만 세상에서 이 악인을 줄이는 한 가지 일에 있는 것과 같다. 그렇다할지라도 충분히 넓게 사람 마음의 작용을 살펴서 그 흔적에 나타나는 바를 상세히 하면, 이 악인을 줄이는 한 가지 일로써 문명이라고 할 수 없는 이유가 있다. 지금 시골사람과 도시사람을 비교하여 사사로운 덕(德)의 양을 재면, 어떤 방향에 많은지를 명확하게 결정하기 어려워도, 세상의 일반적인 여론에 따르면 우선 시골 풍속을 질박(質朴)하다고 좋아할 것이다. 가령 이것을 좋아하지 않는 것도, 시골의 도덕적 풍속을 얄팍하다 하고 도시의 풍속은 두텁다고 하는 자가 없을 것이다. 상고시대와 근세를 비교하고, 어린이와 어른을 비교하는 것도 역시 이와 같다. 그런데 그 문명이 어떤지를 논할 때는, 도시는 문명이라고 하고 근세는 문명이 진보했다고 하지 않는 자가 없다. 그렇다면 곧 문명은 다만 악인의 많고 적음으로써 그 진퇴를 점칠 수 없다. 문명의 근본은 사사로운 덕(德)이라는 한 방향에 있지 않는 것 명백하게 증명할 수 있다할지라도, 저 덕행(德行)에 유식한 자는 처음부터 논의의 극단에 멈추어, 사상의 여지를 남기지 않고 한 방향에 치우쳐, 문명의 광대함을 알지 못하고, 문명의 잡다함을 알지 못하고, 그 작용을 알지 못하고, 그 진보함을 알지 못하고, 사람 마음의 다단함을 알지 못하고, 그 지혜와 덕(德)에 공적인 것과 사사로운 것의 구별이 있음을 알지 못하고, 그 공적인 것과 사사로운 것이 서로 억제함을 알지 못하고, 서로 고르게 함을 알지 못하고, 전체 사물을 하나로 통합하여 그 전체 국면의 득실을 판단하는 방법을 알지 못하여, 다만 한결같이 한 쪽으로 이 세상의 악인을 줄이고자 하는 것을 바라서, 그 폐해가 마침내 현재 세계의 사람들로 하여금 복희(伏犠: 중국 고대 전설상의 제왕)와 소호(少昊: 중국 전설상의 임금) 이상의 국민과 같이 되게 하고, 도시로 하여금 시골과 같이 하고, 어른으로 하여금 어린이와 같게 하고, 중생으로 하여금 돌로 만든 원숭이와 같이 되도록 하겠다는 좁은 소견에 빠진 것이다. 결국 신도(神道)와 유교와 불교 및 기독교의 가르침이라도 그 본래의 취지는 이와 같이 한 방향으로 치우친 것이 아닌 것이 물론이라 할지라도, 다만 어쩔 것이냐, 세간의 일반적인 기풍에서 그 가르침을 전하고 또 받는 때에 사람 마음에 감동하는 바의 결과를 보면, 결국 이 하잘것없는 폐해를 피할 수 없다. 그 분위기를 묘사하여 말하면, 위산과다 환자 중에서 심한 자는, 어떤 음식을 주어도 전부 시어져서 영양분의 효과를 이룰 수 없는 것과 같다. 음식의 죄가 아니라, 고질이 일으키는 바이다. 학자들은 이것에 주의하지 않을 수 없다.
또 저 지식인이 심하게 세상의 부덕(不德)을 우려하는 연유를 찾는 데, 틀림없이 세상 사람들을 모두 악한 자라고 생각하여 구원하고자 하는 취지일 것이다. 그 노파심은 진실로 존경할 수 있다할지라도, 세상 사람을 죄업이 깊은 범부(凡夫: 보통사람)라고 일컫는 것은, 소위 자리를 보고 말하는 방편일 뿐, 기실은 반드시 그렇지 않다. 인류는 생애동안에, 열심히 나쁜 짓만 하는 것이 아니다. 옛날과 오늘날의 세상 가운데 있어 어떤 선인(善人)에게서도 반드시 악행이 없음을 보증할 수 없고, 어떤 악인에서도 역시 반드시 선행 없음을 기대할 수 없다. 사람 생애의 행적을 평균하면, 선악이 서로 섞여 선(善)의 방향이 많을 것이리라. 선행이 많으면 세상의 문명도 차츰 진보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 선행은 모두 교육의 힘에만 의하여 생기는 것이 아니다. 사람을 유혹하여 악에 빠뜨리려고 해도, 그 계략이 반드시 백발백중되지 않는 일이 생기면, 곧 이 계략을 뒤집어 선(善)에 이용하는 것도 역시, 반드시 사람을 인도하여 선(善)으로 옮길 수 없는 것을 증명할 수 있다. 결국 사람 마음의 선악은 사람마다의 노력에 달려 있을 따름이어서, 옆에서 자유자재로 주거나 빼앗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교육이 두루 미치지 않는 고대인에도 선한 사람이 있고, 지혜의 힘이 발생하지 않는 어린이에도 정직한 아이가 많은 것을 보면, 사람의 본성은 평균적으로 선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덕의(徳義: 도덕상의 의무: 도덕) 교육의 큰 취지는 그 선(善)의 발생을 방해하지 않는 것에 달려있을 따름이다. 가족과 친구 사이에 선(善)을 촉구하는 것은, 그 사람의 천성에 없는 것을 옆에서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선한 마음을 방해하는 것을 없애는 방법을 가르쳐, 본인이 노력하여 자기의 선(善)으로 돌아가게 하는 것뿐이다. 그러므로 덕의(徳義: 도덕상의 의무: 도덕)는 인위적인 교육만으로써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고, 그것을 배우는 사람의 노력에 의하여 발생하는 것이다. 또한 소위 덕행이라는 것은 본장의 처음에도 기록한 것과 같이 다만 수동적인 사사로운 덕(德)이어서, 결국은 한 몸의 사욕을 떠나, 재산을 사랑하지 않고 명예를 탐하지 않으며, 도둑질하는 일이 없고 속이는 일도 없고, 맑은 마음을 결백하게 하여 성실을 위해서는 하나의 생명도 내팽개치는 것을 가리켜 말하는 것이라면, 곧 인내심이다. 인내의 마음은, 본디 죄가 되지 않는다. 이것을 저 탐욕과 인색과 속임수와 도둑질의 대악무도의 부덕(不德)과 비교하면 비교될 수 없다할지라도, 사람의 품행에 관하여 이 인내하는 선한 마음과 이 부덕한 악한 마음과의 사이에는 천태만상의 작용이 당연히 있을 수 있다. 앞의 문단에서 지혜와 덕행의 항목을 네 가지로 나누었어도, 그 세목을 열거하면 대체로 한계가 있을 수 없다. 흡사 선악을 심한 더위와 심한 추위라는 양 극단으로 삼아, 그 사이에는 봄도 있고 가을도 있어 조금 더운 것도 있고 추워지는 것도 있어, 냉온의 온도에 한계가 없는 것과 같다. 혹시 인류로 하여금 그 천성을 온전하게 할 수 있도록 하면, 심한 추위와 같은 악한 마음은 처음부터 이미 벗어나 먼 상류에 있을 것이 당연하지 않는가? 사람에게 도둑질과 사기를 치는 마음이 없다고 하여 어찌 이것을 미덕이라 하기에 충분한가? 도둑질하지 않고 사기 치지 않는 것 등의 항목은 인류의 품행에 계산하여 넣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만약 저 탐욕과 인색과 사기행각과 도둑질 대악무도함이 있으면, 사람이되 사람이 아닌 것이다. 그 마음을 내부에 포장하면 세간의 경멸을 받고, 그 소행을 외형에 드러낼 때는 사회관련 법으로써 처벌할 수 있다. 어느 것도 인과응보의 절차는 명확해서, 악을 징치하는 도구, 외부에서 준비되고, 선행을 권하는 계기는 내부에 존재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제 부지런히 사사로운 덕(德)의 한 방향을 가르쳐, 만물의 영장인 인류로 하여금 겨우 이 비인간적인 부덕(不德)을 면하도록 하는 것을 힘쓰고, 이것을 면하는 것으로써 인생 최고의 약속으로 삼아, 이 가르침만을 베풀어 한 세대를 농락하려고 하다가 오히려 평생 타고난 지혜의 힘을 위축시키는 것은, 필경 사람을 멸시하고 사람을 제압하여 그 자연스러움을 방해하는 행위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일단 마음에 제압을 받으면 마음을 신장시키는 것이 매우 쉽지 않다. 저 정토진종(浄土真宗) 신도들은 스스로 인정하여 범부(凡夫: 번뇌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평범한 사람)라고 칭하여, 다른 힘에 의지하여 극락왕생을 구하여, 한결같이 오로지 아미타불을 염불하여 나무아미타불 6자를 외우는 것 외에, 도무지 생각하는 것이 없다. 한학자가 공자와 맹자의 도(道)에 심취하여 경서를 반복해서 읽는 것 외에 생각하는 것이 없고, 국학자가 신도(神道)를 믿어 옛 서적에 천착하는 것 외에 생각이 없고, 서양을 연구하는 학자가 기독교를 좋아하여 매일 새로운 학문을 망각하여, 한 권의「바이블」을 읽는 것 외에 생각이 없는 것과 같은 것도, 모두 정토진종(浄土真宗)의 부류이다. 본디 이런 부류의 사람에게서도, 그 믿는 바를 믿어 한 몸 내부를 수양하여 스스로 사회적 행위를 아름답게 하는 효능은 세상에 이바지하는 한 가지 조항이기에, 결단코 이것을 쓸모없다고 탓할 이유가 없다. 비유건대 문명이 하는 일을 지혜와 덕행이라는 한 가지 부담으로 삼아, 사람마다 이 부담을 담당할 수 있는 것이라 한다면, 가르침을 믿어 한 몸의 덕(德)을 닦는 것은 곧 부담 한편을 짊어지는 것이어서, 한편의 책임을 면했다할지라도, 다만 그 믿을 수 있는 것을 믿는 것뿐이어서 노력할 수 있는 것을 노력하지 않은 죄는 피하기 어렵다. 그 정황은 흡사 뇌를 가지고 있되 신경이 없는 것과 같고, 머리를 온전히 하고 팔을 잃어버린 것과 같다. 결국 인류의 본분을 달성하고 그 천성을 온전히 한 자가 아닌 것이다.
위와 같이 사사로운 덕(德)은 타인의 힘으로써 용이하게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가령 충분히 그것을 만드는 것도 지혜에 의지하지 않으면 구실을 할 수 없다. 덕(德)은 지혜에 의존하고, 지혜는 덕(德)에 의존하고, 지혜가 없는 덕의(徳義: 도덕상의 의무: 도덕)는 덕(德)이 없는 것과 동일하다. 다음에서 그 증거를 제시하겠다. 지금의 학자, 기독교를 편리하다고 하고 신도(神道)와 유교와 불교를 쓸모없다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 종교에 옳고 그름의 구별이 있는가? 그 옳고 그름은 내가 감히 알지 못하는 바, 이것을 구별하는 것이 본서의 취지가 아니므로 잠깐 글을 멈추고, 그 민심에 느끼는 바의 효능에 관하여 논할 때는, 기독교도 역시 반드시 항상 유효한 것은 아니다. 유럽의 선교사가 동양의 여러 섬 및 기타 야만스러운 지방에 와서, 그 원주민을 개종시켰다는 사례는 옛날부터 적지 않다. 그런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원주민은 예전과 같은 원주민이어서, 그 문명의 상황은 본래 유럽과 비교할 수 없다. 부부의 구별을 알지 못하는 발가벗은 원주민이 교회에 군집하여, 일처다부 사이에 태어난 그 자식에게, 기독교의 세례를 행하는 것도 다만 그 개종의 의식일 뿐이다. 혹은 그 지방에 문명의 단초를 열어 진보를 향하는 것도 드물게 있다할지라도, 그 문명은 틀림없이 선교사가 교습한 문학과 기술이 함께 나아갈 뿐이어서, 다만 종교라는 한 가지 일에만 의하여 발생하는 결과가 아니다. 종교는 표면적인 의식이라고 할 수 있을 뿐이다. 또 한편에서 보면, 신도(神道)와 유교와 불교에서 키워진 일본 사람들에게서도, 다만 문명의 이름을 부여할 수 없을 뿐, 그 마음씨에 이르러서는 모두 악인이라고 할 수 없고, 정직한 자도 역시 매우 많다. 이 내용을 보면 신도(神道)와 유교와 불교의 도(道), 틀림없이 무력하고, 기독교만 홀로 유력한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곧 무엇으로써 기독교를 문명에 편리하다고 하고 신도(神道)와 유교와 불교의 도(道)는 당장 쓸모가 없다고 하는가? 학자의 생각은 전후가 맞지 않은 것 같다. 이제 그 논의에 의하여 생기는 근본을 찾아, 그 의견이 있는 곳을 분석해서 찾는 데, 기독교는 문명국에서 퍼져서 문명과 같이 양립할 수 있고, 신도(神道)와 유교와 불교는 비문명국에 퍼져서 문명과 함께 양립할 수 없는 이유로, 후자(後者)를 쓸모없다하고 전자(前者)를 편리하다고 하는 것이리라. 그렇다할지라도 그 퍼지는 것과 퍼지지 않는 원인은, 종교의 본질에 관해서 힘의 강약이 있는 것이 아니고, 그 본질을 치장하여 희망을 증가시킬 수 있는 지혜의 작용에 잘하고 못함의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서양 여러 나라에서 기독교를 신봉하는 사람은 대개 모두 문명의 은혜를 입은 자이어서, 특별히 그 선교사와 같은 것은 오직 성경만을 읽는 것이 아니고, 반드시 학교 교육을 받아 문학과 기술을 습득한 인물이기에, 지난해는 선교사가 되어 먼 나라에 여행한 자도, 올해는 자기 나라에 있으면서 법률관련 직업을 열심히 할 수 있고, 오늘은 교회에 머물면서 설교할 수 있는 것도 내일은 학교에 가서 교사가 될 수 있으며, 법과 세속을 겸비하여 법 교육과 함께 학문과 기예를 가르쳐 사람을 지혜의 영역으로 인도하는 이유로, 문명과 양립하여 상충되지 않을 따름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이 종교를 경멸하지 않은 것은 다만 그 종교의 10계명만을 믿는 것이 아니고, 선교사의 언행 스스로 쓸모없지 않아서 오늘날의 문명에 적합하기 때문에 이것에 귀의하는 것이다 (10계가 인터넷 본에는 十戎로 표시되어 있고, 이와나미 문고본에는 十誡로 표시되어 있어 이와나미 문고본의 표현이 옳고 인터넷본의 표현 戎은 戒의 오기로 보인다: 역자). 이제 만약 기독교 선교사로 하여금 배우지 못하고 기술이 없는 우리 산속 절의 주지승과 같게 한다면, 설령 그 품행이 올바른 성인(聖人)과 같이 되는 것도, 신구약성서를 암송하여 아침저녁으로 읊어도, 문명의 높은 학자에게서 누가 이 종교를 믿는 자가 있을 것인가? 우연히 그것을 믿는 자가 있으면 곧 그 사람은 시골노파, 염주를 만지며 아미타불을 염불하는 패거리일 뿐이다. 이 패거리의 눈으로써 보면 예수도 공자도 석가도 이세신궁(伊勢神宮)도 구별이 되지 않는다. 합장하고 절하는 사람은 여우도 너구리도 모두 신(神)이요 부처이다. 의미도 모르고 독경을 듣고 눈물을 흘리는 그 어리석은 사람들에게, 무엇을 가르쳐 어떤 공적을 이룰 수 있는가? 결코 문명의 공적을 이룰 수 없다. 이 문명화되지 않아서 암흑인 어리석은 사람들 사이에 들어가 강제로 기독교를 가르치려 하고, 타이르고 설득하고, 심지어는 돈을 주어 이끌어 들여, 점차 기독교에 귀의하는 자가 생기는 데에 이르는 것도, 사실은 다만 불도(佛道) 안에 예수라고 부르는 하나의 파벌을 세운 것과 같은 뿐이다. 이와 같은 것은 결코 지식인이 평소에 지닌 뜻이 아니다. 지식인은 반드시 박학다재한 기독교 선교사를 받아들여, 종교와 함께 그 문학과 기술을 배우고, 그로써 우리 문명을 달성하고자 하는 의견일 것이다. 그러나 문학과 기술은 지혜가 하는 일이다. 지혜가 하는 일을 가르치는 데는 반드시 기독교 선교사에 국한되지 않는다. 지혜로운 자에게서 배울 수 있을 따름이다. 그렇다면 곧, 저 기독교를 편리하다고 하고 신도(神道)와 유교와 불교를 당장 쓸모없다고 하는 것은 지식인의 소견에 위반되는 것이 아닌가? 나는 본디 기독교 선교사를 싫어하는 것이 아니라, 지혜만 있는 자라면 기독교 선교사에게서도 평범한 교사에게서도 좋고 나쁨의 차별이 없다. 다만 박학다재하고 몸이 올바른 사람을 좋아할 따름이다. 만약 천하에 기독교 선교사를 제외하는 것 외에는 올바른 인물이 없다고 한다면, 본디 이 교사에만 의하여 어떤 일도 교습할 수 있다할지라도, 기독교파가 반드시 올바른 사람이 독점하는 장소가 아니고, 넓게 세계에서는 스스로 박학하고 정직한 군자가 있을 것이다. 이를 선택하는 것은 사람마다의 평가에 맡길 수 있을 뿐이다. 왜 오로지 기독교의 명분에 구애될 이유가 있을까? 어느 쪽도 종교의 실체에 편리함과 불편함이 있을 수 없다. 다만 이것을 신봉하는 사람들의 지혜와 어리석음에 의하여 가치를 변화시키는 것이다 (이 문장에서 인터넷 본에는 지혜<智恵>로 표현되어 있으나 이와나미 문고본에는 지우<智愚: 지혜와 어리석음>로 표현되어 이와나미 문고본에 따라서 해석함. 역자). 예수의 가르침도 석가의 가르침도 어리석은 사람의 손에 들어가면 어리석은 사람의 쓸모가 될 뿐이다. 지금의 신도(神道)와 유교와 불교의 가르침도 지금의 신관(神官)과 승려와 유학자 무리의 손에 있어 지금의 국민을 가르치면, 당연히 쓸모없고, 만약 이 무리의 사람들로 하여금 (기대하기 어려운 일이라 할지라도) 크게 배우는 일이 있도록 하여, 문학과 기술로써 그 가르침을 치장하고, 문명인의 귀를 빌려 이것을 설명하는 일이 생기면, 반드시 그 가르침에 백배의 가치를 늘려, 혹은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이것을 부러워하는 것에 이를 수 있다. 이것을 비유하면 가르침은 오히려 칼과 같고, 가르침을 시행되는 나라의 국민은 더욱 장인(匠人)과 같다. 날카로운 칼이 있다할지라도 서투른 장인의 손에 있으면 그 쓸모를 다하지 못한다. 덕행도 문명화되지 못한 국민을 만나면 문명의 쓸모가 되지 못한다. 저 덕행에 통달한 자는 장인(匠人)의 잘하고 못함을 오해하여 칼의 예리함과 무딤을 판단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말하는 바, 사사로운 덕(德)은 지혜에 의하여 그 빛을 발하는 것이다. 지혜는 사사로운 덕(德)을 인도하여 그 효능을 확실하게 하는 것이다. 지혜와 덕행 모두 구비되지 않으면 세상의 문명은 기대할 수 없다.
