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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좋은 세상을 찾아서, III부 16장 과학에서 그리고 예술에서 창조적 자기-비판

이윤진이카루스 2021. 1. 14. 12:34

더 좋은 세상을 찾아서 III, 16장 과학에서 그리고 예술에서 창조적 자기-비판.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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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과학에서 그리고 예술에서

창조적 자기-비판

(베토벤의 스케치북에서 도용한)

 

 

먼저 나는 잘츠부르크 축제(Salzburg Festival)에서 개회 연설을 해달라는 친절한 초청에 감사를 표하고 싶다. 이것은 커다란 영예이다. 초청을 받고 나는 완전히 놀랐고 초청은 심지어 다소 당혹스러웠다. 1950년 이래 나와 나의 아내는 칠 턴 구릉지대(Chiltern Hills)에 있는 우리의 집에서 은둔 생활을 영위했다. 우리에게는 텔레비전도 없었고 우리는 신문도 구독하지 않았으며 우리는 우리가 하는 일에 완전히 몰입했다. 나의 연구는 주로 추상적인 주제와 관련되었다: 인간의 지식 문제와, 특히, 과학적 지식의 문제. 저렇다고 해서 잘츠부르크 축제에서 내가 개회 연설을 할 자격이 나에 생기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왜 내가 초청을 받았는지 나는 의아했다. 먼저 나는, 내가 다른 사람과 혼동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으면 70년이 훨씬 넘은 내가 약 5세나 6세 때인 어린 시절 사랑으로부터 유래한 이 도시에 대한 나의 사랑 때문인가? 그러나 아무도 이것을 알지 못했다. 반세기 이상 전, 얼음같이 차가운 밤에 내가 여기서 경험한 모험에 관하여 아무도 알지 못한다. 자정이었고 나는 스키를 타고나서 집으로 가는 중이었는데 그 때 보름달의 아름다운 달빛 속에서 나는 우연히 잘츠부르크에 있는 유명한 말 연못(horsepond) 두 곳 중 한 곳으로 미끄러졌다...정말로 나를 여러분의 초청 연사로 선택한 데에는 틀림없이 다른 이유들이 있다. 그 때 나의 머리에 중요한 것이 떠올랐다. 한 가지 면에서 나는 정말로 완전히 독특하다: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나는 낙관론자이다. 지식층 가운데로 우리가 들어가기를 원한다면 우리가 비관론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 엄격한 규칙이 된 세상에서 나는 낙관론자이다. 그러나 우리의 시대가 일반적으로 주장되는 것처럼 나쁘지 않다고 나는 정말로 믿는다. 우리의 시대는 자체에 대한 평판보다 더 좋고 더 아름답다고 나는 정말로 믿는다. 4반세기 전에 나는 강좌를 열었는데 그 제목이 당시보다 오늘날 훨씬 더 도발적으로 들린다: ‘우리 시대의 역사: 낙관론자의 견해(The History of our Time: An Optimist’s View’. 그러므로 이 연설을 하도록 나에게 자격을 부여하는 게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고질적인 낙관론자라는 명성이다.

잘츠부르크 축제와 연계되는 것들과 관련되기도 하는 나의 이 낙관론에 관하여 몇 마디 말을 하겠다. 여러 해 동안 적어도 아돌프 로스(Adolf Loos)와 칼 크라우스(Karl Krauss)의 시대 이래인데 그 두 사람 모두를 나는 알고 있었다 우리의 지식인들은, 우리의 문화라고 지칭되는 것이 상업화된 산업이고 그리하여 저속한 것과 천박한 것일 뿐이라는 원칙을 엄격하게 고수했다. 특히 이 산업이 대중들에게 문화로서 제공하는 것에서 비관론자는 타락과 무미건조함만을 본다. 그러나 낙관론자는 다른 면도 본다: 바흐, 모차르트, 베토벤 그리고 슈베르트의 모든 음악가들 중에서 가장 위대한 음악가들 레코드판들과 녹음테이프들 수백만 개가 구매되고 있다; 그리고 이 위대한 음악가들과 그들의 훌륭한 음악을 사랑하게 된 사람들의 숫자는 셀 수 없게 되었다.

