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 A. L. Fisher

유럽사, 그리스와 마케도니아

이윤진이카루스 2021. 9. 19. 0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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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V

 

                                                   그리스와 마케도니아

 

그리스의 분열. 마케도니아. 필리포스 II. 알렉산더. 헬레니즘 시대. 종교. 철학. 에피고노이(The Epigoni). 마케도니아 시대의 정치적 유산. 제국 숭배. 관료제도. 그리스의 분열은 로마의 기회이다. 그리스인들의 특징. 기독교에 미친 그리스의 영향.

 

기원전 4세기는 소크라테스의 기소와 죽음으로 열리는데 (기원전 399) 그리스 산문의 위대한 시기로서 그리고 마케도니아 제국의 발흥과 확장으로서 주로 기억될 수 있다. 소크라테스가 아테네에 의하여 인정된 신들(gods)을 믿지 않았다는, 그가 기이한 초자연적 존재들을 도입했다는 그리고 그가 젊은이들을 타락시켰다는 그에게 불리하게 작용한 기소로 인하여 한 민족의 충성도 및 관습들과 전통에 대하여 자유롭고 논리적으로 질문함에 의하여 세속적인 사람들에게서 일어난 솔직한 두려움이 드러난다. 이유인즉 정말로 그리스는 새로운 지성적 분위기로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는데 그 분위기에서 개인이 더 중요했으며 국가는 덜 중요했고 오래된 관습과 종교의 장애물들이 빠르게 붕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는 삶이 예술이고 지식은 삶의 열쇠라고 가르쳤는데 이 변화들의 배후에 있어서 기소를 당하여 독배를 마셨다; 그러나 해방적이어서 위대한 정신의 영향이 박해에 의하여 중단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헛되다. 소크라테스의 영예는 그의 종말이 초래한 비극에 의하여 커졌다. 그는 합리주의와 미덕의 성인(聖人: saint)으로서 존경을 받았다; 그리고 플라톤 철학의 아름다운 구조는 스승에 대한 제자의 존경심이고 스승의 명성에 대한 불후의 기념비이다.

마케도니아의 그리스 정복으로부터 스파르타의 아테네 정복을 가르는 66년 동안의 그리스 정치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오래된 악영향으로 다소 악화하였지만 지속성이 드러났다. 정파들은 여전히 사나웠고 정쟁은 여전히 격렬했지만, 용병들이 시민의 세금을 대신하는 경향을 띠었다. 과거의 교훈에서 나오는 장점들과 그렇게 멀리 이탈한 스파르타는, 아테네의 전성기에 아테네의 탓으로 여겨진 모든 잘못들을 반복했는데 아테네가 지녔던 벌충하는 은총들을 지니지 못했다. 페르시아에 대항하는 범-그리스적 통합이라는 오래된 이상은, 주로 현명한 이소크라테스의 연설에서 살아남았던 듯이 보인다. 모든 정파는 페르시아의 금고로부터 기꺼이 독립하려고 했으며 페르시아의 촉구에 기꺼이 움직였다. 소크라테스의 제자이자 교양을 갖춘 신사였던 크세노폰(Xenophon), 페르시아의 키루스(Cyrus) 휘하에서 스파르타의 용병 무리와 복무하는 것을 그리고 나중에 심지어 자신의 정신을 길러준 어머니인 아테네에 대항하여 스파르타군과 싸우는 것을 수치로 여기지 않았다. 스파르타가 페르시아와 맞섰을 때 아테네는 페르시아의 친구였고, 어느 아테네의 장군은 페르시아 함대를 지휘하고 페르시아의 자금을 받아 바다에서 스파르타인들을 무찌르고 아테네의 성곽을 재건했다. 다른 한편으로 스파르타가, 페르시아와 친교를 맺고 심지어 이오니아에 거주하는 아테네 출신 그리스인들의 이익을 엄혹하게 배반하는 지경까지 갔을 때 (387, 안탈키다스 평화조약[Peace of Antalcidas]) 아테네의 태도는 따라서 뒤집혔다. 안탈키다스라는 행운의 군인이 지녔던 정신은 행운이 혹시 발견되는 곳마다 행운을 낚아채서 상황을 장악했다.

이소크라테스는 당시 그리스 정치의 저주가 제국에 대한 욕심이라고 주장해서 아마도 옳다. 아테네, 스파르타, 테베, 포키스(Phocis) 등등 모두는 우위를 차지하려고 애썼고 각 국가가 행운의 정점에 오르면 그 국가는 질투하는 경쟁 국가들에 의하여 나락으로 끌려갔다. 심지어 자신의 시대에 가장 유능하고 가장 사심이 없었던 군인인 테베의 에파미논다스(Epaminondas)도 보에티아(Boetia)를 넘어서까지 볼 수 없었으며 훌륭한 정치적 연합을 이룩할 수 없었다.

