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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생명체는 문제해결 중이다, II부 10장 냉소적 역사해석에 대한 반대론

이윤진이카루스 2021. 4. 7. 12:46

모든 생명체는 문제해결 중이다, II부 10장 냉소적 역사해석에 대한 반대론.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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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소적 역사해석에 대한 반대론*

 

 

 

 

나의 긴 생애에서 나는 지루함을 느낀 적이 없다 강의들을 들을 때를 제외하고, 그리고 특히 매우 고통스러운 두뇌 마비를 초래한 저 학교 교육들을 제외하고. 그 효과는 특히 역사와 지리에서 치명적이었다고 나는 기억한다.

그렇다면 많은 역사교사들이 자기들의 수업에 냉소를 다소 가미한다면 아마도 용서될 수 있다. 그리고 그 교사들이 너무 멀리 나아가서 역사에 관한 냉소적인 견해를 유행의 최고점으로 만든다면 틀림없이 용서될 수는 없을지라도, 이해될 수는 있다.

냉소적 해석은, 더 일반적으로 뿐만 아니라 역사에서 탐욕이 과욕, 돈 긁어모으기, 황금, 석유 그리고 권력 항상 명령한다고 서술한다. 통치의 독재적 형태에서 그리고 또한 민주주의 국가들에서 저것이 항상 그랬던 상황이고 항상 그럴 상황인데, 유일한 차이점은 민주주의 국가들에게 위선이기 때문에 가능하다면 훨씬 더 나쁘다고, 역사교사들은 말한다. 나는 이 이론을, 틀렸을 뿐만 아니라 무책임한 것으로서 간주하는데 정확한 이유는 그 이론이 합당한 듯이 보이기 때문이다. 그 이론과 싸울 시급한 필요가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유인즉 우리가 우리 자신과 우리의 역사에 관하여 생각하는 것은 우리에게 다소 중요하고 우리의 결정들과 우리의 행동들에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내가 오늘 이 주제를 선택한 이유이다.

역사에 대한 냉소적 해석은, 내가 여기서 언급하고 싶은 세 가지 주요 유행들 중에서 가장 최근의 유행이다. 오늘날 그 유행은 마르크스주의적 해석의 직접적인 계승으로 보이는데 마르크스주의적 해석은 반대로, 역사에 대한 민족주의적 혹은 인종주의적 설명이 붕괴한 이후에 크게 유행하게 되었다.

독일에서 민주주의적 혹은 인종주의적인 역사 해석은, 나폴레옹의 전쟁들과

 

* 19915월 아이히슈테트(Eichstätt) 대학에서 행한 강좌.

 

히틀러의 제국 붕괴 사이에 번창했다. 심지어 히틀러 이전에도 유행했기 때문에 그 해석은 지성적인 분위기인 한 가지 세계관을 낳았는데 그 세계관이 없었더라는 히틀러의 등장은 가능하지 않았을 터이다. 이 세계관에 대하여 우리가 신세를 지고 있는 사람은 부분적으로 나폴레옹이고 부분적으로 헤겔이다.a 역사는, 문제가 되고 있던 쟁점이 인종 말살로 민족들과 인종들 사이에서 지배를 위한 투쟁으로 알려진다. 이 역사 이론에 따르면, 예를 들어 히틀러 제국의 패배는 독일인들의 말살을 의미해야 했다. 이 이론적으로 예언된 독일인의 말살을 실행하는 모든 실제적인 조치를 히틀러가 막판에 취했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 예언은 다행히도 허위로 판명되었다.

진지하게 고려될 가치가 있는 이론은, 예언이 실현되지 않고 그런 종류의 것이 고도록 유행성인 민족주의적 역사 해석과 동시에 발생했을 때, 불신을 받는다. 이것은 틀림없이, 헤겔적이고 민족주의적인 해석들 이후에 마르크스주의적 역사 해석이 크게 유행했다는 당시 동부 독일이던 곳에서만은 전혀 아니다 사실에 기여했다. 세 번째이자 냉소적인 유행의 승리를 최근 초래한 것은 마르크스주의적 역사관의 지식적 붕괴이기b 때문에, 저 역사관을 다소 더 면밀하게 검토함에 의하여 나는 시작해야겠다. 무엇보다도 마르크스주의적 역사 해석에 반대하는 싸움이 나의 생애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기 때문에, 나는 이렇게 하기를 원한다.

마르크스주의적 해석은, ‘유물론적 역사관역사적 유물론이라는 명칭들에 의하여 알려지는데 두 가지 모두는 마르크스와 엥겔스에게로 거슬러 올라간다. 마르크스주의적 해석은, 역사를 인종적 갈등들로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 계급투쟁들로 구성된 것으로 보기 때문에 헤겔의 역사철학에 대한 재해석이다. 마르크스주의적 해석에는 한 가지 목표가 있다: 사회주의가 (혹은 공산주의 단어들은 중요하지 않다) 역사적 필연성으로서 틀림없이 승리한다는 증거를 (과학적 증거) 제공하는 것.

이 증거라는 것이, 마르크스의 저서 철학의 빈곤(The Poverty of Philosophy)의 마지막 세 쪽에서 최초로 발견될 수 있는데 그 저서는 원래 1847년 프랑스어로 철학의 빈곤(Misère de Philosophy)으로서 출현했다.

