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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쁘고 추한 사람은 1%, 나쁘고 추한 상황이 99%/ 문유석 판사/ 한겨레신문

이윤진이카루스 2016. 3. 19. 13:23

사회사회일반

나쁘고 추한 사람은 없다, 나쁘고 추한 상황이 있을 뿐

등록 :2016-03-18 21:48

 

문유석 판사. 사진 강재훈 선임기자 <A href="mailto:khan@hani.co.kr">khan@hani.co.kr</A>
문유석 판사. 사진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토요판] 커버스토리 / ‘미스터 함무라비’ 문유석 판사

소설 쓰는 판사 문유석이
법과 현실의 벽을 말하다
연재가 끝났다. 10개월에 걸쳐 <한겨레> 토요판에 연재된 ‘미스 함무라비’는 국내에서 보기 드문, 본격 법정소설이다. 소설의 주 무대인 법정에선 우리 사회의 온갖 갈등과 모순이 응축돼 폭발했다. 열혈파에 정의감 넘치는 젊은 초임 판사는 현실의 벽에 부딪혀 갈등하고 좌절하고 고뇌했다. 박차오름 판사의 좌충우돌을 옆에서 지켜보던 소설 속 임바른 판사는, 달리 어찌 해볼 수 없는 사회의 약자들에게 “안온한 중산층의 도덕을 강요하는” 법의 구실을 두고 고심하고 “자유의지를 전제로 인간에게 책임을 묻는 판사의 일이란 실은 다 허깨비짓 아니냐”며 고뇌한다. ‘미스 함무라비’는 소설의 제목이자 주인공 박차오름 판사의 별명이다. 박 판사는 대학 시절 배낭여행으로 프랑스 루브르박물관을 찾았다가 ‘눈에는 눈, 이에는 이’ 함무라비법전이 새겨진 비석에 머리를 부딪히는 사고를 당한 경험이 있다. 함무라비법은 단순한 ‘동형복수법’이 아니다. 당시의 맥락으로, 귀족이나 힘있는 사람들의 복수를 제한한 법이었다. 소설 속 박 판사의 모습은 소설의 작자인 현실 속 문유석 판사의 모습에도 담겨 있었다. 지난 8일 저녁 서울 광진구 화양동의 한 거리에서 ‘소설 쓰는 판사’ 문유석 동부지법 부장판사를 만났다.

지난 8일 저녁 서울 동부지법 인근 한 카페에서 인터뷰 중인 문유석 판사의 모습. 한 시간 반가량 진행된 인터뷰 내내 문 판사는 신중하고 빠르게 말을 이어나갔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지난 8일 저녁 서울 동부지법 인근 한 카페에서 인터뷰 중인 문유석 판사의 모습. 한 시간 반가량 진행된 인터뷰 내내 문 판사는 신중하고 빠르게 말을 이어나갔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살면서 법원에 갈 일은 그리 많지 않다. 법정 뒤의 일상과 판사들의 속내는 그래서인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건조한 통지서, 판결문만 오고 갈 뿐이다. 판사는 판결문으로 말한다. 판결문이 아닌 글을 쓰는 현직 판사는 드물다. 더욱이 공개적이고 지속적으로 쓰는 이는 더 드물다. 문유석(47) 서울동부지법 부장판사는 그래서 예외적이다. 그만큼 가치 있다. 문 판사는 지난해 5월부터 <한겨레> 토요판에 격주로, 때론 매주 법정소설 ‘미스 함무라비’를 연재해왔다. 26회, 원고지로 회당 30장 분량의 글은 지난 5일 마무리됐다. 판사들의 일상과 법원 안팎에서 펼쳐진 갖은 드라마가 소설에서 다뤄졌다. 연재한 소설은 내용을 보충하고 해설을 덧붙여 책으로 펴낼 예정이다.

