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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용과 지성적 책임
(제노파네스[Xenophanes]와 볼테르로부터
도용한)
나는 오늘 여기서 내가 튀빙겐(Tübingen)에서 행한 강연인 ‘관용과 지성적 책임(Toleration and Intellectual Responsibility)’이라는 주제를 반복하여 제시해달라는 요청 받았다. 그 강연은 학자이자 역사가이며, 무관용과 비인간성의 희생자가 된 관용과 인간성의 인물인 레오폴트 루카스(Leopold Lucas)에게 헌정된다.
1942년 12월 70의 나이에 레오폴트 루카스 박사와 그의 부인은 테레지언슈타트(Theresienstadt) 강제수용소에 감금되었는데 그곳에서 그는 랍비(rabbi)로서 일했다: 엄청나게 어려운 과제. 그는 그 수용소에서 10개월 후에 사망했다. 그의 아내인 도라 루카스(Dora Lucas)는 테레지언슈타트(Theresienstadt) 강제수용소에 13개월 더 감금되었지만 간호사로서 일할 수 있었다. 1944년 10월에 그녀는 18,000명의 다른 포로들과 폴란드로 보내졌다. 그곳에서 그녀는 살해되었다.
그것은 가공할 운명이었다. 그것은 수없이 많은 인간의 운명이었다; 다른 사람들을 사랑했던, 다른 사람들을 도우려고 노력했던 사람들; 다른 사람들에 의하여 사랑을 받았고 다른 사람들이 도우려고 노력했던 사람들. 그들은, 분리되고, 파괴되고 박멸된 가족들에 속했다.
여기서 나에게는 이 가공할 사건들에 관하여 말할 의도가 없다. 우리가 무엇이라고 말하려고 ㅡ 혹은 생각하려고 ㅡ 시도하든 그것은, 상상을 초월하는 사건들을 비하하려는 시도처럼 항상 보인다.a
1981년 5월 26일 튀빙겐 대학에서 시행되고 1982년 비엔나에서 (요청을 받아) 반복 시행된 강연.
원래 번역자의 주석: 로라 J. 베네트(Laura J. Bennett)의 몇 가지 세세한 수정사항과 함께, 멜리타 뮤(Melitta Mew)에 의하여 독일어에서 번역되었다. 운문은 저자에 의해서 번역되었다.
a 역주: 이 문장의 원문은 Whatever one may try to say - or even to think - it always seems like an attempt to belittle events that defy the imagination.인데 박영태 번역은 ‘사람들이 무엇을 말하려고 하든ㅡ또는 심지어 생각하려고 하든ㅡ이러한 상상을 애써 무시하는 것은, 항상 사건들
I
그러나 공포는 계속된다. 베트남에서 발생한 피난민들; 캄보디아에서 폴 포트 정권에 의한 희생자들; 이란 혁명의 희생자들; 아프가니스탄 난민들과 이스라엘에서 온 아랍 피난민들: 반복적으로 아이들과 여성들과 남성들이 발광하는 광신자들의 희생자가 된다.
이 기괴한 사건들을 예방하기 위하여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우리는 조금이라도 어떤 일을 할 수 있는가?
나의 답변은: 그렇다. 우리가 할 수 있는 많은 일이 있다고 나는 믿는다. 내가 ‘우리’라고 말할 때, 나는 지성인들은 다시 말해서 이념들에 관심을 갖는 인간들을 의미한다; 특히 읽고 아마도 쓰는 사람들.
우리 지성인들이 왜 도울 수 있다고 내가 생각하는가? 단지 우리 지성인들이 수천 년 동안 가장 지독한 해악을 끼쳤기 때문이다. 이념, 교설, 이론, 종교라는 ㅡ 모두 우리의 행위, 우리의 발명품 ㅡ 이름으로 저질러진 대량 학살: 지성인들의 발명품. 우리가 사람과 사람을 적대시키는 일을 ㅡ 흔히 최고의 의도를 지니고 ㅡ 중단만 한다면 많은 소득이 이룩될 터이다.a 우리가 이것을 중지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아무도 말할 수 없다.
십계명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이것이다: 살인하지 말라! 그 계명은 거의 윤리학 모두를 포함한다. 예를 들어 쇼펜하우어가 윤리학을 언명하는 방식은 이 가장 중요한 계명의 확대일 뿐이다. 쇼펜하우어의 윤리학은 간단하고 직접적이면서 분명하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아무도 해치지 말고 당신이 할 수 있는 모든 힘으로 모든 사람을 도우라!
그러나 모세가 심지어 십계명을 선언할 수 있기 이전에 시나이산에서 십계명을 가지고 처음으로 내려왔을 때 무슨 일이 발생했던가? 그는, 황금 송아지 숭배라는 지독한 이단을 목격했다. 이것을 보고 그는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에 관하여 모두 잊었고 그는 다음과 같이 소리쳤다 (출애굽기 32):
누가 여호와의 편에 있는가? 내게로 나아오라….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렇게 말씀하시기
를 너희는 각각 허리에 칼을 차고…. 각 사람이 그 형제를, 각 사람이 자기
을 축소시키려고 노력하는 것처럼 보인다.’이다.
a 역주: 이 문장의 원문은 If only we would stop setting man against man-often with the best intentions-much would be gained.인데 박영태 번역은 ‘우리가 사람들을 부추겨서ㅡ때로는 가장 선한 의도들을 가지고서ㅡ사람들에 대한 공격을 중단하도록 만든다면 많은 일들을 성취할 수 있을 것이다.’이다.
친구를, 각 사람이 자기의 이웃을 죽이라 하셨느니라...
이날에 백성 중에 삼천 명 가량이 죽임을 당하니라.
저것이 아마도 시작이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사태가 이런 방식으로 계속되었다는 것이다; 성지(聖地: Holy Land)에서, 그리고 나중에는 여기 서양에서. 그리고 기독교가 공식 종교의 위상에 도달한 다음 특히 서양에서. 기독교는 정통성을 위한 박해인 종교적 박해의 무시무시한 이야기가 되었다. 나중에 ㅡ 무엇보다도 17세기 및 18세기에 ㅡ 여전히 다른 이념들이 경쟁적으로, 박해와 잔인성과 공포를 정당화했다: 민족주의, 인종, 정치적 정통성 및 다른 종교들.
