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I장
로마와 카르타고
로마 공화국의 발흥. 로마의 법률적 및 제도적 성장의 특징. 로마의 이탈리아 정복. 갈리아치살피나(Cisalpine Gaul)와 카르타고, 로마인과 에트루리아인. 포에니 전쟁과 갈리아치살피나 정복. 한니발.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P. Cornelius Scipio). 카르타고 파괴. 로마의 위엄. 동양에서 증가하는 로마의 영향력. 마케도니아와 그리스의 복속. 미리 결정된 정복 계획의 부재.
그리스는 발흥을 응시했고 이탈리아는 석양을 응시했다. 이탈리아반도의 서쪽에는 넓고 비옥한 평야, 충분한 개천들 그리고 대피항구들이 있다. 동쪽에서는 아페닌 산맥의 등성이가 사람이 살기 어려운 해안을 따라 더 길게 뻗어서 풀리아의(Apulian) 훌륭한 두 항구인 브린디시(Brindisi)와 오트란토(Otranto)를 제외하고 아드리아 해의 폭풍에 대비하여 선원들에게는 대피항구가 없다. 그리하여 이탈리아반도의 중심부과 남부 사이에는 두드러진 차이점이 확립된다. 남부 연안 지역이 찬란한 그리스 문화의 장면이자 이민의 장면이 되어 이민의 흔적이 남부 이탈리아 사람들의 인격과 모습에 여전히 감지될 수 있는 반면, 그 나라의 라틴적 핵심은 이 외국의 영향들로부터 보호되었다. 그리스와 티베르 강의 누런 물결 사이에는, 아드리아 해를 별도로 하고, 원시적이고 건너기 어려운 언덕들이라는 장애물이 퍼져있었다.
저 장애물 뒤에서 원래 작은 도시국가인 로마공화국이 통치와 전쟁에 대한 재능을 발전시켰는데 그리스의 관행과 교훈에서 빌려온 것은 없다. 아테네와 스파르타 및 테베가 번갈아 갈구했던 패권보다 더 큰 패권은, 끈질긴 전쟁과 현명한 훈련의 상품으로서 로마인들에게 왔다: 절제와 훌륭한 감각, 건전한 가족생활과 강력한 법률적 본능 그리고 엄격하고 단순한 자세가 내뿜는 위엄의 상품으로서인데, 그 자세는 주거지와 토양에 대한 고대의 경건함에 뿌리를 두었다. 기원전 510년 외국인 왕조를 추방한 두드러진 혁명으로 인하여, 혁명은 로마인의 방식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만큼 더 깊었던 인상이 로마인의 기억에 남았다. 로마공화국의 구성은, 사회적 압력과 확장 의무에 대한 위압적인 요구들이 연속적으로 변함에 따라 부지불식간에 적응하면서 서서히 발전했다.
법률체계가, 많은 원시적 관습과 사제들의 관행으로부터 발전하여 확대되는 공동체의 생활에 따라서 성장하였고 시민 모임은 법령들로부터 그리고 집정관들의 칙령들 및 법학자들의 견해와 철학자들의 이론체계들로부터 도움을 받아서 마침내 문명 세계의 실용적 요구에 맞게 되었다. 사회적 및 정치적인 내부 불화들은, 유혈사태 및 무력충돌에 의해서라기보다는 항의와 타협에 의하여 그리고 현명하고 체면을 세우는 수단들 및 헌법적 법률들에 의하여 해결되었다. 귀족들과 평민들 사이의 긴 투쟁에서 (기원전 510-287년) 평민정당의 연속적인 승리로 인해서도 치명적인 상처나 무자비한 악의가 남지 않았던 듯이 보인다. 특권을 포기하도록 강요당하면서 귀족들은 추방된 적이 없고 로마에 명예로운 역할을 제공하려는 자신들의 주장을 포기하지도 않았다. 필수적인 자유 항목들이 12표법(Twelve Tables)까지 일찍이 억압되었지만 상원은 평민들로부터 부분적으로 모집되었을지라도 본질적으로 그리고 전망에서 귀족들의 집합체로 남았다. 국내의 긴장은 로마인들을 애국심을 파괴하거나 외적에 직면하여 로마인들을 약화시킬 정도로 엄중한 적이 없었다.