문 판사는 최근 3년간 근무했던 인천지법을 떠나 서울동부지법으로 근무지를 옮겼다. 연재가 끝난 지난 8일 저녁 문 판사를 동부지법 근처에서 만났다. 소설 뒷이야기와, 충분히 다루지 못한 판사들의 일상에 관해 묻고 들었다. 문 판사는 최근 해외 배낭여행을 다룬 방송 프로그램 <꽃보다 청춘>을 보며 아프리카 여행을 꿈꾼다고 했다. 소설을 통해 그는 결국 우리와 같은 평범한 사람들인 판사들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고 했다. 그간 잘 드러나지 않던 판사들의 일상과 고민을 통해, 법원과 국민의 거리를 좁히고 싶었다고 했다.

‘파산이 뭐길래’ 기억하시나요

-현직 판사가 왜 소설을 썼을까?

“원래 법정 실화를 다룬 에세이를 쓰려 했다. 판사들의 일상이나 재판 과정들은 베일 속에 가려져 있지 않나. 판사는 사람이 아닌 것 같고. 내 생명과 재산을 다루는 중요한 재판을 과연 인간이 하고 있는 것인가 하는 의구심이 많을 거다. 검사나 변호사는 영화나 드라마에 많이 나오지만 판사는 항상 ‘병풍’ 아닌가. 법정에도 독자들과 똑같은 사람이 살고, 소소한 일상 속에서 고민하고, 때로 찌질한 짓도 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잠입 르포 같은 느낌으로. 한데 직접 다룬 사건을 쓰면 사생활 침해가 되겠더라. 농담 삼아 소설로 써보자는 얘기가 나왔는데, 결국 이렇게 됐다.”

-처음 쓰는 소설이라 쉽지 않았을 것 같다.

“독자들 반응이 제일 궁금했다. ‘얘는 뭔데 이런 거 쓰고 있냐’고 할까봐. (신문사에) 항의 전화 안 왔나?(웃음) 쓰는 과정은 즐겁고 좋았다. 하지만 일이 바빠 많은 시간을 투자할 수 없었다. 좀 뻔뻔하다 생각했다. 전업작가들은 문장 하나 가다듬는 데 몇 번이나 고민하는데 난 일하다가 짬 날 때마다 썼으니. 소설은 (그동안 써 온) 에세이와 다르더라. 대화 하나 쓸 때도 어색했다. 막연한 스토리는 생각해 낼 수 있는데, 소설로 형상화하는 과정에서 필요한 디테일(세부 사항)은 많은 고민을 해야겠더라. 작가들 존경하게 됐다.”

-책을 두 권(<판사유감>, <개인주의자 선언>)이나 냈다. 판사 일과 별도로 글을 쓰는 이유가 뭔가?

“2004년 법원 내 ‘코트넷’이란 사내게시판에 파산사건 관련 글을 쓴 게 시작이었다. 첫 책 <판사유감>의 내용은 대부분 그렇게 쓴 글이다. ‘파산사건을 직접 다뤄본 소감’, ‘국민참여재판의 감회’ 같은 것을 동료들과 공유하자는 취지로 썼다. 많은 판사들이 좋아해주더라. 댓글도 달고. 가까이 있는 동료 선후배들로부터 공감을 얻은 게 큰 즐거움이 됐다. 판사의 생활은 고독하다. 혼자 밤낮 기록 보고 판결 쓴다. 동료들과 속 터놓고 이야기하는 분위기가 아니다. 근데 무언가 속내를 드러낸 글을 썼더니 공감을 얻은 것이다. 이런 글 써줘 고맙다는 사람도 있었다. 뭉클함 같은 게 있었다. 그 맛에 중독되기 시작했다.”

