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쿠자와 유키치(왼쪽)와 마루야마 마사오. 여전히 일본 근대의 국민적 영웅으로 떠받들어지며 1만엔권 지폐를 장식하고 있는 후쿠자와. 일본 전후민주주의를 이끈 ‘진보적’ 정치사상가로, 지금도 학계의 권위로 군림하는 마루야마는 침략적 천황주의자인 후쿠자와를 시민적 자유주의자로 재창출했다. 역사비평사 제공
천황숭배 침략주의자 후쿠자와를
시민자유주의 아이콘으로 만든
‘후쿠자와+마루야마 신화’ 해체
시민자유주의 아이콘으로 만든
‘후쿠자와+마루야마 신화’ 해체
‘후쿠자와 유키치’라는 신화
야스카와 주노스케 지음, 이향철 옮김
역사비평사·3만원 “조선 인민은 소나 말, 돼지와 다를 것 없다.” 그는 임오군란(1882)·갑신정변(1884) 때 개화파의 거사 단계에서부터 깊숙이 개입해 무기까지 제공했고, 실패 뒤 중국에 쳐들어가 베이징을 함락시키라고 주장했다. 게이오대학 창설자로, 지금도 일본 최고액 지폐인 1만엔권을 장식하고 있는 후쿠자와 유키치(1835~1901, 福澤諭吉). 그는 당시 “지나병(중국군)(…) 돼지사냥하는 셈 치고” 휩쓸어버리라면서 일본 병사들에게 이런 주문까지 했다. “눈에 띄는 것은 노획물밖에 없나니, 아무쪼록 이번에는 온 베이징을 뒤져 금은보화를 긁어모으고(…) 창창 되놈들의 옷가지라도 벗겨 가져오는 것이야말로 바라는 바이니라. 그 가운데는 유명한 고서화, 골동, 주옥, 진기 등도 많을진저(…) 한밑천 잡는 것…” 이런 후쿠자와를 “전형적인 근대 시민적 자유주의 정치관”을 지닌 근대일본의 ‘총체적 스승’으로 정립시키는 데 결정적 기여를 한 사람이 마루야마 마사오(1914~1996, 丸山眞男)다. 1940년에 도쿄제국대 법학부 조교수가 된 마루야마는 천황제를 옹호하고 전쟁동원에도 가담했으나, 패전 뒤 <세카이(세계)> 기고문 ‘초국가주의의 논리와 심리’(1946)로 각광받으면서 일본 전후(戰後)민주주의를 이끈 ‘진보적 지식인’이요 ‘계몽의 기수’가 됐다. 야스카와 쥬노스케(80) 나고야대 명예교수의 <마루야마 마사오가 만들어낸 ‘후쿠자와 유키치’라는 신화>(원제: 후쿠자와 유키치와 마루야마 마사오-‘마루야마 유키치’ 신화를 해체한다, 2003)는 제목 그대로 ‘후쿠자와 신화’와 그 신화의 토대가 된 ‘마루야마 신화’ 자체의 해체까지 정면으로 겨냥한다. 야스카와 교수는 2011년에 한글판이 나온 <후쿠자와 유키치의 아시아 침략사상을 묻는다>(후쿠자와 유키치의 아시아 인식, 2000)의 후속편인 이 책을 낸 이유를 얘기한다. “이 책(전편)만으로는 저 ‘전형적인 시민적 자유주의자’ 후쿠자와도 아시아에 대해서는 편견과 차별의식을 가지고 있었구나 하는 정도만 전할 뿐이며, 후쿠자와의 ‘민주주의’와 ‘시민적 자유주의’ 자체는 문제삼지 않은 채 내버려 두는 격…” 따라서 이 책과 그 뒤에 그가 써낸 <후쿠자와 유키치의 전쟁론과 천황제론>(2006), <후쿠자와 유키치의 교육론과 여성론>(2013) 등 일련의 비판서들은 당연히 후쿠자와가 마루야마가 그려낸 민주주의자도 시민적 자유주의자도 아니었음을 입증하는 데 집중한다. 