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서귀포시 대정읍 알뜨르비행장 일대에는 태평양전쟁 시기 조선인들을 강제동원해 만든 엄체호가 원형 그대로 남아 있어 당시 일본의 침략상을 보여주고 있다.
제주도내 700여개 갱도진지
셋알오름·송악산 해변 등 유명
알뜨르비행장 격납고 그대로
일제말기 마을별 30~100명 할당
곡괭이·삽 등 인력으로 만들어
“세계문화유산 등재…참상 기억을”
셋알오름·송악산 해변 등 유명
알뜨르비행장 격납고 그대로
일제말기 마을별 30~100명 할당
곡괭이·삽 등 인력으로 만들어
“세계문화유산 등재…참상 기억을”
광복 70돌을 맞는다. 70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도, 제주에는 일제강점기 일본의 침략상을 보여주는 군사시설 흔적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태평양전쟁에서 일본의 패색이 짙던 1945년 초, 일본군은 만주의 관동군과 한반도, 일본 본토의 병력을 제주도로 이동시켰다. 일본 본토로 진격해오는 미군을 제주도에서 막기 위해서였다. 1945년 3월 3000여명이던 제주도 주둔 일본군 병력은 해방 무렵 6만5000여명(조선인 징병자 포함)에 이르렀다. 오키나와에서는 1945년 4~6월 미군과 일본군 사이의 전투로 오키나와 주민 12만명이 희생된 것을 포함해 20만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다. 연구자들은 일본의 항복이 늦어졌더라면 제주도가 ‘제2의 오키나와’ 운명을 맞았을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제주지역 곳곳에 남아 있는 일본군 군사시설들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해 역사교훈의 장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 원형이 남아 있는 엄체호 더위가 기승을 부린 지난 7일 제주 서귀포시 대정읍 알뜨르비행장 일대에는 흙먼지가 날렸다. 알뜨르는 ‘아래 벌판’이란 제주어다. 알뜨르비행장(옛 일본 해군 오무라항공기지)은 중일전쟁(1937~45) 때 일본 항공기가 중국 상하이와 난징을 폭격한 뒤 들러 재급유나 보급을 하는 기착기지로 활용했다. 지금은 잔디밭 등으로 변했다.
산방산과 모슬봉을 배경으로 10여개의 엄체호(공습으로부터 비행기를 보호하기 위해 만든 시설)가 아가리를 벌린 것처럼 한눈에 들어왔다. 한 엄체호에는 설치작가 박경훈·강문석씨가 제작한 제로센(일본군 전투기) 모형이 설치돼 엄체호의 용도를 알 수 있게 했다.
1944~1945년 만든 38개의 엄체호 가운데 19개가 원형 그대로 보존돼 있다. 당시 일본군은 0.6~1m 두께 콘크리트 지붕에 흙을 덮고 풀을 심어 위장했다. 주변 지하벙커는 서귀포시가 정비작업을 벌여 지붕 위의 잡목들을 제거했다.
인근 셋알오름 갱도진지의 입구는 수풀로 우거져 있었다. 이 갱도진지는 총길이 1220m, 너비 4m, 높이 3m 안팎에 연면적 5만7000㎡에 이르러 일본 나가노현 마쓰시로 대본영(일본 군 통수기관)의 지하시설(3만2000㎡)보다 1.5배나 크다. 알뜨르 일대에는 고사포 진지가 있고, 알뜨르비행장 근처 송악산 해안 절벽에는 ‘인간어뢰’라고 불리는 가이텐 기지 구축 흔적도 있다.
이 지역의 일본군 유적으로 석사학위를 받은 강순원(53)씨는 “알뜨르비행장 주변은 일본의 침략상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장소다. 특히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의 전쟁유적 가운데 원형 그대로 남은 대규모 비행장은 알뜨르비행장이 유일하다”고 말했다.
제주도 내 전체적으로 700여개의 갱도진지가 있는 것으로 추정되고, 세계자연유산으로 등재된 성산일출봉을 비롯해 제주시 서우봉해안, 서귀포시 황우지해안 등에도 해군특공기지가 건설된 흔적이 남아 있다.