하나하나 이탈리아에 있는 로마의 적대자들 모두는 로마의 위세를 인정하게 되었는데, 평야지대의 라틴 인들과 그 왕국 안에 로마 자체가 한 때 포함되었던 신비로운 비-아리안족인 에트루리아인들(Etruscans)이었으며 구릉지대에 살던 강골의 삼니움 족(Samnites)과 390년 로마를 약탈했던 무서운 갈리아 인들도 있었는데 모두 뒤에 공포의 기억을 남겼고 마지막으로 피로스 장군(Phyrrhus the Epirot)의 밀집대형(phalanx)과 코끼리들에 의하여 도움을 받는 남부 그리스 도시들이 있었다. 기원전 3세기 초기에 로마는 이탈리아에서 최고 권력이었다. 그러나 고대 세계의 다른 도시들이 정복했다가 잃은 반면, 이탈리아에서 로마가 정복한 지역을 로마는 손아귀에 쥐고 촘촘한 국가로 조성했다. 로마의 확장에는 방법이 있었다. 로마는 페르시아제국만 건설한 것과 같은 군사도로를 건설했고 이 도로들 위의 전략적 거점들에 로마인들에 의하여 수비되는 성벽 도시들을 건설했다. 다른 이탈리아의 공동체들을 로마는 배타적인 동맹으로 결속시켜서 신중하게 등급을 매겨 특권을 주었다.
그러나 로마는 안전하지 않았다. 갈리아 인들이 포강(Po) 계곡에 정착했는데 지중해 연안에서 가장 크고 가장 비옥한 평야를 차지했다: 그러나 갈리아 인들보다 훨씬 더 큰 위험은 카르타고의 해군력이었는데 시칠리아라는 비옥한 섬을 두고 그리스인들과 싸웠고 사르데냐(Sardinia)를 두고 싸웠으며 자신의 베테랑 함대들을 통하여 티레니아 해(Tyrrhenian Sea)에서 도전을 받지 않고 지배권을 행사했다.
당시 세계의 상업 수도이던 이 거대한 셈족의 강대국과 로마는 100년 이상 (기원전 264-146년) 전쟁을 치렀는데 그 전쟁으로 인하여 유럽의 일반적인 정치적 모습이 변했다.
이전의 모든 전쟁을 훨씬 뛰어넘는 규모로 벌어진 이 필사적인 전쟁 말기에 카르타고는 역사의 장에서 말살되었다. 카르타고의 해군력은 침몰했고 제국을 빼앗겼으며, 자랑스럽고 인구가 많던 수도는 초토화되었다. 해군력도 없고 해외에 땅 1야드도 없이 로마는 전쟁을 벌여 전쟁 논리에 의하여 세계적 강국이 되었다. 지중해의 상업은 로마의 손아귀에 들어갔다. 시칠리아, 사르데냐, 스페인과 아프리카는 로마의 속주가 되었다. 서양에 널리 퍼진 카르타고 제국의 모든 지역이 로마의 통제에 들어갔다.