새롭게 종교를 도입하는 득실을 논하는 것은 본장의 취지가 아니라도, 논의 순서가 여기에 이르렀기에, 덧붙여 조금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일반적으로 물건을 구하는 것은 내게 없는 것이거나 또는 부족한 것을 얻고자 하는 것이다. 여기에 두 항목의 구하는 것이 있어, 어느 것인가 전후완급을 정하는 것은, 우선 내가 소유한 상황을 고려하여, 전혀 나에게 없는 것인지, 또는 두 가지 중, 제일 부족한 것을 살펴서 구하지 않을 수 없다. 생각건대 하나를 구하고 다른 하나를 필요하지 않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두 가지 모두 필요하여도, 이것을 구하는 데 전후완급의 구별이 있을 따름이다. 문명은 일개 국민의 지혜와 덕행을 밖에 드러내는 현상이라는 것은 앞서 이미 논했다. 그런데 일본의 문명이 서양 여러 나라의 것에 미치지 못하는 것도 보편적으로 사람들이 인정하는 바이다. 그렇다면 곧 일본이 아직 문명에 도달하지 못한 것은, 그 국민의 지혜와 덕행에 부족한 바가 있어서 그런 것이어서, 이 문명을 달성하고자 하는 것에는 지혜와 덕의(徳義: 도덕상의 의무: 도덕)를 구하지 않을 수 없다. 곧 이것이 현재 우리나라에 대한 두 항목의 요구이다. 그러므로 문명을 연구하는 학자는 널리 일본국 가운데를 전망하여 이 두 가지의 분량을 헤아려, 어느 것이 많고 어느 것이 적은지를 살피지 않으면, 그 요구의 전후완급을 분명하게 구별할 수 없다. 어떤 어리석은 자라할지라도, 일본 전체의 국민을 평가하여 덕의(徳義: 도덕상의 의무: 도덕)는 부족하여도 지혜는 넘친다고 하는 바는 없을 것이다. 그 증거가 될 수 있는 항목은 매우 많고 또 명확해서 헤아릴 겨를이 없고, 또 헤아리는 것에도 미치지 않은 정도의 것이라도, 만약을 위해 한, 두 가지 사례를 들겠다. 대체로 일본에서 시행되어 온 덕의(徳義: 도덕상의 의무: 도덕) 교육은 신도(神道)와 유교와 불교이고, 서양에서 시행되어 온 것은 기독교이다. 기독교 및 신도(神道)와 유교와 불교가 주장하는 바는 같지 않다할지라도, 그 선(善)을 선(善)이라 하고 악(惡)을 악(惡)이라 하는 큰 취지에 이르러서는 서로 크게 다른 것이 없다. 비유건대 일본에서 흰 눈은 서양에서도 희고, 서양에서 검은 숯은 일본에서도 검은 것과 같다. 또 덕의(徳義: 도덕상의 의무: 도덕)를 가르치는 일에 관해서는 동양과 서양의 학자가 빈번히 자기들의 가르침을 주장하고, 혹은 그 책을 저술하고 혹은 다른 주장을 반박하여 논쟁을 그치는 일이 없다. 이 논쟁의 내용을 보아도 역시 그것으로써 동양과 서양의 가르침에 큰 우열이 없는 것을 증명할 수 있다. 무릇 사물의 역량은 대개 서로 대적하지 않으면 논쟁은 일어날 수 없다. 소와 고양이가 싸우는 것을 보지 못하고, 씨름꾼과 어린이가 싸웠다는 것을 듣지 못한다. 싸움이 일어나는 것은 반드시 그 힘이, 백중한 사이에 있는 것이다. 저 기독교는 서양인의 지혜로써 닦고 꾸며서 유지한 종교라서, 그 정교하고 세밀한 것 도저히 신도(神道)와 유교와 불교가 미치는 바가 아닐지라할지라도, 서양의 선교사가 일본에 와서 빈번히 그 가르침을 주장하여 신도(神道)와 유교와 불교를 배척하여 자신의 지위를 얻고자 했고, 신도(神道)와 유교와 불교 학자가 미흡하나마 주장을 세워 그것에 적대하고자 하여, 아무튼 싸움과 논쟁의 체재를 갖춘 것은 왜인가? 서양의 종교가 반드시 소와 씨름꾼 같지 않고, 일본의 종교가 반드시 고양이와 어린이 같지 않아서, 동양과 서양의 종교, 틀림없이 백중지세에 있다는 명확한 증거라고 할 수 있다. 어느 편이 백(伯: 맏이)이고 어느 편이 중(仲: 둘째)인지는 내가 관여할 바가 아니라할지라도, 우리 일본인도 상응하는 종교를 신봉하여 그 덕(德)의 가르침에 은혜를 입은 자라면, 사사로운 덕(德)의 두터움과 얕음을 논할 때는, 서양인에 비하여 백(伯: 맏이)이 아니라도 반드시 중(仲: 둘째)이다. 혹은 종교의 논의 관련하지 않고 사실에 관하여 보면, 백(伯: 맏이)인 자는 오히려 문명화되지 않은 일본인 안에 많은 것도 되리라. 그러므로 덕(德)의 분량은 가령 우리나라에 부족함이 있는 것도 초미의 긴급사항이 아닌 것이 분명하다. 지혜에 관한 것은 완전히 이것과 다르다. 일본인의 지혜와 서양인의 지혜를 비교하면, 문학과 기술과 상업과 공업, 최대에서 최소에 이르기까지, 하나에서 헤아려 백에 이르러서도 또 천에 이르러서도, 하나도 저쪽보다 나은 것이 없다. 저쪽에 적대하는 자가 없고, 저쪽에 적대하고자 기도하는 자도 없다. 천하에 지극히 어리석지 않다는 것 외에 우리의 학술과 상공업으로써 서양 여러 나라에 어깨를 나란히 하겠다고 생각하는 자가 없을 것이다. 누가 큰 수레로써 증기차에 비교하고, 일본도로써 소총에 비교하는 자가 있을까? 우리에게 음양오행설을 주장하면, 저쪽에는 60 원소의 발명이 있다. 우리가 천문으로써 길흉을 점친 것에, 저쪽은 이미 혜성의 역(曆)을 작성하여 태양과 달의 실제내용을 음미했다. 우리가 움직이지 않고 평지에 거주했다고 셈하는 것에, 저쪽은 둥글고 움직이는 물체라는 것을 알았다. 우리는 우리나라로써 지존의 신국(神國)이라고 생각하는데, 저쪽은 이미 세계 분주하게 뛰어다니면서 영토를 개척하여 나라를 세우고, 그 시행령과 상법이 정비된 것은 오히려 우리보다 훌륭한 것이 많다. 이것들의 제반 사항에 이르는 것은, 지금의 일본의 형편에서 결코 서양을 향하여 자랑할 수 있는 것이 없다. 일본인이 자랑하는 것은 다만 자연적인 물산이 아니라면 산수(山水)의 풍경뿐, 사람이 제조한 물건에서는 전혀 그것이 있다는 것을 듣지 못한다. 나에게 싸우고자 하는 뜻이 없으면 저쪽도 역시 싸우지 않는다. 외국인은 충분히 자국의 일에 붙여 자부하는 자들이지만, 아직 증기차의 편리를 이야기하여 큰 수레의 불편을 논박했다는 것을 듣지 못한다. 결국 피차의 지혜가 다른 것은 소와 고양이 같은 것이어서 서로 싸움의 단서를 열지 않는 것이다. 이에 따라 그것을 보면, 방금 우리나라가 매우 급하게 구하는 것이 지혜가 아니고 무엇인가? 학자는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또 한 가지 사례를 들어 이것을 밝히리라. 시골에 인물이 있고, 옛 번(藩)의 무사라고 한다. 번(藩)을 폐지하기 전에 녹봉 2, 3백석을 받고, 주군을 섬기고 충성, 부모에게 봉사하여 효도, 부부의 구별이 있고, 장유유서가 있고, 빌린 돈은 반드시 갚고, 사교상의 의리를 반드시 성실히 지키고, 한 점의 불의를 저지른 일이 없다. 하물며 사기와 도둑질에 관해서야! 혹은 위력으로써 농부와 상인을 압제한 일이 있어도, 본디 신분상 당연하여 마음에 부끄러운 바가 없다. 집은 극도로 검약, 몸은 극도로 노력, 활을 쏘고 말을 타는 재주, 검과 창을 쓰는 기술, 통달하지 않은 것이 없다. 다만 문자를 알지 못할 따름이다. 지금 이 사람을 위하여 계획하는 것에 어떻게 할 수 있는가? 덕(德)을 줄까, 아니면 지식을 줄까? 시험 삼아 이 사람을 덕(德)으로 이끌어, 별안간 기독교의 10계명을 보여주는 일이 있으면, 제 4계명까지 각 조항은 태어나서 알지 못하는 것이므로 혹시 그것을 들을 수 있다할지라도, 제 5계명이하에 이르러서는 이 사람이 반드시 말하여, 나는 부모를 공경하였고, 나는 사람을 죽일 의도가 없어, 어떻게 음란한 짓을 하겠는가, 어떻게 도둑질을 하겠는가 하고, 하나하나 항변하여 쉽게 승복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 본디 기독교는 이 10계명의 본문으로써 다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반드시 의미심장한 것이어서, 부모를 공경하는 것에도 스스로 공경하는 법이 있고, 사람을 죽이지 않는 것에도 스스로 죽이지 않는 취지가 있고, 음행을 하지 않는 것에도 뜻이 있고, 도둑질하지 않는 것에도 뜻이 있는 것이리라. 그러므로 이것을 설명하는 데는 정성껏 반복하여 충분히 그 취지를 다하여, 마침내는 이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키는 일도 있을 수 있다할지라도, 아무튼 덕행의 일에 관해서는, 이 무사의 평소 품행에 있어서, 적어도 초보적인 소양이 있는 자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한편에서 그 지혜에 관하여 얻은 바를 시험하는 데, 몸 전체가 흡사 공허한 것 같다. 다섯 가지색깔의 구별은 겨우 할지라도 자연의 일곱 가지 색깔의 이치는 본디 알지 못하고, 추위와 더위에 관한 인사는 말해도 온도계의 상승과 하강의 이치를 모르고, 식사 때는 잘못 알지 않더라도 시계의 용법을 이해하는 일에 능하지 못하고, 고향의 밖에 일본에 있는 것을 알지 못하고, 일본 밖에 외국이 있는 것을 알지 못하여, 어찌 내부의 형세를 알 것이고, 어찌 외부의 외교를 알 것이고, 옛 풍속을 그리워하여 옛 법을 고수하고, 한 가정이 흡사 일 개의 작은 하늘과 땅이어서, 그 분별력이 미치는 바는 다만 가족 내부에 국한되어, 집밖에 나가는 것이 겨우 한 걸음이어서 세계만방 모두 캄캄한 것과 같다. 번(藩)을 폐지하는 한 가지 행동으로써 이 작은 하늘과 땅을 뒤엎고, 오늘에 이르러서는 다만 어찌 할 바를 모를 따름이다. 일반적으로 이런 인물을 평하면 우직하다고 하는 것 외에 상태를 표현할 수 없다. 이런 우직한 국민은 다만 옛 무사족속에만 한하지 않고 세간에 그런 부류는 매우 많다. 사람들이 널리 아는 바에서, 학자도 정부도 함께 염려하는 바의 것이다. 그런데, 저 덕행에 관한 지식인은 여전히 이 어리석은 백성을 설득하여 기독교를 전파하여 그 덕의(徳義: 도덕상의 의무: 도덕)를 향상시키고자 하는 것이 분주하여, 그 지혜의 유무는 버리고 묻지 않는가? 지식인의 눈에는 다만 어리석고 정직하지 않은 자만을 보는 일이 될 수 있다할지라도, 세간에는 어리석으면서 정직한 자도 역시 매우 많다. 지식인은 이것을 향해 어떤 조치를 취하려는가? 정직으로 하여금 더욱 정직하게 하고, 그 어리석음으로 하여금 더욱 어리석게 하기를 바라는가? 물건을 구하는 데 전후완급의 분별이 없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서양 방식을 따르는 사람들은 일본과 중국의 옛 학문이 항상 당장 쓸모가 없다고 매도하지 않는가? 이것을 매도하는 것은 왜인가? 사실은 지혜의 작동이 없는 것을 나무라는 것이리라. 다른 사람을 나무라며 스스로 전철을 밟고, 스스로 건축하여 스스로 허물어, 미혹이 심하다.
