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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미국 ‘1985년 DJ 귀국’ 싸고 밀고당겨/ 한겨레신문

이윤진이카루스 2016. 4. 17. 23:18

정치정치BAR

전두환-미국 ‘1985년 DJ 귀국’ 싸고 밀고당겨…DJ, 신변보장 기류 읽고 총선 직전 전격 귀국

등록 :2016-04-17 14:35수정 :2016-04-17 20:08

 

정치BAR_31년만에 공개된 외교문서가 드러낸 전말

김대중 전 대통령(왼쪽 둘째)과 이희호 여사(왼쪽 셋째)가 1985년 2월8일 미국 망명 2년1개월 남짓 만에 김포공항을 통해 귀국하고 있다. 김포공항을 내린 순간부터 사복경찰들이 부부를 에워싸고 일행과 격리시켰다. '한겨레' 자료사진
김대중 전 대통령(왼쪽 둘째)과 이희호 여사(왼쪽 셋째)가 1985년 2월8일 미국 망명 2년1개월 남짓 만에 김포공항을 통해 귀국하고 있다. 김포공항을 내린 순간부터 사복경찰들이 부부를 에워싸고 일행과 격리시켰다. '한겨레' 자료사진
“본인은 백악관과 국무성으로부터 김대중 문제와 관련해서 각하(전두환 대통령)를 직접 뵙고 말씀을 드리는 동시에 각하의 견해를 본국 정부에 보고하라는 훈령을 받았다. … 기본적으로 김대중 문제는 한국의 국내 문제에 속하는 것이지만 한·미 관계 전반과 태평양 계획에도 영향을 줄 수 있는 중요한 문제다. … 본건은 한·미 관계 전반에 영향을 끼치는 것으로서 백악관에서 직접 지시를 받고 있다는 점을 재차 말씀드리며, 조속한 시일 안에 각하를 뵈올 수 있도록 선처하여 주시기를 거듭 요청드린다.”


1984년 5월 ‘양김씨’ 주도로 결성된 민주화추진협의회는 신민당을 결성해 85년 ‘2·12 총선’에서 돌풍을 일으키며 정치 해빙기를 열었다. 사진은 85년 2월 미국 망명에서 돌아온 고 김대중(왼쪽) 대통령이 3월 18일 민추협 공동의장 취임 환영식에서 김영삼(오른쪽) 공동의장과 나란히 자리한 모습. 사진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제공
1984년 5월 ‘양김씨’ 주도로 결성된 민주화추진협의회는 신민당을 결성해 85년 ‘2·12 총선’에서 돌풍을 일으키며 정치 해빙기를 열었다. 사진은 85년 2월 미국 망명에서 돌아온 고 김대중(왼쪽) 대통령이 3월 18일 민추협 공동의장 취임 환영식에서 김영삼(오른쪽) 공동의장과 나란히 자리한 모습. 사진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제공


1985년 1월19일 리처드 워커 주한미국대사가 서울 세종로 정부중앙청사 외무장관실에서 이원경 외무장관을 만나 ‘직설 화법’으로 밝힌 요구 사항이다. 요약하면, 전두환 대통령을 만나 김대중의 무사 귀국 보장을 받아내라는 백악관의 지시가 있으니 전두환 대통령 면담을 주선해달라는 주문이다. “백악관 직접 지시”, “한·미 관계 전반과 태평양계획에도 영향을 줄 수 있는…” 운운은 ‘외교적 수사’의 화장발을 걷어낸 노골적 압박이다.(‘태평양계획’은 1985년 4월24~29일 전두환 대통령의 방미 계획을 뜻하는 한국 정부의 암호명이다) ‘김대중 귀국 문제’가 당시 레이건 미국 행정부와 전두환 한국 정부 사이에 의견이 엇갈리는 민감한 현안이었음을 드러낸다.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은, 1985년 1월 당시 형집행정지 상태에서 신병 치료를 이유로 미국에 머물고 있었다. 아울러 1985년 2월12일 한국 총선(2·12 총선)을 앞두고 ‘김대중의 귀국 문제’는 한국 정치의 가장 뜨거운 현안의 하나였다.

