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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장 일본문명의 유래
앞장에 언급한 바와 같이, 서양의 문명은, 그 인간의 교류에 여러 주장이 병립하여 점차 서로 근접하여, 마침내 합쳐서 하나가 되어, 그로써 그 사이에 자유를 존치시킨 것이다. 이것을 비유하면 금은동철 등과 같은 여러 원소를 용해하여 한 덩어리로 하여, 금도 아니고, 은도 아니고, 또 동과 철도 아니고, 일종의 혼합물을 만들어 스스로 그 균형을 이루어, 상호 서로 유지하여 전체를 보존하는 것과 같다. 되돌아보아 우리 일본의 형편을 살피면 이것과 크게 다르다. 일본의 문명도 인간의 교류에 있어서 본래 요소가 없을 수 없다. 군주든지 귀족이든지, 종교든지 국민이든지, 모두 옛날부터 우리나라에 존재하여 각각 한 종족이 되어, 각각 자신의 주장이 없는 것이 아니라도, 그 여러 주장이 병립할 수 없고, 서로 근접할 수 없고, 합쳐서 서로 하나가 될 수 없다. 이것을 비유하면 금은동철이라는 여러 품목이 있더라도, 그것을 용해하여 한 덩어리가 되는 일이 불가능한 것과 같다. 만약 혹은 합쳐서 하나가 되는 것과 같은 일이 있다할지라도, 기실 여러 품목의 비율을 평균하여 혼합한 것이 아니다. 반드시 한쪽이 무겁고 한쪽이 가벼워, 하나로써 다른 것을 없애고, 다른 것으로써 그 본색을 드러나게 할 수 없는 것이다. 더욱 금은의 화폐를 만드는 데 10분의 1의 구리를 섞는 것도, 구리는 그 본색을 드러낼 수 없고, 그 만들 수 있었던 것이 순수한 금은화폐인 것과 같다. 이것을 사물의 편중이라고 칭한다. 대체로 문명의 자유는 다른 자유를 희생하여 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여러 권리를 허락하고 여러 권익을 얻게 하고, 여러 의견을 수용하여 여러 힘을 마음껏 발휘하게 하여, 타인과 나의 균형 사이에 존재할 뿐. 그러므로 인간의 교류에 있어서, 혹은 정부, 혹은 국민, 혹은 학자, 혹은 관리, 그 지위가 어떠한지를 묻지 않고, 다만 권력을 지닌 자가 있으면, 설령 지혜의 힘에서도 완력에서도, 그 힘이라고 칭하는 것에 관해서는 반드시 제한이 없을 수 없다. 대체로 인류가 지닌 권력은 결코 순수할 수 없다. 반드시 그 중에 천성적인 악폐를 배태하여, 혹은 비겁하기 때문에 일을 그르치고, 혹은 과격하기 때문에 사물을 해치는 일, 천하 고금의 실례에 의하여 볼 수 있다. 이것을 편중의 재앙이라고 칭한다. 권력을 쥔 자는 항상 스스로 경계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나라의 문명을 서양의 문명에 비교하여, 그 의미가 다른 바는 특히 이 권력의 편중에 관해서 볼 수 있다.
일본에서 권력의 편중이라 함은, 일반적으로 인간교류의 한 가운데에 침투하여 도달하지 않은 곳이 없다. 본서의 제2장에서, 한 나라 국민의 기풍이라고 하는 것이 있다. 곧 이 권력의 편중도, 저 기풍의 한 가운데 한 가지 항목이다. 지금의 학자, 권력에 관한 일을 논하는 데는, 다만 정부와 국민만을 상대하여, 혹은 정부의 전제에 분노하고 혹은 국민의 발호를 나무라는 자 많다고 할지라도, 충분히 사실을 상세히 하여 세밀히 음미하면, 이 편중은 교류의 지대한 것부터 지극히 작은 것에 미치고, 대소를 묻지 않고 공적인 것과 사사로운 것에 구애되지 않고, 적어도 여기에 교류가 있으면 그 권력은 편중되지 않은 것이 없다. 그 의미를 묘사하여 말하면, 일본 한 가운데 1100개 저울을 걸어, 그 저울 크고 작든, 전부 모두 한 방향에 치우쳐 균형을 잃은 것 같고, 혹은 3각 4면의 결정체를 부수어, 1000으로 나누고 10000으로 나누어 마침내 가루로 되는 것도, 그 한 분자는 여전히 3각 4면 본색을 잃지 않고, 또 이 가루를 합쳐서 하나의 작은 조각으로 만들고 또 합쳐서 하나의 덩어리로 만들어도, 그 물체는 여전하여 3각 4면의 형태를 유지하는 것 같다. 권력편중을 일반적으로 개괄하여 사사건건 미세함과 치밀함의 극에 통달하는 형편은 이와 같다고 할지라도, 학자가 특별히 이것에 주의하지 않는 것은 어째서인가? 다만 정부와 국민 사이는 교류가 크고 공적인 것이어서 두드러지게 사람의 이목을 끌기 때문에, 그 논의도 이것을 목적하는 것이 많을 뿐. 이제 실제적으로 편중이 있는 곳을 설명하겠다. 여기에 남녀의 교제가 있으면 남녀 권력의 편중이 있고, 여기에 부모와 아들의 교류가 있으면 부모와 아들 권력의 편중이 있고, 형제의 교류에서도 이것이 있고, 어른과 아이의 교류에도 이것이 있고, 집안에서 나와 세간을 보아도 역시 그렇지 않은 것이 없다. 스승과 제자 주인과 종, 빈부귀천, 신참 고참, 본가와 먼 혈족, 어느 것도 모두 그 사이에 권력의 편중을 존재하게 했다. 더욱 한 걸음을 나아가 인간이 다소 종족을 이룬 바의 것에 관하여 보면, 봉건시대에 큰 번(藩)과 작은 번(藩)이 있고. 절에 본산(本山)과 말사(末寺)가 있고, 신사(神社)에 본사(本社)와 말사(末社)가 있어, 적어도 인간의 교류가 있으면 반드시 그 권력에 편중이 없음이 없다. 혹은 또 정부 가운데서도 관리의 지위와 계급에 따라 이 편중이 존재하는 것 매우 심하다. 정부의 관리가 평민을 대하여 위세를 떨치는 상황을 보면 이 권력이 있는 것 같아 보여도. 이 관리가 정부의 가운데 있어서 상급자를 대할 때는, 그 억압을 받는 일이 평민이 관리를 대하는 것보다도 훨씬 심한 것이 있다. 비유건대 지방의 하급관리 등이 촌장을 함께 불러 일을 말할 때는 그 오만이 혐오스러울 것 같아도, 이 하급관리가 장관을 대하는 모양을 보면 역시 불쌍히 여기는 미소를 참고 있다. 촌장이 하급관리를 만나 무리하게 질타를 당하는 모양은 불쌍하더라도 마을에 돌아와 소작농을 무리하게 질타하는 모습을 보면 역시 혐오스러울 것이다. 갑은 을에게 압제당하고 을은 병에게 제재를 받아, 강압과 억제의 순환, 끝이 있을 수 없다. 역시 기이한 광경이라고 할 수 있다. 본디 인간의 귀천과 빈부, 지혜와 어리석음과 강함과 약함의 부류는, 그 상황(컨디션: condition)에서 몇 단계도 제한이 있을 수 없다. 이 단계를 존치시키는 것도 교류에 방해가 될 수 없다할지라도, 그 상황이 다른 것에 따라 겸하여 또 그 권리(라이트: right)도 다른 것이 많다. 이것을 권력의 편중이라고 칭하는 것이다.
이제 세간의 사물을 피상적으로 보면 권력을 가진 자는 다만 정부만 같아도, 충분히 정부가 어떤 것인지를 음미하여 그런 이유를 구하면, 조금 논의가 세밀한 것에 도달할 수 있다. 원래 정부는 국민이 모여 일을 하는 곳이다. 이 장소에 있는 자는 군주라 칭하고 관리라고 칭할 뿐. 그리고 이 군주와 관리는 태어나면서 요로에 있는 군주와 관리가 아니다. 설령 봉건시대에 관직을 세습하는 풍습이 있어도, 실제적으로 일을 맡은 자란 많게는 우연히 선발된 인물이다. 이 인물, 일단 정부의 지위에 오른다 해서, 갑자기 평소의 마음씨를 고칠 이치가 없다. 그 혹은 정부에 있어 권력을 자행하는 일이 있음은, 곧 평소의 본색을 드러내는 것일 뿐. 그 증거에서는 봉건시대에서도 천민을 천거하여 정부의 요로에 고용한 일이 없지 아니할지라도, 그 인물의 소행을 보면 결코 기이한 것이 없다. 다만 이전의 행태에 따라 조금 일을 교묘하게 하는 것 밖에 없다. 그 교묘함은 곧 전횡의 교묘함이어서, 백성을 사랑하여 어리석게 하는 것이 아니면, 백성을 위협하여 위축되어 물러가도록 하는 것이다. 만약 이 인물로 하여금 민간에 있도록 하면, 반드시 민간에 있어서 그렇게 행동할 것이다. 촌에 있으면 촌에서 행동하고, 도시에 있으면 도시에서 행동하여, 도저히 우리 국민이 일반적으로 피할 수 없는 유행병이기에, 홀로 이 사람에 한하여 그것을 탈각하는 일이 있을 수 없다. 다만 정부에 소속되면 그 사업이 성대하여 능히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것으로써, 인구에 회자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정부는 유독 전횡의 근원이 아니고, 전횡하는 자들을 모이게 하는 중심이다. 전횡하는 자에게 자리를 빌려주어 평소의 본색을 드러내어 성대히 일을 시행하도록 하는 데 흡사 적당한 장소이다. 만약 그렇지 않아서 전횡의 근원이 특히 정부에 있다고 하면, 전국의 국민은 다만 관직에 있을 때만 이 유행병에 감염되어 전과 후는 과연 병이 없거나, 무례하다고 할 수 있다. 대체로 권력을 자행하는 것은 권력을 지닌 자의 공통적인 폐단이어서, 이미 정부에 있어 권력을 지니면 그 권력 때문에 스스로 현혹되어 더욱 이것을 가지고 노는 폐단도 있을 것이고, 혹은 또 정책을 시행하는 과정에서 전횡이 아니면 일을 수행할 수 없는 형국도 있을 것이라 할지라도, 일반적인 국민에게서 평소의 교육과 습관에서 전혀 없는 바의 것을, 다만 정부의 지위에 알맞다고 해서 마음에 두어 업무에 시행하는 이유는 결코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이상의 논의에 따르면, 권력을 자행하여 그 힘의 편중됨은 결코 정부뿐만 아니라, 이것을 전체 국민의 기풍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 기풍은 곧 서양 여러 나라와 우리 일본을 구별함에 두드러진 경계선이기에, 이제 여기에서 그 원인을 구하지 않을 수 없다할지라도, 그 일은 매우 어렵다. 서양인의 저서에 아시아 지역에 전횡이 횡행하는 원인은, 그 기후가 온난하고 토지가 비옥하기 때문에 인구가 과다하고, 지리는 산과 바다가 험악하고 광활한 것으로 인해 망상과 공포심이 심하다는 등에 있다고 하는 주장도 있는 것도, 이 주장을 받아들여 직접적으로 우리 일본의 상황에 적용하여, 그로써 미심쩍은 점을 단정할 것인지, 아직 알 수 없다. 가령 이것에 의해서 미심쩍음을 단정하여도, 그 원인은 모두 자연스러운 일이므로 사람의 힘으로써 이것을 어떻게도 할 수 없다. 그러므로 나는 다만 사건의 과정을 설명하고, 전횡이 이루지는 단계를 밝히고자 할 따름이다. 그 단계가 일단 밝혀지면 역시 이것에 대응하는 조치도 있을 것이다. 대체로 우리 일본이라는 나라도 개벽의 초기에 있어서는, 세계 중의 다른 여러 나라와 같이, 약간의 백성으로 한 무리를 이루어, 그 한 무리의 안에서 완력이 매우 강하고 지혜의 힘을 최대한 마음대로 쓸 수 있는 자가 있어 기배하거나, 혹은 다른 지방에서 와서 정복하여 그 우두머리가 된 일이리라. 역사에 의하면 신무천황(神武天皇)이 서쪽에서 군사를 일으킨 일이 있다. 한 무리의 백성을 지배함은 본래 한 사람의 힘으로 능히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므로, 그 우두머리에 딸려 사무를 보는 자가 없을 수 없다. 그 인물은, 혹은 우두머리의 친척, 혹은 친구 안에서 뽑아, 함께 힘을 모아, 스스로 정부의 체제를 이룬 것이리라. 일단 정부의 체제를 이루면. 이 정부에 속한 자는 백성을 다스리는 자이고, 백성은 그 다스림을 받는 자이다. 이것 때문인가 처음에 다스리는 자와 다스림을 받는 자의 구별이 생겨, 다스리는 자는 위이고 주인이고 또 내부이고, 다스림을 받는 자는 아래이고 객(客)이고 또 바깥이다. 상하와 주객과 내외의 구별, 명백하게 볼 수 있다. 생각건대 이 양자는 일본의 인간 교류에 있어서 매우 두드러진 경계선 이루어, 흡사 우리 문명의 두 가지 요소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먼 옛날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교류한 종족이 적지 않다고 할지라도, 결국 그 도달한 바는 이 두 가지 요소에 돌아가, 하나도 독립하여 자신의 본분을 지키는 자가 없다. (다스리는 자와 다스림을 받는 자가 서로 나뉘다)
사람을 다스림은 그 일이 본디 쉽지 않다. 그러므로 이 다스리는 자의 무리에 가입하는 자는 반드시 완력과 지혜의 힘을 겸비하고 또 다소간의 재산이 없을 수 없다. 일단 몸과 마음이 힘이 있고, 또 이것에 부유함을 겸비할 때는, 반드시 사람을 통제하는 권력을 얻는다. 그러므로 다스리는 사람은 반드시 권력을 지닌 자가 되지 않을 수 없다. 왕실은 이 권력자의 위에 서서, 그 힘을 모아서 국내를 다스리고, 전쟁을 해서 이기지 않음이 없고, 정벌하여 항복시키지 않음이 없다. 또 다스림을 당하는 백성도, 왕실의 유래가 유구한 이유로써 더욱 복종하고, 신공(神功)왕후 시대부터 누차 외국으로 출정한 일도 있고, 국내에 위력을 보이고 혜택을 베풀어 국내를 돌아보아 근심이 없었던 것 미루어 알 수 있다. 이후 문화가 점차 열려, 양잠과 조선술, 직조와 바느질 기계 및 농기구, 의학서와 유교서 및 불교서적, 기타 문명의 여러 사항들이, 혹은 조선으로부터 전해지고, 혹은 자국에서 발명하여, 인간의 생생한 모습은 점차 성대함에 이르렀다고 할지라도, 이 문명의 제반 상항을 시행하는 권력은 모두 정부의 한 손에 달려, 백성은 다만 그 내용에 따를 뿐. 게다가 전국의 토지, 백성의 신체까지도, 왕실의 사유와 다르지 않음이 없다. 이 상황을 보면 다스림을 받는 자는 다스리는 자의 노예와 다르지 않다. 후세에 이르기까지도 어(御)국가, 어전지(御田地), 어백성(御百姓) 등의 명칭이 있다. 이 어(御)라는 글자는 정부를 존경한 말이어서, 일본의 논밭도 백성의 신체도 모두 정부가 소유한 물건이라고 하는 의미이다. 닌토구(仁徳) 천황이 민간에서 밥 짓는 연기가 오르는 것을 보고 짐은 이미 부유하다고 했다는 것도, 분명히 백성을 사랑하는 본심에서 나와, 백성의 부유함은 오히려 내가 부유함 것과 같다는 의미이어서, 정말이지 마음을 비운 침착하고 인자한 군주라고 칭할 수 있을지라도, 천하를 한 가족으로 간주하여 이것을 사유화하는 기상을 살펴서 볼 수 있다. 이 추세에서 천하의 권력은 모두 왕실에 돌아가고, 그 힘, 항상 한편에 편중되어, 그로써 왕조시대의 말기에 다다랐다. 생각건대 권력의 편중은 앞에 언급한 것과 같이 지극히 큰 것에서부터 지극히 세세한 것에 이르러, 인간의 교류를 천만가지로 나누면 천만가지의 단계로 된 편중이 나타나고, 모아서 백으로 만들면 백가지 단계의 편중이 나타나, 이제 왕실과 백성의 두 가지 단계로 나누면, 편중도 역시 이 사이에 생겨나, 왕실의 한 편에 편중되는 것이다. (국력은 왕실에 편중된다)
켄페(源平: 겐지[源氏]와 헤이시[平氏]) 두 가문이 일어나는 데 이르러 천하의 권력은 무사가문에 돌아가고, 이것에 의하여 혹은 왕실과 균형을 이루어, 인간교류의 추세가 일변할 수 있을 것 같다하여도, 결코 그렇지 않다. 켄페(源平)든지, 왕실이든지, 모두 이 다스리는 자 가운데의 부분이어서, 국권이 무사가문에 돌아감은 다스리는 자 가운데서 이 부분에서 저 부분으로 힘을 옮겼을 뿐. 다스리는 자와 다스림을 받는 자의 관계는 여전하여 상하 주객의 추세를 갖추어, 조금도 옛날과 다른 것이 없다. 단지 다른 것이 없을 뿐만 아니라, 앞서서 고닌(光仁) 천황은 호키(宝亀)시대에 천하에 명령을 내려 병사와 농부로 나누어, 백성에게서 부유하고 무력이 있는 자를 뽑아 병역에 쓰고, 초췌한 자로 하여금 농업에 종사하도록 하였다고 한다. 이 명령의 취지에 따르면, 백성 중에 부유하고 강한 자는 무력으로써 약소한 자를 보호하고, 가난하고 약한 자는 농사에 힘써 무사에게 공급하는 것이라면, 가난하고 약한 것은 더욱 가난과 약함에 빠지고, 부강은 더욱 부유함과 강함으로 나아가, 다스리는 자와 다스림을 받는 자의 경계선이 더욱 확연하여, 권력의 편중은 더욱 심해지지 않을 수 없다. 여러 서적을 생각건대, 요리토모(頼朝)가 60여주의 총사령관이 되어, 나라마다 치안관을 두고, 장원(荘園)에는 책임자를 임명하여, 그로써 종전의 지방관과 장원관리관의 권한을 약화시킨 이후, 여러 나라의 무사들 가운데서 혈통도 있고 인품도 지닌 자는 치안관과 장원책임자의 직에 임명하고, 이하의 사람은 고케닌(御家人)이라 칭하여 지방관과 장원책임자의 지배를 받고, 모두 막부의 부하가 되었고, 혹은 백일교대(百日交代: 지방 관리들이 백일마다 교대로 수도에 와서 인질로 근무하는 것)로 가마쿠라(鎌倉)에 숙영하는 사례도 있다고 한다. 호조(北条)시대에도 대개 동일한 형편이어서, 나라 안 어디에도 무사가 없는 곳이 없다. 조큐(承久)의 난에 야스토키(泰時)가 18 기병으로 가마쿠라(鎌倉)를 세운 것은 5월 22일의 일인데, 같은 달 25일까지 사흘간에 관동지역의 병사를 모두 모아, 도합 19만 기병이 되었다 한다. 이것에 의하여 생각하면, 여러 나라의 무사인 자는 평소부터 출진하려는 준비에 바빠, 본디 농업에 힘쓸 여가가 있을 수 없고, 분명히 다른 백성의 힘에 의지하여 먹고 산 일을 명백히 알 수 있다. 병역과 농업의 경계선이 더욱 명백하게 정해져, 인구가 증가함에 따라 무사의 수도 점차 증가한 것이리라. 요리토모(頼朝)의 시대에는 대체로 관동의 섬기는 무사가문으로써 여러 나라를 수비하는 데 배치하여, 3, 5년의 교대였는데, 그 후 무기한으로 대대로 세습적으로 봉록을 받는 직책이 되고, 호조(北条)가 망하고 아시카가(足利) 시대에 이르러서는, 이 치안관이라는 자, 번갈아 서로 병탄하고, 혹은 흥하고 혹은 망하고, 혹은 토호에게 쫓기고. 혹은 신하에게 빼앗겨, 점차 봉건적 추세를 이루었던 것이다. 왕조시대 이래의 형편을 개괄적으로 말하면, 일본의 무사, 처음에는 국내의 처소에 분산하여 각자 권력을 휘둘러, 그로써 왕실의 명령에 복종한 것은, 가마쿠라(鎌倉) 시대에 이르기까지 점차 합쳐서 몇 개의 소집단을 이루어, 처음으로 다이묘(大名)과 쇼묘(小名)의 칭호가 생겼다. 아시카가(足利) 시대에 이르러서는 또 합쳐서 몸체가 큰 것을 이루었어도, 그 몸체와 다른 몸체를 합칠 수 없다. 즉 오닌(応仁) 이후 난세여서, 무사가 최고로 번성한 시대이다. 이와 같이, 무사의 세계에는 이합집산이 일어나고 진퇴영고(進退栄枯)가 있어도, 백성의 세계에서는 하등의 움직임이 있다는 것을 듣지 못한다. 다만 농업에 힘써 무사의 세계에 보낼 뿐이다. 그러므로 백성의 눈으로 보면, 왕실도 무사의 가문도 구별이 있을 수 없다. 무사의 세계에 치세와 난세와 흥망이 있는 것은, 백성을 위해서는 흡사 날씨와 기후의 변화가 있음과 다르지 않다. 다만 말없이 그 과정을 볼 따름이다.《무사의 가문이 흥해서 신정정치의 미혹을 일소한 소득은 제2장 35쪽에 (이와나미[岩波] 문고 구판 33항) 논했다》
아라이 하쿠세키(新井白石)의 주장에, 천하의 대세는 아홉 번 변하여 무사가문의 시대가 되고, 무사 가문의 세대 또한 다섯 번 변하여 도쿠가와(徳川)의 시대에 이르렀다고 하여, 그 외에 여러 연구가들의 주장도 대동소이하여도, 이 주장은 다만 일본에서 정권을 잡는 사람의 신진교대(新陳交代)한 모양을 보고 몇 번이라고 할 따름인 것이다. 모두 이때까지 일본에서 이루어진 역사는 오직 왕실의 계보를 탐구한 것이거나, 혹은 임금과 재상과 벼슬아치의 득실을 논하는 것이거나, 혹은 전쟁과 승패의 이야기를 기록하여 강역사(講釈師: 이야기꾼 혹은 야담가)의 전쟁이야기와 비슷한 것이거나, 대체로 이런 항목 밖에 없다. 드물게 정부와 관계가 없는 것이 있다면 불교도의 거짓말과 허망한 주장뿐, 역시 볼 필요가 없다. 일반적으로 말하면 일본의 역사는 없고 일본정부의 역사가 있을 뿐이다. 학자의 부주의여서 나라의 큰 결함이라고 할 수 있다. 아라이(新井) 선생의 독사여론(読史余論)이라는 것도 곧 이런 부류의 역사여서, 그 책 가운데 천하의 추세가 변한다고 되어있어도, 실은 천하의 대세가 변함이 아니고, 천하의 추세는 일찍이 이미 왕조시대에 정해져, 다스리는 사람과 다스림을 받는 사람 두 가지 요소로 구별하고, 군사와 농업으로 나누는 데 이르러 더욱 그 경계선을 분명히 해서,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한 번도 변한 적이 없다. 그러므로 왕조시대의 말기에 후지와라(藤原) 가문, 권력을 독점하여, 혹은 상황(上皇), 정치를 자문하는 일이 있어도, 다만 왕실 내부의 일이어서 본디 세상의 형편과 관계가 있을 수 없다. 다이라(平) 가문이 망하고 미나모토(源) 가문이 일어나서, 새로이 가마쿠라(鎌倉)에 정부를 열어도, 호조(北条)가 신하로 국가의 명령을 집행함도, 아시카가(足利)가 남조(南朝)에 대항하여 역적으로 불리는 것도, 오다(織田)와 도요토미(豊臣)와 도쿠가와(徳川)가 각각 일본을 통솔하여 지배했다 하는 것도, 지배하는 데 다만 유능하고 졸렬함이 있을 뿐. 천하의 형세는 여전하여 옛날과 다르지 않다. 그러므로 호조(北条)와 아시카가(足利)에서 즐거웠던 것은 도쿠가와(徳川)도 그것을 기뻐했고, 갑(甲)이 근심했던 것은 을(乙)도 그것을 근심하여, 그 기뻐함과 근심함에 대처하는 방법도 갑과 을에 있어서 조금도 다른 바가 없다. 비유건대 호조(北条)와 아시카가(足利)의 정부에서 오곡이 풍부하게 익어 백성이 유순함을 기뻐하는 심정은, 도쿠가와(徳川)의 정부도 그것에서 같다. 호조(北条)와 아시카가(足利)의 정부에서 두려워하는 바의 모반자의 종류는, 도쿠가와(徳川) 시대에서도 그 종류가 다르지 않다. 회고하여 저 유럽 여러 나라의 형편을 보면 크게 의미가 다른 바가 있다. 그 국민 사이에 종교적 교설에 관한 새로운 주장이 점점 유행하면 정부도 역시 그것에 따라 조치를 취하지 않을 수 없다. 과거에는 봉건적 귀족만을 두려워했지만, 세간의 상공업이 점차 번성하여 중산층에서 권력을 지닌 자가 있기에 이르면, 역시 이것을 기뻐하고 혹은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유럽의 각 국가에서는 그 국가의 추세가 변하는 데 따라서 정부도 역시 그 취지를 바꾸지 않을 수 없다고 할지라도, 오직 일본은 그렇지 않다. 종교적 교설도 학문도 상업도 공업도 모두 정부 안에서 농락당하는 것이어서, 그 변동을 근심할 필요가 없고, 또 두려워할 필요가 없고, 만약 정부의 뜻에 맞지 않는 것이 있으면 언제나 그것을 금지할 수 있다. 유일한 걱정은 같은 부류 중에서 일어나는 자가 있어 정부가 신진교대(新陳交代)하는 것을 두려워할 뿐.《같은 부류 중에서 일어나는 자라는 것은 다스리는 자 중에서 일어나는 자를 말한다》그러므로 건국 2500여 년간, 나라의 정부라는 것은 동일한 모양의 일을 반복하여, 그 모양이 흡사 한 권의 책을 반복해서 여러 번 읽은 것과 같고, 같은 제목의 연극을 몇 번이고 공연하는 것과 같다. 아라이(新井) 씨가 천하의 대세 아홉 번 변하고 또 다섯 번 변했다고 하는 것은, 곧 이 연극을 아홉 번 공연하고 또 다섯 번 공연했다는 것일 뿐. 혹은 서양인의 저서에, 아시아주의 여러 나라에서도 변혁과 소동이 일어남은 유럽과 다르지 않다고 할지라도, 그 변란 때문에 나라의 문명을 진척시키는 일이 없다고 하는 주장이 있다. 생각건대 이유가 없는 것이 아니다. (정부는 신구 교체하여도 국가의 추세는 변하는 일이 없다)