 

a 역주: 이 문장의 원문은 It is partly Napoleon, partly Hegel whom we have to thank for this view of the world.인데 허형은 번역은 민족주의 사조는 일부 나폴레옹의 사상과 일치하며, 일부는 헤겔 덕분에 존재하는 것이라 봐도 좋다.’이다.

b 역주: ‘지식적 붕괴의 원어 표현은 intellectual collapse인데 허형은 번역에 누락되었다.

 

기에 증거가 나타났다.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이다. 우리 시대에 (마르크스는 1847년에 저술하고 있었다) 이것은 착취자들인 유산계급과 피착취 생산자들의 계급인 무산계급 사이의 투쟁들을 의미한다. 이 투쟁은 생산자들의 승리로만 끝날 수 있는데 이유인즉 생산자들이 계급을 의식해서 조직되면 그들은 생산을 중단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당신들의 강력한 팔이 의지를 보인다면 모든 바퀴들을 멈춘다.’ 다시 말해서, 생산자들은, 아직 의식하지 못할지라도, 물질적인 힘을 자기들의 손아귀에 쥐고 있다. 게다가 생산자들은 압도적 다수를 차지한다. 소위 사회 혁명에서 그들의 해방인 그들의 승리는 그리하여 틀림없이 일어난다. 이것은 틀림없이 유산계급의 박멸로 끝나는데 승리한 무산계급의 독재를 통하여 발생하는 과정이다.

이로 인하여 단 하나의 계급으로 구성된 사회가 생기는데 그 사회는 그리하여 계급 없는 생산자들의 사회이다. 더 이상 지배계급이 없고 그리하여 유산계급이 박멸되자마자 지배자들도 없고 피지배자들도 없다. 그리고 계급 없는 사회는 지구상에서 갈망된 평화를 가져오는데 왜냐하면 모든 전쟁들은 계급 전쟁들일 따름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요컨대, 사회주의가 틀림없이 도달하는 역사적 필연성에 대한 표면적으로a 과학적인 증거이다.

이미 1847, 철학의 빈곤의 끝에서 두 번째 쪽에서 마르크스는 자신의 설명에 대한 반론을 고려했다. 구사회의 붕괴 이후에 새로운 정치권력에 정점을 이루는 새로운 계급지배가 있을 수 없을까?b 그렇게 명백하게 중요한 이 질문에 대하여 그는 단 한 마디의 말로 답변한다: ‘없다.’ 생산자들의 계급 자체는 분열하지 않을 것이라고 그는 전제하는 듯이 보인다; 프랑스 혁명에서처럼, 한편으로는 자신의 관료체제와 경찰 및 충복들에 의하여 지지를 받는 나폴레옹적 독재자들의 새로운 지배계급과 다른 한편으로는 다른 모든 사람들 사이에서의 분열이 없을 것이라고. 마르크스는 저 분열을 예견하지 못했다.

사회적 혁명과 불가피한 사회주의 도래에 대하여 과학적인 예언을 제공한다는 뉴튼의 천체 역학의 도움을 받아서 일식이 예측될 수 있는 바와 꼭 마찬가지로 마르크시즘의 주장은 지독한 도덕적 위험성을 내포한다. 1차 세계대전의 막바지인 1918~1919년 겨울, 내가 166개월이던 때 나는 나 자

 

a 역주: ‘표면적으로의 원어는 ostensibly인데 허형은 번역에 누락되었다.

b 역주: 이 문장의 원문은 Could it not be that after the fall of the old society there will be a new class dominance culminating in a new political power?인데 허형은 번역은 새로운 지배계급이 결국 새로운 정치세력의 생성을 야기하지는 않을까?’이다.

 

신의 생애에서 이것을 경험했다. 젊은이가 사회주의의 역사적 필연성에 대한 증거에 의하여 기망을 당할 때 그는 내가 보았던 것처럼, 공산주의자들이 흔히 거짓말을 하고 도덕적으로 비난을 받을만한 수단을 사용함을 그가 볼지라도 자신도 돕겠다는 깊은 도덕적 의무감을 느낀다.a 이유인즉 사회주의가 틀림없이 도래한다면, 그 도래와 싸우는 것은 분명히 범죄이기 때문이다. 정말로 사회주의의 도래를 촉진하는 것이 모든 사람의 의무여서 반드시 도래하는 것은 가능한 한 적은 저항에 부딪힐 것이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가 당신이 도덕적으로 혐오스러운 것으로 발견하는 것들을 당신이 지지하거나 적어도 억누르는 것을 의미할지라도, 당신이 개인으로서 충분히 강력하지 못하기 때문에 당신의 당과 함께, 운동과 함께 가야하고 당신의 당을 충성스럽게 지지해야 한다. 이것은 틀림없이 개인적인 타락을 초래하는 계기이다. 당신은 점점 더 지성적 농간과 변명들 및 거짓말들을 억누르게 된다. 그리고 당신이 특정 경계선을 넘어서자마자, 당신은 상상컨대 무엇이든 수용할 준비가 된다. 저것은 정치적 테러리즘으로, 범죄로 향하는 길이다. 내가 17살 생일을 맞기 바로 전 마르크시즘을 최종적으로 내가 거부했을 때인 약 8주 후에 나 자신은 이 계기를 피했다. 시위에서 경찰의 총에 맞은 몇몇 젊은 동무들의 죽음에 영향을 받고 나는 다음과 같이 자문했다: ‘이 과학적 증거라고 주장되는 것을 너는 정말 사실로 아냐? 어떤 실제적인 방식으로 그 증거를 너는 비판적으로 시험했냐? 다른 젊은이들에게 목숨을 걸라고 부추긴 것에 대하여 너는 책임을 질 수 있냐?’

