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를 위하여

미국으로 떠나는 김대중, 그리고 미국에서의 환영/ 이희호평전/ 한겨레신문

이윤진이카루스 2016. 3. 14. 22:30

정치정치일반

조국땅을 두고 이륙하는 비행기 안에서 눈물을 훔쳤다

등록 :2016-03-13 20:08

[길을 찾아서] ‘고난의 길, 신념의 길’ 이희호 평전
제4부 제5공화국-13회 미국 망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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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년 12월23일 김대중과 이희호는 아들 홍업·홍걸과 함께 미국 망명길에 올랐다. 서울대병원 뒷마당에서 구급차에 실려 김포공항에 도착한 가족은 애초 예약한 대한항공이 아닌 미국적 노스웨스트항공에 몰래 태워졌다. 취재진과 환송객을 따돌리기 위한 ‘비밀 추방 작전’이었다. 12월23일 저녁 김포공항에 대기 중인 노스웨스트 항공기 트랩 앞에 도착한 앰뷸런스에서 내린 김대중(왼쪽)과 막내아들 홍걸(오른쪽)의 모습.  사진 김대중평화센터 제공
1982년 12월23일 김대중과 이희호는 아들 홍업·홍걸과 함께 미국 망명길에 올랐다. 서울대병원 뒷마당에서 구급차에 실려 김포공항에 도착한 가족은 애초 예약한 대한항공이 아닌 미국적 노스웨스트항공에 몰래 태워졌다. 취재진과 환송객을 따돌리기 위한 ‘비밀 추방 작전’이었다. 12월23일 저녁 김포공항에 대기 중인 노스웨스트 항공기 트랩 앞에 도착한 앰뷸런스에서 내린 김대중(왼쪽)과 막내아들 홍걸(오른쪽)의 모습. 사진 김대중평화센터 제공
전두환 정권이 정한 김대중과 이희호의 출국일은 1982년 12월23일이었다. 이희호는 서둘러 집을 정리하고 수속을 밟았다. 안기부는 큰아들 홍일의 가족도 함께 떠나라고 종용했지만 홍일은 동교동을 지키겠다고 했다. 미국으로 떠나기 전날 3·1사건 동지들의 아내인 박영숙·이종옥이 이희호를 찾아와 소문 하나를 이야기했다. “이상한 소리가 들려요. 박형규·김관석·이해동 목사가 노신영 안기부장을 만났는데 ‘김대중씨에게 15만달러를 주었다’고 말하더래요.”

이희호는 그 말을 듣고 기가 막혔다. “남편이 미국에서 고관절 수술을 받으려면 돈이 필요하잖아요. 그래서 은행에 다니는 제부의 여동생에게 특별히 부탁해 돈을 빌렸어요. 그 돈을 환전할 길이 없어 노신영 부장에게 부탁했는데 그렇게 말을 만들어낸 거예요.” 김대중을 겨냥한 치졸한 중상이었다. “구속자 가족 중에는 타의로 쫓겨 가는 것이니까 비행기 삯을 내지 말라는 사람도 있었지만, 그 비용도 우리가 마련했어요. 나는 환전한 6만8843달러와 대한항공 비행기표 영수증을 박영숙·이종옥씨에게 보여주었어요. 그제야 안심을 하더라고요.” 안기부의 모략에 함께 민주화 운동을 하던 사람들마저 속아 넘어갈 뻔한 일이었다.

1982년 12월23일 홍일만 두고 미국행
외신기자 따돌리려 항공사 교체
비행기 태운 뒤 “형집행정지 석방”
환전 도와준 안기부 ‘거액 줬다’ 소문

워싱턴 공항에 300여명 환영객
“김대중” 연호에 감사·감격 ‘범벅’
즉석연설로 답하며 공개 다짐
“치료 끝나는 대로 돌아가 싸우겠다”

83년 2월 케네디 의원 ‘환영회’ 성황
“안보 구실 독재 지원말라” 미국에 요청
곳곳 ‘인권영웅 김대중’ 초청 인기
“아내는 ‘동역자’…남편으로 자랑스럽다”

교회·대학·인권단체·정계 돌며 강연
일본 잡지 ‘세카이’ 인터뷰 기사 ‘반향’
83년 6월 한국인권문제연구소 열어
‘행동하는 양심’ 발행 위해 서예전도