위와 같이 정부는 때때로 변혁을 번갈아 일으키는 일이 있어도, 국가의 형편은 곧 그렇지 않아, 그 권력은 항상 한 편에 편중되어, 흡사 다스리는 자와 다스림을 받는 자 사이에 높고 큰 장벽을 만들어 그 통로를 끊은 것 같다. 형태가 있는 완력도 형태가 없는 지혜와 덕행도, 학문도 종교도, 모두 다스리는 자의 무리에 참여하여, 그 무리들은 번갈아 서로 의지하여 각각 권력을 늘이고, 재산도 여기에 모이고 재능도 여기에 모여, 영욕(榮辱)도 여기에 있고 염치도 여기에 있고, 멀리 상류의 지위를 차지하여 하류 백성을 지배하여, 치세와 난세와 흥망, 문명의 진보, 모두 다스리는 자가 아는 바이고, 다스림을 받는 자는 전혀 마음에 이것을 관여하지 않고, 태연히 길가의 일을 보고 듣는 것 같다. 비유건대 옛날부터 일본에 전쟁이 일어났다. 혹은 고에츠(甲越)의 접전이라 하고, 혹은 죠코쿠(上國: 수도 지역)와 관동(關東)의 전투라고 하고, 그 명칭을 들으면 양국이 서로 적대하여 싸우는 것 같아도, 실제로는 결코 그렇지 않다. 이 전투는 다만 양국의 무사와 무사의 싸움이어서, 백성은 전혀 이것에 관계하는 일이 없다. 원래 적국이라는 것은 전국의 백성이 일반적인 마음으로써 서로 적대하는 것이어서, 설령 스스로 무기를 휴대하고 전장을 향하지 않아도, 자기 나라의 승리를 원하고 적국의 불행을 기원하고, 사사건건 하찮은 일에 이르기까지도 적과 아군의 의미를 잊지 않는 것이야, 진실로 적대적인 두 나라라고 할 수 있다. 백성이 지닌 나라에 보답하려는 마음은 이 부근에 있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전쟁에 있어서는 옛날부터 그런 사례를 보지 못한다. 전쟁은 무사와 무사의 싸움이지, 백성과 백성의 싸움이 아니다. 가문과 가문의 싸움이지, 나라와 나라의 싸움이 아니다. 두 가문의 무사, 전쟁을 시작할 때는, 백성이 그것을 방관하여, 적에게서도 아군에게서도 다만 강한 자를 두려워할 뿐. 그러므로 전쟁에 즈음하여, 쌍방의 깃발의 색깔을 따라서, 어제 아군의 군수품을 운송한 자도 오늘은 적의 군량미를 질 수 있다. 승패가 결정되어 전쟁을 끝내는 때는, 백성은 소동이 진정되어 장원책임자가 바뀌는 것을 볼 따름. 그 승리를 영예로 하는 것도 아니고, 또 그 패배를 모욕으로 하는 것도 아니다. 혹은 새로운 장원책임자의 정치적 명령이 관대하여 연공미(年貢米: 매년 세금으로 내는 쌀)가 높은 것을 감액하는 일이라도 있으면 이것을 우러러 기뻐할 따름. 그 한 가지 사례를 들어 말하겠다. 고호조(後北条) 국은 관동 8주이다. 일단 도요토미(豊臣)와 도쿠가와(徳川)가 적대하여 패망이 발생하면, 패망 후 곧바로 8주를 지배한 자는 원수인 도쿠가와(徳川)이다. 도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가 어떤 인물이기에 일시에 8주의 많은 적을 복종시킬 수 있는가? 생각건대 8주의 백성은 적도 아니고 아군도 아니고, 호조(北条)와 도요토미(豊臣)의 전쟁을 구경한 사람들이다. 도쿠가와(徳川)가 관동으로 옮겨 후에 적의 잔당을 진압하여 토벌했다는 것은, 다만 호조(北条) 가문의 남은 신하들을 토벌했을 뿐인 일이어서, 농부들과 상인들 등의 처리에 이르러서는 흡사 손으로써 머리를 만지는 즉시 안도하였던 것이다. 이것 등등의 사례를 헤아리면 옛날부터 하나하나 열거할 겨를이 없다. 오늘날에 이르러도 아직 변한 것을 보지 못한다. 그러므로 일본은 옛날부터 아직 국가를 이루지 못했다고 할 수 있다. 이제 만약 이 전체 국가로써 외국을 적대하는 등의 일이 일어나면, 일본 가운데의 백성에게서 설사 무기를 휴대하고 출진하지 않아도 싸우는 일에 심적으로 관여하는 자를 전사(戰士)라고 칭하고, 이 전사(戰士)의 수와 저 소위 구경꾼의 수를 비교하여 누가 많을 것인지, 미리 헤아려 알 수 있다. 일찍이 내가 주장 바에, 일본에서는 정부가 있되 국민은 (네이션: nation) 없다고 한 것도 이런 의미이다. 본디 유럽의 여러 나라에서도 전쟁에 의하여 타국의 토지를 합병하는 일이 여러 차례 있어도, 이것을 합병하는 일이 매우 쉽지 않고, 비상한 병력으로써 압도하거나, 어쩌면 그 토지의 백성과 약속하여 얼마간의 권리를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면, 이것을 우리 국토에 편입시킬 수 없다고 한다. 동양과 서양의 백성이 그 기풍을 달리하는 것으로써 알 수 있다. (일본의 백성은 국사에 관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연히 민간에 재주와 덕행을 지닌 자가 있으면, 자기가 지위에 있으면서 이 재능과 덕행을 이용하는 데 수단이 없기 때문에, 스스로 그 지위에서 벗어나 상류의 무리에 들어가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어제의 평민, 오늘은 장군과 재상으로 되는 일, 옛날과 지금 그 사례가 적지 않다. 이것을 일별하면 저 위아래의 장벽도 없는 것과 같아도, 이 인물은 다만 그 신분을 벗어나 다른 신분에 숨었을 따름. 이것을 비유하면 토지의 낮고 습윤함을 피하여 높고 건조한 땅으로 옮긴 것과 같다. 한 몸을 위해서는 상황이 적당할 수 있다고 할지라도, 원래 그 습지에 스스로 흙을 쌓아 높고 건조한 지위를 만든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습지는 옛날의 습지여서, 당장 자기가 자리를 차지한 높고 건조한 땅에 비교하면, 그 장벽이 여전히 존재하여 위아래의 구별은 조금도 내용을 바꾼 것이 없다. 또한 옛날 오와리(尾張)의 기노시타 도키치(木下藤吉)가 다이코(太閤: 태합)이 되었다 하여도, 오와리(尾張)의 백성은 옛날의 농민이어서 그 상황을 고치지 않은 것이 이것이다. 도키치(藤吉)는 다만 농민의 무리를 탈출하여 무사의 가문의 무리에 가담하였던 것이다. 그 입신은 도키치(藤吉) 한 사람의 입신이고, 농민의 일반적인 지위를 높인 것이 아니다. 본디 그 시대의 추세이기 때문에 지금부터 논할 수 없고, 이것을 논하는 것도 매우 무익하여도, 만약 도키치(藤吉)로 하여금 그 옛날 유럽의 독립적인 시읍(市邑)에 살게 했더라면, 시민들은 틀림없이 이 영웅의 행동을 반기지 않았을 것이다. 혹은 또 지금의 세상에 도키치(藤吉)을 살게 하여 도키치(藤吉)의 일을 하도록 하고, 저 독립적인 시민을 지금 세상에 소생시켜 그 사업을 평가하게 한다면, 이 시민은 틀림없이 도키치(藤吉)를 보고 박정한 인물이라고 하리라. 조상의 묘지가 있는 고향을 돌아보지 않고, 동료인 농민을 돌보지 않고 버리고, 홀로 무사가문에 의탁하여 한 몸의 명예와 이익을 탐하는 자는, 우리의 무리에 속하는 사람이 아니어서, 이 자를 욕할 것이다. 도저히 도키치(藤吉)와 이 시민과는 그 주장하는 요점을 달리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행동의 조잡함과 세밀함과 관대함과 엄격함은 서로 비슷해도, 시대의 추세에 의하지 않고 세태에 구애되지 않고, 옛날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끝내 서로 용납할 수 없는 것이다. 생각건대 유럽에서 1200, 1300년대 경, 성대하게 유행하던 독립시민과 같은 것은, 그 소행이 본디 난폭하고 과격하고, 혹은 고루하고 매우 무지하고 어리석은 자가 있다할지라도, 결코 다른 사람에게 의지하는 것이 아니고, 본업에는 상업에 힘쓰고, 그 상업을 보호하기 위하여 군사적 조치를 마련하여, 스스로 그 지위를 굳힌 자들이다. 근세에 이르러 영국과 프랑스와 기타 국가들에 있어서, 중류의 시민이 차츰 재산을 축적하고 따라서 또 그 품행을 고양하여, 의회 등에서 논설을 시끄럽게 펼치는 자가 있어도, 다만 정부의 권력과 싸워 소시민을 압제하는 힘을 탐내겠다는 것이 아니고, 스스로 자신의 지위가 유발하는 이익을 온전히 하여 타인의 압제를 압제하기 위하여 노력한다는 취지일 뿐. 그 지위가 유발하는 이익이라는 것은, 지역과 관련해서는 「로컬 인터레스트: local interest: 지역이익」이 있고, 직업에 관해서는 「클래스 인터레스트: class interest: 계급이익」이 있어, 각각 그 사람이 거주하는 지방, 또는 영업을 함께하는 등의 교류하는 정에 의하여, 각자 자신의 주장을 내놓고 자기의 이익을 보호하고, 이것 때문에 혹은 한 생명을 버리는 자가 없지 않다. 이 내용을 보면, 옛날부터 일본인이 자신의 지위를 돌아보지 않고 편리한 편에 붙어, 다른 사람에게 의탁하여 권력을 구하거나, 혹은 타인에게 의탁하지 않으면, 스스로 다른 사람을 대신하여 다른 사람의 일을 하여, 폭력으로써 폭력을 대신하고자 하는 것과 같은 것은, 비열하기가 심한 것이다. 이것을 서양의 독립적인 시민과 비교하면 천양지차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옛날 중국에서 초나라의 항우가 진시황의 행렬을 보고, 저자를 잡고 대신할 것이다 라고 하고, 한고조는 그것을 보고 대장부는 당연히 이와 같이 되어야 한다고 했다고 한다. 지금 이 두 사람의 마음속을 살피는 데, 자신의 지위를 지키기 위하여 진나라의 폭정에 분노한 것이 아니라, 실은 그 폭정을 호기로 삼아 자기가 야심을 채우고, 진시황의 지위를 대신하여 진나라의 일을 맡는 것을 바라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또는 그 포학함이 진나라와 같이 되지 않아도, 조금 일을 교묘하게 수행하여 인망을 살 따름. 그 전횡으로써 하층민을 다스리는 한 가지 일에 이르러서는, 진시황도 한고조도 차이가 없다. 우리나라에서도 옛날부터 영웅호걸이라고 칭하는 자가 적지 않을지라도, 그 업적을 보면 항우가 아니면 한고조이다. 역사의 시작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전체 일본 가운데 있어서 독립적인 시민 등의 사례는 꿈속에서 헛된 망상을 한 적도 없을 것이다. (국민은 그 지위를 중요시하지 않는다)
종교는 사람 마음의 내부에서 작동하는 하는 것이어서, 가장 자유롭고 가장 독립적이어서, 조금도 다른 사람의 제어를 받지 않고, 조금도 다른 사람의 힘에 의지하지 않아, 세상에 당연히 존재할 수 있을 터인데, 우리 일본에 있어서는 곧 그렇지 않다. 원래 우리나라의 종교적 교설은 신도(神道)와 불교의 양쪽 길이라고 하는 자가 있어도, 신도(神道)는 아직 종교적 교설의 체제를 갖추지 못했다. 설령 오랜 옛날에 그 주장이 있어도, 이미 불법(仏法) 안에 농락되어. 수 백 년 간 본색을 드러낼 수 없다. 혹은 요즘에 이르러 조금 신도(神道)라는 이름을 듣는 것 같아도, 정부의 변혁을 맞아 겨우 왕실의 음덕에 의지하여 미미한 운동을 하려고 할뿐이어서, 다만 한 때의 우연한 일이기에, 나의 소견에서는 이것을 정해진 종교적 교설이라고 인정할 수 없다. 아무튼 옛날부터 일본에서 유포되어 문명의 한 국면을 맡은 종교적 교설은, 다만 하나의 불법(仏法)이 있을 따름. 그런데 이 불법(仏法)도 처음 생긴 때부터 다스리는 자의 무리에 들어가 그 힘에 의지하지 않은 것이 없다. 옛날부터 유명한 스님과 고명한 스님이라고 칭하는 사람, 혹은 당나라에 들어가서 법(法)을 구하고, 혹은 자국에서 있으면서 새로운 종파를 열어, 사람들을 교화하고 절을 세운 것도 많다할지라도, 대개 모두 천황과 쇼군(將軍) 등의 보살핌이라는 요행을 맞이하여, 그 음덕을 빌려서 법(法)을 보급하려 할 따름. 심지어는 정부로부터 작위를 받고 명예라고 하는 데 이르렀다. 승려가 승정(僧正: 승려의 고위직)과 승도(僧都: 승려의 고위직)의 지위에 보해진다는 사례는 매우 오래되어, 엔키시키(延喜式: 헤이안 시대 율령의 시행세칙)에 승도(僧都: 승려의 고위직) 이상은 3품에 준한다 하고, 고다이고(後醍醐) 천황의 겐무(建武) 2년의 칙명에는, 대승정(大僧正: 승려의 최고위직)으로써 2품 대납언(大納言), 승정(僧正: 승려의 고위직)으로써 2품 중납언(中納言), 권승정(権僧正: 승정의 다음 직위)으로써 3품 참의(参議)에 준한다고 되어 있다 (석가관반기[釈家官班記]). 이 내용을 보면, 당시 유명한 스님과 고명한 스님도 조정의 관직을 몸을 지니고, 그 지위로써 조정의 많은 신하들과 상하의 반열을 다투어 한 자리 내외로써 영예와 수치로 삼았던 것이리라. 이것 때문에 일본의 종교적 교설에서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종교는 있어도 자립적인 종교 행정인 것이 있음을 듣지 못한다. 더욱이 그 실제적 증거를 얻고자하면, 오늘날에도 나라 안의 유명한 절에 가서 그 기록된 유래를 불 수 있다. 쇼무(聖武) 천황의 텐표(天平) 연중에 일본의 제후국마다 고쿠분지(国分寺: 국분사)를 세우고, 간무(桓武) 천황 엔랴쿠(延暦) 7년에는 전교대사(伝教大師: 最澄: 최징)가 히에이잔(比叡山)을 열어 고본츄도(根本中堂: 근본중당)을 세워 왕성(王城)의 기몬(鬼門: 귀문: 음양설에서 여러 귀신이 출몰하는 곳)을 진압하고, 사가(嵯峨) 천황 고닌(弘仁) 7년에는, 고보다이시(弘法大師: 홍법대사: 空海: 공해)가 고야산(高野山)을 열어 천황으로부터 윤허를 받아 그 대가람(大伽籃)을 건립했다. 기타 남부의 여러 산, 교토의 여러 절, 헤이안 시대에는 가마쿠라(鎌倉)의 5산, 근세에는 우에노(上野)의 도에이야마(東叡山), 시바(芝)의 조죠지(増上寺) 등 어느 것도 모두 정부의 힘에 의존하지 않은 것이 없다. 기타 역대 천황 스스로 불교에 귀의하여, 혹은 친왕(親王: 적출 황손)으로 중이 된 자도 매우 많다. 시라카와(白河) 천황에게 8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6명은 중이었다고 한다. 이것 역시 종교에서 권력을 얻은 한 가지 원인이다. 오직 정토진종(淨土眞宗)이 자립에 가까운 것이라 해도 여전히 그런 폐단을 면할 수 없다. 아시카가(足利) 말기, 다이에이(大永) 원년 지츠뇨 상인(実如上人) 시대에 천황의 즉위 자금을 기부하여, 그 보답으로써 영원히 몬제키(門跡: 황족이 출가하여 법통을 전하는 절)에 준한다 하여 호신노(法親王: 법친왕: 황자가 출가하여 친왕까지 봉해지는 경우)에 준하는 지위를 하사받은 일이 있다. 왕실이 쇠미하고 빈곤함을 불쌍히 생각하여 여유 돈을 대주는 것은 승려의 신분으로서 훌륭한 일일지라도, 사실은 그렇지 않아서, 니시산조(西三条)는 불교에 입문하는 중개인을 통하여 관직의 등급을 산 일이 있다. 이것을 비열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옛날부터 일본 가운데 대사원이라 칭하는 것은, 천황과 칙명으로 기원하는 바가 아니면 쇼군(将軍)이 집권하여 건립했다. 생각건대 이것을 어용사찰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 절의 유래를 들으면, 쇼군(将軍)의 도장이 찍힌 문서는 몇 백 석, 주지의 자격은 어떠어떠하다고 하여, 그 상황도 높은 무사 족이 자신의 가문을 말함에 다르지 않다. 한 번 들어서 혐오감이 생길 것이다. 절의 문 앞에는 말에서 내리라는 표찰을 걸고, 문에서 나가면 추종세력을 거느리고, 사람들을 치워서 길을 피하게 하여, 그 위력은 봉건시대의 다이묘(大名)보다도 기세등등한 것이다. 그런데 그 위력의 근원을 찾으면, 종교의 위력이 아니고, 다만 정부의 위력을 차용한 것이어서, 결국 속세 권력 중의 한 부분이었음에 지나지 않는다. 불교가 번성했다할지라도, 그 종교는 모두 정권의 한 가운데 포함되어, 사방 온 누리에 보편적으로 비추는 것은, 불교의 밝은 빛이 아니고, 정권의 위력인 것 같다. 사원에서 독립적인 종교가 없는 것도 역시 괴이할 것이 없고, 그 종교에 귀의하는 무리에 종교를 믿는 본심이 없는 것도 역시 놀랄 것이 못된다. 그 한 가지 증거를 들면, 옛날부터 일본에서는 종교적 교설만을 위한 전쟁에 이르는 것이 극히 드문 것을 보아도, 역시 신앙인의 나약함을 살펴 알 수 있다. 이 종교에 있어서 신앙심이 귀의하는 외양에 드러나는 바는, 무지하고 배우지 못한 촌농부와 촌노파가 눈물을 흘리며 우는 경우가 있는 것에 불과하다. 이 상황을 보면, 불법(仏法)은 다만 이 문맹세계의 한 가지 도구이어서, 매우 어리석고 매우 누추한 사람의 마음을 완화하는 수단일 뿐, 기타에서는 하등의 효용도 없고, 또 하등의 세력도 있을 일이 없다. 그 세력이 매우 없음은, 도쿠가와(徳川) 시대에, 파계승이라 하여, 세속적인 죄를 범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종파 위의 계율을 어긴 자이기 때문에, 정부로부터 직접 그를 체포하여, 시중에 끌고 다니고 귀양을 보내는 사례가 있다. 이와 같은 것은 곧 승려가 정부의 노예라고 할 수 있다. 요즘에 이르러서는 정부로부터 전국의 승려에게 육식과 대처(帯妻)를 허락하는 명령이 내렸다. 그 명령의 의하면, 종래의 승려가 고기를 먹지 않고 부녀자를 가까이 하지 않은 것은 그 종교의 취지를 지키기 위함이 아니어서, 정부의 허락이 없기 때문에 노력하여 스스로 금지한 것이리라. 이런 것들의 내용을 보면, 승려는 비단 정부의 노예뿐만 아니라, 일본 안에 이미 종교가 없다고도 할 수 있다. (종교 권리가 없다)
종교는 여전히 또 그러하다. 하물며 유교의 학문에 있어서야. 우리나라에 유교서적이 전해진 것은 이미 오래다. 왕조시대에 박사를 두고, 천황이 스스로 중국서적을 읽고, 사가(嵯峨) 천황의 시대에 대납언(大納言) 후유츠구(冬嗣)가, 간가쿠인(勧学院: 권학원)을 세워 일족의 자제를 가르치고, 우다(宇多) 천황 시절에는 중납언(中納言) 유키하라(行平)가, 쇼가쿠인(奨学院: 장학원)을 건설하는 등, 한학도 점차 열리고, 특히 와카(和歌: 일본의 시) 교육은 옛날부터 성행한 일이 있어도, 모두 이 시대의 학문은 다만 재위 천황의 자제에게 미칠 뿐이어서, 저서라 할지라도 모두 관청의 손에 이루어진 것이다. 본래 인쇄술도 아직 발명되지 않아서, 민간에서 교육에 다다를 수 있는 수단이 있을 수 없다. 가마쿠라(鎌倉) 시대에 오에노 히로모토(大江広元), 미요시 야스노부(三善康信) 등, 유학으로써 등용되었다 해도, 이것 역시 정부에 속한 자들이어서, 백성들 사이에 학자가 있음을 듣지 못한다. 죠큐(承久) 3년 호조 야스토키(北条泰)가, 우지세타(宇治勢多)에 침입했을 때, 고토바(後鳥羽) 상황(上皇)으로부터 어명이 와서, 병졸 5000여명 안에서부터 이 어명을 읽을 수 있는 자를 찾는 데, 무사시노(武蔵) 국의 주민 후지타 사부로(藤田三郎)라는 자 한 사람을 얻었다고 한다. 세상이 문맹인 것을 이로써 알 수 있다. 이로부터 아시카가(足利) 말기에 이르기까지, 문학은 온전히 승려의 몫이 되어, 글자를 배우고자하는 자는 반드시 절에 의지하지 않으면 그 수단을 얻지 못한다. 후세 글자를 배우는 학생을 칭하여 데라코(寺子: 절 아이)라고 하는 것도 그 이유가 있다. 혹자의 주장에, 일본에 목판본이 생긴 것은 가마쿠라(鎌倉)의 5산(五山)을 시작으로 한다고 했다. 과연 믿을 것인가? 도쿠가와(徳川) 초기에 그 시조 이에야스(家康), 우두머리로서 후지와라 세이카(藤原惺窩)를 중용하고, 다음에 하야시 도슌(林道春)을 등용하고, 평화가 지속됨에 따라 대유학자를 배출, 그로써 근세에 이른 것이다. 이와 같이 학문의 성쇠는 세상의 치세와 난세라는 행보를 함께하여, 독립적인 지위를 차지하는 일이 없고, 수 십 백년 전쟁과 소란의 사이, 완전히 이것을 승려의 손에 맡긴 것은, 학문의 불명예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 한 가지 사건을 보고도 유교는 불교에 미치지 못함을 알 수 있다. 그렇다할지라도 전쟁에 즈음하여 학문이 쇠미함은 유독 일본뿐이 아니고, 세계의 모든 국가가 그렇지 않음이 없다. 유럽에 있어서도 중세 암흑시대부터 봉건시대에 이르기까지는, 문자에 관한 권한, 전적으로 승려에게 귀속되어, 세간에서 점차 학문이 피어난 것은 실제로 1600년대 이후의 일이다. 또 동양과 서양의 학풍이 그 내용을 달리하여, 서양 여러 나라는 실험에 대한 주장을 주로 하고, 우리 일본은 공자와 맹자의 이론을 좋아하여, 허실의 차이, 동시에 말할 수 있음이 아니라도, 역시 일률적으로 그것을 나무랄 수 없다. 아무튼 우리 국민을 야만의 단계에서 구하여 오늘날의 문명에 이르도록 한 것은, 불교와 유교의 덕택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특히 근세에 유교가 번성함에 이르러, 세속에 유행하는 신불(神佛)을 믿는 부류의 거짓말과 망설을 배척하여 사람 마음의 현혹을 불식시킴과 같은 것은, 그 공로가 매우 적지 않다. 이 한편에서 보면 유교도 역시 유력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제 동양과 서양 학풍의 득실을 잠깐 제쳐두고, 다만 그 학문이 유행한 사정에 관하여, 두드러진 두 가지 양상의 차이를 내걸어 여기서 제시할 따름. 생각건대 그 차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난세가 지나고, 학문이 일어남을 맞아, 이 학문이라는 것, 서양 여러 나라에 있어서는 국민 모두 사이에서 일어나고, 우리 일본에서는 정부 안에서 일어나는 한 가지 사건이다. 서양 여러 나라의 학문은 학자가 하는 일이어서, 그 실행하는 것이야 관민의 구별이 없고, 다만 학자의 세계에 있다. 우리나라의 학문은 소위 다스리는 자의 세계에 속하는 학문이어서, 흡사 정부의 한 부분임에 지나지 않는다. 시험적으로 보자, 도쿠가와(徳川)의 치세 250년간, 국내에서 학교라고 칭하는 것은, 처음 정부의 설립이 아니면 여러 번(藩)의 것이다. 혹은 유명한 학자가 없지 않고, 혹은 많은 저술이 없지 않아도, 그 학자는 반드시 다른 사람의 하인이고 그 저서는 반드시 관청의 발간이다. 혹은 떠돌이 낭인(浪人)에서 학자도 있을 것이고, 개인적인 장판(蔵版: 소장본)도 있으리라고 할지라도, 그 낭인(浪人)은 하인이 되는 것을 바라서 이루지 못한 것이고, 그 개인적인 장판(蔵版: 소장본)도 관청 판본이기를 바라서 적합하지 않은 것이다. 국내 학자의 결사가 있음을 듣지 못하고, 논문과 신문 등의 출판이 있음을 듣지 못하고, 기예를 가르치는 교습소를 보지 못하고, 여러 사람이 회의를 여는 곳을 보지 못하고, 전체 학문에 관한 일에 대해서는 조금도 사사로이 기획하는 것이 없다. 간혹 석학과 대유학자가, 사숙(私塾)을 열어 사람을 가르치는 자가 있으면, 그 학생은 반드시 무사에 한하여, 세습봉록을 먹고 군주를 섬기는 여가 시간에 글자를 배우는 자일 뿐. 그 배움의 흐름도 역시 다스리는 자의 명분에 어긋나지 않아서, 오로지 사람을 다스리는 길을 구하여, 수 천 백 권의 책을 독파함도, 벼슬길에 오르지 않으면 소용이 없는 것과 같다. 혹은 드물게 은둔군자라고 칭하는 선생이 있어도, 사실은 마음에 만족하여 숨은 것이 아니고, 몰래 불우함을 탄식하여 다른 사람을 원망하는 자이거나, 그렇지 않으면 세상을 잊고 방심한 자이다. 그 내용을 표현하여 말하면, 일본의 학자는 정부라고 칭하는 새장 속에 갇혀, 이 새장으로써 자기가 하늘과 땅으로 삼고, 이 작은 하늘과 땅 속에서 번민하는 자라고 할 수 있다. 다행히도 세상 한 가운데 중국의 유교 교육이 멀리 퍼지지 않아서 배우는 자가 많지 않은 것이 축하할 가치가 있고, 만약 선생의 생각대로 무수한 학생을 낳는 일이 생기면, 좁은 새장 속에 혼잡하여, 몸을 수용할 수 있는 좌석도 없어서, 원망은 더욱 많고, 번민은 더욱 심하지 않을 수 없다. 불쌍하기가 짝이 없는 상황이 아닌가? 이와 같이 제한된 새장 안에 한없는 학생을 낳아, 새장 바깥에 인간세상이 있음을 알지 못하는 자이기에, 자신의 지위를 만드는 방도를 이해하지 못한다. 오로지 그 시대의 권력자에게 의지하여, 어떤 경멸을 받아도 전혀 부끄러움을 모른다. 도쿠가와(徳川) 시대에 학자의 뜻을 얻은 자는 정부와 여러 번(藩)의 유교로 등용된 관리(儒官: 유관)이다. 이름은 유관(儒官)이라고 부른다할지라도, 사실은 긴 소매 옷을 입은 신분(長袖の身分)이라 하여, 그들을 존경하지 않고, 다만 일종의 수단과 같이 다루어, 또 본인이 좋아하는 것인 정치적인 사무에서도 참가하게 하지 않고, 겨우 다섯 말의 쌀을 주어 소년들에게 독서교육을 하게 할뿐. 글을 아는 자가 드문 세상이기에, 다만 그 부자유를 보충하기 위하여 이용하기까지 하는 일이어서, 이것을 비유하면 가죽세공에 한하여 에타(穢多: 쇠백정)에게 지시하는 것과 같다. 비굴과 비천의 극한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무리를 향해 또 무엇을 바랄 것이며, 또 무엇을 비난하리? 그 패거리 안에 독립적인 결사가 없는 것은 수상한 일이 아니고, 일정한 논의가 없는 것도 역시 놀랄 일이 아니다. 그뿐만 아니라, 정부의 전제가 충분히 사람을 속박한다고 하여, 조금 기개가 있는 유학자는 자칫하면 그것을 향해 불평을 품는 자가 없지 않다. 그렇다할지라도 잘 그 근본을 찾으면, 그 사람 스스로 씨앗을 뿌려 그것을 배양하여, 그 묘목이 무성하기 때문에 오히려 스스로 비난을 받는 것이다. 정부의 전제, 이것을 가르치는 자가 누구인가? 설령 정부 본래의 특성에 전제라는 요소가 있어도, 그 요소의 발생을 도와서 그것을 윤색하는 자는 중국에 관한 유교학자 무리의 학문이 아닌가? 옛날부터 일본의 유교학자에게서 매우 재주가 있어 매우 잘 일을 처리하는 인물이라고 칭하는 자는, 매우 전제를 잘하여 매우 잘 정부에 등용된 자이다. 이 단계에 이르러서는 중국의 유교는 스승이고 정부는 제자라고 하는 것도 가능하다. 불쌍하게도, 지금 일본 국민, 누가 사람의 자손이 아니랴? 현재 세상에 있어 전제를 행하고, 또 그 전제에 괴로움을 당하는 것은, 오로지 이것을 현대인의 죄로 돌릴 수 없고, 멀리 그 선조에게 받은 유전적인 독소가 그렇게 만든 것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이 병적인 독소의 득세를 도운 자가 누구인가, 중국 유교의 선생도 역시 책임이 있고 크게 힘을 쓴 것이다. (학문에 권리가 없고 오히려 세상의 전제를 돕다)
