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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론에서 합리적 소신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이윤진이카루스 2026. 2. 24. 1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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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론에서 합리적 소신은 어떻게 이룩되는가

 

훌륭한 이론에 그 이론이 지금까지 오류판정을 피했다는 것 이상의 것이 있다: 우리가 항상 오류를 저지를 수 있고 많은 오류를 저지르기 쉽다고 그리고 모든 과학적 이론이 추측성이라고 우리가 인정할지라도, 과학에 엄청난 양의 긍정적 지식이 있다는 것을 부인하면 불합리하다. 그러나 어떻게 우리는 이 입장의 ㅡ 과학에 대한 다소 제한된 종류의 이 소신 ㅡ 합당성을 인정하고 동시에 흄이 옳다고 인정할까?

이것은 새로운 과제이다. 그 과제가 첫 번째 문제보다 덜 근본적이고 덜 흥미롭다는 나의 견해는, 소신과 관련된 철학에 대한 나의 제한적 흥미에 부분적으로 기인한다. 그러나 그런 나의 견해는 또한 그 과제를 충족시키기 위하여 실제로 새로운 관념이 필요하지 않다는 사실에도 기인한다. 그러나 이 새로운 과제 즉, 그 문제의 두 번째 단계로 인하여 상황을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과학적 이론의 추측성 특징에 관하여 합의가 이루어졌다고 나는 전제하겠다: 우리의 과학적 이론은 증거와 토론의 결과에 의하여 아무리 성공적이고 잘 뒷받침되었다할지라도 불확실한 상태로 남는다고, 어떤 종류의 변화가 필요하게 될지 우리가 예견할 수 없을 것이라고 나는 전제하겠다. (뉴튼의 역학을 기억하라!) 따라서 여기서 과학에 대한 그리고 과학적 이론에 대한 합리적 소신을 우리가 말한다면 특정 이론의 진리를 신뢰하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말할 의도가 우리에게 없다고 나는 전제하겠다. 그 요점은 매우 중요하다.

그렇다면 우리의 합리적 소신의 목표가 무엇인가? 그것은 진리가 아니라 시험을 포함하여 엄격한 비판을 견디어낸 한, 과학 이론의 소위 진리유사성(혹은 박진성[迫眞性]’)이라고 (truthlikeness[or verisimilitude]) 나는 제안한다. 우리가 믿는 것은 (옳든 그르던) 뉴튼 이론이나 아인슈타인의 이론이 참이라는 것이 아니고 그 이론들이, 나은 이론에 의하여 대체될 수 있을지라도, 진리에 대한 충분한 근사치(good approximations)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 소신이 합리적이라고 나는 주장한다. 역학법칙이 (혹은 역학법칙이라고 우리가 생각했던 것) 별안간 변했다는 것을 (‘내일의 문제를 연구하며 아래 III IV 항에서 더 완전히 토론될 가능성) 우리가 내일 발견할 것이라고 우리가 전제할지라도 그 소신은 합리적이다. 이유인즉 이 경우에 새로 관찰된 규칙성뿐 아니라 옛 규칙성도 설명하는 문제에 우리가 틀림없이 봉착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문제는 (a) 옛 이론이 획득될 수 있는 이론을, 특정 상황에서 충분한 근사치로서 구축하는 것, 그리고 (b) 어떤 상황으로 (초기조건) 인하여 변화가 발생했는지를 밝히는 것일 터이다. 이 접근방법은 대체된 이론의 부활을 근사치로서 보장하고 실재론에 의하여 그리고 과학의 방법에 의하여 요구된다. 단순히 변화가 발생했다는 사실에 굴복하고 그 변화를 기록하는 일은 기적을 수용하는 것, 합리적 설명 추구를 포기하는 것 그리하여 과학의 과제를 ㅡ 합리성을 ㅡ 포기하는 것에 해당할 터이다.

이 고찰로 인하여 잘 입증된 과학의 결과에 (역학법칙과 같은 것들) 있는 진리유사성에 대한 소신이 정말로 합리적이고, 심지어 그 결과가 대체된 이후에도 합리적으로 남는다고 밝혀진다. 게다가 그것은 등급들(degrees)이 가능한 소신이다.

우리는 두 가지 다른 차원이나 등급의 규모를 구분해야 한다: 이론에 있는 진리유사성의 등급, 그리고 특정 이론이 진리유사성을 (특정 등급의) 이룩했다는 우리 소신의 합리성 등급.

