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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좋은 세상을 찾아서 III부 15장 서양은 무엇을 신뢰하는가?

이윤진이카루스 2021. 1. 7. 12:20

더 좋은 세상을 찾아서, III부 15장.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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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서양은 무엇을 신뢰하는가?

(열린사회와 그 적들[The Open Society]

저자로부터 도용한)

 

 

말하기가 미안하지만 나는 변명으로써 시작해야겠다: 나의 강연 제목에 대한 변명. 이 제목은 서양은 무엇을 신뢰하는가?’이다. ‘서양이라는 표현의 내력을 내가 생각할 때, 내가 그 표현을 피해야 했지 않았을까 나는 의아하다a. 슈펭글러(Spengler)의 저서 서양의 침몰(Untergang des Abendlandes)을 영어로 번역하여 제목을 붙인 것이 서양의 쇠퇴(The Decline of the West)임을 통하여 이 표현은 영국에서 일반적으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나는 물론 나 자신을 슈펭글러와 연계시키고 싶지 않는데, 그를 나는 주장되는 쇠퇴에 대한 허위 예언자로서 뿐만 아니라, 이것이 서양의 쇠퇴는 아닐지라도, 그를 실제적인 쇠퇴의 증상으로서도 또한 간주한다; 그의 예언들이 실제로 예시하는 것은 많은 서양 사상가들이 지닌 지성적 양심의 쇠퇴이다. 지성인의 불손이 승리한 것을, 지식을 갈망하는 대중을 허풍스러운 단어들을 사용하여 속이려는 시도가 승리한 것을 그 예언들이 예시하는데 요컨대 헤겔주의의 승리와 100여 년 전 독일 지성인들의 질병으로서 쇼펜하우어가 폭로하여 반대하여 싸운 헤겔적 역사주의의 승리를 예시한다.

나의 제목 선택과, 그 선택이 불러올 헤겔주의의 반향들로 인하여 한편으로는 나 자신과 다른 한편으로는 쇠퇴와 진보에 대한 예언들과 함께 헤겔적 철학을 분명히 구분함에 의하여 나의 강연을 나는 어쩔 수 없이 시작한다.

그리하여 먼저 나 자신을 나는 소개하고 싶다. 나는, 그 후 오랫동안 낡고

 

a 역주; ‘내가 그 표현을 피해야 했지 않았을까의 원어 표현은 I should not have avoided it인데 should have + 과거의 미실행 의무를 표현하기 때문에 문맥상 적절하지 않다. 원문의 뜻은 그 표현을 피하지 말았어야가 된다. I must not have used it이나 다른 표현이 적당할 것이다.

 

1958년 알베르트 후놀트(Albert Hunold)의 초청으로 취리히에서 행한 강연. 자유에 관한 교육. 외국 연구를 위한 슈바이처 재단의 사회과학 연구(Erziehung zur Freiheit. Sozial Wissenshaftliche Studien für das Schweizerische Institut für Auslandsforschung), 알베르트 후놀트 편집, 7, Erlenbach-Zürich/Stuttgart, 1950년에 독일어로 처음 발표됨.

그 천박함과 정말로 그 터무니없음이 지겹도록 밝혀진 운동인 계몽사조의 마지막 느림보 지지자이다. 이것은, 내가 합리주의자임을 그리고 내가 진리와 인간의 이성을 신뢰함을 의미한다. 이것은 물론, 인간의 이성이 전능하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합리주의자는, 우리를 적대하는 반합리주의자들이 우리를 믿게 만들려고 시도하는 사람이 절대 아니다: 순전히 합리적인 존재가 되고 싶은, 그리고 다른 사람들을 순전히 합리적인 존재들로 변화시키고 싶어 하는 사람. 저것은 매우 비합리적일 터이다. 합리적인 사람과 그리하여 내가 희망하는 바, 합리주의자는 이성이 인간의 생활에서 매우 겸손한a 역할을 한다는 것을 전적으로 잘 알고 있다: 그것은 비판적 고찰의, 비판적 토론의 역할이다. 이성이나 합리주의를 말할 때 내가 의미하는 것은, 비판을 통하여 다시 말해서 다른 사람들과의 비판적 토론 및 자기-비판을 통하여 우리가 배울 수 있다는 바로 그 신념이다b: 우리가 우리의 실수들로부터 배울 수 있다는 신념b. 합리주의자는, 다른 사람들의 의견들을 수용함에 의해서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관념들을 비판하도록 허용함과 다른 사람들의 관념들을 비판함에 의해서도 또한 다른 사람들로부터 기꺼이 배우고자 하는 사람이다: 다시 말해서 비판적 토론에 의하여 기꺼이 배우고자 하는 사람. 진정한 합리주의자는, 자신이나 다른 사람이 지혜를 독점한다고 믿지 않는다. 우리에게 항상 새로운 관념들이 필요하다는 것과 비판이 그 새로운 관념들을 만들어내지 않는다는 것을 진정한 합리주의자는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그는, 좋은 것과 나쁜 것을 우리가 구분하는 데 비판이 도움을 줄 수 있다고 믿는다. 그는 또한, 관념의 배척이나 수용이 결코 순전히 합리적인 문제일 수 없다는 사실을 인식한다. 그러나 비판적 토론만이, 우리가 많은 각도들에서 관념을 바라보고 그 관념을 공정하게 판단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 합리주의자는 물론, 모든 인간관계들이 비판적 토론에 의하여 완벽하게 탐구될 수 있다고 주장하지 않을 것이다; 저것이 다시 매우 합리적일 터라고 주장하지 않을 것이다.c 그러나 합리주의자는 아마도, 주고받기의 태도가 비판적 토론의 기저를 이루는데 또한 순전한 인간관계들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지적할 것이다. 이유인즉 합리주의자는, 자신이 자신의 합리성을 다른 사람들에게 의지하고 있음을 쉽게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비판적 태도가 다른 사람들에 의한 비판의 결과일 수 있을 뿐임을 그리고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 대한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 의한 비판에 의해서만 자기-

 

a 역주: ‘겸손한의 원어는 modest인데 박영태 번역은 신중하게 온당한이다.

b 역주: ‘신념의 원어는 conviction인데 박영태 번역은 사실이다.

c 역주: 이 문장의 원문은 that again would be most unreasonable.인데 박영태 번역에 누락되었다.

 

판적이 될 수 있음을 인정할 것이다. 아마도 합리적인 태도는 다음과 같이 말함에 의하여 최고로 표현될 것이다: 당신이 옳을지도 모르고 내가 틀렸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우리의 비판적 토론으로 인하여 누가 옳은지를 우리가 확정적으로 결정할 수 없을지라도, 우리는 토론 후에 문제들을 보다 분명하게 보기를 여전히 희망할 것이다. 실제로 중요한 것은 누가 옳은가가 아니라 오히려 우리가 객관적인 진리에 더 근접한다는 것을 우리가 잊지 않는다면, 우리 모두 서로로부터 배울 것이다. 우리 모두가 도모하고 있는 것은 객관적인 지식임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

이것이 개략적으로, 내가 나 자신을 합리주의자로 선언한다면 내가 의미하는 바이다. 그러나 내가 나 자신을 계몽사조의 마지막 느림보 지지자로서 말할 때, 나는 이것 이상의 것을 염두에 두고 있다. 지식이 우리를 자유롭게 만들 것이라는 지식을 통하여 우리가 경제적 및 정신적 노예상태로부터 우리 자신을 해방시킬 것이라는 페스탈로치(Pestalozzi)를 고무시킨 희망을 나는 염두에 두고 있다; 그리고 나는, 칸트가 지칭한 바와 같이, 우리의 독단적인 수면상태로부터 우리가 우리 자신을 일깨울 희망을 염두에 두고 있다. 그리고 특히 피히테와 쉘링(Schelling) 및 헤겔과 같은 특정 철학자들이 지성인들의 정직성을 약화시키기 시작한 이래, 대부분의 지성인들이 망각하는 경향을 지녔던 의무인 심각한 의무를 나는 염두에 두고 있다. 나는, 예언자로서의 자세를 결코 취하지 말라는 의무를 언급하고 있다.

이 의무에 반하여 특히 독일 철학자들이 중대한 죄를 지었다. 그들이 우주 및 삶의 가장 심오한 비밀들을 밝힐 수 있는 예언자들로서, 종교개혁가들과 같은 것으로서 보이기로 기대되었기a 때문에, 그들은 의심 없이 중대한 죄를 지었다. 다른 곳에서처럼 여기서도, 끊임없는 수요가, 불행하게도, 공급을 창조한다. 예언자들과 지도자들이 요청되었다; 예언자들과 지도자들이 발견되었다. 특히 독일어에서 이 반응이 초래한 것은 믿을 수 없을 정도이다b. 다행히도 영국에서는 이런 것들이 인기가 덜하다. 두 가지 언어들로 된 문헌에서 내가 상황을 비교한다면, 영국에 대한 나의 찬사는 무한해진다. 이와 관련하여, 계몽사조가 영국의 지성적 냉철함을c 영국의 지성적 풍조의 무미건조함인데d 그 무미건조함은 영국의 물리적 기후와 그렇게 묘하게 대조를 이룬다 유럽대

 

a 역주: ‘보이기로 기대되었기의 원어 표현은 expected to appear인데 박영태 번역은 나타나기로 되었기이고 강조되지 않았다.

b 역주: ‘믿을 수 없을 정도의 원어 표현은 scarcely credible인데 박영태 번역은 거의 신뢰할 수가 없다이다.

c 역주: ‘냉철함의 원어는 sobriety인데 박영태 번역은 각성이다.

d 역주: ‘무미건조함의 원어는 dryness인데 박영태 번역은 침착한 (지적 풍토)’이다.