분명히 아니다가 이 질문들에 대한 유일하게 솔직한 답변임을 나는 알았다. 나는 실제로 마르크주의의 증거를 비판적으로 시험하지 않았다. 나는 다른 사람들의 승인에 나 자신이 의존하도록 부분적으로 내버려두었고 그 다른 사람들은 반대로 다른 사람들에게 (나 자신을 포함하여) 의존했다 모든 참가자들이 지성적으로 파멸하고 (무의식적으로) 서로를 거짓으로 끌어들이는 상호간의 보장. 그것은 내가 나 자신 속에 인정한 상태였고 그것은 분명히 당지도자들을 아주 강압적으로 장악했다.

모든 것이, 계급 없는 사회의 도래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적 증거를 촉발시킨

 

a 역주: 이 문장의 원문은 When a youngster is taken in by the proof of the historical necessity of socialism, he feels a deep moral obligation to offer his help even if he sees, as I did, that the communists often lie and employ morally reprehensible means.인데 허형은 번역은 정신적으로 덜 성숙한 청년이 사회주의의 역사적 당위성에 설득당하면, 그 젊은이는 자신이 도움이 되어야 한다는 도덕적 의무감에 사로잡힌다. 공산당원들이 종종 거짓말을 해대고 도덕적으로 비난받아 마땅한 수단을 사용하는 것을 목격해도, 당시로서는 쉽게 합리화할 수 있다. 나 또한 그랬다.’이다.

 

다고 나는 배웠다.a 그러나 이것은, 마르크스가 반론의 가능성을 보고 부인한 바로 그 시점에 몰락했다. 분명히 당의 도움을 받아서 새로운 계급을 시작하고 그리하여 마르크스의 소망들을 부정한 사람들은 당지도자들이다. 새로운 지배계급은 미래 백성들을 속이고 불신하지만 그 백성들의 신뢰를 요구한다. 이미 승리와 독재 이전에 그 지도자들은, 곤란한 질문들을 제기한 모든 사람들을 당으로부터 축출한 지배자들이었다. (그 지도자들은 그런 사람들을 아직 죽일 수는 없었다.) 이것이 질문들을 다루는 그들의 방식이었다. 이것이 당 강령의 근원이었다.b

이 모든 것을 직시할 훌륭하고도 받을 자격이 없는 행운을 나는 결국 경험했다. 17세 생일에 나는 마르크시즘에 영원히 등을 돌렸다. 내가 조금이라도 덜 길게 마르크시즘과 함께 갔더라면 나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을 터인가? 심지어 용감하고 결의가 굳은 사하로프(Sakharov) 같은 반체제 인사도, 마르크스주의적 증거에 의하여 오랫동안 충분히 홀려서 먼저 스탈린의 손아귀에 (충복 베리아[Beria]를 통하여) 발명된 최고로 무시무시한 대량 살상 무기들을 쥐어주었고 그 다음에 흐루시초프의 손아귀에 쥐어주었다.c 심지어 더 약한 무기 형태에서도 사하로프가 고안한 초강력 폭탄은 히로시마에 투하된 원폭보다 수천 배 더 강력했다.

나 자신은, 마르크스의 증거를 신뢰했고 공산당원이던 중요한 과학자들을 나중에 만났다. 가장 훌륭한 과학자들 중에서 한 명을 공산당에서 떠나도록 내가 설득해서 나는 자랑스럽다. 그는 훌륭한 생물학자 J.B.S. 홀데인(Haldane)이었다.

스탈린의 사망에 즈음하여, 사하로프는 스탈린이 저지른 범죄행위들을 인류애적인 행위들로서 용서했는데, 인류를 위하여 결정적으로 중요한 사회혁명에서 (그가 본 바와 같은 혁명) 그런 범죄행위들은 불가피했다는 근거들을 들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바로 초기 단계에 우리는 자신의 이상들을 위하여 다른

 

a 역주: 이 문장의 원문은 Everything turned upon the Marxist proof of the coming of a classless society, I learnt.인데 허형은 번역은 모든 것은 계급 없는 사회의 도래로 결정된다고 나는 배웠다.’이다.

b 역주: 이 문장의 원문은 This was the source of party discipline.인데 허형은 번역은 그리고 당 질서가 유지되는 이유이기도 했다.’이다.

c 역주: 이 문장의 원문은 Even a brave and determined dissident like Sakharov was for a long time sufficiently captivated by the Marxist proof to press into the hands first of Stalin (via his henchman Beria), and then of Khrushchev, the most terrible weapons of mass destruction ever invented.인데 허형은 번역은 용기와 결단력을 갖춘 반체제 인사 사하로프 같은 사람도 상당 기간 마르크시즘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사상 최대의 파괴력을 갖는 대량살상 무기를 먼저 스탈린의 심복인 베리아Lavrentii Pavlovich Beria를 통하여 스탈린 손에, 이어서 흐루시초프의 손에 쥐어주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이다.