나는 이 두 가지 등급 중 첫 번째를 박진성(迫眞性)의 등급(degree of verisimilitude)’으로 두 번째를 입증의 등급(degree of corroboration)’으로 불렀다. 두 가지 이론이, 그러나 일반적으로 (다시 말해서 아마도 확률론적 이론을 제외하고) 숫자적 평가를 초래하지 않고, 박진성이나 입증과 관련하여 비교될 수 있다는 의미에서 그 등급들은 상대적이다.

두 가지 경합하는 이론이 우리가 다룰 수 있는 만큼 철저하게 비판되고 시험되어서 그 이론 중 한 가지 이론의 입증 등급이 다른 이론의 입증 등급보다 더 크다는 결과를 낳는다면 일반적으로 두 번째 이론보다 첫 번째 이론이 진리에 나은 근사치라고 믿을 근거가 우리에게 있을 것이다. (아직 입증되지 않은 이론에 대하여 그 이론이 다른 이론보다 잠재적으로 낫다고 또한 말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그 이론이 특정 시험을 통과한다면 그 이론을 진리에 대한 나은 근사치로서 수용하는 것이 합리적일 터라고 말할 수 있다.)

이 견해에 따르면 과학과 과학의 결과에 있는 합리성은 ㅡ 그리하여 과학과 과학의 결과에 대한 소신에 있는 합리성 ㅡ 그 합리성의 진보 및 새로운 이론의 상대적 장점과 관련하여 항상 새롭게 시작되는 토론과 본질적으로 관련된다; 그 합리성은, 귀납주의자들이 믿는 바와 같이 뒷받침하는 관찰의 축적으로부터 발생하는 이론에 대한 소위 진보적 강화(progressive consolidation)라기보다 (혹은 확률증가) 이론에 대한 진보적 타도(progressive overthrow)와 관련된다.

수백 가지의 사례 중에서 한 가지 사례가 이것을 예시할 것이다.

우리 대부분은 오늘날 태양계에 대한 코페르니쿠스의 모형을 신뢰한다 ㅡ 그리고 신뢰할 근거를 지닌다 (케플러와 뉴튼에 의하여 수정된 바와 같이): 자기들의 위성에 의하여 동반되어 태양 주위를 거의 타원형으로 움직이는 행성들의 특정 배열을 신뢰한다. 그러나 이 이론의 진리유사성을 신뢰하는 데 대한 우리의 근거가 무엇인가? (확신컨대 우리는 그 이론의 완벽한 진리를 신뢰하지 않는데 왜냐하면 그 이론은 모형일 따름이고 그리하여 과도한-단순화와 근사치이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ㅡ 그 이론에 아인슈타인의 수정이 필요할 것이고 아마도 보데의 법칙[Bode's law]에 있는 근접한 타당성을 설명할 어떤 혁명적 추가 설명이 필요할 것이라는 사실과 완전히 별도로.)

이집트인과 바빌로니아인으로 시작하여 여러 세기 동안 축적된 관찰성 증거의 이야기를 언급하면, 그 모형의 진리유사성을 신뢰하는 데 우리가 지닌 강력한 근거를 공정하게 대하지 못할 터이다. 우리가 신화로서 설명해치워야 (비판적 토론을 통하여) 하는 전통을 (태양이 자체의 통로에서 주저하는 것에 대한 호메로스의 보고서 혹은 여호수아가 태양을 멈추게 만든 것과 같은 것) 우리가 언급해야 할 것이라는 사실과 완전히 별도로, 관찰 보고서는 고도로 선택적이고 이 선택은 미리 생각된 관념들에 의하여 영향받는다.

코페르니쿠스 모형의 진리유사성을 신뢰하는 데 우리가 지닌 실재적 근거는 훨씬 더 강력하다. 그 근거의 본질은, 새로운 태양이 매일 탄생한다는 헤라클레이토스의 가설이나 데모크리토스와 플라톤 및 아리스토텔레스와 아리스타르코스(Aristarchus) 그리고 프톨레마이오스의 우주론을 간과하지 않고 아낙시만드로스(Anaximander) 이래 관찰에 대한 비판적 평가를 포함하여 태양계에 대한 모든 이론을 비판적으로 토론하는 이야기이다. 그것은 티코(Tycho)에 의한 관찰의 축적이라기보다 케플러와 데카르트 및 다른 사람들에 의한 많은 추측을 비판적으로 배척하는 것으로 뉴튼 역학과 뉴튼 역학에 대한 후속 비판적 검토에서 절정을 이루었고 뉴튼 역학과 그 역학에 대한 비판적 검토로 인하여 결국 모든 사람이 진리를 향하여 커다란 진보가 이루어졌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 생각, 이 소신, 이 선호는 비판적 토론의 현재 상태가 낳는 결과에 근거하기 때문에 합당하다; 그리고 한 이론에 대한 선호는 그 이론이 논증될 수 있고 그 이론이 탐구적인 비판적 논증을 ㅡ 그 이론과 경합하는 이론들보다 그 이론이 참도 아니고 진리에 더 가깝지도 않다고 밝히려는 독창적 시도 ㅡ 견디어낸다면, ‘합당하다(reasonable)’라고 지칭될 것이다. 정말로 이것은 우리에게 알려진 최고 의미의 합당하다이다.