■ 군사시설 구축에 총동원된 제주도민 군사시설 구축에는 제주도민들은 물론 전남 등 다른 지역 청장년까지 노무자로 강제동원됐다. 특히 제주도민들은 일본군의 요새화 작업에 총동원됐다. 아버지와 자식들이 함께 동원되는가 하면, 농사일을 해야 하는 아버지 대신 초등학교를 갓 졸업한 자식이 동원되기도 했다. 제주도민들은 1930년대 후반과 1940년대 초반에는 집에서 드나드는 느슨한 형태로 노무동원됐다. 군사시설 구축작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1944년께부터 마을별로 할당돼 적게는 5~6명, 많게는 30~100명 단위로 동원됐다. 엄체호를 만들거나 셋알오름 갱도진지 구축 작업에 끌려갔다 다쳤으나 치료를 받지 못해 평생 상처를 간직한 이들도 있다.
■ 역사교육의 장 활용해야 제주지역 곳곳에 일제의 침략상을 보여주는 군사유적들이 있으나 이를 역사교육의 장으로 활용하려는 시도는 더디다. 강순원씨는 “지금은 허물지 않고 그냥 내버려두는 수준에 머물러 있다. 왜 이런 시설들이 제주에 있는지를 고민해야 한다. 당시 동북아 정세 속에서 제주도가 처했던 지정학적 상황을 정확히 해석해서 후대에 알려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황석규 제주역사문화진흥원 책임연구원은 “송악산 갱도진지가 무너지고 있는 등 일부 유적들의 훼손이 가속되고 있다”고 우려했다. 그는 “제주도의 일본군 군사시설은 규모와 전략적 배치 등에 희귀성이 있어 역사적 의미가 크다. 이 유적은 전쟁의 참상을 알리고 평화를 염원하는 역사평화교육의 장으로 활용할 가치가 충분히 있다”고 말했다.
일본군 군사시설 활용 방안에 대해 김석윤 박사(제주4·3평화재단)는 “후세대들이 피부에 와 닿을 수 있도록 다크투어리즘의 방향에서 고민해야 한다”고 말했다. 다크투어리즘은 전쟁이나 학살 등 비극적인 역사의 현장을 돌아보며 깨달음을 얻는 여행이다.
최근에는 다른 지역의 일제 군사시설과 묶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박찬식 제주문화유산연구원장은 “한국인들이 겪은 고난을 잊지 않고 평화의 소중함을 되새기기 위해서 알뜨르 일대만이라도 평화유산, 역사교훈유산으로 발전시켜야 한다”고 말했다. 박 원장은 “전국적으로도 이만한 태평양전쟁 유적이 드물기 때문에 서울 용산 미군기지 내 일본군 시설 등과 연계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하는 작업을 고민해야 한다”며, 서울과 제주의 공동작업을 통한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제안했다.
“그땐 사람사는 세상이 아니었지” 비행장 건설 동원됐던 문상진씨
“사람 사는 세상이 아니었지. 물자가 없으니까 모든 걸 사람 힘으로만 하려고 했으니 죽기 아니면 살기로 한 거야. 그만큼 힘든 노동이었어.”
바닷가 자갈·돌담 깨서 날라
열흘씩 함바서 합숙하며 노동
먹거리는 보리죽에 멸치 한마리 문상진(90·서귀포시 대정읍 무릉리)씨는 70여년 전 알뜨르비행장 확장공사에 노무동원됐다. 지난 7일 만난 문씨는 망백이 머잖은 나이인데도 당시 상황을 자세하게 기억했다. 문씨는 17살 때인 1942년부터 3년 동안 노무동원됐다. 문씨는 “당시는 포클레인이나 장비가 없었기 때문에 모든 일을 곡괭이와 삽을 사용해 사람 힘으로만 했다. 그래서 더 힘들었다”고 회고했다. “비행장 공사를 할 때 마을별로 몇명씩 나오라고 해서 계속 교대하면서 다녔어. 농번기 때는 내가 사는 무릉리에서 50명이 동원돼 일주일이나 열흘 정도 함바(집단합숙소)에서 살면 교대로 또 50명이 들어가야 돼.” 