문 판사의 첫 책 <판사유감>은 2014년에 출간됐다. 거의 10년치 글을 모아 낸 책이다. 문 판사가 알려진 건 서울중앙지방법원 파산부 근무 시절인 2005년 5월 법원 회보인 <법원 사람들>에 쓴 글 ‘파산이 뭐길래’를 통해서였다. 개인파산면책이나 개인회생을 신청하러 온 이들의 상황을 구체적으로 접한 뒤 느낀 소회가 담긴 글이다. 당시는 구제금융 사태에 이은 카드대란으로 신용불량자가 400만명에 이르던 때다. 개인파산자를 ‘모럴 해저드’(도덕적 해이)로 보는 시각도 팽배했다. 문 판사는 하지만 “‘남의 돈을 흥청망청 써대는 모럴 해저드’는 이들 중 1%에 불과하다”고 글을 통해 소개했다. 실제 2004년 서울중앙지법 파산부가 처리한 면책사건의 면책률은 98.6%였다. 법원은 파산을 신청한 이의 99%가량을 ‘빚을 탕감받아야 할 만큼 사정이 어렵다’고 본 것이다. 파산자들이 도덕적으로 해이하다는 지적은 현실을 모르는 것이며, 파산은 사회 구조적 문제일 수 있다고 지적한 문 판사의 글은 화제가 됐다. 여러 언론이 이 글을 다뤘다. 문 판사는 “법원 내부에서라도 의견을 공유하자는 취지로, 외부에 알려질 가능성이 있다는 것까지 예견해 작심하고 쓴 글”이라 했다.

-처음 쓴 글이 파산과 관련된 내용이다.

“당시엔 지금과 인식이 달랐다. 보수적인 지방에선 개인파산 신청하러 오면 접수 안 하고 돌려보내기도 했다. ‘사지 멀쩡하니 벌어서 갚으라’는 거였다. 신불자(신용불량자)에 대한 사회적 선입견이 있었다. 나 역시 비슷한 생각이었는데 실제 해보니 아니더라. 구조적 문제이고 희생자, 불운한 사람들이 많았다. 그래서 사회의 인식을 바꾸고 싶었다. 일선에서 접하는 사람들이 해보니 밖에서 막연히 ‘모럴 해저드’ 운운하는 것과 다르더라는 것을 전하고 싶었다. 꽤 긴 글이었고 약간 ‘울컥’해서 썼는데, 그 글이 많이 알려졌다. 신불자 문제가 당시 심각했고 개인파산 제도가 충분히 알려지지 않은 상황이었다. 현직 판사가 신불자 문제에 대해 전향적으로, 채무 탕감을 많이 해줘야 한다는 취지로 썼으니 언론의 관심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모럴 해저드를 판사가 부추긴다는 비판도 있었지만, 그래도 다행히 다수는 취지를 잘 이해해줬다.”

검사와 변호사는 영화나 드라마
많이 나오지만 판사는 늘 ‘병풍’
법정에도 똑같은 사람들이 살고
소소한 일상 속에서 고민하고 때로
찌질하다는 거 보여주고 싶었다

주인공 박차오름처럼 정의감 강하고
권위적인 문화에 순응하지 않는
젊은 판사들 실제 많이 늘어
특히 여성 판사들 활약이 대단
박차오름은 그들 모자이크한 것

‘미스 함무라비’ 주요 인물 캐릭터
‘미스 함무라비’ 주요 인물 캐릭터

“주인공 세 명 모두에게 내 모습 들어있어”

-흔히 판사 개인이 알려지면 구설에 오르다 법복을 벗는 경우가 많던데, 걱정되진 않던가?

“그래서 책 내는 데 10년이 걸렸다.(웃음) 첫 글을 썼을 때부터 출간 제의를 지속적으로 받았지만, 오해를 살 것 같고 부적절한 것 같아 계속 사양했다. 마음을 바꾼 건 사회 분위기가 그사이 조금씩 유연해진 덕이다. 법원 내부에도 국민과 법원 간에 인식 차이가 크기 때문에 우리가 어떻게 일하는지, 어떤 고충이 있는지 적극 알릴 필요가 있다는 흐름이 이미 몇년째 형성되고 있다. <인간극장>에서 판사들 일하는 거 찍기도 했고.”

