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안부' 특종기사 쓴 일본인 기자
시사IN송지혜 기자입력2016.10.16. 02:39
하지만 2014년 1월, 일본 주간지 <주간 문춘>은 <아사히 신문> 우에무라 다카시의 특종이 ‘날조 기사’라고 비판했다. <주간 문춘>은 잘못된 기사로 한·일 관계뿐 아니라 일본의 국제적 이미지를 악화시켰다고 보도했다. 그해 3월, <아사히 신문>에서 조기 퇴직 후 대학으로 전직하려던 기자 우에무라 다카시의 계획은 좌절됐다. 대학으로 일본 극우 세력의 항의가 빗발쳤다. 이들은 그를 ‘매국노’라 비난했고, 그의 가족에게 ‘자살할 때까지 몰아붙이겠다’며 위협했다.
고 김학순 할머니가 증언하기 사흘 전, 처음 보도한 경위는?
1991년 8월10일, 서울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 윤정옥 공동대표 등 2명이 증언을 녹음한 테이프를 들려줬다. 이들이 ‘위안부’ 피해자를 상대로 진행한 구술 기록이었다. 약 30분 동안 “어떻게든 잊고 살자고 생각했지만 잊을 수가 없다. 당시의 일만 생각하면 분통이 터지고 눈물이 멈추지 않는다” “지금도 온몸에 소름이 돋는다” 같은 증언이 이어졌다. 나는 ‘위안부 피해자가 입을 열었고 정대협이 조사를 시작했다’는 취지로 기사를 썼다. 위안부가 존재했다는 건 공공연한 사실이었지만 피해자의 증언이 없어 증명하기가 어려웠다.
그전에도 위안부 문제를 추적했나?
그해 1년 전 여름, 위안부 피해자의 증언을 듣기 위해 2주 동안 한국에서 취재했다. 하지만 실패했다. 그때는 위안부 피해 사실을 말하는 할머니를 찾는 게 간단하지 않았다. 어렵사리 만나도 과거 일은 다 잊었다고 하더라. 실패를 거듭하면서도 나는 아픈 역사를 계승해야 한다는 사명감 같은 게 있었다.
첫 기사가 일본 사회에서 반향이 있었나?
안타깝게도 다른 일본 언론에 영향을 주지 못한 특종이었다. 한국 언론도 내 첫 기사를 외면했다. 국제사회에서 인권 문제로 대두된 건 보도 사흘 뒤 김학순 할머니가 실명으로 증언을 하면서다. 김학순 할머니 증언에 대해서도 일본 언론은 처음엔 크게 주목하지 않았다. <홋카이도 신문>을 제외하고 <마이니치 신문>과 <요미우리 신문>도 김 할머니의 기자회견 내용을 내보내지 않았다.
이 보도가 일본 내 극우 세력에게 공격의 빌미가 된 이유는?
기사 중에 ‘여자 정신대라는 이름으로 연행돼 일본군을 상대로 매춘 행위를 강요당했다’는 부분이 문제가 됐다. ‘여자 정신대’와 ‘종군위안부’를 혼동되게 썼다는 것이다. 위안부 문제가 불거졌을 때 일본 정부는 “업자들이 알아서 한 것”이라고 했다. 일본 정부가 조선인 위안부 여성을 강제로 연행한 게 아니라는 해명이었다. 민간업자가 인신매매를 했건 정부가 강제로 끌고 갔건 본인의 의사에 반해 끌려갔다는 사실이 가장 중요한 것 아닌가? 위안부 문제가 처음 불거졌을 때 한·일 양국 모두 정신대를 같은 의미로 사용했다. 나를 비판하는 <요미우리 신문>이나 <산케이 신문>의 당시 기사를 봐도, 정신대와 위안부를 혼용하고 있다.
또 다른 이유는? 가족사도 공격의 빌미가 되었다고 들었다.
다른 하나는 기사에 김학순 할머니가 위안부로 끌려가기 전 기생학교에 다녔다는 사실을 언급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거기에 들어간다고 반드시 위안부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녀에게 어떤 경력이 있다 한들 위안부가 되어 인권을 침해당한 피해자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는 것 아닌가. 나아가 내가 한국인 아내와 결혼(1991년 2월)했고, 장모가 양순임 태평양전쟁희생자유족회장이라는 사실도 공격의 이유가 됐다. 우익은 ‘우에무라가 장모의 영향을 받아 기사를 날조했다’는 식으로 선전했다.