고된 노동을 해도 먹을 것은 언제나 부족했다. 문씨는 “함바 생활을 할 때도 마을에서 갖고 간 보리로 죽을 끓이고, 멸치 한마리씩 주면 그게 전부였다. 집에서 드나들 때는 공출해버리니까 먹을 것이 없어서 보리나 고구마를 조금씩 먹으면서 일했다”고 당시 상황을 전했다. 비행장 확장공사와 함께 격납고로 불리는 ‘엄체호’도 건설됐다. 문씨는 엄체호를 바닷가에서 자갈을 나르거나 돌담을 일일이 망치로 부수면서 운반해 만들었다고 말했다. 문씨는 “대정읍 모슬봉 앞의 이른바 오무라병사에는 비행훈련생들을 수용하기 위한 200평 규모 남짓의 건물들이 속속 들어섰다. 아카톤보(일본 소형 연습기)가 상당히 많았다. 공중에서 올라갔다 내려왔다 하면서 연습하는 걸 자주 목격했다. 엄체호 속에는 전투기들이 들어가 있었다”고 기억했다. 문씨는 한 초등학교 교장의 말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그때 교장이 미군이 오키나와를 점령했다고 했어. 그러면서 우리한테 오키나와 청년들은 4m 높이의 파도를 헤치고 기라이(기뢰)를 끌고 가 미국 군함을 격침시켰다, 너희들도 죽을 때는 미군 10명 이상을 죽이고 죽으라는 거야. 그것도 죽창으로. 그게 될 짓인가. 정말 어이없는 말이었어.” 제주/글·사진 허호준 기자 hojoon@hani.co.kr
정비되지 않은 셋알오름 갱도진지에 수풀이 무성하게 자랐다.
송악산 해안절벽에 일본군 해군특공기지로 구축됐던 갱도진지가 절벽이 무너지면서 훼손되고 있다.
“그땐 사람사는 세상이 아니었지” 비행장 건설 동원됐던 문상진씨
문상진 씨.
열흘씩 함바서 합숙하며 노동
먹거리는 보리죽에 멸치 한마리 문상진(90·서귀포시 대정읍 무릉리)씨는 70여년 전 알뜨르비행장 확장공사에 노무동원됐다. 지난 7일 만난 문씨는 망백이 머잖은 나이인데도 당시 상황을 자세하게 기억했다. 문씨는 17살 때인 1942년부터 3년 동안 노무동원됐다. 문씨는 “당시는 포클레인이나 장비가 없었기 때문에 모든 일을 곡괭이와 삽을 사용해 사람 힘으로만 했다. 그래서 더 힘들었다”고 회고했다. “비행장 공사를 할 때 마을별로 몇명씩 나오라고 해서 계속 교대하면서 다녔어. 농번기 때는 내가 사는 무릉리에서 50명이 동원돼 일주일이나 열흘 정도 함바(집단합숙소)에서 살면 교대로 또 50명이 들어가야 돼.” 고된 노동을 해도 먹을 것은 언제나 부족했다. 문씨는 “함바 생활을 할 때도 마을에서 갖고 간 보리로 죽을 끓이고, 멸치 한마리씩 주면 그게 전부였다. 집에서 드나들 때는 공출해버리니까 먹을 것이 없어서 보리나 고구마를 조금씩 먹으면서 일했다”고 당시 상황을 전했다. 비행장 확장공사와 함께 격납고로 불리는 ‘엄체호’도 건설됐다. 문씨는 엄체호를 바닷가에서 자갈을 나르거나 돌담을 일일이 망치로 부수면서 운반해 만들었다고 말했다. 문씨는 “대정읍 모슬봉 앞의 이른바 오무라병사에는 비행훈련생들을 수용하기 위한 200평 규모 남짓의 건물들이 속속 들어섰다. 아카톤보(일본 소형 연습기)가 상당히 많았다. 공중에서 올라갔다 내려왔다 하면서 연습하는 걸 자주 목격했다. 엄체호 속에는 전투기들이 들어가 있었다”고 기억했다. 문씨는 한 초등학교 교장의 말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그때 교장이 미군이 오키나와를 점령했다고 했어. 그러면서 우리한테 오키나와 청년들은 4m 높이의 파도를 헤치고 기라이(기뢰)를 끌고 가 미국 군함을 격침시켰다, 너희들도 죽을 때는 미군 10명 이상을 죽이고 죽으라는 거야. 그것도 죽창으로. 그게 될 짓인가. 정말 어이없는 말이었어.” 제주/글·사진 허호준 기자 hojoo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