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장 서양문명의 유래
지금의 서양문명을 기술하는데 그 유래를 천착하는 것은 이 소책자가 능히 할 수 있는 바가 아니다. 따라서 여기서는 프랑스의 학자「기조」씨 저술의 문명사 및 다른 여러 서적을 인용하여, 그 1%의 대의를 기술한 것 다음과 같다.
서양의 문명이 다른 문명과 다른 바는, 인간의 사회생활에 관하여 그 주장이 한 가지가 아니라, 여러 가지 설을 서로 병립하여 서로 화합하는 일 없는 한 가지 일에 있다. 비유건대 정치의 권력을 주장하는 설이 있고, 종교가 권력을 독점한다는 논의가 있다. 혹은 전제정치라고 하고 혹은 신정(神政)이라고 하고, 혹은 귀족집권(귀족정치) 혹은 중서위정(衆庶爲政: 민주주의)이라 하여, 각자 그 지향하는 바를 향해 각자 그 주장하는 바를 주장하여, 서로 싸운다할지라도 서로 능히 이것을 제어할 수 없다. 하나도 이기는 자가 없고 하나도 패하는 자가 없다. 승패가 오래도록 결정되지 않아서 서로 적대하면, 설사 불평이 있다할지라도 서로 동시에 공존하지 않을 수 없다. 이미 동시에 공존할 수 있으면, 설사 적대하는 자라할지라도, 서로 그 실정을 알고 서로 그 행동하는 바를 허용하지 않을 수 없다. 나에게 전승(全勝)의 세력을 얻지 못하여 다른 사람의 행위를 허용하는 경우에 이르면, 각각 자기주장을 펼쳐서 문명의 한 국면을 작동시켜, 마침내는 합쳐서 하나로 될 수 있다. 이것이 곧 자주(自主)와 자유(自由)가 생겨나는 이유이다.
지금의 서양 문명은 로마멸망의 때를 시작으로 한다. 기원 300년경부터 로마제국의 권세는 점점 쇠약해져, 400년대에 이르러 최고로 심해져, 야만족이 팔방으로부터 침입하여 또 제국의 온전한 권력을 지킬 수 없다. 이 종족들 안에서 최고를 힘이 센 것은 게르만족이라고 한다. 「프랑크」 족도 곧 이 무리이다. 이 야만의 여러 종족, 제국을 유린하여 로마 수 백 년의 옛 문물을 없애고, 인간의 사회에서 시행되는 것은 오직 완력뿐. 무수한 야만인들, 무리를 지어 침략과 약탈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다. 따라서 나라를 건설하는 자 있으면 따라서 병합되는 자가 있다. 700년대 말에 「프랑크」의 추장 「샤를르마뉴」라는 자, 지금을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의 지방을 힘으로 빼앗아 하나의 대제국의 기초를 세우고, 점차 유럽 전 지역을 통일하고자 하는 세력을 이루었어도, 황제의 사후는 나라가 또 분열하여 돌아갈 곳이 없다. 이 시기를 맞아서는, 프랑스라고 하고 독일이라고 하여, 그 나라의 명칭이 있어도, 아직 나라의 체제를 이루지 못한다. 사람마다 하나의 완력을 마음껏 펼치고 하나의 욕심을 자행했을 뿐이다. 후세는 이 시대를 주목하여 야만의 시대 또는 암흑의 시대라고 칭한다. 곧 로마 말부터 기원 900년대에 이르기까지 대체로 700년간이다.
이 야만과 암흑의 시대에 있어 기독교 성당은 스스로 형태를 온전히 하여 존재할 수 있었다. 로마 멸망에는 성당도 함께 멸망할 수 있을 것 같았어도 결코 그렇지 않다. 성당은 야만 속에 섞여 지내며 단지 존재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이 야만족을 교화시켜 자기네 종교 안에 농락하는 일에 힘썼다. 그 담대한 계략도 역시 크다고 할 수 있다. 생각건대 무지한 야만을 인도하는 것은 고상한 이치로써 할 수 없다. 곧 성대히 의식을 마련하여 외형적인 허식(虛飾)으로써 사람들의 이목을 현혹하여, 애매한 경우에 점차 그 신앙심을 일으키기에 이르렀다. 후세로부터 이것은 논하면 거짓말로써 사람들 현혹한다는 비난을 면하기 어렵다고할지라도, 이 정부도 없고 법도 없는 세상에서 적어도 자연의 이치와 사람의 길이 귀중함을 아는 것은 다만 기독교가 있을 뿐. 만일 이 시대에 이 종교가 없도록 했다면, 유럽의 전체 나라는 한 마당의 금수 세계일 것이다. 그러니까 기독교의 공적도 이 시대에 있어서 작다고 할 수 없다. 그 권력을 얻음도 역시 우연이 아니다. 일반적으로 말하면 육체를 억제하는 일은 세속의 완력에 속하고, 정신을 억제하는 일은 성당의 권력에 귀속되어, 속세의 권력과 교회의 권력이 서로 대립하는 것과 같다. 그뿐만 아니라 성당의 사제가 세속적인 일에 관계하여 시내의 민간의 공무를 맡아보는 것은 로마시대부터 시행되는 관습이어서, 이 시대에 이르기까지도 그 권한을 잃지 않는다. 후세의 의회에 사제가 참석하는 것도, 그 원인은 멀리 오랜 옛날에 있어서 존재하는 것이다. (성당의 권한이 있다)
초기 로마 국을 건설하자 수많은 도시와 촌락이 합쳐진 것이 된다. 로마의 관할, 도처로 도시와 촌락이 아닌 것이 없다. 이 합쳐진 도시와 촌락 안에는 각자 개별적인 성문법이 있어, 스스로 한 도시와 한 촌락의 행정을 실시하여 로마황제의 명령에 복종하고, 모여서 한 제국을 이루었지만, 제국이 멸망한 후도 시민의회의 풍습은 여전하고 이것을 존속시켜, 그로써 후세 문명의 원소가 되었다. (민주정치의 요소)
로마제국은 멸망하였다할지라도, 과거 수 백 년 간 이 국가를 칭하여 제국으로 부르고, 그 군주를 존경하여 황제라 이름하고, 그 명칭은 마음속에 새겨져 잊힐 수 없다. 일단 황제 폐하의 이름을 잊지 않으면 전제와 독재의 관념도 이 이름과 함께 존재하지 않을 수 없다. 후세 군주제의 주장도 그 기원은 아마도 여기에 있는 것이다. (군주제의 요소)
이 시대에 있어 천하에 횡행하는 야만 종족이라는 것은, 고서에 기재된 바를 보아 명백하게 그 기풍과 성질을 규명하기에 어렵다할지라도, 당시의 사정을 짐작하여 생각하는 데, 세찬 기세(호기: 豪気)가 표한(慓悍)하여서 인정을 모르고, 그 무식하고 아둔한 것이 거의 금수에 가까운 것과 같다. 그렇다할지라도 지금 한 걸음을 나아가, 그 속사정에 관하여 세밀하게 분석하여 그것을 음미하면, 이 아둔하고 표한(慓悍)한 것 안에 스스로 뛰어난 용맹과 강개(慷慨: 의로운 분노)의 기운이 존재하여 자유로운 독립의 기풍이 있다. 생각건대 이 기풍은 인류의 본심으로부터 유래하는 것이어서, 곧 스스로 인식하여 홀로 하나의 남자라고 생각하여, 스스로 유쾌함을 지각하는 마음이고, 대장부의 뜻이고, 마음의 의지가 발생하는 것을 막고자 하여도 막을 수 없는 용기이다. 과거 로마시대에도 자유에 대한 주장이 없지는 않고, 기독교의 무리에서도 이 주장을 외치는 자가 없는 것이 아니더라도, 그 자유와 자주라고 외치는 것은 한 종족의 자유여서, 한 몸의 자유를 외치는 자가 있다고 듣지 못한다. 한 개인의 자유로운 독립을 주장하여 한 개인의 의지를 펴겠다는 기풍은, 게르만 야만족에 있어서 처음으로 그 요소가 있음을 보았다. 후세 유럽의 문명에 있어서, 일종의 둘도 없는 금과 옥과 같은 것으로서 오늘날에 이르기까지도 귀중한 바의 자유와 독립의 기풍은, 그것을 게르만의 덕택으로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자유와 독립의 기풍은 게르만의 야만에서 배태되었다.)