 

륙으로 이전하려는 시도로써 볼테르의 저서 영국민족에 관한 서한(Letters

Concerning the English Nation)과 동시에 시작되었다는 것은 기억할 가치

가 있다. 이 무미건조함이자 냉철함은 자신의 동료 인간에a 대한 존경의 산물일 따름이다: 사람들은 동료 인간에게 자신의 관념들을 팔아먹으려고 시도하지 않고 또한 사람들은 자신의 관념들을 동료 인간에게 부과하려고 시도도 하지 않는다.

독일이라는 영역에서는 불행하게도 상황이 그렇지 않다. 독일에서는 모든 지성인이 자신의 세상에 대하여 궁극적 비밀들 모두를 소유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싶어 한다. 독일에서는 철학자들뿐만 아니라 경제학자들과 의사들과 특히 심리학자들 및 정신과 의사들은 종교들을 창립하는 사람들이 된다.

이 두 가지 태도들을 계몽사조를 추종하는 사람의 태도와 자칭 예언가의 자세 구분하는 특징이 있는가? 있다: 그 특징은 말하는, 언어를 사용하는 그들의 다른 방식이다. 계몽사조를 추종하는 사람은 가능한 한 간단하게 말하는 반면, 예언은 깊고 어둡고b 웅장하게 말한다: 계몽사조를 추종하는 사람은 자기 말이 이해되기를c 바란다. 이런 면에서 버트런드 러셀은 우리의 가장 위대한 거장이다. 심지어 우리가 버트런드 러셀과 의견을 같이할 수 없을 때도, 우리는 그를 항상 칭찬한다. 그는 항상 분명하고 간단하고 강력하게 말한다.

왜 계몽사조는 언어의 단순성을 그렇게 크게 귀중하게 여기는가? 왜냐하면 계몽사조는 통제하려는 게 아니라 계몽하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진정한 계몽사조의 사도인 참된 합리주의자는 심지어 설득하기를 원하지 않고 또한 심지어 확신시키기도 원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이 틀릴지도 모른다는 것을 항상 의식한다. 그리하여 그는 다른 사람의 독립성을d 너무 높이 존중하여 중요한 문제들에서 그를 통제하려고 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반론들과 비판들을 원한다. 그는 논쟁의 흥미진진함을 일깨워서 자극하고 싶어 한다. 이것이 그에게 귀중한 것이다. 자유롭게 의견을 교환함으로써 그가 진리에 더 잘 접근할 수 있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가 이런 과정과 같은 것을 귀중하게 여기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렇게 형성된 견해가 그에게 오류로 보일지라도 그는 그 과정을e 존중한다.

 

a 역주: ‘동료 인간의 원어 표현은 fellow man인데 박영태 번역은 동료들이다.

b 역주: ‘어둡고의 원어는 darkly인데 박영태 번역은 신비스럽게이다.

c 역주: ‘자기 말이 이해되기를의 원어 표현은 (he) wants to be understood인데 박영태 번역은 자신의 알을 이해하기를이다.

d 역주: ‘독립성의 원어는 independence인데 박영태 번역의 인격의 독립성이다.

e 역주: ‘과정의 원어는 it인데 박영태 번역은 그 견해이다.

 

계몽사조를 추종하는 사람이 통제하기를 원하지도 않고 설득하기를 원하지도 않은 이유들 중 한 가지 이유는 이렇다: 논리학이나 수학의 협소한 한계들

안에서만 논리적 증거들을 제시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그는 안다. 다소 지나치게 단순화하여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할 것이다: 어떤 것도 증명될 수 없다. 우리는 때때로 강력한 논증들을 제시할 것이고 우리는 항상 다양한 견해들을

비판적으로 조사할 수 있다; 그러나 수학을 제외하고 우리의 논증들은 결코 확정적이 아니다.a 우리는 항상 논증들의 그리고 근거들의 무게를 평가해야 한다; 그것들 중 어느 것이 더 큰 무게를 지니는지를 우리는 항상 결정하거나 판단해야 한다; 제시된 견해에 찬성하는 논증들과 근거들 혹은 그 견해에 반대하는 논증들과 근거들을 우리는 항상 결정하거나 판단해야 한다. 그리하여 진리 탐구와 의견 형성에는 항상 자유로운 결정이라는 요소가 담긴다; 그리고 인간의 의견을 귀중하게 만드는 것은 이 자유로운 결정이다.

계몽사조라는 철학은, 존 로크(John Locke)의 철학으로부터 개인적인 의견에 대한 이 높은 존중을 채택했다. 그것은 영국과 대륙의 종교전쟁들 및 종교갈등들의 직접적인 결과라고 우리는 추측할 것이다. 이 갈등들로 인하여 종국적으로 종교적 관용이라는 이념이 태어났는데 그 이념은, 흔히 주장되는 바와 같이 (예를 들어 아놀드 토인비[Arnold Toynbee]에 의하여) 전혀 부정적인 이념이 아니다. 종교적 관용이라는 이념은, 권태의 표현만이 아니고 공포에 의하여 종교적 순응을 강요하려는 시도가 가망 없는 일임을 인정하는 표현만이 아니다.b 반대로 종교적 관용은, 강요된 종교적 순종은 가치가 없다는, 자유롭게 수용된 신앙만 귀중할 수 있다는 긍정적인 통찰의 산물이다. 이 통찰로 인하여 우리는 모든 진솔한 신앙을 존중하게 되고 개인과 그 개인의 의견을 존중하게 된다. 그로 인하여 최종적으로, 이마누엘 칸트의 계몽사조의 가장 위대한 마지막 철학자 말로,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인정이 이루어진다.

칸트에 따르면 개인의 존엄성이라는 원칙은, 모든 사람과 그의 신념들을 존중하는 의무를 의미한다. 칸트는 충분한 이유를 들어, 영어로 황금률(Golden Rule)로 지칭되는 것과 이것을 밀접하게 관련시킨다. 그는 또한 이 원칙과 자유라는 이념의 밀접한 관련성을 인정했다: 필립(Philip) II세로부터 마르키 포사(Marquis Posa)에 의하여 요구되는 (쉴러[Schiller]의 작품 돈 카를로[Don

 

a 역주; 이 문장의 원문은 yet excepting mathematics, our arguments are never conclusive.인데 박영태 번역은 그러면서도 수학을 제외하고는 어떠한 논증들도 최종적으로 증명될 수가 없다.’이다.

b 역주: 이 문장의 원문은 It is not only the expression of weariness and of the recognition that the attempt to enforce religious conformity by terror is a hopeless undertaking.인데 박영태 번역은 이러한 관념은, 그러한 갈등이 사람을 지치게 만든다는 표현이면서, 폭력에 의해 강제로 종교적인 순종을 강화하려는 시도가 절망적이라는 것에 대한 깨달음의 표현이다.’이다.

 

Carlos]에서) 사상의 자유; 결정론자였던 스피노자가 양도 불가능한 자유로 믿었던 사상의 자유인데 독재자가 우리로부터 강탈하려고 시도하지만 강탈할 수 없는 자유.

이 마지막 요점에 관하여 우리는 스피노자의 의견에 더 이상 완전히 동의할 수 없다고 나는 믿는다. 사상의 자유가 결코 완벽하게 억압될 수 없다는 것은 아마도 참이지만, 자유로운 사상의 교환이 없다면 참된 사상의 자유가 있을 수 없기 때문에, 사상의 자유는 적어도 매우 큰 정도까지 억압될 수 있다. 우리의 이념들 중 어느 이념들이 타당한지를 알아내는 시험에 우리의 사상들을 부치기 위하여 우리에게는 다른 사람들이 필요하다. 비판적 토론은, 개인의 자유로운 사상의 초석이다. 그러나 이것은, 정치적 자유가 없으면 참된 사상의 자유가 불가능함을 의미한다. 그리하여 정치적 자유는, 개별적인 사람 각각에 의하여 그의 이성을 철저하게 사용하기 위한 조건이 된다.

그러나 정치적 자유는, 전통에 의해서를 제외하면 확보될 수 없는데 정치적 자유를 옹호하려는, 그 자유를 위하여 싸우려는 그리고 그 자유를 위하여 희생하려는 전통적인 의지가a 없으면 확보될 수 없다.

합리주의가 모든 전통과 충돌한다고 자주 주장되었다. 합리주의가 각각의 전통 및 여하한 전통도 비판적으로 자유롭게 토론하고 싶어 한다는 것은 참이지만 궁극적으로 합리주의 자체가 전통에 근거한다: 비판적 사고의, 자유로운 토론의, 간명한 언어의 그리고 정치적 자유의 전통.

나는 여기서 합리주의와 계몽사조에 의하여 내가 의미하는 바를 설명하려고 시도했고, 나 자신을 슈펭글러 및 헤겔주의자들로부터 분리시키기를 내가 원했기 때문에, 나는 나 자신을 합리주의자로 선언해야 했고 오랫동안 폐기되었고 철저히 유행에서 멀어진 철학적 운동인 계몽사조의 마지막 느림보 지지자로 선언해야 했다.