정통성과 이단이라는 관념 배후에는 가장 작은 악행들이 숨어있다; 지성인들이 특히 저지르기 쉬운 악행들: 오만, 독단에 가까운 자기만족. 지성적 허영. 이 모든 것들은 ㅡ 잔인성과 같은 주요 악행들이 아닌 ㅡ 작은 악행들이다.
II
나의 강연 제목인 ‘관용과 지성적 책임’은 계몽사조의 아버지인 볼테르의 논증을 언급한다; 관용을 옹호하는 논증. 볼테르는, ‘관용은 무엇인가?’라고 묻고 그는 다음과 같이 답변한다 (나는 그의 말을 의역하고 있다):
관용은, 우리가 지닌 인간적인 오류가능성을 깨달은 필연적인 결과이다: 오
류를 저지르는 것은 인간의 속성이어서 우리는 항상 오류를 저지른다. 그래
서 서로의 어리석음을 용서하자. 이것은 기본권의 첫 번째 원칙이다.
여기서 볼테르는 우리의 지성적인 솔직함에 호소하고 있다: 우리는 우리의 오류들을, 우리의 오류가능성, 우리의 무지를 인정해야 한다. 완벽하게 확신에 찬 미치광이들이 정말로 존재한다는 것을 볼테르는 완전히 알고 있다. 그러나 그들의 확신은 정말로 진솔한가? 자신들, 그들의 믿음들 그리고 저 믿음을 주장하는 그들의 이유들을 그들은 진솔하게 검토했는가? 그리고 자기-비판적인 태도는 모든 지성적 솔직성의 한 부분이 아닌가? 광신은 흔히, 우리가 억압해서 그리하여 겨우 반쯤 의식하는, 우리 자신이 인정하지 않은 반감을 삼켜버리려는 시도가 아닌가?
우리의 지성적 겸손을 볼테르가 호소함과, 무엇보다도 우리의 지성적 솔직성을 호소함으로써 그의 시대의 지성인들에게 커다란 인상이 각인되었다. 나는 그의 호소를 여기서 다시 서술하고 싶다.
관용을 지지하여 볼테르에 의하여 제시된 이유는, 우리가 서로의 어리석음을 용서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불관용이라는 어리석음인 흔한 어리석음은 관용하기가 어렵다고 볼테르는 전적으로 올바르게 알아낸다. 정말로 관용에 자체의 한계들이 발생하는 것은 여기이다. 우리가 관용되는 권한을 불관용에게 부여한다면, 우리는 관용과 입헌 국가를 파괴한다. 저것이 바이마르 공화국(Weimar Republic)의 운명이었다.
그러나 불관용과 별개로, 우리가 관용해서는 안 되는 여전히 다른 어리석음들이 있다; 무엇보다도 지성인들이 최신 유행을 따르도록 만드는 저 어리석음; 많은 저술가들이, 괴테가 파우스트에서 통렬하게 비판한 저 비밀스러운 문체인 (예를 들어, 마녀의 곱셈표) 모호하고 웅장한 문체를 채택하도록 만든 어리석음. 허세적이고 모호한 단어들의 문체이자 허풍스럽고 이해 불가능한 문체인 이런 글쓰기의 방식은 더 이상 칭찬을 받아서는 안 되고 심지어 지성인들에 의하여 용납되어서도 안 된다. 그것은 지성적으로 무책임하다. 그것은 건전한 상식을 파괴한다; 그것은 이성을 파괴한다; 그로 인하여 상대주의(relativism)로 묘사된 철학이 가능해진다; 모든 논지들은 다소 동등하게 옹호될 수 있다는 논지에 해당하는 철학. 무엇이든 합당하게 작용한다! 그리하여 상대주의라는 논지는 난장판을, 무법천지를 초래한다; 그리고 폭력의 지배를 초래한다.a
그리하여 나의 주제인 관용과 지성적 책임으로 인하여 나는 상대주의라는 문제에 도달했다.
이 시점에서 나는 상대주의를, 거의 항상 상대주의와 혼동되지만 사실상 상대주의와 전혀 다른 입장과 비교하고 싶다. 나는 이 입장을, 다원론(pluralism)으로서 흔히 기술했다; 그러나 이것은 상대주의라는 오해들을 초래했을 따름이다. 그리하여 나는 여기서 그것을, 비판적 다원론으로서 규정하겠다. 상대주의가 관용의 느슨한 형태로 출현하여 폭력의 지배를 초래하는 반면. 비판적 다원론은 폭력을 길들이는 데 기여할 수 있다b.
비판적 다원론으로부터 상대주의를 구분하기 위하여, 진리라는 관념이 결정적인 중요성을 띤다.
상대주의는, 모든 것이나 실제로 모든 것이 주장될 수 있어서 아무것도 주장될 수 없다는 입장이다. 모든 것이 진리이거나 아무것도 진리가 아니다. 그
a 역주: ‘폭력의 지배를 초래한다’의 원문은 and (leads) to the rule of violence인데 박영태 번역에 누락되었다.
b 역주: 이 문장의 원문은 Whilst relativism, arising from a lax form of toleration, leads to the rule of violence, critical pluralism can contribute to the taming of violence.인데 박영태 번역은 ‘상대주의는 엄격하지 않은 느슨한 형식의 관용으로부터 나왔기 때문에 무법적인 폭력의 규칙으로 인도하지만, 비판적 다원주의는 폭력에 대한 억제로 인도한다.’이다.
리하여 진리는 무의미한 개념이다.
비판적 다원론은, 진리 탐구를 이룩하기 위해서 모든 이론들에게 ㅡ 많을수록 더 좋다 ㅡ 다른 모든 이론들과의 경쟁이 허용되어야 한다는 입장이다. 이 경쟁은 이론들에 대한 합리적 토론을 본질로 하고 그 이론들을 비판적으로 제거하는 것을 본질로 한다. 토론은 합리적이어야 한다 ㅡ 그리고 저것은, 토론이 경쟁하는 이론들의 진리와 관련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비판적 토론의 과정에서 진리에 더 근접하는 듯이 보이는 이론이 더 좋은 이론이다; 그리고 더 좋은 이론은 열등한 이론들을 대체한다. 그리하여 성패에 걸린 것은 진리라는 문제이다.