야만스러운 암흑의 시대가 첨차 끝나고 정착하지 않고 돌아다니는 사람들도 그 거처를 정해, 이것 때문인가 봉건할거의 추세로 바뀌었다. 이 추세는 900년대에 시작하여 1500, 600년대에 이르러 멸망하였던 것이다. 이 시대를「봉건제도(feudal system)」의 세상이라고 칭한다. 봉건의 시대에서는, 프랑스라고 하고 서반아(스페인)이라 하여, 각자 그 나라의 명칭을 지녀 각국의 군주가 없는 것은 아니라도, 군주는 다만 실권이 없는 자리를 차지할 뿐이다. 국내의 무사가 도처에서 할거하여 하나의 부락을 이루고, 산에 의지하여 성을 쌓고, 성의 아래에 부하를 소집하여, 하층민을 노예처럼 간주하여 스스로 귀족이라고 칭하고, 실제로 독립의 형태를 마련하여 꺼리는 바가 없고, 무력으로써 서로 공격할 뿐이다. 암흑의 시대에 있어서는, 세상의 자유라는 것이 개인 위에서 시행되었다할지라도, 봉건의 세상에 이르러서는 크게 그 취지를 달리하여, 자유권은 토지와 백성의 주인인 귀족 한 사람의 몸에 속하여, 이것을 제어하는 것에 일반적인 국법이 없고, 이것을 비판하는 데 시민의 논의가 없고, 한 개의 성 안에 있어서는 지극히 높은 군주라고 하지 않을 수 없고, 다만 그 전제를 방해하는 것은 적국과 외환(外患)이 아니면 자신의 힘이 부족할 뿐이다. 유럽의 각 나라가 대개 이 기풍을 이루어, 국가 안의 국민 모두 귀족이 있는 것을 알되 국왕이 있는 것을 알지 못한다. 저 프랑스, 서반아와 같은 것도, 아직 프랑스 국, 서반아 국이라는 칭할 수 있는 국가체제(国体)를 이루지 못한 것이다. (봉건할거)
위와 같이 봉건의 귀족 홀로 권력을 독점하는 것 같아도, 결코 이 독립적인 권한으로써 유럽 전 지역의 형세를 지배하는 것이 아니다. 종교는 이미 야만적인 사람의 마음을 농락하여 그 믿음을 얻고, 기원 1100년부터 200년대에 이르러서는 최고로 강성함에 도달했다. 생각건대 그 권력을 얻은 원인을 찾으면 결코 우연이 아니다. 대체로 인류의 생생한 모습을 보는 데, 세태의 변천에 따라서 혹은 일시적인 영광을 빛낼 수 있고, 힘이 있으면 그로써 백만의 적을 섬멸할 수 있고, 재간이 있으면 그로써 천하의 부(富)을 지킬 수 있고, 인간의 만사는 재간과 힘에 따라서 뜻대로 할 수 있다할지라도, 오직 삶과 죽음 저승의 이치에 이르러서는 하나로 풀 수 없는 것이다. 이 저승의 이치와 마주할 때는, 「샤를르마뉴」의 뛰어난 무용(武勇)이라할지라도, 진시황의 맹렬한 위력이라 할지라도, 추호의 힘을 사용하는 데 방법이 없고, 처연하여 낙담하고, 부귀는 뜬구름, 인생은 아침이슬임을 한탄하지 않을 수 없다. 사람 마음의 최고로 약한 부분은 바로 이곳에 있는 것이어서, 방어전으로써 말하면 준비를 하지 않은 요새와 같고, 사람의 몸에서 말하면 예민한 급소와 같아서, 한번 이것을 침범당하면 갑자기 움츠러들어, 나의 미약함을 보이지 않는 자가 없다. 종교의 본분은 이 저승의 이치를 설명하여 우주의 미묘함을 밝히는 것이라고 칭하여, 감히 사람이 지닌 의혹에 답하는 것이어서, 적어도 생명을 지닌 인류에 있어서 누가 이것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을 자가 있는가? 그뿐만 아니라 당시 문화가 아직 개화되지 않고, 오류와 가볍게 믿는 세계의 한가운데여서, 허랑한 거짓말일지라도 일찍이 그것을 의심하는 자가 없고, 세상에 복종하는 것이라 하여 종교를 믿는 형세를 이루어, 한 마음으로 오로지 종교의 교설을 믿도록 할 뿐이어서 도무지 사사로운 논의를 허락하지 않고, 그 전제 억압의 형세는 왕과 제후의 폭정으로써 하층민을 괴롭히는 것과 다르지 않다. 당시의 사정을 일반적으로 평가하면, 백성은 흡사 그 몸을 반으로 잘라 정신과 육체의 두 부분으로 나누어, 육체의 운동은 왕과 제후의 속권(俗權: 정치권력)의 다스림을 받고, 정신의 작용은 로마 가톨릭의 명령에 따른 것과 같다. 속권(俗權: 정치권력)은 신체라는 유형의 세계를 지배하는 것이다. 종교는 정신이라는 무형의 세계를 지배하는 것이다.