그러나 여러분은, 이것이 다소 지나치게 긴 도입부가 아닌지 물어볼 것이다. 이 모든 것은 우리의 주제와 무슨 관련이 있는가? 여러분은 여기서 서양과 서양이 신뢰하는 것에 관하여 듣게 되었다. 그러나 대신에 나는 나 자신과 내가 신뢰하는 것에 관하여 말하고 있을 따름이다. 내가 얼마나 더 길게 여러분의 인내심을 남용할 예정인지 여러분은 의아할 것이다.

그러나 사실상 나는 이미 우리의 주제의 한 가운데 있다. 내가 방금 이야기한 것처럼, 합리주의와 계몽사조라는 철학이 유행이 지난 이념들이라는 것과 서양이 의식적으로나 무의식적으로 이 이념들을 신뢰한다는 것이 우스울 터임

 

a 역주: ‘의지의 원어는 willingness인데 박영태 번역은 관습이다.

 

을 나는 매우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 대부분의 지성인들이 저 이념들을 경멸할지라도, 합리주의는 적어도 합리주의 없이 서양이 심지어 존재할 수도 없을 터인 이념이다. 이유인즉 서구 문명이 과학과 불가분하게a 연결된다는 사실보다 우리의 서구 문명에 더 특징적인 것은 없기 때문이다. 서구 문명은, 자연과학을 산출한 그리고 이 과학이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유일한 문명이다. 그러나 자연과학은 그리스 고전적 철학자들의 합리주의가 직접적으로 산출한 것이다: 소크라테스 이전의 그리스 고전적 철학자들.

나를 오해하지 마시라: 서구 문명이 합리주의를 의식적으로나 무의식적으로 신뢰한다는 것은 전혀 나의 논지가 아니다. 나중에 나는 서구의 믿음들에 관하여 더 많은 것을 말하겠다. 우리 서구 문명이 역사적으로 말해서 주로 그리스인들로부터 계승한 합리주의적 사고방식의 산물이라고 나는 여기서 서술하고, 나에 앞서서 다른 사람들이 서술했던 것처럼, 싶을 따름이다. 슈펭글러가 말하는 서양이나 우리가 말하는 서양을 우리가 이야기할 때마다 우리는 주로 우리의 서양 전통에서는 합리주의적 요소가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둔다.

합리주의를 설명하려고 시도함에서, 나의 동기는 유행하는 특정 반()-합리주의적 운동들로부터 나 자신을 거리를 두고자 하는 소망뿐만 아니라 많이 남용된 합리주의적 전통을 여러분 앞에 놓으려는 시도이기도 한데 그 합리적 전통은 우리의 서구 문명에 아주 결정적으로 영향을 미쳤다; 서구 문명을, 합리주의적 전통이 지배적인 역할을 한 유일한 문명으로서 우리가 규정할 정도까지. 다시 말해서 내가 서양을 말할 때 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설명하기 위하여 나는 합리주의를 말해야 했다. 그리고 동시에 합리주의가 그렇게 자주 왜곡되고 오해되기 때문에 나는 합리주의를 옹호해야 했다.

그리하여 내가 서양을 말할 때 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내가 아마도 설명했다. 그러나 서양을 말함에서 나는 주로 영국을 생각하고 있다고 나는 부언해야 하겠다. 아마도 이것은, 내가 영국에서 살기 때문에만 그렇지만 다른 이유들이 있다고 나는 믿는다. 영국은 홀로서 히틀러와 맞설 때 항복하지 않은 나라이다. 그리고 내가 서양은 무엇을 신뢰하는가?’라는 질문으로 이제 선회한다면, 영국에 있는 나의 친구들과 다른 사람들이 신뢰하는 저것들을 주로 생각하는 경향이 나에게 있을 것이다. 그들은 분명히 합리주의를 신뢰하지 않는다; 과학이 그리스 합리주의에 의하여 창조되었을지라도, 그들은 분명히 과학을 신뢰하지 않는다; 반대로, 합리주의는 많은 사람들에게 낡은 것으로 보이는 듯하다; 그리고 과학에 관해서는, 많은 서양인들에게 과학은 처음에 기묘한 것이

 

a 역주: ‘불가분하게의 원어는 inextricably인데 박영태 번역은 복잡하게이다.

 

되었고 원자폭탄 이후 나중에 기괴하고 비인간적인 것이 되었다. 그리하여 우리가 오늘날 신뢰하는 것은 무엇인가? 서구는 무엇을 신뢰하는가?

우리가 이 문제를 진지하게 관조하여 그 문제에 답변하려고 시도한다면, 우리가 무엇을 신뢰할지를 우리는 전혀 알지 못한다고 우리들 대부분은 아마도 고백해야 할 것이다. 우리들 대부분은, 이런저런 거짓 예언자들 신뢰했고 이 거짓 예언자들을 통하여 어떤 거짓 신(: god)을 또한 신뢰했다고 이런저런 시점에서 깨달았다. 우리 모두는, 우리의 신념들에서 격변들을 경험했다. 그리고 이 모든 격변들을 통해서도 견고하게 남았던 믿음들을 지녔던 극소수의 사람들도, 서양에 사는 우리가 무엇을 신뢰할 것인지 우리가 안다는 것이 오늘날 쉽지 않음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이 언급들은 아마도 매우 부정적으로 들릴 것이다. 서양에는 통일된 배경 이념인, 우리가 동구의 공산주의라는 종교에 자랑스럽게 대항할 수 있을 터인 통일된 버팀목 같은a 믿음이 없다는 것을 서양의 약점으로 생각하는 많은 선량한 사람들을 나는 알고 있다. 이 인기 있는 견해는 매우 이해가 가능하지만 나는 그 견해가 철저히 잘못되었다고 생각한다.

우리에게 한 가지 이념이 아니라 좋고 나쁜 많은 이념들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자랑스러워해야 한다; 우리에게 단일한 믿음, 하나의 종교가 아니라 많은 믿음들이나 종교들이 있다는 것을: 좋은 것들과 나쁜 것들. 우리에게 저런 여유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은 서양이 지닌 최고의 힘에 대한 징표이다.b 서양이 단일한 이념에, 단일한 믿음에, 단일한 종교에 합의한다면 그것은 서양의 종말이고 전체주의적 이념에 대한 우리의 항복이며 우리의 무조건항복일 터이다.

그다지 오래전이 아닌데 지금은 영국의 수상인 맥밀런(Macmillan) 씨가 당시 외상이던 때, 서양의 우리가 실제로 무엇을 신뢰하는지 흐루시초프(Khrushchev)에게서 질문을 받았다. 그는 다음과 같이 답변했다: ‘기독교를 믿습니다.’ 역사적 관점에서 우리는 그와 의견을 달리할 수 없다: 그리스의 합리주의를 제외하고, 기독교와 기독교 국가들 내부의 긴 갈등들과 싸움들만큼 많이 서양의 이념들에 영향을 미친 것은 없다.

그러나 나는 맥밀런의 답변이 틀렸다고 생각한다. 물론 우리들 가운데는 선량한 기독교인들이 있다; 그러나 기독교적이라고 솔직하게 그리고 진지하게 지칭될 수 있는 국가가 있는가, 정책이 있는가? 그런 정책이 있을 수 있는가? 오히려 서양의 전통들에 매우 깊은 영향을 미친 것은, 교회와 세속 권력 사이의 긴 싸움과 세속적인 권력에 대한 교회의 주장의 패배가 저 역사적 사실들

 

a 역주: ‘통일된 버팀목 같은의 원어 표현은 unified supporting인데 박영태 번역은 버팀목이 되는이다.

b 역주: 이 문장의 원문은 It is a sign of the supreme strength of the West that we can afford that.인데 박영태 번역은 우리가 그러한 것들을 산출해내었다는 것이 서구의 가장 큰 장점을 말해준다.’이다.

 

중 한 가지 사실이 아닌가? 그리고 기독교는 단일한, -정의된 이념인가?a 이 이념에 대하여 양립 불가능한 많은 해석들이 있지 않은가?

그러나 이 질문들보다 아마도 훨씬 더 중요한 것은, 칼 마르크스 이래 모든 마르크스주의자처럼 흐루시초프가 틀림없이 준비하고 있던 답변이다. ‘당신들은 전혀 기독교도들이 아니다, 당신들은 자신을 기독교도라고 부를 뿐이다; 진정한 기독교들은 우리인데, 자신을 기독교도들이라고 지칭하지 않고 공산주의자들이라고 지칭하는 우리다. 이유인즉 우리가 억압을 받는 사람들을 위하여, 노동을 하고 무거운 짐들을 나르는 사람들을 위하여 투쟁하는 반면, 당신들은 악마(Mammon)를 찬양하기 때문이다라고 모든 공산주의자는 답변할 것이다.