III
객관적인 진리라는 개념과 진리 탐구라는 개념은 여기서 결정적인 중요성을 띤다.
진리 이론을 전개하여 객관적인 진리라는 개념을, 우리가 지닌 기본적인 인간적 오류가능성이라는 개념과 연결한 최초의 사상가는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인 제노파네스(Xenophanes)였다. 기원전 571년에 소아시아의 이오니아 지방에서 태어난 그는, 문학적 비판을 서술한 최초의 그리스인이었다; 최초의 도덕 철학자; 인간의 지식에 대하여 비판적인 이론을 전개한 최초의 철학자; 그리고 최초의 사변적 일신론자(一神論者: monotheist).
제노파네스는 사색의 한 가지 방법인 한 가지 전통의 창설자였는데 다른 사람들 가운데서 소크라테스, 에라스무스, 몽테뉴, 로크, 흄, 볼테르 및 레싱(Lessing)이 속한 전통이었다.
이 전통은 때때로 회의론 학파로 지칭된다. 그런 기술은, 그러나 쉽게 오해들을 초래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콘사이스 옥스퍼드 사전(Concise Oxford Dictionary)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있다: ‘회의론자(Sceptic)...종교적 교설들...의 진리를 의심하는 사람, 불가지론자,...무신론자;...혹은 냉소적인 견해들을 지닌 사람.’ 그러나 그 단어가 유래하는 그리스어 단어는 ‘경계하다’, ‘질문하다’, ‘사색하다’, ‘탐구하다’를 의미한다 (옥스퍼드 사전이 우리에게 알려주는 바와 같이).
회의론자들 (그 단어의 원래 의미에서) 가운데는 틀림없이 의심하는 많은 사람들과 혹시 불신하는 사람들이 또한 있지만 ‘회의적(sceptical)’과 ‘의심하는(doubting)’이라는 단어들을 동일시하는 치명적인 움직임은 아마도 스토아학파의 교활한 움직임이었는데 그 학파는 자체의 적대자들을 조롱하고 싶어 했다. 아무튼 제노파네스, 소크라테스, 에라스무스, 몽테뉴, 로크, 흄, 볼테르 및 레싱(Lessing)은 모든 유신론자들이거나 이신론자들(理神論者들: deists)이었다. 이 회의론적 전통에 속하는 모든 사람들이 ㅡ 추기경이었던 니콜라스 다 쿠사(Nicolas da Cusa)와 로테르담의 에라스무스(Erasmus of Rotterdam)를 포함하여 ㅡ 공통으로 지녔던 것과 내가 이 전통과 또한 공유하는 것은, 우리가 우리의 무지를 강조한다는 것이다. 이것으로부터 우리는 중요한 윤리적 결과들을 가리킬 수 있다: 관용 그러나 불관용에는, 폭력이나 잔인성에는 관용이 없다.
제노파네스는 직업에서 음유시인이었다. 그는 호머와 헤시오드의 제자였는데 그들 두 사람을 비판했다. 그의 비판은 윤리적이고 교육학적이었다. 그는, 신들(gods)이 훔치고 거짓말하고 간음을 저지르고 있다는 호머와 헤시오드의 주장에 반대했다. 이로 인하여 그는 신들(gods)에 대한 호머의 교설을 비판하게 되었다. 그 비판의 중요한 결과는, 오늘날 신인동형론(神人同型論: anthropomorphism)으로 지칭될 것의 발견이었다: 신들(gods)에 대한 그리스의 이야기들은, 신들(gods)을 인간으로서 재현했기 때문에, 진지하게 생각될 수 없다는 발견. 이 시점에 나는 아마도 운문 형태로 된 제노파네스의 논증들 중 몇 가지 논증들을 인용할 것이다 (내가 거의 직역하여):
에티오피아인들은 자기들의 신들(gods)의 코가 납작하고 검다고 말하고
반면 트라키아인들(Thracians)은 자기들의 신들(gods)의 눈은 푸르고
머리털은 붉다고 말하지.
그러나 소나 말이나 사자들에게 손이 있어서 그림을 그릴 수 있고
사람처럼 조각할 수 있다면, 말은 그들의 신들(gods)을 말처럼,
소는 소처럼, 그리고 각각은 종류별로 자체와 닮은꼴로 신들(gods)
의 형상을 만들 터이지.
제노파네스는 이렇게 논증하면서 자신에게 문제를 제기한다: 신인동형론(神人同型論: anthropomorphism)에 대한 그런 비판에 이어 어떻게 우리는 신들(gods)을 생각해야 하는가? 우리에게는, 그의 답변의 중요한 부분을 담고 있는 네 가지 단편 글이 있다. 제노파네스가, 첫 번째 계명(the First Commandment)을 번역할 때 루터처럼, 자신의 일신론(一神論: monotheism)의 언명에서 ‘신들(gods)’을 복수로 사용하여 피신할지라도, 일신론적(一神論的: montheistic)이다.
신들(gods) 중에서 홀로 그리고 인간들 중에서 홀로 하나의 신(神)이
가장 위대하다.
신체에서 인간들은 닮지 않고, 그의 생각에서도 인간을 닮지 않는다.
항상 그는 어느 때도 움직이지 않고 한 장소에 고착되어 머문다.
또한 이곳저곳으로 그가 배회하는 것은 적당하지 않다.
모든 것 위에서 노력도 없이 그는 사상과 의도로만 지배한다.
그는 모두를 보고 있다; 그리고 그는 모두를 생각한다; 그리고 그는 모두를
듣는다.
이것들은, 제노파네스의 사념적 신학(神學: theology)을 설명하는 단편 글이다.
완전히 새로운 이 이론이 제노파네스와 관련된 난제에 대한 해답이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사실상 그 이론은, 우주의 문제라는 모든 문제들 중에서 가장 큰 문제에 대한 해답으로서 그에게 떠올랐다. 지식 심리학에 관하여 어떤 것을 아는 누구도, 이 새로운 통찰이 그 심리학의 창조자에게 틀림없이 계시처럼 나타났다는 것을 의심할 수 없다.
