습작시

살아남기가 목적이라면

이윤진이카루스 2016. 3. 9. 00:16

살아남기가 목적이라면

 

시간에게 진다, 영원할 우주에게 패배하기에

이름은 시간 속에서 지워진다.

사랑의 순간은 끝나고

수많은 인간들에 의하여 불멸은

이어지지 않은가, 살아남지 않은가?

 

오성(悟性) 없는 호모사피엔스 6백 만 년에

우리가 하나의 과정임을 인식할 때

스스로 겸손한 자도 살아남지 못하지만

그런대로 살았다고, 살인하지 않았다고

스스로 위로하지 않을까?

 

사라진다는 것이 아름다울 수 있음은

계속되는 것이 있음을 알기 때문인데

이별에서 안도하면서 눈을 감겠다.

 

절망을 보고, 상황 속의 인간을 보고.

우주의 별들이 블랙홀에 빨려 들어가면

종말을 맞이하여 끝장이 난다고?

블랙홀을 관찰한 인간은 무엇인데,

시각만 있고 생각 없는 존재일까?

 

세상이 완전하지 않지만 혁명을 도모하느니

한걸음 진보에 지나지 않는 삶을 사는 까닭은

언젠가 이 세상의 근원이 밝혀져

아하, 그래서 이런 모습으로 살아가는구나,

종말은 그렇게 다가오겠구나! 이겠지.

 

세상에 태어나는 자의 소중함은

호모 사피엔스가 세운 규칙이

오류임을 증명하는 것인데

자신의 이론이 검증되기를 아인슈타인은

기대하지 않고 일생동안 의심했다지.

 

진보가 있다면, 마르크스와 레닌의 몽상이 아니라

프롤레타리아처럼 순간적인 전칭 명제에게 브레이크를 걸고

오류를 검증하는 단칭 경험주의적 아름다움이려니,

그런 후세는 얼마나 많은 고통과 방황이 있었을까?

전칭 명제가 필요한 까닭은 내일을 살아가기 위한

삶은 희망이려니, 판도라 상자의 마지막 출현이려니.

 

후기:

그러나 나보다 더 훌륭한 사람이 진실을 상상하기 위하여, 그리고 그의 작업에서 나의 실수를 증명하고 비난하도록 하기 위하여 나는 내가 배운 작은 적은 것을 대낮 속으로 보낸다. 이것을 보고 그것으로써 내가 그런 진실이 밝혀질 원인이었음에 나는 기뻐할 것이다.

              - 알브레흐트 뒤러 -

But I shall let the little I have learnt go forth into the day in order that someone better than I may guess the truth, and in his work may prove and rebuke my error. At this I shall rejoice that I was yet a cause whereby such truth has come to light.

              - ALBRECHT DÜRER -

 

단칭경험서술들은 원칙적으로 검증될 수 있고 동시에 오류로 판정될 수 있으며, 전칭 경험서술들은 오류로 판정될 수 있을 따름이다...

   먼저 연역주의적 구분은, 전칭 경험서술들이 지닌 진실성이 결코 밝혀질 수 없다고 확인한다. 전칭 경험서술들에는 긍정적인 진리 가치가 있을 리가 없다, 전칭 경험서술들은 유효할리가 없다 [보다 정확하게, 전칭 경험서술들이 지닌 유효성은 결코 밝혀질 리가 없다]. 이제 이것은, 의심의 여지없이, 그런 전칭 경험서술들이 지닌 가치에 대한 정확하고 또한 근본적인 제한이다. 전칭 경험서술들은 긍정적으로 평가될 가능성이 높은 반면, 그 서술들이 지닌 긍정적인 가치, 즉 그 서술들이 지닌 입증 가치는 결코 최종적이 아니다.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바와 같이, 이 가치는 이전 검증 시도들에 대한 일반적인 설명에 지나지 않는다; 혹은 내가 표현하기를 선호하는 바와 같이, 이전 (성공하지 못한) 반증 시도들에 대한 일반적인 설명에 지나지 않는다.

- 칼 포퍼, “지식론에 관한 두 가지 근본적인 문제들(Two Fundamental Problems of the Theory of Knowledge)”, 2009, 331~332-

“Singular” empirical statements are, in principle, verifiable and falsifiable, universal empirical statements are only falsifiable...

   First, the deductivist distinction establishes that the truth of universal empirical statements can never be demonstrated. They cannot have positive truth value, they cannot be “valid” [more precisely, their validity can never be demonstrated]. Now this is, undoubtedly, a precise and also a radical restriction of the “value” of such universal empirical statements. Whereas they may well be positively appraised, their positive value, or their corroboration value is, is never final. As we have already know already, this value is nothing but a general account of previous attempts at verification; or, as I prefer to put it, of previous (unsuccessful) attempts at falsification.

- Karl Popper, Two Fundamental Problems of the Theory of Knowledge)”, 2009, p331~33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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