종교는 이미 정신의 세계를 지배하여 사람의 마음을 빼앗고, 왕과 제후의 속권(俗權: 정치권력)에 대립하여도, 더욱 이것에 만족하지 않고 이르기를, 정신과 육체를 어느 것이 귀중한가? 육체는 끝이고 또 바깥이고, 정신은 근본이고 또 안쪽인데, 나는 이미 그 근본을 제압하고 안쪽을 지배했노라, 어쩌랴 그 바깥과 끝을 버릴 이치가 있는가? 반드시 그것을 나의 범위 안에서 농락하지 않을 수 없다 하여, 점차 왕과 제후의 지위를 침범하여, 혹은 그 나를 빼앗고 혹은 그 왕위를 박탈하여, 로마교황은 흡사 하늘과 땅에서 홀로 존귀한 것 같다. 게르만의 황제 「하인리히」 4세가 교황 「그레고리」의 노여움을 사서, 추운 겨울의 바람과 눈 속에서 맨발로 로마의 성문에 선 것이 3일간의 낮과 밤, 울며 교황에게 애걸하였다고 하는 것도 이 시대의 일이다. (종교의 권력이 크게 번성하다)
야만의 횡행이 점차 진정되어 할거의 형세를 이루고, 이미 성을 구축하여 집을 건설하고 그 주거가 안정되는 데 이르면, 다만 배고픔과 추위를 면하는 것으로써 만족할 수 없고, 점차 사람에게서 풍취를 생기게 해서, 의복은 가볍고 따뜻함을 원하고 음식은 맛있음을 좋아하여, 제반 수요가 동시에 일어나 또 옛날의 조야함을 감수하는 자가 없다. 이미 수요가 있으면 따라서 또 그것을 공급하는 자가 없을 수 없다. 이것 때문인가 처음에 조금 상공업의 길을 열고, 도처에 시읍(市邑)의 형태를 이루어, 혹은 그 시민의 안에 재산을 이룩한 자도 있다. 곧 로마 이후, 시읍(市邑)이 부흥한 것이다. 생각건대 이 시민들이 서로 모여 무리를 이룬 것이야, 그 초기에 있어서는 결코 힘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야만적인 무사들이 과거의 형세를 회고하여 폭력과 약탈과 관련된 쾌락을 잊을 수는 없다고 할지라도, 시대의 형세가 이미 정해져 멀리 출정할 이유가 없고, 근방에서 약탈을 자행할 수 있는 상대는 다만 같은 종족인 시민이 있을 뿐. 시민의 눈으로써 봉건의 귀족과 무사를 보면, 물건을 팔 때는 손님과 같고, 물건을 빼앗길 때는 강도와 같기 때문에, 상업으로써 그들과 교류한다고 할지라도, 겸하여 또한 그 폭력을 막는 준비를 하지 않을 수 없다. 곧 시읍(市邑)의 주의에 성곽을 세우고, 성안의 주민은 서로 도와 외적을 막고, 그로써 이해(利害)를 함께한다는 취지여서, 큰 모임을 열 때는 종을 울려서 주민을 모으고, 서로 다른 뜻이 없음을 맹서하여 믿음을 표시하고, 이 회동의 때에 있어서 대중 안에서부터 사람 몇 명을 선출하여, 성안의 우두머리로 삼아서 공격과 방어의 정치를 맡도록 하는 풍습이다. 이 우두머리인 사람, 일단 선거에서 당선되어 권력을 잡은 때는, 그 전제, 의지와 같지 않은 것이 없다. 대부분 군주제의 특별한 체제라도, 다만 시민의 권리로써 거듭 다른 사람을 선출하여 그를 대신하도록 하는 법률이 있다.
이와 같이 시민이 무리를 이루어 독립하는 것을 「프리시티: 자유도시: Free City」라고 칭하여, 혹은 제왕의 명령을 거부하고 혹은 귀족의 군대와 싸워, 전쟁의 혼란이 거의 없는 날이 없다. 《「프리시티」는 자유로운 시읍[市邑]의 의미여서 그 시민은 곧 독립적인 시민이다》 기원후 1000년경부터 유럽의 여러 나라에서 자유의 도시를 세운 것이 많고, 그 유명한 것은 이탈리아의 「밀라노」 「롬바르디아」, 독일에서는 「한세틱 리규 (한자동맹)」라 하여, 1200년대의 초부터 「류벡」 및 「함부르크」 등의 시민이 서로 모여 공회(公會)을 결성하여, 그 세력이 점점 번성하여 한 때는 85 마을의 연합을 이루어 왕과 제후 귀족도 그것을 제어할 수 없고, 더욱이 조약을 맺어 그 자립을 인정하고, 각 시읍(市邑)에 성곽을 쌓아 군비를 두어 법률을 만들고 시행령을 시행하는 것을 허용하여, 흡사 독립국의 체제를 이루는 데 이르렀다. (민정[民政: 민주정치]의 요소)
이상 기술한 바와 같이, 기원 3, 4백년 경부터, 사원이나, 군주제나, 귀족이나, 백성이나, 무엇이든 모두 그 형태를 이루어 각각 다소의 권력을 지녀, 흡사 인간의 사회생활에 필수적인 제반 여건은 구비했다하더라도, 아직 그것을 합쳐서 하나로 하여, 한 나라를 만들어 하나의 정부를 세우는 때에 이르지 못하여, 시민들이 싸우는 바, 각 한 부분에 머물러, 아직 전체적인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기원 1096년 십자군 사건이 일어난다. 이 군대는 유럽의 시민, 종교 때문에 힘을 합쳐서 소아시아 지역을 정벌하여, 전체 유럽을 아군으로 하고 아시아를 적대시하는 것이어서, 시민의 마음에 처음으로 유럽과 아시아라는 안팎의 구별을 예상하여 그 방향을 하나로 하여, 또 유럽의 각국에 있어서도 역시 하나의 전체적인 대사건이므로, 전국의 시민이 지향하는 바를 같이하여, 전국의 이해(利害)로써 관여하는 데 이르렀다. 그리하여 십자군이라는 사태는 유럽의 시민으로 하여금 유럽이 있음을 알게 하고, 각국의 시민으로 하여금 각 나라가 있음을 알도록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군대는 1096년부터 시작하여, 뒤에 중단되었다가 뒤에 일어나, 전후의 정벌이 여덟 차례이어서, 그 전부가 끝난 것은 1270년의 일이다.