위에 기술된 의미에서 소신의 합당성은, 시간 및 문화적 전통과 함께 변하고 제한된 범위까지 토론을 수행하고 있는 사람들의 무리와 함께 변한다; 왜냐하면 새로운 논증, 새로운 비판적 관념들로 인하여 소신에 대한 합당성이 변할 것이기 때문이다. 새로운 실험으로 인하여 같은 일아 발생할 것임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비판적 토론의 현재 상태는 한 이론의 다른 이론에 대한 우월성에 관하여 매우 확실할 수 있다. 그 상태는 한 이론의 허위성에 대해서 또한 매우 확실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이론의 진리에 대해서는 확실할 수 없다. 그런 확실한 평가들이 장기적이고 완벽한 비판적 토론의 결과였을 때, 그 평가들은 과거에 통상적으로 나중 토론들에 의하여 입증되었다: 두 가지 이론에 대한 상대적 평가가 뒤바뀌는 것과 확실하게 배척된 이론들이 부활하는 것은 현저하게 드물었다. (뉴튼의 광입자설[corpuscular theory of light]은 흔히 주장되는 바와 같이 아인슈타인의 광자론에 의하여 부활한 것이 어떤 의미에서도 아니다: 뉴튼의 광입자설은 전송전파 이론(a theory of transmission and propagation)이다; 광자론은 방출과 흡수의 문제를 충족시키려고 고안되었는데 전파의 문제에서 파동설에 굴복한다.) 이것과 반대로 귀납적 증거에 근거한 주장들의 역전은 놀라울 정도로 흔하여 귀납에 반대하는 귀납적 증거와 같은 것이 있다. (모든 백조가 희다는 거짓 서술뿐 아니라 의학적 미신을 포함하여 미신 대부분도 또한 방대한 양의 귀납적 증거에 의하여 뒷받침된다.) 비판적 평가들의 역전이 드물다는 사실은 쉽게 설명될 수 있다: 훌륭한 비판적 논증들은 자체의 힘을 유지한다 ㅡ 정말로 그 논증들이 발견되지 않은 편견들을 이용하여 혹은 허위이거나 잘못 해석된 관찰성 증거를 이용하여 작용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비판적 평가 중 많은 평가가 살아남았다고, 그리고 심지어 우리의 최고 이론이 대체되었을 때 그 이론이 그렇게 평가받을 시간에 이용될 수 있는 최고의 이론이었다는 판단을 우리가 뒤집은 적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우리의 비판적 방법이 과거에 놀라울 정도로 성공적이었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최고의 이론이 미래에도 최고일 것이라고 우리가 결론을 내려서는 안 된다. 우리가 경험하는 문제는 우리에게 너무 어렵게 되거나 우리의 지성이 퇴보할지도 모른다. 결국 교육을 잘 받은 수천 명의 과학자 가운데서 극소수만 과학과 관련하여 더 어렵고 근본적인 문제에 기여하는 데 성공한다; 그리고 이 극소수마저 더 이상 없다면 과학은 아마도 침체할 터이다. 아니면 몇 가지 편견에 의하여 우리가 망할 것이다: 위압적 세부사항에 대한 숭배나 정확에 대한 숭배가 우리를 압도하여 명료성과 단순성 및 진리를 찾으려는 우리의 탐구를 방해할 것이다. 과학에 왕도가 없다; 성공을 보장하는 방법이 없다; 그래서 우리가 성공하는 이유를 설명하는 데서 지식론에 의하여 우리가 지속적으로 성공할 것이라고 예측할 수 있는 여하한 지식론은 너무 많이 설명하고 너무 많이 예측한다.

 

나은 이론에 대한 이 선택은 나은 증인을 선택하는 것과 같다. 우리가 서로 다르게 증언하는 증인들과 만날 때, 우리는 그 증인들을 교차-질문하려고, 그들이 말하는 것을 비판적으로 분석하려고, 관련 세부사항을 검토하고 또 반대로 검토하려고 시도한다. 그래서 우리는 그 증인 중 한 증인을 선호하기로 결정할 것이다 ㅡ 합리적으로 결정할 것이다; 모든 증언이 심지어 관찰에 국한될 때도 선택적이기 (모든 사유처럼) 때문에 최고의 증인을 배제하지 않고 비록 모든 증인이 다소 편향적이라고 우리가 전제할지라도 전체 진실을 그리고 진실만을(the whole truth and nothing but the truth)’이라는 이상(理想)은 엄격히 말해서 도달될 수 없다; 물론 우리가 새로운 비판적 논증이나 새로운 증거에 비추어 증인 중 한 증인에 대한 우리의 선호를 수정할 준비가 되어 있을지라도 그 이상은 엄격히 말해서 도달될 수 없다.

