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5년 2월8일 김대중과 이희호는 미국 망명 2년1개월 남짓 만에 귀국했다. 이날 오전 11시40분 김포공항에 내린 순간부터 사복경찰들은 부부를 에워싸고 일행과 격리시켰다.
이희호와 김대중은 2·12 총선을 며칠 앞둔 1985년 2월6일 오전 워싱턴 내셔널 공항에서 노스웨스트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미국 망명 2년1개월 만이었다. 김대중이 귀국한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미국 상·하원 의원 80여명과 각계 지도자 150여명이 김대중의 안전 귀국을 요구하는 문서에 서명해 한국 정부에 보냈다. 또 김대중이 제2의 아키노가 되는 것을 막아야 한다며 미국의 저명인사 27명이 김대중과 이희호의 귀국 비행기에 동승했다.
하원의원 토머스 포글리에타와 에드워드 피앤(Feighan), 카터 행정부 인권담당 차관보 퍼트리샤 데리언, 목사 패리스 하비, 워싱턴대학 교수 브루스 커밍스가 탔고, 전 엘살바도르 주재 미국대사 로버트 화이트, 국제법률가위원회 미국협회 회장 윌리엄 버틀러, 그밖에 퇴역 해군대장, 아메리칸익스프레스 사장, 여성 가수도 동행했다. 미국에서 김대중과 함께 활동하던 이근팔·김응태·최창학·송선근도 동승했다. 기자 수십명도 귀국길에 함께했다. “우리를 지켜주겠다고 많은 분들이 우리 비행기에 함께 탔지요. 잘 아는 분들도 있었지만, 모르는 사람도 있었어요. 자발적으로 나선 분들이었지요.”
1985년 ‘2·12총선’ 나흘전 김포 도착
미국 저명인사 27명 ‘경호 동행’ 불구
사복경찰들 폭력 휘두르며 ‘격리작전’
김대중·이희호만 압송해 가택연금 “왼쪽엔 진압경찰 오른쪽엔 시민들”
김포가도 봉쇄 뚫고 수십만 환영물결 투표율 84.6%…‘103석’ 거대야당 탄생
‘3·6 해금’ 김대중 민추협 공동의장에
“사면복권은 막아 정치활동 못했죠” 내내 ‘관절염’ 통증에 시달린 이희호
“치료차 온천 다녀왔는데 음해할 줄이야” 이희호와 김대중을 태운 비행기는 2월7일 일본 나리타공항에 도착했다. “밤에 도착하면 무슨 일이 날지 몰라 일본에서 하룻밤을 묵고 다음날 아침에 서울로 떠나기로 했어요.” 공항 근처 숙소에는 취재진이 구름처럼 몰려들어 김대중과 이희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렇게 많은 카메라를 본 적이 없었어요. 기자들이 너무나 많이 몰려서 발 디딜 틈이 없었지요. 일본 경찰의 경비도 사상 최대 규모였다고 해요. 만일의 사태에 대비했던 거지요.” 월간 <세카이> 편집장 야스에 료스케, 도쿄대 교수 와다 하루키가 회견장에 나와 김대중 부부를 환영했다. 김대중은 기자회견에서 단호하게 말했다. “민주주의만이 구국의 길입니다. 내일 내 운명이 어떻게 되든 귀국할 것입니다.”
김대중과 이희호를 실은 비행기는 2월8일 오전 11시40분 김포공항에 내렸다. 김대중은 동행한 사람들에게 부탁했다. “아키노는 비행기에서 내릴 때 정부기관 요원의 안내를 받고 따라가다 살해당했습니다. 나는 절대로 특별 안내는 받지 않겠습니다. 일반인들과 함께 입국 심사 창구로 가겠습니다. 내가 다른 곳으로 끌려가지 않게 도와주십시오.”