그런 답변들이 항상 진정한 기독교도들에게 감명을 주었다는 것과 서양에서 기독교적 공산주의자들이b 항상 존재했고 존재한다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1942년에 브래드포드의 주교(Bishop of Bradford)가 우리의 서구 사회를 사탄의 업적으로서 기술하고 기독교의 모든 신실한 종들에게 우리 사회의 파괴를 위하여 그리고 공산주의의 승리를 위하여 일하라고 요구했을 때, 그 주교의 신념이 지닌 솔직성을 나는 의심하지 않는다. 그때부터 스탈린의 악마론과 그의 부하 고문 자행자들은c 공산주의자들 자신에 의하여 용납되었고, 훨씬 더 나아가 얼마 동안 스탈린의 악마론의 논지는 그들의 일반적인 당 노선의 필수적인 부분이었다. 그러나 이전 브래드포드의 주교와 동일 방식으로 여전히 생각하는 신실한 기독교도들이 있다. 맥밀런처럼 우리가 우리의 경우를 기독교에 근거시킬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의 사회는 합리주의적 사회가 아닌 것처럼 기독교 사회가 아니다.d

이것은 전적으로 이해될 수 있다. 기독교는 우리로부터, 성인들(聖人: saints)만 도달할 수 있는 행동과 사고의 순수성을 요구한다. 이것이, 기독교 정신으로 가득한 사회를 건설하는 많은 시도들이 실패한 이유이다. 그 시도들은 항상 그리고 불가피하게 불관용을, 광신주의를 초래했다. 로마와 스페인이 이 이야기를 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제네바와 취리히 그리고 수많은 미국의 기독교-공산주의적 실험들도 이 이야기를 할 수 있다. 마르크스주의적 공산주

 

a 역주: 이 문장의 원문은 And is Christianity a single, well-defined idea?인데 박영태 번역은 그리고 기독교는 하나의 단일한, 절 정의된 사상이 아닌가?’이다.

b 역주: ‘공산주의자들의 원어는 communists‘인데 박영태 번역은 공동체들이다.

c 역주: ’스탈린의 악마론과 그의 부하 고문 자행자들의 원어 표현은 the satanism of Stalin and his tortures인데 박영태 번역은 스탈린의 악마적 행위와 그의 억압적인 고문들이다.

d 역주: 이 문장의 원문은 Ours is not a Christian society, any more than it is a rationalist society인데 문맥상 의미가 우리의 사회는 기독교적 사회라기보다는 합리주의 사회이다라면 원문 표현이 올바르지 않다.

 

의는, 지구상에 천국을 실현하려는 모든 저 시도들의 가장 지독한 사례일 뿐이다: 그것은, 지구상에 천국을 감히 실현하려는 사람들이 얼마나 쉽게 지옥을 이룩할 수 있는지를 우리에게 가르치는 실험이다.

공포와 비인간성을 초래하는 것이 기독교의 이념이 아니라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a. 오히려 공포와 비인간성을 초래하는 것은, 하나의 통합된 이념이라는 이념이자 하나의 통합되고 배타적인 믿음에 대한 믿음이다. 그리고 나 자신을 내가 합리주의자로 지칭했기 때문에, 합리주의의 테러행위라는 로베스피에르(Robespierre)의 이성에 대한 종교적 테러행위가 가능하다면 기독교적이거나 모하메드적이거나 유태교적 광신주의보다 훨씬 더 나쁘다는 것을 지적하는 것을 나의 의무로서 나는 간주한다. 진정으로 합리주의적인 사회적 질서는, 진정으로 기독교적인 사회적 질서와 같이 불가능할 뿐이다; 그리고 불가능한 것을 실현하려는 시도는 여기서 틀림없이 적어도 동등하게 가공할 분노들을 초래한다. 로베스피에르의 공포에 관하여 우리가 말할 수 있는 최선의 것은, 그 공포가 오랫동안 지속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한 가지 고무적인 이념의 지도를 받아서 서양을 통합하려는 소망과 필요성을 지닌 저 좋은 의도를 지닌 열성분자들은, 자신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 자신들이 불장난을 하고 있다는 그들을 매혹하는b 것은 전체주의적 이념이라는 사실을 그들은 의식하지 못한다.

아니지c, 서양이 자랑스러울 것은 이념의 통합이 아니라 우리가 지닌 많은 이념들의 다양성이다: 우리가 지닌 이념들의 다원성d. ‘서양은 무엇을 신뢰하는가?’라는 물음에 우리는 이제 첫 번째이자 예비적인 답변을 발견할 수 있다. 이유인즉 서양에 사는 우리는 많아서 다양한 것들을, 참인 많은 것들과 거짓인 많을 것들을 우리가 신뢰한다고 우리는 자랑스럽게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훌륭한 것들과 나쁜 것들을 신뢰한다고.

그리하여 나의 첫 번째이자 예비적인 답변은, 거의 사소한 사실을 지적하는 것이다: 우리는 아주 다양한 것들을 신뢰한다. 그러나 이 하찮은 사실은 매우 중요하다.

물론 의견에 대한 서양의 관용을 부인하는 많은 사람들이 있다. 예를 들어 버나드 쇼(Bernard Shaw), 우리의 시대와 우리의 문명이 다른 것들과 꼭

 

a 역주: ‘두말할 필요가 없다의 원어 표현은 goes without saying인데 박영태 번역은 반드시 말하고 넘어가야 하겠다이다.

b 역주: ‘매혹하는의 원어는 attracts인데 박영태 번역은 유인하여 결집시키는이다.

c 역주: ‘아니지의 원어는 No인데 박영태 번역은 그렇다이다.

d 역주: ‘우리가 지닌 이념들의 다원성의 원어 표현은 the pluralism of its ideas.인데 박영태 번역에 누락되었다.

 

마찬가지로 비관용적이라고 반복해서 주장했다. 그는, 우리의 미신의 그리고 우리의 독단들의 내용만 변했음을 증명하려고 노력했다: 종교적인 독단 대신에

이제 우리에게는 과학적 독단이 있다고; 그리고 그 과학적 독단에 감히 반대하려는 모든 사람은, 과거의 지오르다노 브루노(Giordano Bruno)처럼, 화형에 처해질 것이라고a. 그러나 버나드 쇼가 자신의 의견들로 자신의 동료들에게 충격을 주려고 모든 힘을 다했을지라도, 그의 동료들은 그를 용서했다. 그의 의견이 진지하게 고려되지 않았다는 것이나 그의 의견은 어릿광대의 자유일b 뿐이었다는 것은 또한 사실이 아니다. 반대로 그가 자신의 동시대인들에게 즐거움을 선사했을지라도, 그 동료들 중 많은 사람들에 의하여 그는 매우 진지하게 생각되었다; 특히 서양의 비관용에 관한 그의 이론은 아주 영향력이 컸다. 쇼의 영향력이 지오르다노 브루노의 영향력보다 훨씬 컸다는 것을 나는 의심하지 않지만, 그는 90살이 넘어서 화형장에서가 아니라 엉덩이뼈가 부러져서 죽었다.

그리하여 나는, 우리의 질문에 대한 나의 첫 번째 예비적 답변을 수용하고 우리의 서양 도처에서 다양한 사람들이 신뢰하는 많은 다양한 것들로 선회할 것을 제안한다.

좋은 것들과 나쁜 것들이 있는데, 적어도 저것이 그것들이 나에게 보이는 방식이다. 그리고 좋은 것들을 더 상세하게 다루기를 내가 원하기 때문에 나는 나쁜 부분을 먼저 빼버리고 싶다.

우리는 서양에서 많은 거짓 예언자들과 많은 거짓 신들(gods)을 경험한다. 권력을 신뢰하여 다른 사람들을 노예화하는 것을 신뢰하는 사람들이 있다. 역사적 필연성을 신뢰하는 사람들이 있다; 역사법칙을 신뢰하는 사람들인데 그 법칙을 우리는 추측할 수 있고 그 법칙으로 인하여 우리는 미래를 예견할 수 있고 시간에 맞춰 시류에 편승할 수 있다c. 진보를 예언하는 사람들과 반작용을 예언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그들 모두에게는 충실한 제자들이 붙좇는다. 성공이라는 그리고 효율(效率: efficiency)이라는 여신들(女神: goddesses)을 예언하는 사람들과 신뢰하는 사람들이 또한 있는데 특히 어떤 대가를 치르고도 생산의 증가를, 경제적인 기적을 그리고 자연을 지배하는 인간의 능력을 신뢰하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지성인들 가운데서 가장 큰 영향력은, 비관론을 신음하며 내뱉는 예언자들에게 있는 듯하다.

 

a 역주: 이 문장의 가정법 과거로 표현되면서 현재나 미래를 표현하는데 박영태 번역은 처해졌을 것이다이다.

b 역주: ‘자유의 원어는 freedom인데 박영태 번역에 누락되었다.

c 역주: ‘시간에 맞춰 시류에 편승하다의 원어 표현은 jump on the bandwagon in time인데 박영태 번역은 때에 맞추어 승산이 있는 정당 후보자를 지지하도록이다.