종교는 문명이 진보하는 때에 따라 그 취지를 바꾸는 것이다. 서양에서도 기독교가 일어난 초기는 로마시대이다. 로마의 문물이 번성하였다하더라도, 오늘날의 문명으로써 보면 대체로 무지하고 야만스러운 세상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기독교도 그 시대에서는 오직 허망한 망설을 주장하여, 바로 당시의 사람의 지혜에 맞추고, 세상에서 비난을 받는 일이 없고 세상을 놀라게 하는 일도 없이, 수백 년 간, 세상과 서로 변해서 점점 사람의 믿음을 얻어, 그 즈음에 스스로 일종의 권력을 얻어 오히려 사람들의 생각을 제압하여, 그 정상, 흡사 폭력정부의 전제로써 국민을 괴롭히는 것과 같았지만, 사람의 지혜가 발생하는 힘은 큰 강의 흐름과 같아서, 막으려 하다가 오히려 충돌하고, 종교의 권력은 일시에 그 명성을 떨어뜨리는 데 이르렀다. 곧 기원 1500년대에 시작된 종교개혁이, 이것이다. 이 개혁은 로마의 천주교를 배제하고「프로테스탄트」라는 새로운 종파를 일으킨 것이어서, 여기서부터 양 종파가, 무리를 달리하여 서로 대치한다고 할지라도, 오늘날의 세력에서는 신교 쪽이, 차츰 권력을 얻는 것 같다. 일반적으로 이 양 종파는 원래 동일한 기독교에서 나온 것이어서, 그 믿는 바의 목적도 쌍방 모두 다른 것이 없다할지라도, 신교가 번성한 이유는, 종교의식을 간단하게 고쳐, 옛 관습의 허망한 망설을 반성하여 바로 근세의 사람의 정서에 부응하여, 그 지식이 진보하는 상황에 맞추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말하면 구교는 농후(濃厚)하여 어리석고 바보 같음에 가깝고, 신교는 담백(淡白)하여 활발한 차이가 있다. 세상의 물정과 문물의 고금의 차이를 표출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문장의 인터넷 본 원문은 世情人古今の相違を表し出したるものと云ふ可し인데 이와나미 문고본에는 世情人文古今の相違を表し出したるものと云ふ可し로 되어서 文자가 추가되어 있다. 이와나미 문고본에 따라서 번역하였다. 역자).
위에 기술된 바에 따르면, 유럽의 각국에서 문명이 앞선 것은 반드시 신교에 따르고, 뒤진 것은 반드시 구교를 신봉하는 것이 당연하거늘, 역시 결코 그렇지 않다. 비유컨대 스코틀랜드와 스웨덴의 국민은 거짓말에 빠진 자가 많아서, 프랑스인이 영민하고 활발한 것에 미치지 못하는 바 크다. 그러므로 스코틀랜드와 스웨덴은 문명국이 아니고 프랑스는 문명국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프랑스는 옛 천주교를 믿고, 스코틀랜드와 스웨덴은 신교인「프로테스탄트」에 귀의했다. 이 취지를 보고 생각하면, 천주교도 프랑스에 있어서는 그 종교의 방식을 고쳐서 스스로 프랑스인의 품성에 맞춘 것이거나, 그렇지 않으면 프랑스인은 종교를 도외시하여 돌아보지 않는 것일 터이다. 신교도 스코틀랜드와 스웨덴 양국에 있어서는 그 특성을 바꾸어 스스로 국민의 어리석음에 적응한 것이리라. 요컨대 종교는 문명의 정도에 따라 형태를 바꾸는 명백한 증거라고 할 수 있다. 일본에서도 옛날 산속의 종교 또는 천태종과 진언종과 같은 것은 오로지 불가사의를 주장하고, 혹은 물과 불이 인연을 맺는다고 하고, 혹은 가지기도(加持祈禱: 부처의 힘으로 재난을 면하려는 기도)의 묘법을 닦는다고 하고, 그로써 사람을 현혹하여, 옛 국민은 이 거짓말을 신앙하도록 한 일이 있었지만, 헤이안(平安)시대에 정토진종(淨土眞宗)이 일어나기에 이르러서는 불가사의를 말하는 일이 적고, 그 종교의 방식이 대체로 간소하고 담백함을 위주로 하여 역시 헤이안(平安)시대의 문물에 적응하여, 마침내 여러 종파를 압도하여 홀로 권력을 독점했다. 세상의 문명은 점진적으로 진보하기에 종교도 반드시 간소함을 좇아, 점점 도리에 토대를 두지 않을 수 없다는 증거이다. 가령 오늘날에 홍법대사(弘法大師: 헤이안시대 진언종[眞言宗]의 개조 구카이[空海] 스님)를 환생시켜, 그 옛 사람을 현혹시키는 바의 불가사의를 주장하게 하는 일이 있어도, 메이지(明治) 연간의 사람들에는 그것을 믿는 사람이 매우 드물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날의 국민은 정말로 오늘날의 종교에 적응하고, 종교도 국민에게 만족하고, 국민도 종교에 만족하여, 서로 불평이 있을 수 없다. 만약 일본의 문명이 지금보다 점차 진보하고, 지금의 정토진종(淨土眞宗)도 허망하다고 하여 혐오하기에 이르면, 필히 또 별도의 정토진종(淨土眞宗)을 낳게 하는 일이 있을 수 있다. 혹은 서양에서 믿는 종교를 그대로 채택하는 일도 있을 수 있다. 결국 종교라는 것은 도외시할 수 있을 따름이다. 학자의 힘을 모두 쏟아도 정부의 권력을 사용하여도 어찌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다만 자연적인 추세에 맡길 수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책을 저술하여 종교의 옳고 그름과 바르고 사악함을 논하여, 법을 세워 종교의 가르침을 지배하고자하는 것은, 천하의 최고 어리석음이라고 할 수 있다.
덕(德)이 있는 선량한 사람이 반드시 선(善)을 행하지 않고, 덕(德)이 없는 악인이 반드시 악(惡)하지 않다. 옛날 서양 여러 나라에서 종교 때문에 전쟁을 일으켜 사람을 죽였던 사례는 역사를 보고 알 수 있다. 그 최고로 심한 것은「퍼시큐션[persecution]: 종교박해」이라 하여, 자기가 믿는 바의 종교와 다른 사람을 뒤쫓아 살육하는 것이다. 예로부터 프랑스 및 스페인에 있어서 그 사례가 최고로 많다. 유명한 「바솔로뮤」살육에서는, 8일간에 죄 없는 국민 5천명을 죽였다고 한다. 《사건은 서양사정 2편 프랑스의 역사에 있다.》그 참혹하기는 사태의 한계가 없어도, 살육을 저지른 본인이 보면, 본래 한 가지 마음이 오로지 종교를 믿어, 믿음이라는 한 가지 일에 있어서는 둘러보아 거리끼는 바가 없고, 소위 남이 보지 않는 곳에서도 부끄러워하지 않는 선량한 사람이다. 이 선량한 사람이 이 큰 악행을 저지르는 것은 왜인가? 사사로운 덕행이 부족한 것이 아니라, 총명한 지혜가 결여된 것이다. 어리석은 사람에게 권력을 맡겨, 그로 하여금 믿는 바가 생기게 하면, 어떤 큰 악행도 저지르지 않는 것이 없다. 세상을 위하여 최대로 두려운 요괴라고 할 수 있다. 이후 여러 나라의 문물이 점차 번성하는 데 이르러, 오늘날에는 이미 「퍼시큐션[persecution]: 종교박해」이라는 사건을 있음을 듣지 못한다. 이것은 고금의 종교와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니라, 문명이 앞서고 뒤짐에 의하여 그런 것이다. 동일하게 이 예수의 종교인 것에, 옛날에는 이 종교 때문에 사람을 죽이고, 지금은 이 종교로써 사람을 구원한다고 함을 왜인가? 사람의 지혜와 어리석음에 관하여 그 원인을 구하는 것 외에 방법이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지혜는 덕의(徳義: 도덕상의 의무: 도덕)의 빛을 증가시킬 뿐만 아니라, 덕의(徳義: 도덕상의 의무: 도덕)를 보호하여 악을 피하게 하는 것이다. 근자에는 우리 일본에서도, 미토 번(水戸 藩) 안에서 정당(正党)과 간당(姦党)이라는 것이 있다. 그 유래는 지금 이곳에서 논하는 데 이르지 못할지라도, 결국, 충의(忠義)라는 두 글자를 논쟁하여 무리를 나누는 것이어서, 그 상황은 종교론과 다르지 않다. 정(正)이라고 하고 간(姦)이라고 하는 것도 그 글자에 의미가 있을 수 없다. 스스로 칭하여 정(正)이라고 남을 평가하여 간(姦)이라고 이름을 붙일 따름이다. 양 패거리 모두 충의(忠義)의 일을 저질러, 그 한 사람의 언행에 관하여 보면, 가슴속의 항아리 같은 진심을 품은 자들이 많다. 그 가짜 군자가 아니라는 증거는, 이 패거리가 일을 그르칠 때를 맞아 항상 침착하여 죽음에 대하여 당황하는 자가 없는 것을 보고 알 수 있다. 그런데 근세에 논의 때문에 무고한 백성을 많이 죽인 것은 미토 번(水戸 藩) 안을 최고로 한다. 이것 역시 선한 사람이 악행을 저지른 한 가지 사례이다.
도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는 난세 이후를 계승하여 비바람을 맞으며 돌아다니며, 고난을 꺼리지 않아 마침내 300년 태평시대를 열어, 천하를 태산 같은 평안함에 올려놓았다고 하여,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그 업적의 훌륭함을 칭송하지 않는 자가 없다. 실제로 아시카가(足利)의 말기, 국내의 분란의 시대를 맞아, 오다(織田)와 도요토미(豊臣)의 업적도 아직 그 기초를 다지는 일이 없었다. 이때에 이에야스(家康)가 없었다면 어떤 시대가 태평을 기약할 수 있는가? 실제로 이에야스(家康)는 300년간 태평의 부모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사람의 한 몸에 (인터넷 본에는 一心に로 되어있어 ‘한 마음에’라는 의미이나 이와나미 문고본에는 一身に로 되어 있어서 ‘한 몸에’로 해석함. 역자) 관하여 그 덕의(徳義: 도덕상의 의무: 도덕)를 살피면, 사람에게 부끄러울 수 있는 것도 적지 않다. 특히 그 태합(太閤)의 유언을 배신하고 오사카(大阪)를 보호하려는 의도가 없이, 특히 부탁을 받았던 히데요리(秀頼)를 보좌하지 않고 오히려 그 방탕함과 어리석음과 허약함을 부추겨, 이시다 미츠나리(石田三成)를 제거해야 하는 것을 제거하지 않아서 후일 오사카(大阪)를 함락시키는 중개자로 남긴 것과 같은 것은, 간계가 심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한 가지 조항에 관해서는 이에야스(家康)의 몸에는 한 점의 덕의(徳義: 도덕상의 의무: 도덕)도 없는 것 같다. 그런데 이 부덕으로써 300년의 태평을 열어 서민을 도탄에서 구한 것은 기이한 이야기가 아닌가? 그 외에 요리토모(頼朝)에게서도 노부나가(信長)에게서도, 한 몸의 품행을 논하면 잔인과 박정과 사기와 번복 미워할 수 있는 것이 많다고 할지라도, 모두 한 때의 전쟁을 멈추고 국민의 살육을 줄인 것은 무엇인가? 악인도 반드시 선행을 하지 않은 것이 아니다. 필경 이 무리의 영웅은, 혹시 사사로운 덕행에 결점이 있다할지라도, 총명과 예지의 작동으로써 선행의 큰일을 이룬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한 점의 흠집을 보고 전체의 가치를 평가할 수 없는 것이다.
