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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관론적 지식론이 실패하는 이유

이윤진이카루스 2026. 3. 13. 1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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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관론적 지식론이 실패하는 이유

 

9. 주관론적 지식이론이 실패하는 이유.

주관론적 지식이론은 다양한 이유로 실패한다. 먼저 주관론적 지식이론은 모든 지식이 주관적이라고 ㅡ 아는 주체인 아는 사람이 없으면 지식에 대하여 우리가 말할 수 없다고 ㅡ 순진하게 전제한다. 둘째, 전통적으로 그 이론의 근본적 문제가 잘못 생각된다. ‘내가 안다는 것을 나는 어떻게 아는가?’라는 문제를 (러셀의 언명으로; 7절의 주석46 참조), 그 문제의 함축된 순진한 경험주의적 답변 관찰이나 감각-경험으로부터와 함께, 내가 염두에 둔다.

이 모든 것에 반대하여 과학적 지식이 틀림없이 나의 지식이 아니라고 내가 주장한다. 이유인즉 내가 얼마나 아는 게 없는지를 ㅡ 과학에 알려진얼마나 많은 수천 가지의 지식이 있지만 나에게 알려진 게 없다 (비록 내가 틀림없이 그 지식을 알고자 갈망할지라도) ㅡ 내가 우연히 알기 때문이다. 나에게 (그리고 다른 주제에 대해서도 나는 틀림없이 기대한다) 이 사실만도 틀림없이 과학적 지식에 대한 주관론적 이론을 배척하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심지어 나 자신이 우연히 소유한 과학적이자 상식적 지식의 저 조각들도 주관론적 지식이론의 미리 생각된 도식에 부합하지 않는다: 그 지식의 조각 중 전적으로 나 자신의 경험의 결과인 것은 없다. 오히려 그 지식의 조각들은 주로 부분적으로 의식적으로 부분적으로 무의식적으로 특정 전통을 (예를 들어 특정 저서들을 읽음으로써) 내가 흡수한 결과이다. 그래서 그 지식의 조각들이 특정 전통을 흡수함으로써 또한 초래되는 나의 형이상학적 소신과 (가령 종교적이거나 도덕적 확신) 밀접한 관련이 없는 것과 같이 나 자신의 관찰성 경험과도 밀접한 관계가 없다. 두 가지 경우 모두에서 이 전통 중 몇 가지에 대한 나 자신의 비판이, 내가 안다고 내가 믿는 것을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실행할 것이다. 그러나 이 비판은, 한 가지 전통 내부의 모순 또는 다양한 전통들 사이의 모순을 발견함으로써 거의 항상 자극받는다. (그 비판은 한 가지 전통과 나 자신의 관찰성 경험 사이의 모순을 발견함으로써 자극받는 적이 없다; 이유인즉 사람들이 자신의 관찰에 의하여 전통적 이론을 실제로 오류로 판정하는 일이 사람들에게 발생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과학적 지식은 나의 지식과 동일하지 않다; 그리고 나의 지식인 것은 ㅡ 나의 상식이나 나의 과학적 지식 ㅡ 주로 내가 전통을 흡수한 결과이며 (내가 희망하는 바) 어떤 비판적 사유의 결과이다.

물론 거의 나의 지식으로 또한 아마도 지칭될 세 번째 종류의 지식이 있다: 어디에서 내가 잉크병을 찾아야 하는지 혹은 내 방의 문을 찾아야 하는지를 내가 안다; 나는 기차역으로 가는 길을 안다; 내가 늦게 조치하면 나의 구두끈이 끊어질 성향이 있다고 나는 안다. (혹시 개인적 지식으로 일컬어질) 이런 종류의 지식은, 나 자신의 경험으로부터 결과이기 때문에, 전통적이 아니다; 그리고 그런 종류의 지식은 그리하여 주관론적 이론에 의하여 예상되는 종류의 것에 매우 가깝다. 그러나 심지어 개인적 지식조차도 저 이론에 들어맞지 않는다; 이유인즉 개인적 지식이 전통적인 것에 대한 ㅡ 잉크병, 구두끈, 기차역에 대한; 우리가 전통을 흡수함으로써 배워야 하는 것들 ㅡ 상식적 지식에 박혀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관찰과 우리의 눈과 귀는 이 흡수과정에서 엄청난 도움이 된다고 인정된다. 그러나 전통을 흡수하는 것은 주관론적 이론에 의하여 예상되는 과정과 근본적으로 다른 과정인데 내가 나의 지식으로부터 그리고 더욱이 나의 관찰성 경험으로부터 시작하기를 그 이론이 원한다.