문화라기보다는 특징에 의하여 이 승리들에 대한 이해의 열쇠가 제공되었다. 예술적 취향 및 업적과 관련하여 에트루리아인들은 9세기 말엽 소아시아로부터 이탈리아에 침공하여 300년 후 권력과 번영의 최고점에 도달해서 야만적이고 강력한 자신들의 정복자들과 거리를 두었다. 중부 이탈리아는, 인도유럽어가 아닌 언어를 말하던 재능 있고 사치스러운 귀족계급의 기념비들로 가득 차 있는데 그 언어를 우리는 읽을 수 없고 그들은 말을 타고 목축을 했으면 사냥하고 농사를 지었다. 그들은 점술에 관한 많은 비밀 지식을 거대한 로마인 가족들에게 남겼는데 그 가족들은 에트루리아인을 자랑스럽게 자신의 선조 중 한 분파로 간주했다. 에트루리아 문학이 있다면 오래 전에 사멸했지만 아폴로 조상(Apollo of Veii)과 트라시메노 호수의 연설가 청동상(Orator of Lake Trasimene)은 유럽 조각상들의 영예에 속한다. 신생 로마공화국의 로마인들에게는, 테라코타에서 이 걸작들과 비견될 수 있는 것이 없었고, 아시리아와 이집트 및 그리스로부터 자유롭게 빌려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고유하게 기여할 것을 지녔던 이 솜씨 좋은 사람들의 상아제품 및 보석과 비견될 수 있는 것도 없었다. 당시 로마인들에 의하여 제압당하는 것은 야만적인 이탈리아가 아니었지만, 그 지역에서 세 번째로 이탈리아는 그리스와 동양의 예술과 기술로 물들었다. 그러나 로마가 단결되어 집착적이었던 반면, 에트루리아인들은 치명적인 단결 부족으로 고통을 겪었다. 타르퀴누스 왕조(Tarquins)는 티베르 강의 일곱 언덕(Seven Hills)에서 추방되었다 (기원전 510년). 에트루리아 해군은 쿠마에(Cumae) 전투에서 그리스인들 눈앞에서 침몰했다 (474년). 에트루리아의 주요 성지인 베이(Veii)가 자체의 습관적 적에 대항하여 80년 전쟁을 우방 없이 지속해야 하는 일이 벌어졌다. 그러나 에트루리아가 제국으로서 사라졌다면 토스카나인들(Tuscans)은 하나의 인종으로서 살아남아 천년을 통하여 근본적으로 통일하고 13세기 및 14세기에서처럼 인간적 탁월함의 정점에 근접하는 아름다움에 대하여 천재성을 드러낸다.
1차 포에니 전쟁은, 평화로 인하여 간헐적이고 불연속적인 23년의 전쟁 후에 끝났는데 그로 인하여 시칠리아라는 곡창 섬이 카르타고로부터 로마로 주인이 바뀌었다. 그 전쟁이 그렇게 오래 끌었고 결정적인 결과를 더 많이 초래하지 못했다는 것은, 그 전쟁이 진행된 상황에 부분적으로 기인할 것이고 또한 전쟁 당사자 국가들 각각이 염두에 있던 목표의 특정 불명확성에도 기인할 것이다. 전함이 노예 의하여 움직여야 하고 오직 여름에만 전함이 안전하게 바다로 나아가고 장거리 무기가 없는 상황에서 적에게 잡혀서 적이 승선하여 공격하지 않은 함선은 아마 피해를 입지 않고 쉽게 도주할 당시, 재빠른 결정이 필요하지 않았다. 로마는 바다에 대한 교훈을 배워야 했다; 카르타고는 바다에서 경험이 풍부했지만 국내에서 방해를 받아 시칠리아 전쟁에서 충분히 필요한 용병을 확보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상대방 모두 당시까지 파괴적 전쟁을 완전히 결심하지 않았다. 로마인들은 아프리카를 침공했지만 레굴루스(Regulus) 장군의 군대를 지원하지 않았고 그의 패배를 복수하려고 시도하지 않았다. 또한 카르타고인들도 이탈리아의 해안을 괴롭히려고 해군력을 사용하지 않았다. 결국 로마인들이 승리했는데 왜냐하면 자신들의 적으로부터 불쾌하고 미숙한 기교를 배워서 사사로운 애국심의 최고로 발휘하여, 카르타고가 전쟁에 지친 순간에 승리할 수 있는 함대를 건조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유럽의 역사에 자체의 흔적을 남긴 23년간의 공백이 뒤를 이었다. 저 공백기에 로마는 사르데냐를 장악했고 아드리아 해에서 일리리아 해적들을 소탕하여 저 과정에서 코르큐라 정복을 통하여 그리스 땅에 최초의 교두보를 세웠는데 가장 위대하고 가장 중요한 업적으로 갈리아치살피나(Cisalpine Gaul)를 점령해서 국경선을 알프스까지 확대했다. 못지않게 기억될 수 있는 것은 동일한 시기 카르타고의 업적이다. 아프리카에서의 심각한 반란 진압과 별도로, 그 업적의 본질은 스페인에서 새로운 제국의 설립이다.