공항은 사복경찰 천지였다. “공항 청사에 들어서자 사복경찰들이 우르르 뛰어나오더니 남편과 나만 떼어내 끌어가려고 했어요. 같이 왔던 분들이 우리를 에워싸고 필사적으로 경찰을 막았지요.” 공항 일대가 아수라장이 됐다. 경찰들이 김대중과 이희호를 빼내려고 폭력을 휘둘렀다. 퍼트리샤 데리언이 경찰에 맞아 넘어지면서 비명을 질렀다. “카메라 기자들이 그 장면을 촬영해 세계에 알렸어요. 데리언은 차관보 시절에 자기 사무실 문에 ‘김대중을 구출하자’는 스티커를 붙여놓았던 분이에요. 데리언의 비명소리가 지금도 귀에 생생해요.”
경찰은 김대중과 이희호를 납치하다시피 해 엘리베이터에 밀어 넣은 뒤, 공항 1층에 미리 대기시켜 놓은 흰색 마이크로버스에 강제로 태웠다. “경찰이 우리에게 입국 심사를 해야 하니 여권을 내놓으라고 했어요. 우리가 직접 입국 심사를 받겠다고 거부하니까 그대로 공항을 빠져나갔어요. 입국 수속도 밟지 않은 거예요. 우리는 환영 나온 사람들을 보지도 못하고 동교동 집으로 직행했지요.”
김대중이 도착한 날 오전 김포공항엔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김대중의 귀국을 보려고 밀려들었다. 그날의 상황을 김옥두는 이렇게 기록했다. “공항 길목인 인공폭포 쪽으로 들어서니 수십만명의 인파 속에 ‘김대중 선생 환영’이라는 플래카드와 선생의 안전 귀국을 염원하는 피켓·전단이 어지럽게 물결치고 있었다. 김포가도는 무슨 축제와도 같고, 한편으론 전쟁통과도 같은 북새통이었다. 엄청난 인파였다. 수를 이루 다 헤아릴 수 없는 인파가 귀국 시각에 맞춰 공항 청사가 뒤흔들릴 정도로 연호와 함성을 토해놓고 있었다. ‘김대중! 김대중! 김대중!’ 공항 안은 물론이고 공항 밖에서도 인산인해의 물결을 이루고 있어서 청사 안으로 들어갈 틈이 없었다.”
1만명에 이르는 전투경찰이 공항으로 통하는 모든 도로를 봉쇄하고 공항 길목마다 임시검문소를 설치했지만 밀어닥치는 환영 인파를 막을 수 없었다. 현장에 있던 김옥두와 김홍일은 도착 예정 시각을 한참 지난 뒤에도 김대중 일행이 모습을 보이지 않자 동교동으로 전화를 걸었다. 김대중과 이희호가 벌써 도착해 연금돼 있었다. 몰려든 사람들은 경찰이 김대중을 빼돌렸다는 사실을 알고 고함을 지르고 시위를 벌였다. 흥분한 사람들이 동교동 주변으로 몰려들자 경찰은 집 주위에 가림막을 세워 김대중과 이희호를 볼 수 없도록 막았다.
김대중과 동행했던 브루스 커밍스는 그때의 상황을 이렇게 기록했다. “서울로 진입하는 길의 왼쪽에는 수천명의 폭동진압경찰이 있었다. 오른쪽에는 엄청난 수의 서울시민들, 작업복을 입은 노동자들, 검은 교복 차림의 학생들, 긴치마를 입은 어머니들, 바람을 막으려 몸을 단단히 감싼 어린아이들, 한복을 입은 노인네들이 김대중의 귀국을 환영하는 플래카드를 들고 서 있었다. 전체 국민이 폭동진압경찰과 시위대로 나뉘어 있는 듯한 풍경이었다.”
1주일 뒤 미국 시사주간지 <뉴스위크>는 ‘폭풍의 귀국’(A Stormy Homecoming)이라는 제목의 표지기사에서 김대중과 이희호의 귀국을 상세히 다루었다. “한국 정부 당국은 김대중씨와 부인, 그리고 미국인 고관들을 비행장의 출입제한구역으로 몰고 갔다. 거기서 50여명이 넘는 사복 요원들이 야당 지도자를 수행원들과 분리시켜 끌고 갔다. 그들은 미국인 몇 사람을 주먹으로 치고 발로 차고 땅바닥에 내동댕이쳤다. 그러고 나서 그들은 김대중씨를 엘리베이터에 처박았다. 김대중씨와 부인은 흰색 마이크로버스에 실려 공항 뒷길을 통해 자택으로 압송됐고 자택에 도착한 즉시 가택연금에 처해졌다.”