앞에서 논하는 바를 요약하여 말하면, 덕의(徳義: 도덕상의 의무: 도덕)은 한 사람의 품행에서 그 효능이 미치는 바가 좁고, 지혜는 사람에게 전하는 것이 빨라서 그 미치는 바가 넓고, 덕의(徳義: 도덕상의 의무: 도덕)에 관한 일은 개벽의 초부터 이미 정해져서 진보할 수 없고, 지혜의 작동은 매일 진보하여 제한이 없고, 덕의(徳義: 도덕상의 의무: 도덕)는 유형의 기술로써 사람에게 가르칠 수 없고, 이것을 이해하는 것도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사람마다의 생각에 달려있고, 지혜는 이것과 반대로 사람의 지혜를 규명하는 데 시험하는 방법이 있고, 덕의(徳義: 도덕상의 의무: 도덕)는 갑자기 진퇴하는 일이 있고, 덕의(徳義: 도덕상의 의무: 도덕)는 한번 이것을 얻어서 잃는 법이 없고, 지혜는 서로 의지하여 그 효과를 나타내는 것이고, 선량한 사람도 악행을 저지르는 일이 있고 악인도 선행을 행하는 일이 있다는 것을 설명하여 보여주는 것이다. 대체로 덕의(徳義: 도덕상의 의무: 도덕)를 사람에게 전수하는 것에 관해서는 유형의 수단이 없고, 충고가 미치는 바는 겨우 친척과 친구 사이뿐이라 할지라도, 그 교화가 도달하는 영역은 매우 넓다. 만 리 밖에서 출판된 저서를 보고 크게 깨닫는 일이 있고, 옛 사람의 언행을 듣고 스스로 생각을 작동시켜 마침내 한 몸의 마음자세를 고친 자가 있다. 백이(伯夷)의 풍모를 듣고 일어선다고 함은 이것이다. 적어도 사람으로서 세상을 해치려는 뜻이 없다면 한 몸의 덕의(徳義: 도덕상의 의무: 도덕)를 닦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름을 위해서가 아니고, 이익을 위해서도 아니고, 바로 이것은 인류인 사람이 스스로 맡아야 하는 덕의(徳義: 도덕상의 의무: 도덕)의 의무이다. 자신의 나쁜 생각을 방지하는 것에는, 용사가 적을 향해 싸우는 것과 같고, 폭군이 백성을 억압하여 괴롭히듯이 하고, 선행을 보고 취하는 것은 수전노가 돈을 탐해 만족하는 것을 모르는 것과 같이 하고, 이미 한 몸을 닦아 또 충분히 한 가정을 교화하여, 더욱 여력이 있으면 곧 널리 타인에게 미치게 하여 설명하고 권유하여, 중생으로 하여금 덕행의 문으로 들어가도록 하여, 한 걸음에서도 덕의(徳義: 도덕상의 의무: 도덕)의 영역을 넓히는 것을 힘써야 한다. 이것 역시 인간의 한 가지 과업이어서, 문명을 돕는 효능은 본디 매우 크기 때문에, 세상에 선교사 무리가 있어 도덕적인 일을 권유하는 것은 진실로 바람직할 수 있는 것이라도, 다만 덕의(徳義: 도덕상의 의무: 도덕)의 한편으로써 세상 한 가운데를 농락하고자 하여, 혹은 심하기에 이르는 것은 덕행의 가르침 가운데 한 파벌을 주장하여 다른 교파를 배척하여, 한 파벌로써 세상의 덕행 교육을 힘으로 빼앗고 겸하여 또 지혜의 영역도 침범하여, 흡사 인간의 의무가 덕의(徳義: 도덕상의 의무: 도덕)라는 한 가지 일에 멈추어 덕행 교육의 일이 또 그 내부의 한 개 파벌에 국한하는 것과 같이 하여, 사람의 사상을 속박하여 자유를 얻게 하지 않고, 오히려 사람을 무위(無爲)와 무지에 빠뜨려 실제 문명을 해치는 것과 같은 것은, 내가 가장 좋아하지 않는 바이다. 수동적인 사사로운 덕행으로써 세상의 문명을 돕고, 세상 사람으로 하여금 그 덕택을 입도록 하려는 일이 있은 것은, 우연히 이루어지는 아름다운 일이라고 할 수 있을 뿐이다. 비유건대 내 땅 안에 집을 지어 때때로 옆집의 담장이 된 것과 같다. 이웃사람을 위해서는 매우 편리하다고 할지라도, 원래 내 집을 짓는 것은 자신을 위해서지 이웃사람을 위해서가 아니고, 우연한 편리라고 할 수 있을 따름이다. 사사로운 덕행을 닦는 것도 원래 한 몸을 위하여 하는 것이어서 다른 사람을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고, 만약 다른 사람을 위해 덕행을 닦는 자가 있으면, 곧 그 사람이 거짓 군자이어서, 덕행 실천가가 혐오하는 바이다. 그러므로 덕의(徳義: 도덕상의 의무: 도덕)의 본분은 한 몸을 닦는 데 놓여있다. 그것을 닦아 문명에 이익이 되도록 하는 일이 있는 것은 우연적인 아름다운 일일 뿐이다. 우연적인 사건에 의거하여 한 세상을 지배하고자 하는 것은 커다란 실수라고 할 수 있다. 원래 사람으로서 이 세상에 태어나, 겨우 한 몸의 뒤처리를 하려고 해서, 아직 사람다운 직분을 끝냈다고 하기에는 부족하다. 시험적으로 묻노니, 덕행을 실천하는 군자여, 매일 먹고 입는 바의 물건은 어디서 나오는가? 조물주의 은혜가 매우 크다 할지라도, 의복은 산에서 생기지 않고, 음식은 하늘에서 내려오지 않는다. 하물며 세상의 문명이 점차 진보하면 그 편리함, 다만 의복과 음식뿐만 아니라, 증기기관과 전신의 이익도 있고, 법령과 상업의 편리함이 있는 것에 있어서야! 모두 이 지혜의 하사품이 아닌 것이 없다. 인간평등권의 취지에 따르면, 앉아서 타인의 하사품을 받을 이치가 있을 수 없다. 만약 덕행을 실천하는 군자로 하여금 표주박처럼 하여, 잘 매달려 먹는 일이 없으면 곧 그만이리라 (유덕한 군자가 매달려만 있어 먹을 수 없는 표주박과 같은 것이 된다면 무의미한 것이다). 적어도 음식을 먹고 옷을 입고, 증기기관과 전신의 이점을 이용하여, 법령과 상업의 편리함을 편리함으로 하는 것이라면, 역시 그 임무에 맡기지 않을 수 없다. 게다가 육체의 편리는 이미 풍부하고 한 몸의 사사로운 덕행은 이미 부끄러울 것 없다고 하여도, 아직 이 형편에 머물러 안주할 이유가 없다. 그 풍부하다고 하는 것, 부끄러움이 없다고 하는 것은, 겨우 오늘날의 문명에 있어서 만족스러울 뿐, 아직 그 최고점에 이르지 않은 것이 분명하다. 사람의 정신이 발달하는 것은 한계가 있는 것이 아니고, 천지의 시작에는 법칙이 있지 않은 것이 없다. 무한한 정신으로 하여금 정해진 이치를 규명하고, 마침내는 유형과 무형의 구별이 없이, 천지간의 사물 모두를 인간의 정신 속에 포함시켜 누락된 것이 없기에 이를 수 있다. 이 단계에 이르러서는 왜 또 구구한 지혜와 덕행을 구별하여 그 경계선을 다투는 데 만족하리. 흡사 사람과 하늘이 양립하는 형국이다. 천하 후세에 반드시 그날이 있을 것이다.
巻之三
第六章 智徳の弁
前章までの議論には、智徳の二字を熟語に用ひ、文明の進歩は世人一般の智徳の発生に関するものなりとの次第を述たれども、今此一章に於ては智と徳とを区別して其趣の異なる所を示す可し。
徳とは徳義と云ふことにて、西洋の語にて「モラル」と云ふ。「モラル」とは心の行儀と云ふことなり。一人の心の中に慊(こころよ)くして屋漏(をくろう)に愧ざるものなり。智とは智徳と云ふことにて、西洋の語にて「インテレクト」と云ふ。事物を考へ事物を解し事物を合点する働なり。又此徳義にも智恵にも各二様の別ありて、第一貞実、潔白、謙遜、律儀等の如き一心の内に属するものを私徳と云ひ、第二廉恥、公平、正中、勇強等の如き外物に接して人間の交際上に見はるゝ所の働を公徳と名く。又第三に物の理を究めて之に応ずるの働を私智と名け、第四に人事の軽重大小を分別し軽小を後にして重大を先にし其時節と場所とを察するの働を公智と云ふ。故に私智或は之を工夫の小智と云ふも可なり。公智或は之を聡明の大智と云ふも可なり。而して此四者の内にて最も重要なるものは第四条の大智なり。蓋し聡明叡知の働あらざれば私徳私智を拡て公徳公智と為す可らず、或は公私相戻て相害することもある可し。古より明に此四箇条の目を掲げて論じたるものなしと雖ども、学者の議論にても俗間の常談にても、よく其意の在る所を吟味すれば果して此区別あるを見る可し。孟子に惻隠、羞悪、辞譲、是非は人心の四端なり、之を拡るときは火の始て燃へ泉の始て達するが如く、よく之を充れば四海を保つ可く、之を充たざれば父母に事(つか)ふるに足らずとあり。蓋し私徳を拡て公徳に至るの意ならん。又智慧ありと雖ども勢に乗ずるに如かず、鎡基(じき鋤鍬)ありと雖ども時を待つに如かずとあり(『孟子』公孫上一)。蓋し時勢の緩急を察し私智を拡て公智と為すの義ならん。又俗間の談に某は世間に推出して申分なき人物、公用向には最上なれども一身の行状に至ては言語道断なりと云ふことあり。仏蘭西の宰相「リセリウ」の如き是なり。蓋し公智公徳に欠点なくして私徳に乏しきの謂なり。又某は囲碁、象棋、十露盤は勿論、何事にても工夫は上手なれども、所謂碁智恵、算勘にて、兎角無分別なる人物なりと云ふことあり。蓋し私智ありて公智なきを評するなり。右の如く智徳四様の区別は、学者も俗間も共に許す所のものなれば之を普通の区別と云はざるを得ず。先づ此区別を定めて次に其働を論ずること左の如し。
前に云へる如く聡明叡知の働あらざれば私智を拡て公智と為すを得ず。譬へば囲碁、闘牌(カルタ)、弄椀珠(シナダマ)等の技芸も人の工夫なり、窮理器械等の術も亦人の工夫にして、等しく精神を労するの事なれども、其事柄の軽重大小を察して重大の方に従事し以て世間に益すれば、其智恵の働く所、稍や大なりと云ふ可し。或は又自から其事に手を下ださゞるも、事物の利害得失を察すること「アダム・スミス」が経済の法を論ずるが如くして、自から天下の人心を導き一般に富有の源を深くすることあるは、智恵の働の最も至れるものと云ふ可し。何れにも小智より進て大智に至るには聡明叡知の見なかる可らざるなり。又士君子の口吻に、天下を洒掃(さいさう)すれども庭前は顧みるに足らずなどゝて、治国平天下の術を求めて大に所得あれども、一身一家の内を脩ること能はざる者あり。或は一心一向に律儀を守て戸外の事を知らず、甚しきは身を殺して世に益するなき者あり。何れも皆聡明の働に乏しくして事物の関係を誤り、大小軽重を弁ずる能はずして脩徳の釣合を失したるものなり。是に由て考れば聡明叡知の働は恰も智徳を支配するものなるが故に、徳義に就て論ずるときは之を大徳と云ふも可なりと雖ども、爰に天下一般の人心に従て字義の用ひ来りに拠れば之を徳と名く可らずの由縁あり。蓋し古来我国の人心に於て徳義と称するものは、専ら一人の私徳のみに名を下したる文字にて、其考の在る所を察するに、古書に温良恭謙譲と云ひ、無為にして治ると云ひ、聖人に夢なしと云ひ、君子盛徳の士は愚なるが如しと云ひ、仁者は山野如しと云ふなど、都て是等の趣を以て本旨と為し、結局、外に見はるゝ働よりも内に存するものを徳義と名るのみにて、西洋の語にて云へば、「パッシ-ウ」とて、我より働くには非ずして物に対して受身の姿と為り、唯私心を放解するの一事を以て要領と為すが如し。経書を按ずるに其所説悉皆受身の徳のみを論ずるに非ず、或は活潑々地の妙処もあるが如くなれども、如何せん書中全体の気風にて其人心に感ずる所を見れば唯堪忍卑屈の旨を勧るに過ぎず。其他神仏の教とても脩徳の一段に至ては大同小異のみ。此教に育せられたる我国の人民なれば、一般の人心に拠るときは徳の字の義は甚だ狭くして、所謂聡明叡知等の働は此字義の中に含有することなし。都て文字の趣意を解くには、学者の定めたる字義に拘はらずして天下衆人の心を察し、其衆心に思ふ所の意味を取るを最も確実なりとす。譬へば舟遊山と云ふ文字の如し。一々字義を糺せば甚だ不都合なれども、世間一般に思ふ所にては、此文字の内に山に遊ぶと云ふ義を含有することなし。徳の字も亦斯の如し。学者流に従て義を糺せば其意味甚だ広しと雖ども、世人の解す所は則ち然らず、世俗にて無欲なる山寺の老僧を見れば之を高徳なる上人と尊崇すと雖ども、世に窮理、経済、理論等の学問に長ずる人物あれば、之を徳行の君子と云はずして才子又は智者と称すること必定なり。或は又古今の人物が大事業を成す者あれば之を英雄豪傑として称誉すると雖ども、其人の徳義に就て称する所は唯私徳の一事に在るのみにて、公徳の更に貴ぶ可きものは却て之を徳義の条目に加へずして往々忘るゝことあるが如し。世人の解す所にて徳の字の義の狭きこと以て見る可し。蓋し其心に自から智徳四様の区別を知らざるに非ざれども、時としては之を知るが如く又時としては知らざるが如く、結局天下一般の気風に制せられて其重んずる所、私徳の一方に偏したるものならん。故に余輩も此天下一般の人心に従て字義を定れば、聡明叡知の働は之を智恵の条目中に掲げて、彼の徳義と称するものは其字義の領分を狭くして唯受身の私徳に限らざるを得ざるなり。第六、七章に記す所の徳の字は悉皆この趣意に従て用ひたるものなれば、其議論の際、智恵と徳義とを比較して、智の働は重くして広く、徳の働は軽くして狭く、或は偏執なるが如くなれども、学者若し爰に記す所の趣意を了解せば之に惑ふことなかる可し。