일본 극우 세력에게 어떤 공격을 받았나?
2014년 1월 말에 발매된 <주간 문춘>(2월6일자)에서 ‘위안부 날조 <아사히 신문> 기자가 여자대학의 교수로’였다. 제목 그대로 위안부 기사를 ‘날조’한 기자가 고베쇼인 여자학원대학 교수가 된다는 내용이었다. 며칠 뒤 학교 사무국장이 면담을 요청했다. 대학에서는 “기사의 진위는 상관없다. 이대로는 학생 모집에 영향이 있고, 학교 이미지가 나빠진다”라고 말했다. 그렇게 고용 계약이 취소됐다. 기사가 나오고 일주일 정도 사이에 내 취임을 취소해달라고 요구하는 메일이 250통이나 왔다고 했다. 2012년 봄부터 강사로 일한 호쿠세이 학원대학에도 ‘해고하지 않으면 폭파하겠다’는 협박 글이 쏟아졌다. 심지어 가족에게도 고통이 이어졌다. 당시 17세이던 딸의 사진이 인터넷에 유출돼 ‘이 X의 애비 때문에 얼마나 많은 일본인이 고생했나’ ‘반드시 죽인다’ 같은 글이 게재됐다. 이때 상황이 반전되기 시작했다.
어떤 반전이었나?
어린 학생에 대한 도를 넘은 공격에 사람들이 일어섰다. 변호사들이 법적 대리를 자청했고, 한 시민은 페이스북에 ‘호쿠세이 학원대학을 격려해달라’고 호소했다. 전국의 학자·변호사·언론인 444명이 모여 ‘지지 마라 호쿠세이 모임’을 만들었다. 지난해 12월 강사 계약을 종료하겠다던 호쿠세이 학원대학에서도 1년 갱신하겠다고 발표했다. 지난 8월3일에는 딸이, 협박한 남성을 고소한 재판에서 승소했다. 도쿄 지방법원 판사는 “미성년자에 대한 악질적인 인신공격”이라며 딸에게 170만 엔(약 1800만원)을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지금도 ‘날조 기자’라는 오명을 받고 있는데?
‘날조 기자’라는 딱지는 사형선고와 마찬가지다. 날조는 사실이 아닌 것을 사실인 것처럼 왜곡하는 것이다. 기자가 정말 날조를 했다면 징계 처분을 받을 것이다. <아사히 신문>은 지난 8월 ‘위안부 문제를 생각한다’ 검증 특집 기사를 게재하고 ‘기자에 의한 날조는 일절 없었다’고 발표했다. 이후 나에 대한 악의적인 보도를 일삼는 매체와 극우 인사를 상대로 소송을 시작했다. 변호사들은 ‘우에무라 씨의 명예회복뿐만 아니라 일본 민주주의, 평화와 인권과 관계된 일이다’라며 나서주었다.
아베 정부 이후 일본에서 언론의 자유가 위축된 것 같다.
지난 4월 유엔 인권이사회는 데이비드 케이 특별보고관을 임명해 일본 내 언론·표현의 자유 실태를 직접 조사하게 했다. 케이 특별보고관은 나에 대한 온갖 위협이 벌어진 것도 표현의 자유를 저해한 사례라고 지적했다.
한국과의 인연은?
1978년 와세다 대학에 입학했는데 같은 기숙사에 재일 한국인 선배가 있었다. 그를 통해 한반도나 재일 조선인에 대한 차별 문제를 알게 되었다. 1980년 광주항쟁을 다룬 다큐멘터리를 보기도 했다. 김대중 사형 판결이 나올 때는 한국 대사관 앞 데모에 참여했다. 김대중 사형 집행에 반대한다는 글을 <아사히 신문>에 투고하기도 했다. 1987년 <아사히 신문> 입사 이후 연세대학에 유학했다. 1997년 서울 특파원이 된 뒤 김대중 대통령 당선 기사를 썼는데, 그때 기자가 되길 정말 잘했다고 느꼈다. 민주주의를 지키려는 다양한 한국 사람을 만났고 그 덕분에 지금까지 싸울 수 있었다. 행운이다.
송지혜 기자 song@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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