정권의 김대중 비방은 거기에 그치지 않았다. “우리가 출국하고 나서 이런저런 소문이 무성했어요. ‘대통령이 제공한 특별 전세기를 타고 미국에 가서 호화스러운 망명생활을 하고 있다’느니 ‘이희호가 이순자 여사로부터 20만달러를 받았다’느니 하는 소문들이 나돌았어요.” 그런 소문은 정체를 알 수 없는 일본 잡지에 실리고 국내 언론이 받아서 보도하는 방식으로 ‘국제적 기사세탁 과정’을 거쳐 유포됐다. “그런 거짓말을 사실로 포장해 퍼뜨리는 공작세력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었어요. 민주화 운동을 같이 하는 사람들을 그렇게 이간하는 말을 들을 때마다 견딜 수 없을 정도로 힘들었지요.”

이희호와 김대중, 그리고 두 아들 홍업·홍걸이 미국으로 떠나는 날 아침 창천교회 교인들이 동교동 집을 방문해 기도회를 열었다. “나는 아브라함이 하느님의 명령을 받고 정든 고향을 떠나 하란으로 가는 심정이 되어서 울면서 기도드렸지요.” 이희호는 그날 오후 4시30분에 김대중이 수감된 서울대병원으로 갔다. 홍일과 시동생 김대현도 김대중을 만나러 갔지만 안기부 요원들은 홍일만 잠깐 병실로 들여보냈다. 나머지 사람들은 김포공항에서 만나라는 것이었다. 날이 어두워지자 안기부 직원들은 김대중과 이희호 일행을 병원 뒷마당으로 데리고 가더니 앰뷸런스에 태우고 달렸다.

일반 승객은 전혀 없는 노스웨스트 항공기에 탑승한 채 이륙을 기다리고 있는 홍걸(왼쪽부터)·이희호·김대중·홍업. 돌아올 기약 없이 조국을 떠나야 하는 기구한 상황에 모두 입을 굳게 다문 모습이다.  사진 김대중평화센터 제공
일반 승객은 전혀 없는 노스웨스트 항공기에 탑승한 채 이륙을 기다리고 있는 홍걸(왼쪽부터)·이희호·김대중·홍업. 돌아올 기약 없이 조국을 떠나야 하는 기구한 상황에 모두 입을 굳게 다문 모습이다. 사진 김대중평화센터 제공
앰뷸런스가 멈춘 곳은 노스웨스트 비행기 트랩 바로 앞이었다. “우리를 비행기에 태우더니 청주교도소 부소장이라고 하는 사람이 주머니에서 종이를 꺼내 ‘형집행정지로 석방한다’고 서둘러 읽고는 바로 내려갔어요.” 이희호 일행은 공항에 배웅 나온 사람들 얼굴도 보지 못했다. 안기부 직원이 여권과 비행기 표를 주었다. “우리는 대한항공 티켓을 사고 짐도 그 카운터에 가져다 놓으라고 해서 그렇게 했는데, 정작 우리가 탄 비행기는 노스웨스트 항공이었어요. 대한항공 기내에서 동행 취재를 하려던 외신 기자들을 떼어놓으려고 표를 바꿔치기한 것이었어요.” 조국의 땅을 두고 이륙하는 비행기 안에서 이희호는 눈물을 훔쳤다.

이희호와 김대중을 태운 비행기는 12월23일 밤 미국 워싱턴에 도착했다. “공항 입국장을 나서니 밤이 늦었는데도 300여명이 몰려 나와 ‘행동하는 양심’이라고 쓴 플래카드를 들고 ‘김대중’을 연호하면서 뜨겁게 환영해주었어요. 최성일 박사, 문동환 목사, 한완상 박사, 이근팔 비서, 패리스 하비 목사가 나와 있었고, 에드워드 케네디 상원의원 수석보좌관도 마중을 나왔어요. 그런 환영 인파를 보니 순간 지난날의 고난이 영광으로 느껴지기도 했어요. 감사와 감격의 눈물로 얼굴이 범벅이 됐지요.”

문동환이 환영사를 했다. “다니엘을 사자굴에서 건지신 하느님은 김대중 선생을 악랄한 독재자 전두환의 손에서 건지셨습니다. 그것은 앞으로 김 선생께서 한국의 민주화와 통일에 큰 역할을 하셔야 하기 때문입니다.” 문동환의 눈에도 눈물이 그렁거렸다. 에드워드 케네디도 수석보좌관을 통해 환영 메시지를 전했다. 김대중은 즉석연설을 했다. “치료가 끝나는 대로 조국으로 돌아가 다시 싸우겠습니다.” 이희호 일행이 미국에 도착한 다음날 ‘내란음모’ 사건으로 수감돼 있던 사람들이 모두 석방됐다는 소식이 날아왔다.