 

주관론자는 자기가 예상하는 과정이 논리적으로 그리고 유전적으로 내가 암시하고 있는 과정에 앞선다고 답변하기 쉽다. 내가 전통을 흡수하기 시작하기 전에 관찰성 경험에 의하여 세상에 관하여 내가 틀림없이 많이 배운다고 주관론자가 말할 것이다.

이 단계에서 나는, 주관론자처럼, 다음과 같이 질문하고 싶다: ‘당신은 어떻게 아는가? 당신의 주장에 대한 관찰성 토대가 무엇인가?’ 이유인즉 그의 답변이 순전히 편견과 상상력 부족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생물학적 과학에 의하여 우리가 다른 이야기를 듣는다: 예를 들어 많은 곤충에 많은 타고난 지식이 있다고 ㅡ 몇몇 곤충은 사실상 자신들의 타고난 반응을 특정 분야에서 배우고 수정할 수 없다고 ㅡ 생각할 매우 충분한 근거가 우리에게 있다; 그 곤충들이 자신들의 감각을 사용하여 이전에 보지 않고도 특정 물체를 (먹이나 잠재적 배필) ‘인식한다고 생각할 매우 충분한 근거가 우리에게 있다. 그러나 몇몇 곤충에게 이것이 참이라면 적어도 어느 정도까지 포유류와 사람에게도 참일 개연성이 높다: 우리는 내재적 전통이나 본능과 같은 것을 지니고 태어날 것이다 (비록 이것들이 우리를 흔히 오도할지라도). 사실상 주관론적 답변은 경험주의적 신화(神話)의 일부이다.

 

주관론자의 다음 답변은 다음과 같기 쉽다: 곤충과 인간이 본능적 종류의 타고난 지식을 지닌다는 것이 틀림없이 참일지라도, 이 지식은 틀림없이 여전히 이런저런 정도로 관찰성 경험의 결과이다; 다시 말해서 이전 세대의 관찰성 경험의 결과이다.

두 가지 다른 근거로, 이 답변은 이전 답변보다 더 옹호될 수 없다. 먼저 참일지라도 이 답변은 논점(論點)을 변경할 터이다. 둘째, 그 답변이 주장하는 것은 참이 아닌 듯하다 ㅡ 아무튼 그 답변은 현재 유전학자 대부분이 수용하는 견해와 충돌한다.

나의 두 가지 요점 중 첫 번째 요점에 관하여 쟁점인 것은, 일반적 경험주의가 아니라 주관론적 경험주의로 또는 더 정확하게 내가 어떻게 아는가?’라는 문제로 시작하고 나의 모든 지식이 나의 주관적인 관찰성 경험까지 추적될 수 있다고 전제하는 주관론적 지식이론이다. 그러나 나의 경험이 충분하지 않다고 ㅡ 우리가 선조들의 (혹은 다른 사람의) 경험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고 ㅡ 인정되자마자 그 주관론적 이론이 붕괴한다. 이유인즉 그렇다면 지식이 상호-주관적인 것으로 인정될 터이고 이 상호-주관적 지식이 그렇다면 나의 주관적 지식에 유전적으로 앞선다고 인정될 터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부수적으로, 나의 주관적 지식이 상호-주관적 지식에 논리적으로 앞설 수 없다는 것을 한층 더 강력한 이유로 증명한다.)

두 번째 요점에 관하여, 그 응수는 다윈적 응수에 반대가 되는 것으로서 본질적으로 라마르크적이다; 이유인즉 그 응수에, 우리에게 타고난 지식이 있다면 그 지식은 마지막 수단으로 틀림없이 여전히 개인적으로 습득된 관찰성 경험의 결과라는 견해를 방어하려는 의도가 있기 때문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우연히 라마르크 이론을 많이 동정한다; 그러나 라마르크의 이론은 현재 생물학자 대부분에 의하여 선호되지 않는다; 그리고 아무튼 지식이론은 (경험주의적이든 다른 것이든) 선험적 토대와 같은 것을 근거로 라마르크 이론과 같은 추측을 무비판적으로 채택해서는 안 된다.

