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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신라 정벌을 연구한 야쓰이/ 한겨레신문

이윤진이카루스 2016. 3. 1. 10:48

문화문화일반

‘신라 정벌 흔적 찾겠다’ 왜곡된 역사에 심취한 야쓰이의 야심

등록 :2016-02-29 18:53수정 :2016-03-01 00:25

‘야쓰이 비망록’으로 본 조선 발굴비사
① 경주발굴 첫발은 ‘진구왕후에 대한 미몽’

고적조사 당시 경주 신라왕릉의 십이지신상 호석 앞에 앉아 기념사진을 찍은 야쓰이 세이치. 그는 경주 고적에 대한 집착이 유별났다.  자료·사진 정인성 영남대 문화인류학과 교수 제공
고적조사 당시 경주 신라왕릉의 십이지신상 호석 앞에 앉아 기념사진을 찍은 야쓰이 세이치. 그는 경주 고적에 대한 집착이 유별났다. 자료·사진 정인성 영남대 문화인류학과 교수 제공
지난해 나온 정부의 국정교과서 편찬 발표와 맞물려 학계에서 고대사 논란이 재연되고 있다. 고조선과 한사군 강역, 임나일본부설의 실체 등을 두고 불거져온 고대사 쟁점들은 기실 일제강점기 일본 식민사학자들이 ‘조선고적조사’라는 이름으로 벌인 고고 발굴 사업의 성과와 해석을 둘러싼 갈등과 대립의 산물이다.

<한겨레>는 1909~1921년 조선의 고적, 유적들을 조사했던 식민사학자 야쓰이 세이치(1880~1959)의 비망록과 유품 등을 최근 단독입수했다. 고고학자 정인성 영남대 문화인류학과 교수가 지난해 일본에서 매입해 <한겨레>에 분석내용과 함께 공개한 이 야쓰이 문서들은 일제강점 초기 한반도 유적 발굴의 비사와 유물 반출의 숨은 경위 등을 담고있는 일급사료들이다. 정 교수가 연구해온 야쓰이 문서의 전모를 통해 일제 식민사학의 뿌리를 파헤쳐보는 연재물을 격주로 싣는다. 

 

도쿄 제국대 사학과 졸업한 인재
대학시절 ‘일본서기’ 공부하며
3세기 진구왕후 신라정벌담 매혹
‘임나일본부설’ 열광하며 배워

조선 고건축물 조사팀 합류 뒤
한반도 고분 탐색 기회만 엿봐
야심에 불타는 그의 눈에
경주 고분이 들어왔다

대한제국이 마지막 가쁜 숨을 몰아쉬던 1909년 9월20일이었다. 촬영장비와 조선사 자료 등이 들어찬 가방을 든 29살 일본 청년이 서울 경성역 플랫폼에 상기된 표정으로 발을 내디뎠다.

사흘전 도쿄를 떠나 관부 연락선과 경부선 열차를 타고 한달음에 경성으로 달려온 그의 이름은 야쓰이 세이치. 와카야마 출신으로, 1907년 최고 명문인 도쿄 제국대학 사학과를 졸업하고 도쿄 제실박물관에서 근무했던, 촉망받는 엘리트 역사학자였다. 일본 통감부가 장악한 대한제국 탁지국으로부터 조선의 고건축물들을 조사해달라는 부탁을 받고 조사단장격인 건축사학자 세키노 타다시 도쿄대 교수와 함께 처음 조선에서 조사를 시작하려는 참이었다.  

세키노는 원래 야쓰이의 대학동문이자 비슷한 연배인 이마니시 류(1873~1932)를 조수로 데려갈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마니시는 당시 평양 일대의 유적 조사에 전념하는 상황이어서 사진을 잘 찍고 체력도 좋다고 소문난 야쓰이를 대신 점찍게 됐다. 그에게 주어진 임무는 고건축물의 사진을 찍고 고고자료의 역사적 해석을 맡는 역할이었다. 그러나 청년 야쓰이의 머리 속에는 고건축 조사 대신 다른 야심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바로 고구려와 신라의 옛땅인 평양과 경주 지역의 고분을 조선에서 처음으로 발굴해보겠다는 욕망이었다. 대학시절 옛 역사책 <일본서기>를 공부하면서 스승 하기노 교수한테서 배웠던 3세기 진구왕후의 신라 정벌담에 마음을 빼앗겼고, 그 흔적을 한반도 고분 발굴로 확인하겠다는 게 진짜 속내였다.

1909년 조선 고적조사의 일정과 촬영목록을 적은 야쓰이의 작업일지 ‘계림기행’의 앞 부분. 자료·사진 정인성 영남대 문화인류학과 교수 제공
1909년 조선 고적조사의 일정과 촬영목록을 적은 야쓰이의 작업일지 ‘계림기행’의 앞 부분. 자료·사진 정인성 영남대 문화인류학과 교수 제공
진구왕후는 일본 역사상 처음으로 나라의 위세를 대외적으로 널리 확장시킨 여성호걸로 일컬어졌다. 3세기 오진 일왕을 임신한 채 한반도에 출병해 신라를 정벌했다는 기록이 <일본서기>에 전해진다. <일본서기>를 보면 왕후의 일본군이 영일만을 거쳐 신라 땅에 상륙하자 당시 신라임금이던 파사 이사금이 스스로 몸을 묶고 나와 말과 마구 등을 바치며 항복했다고 기록돼 있다. 현재 진구왕후의 정벌설은 한일 학계에서 정설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진구왕후의 실존여부도 명확치 않고, 정벌 시기도 파사 이사금의 실제 재위 기간과 맞지 않아 조작, 왜곡됐다는 설이 유력하다. 하지만, 청일전쟁, 러일전쟁 등을 통해 대륙침략 기반을 다졌던 20세기 초의 일본 제국은 진구왕후의 못다한 미몽을 살려 옛땅을 회복하자는 구호를 꺼내들었고, 이는 일본 역사학계에서 정벌의 실제 흔적을 한반도에서 찾자는 고토 회복 사관으로 나타나게 된다.  