앞 문단에 말한 것과 같이, 유교는 불교와 더불어 각각 그 한 가지 면을 맡고, 우리나라에 있어서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이 문명을 일으킨 일이 있지만, 어느 것도 모두 옛날을 그리워하는 병을 벗어나지 못한다. 종교적 교설의 본분은 사람 마음에 대한 교육을 맡아, 그 교육에 변화가 있을 수 없는 것이어서, 불교 또는 신도(神道)의 무리가 수 천 백년의 옛날을 말하여 금세기의 사람을 깨우치고자함도 매우 당연한 일일지라도, 유교에 이르러서는 종교와 다르고, 오직 인간 교류의 이치를 논하여, 예악(礼楽)과 6예(六芸)라는 것을 주장하여, 절반은 이것을 정치에 관련시키는 학문이라고 할 수 있다. 이제 이 학문에서 융통성과 개혁의 내용을 알지 못함은 유감스러운 일이 아닌가? 인간의 학문은 날마다 새롭고 달마다 진보하여, 어제의 소득은 오늘의 손실로 되고, 전년의 옳음은 금년의 틀림이 되어, 물체마다 의심을 수용하고 사건마다 의심을 일으켜, 이것을 규명하여 이것을 음미하며, 이것을 발명하고 이것을 개혁하여, 자식과 동생은 아비와 형보다 우수하고 후배는 선배보다 뛰어나, 해마다 태어나고 또 태어남을 거듭하여, 점차 성대하게 진보하여, 뒤돌아보아 백년의 옛날을 보면, 그 거칠고 미련함과 문명 부재를 불쌍하게 여기며 웃을 수 있는 것이 많은 것이야, 문명의 진보, 학문의 발전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논어에서 말하기를, 후세가 두려워해야 할 것이니, 어찌 오는 자가 지금 사람과 같지 못하다는 것을 알겠는가? 라고. 맹자에서 말하기를, 순임금도 사람이고, 나도 사람이고, 하는 일 있는 자는 역시 이와 같다. 또 말하기를, 문왕은 나의 스승이다, 주공이 어찌 나를 속이려나고. 이 교훈으로써 중국학문의 정신을 엿볼 수 있다. 후세가 두려워해야 할 것이니 운운하는 것은, 후배인 자가 노력하면 혹시 오늘날의 사람과 같이 되는 일도 있을 것이고, 방심은 안 된다고 하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후세의 사람이 노력하여 도달할 수 있는 정상은 기껏해야 오늘날의 사람들의 지위에 있을 따름. 게다가 오늘날의 사람들도 이미 옛 사람에 미치지 못하는 말세의 사람이므로, 설사 이것에 미치는 일이 있어도 그다지 기대할만한 상황이 아니다. 또 후배 학자가 크게 분발하여, 대성일갈(大声一喝), 그 강개한 뜻을 기술하는 곳은, 수천 년 이전의 순임금과 같이 되려고 바라는 것이거나, 혹은 주공(周公)을 증인으로 세워 두려워하면서 문왕(文王)을 배우려고 하는 것까지의 일이어서, 그 내용은 재주가 없는 아이가 스승에게서 습자본을 받아, 주신 글씨본대로 글자를 쓰고자 고심하는 것과 같다. 처음부터 스승에게는 미치지 못하는 자라고 각오를 했기 때문에, 아주 잘 할 수 있는 곳에서 스승의 필법을 흉내 낼 뿐, 도저히 그 이상으로 나아가는 일이 이루어질 수 없다. 중국 유교의 계보는, 요순부터 우왕과 탕왕 문왕과 무왕 및 주공과 공자에게 전해져, 공자이후는 이미 성인의 씨가 다하여, 중국에서도 일본에서도 다시 그런 사람이 있는 것을 듣지 못한다. 맹자이후 송나라 시대의 유교학자 혹은 일본의 석학이 대유학자이어도, 후세를 향하여 자부할 수 있다할지라도, 공자이전의 옛 성인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있을 수 없다. 다만 이것을 배워서 미치지 못하는 한탄을 할 뿐. 그러므로 그 도(道)는 후세에 전해지면 전해지는 만큼 나쁘게 되어, 점차 인간의 지혜와 덕행을 감소시키고, 점차 악인의 수를 증가시키고, 점점 어리석은 자의 수를 증가시켜, 한 번 전하고 또 한 번 전하여, 그로써 마지막 세대인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재빨리 이미 금수의 세계로 될 수 있는 것은 수지타산 상에 명백한 계산이라도, 다행히도 사람의 지혜가 진보하는 규칙은 스스로 세상에 시행되어 유교학자의 생각과 같지 않고, 왕왕 옛 사람보다 우수한 인물을 탄생시킨 일에서야, 오늘날까지의 문명을 진보시켜, 저 계산의 비율에 어긋난 것은, 우리 국민의 큰 축복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옛날을 신뢰하고 옛날을 그리하여 조금도 자기의 생각을 교환하지 않아, 소위 정신적 노예(멘탈 슬레이브: mental slave)라 하여, 자기가 정신을 들추어내어 옛날의 도(道)에 바쳐, 지금의 세상에 살면서 옛 사람의 지배를 받고, 그 지배를 또 전하여 지금의 세상 한 가운데를 지배하고, 널리 인간 교류에 정체와 불통의 요소를 흡입케 하였던 것은, 유교학문의 죄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할지라도 또 한편에서 말하면, 옛날에 만약 우리나라에 유교학문이라고 하는 것이 없었더라면, 지금 세상의 형편에는 도달할 수 없다. 서양의 말에 「리파인먼트: refinement」라고 하여, 사람의 마음을 단련하여 세련되게 한다는 한 가지 일에 관해서는, 유교학문의 효과가 역시 적다고 할 수 없다. 다만 옛날에 있어서는 주효하였으나 현재에 있어서는 쓸모가 없을 뿐. 물질이 자유롭지 못한 시절에 있어서는, 찢어진 멍석도 이불로 사용할 수 있고, 쌀겨도 양식으로 할 수 있다. 하물며 유교학문에 있어서야, 틀림없이 그 구악을 책망할 수 없다. 나의 생각에 유교학문으로써 옛날의 일본인을 가르친 것은, 시골의 처녀를 대궐에 바쳐 보낸 것과 같다. 대궐에서 기거하고 움직이는 것은 스스로 세련됨을 흉내 내고, 그 재주도 혹은 영민을 더했다하여도, 활발한 기력은 잃어버리고, 가산을 운용하기 위해서 필요 없는 한 부녀자를 만들어낸 것이다. 생각건대 그 시절에는 처녀를 가르칠 교육시설이 없었기 때문에, 바치는 것도 이유가 없는 것이 아니더라도,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그 이해득실을 살펴서 달리 방향을 정하지 않을 수 없다.
옛날부터 우리 일본은 의리와 용기의 나라라고 칭하여, 그 무사가 표한하여 과단, 충성스러워 솔직함은, 아시아 여러 나라에 있어서도 부끄러운 것이 없을 것이다. 그 중 아시카가(足利) 말년에 이르러 천하의 대란, 호걸은 있는 곳에 할거하여 공격이 멈추는 때가 없고, 대체로 일본에서 싸움이 유행함은, 이 때 전후보다 성행함이 없다. 한 번 패하여, 국가를 망하게 한 자가 있고, 한 번 승리하여, 집안을 일으킨 자가 있고, 문벌도 없고 유래도 없고, 공적과 명성이 자유자재, 부귀를 순간에 얻을 수 있다. 문명의 정도에 앞뒤의 차가 있어도, 이것을 저 로마의 말기에 북쪽 오랑캐가 침입한 시대와 비교하여 비슷한 형편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사건의 추세 가운데에 있어서는 일본의 무사에게도 스스로 독립과 자주의 기상을 일으켜, 혹은 저 독일의 야만인이 자주와 자유의 요소를 남긴 것처럼, 우리 국민의 기풍도 일변할 수 있는 것으로 생각되지만, 사실에 있어서는 결코 그렇지 않다. 본 장의 첫머리에서 말한 권력의 편중은, 역사시작 처음부터 인간 교류의 미세한 곳까지도 침투하여, 어떤 진동이 있어도 이것을 파괴할 수 없다. 이 시대의 무사가 쾌활하고 자유로운 것 같아도, 그 쾌활하고 자유로운 기상은 한 몸의 강개함으로부터 피어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인정하여 일개의 남아라고 생각하여, 몸을 가장 중시하여, 자기 혼자의 자유를 즐긴다는 마음이 아니라, 틀림없이 외부의 무엇에 유혹되어 발생한 것이거나, 그렇지 않으면 외부의 무엇을 빙자하여 발생을 도운 것이다. 무엇을 외부의 무엇이라고 하는가. 조상 때문이고, 가문의 이름 때문이고, 주군 때문이고, 부친 때문이고, 자기의 신분 때문이다. 대체로 이 시기의 전쟁에서 명분으로 하는 바는 반드시 이런 것 등의 제반 조건에 의존하지 않는 것이 없다. 또는 조상의 가문 이름이 없고, 주군과 부친의 신분이 없는 자는, 일부러 그 명분을 만들어 핑계로 이용하는 꼴이다. 어떤 영웅호걸이어서 힘이 있고 지혜가 있는 자라할지라도, 그 지혜의 힘에만 의지하여 일을 하고자 기도하는 자가 있음을 듣지 못한다. 여기서 사건의 흔적에 드러난 것을 들어, 한 가지, 두 가지 사례를 보이겠다. 아시카가(足利)의 말년에 사방의 호걸, 혹은 그 주인을 내쫓고, 혹은 그 주군과 부친의 원수를 갚고, 혹은 조상의 가문을 일으키고자 하고, 혹은 무사다운 면목을 온전하게 하기 위해서라 하여, 무리를 모아 토지를 압수하고, 할거하는 세력을 이루었다할지라도, 그 기대하는 바는 다만 수도(교토)로 올라가는 한 가지 일이 있을 뿐. 대체로 수도(교토)로 올라간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살피면, 천황 혹은 쇼군을 알현하여, 그 명의를 차용하여 천하를 통제하겠다는 것이다. 또는 아직 수도(교토)로 올라가는 수단을 얻지 못한 자는, 멀리 왕실의 관직을 얻어, 이 관직에 의지하여 자신의 영예를 늘리고, 그로써 아랫사람을 통제하는 재주로 이용하는 것이다. 이 재주는 옛날부터 일본의 무사들 사이에 유행하는 정해진 고유한 방식이어서, 미나모토(源) 가와 다이라(平) 가의 우두머리, 모두 그렇지 않음이 없다. 호조(北条)에 이르러 바로 최상의 관직을 바라지 않고, 명분을 위하여 쇼군을 두고, 신분은 5품계로써 천하의 권세를 쥔 것은, 비단 왕실을 도구로 이용할 뿐만 아니라, 또한 쇼군도 이용한 것이다. 그 외형을 피상적으로 판단하면 아름답고 훌륭해 보이더라도, 충분히 사건의 내부를 분석하면, 틀림없이 사람의 비겁으로부터 생긴 것이어서, 진실로 천시할 수 있고 미워할 수 있는 요소를 포함하는 것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아시카가 타카우지(足利尊氏)가 아카마츠 엔신(赤松円心)의 책략을 이용하여 고후시미(後伏見) 천황의 칙서를 받고, 그 아들 고묘(光明) 천황을 세운 것과 같은 것은, 만인의 눈으로써 보아도 이것을 천황의 본심에서 나온 것으로 인정할 수 없다. 노부나가(信長)가 처음에 쇼군 요시아키(義昭)를 손안에 넣었어도, 쇼군의 명성이 천황의 명성보다 약하지 않음을 알아차리고, 곧 요시아키(義昭)를 내쫓고 곧바로 천황을 껴안은 것도, 그 정(情)이 두텁다고 할 수 없다. 어느 것도 모두 계략과 속임수가 명백한 것이어서, 대체로 천하에 눈과 귀를 구비한 자라면, 그 속내를 통찰할 수 있음이 당연하여도, 아직 그 표면에서는 충성과 신의와 절개와 의리를 부르짖어, 어린애의 놀이와 같은 명분을 핑계로 이용하여 스스로 이것을 책략을 얻은 것으로 하여, 사람들도 역시 이것에 의심을 품지 않는 것은 왜인가? 생각건대 그 무리들 안에 있어서 위와 아래가 함께 크게 이득을 보는 바가 있기 때문이다. 일본의 무사는 역사시작 초부터 이 국가에서 이루어지는 인간 교류의 규칙에 따라, 권력 편중의 속에서 길러져, 항상 사람에게 굽힘으로써 수치로 여기지 않는다. 저 서양의 국민은 자기의 지위를 중시하여, 자기의 신분을 귀하게 여기고, 각각 그 권리와 의무를 지속적으로 확대함에 비교하면, 그 사이에 두드러진 차이점을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전쟁과 소란의 세상이라 할지라도, 이 교류의 법칙은 파괴할 수 없다. 일족의 우두머리에 대장이 있고, 대장 밑에 가노(家老)가 있고, 그 다음에 기마병이 있고, 또 가치(徒士: 하급무사)가 있고, 그로써 아시가루(足軽: 최하급 무사)와 쥬겐(中間: 하인)에 이르러, 상하의 명분이 명백하고, 그 명분과 함께 권한과 의무를 달리하여, 한 사람으로서 무리함을 당하지 않는 자가 없고, 한 사람으로서 무리함을 행하지 않는 자가 없다. 무리함에 억압당하고, 또 무리하게 억압하고, 이것을 향하여 굴복하면, 저것을 향하여 자부할 수 있다. 비유건대 여기에 갑을병정(甲乙丙丁)이라는 10명이 있어, 그 을(乙)인 자, 갑(甲)에 대하여 비굴한 모습을 하고, 참을 수 없는 치욕이 있는 것 같아도, 병(丙)에 대하면 의기양양하여 크게 자부할 수 있는 유쾌함이 있다. 그러므로 앞의 치욕은 뒤의 유쾌함에 의하여 보상을 받고, 그로써 불만을 고르게 하고, 병(丙)은 정(丁)에게서 보상을 받고, 정(丁)은 무(戊)에게서 대가를 구하여, 점점 끝이 없고, 흡사 서쪽의 이웃에 빌려준 돈을 동쪽 이웃에게 독촉하는 것과 같다. 또 이것을 물질에 비유하여 말하면, 서양 국민의 권력은 쇠와 같아서, 그것을 팽창시키는 것이 매우 어렵고, 이것을 수축시키는 것도 역시 매우 쉽지 않다. 일본의 무사의 권력은 고무와 같고, 그 서로 붙이는 바의 물질에 따라서 수축과 팽창의 내용을 달리하여, 밑에 붙이면 크게 팽창하고, 위에 붙이면 갑자기 수축하는 성질이 있다. 이 치우쳐서 수축하고 치우쳐서 무거워지는 권력을 일체로 모아서 무사가문의 위세라고 칭하고, 그 일체의 억압을 당하는 자는 의지할 데가 없는 평민이다. 평민을 생각하면 불쌍하여도, 무사의 무리에 있어서는 위로 대장(大将)부터 밑으로 아시가루(足軽: 최하급 무사)와 쥬겐(中間: 하인)에 이르기까지, 상하 일반적인 이익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비단 이익을 도모할 뿐만 아니라. 그 상하의 관계, 충분히 정돈되어 크게 체계적인 아름다움이 있는 것 같다. 곧 그 체계적이라는 것은 무리의 내부에서, 상하 간에 사람마다 비굴함의 추태가 있을지라도, 무리가 일체의 영광으로써 굳이 스스로 이것을 자기네 영광으로 삼고, 오히려 한 개인의 지위는 버리고 그 추태를 망각하고, 달리 일종의 체계를 만들어 그것에 길들여진 것이다. 이 관습의 한 가운데서 길러져 마침내 그로써 제 2의 천성을 이루어, 어떤 물체에 접촉하여도 그 물체를 움직일 수가 없다. 위세와 무력도 굴복시킬 수가 없고, 가난과 천박함도 빼앗을 수 없고, 엄연한 무사가문의 기풍을 엿보아 알 수 있다. 그 한 국면의 사건에 관하여 한 장면의 작동에 관하여 이것을 살피면, 정말로 부러워할 수 있고 또 사모할 수 있는 것이 많다. 옛날 미가와(三河)의 무사가 도쿠가와(徳川) 집안에 따라붙었던 형편도 이 한 가지 사례이다. 그 조직으로써 성립된 무사의 교류이기에, 이 교류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부득이한 일종의 무형의 최고 권위가 없을 수 없다. 곧 그 권위가 있는 곳은 왕실에 멈춘다 할지라도, 인간세계의 권위는, 사실, 사람의 지혜와 덕행에 귀속되는 것이기 때문에, 왕실이라 할지라도 실질적인 지혜와 덕행이 있지 않으면 실질적인 권위는 왕실에 귀속될 수 없다. 이런 까닭에서인가 그 명분만을 남기고 왕실에 실권이 없는 지위를 품게 하여, 실권은 무사가문의 우두머리에게 장악하게 하려는 책략을 꾸몄던 것이므로, 곧 당시 사방의 호걸이 수도(교토)로 올라오는 일에 열중하여, 어린애 장난 같은 명분도 짐짓 남겨 이것을 이용한 까닭이다. 결국 그 근본을 찾으면, 일본의 무사에게 단지 한 개인의 기상(인디비쥬얼리티: individuality)이 없어서, 이런 비열한 소행을 수치로 여기지 않았던 것이다. (난세의 무사에게 단 하나의 기상이 없다)
옛날부터 세상 사람들이 등한히 간과하여 유의하지 않은 바이라도, 지금 특별히 그것을 기록하면, 일본의 무사에게는 오직 한 개인의 기상이 없는 모습을 엿볼 수 있는 한 가지 항목이 있다. 곧 그 항목이라는 것은 사람의 성명에 관한 것이다. 원래 사람의 이름은 부모가 짓는 것이어서, 성장 후 혹은 개명하는 일이 있어도, 다른 사람의 지시를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의식주에 관한 물품은 사람마다의 취향에 맡겨, 자유자재일 것 같아도, 대개는 외부의 물체의 의하여 움직여, 스스로 시대의 유행에 따르는 것이어도, 사람의 성명은 의식주의 물품과 다르고, 이것을 짓는 것에 타인의 지시를 받지 않는 것은 물론, 설령 친척과 친구라고할지라도, 내가 원해서 상담을 받는 것이 아니면, 참견할 수 있는 사항이 아니다. 사람의 일의 형태에 나타나는 것들 중에서 최고로 자유자재일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법에 따라서 개명을 금지하는 나라에 있어서는, 본래 그 법에 따름도 자유를 방해하는 것이 아니라도, 개명이 자유로운 국가에 있어서, 겐스케(源助)라고 하는 이름을 히라키치(平吉)라고 고치거나, 또는 그것을 고치지 않는 자유는, 전적으로 한 개인의 의사에 맡겨, 밤에 자는 데 오른쪽을 베게로 하고 또 왼쪽을 베게로 하는 자유와 같다. 조금도 타인과 관계가 있을 수 없다. 그런데 옛날부터 우리 일본의 무사가문에서, 이름 한 자를 하사하여 성을 허락하는 사례가 있다. 비굴하고 저열한 풍습이라고 할 수 있다. 우에스기 겐신(上杉謙信)의 용맹도 여전히 이것을 피하지 못하고, 쇼군 요시데루(義輝)의 이름 한 자를 하사받아서 데루토라(輝虎)로 개명한 일이 있다. 더욱 심한 것은, 세키가하라(関原) 전투 후에 천하의 통치권이 도쿠가와(徳川) 씨에게 귀속되어, 제후 도요토미(豊臣) 씨를 사칭하는 자는 두 본래 성으로 회복시켰고, 또 마쓰다이라(松平)를 사칭하는 자가 있다. 이와 같은 성 개명은 혹은 스스로 원하여 혹은 위의 명령에 의해 하사를 받는 일도 있으려니 할지라도, 어느 것도 그 내용에 있어서는 경멸할 수 있는 행동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어떤 사람은 생각하여, 개명과 성을 사칭하는 일은, 당시의 풍습이어서 사람이 마음에 두는 일이 아니어서, 지금부터 나무랄 수 없다고 하는 사람이 있어도, 결코 그렇지 않다. 타인의 성명을 사칭하여 마음에 만족스럽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의 심정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모두 같다. 그 증거에서는 아시카가(足利) 시대, 에이교(永享) 6년, 가마쿠라(鎌倉)의 구보 모치우지(公方持氏)의 아들이, 성년식을 하면서 이름을 요시히사(義久)로 짓는 데, 관령(管領: 쇼군 아래 고위직) 우에스기 노리사네(上杉憲実)는 여느 때처럼 무료마치(室町) 막부의 쇼군의 생전 이름을 원할 수 있다고 간언하였어도 듣지 않았던 일이 있다. 이때 모치우지(持氏)는 이미 자립의 의지가 있었다. 그 의지는 선이든 악이든, 다른 사람의 이름을 사칭하는 것은 천박한 행동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리라. 또 도쿠가와(徳川) 시대에, 호소카와(細川) 가문에 마쓰다이라(松平)의 성을 주려고 하는 데 사양하였다고 하여, 민간에서는 이것을 미담으로 하여 전했다. 진위가 상세하지 않을지라도, 이것을 아름답다고 하는 사람의 심정은 지금도 옛날도 같은 것을 명백하게 증명할 수 있다. 이상 기록한 바의 성명에 관한 사건은 그다지 큰 사건도 아니라도, 옛날부터 의리가 있고 용감하다고 칭하는 무사가, 사실은 의외로 비겁함을 알 수 있고, 또 한 가지는 권위를 장악한 정부의 힘은 무서운 것이어서, 사람 마음의 내부까지도 침범하여 통제하기에 충분하다는 내력을 밝히기 위하여, 몇 마디 말을 여기에 단 것이다.