이것에도 불구하고 제노파네스는, 자신의 이론이 추측일 뿐이라고 명백하고도 솔직하게 서술했다. 이것은 유례가 없는 자기-비판의 승리인데 자신의 지성적 솔직함과 겸손의 승리였다.a
제노파네스는 이 자기-비판을, 내가 생각하기에 그의 특징인 방식으로 일반화했다: 자신이 자신의 이론에 관하여 발견한 것이 ㅡ 그것이 지닌 직관적인 설득력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추측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 ㅡ 틀림없이 인간의 모든 이론들에 참이라는 것이 그에게는 명백했다: 모든 것은 추측일 뿐이다.b 내가 보기에 이로 인하여, 그가 자신의 이론을 추측으로서 간주하는 것이 쉽지 않았음이 드러난다.
제노파네스는 지신의 비판적인 지식이론을 ㅡ 모든 것은 추측이다 ㅡ 아름다운 6행 운문으로 언명했다:
그러나 확실한 지식에 관하여 아무도 그 진실을 알지 못했고,
또한 아무도 알지 못할 것이다; 신들(gods)에 대해서도c,
a 역주: 이 문장의 원문은 This was a victory of self-criticism without equal, a victory of his intellectual honesty and of his modesty.인데 박영태 번역은 ‘이러한 점이 특별히 특별히 대우해야 할 자기 비판의 성과물이며, 그의 지적 성실성과 그의 겸손함의 성과라고 할 수 있다.’이다.
b 역주: 이 문장의 원문은 everything is only conjecture.인데 박영태 번역에 누락되었다.
c 역주: ‘신들(gods)에 대해서도’의 원문은 neither of the gods인데 박영태 번역은 ‘그 어떤 신들
그리고 내가 말하는 모든 것들에 대해서도 여전히 알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누군가가 우연히 완벽한 진리를 발설할지라도,
그 자신이 그 진리를 알지 못할 터이다:
이유인즉 모든 것인 추측들로 짜인 그물일 뿐이기 때문에.
이 6행은 인간 지식의 불확실성이라는 이론 이상의 것을 담고 있다. 그 행들은 객관적 지식의 이론을 담고 있다. 이유인즉 제노파네스는 여기서 우리에게, 내가 말하는 것이 참일지도 모르는 반면, 나나 다른 누구도 그것이 참이라는 것을 알지 못할 것이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진리가 객관적임을 의미한다: 진리는, 내가 말하는 것이 사실들과 일치하는 것이다; 그 일치가 존재하는 것을 내가 실제로 알든 모르든.
게다가 이 6행은 매우 중요한 또 다른 이론을 담고 있다. 그 6행은 객관적인 진리와 주관적인 지식의 확실성 사이의 차이점에 대한 실마리를 담고 있다. 이유인즉 그 6행은, 심지어 내가 가장 완벽한 진리를 선포할 때조차도 나는 이것을 확실하게 알 수 없다고 단언하기a 때문이다. 왜냐하면 진리에 대하여 틀릴 수 없는 기준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결코, 혹은 거의 결코, 우리가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완전히 확신할 수 없다.
그러나 제노파네스는 인식론적 비관론자가 아니었다. 그는 탐구자였다; 그리고 그의 긴 생애 동안 그는 비판적인 재-검토를 통하여 자신의 추측들 중 많은 추측들과 더욱 특히 자신의 과학적 이론들을 향상시킬 수 있었다. 이것들은 그의 말이다:
신들(gods)은 처음부터 밝히지 않았다,
우리에게 모든 것들을;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탐구를 통하여, 우리는 배워서 사물들을 더 잘 알 것이다.b
제노파네스는 또한, ‘사물들을 더 잘 아는 것’으로 자기가 의미하는 것을 설명한다: 그는, 객관적인 지식에 대한 근사치를 의미한다: 진리에 대한 근접성이자 진리에 대한 유사성. 이유인즉 그는 자신의 추측들 중 한 가지 추측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기 때문이다:
도 알지 못할 것이라네’이다.
a 역주: ‘단언하기’의 원어는 affirm인데 박영태 번역은 ‘인정하기’이다.
b 역주: ‘알게 될 것이다’의 원어 표현은 we may...know인데 박영태 번역은 ‘알게 되었다네’이다.
이것들은 진리를 닮았다고 우리는 추측할 것이다.a
이 단편 글에서 ‘추측한다’라는 단어가 제노파네스의 일신론을 언급할 가능성이 있다.
제노파네스의 진리 이론과 인간 지식론에서 우리는 다음 요점들을 발견할 것이다:
1. 우리의 지식은 서술들로 구성된다.
2. 서술들은 참이거나 허위이다.
3. 진리는 객관적이다. 진리는 서술의 내용이 사실들과 일치하는 것이다.
4. 심지어 우리가 가장 완벽한 진리를 표현할 때도 우리는 이것을 알지 못한다 ㅡ 다시 말해서, 우리는 그것을 확실하게 알 수 없다.
5. ‘지식’은 통상적인 그 단어의 의미에서 ‘확실한 지식’이기 때문에. 지식은 있을 리가 없다. 추측성 지식이 있을 뿐이다. ‘이유인즉 모든 것은 추측들로 짜인 그물일 뿐이기 때문에.’
6. 그러나 우리의 추측성 지식에도 나은 것을 향한 진보가 있을 수 있다.
7. 나은 지식은 진리에 대한 나은 근사치이다.
8. 그러나 그것은 항상 추측성 지식으로 ㅡ 추측들로 짜인 그물 ㅡ 남는다.
제노파네스의 진리 이론을 이해하기 위하여, 제노파네스가 객관적인 진리와 주관적인 확실성을 분명하게 구분한다는 것을 강조함이 중요하다. 객관적인 진리는, 우리가 알든 ㅡ 그것을 확실하게 알든 ㅡ 모르든, 서술이 사실들과 일치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진리는 확실성이나 확실한 지식과 혼동되어서는 안 된다. 어떤 것을 확실하게 아는 사람은 진리는 아는 사람이다. 그러나 어떤 것을 확실히 알지 못하면서 그것을 어떤 사람이 추측하는 일이 종종 발생한다; 게다가 그의 추측이 사실들과 일치하기 때문에 그의 추측은 실제로 진리이다. 제노파네스는, 아무도 확실하게 알지 못하는 많은 진리들이 ㅡ 그리고 중요한 진리들 ㅡ 있다고 전적으로 올바르게 암시한다; 그리고 심지어 그 많은 진리들이 몇몇 사람들에 의하여 추측될지라도, 아무도 알 수 없는 많은 진리들이 있다고 암시한다. 그리고 그는 나아가, 아무도 심지어 추측조차 할 수 없는 진리들이 있다고 암시한다.
