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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심은 어디 가고 왜 반동의 물결에 발을 담그십니까/ 서경식 도쿄경제대 교수/ 한겨레신문

이윤진이카루스 2016. 3. 12. 13:51

정치외교

초심은 어디 가고 왜 반동의 물결에 발을 담그십니까

등록 :2016-03-11 21:02

 

지난해 9월 저서 출간에 맞춰 <한겨레21>과 대담하는 서경식 도쿄경제대 교수(왼쪽)와 2013년 8월 <한겨레>와의 인터뷰에서 한반도 정세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와다 하루키 도쿄대 명예교수.   류우종 <한겨레21> 기자, 이정아 기자 <A href="mailto:leej@hani.co.kr">leej@hani.co.kr</A>
지난해 9월 저서 출간에 맞춰 <한겨레21>과 대담하는 서경식 도쿄경제대 교수(왼쪽)와 2013년 8월 <한겨레>와의 인터뷰에서 한반도 정세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와다 하루키 도쿄대 명예교수. 류우종 <한겨레21> 기자, 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토요판] 특집
서경식, 와다 하루키에게 묻다
▶ 서경식(65) 도쿄경제대 교수는 교토 출신의 재일동포 2세로 와세다대에서 프랑스문학을 전공했다. 1992년 번역 출간된 <나의 서양미술 순례>와 <디아스포라 기행>, <시대의 증언자 쁘리모 레비를 찾아서> 등을 통해 드러난 서경식의 생각과 작품세계는 독재정권에 항거한 두 형의 장기 구금으로 인한 기구하고 처절한 가족사, 경계인적인 한민족 디아스포라로서의 남다른 정체성, 차별적인 일본 사회가 강화시켜준 마이너리티(소수자) 의식 등이 섬세하고도 날카롭게 살아 있다.

맨 위 흑백사진은 1985년 2월 와다 하루키 교수(왼쪽)가 미국 망명에서 귀국을 강행하는 길에 잠시 일본 나리타공항의 호텔에 묵고 있던 한국의 재야인사 김대중씨를 방문한 모습.  <한겨레> 자료사진
맨 위 흑백사진은 1985년 2월 와다 하루키 교수(왼쪽)가 미국 망명에서 귀국을 강행하는 길에 잠시 일본 나리타공항의 호텔에 묵고 있던 한국의 재야인사 김대중씨를 방문한 모습. <한겨레> 자료사진
와다 하루키 선생님, 달리 어찌해볼 수 없는 심정으로 이 편지를 올립니다.

선생님을 생각할 때마다 내 뇌리에는 낡은 사진과 같은 풍경이 떠오릅니다. 1980년대 초, 선생님은 40대 전반, 나는 갓 30대였을 무렵입니다. 저녁 때 도쿄 긴자 거리를 걷고 있던 나는 우연히 선생님 모습을 발견했습니다. 어디로 가시는지 여쭸더니 “스키야바시 공원에”라고 하셨습니다. “지금부터 데모를 할 겁니다”라는 말씀과 함께.

당시 선생님은 ‘한·일 연대 운동’에 매진했습니다. 광주사건 뒤 ‘김대중 내란음모사건’ 군사재판이 진행중이었고, 사형 판결이 예상되고 있던 절망적인 나날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김대중을 죽이지 말라!”고 호소하는 그 데모에는 많아야 수십명, 적을 때는 몇명밖에 참가하지 않았던 적도 있다고 들었습니다. 선생님은 그처럼 세인들의 관심을 끌지도 못하는 활동을 묵묵히 계속했습니다. 번화한 긴자 거리를 오가는 일본 국민 대다수는 무관심했지만, 여기에 조선 민족의 진정한 벗이라고 할 만한 사람이 있구나, 그렇게 느끼면서 나는 무거운 가방을 늘어뜨린 채 천천히 멀어져가는 선생님 뒷모습을 바라보았습니다.

초심

선생님은 당시의 생각을 저서 <한국 민중을 주목할 것>(소주샤, 1981)에서 정리했습니다. 그 책 머리말에 고교 시절 다케우치 요시미의 <현대중국론>(1951년 초판)을 읽고 “역사와 사회에 눈을 떴다”고 썼습니다.

와다 하루키 소년의 마음을 흔든 것은 필경 그 책에 수록된 ‘일본인의 중국관’이라는 논문이었을 것입니다. 1948년에 일본을 방문한 중국 국민당 정부 고관인 장췬(張群)이 귀국할 때 ‘일본의 여러분에게’라는 메시지를 남겼습니다. “일본 국민에게 사상혁명과 심리건설을 철저히 실행하기를 간절히 바란다”며 “이 두 가지는 평화민주 일본을 보증할 뿐만 아니라 일본과 다른 민주국가가 합리적 관계를 재건하는 데에 필요한 보증이기도 하다”고 메시지는 지적했습니다. 하지만 누구도 그 호소에 응답하지 않았고, 바로 그 때문에 선생님은 내가 응답하고 싶다, 그것이 내 의무라고 느낀다고 썼습니다.

장췬의 메시지를 거의 아무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던 원인에 대해, 다케우치는 상업신문에서부터 일본공산당에 이르기까지 중국혁명을 피상적인 이데올로기 대립 측면에서만 바라보고 “그 밑바탕에 흐르고 있는 민족적인 혁명 에너지라는 측면을 보지 않기 때문이 아닌가”라고 지적하면서, 패전 직후에도 일본인의 중국관 밑바탕에는 ‘모멸감’이 있다고 갈파했습니다. 추측하기에 이 다케우치의 사상으로 촉발된 와다 소년은 그 뒤 이를 조선문제를 다룰 때 사상적 참조 축으로 삼았을 겁니다. ‘일본인의 조선관’을 근저에서 다시 묻고 “사상혁명과 심리건설을 철저히 실행”하겠다는 것이 선생님의 초심이었겠지요.

‘불가역적 최종해결’

지난해 12월28일 한·일 외교장관 회담으로 이른바 ‘위안부 문제에 관한 최종합의’(이하 ‘합의’)가 발표됐습니다만, 피해자를 비롯해 한국과 세계의 많은 사람들이 이를 비판하며 크게 반발하고 있습니다. 선생님이 이 ‘합의’ 직후에 신문에 공표한 글 ‘피해자를 찾아가서 사죄의 말을’(<아사히신문> 2015년 12월29일)은 이번 “합의 최종타결”은 “의외였다”는 말로 시작합니다. “피해자에게 어떻게 사죄의 말을 전할 것인지, 이게 전혀 보이지 않는다”고 했고, 한국 정부가 만드는 재단에 10억엔을 출연하겠다고 한 것은 “무책임한 태도라는 반발을 사지 않을까”라고 우려를 표명했습니다.

이번 ‘합의’를 비판하는 대표적인 글로, ‘위안부 문제’ 연구 권위자인 요시미 요시아키 교수가 ‘진정한 해결에 역행하는 한·일 합의’라는 제목의 글(이하 <해결>)을 발표했습니다.(<세카이>(세계) 2016년 3월호)

그 논지는 다음과 같습니다.

①사실과 책임 소재를 인정하는 부분이 애매하다. “(일본)군의 관여하에”라고 할 게 아니라, 왜 “군이”라고 할 수 없는가. ②‘위안부’ 제도가 ‘성노예 제도’인 것을 부인하고 있다. ③배상하지 않는다는 ‘합의’다. ④진상규명과 재발방지 조처가 실시되지 않았다. ⑤가해자 쪽이 “최종적이고 불가역적인 해결” 따위의 말을 해서는 안 된다. 그런 말은 피해자 쪽만이 할 수 있다.

“이번 합의는 한·일 정부가 피해자를 억압해서, 해결된 것으로 친다는 억지를 부린 것이다. (중략) 실시된다 하더라도 피해자는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므로 ‘합의’의 실현이 불가능하다. 따라서 ‘최종해결’이 될 수 없을 것이다. (중략) 백지화하고 다시 해야 한다.”

나는 이 요시미 교수의 견해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만, 선생님은 어떠신지요?

일본군 ‘위안부’ 문제와 아시아여성기금
일본군 ‘위안부’ 문제와 아시아여성기금
이번 ‘합의’ 발표 이전부터 선생님은 1995년에 만든 ‘여성을 위한 아시아평화 국민기금’(이하 여성기금)이 “객관적으로 보건대 한·일 간의 문제인 위안부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다”며 “피해자와 운동단체가 받아들일 수 없는 안을 제시해서 사업 실패를 되풀이해선 안 된다”고 지적했습니다. 그리고 한국 쪽이 제시한 조건, 즉 “피해자가 수용하고, 한국 국민이 납득할 수 있는” 안이어야 한다는 것이 핵심적으로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했습니다.(‘의심받는 위안부 문제 해결안’ <세카이> 2016년 1월호)

결과적으로 보면, 선생님의 이런 생각은 일본과 한국의 정권들로부터 배반당했고, 여성기금의 실패가 되풀이되고 있다고 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일본 정부는 벌써 이번 ‘합의’ 자체를 무효로 만들지도 모를 언동을 되풀이하고 있습니다. 일본 정부는 이제까지 그래 왔듯이 이번 ‘합의’도 외교적인 자기방어 레토릭으로서만 활용하겠다는 자세를 명확하게 내보인 것입니다. 그들은 시종일관합니다. 그리고 한국 정부는 거기에 가담했습니다.

‘위안부 문제의 최종해결’이라는 말은 ‘유대인 문제의 최종해결’이라는 나치의 행정용어를 연상시킵니다. 이 말은 모든 ‘문제’의 원인을 ‘유대인’에게 억지로 떠안기는 심리적 기능을 수행했고, 대량학살로 귀결됐습니다. 마찬가지로 ‘위안부 문제’라는 말은, 그것이 본래 ‘일본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위안부’에게 문제가 있는 듯한 편견을 조성합니다.

그런 시선으로 보면, “아베 총리와 박 대통령에게, 이제 한 걸음 더 노력해주기 바란다”고 한 선생님의 견해는 요시미 교수에 비해 너무나 애매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일본인의 조선관’을 근저에서 다시 묻고 “사상혁명과 심리건설을 철저히 실행”하겠다던 선생님의 초심은 건재한가요? 외람되지만, 나는 지금 그것을 의심하고 있습니다. 이는 선생님으로 대표되는 일본의 전후 진보세력의 실패와 한·일 연대운동 파산과도 밀접한 연관을 갖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또 실패할 수밖에 없는 이번의 ‘불가역적 최종합의’도 그 연장선상에 있다고 봅니다. 이른바 ‘박유하 현상’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뿌리 깊은 실패의 원인은 무엇일까요?

1980년대 도쿄 긴자거리에서 만난
당신은 데모하러 가는 길이었죠
김대중 구명운동에 매진하셨어요
저를 눈뜨게 한 글 쓰신 당신은
조선민중의 진정한 벗이었습니다

이제 당신의 초심을 의심합니다
그것은 일본 전후 진보세력 실패,
한일연대 파산과 밀접한 연관 있죠
‘불가역적 최종합의’도 그 연장
‘박유하 현상’도 마찬가지입니다

제4의 호기

<한국 민중을 주목할 것>제1장의 ‘한국 민중을 주목할 것-역사 속에서 끌어낸 반성’이라는 제목을 단 논고는 1974년, 유신독재가 최악의 탄압정책을 펴던 시기에 발표된 것입니다.