스페인이 유럽의 정치사에 소개된 것은 그리하여 카르타고의 덕택이다. 자체의 풍부한 광산들과 공장들, 자체의 비옥한 연안지역, 바람이 훑고 태양이 내리쬐고 인간이라는 종이 거칠고 뻣뻣한 중앙 고원지대에 분포된, 대담하고 호전적인 종족들의 많은 자체의 인구들이 있는 스페인에서, 천재성을 지닌 어느 카르타고인은, 자신의 국가에 대한 새로운 권력의 근원과 로마에 대항하는 새로운 기지를 공개적으로 비판했다. 시칠리아 전쟁에서 충분히 증명된 군인인 하밀카르 바르카(Hamilcar Barca)는 자신의 여생을 복수 전쟁에 바치기로 결심했다. 카르타고 민주주의의 우상으로 그는 이베리아 반도에서 재량권을 획득했고 그곳에서 밀집되고 탁월한 에너지를 8년 동안 사용하여 국가와 국고 그리고 군대를 구축했다. 사위이자 아들이 그의 과업을 계속해서 강화했다. 그 아들은 한니발이었다. 기원전 221년에 권력을 물려받아 하밀카르는 그에게 자신의 재능과 자신의 에너지와 자신의 복수심을 물려주었다.
고대세계의 우두머리 가운데서 천제성과 관련하여 한니발만 알렉산더 대왕에 비견된다. 그에게 알렉산더의 매혹적인 빛이 결여되었다면, 그는 침착성과 목표 집중에서 우위였다. 그의 과감성은 극단적이었고 그의 자원은 무한했으며 그의 매력적인 개인적 재능은, 극단적인 어려움과 위험을 통과하면서 군대의 충성심을 유발하여 지속시켰다. 그는 적의 취약점을 재빨리 간파하고 이득을 보았다. 그가 주목하기에 너무 큰 것도 너무 작은 것도 없었다.
그의 계획은 간단하고 과감했으면 치명적인 효율로 모두 잘 진행되었다. 그 계획은 로마와 전쟁을 시작하는 것이었는데, 로마의 스페인 보호령이었던 사군토(Saguntum)를 공격함에 의하여 그렇게 해서 자신의 아프리카 및 스페인 징집병들과 함께 육지를 넘어 이탈리아로 진군하여 로마를 핵심부에서 공격했다. 그는 물론, 자신이 도움 없이 자신의 목표를 달성할 수 있다고 생각할 정도로 어리석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최근의 패배로 인하여 고통스러워하던 갈리아치살피나(Cisalpine Gaul)에게 의지했고 로마의 지배에 분노한다고 예상되는 이탈리아의 도시들에게 의지했고 젊고 야망을 지녔으며 저돌적인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에게 의지했는데 필리포스는 아마도 더 행복했을 때의 피로스(Pyrrhus)를 닮으려는 유혹을 받았고 로마인들로부터 남부의 통제하려는 유혹을 받았다.
세 번의 탁월하고 파괴적이고 섬멸적인 승리가 뒤따른 놀라운 진군에도 불구하고, 계획은 실패했다. 갈리아인들은 일어서지 않았고 중부 이탈리아에서는 반란이 없었으며 마케도니아로부터 침공이 없었고, 이탈리아 땅에 있던 적들에게 대적하지 말자는 로마 상원의 결정은 완화되지 않았으며 한니발이 기대할 권리를 지녔던 지원의 규모가 카르타고로부터 오지 않았다. 그러나 여러 해 동안 그는 인구가 많은 적국에서, 그리고 자신의 병력보다 33배 이상을 모을 수 있던 적에 대항하여 3만 명의 군사로 야전을 지켰다.