抑も未開の有様に於て私徳の教を主張して人民も亦其風に靡くは独り我国のみに非ず、万国皆然らざるはなし。蓋し国民の精神未だ発生せずして禽獣を去ること遠からざるの時代に於ては、先づ其粗野残刻の挙動を制馭して一身の内を緩和し人類の放心を求めしむるに忙はしければ、人間交際の入組たる関係に就ては之を顧るに遑あらず。猶衣食住の物に於ても、開闢の初には所謂手以て直に口に達するものにて、未だ家屋衣装の事を顧るに遑あらざるが如し。然るに文明次第に進めば人事も亦繁多に赴き、私徳の一器械を以て人間世界を支配す可きの理は万々ある可らずと雖ども、古来の習慣と人生懶惰の天賦とに由て古を慕ふて今に安んじ、一方に偏して平均を失ふたることなり。固より其私徳の条目は、万世に伝へて変ず可らず、世界中に通用して異同ある可らず、最も単一にして最も美なるものなれば、後世より之を改正す可らざるは無論なりと雖ども、世の沿革に従て之を用るに場所を撰び、又これを用るの法を工夫せざる可らず。譬へば食を求るは万古同様なれども、古は手以て直に口に達するの一法ありしもの、後世に至れば飲食の事にも千種万様の方術あるが如し。又これを譬へば私徳の人心に於けるは耳目鼻口の人身に於けるが如し。固より其有用無用を論ず可きに非ず。苟も人の名あれば必ず是れなかる可らず。耳目鼻口有無の議論は片輪者の住居する世界に行はる可きことなれども、苟も片輪以上の地位に上れば亦喋々の弁を費すに足らず。蓋し神儒仏なり、又耶蘇教なり、何れも上古不文の世に在て恰も片輪の時代に唱へたる説なれば、其時代に於て必用なるは固より論を俟たず。後世の今日に至るまでも世界中の人口、十に八、九は片輪なる可ければ、徳義の教も亦決して等閑にし難し。或は之がため喋々たらざる可らざるの勢もあらん。《儒者の道に誠を貴び、神仏の教に一向一心を勧る等、下流の民間に在ては最も緊要なる事なり。譬へば智力未だ発生せざる小児を育し、或は無智無術なる愚民に接して、一概に徳義などは人間のさまで貴ぶ可きものに非ずと云はゞ、果して誤解を生じて、徳は賎しむ可し、智恵は貴ぶ可しと心得、其智恵を又誤解して、美徳を棄てゝ奸智を求むるの弊に陥り、忽ち人間の交際を覆滅するの恐なきに非ざれば、此輩に向ては徳義の事に付き喋々の弁、なかる可らずと雖ども、誠心一向の私徳を以て人類の本分と為し、以て世間万事を支配せんとするが如きは、其弊も亦極て恐る可きものなり。場所と時節とを勘弁して、其向ふ所は高尚の域を期せざる可らず。》 然りと雖ども文明の本旨は多事の際に動て進むに在るものなれば、上世の無事単一に安んず可らず。今の人として食を求るに手以て直に口に達するの法を快とせず、我身に耳目鼻口を具するも誇るに足らざるを知らば、私徳の一方を脩るも今だ人事を尽したるに非ざるの理は明白なる可し。文明の人事は極て繁多なるを要す。人事繁多なれば之に応ずる心の働も亦繁多ならざる可らず。若し私徳の一品を以て万事に応ず可きものとせば、今の婦人の徳行を見て之に満足するも理なしと云ふ可らず。支那日本にて風俗正しき家の婦人に、温良恭謙の徳を備へて、言忠信、行篤敬、よく家事を理するの才ある者は珍らしからずと雖ども、此婦人を世間の公務に用ゆ可らざるは何ぞや。人間の事務を処するには私徳のみを以て足らざるの証なり。結局余輩の所見は私徳を人生の細行として顧ざるには非ざれども、古来我国人の心に感ずる如く、唯この一方に偏して議論の本位を定るを好まざるなり。私徳を無用なりとして棄るには非ざれども、之を勤るの外に又大切なる智徳の働あるとの事を示さんと欲するのみ。
智恵と徳義とは恰も人の心を両断して各其一方を支配するものなれば、孰れを重しと為し孰れを軽しと為すの理なし。二者を兼備するに非ざれば之を十全の人類と云ふ可らず。然るに古来学者の論ずる所を見れば、十に八、九は徳義の一方を主張して事実を誤り、其誤の大なるに至ては全く智恵の事を無用なりとする者なきに非ず。世の為に最も患ふ可き弊害なれども、此弊害を弁論するに当て一の困難あり。何となれば今の世に在て智恵と徳義との区別を論じて旧弊を矯めんとするには、先づ此二者の分界を明にし、以て其功用の所在を示すことなれば、思想浅き人の目を以て見るときは、或は其議論は徳を軽んじて智を重んじ漫に徳義の領分を犯すものなりとて不平を抱く者もあらん。或は其議論を軽々看過して、徳義は人間に無用なりとて誤解する者もある可ければなり。抑も世の文明のために智徳の共に入用なるは、猶人身を養ふに菜穀と魚肉と両ながら欠く可らざるが如し。故に今智徳の功用を示して智恵の等閑にす可らざるを論ずるは、不養生なる菜食家に向て肉食を勧るに異ならず。肉食を勧るには必ず肉の功能を説て菜穀の弊害を述べ、菜肉共に用ひて両ながら相戻らざるの理を明にせざる可らず。然るに此菜食家なる者、其片言を信じて、断じて菜穀を禁じて魚肉のみを喰はんとすることあらば、惑の甚しきなり。之を誤解と云はざるを得ず。窃に按ずるに古今の識者も智徳の弁を知らざるに非ざれども、唯この誤解の弊害を恐れて云はざることならん歟。然りと雖ども知て之を云はざれば際限ある可らず。何事にても道理にさへ叶ふことなれば、十人は十人悉皆誤解するものに非ず。或は遇ま十に二、三の誤解あるも尚云はざるに優れり。二、三の誤解を憚りて七、八の智見を塞ぐの理なし。畢竟世人の誤解を恐れて云ふ可き議論をも隠さんとし、或は其議論を装ふて曖昧の際に人を導んとし、所謂坐を見て法を説く(その場の雰囲気に合せること)の策を運らすは、同類の生々を蔑視するの挙動と云ふ可し。世人愚なりと雖ども黒白は弁ずるものなり。同類の人間に甚しき智愚はある可らず。然るに我心を以て人の愚を察し、其誤解を臆度して事の真面目を告げざるは、敬愛の道を失するに非ずや。君子の為す可らざることなり。苟も我に是とする所のものあらば丸出しに之を述て隠すことなく、其可否の判断は他に任して可なり。是即ち余輩が敢て弁を好て智徳の差別を論ずる由縁なり。
徳義は一人の心の内に在るものにて他に示すための働に非ず。脩身と云ひ慎独と云ひ、皆外物に関係なきものなり。譬へば無欲正直は徳義なれども、人の誹謗を恐れ世間の悪評を憚りて無欲正直なる行を勉るものは、これを真の無欲正直と云ふ可らず。悪評と誹謗とは外の物なり。外物のために動くものは徳義と称す可らず。若しこれを徳義といはゞ、一時の事情にて世間の咎めを遁るゝを得るときは、貪欲不正の事を行ふも徳義に於て妨げなかる可し。斯の如きは則ち偽君子と真君子との区別はある可らず。故に徳義とは一切外物の変化に拘はらず、世間の譏誉を顧ることなく、威武も屈すること能はず、貧賎も奪ふこと能はず、確乎不抜、内に存するものを云ふなり。智恵は則ち之に異なり。外物に接して其利害得失を考へ、此の事を行ふて不便利なれば彼の術を施し、我に便利なりと思ふも衆人これを不便利なりと云へば輙(すなは)ち又これを改め、一度び便利と為りたるものも更に又便利なるものあれば之を取らざる可らず。譬へば馬車は駕籠よりも便利なれども、蒸気力の用ゆ可きを知れば又蒸気車を作らざる可らず。此馬車を工夫し蒸気車を発明し、其利害を察して之を用るものは智恵の働なり。斯の如く外物に接して臨機応変以て処置を施すものなれば、其趣全く徳義と相反して之を外の働と云はざるを得ず。有徳の君子は独り家に居て黙坐するも、これを悪人と云ふ可らずと雖ども、智者若し無為にして外物に接することなくば、これを愚者と名るも可なり。
徳義は一人の行ひにて、其功能の及ぶ所は先づ一家の内に在り。主人の行状正直なれば家内の者自から正直に向ひ、父母の言行温順なれば子供の心も自から温順に至る可し。或は親類朋友の間、互に善を責て徳の門に入る可しと雖ども(『孟子』離婁下三一)、結局忠告に由て人を善に導くの領分は甚だ狭し。所謂毎戸に諭す可らず毎人に説く可らずとは即ち此事なり。智恵は則ち然らず。一度び物理を発明してこれを人に告れば、忽ち一国の人心を動かし、或は其発明の大なるに至ては、一人の力、よく全世界の面を一変することあり。「ゼイムス・ワット」蒸気機関を工夫して世界中の工業これがために其趣を一変し、「アダム・スミス」経済の定則を発明して世界中の商売これがために面目を改めり。其これを人に伝るや、或は言を以てし或は書を以てす可し。一度び其言を聞き其書を見て之を実に施す人あれば、其人は正しく「ワット」と「スミス」に異ならず。故に昨日の愚者は今日の智者と為りて、世界中に幾千万の「ワット」と「スミス」を生ず可し。其伝習の速にして其行はるゝ所の領分の広きは、彼の一人の徳義を以て家族朋友に忠告するの類に非ず。或人云く、「トウマス・クラルクソン」が一心を以て世に売奴の悪法を除き、「ジョン・ホワルド〈John Howard〉」が勉強に由て獄屋の弊風を一掃したるは、徳義の働なれば、其功徳の及ぶ所亦洪大無量と云はざるを得ずと。答て云く、誠に然り、此二士は私徳を拡て公徳と為し、其功徳を洪大無量ならしめたるものなり。蓋し二士が事を施すに当て、千辛万苦を憚らずして工夫を運らし、或は書を著し或は財を散じ、難を凌ぎ危を冒して、世間の人心を動かし、遂によく其大業を成したるは、直に私徳の功に非ず、所謂聡明叡知の働と称す可きものなり。二士の功業大なりと雖ども、世の人心に従て徳の字を解し、徳義の一方に就て之を見れば、身を殺して人を救ふより外ならず。今爰に仁人ありて、孺子(じゆし)の井に入るを見て之を救はんがために共に身を失ふも、「ジョン・ホワルド」が数万の人を救ふて遂に身を殺したるも、其惻隠の心を比較すれば孰か深浅の別ある可らず。唯彼は一孺子のためにし、此は数万人のためにし、彼は一時の功徳を施し、此は万代に功徳を遺すの相違あるのみ。身を致すの一段に至ては此と彼との間に徳義の軽重あることなし。其数万の人を救ひ万代の後に功業を遺したるは、「ホワルド」が聡明叡知の働に由て其私徳を大に用ひ、以て功徳の及ぶ所を広く為したるものなり。故に此仁人は私徳を有して公徳公智に乏しき者なり、「ホワルド」は公私両ながら之を有する者なり。之を譬へば私徳は地金の如く聡明の智恵は細工の如し。地金に細工を施さゞれば鉄も唯重くして堅きのみの物なれども、之に少しく細工を施して鎚と為し釜と為せば、乃ち鎚と釜との功能あり。又少しく工夫を運らして小刀と為し鋸と為せば、乃ち小刀と鋸の功能あり。尚其細工を巧にすれば巨大なるは蒸気機関と為る可し、精細なるは時計の弾機(ばね)となる可し。今世間にて大釜と蒸気機関とを比較せば、誰か機関の功能を大なりとして之を貴ばざる者あらん。其これを貴ぶは何ぞや。大釜と機関と地金の異なるに非ず、唯其細工を貴ぶなり。故に鉄の器械を見て其地金を論ずるときは、釜も機関も鎚も小刀も正しく一様なれども、此諸品の内に貴き物と賎しき物との区別を生ずるは、之に細工を施すの多少あればなり。智徳の釣合ひも亦斯の如し。彼の孺子を救はんとしたる仁人も「ジョン・ホワルド」も、其徳行の地金に就て見るときは軽重大小の別なしと雖ども、「ホワルド」は此徳行に細工を施して其功能を盛大に為したるものなり。而して其細工を施したるものは即ち智恵の働なれば、「ホワルド」の為人(ひとゝなり)は之を評して唯徳行の君子とのみ云ふ可らず。智徳兼備して然も其聡明の智力は古今に絶したる人物と云ふ可し。若し、この人をして智力なからしめなば、一生の間、蠢爾(しゆんじ)として家に居り、一冊の聖経を読て命を終り、其徳義を以てよく妻子を化することを得る歟、或はこれを得ざることもある可し。奈何ぞ此大事業を企て欧羅巴全州の悪風俗を除くを得んや。故に云く、私徳の功能は狭く智恵の働は広し。徳義は智恵の働に従て其領分を弘め其光を発するものなり。
徳義の事は古より定て動かず。耶蘇の教の十誡なるものを挙れば、第一「ゴッド」の外に神ありと思ふ勿れ、第二偶像の前に膝を屈する勿れ、第三「ゴッド」の名を空ふする勿れ、第四礼拝の日を穢す勿れ、第五汝の父母を敬せよ、第六人を殺す勿れ、第七穢れたる言行思想を避けよ、第八貧賎なりと雖ども盗む勿れ、第九故さらに詐(いつは)る勿れ亦詐を好む勿れ、第十他人の物を貪る勿れ、以上十箇条なり。孔子の道の五倫とは、第一父子親ありとて親子相親しむことなり、第二君臣義ありとて旦那と家来との間には義理合を守て不実なる挙動ある可らずとのことなり、第三夫婦別ありとて亭主と妻君と余りなれなれしくして見苦しき様に陥る可らずとのことなり、第四長幼序ありとて年若き者は何事も差控て長老を敬す可しとのことなり、第五朋友信ありとは友達の間には偽詐を行ふ可らずとのことなり。此十誡五倫は聖人の定めたる教の大綱領にして数千年の古より之を変ず可らず。数千年の古より今日に至るまで盛徳の士君子は輩出したれども、唯この大綱領に就き註解を施すのみにて別に一箇条をも増加することなし。宋儒盛なりと雖ども五倫を変じて六倫と為すを得ず。徳義の箇条の少なくして変革す可らざるの明証なり。古の聖人は此箇条を悉く身に行ふたるのみならず人にも教へたることなれば、後世の人物如何に勉励苦心するも決して其右に出づ可きの理なし。之を譬へば聖人は雪を白しと云ひ炭を黒しと云たるが如し。後人これを如何す可きや。徳義の道に就ては恰も古人に専売の権を占められ、後世の人は唯仲買の事を為すより他に手段あることなし。是即ち耶蘇孔子の後に聖人なき所以なり。故に徳義の事は後世に至て進歩す可らず。開闢の初の徳も今日の徳も其性質に異同あることなし。智恵は則ち然らず。古人一を知れば今人は百を知り、古人の恐るゝ所のものは今人は之を侮り、古人の怪む所のものは今人は之を笑ひ、智恵の箇条の日に増加して其発明の多きは古来枚挙に遑あらず、今後の進歩も亦測る可らず。仮に古の聖人をして今日に在らしめ、今の経済商売の説を聞かしめ、或は今の蒸気船に乗せて大洋の波濤を渡り、電信を以て万里の新聞を瞬間に聞かしむる等のことあらば、之に落胆するは固より論を俟たず。或はこれを驚かすに必ずしも蒸気電信を要せず、紙を製して字を書くの法を教へ、或は版木彫刻の術を示すも尚これを敬服せしむるに足る可し。如何となれば此蒸気、電信、製紙、印書の術は悉皆後人の智恵を以て達し得たるものにて、此発明工夫を為すの間に聖人の言を聞て徳義の道を実に施したることなく、古の聖人は夢にも之を知らざりしことなればなり。故に智恵を以て論ずれば古代の聖賢は今の三歳の童子に等しきものなり。
