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포퍼 원전+번역문

관념론은 틀렸고 실재론은 옳다

이윤진이카루스 2026. 3. 13. 16:01

관념론은 틀렸고 실재론은 옳다.hwpx
0.08MB

 

관념론은 틀렸고 실재론은 옳다

 

세상이 나의 꿈이라는 교설은 ㅡ 다시 말해서 관념론의 교설 ㅡ 반증될 수 없다. 그 교설은 모든 반증을, 꿈으로서 해석함으로써 모든 반증을 다룬다 (심리분석이 모든 비판을, 그 비판을 심리-분석함으로써 다룰 수 있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그러나 이론에 대한 반증 불가능성이 그 이론을 선호하는 요점이라는 일반적 소신은 오류다. 반증 불가능성은 미덕이 아니라 악덕이다. 불행히도 이것은 실재론에도 적용된다: 이유인즉 실재론 또한 반증될 수 없기 때문이다. (실재론에 대한 반증은 관념론자의 꿈일 뿐이다. 죽음은, 우리가 살아있던 동안 우리가 오직 꿈을 꾸고 있었다고 우리에게 최종적으로 밝힐 깨어남일 것이라고 관념론자가 꿈을 꾼다. 그러나 논증으로서 이것은 심지어 실재론을 반증하는 경향조차 없을 터이다. 깨어나자마자 우리가 꿈을 꾸고 있었다고 우리가 깨닫는다면 우리가 실재로부터 꿈을 구분할 수 있기 때문에 우리가 그렇게 할 터이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가 할 수 없는 것이라고 관념론자가 말하는 것일 뿐이다.) 관념론에 대한 반증 불가능성으로부터 실재론의 증명 불가능성이 귀결되고 역순도 성립한다. 두 가지 이론 모두 증명될 수 없고 (그리하여 종합적이다 [synthetic]) 또한 반증될 수 없다: 두 가지 이론은 형이상학적이다.

그러나 두 이론 사이에 매우 중요한 차이점이 있다. 형이상학적 관념론은 거짓이고 형이상학적 실재론은 참이다. 물론 우리가 2 + 3 = 5를 알 것이라는 의미에서 우리는 이것을 알지못한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증명 가능한 지식의 의미에서 그것을 알지 못한다. 우리는 또한 시험될 수 있는 과학적 지식의 의미에서 그것을 알지 못한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의 지식이 불합리하다거나 터무니없다고 의미하지 않는다. 반대로, 더 많거나 더 강력한 (비결정적일지라도) 논증들에 의하여 뒷받침되는 사실적 지식이 없다.

 

형이상학적 실재론을 뒷받침하는 긍정적 논증들을 더 완벽하게 고찰하기 전에 나는 먼저 몇 가지 부정적 논증들을 토론하겠다: 그 논증들은 관념론을 비판함으로써 실재론을 뒷받침한다.

주관적이거나 관념론적 인식론의 관점에서, 관념론의 가장 강력한 형태는 유아론(唯我論: solipsism)이다. 관념론을 선호하는 인식론적 논증은, 내가 아는 유일한 것이 나 자신의 경험이고 나 자신의 관념이라는 것이다. 다른 정신에 관해서 나는 직접적인 것을 알 수 없다. 사실상 다른 정신에 대한 나의 지식은, 몸에 대한 나의 지식에 틀림없이 의존할 터이다: 몸에서 분리된 정신에 대해서 우리는 경험적 지식을 가지지 못한다. 몸이 나의 꿈의 부분일 뿐이라면 다른 정신은 틀림없이 훨씬 더 그러하다.

다른 정신에 대한 문제는 최근에 주로 인식론적 관계로 끝없이 토론되었다. 내가 이 토론 기록을 모두 읽지 못했다고 나는 고백한다. 그래서 다른 정신의 존재에 대한 나의 단순한 논증이 이전에 다른 사람들에 의하여 이용되었다는 것이 (비록 나의 논증이 다른 사람들에 의하여 이용되었다고 내가 생각하지 않을지라도) 불가능하지 않다. 그것으로 인하여 나는 완전히 만족한다 ㅡ 아마도 내가 이런 종류의 탐구에서 논증이 결정적일 수 없다고 내가 항상 기억하기 때문이다.