우리의 어린이들을 잔인하고 폭력적인 영화들과 텔레비전에 노출시킴에 의하여 그 어린이들이 잔인성과 폭력에 익숙해지도록 우리가 거의 의도적으로 교육한다고 비관론자들이 지적할 때 나는 물론 비관론자들과 틀림없이 의견을 같이한다. 불행하게도 현대 문학에도 동일한 것이 유효하다. 그러나 낙관론자로서 나는, 폭력을 전파하려는 우리의 모든 시도들에도 불구하고 세상에는 여전히 선량하고 도움을 주는 사람들이 많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결국 문화적 비관론자들은, 증오를 가득 찬 우리 시대에 그리고 그것은 때때로 전적으로 확실하다 관하여, 행복하게 살고 있는 사람들이 여전히 많다고 말해야 한다.

비관론자들은 도덕적 및 정치적 쇠퇴를 지적하여, 우리 모두가 안전하다고 생각한 인권들에 대한 무시를 지적한다. 그들은 옳다. 그러나 그들이 이것은 과학과 기술에서 과학의 이용 때문이라고 비난할 때 그들은 또한 옳은가? 물론 옳지 않다. 그리고 낙관론자는, 과학과 기술이 유럽인들과 미국인들에게 매우 제한적인 번영을 가져왔다고 그리고 이전 세기의 충격적인 빈곤과 고통이 세계의 커다란 지역들에서 거의 추방되었다고 평가한다.

여러분, 나는 진보를 신뢰하는 사람도 아니고 진보의 법칙을 신뢰하는 사람도 아니다. 인류의 역사에는 우여곡절이 있다. 커다란 부유함은 커다란 타락과 동시에 발생할 수 있고 예술의 만개는 인간성의 쇠퇴 및 선한 의지의 쇠퇴와 동시에 발생할 수 있다. 40여 년 전에 나는, 진보에 대한 신뢰에 반대하여 그리고 예술에 미치는 그리고 과학에 미치는 유행들과 현대성 예찬의 영향력에 반대하여 몇 편을 글을 썼다. 겨우 최근에 우리는 현대성이라는 개념과 진보라는 개념을 신뢰하도록 요청을 받아서 오늘날 우리는 문화적 비관론을 주입받을 수 있다. 내가 비관론자들에게 말하고 싶은 것은, 나의 긴 생애에서 나는 퇴행뿐만 아니라 매우 명백한 진보의 증거를 보았다는 것이다. 우리 시대와 우리 사회에 관하여 훌륭한 것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싶어 하지 않는 문화적 비관론자들은 이것을 보지 못하여 그 비관론자들은 다른 사람들을 보지 못하게 만든다. 지도적이고 칭찬받는 지식인들이 사람들에게 그들이 실제로 지옥 속에서 살고 있다고 지속적으로 말할 때는 해를 끼친다고 나는 믿는다. 이런 방식으로 그 지식인들은 사람들을 불만상태로 만들 뿐만 저것은 그다지 나쁘지 않을 터이다 아니라 사람들을 불행하게 만들기도 한다. 삶에서 그들의 즐거움은 그들로부터 탈취된다. 자신의 개인적인 삶에서 크게 불행했던 베토벤은 자신의 작품을 어떻게 끝냈던가? 쉴러(Schiller)환희의 송가(Ode to Joy)로 끝냈다.

베토벤은 자유와 관련하여 절망적인 시대에 살았다. 프랑스혁명은 공포정치로 그리고 나폴레옹의 제국으로 사멸했다. 메테르니히(Metternich)의 왕정복고로 인하여 민주주의라는 이념이 억압당했고 계층 적대감이 예리해졌다. 대중들의 비참함은 지독했다. 베토벤의 기뻐하며 경배하세(Hymn to Joy), 인류가 갈라진 계층 적대감에 반대하는 열정적인 항의이다; ‘예리하게 갈라졌다라고 (‘streng geteilt’) 쉴러는 말하는데, 베토벤은 이 단어들을 한 장소에서 다음과 같이 서술하여 합창단에 의한 감정폭발을 위하여 바꾼다a: ‘무례하게 갈라졌다’(‘frech geteilt’). 그러나 그는 계층 증오를 알지 못한다; 그는 자신의 동료 인간의 사랑만을 안다. 그리고 그의 작품들 거의 모두는, 장엄미사곡(Missa Solemnis)이 그러한 것처럼 위안의 정신으로 끝나거나 교향곡들과 오페라 피델리오(Fidelio)가 그러한 것처럼 환호하는 것으로서 끝난다.