그리스 문제의 해결책은 생각지도 않은 지역에서 왔다. 테살리아의 북쪽 테르마이코스 만(Thermaic gulf) 해안지역에 한 그리스 민족이 정착했는데 아테네나 코린트의 주민들보다 더 거칠고 덜 개화되었고 파리시민이 브리타니(Brittany)나 랑그도크(Languedoc) 주민들을 보는 것과 아주 비슷하게 남부 그리스인들에 의하여 간주되었다. 이들은 마케도니아인들로 술고래에다 싸움꾼들이었고 산악지역인 고국에서 삼림과 골짜기를 통하여 곰과 늑대를 열정적으로 사냥하고 여전히 호메로스 시대의 문명 속에서 살고 있었는데 왕족인 필립이 테베에서 에파미논다스로부터 전술을 익히고 24세에 모국에 돌아와 지배자가 되기까지 그들에게는 언급할 중요한 것이 많지 않다. 유럽사 전체에서 이 끈질기고 현명한 사람보다 (359-336) 더 효율적인 정치가는 없었다. 그가 왕위를 계승했을 때 마케도니아는 가난했지만 판게우스(Pangaeus) 산의 금광들이 개발되자 유럽 최고의 부유국이 되었다. 지리적 표현에 지나지 않던 이 나라를 (이유인즉 거친 일릴리아[Illyria]의 구릉지대에 사는 사람들은 명목상으로 왕에게 신하였지만, 퍼스[Perth]나 스털링[Stirling] 골짜기에 사는 농부들에 대한 17세가 고원지대 도둑들처럼, 저지대에 사는 그리스인들에게 친절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국가와 군대로 만들었다 ㅡ 건전하게 구성된 국가와 정신에서와 목표에서 민족적이고 전문적이며 게다가 기병에 보병을 날개로 달고 경보병과 중무장 군사들을 섞어서 그리스 국가들이 전장에 내보낼 수 있는 어떤 군대보다 우세했다. 마케도니아의 밀집 전투대형은 세계의 역사를 바꾸었다. 그 대형은 필립의 작품이었다. 급여를 제때 주는 필립에게 충성하며, 기병이 쐐기 형태로 날개들로 공격하여 승패를 결정짓는 동안 마케도니아 창병들은 전열을 열고 진격했다. 북쪽에 있는 이 반쯤 야만적인 신흥세력에 대한 그리스 국가들의 태도는 어땠을까? 필립은 친구가 되기를 갈망했다. 그의 거칠고 동물적인 본성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을 그리스인으로 간주하여 문화와 지식에 가치를 두었고 (마케도니아 궁정의 의사 아들인 스타기라[Stagira] 출신의 아리스토텔레스를 자기 아들의 교사로서 고용하여) 그리스 연맹의 종주국으로 인정되기를 갈망했다. 그의 자원을 그리스 국가들과 비교하는 진정한 현실주의자라면 그 국가들에게 필립의 선의를 찾으라고 충고했을 터이다. 심지어 동시대인들도 페르시아에 대항하여 그리스인들을 이끌 수 있고 그 국가들의 굶주리고 넘치는 인구들에게 소아시아에서 새로운 식민지 정착촌을 제공할 수 있는 우두머리가 당시 출현하지 않았는지 물었다. 아테네는 물론 마케도니아와 테살리아의 지배자이자 트라키아 정복자를 확고하게 이해함으로써 얻을 것이 많았다: 그러나 아테네 역사의 이 시점에서 아테네의 정책은, 마케도니아의 성장하는 권력에서 그리스의 전통적 자유에 대한 위협을 본 웅변가인 데모스테네스(Demosthenes)에 의하여 흔들렸는데 그 위협은 죽음을 무릅쓰고 저지되어야 했다. 데모스테네스의 연설은 정치적 자유에 관한 고전의 반열에 속하여 심지어 지금도 감명 없이 읽힐 수 없다: 그러나 그 연설은 유혈이 낭자한 카이로네이아(Chaeronea) 전장으로 이어졌을 따름이다. 여기서 필립은 테베와 아테네 연합군을 한 번에 무찔러서 그리스의 지배자가 되었다. 2년 후 그 정복자는 암살자의 손에 쓰러졌다. 코린트에서 열린 총회에서 그는 그리스와 신들(gods)을 위하여 소아시아의 그리스 도시들을 해방시키는 전쟁을 페르시아와 치르려는, 그리고 크세르크세스 통치 하에서 저질러진 신성모독 행위에 대하여 야만인들을 처벌하려는 자신의 의도를 공언했다. 그리고 마케도니아 건국자가 자신의 종말을 맞이한 것은 이 거대한 정복 전쟁에 출발하는 전야였다. 필립과 난폭한 올림피아스(Olympias) 사이에서 태어난 알렉산더가 그의 왕위와 거대한 야망들을 계승했다. 13년 동안의 짧은 통치에서 이 탁월한 젊은이는 그리스와 트라키아에서 마케도니아의 권위를 다시 주장했고, 테베를 초토화했으며 자신의 작고 기동력이 있으며 매우 효과적인 군대를 이용하여 소아시아와 시리아 및 이집트와 페르시아를 정복하고 카이버고개(Khyber Pass)를 넘어 인도 평원으로 자신의 노련한 마케도니아 군대를 진군시켰다. 어떤 군사적 지위도, 심지어 그를 모방했던 나폴레옹의 지위도 여기 아시아에서 그리스어와 문화까지 커지면서 동양 땅과 동양 민족들과 관련된 많은 새로운 사실들을 서양으로 가져와 역사에 더 넓은 영향을 발휘하지 못했는데 그것은 나중에 유럽이 십자군 원정에서 얻은 지식의 추가사항들에 의하여 비견될 따름이다. 게다가 알렉산더가 자신의 과업을 선출된 그리스 총사령관으로서 시작했음이 기억되어야 한다. 그리스의 전설들과 문학에 조예가 깊고 자신이 아킬레스의 후예라고 믿으며 그 금발의 젊은 마케도니아인은 트로이와 싸웠던 영웅들의 후계자로서 아시아에 도착했다. 그러나 그가 트로이에서 아킬레스 동상에 왕관을 씌우고 사르디스(Sardis)에서 제우스 신전을 건립하여 그리스의 임무를 띤 사람으로서 왔지만, 그는 광신에 물들지는 않았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충고에도 불구하고 그는 동양인들은 열등한 민족으로서 간주하기를 거부했고 동양인들의 종교를 금지하지 않았다. 사회적, 종교적 그리고 장치적인 현명한 관용이 그가 정복한 지역들의 통치에 알려졌다. 자유로운 사람의 활기찬 본성에서 신사이자 스포츠맨인 사람을 보면 반드시 우러나는 지지와 존경을 페르시아의 지주 귀족층은 그로부터 얻었다. 언급되는 바와 같이 70 곳의 그리스 도시를 건설하고 일리아드를 자신이 여행하면서 항상 동반자로서 지니고 그는 그리스의 우월성에 대한 신념을 잃지 않은 반면, 그는 자신의 마케도니아인 전사들을 아시아의 여성 상속인들과 결혼시켰고 자신은 페르시아의 공주와 결혼하여 동양적 제후의 지위를 얻었다. 관념상 그의 제국은, 세계와 공동 경계선을 지녔고 요컨대 후대의 신성로마제국 황제를 의미하는 신성 그리스제국 황제인 군주에게 복종하는 보편적 사회를 토대로 세워졌다. 그 제국은 인간 평등이라는 교설인 공통적인 기준에 부합하도록 의도되었고 그는 인류의 최고 은인으로서 신적(神的: divine) 영예를 부여받았는데 옳았다. 사실상 그는, 아시아와 아프리카 땅에서 그리스 문명이 번성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서 유럽에 소아시아와 시리아 및 이집트를 포함하는 방대한 지역을 주었는데 그 지역은 로마제국에 흡수될 때까지 마케도니아 왕조에 종속되었다.

