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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이 모르는 일본](9) 만들어진 영웅의 전설…역사로 만들려는 슬픈 열망 / 김시덕 서울대 교수 / 경향신문

이윤진이카루스 2016. 10. 8. 17:53

[한국이 모르는 일본](9) 만들어진 영웅의 전설…역사로 만들려는 슬픈 열망

글·사진 | 김시덕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교수

ㆍ상상을 좇는 사람

바다를 건너는 요시쓰네 일행을 그린 에도시대 소설 <요시쓰네 반석전>의 한 장면.

바다를 건너는 요시쓰네 일행을 그린 에도시대 소설 <요시쓰네 반석전>의 한 장면.

지난 회에는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 사람들이 일본열도로 건너가 인상적인 활약을 펼쳤다는 일부 한국인들의 주장을 살폈다. 대륙과 일본열도가 연결돼 있던 선사시대부터 21세기까지 한반도 사람들이 일본열도로 건너가는 일은 계속됐다. 하지만 고대 한반도의 세 나라가 일본열도에 식민지를 만들었다는 ‘일본열도 분국설(日本列島 分國說)’이나, 유라시아 대륙 북부의 기마민족이 한반도를 거쳐 일본열도를 정복했다는 ‘기마민족 정복 왕조설(騎馬民族 征服 王朝說)’ 같은 주장에 대해 필자는 납득할 만한 증거가 아직까지 제시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주장은 일본이 한반도를 식민지화한 충격에서 벗어나기 위해 독립 이후 한반도 사람들이 집단적으로 자가 치유를 시도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현상들 중 하나다.

요시쓰네가 죽지 않고 대륙으로 건너가자 상서로운 구름이 서쪽 하늘에 생겼고, 요시쓰네를 동정하던 사람들은 이 구름을 보고, 요시쓰네가 뜻을 이루었음을 알게 됐다.

요시쓰네가 죽지 않고 대륙으로 건너가자 상서로운 구름이 서쪽 하늘에 생겼고, 요시쓰네를 동정하던 사람들은 이 구름을 보고, 요시쓰네가 뜻을 이루었음을 알게 됐다.

집단이나 개인의 정신적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역사를 재구성하는 일은 동서고금에 숱하게 일어났다. 그 상처를 치유해줄 만한 역사가 없을 때는 만들어내기도 한다. 위서(僞書)의 탄생이다. 필자는 위서를 수집하는 취미를 갖고 있는데 위서를 읽을 때마다 이 책을 만들어낸 개인이나 집단이 처했을 곤란한 상황과 그들이 느꼈을 심정을 상상하곤 한다.

18세기의 그림책.

18세기의 그림책.

인구수에 비해 남아 있는 문헌 수가 특이하게 많은 일본열도에서는 이런 위서의 흔적이 서력 1000년 이전부터 확인된다. 일본의 위서들 가운데 일본열도 분국설에 비견될 만한 주장을 담은 것들이 있다. 미나모토노 요시쓰네(源義經)라는 장군이 일본열도를 탈출해 홋카이도, 사할린을 거쳐 유라시아 대륙 동부를 정복하고 칭기즈칸이 됐다는 주장이다.

요시쓰네 불사설(不死說)이라 불리는 이런 주장은 갑자기 등장한 것이 아니라 최소한 500년에서 1000년에 걸쳐 서서히 형성됐다. 일본의 식민지가 된 상처를 치유하고자 하는 시도가 독특한 형태로 나타난 것이 일본열도 분국설이라면, 불행한 처지의 영웅을 애도하고 위서 작가 자신이 처한 역경을 이겨내고자 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것이 요시쓰네 불사설이다.

가마쿠라 막부 탄생 직전 일본열도에서는 미나모토씨(源氏)와 다이라씨(平氏)가 정면충돌했다. 겐페이 전쟁(源平合戰·1180~1185)이다. 미나모토씨는 신라계이고 다이라씨는 고구려계이며 겐페이 전쟁은 신라와 고구려 전쟁의 일본열도 버전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이야기를 지난 회에 했다. 물론 필자는 이런 주장을 인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겐페이 전쟁을 둘러싸고 한반도에서는 고대 삼국의 일본열도 정복설이, 일본열도에서는 요시쓰네 불사설과 대륙 정복설이 탄생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한 현상이다.

요시쓰네에게 무술을 가르쳐주었다고 하는 새 모양의 덴구.

요시쓰네에게 무술을 가르쳐주었다고 하는 새 모양의 덴구.