십자군이라는 사건은 본래 종교의 열정에서 일어난 일이라도, 200년의 긴 세월을 거쳐 그 업적이 나타나지 않았다. 사람의 마음에 있어서 이것을 혐오하지 않을 수 없다. 각 나라의 군주 자신에 있어서도, 종교적 권력을 다투는 것은 정치적 권력을 다투는 중대함과 같지 않다. 아시아에 가서 토지를 강탈하는 것은, 유럽에 있어 국경을 여는 편리함과 같지 않음을 알고, 또 군사적인 일에 따르겠다고 하는 자가 없다. 시민도 역시 점차 그 소견을 크게 하여, 자국에서 공업을 권장하는 일을 계획하여 할 것임을 깨닫고 원정을 좋아하지 않고, 정벌의 열정도 모호한 사이에 흩어져 사건의 끝에 파하고, 그 결과는 웃을 수 있는 것 같아도, 당시 유럽의 촌사람이 동방 문명의 상황을 목격하여 그것을 자국으로 옮겨, 그로써 스스로 사물의 진보를 돕고, 또 한편으로는 동양과 서양이 서로 대조하여 안팎의 차이를 알고, 그로써 스스로 국가의 체제를 정한 것은, 이 십자군의 결과라고 칭할 수 있다. (십자군의 업적을 나타내는 것은 크다)
봉건시대에 있어서는 각국의 군주는 다만 실권이 없는 지위를 지닐 뿐이라 할지라도, 본디 평온한 마음에 도달할 수 없다. 또 한편에서는 국내의 시민도 점차 식견을 넓히고, 오래 귀족의 굴레에 묶인 것을 싫어한다. 이것 때문인가 또 세상에 일종의 변혁을 발생시켜 귀족을 제압하는 단초를 열었다. 그 한 가지 사례를 들어 말하면, 1400년대 말에 프랑스 왕 「루이」 11세가 귀족을 타도하고 왕실의 권력을 되찾은 것과 같은 것이다. 후세에서 이 군주의 업적을 논하면, 그 사기와 교활, 천박할 수 있는 것 같아도, 역시 크게 그렇지 않은 바가 있다. 생각건대 시대의 추세의 변화, 이것을 살피지 않을 수 없다. 옛날은 세간을 다스리는 데 다만 무력만 있지만,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이것을 대신하는 것에 지혜의 힘으로써 하고, 완력을 대신하는 것에 교활함으로써 하고, 폭력에 대신하는 것에 기만으로써 하여, 혹은 타이르고 혹은 유인하여, 교묘하게 책략을 운용하는 취지를 보면, 설령 그 인물이 생각하는 바가 비열하여도, 그 기대하는 바는 점점 원대하여, 무(武)을 경시하고 문(文)을 중시하는 기풍이 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시대에 있어서 왕실에 권력을 집중한 일은, 프랑스뿐만 아니라 영국, 독일, 스페인의 여러 나라에 있어서도 역시 모두 그렇다. 그 나라의 왕이 이것에 힘쓴다는 것은 본래 논할 필요가 없다. 국민도 역시 왕실의 권력에 의지하여 자신의 원수인 귀족을 멸하려 하여, 위아래가 투합하여 그 중간을 타도하겠다는 형세가 되고, 전국의 정치적 시행령이 점차 한 길로 돌아와 점점 정부의 체제를 이루는 데 이르렀다. 또 이 시대에서는 무기를 사용하는 법이 점점 세상에 퍼져서, 활과 말을 사용하는 길은 차츰 폐기되어, 천하에 필부의 용기를 두려워하는 자가 없다. 또 동시에 문자를 출판하는 기술을 발명하여, 흡사 인간세계에 새롭게 뜻을 전달하는 길을 연 것과 같고, 사람의 지혜가 갑자기 피어나서 사물의 경중을 달리하여, 지혜의 힘, 지위를 차지하고, 완력, 길을 피하여, 봉건적 무인(武人)은 날마다 권위를 잃어 그 의지하는 곳을 잃어버리고, 상하의 중간에 있어서 고립된 것과 같다. 일반적으로 이 시대의 형세를 평가하면, 국가의 권력이 점차 중심적인 하나의 정부에 집중하려는 형세로 향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국가의 세력이 합쳐서 하나가 됨)
교회는 이미 오랫동안 특권을 자행하여 꺼리는 바가 없고, 그 상태는 흡사 옛날 악한 정부가 여전히 존재하여 무너지지 않은 것과 같고, 내부의 형편은 무너지고 파괴되어 끝났더라도, 오로지 옛 문물을 고수하여 융통성을 알지 못하고, 회고하여 세상을 보면 사람의 지혜는 날마다 진보하여 또 옛날의 소홀함과 가벼운 믿음뿐 아니라, 글자를 아는 것은 오직 성직자의 농단에 속하지 않고, 세속인이라 할지라도 역시 글을 읽는 자가 있다. 이미 글을 읽는 이치를 구하는 법을 알면, 사물에 관하여 의문이 없을 수 없다. 그런데 이 의(疑: 의문)라는 한 글자는 바로 사원이 금지하는 말이어서, 그 추세는 양쪽 모두 서로 허용할 수 없다. 이 때문인가 세상에 종교개혁이라는 큰 사건을 일으켰다. 1520년, 유명한 종교개혁의 우두머리 「루터」 씨, 처음에는 로마 교황에게 저항하여 새로운 주장을 외쳐, 천하의 인심을 움직여 그 세력 거의 당할 수 없다. 그렇다할지라도 로마도 역시 병든 사자와 같고, 생명력은 쇠약하다할지라도 사자는 곧 사자이다. 구교가 사자와 같고, 신교는 호랑이와 같고, 그 승패 쉽게 결정할 수 없다. 유럽의 각국 이것 때문에 사람을 죽인 일이 거의 그 수를 알 수 없다. 마침내 「프로테스탄트」라는 하나의 종파를 열고, 신교와 구교 모두 그 지위를 잃지 않아서 「루터」의 노력도 그 업적이 헛되지 않았다고 하는 것도, 살인의 과오를 헤아리면 이 신교의 가치가 낮다고 할 수 없다. 그런데 그 낮고 낮지 않고는 잠시 제쳐놓고, 결국 이 종교적 교설의 관점을 찾으면, 쌍방 모두 종교의 옳고 그름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어서, 다만 사람 마음의 자유를 허락하는 것과 허락하지 않는 것을 다투는 것이다. 예수교를 시비하는 것은 아니고, 로마의 정치적 권한을 다투는 취지이다. 그러므로 이 논쟁은 사람들의 자유로운 기풍을 밖으로 나타낸 것이어서, 문명 진보의 징후라고 할 수 있다. (종교개혁은 문명의 징후)
1400년대 말부터, 유럽 각국에 있어서 그 국력이 점차 하나의 정부에 모여, 그 초기에 있어서는 국민 모두 왕실을 흠모할 뿐이어서, 스스로 정치에 참여하는 권리가 있음을 알지 못한다. 국왕도 역시 귀족을 타도하고자 한 것은 일반 백성의 힘에 의지하지 않을 수 없다. 한 때의 편의를 위하여 흡사 국왕과 백성이 도당을 결성하여 서로 이익이 되는 바를 이용하고, 스스로 백성의 지위를 높이 끌어올려, 혹은 정부로부터 허락하였기 때문에 더욱 국민에게 권력을 부여한 일도 있다. 이 과정에 따라, 1500, 600년 즈음에 이르러서는, 봉건적 귀족도 점차 흔적을 끊고, 종교의 교설에 대한 논쟁도 아직 평화로운 치세가 아니라고 할지라도 점차 그 방향을 정하여, 나라의 형세는 다만 국민과 정부 둘에 귀속된 것과 같다. 그렇다할지라도 권력을 독점하고자 하는 것은 권력을 가진 자의 일반적인 경향이어서, 각국의 군주도 이 습관을 벗어날 수 없다. 이것 때문인가 국민과 왕실 사이에 싸움을 단초를 열어, 이 사건이 선구를 이룩한 것은 곧 영국이다. 이 시대에 있어서는 왕실의 권위가 크지 않은 것은 아니라할지라도, 국민도 역시 상업과 공업에 힘써 가산을 축적하고, 혹은 귀족의 토지를 매입하여 지주가 된 사람도 적지 않다. 이미 가산과 토지를 보유하여 직업에 힘써, 내외의 상업을 독점하여 국가 재정의 주인이 되면, 또 앉아서 왕실의 전제를 방관할 수 없다. 과거에는 로마에 저항하여 종교개혁이 일어났다. 오늘날은 왕실에 저항하여 정치개혁이 일어나려는 추세에 이르러, 그 상황이 종교와 세속의 차이가 있어도, 자주와 자유의 기풍이 밖으로 흘러서 문명의 징후인 것은 동일하다. 생각건대 오랜 옛날에 실시된 「프리시티: 자유도시」의 요소도 여기에 이르러 점차 발생한 것이리라. 1625년 「찰스」 1세가 즉위한 후는, 민권설(民權說)에 겸해 또 종교적 싸움도 시끄럽고, 혹은 의회를 열고 혹은 의회를 폐쇄하여, 여론이 봉기, 마침내 1649년에 이르러 국왕의 지위를 폐지하고, 한 때 공화정치체제가 이루어졌어도 영속할 수 없고, 이후 여러 가지 국가적 혼란을 거쳐, 1688년 「윌리엄」 3세가 왕위에 오르고부터, 비로소 크게 정부의 방향을 정해, 자유와 관용의 취지에 따라 임금과 국민이 함께 다스리는 정치체제를 정해, 그로써 오늘날에 전했다.