우리와 작품을 많이 창작한 동시대의 많은 예술가들은 우리의 문화에 관한 비관적 선전의 희생물이 되었다. 자신들이 충격적인 세상으로서 간주하거나 충격적인 역사적 기간을 충격적인 방식으로 간주하는 것을 제시하는 것이 자신들의 과제라고 그들은 믿는다. 심지어 과거의 몇몇 위대한 예술가들도 바로 이렇게 했다는 것은 사실이다. 나는 고야(Goya)나 케테 콜비츠(Käthe Kollwitz)를 생각하고 있다. 사회에 대한 그런 비판은 필요하고 그런 비판은 틀림없이

 

a 역주: 이 문장의 원문은 ‘sharply divided' ('streng geteilt'), says Schiller, Beethoven alters these words in one place, for an outburst by the choir인데 두 개의 절이 접속사 없이 연결되어 비문법적인 문장이 되었다.

 

매우 당혹스럽다. 그러나 그런 비판의 중요성이 한탄에a 놓여서는 안 된다; 더 정확하게 그런 비판의 중요성은, 자체의 시대에 대한 비판으로 가득 찬 피가로의 결혼(The Marriage of Figaro)에서와 같이, 고통을 극복하려는 외침이 되어야 한다. 그런 비판은 재치, 풍자 그리고 역설로 가득하다; 그러나 그런 비판은 더 깊은 중요성을 담고 있다. 이 훌륭한 작품에는 진지함이 많고 심지어 슬픔도 많지만 또한 기쁨과 넘치는 생기가 많다.

여러분, 나는 나의 낙관론에 관하여 너무 많은 것을 말했고 내가 공표한 주제인 과학에서 그리고 예술에서 창조적 자기-비판으로 올 적당한 때이다.

이 주제는, 나의 서문에서 내가 말한 것과 밀접하게 관련된다. 비록 간략하게일지라도, 위대한 자연과학자들의 창조적인 업적과 위대한 예술가들의 창조적인 업적들 사이의 유사점들과 차이점들 중 몇 가지들을 나는 말하고 싶은데, 부분적으로 최근에 화제가 된 쟁점인 자연과학들에 반대하는 문화적 비관론자들의 선전과 싸우려는 희망b 때문이다.

위대한 예술가들은 항상 한 가지 핵심적인 관심을 지닌다: 그들의 작품; 그들이 몰두하는 작품. 저것이, ‘예술을 위한 예술이라는 말의 의미이다: 이유인즉 이것은 예술 작품을 위한 예술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위대한 과학자들에게도 동일한 것이 적용된다.c 자연과학을 연구하는 유인책이 그 과학을 응용하는 것에 놓여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완전히 틀렸다. 플랑크(Planck)도 뉴튼도, 러더포드(Rutherford)도 보어(Bohr)도 가능한 원자이론의 응용을 생각하지 않았다. 반대로 1939년까지 그들은 그런 응용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그 생각을 과학소설의 영역으로 격하시켰다. 이 사람들은 탐구를 위한 탐구를 하고 있었다; 진리 자체를 위한 진리 탐구. 그들은 물리학자들이거나, 아마도 더 낫게는 괴테의 파우스트가 다음과 같이 말할 때 파우스트가 표출한 갈망에 의하여 고무된 우주론자들이었다:

 

혹시 이 세상을 통일시키는

그 힘들(forces)을 안다는 것.

 

이것은 인류의 옛날 꿈으로 시인들과 사상가들의 꿈이다. 우주론적 사념은

 

a 역주: ‘한탄의 원어는 lament인데 박영태 번역은 비판이다.

b 역주: ‘싸우려는 희망의 원어 표현은 (in the) hope of combatting인데 박영태 번역은 치열한 논쟁을 기대하면서이다.

c 역주: 이 문장의 원문은 But the same is true of the great scientists.인데 박영태 번역은 그러나 이와 같은 내용은 위대한 과학자들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이다.