알렉산더의 정복 이야기는, 유럽 역사의 범위 밖에 속하는 반면 지중해 민족들의 운명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두 가지 관련된 사건들을 포함한다. 두 가지 사건은 티레(Tyre)의 파괴와 알렉산드리아의 건설인데 전자(前者)는 페니키아 세력의 쇠퇴를 표시하고 후자(後者)는 이집트 연안에 새로운 그리스의 문화 및 상업 중심지의 건설을 표시하고 알렉산드리아는 아테네 자체와 경쟁할 운명이었다.

그리스 국가들이 세상에 나타나는 변화를 깨닫는다는 것은 쉽지 않았다. 그렇게 열정적인 사랑을 받았고 그렇게 사랑스럽게 치장되었으며 사람들이 기꺼이 생명과 심지어 명예를 바치려던 이 작은 국가들이 결국 자기들의 독립과 제국의 꿈을 잃을 운명이었다는 것이 가능했을까? 사람들은 그것을 잘 믿지 못했다. 현명한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신의 제자가 아시아를 점령하는 동안 아테네의 리카베투스(Lycabettus) 산기슭에서 가르치고 있었는데, 정치학이 마치 한 명의 사자(使者: herald)의 목소리를 들을 정도로충분히 작은 도시들의 경험에 포함된 양 그리고 노예와 자유민의 구분에 근거한 양 정치학에 관하여 서술한다. 심지어 생선 해부학에서부터 인간 영혼의 궁극적인 참된 모습에 이르는 관심 분야를 지녔던 고대의 그 최고 사상가도 마케도니아 제국에서 새로운 시대의 탄생과 범세계적인 사상의 도래를 감지하지 못했다.

