되돌아본 ‘최경환호 18개월’
지난해 7월 최경환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취임할 당시 한국 경제는 저성장 가능성에다 잠재 위험도 컸다. 일본의 ‘잃어버린 20년’을 따라간다는 암울한 전망이 쏟아졌다. 세계 경제 상황도 녹록지 않았다. “지도에 없는 길을 가겠다.” 최 부총리가 취임 뒤 첫 회견에서 한 이 발언은 이런 나라 안팎의 상황에서 나왔다.
지난 1년 6개월을 돌아보면, 최 부총리의 모습은 ‘메시지 부총리’에 가까웠다. 말을 앞세워 경제를 운용해왔다는 얘기다. 이는 경제 회복의 밑단추를 경제 주체의 심리 회복에서 찾았고, 무엇보다 정치인답게 말에 능한 그의 스타일에서 비롯됐다. ‘확인된 사실’에만 집착해 움직임이 적었다는 평가가 많았던 전임 현오석 부총리와는 달랐다. 그러나 주요 경제 지표들을 보면, 최 부총리의 전략이 의미있는 성과를 거뒀다고 평가하기 어렵다.
■ 가계 빚 늘린 부동산 ‘올인’ 최 부총리가 재임 기간 일관된 기조를 유지한 건 부동산 대책이다. 그는 취임 뒤인 지난해 8월 곧바로 ‘대출 규제 합리화’를 빌미로 은행권 총부채상환비율(DTI)과 담보인정비율(LTV) 규제를 완화했다. 이런 정책은 얼어붙은 주택 거래를 늘리고 집값을 띄우면 소비가 늘어날 것이라는 기대에 따른 것이다. 최 부총리는 지난해 말 기자들을 만나 “(규제 완화 뒤) 주택 거래량이 많이 늘어났다. 집을 팔지 못해 전전긍긍하던 사람들로부터 고맙다는 이야기를 들어 뿌듯했다”며 만족감을 드러내기도 했다.
그러나 기대했던 ‘자산 효과’는 뚜렷하지 않았고 부채는 급증했다. 집을 가진 사람들이 주로 분포돼 있는 소득 상위계층(월평균 가구 소득 500만원 이상)의 평균 소비성향은 지난 1년 6개월 새 되레 떨어졌다. 반면 올 3분기 가계부채(가계신용 기준)는 1166조원으로, 2008년 2월(3.11%) 이후 가장 높은 증가율(3.05%)을 보였다.
■ 공염불로 끝난 임금 인상 최 부총리는 취임 초 경기 침체의 원인을 총수요 부진에서 찾았다. 그 배경엔 가계 소득 부진이 있다고 봤다. 최 부총리는 “수년간 임금을 쥐어짰는데 경제가 돌아가겠나. 임금을 올려야 경제가 살아난다”고 말했다. 가계 소득을 올리기 위해 그가 쓴 수단은 세금제도였다. 후보자 신분에서 꺼내든 ‘사내유보 과세’가 취임 뒤 다듬어져 ‘기업소득 환류세제’로 얼굴을 내밀었다. 임금과 배당 등에 돈을 많이 쓴 기업에 세금을 깎아주는 제도다. 진보 성향 학자들도 “방향이 틀리지 않았다. 한번 지켜보자”며 기대감을 드러냈다.
실제 가계 소득은 늘었을까? 지난 3분기 가계 소득(전체 가구, 실질소득 기준) 증가율은 0%였다. 1년간 소득이 제자리걸음을 했다는 뜻이다. 2011년 1분기(-0.3%) 이후 4년 6개월 만에 가장 낮은 소득 증가율이다. 기업소득 환류세제 이후 가계 소득 증대를 위한 의미있는 후속 조처는 없었다.
■ 말뿐인 재정 확대 ‘확장적 재정 운용’은 최 부총리의 또다른 메시지였다. 기업과 가계 등 민간 경제 주체가 돈을 쓰지 않으니 정부가 경기 진작의 불씨가 되겠다는 전략이다. 최 부총리는 종종 과거 미국 위스콘신대 유학 시절을 이야기하며 “래리 서머스 논문을 열심히 읽었다”고 말했다. 래리 서머스는 미 재무장관을 지낸 하버드대 교수로 확장적 통화·재정정책을 강조하는 대표 석학이다.
그러나 재정 확장 수준은 미미했다. ‘2015년 예산’은 당초 예정보다 8조원 증액됐을 뿐이다. 이마저도 5조원이나 세수 추계를 잘못한 나머지 올해 7월 추가경정예산을 편성해야 했다. 미미한 확장재정마저 1년 만에 걸음을 멈췄다. 이달 초 국회를 통과한 ‘2016년 예산’은 총지출 증가율을 경제성장률(명목)보다 크게 낮은 3%로 묶었다. 사실상 긴축예산 편성이란 평가가 나왔다. 확장적 재정 운용 역시 공염불에 그친 셈이다.
■ 꼼수 증세 박근혜 대통령의 대선 공약인 ‘증세 없는 복지’는 최 부총리에게도 덫이었다. 고령화·저출산·저성장 대책 등에 써야 할 돈은 많은데, 쓸 돈이 부족했다. 여기에 경제 전망까지 빗나가면서 지난해 역대 최악(10조9000억원)의 세수 부족을 겪었다.