프랑스에 있어서는 1600년 초, 「루이」 13세 때에, 재상 「리슐리에」의 힘으로써 더욱 왕실의 권위를 빛내고, 1643년 「루이」 14세가 왕위를 계승한 때는, 연세가 5세이어서 아직 국사를 알지 못하고, 게다가 내외 많은 일이 있는 때였어도 국력을 떨어뜨리는 데 이르지 않고, 왕이 나이를 먹음에 이르러 천품이 뛰어나고 총명하고, 충분히 선조의 유업을 이어 국내를 위력으로 복종시킬 뿐 아니라, 누차 외국과 맞서 싸워 이기지 않은 적이 없다. 재위 72년간, 왕의 위세가 혁혁함의 극에 달하여, 프랑스에서 왕실이 번성한 것은 특히 이 시대로써 최고라고 칭한다. 그러나 그 말년에 이르러서는, 군대의 위세가 점점 떨치지 못하고, 정치의 기강이 점점 이완되어, 은연중에 왕실 몰락의 단초를 보는 것 같다. 생각건대「루이」14세가 늙은 것은, 다만 그 사람이 늙은 것만이 아니고, 유럽 전체에 흡사 왕권이 노쇠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루이」 15세는, 더욱 정부의 추악함을 극대화하여 거의 무정부와 무법의 극단에 빠져, 이것을 옛날의 상황과 비교하면, 프랑스는 흡사 전후 두 나라가 있는 것 같다. 그렇다 할지라도, 또 한편에서 나라의 문명이 어떠한지를 찾으면, 정치 파멸의 이때를 맞아, 문물이 번성한 것이 이전시대에 비교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1600년 사이에도 학자들의 논의에서 자유의 사상이 없는 것은 아니라도, 그 소견이 혹은 협소함을 면하지 못한 것, 700년대에 이르러서는 다시 그 면목을 바꾸어, 종교적 교설의 가르침이라든지, 정치학이라든지, 논리학이든지, 자연과학이든지, 그 연구하는 바에 제한이 없고, 그것을 연구하고 그것을 의심하여, 그것을 규명하고 그것을 시험하여, 생각이 활연하여 그 지향하는 바를 방해하는 것이 없는 것 같다. 개괄적으로 이 시대의 사정을 논하면, 왕실의 정치는 흐르지 않고 정체한 사이에 부패를 낳고, 국민이 지닌 지혜의 힘은 진보하고 쾌활하기 때문에 생기를 더하여, 왕실과 국민 사이에 반드시 격동적이지 않다고 할 수 없는 추세라고 할 수 있다. 곧 1700년대 말에 프랑스 대혁명은, 이 격동적인 사실에 나타난 것이다. 단지 그 사건이 터진 것이야, 영국에서는 1600년대 중간에 있어서고, 프랑스에서는 1700년대 말에 있어서여서, 전후 100여년의 차이가 있어도, 사건의 원인과 그 결과가 서로 대응한다는 뜻은, 바로 동일한 전철을 밟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상은 서양문명의 대강이다. 그 상세한 것은 세상에 문명사의 번역서가 있고, 참고하여 볼 수 있다. 학자는 충분히 그 책 전체에 눈을 두어, 반복하여 숙독하여 전후를 참고하는 일이 있으면, 반드시 크게 소득이 있을 것이다.