 

주관론자는 지식이라는 단어의 모호성 몇 가지에 의하여 흔히 오도된다. ‘지식은 분명히 나는 안다로부터 도출된다. 이것은 지식이 단지 알려진 ㅡ 사람들에게 알려진 ㅡ 것일 수 있다고 의미한다.

그러나 이 견해는 분명히 부적당하다. 대수표(logarithmic table)를 포함하는 책을 생각하라. 그런 표를 만드는 방법을 아는 (그 표를 계산하는, 그 표를 배열하는, 그 표를 인쇄하는 방법) 사람들이 있고 그 표를 이용하는 방법을 아는 다른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그 표를 아는사람은 없다 (가령 심지어 몇몇 사람이 구구단의 시작을 안다는 의미에서도 없다). 그러나 그 표는 지식을 ㅡ 객관적 지식 ㅡ 대표한다: 셀 수 없이 많은 중요한 질문에 대한 답변이나 부분적 답변을 대표한다: 매우 유용한 정보를 대표한다. 그리고 이 지식은 누구에게도 알려지지않는다 (심지어 편찬자에게도 알려지지 않는다); 그 지식은 단지 이용될 수 있다: 그 지식은 편집자와 발행자를 신뢰할 각오가 되어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거기에 잠재적으로 있다.

그 경우는 모든 과학적 이론과 유사하다: 이론은 아무도 알지못하는 ㅡ 그 이론을 발견한 사람이나 이용하는 사람 모두 알지 못하는 ㅡ 다량의 정보를 잠재적으로나 성향적으로 포함할 것이다: 이론은 선택될 수 있고 정보는 이론으로부터 도출될 수 있다; 예를 들어 매우 특별한 상황의 집합들에 이론을 적용함으로써 정보가 도출될 수 있다.

이 객관적 의미에서 과학적 지식은 학습될 수 있고, 흡수될 수 있으며 이용될 수 있고 적용될 수 있다. 동일한 과학적 지식 조각이 독단적으로나 비판적으로 수용되거나 배척될 수 있다. 그 지식은 열렬히 신뢰될 수 있거나 대충 짐작으로서 간주될 수 있다: 분기하는 많은 주관적 태도가 있고 전통에 반응하는 많은 방식이 있다.

객관적 지식을, 혹은 객관적 지식 한 조각을 사용하는 한 가지 방법을 사용하면, 우리 자신의 주관적 확신 중 몇 가지를 우리가 형성하는 데 도움받는다. 이 방법은 ㅡ 객관적 지식에서부터 주관적 지식에 이르는 방법 ㅡ 주관적 지식에서부터 객관적 지식에 이르는 방법보다 훨씬 더 자주 사용된다. 그러나 주관론적 지식이론은, 오직 주관적 지식만 있다거나 (저서는 사용자의 정신에서 지식을 구성할 저 연상 작용을 일깨울 수 있는 종류의 물리적 몸체일 뿐이라고) 적어도 객관적 지식이 ㅡ 우리가 그런 것에 대하여 조금이라도 말할 수 있다면 ㅡ 주관적 지식의 어떤 조각의 기록이나 그 조각으로부터 도출일뿐이라고 의당 전제한다.

객관적 지식이 항상 인간의 행동으로부터, 주관적인 동시에 객관적인 지식에 비추어 취해진 조치로부터 직접적으로나 간접적으로 기인할지라도, 객관적 지식은 흔히 이전에 주관적으로 알려지지 않고 나타난다. 이것은 모든 계산에서 변함없이 사실이다 (계산을 하는 사람에 관한 한): 여기서 우리가 대응하는 주관적 확신을 형성하기 전에 결과가 어떤 물리적 형태로 나타나기를 우리가 기다린다. (미적분학을 창안한 사람들이 모호한 관념을 지니고 있었을지라도, 실제로 미적분학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알지 못했다는 것을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된다: 그리하여 그 창안자들은 거의 마술에 의하여 자신들의 지식을 자신들의 계산으로부터 얻었다. 그들이 발견한 것은, 자신들이 구축한 지식 기계가 극도로 잘 작동한다는 ㅡ 항상은 아닐지라도 통상적으로 ㅡ 것이었다.)