소설에서 첫 재판에 들어가는 박차오름을 위해 한세상 부장이 입혀주던 법복이 그의 사무실에 걸려 있다. 문유석 판사 제공
소설에서 첫 재판에 들어가는 박차오름을 위해 한세상 부장이 입혀주던 법복이 그의 사무실에 걸려 있다. 문유석 판사 제공

-소설 얘기를 해보자. 주인공이라 할 박차오름의 캐릭터는 다소 비현실적으로 보이기도 한다.

“전반적으로 딱딱하고 어두운 얘기들이라, 최소한 주인공이라도 밝고 활기차야 할 것 같다 생각했다. 웹툰이나 만화 같은 느낌이 나도록. 근데 또 너무 튄다는 생각이 들더라. 다루는 이야기는 지극히 현실적인데 주인공 혼자 둥둥 떠 있었다. 그래서 갈수록 ‘톤 다운’시켰다. 한데 박차오름처럼 정의감 강하고 권위적 문화에 순응하지 않는 젊은 판사들은 실제 많이 늘고 있다. 특히 여성 판사들의 활약이 대단하다. 눈에 띄고, 활기차고, ‘아 정말 법원이 바뀌고 있구나’ 하는 느낌을 주는 판사 중에 여성이 많다. 특정 인물을 모델로 하진 않았지만 박차오름은 요즘 젊은 여성 판사들의 모습을 모자이크했다고 볼 수 있다.”

-주인공 중 자신의 모습에 가장 가까운 건 임바른 판사인가?

“한세상 부장판사까지 포함한 주인공 세 명 모두에게 내 모습의 일부가 들어 있다. 내겐 한 부장처럼 나이 먹은 이의 사고도 있고, 젊은 시절엔 임 판사처럼 모나기도 했다. 의외로 박 판사같이 마구 들이대기도 했다. 셋은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다 같이 성장해 간다. 일방적인 지도 관계가 아니다. 박 판사의 열정이나 정의감, 신선한 문제의식 같은 것을 접하며 매너리즘에 젖은, 현실주의적인 한 부장은 바뀌어 간다. 박 판사도 이상은 좋지만 현명해야 하고 속도조절이 필요하구나 그런 깨달음을 얻는다. 임 판사도 냉소주의에서 조금씩 벗어나게 된다. 삼각형의 세 꼭짓점이 서로 영향을 미쳐 다 같이 성장해 가는 이야기를 그리고 싶었다. 그게 이상적인 합의부의 모습이기도 하다. 나 역시 30대 초·중반의 배석판사들과 일하면서 많이 배우고 있다.”

판사들이 끼는 파란 고무 골무. 문유석 판사 제공
판사들이 끼는 파란 고무 골무. 문유석 판사 제공

소설 속엔 판사들 세계의 은어가 등장한다. ‘벙커’, ‘납품’, ‘깡치사건’, ‘프로’ 같은. 벙커는 같이 일하기 피곤한 재판장을, 납품은 결심(원피고의 변론 종결) 뒤 배석판사가 판결 초고를 작성해 부장판사에게 제출하는 일을 이른다. 깡치사건은 오래되고 복잡한 사건, 프로는 친한 판사들끼리의 농담조 호칭이다. 소설 속 판사들의 세계도 여느 직업군과 다르지 않다. 재판장의 입에서 ‘결심’이란 단어가 나올 때마다 판결 초고를 작성해야 하는 배석판사들의 가슴은 철렁인다. 첫 재판 뒤 박 판사는 매일 야근을 하며 배달음식을 시켜 먹고, 엄지손가락에 파란색 고무 골무를 끼고 사건 기록을 넘긴다. 곳곳에 포스트잇을 붙이고, 사건 메모지에 메모하고, 판례를 검색하고, 고민한다. 판사들은 실수하고 호통치고 고뇌한다. 현실에서도 그렇다.