 

모든 고대 문명들에서 발견될 수 있다. 그 사념은 호머의 일리아드(Iliad)에서 (8, 13-16) 그리고 헤시오드(Hesiod)신통기(Theogony)에서 (720-5) 발견된다.

자연과학들은 사실들을 수집할 뿐이라고 아마도 산업에서 그 사실들을 이용하기 위하여 믿는 몇몇 과학자들과 물론 많은 비전문가들이 여전히 있다. 나는 과학을 다르게 본다. 과학의 시초들은 시적(詩的) 및 종교적 신화들에서, 우리 자신에 대하여 그리고 세상에 대하여 설명하려고 시도하는 인간의 환상에서 발견될 수 있다. 과학은, 합리적인 비판의 도전을 받아 신화로부터 발전한다: 진리라는 개념에 의하여 고취된 비판의 형태; 진리 탐구에 의하여 그리고 진리에 도달하려는 소망에 의하여 고취된 비판의 형태, 이 비판의 기초를 이루는 기본적인 질문들은 다음과 같다: 이것이 참일 수 있는가? 그리고 이것은 참인가? 그리하여 나는 다음과 같은 나의 연설의 첫 번째 논지로 온다: (: poetry)와 과학은 근원이 동일하다. 그것을 신화들(myths)에서 시작된다.

나의 두 번째 논지는 다음과 같다: 우리는 두 가지 종류의 비판을 구분할 수 있는데 하나는 심미적이고 문학적 관심들을 지닌 비판이고 다른 하나는 합리적인 관심을 지닌 비판이다.a 전자(前者)는 신화에서 시()에 이르고, 후자(後者)는 신화에서 과학에 이른다; 혹은 더 정확하게, 자연과학에 이른다. 전자는 언어의 아름다움, 운율의 힘, 심상의 광휘와 생동감, 극적인 긴장 및 그 긴장의b 설득력을 평가한다. 이런 종류의 비판적 판단은 시()를 낳는데 특히 서사시와 극시를 낳는다; 시적(詩的: poetic) 노래 및 그 노래와 함께 고전음악을 낳는다.

합리적 비판은, 대조적으로, 신화적 이야기가 참인지를 질문한다; 세상이 실제로 주장되는 방식으로 진화했는지: 세상이 헤시오드(Hesiod)가 우리에게 말하는 바와 같이 혹은 창세기(Genesis)에 따라서 창조될 수 있었을 터인지. 그런 질문들의 압박을 받아서 신화는 우리 세계에 대한, 우리의 환경에 대한 과학인 우주론이 된다; 신화는 자연과학으로 변한다,

나의 세 번째 논지는, 한편으로는 시와 음악의 공통적인 근원으로부터 남겨진 많은 흔적들이 여전히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우주론과 과학의 공통적인 근원으로부터 남겨진 많은 흔적들이 여전이 있다는 것이다. 모든 시()는 특징

 

a 역주: 이 문장의 원문은 we can distinguish two kinds of criticism, one that has aesthetic and literary interests and one that has rational interests.인데 두 가지를 각각 표현하는 대명사는 oneone이 아니라 onethe other이다.

b 역주: ‘그 긴장의의 원어는 its인데 박영태 번역은 신화의이다.

 

에서 신화적이라고a 혹은 모든 과학은 우주론이라고 나는 주장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에서 우리는 호프만스탈(Hofmannsthal)예더만(Jedermann)을 생각하기만 하면 된다b 그리고 과학에서 신화 창조가 의외로 커다란 역할을 여전히c 수행한다는 것이다. 신화들은, 우리의 상상력에 의하여 고취되어 우리 자신들과 우리의 세상을 우리 자신에게 설명하려는 우활한(迂闊: naive) 우리의 시도들이다. ()뿐만 아니라 과학의 커다란 부분도, 상상력에 의하고 고취되어 우리의 세상을 우리 자신들에게 설명하려는 우활한(迂闊: naive) 시도로서 여전히 기술될 수 있다.

()과 과학은 그리고 그리하여 음악 또한 혈연관계들이다. 그것들은, 우리의 근원과 우리의 운명 그리고 우리 세상의 근원과 운명을 이해하려는 시도에서 유래한다.