 

오늘날 모든 동시대 사상가들은 적어도 자신들의 훌륭한 평판에 신경

쓰는 사상가들 한 가지 요점에 동의하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가 다소 비참

한 시대에 틀림없이 범죄적인 시대에, 아마도 심지어 최악의 시대에a 산다는 것; 우리가 심연의 언저리를 걷고 있다는 것; 그리고 이 지경까지 우리를 데려온 것은 우리의 사악함, 아마도 심지어 우리의 원죄라는 것. 우리는 영리해졌다고b 아마도 너무 영리해졌다 버트런드 러셀은 (내가 매우 높이 생각하는) 말한다; 그러나 도덕성에 관한 한, 우리는 충분히 훌륭하지 이라고. 우리의 지성이 우리의 도덕적 의식보다 더 빨리 발전한 것은 우리의 불행이라고. 그리하여 우리는 원자폭탄들과 수소폭탄들을 만들 정도로 충분히 영리했다고; 그러나 도덕적으로 우리는 너무 미숙해서 세계국가를 건설하지 못했는데 그 국가만이 우리를 전체-파괴적인 전쟁으로부터 구할 수 있다고.

우리 시대의 이 유행하는 비관론적 견해가 잘못되었다고 내가 믿는다는 것을 나는 고백해야겠다.c 내가 생각하기에, 그것은 위험한 유행이다. 나는 틀림없이 세계국가나 국가들의 세계연합에 반대하여 말하고 싶지 않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국제연합의 실패를, 이 국가들의 개별적인 시민들의 부분에서의 도덕성 결여의 탓으로 비난한다는 것은 완전히d 틀렸다. 반대로, 어떻게 그런 희생을 하는가가 우리의 목표에 부합하는지를 우리가 알 수만 있을 터이라면, 서양의 우리 모두에게는 지구상에서 평화를 확보하기 위하여 가능한 희생을 할 의지가 있을 터이라는 게 나의 신념이다. 이 희생에 의하여 그 사람들이 인류에게 평화를 확보할 수 있을 터이라면 기꺼이 자신들의 목숨을 바치지 않을 터인 사람은 없을 것이라고 나는 개인적으로 예상한다. 이렇게 할 결의가 없는 사람들이 있을 것임을 나는 부인하고 싶지 않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은 비교적 드물다고 나는 정말로 주장하고 싶다. 우리 모두는 분명히 평화를 원한다. 그리고 저것은, 우리가 어떤 대가를 치르고서도 평화를 우리가 원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 강좌를 핵무기라는 문제에 바치는 것은e 나의 의도가 아니다. 영국에서는 이 문제들에 관한 강좌가 없고, 모든 사람이 버트런드 러셀을 사랑하고 칭

 

a 역주: 이 부분의 원어 표현은 in a positively criminal time, possibly even in the worst of all times인데 박영태 번역은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범죄가 많은 시대, 가능적으로는 모든 시대들 중에서 가장 최악의 시대이다.

b 역주: ‘영리한의 원어는 clever인데 박영태 번역은 지능이 빠르게 발전했다이다.

c 역주: 이 문장의 원문은 I have to confess that I believe this fashionable pessimistic view of our time to be mistaken.인데 박영태 번역은 나는 지금 우리 시대에 유행하는 이러한 비관주의적 견해를 믿는다는 사실을 시인해야만 하겠다.’이다.

d 역주: ‘완전히의 원어는 quite인데 박영태 번역에 누락되었다.

e 역주: ‘바치는 것의 원어는 devote인데 박영태 번역은 기여하기이다.

 

찬할지라도, 심지어 그도 이 문제들을 진지하게 토론되도록 만드는 데 성공하지 못했다. 예를 들어 나의 제자들이 이 주제에 관하여 강좌를 제공하도록 그를 초청하였고 그는 열광적인 환영을 받았다. 나의 제자들은 그에 관하여 열성적이었고 나의 제자들은 매우 흥미롭게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으면 심지어 토론 기간 동안에 말을 했지만 내가 아는 한, 그 다음에 나의 제자들은 그 주제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나의 학술회의에서 자연철학에서 정치윤리학까지 상상 가능한 여하한 문제에 대하여 가능한 가장 자유로운 토론이 있는 어떤 학생도 러셀이 제기한 문제를 다룬 적이 없다. 유럽 대륙에서는 상황이 전혀 다르다고 나는 이해한다.

8년 전 [다시 말해서, 1950년에] 자신이 아마도 원자폭탄을 만들려는 결정을 실현하기 위하기 다른 누구보다도 더 많은 일을 한 어떤 원자물리학자로부터 미국에서 처음으로 내가 러셀의 논증들을 들었음을 알면 여러분은 아마도 흥미를 느낄 것이다. 그의 견해는 다음과 같았다: 항복이a 원자폭탄 전쟁보다 낫다. 인정되는 바와 같이, 인류는 항복한 후에 최악의 시대를 통하여 살아가야 할 터이다; 그러나 미래의 어느 때 자유가 회복될 것이라고 그는 말했다. 그러나 원자폭탄 전쟁은 모든 것의 종말일 터이다. 동일한 개념이 다른 사람들에 의하여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표현되었다: 원자폭탄에 의하여 죽는 것보다 러시아의 독재체제 하에서 사는 것이 낫고 훨씬 더 명예로울b 터이다.

이 의견을 내가 존중하는 반면c, 대안이 잘못 표현되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대안이 틀렸는데 왜냐하면 대안이, 항복하지 않고 핵전쟁을 피하는 가능성을 고찰하지 않기 때문이다. 결국 핵전쟁이 불가피하다는 것을 우리는 알지 못하고 사실상 우리는 이것을 알 수 없다. 또한 항복한다고 핵전쟁이 발생할지 아닐지를 우리는 알지 못한다. 우리 앞에 놓인 참된 대안을 그리하여 다음과 같다: 핵전쟁의 가능성이나 개연성을 줄이기 위하여 우리가 항복할까 아니면, 필요하다면, 모든 수단들을 사용하여 우리가 우리 자신을 보호할까? 심지어 이 대안에도 매우 어려운 결정이 포함된다. 그러나 그 대안은 평화 당파와 전쟁 당파 사이의 결정이 아니다.d 오히려 그 대안은, 한편으로는 핵전쟁의 개연성 정도를 자체가 충분히 정확하게 추정할 수 있어서 위험이 너무 크다고 너무 커서 항복이d 낫다고 생각하는 당파와 평화를 또한 원하지만 위험을 감

 

a 역주: ‘항복의 원어는 capitulation인데 박영태 번역은 무조건 항복이다.

b 역주: ‘훨씬 더 명예로울의 원어 표현은 even more honourable인데 박영태 번역은 더 훌륭할이다.

c 역주: ‘이 의견을 (내가) 존중하는 반면의 원어 표현은 While respecting this opinion인데 박영태 번역은 이러한 견해를 고려하면서도이다.

d 역주: ‘항복의 원어는 capitulation인데 박영태 번역은 항목으로 인쇄 오류로 보인다.

 

수하지 않고는 자유를 지킬 수 없다는 것을 또한 기억하는 당파 사이의 결정이다;a 자신의 입장이 거의 가망이 없을 때 처칠이 히틀러 앞에서 항복하지 않았다는 것을 기억하는; V-무기들을 알고 있던 사람들에게 히틀러가 원자 무기

들을 언급하고 있다고 두려워할 이유가 있을지라도 히틀러가 그 무기들을 발표했을 때 아무도 항복을 고려하지 않았다는 것을 기억하는: 그리고 예를 들어 작은 스위스가 자체의 분명한 군사적 약세에도 불구하고 단호한 군사적 중립으로 히틀러를 막은 것을 기억하는.

내가b 여기서 지적하고 싶은 것은, 두 당파들 모두가 이 토론에서 전쟁에 반대한다는 것이다. 그 당파들은, 무조건적으로 전쟁에 반대하지 않는 것에 의견을 같이한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두 당파들 모두는 평화뿐만 아니라 자유를 신뢰한다.

이 모든 것을 두 당파들은 공유한다. 불화는 다음과 같은 질문으로써 시작

된다: 개연성의 등급들을 우리가 계산하여 그 등급들에 의존할 것인가 아니면 우리의 전통을 따를 것인가?c

그리하여 우리에게는 여기서 합리주의와 전통 사이의 대립을 경험한다. 합리주의는 항복과 관련되는 것으로 보인다; 자유의 전통은 항복에 반대한다.

나는 나 자신을, 버트런드 러셀을 크게 칭찬하는 사람인 합리주의자로서 여기서 소개했다. 그러나 이 갈등에서 나는 합리주의가 아니라 전통을 선택한다. 그런 문제들에서 우리가 개연성의 등급들을 추산할 수 있다고 나는 믿지 않는다. 우리는 모든 것을 알지는 못한다; 우리에게 아는 것은 거의 없어서 우리가 모든 것을 아는 것처럼 자세를 취해서는 안 된다. 내가 합리주의자라는 이유만으로 나는, 합리주의에는 한계가 있다고 그리고 사실상 합리주의는 전통이 없으면 불가능하다고 나는 믿는다.

나는 논쟁을 피하고 싶은데 논쟁으로 인하여 이미 많은 쓰라린 단어들이 생겼다. 나는 나의 의견을 알려줄 수밖에 없었다. 나의 입장을 옹호하는 것이 여기서 나의 과제라고 내가 생각하지 않는 반면, 나는 의견의 차이점들을 분석하여 당파들이 공유하는 것을 발견하고 싶은데 이유인즉 여기서 우리는 서양이 신뢰하는 것을 배울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 서양은 무엇을 신뢰하는가?’라는 질문을 선회하여, 우리가 제시할 수

 

a 역주: 이 문장에서는 앞의 한편으로는의 원어 표현인 on the one side의 대구인 on the other (side)가 뒷부분에 누락되었다.

b 역주: 이 주어는 박영태 번역에 누락되었다.

c 역주: 앞의 세 문장의 원문은 All this both parties have in common. The disagreement starts with the question: Shall we calculate, and rely upon, degrees of probability or shall we follow our tradition?인데 박영태 번역에 누락되었다.