산더미같이 쌓인 사건 기록들. 문유석 판사 제공
산더미같이 쌓인 사건 기록들. 문유석 판사 제공
기록을 읽고 또 읽는 것이 일상이다. 다 읽지 못한 기록은 보자기에 싸들고 퇴근한다. 문유석 판사 제공
기록을 읽고 또 읽는 것이 일상이다. 다 읽지 못한 기록은 보자기에 싸들고 퇴근한다. 문유석 판사 제공

-소설 속 판사들 생활이 실제를 그대로 반영한 것이라 했는데, 초임 판사의 흔한 실수로 언급된 게 ‘법정에서 소송대리인과 알은척하기’다. 박 판사도 연수원 때 교수님인 ‘머리가 희끗희끗한 변호사’를 알아보고 법정에서 머리 숙여 인사했다가 한 부장에게 꾸중을 듣는다. 실제 그런 일이 많나?

“많은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가끔 있다. 한데 무심코 그러는 거다. 장유유서 사회니까. 선배나 연수원 때 교수님이 오면 자기도 모르게 꾸뻑 목례하거나 알은척한다. 몸에 밴 예의범절이 직업의식을 앞서는 것이다. 근데 그건 사건 당사자들한테 큰 오해를 사는 행위다. 설사 실제로 잘 알더라도 모르는 척해야 한다.”

gomnme@naver.com
gomnme@naver.com

어느 영구임대아파트와 이혼소송

-박 판사는 또 사건 당사자에게 전화를 걸었다가 혼이 난다. 딴에는 자세한 이야기를 들어보려던 것인데, 전화를 받은 당사자가 상대에게 판사와의 친분을 과시하면서 재판부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졌다. 이런 일도 실제로 있는 일인가?

“초임 때 내가 그랬다 혼났다. 딴에는 사건 당사자가 너무 불쌍해서, 나서서 해결해본답시고 그랬다가 된통 혼났다. 물론 소설처럼 심각한 상황은 아니었지만. 근데 많이들 그런 욕구를 느낀다. 특히 변호사도 없는, 가난한 서민 사건은 안타까워서 가능한 범위 내에서 방향을 제시해주거나, 궁금한 걸 물어보거나 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그래도 투명한 절차 내에서, 법정에서 해야 한다. 따로 전화를 걸어서, 개인적으로 해선 안 된다. 약자를 돕겠다는 마음이 없어도 안 되는데, 그 마음이 너무 앞서면 오히려 더 위험한 결과를 낳는다. 그래서 그런 에피소드를 넣었다. ‘법정에서 가장 강하지만 또 가장 위험한 사람이 바로 우리 판사’라는. 대부분의 판사들은 한 번씩 경험하는 일이다.”

-법정은 우리 사회의 모든 갈등이 모여드는 곳이다. 판사를 오래 하면 인간과 사회에 대한 회의감 같은 게 쌓이지 않을까?

“좋은 일로 법정에 오는 사람은 없으니까. 불행한 일, 바닥을 많이 보게 된다. 사랑했던 사이인데 줬던 물건 다 돌려달라 이런 소송 많다. 밥 몇 번 샀고 반지 줬고 월세 보증금 내줬으니 다 돌려달라고 하면, 사랑해서 준 거 아니냐, 뭔 소리냐 빌려준 거다, 이러면서 싸우고. 특히 이혼 소송을 할 때 제일 우울하다. 10년, 20년 같이 살 부대끼며 살던 부부가 양육권이나 재산분할, 위자료 때문에 서로를 인간쓰레기로 모는 경우가 많다. 양쪽 집안 식구들이 죄 나와서 전쟁을 치르는데, 듣다 보면 ‘다 집어치우라’고 하고 싶다. 근데 좀 지나면 어느 정도 적응이 된다. 처음엔 분노하고 냉소적이 되거나 우울해지는데, 계속 보다 보면 그 사람들이 이상하고 나쁜 게 아니라 그 사람들의 상황이 나쁜 거란 생각이 든다. 나쁘거나 추한 사람들이 있는 게 아니라 나쁘거나 추한 상황이 있는 거다. 그런 상황은 누구에게나, 심지어 판사들에게도 숙명적으로 올 수 있다. 그런 시기가 오면 원래 선량하고 관대한 사람도 절박해지고 여유가 없어지고 공격적이 된다. 그걸 알게 되면, 이건 인간에 대한 실망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의 숙명에 관한 문제가 된다. 행복하게만 살 수 없고, 적대적인 관계에 놓일 수밖에 없는. 그렇게 생각하면 훨씬 마음이 편해지는 것 같다.”