야스카와 교수가 후쿠자와가 남긴 <학문의 권장> <문명론의 개략> <일본국회의 유래> <시사소언> <제실론> <존왕론> <후쿠옹 자전> <민정일신> 등에 나오는 언설들을 통해 하나하나 논파하는 ‘마루야마 유키치’ 신화는 끔찍하다. “하늘은 사람 위에 사람을 만들지 않고, 사람 아래 사람을 만들지 않았다고 한다”, “일신독립해야 일국독립하는 것” 등의 언설로 회자되는 후쿠자와 사상은 실은 “일본인민의 정신을 하나로 결집하는 중심”으로서의 절대주의적 천황제에 ‘감읍’하고 “우민을 농락하는 사술”로서의 제실 활용을 주창하며, 귀족 특권계급인 화족 제도, 봉건제, 제국헌법과 교육칙어를 옹호하고, 야스쿠니 신사 경배 필요성을 역설하는 썩은 냄새들로 가득하다. 후쿠자와는 아동노동과 남녀차별, 지주-소작인적 노사관계를 비호했고, 사족을 비롯한 중상층의 특권 유지를 주장하면서 하층민들을 “돼지” “바보와 병신”으로 비하하고 그들을 종교로 교화해 ‘강병부국’ 만들기에 동원해야 하며, 내부 안전과 결속을 위해서는 대외침략을 적극 활용하는 ‘내안외경(內安外競)’의 권모술수 방책을 권장했다. 심지어 공창제도와 매춘부 해외 돈벌이까지 장려하면서, 기독교에는 반대했다. 후쿠자와 신화를 만들어낸 마루야마는 이런 모습이 초기 계몽기를 뺀 중기 이후 후쿠자와 사상의 예외적 파편들이 아니라 근간을 이룬 본질인데도, 이를 아예 무시하거나 ‘그럴 리 없다’는 투로 비켜가거나 천황의 직접 통치를 초월적 상징 권력으로 왜곡하는 식으로 둘러댔다. 책 내용의 대부분을 마루야마의 그런 행태를 고발하는 데 할애한 야스카와 교수는, “마루야마의 후쿠자와론은 후쿠자와를 빌려서 마루야마 자신의 사상을 전개한 것”이라는 이에나가 사부로의 논평에 공감한다. 하지만 그는 마루야마 철학 자체에 회의적이다. 그럼에도 아베 신조 총리도 자신의 정치행보 정당화에 후쿠자와를 인용하듯, ‘마루야마 유키치’ 신화의 권위는 아직도 굳건하다. 전쟁 막바지에 육군 이등병으로 평양에서 잠시 복무하기도 한 마루야마는 조선침략과 식민지배를 비롯한 제국일본의 아시아 침략범죄에 철저히 무심했다. 근대일본의 설계자요 메이지유신 이후 제국일본의 범죄적 과거사에 직접적인 책임이 있는 후쿠자와가 버젓이 1만엔권을 장식하고 정한론자들인 사이고 다카모리나 이토 히로부미, 요시다 쇼인 등이 일본국민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영웅’ 대접을 받고 있는 일본 현실. 그들 대다수 일본 식자들이 국민작가 대접을 받았던 시바 료타로의 ‘밝은 메이지’와 ‘어두운 쇼와’론을 신봉하면서 1931년의 만주침략 이전의 침략범죄를 인식조차 하지 못하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일본과 후쿠자와의 문제는 쇼와가 아니라 메이지 시절부터 시작됐다는 걸 책은 명쾌하게 보여준다. 후쿠자와 저작들이 아직도 걸출한 경세서로 수입되는 이 땅의 ‘식민지적 풍토’를 다시 생각하게 된다. 한승동 선임기자 sdha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