 

사람이 아니라 우리 자신만 희생시켜야 한다는 것을 나는 분명히 알았다.

마르크스의 증거에는 사회주의의 도래와 지구상에서의 평화의 불가피성을

밝히려는 의도가 있었을지라도, 속류 마르크시즘으로 기술될 개연성이 높은 역사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적 관점에는 다른 특징들이 있다. 그 특징들을 간략하게 요약하자. 사회주의를 위하여 투쟁하지 않는 모든 사람은 자기-이익에 의

하여 동기를 부여받고 다른 것에 의하여 동기를 부여받지 않는다. 사람들이 이것은 수용하지 않으면, 그 사람들은 사기꾼들이고 위선자들뿐이다 정말로 아주 나쁜 범죄자들이다. 이유인즉 사람들이 사회주의 도래를 지체시키려고 시도한다면, 진보를 위하여 실행되어야 할 모든 인간적 희생에 죄를 짓기 때문이다. 혁명이 폭력적으로 행동하도록 강요하는 것은 중단될 수 없는 혁명에 대한 저항이다. 혁명가들이 피를 흘리도록 강요하는 것은 그런 범죄자들의 탐욕이다.

이제 나는 역사 해석에서 세 번째 큰 유행으로 온다.

사회주의 도래가 마르크스주의 이론에서 떨어진다면 냉소적 역사관이 이어진다는 것은 분명하다. 새로운 이념들은 필요하지 않다 아니면 기껏해야, 사태가 항상 그랬고 항상 그럴 것이어서 굶주림과 강제 추방과 전쟁 및 빈곤은 심지어 실제로 풍요로운 사회에서도 주요 역할을 할 것이라는 비관론적 이념만 필요한데 왜냐하면 사회는 권력과 황금과 석유를 탐하는 사람들에 의하여 그리고 비도덕적인 무기산업에 의하여 통제되기 때문이다.

마르크시즘과 그리하여 냉소주의 또한, 가장 부유한 국가인 미국에서도 물론 모든 것이 매우 나쁘다고 가르친다. 이것이, 반미론이 다른 나라들 특히 전혀 그렇게 부유하지 않은 나라들에서 출현하는 방식이다.

이것으로, 역사에 대한 초현대적인 냉소적 관점과 그 관점의 위험스럽게 영향력을 지닌 두 가지 과거 관점들에 대한 나의 개괄이 끝난다. 이제 나는 나 자신의 견해들 중 몇 가지 견해로 급작스럽게 선회한다. 어떻게 급작스러운지 여러분은 나의 다음 진술로부터 알 수 있을 것인데 그 진술을 나는 나의 언급의 후반부의 제목으로 이용할 수 있을 터이다: 나는 낙관론자이다.

나는, 미래를 알지 못하고 그리하여 예언을 하지 않는 낙관론자이다. 우리가 판단할 수 있고 판단해야 하는 현재와 우리가 영향을 미칠 수 있는 활짝 열린 미래를 우리는 매우 분명하게 구분해야 한다. 그리하여 미래가 단지 과거

와 현재의 연속이라면 우리가 어떻게 미래를 대면할지와 전혀 다르게, 미래를 대면할 도덕적 의무가 우리에게 있다. 열린 미래에는 예견될 수 없고 도덕적으로 전혀 다른 가능성들이 놓여있다. 그리하여 우리의 기본적인 태도는 무슨 일이 발생할까?’가 아니라 세상을 다소 낫게 만들기 위하여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우리가 그렇게 하자마자 미래 세대들이 혹시 모든 것을 다시 악화시킬 것을 우리가 알지라도?’가 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나의 강좌 후반부는, 다음 두 가지 질문들을 또한 다룬다: 현재에 관한 나의 낙관론; 그리고 미래와 관련된 나의 활동론.

나를 다시 낙관론자로 만든 것은 1950년 나의 첫 번째 미국 방문 여행이었다고 나는 곧장 말하고 싶다. 그 후 나는 아마도 20차례나 25차례 미국에 갔다 왔고 갈 때마다 나는 더 깊은 인상을 받았다. 저 첫 번째 여행에서, 2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에서 압도적인 마르크시즘의 영향에 의하여 초래된 우울증으로부터 나는 영원히 벗어났다. 나의 저서 열린사회와 그 적들은 히틀러가 오스트리아로 진군한 1938년에 시작되어 1945년에 마침내 출간되었다. 그러나 그 저서가 잘 팔렸고 호의적으로 검토되었지만, 마르크시즘의 승리에 관하여 어떤 일을 한다는 것이 불가능해 보였다.

여기서 나는 나의 낙관론의 주요 요소들을 설명해야겠다.