-파산부 땐 어땠나. 파산부 때 주로 그런 생각을 하게 되지 않나?

“파산부 때 집중적으로 보게 된다. 상대방은 사기꾼이라고 얘기하는데, 만나서 주야장천 얘기 들어보고 제출한 서면 보다 보면 불쌍하거든. 악의적인 사람도 일부 있겠지만 1% 미만이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살아보겠다고 발버둥치다 그 지경이 됐다는 게 역력히 드러나는 경우가 많다. 인간이라면 어쩔 수 없는, 그런 상황에 놓이는 일이 너무 많구나 느낀다.”

-전과 26범인 동네 골칫거리 노인이 사는 영구임대아파트를 다룬 에피소드에선 판사 일의 고뇌 같은 게 엿보이더라.

“이전에 근무했던 지방의 한 영구임대아파트에서 살인사건이 연이어 있었다. 사람 목숨이 파리 목숨 같았다. 큰 원한이 있는 것도 아닌데 무의미하게 죽었다. 대낮에 술 먹다 싸워 죽고, 윷놀이하다 시비 붙어 싸워 죽고. 특정 아파트 이름이 자꾸 눈에 띄어서 어느 날 주말에 찾아갔다. 동네 전체가 희망이 하나도 없는 분위기였다. 아이 웃음소리 하나 없고, 가게에선 소주만 팔리고. 형사 재판을 하다 보면 그런 생각을 한다. 법이나 재판이란 건, 절박한 처지에 놓여 있는 다른 세계의 사람들에게 안온한 중산층의 도덕을 강요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 이 사람들에겐 술 먹고 싸우는 게 일상이다. 사람은 절박한 처지에 놓이면 마음의 여유가 없어진다. 작은 일에도 울컥한다. 늘 자존감이 낮은 상태, 그런 환경에선 폭력 사건이 자꾸 발생할 수밖에 없다. 의구심을 갖게 된다. 이 사람에게 다른 선택지가 있었을까, 적법하고 남한테 피해 안 끼치고 우아하게 살 만한 선택의 가능성이 과연 이 사람에게 있었을까 하는.”

문 판사는 인천지법에 근무할 때 근처 주안동 골목길을 짬이 날 때마다 걸었다. 문유석 판사 제공
문 판사는 인천지법에 근무할 때 근처 주안동 골목길을 짬이 날 때마다 걸었다. 문유석 판사 제공

형사재판 하다보면 그런 생각 든다
법이나 재판이란 건 절박한 처지의
다른 세계 사람들에게 안온한
중산층 도덕 강요하는 게 아니냐는
내가 과연 저 입장이면 달랐을까?