내가 말한 것으로부터 우리가 객관적 지식을 ㅡ 과학 ㅡ 사회적 제도로서, 혹은 사회적 제도의 집합이나 구조로서 간주할 수 있다고 알려질 것이다. 다른 사회제도처럼 객관적 지식은 주로 의도되지 않고 거의 전적으로 예견되지 않은 인간 행동의 결과이다 (베이컨에게 실례지만). 확실히 객관적 지식은, 호기심에 ㅡ 과학자들의 주관적 지식을 증가시키려는 소망 ㅡ 의하여 영감받을 뿐 아니라 지식의 ㅡ 다시 말해서 객관적 지식의 ㅡ 성장에 기여하려는 소망에 의하여 훨씬 더 영감받기도 하는 과학자들의 주로 제도화된 협력과 경쟁을 통하여 생명을 얻고 성장한다. (객관적 지식에 이룩된 많은 위대한 기여의 본질은 오류였고 이 오류의 탐지였다.)

기여가 어떻게 이룩되어 시험되고 수용되어 배척되는지에 대한 연구; 기여의 가설적 위상에 대한 연구; 기여에 적용되는 전통적 표준에 대한 연구와 이 표준의 개선에 대한 연구 ㅡ 이 연구가 지식이론의, 다시 말해서 객관적 지식이론의 가장 흥미롭고 가장 유익한 부분이다.

 

주관적 지식 같은 것이 없다거나 주관적 지식이 객관적 지식의 성장에 중요하지 않다고 제안할 의도가 물론 나에게 없다: 객관적 지식은 주관적 지식이 없다면 성장할 수 없을 터이다. 이 두 가지 지식 사이의 연결은, 내가 적시한 바와 같이, 전혀 간단하지 않다. 그리하여 주관적 지식이론을 또한 갖는 것에 대한 충분한 근거가 있다.

그러나 그런 이론은 과학의 논리나 인식론의 일부가 아니라 경험 과학의 일부일 터이다. 이유인즉 주관적 지식의 화제가 어떤 사람이 지닌 지식의 ㅡ 우리가 그것이 그럴 것이라고 내가 알았어!’라고 말할 때 우리가 표현하는 저 주관적 경험의 ㅡ 성장이자 발전이기 때문이다. 저 경험은 심리학적이거나 ㅡ 내가 생각하기 더욱 흥미롭게 ㅡ 일반적인 생물학적 연구의 대상일 될 것이다.

과학적 지식과 활동을, 생물학적 현상으로 우리가 간주하고 싶으면 인간이라는 동물이 자기 환경과 환경적 변화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그 현상이 수행하는 역할을 우리가 고찰해야 한다: 임박한 사건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그 현상이 수행하는 역할을 우리가 고찰해야 한다. 동물과 심지어 식물도 월동에, 가령 순전히 본능적 토대에 근거하여 대비한다. (내가 여기서 주장할 예정인 이것과 다른 것을 내가 어떻게 아는가? 나는 그것들을 알지 못한다: 이것들 모두가 짐작이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아마도 달력을 참고하고 석탄 상인에게 주문함으로써 월동에 대비한다. 몇몇 다른 사람은 석유 연소를 연구하여 새롭고 더 안전하고 더 경제적인 유형의 석유 버너를 발명함으로써 월동에 대비한다.

 

가설의 심리학적이거나 생물학적 유사체는, 사건에 대한 기대 혹은 예상으로서 기술될 것이다. 이 기대나 예상은 의식적이거나 무의식적일 것이다. 그것의 본질은, 생명체가 특정 구체적 종류의 상황에 반응하여 행동하거나 대응하려는 대비상태이다. 그것의 본질은 특정 성향(意向: dispositions)(부분적) 활성화이다. (과학적 발견의 논리27, 특히 99쪽을 참조하는데 그곳에 지식의 성향적 특징이 간단하게 언급된다.)