徳義の事は形を以て教ゆ可らず。之を学て得ると得ざるとは学ぶ人の心の工夫に在て存せり。譬へば経書に記したる克己復礼の四字を示して其字義を知らしむるも、固より未だ道を伝へたりと云ふ可らず。故に此四字の意味を尚詳にして、克己とは一身の私欲を制することなり、復礼とは自分の本心に立返て身の分限を知ることなりと、丁寧反覆これを説得す可し。教師の働は唯これまでにて、他に道を伝るの術なし。此上は唯人々の工夫にて、或は古人の書を読み或は今人の言行を聞見して其徳行に倣ふ可きのみ。所謂以心伝心なるものにて、或はこれを徳義の風化と云ふ。風化は固より無形の事なれば、其これに化すると化せざるとに就ては試験の法ある可らず。或は実に私欲を恣にしながら自分には私欲を制したりと思ひ、或は分外の事を為しながら自分には分限を知ると思ふ者もある可しと雖ども、其思ふと思はざるとは教る人の得て関す可きに非ず。唯これを学ぶ人の心の工夫に存するのみ。故に克己復礼の教を聞て、心に大に発明する者もあり、或は大に誤解する者もあり、或は之を蔑視する者もあり、或は之を了解するも却て外見を装ふて人を欺く者もあり。其趣千状万態にして、真偽を区別すること甚だ難し。仮令ひこの教を蔑視する者にても、外見を飾て人を欺く歟、又は之を誤解して之を信じ、真の克己復礼に非ざるものを是として疑はざる者あるときは、傍より之を如何ともす可らず。此時に至ては縄墨の以て証す可きものなきゆゑ、或はこれに告るに天を恐れよと云ひ、或は自から心に問へと云ふの外、手段ある可らず。天を恐れ心に問ふは一身の内の事にて、真に天を恐るゝも偽て天を恐るゝも外人の目を以て遽に看破す可き所に非ず。是即ち世に偽君子なる者の生ずる由縁なり。偽君子の甚しきに至ては、啻に徳義の事を聞て其意味を解するのみならず、自分にて徳義の説を主張し、或は経書の註解を著し、或は天道宗教の事を論じ、其議論如何にも純精無雑にして、其著書のみを取て之を読めば後世又一の聖人を出現したるが如きものあれども、退て其人の私に就て之を見れば言行の齟齬すること実に驚く可し、心匠の愚なること実に笑ふ可し。韓退之が仏骨の表を奉て天子を諌めたるは如何にも忠臣らしく、潮州に貶(へん)せられたる時には詩など作て忠憤の気を洩しながら、其後、遠方より都の権門へ手紙を遣て、きたなくも再び出仕を歎願したるは、此れこそ偽君子の張本なれ。此類を計へ上れば古今支那にも日本にも西洋にも韓退之の手下なきに非ず。巧言令色、銭を貪る者は論語を講ずる人の内に在り。無智を欺き小弱を嚇し名利を併せて両ながら之を取らんとする者は、耶蘇の正教を奉ずる西洋人の内に在り。此輩の小人は、無形の徳義に試験の縄墨なきを利し、徳義の門に出入して暫時にても密売を行ふ者と云ふ可し。畢竟徳義の働は以て人を制す可らざるの明証なり。《書経に今文と古文との区別あり。秦皇天下の書を焚て書経も共に亡び、漢興て文帝の時に済南の老学生伏勝よく二十九篇を暗記して之を伝へたるものを今文と名け、其後孔子の故宅を毀て壁中より古書を得たりとて之を古文と名く。故に今の書経五十八篇の内に今文二十九篇古文二十九篇あり。然るに今この今古の文を比較するに全く其体裁を異にし、今文は難渋、古文は平易、其文意語勢、明に両様の別ありて、何人の目を以て見るも秦火以前に行はれたる同一書中のものとは思はれず。必ず其一は偽作たるを免かれざるなり。殊に壁中古文の世に行はれたるは晋の時代にて、其以前、漢代に書中の一篇秦誓とて諸儒の引用したるものを、晋の時に偽秦誓と名けて之を廃したることあり。何れにも書経の由来は不分明なるものと云はざるを得ず。されども後世に至ては人の信仰益固くして、一に之を聖人の書と為し、蔡沈が書経集伝の序にも、聖人の心の書に見はれたるものなりと云へり。怪しむ可きに非ずや。蓋し蔡沈の意は今文古文等の区別を論ぜずとも、書中に記す所、聖人の旨に叶ふが故にとて之を聖書と見做したることならんと雖ども、今古の内、其一文は後世より聖人の意を迎へて作為したる文章なれば、之を偽聖書と云はざるを得ず。されば世の中に偽君子の多きは勿論、或は偽聖人を生じて偽聖書をも作る可きものと知る可し。》 智恵は則ち然らず。世上に智恵の分量饒多なれば、教へずして互にこれを習ひ、自から人を化して智恵の領域に入らしむること、猶かの徳義の風化に異ならずと雖ども、智恵の力は必ずしも風化のみに藉て其働を伸るものに非ず。智恵は之を学ぶに形を以てして明に其痕跡を見る可し。加減乗除の術を学べば直に加減乗除の事を行ふ可し。水を沸騰せしめて蒸気と為す可きの理を聞き、機関を製して此蒸気力を用るの法を伝習すれば、乃ち蒸気機関を作る可し。既に之を作れば其功用は「ワット」が作りし機関に異ならず。之を有形の智教と云ふ。其教に形あれば亦これを試験するにも有形の規則縄墨あり。故に智恵の法術を人に授けたりと雖ども、之を実地に施すことに就き尚不安心の箇条あらば、之を其実地に試験す可し。之を試験して未だ実地の施行を能せざる者あらば、更に実地施行の手順を教ふ可し。何れも皆形を以て教ゆ可らざるものなし。譬へば爰に数学の教師あらん。十二を等分して六を得るの術を生徒に教へて、其これを実地に施し得るや否を試るには、十二個の玉を与へてこれを二に分たしめ、明に其術を得ると得ざるとを証す可し。生徒若し誤てこの玉を二に分ち八と四とに為さば、未だ術を得ざるものなり。若し然るときは再び説弁して之を試み、此度びは十二の玉を等分して六と六とにするを得れば、此一段の伝習は終りて、其学び得たる術の巧なるは教師に異なることなく、恰も天地の間に二人の教師を生じたるが如し。其伝習の速にして試験の明白なるは現に耳目を以て聞見す可し。航海の術を試るには船に乗て海を渡らしむ可し、商売の術を試るには物を売買せしめて其損益を見る可し、医術の巧拙は病人の治不治を見て知る可し、経済学の巧拙は家の貧富に由て証す可し。斯の如く一々証拠を見て其術を得たると否とを糺す、之を智術有形の試験法と云ふ。故に智恵の事に就ては外見を飾て世間を欺くの術なし。不徳者は装ふて有徳者の外見を示す可しと雖ども、愚者は装ふて智者の真似を為す可らず。是即ち世に偽君子多くして偽智者少なき由縁なり。或はかの経済家が天下の経済を論じて一家の世帯を保つの法を知らず、航海者が議論は巧なれども船に乗ること能はざるの類は、世間に其例少なからず。是等は所謂偽智者なるものに似たれども、畢竟世の事物に於て議論と実際と相異なる可きの理なし。唯徳義の事に就ては此議論と実際との相違を明にす可き縄墨に乏しきのみ。智恵の領分に於ては、仮令ひ此偽智者を生ずるも尚其真偽を糺す可き手段あり。故に航海者が船に乗ること能はずして、経済家が世帯に拙なることあらば、其人は必ず未だ真の術を知らざる者歟、又は別に其学び得たる術を妨るの源因ありて然るものなり。《譬へば経済家が奢侈を好み、航海者が身体虚弱にして其術は巧なれども之を実地に施すこと能はざるの類を云ふ。》然り而して、其術と云ひ又これを妨る所の源因と云ひ、皆是れ有形の事なれば、其有様を糺して、真に其術を得たる者歟、然らざる者歟を証するは難きに非ず。既に其真偽を証するときは、又傍より議論して之に教るの法もある可し、或は自から工夫して人に学ぶの路もある可し。結局智恵の世界には偽智者を容る可き地位を遺さゞるなり。故に云く、徳義は形を以て人に教ゆ可らず、形を以て真偽を糺す可らず、唯無形の際に人を化す可きのみ。智恵は形を以て人に教ゆ可し、形を以て真偽を証す可し、又無形の際に人を化す可し。
徳義は一心の工夫に由て進退するものなり。譬へば爰に二少年あり、田舎の地方に生れて天稟謹直なること、二人毫も差別なき者、商売歟、又は学問のため都会の地に出て、其初は自から朋友を撰て之に交り、師を撰て之に学び、都会の人情の軽薄なるを見て私に歎息せし程のことなりしが、半年を過ぎ一年を経る間に、其一人は旧来の田舎魂を変じて都下の浮華を学び遂に放蕩無頼に陥て生涯の身を誤り、一人は然らずして益身を脩め其行状終始一なるが如くして嘗て田舎の本心を失はず、二人の徳行頓に雲壌懸隔することあり。其事実は今日東京に在る学問の生徒を見ても知る可し。若し此二少年をして故郷に在らしめなば、二人共に謹直なる人物にて、歳月を経るに従ひ有徳の老成人たる可き筈なるに、中年にして一人は徳より不徳に入り、一人はよく其身を全ふせし者なり。今其然る由縁を尋るに、二人互に天稟の異なるに非ず、又其交る所の人も同様にして学ぶ所のことも同様なれば、教育の良否に由るものと云ふ可らず。然るに其徳行の互に懸隔すること斯の如きは何ぞや。其一人の徳義は頓に趣を変じて却歩し、一人は其旧を守て之を失はざりしものにて、外物の働に強弱あるに非ず、一心の工夫に動と不動との別ありて、一は退き一は進たるの証なり。又少年の時より遊冶(ゆうや)放蕩を事とし、物を盗み人を害し悪業至らざる所なくして、親類朋友の交をも失ひ、殆ど世間に身を容る可き地位なきに至りし者にても、一旦豁然として心術を改め、前日の非を悔悟して後来の禍福を慮り、謹慎勉強して半生を終る者あり。其生涯の心事を見れば明に前後二段に分れ、一生にして正しく二生の事を為し、恰も桃の木の台に梅の芽を接ぎ、成木の後唯梅花のみを見て其根の桃の木たるは之を弁ず可らざるものゝ如し。試に世間に就て其実証を求めなば、昔の博徒が今の念仏者と為り、有名の悪漢が手堅き町人と為りたるの類は珍しからず。此輩は皆他人の差図に従て心事を改めたるに非ず、一心の工夫に由て改心したるものなり。在昔熊谷直実が敦盛を討て仏に帰し、或る猟師が子を孕たる猿を撃て生涯、猟を止めたりと云ふも此類なる可し。熊谷も仏に帰すれば則ち念仏行者にて旧の荒武者に非ず、猟師も鉄砲を抛て鋤を採れば則ち、やさしき百姓にて昔の殺生人に非ず。荒武者より念仏行者に変じ、殺生人より百姓に移るの事は、他人の伝習を要せず一心の工夫を以て瞬間に行ふ可し。徳と不徳との間に髪を容れざる者なり。智恵の事に至ては大に其趣を異にせり。人の生は無智なり、学ばざれば進む可らず。初生の児を無人の山に放たば、幸にして死せざるも其智恵は殆ど禽獣に異なる可らず。或は鶯の巣を架するが如き巧なる術は、教なき人間一代の工夫にては出来ざる可し。人の智恵は唯教に在るのみ。之を教れば其進むことも亦際限ある可らず。既に進めば又退くこともある可らず。二人の少年天稟相同じければ、之を教て亦共に進む可し。或は双方の進歩に遅速あるものは、其天稟相異なる歟、其教授の方同じからざる歟、或は二人の勤怠一様ならずして然るものなり。何等の事情あるも一心の工夫を以て頓に智を開くの術ある可らず。昨日の博徒は今日の念仏者と為る可しと雖ども、人の智愚は外物に触れずして一日の間に変化す可らず。去年の謹直生は今年の遊冶郎に変じて其謹直の跡をも見ずと雖ども、人の既に得たる智見は健忘の病症に罹るに非ざれば之を失ふことなし。孟子は浩然の気と云ひ、宋儒の説には一旦豁然として通ずると云ひ、禅家には悟道と云ふことあれども、皆是無形の心に無形の事を工夫するのみにて其実跡を見る可らず。智恵の領分に於ては、一旦豁然として之を悟り、其功用の盛なること、かの浩然の気の如きものある可らず。「ワット」が蒸気機関を発明し、「アダム・スミス」が経済論を首唱したるも、黙居独坐、一旦豁然として悟道したるに非ず、積年有形の理学を研究して其功績漸く事実に顕はれたるものなり。達磨大師をして面壁九十年ならしむるも蒸気電信の発明はある可らず。今の古学者流をして和漢の経書万巻を読ましめ、無形の恩威を以て下民を御するの妙法を工夫せしむるも、方今の世界に行はるゝ治国経済の門には遽に達す可らず。故に云く、智恵は学て進む可し、学ばざれば進む可らず、既に学て之を得れば又退くことある可らず。徳義は教へ難く又学び難し、或は一心の工夫にて頓に進退することあるものなり。
世の徳行家の言に云く、「徳義は百事の大本、人間の事業、徳に由らざれば成る可きものなし、一身の徳を脩れば成る可らざるものなし、故に徳義は教へざる可らず、学ばざる可らず、人間万事これを放却するも妨なし、先づ徳義を脩めて然る後に謀る可きなり、世に徳教なきは猶暗夜に灯を失ふが如くして、事物の方向を見るに由なし、西洋の文明も徳教の致す所なり、亜細亜の半開なるも亜非利加の野蛮なるも、其源因は唯徳義を脩るの深浅に従て然るものなり、徳教は猶寒暖の如く文明は猶寒暖計の如く、此に増減あれば忽ち彼に応じ、一度の徳を増すときは一度の文明を進るものなり」とて、人の不徳を悲み人の不善を憂ひ、或は耶蘇の教を入る可しと云ひ、或は神道の衰へたるを復す可して云ひ、或は仏法を持張す可しと云ひ、儒者にも説あり、国学者にも論ありて、異説争論囂々(がうがう)喋々、其悲憂歎息の有様は、恰も水火の将(まさ)に家を犯さんとするに当るものゝ如し。何ぞ夫れ狼狽の甚しきや。余輩の眼には自から又別に見る所あり。都て事物の極度を持出すとも之に由て議論の止まる所を定む可らず。今不善不徳とて極度の有様を本位に定めて、唯其一方を救はんとせば固より焦眉の急に似たれども、此一方の欠のみを補へばとて未だ人事を全ふしたりと云ふ可らず。猶彼の手以て直に口に達するの食を得るも人間の活計を成すと云ふ可らざるが如し。若し事物の極度を見て議論を定む可きものとせば、徳行の教も亦無力なりと云はざるを得ず。仮に今徳教のみを以て文明の大本と為し、世界中の人民をして悉皆耶蘇の聖教を読ましめ、之を読むの外に事業なからしめなば如何ん。禅家不立文字の教を盛にして、天下の人民文字を忘るゝに至らば如何ん。古事記五経を諳誦して忠義脩身の道を学び糊口の方法をも知らざる者あらば、之を文明の人と云ふ可きや。五官の情欲を去て艱苦に堪へ人間世界の何者たるを知らざる者あらば、之を開化の人と云ふ可きや。路傍に石像あり、三匹の猿を彫刻して、一は目を覆ひ、一は耳を覆ひ、一は口を覆へり。蓋し見ざる、聞ざる、云はざる、の寓意にて、堪忍の徳義を表したるものならん。此趣意に従へば、人の耳目口は不徳の媒妁にて、天の人を生ずるは之に附与するに不徳の具を以てするが如し。耳目口を害なりとせば手足も亦悪事の方便たらん。ゆえに盲聾唖子は未だ十全の善人に非ず、兼て四肢の働をも奪ふこそ上策なれ。或は斯る不具の生物を造るよりも、寧ろ世界に人類なからしめなば上策の上なる可し。之を造化の約束と云ふか。余輩少しく疑なきを得ず。されども耶蘇の聖経を念じ、不立文字の教に帰し、忠義脩身の道を尊び、五官肉体の情欲を去る者は、徳義の教を信じて疑はざるものなり。教を信じて疑はざる者は仮令ひ無智なりと雖ども之を悪人として咎るの理なし。無智を咎るは智恵の事なり、徳義の関る所に非ず。故に極度を以て論ずれば、徳義に於ては私徳を欠く者を見て概して之を悪人と為し、教の目的は唯世に此悪人を少なくするの一事に在るが如し。然りと雖どもよく広く人心の働を察して其事跡に見はるゝ所を詳にすれば、此悪人を少なくするの一事を以て文明と云ふ可らざるの理あり。今田舎の土民と都会の市民とを比して私徳の量を計れば、何れの方に多きや明に之を決し難しと雖ども、世間一般の論に従へば先づ田舎の風俗を質朴なりとして悦ぶことならん。仮令ひ之を悦ばざるも、田舎の徳風を薄しとして都会の風を厚しとする者はなかる可し。上古と近世とを比し、子供と大人とを比するも亦斯の如し。然るに其文明如何を論ずるときは、都会は文明なりと云ひ近世は文明進歩したりと云はざる者なし。然ば則ち文明は唯悪人の多少を以て其進退を卜す可らず。文明の大本は私徳の一方に在らざること明白に証す可しと雖ども、彼の徳行の識者は初より議論の極度に止まり、思想に余地を遺さずして一方に切迫し、文明の洪大なるを知らず、文明の雑駁なるを知らず、其働くを知らず、其進むを知らず、人心の働の多端なるを知らず、其知徳に公私の別あるを知らず、其公私互に相制するを知らず、互に相平均するを知らず、都て事物を一体に纏めて其全局の得失を判断するの法を知らずして、唯一心一向に此世の悪人を少なくせんことを欲し、其弊や遂に今の世界の人民をして犠昊(伏犠と少昊)以上の民の如くならしめ、都会をして田舎の如くならしめ、大人をして小児の如くならしめ、衆生をして石の猿の如くならしめんとするの陋見に陥りたるものなり。必竟神儒仏及び耶蘇の教とても其本旨は斯の如く切迫なるものに非ざること無論なりと雖ども、唯如何せん、世間一般の気風にて其教を伝へ又これを受るの際に人心に感ずる所の結果を見れば、終に此陋弊を免かるゝを得ず。其趣を形容して云へば、酸敗家の甚しき者へは、何等の飲食を与ふるも尽く酸敗して滋養の功を奏せざるが如し。飲食の罪に非ず、痼疾の致す所なり。学者これに注意せざる可らず。