 

있을 터인 많은 올바른 답변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답변은 다음의 것이라고

우리는 아마도 말할 수 있다. 우리는, 폭정과 압제와 강압을 증오하고 우리 모두는 그것들과 싸우는 것을 신뢰한다. 우리는 전쟁에 반대하고 여하한 종류의 협박에도 반대하고 특히 전쟁으로 위협하는 협박에 또한 반대한다. 우리는 원자폭탄의 발명이 끔찍한 재앙이라고 믿는다. 우리는 평화를 원하고 이 목표를 실현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우리는 믿는다. 우리 모두는 자유를 신뢰하고 오직 자유만이 삶을 살아갈 가치가 있는 것으로 만든다고 우리는 믿는다. 우리의 방향들은, 협박에 굴복하여 자유를 대가로 평화를 사려고 노력하는 것이 옳은지 옳지 않은지의 문제서만 갈린다.

서양의 우리가 평화와 자유를 원한다는 그리고 우리 모두에게는 두 가지 모두를 위하여 가장 큰 희생을 치를 결의가 있다는 사실은 내가 보기에, 내가 기술한 두 당파의 불화보다 더 중요하다. 그래서 이 사실로 인하여 나는 여러분에게 우리 시대에 대하여 매우 낙관적인 그림을 제시할 수 있다고 나는 믿는다. 그 그림은 매우 낙관적이어서 여러분의 신뢰를 잃을까봐 여러분에게 그 견해를 감히 제출하지 못할 지경이다. 이유인즉 나의 논지는 이러하기 때문이다:

결국a 우리 시대는, 우리가 역사적 지식을 가지고 있는 한, 최고의 시대라고 그리고 우리가 서양에서 살아가는 종류의 사회가 자체의 결점들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존재한 최고의 사회라고 나는 주장한다.

이렇게 말하면서, 2차 세계대전 이래 짧은 기간 동안에 북유럽과 서유럽에서 빈곤이 거의 사라졌다는 것은 결국 아주 중요할지라도 우리의 물질적 풍요로움을 나는 전혀 주로 생각하고 있지 않다. 반면 나의 젊은 시절 동안과 심지어 양차 세계대전 사이에, 빈곤은 (특히 일자리가 없는 결과로서) 여전히 한 가지 사회적 문제였다.b 빈곤이 사라진 것에는 (불행하게도 서유럽에서만) 몇 가지 원인들이 있는데 그 중에서 생산 증대가 가장 중요한 원인일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나는 세 가지 원인들을 주로 지적하고 싶은데 그 세 가지 원인

 

a 역주: ‘결국의 원어 표현은 in spite of everything인데 박영태 번역은 모든 것이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이다.

b 역주: 앞의 두 문장의 원문은 In saying this I am thinking by no means primarily of our material wealth, although it is, after all, quite significant that during the short time since the Second World War, poverty has nearly disappeared from Northern and Western Europe, while in my youth and even between the two world wars, poverty (especially as a consequence of unemployment) was still the one great social problem.인데 박영태 번역은 이렇게 말하면서 나는 원래부터 우리의 물질적 부에 의하여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짧은 기산 동안에, 북부 유럽과 서부 유럽에서 가난이 거의 사라졌다는 사실은 중요하다. 왜냐하면 나의 어린 시절과 심지어 양차 세계대전 사이에, 가난은 (특히 비고용 실업 때문에) 아주 큰 사회적 문제였기 때문이다.’이다.

 

들 모두는 우리의 문제와 관련하여 중요하다. 이유인즉 그 원인들이, 서양에 사는 우리가 무엇을 신뢰하는지를 매우 명료하게 보여주기 때문이다.

1. 우리의 시대는, 모든 사람에게 충분한 식량이 있는 한 아무도 틀림없이

굶주리지 않는다는 것을 신조로서, 심지어 도덕적으로 자명한 것으로서 확립했다. 그리고 또한 빈곤에 대한 싸움이 우연에 맡겨져서는 안 되고 그 싸움이 모든 사람의, 특히 잘 사는 사람들의 기본적인 의무로서 간주되어야 한다고 우리는 또한 결정했다.

2. 우리의 시대는 모든 사람에게, 삶에서 가능한 최고의 기회를 (‘기회의 평등’) 부여하는 원칙을 신뢰한다. 계몽사조의 시대처럼, 우리의 시대는 지식을 통한 자기-해방을 신뢰하고 페스탈로치(Pestalozzi)와 함께 지식을 통한 궁핍과의 싸움을 신뢰하고 그리하여 우리의 시대는, 고등교육이 필요한 능력들을 지닌 모든 사람들에게 제공될 수 있어야 한다고 올바르게 믿는다.

3. 우리의 시대는 대중에게서 새로운 요구들과 소유욕을 부추겼다. 이것은 분명히 위험한 상황전개이지만 그것이 없다면 대규모의 빈곤이 불가피하다. 이것은 18세기 및 19세기의 개혁자들에 의하여 일찍 인식되었다. 그들은, 가난한 사람들을 능동적으로 돕지 않고는 빈곤의 문제가 해결될 수 없음을 그리고 자신들의 운명을 개선하는 욕망과 의지는 그들에 대한 지원이 확보되기 전에 일깨워져야 함을 그들은 알았다. 이 통찰은 예를 들어, 클로인의 주교(Bishop of Cloyne)인 조지 버클리(George Berkeley)에 의하여 분명하게 언명되었다 (이것은, 마르크시즘이 채택해서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과장한 저 진리들 중 한 가지 진리이다).

대중적인 신념에 관한 이 세 가지 조항들은 빈곤에 대한 싸움, 보편적 교육, 그리고 욕구들에 대한 인식과 수요 증가 매우 의심스러운 전개상황들을 초래했다. 빈곤에 대한 싸움은 몇몇 국가들에서, 예를 들어 병원들과 전체 의료업을 집어삼키는 기괴한 관료체제를 낳았는데 명백한 결과는 복지를 위하여 쓰인 돈의 일부만 실제로 복지가 필요한 사람들에게 도움을 준다.

그러나 우리가 복지 국가를 비판할지라도 그리고 우리는 복지 국가에 비판적이어야 한다 복지 국가란 매우 인간적이고 매우 칭찬받을만한 도덕적 신념에서 유래한다는 것과 빈곤과의 싸움에서 심각한 물질적 희생을 치를 결의가 있고 그리하여 자체가 지닌 신념의 진정성을 증명한다는 것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된다.

자체가 지닌 도덕적 신념을 위하여 그렇게 심각한 희생을 치를 결의가 있는 사회는 자체의 이념들을 실행할 권리를 지닌다. 그리하여 복지 국가에 대한 우리의 비판은 이 이념들을 이룩하기 위한 나은 방법들을 밝히는 것을 겨냥해야 한다.

고등 교육에 대한 기회 균등과 동등한 권리라는 이념도 몇몇 국가들에서 유사하여 바람직하지 못한 효과들을 낳았다. 우리 세대의 가난한 학생에게는 지식을 위한 싸움이 모험인데 극기와 희생을 요구하고 그로 인하여 독특한 가치에 도달한 지식이 생겼다. 나는 이 태도가 퇴조하고 있어서 걱정스럽다. 교육에 대한 새로운 권리로 인하여 다른 태도가 생겼다. 이 권리가 당연시된다; 그리고 희생 없이 우리의 몫으로 우리가 받는 것을 우리는 귀중하게 여기지 않을 뿐이다. 교육에 대한 권리를 학생에게 주는 선물로 만들어서 사회는 학생에게서 독특한 경험을 빼앗았다.

이 두 가지 요점들에 관한 나의 비평들로부터 여러분이 아는 바와 같이, 나의 낙관론은 우리가 발견한 모든 해결책들을 내가 칭찬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고 오히려 이 해결책들을 시도하는 동기들을 나는 칭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동기들이 기본적으로 위선적이고 이기적인 것으로서 틀렸음을 밝히는 것이 유행하는 비관론의 한 부분이다. 그러나 심지어 도덕적 위선자도 자신의 바로 그 항의들에 의하여, 자기들이 수용한다고 주장하는 저 가치들의 도덕적 우월성을 자신이 신뢰한다는 것을 증명함을 비관론자들은 망각한다. 심지어 우리 시대의 커다란 독재자들도, 자유와 평화와 정의를 자신들이 신뢰하는 양 어쩔 수 없이 말했다. 그들의 위선은, 저 가치들을 무의식적이고 비자발적으로 인정하는 것이었고 저 가치들을 신뢰한 대중들에 대한 비의도적인 찬사였다a.

이제 나는 나의 세 번째 요점으로 온다: 대중들의 물질적 요구 증가. 여기서 폐해가 명백하게 보이는데 왜냐하면 이 개념이 또 다른 자유의 이상과 직접적으로 충돌하기 때문이다: 물질적 욕망들로부터의 자유라는 그리고 극기를 통한 자기-해방이라는 그리스적 및 기독교적 자유.