선생님은 일본이 조선을 ‘병합’했을 때, 시인 이시카와 다쿠보쿠 등 겨우 몇 명을 빼고는 “얼마나 무서운 죄의 길로 일본국이 들어서려 하고 있는지” 대다수 일본인들이 알지 못했거나, 국가권력의 공포에 위축당해, 또 어떤 이들은 ‘병합’에 취해버리는 바람에, “일본 제국주의의 조선 식민지배가 시작되고 말았다”고 지적했습니다.

선생님은 “일본인들이 이 침략과 수탈의 역사를 부정하고, 조선반도 사람들과의 새로운 관계를 창조해 갈 기회”가 세 번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 첫 번째는 1945년의 일본 패전 때. 두 번째의 호기는 1964~65년 한·일 국교정상화 조약 교섭 타결 전후. 그러나 이 두 번의 기회에도 일본 국민 대다수는 조선민족의 진의, 항일독립투쟁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고 조선민중과 연대하지 못한 채 호기를 날려버렸다고 지적한 다음, 선생님은 1973년 김대중 납치사건과 그것을 계기로 일어난 한국 민주화투쟁과의 연대운동 속에 ‘제3의 기회’가 있다고 역설했습니다.

일본 국민은 이 ‘제3의 기회’를 붙잡았던가요?

1989년 1월7일 ‘쇼와(昭和) 천황’(히로히토)이 사망했을 때 나는 ‘제4의 호기-쇼와의 종언과 조선’이라는 제목의 짧은 글을 썼습니다.(<세카이> 1989년 4월호. ‘네 번째 호기’ <언어의 감옥에서>. 돌베개, 2011년) 제목으로도 알 수 있듯이 선생님한테서 받은 영향의 연장선상에 있는 논고입니다.

“일본의 조선 식민지화 과정은 모두 통치권의 총람자인 천황의 ‘재가’를 받아서 추진됐다. 조선총독은 법적으로도 천황 ‘직예’(직속)의 천황 대리인이었다.” “(조선 식민지배와 그에 따른 투옥, 고문, 살해 등의 행위는) 얼마 전에 사망한 그 사람의 이름으로 행해졌다. (중략) ‘쇼와’의 종언에 즈음해서 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을 상기하는 일본인은 실로 얼마 되지 않는다. (중략) 그들은 모르는 것이 아니라 묵살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조선’을 직시하는 일은 그들의 자기긍정, 자기찬미 욕구와 부합하지 않기 때문에. 하지만 침략과 수탈의 역사를 자기부정하는 것은 바로 일본인 자신의 도덕적 갱생과 영속적인 평화를 확보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일본인은 앞으로도 계속 ‘항일 투쟁’에 직면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아사히신문>(1989년 1월7일 석간) ‘쇼와를 보낸다’는 제목의 사설은 나를 놀라게 만들었습니다. 일본의 진보적 리버럴파를 대표한다는 <아사히신문>사설이 천황의 전쟁책임으로부터 눈을 돌리고 그를 일개 평화애호가적 인물로 묘사했을 뿐만 아니라, 일본 패전 뒤 미국이 “일본 재건에 도움이 될 것”이라며 천황제를 옹호한 것이 “좋은 결과를 낳았다. 만일 천황제를 폐지했다면 패전의 혼란은 가속되고 부흥은 지연됐을 게 분명하다”고 단언했습니다.

천황제 긍정의 논거가 ‘부흥’이라니, 이 얼마나 허무하기까지 한 자기중심주의인가요. 일본 패전 뒤 조선을 비롯한 일제 피해 민족들은 혼란과 빈궁에 허덕이고 있었지만, 일본 경제는 조선전쟁과 베트남전쟁 특수로 막대한 이윤을 얻었습니다. 그럼에도 가해국인 일본은 배상에 착수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그 글을 나는 다음과 같이 끝냈습니다. “이제 천황 사망을 ‘호기’로 삼아 천황의 전쟁책임을 면책함으로써 일본인 전체의 ‘1억 총면책’을 꾀하고 있으며, 전후의 ‘부흥’과 ‘번영’이라는 노골적인 자기긍정이 거대한 힘으로 추진되고 있다. (중략) ‘쇼와’ 천황의 사망이 일본인들에게 자신의 역사를 비판적으로 재검토할 호기를 제공하고, 일본인들이 조선을 비롯한 아시아 민족들과의 진정한 우정을 쌓아올릴 호기를 제공할지도 모르겠다는 내 생각은 아마도 너무 순진한 것이리라. 일본인들은 이 ‘제4의 호기’를 뻔히 보면서도 떠나보내려 하는가.”

지금 뒤돌아보면 역시 나는 너무 순진했던 것 같습니다. 예상대로 일본인들은 그 뒤 지금까지도 ‘항일투쟁’에 계속 직면해 있습니다. ‘위안부 문제’를 둘러싼 대립과 갈등도 크게 보면 이 문맥 위에 있습니다.

‘유대인 문제의 최종해결’이라는 나치의 행정용어가 모든 문제의 원인을 유대인에게 억지로 떠안기는 심리적 기능을 수행했듯이 ‘위안부 문제’라는 말은, 그것이 본래 ‘일본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위안부’에게 문제가 있는 듯한 편견을 조성한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지난해 8월14일 도쿄의 총리 관저에서 전후 70주년 담화를 낭독하고 있다.    연합뉴스
‘유대인 문제의 최종해결’이라는 나치의 행정용어가 모든 문제의 원인을 유대인에게 억지로 떠안기는 심리적 기능을 수행했듯이 ‘위안부 문제’라는 말은, 그것이 본래 ‘일본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위안부’에게 문제가 있는 듯한 편견을 조성한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지난해 8월14일 도쿄의 총리 관저에서 전후 70주년 담화를 낭독하고 있다. 연합뉴스

암울한 풍경

2012년 12월 총선거 때의 거리연설 광경이 눈에 선합니다. 아키하바라 역두에서 연설하던 아베 신조 자민당 총재를, 일장기를 휘날리며 환호하는 ‘시민’들이 에워싸고 반중·반한, 재일조선인 배척 구호를 외쳤습니다. 1930년대의 독일이나 이탈리아로 되돌아간 듯한 소름 끼치는 광경이었습니다.

‘위안부’ 문제와 관련해서도 한국의 운동단체에는 ‘과격 민족주의’, 일본의 시민운동단체에는 ‘반일주의’라며 저열하게 매도하고 있습니다. 한·일 시민·연구자들이 오랜 세월 쌓아온 노력과 연구, 심화된 논의를 완전히 뒤엎을 기세로 부정론이나 역사수정주의의 폭풍이 거세게 불고 있습니다. 통탄스러운 것은 저널리스트나 지식인들까지도 이런 폭풍에 그저 몸을 움츠리거나 자진해서 거기에 동조하고 있는 현실입니다.

지난해 여름에 발표된 아베 신조 총리의 ‘전후 70년 담화’는 총리 자신이 명백한 역사수정주의자임을 재확인시킨 것인데도 일본 언론이나 지식인들이 그 점을 날카롭게 지적하는 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았습니다.

아베 담화는 시작 부분에서 “러일전쟁이 식민지배 아래에 있던 많은 아시아·아프리카인들에게 용기를 주었다”고 했습니다. 이런 인식은 오랜 세월 일본 보수파에게 널리 공유돼온 것입니다만, 조선민중의 입장에서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다는 건 말할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그것은 ‘화해’가 아니라 정반대로 우롱이나 도발이라고도 할 수 있는 언동입니다.

아베 담화는 홋카이도, 류큐(오키나와), 대만에 대한 정복과 지배에 대해 한마디의 ‘사과’도 ‘반성’도 하지 않았습니다.

아시아 여성기금

냉전이 무너진 1990년대 들어 김학순 할머니를 비롯해 ‘위안부 피해’ 증인들이 속속 나타나기 시작했고, 그때까지 은폐돼 있던 증거자료들도 발굴되기 시작했습니다. 가토 고이치 관방장관 담화(1992년 1월), 미야자와 기이치 총리의 사죄 표명, 고노 요헤이 관방장관 담화(1993년 8월), 호소카와 모리히로 총리 기자회견 등 피해자들 처지에서는 여전히 불충분했겠지만, 일본 정부가 종래의 입장을 바꾸는 자세를 연속적으로 표명했습니다. 국제적인 관심도 커졌고, 그것은 베이징 세계여성회의(1995년 9월) 행동강령(‘성노예제 피해에 관해 진상 규명, 가해자 처벌, 충분한 보상을 요구한다’)으로 이어졌습니다. 이러한 흐름이 순조롭게 발전됐다면 국면이 지금과는 달라졌겠지요.

그러기 위해 필요했던 건 일본의 진보적 시민과 한국의 (그리고 전세계의) 반식민주의 세력이 연대해 일본 정부에 맞서는 것이었겠지요. 물론 쉽지 않은 싸움이었겠지만 이런 싸움의 과정을 거쳐 연대가 강화됐을 겁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게 전개되지 않았습니다.

내가 경악한 것은, 하필이면 와다 선생님이 여성기금을 주도적으로 추진하는 일을 맡은 것입니다. 내가 아는 선생님의 ‘초심’과도, 저 1970년대, 80년대의 연대운동 경험과도 합치되지 않는, 도무지 이해하기 어려운 선택이었습니다.

잡지 <세카이>(1995년 11월호)에 한·일 지식인들 간에 주고받은 서간이 실렸습니다. 발신인 “왜 ‘국민기금’에 호소하는가”는 오타카 요시코, 시모무라 미쓰코, 노나카 구니코, 와다 하루키 네 분의 연명 서한, 답신인 “역시 기금 제안은 받아들일 수 없다”는 이효재·윤정옥·지은희·박원순 네 분의 연명 서한이었습니다.

이 왕복서간에서 일본 쪽(실질적인 집필자는 와다 선생님이겠지요)은 “위안부 제도는 일본군의 판단을 토대로 일본군의 요청과 관리하에 조직적으로 만들어졌다”, “여성의 명예, 존엄, 인권을 유린한 그 죄는 중대”하다고 해놓고는, “문제는 일본 정부로서는 ‘종군위안부’ 문제를 국가가 저지른 전쟁범죄라고 법적으로 인정하기 어렵다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 이유로 가장 먼저 든 것은 “유감스럽게도 일본과 독일은 다르다”는 것이었습니다. 독일은 나치 국가와 단절한 국가이지만 일본은 전쟁 전과 연속된 국가이고, 과거의 전쟁범죄를 단 한 번도 스스로 재단하지 못했다, 이런 일본국가에 지금 전쟁범죄를 인정하고 법적인 책임을 지라고 요구해봤자 어렵다는 얘기입니다.

일본과 독일이 다르다는 건 다 아는 사실입니다. 한국의 피해자나 지식인들이 그것을 모르고 있다는 얘기라도 하려던 것인가요?