앞에 조목조목 논한 것과 같이, 일본의 인간 교류는, 상고시대부터 통치자 부류와 피통치자 부류라는 두 가지 요소로 나뉘어, 권력의 편중을 이루어, 오늘날에 이르기까지도 그 세력이 변한 것이 없다. 백성 간에 자신의 권리와 의무를 주장하는 자가 없는 것은 본디 말할 것도 없다. 종교도 학문도 모두 통치자 부류에 안에서 농락당하여 일찍이 자립할 수 없다. 난세의 무사가 의리가 있고 용감한 것 같아도, 역시 홀로 개인적인 묘미를 모른다. 난세에서도 치세에서도, 인간 교류의 지대함에서 지극히 세밀함에 이르기까지, 편중이 이루지지 않은 곳이 없고, 또 이 편중에 의하지 않으면 일이라 하여 시행할 수 있는 것이 없다. 흡사 만 가지 병에 한 가지 약을 쓰는 것 같고, 이 한 가지 약의 효능으로써 통치자 부류의 힘을 보충하여 늘리고, 그 힘을 모아 집권자의 한 손에 귀속시키는 취향이다. 앞에서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왕조시대의 정치도 무사가문의 정치도, 호조(北条) 아시카가(足利)의 책략도 도쿠가와(徳川)의 책략도, 결코 요점을 달리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저것을 이것보다 좋다고 하고, 이것을 저것보다 나쁘다고 하는 것은, 이 편중을 이용하는 능란함과 서투름을 보고 그 득실을 판단할 따름. 능란하게 편중의 재주를 실시하여 최상의 권력을 집권자의 가문에 귀속시킬 수 있으면, 만사가 이미 이루어져 달리 또 바랄 수 있는 것이 없다. 옛날부터의 인습으로 국가(国家)라고 하는 문자가 있다. 이 가(家)라는 자는 백성의 집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고, 집권자의 가족 또는 가문의 이름이라고 하는 뜻이리라. 그러므로 나라(国)는 즉 집(家)이고, 집(家)은 곧 나라(国)이다. 심지어는 정부를 부유하게 하는 것으로써 어국익(御国益) 등으로 주장함에 이르렀다. 이와 같은 것은 곧 나라(国)가 집(家) 때문에 망하게 된 꼴이다. 이와 같은 생각으로써 정치의 근본을 정하기 때문에, 그 책략이 나오는 곳은 항상 편중적인 권력을 한 가문에 귀속시키고자 하는 것일 뿐이다. 산요(山陽)의 외사(外史), 아시카가(足利)의 정치를 평하여 꼬리가 커서 다룰 수 없다(尾大不掉: 미대부도: 부하의 세력이 강하여 군주가 자유롭지 못하다) 하여 그 큰 실책이라 하였다. 이 사람도 다만 편중이 실행되지 않아서 아시카가(足利) 가문에 권력이 귀속되지 않음을 논하는 것까지의 일이어서, 당시 유교학자의 생각에는 뛰어난 것이라도, 결국 집이 있음을 알고 나라가 있음을 알지 못한다는 논리이다. 만약 아시카가(足利)의 꼬리가 커서 다룰 수 없다(尾大不掉: 미대부도: 부하의 세력이 강하여 군주가 자유롭지 못하다)를 실책이라고 하면, 도쿠가와(徳川)의 머리 쪽의 큰 편중을 보고 이것에 만족하지 않을 수 없다. 대체로 편중의 정치는 옛날부터 도쿠가와(徳川) 가문보다 능란하여 뛰어난 것은 없다. 통일 후, 빈번히 자기 가문의 토목공사를 일으켜 제후의 재산을 쓰게 하고, 한편에서는 사방의 성채를 무너뜨려 번(藩)마다 성(城)의 토목공사를 중지시키고, 큰 배를 만드는 것을 금지하고, 무기를 수도에 반입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고, 제후의 처자식을 에도에 억류해서 성대히 저택을 짓도록 하여, 스스로 그들을 사치로 이끌어 인간에게 유용한 사업을 태만하게 하고, 여전히 그 여력이 있음을 보면, 혹은 하녀라 하든, 혹은 문지기라 하든, 제반의 핑계를 만들어 바쁘게 뛰어다녀 지치게 하여, 명령하여 실행되지 않은 것이 없고, 명령하여 따르지 않음이 없음은, 그 형국이 마치 사람의 수족을 꺾고 그와 힘을 겨루는 것과 같다. 편중의 정치에 있어서는 실제로 최고로 높고 최고로 훌륭한 본보기로 삼을 수 있는 것으로, 도쿠가와(徳川) 일가의 행위를 생각하면 능란함을 다하여 신묘함을 얻은 것이라 할 수 있다. 본디 정부를 세우는 데는 중심에 권력을 쥐고 전체를 통제하는 균형이 없을 수 없다. 이 균형을 반드시 써야함은 오직 일본뿐만 아니라 세계 만국 모두 그러하다. 야만적이고 문명이 없던 옛 일본인에게서도 여전히 이 이치를 이해하기는커녕, 수천 수백 년 전 시대부터 전제정치의 취지만은 잊지 않은 것 아닌가? 하물며 문물이 점차 열린 후의 세상에 있어서, 누군가 정부의 권력을 빼앗아버리고 그런 후에 문명을 기대한다고 하는 사람이 있으리라. 정치적 권력을 반드시 써야함은 학교의 어린이도 아는 바이다. 그렇다할지라도, 서양 문명적인 각 나라에서는 이 권력의 발원이 다만 한 곳이 아니고, 행정명령은 한 가지 길로 나올지라도, 그 행정명령은 국내의 인심을 모은 것이거나, 설령 혹은 완전히 그것을 모을 수 없어도, 그 인심에 의하여 다소의 내용을 바꾸어, 다양한 의견을 조합하여 다만 그 나오는 곳을 하나로 하는 것이다. 그러나 옛날부터 일본에서는, 정부와 국민은 다만 주객(主客)일 뿐만 아니라, 혹은 이것을 적대(敵対)라고 일컫는 것도 가능하다. 즉 도쿠가와(徳川) 정부에서 제후의 재산을 낭비하게 한 것은, 적에게 이겨 배상금을 받는 것과 다르지 않다. 국민에게 조선(造船)을 금지하고, 다이묘(大名)에게 성(城) 토목공사를 중지시킨 것은, 전쟁에서 승리하여 적국의 포대를 무너뜨린 것과 다르지 않다. 이것을 동포의 소행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대체로 세상의 사물에서는 첫걸음과 그 다음 걸음의 구분이 있는 것이어서, 초보 단계의 제 1보를 처리하는 데는, 이것으로 다음의 제 2보에 맞추려는 궁리가 없을 수 없다. 그러므로 다음 걸음은 처음 걸음을 지배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비유건대 속담에, 고생 끝에 낙이 온다하고 하고, 좋은 약은 입에 쓰다고 하는 것이 있다. 고통을 고통으로 하여 피하고, 쓴 약을 쓴 약으로 하여 싫어하는 것은, 인지상정이어서, 사물의 첫걸음에서만 정신을 쏟는 때는, 그것을 피하고 싫어하는 것도 매우 좋은 것 같아도, 다음의 두 번째 걸음인 안락함과 병의 치료에 착안하면, 이것을 참고 견디지 않을 수 없다. 저 권력의 편중도, 일시 국내의 인심을 유지하여 사물의 순서를 얻고자 하는 것에는 부득이한 추세여서, 결코 사람의 나쁜 마음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다. 소위 첫걸음의 처리이다. 게다가 그 편중의 교활함에 이르면, 일시적으로, 사람의 이목을 놀라게 하는 정도의 훌륭함에 이르는 것이라 할지라도, 다만 어찌하랴, 두 번째 걸음으로 나아가고자하는 때에 이르러, 곧 전년의 폐해를 드러내어 첫걸음의 적절함을 얻을 수 없었던 징후를 볼 수 있다. 이것으로써 생각하면, 전제적인 정치는 더욱 교묘해지면 그 폐해가 더욱 심해지고, 그 치세(治世)가 오래되면 그 나머지 폐해가 더욱 깊어져, 영원한 유전적인 독소가 되어 쉽게 제거할 수 없는 것과 같다. 도쿠가와(徳川) 시대의 평화와 같은 것이 곧 한 가지 사례이다. 오늘날에 이르러서 세상의 형편을 변혁시켜, 교류의 두 번째 걸음에 나아가고자 하여도, 그 일이 극도로 어려운 것이 아닌가? 그 어려운 이유가 무엇인가? 도쿠가와(徳川)의 전제가 교활하여 그 평화가 오래갔기 때문이다. 내가 이미 거친 말로써 이 사정을 평한 일이 있다. 이르건대, 전제의 정치를 미화하는 것은, 한가한 은둔자가 표주박을 애지중지하여 그 표주박을 닦는 것과 같다. 아침저녁으로 심신을 피곤하게 하여 닦아서 얻을 수 있는 것은, 여전히 둥근 표주박이어서, 다만 광택만 늘어났을 뿐. 시대의 추이가 바야흐로 변화하여 두 번째 걸음에 들어가려는 데 즈음하여, 여전히 구습을 사모하여 융통성을 모르고, 도저히 구할 수 없는 바의 물건을 구하여 뇌리에 상상의 그림을 그리고, 이것을 실제로 찾을 수 있다고 하여 번민하는 것은, 표주박이 이미 깨진 것을 알지 못하고 여전히 그것을 닦는 것과 같다. 어리석음도 역시 한층 더 심하다고 할 수 있다 하고. 이 거친 말은 혹시 들어맞는 일도 있으리라. 어떤 것도 모두 사물의 첫걸음에 근심하여 다음 걸음이 있음을 알지 못하고, 첫걸음에 멈추어 다음 걸음에 나아가지 않는 것이고, 첫걸음으로써 다음 걸음을 방해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것은 곧, 저 첫걸음의 편중으로써 사물의 순서를 얻게 하였다 하여도, 사실은 순서를 얻은 것이 아니고, 인간의 교류를 고사시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교류를 고사시킨 것이므로, 산요(山陽)의 외사(外史)의 이른바 꼬리가 커서 다룰 수 없다(尾大不掉: 미대부도: 부하의 세력이 강하여 군주가 자유롭지 못하다)도, 도쿠가와(徳川)의 머리 쪽의 큰 편중도, 어느 쪽도 득실을 결정할 수 없다. 결국 외사(外史) 등도 다만 사건의 첫걸음에 착안하여 표주박을 닦는 생각이 있을 따름.
시험적으로 도쿠가와(徳川)의 치세(治世)를 보는 데, 백성은 이 전제 편중의 정부를 위로 받들고, 회고하여 세간의 형편을 살펴 사람의 품행이 어떠한지를 물으면, 일본국 가운데 수천만의 인류는 각 수천만 개의 상자 안에 갇혀, 또 수천만 개의 장벽에 차단된 것과 같아서, 전혀 움직일 수 없다. 사농공상(士農工商), 그 신분을 구별하는 것은 물론, 무사 가족의 가운데서는 봉록을 세습하고 벼슬을 세습하여, 심지어는 유교 관리와 의사와 같은 것도 그 집안에 정해진 일이 있어 대대로 직업을 바꿀 수 없다. 농업에도 문벌이 있고, 상업과 공업에는 주식(株式)이 있어, 그 칸막이가 견고함이 쇠와 같고, 어떤 힘을 사용해도 그것을 깨뜨릴 수 없고, 사람마다 재간이 있어도 나아가 일을 할 수 있는 목적이 없기 때문에, 다만 물러서서 몸을 지키는 방책을 구할 뿐. 수 백 년 오래되어, 그 습관 마침내 사람의 본성이 되어, 소위 과감한 정신을 잃어버리기에 이르렀다. 비유건대 가난한 무사와 가난한 백성이 무지하고 문맹이어서 다른 사람의 경멸을 받고, 매년 가난은 또 가난에 빠져, 그 고통은 인간 세상에 비교할 수 있는 것이 없는 것 같아도, 스스로 고난을 거역하여 용감히 일을 하려는 용기가 없다. 예기치 않게 찾아오는 고난에는, 잘 감당하여도, 스스로 고난을 예상하여 미래의 행복을 구하는 자가 없다. 가난한 무사와 가난한 백성뿐만 아니라, 학자도 역시 그러하고, 상인도 역시 그러하다. 일반적으로 이것을 평가하면, 일본국의 사람은, 보통 사람들에게 갖추어질 수 있는 일종의 운동력이 결여되어 정체되어 흐르지 않는 극한상황에 빠진 것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이 곧 도쿠가와(徳川)의 치세(治世) 250년간, 이 나라에 대업을 기획하는 자, 드믄 이유이다. 최근 번(藩)의 폐지라는 한 가지 행동이 있었어도, 전국의 백성, 돌연히 그 품성을 바꿀 수 없었고, 다스리는 자와 다스림을 받는 자의 경계는 지금 여전히 분명하여 조금도 그 내용을 고치지 않기 때문이다. 그 뿌리를 찾으면 모두 권력의 편중으로 부터 오는 것이어서, 사물의 두 번째 걸음에 주의하지 않은 폐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 폐해를 살펴서 편중이라는 병을 제거하지 않으면, 천하는 난세에서도 치세(治世)에서도, 문명은 결코 진보하는 일이 있을 수 없다. 오직 이 병의 치료법은, 당장 현재 정치가의 직무이므로, 이것을 논하는 것은 본서의 취지가 아니고, 우리는 다만 그 병의 병세를 제시한 것일 뿐. 대체로 역시 서양 여러 나라의 국민에 있어서도, 빈부강약이 똑같지 않다. 그 부강한 자는 가난하고 약한 자를 억제하는 데, 각박하고 잔인한 일도 있으리라, 오만하고 무례한 일도 있으리라. 가난하고 약한 자도 역시 이름과 이익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아첨하는 일도 있으리라, 다른 사람을 속이는 일도 있으리라. 그 교류의 추악함은 결코 우리 일본인과 다른 것이 없고, 혹은 일본인보다 심한 경우도 있을 수 있다할지라도, 그 추악한 즈음에, 스스로 사람마다 안에 홀로 개인의 기상을 보존하여 정신의 순조로운 흐름을 막지 않는다. 그 각박함과 오만함은 다만 부강하기 때문이고, 특별히 의지하는 바가 있지 않다. 그 아첨과 사기는 다만 가난하고 약하기 때문이고, 달리 두려워하는 바가 있지 않다. 그런데, 부강과 빈약은 자연스러움이 아니고, 사람이 지닌 지혜의 힘으로써 이룰 수 있다. 지혜의 힘으로써 그것을 이룰 수 있는 목적이 있으면, 가령 실제로 이룰 수 없어도, 사람마다 스스로 자신의 몸에 의존하여 자립과 진취의 길로 향하여 갈 수 있다. 시험적으로 저 가난한 사람을 향하여 물으면, 입으로 말할 수는 없다할지라도, 마음에서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는 것이 있으리라. 나는 빈곤하기 때문에 부유한 사람에게 순종하는 것이다, 빈곤한 시절만 저 사람에게 억제당하는 것이다, 나의 순종은 빈곤과 함께 사라질 수 있고, 저 억제는 부귀와 함께 가버릴 것이라고. 대체로 정신의 순조로운 흐름이라 함은 이 정도의 기상을 가리켜 이르는 것이다. 이것을 우리 일본인이, 역사 이래 세상에서 유행하는 편중의 법칙에 억매여, 다른 사람과 접촉하면 그 빈부강약에 구애되지 않고, 지혜와 어리석음과 현명함과 불초(不肖)를 불문하고, 다만 그 지위 때문에 혹은 이것을 경멸하고 혹은 이것을 두려워하여, 추호의 활기도 보존하지 못하고, 자신의 칸막이 안에 고착하는 것과 비교하면, 천양지차가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권력이 편중되면 치세와 난세 모두 문명은 진보할 수 없다)
이 권력의 편중으로부터 해서 전국의 경제에 끼친 영향도 소홀히 간과할 수 없는 것이다. 대체로 경제에 대한 논의는 대단히 뒤얽힌 것이어서, 이것을 양해하는 것은 매우 쉽지 않다. 각 영주국의 사태는 시대 상황에 의하여 한결같은 것이 아니므로, 서양 여러 나라의 경제론으로써 직접 우리나라에 적용할 수 없는 것은 본래 말할 것도 없다할지라도, 여기서 어떤 영주국에 있어서도 어떤 시기에 있어서도, 일반적으로 통용할 수 있는 두 가지 법칙의 비결이 있다. 즉 그 제 1 법칙은 재화를 축적하고 또 없애는 것이다. 그런데 이 축적하는 것과 없애는 것의 두 가지 방식의 관계는, 최고로 긴밀하여 결코 서로 떨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축적은 곧 없애는 수단이고, 없애는 것은 곧 축적의 방편이다. 비유하면 봄의 시절에 종자를 뿌리는 것은 가을의 곡식을 축적하는 수단이어서, 의식주를 위하여 재산을 없애는 것은, 신체를 건강하게 유지하여 그 힘을 기르고, 또 의식주에 관한 물건을 축적하는 방편임과 같다. 이 축적과 없앰의 때에, 혹은 없애서 축적할 수 없는 것이 있다. 화재와 수재와 같은 것이 이것이다. 혹은 사람의 마음이 애호하여 사치를 좋아하여, 헛되이 재물을 허비하여 흔적 없는 것이 있다. 이것 역시 물과 불의 재난과 다르지 않다. 경제의 요점은 결코 소비를 금하는 것이 아니고, 다만 이것을 소비하여 이것을 없앤 후에, 얻은 바의 물건의 다소를 보고 그 소비의 득실을 판단할 뿐이다. 그 얻은 재물이, 소비보다 많으면, 이것을 이익이라고 칭하고, 소득과 소비가 서로 같으면 이것을 이익이 없다고 칭하고, 소득이 오히려 소비보다도 작거나, 혹은 전혀 소득이 없으면, 이것을 손실이라고 칭하고 또 전손(全損)이라고 칭한다. 경제가의 목표는, 항상 이 소득으로 하여금 손실보다 많도록 하여, 차츰 축적하고 또 소비하여 전체 국가의 부유함을 이루고자 함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축적과 소비라는 두 가지 조목은, 어느 것을 수단으로 하고 어느 것을 목적으로 할 수 없고, 어느 것을 앞이라 하고 어느 것을 뒤라고 할 수 없다. 전후완급의 구별이 없고, 어렵고 쉽고 가볍고 무거움의 차이가 없다. 바로 같은 형태의 일이어서, 바로 같은 형태의 마음으로써 처리할 수 있는 것이다. 생각건대 축적하여 잘 이것을 없애는 방법을 알지 못하는 자는, 끝내 크게 축적할 수 없다. 소비하여 없애서 또 잘 축적하는 노력이 없는 자는, 끝내 크게 없애버릴 수 없기 때문이다. 부국의 토대는 다만 이 축적과 소비를 성대히 함에 있을 뿐이다. 그 성대한 국가를 일러서 이것을 부국이라고 칭한다. 이것에 의하여 생각하면, 국가재산의 축적과 소비는 전체 국가의 인심으로써 처리하지 않을 수 없다. 이미 국가재산이라는 명칭이 있으면 국가마음이라는 명칭이 있음도 근거가 없는 것이 아니다. 국가재산은 국가마음으로써 처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정부의 세입과 세출도 국가재산의 일부분이기에, 서양 여러 나라에서 정부의 회계를 국민과 논의하는 것도, 그 취지는 생각건대 여기에 근거하는 것이다. 제 2 법칙, 재산을 축적하여 또 이것을 소비하는 것에는, 그 재산에 상응할 수 있는 지혜의 힘과 그 일을 처리하는 관습이 없을 수 없다. 이른바 이재(理財)의 지혜, 이재(理財)의 습관이라는 것, 이것이다. 비유하면, 천금을 받은 아들, 그 집안을 망쳐먹고, 도박에서 이긴 자, 오래 그 재산을 유지할 수 없는 것과 같다. 어느 것도 모두 그 재산과 그 지혜의 힘 습관과 걸맞지 않은 것이다. 지혜의 힘이 없고 습관이 없는 자에게 과분한 재산을 주는 것은, 헛되이 그 재산을 잃을 뿐만 아니라, 어린애의 손에 예리한 칼을 맡기는 것과 같고, 오히려 그것으로써 몸을 해치고 다른 사람을 상하게 하는 화를 불러올 수 있다. 고금에 그 사례가 매우 많다.
위에 기술된 바의 두 가지 법칙이 역시 옳다면, 이것을 비추어 옛날부터 일본에서 시행된 경제의 득실을 알 수 있다. 왕조시대의 일은 잠시 중지하고, 가쓰잔 하쿠유(葛山伯有) 선생의 전제연혁고(田制沿革考)에 이르기를,
겐페이(源平) 난에 이르러, 징세는 관아에 의하지 않는다. 국민이 받드는 곳을 알지 못한다. 하나의 마을 하나의 장원의 땅이, 관청을 받들고, 다이라(平) 가문을 받들고, 미나모토(源) 가문을 받든다. 간혹 역시 간사한 도둑 무리들 때문에 식량을 빼앗기고, 호소할 것이 없는 백성, 도탄에 빠진다. 끝내 미나모토(源) 공의 권력이 행사되어, 영주국에 슈고(守護: 지방관)를 두고, 장원에는 지토(地頭: 마름)을 세운다. 고쿠시(国司: 지방관)와 쇼시(荘司: 장원의 마름)는 여전히 존재하므로, 백성은 두 명의 군주를 받든다고 할 수 있다. 중략 아소카가(足利) 씨의 영주국과 군(郡)을 다스리는, 다른 정치적 시행령이 없고, 영주국과 군(郡)과 마을과 장원 모두를 나누어 무사에게 주어, 조세는 그 주인의 지위에 맡겨, 별도로 50분 1의 과세를 할당하고, 스스로 받들도록 한다. 비유건대 조세로 내는 쌀 50석을 낼 수 있는 땅은, 별도로 1석을 내도록 하여 수도로 운송하여, 쇼군의 주방재료로 할당하였던 것이다. 혹은 늘려서 20분의 1에 이르렀던 해도 있다. 슈고(守護: 지방관)와 지토(地頭: 마름)는 스스로 그 세출을 헤아려 세입을 통제하기 때문에, 두 가지 조세(쇼군과 슈고[守護: 지방관]와 지토[地頭: 마름]에게 내는 이중세)이다. 중략 또 단센(段銭: 조세의 일종), 무네베츠(棟別: 조세의 일종), 구라야쿠(倉役: 조세의 일종)는 시기를 골라 징수한다. 단센(段銭: 조세의 일종)이라 함은 논에 걸어서 돈을 내게 하는, 지금의 다카가카리(高掛り: 부가세)와 같다. 무네베츠(棟別: 조세의 일종)라 함은 가구별로 할당해서 은(銀)을 내도록 하는 것이고, 지금 말하는 가기야쿠(鍵役) 등과 같다. 구라야쿠(倉役: 조세의 일종)라 함은 부유한 백성과 부유한 상인에만 걸어 할당하는 것이고, 지금 말하는 부겐와리(分限割)라고 하는 것과 같다. 구라야쿠(倉役: 조세의 일종)는, 요시미츠(義満) 공의 시대에서는 4계절에 할당되었고, 요시노리(義教) 공의 시대에는 1년에 12회에 이르고, 요시마사(義政) 공에서는 11월에 아홉 번, 12월에는 여덟 번에 이르렀기에, 농민은 논과 집을 버리고 도망쳐 흩어져, 도부꾼은, 문을 닫고 재물을 교환하지 않은 것이 오닌기(応仁記)에 나오고, 운운. 또 이르기를, 도요토미(豊臣) 가문이 통일한 후, 분로크(文禄) 3년에 이르러, 법률이 있는 바는, 천하의 조세 3분의 2는 지토(地頭: 마름)가 징수하고, 3분의 1은 농민의 몫으로 할 수 있다고 되어 있고, 운운. 또 이르기를, 여기에 국가 초기 《도쿠가와[徳川]》에 이르러, 승전국의 가혹함을 혐오해, 조세 3분1을 완화하여 《4공 6민의 법을 [四公六民の法: 농산물의 4할을 영주에게 바치고 6할을 농민이 갖는 조세법] 말한다》 백성의 극심한 고통을 해결하고, 운운.