워커 대사가 이원경 장관을 만난 1985년 1월19일은, 김대중이 이미 2월8일 귀국 계획을 잠정 결정한 직후다. 2월8일은, 2·12 총선 나흘 전이다. 전두환 정부가 김대중의 귀국 여부와 그 시기에 민감하게 반응한 이유다.

당시 한-미 정부는 ‘김대중 귀국 문제’를 놓고 빈번하게 비공개 고위급 협의를 이어갔다. 워싱턴에선 폴 월포위츠 국무부 동아태차관보와 류병헌 주미한국대사가, 서울에선 워커 주한미국대사와 이원경 외무장관이 수시로 접촉했다. 그때까지 ‘김대중 귀국 문제’에 대한 전두환 정부의 태도는 “귀국하면 재수감”이었다. 반면 레이건 행정부는 전두환 정부를 상대로 “김대중 무사 귀국 보장”을 받아내려 외교적으로 파상 공세를 펼쳤다.

김대중의 2월8일 귀국 일정 잠정 확정과 이원경-워커 1월19일 회동 이후 한-미 정부와 김대중의 3각 게임이 복잡하고도 숨가쁘게 펼쳐졌다.

우선 미국 쪽의 강력한 압박에 따라 전두환 대통령과 워커 대사의 면담이 1월22일 성사됐다. 하지만 전 대통령은 ‘나의 4월 방미 이전에 김대중이 귀국하면 재수감이 불가피하다’는 태도를 고수했다. 다음날 아침 클리브랜드 주한미국대사관 공사가 자기 집으로 박건우 외무부 미주국장를 불러 조찬 협의를 진행했다. 클리브랜드 공사는 “어제 워커 대사가 대통령 각하를 뵈온 내용은 워싱턴에 자세히 긴급보고하였고, 국무성은 레이건 대통령한테까지 보고할 예정으로 보이는데, 국무성의 1차적 반응은 한마디로 대단히 실망하였다는 것이다. 국무성은 24일로 예정된 태평양계획의 발표를 연기하는 문제를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전두환 정부의 ‘김대중 귀국 때 재수감’ 방침에 맞서 미국 정부가 ‘전두환 방미 계획 발표 연기’로 추가 압박을 가한 셈이다. 상황 전개에 따라서는 전두환 대통령의 방미 계획 자체가 흔들릴 수 있다는 암시와 함께. 1월23일 저녁 외무부장관실에서 이원경 장관은 워커 대사를 만나 “대통령 각하께서는 만일에 김(대중)이 각하 (4월) 방미 후에 귀국한다면 재수감을 하지 않겠다는 생각을 하시고 계신다. 그러나 만일에 방미 전에 귀국한다면 재수감은 불가피한 일이다”라고 거듭 통보했다. 이에 워커 대사는 “앞으로 이 문제를 어떻게 처리하는 것이 좋을지 모르겠다”며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런데 다음날인 1월24일 오후 이원경 장관은 자신의 집무실에서 워커 대사를 만나 “오늘 아침 대통령 각하를 뵈옵고 이 말씀을 드리는 것”이라며 “그(김대중)의 귀국과 관련하여 레이건 행정부의 입장을 난처하게 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밝혔다. 전두환 대통령이 이 장관한테 ‘김대중이 (2·12 총선 이후인) 5월께 귀국한다면 재수감하지 않는다’는 지침을 준 데 따른 것이다. 이에 워커 대사는 “재수감을 하지 않고 가택연금 같은 것을 하겠다는 뜻으로 해석되는데…, 좌우간 이런 기쁜 소식을 주셨으니 빨리 돌아가 본국 정부에 보고하겠다”고 반색한다. 결국은 전두환 정부가 미국의 압력에 굴복해 ‘재수감 방침’을 철회한 것인데, 미국 쪽도 ‘재수감만 아니면 (가택연금과 정치활동 규제는) 괜찮다’는 태도로 보인다.