무의식적 기대가 의식적이 될 방식의 고전적 사례는 다음과 같다: 계단에서 굴러떨어지기 (‘나는 여기에 계단이 없다고 생각했다’), 또는 시계가 멈추는 것을 듣기 (‘시계가 째깍거리는 것을 내가 들었다고 나는 의식하지 못했지만, 시계가 멈추었을 때 나는 그것을 들었다’). 우리의 생명체는 특정 사건을 무의식적으로 예상하고 있어서 우리의 기대가 좌절되거나 오류로 판정된 다음에만 우리가 그 사실을 의식하게 되었다.

미래에 올 것에 대한 이 성향적 대비상태는, 과학적 지식의 참인 생물학적 유사체인 듯하다.

동물 생명체에서 특정 종류의 자극에 대하여 특정 방식으로 반응하는 성향은 부분적으로 타고난다. 나의 논지는, 그런 성향이 습득되는 한 그런 성향은 자극에 의하여 활성화되자마자 그리고 특히 또한 실패와 성공의 영향을 받고서 (아마도 고통스럽고 유쾌한 감정과 결합되어) ‘유연하(plastic)’며 발전하여 변하는 타고난 성향의 교정이라는 것이다; 이유인즉 자극에 의하여 방출되는 행동과 반응은 통상적으로 특정 생물학적 목표를 지향하기 때문이다. 이런 방식으로 생명체는 자신의 타고난 성향적 지식을 발전시킨다: 생명체는 시행착오에 의하여 학습한다.

이것이, 상속에 의해서는 아닐지라도 (우리가 다윈의 추측을 믿으려면), 전통에 의하여 상속될 습득된 지식이다. 그러나 타고난 지식도 변한다; 그리고 가장 적합한 타고난 지식의 생존이 다시 시행착오의 과정이다.

 

여기에 제시된 그림이 흄의 그림과 대비되어야 하는데 흄의 그림은 인식론학자들 가운데서 여전히 일반적이다: 우리가 사실상 관찰의 반복에 의하여 학습한다는 견해가 인식론학자들 가운데서 여전히 일반적이다.

반복은 정말로 학습 과정에서 한 가지 역할을 실행한다. 그러나 이것은 시행착오에 의한 학습과 전혀 다른 의미에서 학습이다. (3절 참조.) 우리가 재주를 (자전거 타기, 피아노 치기, 새로운 언어 말하기) 배운다면, 반복에 의한 학습이 시행착오를 통한 학습이 멈추는 장소를 장악하기 때문에, 두 가지 과정이 한 과정처럼 보일 것이다. 그러나 차이점은 이렇다: 모든 새로운 지식, 우리의 성향에 대한 모든 근본적 교정, 모든 발견은 시행착오의 결과이다. 반복에 의하여 새로 습득된 지식에 우리가 친숙하게 될 따름이다 ㅡ 반복에 의하여 우리가 실행하고 있는 것을 우리가 잊게 되고, 우리의 반응을 습득하는 방식을 우리가 잊게 되며 특히 시행착오 기간에 극복할 난제가 있었다는 것을 잊게 된다.

내가 인식하는 한, 학습 과정에 관한 이론가들은 학습에 관한 두 가지 의미 사이의 격차에 대하여 아직 확신하지 못한다. 주관적 지식이론은 ㅡ 우리의 주관적 지식의 성장에 관한 이론 ㅡ 시행착오라기보다 반복을 학습의 주요 도구라고 간주할 때 치명적인 오류를 저질렀다. (3절 참고. 이 오류는 개연성에 관한 모든 주관론적 이론에서 결정적 역할을 수행한다: 이 책의 2부 참조.)

관찰 그리고 우리의 감각이라는 증거를 통한 학습에 관하여, 여기서 개괄된 이론은 전통적 경험주의와 직접적으로 반대가 된다.

그 전통적 이론은, 우리에게 감각이 없다면 우리는 세상에 관한 지식을 가질 수 없을 터라는 부인될 수 없는 지식에 의하여 지나치게 영향받는다. 나는 훨씬 더 많은 것을 인정할 준비가 되어 있다: 우리의 감각이 없다면 우리는 살 수가 없을 터이다. 그러나 세상에 대한 우리의 모든 지식이 관찰이나 감각경험의 결과라는, 또는 지식은 항상 우리의 감각을 통하여 우리의 지성에 들어온다라는 전통적인 경험주의적 견해에 나는 전혀 동의하지 않는다. 타고난 성향적 지식과 별개로 우리의 지식은 자극의 (우리의 감각에 의하여 전해지는) 영향을 받아서 정말로 발전한다. 그러나 자극이 우리의 성향적 옷을 입고 수많은 새로운 발전을 방출할지라도, 통상적으로 단지 계기로서 행동한다. 관찰도 유사하다. 관찰은 우리의 기대, 우리의 가설, 우리의 이론의 문맥에서만 중요하다.