이 세 가지 논지들은, 그리스 시()와 관련하여 특히 그리스 비극과 관련하여 신화적 근원이 의심될 수 없을지라도, 역사관련 가설들로서 기술될 수 있다. 그리스 자연철학의 시작들에 대한 연구와 관련하여, 세 가지 가설들은 자체가 유익함을 증명했다. 우리 서양의 자연과학과 우리 서양의 예술 모두는 그것들의 그리스 것들의 부활 르네상스 이다. 그러나 예술과 과학의 출처가 같을지라도, 물론 그들 사이에는 본질적인 차이점들이 있다.

과학에는 진보가 있다. 저것은, 과학에 목표가 있다는 사실과 관련이 있다. 과학은 진리 탐구이고 그 목표는 진리에 대한 근사치이다. 예술에도 또한 목표들이 있을 것이고 동일한 목표가 얼마 동안 추구되는 한, 우리는 예술에서 진보에 관하여 정말로 때때로 말할 수 있다. 오랫동안 자연 모방이 회화에서 그리고 조각에서 목표였다; 비록 그것이 결코 회화와 조각의 유일한 목표는 틀림없이 아니었을지라도. 그리고 정말로 우리는 이 목표와 관련해서 진보를 말할 수 있는데 예를 들어 빛과 그림자를 처리함에서이다. 관점도 또한 여기서 언급될 수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목표들은 결코 예술에서 유일한 추동력들이 아니다. 위대한 예술 작품들은 흔히, 진보에 종속되는 그런 기교들 및 다른 수단들을 예술가가 통달하는 것과 완전히 독립적으로 우리에게 영향을 미친다.

예술에는 일반적인 진보가 없다는 것이 흔히 알려졌고 흔히 강조되었다. 원시주의(原始主義: primitivism)는 아마도 이 사실을 지나지게 강조했다. 그러나 예술가 개인의 창조력에서 틀림없이 진보가 있는 곳에는 물론 쇠퇴도 또한

 

a 역주: ‘신화적의 원어는 mythical인데 박영태 번역은 신비적이다.

b 역주: 이 문장의 원문은 one only has to think of Hofmannsthal's Jedermann인데 박영태 번역은 호프만스탈의 <예더만(Jedermann, 모든 사람)>에 대해서는 오직 그렇게 생각해야만 한다이다.

c 역주: ‘여전히의 원어는 still인데 박영태 번역에 누락되었다.

 

있다.

모든 예술가는, 심지어 모차르트와 같이 믿을 수 없는 천재도 자신의 예술을 배워야 한다. 모든 예술가 혹은 거의 모든 예술가에게는 스승이 있다; 그리고 모든 위대한 예술가는 자기 자신의 경험들로부터, 자기 자신의 작품으로부터 배운다. 잘츠부르크에서 알려진 위대한 시인인 오스카 와일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경험은 모든 사람이 자신의 실수들에게 부여하는 명칭이다.’ 그리고 위대한 물리학자이자 우주론자인 존 아치볼드 휠러(John Archibold Wheeler)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의 문제 전체는, 가능한 한 빨리 실수들을 저지르는 것이다.’ 이것에 대한 나의 비평은 이렇다: 그리고 우리의 실수들을 발견하여 그 실수들로부터 배우는 것이 우리의 과제이다. 심지어 모차르트도 자신의 작품들 몇 곡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개선했는데 예를 들어 그의 초기 작곡인 최초의 현악 5중주 B 플랫 장조이다. 모차르트의 가장 위대한 곡들은 자신의 짧은 생애의 마지막 10년 동안인 약 1780년부터 그가 사망한 1791년까지로 그의 나의 24살과 35살에 만들어졌다. 이로 인하여, 그가 자기-비판을 통하여 그것도 놀라울 정도로 신속하게 틀림없이 배웠다는 것이 정말로 밝혀진다. 그가 후궁으로부터의 도주(Seraglio)25세나 26세 때 그리고 피가로의 결혼(Figaro)30세에 작곡했다는 것은 여전히 전혀 믿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나의 현재 강연의 제목인 과학에서의 그리고 예술에서의 창조적 자기-비판은 베토벤의 작품에 의하여 영감을 받았다; 더 정확하게, 비엔나에서 음악 친구들의 협회(Gesellschaft der Musikfreunde)(Society of the Friends of Music) 의하여 조직된 베토벤의 스케치북 전시회에 의하여 그 제목은 영감을 받았다; 내가 여러 해 전에 방문한 전시회.