미래 법원은 ‘문제해결법원’ 돼야
전통적인 엄정중립 역할만으론
소년사건·주폭사건·가정파괴 등
원인 해결되지 않고 계속 반복
전문가·복지기관과 힘 합쳐야

판사는 항상 벽에 부딪혀 있다
햄릿처럼 갈등하고 고민한다
정답 없는 안갯속 헤쳐나간다
문제해결 열쇠는 시민이 쥐었다
쉽게 권리 위에 잠자지 말자

‘주폭’을 어떻게 할 것인가

전과 26범의 ‘주폭 노인’은 소설의 17화 ‘술 권하는 사회’ 편에 등장한다. 박 판사가 검토하던 기록에 문 판사가 인터뷰에서 언급한 ‘어이없는 죽음’들이 출몰했는데, 이 죽음의 배경이 되는 아파트가 주폭 노인이 사는 아파트였다. 박 판사와 임 판사는 같은 서울임에도 “평행우주로 들어서는 느낌”을 받으며 아파트를 둘러본다. 돌아오는 길에 임 판사는 혼란스러워했다. “자유의지를 전제로 인간에게 책임을 묻는 판사의 일이란 실은 다 허깨비짓 같은 것은 아닐까”라며 고심한다. 소설 속 임 판사는 노인에 대한 선고를 앞두고 검찰에 치료감호 청구를 요청할지 고민하지만, 이내 포기하고 3년6개월의 실형을 선고한다. “예산 부족으로 겨우 열 명 남짓의 의사가 1200여명의 정신장애인을 담당하고 있고, 방호인력도 부족해 탈주 사태까지 벌어지는 것이 이 나라의 현실”이기 때문이다.

-소설에서 묘사한 대로, 현실의 치료감호 인력이나 시설은 태부족이다. 어떻게 해야 할까?

“‘주폭’들은 대개 사회적 약자, 밑바닥에 있는 이들이다. 하지만 이들에게 피해 입는 사람도 똑같은 약자다. 약자가 약자를 괴롭히는 사건이다. 그래도 주폭들은 남성이고 나이도 있지만, 당하는 사람들은 젊은 여성이나 할머니, 영세 상인들이다. 젊고 건장한 사람에겐 그러지 않는다. 이 때문에 무조건적인 온정주의로 해결할 수도 없다. 사회가 예산을 더 투자해서라도 적극적으로 알코올중독 치료와 재활교육을 하고 직업알선 같은 것을 병행해야 한다. 밤낮 술만 먹을 게 아니라 뭔가 생산적인 일에 종사하게 하고, 자기 삶을 갖게 하는 해결책이 같이 이뤄져야 한다. 대부분 외톨이인 이들을 위해 사회적으로 유의미한 일을 하며 살아갈 공동체도 있어야 한다. 아니면 영원히 그런 일이 반복된다.”

-하지만 일반적인 사람들은 이런 문제에 대해 문제의식이 없거나 약하다. 이런 문제를 직접, 자주 접하는 법원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을까?

“미래의 법원은 ‘문제해결법원’으로 가야 한다. 우린 그동안 팔짱 끼고 중립적으로 심판만 잘 보면 된다는 ‘고전적 법치주의’였다. 당사자들과 검사, 변호사끼리 싸우고 판사는 엄정중립을 지켰다. 그것이 법원에 요구되는 전통적 역할이었다. 한데 그것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구조적이고 반복되는 문제들이 있었던 거다. 소년사건이나 주폭사건, 마약중독범죄, 가정파괴 같은 문제는 중립적 판단만 해선 원인이 해결되지 않는다. 당사자들도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없는 경우가 많다. 이런 경우 법원이 다른 전문가나 사회복지기관, 또는 정부와 힘을 합쳐 문제의 원인을 탐구하고 해결하는 방법까지 함께 제공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게 문제해결법원이란 사상이다. 1990년대 이래 미국에서 마약법원, 소년법원 등이 생기면서 시작됐다. 판사가 소년범이나 마약중독자를 데리고 1~2년씩 계속 주기적으로 만나면서 상황이 호전되는지 보고받고 호전되면 그때 비로소 처분을 달리 한다. 미국이 선도하고 한국도 가정법원을 중심으로 벌써 수년째 그런 흐름이 있어왔다. 앞으로 더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삼권 분립’이지만 필요한 기능은 통합 내지 연대해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주민센터와 구청, 법원이 연계하거나 지역의 시민단체와 연계하는 식으로. 가정법원만이 아니라 주폭이나 마약범죄 같은 형사사건 분야에도 그런 해결책이 나와야 한다 생각한다.”