이것은, 개괄하여 나의 이론이 귀납 문제의 두 번째 단계에 던지는 긍정적기여이다. 그러나 이것은 부정적 면을 또한 강조하는 데 필요하다.

뉴튼에 의하여 수정된 것으로서 코페르니쿠스 모형이 프톨레마이오스의 모형보다 진리에 더 가깝다고 우리가 합당하게 믿을지라도, 그것이 어떻게 가까운지 말할 방법이 없다: 설령 우리가 박진성(迫眞性: verisimilitude)에 대한 측정 기준을 정의(定義) 수 있을지라도 (흥미롭지 못한 경우에만 우리가 그렇게 할 수 있다) 우리가 진리를 알지 못한다면 ㅡ 우리는 진리를 알지 못한다 ㅡ 그 기준을 적용할 수 없을 터이다. 태양계에 대한 우리의 현재 관념이 진리에 가깝다고 우리가 생각할 것이고 그 관념은 정말 그럴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알 수 없다. 또한 우리의 토론이 그렇게 믿을 근거를 우리에게 제공했다고 우리가 생각해서도 안 된다: 우리의 토론이 이룩한 유일한 것은, 우리가 진리를 향하여 진보했다고 믿을 충분한 근거를 우리에게 제공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현재 관념 중 몇 가지가 다른 대안들보다 더 진리와 유사하다고 믿을 충분한 근거가 우리에게 있다. 그래서 코페르니쿠스의 모형이 위대한 돌파구였을지라도 태양이 우주의, 심지어 우리 은하계의 중심이라고 우리가 더 이상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의 이론들을 우리가 정당화할 수 없고 또 그 이론들이 참이라는 소신을 정당화할 수도 없다; 또한 그 이론들이 진리에 더 가깝다는 소신을 우리가 정당화할 수 없다. 그러나 특정 이론에 대한 선호를 ㅡ 때때로 매우 강력한 선호 ㅡ 우리가 수행한 토론의 현재 결과에 비추어 우리가 합리적으로 옹호할 수 있다.

과학의 방법은 합리적이다: 과학의 방법은 우리가 지닌 최상의 방법이다. 그러므로 과학의 방법이 낳은 결과를 수용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그러나 우리의 신념을 그 결과에 고정시킨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다: 어디에서 우리가 실망할지 우리는 결코 미리 알지 못한다.

그러나 모든 실용적 목적을 위하여 과학의 결과에 의존하는 것이 합당하거나 합리적이다. 이유인즉 실행이 항상 선택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런 방식 또는 저런 방식으로 행동할 것이다. (행동하지 않는 것도 물론 행동의 가능한 한 가지 방식일 뿐이다.) 그리고 우리가 한 가지 과학적 이론을 실용적 행동의 토대로서 수용하거나 배척하는 한, 이것은 또 다른 이론이라기보다 한 이론 선택을 의미한다. 우리가 그런 선택을 실행할 입장에 있는 곳에서 두 가지 경합하는 이론 중에서, 시험을 포함하여 장기적인 비판적 토론으로부터 살아남은 이론을 선택하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다.

여기서 마지막 요점이 전개되어야 한다. 소신은 실제 행동에서 많이 필요한 것으로 보인다: 사람은 행동하는 동물이기 때문에 믿는 동물이다. 이론가는 이론가의 자격으로서 소신 없이 일할 수 없다. 최대의 박진성(迫眞性: verisimilitude)이 있는 듯한 이론이 이론가에게 신뢰할 이론이 아니라 추가 진보를 위하여 중요한 이론이다. 그 이론은 또한 추가로 비판할 가치가 있는 것으로서 이론가가 골라낼 이론이기도 하다.

물론 심지어 이론가도 이론가의 자격으로서 행동해야 한다; 예를 들어 이론가는 자기 문제들을 선택해야 한다. 그리고 이론가가 그렇게 하는 한, 그도 역시 자기 소신에 의하여 ㅡ 동시에 의심에 의하여 ㅡ 영향받을 것이다.

ㅡ 칼 포퍼, ‘실재론과 과학의 목적’, 2000, 56-62쪽 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