위의 연혁고(沿革考)의 주장에 의거하면, 옛날부터 우리나라의 조세는 심히 가혹했다는 것으로 의심의 여지가 없다. 도쿠가와(徳川) 초기에 이르러 조금 완화된 것도, 세월이 경과함에 따라 시도 때도 없이 옛날의 가혹한 조세로 돌아갔던 것이다. 또 옛날부터 세상의 지식인라고 칭하는 사람의 주장에, 농민은 나라의 근본이라도, 공업과 상업의 두 백성은 겨우 세금을 내거나 내지 않아서 앉아서 배를 채우는 것, 이치에 있어서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하여, 빈번히 공업과 상업을 나무란 것도, 충분히 사실을 밝히면, 상공인은 결코 편안한 사람들이 아니다. 드물게 부유한 상인과 큰 장사꾼은 편안하게 먹는 자도 있으리라할지라도, 이는 다만 그 재산과 자본에 의지하여 생계를 세운 사람이기 때문에, 농사를 많이 짓는 사람이 많은 논을 소유하고 앉아서 먹은 것과 다르지 않다. 그 아래의 가난한 상인에 이르러서는 가령 직접 공공 세금을 내지 못하는 것도, 그 생산의 어려움은 농민과 다르지 않다. 일본에서는 옛날부터 공업과 상업의 세금이 없다. 그 세금이 없기 때문에, 이것을 업으로 하는 자도 스스로 증가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그 증가함이야 역시 반드시 한계가 있을 것이다. 이 한계는 농업의 이익과 공업 및 상업의 이익이 서로 균형을 이루는 데 이르러 멈출 수 있다. 비유건대 4공 6민의(四公六民の: 농산물의 4할을 영주에게 바치고 6할을 농민이 갖는) 세금 땅을 경작함은, 그 이익, 본래 풍족함이 아니라할지라도, 평년이라면 여전히 처자를 부양하고 굶주림을 면할 수 있다. 상공인이 도회지에 거주하면서 세금이 없는 직업을 영위함은, 농민에 비하면 편리한 것 같이 보여도, 여전히 굶주림과 추위를 면하지 못하는 자가 많다. 그런 원인이 무엇인가? 동료의 경쟁에 의한 것이다. 생각건대 전국의 상공업에는 한계가 있어, 약간의 인원이 있으면 이것을 할 수 있도록 정해진 곳에, 직무를 늘리지 않으면서 인원만을 늘리면, 10명으로 할 수 있는 상업을 2, 30명의 손에 나누어, 100명에서 받을 수 있는 일당임금을 2, 300명에게 나누어주어, 3할의 중개료를 얻는 장사도 1할로 감소하고, 2관문(2000문)을 받을 수 있는 임금도 500문으로 내려가고, 스스로 동료의 경쟁 사업으로써 스스로 그 이윤을 박하게 하여, 오히려 다른 사람의 편리를 위하여 농민도 역시 이 편리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상공업이라는 명칭은 세금이 없다고 할지라도, 사실은 세금이 있는 농업과 다르지 않다. 혹은 상공업에 이익이 많은 경우가 있으면, 그 많은 이유는, 정부에서 지식인의 말을 이용하여, 다양한 장애물을 설치하여, 농민이 상업으로 돌아가는 것을 막아, 그 사람 수의 비율이 여전히 낮기 때문에, 약간 독점적인 이익을 얻도록 하였던 것이다. 이 사정에 의하여 생각하면, 농업과 상공업이 틀림없이 그 이해를 같이하여, 함께 국내의 유용한 사업을 하는 것이므로, 그 명분에서 세금이 있는 것과 세금이 없는 것의 차별이 있다할지라도, 누구도 한가한 백성이 아니다. 쌍방 모두 국가의 재산을 축적하는 종류의 백성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인간의 교류에 있어서, 다스리는 자 부류와 다스림을 받는 자 부류로 구별한 것을, 지금 여기서 경제상에서는 생산자와 비생산자의 두 종류로 나눌 수 있다. 곧 농업과 공업과 상업 이하의 다스림을 받는 자라는 종족은 국가의 재산을 생산하는 자여서, 무사 이상의 다스리는 자의 종족은 이것을 생산하지 않는 자이다. 혹은 앞 문단의 문자를 이용하여, 하나를 축적하는 종족이라 하고, 하나를 없애는 종족이라고 하는 것도 가능하다. 이 두 종족의 관계를 보는 데, 그 노력과 안일과 손해와 이익의 형편, 본래 공평하지 않다할지라도, 인구가 많아 자본의 비율을 넘고, 서로 다투어 직업을 구하는 형세에 닥치면, 부자는 일탈하고 가난한 자는 일하지 않을 수 없다. 이것 역시 오직 우리나라뿐만 아니고, 세계적으로 보편적이 폐해이어서, 어떻게라도 할 수 없는 것이어서 깊이 나무랄 것이 못된다. 그리고 또한 무사 이상, 다스리는 자 부류의 사람을 비생산 또 소비의 종족이라고 지칭한다고 할지라도, 정부에서 문무(文武)에 관한 시책을 시행하여 세상의 사물의 순서를 정리하려 함은, 경제를 돕는 근본이므로, 정부의 세출로써 일률적으로 이것을 무익한 비용이라고 할 수 없다. 다만 우리나라의 경제에 있어서, 특히 불합리하여 특히 문명국과 다른 바는, 이 동일한 방식의 일인 국가재산의 축적과 소비를 처리하는 데, 동일한 방식의 마음으로써 하지 않는 한 가지 일에 있다. 옛날부터 우리나라에서 통용되는 법에 있어서, 백성은 항상 재물을 축적하여, 비유건대 4공 6민의 세법(四公六民の稅法: 농산물의 4할을 영주에게 바치고 6할을 농민이 갖는 조세법)이라 하면, 그 6할로써 겨우 부모와 처자를 부양하고, 나머지 4할은 정부에 납부하여, 일단 자신의 손을 떠나면 그 가는 곳을 알지 못하고, 그 어떤 쓰임에 이바지하는지를 알지 못하고, 남는 것을 알지 못하고, 부족함을 알지 못한다. 일반적으로 말하면 이것을 축적함을 알되 그 소비되는 길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정부도 역시 이미 이것을 자기 손에 수취한 때는. 그 오는 곳을 잊고, 그 어떤 수단에 의하여 생겼던 것을 알지 못하여, 흡사 이것을 하늘이 준 물건으로 생각하여, 이것을 소비하여 없애는 데 하나도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이 없다. 일반적으로 말하면 이것을 소비하여 없애는 것을 알되 축적하는 길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경제의 제 1법칙에, 축적과 소비는 확실히 동일한 방식의 일이어서, 틀림없이 동일한 방식의 마음으로써 처리해야 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지금 이 상황을 보면, 동일한 방식의 일을 하는 데 두 가지 방식의 마음으로써 하여, 이것을 비유하면 한 글자의 문자를 쓰는 데, 왼쪽 변과 오른쪽 방을 나누어 두 사람의 손을 사용하는 것과 같다. 어떤 달필이어도 글자를 이룰 수 없음이야 분명하다. 이와 같이 위와 아래의 마음을 두 가지 방식으로 나누어, 각각 그 보는 바의 이익을 달리하여, 상호간에 서로 알지 못할 뿐만 아니라, 서로 그 행동을 보고 서로 의심하기에 이르렀다. 어찌 경제의 부조리를 낳지 않을 수 있는가? 소비해야 함에 소비하지 않고, 소비해서는 안 됨에 소비하여, 도저히 그 비율이 적절할 수 없는 것이다. 아시카가 요시마사(足利義政)가 대란의 한 가운데 은각사(銀閣寺)를 일으키고, 하나노고쇼(花御所)의 기와지붕 주옥(珠玉)에 금과 은을 치장하고 60만 양의 돈다발, 다카쿠라 어소(高倉御所)의 미닫이 한 칸에 2만 전을 소비하는 사치여서, 여러 영주국의 백성에게 단센(段銭: 조세의 일종), 무네베츠(棟別: 조세의 일종)를 독촉하여, 정부에 한 푼의 여유재산도 없음은, 위와 아래 함께 가난한 시절이다. 태합(太閤: 도요토미 히데요시)이 내란 후에 오사카 성을 짓고, 다음에 또 조선을 정벌하여, 밖은 전쟁의 쓸데없는 비용, 내부는 향연의 사치를 다하여, 아직 금과 병마가 비축되어 있음은, 아래는 가난하되 위는 번성하고 부유한 시절이라고 할 수 있다. 또 역대 가운데서 현명함이라는 이름이 있는 호조 야스토키(北条泰時) 이하 도키요리(時頼)와 사다토기(貞時) 등 여러 제후는, 그 스스로 받드는 것이 틀림없이 검소 검약하였던 것이리라. 아래로 도쿠가와(徳川) 시대에 이르러, 그 초기시대에는 현명한 제후와 현명한 재상을 배출하여. 정부의 체재는 하나도 흠잡을 수 있는 것이 없다. 이것을 요시마사(義政)의 시대 등과 비교하면 비교가 안 된다할지라도, 민간에 부유함을 가져와 일을 기획한 자가 있음을 듣지 못한다. 호조(北条)에 이르러 도쿠가와(徳川)의 유물로 하여금 오늘날에 전해진 것 중에서 가장 두드러진 것은, 가마쿠라(鎌倉)의 고산(五山)이고, 에도 및 나고야의 성이고, 닛코산(日光山)이고, 도에이산(東叡山)이고, 조쇼지(増上寺)이고, 어느 것도 성대하지 않은 것이 없어도, 오직 의심할 수 있는 것은 그 시대의 일본에서 그런 성대한 건축공사를 일으킬 수 있었다는 한 가지 사건이다. 과연 전국의 경제의 비율이 합당한 것인지, 우리는 결코 이것을 믿지 않는다. 지금 국내에 있는 성곽은 물론, 신사(神社)와 절의 고적이라 하여, 혹은 큰 불상과 큰 종, 혹은 대가람 등의 장대한 것이 있음은, 대개 모두 신도(神道)와 불교가 성행한 징표가 아니고, 독재군주가 성행함을 증명함에 충분할 따름. 드물게 수도와 물길 등의 대 공사를 일으킨 것도 있어도, 결코 백성의 의사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단지 그 시대의 영주와 재상과 관리의 기호에 따라, 소위 백성의 질병을 물어 그 편리함을 헤아렸던 것 뿐. 본래 고대 무지한 세상의 한 가운데이어서, 정부에서 홀로 일을 함은 필연적인 추세여서, 누가 이것을 의심하는 자 있겠는가? 지금부터 그 행동을 시비하는 이유가 전혀 있을 수 없다할지라도, 국가 재산의 축적과 소비는 그 길을 달리하여, 경제상에 한없이 부조리를 낳고, 현명한 군주와 현명한 재상의 시대에서도 폭군과 오리(汚吏)의 시대에서, 모두 이 폐해를 피하지 못했던 것은 분명하게 증명할 수 있는 일이므로, 후세에 적어도 여기에 분별력을 지닌 자가 있으면, 다시 그 전철을 밟아서는 안 된다. 현명한 군주와 현명한 재상은 반드시 유용한 일에 재산을 써야 한다고 할지라도, 그 유용이라 함은 군주와 재상의 의지로써 결정하는 바의 유용이므로, 사람마다 기호에 따라 무(武)를 유용하다고 하는 자도 있을 것이고, 문(文)을 유용하다고 하는 자도 있을 것이고, 혹은 진실로 유용한 일을 유용하다고 하는 일도 있을 것이라 할지라도, 또는 무용한 일을 유용하다고 하는 일도 있으리라. 아시카가 요시마사(足利義政)의 시대에, 정부로부터 명령하여 일절 채무 약속을 깨고 이것을 덕정(徳政)이라고 지칭한 일이 있다. 도쿠가와(徳川)의 시대에도 이것과 비슷한 사례가 없는 것이 아니다. 이와 같은 것들도 정부로부터 덕(德)이라고 말하면 덕(德)인 것 같다. 아무튼 국내의 축적하는 자는 소비하는 자의 조치에 관하여 조금도 말참견을 하지 않은 풍습이므로, 소비하는 자는 세출을 헤아려 세입을 통제하는 것이 아니고, 세출과 세입 모두 한계가 없고, 다만 하층민의 생계를 살펴서 종전의 형편에 멈추면, 이것을 최고의 인정(仁政)이라 하여 달리 되돌아보는 바가 없다. 매년 동일한 방식의 일을 반복하여, 이곳에서 축적하는 것은 저 곳에서 소비하고, 한 글자의 문자를 두 사람에게서 써서, 그로써 수백 년의 오늘에 이르고, 되돌아보아 옛날과 지금을 비교하여 전국 경제의 유래를 보면, 그 진보가 느린 것 실로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 한 가지 사례를 들어 말하는 데, 도쿠가와(徳川)의 치세(治世) 250년, 국내에 조금의 병기를 사용한 일이 없음은, 역사상 유례가 없는 평화라고 할 수 있다. 이 세계에 유례가 없는 평화로운 세상에 살면, 일본인이 어리석다할지라도, 공예의 길이 피어나지 않았다할지라도, 가령 그 축적은 서행했다할지라도, 250년 동안에는 경제적으로는 장족의 진보를 할 수 있음이 당연한데, 사실에 있어서는 그렇지 않은 것은 왜인가? 오직 이것은 쇼군과 여러 번주(藩主)의 부덕(不德)만으로 돌릴 수는 없다. 만약 혹시 이것을 영주와 재상과 관리의 부덕(不德)과 무재주로 인하여 온 재앙으로 하면, 그 부덕(不德)과 무재주는 그 사람들의 죄가 아니고, 그 지위에 있으면 멈출 수 없는 부덕(不德)과 무재주이지 않을 수 없는 추세로 되어, 그 추세에 직면하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경제의 한 방향에서 논하면, 현명한 군주와 현명한 재상도 의외로 의지할 수 없고, 천하태평도 의외로 효과가 적은 것이다. 어떤 사람의 주장에, 전쟁은 실로 두려워해야 하고 혐오해야 하는 재난이라도, 그 나라의 경제에 영향을 미치는 곳은, 이것을 사람 몸에 비유함에 칼로 벤 상처와 같고, 한 때는 사람의 이목을 놀라게 할지라도, 생명의 기본적인 부분과 관계가 없으면, 그 치유는 뜻밖에 빠른 것이고, 다만 경제에 관하여 각별히 두려워해야 함은, 칼로 벤 상처가 아니고 저 폐결핵과 같이, 달마다 날마다 차츰 쇠약한 병에 있다고. 이 주장에 의하여 생각하면, 우리 일본의 경제에 있어서도, 본래 권력의 편중으로부터 축적하는 자와 소비하는 자의 두 부류로 나누어, 쌍방 간에 기맥을 통하지 않게 하여, 달마다 날마다 쇠약하지 않으면, 해마다 달마다 동일한 형편에 머물러, 혹은 수백 년간에 조금 진보한 것도 도저히 성대하고 활발한 지경에 들어갈 수 없어서, 도쿠가와(徳川) 씨의 250년의 치세(治世)에서도 두드러진 진보를 보지 못했음은, 소위 경제의 폐결핵이라 할 수 있다. 《옛날부터 일본 학자들의 의견에, 정부의 간죠부교[勘定奉行: 에도막부의 직명으로 재정을 맡음]와 군부교[郡奉行: 에도막부의 지방행정관]는 과세를 나누지 않을 수 없다고 하였다. 생각건대 그 취지는, 간죠부교[勘定奉行: 에도막부의 직명으로 재정을 맡음]에게 세금징수권을 맡기면 스스로 가혹한 징수에 빠지기 때문에, 백성에게 가까운 군부교[郡奉行: 에도막부의 지방행정관]의 권한으로써 이것을 균형 잡으려는 기대이리라. 본래 한 정부의 같은 구멍 안에 있는 관리에게 과세를 나누는 것도, 사실은 이익이 없다 할 수 있을지라도, 그 의견의 뜻을 미루어 생각하면, 소비하는 사람의 한 손에 재정권을 부여하는 해로움은, 옛날 사람도 암암리에 알지 못한 것이 아닌 것이다.》
경제의 제 2법칙에는, 재산을 축적하여 또 이것을 소비하는 데는, 그 재산에 상응할 수 있는 지혜의 힘과 그 일을 처리하는 관습이 없을 수 없다고 한다. 대체로 이재(理財)의 요령은, 활발하고 과감한 행동과 검소하고 열성적인 힘에 있는 것이어서, 이 두 가지가 그 적당함을 얻어, 상호 서로 억제하고 상호 서로 평형을 이루어, 처음 축적과 소비의 성대함을 이룰 수 있는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고 한편에 편중되어, 과감한 행동이 없고 검소를 오로지하면, 그 폐해야 탐욕과 인색에 빠지고, 검소의 취지를 잊고 과감한 행동을 마음대로 하면, 그 폐해야 낭비와 남용으로 되어, 어느 것도 이재(理財)의 근본에 위배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전 문단에서 말한 바와 같이, 전국의 백성을 축적하는 사람과 소비하는 사람의 두 종족으로 구분하여, 그 경계가 판연할 때는, 그 종족 전체의 품행에 있어서 반드시 한편에 편중되어, 갑(甲)의 종족에서는 검소와 열성의 요소를 지닌 것도, 과감한 행동을 잃고 인색이라는 폐단에 빠지지 않을 수 없고, 을(乙)의 종족에서는 활발함과 과감함의 요소를 지닌 것도, 검소의 취지를 읽고 낭비의 폐단에 빠지지 않을 수 없다. 일본인은, 그 교육이 보편적이 아니라할지라도, 천품이 어리석지 않기 때문에 이재(理財)라는 한 가지 일에 있어서 특별히 서투르다고 할 이유가 없다. 다만 그 인간 교류의 추세에 의하여 나누어서는 안 되는 직업을 나누어 각 종족의 습관을 이루어, 마침내 그 품행을 특화하여 서투름을 드러내기에 이른 것이다. 그 품행의 소질은 결코 악성이 아니고, 적절하게 이것을 조화시키면 과감함과 활발함, 검소와 열성이라 칭하는 것을 생성하여, 이재(理財)에 둘도 없는 용도를 이룰 수 있음이 당연하여도, 그 용도를 이루지 못하고 오히려 낭비와 남용, 탐욕과 인색의 형태로 변했던 것은, 틀림없이 요소의 악성이 아니라, 조화의 적절함을 잃었던 것이다. 이것을 비유하면 산소와 질소를 조화롭게 하면 공기라는 명칭의 물체를 생성하여, 동식물의 생기에 빠질 수 없는 효과가 되기 마련이어도, 이 두 가지 원소를 분석하여 각각 달리할 때는, 효과가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생물의 목숨을 해치치는 것과 같다. 옛날부터 우리나라의 이재(理財)의 상황을 보는 데, 돈을 써서 일을 하는 자는 항상 무사 이상의 다스리는 자의 부류이다. 정부에서 토목공사를 일으켜, 문무(文武)에 관한 일을 기획함은 물론, 대체로 세간에서 글을 읽고, 무예를 강의하고, 혹은 기예를 연마하고, 혹은 풍류를 즐기는 등, 그 형편은 유용함에서도 무용함에서도, 한 몸의 의복과 식량을 도모하는 외에 여유를 만들어, 인생의 조금 고상한 부분에 마음을 쓰는 자는, 반드시 무사 이상에 한하여, 그 품행도 스스로 영민하고 활발하여, 무리하게 일을 하는 기력이 부족하지 않다. 실제로 우리 문명의 근본이라고 칭할 수 있는 것일지라도, 다만 어찌하랴, 이재(理財)라는 한 가지 사항에 이르러서는 수천 수백 년의 추세에 따라, 나감을 알되 들어옴을 모르고, 흩어짐을 알되 축적함을 모르고, 있는 물건을 소비함을 알되, 없는 물건을 만드는 것으로 모르는 자들이므로, 그 즈음에 스스로 낭비와 남용의 폐단을 피할 수 없다. 게다가 인습이 오래되어, 마침내 일종의 풍속을 이루어, 이재(理財)를 논의하는 것은 군자의 일이 아니라 하여, 이것을 알지 못함을 수치로 하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이것을 아는 것을 수치로 삼아, 군자의 최고 상류라는 자와, 이재(理財)에 최고로 서투른 자는 두 글자가 같은 의미임에 이르렀다. 우회함도 또한 극도에 이르렀다고 할 수 있다. 또 한편에서 농부와 상인 이하의 다스림을 받는 자의 종족을 보면, 상류의 종족에 대하여 분명히 경계선을 정하여, 흡사 별도로 한 마당의 하류 세계를 열어, 인정과 풍속을 특화하여, 다른 사람의 억제를 당하고, 다른 사람의 경멸을 받아, 말하는 데 호칭이 다르고, 앉는 데 좌석을 차별하여, 의복에서도 제한이 있고, 법률에서도 차별이 있고, 심지어는 생명과 관련된 권한과 의무를 다른 사람에게 맡기는 데 이르렀다. 도쿠가와(徳川)의 법률서에,
아시가루(足軽: 하급무사) 신분으로, 하찮은 상인과 농부의 신분으로서 법에 어긋나는 욕설 등 부주의한 처사 때문에 부득이 칼로 베어 죽인 자는 심문을 받고 틀림없다면 죄가 되지 않는 것 (법률조항이므로 상세한 내용을 알 수 없음: 역자)
이라고 한다. 이 법에 의거하면, 농부와 상인은 항상 수천만 명의 적과 접촉하는 것과 같고, 그 무사함은 다행히 피하는 것 뿐. 이미 생명을 안심할 수 없고, 어떻게 다른 것을 되돌아보는 여유가 있으랴? 염치와 공명심은 몸을 바쳐 소진해 끝장이 났고, 또 학문과 기예 등에 뜻을 둘 수 있는 여유를 남기지 않고, 다만 위의 명령에 따라 정부의 비용을 제공할 뿐이어서, 심신 모두 속박을 당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할지라도 인류의 천성에 있어서는, 마음의 작용은 어떤 방식의 수단을 써도 완전히 이것을 바짝 묶어 가둘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어디에서도 틈을 구하여 간신히 빠지는 길이 없는 것이 아니다. 이제 이 농부와 상인 등의 신분도 진퇴가 본디 부자유스럽다하여도, 사재를 축적하여 재산을 운용하는 한 가지 일에 있어서는, 그 마음의 작동을 신장할 수 있는 길을 열어서 이것을 방해하는 것이 적다. 이것 때문인가 조금 기력이 있는 자는 축재에 마음을 다하여, 천신만고를 꺼리지 않고 검소와 열성으로 왕왕 거대한 재산을 이룩하는 자가 없지 않다. 그런데 본디 이 무리는, 다만 부유함을 원하여 부유함을 이룬 자여서, 달리 뜻을 둔 바가 있지 않고, 부유함을 구함은 다른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 아니어서, 분명히 이것은 생애 둘도 없는 목적인 것과 같다. 그러므로 인간의 세계는, 부유함 외에 귀중할 것이 없고, 부유함을 버리고 대신할 수 있는 것이 없고, 학술 이상 사람마음의 고상한 부분에 속하는 바의 일은, 이것을 되돌아보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사치의 한 항목으로 하여 이것을 금지하고, 상류 사람의 행동을 보고 은밀히 그 직접적으로 필요 없음을 측은하게 여기는 미소를 짓기에 이르렀다. 사태의 추이에 있어서는 역시 이유가 없는 것이 아니라도, 그 품행이 비열하여 과감한 행동이 없음은, 진실로 천하게 여기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시험적으로 일본 안에서 부호라고 칭하는 집안의 유래와 그 흥망의 내용을 탐색하면, 분명하게 사건의 실제 증거를 볼 수 있다. 옛날부터 대상인과 부농의 집안을 일으킨 자는, 결코 학자와 군자의 부류가 아니고, 100에 99는 배우지 못하고 기술도 없는 시골사람이어서, 부끄러워해야 할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참을 수 없는 것을 참고, 다만 인색이라는 한 방식에 의하여 축적한 것뿐. 또 그 집안을 망해먹는 자를 보면, 기력이 결핍되어 축적하는 방식을 게을리 하던지, 혹은 주색과 방탕이라는 육체의 욕망을 자행하여 돈을 잃는 자에 불과하다. 저 무사의 부류가 표연하여 재산을 다스리지 않고, 그 좋아하는 곳에 빠져 감히 그 의지를 굽히지 않고, 감히 그 의지하는 바의 일을 하여 가난을 염려하지 않는 것에 비하면, 차이가 크다. 본래 육체적 욕망으로써 집안을 파괴하는 것도, 표연하여 집안을 파괴하는 것도, 그 집안을 파괴하는 사실은 같을지라도, 마음이 향하는 곳을 논하면, 상류의 사람에게는 여전히 지혜와 덕행의 작용에 여유를 남기고, 하류의 사람에게는 다만 돈을 좋아하고 육체적 욕망을 받드는 한 가지 요소가 있는 것 같다. 그 품행의 차이가 역시 크다고 할 수 있다. 위의 형편으로써 다스림을 받는 자 부류의 검소함과 열성은 그 형태를 고쳐 탐욕과 인색이 되고, 다스리는 자 부류의 활발함과 과감한 행동은 그 성격을 변화시켜 낭비와 남용이 되어, 모두 이재(理財)의 쓰임이 맞지 않고, 그로써 오늘날의 상황에 다다른 것이다. 대체로 일본을 가난하다고할지라도, 천연자원이 부족하지 않아서, 하물며 농사라는 한 가지 일에 있어서는, 세계만방에 대하여 자랑할 수 있는 것이 많음이야. 결코 이것을 천연자원 빈국이라고 할 수 없다. 혹은 세법이 가혹해서인가, 세법이 가혹하다고할지라도, 그 세금을 모아 바다에 던지는 것이 아니므로, 국내에 있으면서 자본의 일부분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오늘날의 상황에서 전국이 가난함은 왜인가? 틀림없이 재원이 부족함이 아니고, 그 재원을 다루는 지혜의 힘이 부족한 것이다. 그 지혜의 힘이 부족한 것이 아니고, 그 지혜의 힘을 둘로 나누어 위와 아래 각각 일부분을 지키기 때문이다. 이것을 개괄하여 말하면, 일본의 재원은 역사시작의 처음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아직 그것에 상응할 수 있는 지혜의 힘을 만나지 못했다고 할 수 있다. 생각건대 이 지혜의 힘을 둘로 나눈 것을 조화롭게 하나로 만들어, 실제의 쓰임에 맞게 하는 것은 경제의 급선무이어도, 수천 수백 년의 관습을 이루었던 것이므로, 일조일석의 운동으로써 개혁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최근에 이르러 조금 그 운동의 시작을 보는 것 같아도, 위와 아래의 종족, 서로 그 장점을 취하지 않고 오히려 그 단점을 배우는 자가 많다. 이것 역시 어떻게 할 수 없는 추세여서, 반드시 그 사람의 죄는 아니다. 드넓은 천하의 대세는 먼 옛날부터 흘러 오늘의 시대에 이르러, 억조의 인류를 압도하여 그 지향하는 바로 기운 것이므로, 지금에 있어서 돌연히 이것에 저항할 수 없는 것도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巻之五