세수가 부족해지자 정부는 지난해 담뱃값·주민세 인상을 들고나왔다. 담뱃값 인상 명분은 국민 건강이었으나 세수 확보 목적도 컸다. 정부는 애초 올해 세수 증가액을 2조8000억원으로 예상했으나 담배 판매가 늘면서 3조2000억원 증가로 바꿔 전망했다. 일부에서는 5조원이 넘을 것으로 내다보기도 한다.
최 부총리는 “증세가 아니다”라고 주장한다. 기재부 세제실은 “증세라고 말하기도, 아니라고 말하기도 어렵다”고 해명하느라 진땀을 흘렸다. 여론은 ‘꼼수 증세’라고 비판했다. 올 초 소득공제를 세액공제로 전환해 연말정산 과정에서 연봉 7000만원 이상 직장인들의 세금이 집중적으로 늘면서 논란은 더욱 커지기도 했다. 당시 유승민 새누리당 원내대표도 “담뱃값 인상, 연말정산 파동은 증세가 맞다. 증세 없는 복지는 허구”라고 공박했다. “증세는 없다”는 기조는 가뜩이나 선진국보다 낮은 조세부담률을 2012년 18.7%에서 2013년 17.9%, 지난해 17.8%(잠정치)까지 떨어뜨렸다.
재정확대 말뿐 빠듯한 예산에 추경 ‘법석’…확장커녕 ‘긴축’ 돌아서
부동산 띄우기 대출규제 다 풀었지만…소비 얼어붙고 부채 눈덩이
증세 아닌 증세 담뱃값·주민세 인상 ‘꼼수’…연말정산 증세논란 증폭
단기부양책 양산 소비세 인하·‘블프’ 반짝효과뿐…결국 3%성장 ‘백기’
인사엔 ‘실세의 힘’ 대구고 인맥 요직에…의원실 인턴 채용압력 의혹까지
■ 3% 성장에 목맨 단기 부양 최 부총리는 지난해 7월 취임 뒤, 부동산 대출 규제 완화를 신호탄으로 단기 부양책을 계속해서 쏟아냈다. 최 부총리가 들어서고 새로 만들어지거나 확대된 정책금융(기업은행·신용보증기금 등에서 돈을 빌려주는 것) 규모만 45조원에 이른다. 정부는 지난해 3.3%의 경제성장률에 이어 올해도 3%(정부 3.1% 전망)대를 방어하기 위해 대대적인 경기 부양에 나섰다. 최 부총리는 지난 7월 ‘3% 사수’를 목표로 11조5362억원 규모의 추가경정예산(추경)을 단행했다. 빚을 내서 세수 부족을 채우고 사회간접자본(SOC) 등에 돈을 풀었다. 구조적 어려움을 겪고 있는 한국 경제는 좀처럼 기지개를 펴지 못했다. 버팀목이던 수출은 올해 들어 11개월 연속 마이너스를 보이고, 분기별 경제성장률은 0%대를 맴돌았다.
정부는 올 하반기에도 단기부양책을 꺼내 들었다. 승용차·가방 등 개별소비세를 잠시 인하해 물건값을 깎아준 것이다. 10월엔 미국의 대규모 세일 행사를 모방한 ‘코리아 블랙프라이데이’도 시행했다. 소비가 반짝 늘긴 했지만 투자와 생산으로 이어지지 못했다. 일부에선 정책 효과가 사라지면서 내년 초부터 소비가 급격히 줄어드는 ‘소비 절벽’ 현상이 나타날 것이라고 우려한다. 임기 내내 다양한 단기 부양책을 쏟아낸 최 부총리는 최근 “올해 3% 성장은 힘들 것 같다”고 밝혔다.
■ 인사로 보여준 실세의 힘 ‘실세의 힘’은 경제가 아니라 인사에서 여실히 드러났다. 임환수 국세청장, 이완수 감사원 사무총장, 이순진 합참의장, 박성재 서울중앙지검장 등이 모두 최 부총리의 대구고 인맥이다. 최 부총리의 매제이자, 보좌관 출신인 장병화씨는 지난해 기술신용평가기관인 한국기업데이터 상임감사에 선임됐다.
채용 비리 의혹도 불거졌다. 최 부총리의 지역구 사무실에서 4년 동안 인턴으로 일했던 황아무개씨가 서류전형에서 2299위를 하고도 중소기업진흥공단에 합격한 것에 대해 현재 검찰이 수사를 하고 있다. ‘기재부발 낙하산 인사’도 논란이다. 추경호 기재부 1차관이 장관급인 국무조정실장, 이석준 2차관이 미래창조과학부 1차관, 방문규 2차관이 보건복지부 차관으로 자리를 옮겼다. 최근에는 국토교통부 장관에 기재부 출신인 강호인 전 조달청장이 임명되면서 부처 간에 갈등이 커졌다.
세종/김경락 김소연 기자 dandy@hani.co.kr
최경환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8일 오전 청와대에서 열린 국무회의에 앞서 차를 마시며 생각에 잠겨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