그건 일본 정부나 일본 국민을 향해서 해야 할 얘기겠지요. 그것을 여성기금 구상을 받아들이라고 한국 쪽을 설득하는 논법으로 사용한 것은 근본적인 착오가 아닌가요.

그건, 예컨대 반성할 줄 모르는 상습적인 폭력범을 두고 그 가족이 피해자에게 “그에게 근본적인 반성을 하라고 압박해봤자 무리예요”라며 포기하라고 설득하는 것과 같습니다.

일찍이 “우리가 다시 태어나기 위한 연대”를 주장하면서 고독한 연대운동의 선두에 섰던 그 와다 선생님이 가장 ‘연대’가 요구되는 그 국면에서 그런 얘기를 하시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습니다. 한국 쪽 네 사람의 답신에는 “한·일 간에 가로놓인 심연의 깊이를 지켜보면서”라는 부제가 붙어 있습니다만, 나도 바로 그 ‘심연’을 엿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선생님들이 말씀하셨듯이 일본의 현실이 기금안 외에 달리 기대하기 어렵다는 것은 정직한 얘기겠지요. 하지만 우리는 오히려 일본의 정치·사회적 현실이 그런 분위기이기 때문에 더더욱 기금사업 수용을 망설이게 되는 것도 사실입니다. 일본이 이토록 과거의 비인도적인 범죄를 은폐하고 호도하면서 옹호하려 하는 마당에, 얼마 되지 않는 돈이나 물질적 이익으로 모든 현안을 결착짓는 것은 우리 양심이 허락하지 않습니다.” “일본 사회가 유럽과 달라서 파시즘을 제대로 청산할 수 없는 것이라면, 오히려 확실히 청산하도록 압력을 가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여성기금은 당신의 경악스런 선택
일본과 독일 다르다며 일본 정부에
법적 책임 지라고 해봤자 어렵다니요
여성기금이 사실상의 보상이라며
위안부 피해자 설득하던 딜레마

저를 가장 실망시킨 것은 당신이
문제투성이인 박유하의 책 간행에
진력해준 사람으로 등장한 것
한일협정 뒤 배상요구가 무리라는
그의 주장에 정말 동의하십니까

균열

선생님의 “‘종군위안부’ 기금 호소인이 된 이유”(1995. 7. 5)라는 글은 다음과 같은 삽화로 시작합니다.

1953년, 한일회담이 ‘구보타 망언’으로 중단됐을 때 당시 17살의 고교생이던 선생님은 이구동성으로 한국 쪽을 비난하는 일본 정부, 야당, 큰 신문의 논조를 납득할 수 없어서 “옛날 일은 미안했다는 기분을 일본 쪽이 갖고 있는지의 여부는 회담의 기초이며, 이 점에 대해선 양보의 여지가 없다는 한국 쪽의 주장은 ‘조선민중의 소리’로서 경청해야 한다고 생각했다”며 “그때 이후 나는 일본 국민의 생각이 바뀌기를” 바라왔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생각이 어떻게 여성기금 추진 쪽으로 이어지는 것인지 논리적으로 연결이 잘 되지 않습니다.

기금 구상을 둘러싸고 노정된 한·일 간의 균열은 ‘보상금’(여성기금이 사용한 ‘쓰구나이킨’(償い金)의 ‘쓰구나이’는 보상(compensation), 속죄(atonement)의 뜻을 갖고 있고, 속죄 쪽에 더 가까운 것이라고 하나, 보상이 더 귀에 익은 말이다-역주) 지급으로 결정적인 위기를 맞게 됩니다. 한국 쪽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기금이 1997년 1월에 7명의 피해자에게 비공개로 지급을 강행했기 때문입니다. 한국 외무부가 “유감”을 표명했고,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와 시민연대는 “일본 정부는 기금을 통한 매수공작을 백지화하고 공식적으로 사죄하라”, “7명의 할머니들 행동은 올바르지 않다”는 성명을 발표했습니다. 나중에 7명은 ‘시민연대’의 국민성금 지급 대상에서 제외됐고, 나머지 151명에게만 지급하기로 결정됐습니다. 기금은 ‘보상금’을 받고 싶어하는 “할머니의 주체성을 존중하라”며 “7명을 차별하지 말라”고 요구했습니다.

선생님과 다카사키 소지 쓰다주쿠대 명예교수 연명의 ‘한국의 벗들에게 보내는 편지’(1997. 5. 30. <창작과 비평> 1997년 여름호)는 “죄를 인정하지 않은 채 주는 동정금을 받는다면, 피해자는 자원해서 공창(公娼)에 들어간 셈이 된다”는 윤정옥 선생님의 발언과 관련해, “꾸지람을 들은 할머니들을 생각하고 눈물을 흘렸습니다”며, 시민연대 선언문의 “사죄 없는, 배상금이 아닌 위로금을 받아들인다면 일본 정부에 면죄부를 주고 우리 스스로 또다시 돈에 팔린 노예가 되는” 것이고 이는 용납할 수 없다고 한 대목을 두고, “놀라움을 넘어 슬픔을 느꼈다”고 했습니다.

나는 이 편지를 읽고, 윤정옥 선생님의 ‘공창’ 관련 발언에는 문제가 있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여기에는 기괴한 도착(倒錯)이 있다고 느꼈습니다. 보상금을 받은 7명이 비판당하는 처지에 놓인 것은 비극입니다. 그러나 그 원인을 만든 건 누구인가요? 한국 쪽의 이해를 얻지 못한 채 사업을 강행한 기금 쪽에 책임이 있는 게 아닐까요? 그럼에도 일본 쪽이 한국 쪽에 도덕적인 비난을 가하고 자신들을 도덕적 우위에 두는 것은 도착이 아닙니까?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 1월13일 청와대 춘추관에서 한 대국민 담화 및 기자회견에서 기자들의 질의에 답하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 1월13일 청와대 춘추관에서 한 대국민 담화 및 기자회견에서 기자들의 질의에 답하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초기설정의 오류

선생님은 여성기금이 한국과 대만에서는 목적을 달성할 수 없었으나, 필리핀과 네덜란드에서는 “성공을 거두었다”고 총괄하면서, 기금에 대한 비판은 이해할 수 있으나 그 사업을 통해 “마음의 평안을 얻은 피해자들이 있다는 사실을 무시하고, 여성기금을 전면 부정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라고 했습니다.(<해결>)

내가 여기서 다시 묻고 싶은 것은, 한국과 대만에서 이해를 얻을 수 없었던 이유를 어떻게 생각하고 계시느냐는 것입니다. 선생님의 책에서는 ‘위문금’ 보도에 즉각 반론을 펴지 못했기 때문에 진의가 왜곡됐다, ‘보상’이라는 말에 대한 설명이 불충분해서 한국어와 중국어로 번역할 때 “결정적인 오류”를 범했다는 것 등을 이유로 들었습니다. 그러나 내 생각에는 이런 이유는 ‘결정적’인 것들이 아닙니다.

그 결정적인 이유는 “초기설정(初期設定)의 오류”에 있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선생님은 <아사히신문>(1994. 8. 19)에 실린 “전 위안부에게 ‘위문금’, 민간모금으로 기금 구상, 정부는 사무비만 내”라는 기사와 관련해, “이가라시 고조 관방장관은 그때 곧바로 기자회견을 열어 ‘위문금’ 따위는 생각하고 있지 않다고 단호하게 부정해야 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았다. (…) ‘위문금’이라는 딱지가 일찌감치 붙어버리는 바람에 그것을 떼어낼 수 없게 됐다”고 했습니다.(<해결>)

하지만 관방장관이 “단호하게 부정하지 않았던” 것은, ‘위문금’이라고 부르든 다른 무엇이라 부르든 정식 배상금은 절대로 주지 않겠다는 것이 정권의 물러설 수 없는 의도였기 때문이 아닙니까? 선생님은 야부나카 미토지 전 외무차관이 근저(<일본의 침로> 2015년)에서 일본이 위안부에게 ‘위문금’을 주었다고 쓴 것을 비판했습니다. 하지만 그거야말로 일본 정부 중추부의 일관된 입장이며, 그것을 선생님처럼 “사실상의 보상금”이라고 편의적으로 읽고 받아들이도록 피해자들을 향해 주장하고 있는 쪽에 무리가 있어 보입니다.

1990년대에 증인들이 계속 나타나 소송을 제기하고 유엔에서도 문제가 됐습니다. 1994년 6월 자민·사키가케·사회당 3당 연립정권이 탄생하고, 사회당의 이가라시 관방장관이 중심이 돼 ‘기금 방식’에 관한 협의를 시작했습니다. 여성기금은 잡다한 세력들이 모인 정권이 충분한 준비도 없이, 무엇보다 상대방(피해자와 지원단체)과의 신중한 사전협의도 없이 즉흥적으로 제안한 대응책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일국의 전쟁범죄를 마무리짓기에는 너무나도 허술한 것이었다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번 ‘최종 합의’는 그것의 재연이었습니다.

집권 여당으로 참여한 사회당 세력이 보수파나 관료의 저항을 무너뜨릴 수 없다고 판단하고 국가 보상이나 입법 해결의 길을 포기하면서 애매모호한 대응책으로 기금안이 제시된 것이 무엇보다 큰 문제였습니다. 그 때문에 정부가 일관되게 국가 보상을 부정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선생님과 같은 분들이, 이것은 “사실상의 보상”이라고 피해자들을 설득해야 하는 ‘딜레마’에 빠졌습니다. 선생님이 “사실상의 보상”이라는 해석을 강조할 때마다 그 말은 정부에 의해 번복돼 왔습니다. 이번 ‘합의’도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역방향의 벡터

위안부 문제는 원래 세계적인 동서대립 구조(냉전)의 종언과 함께 떠오른 사태입니다. 한국을 포함한 아시아 국가들의 권위주의 체제가 동요하고 민주화가 진행된 결과 피해자들이 이름을 밝히며 나설 수 있게 됐고, 지원운동도 활발해졌습니다. 그때까지 봉인돼 있던 일본의 전쟁범죄 문제가 표면으로 떠오르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당사자인 일본에서는 이 벡터가 역방향을 향하고 있었습니다. 일본에서는 동서대립 시대의 종언이 ‘탈이데올로기 시대’라는 천박한 구호와 함께 진보적 리버럴 세력의 자기해체라는 방향으로 진행됐습니다. 사회당·일본노동조합총평의회 블록 자체가 ‘55년 체제’(자민당 장기집권을 가능하게 만든 보수합동 체제-역주)라 불린 구체제에 의존해온 것은 사실이지만, 그런 사회변화 속에서 새롭게 진보적 세력을 결집하는 대안을 제시하지 못한 채 스스로 자기붕괴의 길을 택했습니다. 소선거구제를 수용하고, 자민당과의 연립도 기꺼이 받아들였습니다. 일관되게 국가주의에 저항해온 일본교직원조합은 방침을 전환해 학교 행사 때의 국기(히노마루) 게양, 국가(기미가요) 제창을 용인했습니다.