第九章 日本文明の由来
前章に云へる如く、西洋の文明は、其人間の交際に諸説の並立して漸く相近づき、遂に合して一と為り、以て其間に自由を存したるものなり。之を譬へば金銀銅鉄等の如き諸元素を鎔解して一塊と為し、金に非ず、銀に非ず、又銅鉄に非ず、一種の混和物を生じて自から其平均を成し、互に相維持して全体を保つものゝ如し。顧て我日本の有様を察すれば大に之に異なり。日本の文明も其人間の交際に於て固より元素なかる可らず。立君なり貴族なり、宗教なり人民なり、皆古より我国に存して各一種族を為し、各自家の説なきに非ざれども、其諸説並立するを得ず、相近づくを得ず、合して一と為るを得ず。之を譬へば金銀銅鉄の諸品はあれども、之を鎔解して一塊と為すこと能はざるが如し。若し或は合して一と為りたるが如きものありと雖ども、其実は諸品の割合を平均して混じたるに非ず。必ず片重片軽、一を以て他を滅し、他をして其(その)本色を顕はすを得せしめざるものなり。猶かの金銀の貨幣を造るに十分一の銅を混合するも、銅は其本色を顕はすを得ずして、其造り得たるものは純然たる金銀貨幣なるが如し。之を事物の偏重と名く。抑も文明の自由は他の自由を費して買ふ可きものに非ず。諸の権義を許し諸の利益を得せしめ、諸の意見を容れ諸の力を逞ふせしめ、彼我平均の間に存するのみ。或は自由は不自由の際に生ずと云ふも可なり。故に人間の交際に於て、或は政府、或は人民、或は学者、或は官吏、其地位の如何を問はず、唯権力を有する者あらば、仮令ひ智力にても腕力にても、其力と名るものに就ては必ず制限なかる可らず。都て人類の有する権力は決して純精なるを得べからず。必ず其中に天然の悪弊を胚胎して、或は卑怯なるがために事を誤り、或は過激なるがために物を害すること、天下古今の実験に由て見る可し。之を偏重の禍と名く。有権者常に自から戒めざる可らず。我国の文明を西洋の文明に比較して、其趣の異なる所は特に此権力の偏重に就て見る可し。
日本にて権力の偏重なるは、洽ねく其人間交際の中に浸潤して至らざる所なし。本書第二章に、一国人民の気風と云へることあり。即ち此権力の偏重も、かの気風の中の一箇条なり。今の学者、権力の事を論ずるには、唯政府と人民とのみを相対して、或は政府の専制を怒り或は人民の跋扈を咎る者多しと雖ども、よく事実を詳にして細に吟味すれば、此偏重は交際の至大なるものより至小なるものに及び、大小を問はず公私に拘はらず、苟も爰に交際あれば其権力偏重ならざるはなし。其趣を形容して云へば、日本国中に千百の天秤を掛け、其天秤大となく小となく、悉く皆一方に偏して平均を失ふが如く、或は又三角四面の結晶物を砕て、千分と為し万分と為し遂に細粉と為すも、其一分子は尚三角四面の本色を失はず、又この砕粉を合して一小片と為し又合して一塊と為すも、其物は依然として三角四面の形を保つが如し。権力偏重の一般に洽ねくして事々物々微細緻密の極にまで通達する有様は斯の如しと雖ども、学者の特に之に注意せざるは何ぞや。唯政府と人民との間は交際の大にして公なるものにて著しく人の耳目に触るゝが故に、其議論も之を目的とするもの多きのみ。今実際に就て偏重の在る所を説かん。爰に男女の交際あれば男女権力の偏重あり、爰に親子の交際あれば親子権力の偏重あり、兄弟の交際にも是あり、長幼の交際にも是あり、家内を出でゝ世間を見るも亦然らざるはなし。師弟主従、貧富貴賎、新参故参、本家末家、何れも皆其間に権力の偏重を存せり。尚一歩を進めて人間の稍や種族を成したる所のものに就て之を見れば、封建の時に大藩と小藩あり、寺に本山と末寺あり、宮に本社と末社あり、苟も人間の交際あれば必ず其権力に偏重あらざるはなし。或は又政府の中にても官吏の地位階級に従て此偏重あること最も甚し。政府の吏人が平民に対して威を振ふ趣を見ればこそ権あるに似たれども、此吏人が政府中に在て上級の者に対するときは、其抑圧を受ること平民が吏人に対するよりも尚甚しきものあり。譬へば地方の下役等が村の名主共を呼出して事を談ずるときは其傲慢厭ふ可きが如くなれども、此下役が長官に接する有様を見れば亦愍笑に堪へたり。名主が下役に逢ふて無理に叱らるゝ模様は気の毒なれども村に帰て小前の者を無理に叱る有様を見れば亦悪む可し。甲は乙に圧せられ乙は丙に制せられ、強圧抑制の循環、窮極あることなし。亦奇観と云ふ可し。固より人間の貴賎貧富、智愚強弱の類は、其有様(コンヂ-ション)にて幾段も際限ある可らず。此段階を存するも交際に妨ある可らずと雖ども、此有様の異なるに従て兼て又其権義(ライト)をも異にするもの多し。之を権力の偏重と名るなり。
今世間の事物を皮相すれば有権者は唯政府のみの如くなれども、よく政府の何物たるを吟味して其然る由縁を求めなば、稍や議論の密なるものに達す可し。元来政府は国人の集りて事を為す処なり。此場所に在る者を君主と名け官吏と名るのみ。而して此君主官吏は生れながら当路の君主官吏に非ず。仮令ひ封建の時代に世位(せいゐ)世官(せいかん)の風あるも、実際に事を執る者は多くは偶然に撰ばれたる人物なり。此人物、一旦政府の地位に登ればとて、忽ち平生の心事を改るの理なし。其或は政府に在て権を恣にすることあるは、即ち平生の本色を顕はしたるものゝみ。其証拠には封建の時代にても賎民を挙て政府の要路に用ひたることなきに非ずと雖ども、其人物の所業を見れば決して奇なるものなし。唯従前の風に従て少しく事を巧にするより外ならず。其巧は即ち擅権(せんけん)の巧にて、民を愛して愚にするに非ざれば、之を威して退縮せしむるものなり。若し此人物をして民間に在らしめなば、必ず民間に在て此事を行ふ可し。村に在らば村にて行ひ、市に在らば市にて行ひ、到底我国民一般に免かる可らざるの流行病なれば、独り此人に限て之を脱却することある可らず。唯政府に在れば其事業盛大にしてよく世間の耳目に触るゝを以て、人の口吻にも掛ることなり。故に政府は独り擅権の源に非ず、擅権者を集会せしむるの府なり。擅権者に席を貸して平生の本色を顕はし盛に事を行はしむるに恰も適当したる場所なり。若し然らずして擅権の源は特に政府に在りとせば、全国の人民は唯在官の間のみ此流行病に感じて前後は果して無病なる乎、不都合なりと云ふ可し。抑も権を恣にするは有権者の通弊なれば、既に政府に在て権を有すれば其権のために自から眩惑して益これを弄ぶの弊もあらん、或は又政府一家の成行にて擅権に非ざれば事を行ふ可らざるの勢もあらんと雖ども、此一般の人民にして平生の教育習慣に絶てなき所のものを、唯政府の地位に当ればとて頓に之を心に得て事に施すの理は万々ある可らざるなり。
右の議論に従へば、権を恣にして其力の偏重なるは決して政府のみに非ず、之を全国人民の気風と云はざるを得ず。此気風は即ち西洋諸国と我日本とを区別するに著しき分界なれば、今爰に其源因を求めざる可らずと雖ども、其事甚だ難し。西人の著書に亜細亜洲に擅権の行はるゝ源因は、其気候温暖にして土地肥沃なるに由て人口多きに過ぎ、地理山海の険阻洪大なるに由て妄想恐怖の念甚しき等に在りとの説もあれども、此説を取て直に我日本の有様に施し、以て事の不審を断ず可きや、未だ知る可らず。仮令ひ之に由て不審を断ずるも、其源因は悉皆天然の事なれば人力を以て之を如何ともす可らず。故に余輩は唯事の成行を説て、擅権の行はるゝ次第を明にせんと欲するのみ。其次第既に明ならば亦これに応ずるの処置もある可し。抑も我日本国も開闢の初に於ては、世界中の他の諸国の如く、若干の人民一群を成し、其一群の内より腕力最も強く智力最も逞しき者ありて之を支配する歟、或は他の地方より来り之を征服して其酋長たりしことならん。歴史に拠れば神武天皇西より師を起したりとあり。一群の人民を支配するは固より一人の力にて能(よく)す可きことに非ざれば、其酋長に附属して事を助る者なかる可らず。其人物は、或は酋長の親戚、或は朋友の内より取て、共に力を合せ、自から政府の体裁を成したることならん。既に政府の体裁を成せば、此政府に在る者は人民を治る者なり、人民は其治を被る者なり。是に於てか始て治者と被治者との区別を生じ、治者は上なり主なり又内なり、被治者は下なり客なり又外なり。上下主客内外の別、判然として見る可し。蓋し此二者は日本の人間交際に於て最も著しき分界を為し、恰も我文明の二元素と云ふ可きものなり。往古より今日に至るまで交際の種族は少なからずと雖ども、結局其至る所は此二元素に帰し、一も独立して自家の本分を保つものなし。(治者と被治者と相分る)
人を治るは其事固より易からず。故に此治者の党に入る者は必ず腕力と智力と兼て又多少の富なかる可らず。既に身心の力あり、又これに富有を兼るときは、必ず人を制するの権を得べし。故に治者は必ず有権者ならざるを得ず。王室は此有権者の上に立ち、其力を集めて以て国内を制し、戦て克たざるはなし、征して降さゞるはなし。且被治者なる人民も、王室の由来久しきの故を以て益これに服従し、神后の時代より屢外征の事もあり、国内に威福の行はれて内顧の患なかりしこと推して知る可し。爾後人文漸く開け、養蚕造船の術、織縫耕作の器械、医儒仏法の書、其他文明の諸件は、或は朝鮮より伝へ、或は自国にて発明し、人間生々の有様は次第に盛大に及ぶと雖ども、此文明の諸件を施行するの権は悉皆政府の一手に属し、人民は唯其指揮に従ふのみ。加之全国の土地、人民の身体までも、王室の私有に非ざるはなし。此有様を見れば被治物は治者の奴隷に異ならず。後世に至るまでも御国、御田地、御百姓等の称あり。此御の字は政府を尊敬したる語にて、日本国中の田地も人民の身体も皆政府の私有品と云ふ義なり。仁徳天皇民家に炊煙の起るを見て朕既に富めりと云ひしも、必竟愛人の本心より出て、民の富むは猶我富むが如しとの趣意にて、如何にも虚心平気なる仁君と称す可しと雖ども、天下を一家の如く視做して之を私有するの気象は窺ひ見る可し。此勢にて天下の権は悉く王室に帰し、其力、常に一方に偏して、以て王代の末に至れり。蓋し権力の偏重は前に云へる如く至大より至細に至り、人間の交際を千万に分てば千万段の偏重あり、集めて百と為せば百段の偏重あり、今王室と人民との二段に分てば、偏重も亦此間に生じて、王室の一方に偏したるものなり。(国力王室に偏す)
源平の起るに及んで天下の権は武家に帰し、之に由て或は王室と権力の平均を為し、人間交際の勢一変す可きに似たれども、決して然らず。源平なり、王室なり、皆是れ治者中の部分にて、国権の武家に帰したるは治者中の此部分より彼部分に力を移したるのみ。治者と被治者との関係は依然として上下主客の勢を備へ、毫も旧時に異なることなし。啻に異なることなきのみならず、曩(さき)に光仁天皇宝亀年中天下に令を下だして兵と農とを分ち、百姓の富て武力ある者を撰て兵役に用ひ、其羸弱(るいじやく)なる者をして農に就かしめたりとあり。此令の趣意に従へば、人民の富て強き者は武力を以て小弱を保護し、其貧にして弱き者は農を勉めて武人に給することなれば、貧弱は益貧弱に陥り、富強は益富強に進み、治者と被治者との分界益判然として、権力の偏重は益甚しからざるを得ず。諸書を案ずるに、頼朝が六十余州の総追捕使と為りて、毎国に守護を置き、荘園に地頭を補し、以て従前の国司荘司の権を殺ぎしより以来、諸国の健児の内にて筋目もあり人をも持つ者は守護地頭の職に任じ、以下の者は御家人と称して守護地頭の支配を受け、悉皆幕府の手の者と為りて、或は百日交代にて鎌倉に宿衛するの例もありと云ふ。北条の時代にも大抵同じ有様にて、国中処として武人あらざるはなし。承久の乱に泰時十八騎にて鎌倉を打立たるは五月二十二日のことなるが、同二十五日まで三日の間に東国の兵尽く集りて、都合十九万騎とあり。是れに由て考れば、諸国の武人なる者は平生より出陣の用意に忙はしく、固より農業を勉るの暇ある可らず、必ず他の小民の力に依て食ひしこと明に知る可し。兵農の分界愈明に定りて、人口の増加するに従ひ武人の数も次第に増したることならん。頼朝の時には概ね関東伺候の武家を以て諸国の守護に配し、三、五年の交代なりしが、其後いつとなく譜代世禄の職と為り、北条亡びて足利の代に至ては、此守護なる者、互に相併呑し、或は興り或は廃し、或は土豪に逐はれ或は家来に奪はれ、漸く封建の勢を成したるなり。王代以来の有様を概して云へば、日本の武人、始は国内の処在に布散して一人一人の権を振ひ、以て王室の命に服したるもの、鎌倉の時代に至るまでに漸く合して幾個の小体を成し、始て大小名の称あり。足利の代に至りては又合して体の大なるものを成したれども、其体と体と合するを得ず。即ち応仁以後の乱世にて、武人の最も盛なる時なり。斯の如く、武人の世界には合離集散あり進退栄枯あれども、人民の世界には何等の運動あるを聞かず。唯農業を勉めて武人の世界に輸するのみ。故に人民の目を以て見れば、王室も武家も区別ある可らず。武人の世界に治乱興敗あるは、人民のためには恰も天気時候の変化あるに異ならず。唯黙して其成行を見るのみ。《武家興て神政府の惑溺を一掃したるの利益は第二章三十五葉(岩波文庫旧版三三頁)に論じたり》
新井白石の説に、天下の大勢九変して武家の代と為り、武家の世又五変して徳川の代に及ぶと云ひ、其外諸家の説も大同小異なれども、此説は唯日本にて政権を執る人の新陳交代せし模様を見て幾変と云ひしのみのことなり。都てこれまで日本に行はるゝ歴史は唯王室の系図を詮索するもの歟、或は君相有司の得失を論ずるもの歟、或は戦争勝敗の話を記して講釈師の軍談に類するもの歟、大抵是等の箇条より外ならず。稀に政府に関係せざるものあれば仏者の虚誕妄説のみ、亦見るに足らず。概して云へば日本国の歴史はなくして日本政府の歴史あるのみ。学者の不注意にして国の一大欠典と云ふ可し。新井先生の読史余論なども即ち此類の歴史にて、其書中に天下の勢変とあれども、実は天下の大勢の変じたるに非ず、天下の勢は早く既に王代の時に定まりて、治者と被治者との二元素に区別し、兵農の分るゝに及て益この分界を明にして、今日に至るまで一度びも変じたることなし。故に王代の末に藤原氏、権を専にし、或は上皇、政を聴くことあるも、唯王室内の事にて固より世の形勢に関係ある可らず。平家亡びて源氏起り、新に鎌倉に政府を開くも、北条が陪臣にて国命を執るも、足利が南朝に敵して賊と称せらるゝも、織田も豊臣も徳川も各日本国中を押領して之を制したれども、其これを制するに唯巧拙あるのみ。天下の形勢は依然として旧に異ならず。故に北条足利にて悦びしことは徳川も之を喜び、甲の憂ひしことは乙も之を憂ひ、其喜憂に処するの法も甲乙に於て毫も異なることなし。譬へば北条足利の政府にて五穀豊熟人民柔順を喜ぶの情は、徳川の政府も之に同じ。北条足利の政府にて恐るゝ所の謀反人の種類は、徳川の時代にても其種類を異にせず。顧て彼の欧洲諸国の有様を見れば大に趣の異なる所あり。其国民の間に宗旨の新説漸く行はるれば政府も亦これに従て処置を施さゞる可らず。昔日は封建の貴族をのみ恐れたりしが、世間の商工次第に繁昌して中等の人民に権力を有する者あるに至れば、亦これを喜び或は之を恐れざる可らず。故に欧羅巴の各国にては其国勢の変ずるに従て政府も亦其趣を変ぜざる可らずと雖ども、独り我日本は然らず、宗旨も学問も商売も工業も悉皆政府の中に籠絡したるものなれば、其変動を憂るに足らず、又これを恐るゝに足らず、若し政府の意に適せざるものあれば輙ち之を禁じて可なり。唯一の心配は同類の中より起る者ありて、政府の新陳交代せんことを恐るゝのみ。《同類の中より起る者とは治者の中より起る者を云ふ》故に建国二千五百有余年の間、国の政府たるものは同一様の仕事を繰返し、其状恰も一版の本を再々復読するが如く、同じ外題の芝居を幾度も催ふすが如し。新井氏が天下の大勢九変又五変と云ひしは、即ち此芝居を九度び催ふし又五度び催ふしたることのみ。或る西人の著書に、亜細亜洲の諸国にも変革騒乱あるは欧羅巴に異ならずと雖ども、其変乱のために国の文明を進めたることなしとの説あり。蓋し謂れなきに非ざるなり。(政府は新旧交代すれども国勢は変ずることなし)
右の如く政府は時として変革交代することあれども、国勢は則ち然らず、其権力常に一方に偏して、恰も治者と被治者との間に高大なる隔壁を作て其通路を絶つが如し。有形の腕力も無形の智徳も、学問も宗教も、皆治者の党に与みし、其党与互に相依頼して各権力を伸ばし、富も爰に集り才も爰に集り、栄辱も爰に在り廉恥も爰に在り、遥に上流の地位を占めて下民を制御し、治乱興廃、文明の進退、悉皆治者の知る所にして、被治者は嘗て心に之を関せず、恬として路傍の事を見聞するが如し。譬へば古来日本に戦争あり。或は甲越の合戦と云ひ、或は上国と関東との取合と云ひ、其名を聞けば両国互に敵対して戦ふが如くなれども、其実は決して然らず。此戦は唯両国の武士と武士との争にして、人民は嘗て之に関することなし。元来敵国とは全国の人民一般の心を以て相敵することにて、仮令ひ躬から武器を携て戦場に赴かざるも、我国の勝利を願ひ敵国の不幸を祈り、事々物々些末のことに至るまでも敵味方の趣意を忘れざるこそ、真の敵対の両国と云ふ可けれ。人民の報国心は此辺に在るものなり。然るに我国の戦争に於ては古来未だ其例を見ず。戦争は武士と武士との戦にして、人民と人民との戦に非ず。家と家との争にして、国と国との争に非ず。両家の武士、兵端を開くときは、人民之を傍観して、敵にても味方にても唯強きものを恐るゝのみ。故に戦争の際、双方の旗色次第にて、昨日味方の輜重(しちよう)を運送せし者も今日は敵の兵糧を担ふ可し。勝敗決して戦罷むときは、人民は唯騒動の鎮まりて地頭の交代するを見るのみ、其勝利を栄とするに非ず、又其敗北を辱とするに非ず。或は新地頭の政令寛にして年貢米の高を減ずることもあらば之を拝して悦ばんのみ。其一例を挙て云はん。後北条の国は関八州なり。一旦豊臣と徳川に敵対して敗滅を取り、滅後直に八州を領したる者は讐敵なる徳川なり。徳川家康如何なる人傑なればとて一時に八州の衆敵を服するを得んや。蓋し八州の人民は敵にも非ず味方にも非ず、北条と豊臣との戦争を見物したるものなり。徳川の関東に移りし後に敵の残党を鎮撫征討したりとは、唯北条家の遺臣を伐ちしのみのことにて、百姓町人等の始末に至ては恰も手を以て其頭を撫で即時に安堵したることなり。是等の例を計れば古来枚挙に遑あらず。今日に至ても未だ其趣の変じたるを見ず。故に日本は古来未だ国を成さずと云ふも可なり。今若し此全国を以て外国に敵対する等の事あらば、日本国中の人民にて仮令ひ兵器を携へて出陣せざるも戦のことを心に関する者を戦者と名け、此戦者の数と彼の所謂見物人の数とを比較して何れか多かる可きや、預め之を計て其多少を知る可し。嘗て余が説に、日本には政府ありて国民(ネ-ション)なしと云ひしも是の謂なり。固より欧羅巴諸国にても戦争に由て他国の土地を兼併すること屢これありと雖ども、其これを併すること甚だ易からず、非常の兵力を以て抑圧する歟、若しくば其土地の人民と約束して幾分の権利を附与するに非ざれば、之を我版図に入るゝこと能はずと云ふ。東西の人民其気風を殊にすること以て見る可し。(日本の人民は国事に関せず)
故に遇ま民間に才徳を有する者あれば、己が地位に居て此才徳を用るに方便なきがため、自から其地位を脱して上流の仲間に入らざるを得ず。故に昨日の平民、今日は将相と為りしこと、古今に其例少なからず。之を一見すれば彼の上下の隔壁もなきが如くなれども、此人物は唯其身を脱して他に遁れたるのみ。之を譬へば土地の卑湿を避けて高燥の地に移りたるが如し。一身のためには都合宜しかる可しと雖ども、元と其湿地に自から土を盛て高燥の地位を作りたるに非ず。故に湿地は旧の湿地にて、目今己が居を占めたる高燥の地に対すれば、其隔壁尚存して上下の別は少しも趣を変ずることなし。猶在昔尾張の木下藤吉が太閤と為りたれども、尾張の人民は旧の百姓にして其有様を改めざるが如きもの是なり。藤吉は唯百姓の仲間を脱走して武家の党に与みしたるなり。其立身は藤吉一人の立身なり、百姓一般の地位を高くしたるに非ず。固より其時の勢なれば今より之を論ず可らず、之を論ずるも万々無益なれども、若し藤吉をして其昔欧羅巴の独立市邑に在らしめなば、市民は必ず此英雄の挙動を悦ばざることなる可し。或は又今の世に藤吉を生じて藤吉の事を為さしめ、彼の独立の市民を今の世に蘇生せしめて其事業を評せしめなば、此市民は必ず藤吉を目して薄情なる人物と云ふならん。墳墓の地を顧みず、仲間の百姓を見捨て、独り武家に依頼して一身の名利を貪る者は、我党の人に非ずとて、之を詈ることならん。到底藤吉と此市民とは其説の元素を異にするものなれば、其挙動の粗密寛猛は互に相似たるも、時勢に由らず世態に拘はらず、古より今に至るまで遂に相容るゝことを得ざるものなり。蓋し欧羅巴にて千二、三百年代の頃、盛に行はれたる独立市民の如きは、其所業固より乱暴過激、或は固陋蠢愚なるものありと雖ども、決して他に依頼するに非ず、其本業には商売を勉め、其商売を保護するために兵備を設けて、自から其地位を固くしたる者なり。近世に至り英仏其他の国々に於て、中等の人民次第に富を致して随て又其品行を高くし、議院等に在て論説の喧しきものあるも、唯政府の権を争ふて小民を圧制するの力を貪らんとするに非ず、自から自分の地位の利を全ふして他人の圧制を圧制せんがために勉強するの趣意のみ。其地位の利とは、地方に就ては「ロカルインテレスト」あり、職業に就ては「カラッスインテレスト」あり、各其人の住居する地方、又は其営業を共にする等の交情に由て、各自家の説を主張し自家の利益を保護し、之がためには或は一命をも棄る者なきに非ず。此趣を見れば、古来日本人が自分の地位を顧みずして便利の方に附き、他に依頼して権力を求る歟、或は他人に依頼せざれば、自から他に代て他の事を為し、暴を以て暴に易へんとするが如きは、鄙劣の甚しきものなり。之を西洋独立の人民に比すれば雲壌の相違と云はざる可らず。昔支那にて楚の項羽が秦の始皇の行列を見て、彼れ取て代る可しと云ひ、漢の高祖は之を見て大丈夫当に斯の如くなる可しと云ひたることあり。今此二人の心中を察するに、自分の地位を守らんがために秦の暴政を忿るに非ず、実は其暴政を好機会と為して己が野心を逞ふし、秦皇の位に代て秦の事を行はんと欲するに過ぎず。或は其暴虐秦の如くならざるも、少しく事を巧にして人望を買ふのみ。其擅権を以て下民を御するの一事に至ては、秦皇も漢祖も区別あることなし。我国にても古来英雄豪傑と称する者少なからずと雖ども、其事跡を見れば項羽に非ざれば漢祖なり。開闢の初より今日に至るまで、全日本国中に於て独立市民等の事は夢中の幻に妄想したることもある可らず。(国民其地位を重んぜず)