베토벤의 스케치북들은, 그의 창조적 자기-비판에 대한 서류들이다; 자신의 개념들을 그가 부단히 재고찰한 그리고 흔히 그가 자신의 개념들을 가차없이 수정한 서류들. 무자비한 자기-비판의 태도인 이 태도로 인하여, 하이든과 모차르트에게서 영향을 받아 작곡을 시작한 때부터 그의 마지막 작품들까지 베토벤의 놀라운 개인적인 발전을 이해하는 것이 아마도 다소 더 쉬워진다.

다른 종류의 예술가들과 작가들이 있다. 몇몇 사람들은 오류 제거의 방법을 사용하여 작업하지 않는 듯이 보인다. 그들은, 사전 시도들 없이 완벽한 작품을 만들어낼 수 있는 듯이 보인다; 그들은 완벽함을 즉각적으로 이루어낸다. 철학자들 가운데는, 버트런드 러셀이 이런 종류의 천재였다. 그는 가장 아름다운 영어로 글을 썼다; 그리고 그의 원고들에서는, 3쪽들이나 혹시 4쪽들에서 단 하나의 단어만 아마도 바뀌었다. 다른 사람들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글을 쓴다. 그들의 글쓰기 방법은, 실수들을 저지르고 그 실수들 교정하는 방법인 시행착오의 방법이다.

모차르트는, 자신의 작품들 몇 가지를 다시 썼지만, 창조적인 예술가들의 첫 번째 무리에 속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베토벤은 틀림없이, 그 작품들이 많은 수정으로부터 때때로 성장하는 예술가들인 두 번째 무리에 속했다.

두 번째 무리에 속하는 이 예술가들에 의하여 채택된 작업 방식들을 바라보는 것은 흥미롭다. 내가 이것에 관하여 말하는 모든 것이 사념적이고 추측성이라는 것을 나는 강조하고 싶다. 이 예술가들은 문제들이나 과제로써 시작한다고 나는 추측한다; 예를 들어 바이올린 협주곡이나 미사곡이나 오페라를 작곡하는 과제로써 시작한다고. 작품의 규모, 작품의 특징 그리고 작품의 구조에 가령, 작품의 소나타 형식 관하여 그리고 혹시 사용된 주제들 중 몇 가지 주제들에 관하여서도 어떤 관념을 갖는 것은 그 과제의 한 부분이다. 혹은 계획은 특히 미사곡이나 오페라의 경우에 훨씬 더 상세할 것이다.

그러나 실행이자 실제 작업이자 관념을 깨닫고 그 관념을 종이에 옮기는 것에 관한 한, 심지어 예술가의 계획도 자신의 작품을 실행하면서 영향을 받아서 변하기 시작하는데 그 실행은 예술가의 자기-비판적 수정사항들과 오류제거를 구체화한다. 계획은 더 구체적이 되고, 계획의 개요는 더 확정적이 된다. 각 부분인 각 세부사항은, 자체가 전체의 이상적인 그림에 들어맞는지 혹은 아닌지에 관하여 판단된다. 그리고 역순도 성립한다: 전체에 대한 이상적인 그림은, 작품이 세부적으로 실현되는 데로 나아감에 따라서 부단히 수정된다. 여기에는 오류 수정을 통하여 완성되는 과정에서 한편으로는 계획인 이상적인 그림이 점점 더 명백해지고 확정적이 됨에 따라서 그 그림과 다른 한편으로는 출현하는 구체적인 작품 사이에 주고받기인 정보교환(feedback) 효과가 있다.