 

1 나의 낙관론은 미래가 아니라 현재를 배타적으로 참고한다는 것을 나는 반복해서 말한다. 진보의 법칙과 같은 것이 있다고 나는 생각하지 않는

. 심지어 과학이나 과학기술에도 그런 법칙은 없다. 진보는 심지어

개연성이 있는 것으로서 기술될 수도 없다.a

2 서양에 있는 우리는 지금 역대 최고의 사회에 산다고 지식인들

대부분의 대역죄에b 불구하고 우리는 그런 사회에 사는데 그 지식인들은

새로운 비관론적 신앙을 설교하고 그 신앙에 따르면 우리는 도덕적 지옥

에 살면서 육체적c 및 도덕적 오염 때문에 멸망하고 있다 나는

주장한다.

3 이 비관론적 신앙은 악랄한 거짓말이라고 그리고 나의 요점들 중

한 가지 요점에 곧장 와서 우리 자신의 사회만큼 개혁에 열정적인

사회는 이전에 없었다고 나는 주장한다.

4 개혁에 대한 이 열정은 희생하려는 새로운 윤리적 각오인, 양차 세계

대전에서 이미 드러난 (양편 모두에서) 각오의 결과이다. 7년 전쟁에서

프리드리히 II세는 자기 부하들에게 죽음을 직시하라고 여전히 강요해야

 

a 역주: 이 문장의 원문은 Progress cannot even be described as likely.인데 허형은 번역은 진보는 진보로 묘사될 수도 없다. 진보가 일어난다고 해서 알아차릴 수도 없다는 뜻이다.’이다.

b 역주: ‘대역죄의 원어 표현은 high treason인데 허형은 번역은 세상에 대한 불신이 최고조에 달한이다.

c 역주: ‘육체적의 원어는 physical인데 허형은 번역은 물리적이다.

 

했다. 그의 전쟁 구호는 유명하다: ‘너희들 잡종견들a, 너희들은 영원히

살고자 하는가?’ 그러나 당시 윤리적 가치들에 호소하는 것이 충분하다

는 것이 밝혀졌다: 독일에서 의무와 조국애에 호소하는 것, 서양에서

조국과 자유와 평화에 호소하는 것; 양측 모두에서 전우애에 호소하는

.

 

나 자신의 경험으로부터 내가 이미 지적한 바와 같이, 공산주의의 힘은 자체의 윤리적 호소력에 놓여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리고 평화 운동에 관해서도 마찬가지다. 나는 또한, 많은 테러리스트들이 원래 윤리적 호소에 응답했다고 생각하는데 그러나 내가 이미 언급한 저 내부적 이중성에 안에서 그들은 그 호소에 빠졌다.

버트런드 러셀은 내가 여러 해 동안 매우 가깝게 느꼈는데 그 후 노인으로서 그는 어느 공산주의 비서에게 휘둘려서, 우리 시대의 문제는 우리의 발전이 지식적으로 너무 빠르고 도덕적으로 너무 느려서 우리가 핵물리학을 발견했을 때 우리가 때에 맞추어 필수적인 도덕적 원칙들을 이룩하지 못했다고 그는 서술했다. 다시 말해서 러셀에 따르면 우리는 너무 영리하다 그러나 도덕적으로 우리는 너무 나쁘다. 많은 냉소주의자들을 포함하여 많은 사람들의 러셀의 의견을 공유했다. 나는 정반대로 믿는다. 우리는 너무 선량하고 너무 어리석다. 우리는 우리의 도덕 감정에 직간접으로 호소하는 이론들에 의하여 너무 쉽게 휘둘려서 이 이론들에 대한 우리의 태도는 충분히 비판적이지 못하다. 우리는 그 이론들과 관련하여 지식적으로 충분히 성숙하지 못하여 기꺼이 우리 자신을 희생하여 이론들에 도움을 주는 희생자가 된다.

나는 나의 낙관론의 긍정적인 측면을 다음과 같이 요약할 터이다. 우리는 훌륭할 뿐인 세상에서 살고 여기 서양에서 우리는 역대 최고의 사회제도를 만들어냈다. 우리는 부단히 그 제도를 개선하려고, 그 제도를 개혁하려고 시도하고 있다 그 일은 결코 쉽지 않다. 유망한 것으로 보이는 많은 개혁들이 잘못 구상된 것으로 밝혀진다. 이유인즉 우리의 사회적 및 정치적 행위들의 결과들이 흔히 우리가 의도한 것과 전혀 달라서 우리가 예견할 수 없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 매우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 중 많은 사람들이 (예를 들어 나 자신) 소망했던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우리는 성취했다.

우세한 이념은 우리가 도덕적으로 사악한 세상에 살고 있다고 보는데 악랄

 

a 역주: ‘잡종견들의 원어는 curs인데 허형은 번역은 겁쟁이들이다.