도착과 동시에 시작된 가택연금은 한 달이 넘도록 계속됐다. 경찰은 김대중이 귀국하기 전에 동교동 집 주변에 감시초소를 여러 곳 설치하고, 주변의 집들을 사거나 빌려서 그곳에 안기부원과 형사 수십명을 배치해 24시간 감시했다. 또 경찰기동대 버스 여러 대와 전투경찰 수백명을 동교동 주위에 배치해 사람들의 접근을 막았다. 전화를 도청하고 우편물을 검열하는 일도 예전처럼 계속했다. 김대중은 1987년 6월까지 28개월 동안 모두 55차례 연금을 당했다. “우리는 응접실 벽에 ‘불법 감금 달력’을 만들어놓고 연금당하는 날짜에 × 표시를 했지요. 삼일절이나 4·19, 5·18 같은 중요한 날에는 어김없이 연금을 당했지요. 가장 길게는 78일 동안 집 밖에 나가지 못했어요.”
김대중의 총선 직전 귀국은 거센 바람을 몰고 왔다. 정권은 김대중 귀국을 크게 보도하지 못하게 언론을 통제했으나 유세장까지 통제하지는 못했다. 야당 후보들은 거의 예외 없이 김대중의 귀국으로 이야기를 풀어 유세장 분위기를 달구었다. 그동안 정권이 금압했던 말들도 사슬에서 풀려났다. 광주학살의 진상이나 정권의 부패 추문이 후보들 입에서 튀어나왔다. 대학생들도 ‘민주총선쟁취학생연합’을 만들어 야당의 선거운동을 도왔다. 신민당은 ‘대통령 직선제 개헌’, ‘국정감사 부활’, ‘지방자치제 전면 실시’, ‘언론기본법 폐지’, ‘노동관계법 개폐’를 선거공약으로 내걸었다.
2월12일 총선 투표율은 84.6%에 이르러 ‘5·16 쿠데타 이후 가장 높은 투표율’을 기록했다. 선거 결과는 사실상 야당의 승리였다. 신민당은 지역구에서 50석, 전국구에서 17석을 차지해 제1야당이 됐다. 20석도 얻지 못할 것이라는 언론의 예상이 여지없이 빗나갔다. 민한당은 지역구 26석, 전국구 9석을 얻어 11대 총선에서 얻은 81석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다. 국민당은 전국구·지역구 합쳐 20석을 얻었다. 민정당은 지역구 87석, 전국구 61석으로 제1당의 지위를 유지했지만, 득표율에서 야권에 완패했다. 신민당(29.26%), 민한당(19.68%), 국민당(9.16%)을 합쳐 야권 득표율이 58.1%에 이르러 민정당의 득표율 35.25%를 멀찍이 따돌렸다. 특히 신민당은 서울에서 43.2%의 득표율로 1위를 기록했다. 민한당이 침몰하자 4월 초 당선자 35명 가운데 32명이 무더기로 탈당했다. 신민당은 탈당파·무소속 36명을 받아들여 103석에 이르는 거대 야당으로 등장했다. 총선에서 패배한 민정당은 기세가 꺾였다. 전두환은 2월18일 청와대 경호실장 장세동을 안기부장에 앉혔다.
1985년 3월6일 전두환은 대통령 취임 4돌에 맞춰 마지막 해금조처를 내렸다. 김대중과 김영삼을 포함해 16명의 정치활동 금지가 풀렸다. “그런데 전두환 정권은 남편의 사면 복권을 해주지 않았어요. 그래서 해금이 됐지만 실제로는 정치활동에 제약을 받았지요.” 3월15일 김대중은 민추협 공동의장 권한대행 김상현의 집에서 민추협 공동의장 김영삼과 만났다. 이 자리에서 김영삼은 김대중에게 민추협 공동의장에 취임해줄 것을 요청했고 김대중은 김영삼의 요청을 받아들였다. 김대중은 4년10개월 만에 정치 현장에 나왔지만, 복권이 되지 않아 정당 활동은 여전히 할 수 없었다.