그때 늘 주고받은 상투어가 “시대는 변했다. 이젠 이데올로기 시대가 아니다”라 것이었습니다. 진보세력이 스스로 탈이데올로기라며 이념이나 이상을 내버렸을 때 우파세력은 오히려 국가주의 이데올로기의 성채를 강화하고 반격의 기회를 엿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회당의 무라야마 위원장을 수반으로 하는 3당 연립정권이 탄생하자, 무라야마 총리는 취임 직후의 국회 연설에서 미·일 안보조약 긍정, 원자력발전소 긍정, 자위대 합헌 등 그때까지 지켜온 당 노선을 전면적으로 뒤집는 선언을 했습니다. 무라야마 담화를 발표했을 때의 기자회견에서 총리는 천황의 전쟁책임에 대한 질문을 받자, “그것은 없다”고 즉답을 했습니다. 모두 어이가 없을 정도로 경박했다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결과 사회당의 구심력은 크게 떨어져고, 1996년 1월 무라야마 내각 총사퇴 뒤 사회당은 당명을 사회민주당으로 바꾸고 해체됐습니다. 그 이후 일본의 진보적 리버럴 세력은 정치적 근거지를 잃은 채 지금에 이르고 있습니다. 현재 안보법제에 대해서도, 원전 재가동 문제에 대해서도, 국민의 절반 안팎이 반대의사를 갖고 있는데도 그것을 대표할 정치세력이 없다는 것을 여론조사는 보여주고 있습니다.

위안부 문제는 동서대립 시대 종언 이후의 한국과 일본에서 이처럼 사회변동의 벡터가 역방향으로 교차하는 과정에서 부각된 문제라고 할 수 있겠지요.

여성기금 구상은 잠시 집권 여당의 일각이 됐던 사회당 세력이 살아남기 위해 ‘원칙’을 포기하고 보수파 및 관료들과의 타협을 꾀하면서 자신들의 존재 이유를 애써 드러내 보이려 한 프로젝트라고 볼 수 있습니다.

현실주의

이런 여성기금 구상에 반대한 사람은 일본에도 물론 적지 않았습니다. 그들 중 한 사람으로, 선생님은 내게도 깊은 추억으로 남은 <세카이>전 편집장 야스에 료스케를 거론합니다. 선생님은 한국에서 열린 심포지엄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아시아 여성기금 문제와 지식인의 책임’, <동아시아 역사인식 논쟁의 메타 히스토리>세이큐샤, 2008) “야스에 료스케 등 일본의 혁신계 인사들은 국가 보상을 요구하면서 여성기금을 부정적으로 봤다. 그러나 운동을 해봤자 정부가 새로운 조치를 취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이 사람들도 내심 이미 생각하고 있었다. 일본에 있으면 (그런 사정을) 알 수 있었다.” “의미있는 절대야당주의는 이미 그 의미를 잃어버렸다.”

야당적인 입장에서 국가나 정부를 비판하는 것은 ‘절대야당주의’이고 무의미하다고 얘기하신 건가요? 사회당 해체 과정에서 거듭 읊어댄 말이 ‘현실주의’이고, ‘만년 야당으로부터의 탈각’이었습니다. 그 세력이 정권 안으로 들어가 극우파·보수파와 타협하는 것이 정당하다는 주장인가요? 그 결과는 앞에서도 얘기했듯이 원칙의 포기와 자기붕괴입니다.

그리고 선생님은 “여성기금에 부정적인 사람들에게 정부가 국가 보상을 하지 않을 때는 어떻게 할 것인지 물으면, ‘그럴 경우에는 피해자들에게 사죄하고, 모금을 해서 얼마간의 돈이라도 주는 수밖에 없다’고 대답했다. 그렇게 되면 여성기금과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라고 했습니다.

물론 ‘차이’가 분명히 있습니다. 국가에 대항해서 민간인들의 자발적인 지원금을 줄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국가와 함께 국가 책임 회피 수단으로 지원금을 줄 것인가 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선생님은 “일본 내 사죄파의 분열, 한·일 대립이 일본 우파가 대두할 여지를 주었다”는 발언도 했습니다. 그렇다면 그 분열의 원인과 책임에 대해 더 깊이 고찰해볼 필요가 있지 않았을까요. 나는 초기설정을 잘못한 채 여성기금 구상을 강행하려 한 쪽에 더 큰 책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와다 선생님의 ‘현실주의’는 진정한 목적에 비춰볼 때 ‘현실적’이지도 못했습니다.

당사자를 위해?

기금의 ‘보상금’ 지급 사업을 정당화할 때 자주 동원한 레토릭이 “피해 당사자가 고령화하고 있어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 적으나마 보상금을 받게 해서 마음의 평안을 주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한 개인의 순수한 선의에서 나온 말이라면 이의를 달 이유가 없겠지만, 선생님은 ‘한 개인’이 아니라 일본 정부가 추진하는 기금사업의 실행 주체였습니다. 어느 때는 민간, 또 어느 때는 국가사업, 또 어느 때는 개인의 선의, 또 다른 때는 국가의지, 이런 식의 애매한 이면성(二面性)이 여성기금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이면성은 상호보완적인 구조를 갖고 있어서, 국가 책임 회피 장치인 여성기금에 ‘도덕성’이라는 분칠을 해주는 기능을 수행했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애당초 “피해 당사자를 위해”라는 레토릭이 지닌 절대성을 다시 한번 허심탄회하게 검토해볼 필요가 있지 않았을까요? 이 사업은 ‘가해 당사자’의 ‘도덕적 갱생’을 위한 것이 아닌지요? 위안부 제도라는 전대미문의 악행이 저질러졌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고, 피해 당사자들이 나타나지 않더라도, 또는 그들이 “용서한다”고 하더라도, 자율적인 윤리관에 따라 마땅히 해야만 하는 행동이 아니었던가요?

한국의 피해자와 지원단체가 처음부터 제시해온 요구는 진상규명, 진실한 사죄, 개인 배상, 책임자 처벌, 올바른 역사교육, 추모비 건립 등 6개 항목입니다.

선생님은 ‘사죄’에 대해서는 총리의 편지를 통해 이미 했다, ‘보상금’은 배상은 아니지만 그것과 같은 것으로 간주할 수 있다(그렇게 간주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돈은 금액보다는 명분이 문제입니다. 오해의 여지 없이 명확한 보상금이 아닌 이상 피해자가 진정으로 위로받을 순 없습니다. 더구나 그밖의 4개 항목은 전혀 실행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지난 25년간의 반동기를 거치면서 더 실현되기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이들 6개 항목을 실현하는 것은 피해자가 아니라 가해자를 위해서 필요합니다.

여성기금 사업은 네덜란드와 필리핀에서는 성공했다고 선생님은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 경우에 ‘성공’이란 무엇일까요? “피해자 중에서 가장 용감하게 이름을 밝히고 나서서, 끊임없이 일본국가가 저지른 일을 비판한 네덜란드인 얀 루프 오헤른은 기금 쪽에 신청하는 것을 거절했습니다.”(<해결>) 이 한 사람의 여성이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도 기금이 ‘성공’했다고는 할 수 없으며, 적어도 ‘성공’을 자찬해서는 안 됩니다.

필리핀의 경우도 ‘보상금’ 받기를 거부한 사람들도 있고, 마리아 헨슨을 비롯해서 최종적으로 받은 사람도 있습니다. 헨슨은 ‘보상금’을 받은 이듬해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철두철미 일본국가에 유린당한 그분이 세상 떠나기 1년 전에 ‘보상금’을 받은 것을 두고 “마음의 평안”을 주었다고 할 수 있을까요?

여성기금 활동은 일본인이 자신들의 ‘양심’을 위로하기 위해 한 것은 아니었던가요. 그것은 겸허라는 옷을 걸친 자기중심주의는 아니었던가요. 그런 심성을 극복하는 것이야말로 일본인들이 직면한 과제가 아닌가요.

박유하 저서가 일본서 인기 끄는 건
일본 리버럴파 요구와 일치하기 때문
우파 노골적인 국가주의 반대하고
자신을 이성적 민주주의자로 자임
국민적 특권 위협받는 데엔 불안

여성기금 실패 원인 고찰하시고
위안부 합의 철회를 위해 싸우는
한일 시민들 편에 서겠다 해주세요
박유하 교수 저작과 언동에 대해
견해를 명시해주시기 바랍니다

박유하 현상

박유하 교수의 <화해를 위하여>(일본어판, 2006)에 대해 나는 이미 ‘화해라는 이름의 폭력’에서 비판했습니다.(‘화해라는 이름의 폭력’, <언어의 감옥에서>, 돌베개, 2011) 여기서 자세히 그것을 되풀이하진 않겠습니다. 다만 나를 놀라게 만들고 실망시킨 것은 이 책 ‘일본어판 후기’에, 간행에 진력해준 사람으로 선생님 이름이 나와 있다는 것입니다.

이 책의 내용은 문제투성이입니다만, 여기에서는 두 가지만 들어 보겠습니다.

하시모토 류타로 일본 총리의 방한을 앞둔 1996년 6월21일 오전 서울 탑골공원에서 태평양전쟁희생자유족회 회원 30여명이 한일협정의 폐기와 군대위안부 문제에 대한 일본의 공식 사과를 요구하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하시모토 류타로 일본 총리의 방한을 앞둔 1996년 6월21일 오전 서울 탑골공원에서 태평양전쟁희생자유족회 회원 30여명이 한일협정의 폐기와 군대위안부 문제에 대한 일본의 공식 사과를 요구하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1905년의 조약(‘을사조약’)이 ‘불법’이라는 주장(이태진 등)에는 자국이 과거에 저지른 일에 대한 ‘책임’의식이 결여돼 있듯이, 한일협정의 불성실을 이유로 또다시 협정 체결이나 배상을 요구하는 것은 일방적이며, 스스로에게 무책임한 일이 될 것이다. 일본 지식인이 스스로에게 물어온 것만큼의 자기비판과 책임의식을 일찍이 한국은 가져본 적이 없다.”

선생님은 박 교수의 이런 인식에 동의하십니까?

내가 믿고 있는 바로는, 이런 얘기는 선생님의 견해와는 합치하지 않습니다. 선생님은 예전 한일조약 교섭 때 한국의 반대운동에 공감하셨으니까요. 당시 선생님이 공감했던 한국의 지식인들은 ‘자기비판과 책임의식’을 지니지 못한 사람들인가요?

“일본 지식인이 스스로에게 물어온 것만큼의 자기비판과 책임의식을 일찍이 한국은 가져본 적이 없다.”(이 문장은 일본어판에만 있다) 이는 혐한론 그 자체라고도 할 수 있는 놀라운 서술 내용입니다. 이 서술을 마주했을 때 선생님은 그것을 부정하려는 생각은 해보지 않았나요? 아니면 (상상하고 싶지도 않습니다만) “그래, 그대로야”라며 만족하셨나요?

여성기금 사업을 하며 한국 지식인들과 어려운 대화를 계속해온 선생님이 한편으로는 이런 인식에 동의하고 있었다면 그건 대화 거절, 상대에 대한 우롱을 의미하는 게 아닌가요?