 

한 거짓말이다. 그 이념이 퍼짐에 따라서 많은 젊은이들은 젊은이들이 자신들을 지탱하는 어떤 희망이 없으면 전혀 살아갈 수 없을 시대에 좌절하고 절망한다. 반복한다: 나는 미래와 관련하여 낙관론자가 아니다, 이유인즉 미래가 열려있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진보의 법칙은 없다. 우리는 내일이 어떠할지 알지 못한다. 아무도 예견할 수 없는, 좋고 나쁜 수십 억 가지의 가능성들이 있다. 나는 역사에 관한 세 가지 해석들의 예언자적인 목표-설정을 거부하고, 도덕적인 근거들을 토대로 우리가 그 해석들을 대신해서 여하한 것도 설명해서는 안 된다고 나는 주장한다. 심지어 역사로부터 추정하려고 시도하는 것도 예를 들어, 현재 추이로부터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지를 추론함에 의하여 틀렸다. 역사를 적어도 부분적으로 예측될 수 있는 물결로서 보는 것은, 심상이나 은유로부터 이론을 구축하는 것이다.

전진하는 유일하게 옳은 방법은, 과거를 미래와 전혀 다른 것으로서 간주하는 것이다. 무엇이 가능하고 무엇이 도덕적으로 옳은지를 배우기 위하여 우리는 과거 사실들을 역사적으로 그리고 도덕적으로 판단해야 한다. 미래에 관하여 예언을 하기 위하여 과거로부터 추이들과 방향들을 도출하려고 우리는 조금이라도 시도해서는 안 된다. 이유인즉 미래가 열려있기 때문이다. 어떤 일도 발생할 수 있다. 이 순간에, 소련에는 수천 개의 초강력 폭탄이 있고 그 폭탄들을 행복하게 사용할 터인 많은 과대망상증 환자들이 틀림없이 있다. 인류가 내일 말살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커다란 희망들도 있다; 현재보다 훨씬 더 좋을 미래를 위하여 셀 수 없이 많은 가능성들이 있다.

불행하게도 미래를 바라보는 이 방식은 파악하기가 쉬워 보이지 않는다. 몇몇 지식인들은 어떤 현명한 사람에게 미래로 들어가는 길을 지시하라고 요구할 것을 마르크시즘으로부터 배운 지식인들 미래와 과거와 현재를 구분할 수 없을 따름이다. 현재에 관하여 낙관론자들이면서 미래에 관해서는 낙관론자들이 아닌 사람들이 없기 때문에 나의 낙관론은 틀림없이 적어도 가식적인 충고라는 말을 나는 한번 이상 들었다.

그러나 현재에 관한 나의 낙관론이 미래에 관하여 제공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희망이다. 그 낙관론은 우리에게 희망과 보상책을 제공할 수 있다; 이유인즉 우리가 많을 것들을 낫게 만드는 데 성공했고 유사한 성공이 미래에 불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하녀들이 1920년대에 노예 신분에서 해방된 이후 서양에는 노예상태가 거의 없었다. 적어도 이런 의미에서 서양이 자유롭다는 사실을 우리는 자랑스러워할 수 있다.

미래에 관한 한, 우리는 예언하려고 시도해서는 안 되고 도덕적으로 옳고 책임이 있는 방식으로 행동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이것은, 이념이라는 색깔 안

경을 통하여서가 아니라 현재를 올바르게 보는 것을 배우는 의무가 우리에게 있음을 의미한다. 우리는 현실로부터, 성취 가능한 것을 배울 수 있다. 그러나 역사에 관한 저 세 가지 이념적 구상들 중 한 가지 구상의 렌즈를 통하여 우리가 현실을 본다면, 우리는 배워야 하는 우리의 의무를 저버린다.

미래는 열려있고, 미래를 현재보다 훨씬 낫게 만들기 위하여 최선을 다할 책임이 우리에 있다. 그러나 이 책임은 자유를 전제한다. 독재체제에서 우리는 노예들이고 노예들은 자신들이 하는 것에 대하여 완전히 책임지지 않는다. 이것으로 나는 나의 마지막 주요 논지에 다다른다.

정치적 자유는 독재로부터의 자유 모든 정치적 가치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이다. 그래서 우리는 정치적 자유를 위하여 싸울 준비가 되어있어야 한다. 정치적 자유는 항상 없어질 수 있다. 우리는 뒤로 물러나서 우리의 자유가 안전하다고 전제해서는 결코 안 된다.

전제적 통치 하에서, 모든 사람은 인류를 배신하는 그리하여 자신들의 인간성을 상실하여 비인간적이 되는 위험에 처한다. 심지어 안드레이 사하로프(Andrei Sakharov) 같은 사람도 (나중에 보인 그의 칭찬받을 만한 행동은 그가 독재에 저항하는 용기를 지녔음을 밝혀주었다), 심지어 그도, 젊은이로서 가학적(加虐的: sadistic) 범죄자처럼 행동할 수 있었다. 내가 밝힌 바와 같이 그는 가장 무서운 대량 파괴 무기들을 스탈린의 충복인 가학증 환자 베리아(Beria)의 손에 쥐어주었을 뿐만 아니다; 그는 러시아 해군에 의하여 그 무기들을 사용할 목적으로 훨씬 더 무서운 계획을 전개했다. 고위 장교가 이 계획을 거부했는데 왜냐하면 그 계획이 전투 윤리와 상충되었기 때문이었고 사하로프는 자신이 부끄러웠다고 진술한다. 그가 저 광적이고 타락한 마르스크주의적 이념들에 의하여 눈이 멀고 그리하여 위대한 인본주의자인 스탈린의 임무를 신뢰했기 때문에 그것이 당시 그가 스탈린을 본 방식이다 이 모든 일이 발생했다. 이 독재 분위기에서 사하로프는 순간적으로 순간적이지만 상상이 되는 한 가장 큰 재앙인, 모든 생명체 위에 다모클레스(Damocles)의 검을 매다는 일을 준비하기에 충분히 오랫동안 정말 미친 짐승이 되었다.

