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및 퍼온 글

인력알선소로 변한 대학 / 김율 대구가톨릭대 교수 / 한겨레신문

이윤진이카루스 2016. 7. 1. 21:15

사설.칼럼칼럼

[기고] ‘프라임게임’과 대학의 승산 / 김율

등록 :2016-06-30 18:07수정 :2016-06-30 19:24

 

김율
대구가톨릭대 교수·철학

2016년 한국의 대학은 인력알선소와 크게 다르지 않다. 대학이 등록금 비싼 취업학원으로 ‘전락’한 지야 이미 오래되었으나, 근년에 조금 바뀐 점이 있다. 인력알선소니 취업학원이니 하는 표현에 깔려 있던 자조적 뉘앙스가 이제는 대학 안에서 거의 사라졌다는 점. 자조는 저열한 악을 피하고 싶되 피할 수 없는 자신의 상황에 대한 반응일 터, 어느덧 대학의 골수에 박힌 재정 논리는 자신의 적나라함에 대한 그 어떤 표현도 개의치 않는다. 프라임사업의 공이 크다. “인력알선소? 말 잘했네, 바로 그거야.” 총장은 교수에게, 교수는 학생에게, 학생은 자기 자신에게 이렇게 말한다. 태연하고도 불안하게. 방향 묻기를 포기하고 대세를 杆는 사람은 수오지심을 제일 먼저 버려야 하는 법이니 그 태연함에 대적할 방법은 없다. 그러니 이렇게 묻자. “인력알선소? 그건 제대로 할 수 있나?”

산업수요 맞춤형 인재 양성이라는 구호를 내세운 프라임사업은 옳고 그름을 떠나 애초부터 대학에 승산 있는 게임이 아니었다. 기초학문과 교양을 도려내고 학과는 물론 학부를 통폐합(융합)해서 ‘기업이 요구하는 실무형 인재’를 키우겠다 결의를 다진들, 마침내 정말로 그런 인재들을 키워낸들, 과연 그들 중 몇이나 ‘취업’에 성공하여 대학은 종래 그들 앞에 떳떳할 수 있을까? 지표로 평가받는 대학이니 지표로 답을 듣게 하자. 작년 대교협 공시에 따르면 4년제 대학 졸업생 취업률은 50%를 겨우 넘는다. 고용형태는 고려하지 않고 건강보험 자료만으로 산출한 수치일 뿐, 이 중 정규직 비율이 얼마인지 말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대졸이라는 고비용 스펙을 갖춰도 ‘미생’의 미래에는 아무 틈도 안 생기는 이 처참한 상황.

재밌게도 프라임사업은 이 책임을 슬쩍 대학에 떠넘긴다. 그러나 진실을 어찌 떠넘기랴. 대졸자 취업난의 근본 원인은 인재의 부재가 아니라 인재를 고용하는 기업의 부재에 있다. ‘고용 없는 성장’의 구조적 원인과 추이를 고민할 능력이나 의지를 대학은 애초에 갖고 있지 않았다. 사회수요가 없는데 사회수요 부응을 외치고 기업이 사람을 고용하려 하지 않는데 기업맞춤형 교육을 외치는 ‘뻘짓’은 이렇게 생겨난다. 대학의 기업 짝사랑은 웬만한 페티시즘을 능가한다. 상대가 누군지는 관심이 없되, 상대에게 간택받으려는 열망으로 충만한 대학.

주술이 아니라 전망이 필요하다. 고용 없는 성장으로 귀결된 반세기의 맹목적 성장주의를 청산하고, 부의 편중과 기회의 독점을 해소하여 ‘성장에 우선하는 공존’의 사회구조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 대학이 고민하고 행동으로 분투하여 제시해야 할 전망이다. 기업을 기업답게 만들자는 것이 재벌개혁이고 인간의 삶을 어쨌든 인간 이하로 만들지는 않아야 한다는 것이 기본소득제라면, 대학개혁은 이 타락 대학들의 무사유를 끝내는 것이어야 한다. 대학이 스스로 실현함으로써 이 시대 학생들에게 유일하게 가르쳐야 할 전망, 그것은 곧 자립과 공존의 질서다.

자립을 위해 필요한 것은 더 갖는 것이 아니라 가진 것을 줄이는 일이다. 건물과 조경이 화려할수록, 사업비 집행용 행사가 많을수록, 적립금과 평가순위를 자랑할수록, 대학의 자립 기반은 사라진다. 그런 대학일수록 비용 절감을 위해 강사를 자르고 과목 수를 줄이고 ‘비실용 학문’을 없애는 알뜰함은 더한 법. 가진 것을 줄이고 사람을 지켜내지 않는다면, 앞으로도 대학은 학생을 볼모로 수많은 ‘프라임게임’에서 노예 역할을 자청해야 할 것이다. 제발 스스로 살자. 인구감소 시대에 학생 수가 줄어든들, 더 공평한 월급으로 더 좁고 낡은 강의실에서 한결같은 양심과 지식을 함께 가르치려는 선생들 말고 대학에 남을 것이 또 무엇이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