又彼の識者が甚しく世の不徳を憂る由縁を尋るに、畢竟世の人をば悉皆悪しき者と思ふて之を救はんとするの趣意なる可し。其婆心は真に貴ぶ可しと雖も、世の人を罪業深き凡夫と名るは、所謂坐を見て説くの方便のみ、其実は必ずしも然らず。人類は生涯の間、孜々として悪事のみを為す者に非ず。古今世界中に於て如何なる善人にても必ず悪行なきを保す可らず、如何なる悪人にても亦必ず善行なきを期す可らず。人の生涯の行状を平均すれば、善悪相混じて善の方多きものならん。善行多ければこそ世の文明も次第に進たることなれ。而して其善行は悉皆教の力のみに由て生じたるものに非ず。人を誘て悪に陥れんとして、其謀の必ず百発百中ならざることあらば、乃ち此謀を倒にして善に用ゆるも亦、必ず人を導て善に移す可らざるを証す可し。到底(ツマリ)人の心の善悪は人々の工夫に在るものにて、傍より自由自在に与奪す可きものに非ず。教の行届かざる古代の民に善人あり、智力発生せざる子供に正直なる者多きを見れば、人の性は平均して善なりと云はざるを得ず。徳教の大趣意は其善の発生を妨げざるに在るのみ。家族朋友の間に善を責るとは、其人の天性になきものを傍より附与するに非ず、其善心を妨げるものを除くの術を教へ、本人の工夫を以て自己の善に帰らしむるのみ。故に徳義は人力の教のみを以て造る可きものに非ず、之を学ぶ人の工夫に由て発生するものなり。且其所謂徳行とは此章の初にも記したるが如く唯受身の私徳にて、其結局は一身の私慾を去り、財を愛まず名を貪らず、盗むことなく詐ることなく、精心を潔白にして誠のためには一命をも抛つものを指して云ふことなれば、即ち忍難の心なり。忍難のこころ、固より非なるに非ず。之をかの貪吝詐盗大悪無道の不徳に比すれば同日に論ず可らずと雖も、人の品行に於て此忍難の善心と此不徳の悪心との間には尚千種万様の働ある可き筈なり。前段に智徳の箇条を四様に分たれども、其細目を枚挙せば殆ど際限ある可らず。恰も善悪を甚暑甚寒の両極と為して、其間には春もあり秋もあり薄暑もあり向寒もありて、冷温の度に限なきが如し。もし人類をして其天性を全ふするを得せしめなば、甚寒の悪心は素より既に之を脱して遥に上流に在る可き筈に非ずや。人に盗詐の心あらざればとて何ぞ之を美徳とするに足らん。不盗不詐等の箇条は人類の品行に計へ込む可きものに非ず。若し夫れ貪吝詐盗大悪無道なるあらば、人にして人に非ざる者なり。其心を内に包蔵すれば世間の軽蔑を受け、其所業を外形に顕すときは人間交際の法を以て之を罰す可し。何れにも因果応報の次第は明にして、懲悪の具、外に備はり、勧善の機、内に存するものと云ふ可し。然るに今孜々として私徳の一方を教へ、万物の霊たる人類をして僅に此人非人の不徳を免かれしめんことを勉め、之を免かるゝを以て人生最上の約束と為し、此教のみを施して一世を籠絡せんとして却て人生天稟の智力を退縮せしむるは、畢竟人を蔑視し人を圧制して其天然を妨るの挙動と云はざるを得ず。一度び心に圧制を受れば之を伸すこと甚だ易からず。かの一向宗の輩は自から認めて凡夫と称し、他力に依頼して極楽往生を求め、一心一向に弥陀を念じて六字の名号を唱るの外、更に工夫あることなし。漢儒者が孔孟の道に心酔して経書を復読するの外に工夫なく、和学者が神道を信じて古書を詮索するの外に工夫なく、洋学者が耶蘇の教を悦て日新の学問を忘れ、一冊の「バイブル」を読むの外に工夫なきが如きも、皆一向宗の類なり。固より此流の人にても、其信ずる所を信じて一身の内を脩め自から人間交際の風を美にするの功能は世の裨益の一箇条なれば、決して之を無用として咎るの理なし。譬へば文明の事業を智徳の一荷と為して、人々此荷物を担ふ可きものとすれば、教を信じて一身の徳を脩るは即ち其片荷を負ふ者にて、一方の責は免れたりと雖ども、唯其信ず可きを信ずるのみにて働く可きを働かざるの罪は遁れ難し。其事情恰も脳を有して神経なきが如く、頭を全ふして腕を失ふが如し。畢竟人類の本分を達して其天性を全ふしたる者に非ざるなり。
右の如く私徳は他人の力を以て容易に造る可きものに非ず。仮令ひよく之を造るも智恵に依頼せざれば用を為す可らず。徳は智に依り、智は徳に依り、無智の徳義は無徳に均しきなり。左に其証を示さん。今の学者、耶蘇の宗教を便利なりとして神儒仏を迀遠なりとするは何ぞや。其教に正邪の別ある乎。其正其邪は余輩の敢て知らざる所、これを弁ずるは本書の趣意に非ざれば姑く擱き、其民心に感ずる所の功能に就て論ずるときは、耶蘇の教も亦必ずしも常に有力なるに非ず。欧羅巴の教化師が東洋諸島及び其他野蛮の地方に来て、其土人を改宗せしめたるの例は古来少しとせず。然るに今日に至るまで土人は依然たる旧の土人にて、其文明の有様固より欧羅巴に比較す可らず。夫婦の区別も知らざる赤裸の土人が寺に群集して、一母衆父の間に生れたる其子供に、耶蘇正教の洗礼を行ふも唯是れ改宗の儀式のみ。或は其地方に文明の端を開て進歩に赴きしものも稀にこれありと雖ども、其文明は必ず教師の伝習したる文学技芸と共に進たるものにて、唯宗教の一事のみに由て生じたる結果に非ず。宗教は表向の儀式と云ふ可きのみ。又一方に就て見れば、神儒仏の教に育せられたる日本の人民にても、唯文明の名を下だす可らざるのみ、其心術に至ては悉皆これを悪人と云ふ可らず、正直なる者も亦甚だ多し。此趣を見れば神儒仏の道、必ずしも無力にして、耶蘇の教のみ独り有力なるに非ず。然ば則ち何を以て耶蘇の教を文明に便利なりとして神儒仏の道を迀遠なりとする乎。学者の考は前後不都合なるに似たり。今其議論の由て生ずる本を尋ね、其意見の在る所を砕て之を探るに、耶蘇の教は文明の国に行はれて文明と共に並立す可く、神儒仏の教は不文の国に行はれて文明と共に並立す可らざるが故に、此を迀遠なりとして彼を便利なりと云ひしことならん。然りと雖ども其行はるゝと行はれざる由縁は、教の本体に於て力の強弱あるに非ず、其本体を装ふて光明を増す可き智恵の働に巧拙の差あればなり。西洋諸国にて耶蘇教を奉ずる人は大概皆文明の風に浴したる者にて、殊に其教師の如きは唯聖経のみを読むに非ず、必ず学校の教を受て文学技芸の心得ある人物なれば、前年は教化師と為て遠国に旅行したる者も、今年は自国に在て法律の業を勤む可し、今日は寺に居て説法するも明日は学校に行て教師と為る可し、法俗兼備して法教と共に学芸を教へ人を智域に導くがゆゑに、文明と並立して相戻らざるのみ。故に人の此教を軽蔑せざるは唯其教の十戎のみを信ずるに非ず、教師の言行自から迀遠ならずして今日の文明に適するがために之に帰依するなり。今若し耶蘇の教師をして無学無術なること我山寺の坊主の如くならしめなば、仮令ひ其行状は正しくして聖人の如くなるも、新旧約書は諳誦して朝夕にこれを唱るも、文明の士君子にして誰かこの教を信ずる者あらんや。遇ま之を信ずる者あれば即ち其者は田夫野嫗(やおう)、数珠を捫(なで)て阿弥陀仏を念ずる輩のみ。此輩の目を以て見れば耶蘇も孔子も釈迦も大神宮も区別ある可らず。合掌して拝むものは狐も狸も皆神仏なり。意味も分らぬ読経を聞て涙を流す其愚民へ、何を教へて何の功を成す可きや。決して文明の功を成す可らず。此不文暗黒の愚民中に入込みて強ひて耶蘇の聖教を教へんとし、之に諭し之に説き、甚しきは銭を与へて之を導き、漸くこれに帰依する者あるに至るも、其実は唯仏法の内に耶蘇と名る一派を設けたるが如きのみ。斯の如きは則ち決して識者の素志に非ず。識者は必ず博学多才なる耶蘇の教師を入れて、宗教と共に其文学技芸を学び、以て我文明を達せんとするの意見なる可し。されども文学技芸は智恵の事なり。智恵の事を教るは必ずしも耶蘇の教師に限らず。智恵ある者に就て学ぶ可きのみ。然ば則ち、かの耶蘇教を便利なりとして神儒仏を迀遠なりとしたるは識者の了簡違に非ずや。余輩は固より耶蘇の教師を悪むに非ず、智恵さへある者なれば耶蘇の教師にても尋常の教師にても好悪の差別あることなし。唯博学多才にして身の正しき人を悦ぶのみ。若し天下に耶蘇の教師を除くの外は正しき人物なきものとすれば、固より此教師のみに従て何事も伝習す可しと雖ども、耶蘇の宗門は必ずしも正者専売の場所に非ず、広き世界には自から博学正直の士君子もある可し。之を撰ぶは人々の鑑定に任ず可きのみ。何ぞ独り耶蘇教の名目に拘泥するの理あらんや。何れにも教の本体に便不便はある可らず。唯これを奉ずる人民の智恵に由て価を変ずるものなり。耶蘇の教も釈迦の教も愚人の手に渡せば愚人の用を為すのみ。今の神儒仏の教も今の神職僧侶儒者輩の手に在て今の人民に教ればこそ迀遠なれ、若し此輩の人をして(期し難きことなりと雖ども)大に学ぶことあらしめ、文学技芸を以て其教を装ひ、文明の人の耳を借て之を説くことあらば、必ず其教に百倍の価を増して、或は他をして之を羨ましむるに至る可し。之を譬へば教は猶刀の如く、教の行はるゝ国の人民は猶工匠の如し。利刀ありと雖ども拙工の手に在れば其用を為さず。徳行も不文の人民に逢へば文明の用を為さゞるなり。かの徳行の識者は工匠の巧拙を誤て刀の利鈍と認めたるものと云ふ可し。故に云く、私徳は智恵に由て其光明を生ずるものなり。智恵は私徳を導て其功用を確実ならしむものなり。智徳両ながら備はらざれば世の文明は期す可らざるなり。
新に宗教を入るゝの得失を論ずるは此章の趣意に非ざれども、議論の次第こゝに及びたるが故に、序ながら少しく云はざるを得ず。都て物を求るとは我に無きもの歟又は不足するものを得んとすることなり。爰に二箇条の求ありて、其孰か前後緩急を定るには、先づ我所有の有様を考へ、其全く我に無きもの歟、又は二の内、最も不足するものを察して之を求めざる可らず。蓋し一を求めて一を不用なりとするに非ず、両ながら入用なれども、之を求るに前後緩急の別あるのみ。文明は一国人民の智徳を外に顕はしたる現象なりとのことは前既に之を論じたり。而して日本の文明は西洋諸国のものに及ばずとのことも普く人の許す所なり。然ば則ち日本の未だ文明に達せざるは、其人民の智徳に不足する所ありて然るものなれば、此文明を達せんとするには智恵と徳義とを求めざる可らず。即是れ方今我邦に於ける二箇条の求なり。故に文明の学者は広く日本国中を見渡して此二者の分量を計り、孰か多くして孰か少なきを察するに非ざれば、其求の前後緩急を明に弁ず可らず。如何なる不明者と雖ども、日本全体の人民を評して徳義は不足すれども智恵は余ありと云ふ者はなかる可し。其証拠と為す可き箇条は甚だ多く且明にして計ふるに遑あらず、亦計ふるにも及ばざる程のことなれども、念のために一、二例を示さん。抑も日本に行はるゝ徳教は神儒仏なり、西洋に行はるゝものは耶蘇教なり。 耶蘇と神儒仏と其説く所は同じからずと雖ども、其善を善とし悪を悪とするの大趣意に至ては互に大に異なることなし。譬へば日本にて白き雪は西洋にても白く、西洋にて黒き炭は日本にても黒きが如し。且徳教の事に就ては東西の学者頻りに自家の教を主張し、或は其書を著し或は他の説を駁して争論止むことなし。此争論の趣を見ても亦以て東西の教に甚しき優劣なきを徴す可し。凡物の力量略(ほぼ)相敵せざれば争論は起る可らず。牛と猫と闘ふたるを見ず、力士と小児と争ふたるを聞かず。争闘の起るは必ず其力、伯仲の間に在るものなり。かの耶蘇教は西洋人の智恵を以て脩飾維持したる宗教なれば、其精巧細密なること迚も神儒仏の及ぶ所に非ざる可しと雖ども、西洋の教化師は日本に来て頻りに其教を主張し神儒仏を排して己れの地位を得んとし、神儒仏の学者は及ばずながらも説を立てゝ之に敵対せんとして、兎に角に喧嘩争論の体裁を成すは何ぞや。西洋の教必ずしも牛と力士との如くならず、日本の教必ずしも猫と小児との如くならずして、東西の教、正しく伯仲の間に在るの明証と云ふ可し。其孰か伯た孰か仲たるは余輩の関する所に非ずと雖ども、我日本人も相応の教を奉じて其徳教に浴したる者なれば、私徳の厚薄を論ずるときは、西洋人に比して伯たらざるも必ず仲たり。或は教の議論に関せずして事実に就て見れば、伯たる者は却て不文なる日本人の内に多きこともあらん。故に徳の分量は仮令ひ我国に不足することあるも焦眉の急須に非ざること明なり。智恵の事は全く之に異なり。日本人の智恵と西洋人の智恵とを比較すれば、文学技術商売工業、最大の事より最小の事に至るまで、一より計へて百に至るも又千に至るも、一として彼の右に出るものあらず。彼に敵対する者なく、彼に敵対せんと企る者もなし。天下の至愚に非ざるの外は、我学術商工の事を以て西洋諸国に並立せりと思ふ者はなかる可し。誰か大八車を以て蒸気車に比し、日本刀を以て小銃に比する者あらん。我に陰陽五行の説を唱れば、彼には六十元素の発明あり。我は天文を以て吉凶を卜したるに、彼は既に彗星の暦を作り太陽太陰の実質をも吟味せり。我は動かざる平地に住居したる積りなりしに、彼は其円くして動くものなるを知れり。我は我邦を以て至尊の神洲と思ひしに、彼は既に世界中を奔走して土地を開き国を立て、其政令商法の斉整なるは却て我より美なるもの多し。是等の諸件に至ては、今の日本の有様にて決して西洋に向て誇る可きものなし。日本人の誇る所のものは唯天然の物産に非ざれば山水の風景のみ、人造の物には嘗てこれあるを聞かず。我に争ふの意なければ彼も亦争はず。外国人はよく自国の事に付て自負するものなれども、未だ蒸気車の便利を述て大八車の不便理を駁したるを聞かず。畢竟彼我の智恵の相違は牛と猫との如くにして互に争端を開かざるものなり。是に由て之を観れば、方今我邦至急の求は智恵に非ずして何ぞや。学者思はざる可らず。