독재는 우리에게서 인간성을 빼앗아 가는데 이유인즉 독재가 우리에게서 인간으로서 우리의 책임을 빼앗아 가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신의 양심을 따르는 사람은 불가능한 일들에 자신이 직면함을 알게 된다: 자신의 가족에 대한 자신의 의무들과 박해를 받는 사람들을 돕는 자신의 의무 혹은 적어도 그들이 받는 박해에서 부역하지 않는 자신의 의무 사이에서의 갈등과 같은 해결 불가능한 갈등들. 자신에 대한 진정한 자신의 의무들을, 자신을 감독하는 독재자들에 대한 거짓인 소위 의무와 혼동하지 않는 용기를 그는 틀림없이 지녔다. 사하로프가 자신이 이행하리라고 흐루시초프에게 약속했고 나중에 자신을 옹호하는 데 독일 전범들이 그러했던 것과 꼭 마찬가지로 이용했던 그런 거짓 의무이다.

인간의 의무감과 책임감을, 그 의무감과 책임감을 이행하려고 노력하는 사람들과 함께, 독재가 어떻게 파괴하는지는 잊을 수 없는 뮌헨의 백장미단(the White Rose) 사례에 의하여 알려질 것인데 백장미단은 1942~43년 겨울 학생들과 한 명의 교수로 이루어진 비밀조직으로 히틀러의 전쟁에 대하여 저항을 요구하는 포스터를 붙였다. 1943222일 한스 숄(Hans Scholl)과 그의 누이 조피(Sophie)는 크리스토프 프롭스트(Christoph Probst)와 함께 처형되었다; 알렉잔더 슈모렐(Alexander Schmorell)과 쿠르트 후버(Kurt Huber) 교수는 1943713일에 처형되었다; 빌리 그라프(Willi Graf)19431012일에 처형되었다. 한스 숄은 24살이었고 조피는 21살이었다; 다른 학생들은 같은 나이였다. 그들의 동료들 중 몇몇은 오늘날에도 아직 살아있다.

우리에게 모범이 될 수 있는 영웅들은 우리 시대에 드물어졌다. 저 사람들이 영웅들이었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이 이어받을 것이라는 희망에서 자기들에게 거의 희망이 없는 투쟁을 시작했다. 그래서 그들은 모범이다: 그들은 자유와 책임을 위하여 그리고 그들과 우리의 인간성을 위하여 싸웠다. 독재의 기괴한 비인간적 권력이 그들을 침묵시켰다. 우리는 그들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우리는 그들을 대신해서 말하고 행동해야 한다.

정치적 자유는 우리의 개인적인 책임인 우리의 인간성에 대한 전제조건이다. 나은 세상을 향하여 발걸음을 내딛으려는 어떤 시도도 자유라는 기본적 가치에 의하여 통제되어야 한다.

미국혁명이라는 위대하고 거의 항상 오해되는 사례가 주목되지 않는 (적어도 학교에서) 반면, 유럽이 프랑스 혁명이라는 실패한 (적어도 드골[de Gaulle]이 제5 공화국을 세울 때까지 실패한) 사례에만 거의 항상 집중했다는 것은 비극적이라고 나는 안다. 이유인즉 미국은, 아테네의 솔론(Solon)이 최초로 실행하려고 시도했고 칸트가 광범위하게 분석한 개인적 자유라는 이념이 유토피아적 꿈은 아니라는 증거를 제공했기 때문이다. 미국의 사례는, 자유에 헌신하는 형태의 정부가 가능할 뿐만 아니라 가장 큰 난제들을 극복할 수도 있음을 보여주었다.a 무엇보다도 미국의 사례는, 권력 분할과 분배를 통한 그

 

a 역주: 이 문장의 원문은 The American example has shown that a form of government dedicated to freedom is not only possible but capable of overcoming the greatest difficulties.인데 허형은 번역은 미국의 독립전쟁은 자유의 수호에 헌신할 줄 아는 정부 형태가 가장 큰 어려음도 극복할 수 있다는 점을 충분히 증명하였다.’이다.

 

리고 그렇게 나누어진 권력들 가운데서 상호 감시와 견제를 통한 독재 방지특히 국민 다수의 독재a 근거한 정부 형태이다. 이 이념은, 독일 민주주의의 기본법을 포함하여, 모든 다른 민주주의 체제들에 영감을 불어넣었다.

그러나 미국은 험난한 시대를 거쳐야 했다. 미국은 혁명과 독립전쟁 이후 항상 험난한 시대를 거치고 있었고, 미국이 커다란 성공들을 이루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험난한 시대의 끝장을 아직 보지 못했다. 자유를 위한 투쟁은 계속된다.