우리의 지식이 감지(perceptions)나 관찰의 축적에 의하여 (또는 반복에 의하여) 성장한다는 전통적 견해는 순전히 신화이다 ㅡ 아마도 현대에 가장 널리 믿어지는 신화. 그 전통적 견해는 날카로운 눈과 귀를 가진 사람보다 눈이 멀고 귀가 먼 사람이 더 많은 것을 알고 지식에 더 큰 기여를 이룩할 것이라는 사실에 의하여 반증된다: 확실히, 우리의 감각이 경험주의자들이 생각했던 것만큼 지적(知的)으로 결정적이라면 이 가장 중요한 감각의 결여로 인하여 가장 중대한 지적(知的) 결핍이 발생할 터이다. 그러나 헬렌 켈러라는 훌륭한 사례에 의하여 밝혀지는 바와 같이 이 가장 중요한 감각의 결여로 인하여 가장 중대한 지적(知的) 결핍이 발생하지 않는다.

 

전통적 경험주의는, 정신을 은유의 도움을 받아 관찰에 의하여 각인될 백지상태로서 ㅡ 잘 닦인 칠판이나 노출되지 않은 사진판과 같은 것으로서 ㅡ 기술하려고 시도한다. 이 이론은, 내가 정신의 양동이 이론이라고 불렀는데 정신을 양동이로서 그리고 감각을 양동이가 서서히 관찰에 의하여 채워질 수 있는 깔때기로서 간주한다. 이 관찰의 합계가 (혹은 아마도 정돈되거나 소화된 합계) ‘우리의 지식이다. 이 견해는 근본적으로 오류다.

모든 고등생명체에 말하자면 두 가지 면이 있다: 고등생명체의 타고난 구조, 고등생명체의 행동하고 반응하는 성향, 고등생명체의 반응성이 하나이고 자극받는 고등생명체의 도구인 고등생명체의 감성이 나머지 하나이다. 전통적 경험주의가 지식을 감성의 영역 안에 위치된 것으로서 간주하는 반면 나의 견해는 지식을 생명체의 활동과 반응의 영역 안에 위치시킨다.

이렇게 영역을 바꾸면 광범위한 결과들이 발생한다. 나의 견해에 따르면 관찰은 (혹은 감각이나 감각-자료’, 기타 등등) ‘지식의 포도주가 흘러나오는 베이컨의 포도와 같은 것이 아니다: 관찰은 지식의 원자재가 아니다. 반대로 관찰은 항상 이전의 성향적 지식을 예상한다. 관찰은 종을 울리는 자극의 결과이다. 이것은 무슨 뜻인가? 자극은 우리의 기대나 예상의 체계와 관련하여 종을 울릴 수 있도록 하여 관찰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틀림없이 중요하다. 종은 ㅡ 또는 다시 말하여 관심, 자극에 대응하려는 성향, 자극이 중요하게 판명되리라는 기대 ㅡ 이전에 틀림없이 그곳에 있었거나 종이 그곳에 없었다면 자극이 주목되지 않은 채 통과할 것이다: 다시 말해서 종이 없었다면 자극이 작동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하여 관찰은 성향적 대비상태를, 다시 말해서 성향적 지식을 전제한다; 그리고 관찰로 인하여 성향적 변화가 방출될지라도 ㅡ 특히 관찰로 인하여 우리의 기대가 부정될지라도 ㅡ 관찰은 우리의 주관적 지식을 구성하는 성향 체계의 부분이나 구성요소가 도저히 될 수 없다: 관찰은 주관적 지식과 유사하지 않고 (관찰의 결과가 주관적 지식과 유사할지라도) 사물의 다른 영역에 속한다.