1982년 말 미국 워싱턴에 정착한 김대중과 이희호는 교회·대학·인권단체·정계 등을 돌며 줄기차게 한국 민주화 지지를 호소하는 강연을 했다. 사진은 1983년 2월15일 상원의원 에드워드 케네디(오른쪽)가 상원 의사당에서 주최한 김대중(왼쪽)과 이희호를 위한 환영회로, 뒤쪽에 홍업·홍일의 모습도 보인다.
 사진 김대중평화센터 제공
1982년 말 미국 워싱턴에 정착한 김대중과 이희호는 교회·대학·인권단체·정계 등을 돌며 줄기차게 한국 민주화 지지를 호소하는 강연을 했다. 사진은 1983년 2월15일 상원의원 에드워드 케네디(오른쪽)가 상원 의사당에서 주최한 김대중(왼쪽)과 이희호를 위한 환영회로, 뒤쪽에 홍업·홍일의 모습도 보인다. 사진 김대중평화센터 제공
이희호가 미국에 도착하고 일주일이 지난 뒤 새해가 밝았다. 1983년 1월3일 미국 하원의원 스티븐 솔라즈가 김대중과 이희호를 환영하는 행사를 열었다. “솔라즈 의원이 자기 집으로 초대했어요. 정원이 큰 저택이었어요. 미국 문화에서는 집으로 초대해 저녁식사를 대접하는 것이 큰 호의라고 해요. 그걸 보고 우리도 미국에 있을 때 집으로 외부인들을 자주 초대했어요. 집에서 식사하는 것이 돈도 적게 들고,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하기도 좋고요.”

1월8일 이희호와 김대중은 미국에서 살 집을 마련했다. 수도 워싱턴에서 가까운 버지니아주 알렉산드리아에 있는 워터게이트 랜드마크 아파트 16층이었다. “우리가 들어간 아파트는 닉슨 대통령의 도청 사건으로 유명한 그 아파트였어요. 방이 세 개에 응접실이 있었는데, 응접실을 사무실로 썼어요. 전기료·수도료·관리비를 포함해 월세로 900달러를 내는 중산층 아파트였어요. 이 아파트 지하에 홀이 있었는데 의자 하나당 50센트만 내면 쓸 수 있었어요. 그래서 한 달에 한 번씩 교민들을 모시고 강연도 하고 식사도 같이 했지요. 그런데 나중에 들으니 전두환 정권이 우리가 호화 아파트에 산다는 소문을 퍼뜨렸다고 해요.”

1983년 6월 김대중은 워싱턴에서 ‘재미한국인권문제연구소’를 열고 소식지 <행동하는 양심>도 발행하며 본격적으로 민주화 운동에 나섰다. 이희호는 주요 도시를 돌며 서예전을 열어 연구소 운영기금을 모았다.   사진 김대중평화센터 제공
1983년 6월 김대중은 워싱턴에서 ‘재미한국인권문제연구소’를 열고 소식지 <행동하는 양심>도 발행하며 본격적으로 민주화 운동에 나섰다. 이희호는 주요 도시를 돌며 서예전을 열어 연구소 운영기금을 모았다. 사진 김대중평화센터 제공
이희호는 1월9일 뉴욕으로 가 미국 교회여성연합회에서 주는 ‘용감한 여성 상’을 받았다. “미국 교회여성연합회는 남편을 구명하려고 미국 전역에서 뜨겁게 기도를 해준 단체였어요. 남편이 감옥에 있을 때 교회여성연합회 회장이 한국에 온 적도 있었는데, 그때 만나서 감사 인사를 드렸지요. 그런 인연으로 그쪽에서 나를 수상자로 결정했던가 봐요.”

