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트런드 러셀의 오류
러셀이 얼마나 관념론자가 되고 싶어 하지 않았는지는 자신이 실재론으로 선회한 후 자신의 느낌을 기술하는 이름다운 구절로부터 알려질 것이다: ‘우리는... 철학이나 신학에 의하여 영향받지 않은 상식이 실재적이라고 상정하는 모든 것이 실재적이라 생각했다. 감옥으로부터 탈출하는 느낌을 지니고 우리 자신이 잔디가 녹색이고 태양과 별들은 아무도 인식하지 않을지라도 존재할 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귀납을 신뢰하는 사람이기에 러셀은 자신의 인식론이 자신이 원하는 장점을 실제로 낳지 못함을 발견했다. ‘지식이론에 특정 본질적 주관성이 있다; 지식이론은 “내가 아는 것을 어떻게 나는 아는가?”라고 물어서 불가피하게 개인적 경험으로부터 시작한다. 지식이론의 자료는 자기중심적이고 그 이론의 논증의 앞선 단계들도 그러하다. 나는 지금까지 초기단계들을 초월하지 못했고 그리하여 실제로 내가 지금 주관적인 것보다 관점에서 더 주관적으로 보였다.’ 이 구절이 흥미로운 까닭은 그 구절이 실재론적 목표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밝히는 솔직성 때문이며 또한 그 구절이 근본적 실수의 장소를 밝히는 명백성 때문이다: 우리의 지식이 추측 작품이라고 우리가 인정한다면 러셀의 근본적 질문인 ‘내가 아는 것을 어떻게 나는 아는가?’는 잘못 표현된 것으로 판명되는데 이유인즉 이 질문이 지식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질문하는 것과 매우 유사하기 때문이다: ‘아내 구타를 벌써 그만두었어?’ 그 질문은 나는 정말로 안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귀납이 타당하다고 전제한다. ‘내가 추측하는 것을 내가 어떻게 (혹은 왜) 추측하지?’와 같은 추측하기와 관련된 표면적으로 유사한 질문은 실제로 전혀 유사하지 않다: 이 질문은 심리학적이다: 그 질문에 인식론적 충격이 없다. 그러므로 러셀의 질문에 대한 합당한 답변은 다음과 같다: ‘나는 알지 못한다; 그리고 추측들에 대해서, 내가 추측하는 것을 어떻게 혹은 왜 추측하는지 신경 쓰지 말라. 나의 추측이 옳음을 내가 증명하려고 시도하고 있지 않고 가능하면 그 추측을 나은 추측으로 대체하기 위하여 그 추측이 비판받기를 내가 매우 갈망한다. 그리고 나만큼 당신도 나의 추측에 대하여 의심스럽게 느낀다면 당신이 무자비하게 나의 추측을 비판함으로써 나를 도와주기를 내가 희망한다.’
지식의 관념을, 추측의 관념으로 대체하는 순간 지식론에서 표면적으로 ‘본질적 주관성’이 사라진다. 아마도 어떤 지식은 (epistēmē?) 주관적 토대에 근거하여 ㅡ 내가 안전하게 아는 것에 근거하여 ㅡ 본질적으로 설명되어야 할 터이다. 그러나 추측은, 이것과 반대로, 제안이고 제안으로서 여하한 사람의 반대-제안에 의하여 마주칠 것이다. 우리의 의미에서 추측의 주관적 토대라는 문제는 (‘처음에 나의 감각에 들지 않았던 것은 나의 정신에 없다’) 제기될 필요가 없다. 우리는, 바로 처음부터 제안과 합리적 비판으로 구성된 주고-받기의 상호주관성의 분야로 움직여 들어간다.
그리하여 러셀의 근본적 문제는 추측과 관련하여 다시 언명될 필요가 있다; (또 다른 문맥에서) 그가 강조하는 최초 사람이 될 지식의 가설적 특징에 관하여 다시 언명될 필요가 있다. 그리하여 그가 여기에 인용된 구절을 발표하기 8년 전 아리스토텔레스 학회에서 내가 러셀의 논문에 답변했을 때 이것을 나의 핵심적 요점으로서 표현하여 내가 옳았다고 나는 생각한다. (1절과 비교하라.)
이미 인용된 구절에 뒤이어 러셀은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철학적 문제를 또 진지하게 조사할 여가를 갖는다면, 나는 경험으로부터 물리학의 세상으로 추론을 분석하려고 시도하겠는데 그 추론이 타당할 수 있다고 전제하고 참이라면 어떤 추론 원칙에 의하여 그 추론이 타당하게 될 터인지를 발견하려고 시도하겠다.’ 그리하여 러셀은 칸트가 ‘초월적’ 방법이라고 불렀던 것을 채택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과학적 지식을 사실로서 수용하는 방법, 그리고 어떻게 이 사실이 가능했는지를 설명할 원칙을 요구하는 방법. 결과는 (러셀의 저서 인간의 지식, 그 지식의 규모 그리고 그 지식의 한계[Human Knowledge, Its Scope and Its Limits], 1948년에 주어진) 예언될 수 있었을 터이다 ㅡ 사실상 나는 아리스토텔레스 학회에서 나의 발언에 의하여 그 결과를 올바르게 진단했다. 그 결과는 귀납적 원리를 ㅡ 혹은 귀납적 추론의 몇 가지 규칙을 ㅡ 선험적으로 타당한 것으로서 수용한 귀납 이론이었다. 러셀의 선험론과 칸트의 선험론 사이의 차이점은, 러셀이 자신의 귀납적 원리를 개연적 추론의 규칙 집합으로서 언명한 것에 주로 놓여있다.
러셀이 방금 인용된 구절에서 기술한 그 (초월적) 방법은 분명히 그의 주관론적 접근방식의 포기에 해당한다. 이유인즉 여기서 그가 ‘물리학의 세계’를, 인식론이 설명해야 하는 객관적 사실로서 수용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심지어 러셀에게도 주관적 방법은 혹시 기대되는 것만큼 본질적이 아니다. 그래서 주관적 방법이 나중에 포기된다면 그 방법이 첫 번째 단계들을 통제해야 할 근거가 없다. 러셀 자신의 분석으로 인하여 주관적 토대가, 러셀 자신이 확립하고 싶어 하는 형이상학적 실재론을 뒷받침할 수 없다고 밝혀지고 다른 ㅡ 비-주관적 ㅡ 방법들이 이 목적에 필요하다고 밝혀진다.
그러나 이 다른 방법들로 인하여 우리가 러셀의 선험론이나 칸트의 선험론에 관련될 필요가 없다. 그 다른 방법들이 전통적인 경험주의적 철학과 결별, 특히 물리적 세상의 실재를 의문시하는 버클리(Berkeley)와 흄의 형이상학과 결별을 포함할지라도, 그 방법들로 인하여 우리가 경험주의와 ㅡ 종합적 원칙이 선험적으로 타당한 것으로서 확립될 수 없다는 교설과 ㅡ 결별을 강요당하지 않는다. 우리가 모든 ‘과학적 지식’의 가설적 특징과 모든 합리적 토론의 비판적 특징을 진지하게 수용한다는 조건으로만, 우리는 경험주의와 형이상학적 실재론 두 가지를 결합할 수 있다.
ㅡ 칼 포퍼, ‘실재론과 과학의 목적’, 2000년, 86-8쪽 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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