요시쓰네는 1159년에 태어났다. 그 직후 발생한 내전으로 아버지가 전사하고 요시쓰네는 11세 때 구라마데라(鞍馬寺) 절에 보내졌다. 전설에 따르면 요시쓰네는 이 절에서 덴구(天狗)라는 산속 괴물들에게서 무술을 배웠다. 그런 다음 16세 때 승려가 되기를 거부하고 탈출해서 북쪽 도호쿠 지방으로 갔는데 역시 전설에 따르면 이때 수많은 섬이 있는 북쪽 바다로 건너가 오니(鬼) 왕국에서 병법의 비법을 담은 두루마리를 훔쳐왔다. 22세 때 친형 미나모토노 요리토모(源賴朝)와 만난 후 요시쓰네는 형의 부대를 이끌고 다이라 세력에 맞서 연전연승을 거두는데 그 비결이 바로 덴구에게서 배운 무술과 오니의 병법서라는 것이다.

요시쓰네를 추모하는 건물.

요시쓰네를 추모하는 건물.

1184년 당시 일본에는 서쪽에 다이라 세력, 동쪽에 요리토모 세력, 그리고 그 가운데 미나모토노 요시나카(源義仲) 또는 기소 요시나카(木曾義仲)라 불리는 무사의 세력이 있었다. 요시쓰네는 우선 요시나카 세력을 무너뜨리고 교토에 진입하는 데 성공했다.

참고로, 일본에서 기소 요시나카는 힘만 앞세우는 산골 무사라는 좋지 않은 이미지가 있다. 그래서인지 임진왜란 발생 초기인 1592년 음력 10월에 진주성을 방어하다가 전사한 김시민이 일본 측 문헌에서는 ‘모쿠소(木曾)’라고 불린다. ‘기소(木曾)’는 ‘모쿠소’라고 읽을 수도 있어 진주 ‘목사’라는 관직명을 일본식으로 읽은 ‘모쿠소’에 이 한자를 붙인 것 같다. 에도시대 연극에서는 모쿠소가 임진왜란의 복수를 위해 일본에 잠입해서 가톨릭의 마법을 부리다가 토벌된다는 작품이 인기를 끌곤 했다.

아무튼, 미나모토 세력의 일선 사령관으로서 두각을 나타낸 요시쓰네와 교토의 덴노(天皇) 세력이 가까워지게 되는데, 이것이 형 요리토모의 경계심을 사서 결국 요시쓰네는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전쟁을 끝낸 1185년 5월, 요시쓰네는 형 요리토모를 찾아 가마쿠라로 갔지만 면담을 거절당했다. 형제이기는 하지만 성인이 되어서야 만난 사이이고, 무엇보다 권력은 둘이 나눠 가질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요리토모가 세운 가마쿠라 막부부터 무로마치 막부, 에도 막부까지 무사정권이 800년을 이어가는 동안에 교토에 덴노가 존재하기는 했다. 하지만 덴노는 무력을 지니지 못했기 때문에 막부에 위협을 주지 않았고, 막부로서도 오랫동안 이어져온 덴노제를 폐지할 부담을 피하려 했기 때문에 형식적인 이중권력 체제가 유지될 수 있었다. 그리고 메이지 유신을 통해 사쓰마번과 조슈번이 덴노 세력과 결탁하자, 막부는 사라질 수밖에 없었다.

자신을 토벌하려는 형 요리토모의 군대를 피해 일본 전국을 헤매던 요시쓰네는, 29세 되던 1187년에 또다시 도호쿠 지방으로 잠입한다. 그곳에서는 아직 오슈 후지와라(奧州藤原) 세력이 요리토모 세력에 굴복하지 않은 상태였다. 요리토모는 후지와라 세력에 만약 요시쓰네를 죽이지 않으면 침략하겠다고 협박했다.

충신의 대명사 벤케이.

충신의 대명사 벤케이.

협박에 굴복한 후지와라 측은 2년 뒤인 1189년 윤4월30일에 요시쓰네 일행이 머물던 다카다치(高館)의 고로모가와노타치(衣川館)를 공격했다. 충성스러운 부하 벤케이(弁慶)가 온몸에 화살을 맞아가면서 건물 앞을 지키는 가운데 요시쓰네는 할복했다. 31세였다. 요시쓰네라는 위협적인 세력이 척결되자, 가마쿠라의 요리토모는 군대를 보내 후지와라 세력을 멸망시켰다. 세계에서 가장 짧은 시 형식인 하이카이(俳諧)를 대표하는 마쓰오 바쇼(松尾芭蕉)는, 1689년에 이곳에서 ‘여름 풀이여, 무사들의 꿈의 흔적(夏草や兵どもが夢の跡)’이라는 유명한 하이카이를 읊었다.