이 모든 것은 아마도, 초상화 작업을 하는 화가의 경우에 가장 명백하게 보일 것이다; 다시 말해서, 자연적인 대상에 대하여 자신의 해석을 구축하려고 노력하는 화가의 경우에. 그는 계획하고, 그는 스케치하고, 그는 수정하기 시작한다. 여기서 그는 한 색깔의 점을 찍고 뒤로 물러서서 효과를 시험한다. 찍힌 색깔의 점의 효과는 맥락에, 이미 그곳에 칠해진 모든 것에 크게 의존한다. 그리고 역순도 성립하는데, 새로운 색깔의 점은 반대로 전체에 영향을 미친다. 모든 것이 그 점에 의하여 바뀌고 모든 것이, 더 좋든 더 나쁘든, 달라진다. 그리고 전체에 대한 그 효과와 동시에 화가가 겨냥하는 그리고 화가의 생각에 완전히 고착된 적이 없는 이상적인 그림이 또한 변한다. 그리고 초상화 화가의 특수한 경우에, 화가가 도달하려는 유사함과 주제의 특징에 대한 화가의 해석은 또한 변하고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림 그리는 행위 다시 말해서 실현하려는 시도는 물론 비판적 비교 행위 및 수정 행위에 틀림없이 앞선다는 (‘만들기가 맞추기에 앞선다고 에른스트 곰브리치[Ernst Gombrich]는 말한다)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이상적인 그림에 근접하는 관념이 틀림없이 있는데 그 수정과 같은 것은 그런 이상적인 대상과의 비교에 의하여 가능해질 수 있을 따름이기 때문에 화가는 그 관념을 이용하여 지금까지 이룩된 작품을 비교할 수 있다. 초상화가라는 특정 경우에 대상이 화가에게 재현되면 문제는 다소 덜 시급해질 것이다. 가사가 음악에 따라 결정될 수 있다면 자기-비판과 오류 수정이 더 쉬워질 음악에서도 상황은 아마도 유사하다. 아무튼 오류 수정은, 이룩된 것 및 이상적인 그림 (실제로 이루어진 작업의 영향을 받아서 지속적으로 변하고 있는, 겨냥되고 있는 것인 작품에 대한) 사이의 비교와 같다. 이룩된 작업은, 창조적인 과정에 점점 더 강력한 영향을 미친다. 위대한 작품의 경우에 이것은, 그 작품을 만든 예술가가 그 작품을 자신의 작품으로서 더 이상 인식할 수 없는 지경까지 갈 수 있다. 그 작품은 예술가의 구상보다 더 위대해졌다. 이것이 하이든의 천지장조(Creation)에서 일어난 일이고, 슈베르트 자신이 포기했던 교향곡인 미완성 교향곡(Unfinished)과 완전히 다른 방식이었다.

이제 결론으로 나는 예술들을, 문화적 비관론자들에 이해된다기보다는 험담을 당하는 과학들과 비교하는 것으로 선회하고 싶다.a 과학에서 작품은 가설인 이론이다; 그리고 활동의 목표는 진리이거나 진리에 대한 근사치 및 설명력이다. 이 목표는 주로 변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것이, 진보가 있다는 이유이다. 그것은, 수 세기 동안 지속될 수 있는 진보이다: 언제나 더 좋은 이론들을 향한 진보. 예술에서 가장 중요한 비판은 예술가의 창조적인 자기-비판이다; 그러나 과학에서는 비판이 자기-비판일 뿐만 아니라 협동적 비판이기도 하다: 과학자가 오류를 간과하거나 오류를 숨기려고 시도할 다행히도 드물게만 발생하는 일 때 이 오류는 통상적으로 다른 과학자들에 의하여 발견된다. 이유인즉 과학의 방법은 자기-비판과 상호비판이기 때문이다. 비판에 의하여, 이론이 진리 탐구에 도달한 것들이 판단된다. 비판을 합리적으로 만드는 것은 저것이다.

이론, 다시 말해서, 창조적인 과학자의 작품에는 그리하여 예술 작품과 많은 공통점이 있다; 과학자의 창조적인 활동은 예술가의 창조적인 활동을

 

a 역주: 이 문장의 원문은 Let me now turn in conclusion to a comparison for the arts with the sciences which are maligned rather than understood by the cultural pessimists.인데 박영태 번역은 이제 결론적으로, 나는 문화적 비관주의자에 의해 이해되기보다는 오히려 중상모략에 가깝게 이야기되는 예술들과 과학들의 비교 내용으로 진행하겠다.’이다.

