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양심의 탄생
오구마 에이지 지음, 김범수 옮김
동아시아·1만6000원
1944년 11월25일, 갓 19살이 된 오구마 겐지(1925~)는 도쿄에서 외할아버지의 배웅을 받으며 병영으로 걸어 들어갔다. 겐지는 부산을 거쳐 같은 해 12월28일께 만주 헤이룽장성에 도착했다. 관동군에 배속된 것이다.
겐지는 그곳에서 고참병의 폭력에 시달리면서 석달짜리 형식적 군사훈련을 받고 항공통신연대에 배치됐다. 소총은 4~5명에 한 정만 있었고, 그마저도 전쟁이 끝날 때까지 한 번도 쏴보지 못했다. 1945년 8월7일 소련군이 만주국 국경을 넘자 부대 전체는 군용열차를 타고 정신없이 퇴각했다. 이등병 겐지는 랴오닝성 단둥에도 미치지 못해, 8월17일 패전 소식을 들었다. “일본으로 돌아간다는 생각이 들어 점점 기뻐졌다.”
겐지의 부대는 간단하게 소련군에게 무장해제를 당한 뒤 기차에 태워졌다. 그런데 기차 방향이 이상했다. 계속 서쪽을 향해 한달 정도를 달렸다. 겐지가 제정 러시아 시절 유형지였던 치타에 도착한 것은 만 20살을 이틀 앞둔 날이었다. 겐지의 소련 포로수용소 생활은 이렇게 시작됐고, 3년 동안 이어졌다.
오구마 겐지는 시베리아 포로수용소에 3년 동안 억류됐으며, 1991년 7월 43년 만에 당시 수용소 터를 찾았다. 동아시아 제공
당시 소련의 수용소에 끌려간 일본군 포로는 대략 64만명에 이르렀고, 이 가운데 6만여명이 살아 돌아오지 못했다. 1945~46년 겨울은 최악이었고, 영하 30~40도의 시베리아 벌판에서 쓰러져 갔다고 한다. 참고로, 시베리아 일본군 포로의 사망률(약 10%)은 독일군에 붙잡힌 소련군 포로(약 60%)와 소련군에 붙잡힌 독일군 포로(약 30%), 일본군에 붙잡힌 영미군 포로(약 27%)의 사망률에 견주면 양호한 편이다.
이 책은 지은이 오구마 에이지가 아버지 겐지를 인터뷰한 결과이다. 자칫 집안 내력 정도에 그칠 수 있었는데, 책은 분명히 그 경계를 넘어 ‘일본 민중의 현대사’로 나아간다. 이는 무엇보다 지은이의 차분하고 입체적인 접근 덕분이다. 우선 전쟁 체험에만 머물지 않고 전쟁 전과 후의 생활사를 두루 담았다. 어릴 적에 먹고살기 힘들어 외할아버지 댁에 맡겨졌고, 전쟁이 확대되면서 도시 하층민의 삶이 점점 곤궁해지는 과정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또 패전 이후 1960년대 고도성장기는 어떤 과정을 통해 사람들의 삶을 바꿔 나갔는지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겐지도 귀국 뒤 몇년 동안 뜨내기 생활을 하다가 결핵으로 5년간 요양소에 붙잡혀 있어야 했지만, 고도성장기 도쿄에서 스포츠용품 외판 사업에 성공해 ‘아래의 아래’ 생활에서 드디어 벗어나게 된다.
사람 이야기는 사회과학적 시점의 도입으로 한 차원 높아졌다. 현재 게이오대 종합정책학부 교수로 있는 아들이 정치, 경제, 사회적 변화상을 아버지의 이야기에 적절하게 교직해 넣었다. 아버지의 중학교 진학, 포로 생활, 공영주택 입주 등 삶의 주요한 변화에 대해 시대 전체 풍경의 일부로 자리를 잡아준 것이다.
무엇보다 한국 독자의 흥미를 끄는 것은 겐지의 ‘정치적 태도’이다. 그는 전쟁 당시를 회상하며 “나는 전쟁에 대해 지지도 반대도 아니었다. 생각할 능력도 정보도 없었다”고 털어놓는다. 민중의 일반적인 태도일 터인데, 전쟁 뒤에는 생각이 좀더 또렷해진다. “먹고살기 바빠서 잘 몰랐지만, 도쿄 전범재판소에 천황이 기소되지 않은 것은 납득이 안 갔다.”
60살이 넘어 은퇴를 준비하면서 겐지는 새로운 자기 모습을 찾아간다. 지역 환경단체에 참여해 힘을 보태고 반전평화운동에도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시베리아 수용소에서 같이 지냈던 조선인 오웅근의 전후보상재판이 벌어지자, 당시 72살의 고령임에도 공동원고의 자격으로 그를 돕는다.
겐지는 현재 90살의 나이로 직접 밥을 짓고 집안일을 하며 건강하게 살고 있다. 2차대전 당시 외교 관련 학술서적을 읽고, 국제 구호단체의 양심수 석방 운동에 참여하기도 한다. 겐지는 삶 전체를 되돌아보면서 “희망이 없으면 살아갈 수 없다”고 했는데, 삶의 무게가 묵직하게 실려 있어 젊은이들이 흉내내기 힘들다. 다소 과장된 느낌이 있는 한국어판 제목보다 원제(‘살아서 돌아온 남자 - 어느 일본군의 전쟁과 전후’)가 좀더 잘 어울려 보인다.
안창현 기자
blue@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