宗教は人心の内部に働くものにて、最も自由最も独立して、毫も他の制御を受けず、毫も他の力に依頼せずして、世に存す可き筈なるに、我日本に於ては則ち然らず。元来我国の宗旨は神仏両道なりと云ふ者あれども、神道は未だ宗旨の体を成さず。仮令ひ往古に其説あるも、既に仏法の中に籠絡せられて、数百年の間本色を顕はすを得ず。或は近日に至て少しく神道の名を聞くが如くなれども、政府の変革に際し僅に王室の余光に藉て微々たる運動を為さんとするのみにて、唯一時偶然の事なれば、余輩の所見にては之を定りたる宗旨と認む可らず。兎に角に古来日本に行はれて文明の一局を働きたる宗旨は、唯一の仏法あるのみ。然るに此仏法も初生の時より治者の党に入て其力に依頼せざる者なし。古来名僧智識と称する者、或は入唐して法を求め、或は自国に在て新教を開き、人を教化し寺を建るもの多しと雖ども、大概皆天子将軍等の眷顧を徼倖(げうかう)し、其余光を仮りて法を弘めんとするのみ。甚しきは政府より爵位を受けて栄とするに至れり。僧侶が僧正僧都等の位に補せらるゝの例は最も古く、延喜式に僧都以上は三位に准ずと云ひ、後醍醐天皇建武二年の宣旨には、大僧正を以て二位大納言、僧正を以て二位中納言、権僧正を以て三位参議に准ずとあり(釈家官班記)。此趣を見れば、当時の名僧智識も天朝の官位を身に附け、其位を以て朝廷の群臣と上下の班を争ひ、一席の内外を以て栄辱と為したることならん。之がため日本の宗旨には、古今其宗教はあれども自立の宗政なるものあるを聞かず。尚其実証を得んと欲せば、今日にても国中有名の寺院に行て其由来記を見る可し。聖武天皇の天平年中日本の毎国に国分寺を立て、桓武天皇延暦七年には伝教大師比叡山を開き根本中堂を建てゝ王城の鬼門を鎮し、嵯峨天皇弘仁七年には弘法大師高野山を開き帝より印符を賜はりて其大伽籃を建立したり。其他南都の諸山、京都の諸寺、中古には鎌倉の五山、近世には上野の東叡山、芝の増上寺等、何れも皆政府の力に依らざるものなし。其他歴代の天子自から仏に帰し、或は親王の僧たる者も甚だ多し。白河天皇に八男ありて、六人は僧たりしと云ふ。是亦宗教に権を得たる一の源因なり。独り一向宗は自立に近きものなれども尚この弊を免かれず。足利の末、大永元年実如上人の時に天子即位の資を献じ、其賞として永世准門跡とて法親王に准ずるの位を賜はりたることあり。王室の衰微貧困を気の毒に思ふて有余の金を給するは僧侶の身分として尤のことなれども、其実は然らず、西三条入道の媒酌に由り銭を以て官位を買たるものなり。之を鄙劣と云ふ可し。故に古来日本国中の大寺院と称するものは、天子皇后の勅願所に非ざれば将軍執権の建立なり。概して之を御用の寺と云はざるを得ず。其寺の由来を聞けば、御朱印は何百石、住職の格式は何々とて、其状恰も歴々の士族が自分の家柄を語るに異ならず。一聞以て厭悪(えんを)の心を生ず可し。寺の門前には下馬札を建て、門を出れば儻勢を召連れ、人を払ひ道を避けしめ、其威力は封建の大名よりも盛なるものあり。然り而して其威力の源を尋れば、宗教の威力に非ず、唯政府の威力を借用したるものにして、結局俗権中の一部分たるに過ぎず。仏教盛なりと雖ども、其教は悉皆政権の中に摂取せられて、十方世界に遍く照らすものは、仏教の光明に非ずして、政権の威光なるが如し。寺院に自立の宗政なきも亦怪むに足らず、其教に帰依する輩に信教の本心なきも亦驚くに足らず。其一証を挙れば、古来日本にて宗旨のみの為に戦争に及びしことの極て稀なるをみても、亦以て信教者の懦弱を窺ひ知る可し。其教に於て信心帰依の表に現はれたる所は、無智無学の田夫野嫗が涙を垂れて泣くものあるに過ぎず。此有様を見れば、仏法は唯是れ文盲世界の一器械にして、最愚最陋の人心を緩和するの方便たるのみ。其他には何等の功用もなく、又何等の勢力もあることなし。其勢力なきの甚しきは、徳川の時代に、破戒の僧とて、世俗の罪を犯すに非ず、唯宗門上の戒を破る者あれば、政府より直に之を捕へ、市中に晒して流刑に処するの例あり。斯の如きは則ち僧侶は政府の奴隷と云ふも可なり。近日に至ては政府より全国の僧侶に肉食妻帯を許すの令あり。此令に拠れば、従来僧侶が肉を食はず婦人を近づけざりしは、其宗教の旨を守るがためには非ずして、政府の免許なきがために勉めて自から禁じたることならん。是等の趣を見れば、僧侶は啻に政府の奴隷のみならず、日本国中既に宗教なしと云ふも可なり。(宗教権なし)
宗教尚且然り。況や儒道学問に於てをや。我国に儒書を伝へたるは日既に久し。王代に博士を置て、天子自から漢書を読み、嵯峨天皇の時に大納言冬嗣、勧学院を建てゝ宗族子弟を教へ、宇多天皇の時には中納言行平、奨学院を設る等、漢学も次第に開け、殊に和歌の教は古より盛なりしことなれども、都て此時代の学問は唯在位の子弟に及ぶのみにて、著述の書と雖ども悉皆官の手に成りしものなり。固より印書の術も未だ発明あらざれば、民間に教育の達す可き方便ある可らず。鎌倉の時に大江広元、三善康信等、儒を以て登用せられたれども、此亦政府に属したるものにて、人民の間に学者あるを聞かず。承久三年北条泰時、宇治勢多に攻入たるとき、後鳥羽上皇より宣旨来り、従兵五千余人の内より此宣旨読む可き者をと尋ねしに、武蔵国の住人藤田三郎なる者一人を得たりと云ふ。世間の不文なること以て知る可し。これより足利の末に至るまで、文学は全く僧侶の事と為り、字を学ばんとする者は必ず寺に依らざれば其方便を得ず。後世習字の生徒を呼て寺子と云ふも其因縁なり。或人の説に、日本に版本の出来たるは鎌倉の五山を始とすと云へり。果して信ならん。徳川の初に其始祖家康、首として藤原惺窩を召し、次で林道春を用ひ、太平の持続するに従て碩儒輩出、以て近世に及びしことなり。斯の如く学問の盛衰は世の治乱と歩を共にして、独立の地位を占ることなく、数十百年干戈騒乱の間、全く之を僧侶の手に任したるは、学問の不面目と云はざるを得ず。此一事を見ても儒は仏に及ばざること以て知る可し。然りと雖ども、兵乱の際に学問の衰微するは独り我日本のみに非ず、世界万国皆然らざるはなし。欧羅巴に於ても中古暗黒の時より封建の代に至るまでは、文字の権、全く僧侶に帰して、世間に漸く学問の開けたるは実に千六百年代以降のことなり。又東西の学風其趣を異にして、西洋諸国は実験の説を主とし、我日本は孔孟の理論を悦び、虚実の相違、固より日を同ふして語る可きに非ざれども、亦一概に之を咎む可らず。兎に角に我人民を野蛮の域に救て今日の文明に至らしめたるものは、之を仏法と儒学との賜と云はざるを得ず。殊に近世儒学の盛なるに及て、俗間に行はるゝ神仏者流の虚誕妄説を排して人心の蠱惑を払たるが如きは、其功最も少なからず。此一方より見れば儒学も亦有力のものと云ふ可し。故に今東西学風の得失は姑く擱き、唯其学問の行はれたる次第に就き、著しき両様の異別を掲げて爰に之を示すのみ。蓋し其異別とは何ぞや。乱世の後、学問の起るに当て、此学問なるもの、西洋諸国に於ては人民一般の間に起り、我日本にては政府の内に起たるの一事なり。西洋諸国の学問は学者の事業にて、其行はるゝや官私の別なく、唯学者の世界に在り。我国の学問は所謂治者の世界の学問にして、恰も政府の一部分たるに過ぎず。試に見よ、徳川の治世二百五十年の間、国内に学校と称するものは、本政府の設立に非ざれば諸藩のものなり。或は有名の学者なきに非ず、或は大部の著述なきに非ざれども、其学者は必ず人の家来なり、其著書は必ず官の発兌なり。或は浪人に学者もあらん、私の蔵版もあらんと雖ども、其浪人は人の家来たらんことを願て得ざりし者なり、其私の蔵版も官版たらんことを希ふて叶はざりし者なり。国内に学者の社中あるを聞かず、議論新聞等の出版あるを聞かず、技芸の教場を見ず、衆議の会席を見ず、都て学問の事に就ては毫も私の企あることなし。遇ま碩学大儒、家塾を開て人を教る者あれば、其生徒は必ず士族に限り、世禄を食て君に仕るの余業に字を学ぶ者のみ。其学流も亦治者の名義に背かずして、専ら人を治るの道を求め、数千百巻の書を読み了するも、官途に就かざれば用を為さゞるが如し。或は稀に隠君子と称する先生あるも、其実は心に甘んじて隠するに非ず、窃に不遇の歎を為して他を怨望する者歟、然らざれば世を忘れて放心したる者なり。其趣を形容して云へば、日本の学者は政府と名る篭の中に閉込められ、此篭を以て己が乾坤と為し、此小乾坤の中に煩悶するものと云ふ可し。幸にして世の中に漢儒の教育洽ねからずして学者の多からざりしこそ目出たけれ、若し先生の思通りに無数の学者を生ずることあらば、狭き篭の中に混雑し、身を容る可き席もなくして、怨望益多く、煩悶益甚しからざるを得ず。気の毒千万なる有様に非ずや。斯の如く限ある篭の中に限なき学者を生じ、篭の外に人間世界のあるを知らざる者なれば、自分の地位を作るの方便を得ず。只管其時代の有権者に依頼して、何等の軽蔑を受るも嘗て之を恥るを知らず。徳川の時代に学者の志を得たる者は政府諸藩の儒官なり。名は儒官と云ふと雖ども、其実は長袖の身分とて、之を貴ぶに非ず、唯一種の器械の如くに御して、兼て当人の好物なる政治上の事務にも参らしめず、僅に五斗米を与へて少年に読書の教を授けしむるのみ。字を知る者の稀なる世の中なれば、唯其不自由を補ふがために用ひたるまでのことにて、之を譬へば革細工に限りて穢多に命ずるが如し。卑屈賎劣の極と云ふ可し。此輩に向て又何をか求めん、又何をか責めん。其党与の内に独立の社中なきも怪むに足らず、一定の議論なきも亦驚くに足らざるなり。加之、政府専制よく人を束縛すと云ひ、少しく気力ある儒者は動もすれば之に向て不平を抱く者なきに非ず。然りと雖どもよく其本を尋れば、夫子自から種を蒔て之を培養し、其苗の蔓延するがために却て自から窘めらるゝものなり。政府の専制、これを教る者は誰ぞや。仮令ひ政府本来の性質に専制の元素あるも、其元素の発生を助けて之を潤色するものは漢儒者流の学問に非ずや。古来日本の儒者にて最も才力を有して最もよく事を為したる人物と称する者は、最も専制に巧にして最もよく政府に用ひられたる者なり。此一段に至ては漢儒は師にして政府は門人と云ふも可なり。憐む可し、今の日本の人民、誰か人の子孫に非ざらん。今の世に在て専制を行ひ、又其専制に窘めらるゝものは、独り之を今人の罪に帰す可らず、遠く其祖先に受けたる遺伝毒の然らしむるものと云はざるを得ず。而して此病毒の勢を助けたる者は誰ぞや、漢儒先生も亦預て大に力あるものなり。(学問に権なくして却て世の専制を助く)
前段に云へる如く、儒学は仏法とともに各其一局を働き、我国に於て今日に至るまで此文明を致したることなれども、何れも皆古を慕ふの病を免かれず。宗旨の本分は人の心の教を司り、其教に変化ある可らざるものなれば、仏法又は神道の輩が数千百年の古を語て今世の人を諭さんとするも尤のことなれども、儒学に至ては宗教に異なり、専ら人間交際の理を論じ、礼楽六芸の事をも説き、半は之を政治上に関する学問と云ふ可し。今この学問にして変通改進の旨を知らざるは遺憾のことならずや。人間の学問は日に新に月に進て、昨日の得は今日の失と為り、前年の是は今年の非と為り、毎物に疑を容れ毎事に不審を起し、之を糺し之を吟味し、之を発明し之を改革して、子弟は父兄に優り後進は先進の右に出て、年々歳々生又生を重ね、次第に盛大に進て、顧て百年の古を見れば、其粗鹵不文にして愍笑す可きもの多きこそ、文明の進歩、学問の上達と云ふ可きなり。然るに論語に曰く、後世畏る可し、焉ぞ来者の今に如かざるを知らんと。孟子に曰く、舜何人ぞ、予何人ぞ、為ることある者は亦是の如し。又曰く、文王は我師なり、周公豈我を欺かんやと。此数言以て漢学の精神を窺ひ見る可し。後世畏る可し云々とは、後進の者が勉強せば或は今人の如く為ることもあらん、油断はならぬと云ふ意味なり。されば後人の勉強して達す可き頂上は辛ふじて今人の地位に在るのみ。加之其今人も既に古人に及ばざる季世の人なれば、仮令ひ之に及ぶことあるも余り頼母しき事柄に非ず。又後進の学者が大に奮発して、大声一喝、其慷慨の志を述べたる処は、数千年以前の舜の如くならんと欲する歟、又は周公を証人に立てゝ恐れながら文王を学ばんとするまでのことにて、其趣は不器用なる子供が先生に習字の手本を貰ひ、御手本の通りに字を書かんとして苦心するが如し。初めより先生には及ばぬものと覚悟を定めたれば、極々よく出来たる処にて先生の筆法を真似するのみ、迚も其以上に出ることは叶ふ可らず。漢儒の道の系図は、堯舜より禹湯文武周公孔子に伝へ、孔子以後は既に聖人の種も尽きて、支那にも日本にも再び其人あるを聞かず。孟子以後宋の世の儒者又は日本の碩学大儒にても、後世に向ては矜る可しと雖ども、孔子以上の古聖に対しては一言もある可らず。唯これを学て及ばざるの歎を為すのみ。故に其道は後の世に伝ふれば伝ふるほど悪しく為りて、次第に人の智徳を減じ、漸く悪人の数を増し、漸く愚者の数を増して、一伝又一伝、以て末世の今日に至りては、疾(はや)く既に禽獣の世界と為る可きは十露盤の上に明なる勘定なれども、幸にして人智進歩の定則は自から世に行はれて儒者の考の如くならず、往々古人に優る人物を生じたることにや、今日までの文明を進めて、彼の勘定の割合に反したるこそ、我人民の慶福と云ふ可けれ。斯の如く古を信じ古を慕ふて毫も自己の工夫を交へず、所謂精神の奴隷(メンタルスレ-ヴ)とて、己が精神をば挙て之を古の道に捧げ、今の世に居て古人の支配を受け、其支配を又伝へて今の世の中を支配し、洽ねく人間の交際に停滞不流の元素を吸入せしめたるものは、之を儒学の罪と云ふ可きなり。然りと雖ども又一方より云へば、在昔若し我国に儒学と云ふもの無かりせば、今の世の有様には達す可らず。西洋の語に「リフハインメント」とて、人心を鍛錬して清雅ならしむるの一事に就ては、儒学の功徳亦少なしとせず。唯昔に在ては功を奏し今に在ては無用なるのみ。物の不自由なる時節に於ては、敗筵(やれむしろ)も夜着に用ゆ可し、糠も食料と為す可し。況や儒学に於てをや、必ず其旧悪を咎む可らず。余思ふに儒学を以て古の日本人を教へたるは、田舎の娘を御殿の奉公に出したるが如し。御殿にて起居動作は自から清雅に倣ひ、其才智も或は穎敏を増したれども、活潑なる気力は失ひ尽して、家産営業の為には無用なる一婦人を生じたることなり。蓋し其時節には娘を教ゆ可き教場もなかりしゆゑ、奉公も謂れなきに非ざれども、今日に至ては其利害得失を察して別に方向を定めざる可らず。
古来我日本は義勇の国と称し、其武人の慓悍にして果断、誠忠にして率直なるは、亜細亜諸国に於ても愧るものなかる可し。就中足利の末年に至て天下大乱、豪傑所在に割拠して攻伐止む時なく、凡そ日本に武の行はれたる、前後この時より盛なるはなし。一敗、国を亡す者あり、一勝、家を興す者あり、門閥もなく由緒もなく、功名自在、富貴瞬間に取る可し。文明の度に前後の差はあれども、之を彼の羅馬の末世に北狄の侵入せし時代に比して彷彿たる有様と云ふも可なり。此事勢の中に在ては日本の武人にも自から独立自主の気象を生じ、或は彼の日耳曼の野民が自主自由の元素を遺したるが如く、我国民の気風も一変す可きに思はるれども、事実に於ては決して然らず。此章の首に云へる権力の偏重は、開闢の初より人間交際の微細なる処までも入込み、何等の震動あるも之を破る可らず。此時代の武人快活不覊なるが如くなれども、此快活不覊の気象は一身の慷慨より発したるものに非ず、自から認めて一個の男児と思ひ、身外無物、一己の自由を楽むの心に非ず、必ず外物に誘はれて発生したるもの歟、否(しから)ざれば外物に藉て発生を助けたるものなり。何を外物と云ふ。先祖のためなり、家名のためなり、君のためなり、父のためなり、己が身分のためなり。凡そ此時の師に名とする所は必ず是等の諸件に依らざるものなし。或は先祖家名なく、君父身分なき者は、故さらに其名義を作て口実に用るの風なり。如何なる英雄豪傑にして有力有智の者と雖ども、其智力のみを恃(たのみ)て事を為さんと企たる者あるを聞かず。爰に其事跡に見はれたるものを撮て一、二の例を示さん。足利の末年に諸方の豪傑、或は其主人を逐ひ、或は其君父の讐を報じ、或は祖先の家を興さんとし、或は武士たるの面目を全ふせんがためにとて、党与を集め土地を押領し、割拠の勢を為すと雖ども、其期する所は唯上洛の一事に在るのみ。抑も此上洛の何物たるを尋れば、天子若くは将軍に謁し、其名義を借用して天下を制せんとすることなり。或は未だ上洛の方便を得ざる者は、遥に王室の官位を受け、此官位に藉て自家の栄光を増し、以て下を制するの術に用る者あり。此術は古来日本の武人の間に行はるゝ一定の流儀にて、源平の酋長、皆然らざるはなし。北条に至ては直に最上の官位をも求めずして、名目のために将軍を置き、身は五位を以て天下の権柄を握りたるは、啻に王室を器械に用るのみならず、兼て将軍をも利用したるものなり。其外形を皮相すれば美にして巧なるに似たれども、よく事の内部に就て之を詳にすれば、必竟人心の鄙怯より生じたることにて、真に賎しむ可く悪む可きの元素を含有するものと云はざるを得ず。足利尊氏が赤松円心の策を用ひて後伏見帝の宣旨を受け、其子光明天皇を立たるが如きは、万人の目を以て見るも之を尊王の本心より出たるものと認む可らず。信長が初は将軍義昭を手に入れたれども、将軍の名は天子の名に若かざるを悟り、乃ち義昭を逐ふて直に天子を挟(はさ)みたるも、其情厚しと云ふ可らず。何れも皆詐謀偽計の明著なるものにて、凡そ天下に耳目を具したる者ならば、其内情を洞察す可き筈なれども、尚其表面には忠信節義を唱へ、児戯に等しき名分を口実に用ひて自から之を策の得たるものと為し、人も亦これに疑を容れざるは何ぞや。蓋し其党与の内に於て上下共に大に利する所あればなり。日本の武人は開闢の初より此国に行はるゝ人間交際の定則に従て、権力偏重の中に養はれ、常に人に屈するを以て恥とせず。彼の西洋の人民が自己の地位を重んじ、自己の身分を貴て、各其権義を持張する者に比すれば、其間に著しき異別を見る可し。故に兵馬騒乱の世と雖ども、此交際の定則は破る可らず。一族の首に大将あり、大将の下に家老あり、次で騎士あり、又徒士あり、以て足軽中間に及び、上下の名分判然として、其名分と共に権義をも異にし、一人として無理を蒙らざる者なく、一人として無理を行はざる者なし。無理に抑圧せられ、又無理に抑圧し、此に向て屈すれば、彼に向て矜る可し。譬へば爰に甲乙丙丁の十名ありて、其乙なる者、甲に対して卑屈の様を為し、忍ぶ可らざるの恥辱あるに似たれども、丙に対すれば意気揚々として大に矜る可きの愉快あり。故に前の恥辱は後の愉快に由て償ひ、以て其不満足を平均し、丙は丁に償を取り、丁は戊に代を求め、段々限あることなく、恰も西隣へ貸したる金を東隣へ催促するが如し。又これを物質に譬へて云へば、西洋人民の権力は鉄の如くにして、之を膨脹すること甚だ難く、之を収縮することも亦甚だ易からず。日本の武人の権力はゴムの如く、其相接する所の物に従て縮張の趣を異にし、下に接すれば大に膨脹し、上に接すれば頓に収縮するの性あり。此偏縮偏重の権力を一体に集めて之を武家の威光と名け、其一体の抑圧を蒙る者は無告の小民なり。小民を思へば気の毒なれども、武人の党与に於ては上大将より下足軽中間に至るまで、上下一般の利益と云はざるを得ず。啻に利益を謀るのみに非ず、其上下の関係、よく整斉して頗る条理の美なるものあるが如し。即ち其条理とは党与の内にて、上下の間に人々卑屈の醜態ありと雖ども、党与一体の栄光を以て強ひて自から之を己が栄光と為し、却て独一個の地位をば棄てゝ其醜体を忘れ、別に一種の条理を作て之に慣れたるものなり。此習慣の中に養はれて終に以て第二の性を成し、何等の物に触るゝも之を動かす可らず。威武も屈すること能はず、貧賎も奪ふこと能はず、儼然たる武家の気風を窺ひ見る可し。其一局の事に就き一場の働に就て之を察すれば、真に羨む可く又慕ふ可きもの多し。在昔三河の武士が徳川家に附属したる有様なども此一例なり。斯る仕組を以て成立たる武人の交際なれば、此交際を維持せんがためには、止むを得ず一種無形最上の権威なかる可らず。即ち其権威の在る所は王室に止まると雖ども、人間世界の権威は、事実、人の智徳に帰するものなるが故に、王室と雖ども実の智徳あらざれば実の権威は之に帰す可らず。是に於てか其名目のみを残して王室に虚位を擁せしめ、実権をば武家の統領に握らんとするの策を運らしたることにて、即ち当時諸方の豪傑が上洛の一事に熱中し、児戯に等しき名分をも故さらに存して之を利用したる由縁なり。必竟其本を尋れば、日本の武人に独一個人の気象(インヂヴヰヂュアリチ)なくして、斯る卑劣なる所業を恥とせざりしことなり。(乱世の武人に独一個の気象なし)
古来世の人の等閑に看過して意に留めざりし所なれども、今特に之を記せば、日本の武人に独一個人の気象なき趣を窺ひ見る可き一個条あり。即ち其個条とは人の姓名の事なり。元来人の名は父母の命ずるものにて、成長の後或は改名することあるも、他人の差図を受く可きに非ず。衣食住の物品は人々の好尚に任し、自由自在たるに似たれども、多くは外物に由て動かされ、自から時の流行に従ふものなれども、人の姓名は衣食住の物に異なり、之を命ずるに他人の差図を受けざるは勿論、仮令ひ親戚朋友と雖ども、我より求て相談を受るに非ざれば喙(くちばし)を入る可き事柄に非ず。人事の形に見はれたるものゝ中にて最も自由自在なる部分と云ふ可し。法に由て改名を禁ずる国に於ては、固より其法に従ふも自由を妨るに非ざれども、改名自由の国に於て、源助と云ふ名を平吉と改る歟、又は之を改めざるの自由は、全く一己の意に任して、夜寝るに右を枕にし又左を枕にするの自由なるが如し。毫も他人に関係ある可らず。然るに古来我日本の武家に、偏諱を賜はり姓を許すの例あり。卑屈賎劣の風と云ふ可し。上杉謙信の英武も尚これを免れず、将軍義輝の偏諱を拝領して輝虎と改名したることあり。尚甚しきは、関原の戦争後に天下の大権徳川氏に帰して、諸侯の豊臣氏を冒す者は悉く本姓に復し、又松平を冒す者あり。是等の変姓は或は自から願ひ或は上命にて賜はることもあらんと雖ども、何れにも事柄に於ては賎しむ可き挙動と云はざるを得ず。或人謂へらく、改名冒姓の事は、当時の風習にて人の意に留めざることなれば、今より咎む可らずと云ふものあれども、決して然らず。他人の姓名を冒して心に慊しと思はざるの人情は、古今皆同じ。其証拠には足利の時、永享六年、鎌倉の公方持氏の子、元服して名を義久と命じたりしに、管領上杉憲実は例の如く室町の諱を願はる可しと諌めたれども聴かずとあり。此時持氏は既に自立の志あり。其志は善にも悪にも、他の名を冒すは賎しき挙動と思ひしことならん。又徳川の時代に、細川家へ松平の姓を与へんとせしに辞したりとて、民間には之を美談として云伝へり。虚実詳ならざれども、之を美とするの人情は今も古も同様なること明に証す可し。以上記す所の姓名のことは左まで大事件にも非ざれども、古来義勇と称する武人の、其実は思の外卑怯なるを知る可く、又一には権威を握る政府の力は恐ろしきものにて、人心の内部までも犯して之を制するに足るとの次第を示さんがために、数言を爰に贅したるなり。
右条々に論ずる如く、日本の人間交際は、上古の時より治者流と被治者流との二元素に分れて、権力の偏重を成し、今日に至るまでも其勢を変じたることなし。人民の間に自家の権義を主張する者なきは固より論を竢たず。宗教も学問も皆治者流の内に籠絡せられて嘗て自立することを得ず。乱世の武人義勇あるに似たれども、亦独一個人の味を知らず。乱世にも治世にも、人間交際の至大より至細に至るまで、偏重の行はれざる所なく、又此偏重に由らざれば事として行はる可きものなし。恰も万病に一薬を用るが如く、此一薬の功能を以て治者流の力を補益し、其力を集めて之を執権者の一手に帰するの趣向なり。前既に云へる如く、王代の政治も将家の政治も、北条足利の策も徳川の策も、決して元素を異にするものに非ず。只彼を此より善しとし、此を彼より悪しと云ふものは、此偏重を用るの巧なると拙なるとを見て其得失を判断するのみ。巧に偏重の術を施して最上の権力を執権者の家に帰するを得れば、百事既に成りて他に又望む可きものなし。古来の因襲に国家と云ふ文字あり。此家の字は人民の家を指すに非ず、執権者の家族又は家名と云ふ義ならん。故に国は即ち家なり、家は即ち国なり。甚しきは政府を富ますを以て御国益などゝ唱るに至れり。斯の如きは則ち国は家の為に滅せられたる姿なり。是等の考を以て政治の本を定るが故に、其策の出る所は常に偏重の権力を一家に帰せしめんとするより外ならず。山陽外史、足利の政を評して尾大不掉とて其大失策とせり。此人も唯偏重の行はれずして足利の家に権力の帰せざりしを論じたるまでのことにて、当時の儒者の考には尤のことなれども、到底家あるを知て国あるを知らざるの論なり。若し足利の尾大不掉を失策とせば、徳川の首大偏重を見て之に満足せざる可らず。凡そ偏重の政治は古来徳川家より巧にして美なるものはなし。一統の後、頻に自家の土木を起して諸侯の財を費さしめ、一方には諸方の塁堡を毀ち藩々の城普請を止め、大船を造るを禁じ、火器を首府に入るゝを許さず、侯伯の妻子を江戸に拘留して盛に邸宅を築かしめ、自から之を奢侈に導て人間有用の事業を怠らしめ、尚其余力あるを見れば、或は御手伝と云ひ、或は御固めと云ひ、百般の口実を設けて奔命に疲れしめ、令するとして行はれざるなく、命ずるとして従はざるなかりしは、其状恰も人の手足を挫て之と力を較するが如し。偏重の政治に於ては実に最上最美の手本と為す可きものにて、徳川一家の為を謀れば巧を尽し妙を得たるものと云ふ可し。固より政府を立るには中心に権柄を握て全体を制するの釣合なかる可らず。此釣合の必用なるは独り我日本のみならず世界万国皆然らざるはなし。野蛮不文なる古の日本人にても尚且この理を解したればこそ、数千百年の前代より専制の趣意ばかりは忘れざりしことならずや。況や文物次第に開けたる後の世に於て、誰か政府の権を奪ひ去て然る後に文明を期すると云ふものあらん。政権の必用なるは学校の童子も知る所なり。然りと雖ども、西洋文明の各国にては此権の発源唯一所に非ず、政令は一途に出ると雖ども、其政令は国内の人心を集めたるもの歟、仮令ひ或は全く之を集ること能はざるも、其人心に由て多少の趣を変じ、様々の意見を調合して唯其出る処を一にしたるものなり。然るに古来日本に於ては、政府と国民とは啻に主客たるのみに非ず、或は之を敵対と称するも可なり。即ち徳川政府にて諸侯の財を費さしめたるは、敵に勝て償金を取るに異ならず。国民に造船を禁じ、大名に城普請を止めたるは、戦勝て敵国の台場を毀つに異ならず。之を同国人の所業と云ふ可らざるなり。