第八章 西洋文明の由来
今の西洋の文明を記して其由来を詮索するは此小冊子の能くする所に非ず。依て爰には仏蘭西の学士「ギゾ-」氏所著の文明史及び他の諸書を引て、其百分一の大意を記すこと左の如し。
西洋の文明の他に異なる所は、人間の交際に於て其説一様ならず、諸説互に並立して互に和することなきの一事に在り。譬へば政治の権を主張するの説あり、宗教の権を専にするの論あり。或は立君と云ひ或は神政府と云ひ、或は貴族執権或は衆庶為政とて、各其赴く所に赴き各其主張する所を主張し、互に争ふと雖ども互によく之を制するを得ず。一も勝つ者なく一も敗する者なし。勝敗久しく決せずして互に相対すれば、仮令ひ不平なりと雖ども共に同時に存在せざるを得ず。既に同時に存在するを得れば、仮令ひ敵対する者と雖ども、互に其情実を知て互に其為す所を許さゞるを得ず。我に全勝の勢を得ずして他の所為を許すの場合に至れば、各自家の説を張て文明の一局を働き、遂には合して一と為る可し。是即ち自主自由の生ずる由縁なり。
今の西洋の文明は羅馬滅亡の時を初とす。紀元三百年代の頃より羅馬帝国の権勢漸く衰微に赴き、四百年代に至て最も甚しく、野蛮の種族八方より侵入して又帝国の全権を保つ可らず。此種族の内にて最も有力なる者を日耳曼(ぜるまん)の党と為す。「フランク」の種族も即ち此党なり。此野蛮の諸族、帝国を蹂躙して羅馬数百年の旧物を一掃し、人間の交際に行はるゝ者は唯腕力のみ。無数の生蕃、群を為して侵掠強奪至らざる所なし。随て国を建る者あれば随て併合せらるゝ者あり。七百年代の末に「フランク」の酋長「チャ-レマン」なる者、今の仏蘭西、日耳曼、伊多里の地方を押領して一大帝国の基を立て、稍や欧羅巴の全州を一統せんとするの勢を成したれども、帝の死後は国又分裂して帰する所なし。此時に当ては、仏蘭西と云ひ日耳曼と云ひ、其国の名あれども、未だ国の体を成さず。人々各一個の腕力を逞ふして一個の情欲を恣にするのみ。後世此時代を目して野蛮の世又は暗黒の世と称す。即ち羅馬の末より紀元九百年代に至るまで凡そ七百年の間なり。
此野蛮暗黒の時代に在て耶蘇の寺院は自から其体を全ふして存するを得たり。羅馬廃滅の後は寺院も共に滅す可きに似たれども決して然らず。寺院は野蛮の内に雑居して啻に存在するのみならず、却て此野蛮の民を化して己が宗教の内に籠絡せんことを勉強せり。其胆略も亦大なりと云ふ可し。蓋し無智の野蛮を導くには高尚の理を以てす可らず。乃ち盛に儀式を設け外形の虚飾を以て人の耳目を眩惑し、曖昧の際に漸く其信心を発起せしむるに至れり。後世より之を論ずれば妄誕を以て人民を蠱惑するの謗を免かれ難しと雖ども、此無政無法の世に苟も天理人道の貴きを知る者は唯耶蘇の宗教あるのみ。若し此時代に此教なからしめなば、欧羅巴の全州は一場の禽獣世界なる可し。されば耶蘇教の功徳も此時代に於て小なりと云ふ可らず。其権力を得るも亦偶然に非ず。概して云へば肉体を制するの事は世俗の腕力に属し、精神を制するの事は寺院の権に帰し、俗権と教権と相対立する者の如し。加之寺院の僧侶が俗事に関係して市在民間の公務を司るは羅馬の時代より行はるゝ習慣なれば、此時に至るまでも其権を失はず。後世の議院に僧侶の出席するも、其因縁は遠く上世に在て存するものなり。(寺院権あり)
初め羅馬の国を建るや幾多の市邑合衆したる者なり。羅馬の管轄、処として市邑ならざるはなし。此衆市邑の内には各自個の成法ありて、自から一市一邑の処置を施して羅馬帝の命に服し、集めて以て一帝国を成したりしが、帝国廃滅の後も市民会議の風は依然として之を存し、以て後世文明の元素と為れり。(民庶為政の元素)
羅馬の帝国滅亡したりと雖ども、在昔数百年の間この国を呼て帝国と称し、其君主を尊て帝と名け、其名称は人民の肺肝に銘して忘る可らず。既に皇帝陛下の名を忘れざれば専制独裁の考も此名と共に存せざるを得ず。後世立君の説も其源は蓋し爰に在るなり。(立君の元素)
此時代に在て天下に横行する野蛮の種族なる者は、古書に載する所を見て明に其気風性質を詳にし難しと雖ども、当時の事情を推察して之を按ずるに、豪気慓悍にして人情を知らず、其無識暗愚なること殆ど禽獣に近き者の如し。然りと雖ども今一歩を進めて、其内情に就き細に砕て之を吟味すれば、此暗愚慓悍の内に自から豪邁慷慨の気を存して不覊独立の風あり。蓋し此気風は人類の本心より来りしものにて、即ち自から認めて独一個の男子と思ひ、自から愉快を覚るの心なり、大丈夫の志なり、心志の発生留めんとして留む可らざるの勇気なり。在昔羅馬の時代にも自由の説なきに非ず、耶蘇教の党にも此説を主張する者なきに非ざれども、其自由自主と唱るものは一種一族の自由にて、一身の自由を唱る者あるを聞かず。一個の不覊独立を主張して一個の志を逞ふせんとするの気風は、日耳曼の生蕃に於て始て其元素あるを見たり。後世欧羅巴の文明に於て、一種無二の金玉として今日に至るまでも貴重する所の自由独立の気風は、之を日耳曼の賜と云はざるを得ず。(自由独立の気風は日耳曼の野蛮に胚胎せり
野蛮暗黒の時代漸く終て周流横行の人民も其居を定め、是に於てか封建割拠の勢に移りたり。此勢は九百年代に始り千五、六百年の時に至て廃滅したるものなり。此時代を「フヒユ-ダル・システム」の世と称す。封建の時代には、仏蘭西と云ひ西班牙(すべいん)と云ひ、各其国の名を存して各国の君主なきに非ざれども、君主は唯虚位を擁するのみ。国内の武人諸方に割拠して一の部落を成し、山に拠て城を築き、城の下に部下を集め、下民を奴視して自から貴族と称し、現に独立の体裁を備へて憚る所なく、武力を以て互に攻伐するのみ。暗黒の時代に在ては、世の自由なるもの一身一己の上に行はれたりと雖ども、封建の世に至ては大に其趣を異にし、自由の権は土地人民の主たる貴族一人の身に属し、之を制するに一般の国法なく、之を間然するに人民の議論もなく、一城の内に在ては至尊の君と云はざるを得ず、唯其専制を妨るものは敵国外患に非ざれば自力の不足のみ。欧羅巴の各国大概この風を成して、国中の人皆貴族あるを知て国王あるを知らず。彼の仏蘭西、西班牙の如きも、未だ仏国、西国と称す可き国体を成さゞるなり。(封建割拠)