우리가 지금 지나는 시대가 여전히 그리스적이지만 차이점이 있다. 그리스 시대는 조각과 수학 및 광범위한 교육의 시대였다. 아티카 그리스어는 경쟁 지역 언어들보다 우세했는데, 마르세유에서 안티오크(Antioch)까지 그리고 펠라(Pella)에서 나일강 폭포까지 사용되며 국제 무역과 점잖은 사교적 언어였고 심지어 유대 사원에까지 침투하여 저 보수적인 민족에 의해서도 그렇게 필수불가결한 것으로 밝혀져 점차 구약이 그리스어로 번역된다. 시가와 철학의 위대한 대가들이, 후손들에게, 거의 모든 문학적 재능의 장르와 철학 및 과학 탐구의 거의 모든 분야를 남기고 사망했다. 그들의 자리는, 대중적 소설 작가들에 의하여 그리고 커다란 도서관들이 발견될 수 있고 공부하는 사람들을 해적질과 전쟁의 방해로부터 보호할 수 있는 정권이 있는 곳에 모여드는 박식한 시인들과 전문가들에 의하여 점령된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와 아탈로스(Attaloids) 왕조 통치하에서 그런 도서관들이 종이와 양피지의 경쟁 수도들인 알렉산드리아와 페르가몬(Pergamum)에 건립되었다. 그리스적으로 지칭되는 이 시대의 또 다른 특징은, 광신적이 되지 않고도 남녀가 도처에서 종교에 동정적이라는 것이다. 관용적이 되는 것은 다신론의 속성이고 그리스인들에게 신들(gods)과 여신들(goddesses)의 문제에서 선호하는 신들(gods)이 있었지만 그들에게는 배타적인 신들(gods)이 없었다. 옛 올림피아의 신들(divinities)이 매력을 잃으면서, 종교적인 동양으로부터 새로운 숭배사상들과 신앙들이 밀려들었다: 점성술, 마술, 입교와 정화 의식들을 지닌 신비 종교들, 위압적이고 대중적인 신앙으로 이집트 근방에서 유래한 세라피스(Serapis)와 이시스(Isis) 숭배. 더욱 특히 의미심장한 것은 지중해 세계의 성모인 이시스(Isis)2세기 동안 숭배였다. “모든 것을 보며 전능하고, 바다의 별이자, 생명의 왕관이고 율법 창시자이자 구세주인이시스는 여성의 여신(goddess)이었다. 그녀는, 푸른 연꽃과 초승달 왕관을 쓰고 팔에 아기 호루스(Horus)를 안은 젊은 부인으로서 상징되었다. 이시스 조상들(彫像: statues)은 나중에 성모 마리아의 상으로서 역할을 하는 일이 드물지 않았다.

고등 정신들에 관하여 제노(Zeno)와 에피쿠로스(Epicurus)의 종교 철학들이 있었다. 311년 키프로스 출신 페니키아인인 제노는 아테네로 와서, 채색된 주랑현관(portico)인 열주랑(Stoa)에서 철학을 가르쳤다. 그는, 완전히 현명하고 완전히 선량한 최고의 힘에 의하여 통치되는 세계 국가라는 교설을 설교했는데 평등과 인간의 형제애와 양심 및 의무에 대한 교설이었으며 지혜와 미덕을 통해서 획득될 뿐인 신적(神的: divine) 목적을 지닌 조화에 대한 교설이었고 영혼의 성채 내부에 있는 피난처에서 발견되는 운명의 외적 불안에 대한 내적 평화 증거에 대한 교설이었다. 클레안테스(Cleanthes)의 제우스 찬가와 (월터 페이터[Walter Pater]플라톤과 플라톤주의자들[Plato and the Platonists]에서 영어 산문으로 번역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 및 에픽테토스(Epictetus)의 작품들에서 살아남은 특별히 아름다운 도덕적 교훈에 남은 이 고귀한 사상가의 원래 글들의 극소수 자취들로 인하여, 비기독교의 세계가 쇠퇴하면서 비기독교 세계의 최고 정신들과 인격들에 대한 스토아철학의 넓고도 긴 영향력이 증명된다. 제노가 의무의 철학자였던 바와 같이 에피쿠로스는 행복의 철학자였다.

정치 분야에서 그리스 시대는, 규모의 차이에 의하여 앞선 세기들과 구별된다. 큰 왕국들, 방대한 도시들, 더 큰 선박들 및 전쟁 무기들이 사사로운 행운을 추구하면서 새로운 시대의 징표가 된다. 바다에는 해적들이 들끓고 마케도니아 제국의 이런저런 지방에서 전쟁 없이 지나는 해가 없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그리스 세계는 동양을 약탈해서 새로운 시장들을 개척하여 부유하게 성장한다. 전쟁과 영아살해 그리고 심지어 말라리아가 피해를 입혔다. 진짜 그리스 인구는 꾸준히 줄고 1세기의 그리스 도시들은 주로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외국인들에 의하여 틀림없이 주로 채워졌다.