2월15일 김대중과 이희호는 상원의원 에드워드 케네디가 연 환영 행사에 초대받았다. 행사는 상원 의사당 안 맨스필드룸에서 열렸다. “그 자리에 미국 정계 인사 수백명이 왔는데, 거기서 카터 정부 시절 국무장관 에드먼드 머스키, 레이건 정부 국가안보보좌관 리처드 앨런도 만났지요. 그분들은 남편의 목숨을 살리려고 애를 많이 쓴 분들이었어요.” 김대중은 그 자리에서 연설하며 미국 정부에 요청했다. “우리는 미국이 우리의 국내 정치에 개입하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다만 미국 정부에 두 가지만을 요망합니다. 첫째는 우리의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을 정신적으로 지원해 달라는 것입니다. 둘째로 미국 정부가 안정과 안보라는 구실로 독재를 합리화하거나 고무하지 말아 달라는 것입니다.”

이희호와 김대중이 미국에 도착하고 얼마 지나지 않은 때였다. 워싱턴에서 기자회견을 하던 중 일본인 기자가 김대중에게 물었다. “조지타운대학에서 1년 전쯤 무료로 수술을 해주겠다고 제안했는데 그 사실을 아십니까?” 이희호와 김대중에게는 금시초문의 일이었다. “남편이 감옥에서 고관절 통증으로 고생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쪽에서 그런 제안을 했던가 봐요. 그렇잖아도 수술을 하려면 돈이 많이 들 수밖에 없어 걱정이었거든요. 그래서 조지타운대학 부속병원에 가서 의사의 진단을 받았는데, 수술을 하더라도 크게 나아질 것 같지 않다면서 경과를 봐가면서 치료를 하자고 했어요. 뒤에 에머리대학 부속병원에서도 진찰을 받았는데 거기서도 그렇게 이야기했어요. 남편이 감옥에 있을 때는 다리 통증이 심했는데, 미국에 온 뒤로 집에서 계속 물리치료를 하니까 한결 나아지기도 해서 수술을 하지 않기로 했지요.”

이희호와 김대중은 미국에 있는 동안 늘 함께 움직였다. 김대중은 교회와 대학, 인권단체와 미국 정계에서 쉬지 않고 강연을 했다. 2년 동안 150차례가 넘는 연설을 했다. 초청받은 대학만 20곳이 넘었다. 한국의 민주주의와 인권 상황이 강연 주제였다. “강연회에는 늘 사람이 많았어요. 적게는 수백명에서 많게는 1만여명까지 모였지요. 사람들이 남편을 인권운동의 영웅으로 대했어요.”

3월에 김대중은 조지아주 애틀랜타의 에머리대학에서 ‘한국의 기독교와 인권’이라는 주제로 강연했다. 에머리대학은 후에 주한 미국 대사를 지낸 제임스 레이니가 총장으로 있었다. “레이니 총장은 과거에 한국에 선교사로 와 있었는데, 내가 와이더블유시에이(YWCA)에 있을 때 그분과 알게 됐지요.”

김대중과 이희호는 에머리대학에서 지미 카터도 만났다. 카터는 대통령직에서 퇴임한 뒤 고향으로 돌아가 에머리대학에 카터센터를 세웠다. 김대중과 이희호는 카터에게 구명에 힘을 써준 데 대해 감사 인사를 했다. “사실은 선거에서 당신이 레이건에게 졌을 때 ‘이젠 죽었구나’ 하는 생각에 발을 뻗고 울었습니다.” 김대중의 인사에 카터가 소탈한 표정으로 말했다. “독재자들이 그렇게 협박하고 회유해도 굴하지 않은 당신의 용기와 인내심을 높이 평가합니다. 우리는 동지입니다.” 이희호와 김대중은 카터센터에서 가까운 곳에 있는 흑인 인권운동가 마틴 루서 킹의 묘소를 찾아가 묵념했다. “우리는 애틀랜타에 내려가는 길에 제임스 크로 목사 댁에도 들렀어요. 크로 목사는 내가 미국 유학을 할 때 장학금을 주선해주신 분이었어요. 그분 집에서 하룻밤을 묵은 뒤 에머리대학으로 갔지요.”