右の如く封建の貴族独り権を専らにするに似たれども、決して此独権を以て欧羅巴全洲の形勢を支配するに非ず。宗教は既に野蛮の人心を籠絡して其信仰を取り、紀元千百年より二百年代に至ては最も強盛を極めり。蓋し其権を得たる由縁を尋れば亦決して偶然に非ず。抑も人類生々の有様を見るに、世体の沿革に従て或は一時の栄光を燿かす可し、力あれば以て百万の敵を殲(ほろぼ)す可し、才あれば以て天下の富を保つ可し、人間万事才力に由て意の如くなる可きに似たりと雖ども、独り死生幽冥の理に至ては一の解す可らざるものあり。此幽冥の理に逢ふときは、「チャ-レマン」の英武と雖ども、秦皇の猛威と雖ども、秋毫の力を用るに由なく、悽然として胆を落し、富貴浮雲、人生朝露の歎を為さゞるを得ず。人心の最も弱き部分は正に此処に在るものにて、防戦を以て云へば備を設けざる要害の如く、人身にて云へば穎敏なる、きうしよの如くにして、一度び之を犯さるれば忽ち避易し、我微弱を示さゞる者なし。宗教の本分は此幽冥の理を説き造化の微妙を明にするものと称して、敢て人の疑惑に答ふるものなれば、苟も生を有する人類に於て誰か之に心を奪はれざる者あらんや。加之当時の人文未だ開けず、粗忽軽信の世の中なれば、虚誕妄説と雖ども嘗て之を怪む者なく、天下靡然(びぜん)として宗旨信仰の風を成し、一心一向に教の旨を信ぜしむるのみにて更に私の議論を許さず、其専制抑圧の趣は王侯の暴政を以て下民を窘るに異ならず。当時の事情を概して評すれば、人民は恰も其身を両断して精神と肉体との二部に分ち、肉体の運動は王侯俗権の制御を受け、精神の働は羅馬宗教の命令に従ふ者の如し。俗権は身体有形の世界を支配するものなり。宗教は精神無形の世界を支配するものなり。
宗教は既に精神の世界を支配して人心を奪ひ、王侯の俗権に対立すと雖ども、尚これに満足せずして云く、精神と肉体と孰か貴重なるや、肉体は末なり又外なり、精神は本なり又内なり、我は既に其本を制して内を支配せり、奈何ぞ其外と末とを捨るの理あらん、必ずしも之を我範囲の内に籠絡せざる可らずとて、漸く王侯の地位を犯し、或は其国を奪ひ或は其位を剥ぎ、羅馬の法皇は恰も天上地下の独尊なるが如し。日耳曼の皇帝第四「ヘヌリ」が法皇「グレゴリ」の逆鱗に逢ひ、厳冬風雪の中に徒跣(とせん)して羅馬の城門に立つこと三日三夜、泣て法皇に哀を乞ひしと云ふも此時代の事なり。(宗教の権力大に盛なり)
野蛮の横行漸く鎮定して割拠の勢を成し、既に城を築き家を建てゝ其居に安んずるに至れば、唯飢寒を免かるゝを以て之に満足す可らず、漸く人に風韻を生じて、衣は軽暖を欲し食は美味を好み、百般の需要一時に起て又旧時の粗野を甘ずる者なし。既に其需あれば随て又これを供するものなかる可らず。是に於てか始て少しく商工の路を開き、諸処に市邑の体を成して、或は其市民の内に富を致す者もあり。即ち羅馬の後、市邑の再興したるものなり。蓋し此市民の相集て群を成すや、其初に於ては決して有力なるものに非ず。野蛮の武人昔年の有様を回顧して乱暴掠奪の愉快を忘るゝこと能はずと雖ども、時勢既に定れば遠く出るに由なく、其近傍に在て掠奪を恣にす可き相手は唯一種の市民あるのみ。市民の目を以て封建の貴族武人を見れば、物を売るときは客の如く、物を奪はるゝときは強盗の如くなるが故に、商売を以て之に交ると雖ども、兼て又其乱暴を防ぐの備を為さゞる可らず。乃ち市邑の周囲に城郭を築き、城中の住民は互に相助て外敵を防ぎ、以て利害を共にするの趣向にて、大会のときには鐘を鳴らして住民を集め、互に異心なきを誓ふて信を表し、此会同のときに於て衆庶の内より人物数名を撰び、城中の頭取と為して攻防の政を司らしむるの風なり。此頭取なる者、既に撰挙に当て権を執るときは、其専制、意の如くならざるはなし。殆ど立君特裁の体なれども、唯市民の権を以て更に他人を撰挙して之に代らしむるの定限あり。
斯の如く市民の群を成して独立するものを「フリイ・シチ」と名け、或は帝王の命を拒み或は貴族の兵と戦ひ、争乱殆ど虚日あることなし。《「フリイ・シチ」は自由なる市邑の義にて其人民は即ち独立の市民なり》紀元一千年の頃より欧羅巴の諸国に自由の市都を立るもの多く、其有名なるものは伊太里の「ミラン」「ロンバルヂ」、日耳曼にては「ハンセチック・リ-ギュ(ハンザ同盟)」とて、千二百年代の初より「リュベッキ」及び「ハンボルフ」等の市民相集て公会を結び、其勢力漸く盛にして一時は八十五邑の連合を為して王侯貴族も之を制すること能はず、更に条約を結て其自立を認め、各市邑に城郭を築き兵備を置き法律を設け政令を行ふことを許して、恰も独立国の体裁を成すに至れり。(民政の元素)
以上所記の如く、紀元三、四百年の頃より、寺院なり、立君なり、貴族なり、民庶なり、何れも皆其体を成して各多少の権力を有し、恰も人間の交際に必用なる諸件は具はりたれども、未だ之を合して一と為し、一国を造り一政府を建るの時節に至らずして、人民の争ふ所、各局処に止まり、未だ全体なるものを知らざるなり。紀元千零九十六年十字軍の事あり。此軍は欧羅巴の人民、宗教のために力を合して小亜細亜の地を征伐し、全欧羅巴洲を味方と為して亜細亜に敵したることにて、人民の心に始て欧亜内外の区別を想像して其方向を一にし、且欧洲各国に於ても亦一国全体の大事件なれば、全国人民の向ふ所を同ふし、全国の利害を以て心に関するに至れり。故に十字軍の一挙は欧羅巴の人民をして欧羅巴あるを知らしめ、各国の人民をして各国あるを知らしめたるものと云ふ可し。此軍は千九十六年より始り、随て止み随て起り、前後の征伐八度にして、其全く終たるは千二百七十年のことなり。
十字軍の事は元と宗教の熱心より起たることなれども、二百年の久きを経て其功を奏せず。人の心に於て之を厭はざるを得ず。各国君主の身に於ても、宗教の権を争ふは政治の権を争ふの重大なるに若かず。亜細亜に行て土地を押領するは、欧羅巴に居て国境を開くの便利に若かざるを知り、又軍事に従はんとする者なし。人民も亦漸く其所見を大にし、自国に勧工の企つ可きものあるを悟りて遠征を好まず、征伐の熱心も曖昧の間に消散して事終に罷み、其成行は笑ふ可きに似たれども、当時欧洲の野人が東方文明の有様を目撃して之を自国に移し、以て自から事物の進歩を助け、又一方には東西相対して内外の別を知り、以て自から国体を定めたるは、此十字軍の結果と称す可し。(十字軍功を奏すること大なり)