알렉산더는 유언을 남기지 않아서 마케도니아 제국의 유산에는 그의 고위지휘관들에 의한 쟁탈전이 시작되었다. 인종의 결속력은 이 유능하고 야심 찬 모험가들에게 효과가 없었다: 그리고 위대한 지도자가 사라지자, 이집트와 시리아 사이에 그리고 이집트와 마케도니아 사이에 긴 전쟁이 이어져 마침내 새로운 세력이 동부 지역에 들어오고 마케도니아인들이 자신들의 싸움에서 낭비한 막대한 자산은 로마에 의하여 점유되고 운영되었다. 그러나 자신들의 국내 불화라는 중대한 결점에도 불구하고 마케도니아의 군주들은 유럽 문명에 두 가지 커다란 기여를 했는데 그것들이 없었더라면 오늘날 세계는 헤아릴 수 없이 더 가난할 터이다. 1세기 반 동안 그들은, 일리리아인들(Illyrians)과 트라키아인들(Thracians)로부터 그리고 동쪽의 파르티아인들(Parthians)로부터 그리고 중부 유럽의 습지와 삼림에 사는 굶주리고 야만적인 거주민들로부터 그리스 문명의 구조를 방어했다. 그들의 갑옷은 때때로 관통되었다: 그들의 방어는 항상 뜻대로 되지는 않았다. 그들은 인도로부터 후퇴해야 했다. 갈리아인들(Gauls)과 갈라티아인들(Galati)은 델피까지 침투해서 소아시아에 건너왔으며 한때 저 번창하던 지역을 혼란 속으로 몰아넣겠다고 위협했다. 그러나 결국 이 무시무시한 야만인들의 위세는 마케도니아 가문의 군주들에 의하여 제어되어 지역적 국경선에 갇혔다. 갈리아인들은 유럽에서 마케도니아의 제 2건국자인 안티고노스 고나타스(Antigonus Gonatas)에 의하여 패퇴했고 아시아에서는 페르가몬의 아탈로스(Attalus of Pergamum)에 의하여 패퇴했다. 사도 바울이 자신의 서간을 보냈던 갈라티아인들이 오랫동안 그리스 사회의 구조에 맞추어졌음을 알기가 쉽다.

그들이 그렇게 지킨 불규칙한 국경들 안에서 알렉산더의 자손들은 그리스 문명의 이해관계를 옹호하고 빈번히 활기차게 촉진했다. 프톨레마이오스 가문은 이집트에 정착했는데 그들이 그 나라를 그리스화 하지 못하거나 심지어 원주민들의 난폭한 미신들을 크게 완화하지 못했을지라도 알렉산드리아의 왕궁 지역에 유럽의 진보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학습과 취미의 센터를 세웠다.

여기서 그리스 사상과 시가의 걸작들이 수집되어 큰 도서관에 쌓였고 노예들에 의하여 복사되어 학자들에 의하여 주해되었다; 여기서 구약성서가 히브리어에서 그리스어로 번역되었고 호메로스의 원고가 정해졌으며 연애소설과 전원시들이 서양 문학의 범주들을 확대했다. 여기서 마침내 플라톤의 글에 기초하여 세워진 신비주의 철학이 태어났는데, 기독교회의 신학에 심오한 영향을 미쳤다.

셀레우코스(Seleucus)와 그의 후손들이 위대한 쾌락 도시인 안티오크로부터 통치한 방대한 아시아 제국은, 문화와 그리스가 동의어인 세계의 한 부분으로서와 다르게 간주될 수 없었다. 과학과 문예에서 알렉산드리아만큼 우세한 소위 이 시리아의 왕국에 중심지가 없었다면 시리아만큼 완벽하게 그리스화된 이집트의 지역은 없었다. 멜레아그로스(Meleager)의 미묘한 서정시와 공관복음서의 단순한 웅변은, 일반인들의 언어가 아람어였던 나라에서 그리스어의 생기를 증명한다.

마케도니아의 군주들은 세계에 새로운 권위의 원칙을 제공했는데 그것은 로마제국이 최초 2세기 동안 존재하면서 로마제국을 결속시킨 가장 중요한 수단 중 한 가지 수단이었다. 알렉산더와 그의 후손들은 신격(神格: divinity)에서 기인하는 숭배심을 주장해서 받았다. 그들은 그리스 도시국가들이 헌법에서 위치를 발견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들은 일반인들의 박수갈채를 받으며 그리스의 판데온(Pantheon) 신전에 들었다. 숭배에서 세력보다 나은 것이 어디서 이질적인 왕국을 결속시키고 찬탈하는 통치에 신성함과 합법성을 부여하는 것으로 밝혀질 수 있을 터인가? 보편적 국가라는 관념이 철학자들을 사로잡았고 군주에 대한 숭배로 인하여 군중은 흥분했고 만족했다.

미래에 유럽을 다스리는 데 중요한 또 다른 요소가 마케도니아 시대로 거슬러 올라갈 것이다. 통계와 관료제도는 이집트에서 익숙했다. 이 고대 문명에서 정확한 지식은 특히 수입과 관련하여 오랫동안 정권의 특권으로서 간주되었다. 여기에는 서기들의 무리와 산더미 같은 서류들에 의존하는 규칙적이고 세밀한 행정이 있었다. 그런 광경으로부터 도출될 교훈들은 이집트를 정복한 사람들에게 잊히지 않았다. 로마인들이 그리스로부터 문학을 취했다면 로마인들은 나일강 계곡으로부터 자신들 제국의 시민행정을 빌려왔다.