계략과 전략에서, 병사들의 헌신적 충성심을 고취하는 지도력의 도덕적 재능에서뿐만 아니라 기병 전술에서도 한니발은 탁월했다. 마술적인 정기가 그를 둘러싼 듯이 보였다. 그에게는 공성 무기가 없어서 무력으로 로마를 정복할 수 없었을지라도 그는 자신의 적들에게서 마비성 열등감을 조성했다. 트라지메노(Trasimene) 호수를 지나고, 칸나에(Cannae)를 지나고 그의 동생 하스드루발(Hasdrubal)이 스페인 지원군과 알프스를 건넜을 때 로마의 핵심부에서는 죽음의 공포가 몰려들었다. 그러나 하스드루발은 메타우루스(Metaurus)에서 패했다. 사실상 파비우스(Fabius) 장군이 한니발과 대적하는 최선의 방식은, 그와의 전쟁을 피하는 것임을 감지한 이래 로마의 승리는 시간의 문제였을 따름이었다.
최종적으로 전쟁을 끝낸 것은, 로마가 유능한 사령관을 발견한 것이었다. 한니발이 이탈리아를 짓밟는 동안, P.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Cornelius Scipio)는 스페인으로부터 카르타고 군을 추방하는 데 몰두했다. 이 상당한 업적의 광휘로 인하여 스페인 문명의 형태가 결정되었는데, 로마인들의 신망에서 스키피오는 독특한 지위를 차지했다. 아프리카 원정을 이끄는 허락이 그에게 떨어졌는데 그 원정은 이탈리아반도로부터 카르타고 군대라는 악몽을 떨쳐내는 가장 확실한 길이었다; 기원전 204년 그는 바다를 건넜고 2년 후 자마(Zama)의 들판에서 한니발을 맞아 그의 코끼리들과 보병 및 기병을 몰살하고 평화를 확보하여 (201년) 카르타고로부터 해외 소유지를 빼앗아 카르타고를 로마의 조공 신하국가로 만들었다.
그러나 카르타고가 튀니지 만에서 약 70만의 인구를 지니고 부유하고 진취적이며 근면하고 유연한 요새화된 도시로 남아있는 한 로마는 불안했다. 두려움과 질투심이, 그 치명적인 결점이 패배로부터 너무 빠른 회복이었던 적에 대하여, 로마를 점령했다. “카르타고는 파괴되어야 한다”고 로마는 스스로에게 되뇌었다. 주술이 작용했고 핑계가 발견되었으며 순응하는 셈족인 카르타고 인들의 변명과 구실은 묵살되었다. 카르타고는 로마의 동맹국인 누미디아(Numidia)을 공격했다는 누명을 썼다. 그래서 자마 들판의 전투 이후 52년 만에 또 다른 로마 정복군이 아프리카로 건너갔다. 이번에는 약점이 있을 수 없었다. 길고도 지독한 포위 작전이 끝나고 카르타고는 거센 공격을 받아 불타서 함락되었고 아프리카는 로마 영역의 한 지방으로서 예속되었다.