 

어도 베토벤에 속했던 저 예술가들인 대담한 구상으로써 시작하고 창조적인

비판을 수단으로 자신들의 작품을 생각되지 못한 높이까지 올릴 수 있는 저 예술가들의 활동 닮는다; 그리하여 결과적으로 아름다운 합창 환상곡(Choral Fantasia)은 훨씬 더 아름다운 환희의 송가(Ode to Joy)로 성장했다.

과학에서 위대한 이론가는 위대한 예술가에 대응하고, 예술가처럼, 그는 자신의 상상력과 자신의 직관 및 자신의 형상 감각에 의하여 영향을 받는다. 아인슈타인은, 1913년 닐스 보어(Niels Bohr)에 의하여 전개된 원의 모형에 그 후 곧 크게 개선된 혁명적 이론 대하여, 그 모형이 가장 큰 음악성의 작품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위대한 예술 작품과 대조적으로, 위대한 이론은 항상 추가적인 개선에 종속된다.

과학자는 이것을 알고 그는 또한, 자신의 상상력과 자신의 직관 및 심지어 자신의 형상 감각도 그를 그의 목표로 이끌어가는 것보다 더 자주 그를 잘못된 길로 이끌어간다는 것을 알고 있다; 다시 말해서, 진리에 대하여 나은 근사치로 이끌어가는 것보다. 이것이 과학에서, 이론 창시자에 의해서 뿐만 아니라 또한 다른 과학자들에 의해서 영원한 비판적 검토가 필수적인 이유이다. 과학에서는 영감과 형상 감각에만 근거하는 위대한 작품이 없다.

여러분, 위대한 과학자들 중 한 명으로 30년 전쟁의 12번째a 해인 1630년에 사망한 위대한 우주론자이자 천문학자인 요하네스 케플러(Johannes Kepler)로부터 인용함으로써 나는 끝맺고 싶다. 이 인용문에서 케플러는 전체의 움직임에 대한 자신의 이론을 자신의 출발점으로 취하고 그는 그 이론을 음악, 특히 천구들(天球: spheres)에 대한 하느님의 음악에 비교한다. 그러나 거의 비의도적으로 케플러는, 인간에 의하여 창조된 음악이자 당시에는 여전히 상당히 최근 발견이었던 다성음악(多聲音樂: polyphonic music)에 대한 찬송가로써 끝맺는다. 케플러는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그리하여 하늘의 움직임들은, 들을 수 있고 음성적이라기보다는 일종의

지속적인 조화에 지나지 않는다. 그 움직임들은, 자체의 결의를 지닌

당김음이나(syncopations) 계류음(suspensions)과 같은 불협화음들의

(그 불협화음들에 의하여 인간은 자연의 상응하는 불협화음들을 모방한다)

긴장을 통하여 움직여 안전하고 미리 결정된 closuresb 도달하여 각각은

여섯 성부로 구성된 화음과 같은 6 termc 포함한다. 그리고 이 기호들

 

a 역주: 12번째의 원어는 twelfth인데 박영태 번역은 ‘20년째이다.

bc 역주: closuresterm은 음악용어인데 한글 번역이 미상임.

 

에 의하여 그 움직임들은 시간의 방대함을 구분하고 명시한다. 그리하여

고대인들에게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창조주의 모방자인 인간에 의하여

마침내 발견된 몇 가지 부분들에서 조화롭게 함께 가창하기에 대한 규칙들

보다 더 크게 고귀하거나 더 많이 고귀한 놀라운 일은 없다; 그리하여,

많은 성부들의 능란한 교향곡을 통하여 인간은 실제로 한 시간의 짧은

부분에서 세계의 전체적인 시간적 영속성에 대한 전망을 떠올린다; 그리고

하느님의 메아리인 음악을 통하여 향유되는 황홀경에 대한 가장 달콤한

느낌에서 인간은 틀림없이 창조자 하느님이 자신의 작품들에서 경험하는

만족에 거의 도달한다.

 

 

 

 

 

 

 

 

 

 

 

 

 

 

 

 

 

 

 

 

 

 

 

 

 

주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