封建の時代に在ては各国の君主は唯虚位を擁するのみと雖ども、固より平心なるを得べからず。又一方には国内の人民も次第に知見を開て、永く貴族の覊絆(きはん)に罹るを慊とせず。是に於てか又世上に一種の変動を生じて貴族を圧制するの端を開きたり。其一例を挙て云へば、千四百年代の末に仏蘭西王第十一世「ロイス」が貴族を倒して王室の権を復したるが如き是なり。後世より此君の事業を論ずれば、其欺詐狡猾、賎しむ可きに似たれども、亦大に然らざるものあり。蓋し時勢の変革、これを察せざる可らず。昔日は世間を制するに唯武力のみありしもの、今日に至ては之に代るに智力を以てし、腕力に代るに狡猾を以てし、暴威に代るに欺計を以てし、或は諭し或は誘ひ、巧に策略を運らしたる趣を見れば、仮令ひ此人物の心事は鄙劣なるも、其期する所は稍や遠大にして、武を軽んじ文を重んずるの風ありと云はざるを得ず。此時代に在て王室に権を集るの事は、仏蘭西のみならず英国、日耳曼、西班牙の諸国に於ても亦皆然り。其国君の之を勉るは固より論を俟たず。人民も亦王室の権に藉て其讐敵なる貴族を滅さんとし、上下相投じて其中を倒すの風と為り、全国の政令漸く一途に帰して稍や政府の体裁を成すに至れり。又此時代には火器の用法漸く世に弘まり、弓馬の道次第に廃棄して、天下に匹夫の勇を恐るゝ者なし。又同時に文字を版にするの術を発明して、恰も人間世界に新に達意の街道を開たるが如く、人智頓に発生して事物の軽重を異にし、智力、地位を占て、腕力、道を避け、封建の武人は日に権威を落して其依る処を失ひ、上下の中間に在て孤立するものゝ如し。概して此時の形勢を評すれば、国の権力漸く中心の一政府に集まらんとするの勢に赴きたるものと云ふ可し。(国勢合一)
寺院は既に久しく特権を恣にして憚る所なく、其形状恰も旧悪政府の尚存して倒れざるものゝ如く、内部の有様は敗壊し了したれども、只管旧物を墨守して変通を知らず、顧て世上を見れば人智日に進て又昔日の粗忽軽信のみに非ず、字を知るのことは独り僧侶の壟断に属せず、俗人と雖ども亦書を読む者あり。既に書を読み理を求るの法を知れば、事物に就て疑なきを得ず。然るに此疑の一字は正に寺院の禁句にて、其勢両ながら相容る可らず。是に於てか世に宗教変革の大事件を生じたり。千五百二十年、有名なる改宗の首唱「ル-ザ」氏、始て羅馬の法皇に叛して新説を唱へ、天下の人心を動かして其勢殆ど当る可らず。然りと雖ども羅馬も亦病める獅子の如く、生力は衰弱すと雖ども獅子は則ち獅子なり。旧教は獅子の如く、新教は虎の如く、其勝敗容易に決す可らず。欧洲各国これがために人を殺したること殆んど其数を知らず。遂に「プロテスタント」の一宗派を開き、新旧共に其地位を失はずして「ル-ザ」の尽力も其功空しからずと雖ども、殺人の禍を計れば此新教の価は廉なりと云ふ可らず。されども其廉不廉は姑く擱き、結局この宗旨論の眼目を尋れば、双方共に教の正邪を主張するには非ずして、唯人心の自由を許すと許さゞるとを争ふものなり。耶蘇の宗教を是非するには非ずして、羅馬の政権を争ふの趣意なり。故に此争論は人民自由の気風を外に表したるものにて、文明進歩の徴候と云ふ可し。(宗教の改革文明の徴候)
千四百年代の末より、欧洲各国に於て其国力漸く一政府に集り、其初に在ては人民皆王室を慕ふのみにて、自から政治に関するの権あるを知らず。国王も亦貴族を倒さんとするには衆庶の力に依頼せざるを得ず。一時の便宜のために恰も国王と人民と党与を結て互に其利する所を利し、自から人民の地位を高上に引揚げ、或は政府より許して故さらに人民へ権力を附与したることもあり。此成行に沿ひ、千五、六百年の際に至ては、封建の貴族も次第に跡を絶ち、宗旨の争論も未だ平治せずと雖ども稍や其方向を定め、国の形勢は唯人民と政府との二に帰したるが如し。然りと雖ども権を専にせんとするは有権者の通癖にして、各国の君主も此癖を脱すること能はず。是に於てか人民と王室との間に争端を開き、此事の魁を為したるものは即ち英吉利なり。此時代に在ては王室の威権盛大ならざるに非ずと雖ども、人民も亦商売工業を勉めて家産を積み、或は貴族の土地を買て地主たるものも少なからず。既に家財地面を有して業を勉め、内外の商売を専にして国用の主人たれば、又坐して王室の専制を傍観すること能はず。昔年は羅馬に敵して宗旨の改革あり。今日は王室に敵して政治の改革あらんとするの勢に至り、其事柄は教と俗との別あれども、自主自由の気風を外に洩して文明の徴候たるは同一なり。蓋し往古に行はれたる「フリ-・シチ」の元素も爰に至て漸く発生したるものならん。千六百二十五年第一世「チャ-レス」の位に即きし後は、民権の説に兼て又宗教の争も喧しく、或は議院を開き或は之を閉じ、物論蜂起、遂に千六百四十九年に至て国王の位を廃し、一時共和政の体をなしたれども永続すること能はず、爾後様々の国乱を経て、千六百八十八年第三世「ヰルレム」が王位に登りしより、始て大に政府の方向を改め、自由寛大の趣意に従て君民同治の政体を定め、以て今日に伝へり。
仏蘭西に於ては千六百年の初、第十三世「ロイス」の時に、宰相「リセリウ」の力を以て益王室の権威を燿かし、千六百四十三年第十四世「ロイス」が王位を継たるときは、年甫(はじめ)て五歳にして未だ国事を知らず、加之内外多事の時なれども国力を落すに至らず、王の年長ずるに及て天資英邁、よく祖先の遺業を承て国内を威服したるのみならず、屢外国と兵を交へて戦て勝たざるはなし。在位七十二年の間、王威赫奕の極に達し、仏蘭西にて王室の盛なるは特に此時代を以て最と称す。然れども其末年に及ては、兵威稍や振はず、政綱漸く弛み、隠然として王室零落の萌(きざし)を見るが如し。蓋し第十四世「ロイス」の老したるは、唯其人の老したるのみに非ず、欧洲一般に恰も王権の老衰したるものと云ふ可し。第十五世「ロイス」の世は、益政府の醜悪を極めて殆ど無政無法の極に陥り、之を昔年の有様に比すれば、仏蘭西は恰も前後二箇の国あるが如し。然りと雖ども、又一方より国の文明如何を尋れば、政治廃壊の此際に当て、文物の盛なること前代無比と称す可し。千六百年の間にも学者の議論に自由の思想なきに非ざれども、其所見或は狭隘なるを免かれざりしもの、七百年代に至ては更に其面目を改め、宗旨の教なり、政治の学なり、理論なり、窮理なり、其研究する所に際限あることなく、之を究め之を疑ひ、之を糺し之を試み、心思豁然として其向ふ所を妨るものなきが如し。概して此時の事情を論ずれば、王室の政治は不流停滞の際に腐敗を致し、人民の智力は進歩快活のために生気を増し、王室と人民との間に必ず激動なかる可らざるの勢と云ふ可し。即ち千七百年代の末に仏蘭西の大騒乱は、此激動の事実に見はれたるものなり。但し其事の破裂するや、英吉利にては千六百年代の央に於てし、仏蘭西にては千七百年の末に於てし、前後百余年の差あれども、事の源因と其結果と相互に照応するの趣は、正しく同一の轍を践むものと云ふ可し。
右は西洋文明の大略なり。其詳なるは世上に文明史の訳書あり、就て見る可し。学者よく其書の全体に眼を着し、反覆熟読して前後を参考することあらば、必ず大に所得ある可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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