내 마음속의 와다 선생님은, 이런 일본인 귀에 듣기 좋은 서술은 한눈에 알아보고 단호하게 거절할 분이었습니다. 그게 아니라면, 저 ‘초심’을 이미 버리신 겁니까?

박 교수의 새 책 <제국의 위안부>가 일본과 한국에서 소동을 불러일으키고 있습니다. 이 책에 대해서도 나는 여기서 자세히 논할 생각이 없습니다. 많은 논자들이 지적하고 있듯이, 이 책도 논증이 부정확하고 자의적이며, 논리 진행에 일관성이 없어서 비판해봤자 생산적인 논의가 되리라 기대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제국의 위안부>에는 (종종 서로 모순되는) 여러 가지 일들이 쓰여 있습니다만, 집요하게 되풀이되는 핵심적 주장은 위안부 연행에 책임이 있는 주체는 ‘업자’이지 ‘군’이 아니며, ‘군’의 법적인 책임은 물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는 일본과 세계의 많은 연구자들에 의해 이미 논파된 지 오래된 주장입니다.

이 주장은 오랜 세월 이어져온 일본 정부의 주장과 보기 좋게 일치합니다.

통탄스러운 것은, 이런 박 교수의 저서가 일본에서는 몇 개의 상까지 받고 인기를 얻고 있는 현상입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일까?” 그 이유에 대해 나는 일찍이 ‘화해라는 이름의 폭력’에서 내 나름의 추론을 해봤습니다.

“박유하의 언설이 일본 리버럴파의 숨겨진 욕구와 정확하게 합치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들은 우파의 노골적인 국가주의에는 반대하면서, 자신들을 비합리적이고 광신적인 우파와는 구별되는 이성적인 민주주의자로 자임하고 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근대사의 전 과정을 통해서 홋카이도, 오키나와, 대만, 조선, 그리고 만주국으로 식민지배를 확대함으로써 획득한 일본국민의 국민적 특권이 위협받는 데에 불안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중략) 우파와 일선을 긋는 일본 리버럴파 다수는 이성적인 민주주의자를 자임하는 명예감정과 옛 종주국 국민으로서의 국민적 특권 모두를 놓치고 싶지 않은 것이다.”

박 교수의 불가해하기까지 한 정열의 원천은 정대협 등 한국 민주세력과 그들과 연대하려는 일본 시민에 대한 적개심에 있다는 게 이번 책에서는 명백히 표명돼 있습니다. 2012년 정대협 심포지엄 자료집에 북한이 보낸 ‘축사’가 실려 있는 사실을 지적하면서 박 교수는 위안부 문제가 처음에는 ‘민족문제’로 인식됐다가 나중에는 ‘보편적인 여성인권문제’로 다뤄졌다면서, “한국의 정대협이나 일본의 일부 인사들이 북한과 연대해서 일본의 ‘군국주의’만 비판해온 것은 운동이 ‘냉전적 사고’에 갇혀 있었기 때문”(일본어판)이라고 했습니다.

위안부 문제는 식민지배하에서 일어난 전쟁범죄이기 때문에 민족문제임이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그것과 ‘보편적인 여성인권문제’는 서로 배제하는 대립적인 범주가 아닙니다. 위안부 문제는 이 두 가지 범주가 겹쳐진 영역에서 일어난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성인권문제’와 ‘민족문제’라는 두 가지 범주는 그 한쪽을 부정하기 위해 또 한쪽을 이용해서는 안 됩니다. “정대협이나 일본의 일부 인사들”에게 그런 인식이 없다고 박 교수가 말하는 것은 지난 20년간의 논의를 통해 축적된 것을 무시한 근거없는 주장입니다.

1990년대 초 일본과 한국 운동단체들의 협력으로 북의 위안부 피해자들이 일본을 초청방문하고, 도쿄에서 남쪽 피해자들과 얼싸안던 감격스런 장면을 기억합니다. 냉전의 얼어붙은 벽에 자그마한 구멍이 뚫려 빛이 비쳐든 순간이었습니다. 그것이 그 뒤 2000년 국제여성전범법정으로 발전했습니다. 피해자와 운동단체들이 이룩한 멋진 성과입니다.

바로 탈냉전적인 사건이었습니다. 그것을 ‘북한’과 엮어서 비난하는 것이야말로 바로 ‘냉전적 사고’에 갇혀버린 이데올로기적 공격이라고 해야겠지요.

박 교수의 저작 자체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그것이 일본에서 인기를 얻고 있는 현상입니다. 이 현상은 3가지 레벨의 반동이 중첩돼 일어났다고 나는 봅니다. 즉 한국에서 보자면, 민주화 투쟁의 달성에 따른 김대중·노무현 정권 시절에 대한 반동, 특히 그 과거사 청산, 친일파 청산 움직임에 대한 보수파와 식민지 근대화론 쪽에서의 반동입니다.

일본 쪽을 보면, 1990년대 이후 오래 이어진 우경화. 이것은 전후 민주주의(아베 총리가 얘기하는 ‘전후 레짐’)에 대한 대반동이며, 여기에 혐한·반중론의 만연이라는 배외주의 풍조가 박차를 가하고 있습니다.

세계적으로 보면, 반식민주의의 고양에 대한 반동입니다. 2001년, 남아프리카공화국 더반에서 유엔 주최로 ‘인종주의, 인종차별, 배외주의, 그리고 그와 관련된 불관용에 반대하는 국제회의’가 열렸습니다. 이 회의는 구미제국이 저질러온 노예무역, 노예제, 식민지배에 ‘인도(人道)에 반하는 죄’라는 개념을 적용할 가능성을 처음으로 공개 논의하는 자리였습니다.

그러나 회의는 ‘법적 책임’을 부정하는 선진제국(옛 식민지 종주국)의 완강한 저항에 부닥쳐 난항을 겪게 되고, 선언문에는 노예제도·노예무역이 ‘인도에 반하는 죄’라는 사실은 명기됐지만 ‘보상의 의무’는 담기지 못했습니다.

이런 3가지 레벨에 걸친 반동의 집약적인 표현으로서 박 교수 현상이 나타났습니다.

박 교수의 저작은 한 색다른 개인의 비논리적인 주장이며, 단적으로 얘기하면 국가 책임 부정론의 한 형태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웃어넘기기에는 너무나도 심각한 상처를 피해자들과 운동단체에 주었고, 반동의 물결을 탄 일본의 역사수정주의자와 한국의 보수파를 응원해주는 기능을 하고 있습니다.

‘사악한 길’

와다 선생님, 이상으로 될 수 있는 한 정직하게 생각하는 바를 얘기했습니다.

나는 선생님의 논문 ‘비폭력 혁명과 억압민족’(<한국 민중을 주목할 것>)을 통해 눈을 뜬 사람들 중 한 명입니다. 3·1 독립선언은 “용맹, 과감으로써 지난 잘못을 확정(廓正)하고, 진정한 이해와 동정을 기본으로 하는 우호적 신국면을 타개하는 것이 피아(彼我)간에 화를 멀리하고 복을 불러오는 첩경임을 명지(明知)하라”며 조선의 독립을 꾀하는 건 조선인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일본에 대해서는 사악한 길에서 나와 동양의 지지자로서의 중책을 다하게 하기” 위해서라고 썼습니다. 그것을 내게 가르쳐준 게 다름아닌 선생님의 논문이었습니다.

선생님, 조선민족의 힘든 싸움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오래 계속되리라는 것을 각오해야겠지요. 그런데 일본은 이미 ‘사악한 길’에서 벗어난 걸까요?

선생님과 같은 분은 국가에 대해 가장 원칙적인 비판의 자세를 견지해주시기 바랍니다. 그 ‘원칙’, 바꿔 말하면 ‘이상’을 공유해야만 비로소 ‘연대’를 할 수 있을 테니까요.

저 험난했던 1970년대, 암흑 속에 ‘연대’의 가능성이 있었습니다. 그것이야말로 선생님 자신이 말씀하신 “일본인이 이 침략과 수탈의 역사를 부정하고 조선반도 사람들과의 새로운 관계를 창조해 갈” 가능성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긴자 거리의 북적대는 사람들 사이로 사라져 가는 선생님의 뒷모습에서 나는 그 가능성을 보았습니다. 지금 그 가능성이 점점 멀어져 가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만, 부디 저 ‘초심’으로 돌아가 주시기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구체적인 소망을 말씀드리겠습니다.

1. 선생님은 ‘아시아 여성기금’ 실패의 원인을 단지 운동론 차원이 아니라, 사상의 차원에서 깊이 파내려가 고찰해 주시기 바랍니다.

2. 지난해 12월28일의 ‘합의’는 즉각 철회돼야 한다는 취지의 의사를 표명하시고, 합의 철회를 위해 싸우고 있는 한·일 시민들 편에 서겠다는 뜻을 밝혀주십시오.

3. 박유하 교수가 자신의 책에서 되풀이하고 있는 견해는 선생님이 보기에도 동의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박 교수의 저작과 언동에 대해 선생님 자신의 견해를 명시해 주시기 바랍니다.

끝으로, 선생님의 건강을 빕니다.

2016년 3월1일 ‘3·1 독립운동’ 기념일에

서경식 도쿄경제대 교수, 번역 한승동 선임기자 sdhan@hani.co.kr

 

국제일본

아베의 사죄 표명이 12·28 합의 백지철회보다 중요

등록 :2016-03-25 20:04수정 :2016-03-25 20:08

왼쪽부터 서경식 교수, 와다 하루키 교수.
왼쪽부터 서경식 교수, 와다 하루키 교수.
[토요판] 특집
와다 하루키, 서경식에게 답하다
▶ <한겨레>는 3월12일치 토요판 20·21·22면을 통해 와다 하루키(78) 도쿄대 명예교수에게 보내는 서경식(65) 도쿄경제대 교수의 도발적인 공개편지를 실었다. 와다 교수가 답신을 보내왔다. 와다 교수는 위안부 문제 해결에 참여해온 사람으로서 책임감을 느낀다면서도 지난해 한일 외무장관의 12·28 합의 백지철회 주장은 무책임하다고 비판한다. 두 지식인 간의 편지 속에 한일 현대사가 진하게 묻어 있다.

와다 하루키 교수가 제시하는 아베 총리 사죄문

“위안부 문제는 당시 군의 관여 아래 다수 여성의 명예와 존엄에 깊은 상처를 준 문제이며, 이러한 관점에서 일본 정부는 책임을 통감하고 있다. 나는 일본국의 내각총리대신으로 다시금 위안부로서 다수의 고통을 경험하시고, 심신에 걸쳐 치유되기 힘든 상처를 입은 모든 분들에 대해 마음으로부터 사죄와 반성의 마음을 표명한다”

- 2015년 12월28일 일본국 내각총리대신 아베 신조

서경식씨가 내 앞으로 보내는 공개서간을 <한겨레> 지면에 3개면(<한겨레> 12일치 20~22면)에 걸친 대논문으로 발표했다는 것을 알고 놀라운 마음으로 서둘러 그 글을 찾아 읽었다. 이후 <한겨레>가 보내준 지면을 보니, 논문의 가장 앞에 “초심은 어디 가고 왜 반동의 물결에 발을 담그십니까”라는 비난의 질문이 걸려 있었다. 그리고 본문에선 “선생님의 초심은 건재한가요. 외람되지만 나는 지금 그것을 의심하고 있습니다. 이는 선생님으로 대표되는 일본의 전후 진보세력의 실패와 한일 연대운동의 파산과도 밀접한 연관을 갖고 있다고 생각합니다”라고 적혀 있었다. 이것을 보고 더욱더 놀라는 마음을 갖게 됐다.