그리하여 조건반사를 바라보는 통상적 방식은 완전히 오류다. 그 실험이 수행하는 것은 종소리를 개의 침 흘리기와 연결시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자기 먹이를 확보하려는 개의 노력과 연결된 결정적으로 중요한 반응이, 명백한 근거로, 동물의 가장 유연한(plastic) 성향 체계 중 한 체계를 구성한다는 사실을 그 실험이 이용한다: 매우 다양한 상황에서 먹이를 사냥해야 하는 동물은 이 상황에 자신을 적응시킬 수 있어야 한다. 먹이 확보는 그리하여 학습에 대하여 미리 성향화된 분야이다: 유연성(plasticity) 자체는 타고난 것이다. 그리하여 개는 쉽게 새로운 기대를 ㅡ 사실상 새로운 이론 ㅡ 형성할 것이다: 개는 종소리가 자신의 식사를 알린다는 것을 발견한다. 이것이 전부다. 성향이 먼저 덜 유연한(plastic) 곳이나 동물의 결정적 관심이 포함되지 않은 곳에서, 조건반사를 설치하려는 시도가 일반적으로 실패한다.

전통적 경험주의는, 적합하게 보일 수 있는 방법에 의하여 우리의 감각경험으로부터 세상에 대한 우리 지식을 우리가 도출하거나 꺼낼 수 있다고 전제한다. 이 견해가 ㅡ 정신의 양동이 이론 ㅡ 무비판적으로 고수되면 귀납의 정당화가 불가능하다는 흄의 발견으로 인하여 틀림없이 비합리주의가 발생한다. 흄의 발견으로 인하여 예를 들어 물리적 몸체에 대한 우리의 소신이 정당화될 수 없는 편견이라는 결론이 틀림없이 발생한다. 그리고 정말로 그렇다. 우리의 모든 지식처럼 물리적 몸체에 대한 우리의 소신은 우선 편견이다 ㅡ 그러나 비판적으로 검토될 편견이다. 과거 100년 동안에 걸친 이 추측에 대한 비판적 검토의 결과로서 우리는 몸체에 대하여 더 많은 것을 이제 안다 ㅡ 예를 들어 몸체가 과정이라는 것을 (헤라클레이토스[Heraclitus]가 예견한 바와 같이) 안다. 그러나 우리는 완벽하게 합리적으로 나아간다: 우리는 우리의 편견을 시험함으로써 우리의 지식을 학습하고 확대한다; 반복을 통한 귀납에 의해서라기보다 시행착오에 의하여. 심지어 규칙성에 대한 우리의 동물적 소신도 반복의 결과가 아니다. 그 소신은 규칙성을 기대하는 타고난 성향의 (반복적 자극에 의하여 혹은 한 가지 단칭 사건의 자극에 의하여 활성화될) 결과이다.

그리하여 나의 감각을 통하여 세상에 관하여 알기를 내가 어떻게 학습하는가?’라는 주관론적 지식이론이라는 문제가 잘못 표현된다. 그리고 어떤 원인으로 인하여 우리가 몸체의 존재를 신뢰할까?’라는 흄의 질문은 흄의 방식과 근본적으로 다른 방식으로 답변될 수 있다. 개가 으르렁거리거나 물거나 좋아하는 것을 그가 존재한다고 믿는다라고 우리가 말할 수 있다. 존재하는 것은 흄이 염두에 두었던 의미에서 최고의 정도로 우리가 강력하게 반응하는 저 물체들이다 ㅡ 그 물체들에 대항하여 우리가 우리의 생명을 위하여 싸우거나 그 물체들을 우리가 먹거나 그 물체들에 의하여 우리가 박살 날 것이다. 그 물체들의 존재에 대한 소신은, 그 물체들을 잠재적으로 중요한 것으로서 취급하는 타고난 성향에서 나온다. 비록 그 소신에 틀림없이 자기 발전을 위하여 많은 자극이 필요할지라도 그 소신은 타고난 소신이다. 이 소신의, 이 편견의 원인은 그런 것이다 ㅡ 혹은 그렇게 내가 추측한다. 그러나 그 원인은 근거가 아니다. 근거는 우리의 편견을 우리가 비판하기 ㅡ 우리의 편견을 추측으로서 취급하기 ㅡ 시작할 때만 나타나기 시작한다; 예를 들어 몸체에 관하여 우리가 더 많은 것을 알아내기 시작할 때 나타나기 시작한다. 그리고 흄의 문제를 초래한 주관론적 인식론을 우리가 비판할 때 또 다른 종류의 근거들이 나타날 것이다.