이것과 별도로, 물질적인 수요들의 증가는 바람직하지 못한 많은 결과들을 낳았다; 예를 들어, 우리가 이룩한 것을 즐기는 대신에 다른 사람들을 따라잡아서 능가하려는 야망. 그 야망은 만족 대신에 불만족과 질투를 초래했다. 그러나 이 맥락에서, 우리가 새로운 전개상황의 출발점에 있다는 것과 배움은 시간이 걸린다는 것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 대중들이 지닌 새롭고 새로이 넓게 퍼진 경제적 야망은 아마도 도덕적으로 그다지 칭찬할만하지 않고 틀림없이 그다지 아름답지 못하다; 그러나 그 야망은, 결국, 개인의 노력을 통하여 빈곤을 극복하는 유일한 방법 이다. 그리고 대중들의 이 경제적인 야망은, 복지

 

a 역주: ‘비의도적인 찬사의 원어 표현은 unintentional compliment인데 박영태 번역은 무심코 겉치레에 불과한 인사이다.

 

국가의 가장 의심스러운 특징들 중 한 가지 특징을 중화시키는 가장 유망한 수단이기도 하다: 관료체제의 비대와 개인에 대한 관료체제의 통제 증가라는 의심스러운 특징. 개인적인 경제적 야망으로 인해서만 빈곤이 매우 드물게 되어서 빈곤에 대한 싸움을 국가의 주요 목표로 만드는 것은 무의미하게 될 것이다. 높은 생활수준이 실현되어야만, 옛날의 빈곤 문제가 아무 드믄 현상이 되어서 제한된a 사회사업이 그 문제를 담당할 수 있어서 수많고 강력한 관료체제의 위험을 피할 있게 되어 그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

이 고찰들에 비추어, 우리 서구의 경제체제의 효율성은 내가 보기에 매우 중요하다: 빈곤을 드문 예외적인 일로 만드는 데 우리가 성공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쉽게 우리의 자유를 복지국가의 관료체제에 잃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여기서, 다양한 형태들로 반복적으로 제기된 교설에 반대해야 한다: 서구 경제체제와 동구 경제체제 사이에서의 결정이 궁극적으로 두 가지 경제체제들 중 한 가지의 우수성에 의존할 것이라는 교설을 나는 의미한다. 개인적으로 나는, 자유시장경제가 계획경제보다 더 효율적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나는, 독재체제 배격을 경제적 주장들에 근거시키는 것은 완전히 틀렸다고 생각한다. 중앙 계획적 국가 경제가 자유시장경제보다 우수할지라도, 나는 계획경제에 반대해야 한다; 계획경제가 국가권력을 독재체제의 지경까지 증가시키기 쉽다는 단순한 이유 때문에. 우리가 싸우고 있는 것은 공산주의의 효율성이 아니라 공산주의의 자유결핍과 인간성결핍이다. 우리는 우리의 자유를 멸시해서는 안 되고 또한 팥죽 한 그릇에 그 자유를 팔아서도 (창세기 25:34) 안 된다; 또한 가능한 최고의 생산성에도 그 자유를 팔아서도 안 되는데, 자유를 대가로 효율성을 사는 것이 가능할지라도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나는 대중들(masses)’이라는 단어를 여러 번 사용했는데 특히, 대중들의 수요 증가와 경제적 야망이 새로운 것임을 지적하기 위해서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우리 사회의 특징을 대중-사회로 강조하는 사람들로부터 나 자신을 분리시킬 필요가 있다. 이 명칭 그리고 유사하게 대중들의 봉기라는 표현은, 지식인들과 반()-지식인들로 구성된 대중들을 정말로 매혹한 듯이 보이는 선전 구호가 되었다.

이 선전 구호들은 우리의 사회적 현실에서 여하한 것도 기술하지 않는다고 나는 믿는다. 우리의 사회철학자들의 시각과 이 현실에 대한 그들의 기술은,

플라톤적-마르크스주의적 사회 이론이라는 색안경들을 통하여 그들이 이 현실을 보았다는 단순한 이유 때문에 결점이 있었다.

 

a 역주: ‘제한된의 원어는 limited인데 박영태 번역은 특별히 만들어진이다.

 

플라톤은 절대정치의 귀족적 형태에 대한 이론가였다. 정치이론의 근본적 문제로서, 그는 다음 질문들을 제시했다: ‘누가 다스려야 하는가? 누가 국가를 다스려야 하는가? 다수들, 군중, 대중들, 혹은 소수들, 선출된 자들, 엘리트들?’

누가 다스려야 하는가?’라는 질문은 근본적인 것으로서 수용되자마자, 그렇다면 분명히 한 가지 합리적인 답변만 있을 수 있다: 알지 못하는 사람들 말고, 정말로 아는 사람들인 현자들; 군중이 아니고 극소수의 최고들. 저것이 최고인 사람들에 의한 통치이론인 귀족들의 통치이론이다.

민주주의에 대한 위대한 이론가들이자 이 플라톤적 이론에 대한 위대한 적대자들이 루소와 같은 플라톤의 문제 서술을 부적당한 것으로서 배척하는 대신에 그 문제에 대한 서술을 채택했다는 것이 다소 기묘한데 이유인즉 정치이론에서 근본적인 문제는 플라톤이 언명한 것이 아님이 전적으로 명백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누가 다스려야 하는가?’누가 권력을 가져야 하는가?’가 아니라 얼마나 많은 권력이 정권에게 허용되어야 하는가?’나 더 정확하게, ‘어떻게 우리는, 심지어 무능하고 부정직한 통치자들이 너무 많이 해코지할 수 없는 방식으로 우리의 정치 제도들을 발전시킬 수 있는가?’이다. 달리 말해서, 정치이론의 근본적인 문제는 견제와 균형의 문제로, 정치권력과 그 권력의 자의성 및 남용이 통제될 수 있고 순치될 수 있는 제도들의 문제이다.

서양에 사는 우리가 신뢰하는 종류의 민주주의는, 권력이 이런 의미에서 제한되고 통제되는 국가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나는 의심하지 않는다. 이유인즉 우리가 신뢰하는 종류의 민주주의는 전혀 이상적인 국가가 아니기 때문이다; 발생해서는 안 되는 많은 것이 발생한다는 것을 우리는 완벽하게 잘 안다. 정치에서 이상들(ideals)을 갈구하는 것은 어린애 짓이어서 서양에 사는 합리적인 성숙한 사람은, ‘모든 정치적 행위는 작은 악을 선택하는 것을 본질로 한다(비엔나 시인 칼 크라우스[Karl kraus]를 인용하여) 것을 안다a.

우리와 관련하여 두 가지 유형들의 정권이 있을 따름이다: 피를 흘리지 않고 통치자들을 피통치자들이 제거할 수 있는 정권의 유형들과 유혈에 의해서만 통치자들을 피통치자들이 조금이라고 제거할 수 있는 정권의 유형들. 이 정권의 유형들 중 첫 번째 유형을 우리는 민주주의라고 부르고, 두 번째 유형을 우리는 전제정치나 독재라고 부른다. 그러나 명칭은 여기서 실제로 중요하지 않고 사실들만 중요하다.

 

a 역주: ‘...것을 안다의 원어 표현은 knows that인데 박영태 번역에 누락되었다.

 

서양에 사는 우리는 이런 냉철한b 의미에서만 민주주의를 신뢰한다: 정권의

최소 악이라는 형태로서의 민주주의. 이것은 또한, 민주주의와 서양을 구하려고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은 일을 한 사람이 민주주의를 기술하는 방식이다: ‘민주주의는, 물론 때때로 시험된b 저 모든 다른 정권의 형태들을 제외하고, 최악의 정권 형태이다라고 윈스턴 처칠은 예전에 말했다.

그리하여 우리는 민주주의를 신뢰하지만 민주주의가 민중이 통치하는 것이기 때문이 아니다. 당신도 나도 통치하지 않는다; 반대로 당신과 나 모두는 통치를 당하고 있는데 때때로 우리가 좋아하는 것 이상으로 통치를 당한다c. 그러나 정치적으로 평화롭고 효과적으로 정권을 반대함과 양립할 수 있고 그리하여 정치적 자유와 양립할 수 있는 형태의 정부로서 우리는 민주주의를 신뢰한다.

나는 위에서, ‘누가 통치해야 하는가?’라는 플라톤의 허위적인 질문이 정치철학자들에 의하여 분명하게 배척된 적이 없다는 불행한 사실을 언급했다. 루소가 동일한 질문을 했지만 반대가 되는 답변을 제시했다: ‘민중의 의지가 소수의 의지가 아니라 다수의 의지 통치할 것이다d; 그 답변은 민중(The People)’을 그리고 민중의 의지(The Will of the People)’를 신화적으로 신격화하는 일을 초래하기 때문에 위험한 답변이다. 마르크스 또한 완전히 플라톤의 맥락에서 다음과 같이 묻는다: ‘누가 통치할 것인가, 자본가들인가 무산자들인가?’ 그리고 그는 또한 다음과 같이 답변을 제시했다: ‘다수; 소수가 아니다; 자본가들이 아니라 무산자들이 통치해야 한다.’

루소 및 마르크스와 반대로, 투표의 그리고 선거의 다수결에서 피를 흘리지 않고 그리고 가능한 한 자유를 최소한으로 제한하고 결정들을 이룩해내는 방법만을 우리는 본다. 물론 다수들은 잘못된 결정에 흔히 도달하여, 우리는 소수들도 다수결이 뒤엎을 수 없는 권리들과 자유들을 지니고 있다고 우리는 주장해야 한다.