1953년 고등학교 1학년 때 구보타 간이치로 대표의 발언(1953년 10월 한일회담 3차 회담 때 “일본이 진출하지 않았으면 러시아, 중국에 점령돼 더 비참해졌을 것”이라고 말한 발언-역자 주)에 대해 한국 대표가 분노해 일한회담이 결렬됐다. 그때 나는 일본의 36년간의 통치는 “조선을 일본의 노예로 만들어, 여러 부와 재산을 짜낸 것이었다” “모국어를 말하는 것까지 금지했”기 때문에, 일본 쪽이 “지난 일에 대해 미안했다라는 마음”을 갖는지가 “일한회담의 기초이며 근본이다”라고 주장한 한국의 발언이 정당하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초심이라고 한다면, 나는 지금까지 초심을 잊어본 적이 없다. 내 ‘초심’에 대한 질문은 부당하며 받아들일 수 없다.

이 말 한마디를 말해두고, 서경식씨의 대논문에 반론을 하려 한다. 서씨는 이 논문에서 먼저 이번 위안부 문제에 대한 (12·28) 일한합의에 대한 내 의견이 애매하다고 비판하면서 요시미 요시아키(일본의 위안부 연구자·주오대 교수)의 백지철회론을 인용해, 이에 완전히 동의한다, 와다도 이것에 동의해 즉시 합의 철회를 위해 싸우는 한일 시민의 편에 서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 의견에는 동의할 수 없다.

윤병세 외교부 장관(오른쪽)과 기시다 후미오 일본 외무상이 지난해 12월28일 오후 서울 외교부 청사에서 위안부 문제와 관련한 공동 기자회견을 마친 뒤 악수하고 있다.  김봉규 선임기자 bong9@hani.co.kr
윤병세 외교부 장관(오른쪽)과 기시다 후미오 일본 외무상이 지난해 12월28일 오후 서울 외교부 청사에서 위안부 문제와 관련한 공동 기자회견을 마친 뒤 악수하고 있다. 김봉규 선임기자 bong9@hani.co.kr

위안부 문제 둘러싼 3라운드 최종 국면

요시미 교수든 서씨든 일한합의를 비판하는 것엔 문제가 없다. 나도 비판하고 있다. 그러나 비판하는 것과 백지철회를 주장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다. 운동가든 전문가든 일한합의의 백지철회를 주장한다면, 이번 합의를 받아들인 피해자 할머니가 나타날 경우 그 행동을 인정하지 않고 그 사람을 비난하는 것이 된다.

위안부 문제는 위안부 피해자가 위안소에서 강요당한 것은 (인간으로) 견딜 수 없는 일이었다고 항의하고, 일본 국가를 고발한 것에서부터 시작됐다. 그래서 일본 정부가 내놓은 사죄와 그에 따른 조처에 대해 받아들일지 받아들이지 않을지는 이름을 밝히고 고발한 피해 당사자들의 권리다. 지금에 와서 피해 당사자 전체의 목소리를 확인하지 않고 “백지로 돌려 다시 한번 수정해야 한다”고 단정할 수 있는 권리가 요시미 교수에게 있을까.

이번 일한합의를 검토하기 위해선 아베 신조 총리와 박근혜 대통령의 일한합의가 1990년대 이래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노력의 역사에서 어떤 위치를 점하고 있는지 생각할 필요가 있다. 이번 일한합의는 위안부 문제를 둘러싼 긴 투쟁의 제3라운드의 최종 국면을 이루고 있다.

제1라운드는 1990년 시작됐다. 그해 한국 여성단체가 위안부 문제에 대한 ‘6항목’의 요구를 내놓았다. 일본 정부는 1995년에 아시아여성기금 사업을 시작했지만, 한국의 피해자 다수와 운동단체, 일본의 운동단체가 반대해 받아들이길 거부했다. 그 결과 아시아여성기금은 한국에선 60명에게 지급되는 것으로 종료됐다.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는 책임자 처벌 등을 더한 8개 항목의 요구를 통해 법적 책임을 인정하는 해결을 주장해왔다. 기금은 2007년 사업을 종료해 해산했다.

제2라운드는 2009년 일본에서 정권교체가 이뤄지면서 시작됐다. 일본의 운동단체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전국행동 2010’(이하 전국행동)을 조직해 민주당 정부에 법적 해결(전시성적강제피해자문제 해결촉진법 제정)을 요구하는 운동을 개시했다. 그러나 정권을 잡은 민주당은 이 요망에 응답하지 못했고 입법 해결의 길은 막히고 말았다. 이때 2011년 한국 헌법재판소가 위안부 문제에 있어 “한국 정부의 부작위를 헌법 위반”이라 판결한 것은 ‘하늘의 도움’이었다. 그해 12월 정대협의 수요시위가 1000회에 달해 일본 대사관 앞에 소녀상(평화비)이 설치됐다. 그 며칠 뒤 일한 정상회담에서 이명박 대통령이 노다 요시히코 총리에게 위안부 문제 해결을 요구하는 강경한 요청을 하게 된다.

이것을 보고 전국행동은 2012년 2월 하나부사 도시오 공동대표의 이름으로 정부간 협의를 통한 정치결단에 의한 해결을 요구한다. 해결의 내용은 ①피해자의 마음을 울릴 수 있는 사죄 ②정부자금에 의한 속죄금의 지급 ③인도지원이란 생각의 거절이라는 3개 항목이었다. 이것은 한국 정대협의 동의를 얻지 않은 안이었지만, 하나부사 안은 일한 양국 정부에 전해져 12월28일 사이토 쓰요시 관방부장관과 이 대통령의 특사인 이동관 대사 사이에 해결안이 합의됐다. (그 내용은) ①일한 정상회담에서 (위안부 문제에 대한) 합의를 이뤄 그 내용을 정상회담 코뮈니케로 발표한다 ②총리의 새로운 사죄문에는 ‘도의적’이라는 말을 쓰지 말고 ‘책임을 인정한다’라고 표현한다 ③주한일본대사가 총리의 사죄문과 국비로 조성한 사죄금을 피해자에게 전한다 ④제3차 일한역사공동연구위원회를 발족시켜 일한 공동으로 위안부 문제의 진상규명을 한다는 것이었다. 이것을 이명박 대통령은 승인했지만, 일본의 노다 총리가 흘려보내고 말았다.

1953년 고1때 3차 한일회담 당시
한국 대표의 발언이 정당하다 생각
만약 그것이 초심이라고 한다면
한번도 초심 잊어본 적 없어
초심에 대한 서경식의 질문은 부당

12월28일 합의, 백지철회론은 무리
그 동력이 일본 국내엔 없어
합의 개조·개선으로 가게 하는 게
지금까지 운동을 해온 사람의 책임
아베 사죄표명 이끌어내는 게 중요

길고 엄혹했던 고난의 도정을 아시는가

이후 민주당 정부는 선거에서 패배해 하야하고, 2012년 말 고노 담화, 무라야마 담화의 재검토를 목표로 하는 역사수정주의자 아베 신조의 자민당 정권이 탄생했다. 위안부 문제의 해결을 생각할 수 있는 상황이 결코 아닌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2013년 2월 취임한 박근혜 대통령은 위안부 피해자들을 위해 문제 해결을 요구한다는 점을 내세워 일한 정상회담을 거부하며 압력을 가하기 시작했다. 그로 인해 제3라운드가 시작됐다. 일한관계는 험악해지고, 일본의 우익적 주간지는 2013년 가을부터 박 대통령 개인에 대한 비방 중상 캠페인을 펼치기에 이르렀다. 미국의 개입이 있어, 결국 2014년 3월 아베 총리는 고노 담화를 계승한다는 것을 국회에서 밝혀 말하기에 이른다. 이 시점에서 공동행동과 한국의 정대협도 협의 결과 위안부 문제의 새로운 해결안을 만들고, 이것이 6월 제12차 아시아연대회의의 결정이 된다. 그 내용의 중심은 ①고노 담화의 계승 발전에 근거한 해결 ②일본 정부의 책임을 인정한 사죄, 가해사실의 승인(군의 위안소에서 자신의 뜻에 반해 위안부·성노예 등이 되었다는 것 등) ③뒤집을 수 없는 방식의 사죄 표명 ④사죄의 증거로서의 배상 ⑤진상규명과 재발방지 등이었다.

‘법적 책임’을 인정하라는 단어가 없고, ‘법적인 배상’ ‘책임자 처벌’이라는 요구도 사라져 있었다. 운동단체로서 생존 피해자가 있는 지금이 문제해결의 최후의 시기라는 생각에서 일본 정부가 받아들일 수 있을 형태를 생각해 요구를 새롭게 표현한 것이었다.

아베 총리는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해 새로운 조처를 취하는 것을 오랜 시간 거부해왔다. 그러나 결국 2015년 4월 미국을 방문한 뒤 한국 정부와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비밀교섭을 진행하게 됐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그해 11월 정상회담에서 조기 타결을 목표로 교섭을 가속하는 데 합의한다. 박근혜 대통령은 “피해자가 받아들이고, 한국 국민이 납득할 수 있는” 해결을 요구하고, 연내 타결을 희망한다는 의견을 표명했다. 운동단체는 일한 정부 교섭의 귀추를 지켜보고 있었다. 12월28일 일한 합의는 이상의 흐름의 귀결로서 태어난 것이다.

서경식씨는 위안부 문제 해결을 요구하는 운동은 이처럼 길고, 엄혹한, 고난의 도정이었는지를 얼마나 이해하고 발언하고 있는 것일까.

일한 합의가 발표된 뒤, 일본의 운동단체는 고심하면서도 현실적인 태도를 취했다. 전국행동은 12월29일 성명을 발표했다. 먼저 “일본 정부가 드디어 국가의 책임을 인정했다. 이것은 피해자와 시민운동이 쟁취한 성과다”라고 평가한 뒤 비판적인 논평을 더해 “총리대신의 사죄와 반성을 총리 자신이 다시 한번 공식적으로 표명할 것”을 요구했다. 한국에선 정대협이 강하게 반발해 12월28일 당일 정대협을 필두로 한 20여개 여성단체를 중심으로 백지철회를 요구하는 공동성명이 나왔다. 일본의 운동단체도 한국의 단체의 이와 같은 반응을 전해 듣고 애초의 입장을 수정하고 있다.

그러나 한국의 분노와 비판이 높아지고 있음을 충분히 고려한다 해도 일한 양국 정부의 합의를 백지철회시키는 것은 (지금까지) 일의 경과를 생각해볼 때 어렵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이번 양보를 통해 지지자인 역사수정주의파로부터 비난을 받은 아베 총리에게 이번 ‘최종적 해결’안을 백지철회시켜 전혀 새로운 해결안을 내놓게 할 동력이 일본 국내엔 없다. 그래서 위안부 문제 해결을 요구해온 일본인으로서 이번 일한 합의를 개조·개선하는 길을 갈 수밖에 없다. 그렇게 하는 게 오히려 지금까지 운동을 해온 사람의 책임이라고 생각한다.