정말로 우리가 자연수의 무한수열을 말할 수 있는 언어들 중 어떤 언어에
a 역주: 이 문장의 원문은 These things, we may well conjecture, resemble the truth.인데 박영태 번역은 ‘우리가 당연하게 추측하게 되는 이것들은 진리와 유사하다네.’이다.
도, 분명하고 모호하지 않은 서술들이 (예를 들어: 17 = 627a + 2) 무한히 다양하게 존재한다. 이 서술들 각각은 참이거나, 거짓이라면 그 서술의 부정이 참이다. 그리하여 참인 다양한 명제들이 무한히 많다. 그리고 이것으로부터, 우리가 결코 알지 못할 무한히 많은 참인 명제들이 ㅡ 알려질 수 없는 무한히 많은 진리들 ㅡ 존재한다는 것이 귀결된다.b
심지어 오늘날에도 진리는 우리가 진리를 소유한다는 조건으로만 중요성을 띨 수 있다고 생각하는 철학자들이 많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진리를 확실하게 안다는 조건으로만. 그러나 추측성 지식의 존재를 안다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힘든 탐구에 의해서 우리가 도달할 수 있을 따름인 진리들이 있다. 우리의 길은 거의 항상, 오류를 통하여 구불구불 점진적으로 나아간다c. 그리고 진리가 없다면 오류가 있을 리 없다 (그리고 오류가 없으면 오류가능성이 없다).
IV
내가 방금 기술한 견해들 중 몇 가지 견해들은, 심지어 내가 제노파네스의 단편 글들을 읽기 이전에도, 나에게 다소 분명했다; 아마도 내가 그 단편 글들을 읽지 않았더라면, 나는 그 견해들을 이해하지 못했을 터이다.d 우리의 최고 지식도 추측성이라는 것, 그 지식은 추측들로 짜인 그물이라는 것은 아인슈타인을 통하여 나에게 분명해졌다.e 이유인즉 아인슈타인은, 뉴튼의 중력이론이 ㅡ 아인슈타인 자신의 중력이론과 꼭 마찬가지로 ㅡ 자체가 거둔 엄청난 성공에도 불구하고, 추측성 지식임을 지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뉴튼이 이론과 꼭 마찬가지로, 아인슈타인 자신의 이론도 진리에 대한 근사치로만 보인다.f
뉴튼과 아인슈타인의 업적 없이, 추측성 지식이라는 중요성이 나에게 분명해졌을 터이라고 나는 믿지 않는다; 그래서g 그 중요성이 2,500년 전에 어떻게
a 역주: ‘627’은 박영태 번역에 ‘287’이다.
b 역주: 이 문장의 원문은 And from this it follows that there exist infinitely many true propositions which we shall never be able to know-infinitely many unknowable truths.인데 박영태 번역은 ‘그러므로 우리가 전혀 인식하지 못할 수도 있는 서로 다른 참된 명제들ㅡ인식될 수 없는 진리들ㅡ이 무한히 많이 존재한다.’이다.
c 역주: ‘구불구불 점진적으로 나아간다’의 원어 표현은 winds its way인데 박영태 번역은 ‘그 앞길을 탐지한다’이다.
d 역주: 이 문장의 원문은 perhaps I would not have understood them otherwise.인데 박영태 번역은 ‘아마도 내가 이해했던 내용도 위의 내용과 다르지 않았다고 생각한다.’이다.
e 역주: 이 문장의 원문은 It had become clear to me through Einstein that our best knowledge was conjectural, that it was a woven web of guesses.인데 박영태 번역은 ‘우리의 최선의 지식이라는 것은 추측적이라는 사실과 그 지식은 어림짐작의 그물망이라는 사실은 아인슈타인을 통하여 분명하게 이해하게 되었다.’이다.
f 역주: 이 문장의 앞의 문장과 별개의 문장인데 박영태 번역은 앞의 문장과 연결하여 ‘...단지 진리에 대한 점근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날 뿐이라고 지적했기 때문이다.’이다.
제노파네스에게 분명해졌는지 나는 자문했다. 아마도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은 이러하다: 제노파네스는 처음에 호머의 우주 그림을, 내가 뉴튼의 우주 그림을
수용한 것과 꼭 마찬가지로, 수용했다. 그의 첫 번째 믿음은, 나에게서와 꼭 마찬가지로, 그에게서 산산조각이 났다: 그에게는 호머에 대한 아낙시맨더의a 비판을 통하여 산산조각이 났다; 나에게는 뉴튼에 대한 아인슈타인의 비판에 의하여 산산조각이 났다. 제노파네스는, 아인슈타인과 꼭 마찬가지로, 우주에 대하여 비판을 받은 그림을 또 다른 그림으로 대체했다; 그리고 두 사람 모두는, 우주에 대한 자신들의 새로운 그림이 단순히 추측임을 인식했다.
제노파네스가 나의 추측성 지식론을 2,500년이나 앞섰다는 깨달음으로 인하여 나는 겸손해지는 것을 배웠다. 그러나 지성적 겸손이라는 개념은 거의 그 만큼 오래전에 똑같이 선행되었다. 그 겸손은 소크라테스로부터 유래한다.
소크라테스는 회의론적 전통을 두 번째로 세웠고 훨씬 더 많은 영향을 미쳤다. 그는, 자신이 현명하지 않음을 아는 사람만 현명하다고 가르쳤다.
소크라테스와, 거의 동시에, 데모크리투스는 서로 독립적으로 동일한 윤리적 발견을 이룩했다. 두 사람 모두는 매우 유사한 단어들로 이렇게 말했다: ‘불의를 저지르는 것보다 불의를 당하는 것이 낫다.’