3월29일에는 재야 사회운동단체 23곳의 연합체인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이 결성됐다. 민통련 고문으로 함석헌·김재준·지학순이 참여했고 상임의장으로 문익환이 선출됐다. 민통련은 신민당과 연합해 이듬해 대통령 직선제 개헌 투쟁에 뛰어들었다. 2·12 총선 바람을 타고 대학마다 총학생회를 부활시키는 선거 열풍이 불었다. 4월17일에는 고려대에서 전국학생총연합(전학련)이 발족했고, 전학련 산하에 3민(민족통일·민주쟁취·민중해방) 이념을 내세운 삼민투쟁위원회(삼민투)가 결성됐다.
이희호는 관절염으로 인한 통증으로 활동에 어려움을 겪었다. “귀국 직후 시작된 가택연금이 한 달 남짓 지나 풀렸어요. 동교동으로 돌아온 뒤로도 몸이 계속 아팠지요. 연금이 풀려 바깥출입을 할 수 있게 되자 남편이 나를 수안보온천에 데려갔어요. 2박3일 정도 쉬었는데, 그러고도 통증이 사라지지 않았어요. 가을쯤에야 한약을 달여 먹고 기운을 차렸지요.”
이희호는 수안보온천 여행이 뒷날 김대중 음해의 자료로 이용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우리 집 경호원을 지낸 함윤식이라는 분이 있었어요. 5·17 쿠데타 때 잡혀가 고생을 많이 했는데, 이 사람이 안기부의 회유와 협박에 넘어가 1987년에 <동교동 24시>라는 책을 냈어요. 함윤식씨 이름으로 사실상 안기부가 만들어 펴낸 책이에요. 그 책에서 남편을 광주 망월동 묘지는 참배하지 않고 온천 관광이나 다니는 파렴치한 사람이라고 묘사했어요. 그런 말을 듣고 얼마나 가슴이 아팠는지 몰라요. 함윤식씨는 뒤에 <속 동교동 24시>라는 책도 펴냈는데, 결국 명예훼손죄로 걸려 유죄판결을 받았지요.”
이희호는 이해 봄에 동교동 집을 개축했다. “연탄보일러를 때는 집이어서 몸도 힘든데 번거로웠어요. 처음엔 조금 손만 보려고 했는데, 결국 새로 짓다시피 했어요. 그때 지하실을 만들어 남편의 서재를 들였어요. 남편이 처음으로 서재가 생겼다고 참 좋아했지요. 그때까지는 수많은 책을 놔둘 곳이 마땅치 않았거든요. 남편은 연금당하던 시절에 안방에서 정장을 입고 서재로 출근했어요. 그렇게라도 마음을 다잡아보려고 했지요.”
1985년 5·18 광주항쟁 5돌을 맞아 대학가와 재야단체의 투쟁 열기가 솟아올랐다. 민통련은 광주항쟁 관련 성명서를 내고 농성에 들어갔고, 5월17일에는 전국의 대학 80곳에서 수만명의 대학생들이 광주학살 책임자 처단을 요구하며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이어 5월23일 대학생 73명이 서울 미국문화원 2층 도서관을 점거했다. 고려대·서강대·서울대·연세대의 삼민투 소속 학생들이었다.
대학생들은 ‘우리는 왜 미국문화원에 들어가야만 했나’라는 제목의 성명서를 뿌렸다. “광주민중항쟁 5주년을 맞이하여 전국에서 학살의 책임자를 단죄하는 소리가 드높아지고, 학살의 원흉인 군사독재정권은 물러나라는 요구가 곳곳에서 터져 나오고 있는 지금, 우리는 미국의 광주학살 지원의 책임을 묻고자 한다. (…) 이제 한국 국민은 광주학살에 대한 미국의 지원에 깊은 의혹을 갖고 있으며, 광주학살에 대한 책임을 미국도 져야 한다는 것을 인식하기에 이르렀다.”