전관 찾을 바엔 피해자 변제를

-소설에 등장하는 전관예우 관련 에피소드는 어떤 면에선 법정에서 전관예우가 없다는 걸 애써 보여주기 위한 것처럼 보이더라.

“두 가지 하고 싶은 얘기가 있었다. 첫째는 실제 여부를 떠나 그런 불신에 대해 법원이 먼저 반성하자는 것. (소설에 나오는) ‘하나만 썩었어도 다 썩은 거나 마찬가지’란 말이 그런 뜻이다. 법원은 그만큼 중요한 책임을 지는 기관이니 ‘우리가 어디보단 낫다’ 이런 건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다. 또 한 가지는, 전관예우가 실제보다 과장돼 있다는 얘기를 하고 싶었다. 이 문제가 사라지지 않는 것은 실제보다 과장된, 사람들의 인식도 원인이다. 전관 여부가 결론에 영향을 미치는 일을 최소한 난 지금까지 겪어보지 않았다. 전혀 없다고 말할 순 없겠지만, 주변을 봐도 일반적인 일은 아니다. 실제론 극히 드문데도 사람들은 만연돼 있다 생각한다. 사람들이 그렇게 믿고 있기 때문에, 거기에 편승해 득을 보려는 브로커나 부끄러운 전관 변호사들이 생긴다. ‘전관예우’ 자체는 희소한데, ‘전관 선호 경향’은 엄청나게 만연한 것이다. 사교육 신화 같은 거다. 원래 그 아이가 실력이 좋아서 좋은 대학에 간 것인데도 마치 대치동 학원이나 과외 선생한테 돈을 들였기 때문에 간 것으로 생각하는 것. 그래서 밑도 끝도 없이 돈을 쓰는 일 같은 거다. 거기서 득을 보는 건 중간에 있는 학원과 선생뿐이다. 그러니 헛돈을 쓰지 말자는 거다. 그럴 돈이 있다면 민사든 형사든 피해 본 사람이 있을 테니 피해자한테 주는 게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다. 아무 효험도 없는 전관보단 피해자 변제가 훨씬 유리하다. 피해자 변제는 모든 판사들이 참작할 수밖에 없게 돼 있다.”

-마지막으로, 소설을 통해 특별히 하고 싶었던 말이 있다면?

“(1997년부터) 20년 정도 판사 하면서 든 생각은, 법정이든 세상이든 정답이 없다는 것이다. 소설을 보면 재판부가 화끈하게 결론을 내린 게 하나도 없다. 항상 그런 식이다. 판사는 항상 벽에 부딪혀 있다. 햄릿처럼 갈등하고 고민한다. 정작 주도권과 해결의 실마리를 쥐는 것은 시민들이다. 마지막 에피소드의 ‘1번 배심원’처럼, 자신의 경험을 통해 자신을 극복하는 사람이 그렇다. 그 재판에선 처음에 가장 생각이 달랐던 사람이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다. 판사들이 한 일은 없다. 사회가 실질적으로 바뀌는 것은 그런 것 같다. 법정 저 높은 곳에서 심판의 잣대를 들이대는 판사들이 실제론 정작 무력감을 느끼고 정답이 없는 안갯속을 헤쳐나간다. 그런 걸 토로하고 싶었다. 판사는 도로, 항만 같은 사회간접자본일 뿐이다. 주어진 법의 테두리 내에서 기능한다. 그 법을 만드는 것은 궁극적으로 주권자인 국민이다. 사회 문제를 해결하는 열쇠는 결국 시민들이 쥐고 있다. 권리 위에 잠자지 말자, 주체적으로 자신의 권리를 지키자는 얘기를 하고 싶었다.”

박기용 기자 xeno@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