내가 말할 것은, ‘대중(mass)’엘리트대중들의 봉기라는 유행 용어들이 플라톤주의와 마르크시즘의 이념들로부터 유래한다는 주장을 뒷받침할 것이다.

루소와 마르크스가 플라톤의 답변을 뒤집은 것과 꼭 마찬가지로, 마르크스

 

a 역주: ‘냉철한의 원어는 sober인데 박영태 번역은 건전한이다.

b 역주: ‘시험된의 원어는 tried인데 박영태 번역은 ‘(악을 범하려고) 시도했던이다.

c 역주: ‘우리가 좋아하는 것 이상으로 통치를 당한다의 원어 표현은 and (sometimes) more than we like인데 박영태 번역은 우리는 이를 훨씬 좋아한다이다.

d 역주: 이 문장의 원문은 ‘The will of the people shall rule the will of the many, not of the few’인데 박영태 번역은 국민의 의지많은 사람들의 의지도 아니요, 소수의 의지도 아닌이다.

 

에 반대하는 몇몇 사람들은 마르크스주의적 답변을 뒤집었다: 그들은 엘리트의 반란에 의하여 대중들의 반란에 대응하고 그리하여 플라톤적 답변과 통치해야 한다는 엘리트의 주장으로 복귀하기를 원한다. 그러나 이 접근방식 전체는 틀렸다. 하느님, 마르크시즘을 뒤집기만 하는 저 반()-마르크시즘으로부터 우리를 구하소서a: 우리는 그것을 너무나 잘 알 따름이다b; 심지어 공산주의도, 이탈리아와 독일 및 일본을 통치한 그리고 제거하기에 세계대전이 필요했던 반()-마르크스주의적 엘리트보다 결코 더 나쁘지 않았다.

그러나 나의 투표가 전혀 교육을 받지 못한 도로청소부의 투표보다 더 무게를 지니지 못해야 한다는 것은 정당한가? 교육을 받지 못한 대중보다 더 멀리 보는 교육적인 엘리트가 있어서 그리하여 중요한 정치적 결정들에 더 큰 영향력을 지녀야 하지 않은가?’라고 교육을 받고 그리고 조금 교육을 받은 사람들을 계속 질문한다.

답변은, 교육을 받는 사람과 조금 교육을 받은 사람은 어떤 정도로든 더 큰 영향력을 정말로 발휘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저서들과 논문들을 작성한다, 그들은 가르치고 강의한다, 그들은 토론들에서 말한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의 정치적 당파의 구성원들로서 자신들의 영향력이 느껴지도록 만들 수 있다.

이렇다고 해서, ‘도로청소부와 비교하여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지닌 더 큰 영향력을 인정한다고 말하려는 의도가 나에게 있는 것은 아니다. 이유인즉 현명한 자와 선한 자에 의하여 통치라는 플라톤적 이념은 무조건적으로 배척되어야 한다고 내가 믿기 때문이다.c 결국 지혜와 어리석음을 누가 결정하는가? 가장 현명한 사람들과 가장 선한 사람들이 십자가형을 받지 그리고 정확하게 현명하고 선한 사람으로서 인정을 받았던 저 사람들에 의하여 않았는가?

우리는, 지혜와 선함과 정직성과 비이기적인 업적을 판단하는 과제로 우리의 정치 제도들에게 부담을 지울 것인가? 우리는 이 과제를 정치적 문제로 만들 것인가? 실제적 정치라는 문제로서, 엘리트라는 문제는 절망적으로 해결이 불가능하다: 실제적으로 엘리트들과 패거리들은 결코 구분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실상, 대중들과 엘리트들에 관한 이 모든 헛소리에 일말의 진실도 없는데 이유가 단지 이 대중들은 실제로 존재하기 않기 때문이

 

a 역주: 이 문장의 원문은 God save us from that anti-Marxism which simply inverts Marxism이라는 기원문인데 박영태 번역은 하느님은 마르크스주의를 단지 방향만 역전시킨 반마르크스주의에서도 우리를 구원해주었다이다.

b 역주: 이 문장의 원문은 we know it only too well인데 박영태 번역은 우리는 유감이지만 이러한 점을 잘 안다이다.

c 역주: 이 문장의 주어 내가는 박영태 번역에 누락되었다.

 

. 우리 모두가 직면하는 그리고 괴롭힘을 당하는 저 대중들은 사람들로 구성되는 구체적인 대중들이 아니라, 가령, 자동차들과 오토바이들로 구성된 대중들이다. 그러나 자동차 운전자도 오토바이 운전자도 대중의 구성원이 아니다; 정반대로 그는, 혼자서 다른 모든 사람에게 대항해서 생존투쟁에 근접한다고 아마도 우리가 말할, 치료 불가능한 개인주의자이다. 인간은 인간에게 늑대(homo-homini-lupus)라는 개인주의적인 인상은 더할 나위 없이 합당하다.a

아니지b, 우리는 대중 사회에서 살고 있지 않다. 반대로 그렇게 많은 개인들이 희생을 각오하고 기꺼이 책임들이라는 부담들을 지려는 시대가 있었던 적이 없다.c 이전에는, 우리 시대의 비인간적인 전쟁들에서처럼, 그렇게 많은 자발적이고 개인적인 영웅적 행위들이 있었던 적이 없다; ‘영웅적 행위에 대한 사회적 및 물질적 유인책이 더 적었던 적이 없었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d.

서양 국가들이 존경을 표하는 무명용사의 기념비는 서양이 신뢰하는 것의 상징이다 이름 없는 평범한 사람에 대한 우리의 신뢰의 상징. 그가 대중에 속했던지 아니면 엘리트에 속했던지 우리는 묻지 않는다: 그는 위대한 인간이었다.e

우리 시대를 우리가 아는 최고의 시대로 만드는 것은 우리의 동료 인간들에 대한 이 신뢰이고 그들에 대한 존경심이다. 이 신뢰의 진정성은, 우리 시대를 위하여 희생하려는 의지에 의하여 증명된다. 우리는 자유를 신뢰하는데 왜냐하면 우리가 우리의 동료 인간들을 신뢰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우리가 노예제도를 폐지한 이유이다. 그래서 우리의 사회질서는, 우리가 역사적으로 알고 있는 최고의 사회질서인데 왜냐하면 우리의 사회질서가 개선을 향하여 가장 호의적

 

a 역주: 이 문장의 원문은 The individualistic image homo-homini-lupus has never been

more appropriate.인데 박영태 번역은 ‘(홉스의) 만인은 만인에 대한 늑대다(homo-homini-lupus)

같은 집단에 적용되는 그러한 이기적인 개인주의 상은 (대중에게는) 더는 적절하지 않다.’이다.

b 역주: ‘아니지의 원어는 No인데 박영태 번역은 그렇다이다.

c 역주: 이 문장의 원문은 On the contrary: there never was a time when so many

individuals were ready for sacrifice and willing to bear the burden of responsibilities.인데 박

영태 번역은 그 반대로 이기적인 개인주의 사회에 살고 있다. 아주 많은 개인들이 책임을 감당하려는

의지를 가지고 그 책임을 위해 기꺼이 희생하겠다고 하는 시절은 존재하지 않는다.’이다.

d 역주: ‘영웅적 행위에 대한 사회적 및 물질적 유인책이 더 적었던 적이 없었다는 사실에도 불구하

의 원어 표현은 in spite of the fact that there has never been less social and material

inducement for heroism.인데 박영태 번역은 영웅적 행위에 대한 사회적이고 물질적인 유인책이 (

거보다 현재에) 더 많이 있는데도, 현재보다 과거의 전쟁 시절에 자발적인 개인적 영웅 행위가 더 많다.’

이다.

e 역주: ‘그는 위대한 인간이었다의 원어 표현은 he was a man, take him for all in all.인데

섹스피어 작품 햄릿에 나오는 대사로, ‘그는 위대한 인간이었다그의 나쁜 업적과 좋은 업적을

고려하면 그는 위대한 인간이었다라는 의미로 풀이되는데 박영태 번역은 그는 한 사람의 인간이었다.

그를 소중하게 생각하여야 한다.’이다.

 

인 의향을 지닌a 사회질서이기 때문이다.

이 관점으로부터 우리가 동구로 눈을 돌린다면, 아마도, 우리는 화해적 생각으로써 끝낼 수 있다.

공산주의가 노예제도와 고문행위를 다시 도입했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이것을 우리는 용납해서도 안 되고 용서할 수 없다. 그러나 동구가 자유를 모든 인류를 위한 자유 약속한 이론을 신뢰했기 때문에 이 모든 것이 발생했다는 것을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된다. 이 쓰라린 싸움에서 우리 시대의 이 최악의 악인 심지어 공산주의도 다른 사람들 돕겠다는 그리고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희생하겠다는 욕망에서 태어났음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된다.

 

 

 

 

 

 

 

 

 

 

 

 

 

 

 

 

 

 

 

 

 

 

 

a 역주: ‘호의적인 의향을 지닌의 원어 표현은 favourably disposed인데 박영태 번역은 유리하게 잘 배열되었기이다.

 

                                                               주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