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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왕 불패 신화' 어떻게 끝날까/ 성한용 한계레기자

이윤진이카루스 2015. 7. 8. 09:33

정치정치일반

‘여왕 불패 신화’ 어떻게 끝날까

등록 :2015-07-07 20:00수정 :2015-07-08 08:56

성한용 선임기자의 현장칼럼 창

왼쪽부터 박근혜 대통령, 유승민 새누리당 원내대표
왼쪽부터 박근혜 대통령, 유승민 새누리당 원내대표
“새누리당의 미래와 박근혜 정권의 성공을 위한 ‘원내대표 사퇴 권고 결의안’을 채택하기 위해 내일 오전 9시 의원총회를 소집하기로 했습니다.”

7일 김무성 대표의 큰 몸집에서 무덤덤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유승민 원내대표가 무엇을 잘못했다는 것인지, 사퇴하면 새누리당의 미래가 어떻게 열린다는 것인지, 박근혜 정권은 어떻게 성공한다는 것인지 설명하지 않았다. ‘명예로운 퇴진을 요구했는데 결국 의원총회까지 가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그는 대답 없이 퇴장했다.

승부는 진작 결정되어 있었다. 박근혜 대통령을 이길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옳으니까 이기는 것이 아니라 이기니까 옳은 것이다. 이런 현실을 어린이들에게 뭐라고 설명할 수 있을까. 부끄럽다.

유승민 원내대표는 무엇을 잘못한 것일까. 이날 아침 ‘새누리당 충청권 국회의원 긴급 연석회의’라는 거창한 회의의 결과를 이장우 의원이 발표했다.

“당정청이 혼연일체가 돼서 국정을 안정적으로 운영하기 위해 유승민 원내대표가 대승적 차원에서 스스로 거취 표명을 하는 게 바람직하다는 데 의견을 모았다.”

역시 유승민 원내대표가 무엇을 잘못했다는 것인지 설명이 없다. 쉽게 말하면 대통령의 화를 돋운 불경죄를 저질렀으니 물러나라는 얘기일 것이다. 불경죄는 옳고 그른 것을 따지지 않는다. 높은 사람이 선이고 낮은 사람이 악이다.

리더십 발휘해야 할 대통령이
싸움과 승부에 몰입하는 현실
경제도 정치도 암담한 전망만…

박근혜 대통령은 승부사다. 정당 대표일 때는 박정희 향수와 비련의 공주 코스프레로 바닥 민심을 끌어모았다. 대통령이 된 뒤에도 ‘나홀로 애국론’과 ‘야당 책임론’으로 선거에서 이기고 있다. 여권 내부 권력투쟁이 벌어지자 이번에는 절대자의 힘과 공포라는 무기를 휘두르고 있다. 싸움의 기술을 어디서 배웠을까. 자서전을 찾아보았다.

“신당동에 살던 시절에는 동네 친구들과 모래주머니놀이, 공기놀이, 고무줄놀이, 숨바꼭질 등을 즐겨 했는데, 그때마다 승부욕에 불타 정말 열심이었다. (…) 고무줄놀이에서 끝까지 살아남기 위해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를 때까지 숨을 참으며 깡충 뛰기도 했다. (…) 나는 골목대장이 되기에 충분했다.”

여고시절 체육대회 사진 설명에는 이런 표현도 나온다.

“승부욕이 강한 내게 운동시간은 골목대장 기질을 발휘할 최적의 시간이었다.”

승부욕은 타고났다는 얘기다. 그럴 수 있다. 그런데 청와대 생활 18년과 은둔의 세월을 거치며 그 승부욕이 이상하게 뒤틀렸다. 윤여준 전 환경부 장관의 회고다.

“당시 스무살을 갓 넘긴 박근혜 대통령은 아버지 연배의 사회 저명인사들을 모아 놓고 충과 효에 대해 강연을 했습니다. 저는 그 모습을 보면서 무례하고 건방지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소셜 콘텍스트, 즉 사회적 맥락을 획득하지 못한 채 지도자가 된 것입니다. 아버지 말이 곧 법이던 시절과 은둔생활을 거치며 박근혜 대통령은 민주적인 가치를 수용할 만한 경험을 하지 못했습니다.”

대략 짐작이 간다. 6월25일 국무회의에서 유승민 원내대표를 배신자로 낙인찍던 순간 그는 ‘독재자 박정희’와 ‘유신공주’에 빙의된 상태였던 것 같다.

물론 최근 사태가 전적으로 박근혜 대통령의 ‘통치 스타일’ 때문이라고 할 수는 없다. 모든 정치·사회적 사건에는 함의가 있다. 정두언 의원은 ‘꼴통보수’와 ‘개혁보수’의 갈등으로 본다. 과거지향 세력과 미래지향 세력의 파워 게임이라는 시각이다. 일리가 있다.

박근혜 대통령을 떠받치는 ‘묻지마 지지층’이 있다. 대구·경북과 60대 이상 유권자들이다. 이들은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연민과 종편에서 제공하는 논리로 철갑을 두르고 있다. 세월호 참사에도, 메르스 사태에도 지지를 철회하지 않았다. 박근혜식 표현으로 하면 한 번도 ‘배신’하지 않았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런 시각의 연장에서 이번 기회에 새누리당을 ‘정통보수당’과 ‘개혁보수당’으로 나누자는 주장이 있다. 중대선거구제로 바꿔 다당제 시스템을 도입하자는 것이다. 될까? 안 될 것이다. 새누리당은 1997년 분열로 정권을 놓쳤다. 10년 야당의 설움을 뼈에 새겼다. 정권을 놓치지 않기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할 수 있다. 김무성 대표와 새누리당 의원들의 굴종이 바로 이 지점에서 출발한다. 집단 탈당이나 신당 창당은 물론이고 선거제도 개편도 없다고 봐야 한다.

정국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새누리당 의원들의 전망은 이렇다.

“박근혜 대통령의 뜻을 물어 새 원내대표를 추대하게 될 것이다. 지금 이런 분위기에서 경선은 불가능하다. 새누리당은 청와대의 여의도 출장소로, 당대표와 원내대표는 대통령의 부하로 확실하게 전락하는 것이다.”

내년 총선은 어떻게 될까? 수도권과 영남 의원들의 전망은 여기서 갈렸다. 수도권은 비관론, 영남은 그래도 낙관론이 우세하다. 낙관론의 근거는 야당의 부진이다.

선거는 그렇다고 치자. 정치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 대한민국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전문가들은 일본의 20년 장기 불황을 우리도 겪게 될 것이라고 우려하기 시작했다.

나라와 국민은 이 지경인데도 정치적 리더십을 발휘해야 할 대통령은 싸움과 승부에만 몰입하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박근혜 대통령의 일생은 신화와 무척 닮았다. 왕의 죽음, 쫓겨난 공주, 은둔과 고행, 여왕의 귀환 등의 표현으로 그의 삶을 묘사할 수 있다. 신화가 어떻게 마무리될까?

“여왕은 권좌에 오른 뒤에도 싸움과 도박을 즐겼다. 여왕은 늘 승리했다. 그 사이 백성은 기근에 시달렸다. 왕국은 거지로 가득 찼다.”

이렇게 끝나지 않을까? 걱정이다.

성한용 정치부 선임기자 shy99@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