又一例を挙て之を示さん。田舎に人物あり、旧藩士族と云ふ。廃藩の前に家禄二、三百石を取り、君に仕へて忠、父母に事へて孝、夫婦別あり、長幼序あり、借金必ず払ひ、附合必ず勤め、一毫の不義理を犯したることなし。況や詐盗に於てをや。或は威を以て百姓町人を圧制したることあれども、固より身分の当然なれば心に恥る所なし。家は極て節倹、身は極て勉強、弓馬の芸、剣鎗の術、達せざるものなし。唯文字を知らざるのみ。今此人のために謀るに之を如何す可きや。徳を与へんか、将(は)た智を与へんか。試に之を徳に導き、突然として耶蘇の十誡を示すことあらば、第四誡までの箇条は生来知らざることなれば或は之を聞く可しと雖ども、第五誡以下に至ては此人必ず云はん、我は父母を敬せり、我は人を殺すの意なし、何ぞ婬(いん)することをせん、何ぞ盗むことをせんとて、一々抗論して容易に敬服することなかる可し。固より耶蘇の教は此十誡の白文を以て尽す可きに非ず、必ず意味深長なるものにて、父母を敬するにも自からの敬の法あり、人を殺さゞるにも自から殺さゞるの趣意あり、不婬にも義あり、不盗にも義あることならん。故に之に説くには丁寧反覆よく其旨を尽して、遂には此人の心を感動せしむることもある可しと雖ども、兎に角に徳行の事に就ては、此士族平生の行状に於て、少なくも初段の心得はある者と云はざるを得ず。然るに一方より其智恵に就て所得を試るに、渾身恰も空虚なるが如し。五色の区別は僅に弁ずれども天然七色の理は固より之を知らず、寒暑の挨拶は述れども寒暖計昇降の理は之をしらず、食事の時は誤らざれども時計の用法をば解すこと能はず、生国の外に日本あるを知らず、日本の外に外国あるを知らず、何ぞ内の形勢を知らん、何ぞ外の交際を知らん、古風を慕ひ古法を守り、一家は恰も一小乾坤にして、其眼力の及ぶ所は唯家族の内を限り、戸外に出ること僅に一歩にして世界万物悉皆暗黒なる者の如し。廃藩の一挙以て此小乾坤を覆へし、今日に至ては唯途方に暮るゝのみ。概して此人物を評すれば愚にして直なりと云ふの外は名状す可きなし。斯る愚直の人民は唯旧藩士族のみに限らず世間に其類甚だ多し。人の普く知る所にして、学者も政府も共に患る所のものなり。然るに、かの徳行の識者は尚この愚民に説て耶蘇の正教を伝へ其徳義を進めんとするに忙はしくして、其智恵の有無は捨てゝ問はざる乎。識者の目には唯愚にして不直なる者のみを見ることなる可しと雖ども、世間には愚にして直なる者も亦甚だ多し。識者これに向て何等の処置を施さんとするや。其直をして益直ならしめ、其愚をして益愚ならしめんと欲する乎。物を求るに前後緩急の弁別なきものと云ふ可し。西洋家流の人は常に和漢の古学を迀遠なりとして詈(ののし)るに非ずや。其これを詈るは何ぞや。事実に智恵の働なきを咎るものならん。他を咎て自から其覆轍に傚ひ、自から築て自から毀つ、惑へるの甚しきなり。
宗教は文明進歩の度に従て其趣を変ずるものなり。西洋にても耶蘇の宗旨の起りし其初は羅馬の時代なり。羅馬の文物盛なりと雖ども、今日の文明を以て見れば概してこれを無智野蛮の世と云はざるを得ず。故に耶蘇の宗教も其時代には専ら虚誕妄説を唱へて、正しく当時の人智に適し、世に咎めらるゝこともなく世を驚かすこともなく、数百年の間、世と相移りて次第に人の信仰を取り、其際に自から一種の権力を得て却て人民の心思を圧制し、其情状、恰も暴政府の専制を以て衆庶を窘るが如くなりしが、人智発生の力は大河の流るゝが如く、之を塞がんとして却て之に激し、宗旨の権力一時に其声価を落すに至れり。即ち紀元千五百年代に始りたる宗門の改革、是なり。此改革は羅馬の天主教を排して「プロテスタント」の新宗派を起したることにて、是より両派、党を異にして相互に屹立すと雖ども、今日の勢にては新教の方、次第に権を得るが如し。抑も此両派は元と同一の耶蘇教より出たるものにて、其信ずる所の目的も双方共に異なることなしと雖ども、新教の盛なる由縁は、宗教の儀式を簡易に改め、古習の虚誕妄説を省て正しく近世の人情に応じ、其智識進歩の有様に適すればなり。概して云へば旧教は濃厚にして愚痴に近く、新教は淡薄にして活潑なるの差あるなり。世情人古今の相違を表し出したるものと云ふ可し。
右所記に従へば、欧羅巴の各国にて文明の先なるものは必ず新教に従ひ、後なるものは必ず旧教を奉ず可き筈なるに、亦決して然らず。譬へば今蘇格蘭(すこつとらんど)と瑞典(すえーでん)との人民は妄誕に惑溺する者多くして、仏蘭西人の穎敏活潑なるに及ばざること遠し。故に蘇瑞は不文にして仏蘭西は文明と云はざるを得ず。然るに仏は旧き天主教を奉じ、蘇瑞は新教の「プロテスタント」に帰依せり。この趣を見て考れば、天主教も仏蘭西に在ては其教風を改めて自から仏人の気象に適するもの歟、然らざれば仏人は宗教を度外に置て顧みざることなる可し。新教も蘇瑞両国に於ては其性を変じて自から人民の痴愚に適するものならん。到底(ツマリ)宗教は文明の度に従て形を改るの明証と云ふ可し。日本にても旧き山伏の宗旨又は天台真言宗の如きは専ら不思議を唱へ、或は水火の縁を結ぶと云ひ、或は加持祈禱の妙法を修すると云ひ、以て人を蠱惑して、古の人民はこの妄誕を信仰せしことなりしが、中古一向宗の起るに及ては不思議を云ふこと少なく、其教風都て簡易淡薄を主として亦中古の人文に適し、遂に諸宗を圧倒して独り権力を専らにせり。世の文明次第に進歩すれば宗教も必ず簡易に従ひ、稍や道理に基かざるを得ざるの証なり。仮に今日に在て弘法大師を再生せしめ、其古人を蠱惑せし所の不可思議を唱へしむることあるも、明治年間の人には之を信ずる者甚だ稀なる可し。故に今日の人民はまさに今日の宗旨に適し、宗旨も人民に満足し、人民も宗旨に満足して、互に不平ある可らず。若し日本の文明今より次第に進て、今の一向宗をも虚誕なりとして之を厭ふに至らば、必ず又別の一向宗を生ずることもある可し。或は西洋に行はるゝ宗旨を其まゝに採用することもある可し。結局宗旨のことは之を度外に置く可きのみ。学者の力を尽すも政府の権を用るも如何ともす可きものに非ず。唯自然の成行に任ず可きのみ。故に書を著して宗旨の是非正邪を論じ、法を設けて宗旨の教を支配せんとする者は、天下の至愚と云ふ可し。
有徳の善人必ずしも善を為さず、無徳の悪人必ずしも悪を為さず。往時西洋諸国にて宗旨のために師を起し人を殺したるの例は歴史を見て知る可し。其最も甚しきものは「ペルセキウション」とて、己が信ずる所の宗旨に異なる者を逐て之を殺戮することなり。古来仏蘭西及び西班牙(いすぱにあ)に於て其例最も多し。有名なる「バルゾロミウ」の屠戮(とりく)には、八日の間に無罪の人民五千人を殺したりと云ふ。《事は西洋事情二編仏蘭西の史記にあり。》其惨酷なるは沙汰の限りなれども、屠戮を行ふたる本人に就て見れば、元と一心一向に宗旨を信じ、信の一事に於ては俯仰憚る所なく、所謂屋漏に恥ざる善人なり。此善人にして此大悪事を行ふは何ぞや。私徳の足らざるに非ず、聡明の智恵に乏しきなり。愚人に権力を附して、之をして信ずる所あらしめなば、何等の大悪事をも為さゞることなし。世のために最も恐る可き妖怪と云ふ可し。爾来諸国の文物漸く盛なるに至り、今日は既に「ペルセキウション」の事あるを聞かず。こは古今の宗旨に異同あるに非ず、文明の前後に由て然るものなり。均しく是れ耶蘇の宗旨なるに、古はこの宗旨のために人を殺し、今はこの宗旨を以て人を救ふとは何故ぞ。人の智愚に就て其源因を求むるの外は手段なかる可し。故に智恵は徳義の光明を増すのみならず、徳義を保護して悪を免かれしむるものなり。近くは我日本にても、水戸の藩中に正党姦党の事あり。其由来は今爰に論ずるに及ばずと雖ども、結局、忠義の二字を議論して徒党を分たるものにて、其事柄は宗旨論に異ならず。正と云ひ姦と云ふも其字に意味ある可らず。自から称して正と云ひ他を評して姦と名るのみ。両党共に忠義の事を行ひ、其一人の言行に就て之を見れば腹中甕(かめ)の如き赤心を納る者多し。其偽君子に非ざるの証は、此輩が事を誤るときに当て常に従容死に就き狼狽する者なきを見て知る可し。然るに近世議論のために無辜の人民を殺したるの多きは水戸の藩中を最とす。是亦善人の悪を為したる一例なり。
徳川家康は乱世の後を承け櫛風(しつぷう)浴雨、艱難を憚らずして遂に三百年の太平を開き、天下を泰山の安(やすき)に置たりとて、今日に至るまでも其功業の美なるを称せざる者なし。実に足利の末世、海内紛擾の時に当て、織田豊臣の功業も未だ其基を固くすること能はず。此時に家康なかりせば何れの時か太平を期す可きや。実に家康は三百年間太平の父母と云ふ可し。然るに此人の一心に就き其徳義を察すれば、人に恥づ可きもの少なからず。就中其太閤の遺託に背て大阪を保護するの意なく、特に託せられたる秀頼を輔けずして却て其遊冶暗弱を養成し、石田三成の除く可きを除かずして後日大阪を倒すの媒妁に遺したるが如きは、奸計の甚しきものを云ふ可し。此一条に就ては家康の身には一点の徳義なきが如し。然るに此不徳を以て三百年の太平を開き衆庶を塗炭に救たるは奇談に非ずや。 其他頼朝にても信長にても、一身の行状を論ずれば残忍刻薄偽詐反覆悪む可きもの多しと雖ども、皆一時の干戈を止め人民の殺戮を少なくしたるは何ぞや。悪人も必ずしも善を為さゞるに非ざるなり。必竟此輩の英雄は、或は私徳に欠点ありと雖ども、聡明叡知の働を以て善の大なるものを成したる人物と云ふ可し。一点の瑾(きず)を見て全璧の価を評す可らざるなり。
右に論ずる所を約して云へば、徳義は一人の行状にて其功能の及ぶ所狭く、智恵は人に伝ること速にして其及ぶ所広し、徳義の事は開闢の初より既に定て進歩す可らず、智恵の働は日に進て際限あることなし、徳義は有形の術を以て人に教ゆ可らず、之を得ると否とは人々の工夫に在り、智恵は之に反して人の智恵を糺すに試験の法あり、徳義は頓に進退することあり、智恵は一度び之を得て失ふことなし、智恵は互に依頼して其功能を顕はすものなり、善人も悪を為すことあり悪人も善を行ふことありとのことを説き示したるものなり。抑も徳義を人に授るに就ては有形の方術なく、忠告の及ぶ所は僅に親族朋友の間のみなりと雖ども、其風化の達する領分は甚だ広し。万里の外に出版したる著書を見て大に発明することあり、古人の言行を聞て自から工夫を運らし遂に一身の心術を改る者あり。伯夷の風を聞て立つとは此事なり。苟も人として世を害するの意なくば一身の徳義を脩めざる可けんや。名のために非ず、利のために非ず、正に是れ人類たる者の自から任ず可き徳義の責なり。自己の悪念を防ぐには、勇士が敵に向て戦ふが如く、暴君が民を御して之を窘るが如くし、善を見て之を採るは守銭奴が銭を貪て飽くことを知らざる者の如くし、既に一身を脩め又よく一家を教化し、尚余力あらば乃ち広く他人に及ぼして之に説き之に諭し、衆生をして徳の門に入らしめ、一歩にても徳義の領分を弘めんことを勉む可し。是亦人間の一科業にて、文明を助るの功能固より洪大なるが故に、世に教化師の類ありて徳義の事を勧るは誠に願ふ可きことなれども、唯徳義の一方を以て世界中を籠絡せんとし、或は其甚しきに至ては徳教中の一派を主張して他の教派を排し、一派を以て世の徳教を押領して兼て又智恵の領分をも犯し、恰も人間の務は徳教の一事に止りて徳教の事は又其内の一派に限るものゝ如くし、人の思想を束縛して自由を得さしめず、却て人を無為無智に陥れて実の文明を害するが如きは、余輩の最も悦ばざる所なり。受身の私徳を以て世の文明を助け、世人をして其徳沢を被らしむることあるは、偶然に成たる美事と云ふ可きのみ。譬へば我地面内に家を建てゝ遇ま隣家の屏墻と為りたるが如し。隣人のためには極て便利なりと雖ども、元と我家を建たるは自己のためにして隣人のためにしたるに非ず、偶然の便利と云ふ可きのみ。私徳を脩るも元と一身のためにするものにて他人のためにするに非ず、若し他人のために徳を脩る者あらば、即是れ偽君子にて、徳行家の悪む所なり。故に徳義の本分は一身を脩るに在り。其これを脩て文明に益することあるは偶然の美事のみ。偶然の事に拠て一世を支配せんとするは大なる誤と云ふ可し。元来人として此世に生れ、僅に一身の始末をすればとて、未だ人たるの職分を終れりとするに足らず。試に問ふ、徳行の君子、日に衣食する所の物は何処より来たるや。上帝の恩沢洪大なりと雖ども、衣服は山に生ぜず、食は天より降らず。況や世の文明次第に進めば其便利、唯衣服飲食のみならず、蒸気電信の利あり、政令商売の便あるに於てをや。皆是れ智恵の賜にあらざるはなし。人間同権の趣意に従へば、坐して他人の賜を受るの理ある可らず。若し徳行の君子をして瓢瓠(へうこ)の如くならしめ、よく懸て食ふことなくば則ち止まん(有徳の君子がぶら下がるだけで食べられない瓢箪のやうなものになるなら無意味なことだ)。苟も食を喰ひ衣を服し、蒸気電信の利を利として、政令商売の便を便とすることあらば、亦其責に任ぜざる可らず。加之肉体の便利既に饒にして一身の私徳既に恥ることなしと云ふも、尚この有様に止て安ずるの理なし。其饒と云ひ、恥るなしと云ふは、僅に今日の文明に於て足れるのみ、未だ其極に至らざること明なり。人の精神の発達するは限あることなし、造化の仕掛には定則あらざるはなし。無限の精神を以て有定の理を窮め、遂には有形無形の別なく、天地間の事物を悉皆人の精神の内に包羅して洩すものなきに至る可し。此一段に至ては何ぞ又区々の智徳を弁じて其界を争ふに足らん。恰も人天並立の有様なり。天下後世必ず其日ある可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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