마케도니아가 북쪽의 야만인들에 대하여 그렇게 유용한 보호지로 판명된 마케도니아의 안티고노스인들(Antigonids)이 그리스 도시들의 지원과 동정심에 의지할 수 있을 터임은 아마도 예상되었다. 이것은 그럴 수 없었다. 그리스인들의 정신에는 군주제에 대한 혐오보다 더 깊은 정치적 감정이 없었고 마케도니아는 군주제 국가였다. 그러나 그리스의 기초를 이루는 감정이 이집트인의 뇌물에 의하여 너무 자주 자극을 받아 반()-마케도니아적이었을지라도, 그리스인들은 어느 때도 합심하여 그들의 종주국에 저항할 각오가 되어있지 않았다. 그 민주주의 지도자들 가운데서 데모스테네스의 정신이 밝게 타올랐던 아테네는, 아카이아(Achaia)와 아이톨리아(Aetolia)가 기꺼이 그 종주국을 수용했을 바로 그때, 싸움을 포기했다. 시민들의 애착과 질투와 열정은 그리스의 정신적 힘이자 정치적 취약성이었는데 끝까지 지속되었다. 연맹에 대한 명예로운 기대치는 그리스인들에 의하여 그리고 덜 희망적인 형태로는 아이톨리아의 산적 마을들에 의하여 시험되었다. 그러나 완벽한 의미에서의 연맹에는 희생이 포함되었는데, 그리스 연맹의 어떤 회원국도 기꺼이 감수하지 않으려 했다. 그리스 연맹은 안티고노스와 그의 후계자 데메트리오스 II(Demetrius II)와 전쟁을 벌였는데 그 연맹 자체가 스파르타의 클레오메네스 III(Cleomenes III)의 파괴적인 공격의 목표였고, 그 연맹 지도자들을 탁월함과 그 연맹이 근거한 정치적 원칙의 가치도 연방 국가의 충성심을 받지 못했고 자문위원회에 더 넓은 예지력을 가져오지 못했다. 그리하여 그리스는 국내 통치에 조바심했지만, 자체 내부에서 마케도니아의 가벼운 굴레를 효과적으로 벗어던지도록 충분히 단합되지 못하고 구원자를 기다리면서 로마의 증가하는 영향력을 기대와 기쁨으로 환영했다.

자신들을 그리스인들로 기술했던 민족들은 영리하고 강하고 근검하며, 헤로도토스가 언급한 바와 같이, 주변의 야만인들보다 더 영리하고 어리석음으로부터 더 해방된 민족들로 자신들을 구분했다; 그러나 그들은 불안정한 세상에서 살았다. 결핍, 역병, 전쟁 그리고 혁명에 대한 방어책은 취약했고 쉽게 전복되었다. 어떤 순간에도 풍요로움은 굶주림에 굴복했고 평화는 전쟁에 굴복했다. 생존하는 것에만 기지와 에너지가 필요했다. 그런 사회에서 우리가 쉽다고 아는 몇 가지 미덕들은 매우 어렵다. 그리스인들은 탁월한 민족이었을지라도 완벽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자신들의 신생아들을 내다 버렸고 그들 중 몇몇은 노예들을 고문했다. 많은 사람은, 반대 목소리 없이, 우리의 혐오를 자아내는 악행들을 저질렀다. 그들의 종교는 경전에 얽매이지 않았는데 마술에 대한 믿음과 그리고 원시적이고 폭력적인 미신의 번창과 양립될 수 있었다. 고통에 대한 기묘한 무감각은, 역겨울지라도, 인간 운명의 필수적인 부분으로서 수용되었던 듯하다. 정치적 관념들에서 그들의 풍요로움은 컸을지라도 그들은 단합의 능력이 결여되어 그들의 도시들의 역사는 파벌에 대한 긴 이야기이고 그것은, 투키디데스가 코르큐라(Corcyra)의 폭동에 대한 자신의 설명에서 서술하는 저 음모와 잔인성의 순수미술을 완성하는 경쟁으로 퇴보하기 쉬웠다. 그들은 자유를 사랑했지만 때때로 소크라테스에 관한 유명한 경우에서처럼, 그들이 간직한 관습들에 안전을 우려하여 솔직한 사상가를 박해하여 죽음으로 몰았다.

그러나 현대 문명에서 귀중하게 여겨질 수 있는 거의 모든 것이, 그리스어로 언급되고 사색된 지중해 세계의 저 부분의 고대 문화에서 빌려오고 있는 것이다 ㅡ 우리의 과학과 철학, 우리의 서사시와 연극과 서정시, 조각과 건축에서 우리의 기준들, 우리의 의약품과 수학, 우리의 인문교육 이론, 우리의 기독교 신학 형태 그리고 중국 문명으로부터 서양을 구분하는 법률적 규칙이라는 저 이상. 그리스인들은 아름다움을 사랑했고 이성을 추구했다. 그들은 자연에 밀착해서 살았다. 예술에서 그들의 취향은 엄격하고 단순했다. 그들은 훌륭한 것들에 관하여 훌륭하게 생각했다. 물질의 궁극적 구조에 대한 심오한 질문은 현대 물리학자들의 생각을 괴롭히는데 밀레투스의 탈레스에 의하여 기원전 6세기나 (585년경) 일찍 제기되었고 그는 네 가지 원소를 한 가지 본질의 상태들로서 간주했다. 우리의 수 이론은 피타고라스에게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고 우리 도덕학은 소크라테스에게로, 우리의 생물학은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자유로운 탐구 정신은, 대중적인 미신들을 묵인하기보다 자연적인 원인들에 대한 이성의 빛에 의하여 사람들을 탐구하도록 이끄는데 두드러지게 그리스적이었다. 그리스인들의 호기심은 생동적이었고 보편적이었다. 신비로운 우주를 관조함에 의하여 제시된 어떤 문제도 너무 멀거나 너무 성스럽거나 너무 심오하지 않아서 그들의 신선한 과감성을 좌절시키지 않았다. 코페르니쿠스가 지동설을 발견하기 수 세기 전에 한 명의 그리스 사상가가, 지구는 태양의 주위를 회전하는 구형 물체라고 추론했는데 지구의 둘레 길이에서 실제와 다르지 않았다.