지난해 12월29일 조태열 외교부 2차관이 경기도 광주시 퇴촌면 나눔의 집을 방문해 회담 결과를 설명하는 모습. 와다 하루키 교수는 한일 회담 합의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아베 총리가 사죄 표명을 하고 이에 관한 편지를 주한일본대사가 직접 위안부 피해 할머니에게 전해야 한다고 말한다. 사진공동취재단
지난해 12월29일 조태열 외교부 2차관이 경기도 광주시 퇴촌면 나눔의 집을 방문해 회담 결과를 설명하는 모습. 와다 하루키 교수는 한일 회담 합의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아베 총리가 사죄 표명을 하고 이에 관한 편지를 주한일본대사가 직접 위안부 피해 할머니에게 전해야 한다고 말한다. 사진공동취재단

주한대사가 ‘아베 편지’ 피해자에게 전해야

지금 필요한 것은 외상회담 합의를 실현한다면 아베 총리가 사죄표명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무엇보다 먼저 아베 총리의 사죄가 문서화되어야만 한다. 기시다 외상의 발표 뒤엔 다음과 같은 아베 총리의 사죄문이 있어야 한다.

“위안부 문제는 당시 군의 관여 아래 다수 여성의 명예와 존엄에 깊은 상처를 준 문제이며, 이런 관점에서 일본 정부는 책임을 통감하고 있다.

나는 일본국의 내각총리대신으로 다시금 위안부로서 다수의 고통을 경험하시고, 심신에 걸쳐 치유되기 힘든 상처를 입은 모든 분들에 대해 마음으로부터 사죄와 반성의 마음을 표명한다.

2015년 12월28일 일본국 내각총리대신 아베 신조”

이 사죄의 말을 편지에 담아 한국의 피해자들에게 전하는 게 급무이다. 주한대사가 살아 계신 한국인 피해자 전원이 계신 곳을 방문해 편지를 전해 드려야 한다. 그때엔 일본 정부가 한국 정부에 10억엔을 기탁한 취지가 이 총리의 사죄문에 분명히 나와 있음을 정중하게 설명을 드릴 필요가 있다.

10억엔은 피해자에게 일본 정부의 사죄의 마음을 전하기 위해 일정 금액을 보내는 데 사용하고, (나머지는) 위안부 문제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분명히 세우기 위한 사업에 사용되는 것이 바람직하다.

서씨는 아시아여성기금에 대해서도 길게 논하고 있다. 현재 일한합의에 대한 내 자세가 아시아여성기금에 대한 내 태도를 반복한 것, 즉 같은 과오를 되풀이하는 것으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아시아여성기금에 대해 나도 논해 보겠다.

서씨는 아시아여성기금이 발족할 때의 상황으로부터 논의를 시작하고 있다. 1993년 고노 담화로부터 호소카와 총리의 회견까지 일본 정부의 움직임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국제적으로는 1995년 9월 베이징 세계여성대회의 행동강령이 언급되고 있다. 이대로 순조롭게 갔다면 국면은 달랐을 것이다, 이를 위해선 일본의 진보적 시민과 한국의 반식민지주의 세력이 연대해 일본 정부와 대치하는 것이 필요했다는 주장이다.

이런 인식은 현실과 상당히 괴리돼 있다. 일본 정부는 미야자와 정권에서도, 호소카와 정권에서도 (1965년) 일한청구권협정을 통해 청구권에 기초한 지불은 해결됐기 때문에 피해자에 대한 국가보상은 불가능하다는 원칙을 따라왔다. 1994년 6월 무라야마 연립정권이 태어나자 지난 대전은 “자존자위, 아시아 해방의 전쟁이었다, 그 전쟁에 대해 사죄도 반성도 해선 안 된다”는 ‘전후 50주년 의원연맹’이 조직돼 자민당 의원 3분의 2가 가담하는 상황에까지 이르렀다. 외무성은 전후 50주년 기념사업으로 평화교류사업계획을 입안해 이것으로 위안부 문제에 대한 대처를 준비하고 있었다.

무라야마 내각의 관방장관이었던 이가라시 고조는 국가보상을 주장해온 사람이었지만, 위안부 문제의 입법을 단념하고 정부 자금으로 움직이는 재단법인을 만들어 정부 돈과 시민 모금을 더해 피해자에게 일시금을 지급하는 틀을 갖고 고노 요헤이 외무상, 다케무라 마사요시 대장상과 절충을 이어가고 있었다. 이 단계에서 1994년 8월19일 <아사히신문>에 “전 위안부에게 위문금, 민간기금으로 기금 구상, 정부는 사무비뿐”이라는 커다란 제목이 달린 기사가 나왔다. 이것이 피해자 할머니들의 강한 반발을 불러 운동단체들이 기금 구상에 절대 반대하게 된 것이다. 이가라시 관방장관은 기자회견을 열어 이 기사에 반론을 해야 했다.

한국과 일본의 지식인들은 지난해 7월29일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 외신기자클럽에서 ‘2015 한일 그리고 세계 지식인 공동성명’ 발표를 통해 일본 정부의 과거사 문제에 대한 인식 전환을 촉구했다. 왼쪽 넷째가 와다 하루키 도쿄대 명예교수. 김성광 기자 flysg2@hani.co.kr
한국과 일본의 지식인들은 지난해 7월29일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 외신기자클럽에서 ‘2015 한일 그리고 세계 지식인 공동성명’ 발표를 통해 일본 정부의 과거사 문제에 대한 인식 전환을 촉구했다. 왼쪽 넷째가 와다 하루키 도쿄대 명예교수. 김성광 기자 flysg2@hani.co.kr

‘펌프의 마중물’로서 다음엔
정부 돈 받으려 한 아시아여성기금
오류와 결함으로 결국 거부됐지만
일본정부 공식사죄와 법적 보상
회피수단으로 보는 덴 동의 못해

일본인과 조선 민중은 여전히
적의 관계에 머물 것인가
한국인의 협력을 신뢰하고
일본인 바꾸기 위해 노력하기
이것이 우리들이 걸어야 할 길

얀 루프 오헤른과 마리아 헨슨의 경우

내가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을 꼬집어 서경식씨는 “‘위문금’이라고 부르든 다른 무엇이라 부르든 정식 배상금은 절대로 주지 않겠다는 것이 정권의 물러설 수 없는 의도”였기 때문에 반론할 수 없었던 게 아닌가라고 비판한다. 내가 주장하고 있는 것은 위문금에는 사죄의 마음을 담을 수 없으니까 정부가 사죄하는 것을 강조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가라시 관방장관도 전후 50년 문제 프로젝트팀의 사회당 의원도 필사적으로 저항했지만 피해자에게 지급하는 돈을 정부 자금으로 한다는 것에 대한 관료와 자민당 의원들의 찬성을 얻을 수 없어 단념하게 된 것이다. 그 상태에서 피해자에게 지급하는 ‘속죄금’을 국민의 모금만으로 충당한다는 것을 기본 콘셉트로 한 아시아여성기금이 설립되게 된 것이다.

국민 모금만으로 속죄금을 지급한다는 것이 한국에선 ‘국민모금을 통한 위문금’이라는 (나쁜) 이미지를 더한층 고정시켜, “정부가 책임을 지려 하지 않는다”는 당연한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아시아여성기금이 거부된 것이다.

나는 그 아시아여성기금의 발기인이 되도록 정부의 요청을 받고 승낙했다. 서경식씨는 내가 당시 쓴 몇몇 문서를 인용해 당시 내가 한 기금 참가에 대한 이유 설명이 “이치에 맞지 않는다”고 비판하고 있다. 분명 나는 국민으로부터 모은 돈도 국가예산으로부터 나오는 자금과 다름이 없다는 ‘기금변호론’에 휩쓸린 설명도 하고 있다. 그러나 내 마음은 ‘펌프의 마중물’로서 국민이 먼저 속죄의 돈을 냈으니, 다음엔 정부도 더 많은 돈을 내주길 바란다는 것이었다. 1995년 11월6일 기금 비판파와 연 공개토론회에서 나는 ‘속죄금’을 한국·필리핀 피해자에게 건네주러 가게 된다면, 그 사업은 반드시 다른 국가의 피해자들에게도 확대된다, “(사업이) 확대되면 국민 모금으로는 불가능할 것이다. (중략) 그래서 일본 정부도 국민도 멈출 수 없는 길로 들어서 있는 것이다”라고 호소하고 있다. 나는 아시아여성기금의 개량·개선·수정이라는 길을 취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제 와 볼 때 그 기회가 기금 발족 1년 뒤에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됐다. 1996년 봄, 속죄금 액수를 결정하기 위한 회의가 기금 내부에서 열렸다. 당시 모금액으로는 제안된 속죄금액(개인당 300만엔 안과 200만엔 안)이 보장되지 못한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기금의 지급) 대상 이해자는 먼저 한국·대만·필리핀의 330명 정도였다. 속죄금이 300만엔이라면 10억엔, 200만엔이라면 6억6000만엔이 필요하게 된다. 모금액은 1996년 4월 현재 3억3000만엔 정도였기 때문에 분명히 부족한 상황이었다. 그때 기금의 운영심사회에서는 부족분을 정부가 보충해야 한다는 의견이 압도적이었다. 하라 분베에 이사장은 200만엔 안을 채택하고, 하시모토 류타로 총리와 담판을 벌여 부족분은 정부가 책임진다는 확약을 얻었다. 이것이 기금에 보고돼 모두가 이해를 했지만 이사회 회의록에는 기재하지 않고 비밀에 부쳐졌다.

이때 기금의 기본 콘셉트는 파산(유지할 수 없다는 게)이 분명해져 있었다. 당시 기본 콘셉트를 수정하는 것을 정식으로 논의해 결정했어야 했다. 그러나 이 찬스를 기금 내부의 사람들이 살리지 못했다. 나는 이 사실에 대해 큰 책임을 느끼고 있다.

그럼에도 아시아여성기금은 일본 정부가 진행한 사죄와 속죄의 사업이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이것을 “일본 정부가 공식 사죄와 법적 배상을 회피하는 수단”이었다고 보는 것은 옳지 않다. 나는 내 책에서 “아시아여성기금은 이런 오류와 사업 내 결함이 있어 한국과 대만에선 목적을 달성하는 것이 불가능했고, 국민적 화해에 공헌할 수 없었다. 그러나 아시아여성기금은 필리핀과 네덜란드에선 분명히 의미있는 사업을 하는 게 가능했고, 성공을 거두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고 썼다.