이 통찰로 ㅡ 적어도 우리에게 아는 게 얼마나 없는지라는 인식과 결합된다면 ㅡ 인하여 볼테르가 훨씬 나중에 가르친 바와 같이, 관용이 등장한다고 우리는 주장할 수 있다.
V
이제 나는, 지식에 대한 이 자기-비판적 철학의 현대적 중요성으로 선회하겠다.
먼저 다음과 같은 중요한 반론을 우리는 토론해야 한다. 제노파네스, 데모크리투스와 소크라테스에게는 아는 게 없었다는 것이 사실이라고 누군가는 말할 것이다; 그들이 자신들의 지식 부족을 인정했다는 것은 정말로 현명한 처사였다고; 그리고 아마도 그들이 지식 연구나 탐구의 태도를 취했다는 것은 훨씬 더 현명한 처사였다고. 우리는 ㅡ 혹은 더 정확하게 우리의 과학자들은 ㅡ 여전히 탐구가들이거나 연구가들이다. 그러나 오늘날 과학자들은 연구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발견하고 있기도 하다. 그리고 그들은 많은 것을 발견했다; 정말로 우리가 지닌 과학적 지식의 수량이 문제가 될 정도로. 그리하여 심지어 지
g 역주: ‘그래서’의 원어 표현은 and so인데 박영태 번역은 ‘그리고’이다.
a 역주: ‘아낙시맨더의’는 박영태 번역에 ‘자신의’이다.
지금도 우리가 아주 성실하게 우리의 지식 철학을 지식 부족이라는 소크라테스적 논지에 위에 계속해서 구축해야 한다는 것이 옳은가?
그 반론은 옳지만 다만 매우 중요한 추가적인 요점들에 비추어서이다.
먼저, 과학이 많은 것을 안다고 제안되었을 때, 이것은 옳지만 여기서 ‘지식’이라는 단어는 분명히 무의식적으로 사용되는데, 제노파네스와 소크라테스에 의하여 의도된 의미와 전혀 다르고 또한 현재 일상적인a 용법에서 ‘지식’이라는 단어에 부여된 의미와도 전혀 다르다. 이유인즉 ‘지식’에 의하여 우리는 통상적으로 ‘확실한 지식’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오늘이 화요일이라는 것을 내가 알지만 오늘이 화요일이라는 것을 나는 확신하지 못한다’라고 어떤 사람이 말한다면, 그는 스스로 모순을 말하거나 자신이 전반에서 말하고 있는 것을 자신의 서술 후반에서 철회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의 과학적 지식은 여전히b 확실한 지식이 아니다. 그 지식은 수정될 수 있다. 그 지식은, 시험될 수 있는 추측들로, 가설들로 ㅡ 기껏해야 가장 혹독한 시험에 부쳐졌지만, 여전히 추측들일 뿐인 추측들로 ㅡ 구성된다. 이것이 첫 번째 요점이고 그 요점은, 본질적으로 우리의 지식 부족에 관한 소크라테스의 강조를 완전히 정당화하는 것이고 그리고 우리가 완벽한 진리를 발설할 때조차도 우리가 발설한 것이 참임을 우리는 알 수 없다는 제노파네스의 논평을 완전히 정당화하는 것이다.
두 번째 요점은 우리가 오늘날 그렇게 많을 것을 알고 있다는 반론에 추가되어야 하는데 다음과 같다: 거의 모든 새로운 과학적 업적에 비례하여, 과학적 문제에 대한 모든 가설적 해답에 비례하여, 해결되지 않은 문제들의 숫자와 그 문제들의 난도(難度)가 증가한다. 사실상, 해결되지 않은 문제들은 해결책들보다 훨씬 더 빠르게 증가한다. 우리는 아마도, 우리와 가설적 지식이 유한한 반면, 우리의 무지는 무한하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저것만이 아니다: 해결되지 않은 문제들을 느끼는 진정한 과학자에게, 세계는 매우 구체적인 의미에서 점점 더 수수께끼가 되고 있다.
나의 세 번째 요점은 이렇다: 제노파네스나 소크라테스가 알던 것보다 오늘날 우리가 더 많은 것을 안다고 우리가 말할 때, 우리가 ‘안다’를 주관적인 의미에서 수용한다면 그것은 아마도 옳지 않다. 아마도 우리들 중 누구도 더 많은 것을 알지 못한다; 우리는 단지 다양한c 것들을 안다. 우리는 특정 이론들, 특정 가설들, 특정 추측들을 다른 이론들과 가설들과 추측들로 대체했다; 인정
a 역주: ‘일상적인’의 원어는 everyday인데 박영태 번역은 ‘여기서’이다.
b 역주: ‘여전히’의 원어는 still인데 박영태 번역에 누락되었다.
c 역주: ‘다양한’의 원어는 different인데 박영태 번역은 ‘다른’이다.
되는 바와 같이a, 대부분의 경우들에서 더 나은 것들로 대체했다: 진리에 대하
여 나은 근사치임이라는 의미에서 나은.
이 이론들, 가설들, 추측들의 내용은, 주관적이거나 개인적인 지식과 반대로, 객관적인 의미에서의 지식으로 지칭될 것이다. 예를 들어, 물리학 사전의 내용은 비개인적이거나 객관적인 ㅡ 그리고 물론 가설적인 ㅡ 지식이다: 그 내용은, 아마도 가장 박식한 물리학자가 아는 것을 멀리 뛰어넘는다. 어떤 물리학자가 아는 ㅡ 혹은, 더 정확하게, 추측하는 ㅡ 것은 그의 개인적이거나 주관적인 지식으로 지칭될 것이다. 두 가지 지식들 모두가 ㅡ 비개인적 및 개인적인 지식들 ㅡ 주로 가설적이어서 개선이 가능하다. 그러나 비개인적이거나 객관적인 지식이 현재, 어떤 인간의 개인적인 지식을 멀리 초월할 뿐만 아니라, 그 지식은 또한 매우 빠르게 전진하여 개인적이거나 주관적인 지식은 작은 분야들에서 그리고 짧은 기간에 그 지식을 따라잡을 수 있을 따름이고 주로 부단히b 낡은 것이 되고 있다.