都て世の事物には初歩と次歩との区別あるものにて、初段の第一歩を処するには、之をして次の第二歩に適せしむるの工夫なかる可らず。故に次歩は初歩を支配するものと云ふも可なり。譬へば諺に、苦は楽の種と云ひ、良薬口に苦しと云ふことあり。苦痛を苦痛として之を避け、苦薬を苦薬として之を嫌ふは、人情の常にして、事物の初歩にのみ精神を注ぐときは、之を避け嫌ふも尤なるに似たれども、次の第二歩なる安楽と病の平癒とに眼を着すれば、之を忍て之に堪へざる可らず。彼の権力の偏重も、一時国内の人心を維持して事物の順序を得せしむるには止むを得ざるの勢にて、決して人の悪心より出たるものには非ず。所謂初歩の処置なり。加之其偏重の巧なるに至ては、一時、人の耳目を驚かすほどの美を致すものありと雖ども、唯如何せん、第二歩に進まんとするの時に及び、乃ち前年の弊害を顕はして初歩の宜しきを得ざりし徴候を見る可し。是を以て考れば、専制の政治は愈巧なれば其弊愈甚しく、其治世愈久しければ其余害愈深く、永世の遺伝毒と為りて容易に除く可らざるものゝ如し。徳川の太平の如きは即ち其一例なり。今日に至て世の有様を変革し、交際の第二歩に進まんとして、其事極て難きに非ずや。其難き由縁は何ぞや。徳川の専制は巧にして其太平の久しかりしを以てなり。余嘗て鄙言を以て此事情を評したることあり。云く、専制の政治を脩飾するは、閑散なる隠居が瓢箪を愛して之を磨くが如し。朝に夕に心身を労して磨き得たるものは、依然たる円き瓢箪にして、唯光沢を増したるのみ。時勢の将に変化して第二歩に入らんとするに当り、尚旧物を慕ふて変通を知らず、到底求めて得べからざる所の物を求めて脳中に想像を画き、之を実に探り得んとして煩悶するものは、瓢箪の既に釁(す)きたるを知らずして尚これを磨くが如し。愚も亦一層甚しと云ふ可しと。此鄙言或は当ることあらん。何れも皆事物の初歩に心配して次歩あるを知らず、初歩に止て次歩に進まざるものなり、初歩を以て次歩を妨るものなり。斯の如きは則ち、彼の初歩の偏重を以て事物の順序を得せしめたりと云ふも、其実は順序を得たるに非ず、人間の交際を枯死せしめたるものと云ふ可し。交際を枯死せしむるものなれば、山陽外史の所謂尾大不掉も、徳川の首大偏重も、孰れか得失を定む可らず。必竟外史なども唯事の初歩に眼を着して瓢箪を磨くの考あるのみ。
試に徳川の治世を見るに、人民は此専制偏重の政府を上に戴き、顧て世間の有様を察して人の品行如何を問へば、日本国中幾千万の人類は各幾千万個の箱の中に閉され、又幾千万個の墻壁に隔てらるゝが如くにして、寸分も動くを得ず。士農工商、其身分を別にするは勿論、士族の中には禄を世(代々のもの)にし官を世にし、甚しきは儒官医師の如きも其家に定ありて代々職を改るを得ず。農にも家柄あり、商工にも株式ありて、其隔壁の堅固なること鉄の如く、何等の力を用るも之を破る可らず、人々才力を有するも進て事を為す可き目的あらざれば、唯退て身を守るの策を求るのみ。数百年の久しき、其習慣遂に人の性と為りて、所謂敢為の精神を失ひ尽すに至れり。譬へば貧士貧民が無智文盲にして人の軽蔑を受け、年々歳々貧又貧に陥り、其苦は凡そ人間世界に比す可きものなきが如くなれども、自から難を犯して敢て事を為すの勇なし。期せずして来るの難には、よく堪ゆれども、自から難を期して未来の愉快を求る者なし。啻に貧士貧民のみならず、学者も亦然り、商人も亦然り。概して之を評すれば、日本国の人は、尋常の人類に備はる可き一種の運動力を欠て停滞不流の極に沈みたるものと云ふ可し。是即ち徳川の治世二百五十年の間、此国に大業を企る者、稀なりし由縁なり。輓近廃藩の一挙ありしかども、全国の人、俄に其性を変ずること能はず、治者と被治者との分界は今尚判然として毫も其趣を改めざる由縁なり。其本を尋れば悉皆権力の偏重より来りしものにて、事物の第二歩に注意せざるの弊害と云ふ可し。故に此弊害を察して偏重の病を除くに非ざれば、天下は乱世にても治世にても、文明は決して進むことある可らず。但し此病の療法は、目今現に政治家のなれば、之を論ずるは本書の旨に非ず、余輩は唯其病の容体を示したるのみ。抑も亦西洋諸国の人民に於ても、貧富強弱一様なるに非ず。其富強なる者は貧弱を御するに、刻薄残忍なることもあらん、傲慢無礼なることもあらん。貧弱も亦名利のために、人に諂諛することもあらん、人を欺くこともあらん。其交際の醜悪なるは決して我日本人に異なることなし、或は日本人より甚しきこともある可しと雖ども、其醜悪の際、自から人々の内に独一個人の気象を存して精神の流暢を妨げず。其刻薄傲慢は唯富強なるが故なり、別に恃む所あるに非ず。其諂諛欺詐は唯貧弱なるが故なり、他に恐るゝ所あるに非ず。然り而して、富強と貧弱とは天然に非ず、人の智力を以て致す可し。智力を以て之を致す可きの目的あれば、仮令ひ事実に致すこと能はざるも、人々自から其身に依頼して独立進取の路に赴く可し。試に彼の貧民に向て問はゞ、口に云ふ能はずと雖ども、心には左の如く答ることならん。我は貧乏なるが故に富人に従順するなり、貧乏なる時節のみ彼に制せらるゝなり、我の従順は貧乏と共に消す可し、彼の制御は富貴と共に去る可しと。蓋し精神の流暢とは此辺の気象を指して云ふことなり。之を我日本人が、開闢以来世に行はるゝ偏重の定則に制せられて、人に接すれば其貧富強弱に拘らず、智愚賢不肖を問はずして、唯其地位の為に或は之を軽蔑し或は之を恐怖し、秋毫の活気をも存せずして、自家の隔壁の内に固着する者に比すれば、雲壌の相違あるを見る可きなり。(権力偏重なれば治乱共に文明は進む可らず)
此権力の偏重よりして全国の経済に差響きたる有様も等閑に看過す可らざるものなり。抑も経済の議論は頗る入組たるものにて、之を了解すること甚だ易からず。各国の事態時状に由て一様なるものに非ざれば、西洋諸国の経済論を以て直に我国に施す可らざるは固より論を俟たずと雖ども、爰に何れの国に於ても何れの時に在ても、普ねく通用す可き二則の要訣あり。即ち其第一則は財を積て又散ずることなり。而して此積むと散ずるとの両様の関係は、最も近密にして決して相離る可きものに非ず。積は即ち散の術なり、散は即ち積の方便なり。譬へば春の時節に種を散ずるは秋の穀物を積むの術にして、衣食住の為に財を散ずるは、身体を健康に保て其力を養ひ、又衣食住の物を積むの方便なるが如し。此積散の際に、或は散じて積むこと能はざるものあり。火災水難の如き是なり。或は人心の嗜慾にて奢侈を好み、徒に財物を費散して跡なきものあり。是亦水火の災難に異ならず。経済の要は決して費散を禁ずるに非ず、唯これを費し之を散じたる後に、得る所の物の多少を見て其費散の得失を断ずるのみ。其所得の物、所費より多ければ、之を利益と名け、所得所費相同じければ之を無益と名け、所得却て所費よりも少なき歟、或は全く所得あらざれば、之を損と名け又全損と名く。経済家の目的は、常に此所得をして所損より多からしめ、次第に蓄積し又費散して全国の富有を致さんとするに在るなり。故に此蓄積費散の二箇条は、何れを術と為し何れを目的と為す可らず、何れを前と為し何れを後と為す可らず。前後緩急の別なく、難易軽重の差なし。正しく同一様の事にして、正しく同一様の心を以て処置す可きものなり。蓋し蓄積してよく之を散ずるの法を知らざる者は、遂に大に蓄積するを得ず。費散して又よく積むの働なき者は、遂に大に散ずるを得ざればなり。富国の基は唯此蓄積と費散とを盛大にするに在るのみ。其盛大なる国を名けて之を富国と称す。是に由て考れば、国財の蓄積費散は全国の人心を以て処置せざる可らず。既に国財の名あれば国心の名あるも謂れなきに非ず。国財は国心を以て扱はざる可らざるなり。政府の歳入歳出も国財の一部分なれば、西洋諸国にて政府の会計を民と議するも、其趣意は蓋し爰に基きしものなり。第二則、財を蓄積し又これを費散するには、其財に相応す可き智力と其事を処するの習慣なかる可らず。所謂理財の智、理財の習慣なるもの、是なり。譬へば、千金の子、其家を亡し、博奕に贏(か)つ者、永く其富を保つこと能はざるが如し。何れも皆其財と其智力習慣と相当せざるものなり。智力なく習慣なき者へ過分の財を附するは、徒に其財を失ふのみならず、小児の手に利刀を任するが如く、却て之を以て身を害し人を傷ふの禍を致す可し。古今に其例甚だ多し。
右所記の二則果して是ならば、之を照らして古来我日本国に行はれたる経済の得失を見る可し。王代の事は姑く擱き、葛山伯有先生の田制沿革考に云く、
源平の乱に至り、徴発国衙に由らず。民奉ずる所を知らず。一郷一荘の地、官に奉じ、平族に奉じ、源氏に奉ず。間亦奸窃の徒の為に粮食を取られ、無告の民、塗炭惟谷。終に源公の権行はれ、国に守護を置き、荘に地頭を設く。国司荘司は依然として存すれば、民両君を戴くと云ふ可し。中略足利氏の国郡を制する、他の政令なく、国郡郷荘尽く割て士に与へ、租税は其主の指揮に任せ、別に五十分一の課を充て、自から奉とす。譬へば租米五十石を出す可き地は、別に一石を出さしめて京に運送し、将軍の厨料に充られしなり。或は増して二十分一に至りし年もあり。守護地頭は自から其出る用を量りて入ることを制する故に、両税なり。中略又段銭(たんせん)、棟別、倉役は時を撰ばずして之を取る。段銭とは田地にかけて銭を出さしむ、今の高掛りと云ふが如し。棟別とは軒別に割附て銀を出さしむるなり、今云ふ鍵役などに同じ。倉役とは富民富商人へばかり割附るなり、今云ふ分限割と云ふに同じ。倉役、義満公の代には四季にあてられ、義教公の代には一箇年十二度に及び、義政公には十一月九度、十二月八度に至りしゆゑ、百姓は田宅を棄てゝ逃散し、商旅、戸を閉て財を交へざりしこと応仁記に出、云々。又云く、豊臣家一統の後、文禄三年に至り、定則ありし所は、天下の租税三分の二は地頭取て、三分の一は百姓の得分たる可しとあり、云々。又云く、玆(ここ)に国初《徳川》に及び、勝国の苛刻を厭ひ、租税三分の一を弛め《四公六民の法を云ふ》民の倒懸の急を解き、云々。
右沿革考の説に拠れば、古来我国の租税は甚だ苛刻なりしこと疑なし。徳川の初に至て少しく弛めたるも、年月を経るに従ひいつとなく旧の苛税に復したることなり。又古より世の識者と称する人の説に、農民は国の本なれども、工商の二民は僅に賦を出すか出さずして坐食逸飽、理に於てあるまじきことなりとて、頻に工商を咎れども、よく事実を詳にすれば、工商は決して逸民に非ず。稀に富商大賈(たいこ)は逸して食ふ者もあらんと雖ども、こは唯其財本に依て活計を立るものなれば、豪農が多分の田地を所持して坐食する者に異ならず。以下の貧商に至ては仮令ひ直に公の税を払はざるも、其生産の難きは農民に異ならず。日本には古来工商の税なし。其税なきが故に、之を業とする者も自から増加せざるを得ず。されども其増加するや亦必ず際限あるものなり。此際限は農の利と工商の利と互に平均するに至て止む可し。譬へば四公六民の税地を耕すは、其利、固より饒なるに非ずと雖ども、平年なれば尚妻子を養ふて饑を免かる可し。工商が都邑に住居して無税の業を営むは、農民に比すれば便利なるに似たれども、尚饑寒を免かれざる者多し。其然る由縁は何ぞや。仲間の競に由るものなり。蓋し全国工商の仕事には限ありて、若干の人員あれば之を為す可きに定りたる処へ、仕事を増さずして人員のみを増せば、十人にて為す可き商業をば二、三十人の手に分ち、百人にて取る可き日傭賃をば二、三百人に配分し、三割の口銭を得べき商売も一割に減し、二貫文を取る可き賃銭も五百文に下り、自から仲間の競業を以て自から其利潤を薄くし、却て他の便利を為して農民も亦此便利を受く可ければなり。故に工商の名は無税なりと云ふと雖ども、其実は有税の農に異ならず。或は工商に利益の多きことあらば、其多き由縁は、政府にて識者の言を用ひ、様々の故障を設けて、農民の商に帰するを妨げ、其人数の割合尚少なきがために、聊か専売の利を得せしめたるものなり。此事情に由て考れば、農と工商とは正しく其利害を共にして、共に国内有用の事業を為すものなれば、其名目に有税と無税との別ありと雖ども、何れも逸民に非ず。双方共に国財を蓄積する種類の人民と云ふ可し。
故に人間の交際に於て、治者流と被治者流とに区別したるものを、今爰には経済の上にて生財者と不生財者との二種に分つ可し。即ち農工商以下被治者の種族は国財を生ずる者にして、士族以上治者の種族は之を生ぜざる者なり。或は前段の文字を用ひて、一を蓄積の種族と云ひ、一を費散の種族と云ふも可なり。此二種族の関係を見るに、其労逸損徳の有様、固より公平ならずと雖ども、人口多くして財本の割合に過ぎ、互に争ふて職業を求るの勢に迫れば、富者は逸して貧者は労せざるを得ず。是亦独り我邦のみに非ず、世界普通の弊害にして、如何ともす可らざるものなれば深く咎るに足らず。且又士族以上、治者流の人を不生財又費散の種族と名くと雖ども、政府にて文武の事を施行して世の事物の順序を整斉ならしむるは、経済を助るの大本なれば、政府の歳出を以て一概に之を無益の費と云ふ可らず。唯我国の経済に於て、特に不都合にして特に他の文明国に異なる所は、此同一様の事なる国財の蓄積と費散とを処置するに、同一様の心を以てせざるの一事に在り。古来我国の通法に於て、人民は常に財を蓄積し、譬へば四公六民の税法とすれば、其六分を以て僅に父母妻子を養ひ、残余の四分は之を政府に納め、一度び己が手を離れば其行く処を知らず、其何の用に供するを知らず、余るを知らず、足らざるを知らず。概して云へば之を蓄積するを知て其費散の道を知らざるものなり。政府も亦既に之を己が手に請取るときは、其来る処を忘れ、其何の術に由て生じたるを知らず、恰も之を天与の物の如くに思ふて、之を費し之を散じて一も意の如くならざるはなし。概して云へば之を費散するを知て蓄積の道を知らざるものなり。経済の第一則に、蓄積と費散とは正しく同一様の事にして、正しく同一様の心を以て処置す可きものなりと云へり。然るに今此有様を見れば、同一様の事を為すに二様の心を以てし、之を譬へば一字の文字を書くに、偏と作とを分て二人の手を用るが如し。如何なる能筆にても字を成す可らざるや明なり。斯の如く上下の心を二様に分て、各其所見の利益を別にし、互に相知らざるのみならず、互に其挙動を見て相怪むに至れり。安ぞ経済の不都合を生ぜざるを得んや。費す可きに費さず、費す可らざるに費し、到底其割合の宜しきを得べからざるなり。足利義政が大乱の最中に銀閣寺を興し、花御所の甍(いらか)珠玉に金銀を飾りて六十万緡(びん)、高倉御所の腰障子一間に二万銭を費す程の奢侈にて、諸国の人民へ段銭、棟別を譴責して、政府に一銭の余財もなきは、上下共に貧なる時節なり。太閤が内乱の後に大阪城を築き、次で又朝鮮を征伐し、外は兵馬の冗費、内は宴楽の奢侈を尽して、尚金馬の貯あるは、下は貧にして上は殷富なる時節と云ふ可し。又歴代の内にて賢明の名ある北条泰時以下時頼貞時等の諸君は、其自から奉ずること必ず質素倹約なりしことならん。下て徳川の時に至り、其初代には明君賢相輩出して、政府の体裁は一も間然す可きものなし。之を義政の時代などに比すれば同日の論に非ずと雖ども、民間に富を致して事を企たる者あるを聞かず。北条及び徳川の遺物として今日に伝へたるものゝ内にて最も著しきは、鎌倉の五山なり、江戸及び名古屋の城なり、日光山なり、東叡山なり、増上寺なり、何れも盛大なるものなれども、独り怪しむ可きは其時代の日本にして斯る盛大なる工業を興し得たるの一事なり。果して全国経済の割合に適したるもの乎、余輩は決して之を信ぜず。今国内にある城郭は勿論、神社仏閣の古跡とて、或は大仏大鐘、或は大伽藍等の壮大なるものあるは、大概皆神道仏教の盛なりし徴には非ずして、独裁君主の盛なるを証するに足るのみ。稀には水道堀割等の大工を起したることもあれども、決して人民の意に出たるに非ず。唯其時の君相有司の好尚に従ひ、所謂民の疾苦を問ふて其便利を推量したるものゝみ。固より古代無智の世の中なれば、政府にて独り事を為すは必然の勢にて、誰か之を怪しむ者あらん。今より其挙動を是非するの理は万々ある可らずと雖ども、国財の蓄積と費散と其路を別にして、経済上に限なき不都合を生じ、明君賢相の世にても暴君汚吏の時にても、共に此弊を免かれざりしは明に証す可きことなれば、後世苟も爰に眼力の達したる者あらば、再び其覆轍を踏む可らず。明君賢相は必ず有用の事に財を費す可しと雖ども、其有用とは君相の意を以て決する所の有用なれば、人々の好尚に由て武を有用とする者もあらん、文を有用とする者もあらん、或は真に有用の事を有用とすることもあらんと雖ども、又は無用の事を有用とすることもあらん。足利義政の時代に、政府より令して一切借金の約束を破りて之を徳政と名けたることあり。徳川の時代にも之に似たる例なきに非ず。是等も政府より徳と云へば徳なるが如し。何れにも国内の蓄積者は費散者の処置に付き少しも喙を入れざる風なれば、費散者は出を量りて入を制するに非ず、出入共に限なく、唯下民の生計を察して従前の有様に止まれば、之を最上の仁政として他に顧る所あらず。年々歳々同一様の事を繰返して、此処に積ては彼処に散じ、一字の文字を二人にて書き、以て数百年の今日に至り、顧て古今を比較して全国経済の由来を見れば、其進歩の遅きこと実に驚くに堪へたり。其一例を挙て云はんに、徳川の治世二百五十年、国内に寸兵を用ひたることもなきは、万古世界中に比類なき太平と云ふ可し。此世界に比類なき太平の世に居れば、日本の人民愚なりと雖ども、工芸の道開けずと雖ども、仮令ひ其蓄積は徐々たりと雖ども、二百五十年の間には経済の上に長足の進歩を為す可き筈なるに、事実に於て然らざるは何ぞや。独り之を将軍及び諸藩主の不徳のみに帰す可らず。若し或は之を君相有司の不徳不才に由て来りし禍とせば、其不徳不才は其人の罪に非ず、其地位に居れば止むを得ず不徳不才ならざるを得ざるの勢と為りて、其勢に迫られたるものなり。故に経済の一方より論ずれば、明君賢相も思の外に頼母しからず、天下太平も思の外に功能薄きものなり。或人の説に、戦争は実に恐る可く悪む可き禍なれども、其国の経済に差響く処は、之を人身に譬るに金創の如し、一時は人の耳目を驚かすと雖ども、生命貴要の部分に係らざれば、其癒着は案外に速なるものなり、唯経済に就て格別に恐る可きは、金創にあらずして彼労症の如く、月に日に次第に衰弱する病に在りと。此説に拠て考れば、我日本の経済に於ても、元と権力の偏重よりして蓄積者と費散者との二流に分ち、双方の間に気脈を通ぜずして、月に日に衰弱せざれば、歳に月に同一の有様に止まり、或は数百年の間に少しく進みたるも到底盛大活潑の域に入るを得ずして、徳川氏二百五十年の治世にも著しき進歩を見ざりしは、所謂経済の労症なる可し。《昔より日本の学者の論に、政府の勘定奉行と郡奉行とは課を分たざる可らずと云へり。蓋し其趣意は、勘定奉行に収税の権を任すれば自から聚斂に陥るが故に、民に近き郡奉行の権を以て之を平均するの積りならん。固より一政府同穴の内に在る役人に課を分つも、事実に益はなかる可しと雖ども、其論の意を推して考れば、費散者の一手に財用の権を附するの害は、古人も暗に知らざるに非ざるなり。》
経済の第二則に、財を蓄積し又これを費散するには、其財に相応す可き智力と其事を処するの習慣なかる可らずとあり。抑も理財の要は、活潑敢為の働と節倹勉強の力とに在るものにて、此二者其宜しきを得て、互に相制し互に相平均して、始て蓄積費散の盛大を致す可きなり。若し然らずして一方に偏し、敢為の働なくして節倹を専とすれば、其弊や貪慾吝嗇(りんしよく)に陥り、節倹の旨を忘れて敢為の働を逞ふすれば、其弊や浪費乱用と為り、何れも理財の大本に背くものと云ふ可し。然るに前段に云へる如く、全国の人を蓄積者と費散者との二種族に区分して、其分界判然たるときは、其種族全体の品行に於て必ず一方に偏し、甲の種族には節倹勉強の元素を有するも、敢為の働を失して吝嗇の弊に陥らざるを得ず、乙の種族には活潑敢為の元素を有するも、節倹の旨を失して浪費の弊に陥らざるを得ず。日本の国人、其教育洽ねからずと雖ども、天稟の愚なるに非ざれば理財の一事に於て特に拙なりと云ふの理なし。唯其人間交際の勢に由て分つ可らざるの業を分て各種族の習慣を成し、遂に其品行を殊にして拙を見はすに至りしものなり。其品行の素質は決して悪性なるに非ず、適宜に之を調和すれば敢為活潑、節倹勉強と名る物を生じて、理財に無二の用を為す可き筈なれども、其用を為さずして却て浪費乱用、貪慾吝嗇の形に変じたるは、必竟素質の悪性に非ず、調和の宜を失したるものなり。之を譬へば酸素と窒素とを調和すれば空気と名る物を生じて、動植物の生々に欠く可らざる功徳を為す可き筈なれども、此二元素を分析して各別にするときは、功徳を為さゞるのみならず、却て物の生を害するが如し。古来我国理財の有様を見るに、銭を費して事を為す者は常に士族以上治者の流なり。政府にて土木の工を興し、文武の事を企るは勿論、都て世間にて書を読み、武を講じ、或は技芸を研き、或は風流を楽む等、其事柄は有用にても無用にても、一身の衣食を謀るの外に余地を設けて、人生の稍や高尚なる部分に心を用ゆる者は、必ず士族以上に限り、其品行も自から穎敏活潑にして、敢て事を為すの気力に乏しからず。実に我文明の根本と称す可きものなれども、唯如何せん、理財の一事に至ては数千百年の勢に従ひ、出るを知て入るを知らず、散ずるを知て積むを知らず、有る物を費すを知て、無き物を作るを知らざる者なれば、其際に自から浪費乱用の弊を免かる可らず。加之因襲の久しき、遂に一種の風俗を成し、理財を談ずるは士君子の事に非ずとして、之を知らざるを恥とせざるのみならず、却て之を知るを恥と為し、士君子の最も上流なる者と、理財の最も拙なる者とは、二字同義なるに至れり。迀遠も亦極ると云ふ可し。又一方より農商以下被治者の種族を見れば、上流の種族に対して明に分界を限り、恰も別に一場の下界を開て、人情風俗を殊にし、他の制御を蒙り、他の軽侮を受け、言ふに称呼を異にし、坐するに席を別にし、衣服にも制限あり、法律にも異同あり、甚しきは生命の権義をも他に任するに至れり。徳川の律書に、
足軽体に候(さうらふ)共軽き町人百姓の分として法外の雑言等不届の仕方にて不得止(やむをえず)切殺し候者は吟味の上紛無之(まぎれこれなく)候はゞ無構事
とあり。此律に拠れば、百姓町人は常に幾千万人の敵に接するが如く、其無事なるは幸にして免かるゝのみ。既に生命をも安んずること能はず、何ぞ他を顧るに遑あらん。廉恥功名の心は身を払て尽き果て、又文学技芸等に志す可き余地を遺さず、唯上命に従て政府の費用を供するのみにて、身心共に束縛を蒙るものと云ふ可し。然りと雖ども人類の天性に於て、心の働は何様の術を用るも全く之を圧窄禁錮す可きものに非ず、何れにか間隙を求めて僅に漏洩の路あらざるはなし。今この百姓町人等の身分も進退固より不自由なりと雖ども、私財を蓄積して産を営むの一事に於ては、其心の働を伸ばす可き路を開て之を妨るもの少なし。是に於てか稍や気力ある者は蓄財に心を尽して、千辛万苦を憚らず節倹勉強して往々巨万の富を致す者なきに非ず。されども元と此輩は、唯富を欲して富を致したる者にて、他に志す所あるに非ず、富を求るは他の目的を達するための方便に非ずして、正に是れ生涯無二の目的なるが如し。故に人間世界、富の外に貴ぶ可きものなし、富を抛て易ふ可きものなし、学術以上人心の高尚なる部分に属する所の事件は、之を顧みざるのみならず、却て奢侈の一箇条として之を禁じ、上流の人の挙動を見て窃に其迀遠を愍笑するに至れり。事勢に於ては亦謂れなきに非ざれども、其品行の鄙劣にして敢為の気象なきは、真に賎むに堪へたるものなり。試に日本国中富豪と称する家の由来と其興敗の趣とを探索せば、明に事の実証を見る可し。古来大賈豪農の家を興したる者は、決して学者士君子の流に非ず、百に九十九は無学無術の野人にして、恥づ可きを恥ぢず、忍ぶ可らざるを忍び、唯吝嗇の一方に由て蓄積したる者のみ。又其家を亡す者を見れば、気力乏しくして蓄積の術を怠る歟、或は酒色游宴肉体の欲を恣にして銭を失ふものに過ぎず。彼の士族の流が飄然として産を治めず、其好む所に耽て敢て其志を屈せず、敢て其志す所の事を為して貧を患へざる者に比すれば、同日の論に非ず。固より肉体の欲を以て家を破るも、飄然として家を破るも、其家を破るの実は同様なれども、心思の向ふ所を論ずれば、上流の人には尚智徳の働に余地を存し、下流の人には唯銭を好み肉体の欲に奉ずるの一元素あるが如し。其品行の異別亦大なりと云ふ可し。右の次第を以て被治者流の節倹勉強は其形を改めて貪欲吝嗇と為り、治者流の活潑敢為は其性を変じて浪費乱用と為り、共に理財の用に適せず、以て今日の有様に至りしものなり。抑も我日本を貧なりと云ふと雖ども、天然の産物乏しきに非ず、況や農耕の一事に於ては、世界万国に対して誇る可きもの多きをや。決して之を天然の貧国と云ふ可らず。或は税法苛刻ならんか、税法苛刻なりと雖ども、其税は集めて之を海に投げるに非ざれば、国内に留て財本の一部分たらざるを得ず。然るに今日の有様にて全国の貧なるは何ぞや。必竟財の乏しきに非ず、其財を理するの智力に乏しきなり。其智力の乏しきに非ず、其智力を両断して上下各其一部分を保つが故なり。之を概言すれば、日本国の財は開闢の初より今日に至るまで、未だ之に相応す可き智力に逢はざるものと云ふ可し。蓋し此智力の両断したるものを調和して一と為し、実際の用に適せしむるは経済の急務なれども、数千百年の習慣を成したるものなれば、一朝一夕の運動を以て変革す可き事に非ず。近日に至て少しく其運動の端を見るが如くなれども、上下の種族、互に其所長を採らずして却て其所短を学ぶ者多し。是亦如何ともす可らざるの勢にて、必ずしも其人の罪に非ず。蕩々たる天下の大勢は上古より流れて今世に及び、億兆の人類を推倒して其向ふ所に傾きしものなれば、今に於て俄に之に抗抵すること能はざるも亦宜(むべ)なりと云ふ可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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