흄의 지식론 문제와 같은 지식론 문제를, 소신이 감지(perceptions)와 연상으로부터 나타나는 방식에 대한 조사를 통하거나 컬러 패치(colour patches)나 물체 또는 기타 등등을 우리가 즉각적으로 경험하는방식에 대한 조사를 통하여 우리가 틀림없이 답변할 수 있다는 독단적 전제는 관념론 대부분의 형태의 핵심을 이룬다. 다윈 이후 100년 철학자들이 인식론의 문제를, 감각-자료나 감지(perceptions)에서 우리 지식의 근원과 관련하여 (혹은 우리가 감지를 토론하면 우리가 사용하는 단어의 종류와 관련하여) 또는 검은 까마귀나 흰 백조에 대한 관찰반복숫자와 관련하여, 순진하게 지속적으로 토론한다는 것은 놀랍다.

 

주관론적 지식론의 배경에 있는 가장 깊은 동기는 소위 우리의 지식중 많은 지식이 불확실하다는 깨달음과 (그리하여 실제로 지식이 아니다), 확실함으로부터 출발하려는 소망이다: 확실한 토대로부터, 혹은 적어도 우리가 지닌 가장 확실한 토대로부터 출발하려는 소망이다. 어떤 것을 본 경험과 (혹은 데카르트와 함께 의심하는 경험) 같이 우리에게 주어지는경험은 자체를 자연적 출발점으로서 제시하는 듯하다. 주관론자들은 이 자료를 토대로 지식이라는 ㅡ 과학적 지식 ㅡ 건물이 세워질 수 있다고 무비판적으로 전제했다. 그러나 이 전제는 옳지 않다. 설사 우리가 자료 자체가 존재한다고 전제할지라도 이 자료를 토대로 세워질 수 있는 것은 없다. 그러나 자료는 존재하지 않는다: 해석되지 않은 자료는 없다; 해석되지 않고 단지 우리에게 주어지는자료는 없다; 아무것도 토대로 수용될 수 없다. 우리의 지식 모두는 우리의 이론으로 우리의 기대에 비추어진 해석이어서 이런저런 정도로 가설적이다.

실재론이 참이라면 이것이 우리가 정확하게 기대해야 하는 것이다 ㅡ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세상이, 많거나 적게, 상식으로서 과학에 의하여 정제되어 우리에게 자체의 현재 상태를 알려주는 것. 실재론이 참이라면, 우리가 우리의 환경에 적응하려고 시도하는 동물이라면, 우리의 지식은 내가 묘사한 시행착오 일만 될 수 있다. 실재론이 참이라면, 세상의 실재에 대한 그리고 물리법칙에 대한 우리의 소신은 타당한 추론에 의하여 증명될 수 없거나 확실하거나 합당하다고 밝혀질 수 없다. 다시 말해서 실재론이 옳다면 우리는 추측성 지식보다 더 많은 것을 지니려고 희망하거나 기대할 수 없다: 기적은 오히려 우리의 추측 추구에서 우리가 매우 성공적이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말하면서 내가 과거 300년의 기적적 성공만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리하여 실재론이 옳다면 세상에 관한 우리의 지식을 세울 안전한 주관적 토대를 발견한다는 주관론적 이론의 목표는 ㅡ 그리고 세상의 실재에 대한 소신의 완전한 근거 ㅡ 실현될 수 없고 정말로 불합리한 목표이다.

 

그리하여 실재론은 왜 우리의 지식 상황이 반드시 불안정한지를 우리에게 설명한다. 다른 한편 어떤 형태의 실재론이 참이라면 여하한 것도 발생할 것이다 ㅡ 그리하여 아마도, 발생하지 않는 것도 또한 발생할 것이다. 그리하여 실재론은 두 가지 형이상학적 이론 중에서 논리적으로 더 강력하다. 실재론은 논리적 근거로 선호될 수 있다: 형이상학적 관념론은 여하한 설명력도 없는 것으로 판명된다.

ㅡ 칼 포퍼, ‘실재론과 과학의 목적’, 2000, 92-102쪽 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