이리하여 요시쓰네는 그야말로 불꽃같은 삶을 마감했지만, 스스로를 약자에게 동정적이라고 생각하는 일본 민중은 계속해서 요시쓰네를 이야기했다. 이때까지 요시쓰네 전설은 28세로 처형된 조선의 남이(南怡)와 같이 비극적 죽음을 맞이한 젊은 장군을 애도하는 내용이었다. 그러다가 1669년 요시쓰네 전설에 근본적인 변화가 생긴다.

<최신 만주국 지도>에 그려진 오호츠크해 연안 지역.

<최신 만주국 지도>에 그려진 오호츠크해 연안 지역.

홋카이도, 쿠릴열도, 사할린 등 오호츠크해 연안 지역에 거주하던 아이누인들은 수백년에 걸쳐 남쪽에서 일본인 세력의 압박을 받아왔다. 삼쿠사이누(Samkusaynu)라는 홋카이도 아이누인 대장이 이끄는 세력이 이에 저항해 1669년에 봉기했다가 실패했지만, 도쿠가와 막부와 주변 지식계급은 홋카이도 아이누인을 무마할 필요를 느꼈다. 그래서 사실 요시쓰네는 다카다치에서 전사한 것이 아니라 바다 건너 홋카이도로 건너가서 ‘오키쿠루미’라는 왕이 되어 아이누인들에게 인정(仁政)을 베풀었으며, 샤쿠샤인도 요시쓰네의 후손일지 모른다는 뉘앙스의 전설을 퍼뜨렸다.

일단 비극의 주인공에서 해외 정복 영웅으로 변모하자 요시쓰네가 정복했다고 주장되는 영토는 점점 더 북쪽으로, 또 서쪽으로 이동했다. 홋카이도에서 요시쓰네의 흔적이 확인되지 않자 요시쓰네가 사할린으로, 만주의 금나라로 갔을 것이라는 주장이 제기됐다. 그런 바람을 담은 <금사별본(金史別本)>이라는 위서도 만들어졌다.

나아가 요시쓰네가 제56대 세이와(淸和) 덴노의 후손이어서 세이와 겐지(淸和源氏)라 불린 일족의 일원이라는 데에 착안, 건륭제가 자기 조상은 요시쓰네이고, 청(淸)나라라는 이름은 세이와(淸和)에서 따왔음을 고백했다는 내용의 <도서집감(圖書輯勘)>이라는 책이 <고금도서집성(古今圖書集成)>에 들어 있다는 주장이 등장했다. 물론 가짜 책이고, 실제 내용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다.

메이지시대가 되자 이 전설은 한 번 더 규모를 키운다. 요시쓰네가 칭기즈칸이 됐다는 주장이 나온 것이다. 스에마쓰 겐초(末松謙澄)라는 사람이 이런 주장을 담은 논문을 영국에서 발표했다. 오야베 젠이치로(小谷部全一郎)가 이 주장을 받아들여 1923년에 <칭기즈칸은 미나모토노 요시쓰네다(成吉思汗ハ 源義經也)>라는 책을 출판했다. 센세이션이 일어났다. 오야베는 일본군이 러시아 혁명에 간섭하기 위해 시베리아에 주둔하던 1919년에 통역관으로 근무하던 인물이다.

이른바 ‘대륙낭인’이었던 오야베는 한반도 병합 이후 일본이 정복을 꿈꾸던 만주와 몽골을 헤매며 요시쓰네의 흔적을 찾아다녔고, 마침내 찾았다고 주장한다. 이 책에서는 불행한 삶을 산 한 인간이 상상 속에서 영웅을 만들어내 자기 자신과 동일시함으로써 자신의 정신적 상처를 치유하고자 하는 열망이 슬플 정도로 뚜렷하게 읽힌다. 필자는 1만년 전 한민족의 흔적을 중앙아시아에서 찾았다거나, 칭기즈칸이 한국인의 조상이라고 주장하는 일부 한국인들의 모습을 100년 전의 어떤 일본인에게서 본다.



원문보기: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code=210100&artid=201610072100005#csidx19c3355db85d7068ce17fc4ae2b11f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