학생들은 미국을 향해 ‘광주학살 지원에 책임지고 공개 사과할 것’, ‘전두환 군사독재정권에 대한 지원을 즉각 중단할 것’, ‘한·미 관계의 올바른 정립을 위해 진지하게 노력할 것’을 요구했다. “남편은 망명 중에도 기회가 날 때마다 미국 정부와 의회에 왜 제3세계에서 반미운동이 일어나고 있는지 직시하고 독재정권을 지원하지 말라고 요구했어요. 미국이 정책을 바꿔야 한다는 것이었지요. 학생들이 과격한 구호를 외치는 것에 반대했지만, 학생들의 주장에 경청할 부분이 있는 것도 사실이잖아요. 우리는 민추협을 통해 학생들이 기물을 훼손하지 않고 스스로 해산할 수 있도록 도왔지요.”
대학생들은 검거 농성 72시간 만에 “미국이 우리에게 진정한 우방과 자유세계의 수호자로서 인식되기에는 상당한 거리가 있음을 확인했다”고 밝히고 농성을 풀었다. 점거를 주도한 서울대 삼민투위원장 함운경을 비롯해 20여명이 구속됐고, 뒤이어 서울대 총학생회장 김민석이 잡혀 들어갔다. 미국문화원 점거농성 사건은 광주학살 사건을 널리 알리고 일반 국민들까지 미국 문제를 생각해보게 하는 계기가 됐다.
글·인터뷰 고명섭 논설위원 michael@hani.co.kr
인터뷰 녹취정리 유선희 인턴기자
(세명대 저널리즘스쿨대학원)
미국 저명인사 27명 ‘경호 동행’ 불구
사복경찰들 폭력 휘두르며 ‘격리작전’
김대중·이희호만 압송해 가택연금 “왼쪽엔 진압경찰 오른쪽엔 시민들”
김포가도 봉쇄 뚫고 수십만 환영물결 투표율 84.6%…‘103석’ 거대야당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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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면복권은 막아 정치활동 못했죠” 내내 ‘관절염’ 통증에 시달린 이희호
“치료차 온천 다녀왔는데 음해할 줄이야” 이희호와 김대중을 태운 비행기는 2월7일 일본 나리타공항에 도착했다. “밤에 도착하면 무슨 일이 날지 몰라 일본에서 하룻밤을 묵고 다음날 아침에 서울로 떠나기로 했어요.” 공항 근처 숙소에는 취재진이 구름처럼 몰려들어 김대중과 이희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렇게 많은 카메라를 본 적이 없었어요. 기자들이 너무나 많이 몰려서 발 디딜 틈이 없었지요. 일본 경찰의 경비도 사상 최대 규모였다고 해요. 만일의 사태에 대비했던 거지요.” 월간 <세카이> 편집장 야스에 료스케, 도쿄대 교수 와다 하루키가 회견장에 나와 김대중 부부를 환영했다. 김대중은 기자회견에서 단호하게 말했다. “민주주의만이 구국의 길입니다. 내일 내 운명이 어떻게 되든 귀국할 것입니다.”
경찰은 ‘안전 보장’을 위해 미국에서부터 동행한 외국인들을 폭력적으로 떼어내고 부부를 소형 버스에 강제로 태워 집으로 직행했다. '한겨레' 자료사진
그 시각 김포가도에서는 수십만의 인파가 ‘김대중 선생 환영’ 펼침막을 내걸고 행진을 하려다 1만명의 경찰과 대치했다. '한겨레' 자료사진
환영 인파가 동교동으로 몰려들자 경찰은 이중삼중 가림막으로 봉쇄한 뒤 부부를 가택연금시켰다. '한겨레' 자료사진
1985년 2·12 총선에서 야당이 압승을 거둔 뒤 3월6일 ‘해금’으로 김대중(왼쪽 둘째)과 이희호(맨 왼쪽)는 연금에서 해제됐다. 이날 ‘정치활동 금지’에서 풀린 김영삼 민추협 공동의장(오른쪽 둘째)이 김상현 공동의장대행(맨 오른쪽)과 동교동을 방문해 기쁨을 나누고 있다. 사진 김대중평화센터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