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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땅에 다시 나올까, 이런 변호사/ 한겨레신문

이윤진이카루스 2015. 12. 8. 22:16

사회사회일반

이 땅에 다시 나올까, 이런 변호사

등록 :2015-12-07 21:16수정 :2015-12-08 09:24

 

변호사 2만명 시대에 돌아본 조영래
“그는 법정의 변호사이자, 민중의 변호사였다.”

한인섭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인권변호사’ 조영래를 이렇게 말한다.

조 변호사는 1983년 남대문합동법률사무소에서 인권변호사 활동을 시작하기 전, 이미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을 통해 ‘정의와 인권의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분투했다. 공식적으로 그의 변호사 활동 기간은 8년 남짓. 그런 그가 인권변호사를 상징하는 인물로 지금도 다시 호출되는 것은 민중의 아픔을 외면하지 않은 조영래의 삶 자체 때문이다.

부천서 성고문 사건 변론부터
망원동 대규모 수재 사건까지
출세의 길 버리고 낮은 곳으로
‘전태일 평전’ 써 노동운동사에 획

조영래 변호사는 인권과 정의, 민주주의가 위협받는 현장과 평생을 함께했다. 1971년 서울대생 내란음모사건으로 구속돼 이듬해 9월 1심 선고공판 법정에 선 오른쪽부터 조영래, 이신범, 장기표, 심재권. '한겨레' 자료사진
조영래 변호사는 인권과 정의, 민주주의가 위협받는 현장과 평생을 함께했다. 1971년 서울대생 내란음모사건으로 구속돼 이듬해 9월 1심 선고공판 법정에 선 오른쪽부터 조영래, 이신범, 장기표, 심재권. '한겨레' 자료사진
대구 출신인 조 변호사는 경기고 3학년이던 1964년 학생들을 이끌고 국회의사당 앞까지 한일회담 반대 거리시위를 벌여 정학을 당했다. 그럼에도 이듬해 서울대 전체 수석으로 법과대학에 진학해 삼성 재벌 밀수 규탄, 삼선개헌 반대 등 학생운동을 주도했다. 1971년 사법시험에 합격했지만 그해 10월 서울대생 내란음모사건으로 구속돼 1년6개월을 복역했다. 1974년엔 민청학련 사건 배후로 수배돼 6년가량 수배 생활을 했다. 이 기간 동안 <전태일 평전>을 집필해 당시 노동자들의 참담한 현실을 고발했고, 옥중에 있던 김지하 시인의 <양심선언> 집필을 주도해 독재정권의 ‘사법살인’을 막아내는 데 일조하기도 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세상을 떠난 직후인 1980년 복권된 그는 1982년 김앤장법률사무소에서 변호사 생활을 시작했다가 이듬해 천정배 의원 등과 함께 남대문합동법률사무소를 만들어 공익·인권변론 활동을 본격화한다. 또 1986년 정의실천법조인회(정법회)를 만들고, 이를 모태로 1988년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을 결성해 인권변호의 밑돌을 놓기도 했다.

1988년 부천서 성고문 사건 당시 조영래(왼쪽), 홍성우 변호사가 검찰 기록을 검토하고 있다.'한겨레' 자료사진
1988년 부천서 성고문 사건 당시 조영래(왼쪽), 홍성우 변호사가 검찰 기록을 검토하고 있다.'한겨레' 자료사진
조 변호사의 이름을 세상에 널리 알린 것은 ‘부천서 성고문 사건’이다. 1986년 당시 22살이던 권인숙씨는 주민등록증을 위조해 공장에 위장취업을 한 일로 부천서 경장 문귀동에게 조사를 받을 때 성고문을 당했다. 당시 검찰은 “권인숙과 운동권이 성마저도 혁명의 도구로 악용하고 있다”고 공격하면서 문 경장을 재판에 넘기지 않았고, 문 경장은 권씨를 무고 혐의로 맞고소했다. 조 변호사를 비롯한 변호인단은 재정신청과 재항고 등을 통해 검찰과 경찰의 만행을 지속적으로 폭로했다. ‘권양? 우리가 그 이름을 부르기를 삼가지 않으면 안 되게 된 이 사람은 누구인가?’로 시작되는 그의 변론요지서는 지금도 전범으로 꼽힌다. 결국 87년 6월항쟁이 끝난 뒤 대법원은 권인숙씨의 재정신청을 받아들였고, 특별검사가 임명돼 문귀동을 강제추행 혐의로 기소했다. 문귀동은 89년 징역 5년의 실형을 선고받았다.

조 변호사는 공안 사건뿐만 아니라 망원동 수재 사건, 상봉동 진폐증 사건 등 민사소송에서도 새로운 영역을 개척했다. 특히 ‘망원동 수재 사건’은 시국형사사건 변론이 대부분이었던 인권변호의 영역을 대규모 집단소송으로 넓힌 분수령 같은 사건으로 꼽힌다. 1984년 9월2일 서울에 몰아친 폭우로 서울 마포구 망원동 유수지의 수문이 무너져 일대 1만7900여가구가 물에 잠겼다. 조 변호사는 무보수로 이 사건을 맡아 전문서적을 독파한 끝에 수문 설계가 잘못된 것이 수해의 원인이었다는 사실을 규명해내 피해 보상을 받아냈다.

‘상봉동 진폐증 사건’은 공해병 소송의 효시와 같은 사건이다. 1988년 서울 중랑구 상봉동에 있는 연탄공장 인근에서 8년간 거주한 박길래씨가 공장에서 나오는 석탄분진으로 진폐증에 걸리자 강원산업에 손해배상을 청구했다. 서울대 법대 석사학위 논문을 공해소송에 관해 썼을 만큼 평소 환경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있던 조 변호사는 강원산업의 책임을 인정하는 법원 판결을 이끌어냈다. ‘여성 조기정년제 철폐 사건’은 조 변호사가 남녀차별 문제에도 깊은 관심을 가졌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1985년 서울민사지방법원은 미혼여성 회사원인 이경숙씨가 제기한 교통사고 손해배상청구 소송에서 이씨가 평균 결혼연령인 26살까지만 회사에 근무하는 것을 전제로 해 손해배상액을 산정했다. 조 변호사는 이 사건의 항소심을 수임해 이례적으로 장문의 의견서를 제출하는 등 노력을 기울여, 여성도 남자와 마찬가지로 55살까지 근무하는 것을 전제로 장래의 취업가능기간 동안 벌어들일 수익을 산정해야 한다는 판결을 이끌어냈다.

정의와 인권, 민주주의가 위협받고 있는 이 시대에 그의 삶은 더욱 빛을 발한다. 그와 함께 활동했던 홍성우(67) 변호사는 <조영래 25주기 추모집>에서 “후배 변호사들이 여성·노동·환경 같은 공익 분야를 개발하고 마음이 맞는 사람끼리 조그마한 사무실이라도 만들어서 변호사의 직역을 넓혀갔으면 좋겠다. 자부심을 가지고 공익사건을 하면 부자가 되지는 못하겠지만 밥 먹고는 살 수 있다”며 후배 변호사들을 독려했다.

김지훈 서영지 기자 watchdog@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