이것이, 소크라테스가 여전히 옳은 네 번째 이유이다. 이유인즉 이 낡은 지식은, 거짓으로 밝혀진 이론들로 구성되기 때문이다: 낡은 지식은 지식이 아닌데, 적어도 그 단어의 평범한 의미에서 지식이 아니다.
VI
그래서 우리에게는, ‘나는 내가 거의 알지 못한다는 것을 아는데, 거의 알지 못한다’라는 소크라테스의 통찰이 여전히 극도로 유관하다는 ㅡ 아마도 소크라테스의 시대에서보다 훨씬 더 유관하다 ㅡ 것을 심지어 오늘날에도 밝히는 네 가지 이유들이 있다. 그래서 에라스무스와 몽테뉴와 볼테르 및 나중에는 레싱이 이 통찰로부터 도출한 저 윤리적 결론들을, 관용을 옹호하여, 도출할 충분한 이유가 우리에게 있다. 그러나 다른 결론들이 여전히 있다.
모든 합리적인 토론의, 다시 말해서 진리 탐구에서 수행되는 모든 토론의 토대를 형성하는 원칙들은 주로 윤리적 원칙들이다. 나는 그런 원칙들 세 가지를 서술하고 싶다.
1. 오류가능성의 원칙: 아마도 내가 틀렸고 아마도 당신이 옳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쉽게c 틀릴 수 있을 터이다.
a 역주: ‘인정되는 바와 같이’의 원어는 admittedly인데 박영태 번역은 ‘그래서’이다.
b 역주: ‘부단히’의 원어는 constantly인데 박영태 번역에 누락되었다.
c 역주: ‘쉽게’의 원어는 easily인데 박영태 번역은 ‘확실히’이다.
2. 합리적 토론의 원칙: 가능한 한 비개인적으로 우리는, 어떤 이론을 찬성하
거나 반대하는 우리의 이유들을 신중하게 고려하기를 시도하고 싶다: 확정 적이어서 비판 가능한 이론.
3. 진리에 대한 근사치라는 원칙: 개인적인 공격을 피하는 토론에서 우리는 거 의 항상 진리에 보다 가까이 갈 수 있다. 그 토론은 우리가 더 잘 이해하 도록 도움을 줄 수 있다; 심지어 우리가 합의를 이루지 못하는 저 경우 들에서도.
이 세 가지 원칙들이 인식론적 원칙들과 윤리적 원칙들 모두임을 주목할 가치가 있다. 이유인즉 그 원칙들은, 다른 것들 가운데서, 관용을 함축하기 때문이다: 내가 당신으로부터 배우기를 희망한다면, 그리고 진리를 위하여 내가 배우기를 원한다면, 나는 당신을 용납해야 할 뿐만 아니라 또한 당신을 잠재적으로 동등한 사람임을 인정해야 한다; 모든 사람의 잠재적인 통합과 평등은, 어떤 정도로든 문제들을 합리적으로 토론하려는 우리의 의지의 전제조건이 된다. 또한 중요한 것은, 토론이 합의에 이르지 못할 때조차도 우리는 토론으로부터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는 원칙이다: 토론은 우리의 오류들 중 몇몇 오류들을 조명함에 의하여 우리를 도울 수 있다.
그리하여 윤리적 원칙들은 과학의 토대를 형성한다. 근본적인 규제적 원칙으로서의 ㅡ 우리의 탐구를 이끄는 원칙 ㅡ 진리라는 개념은 윤리적 원칙으로서 간주될 수 있다.
진리 탐구와 진리에 대한 근사치라는 개념도 또한 윤리적 원칙들이다; 지성적 솔직성이라는 개념과 오류가능성이라는 개념처럼 윤리적 원칙들인데 그 솔직성과 오류가능성으로 인하여 우리는 자기-비판적 태도와 관용에 다다른다.
윤리 분야에서 우리가 배울 수 있다는 것도 또한 매우 중요하다.
VII
지식인에 대한, 특히 지성적 직업들에 대한 윤리의 사례를 바라봄에 의하여 나는 이것을 증명하고 싶다: 과학자들에 대한, 의사들과 법률가들과 기술자들에 대한 그리고 건축가들에 대한 윤리; 공무원들에 대한 그리고 가장 중요하게 정치가들에 대한 윤리.
나는 여러분들 앞에 새로운 직업윤리에 대한 몇 가지 원칙들을 제시하고 싶은데 관용 및 지성적 솔직함이라는 개념들과 밀접하게 연관된 원칙들이다.
이 목적에 관하여 나는 먼저, 아마도 심지어 풍자화 한편을 그려서 옛 직업 윤리를 규정하겠는데 그 윤리를 내가 제시하고 있는 새로운 직업윤리와 비교하기 위해서이다.
옛 직업윤리와 새로운 직업윤리 모두는, 인정되는 바와 같이, 진리와 합리성 그리고 지성적 책임이라는 개념들에 근거한다. 그러나 새로운 윤리가 객관적 지식 및 불확실한 지식이라는 개념에 근거하는 반면, 옛 윤리는 개인적인 지식 및 확실한 지식에 근거하고 그리하여 권위라는 개념에 근거한다. 이것은, 사고의 기초를 이루는 방식에서 그리고 결과적으로 진리와 합리성 그리고 지성적 솔직함 및 지성적 책임이라는 개념이 작동하는 방식에서 근본적인 변화를 의미한다.
옛 이상(理想: ideal)은 진리를 ㅡ 확실한 진리 ㅡ 소유하는 것이었고, 가능하다면, 논리적 증거에 의하여 진리를 보증하는 것이었다.
이 이상은, 오늘날까지 널리 수용되는데 사람에게서의 지혜인 현자라는 개념이다; 물론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의미에서의 ‘지혜’가 아니라 플라톤이 말하는 의미에서이다: 권위자인 현자; 권력을 주장하는 박식한 철학자: 철학자 왕.
지식인들을 위하여 옛 명령은 이렇다: 권위자가 되어라! 너의 분야에서 모든 것을 알라!
당신이 권위자로서 인정되자마자, 당신의 권위는 당신의 동료들에 의하여 보호될 것이다; 그리고 당신은 당신 동료들의 권위를 물론 보호해주어야 한다.