모든 개인의 자유라는 위대한 이념은 미국혁명에 영감을 불어넣었는데, 혁명 이전 시대부터 특히 스페인인들로부터 계승된 노예제도와 가장 큰 대비를 이루었고 그 노예제도는 남부의 주들에서 1백 년 이상을 깊이 뿌리를 내렸다. 남부가 북부에 대하여 예방 전쟁을 시작했을 때. 미합중국은 그 쟁점에 관하여 둘로 쪼개져 있었다. 그 전쟁은 틀림없이 미국에서 가장 혹독한 전쟁이었는데 친구들과 같은 가족들이 서로 대적한 내전이었다. 자유로 향하는 미국의 여정이, 프랑스의 여정처럼 실패로 판명될 것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보였다. 그러나 양측이 낸 가장 큰 희생에도 (60만 명이 사망하고 그중에는 에이브러햄 링컨도 한 명이다) 불구하고 남부의 초기 성공적인 공격은 격퇴되었고 결국 제압되었다. 노예들은 해방되었지만, 과거 흑인 노예들의 자손들을 통합하는 방법에 관하여 큰 문제가 남았다; 피부색 차이점들 때문에 잊히기가 그렇게 쉽지 않던 잔인하고 몇 세기에 걸친 제도를 극복하는 방법.

이 상황이 심지어 상당히 정확하게 기술되어 평가된 독일의 역사적 업적을 나는 아직 보지 못했다.

나의 생애에서 가장 강력한 인상들 중 한 가지 인상은, 과거의 노예들이 동등한 인권을 지닌 시민들이 되는 것을 미국 정부가 도우려고 다양하게 시도하는 것을 내가 1950년과 1989년 사이에 내가 목격한 것에서 유래한다. 나는 한 가지 일화를 언급만 하겠다. 1956년 과거 남부 주들의 핵심에 있던 애틀랜타 대학에 나는 초빙교수로b 있었다. 당시 그 대학에는 흑인 학생들만 다녔고 백인 교수들은 소수였다. 한번은 유명한 흑인c 학자이던 총장에게, 이 크고 훌륭한 대학이 어떻게 그리고 언제 설립되었는지를 나는 물었다. 딥 사우스(Deep South) 지역에 있는 이 흑인 대학이, 남북전쟁 이후 6년 만에 모든 기독교 교회들에 의하여 백인 목사들과 흑인 목사들 및 교수들이 서로 협력하여

 

a 역주: 이 구절의 원어 표현은 not least the despotism of a majority of the people인데 허형은 번역은 특히 국민 다수에 의한 전제정치의 지양이다.

b 역주: 이 단어의 원어는 guest인데 허형은 번역은 교환학생이다.

c 역주: 이 단어의 원어는 black인데 허형은 번역에 누락되었다.

 

가르치던 몇 개의 흑인 대학들을 내가 생각하기에 8개 대학이다 통합하여 시작되었다는 것을 알고 나는 놀랐다.

이 이야기를 숙고하여, 남북전쟁의 종전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서술하는 마이어 백과사전(Meyers Enzyklopädisches Lexicon)의 항목과 비교하는 일을 여러분에 나는 맡긴다: ‘다른 한편의 노예제도는 남북전쟁의 원인이었는데 해결되는 듯이 보이기만 했다.’ 문제의 항목에 있는 많은 다른 것들이 그러한 것처럼, 이것은 내가 보기에 완전히 틀렸고 어떤 진정한 해결책을 저자는 제시했을 터인지 나는 의아하다. 아무튼 애틀랜타 대학의 역사는, 내가 나 자신의 눈으로 목격한 많은 다른 노력들이 그랬던 바와 같이, 나에게 강력한 인상을 남겼다.

나는 많은 나라에 가봤지만, 어느 나라에서도 미국에서처럼 자유로운 숨결을 느끼지 못했다. 어느 곳에서도 관용 및 도움을 주려는 열망과 배우려는 열망과 결합된 그렇게 많은 이상주의(理想主義: idealism)그렇게 능동적이고 실제적인 이상주의, 도움을 주려는 그렇게 큰 의지 나는 발견하지 못했다. 나중에 나는, 흑인들의 통합이 완벽한 성공이어서 피부색이 더 이상 어떤 역할도 하지 못하는 듯이 보이는 미국 대학들에 나는 또한 있었다.

나는 이 모든 것이, 열정적인 환대를 받지 못할 것임을 완벽하게 의식하고 말한다. 3년 전 하노버(Hanover)에서 열린 어느 회의에서a, 미국이 다른 몇 차례의 강좌들에서 공격을 받았기 때문에, 미국을 옹호했다. 진짜 고함소리가 일었고 나의 말에는 휘파람 합창이 따라왔다. 나는 이것을, 나의 청중이 지겨워하지 않는다는 신호로서 환영했다. 그리고 자유와 관용을 위하여 내가 싸우고 있다고 내가 상상할 수 있었기 혹은 확신할 수 있었기 때문에 나는 행복했다.

 

 

 

 

 

 

 

 

 

a 역주: ‘하노버에서 열린 어느 회의의 원어 표현은 a congress in Hanover인데 허형은 번역은 하노버의 의회이다.

 

주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