로마공화국의 놀라운 행운은, 동방의 민족들에 의하여 우려스럽고 경외롭게 오랫동안 추적되었다. 무시무시한 초인들로 구성된 이 야만적 공동체에 대하여 명예로운 혈통이 창안되었고, 자신들이 로마의 신화적 영웅인 아이네이아스(Aeneas)를 통하여 트로이의 프리아모스 왕으로부터 내려와서 그리스 고대의 가장 찬란한 전설들과 연결되었다고 로마인들은 배웠다. 포에니 전쟁이 진행됨에 따라서 로마인들의 커다란 특징들이 패배의 어두운 시기에 가장 빛을 발했는데 점점 힘이 증가하면서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세계에 인상을 남겼다. 그리스와 소아시아의 도시국가들이 자신들의 자유 보호와 동맹 보전을 위하여 기대한 것은 공화국으로 군주제에 대한 고착된 적대국인 로마이었지 않을까? 로마는 갈리아 인들을 처벌했고 일리리아 해적들을 제압했으며 당시 필사적인 우여곡절을 겪은 후 강고한 카르타고의 참주정권을 정벌하고 있었다. 적어도 그의 현명한 역사서가 이 결정적인 시대에 대하여 최고의 권위인 아르카디아인인 폴리비우스(Polybius)의 견해가, 로마가 동서양을 자신의 통제 속에 집어넣고 있을 때, 그러했다.
카르타고와의 전쟁으로부터의 긴장과 탈진 가운데서 로마가 동방에서 정벌을 시작하려는 분위기에 있지 않았다고 기꺼이 상상될 것이다. 로마의 정책은 이집트와 상업적 거래를 육성하여 우정의 손길이 자유롭게 제시되는 곳에서 그 손길을 잡은 것이었다. 페르가몬의 부유한 가문, 강력한 로도스라는 섬나라가 그리고 아테네라는 보편성 도시가 그런 손길을 내밀었고, 서양의 전쟁 무대에 침투하려는 유혹을 혹시 받을 강대국의 활동을 저지하려는 관련 국가들도 그런 손길을 내밀었다.
이 정책은 성공적이었다. 시리아의 안티오쿠스 3세(Antiochus III)나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 V세는 함선이나 병력을 이탈리아로 보낼 형편이 아니었다. 동부의 이 카르타고 친구들 각각은 연합 없이 기동하여 세밀하게 그리고 자신의 영토에서 패배했는데 안티오쿠스는 마그네시아(Magnesis)의 거대한 살육전에서 (기원전 190년)에서 패배했고 필리포스 V세는 키노케팔라이(Cynoscephalae)의 병사들의 전투에서 패배했다. 창병들로 구성된 육중한 밀집대형은 알렉산더가 자신의 거대한 동방의 제국을 정복하는 데 도움을 주었지만 로마의 군단과 스페인 기병들에게는 상대가 되지 않았다. 안티오쿠스는 어쩔 수 없이 타우루스 산맥(The Taurus) 배후로 후퇴했고 소아시아의 패권은 그때부터 로마에게 이전되었다.
그러나 그리스인들은 불만이었다. 자치를 그들은 요구했고 자치를 그들은 받았다. 마케도니아인들은 그리스의 요충지로부터 추방되었고 로마인들을 해방자들로서 환영을 받았다; 그러나 그리스의 화합과 통합은 더 이상 진척되지 않았다. 로마인 촉탁인들은 그리스의 분쟁들을 중재하라는 요청을 받았는데 판결할 때마다 친구가 되기도 했고 적이 되기도 했는데 비도덕적인 로마인들이 그리스의 불화를 조성한 것이 사실이라면 불만인 그리스인들이 마케도니아의 왕 페르세우스(Perseus)와 비밀리에 음모를 꾸몄다는 것도 못지않게 사실인데 페르세우스 왕이 꾸준히 로마에 대한 적대감을 지니는 것을 그리스인들이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기원전 168년 퓌드나(Pydna) 전투 이후 마케도니아의 최종적 파괴에는 무산된 대의명분에 동조했던 그리스인 지도자들이 이탈리아로 추방되는 일이 이어졌다. L. 아에밀리우스 파울루스(Aemilius Paulus)는 최고의 로마인으로 군인이자 정치가였으며 훌륭한 문학에 우호적이었고 금전적 유혹을 초월한 인격체였다; 그러나 퓌디나에서 거둔 그의 절정적 승리 후에 그가 야기한 복수극은 완벽함과 다르지 않았다. 페르세우스 왕 이후 유명한 마케도니아인 모두는 이탈리아로 국외 추방되었다. 인구의 절반 이상이 노예가 되었고 국가는 네 조각으로 분할되어, 로마의 지방으로 자체의 후속적 전환이 비교적 축복일 정도로 무기력하게 비참한 국가로 전락했다.