5월에 김대중은 에머리대학에서 주는 명예 법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희호는 조지아주에 붙은 테네시주 내슈빌에 가 모교 스캐릿대학 졸업식에서 ‘탑 상’을 받았다. “1년 전에 수상자로 결정됐는데 뒤늦게 받았지요.” 이희호는 탑 상을 받은 뒤로 여러 곳에서 상을 받았다. 1984년에는 ‘북미연합’으로부터 한국의 인권에 공헌한 공로로 ‘1984년 인권상’을 받았고 1987년에는 미국 캘리포니아주에서 주는 ‘올해의 탁월한 여성 상’을 받았다. 또 1987년 9월 미국 노스이스턴대학과 1988년 5월 미국 워시번대학에서 명예 인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83년 5월12일 김대중은 캘리포니아주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미국 기독교교회협의회 운영위원회에서 초청강연을 하던 중 동석한 이희호를 두고 이렇게 말했다. “나는 1956년 가톨릭 신자로서 세례를 받았고 1962년 아내와 결혼했습니다. 그 당시 내 아내는 대한와이더블유시에이(YWCA)연합회 총무였는데 나하고는 1951년부터 가까운 친구였습니다. 아내는 그때나 지금이나 한국 개신교 감리교 신자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결혼은 한국에서 에큐메니컬 운동(교회통합운동)이 벌어지기 얼마 전에 이루어진 에큐메니컬한 결혼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결혼한 이후 아내의 내조는 정말 값진 것이었습니다. 아내가 없었더라면 내가 오늘날 무엇이 되었을지 상상할 수도 없습니다. 아내의 내조는 독실한 기독교 신앙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오늘 내가 여러분과 자리를 함께할 수 있는 것은 내 아내 덕분이고, 나는 이희호의 남편으로서 이 자리에 서 있습니다. 나는 그것이 너무나 자랑스럽습니다.” 이 강연에서 김대중은 이희호를 두고 ‘동역자’라고 표현했다. 세상을 구하는 신의 사업에 함께 참여하는 사람이라는 뜻이었다.

6월 초 김대중은 일본의 진보 월간지 <세카이> 편집장 야스에 료스케와 인터뷰했다. 야스에는 김대중을 만나러 워싱턴까지 날아온 터였다. 1973년 일본에서 납치당하기 얼마 전에 인터뷰한 뒤로 10년 만이었다. 야스에는 5·18 광주항쟁을 어떻게 보느냐고 물었다. 김대중은 길게 이야기했다. “광주에서 일어난 사건은 우리 민족의 100년래의 원망인 민중·민족·민주, 이 세 민족적 열망을 집약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김대중은 1894년 동학혁명, 1919년 3·1 독립운동, 1960년 4·19 혁명을 열망의 사례로 들었다. “동학농민혁명의 민중, 3·1 독립운동의 민족, 4월혁명의 민주, 이 민중·민족·민주의 세 가지가 박정희씨의 암살 후에 국민의 집중적인 관심사로 떠오른 것입니다. 이것을 온 국민의 절실한 기대로서 빌던 그 시기에 전두환씨가 국민의 모든 의사와 원망에 등을 돌리고 역사적 요구에 역행하는 쿠데타를 일으켰습니다. 이 쿠데타에 맞서 일어난 것이 바로 5·18 광주항쟁입니다.” <세카이> 인터뷰는 일본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다. <아사히신문>은 1983년 ‘올해의 5대 기사’ 가운데 하나로, <요미우리신문>은 ‘3대 기사’의 하나로 선정했다.

1983년 6월 김대중은 ‘재미한국인권문제연구소’를 설립했다. 김대중이 소장을 맡고 이영작·이근팔·김경재·이재현·최성일을 포함해 10여명이 이사로 참여했다. “미국인으로는 패리스 하비 목사가 이사로 들어왔어요. 하비 목사의 부인이 내가 스캐릿대학에 다닐 때 학부생이어서 그때부터 아는 사이였지요. 나중에는 한국에 선교사로 와서 활동도 했고요. 그분들이 우리에게 도움을 많이 주었지요.” 재미한국인권문제연구소는 소식지 <행동하는 양심>을 발행했다. 심기섭·정동채가 소식지 편집을 맡았다. 연구소는 미국 전역에 한국 민주화 열기를 퍼뜨리는 데 거점 구실을 했다. “연구소를 운영하는 데 돈이 들었어요. 그래서 남편과 함께 뉴욕·워싱턴·로스앤젤레스 등지에서 서예전을 열었어요. 남편과 함께 ‘경천애인’, ‘사인여천’, ‘인내천’ 같은 글귀를 써서 내놨는데 어디서든 많이들 사주었어요. 수입금을 ‘민주화 성금’이라고 생각하고 고맙게 받았지요.”

글·인터뷰 고명섭 논설위원 michael@hani.co.kr

인터뷰 녹취정리 유선희 인턴기자

(세명대 저널리즘스쿨대학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