현대 세계의 과학과 문학이 그리스인들에게서 유래하는 반면 유럽의 종교는 그 근원에서 본질적으로 유대인의 것이라고 때때로 주장되었다. 이것으로 인하여 대비가 너무 강력하게 서술된다. 그리스는 과학과 문학 못지않게 종교에 심오한 영향을 끼쳤다. 우리는 예수의 생애에 대하여 아는 게 없다. 그의 제자들은 그의 생애를 기록하는 데 주로 관심을 두지 않았다. 마침내 십자가 처형 후 한 세대 이상이 지나서 마가(Mark)가 펜을 들고 서술했는데 그가 자신의 영혼을 새로운 매혹으로 채웠던 자신의 스승이자 예언자의 생애 과정을 추적했다는 것이 아니라 수난(Passion)과 부활 이야기로부터 그리고 신성하고 예정된 인물로서, 유대 경전에 예언된 메시아로서 기적에 대한 예수의 많은 증거들을 암송함으로써 예수를 증거했다는 것인데 그는 세상을 심판하고 죄인들을 회개시키기 위하여 왔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 가르침의 전개를 연대기 순으로 추적하거나 주어진 연도나 월이나 일주일이나 일(day) 동안 그의 삶을 재구성할 수 없다.

윤리적 가르침의 귀중한 단편들이 복음서들에 그리고 산재하는 언급들에 담겨있는데 그것 중 몇 가지는 겨우 최근에 이집트에 있는 땅에 묻힌 도서관에서 발굴되었다; 그러나 사도들의 시대에 기독교의 전파는, 기독교적 삶만 완벽하다는 신념에서 기인했다기보다는 그리스도에게서 성령이 발현되었다는 믿음에서 기인했다. 사도들은 청중들에게 그리스도를 닮으라고 요구하지 않았고 메시아적 권위를 수용하라고 요구했다. 사도들은 병든 자들을 치료하는, 기적을 일으키는 그리고 회개를 설교하는 것으로 그리스도를 재현하여 그들 세대의 많은 사람과 공동으로 세상의 종말이 가까웠다고 믿었으며 예수는 세례를 받은 분으로 하늘의 아들이며 최후의 심판 날 이전에 인류를 올바름으로 소환하기 위하여 보내졌다고 믿었다.

초기 사도들은 그리하여 당시 영원한 보편적 교회를 꿈꾸지 않았다. 그들에게 세상의 종말은 가까웠고 선택된 자들의 숫자는 반드시 작았다. 그들은 팔레스타인 지역의 작은 유대 성전들에서 스승의 가르침을 설교하는 데 만족했다.

타르소 출신의 바울(Paul of Tarsus)은 기독교를 비유대인들에게 기독교를 전파했는데, 디아스포라(Diaspora) 당한 유대인이었다. 그는 그리스어로 말하고 생각하는 사회의 구성원이었다. 골로새서나 에베소서는, 정말로 사실이 아닐 수 없는 바와 같이 그가 그리스 종교의 우화들과 신비들에 익숙하다는 것과 그가 그것들에 의하여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준다; 그리고 그가 전하는 이야기는 팔레스타인의 유대인에게 집중되지 않고 그리스로부터 자신들의 문화를 도출한 비유대인들에게 집중되었기 때문에, 그가 좁은 유대인 동포애와 더 넓은 그리스 동포애 모두의 구성원이라는 사실은 그가 전하는 이야기를 서쪽의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도시 인구에게 전달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그가 직접 예수를 만난 적이 없었을지라도, 유대인의 광신주의를 지닌 기독교들이 박해를 받은 후에 그리스도의 영혼이 자신의 영혼을 점령했다는 신념에 그가 별안간 도달했기 때문에 그가 예수를 직접 만난 적이 없다는 것은 그에게 그만큼 의미가 적었다. 이 타오르는 신앙으로 인하여 그의 웅변에 날개가 달렸다. 그의 선교 여행에서 그가 여행한 곳마다 그는 개종자들을 만들어, 신앙과 자기-희생 및 애정으로 결속된 남녀 기독교들로 구성된 작은 공동체들을 세웠다. 아시아에서 유럽으로 들어가면서 그는 살로니카(Salonika), 아테네, 코린트 그리고 로마에서 설교했는데 모든 곳에서 그는 유대율법을 자유롭게 다룸에 의하여 그리고 이교도 사회의 당시 신앙에 그는 두드러진 대비를 제공함에 의하여 강력한 영혼적 흥분상태를 만들어냈다. 그의 열렬한 천재성의 강력한 충격을 받아서 작은 유대교 교파가, 예루살렘의 사제들과 서기들에게 배척을 당하고, 자체의 호소력에서 그렇게 크고 인간적인 신앙이 되어서 어떤 유럽 인종이 아무리 무례하고 잔인할지라도 그 신앙의 영혼적 영향력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