그러나 그 엄혹한 교훈은 그리스에서 잊혔다. 반란이 발생하여 잔혹하게 진행되었고 잔혹하게 진압되었다: 그리고 그리스 연합의 필사적인 마지막 저항이 코린트 평야에서 L. 뭄미우스 장군(Mummius)에 의하여 진압되고 (기원전 146년) 코린트의 남성들을 살해당했으며 여성과 아이들은 노예로 팔렸고 도시는 파괴되어 평지가 되었다. 그리스는 마침내 50년 동안 휴식기간을 로마라는 주인 아래서 보냈다. 이에 앞서 오래 전에 전쟁과 유아살해 및 말라리아로 인하여 그리스 인구가 크게 감소하고, 불멸의 명칭과 그리스에 자체의 파멸을 가져온 자유에 대한 불타는 사랑을 조국에 부여했던 사람들의 자손들이 휩쓸려갔다.
사람들이 거주하던 세상이 단 한 번의 생애 동안에 로마의 통치에 종속됨으로 인하여 동시대인들은 기적적인 역사의 절정을 떠올렸는데 정말로 그러했다. 그러나 로마공화국의 정치권력이 카디스(Cadiz)에서부터 유프라테스 강까지 느껴지는 동안, 로마공화국의 더 깊은 영향력의 한계들이 더 엄격하게 표시되었다. 시칠리아와 스페인에게 로마의 모습은 지워질 수 없게 찍혔다; 그러나 아드리아 해 동쪽에서 지중해 민족들이 이전처럼 한 세계를 격하고 반은 그리스적이고 반은 동양적으로 남았는데 자신들이 지녔던 세련되고 더 우아한 문화에 의하여 자신들을 정복한 사람들에게 깊은 영향을 미쳤지만 어느 정도의 질서와 훈련 및 보호를 제외하여 반대급부로 아무것도 받지 못했다. 그리고 그 민족들은 중세기 십자군 때까지 서양의 라틴 문화에 의하여 침입을 받지 않았다.
정말로 얼이 빠져서가 아니라 반쯤 주저하고 정해진 계획도 없이 로마는 제국으로 끌려들어간 듯이 보일 터이다. 이탈리아에 대한 연속적인 로마의 정복 단계들은 로마에게 강요되었는데 왜냐하면, 나중에 영국이 인도에서 경험한 것처럼 소요사태로 둘러싸인 질서정연한 강대국은 항상 자체의 국경지역에 어쩔 수 없이 평화와 안전을 확보해야 하기 때문이다. 카르타고와의 전쟁은 정말로 한 순간의 대중적 전쟁 열기로 시작되었지만 오래가지 않았다. 로마는 한니발을 차단하려고 스페인에 진출했고 훨씬 나중에는 스페인과 소통하려고 갈리아로 진출했다. 폼페이우스의 시리아 병합이 아마도 자본주의적 계급인 에퀴테스(the equites)의 영향력에 기인했던 기원전 1세기까지, 카르타고와 코린트의 파괴라는 경우들을 제외하고, 상업적 및 재정적 이해관계로 인하여 로마가 정복과 병합의 길로 떠밀렸다는 견해는 유효하지 않다. 더욱 특히 로마는 그리스의 왕국들을 병합하는 데 크게 주저했다. 로마는 그 왕국들의 세력을 부수었고 동방을 통치하는 그 왕국들의 능력을 실제로 파괴했으며 행정이라는 과업을 스스로 회피했다. 로마가 혼란과 해적질로부터 큰 불편을 경험한 후에 최종적으로 전체 지역을 직접적으로 통치하기 전 150년 동안 동부 지중해 지역에서 지배적인 세력이었다는 것은 괄목할만한 사실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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