내가 여기서 기술하고 있는 옛 윤리에는 오류의 여지가 남지 않는다. 오류는 허용되지 않을 뿐이다; 결론적으로, 오류는 허용되지 않는다. 이 옛 직업적 윤리가 관용적이 아니라는 것을 강조할 필요는 나에게 없다. 게다가 그 윤리는 항상 지성적으로 정직하지 못했다; 그 윤리는 (특히 의학과 정치에서) 권위를 보호하기 위하여 오류를 은폐하기에 이른다: 오류는 숨겨질 것이다.a
VIII
이것이, 과학자들을 위해서만은 아니라도 주로 그들을 위해서, 우리에게 새로운 직업적 윤리가 필요하다고 내가 제안하는 이유이다.b 그 윤리가 다음과 같은 12가지 원칙들에 근거해야 한다고 나는 제안하는데 그 제안으로써 나는 이
a 역주: 이 문장의 원문은 mistakes will be swept under the carpet.인데 박영태 번역에 누락되었다.
b 역주: 이 문장의 원문은 This is why I suggest that we need a new professional ethics, mainly, but not exclusively for scientists.인데 박영태 번역은 ‘이상과 같은 내용이 새로운 직업 윤리가 필요하다고 제안하는 이유이다. 이 윤리는 특정하게 말하는 것은 아니지만 주로 과학자들에게 필요한 새로운 윤리이다.’이다.
강좌를 마치겠다.
1. 우리가 지닌 객관적이고 추측성인 지식은, 한 명의 사람이 통달할 수 있
는 것을 넘어 점점 더 멀리 나아간다. 그래서 ‘권위자들’이라는 것은 있을 리가 없을 따름이다. 이것은 또한 전문화된 주제들 내부에서도 참이다.
2. 모든 오류들이나 심지어 본질적으로a 예방될 수 있는 모든 저 오류들을 피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모든 과학자들은 지속적으로 오류들을 저지르고 있다. 우리가 오류를 피할 수 있고 그리하여 우리에게 오류를 피할 의무가 있다는 옛 개념은 수정되어야 한다: 그 개념 자체가 오류이다.
3. 물론 가능할 때마다 오류를 피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로 남는다. 그러나 그래서 우리는 오류를 피할 수 있고 무엇보다도 오류를 피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우리가 의식해야 하고 아무도 완벽하게 성공하지 못한다. 심지어 직관에 의하여 영향을 받는 가장 창조적인 과학자들도 성공하지 못한다: 직관으로 인하여 우리는 오도될지도 모른다.
4. 오류들은, 심지어 매우 잘 입증된 저 이론들에도 숨어있을 것이다; 그런 오류들을 찾는 것이 과학자의 구체적인 과제이다. 성공적으로 사용된, 잘 입증된 이론이나 기술이 오류라는 관찰은 중요한 발견일 것이다.
5. 그리하여 우리는 오류들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수정해야 한다. 우리의 실제적인 윤리의 개혁이 시작되어야 하는 곳은 여기이다. 이유인즉 옛 직업적인 윤리의 태도는 우리의 오류들을 은폐하여, 그 오류들을 비밀로 유지하여 가능한 한 빨리 그 오류들을 잊도록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6. 새로운 기본 원칙은, 오류 저지르기를 피하는 것을 배우기 위하여 우리가 우리의 오류들로부터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오류들을 은폐하는 것은 가장 큰 지성적 죄악이다.
7. 우리는 항상 오류들을 경계해야 한다. 우리가 오류들을 발견할 때 우리는 그 오류들을 확실하게 기억해야 한다; 우리는 사물들의 진실을 발견하기 위하여 그 오류들을 철저히 분석해야 한다.
8. 그리하여 자기-비판적 태도와 개인적인 솔직함의 유지가 의무의 문제가 된다.
9. 우리의 오류들로부터 우리가 배워야 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우리가 저지른 오류들을 지적할 때 우리는 수용하기를, 정말로 감사하며 수용하기를 또한 배워야 한다. 반대로 우리가 다른 사람들의 오류를 지적할 때, 우리 자신이 유사한 오류를 저질렀음을 우리는 항상 기억해야 한다. 그리고 가장 위대한
a 역주: ‘본질적으로’의 원어 표현은 in themselves인데 박영태 번역은 ‘자신의 능력으로’이다.
과학자들이 오류들을 저질렀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a 우리가 저지르는 오류들이 통상적으로 용서될 수 있다고 나는 말하기를 틀림없이 원하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의 경각심이 느슨해지게 내버려 두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반복적으로 오류 저지르는 것을 피하는 것은 인간적으로 불가능하다.
10. 우리 자신이 생각하면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오류들을 발견하여 수정하기 위하여 우리에게 다른 사람들이 필요하다는 (다른 사람들에게 우리가 필요한 것처럼) 것을 우리는 확신해야 한다; 특히 다른 환경에서 다른 관념들을 지니고 성장한 저 사람들. 이것으로 인하여 또한 관용이 생긴다.
11. 자기-비판이 최고의 비판임을 우리는 배워야 한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에 의한 비판이 필수임을 우리는 배워야 한다. 다른 사람들에 의한 비판은 자기-비판과 거의 마찬가지로 좋다.
12. 합리적인 비판은 항상 구체적이어야b 한다: 그 비판은, 특정 서술들인 특정 가설들이 허위로 보이는 혹은 특정 논증들이 무효인 구체적인b 이유들을 제시해야 한다. 그 비판은, 객관적인 진리에 더 근접한다는 개념에 의하여 통제를 받아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그 비판은 개인성을 벗어나야 한다.
나는 여러분에게 이 요점들을 제안들로서 간주한 것을 요청한다. 이 요점들에는, 윤리학의 분야에서도 또한 토론에 부쳐져서 개선될 제안들을 우리가 제시할 수 있음을 밝히려는 의도가 있다.
a 역주: 이 문장의 원문은 And we should remember that the greatest scientists have made mistakes.인데 박영태 번역은 ‘우리는 가장 위대한 과학자라 하더라고 오류를 범할 수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만 한다.’이다.
b 역주: ‘구체적’의 원어는 specific인데 박영태 번역은 ‘특정한’이다.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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