2세기경 지중해 연안의 주요 항구 마을들과 많은 고지대의 마을들 또한 작은 기독교도 무리들을 포함하고 있었는데 그들은 당시 그리고 심지어 네로 황제가 로마에서 그들을 박해의 대상으로 골라낸 기원후 65년에 유대인들과 다르다고 인정되었고 처음에 그들은 유대인들과 흔히 혼동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예언자적이고 배타적인 신앙을 유대인들과 공유했다. 그들은 믿음과 행동이라는 원칙에 근거하여 따로 살았는데 그 원칙들에 타협하기를 거부했다. “우리는 이전에 삶의 불결함에 기뻐했고 지금은 순결함을 사랑한다; 또한 마술을 이용했고 지금은 선하고 독생자인 하느님에게 헌신한다; 우리는 돈과 소유물이라는 재원을 다른 것보다 사랑했고 지금은 실제로 가진 것을 나누고 필요한 모든 사람에게 나누어준다; 우리는 서로 증오하고 서로 죽였으며 또 다른 인종인 사람들과 같이 식사하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재림 이래 공동생활을 영위하며 우리의 적들을 위해 기도하고 정당한 이유 없이 우리를 증오하는 사람들을 설득하려 한다고 순교자 유스티누스(Justin)는 서술했다. 그러나 기독교도들이 이교도 세계와 그렇게 두드러지게 분리되어 있었던 반면, 그들이 자신들의 신앙을 인류 역사의 반전으로서 간주하지 않고 오히려 하느님에 의하여 지정된 인류 역사의 실천으로서 간주했다는 것은 그들에게 힘의 근원이었다. 기독교 옹호자들은 동등하게, 유대교 성경에서 그리고 그리스 철학에서 그리고 그리스 무녀 시빌레(sibyl)의 예언에서 그들의 신앙에 대한 권위를 기꺼이 찾았다. 기독교교회가 세상의 추방자들에게 구원을 제공한 반면, 현명한 자들의 근거에 관하여 현명한 자들에게 위축되지 않고 도전했으며 망설이지 않고 고대인들의 사상의 도움을 청했다는 것은 기독교교회의 성공 비결들 중 한 가지 비결이었다. 요한 복음서의 근원에 관해서나 그 복음서가 서술된 환경에 대하여 확실하게 알려진 것은 없다. 나은 의견은 2세기 초기에 에베소에서 장로인 요한에 의하여 그 복음서가 구성된 듯이 보인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사실이든 아니든, 이 탁월한 성서가 없다면 기독교 신앙의 본질을 현재 상태보다 전혀 다른 것일 터이다. 그 성서가 성 바울에 의하여, 아마도 또한 플라톤의 철학으로부터 자신이 계승한 신앙의 진실들에 대한 증거를 진화시킨 박식한 유대인인 알렉산드리아의 필로(Philo)에 의하여 영향을 받았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필로는, 플라톤이 신()의 영감을 받았다고 믿어서 그 아테네 사상가의 고양된 가르침을 유대교나 기독교 교서들과 조화시키는 유쾌한 과제에 몰두한 신학자들과 철학자들의 긴 반열에서 최초의 사람이었다. 거의 13세기 동안 서양에서 기독교회의 신학은 플라톤의 사상에 의하여 조성되었다. 지식의 장애 시대가 뒤를 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적이고 물리학적인 글들은 스페인의 아랍인들을 통하여 복원되었다. 기독교 신학은 이교도적인 과학에 직면했고 기독교 관념론은 경험에 근거한 철학에 직면했다. 심지어 파리 대학(the Paris University)에 있는 박사들이 범신론으로 희롱하여 천지창조에 대한 정통 견해에 도전했을 때 고민의 순간과 기본원칙들에 대한 자유로운 사고의 순간이 있었다. 두 명의 위대한 도미니크회 박사들인 알베르투스 마그누스(Albert the Great)와 토마스 아퀴나스는, 부활한 아리스토텔레스를 가톨릭교회라는 마차에 묶어서 상황을 복원시켰다.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고상하고, 인류의 도덕적 진보에 원초적으로 기여했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이 모든 동양 종교들 가운데서 가장 그리스적이 아니었고 그리스 철학자들의 최고 사상들과 연옥과 속죄에 대한, 영원한 축복과 영원한 고통에 대한,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신적(神的: divine) 중재자에 대한 그리고 죄인들은 아마도 죄의 사함을 받고 이후 그의 구원을 확신 받는 어떤 신성한 의식에 대한 저 대중적인 관념들과 거의 동일하게 가장 유사하지 않았더라면 기독교 신앙이 유럽을 정복했을지는 의심스러운데 그것들은 당시 그리스인들 사이에서 유행했고 그리스 문명이 우세하던 지중해 연안의 저 넓은 지역에 걸쳐서 근엄한 종교적 의식의 토대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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