17일 외교부가 공개한 1985년 김대중 전 대통령의 귀국 관련 한-미간 외교문서의 일부. 외교부 제공
17일 외교부가 공개한 1985년 김대중 전 대통령의 귀국 관련 한-미간 외교문서의 일부. 외교부 제공
다음날인 1월25일 낮 서울 힐튼호텔에서 이원경 장관과 워커 대사가 비밀리에 회동했다. 워커 대사는 이 자리에서, 1월24일 워싱턴에서 에이브람스 국무부 인권담당 차관보와 월포위츠 동아태 차관보가 김대중을 만나 “한국 정부의 최고위층으로부터 만약 김이 5월에 귀국한다면 재수감되지 않을 것이라는 약속을 김에게 전하여도 좋다는 언질을 받았다”(에이브람스) “김의 귀국이 김의 의도와 관계없이 한국 정치의 양극화 현상을 초래함으로써, 현재 점진적으로 이뤄지고 있는 한국의 정치 발전을 위협할 뿐 아니라 보다 더 기본적인 변화의 전망을 해칠 가능성이 있다. 김이 한국 국회의원 선거 직전에 귀국하겠다는 것은 선거의 원만한 진행에 영향을 끼치고 나아가서는 문제를 일으키기 위한 극적인 제스추어로 밖에 해석될 수 없을 것이다”(월포위츠)라고 말했다고, 이 장관한테 전했다.

요컨대 미국 정부는 전두환 정부를 상대로 “김대중의 무사 귀국”을 보장받고, 김대중한테서는 “(전두환 정부가 바라는대로) 2·12 총선 이후인 5월 귀국”을 확약받으려 한 것이다. 미국 정부는 이를 “선의의 중재”라고 자평하지만, 1985년 당시 미국 정부가 한국의 국내 정치에 얼마나 깊이 개입했는지를 방증한다.

하지만, 김대중은 ‘5월께 김대중 무사 귀국 보장’이라는 한-미 정부의 외교적 절충이 확인된 뒤인 1월26일 에이브람스와 월포위츠 차관보한테 보낸 서한을 통해 ‘2월8일 귀국’강행 방침을 통보했다.

이런 사실은 17일 외교부가 공개한 1602권(25만쪽) 분량의 ‘1985년도 외교문서’ 가운데 8권 분량의 ‘김대중 귀국’ 관련 문서에 담겨 있다.


1985년 3월 6일 김영삼 전 신민당 총재가 서울 동교동 자택에 연금되어 있는 김대중 전 신민당 대통령 후보를 찾아 해금을 앞두고 회동, 웃으며 포즈를 취하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1985년 3월 6일 김영삼 전 신민당 총재가 서울 동교동 자택에 연금되어 있는 김대중 전 신민당 대통령 후보를 찾아 해금을 앞두고 회동, 웃으며 포즈를 취하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김대중은 미국의 저명인사 27명과 함께 2월6일 워싱턴을 출발해 일본을 거쳐 2월8일 오전 11시40분 김포공항에 도착했다. 도착 즉시 김대중 부부는 동교동 자택에 연금됐지만, 나흘 뒤 2·12 총선에서 김대중과 김영삼이 손을 맞잡고 새로 띄운 신민당이 돌풍을 일으켰다. 84.6%라는 이례적으로 높은 투표율을 기록한 2·12 총선에서 신민당은 67석을 얻어 35석을 얻는 민한당을 누르고 일거에 제1야당으로 올라섰다. 신민당은 서울에서는 43.1%의 득표율로 민정당(35.25%)를 압도했다. 미국 시사주간 <뉴스위크>는 당시 김대중의 귀국을 “폭풍의 귀국”(A Stormly Homecoming)이라는 제목의 표지기사로 대서특필했다.

아울러 전두환 정부는 1985년 4월 워싱턴에서 진행된 한-미 정상회담을 계기로 도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의 “5공 헌법 지지” 공개 발언을 거듭 요청했으나 거절당한 사실이 17일 공개된 외교문서를 통해 확인됐다.

한편, 미국 주요 인사 130명이 ‘김대중 안전 귀국’을 요청하는 서한을 1월10일 전 대통령한테 보낼 계획이라는 사실을 1985년 하버드대에 연수 중이던 반기문 외교부 참사관(현 유엔 사무총장)이 1월7일 하버드대 교수한테서 듣고 류병현 주미대사한테 보고한 사실이 이날 공개된 외교문서를 통해 드러났다.

이제훈 기자 nomad@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