정인성 교수가 야쓰이 문서들 가운데서 발굴한 그의 대학 1년생 시절 과제물인 ‘임나일본부의 기초’라는 연습문을 보면, 진구왕후의 삼한정벌과 고대 일본의 야마토 조정이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다는 임나일본부 설을 도쿄제국대에서 체계적으로 가르치고 토론했을 뿐 아니라 야쓰이 또한 이런 왜곡된 역사에 심취했음을 보여주는 흔적이 적나라하게 나온다. 이 연습문에서 야쓰이는 진구왕후의 정벌에 뒤이어 고대 한반도 남부 임라(가야·마한) 지역이 신라군의 침입으로 위기에 처하자 야마토 조정이 장수를 보내어 정벌한 <일본서기>의 기록을 명기하면서 “우리 군대가 피흘려 슬라브족(러시아)을 몰아내고 차지한 조선에서 학계가 진구왕후의 꿈을 이룰 탁식의 종자를 심지못하면 책임을 방기하는 것”이라고 쓰고 있다. 진구왕후의 정벌과 임나일본부 설치로 백제, 신라의 강역은 일본 땅이 됐으나, 이후 당을 끌어들인 신라의 배신으로 결국 일본에서 떨어져나가 잊혀진 영토가 됐다는 그들만의 일방적인 역사관이 당시 학계와 젊은 학도들 사이에 열렬하게 떠올려졌음을 보여주는 증거다.

1909년의 고적 조사상황을 담은 기록으로 현재 유일하게 남은 야쓰이의 현장조사 일지의 제목도 신라를 뜻하는 ‘계림기행’이었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심지어 야쓰이의 동료이자 식민사학의 대가로 반도사관 형성에 큰 영향을 미친 이마니시 류는 그의 수상록에서 경주를 “나의 예루살렘이여, 나의 성지여”라고 열렬히 찬양했다. 그의 찬사는 진구왕후 정벌 이래 일본민족의 숙원이었다는 ‘옛 한반도땅 수복’을 20세기초 메이지 일왕 때 이뤄냈다는 기쁨을 노래한 것에 다름 아니었다.  

그가 도쿄제국대학 시절 ‘임나일본부의 기초’란 제목으로 쓴 연습문. 일본의 고대 한반도 지배 역사를 내세우며 조선 진출의 정당성을 열변하는 내용이다.  자료·사진 정인성 영남대 문화인류학과 교수 제공
그가 도쿄제국대학 시절 ‘임나일본부의 기초’란 제목으로 쓴 연습문. 일본의 고대 한반도 지배 역사를 내세우며 조선 진출의 정당성을 열변하는 내용이다. 자료·사진 정인성 영남대 문화인류학과 교수 제공
대한제국 탁지국이 세키노와 야쓰이에게 부탁한 조사사업은 애초부터 학술적 차원이 아니었다. 러일전쟁 개전을 앞둔 1902년 세키노는 일본 정부의 요청으로 1차 조선고적조사를 벌인 바 있는데, 전쟁터가 될 지역에서 행정시설로 전용가능한 옛 건축물을 파악하려는 의도에서 진행한 조사였다. 2차 조사 또한 그 연장선상에 불과했다. 세키노는 40여일간 진행된 조사에서 경복궁, 숭례문, 평양 대동문, 묘향산 보현사, 경주 향교 등의 고건축물 실측에 주력했지만, 진구왕후에 대한 미몽에 들뜬 야쓰이는 실측을 보조하면서 왕릉과 신라 고분 탐색의 기회를 엿보는데 온신경을 기울였다. 사실상 동상이몽의 조사가 진행된 셈이었다.  

정 교수가 입수한 야쓰이의 조사일지 ‘계림기행’과 사진촬영 노트 등을 보면, 1909년 조사의 세부 일정이 날짜별로 기록되어 있다. 조사단은 먼저 경성에서 대한제국 왕실의 궁내부 차관을 지낸 고미야와 고려청자 애호가였던 아유가이 등 일본인 수집가들의 조선미술 소장품을 조사하고 사진을 찍은 뒤, 충청도를 거쳐 경상도로 내려갔다. 경상도에서는 대구 향교를 조사하고 현지 사찰과 고분 등을 뒤지며 암약하던 골동상들을 통해 조달한 일본 거류민들의 수집품들도 기록했다. 야쓰이는 단장인 세키노에게 고분 발굴을 하겠다는 의도를 드러내지 않고 두어달간 촬영 등 실무작업을 묵묵히 거들었다. 12월12일 조사단이 경주에 도착하면서 이 청년 학자는 고분을 조사하겠다는 야심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상관인 세키노 또한 다른 사업들 때문에 부산을 거쳐 일본으로 먼저 가버리자, 내심 쾌재를 부른 야쓰이는 눈을 번득거리며 근대 조선 최초의 발굴조사 대상을 찾기 시작했다. 진구왕후 정벌설을 입증하겠다는 의욕에 불타는 그의 눈길에 먼저 솔깃하게 와닿은 유적은 경주읍내 서쪽의 서악리 고분군과 천년 신라궁궐터인 월성 근처의 황남리 고분군이었다. 글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자료 및 사진 정인성 영남대 문화인류학과 교수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