이 주장을 서경식씨는 비판하고 있다. 네덜란드에선 피해자임을 밝히고 일본 정부를 비판해온 얀 루프 오헤른이 기금을 거절했다. 서씨는 “이 한 사람의 여성이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도 기금이 ‘성공’했다고 말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는 정당한 평가라 할 수 없다. 필리핀에선 마리아 헨슨을 언급하며 “철두철미 일본국가에 유린됐던” 그녀가 “세상을 떠나기 1년 전에 ‘속죄금’을 받은 것을 두고 “마음의 평안”을 주었다고 할 수 있을까”라고 비판하고 있다. 그러나 헨슨은 기금을 받을 때 “지금까지 불가능하고 생각했던 꿈이 실현됐습니다. 매우 행복하다”고 말했다. 서씨의 사고방식의 문제점은 다음 구절에서도 드러난다. “설사 한국을 비롯한 모든 지역의 피해자들이 ‘보상금’을 받았다고 하더라도 국가가 명확하고 오해의 여지가 없는 사죄와 보상을 하지 않는 한 일본인들은 스스로를 위로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제3의 찬스’를 살려내 변할 수 있었다

필리핀에서 가난해서, 고령이어서 ‘속죄금’을 받았다고 보는 것은 필리핀 피해자들에 대한 편견이 아닐까. 그리고 모든 지역의 피해자가 속죄금을 받아도 일본인이 스스로를 위로해선 안 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서씨는 또 아시아여성기금은 “피해자 구제”나, “일본국가의 책임을 분명히 해” “연대의 지평을 넓히”기 위해서가 아니고 일본인의 “양심”을 “위안하기 위해서”가 아닌가라고 말하고 있지만, 이해하기 힘든 주장이다.

이번 글을 읽고, 나는 서경식씨의 세계와 나의 세계가 너무나도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을 통감하고, 탄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서씨는 이번 글에서 1989년 자신의 논문 <제4의 호기-‘쇼와’의 끝과 조선>을 언급하며 나에게 묻고 있다. 이 논문은 내가 1974년 발표한 <한국 민중을 주시하는 것-역사로부터의 반성>(<전망> 12월호)에서 내가 전개했던 ‘제3의 찬스’론을 염두에 두며 제기된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내 주장은 일본 국민이 식민지 지배의 역사를 부정하고 조선반도의 사람들과의 새로운 관계를 창조해 가는 찬스를 1945년(제1의 찬스)과 1965년(제2의 찬스)에 맞이했음에도 이것을 살리는 게 불가능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1973년 김대중씨 납치사건이 벌어진 뒤 일한조약이 체결된 8년째의 현실과 한국 민중의 투쟁을 접하면서 제3의 찬스가 도래했다. 일본 시민의 일한 연대운동이 국민적으로 확대된 것은 1980년 전두환 쿠데타에 의해 김대중씨를 사형시키려는 음모가 진행될 때였다. 이 때 일본에선 국민도 언론도 김대중씨에 대한 경의와 공감으로부터 이 사람을 죽이게 해선 안 된다는 마음을 갖게 됐다. 나는 제3의 찬스를 정말로 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1980년대엔 전두환 대통령의 방일을 계기로 우리는 조선 식민지지배를 반성·사죄하는 국회 결의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갖고 1984년부터 선전을 개시했다. 1987년 한국 민주혁명이 승리의 때를 맞이한 뒤 1988년에 나는 야스에 료스케(일본의 진보적 지식인. 전 <세카이> 편집장)와 짝을 이뤄 북한과 정부간 교섭을 통해 ‘식민지 지배의 청산’을 시행할 것을 요구하는 활동을 벌였다.

1989년 1월 쇼와 천황(일본인이 쓴 글이라 천황 표기는 원문대로 했다-편집자 주)이 숨졌다. 1월31일 나는 쓰루미 슌스케(일본의 진보적 지식인), 하타다 다카시(〃), 히다카 로쿠로(〃) 등과 성명을 발표했다. “역사 청산이 이뤄지지 못한 채 쇼와라는 시대가 막을 내렸다.” 조선민족에 대해 “우리나라는 식민지 지배의 청산을 이루지 못했다”고 지적하며 식민지 지배가 군사력에 의해 강제된 것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이것이 조선민족의 ‘측량할 수 없는 고통”을 안겼다는 것을 사죄하는 국회 결의를 채택하도록 요구했다. <한겨레>는 2월8일 사설 ‘일본 국회는 식민지 죄과를 사죄하라-지식인들의 ‘사죄결의’ 요구는 정당하다”에서 우리들의 호소를 지지해줬다. 3월1일 우리는 국회 결의를 요구하는 국민서명운동의 스타트를 선언했다.

서씨가 ‘제4의 호기’라는 논문을 갖고 등장한 것은 바로 이 순간 1989년 3월8일이었다. ‘제4의 호기’라고 이름을 붙인 것은 (일본이) ‘제3의 호기’를 살리지 못하고 끝났다는 인식을 전제로 하고 있다. 이번 논문에서도 서씨는 “일본 국민은 이 ‘제3의 찬스’를 잡은 것인가”라고 묻고 있다.

서씨는 한국 민주혁명의 승리가 일본에 영향을 끼쳐 가네마루 신 자민당 부총재, 다나베 마코토 사회당 위원장이 북한을 방문해 일조교섭이 개시되거나 1993년엔 고노 담화가 나오고, 마침내는 1995년의 무라야마 담화가 되는 것을 보지 않고 있다.

그런 비관적인 자세가 생겨난 이유가 문제의 논문 ‘제4의 호기’ 안에 드러나 있다. 서씨가 ‘제4의 호기’라고 부르는 것은 천황의 죽음이다. 식민지 지배는 천황의 이름에 의해 이뤄진 것인데도 천황이 숨진 일본은 “천황의 전쟁책임을 면책하는 것에 의한 일본인 전체의 ‘일억총면책’을 시도하려고” 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서씨는 이를 통해 일본에 절망한 듯 보인다. ‘제4의 호기’도 아마 살리지 못할 것이라고 본다. 한국의 전진에 맞춰 일본인도 전진하고 있다고 보는 것은 “너무 나이브한 일일 것이다”. 그 지점에서 서경식씨는 경고한다. “침략과 수탈의 역사를 자기부정하”지 못한다면, “일본인은 장래에 걸쳐 ‘항일투쟁’에 계속해 직면하게 될 것에 다름 아니다”라고. 그 말이 이번 글에도 되풀이되고 있다.

일본인과 조선 민중은 여전히 적의 관계에 머물 것인가. 나는 일한 양국민의 관계는 ‘제3의 찬스’를 살려내는 데 성공해 변했다고 생각한다. 한국 국민의 협력을 신뢰하고 일본 국민의 의식을 바꾸기 위한 노력을 이어가는 것. 이것이 우리들이 걸어야 할 길인 것이다.

와다 하루키 도쿄대 명예교수, 번역 길윤형 특파원 charisma@hani.co.kr

 

국제일본

위안부 문제에 관한 현실주의…서경식과 화해하기 힘든 심연

등록 :2016-03-25 20:10

 
[토요판] 특집
와다 교수 답신의 배경
“왜 반동의 물결에 발을 담그십니까”라는 서경식 도쿄경제대 교수의 장문의 공개서한이 보도된 지 이틀 만인 지난 14일. 휴대전화에 익숙한 번호의 전화가 한 통 걸려와 있었다. 서한에서 혹독한 비판을 당한 와다 하루키 도쿄대 명예교수였다. 그는 반론을 위한 지면을 내주길 요구했고, <한겨레>는 이를 받아들였다.

반론문을 번역하며 와다 명예교수와 서 교수 사이엔 도무지 화해하기 힘든 심연과 같은 차이가 있음을 다시 한번 절감했다. 이는 둘 사이에 존재하는 두 가지 결정적인 차이에 기인하는 것이다. 하나는 가해자인 일본인과 피해자인 재일조선인이라는 민족적 정체성, 또 하나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 등을 바라보는 와다의 현실주의와 서경식의 이상주의 사이의 갈등이다.

그래서 와다 명예교수가 1995년 아시아 여성기금을 만들 당시의 절박한 정치 상황과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한 한-일 정부 간 12·28 합의를 “백지철회시킬 동력이 일본엔 없다”는 현실적 어려움을 토로할 때, 서 교수는 지나치게 현실 타협적으로 보이는 와다 교수에게 당신의 태도는 “너무나 애매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위안부 문제는 일본 국가가 저지른 국가 범죄이다. 그래서 이를 인정하지 않는 12·28 합의를 백지화해야 한다’는 서 교수에게 와다 명예교수는 “이번 12·28 합의를 (받아들이고) 개조·개선하는 것”이 “지금까지 운동을 해온 사람의 책임”이라고 맞선다. 어쩌면 이 논쟁은 1990대 이후 일본 리버럴 세력 안에서 발생한 가장 뼈아픈 ‘균열’을 상징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아시아여성기금 만들던 1995년
절박한 정치상황 토로하는 와다
이 논쟁은 일본 리버럴 세력 내
가장 뼈아픈 균열을 상징하는 듯

박유하 교수에 관한 견해는 거절
2015년 이후 어느 정도 거리 둬와
박 교수의 형사기소에 대한
지식인 성명에도 이름 안 올려

그리고 박유하 문제. 한국에서는 물론, 일본 진보 진영 안에서도 전후 일본 리버럴들의 ‘지적 타락’을 가장 웅변적으로 드러내는 사례로 박유하 세종대 교수의 <제국의 위안부>에 대한 일본 지식인 사회의 지지를 꼽는 목소리가 있다. <한겨레>는 와다 명예교수에게 이번 반론문에서 박 교수와 <제국의 위안부>에 대한 입장도 서술해줄 것을 요구했지만, “서씨와 이 문제(박 교수 문제)로 논의할 기분이 아니다”며 응하지 않았다. 와다 명예교수는 2014년 5월 박 교수와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제3의 길’ 등을 주제로 한 심포지엄을 함께 연 적도 있다.

그러나 2015년 이후 와다 명예교수는 박 교수나 <제국의 위안부>와 어느 정도 거리를 둬 왔다고 판단한다. 그는 지난해 5월 펴낸 신서 <위안부 문제의 해결을 위해>에서 “모집된 조선인 여성들에게 그런(자신이 제국의 위안부라는) 의식이 있었는지는 의문”이라며 박 교수의 견해를 비판한 데 이어, 지난해 11월 와카미야 요시부미 <아사히신문> 전 주필이 주도한 박 교수의 형사기소에 대한 일본 지식인들의 항의 성명에도 이름을 올리지 않았다. 당시 와다 선생은 <한겨레>와 한 전화 통화에서 자신이 성명에 참가하지 않은 이유로 △지금은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최종적인 국면이다(박 교수 논란이 오히려 문제 해결에 방해가 된다는 의미. 역시 현실주의자적인 면모를 엿볼 수 있다.) △박 교수의 주장에 대해선 조금 더 검토가 필요하다 △양쪽이 대화를 통해 문제를 원만히 풀길 바란다는 점 등을 열거한 바 있다.

이 글을 쓰면서 당시 대화 내용을 기사로 쓰겠다는 의견을 전했는데, 이와 관련해 딱히 반대 의견이 없었다. 박 교수에게 동의하진 않지만, 적극적으로 앞에 나서 비판할 마음도 없다는 입장인 것으로 이해한다.

도쿄/길윤형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