나의 논증은 이렇다. 내가 바흐의 음악이나 모차르트의 음악을 창조하지 않았다고 나는 안다; 내가 렘브란트의 그림이나 보티첼리의 그림을 창조하지 않았다고 나는 안다. 그와 같은 일은 내가 결코 할 수 없을 터라고 나는 철저히 확신한다: 나는 그런 능력을 나의 내부에 지니고 있지 않을 따름이다. (내가 바흐를 모방하려고 여러 번 시도했기 때문에 나는 이것을 특히 잘 안다; 그로 인하여 나는 바흐의 창조력을 더 인정하게 되었다.) 일리아드지옥(Inferno) 또는 템페스트(Tempest)와 같은 것을 집필할 상상력이 나에게 없다고 나는 안다. 가능할지라도 평범한 만화를 그리거나 텔레비전 광고를 만들거나 내가 어쩔 수 없이 읽어야 하는 귀납의 정당화에 관한 저서 몇 권을 저술할 나의 능력은 훨씬 더 떨어진다. 그러나 유아론적(唯我論的: solipsistic) 가설을 근거로 이 모든 창작물은 나 자신이 꿈을 꾼 창작물일 터이다. 그 창작물은 나의 상상력의 소산일 터이다. 이유인즉 다른 정신이 없을 터이기 때문이다: 나의 정신만 있을 터이다. 이것이 참일 리가 없다고 나는 안다.

그 논증은 물론 비결정적이다. 나는 아마도 나의 꿈에서 나 자신을 과소평가할 (동시에 나 자신을 과대평가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창조의 범주가 적용될 수 없을 것이다. 이 모든 것이 이해된다. 그러나 그 논증에 의하여 나는 완벽하게 만족한다.

나의 논증이, 한정되고 불완전한 정신이 자체로부터 신()의 관념을 창조할 수 없다는 데카르트의 논증과 틀림없이 다소 유사하지만 나 자신의 논증이 확신을 더 준다고 내가 안다. 그러나 데카르트 논증과의 유추로 인하여 물리적 세상으로 간단한 확장이 제시된다. 나 자신의 상상력으로부터 스위스의 산이나 빙하처럼 또는 심지어 나의 정원의 꽃 몇 송이와 나무 몇 그루처럼 아름다운 것을 창조하는 능력이 나에게 없다고 나는 안다. 우리의 세상이 내가 결코 만들지 않은 세상이라고 나는 안다.

이 논증에 의하여 내가 만족한다고 나는 반복할 수 있을 따름이다; 아마도 내가 그 논증이 실제로 결코 필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른 정신의 실재나 물리적 물체의 실재를 내가 의심한 적이 있다고 나는 주장하지 않는다. 정말로 이 논증에 대하여 내가 생각할 때 유아론(唯我論: solipsism)(혹은 더 일반적으로 다른 정신의 존재에서 의심) 인식론의 형태라기보다 과대망상의 형태라고 내가 느낄 수밖에 없다.

유아론과, ‘다른 정신의 존재를 의문시하는 다른 형태의 관념론적 인식론에 대해서 그만큼 하자. 여기에 제시된 논증과 같은 논증으로 인하여 버클리(Berkeley)가 유아론자가 될 수 없었다는 것은 내가 보기에 가능성이 매우 크다: 기독교인이었기 때문에 그는 자신이 신()이 아니었다고 알았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정신 외에 다른 정신이 있다는 견해와 많은-장관인(many-splendoured thing) 우리의 경험 세상을 우리가 감지하게 만든 것은 신()이었다는 견해에 도달했다.

버클리가 해석하는 관념론은 다른 관념론만큼 반증될 수 없고 자체를 추천할 것이 없다. 심지어 그 인식론적 논증이 유아론적 논지를 선호한다고 전제하기 때문에 신()과 다른 인간 정신과 같은 감지되지 않는 실재들이 인정되자마자 인식론적 논증의 도움을 받으면 분명히 더 이상 확신을 주지 못한다. 인식론적 관념론과 기독교를 절충하려는 버클리의 시도로 인하여, 사실상 두 가지 모두를 해치는, 피상적 화해가 발생한다. (그리스도의 육체적 고통이 더 이상 인간에 의해서 그리스도에게 가해지는 것이 아니라 신[]의 즉각적 행동에 의하여 그리스도에게 가해지기 때문에 기독교가 손상당한다.)

이 논증 중 어떤 논증도 틀림없이 필요가 없다. 실재론은 그렇게 분명하게 참이어서 심지어 여기에 제시된 것과 같은 단순한 논증도 조금 불쾌할 따름이다. 내가 혐오하는 버릇 조금을 나에게 상기시키는 특정 진부함이 실재론 주위에 있다: 실재적 문제없이 철학화하는 진부함. ‘합리적인 사람은 모두 동일한 종교를 지니고, 합리적인 사람은 저 종교가 무엇인지 말하지 않는다고 언급되었다.’ 나의 논증을 계속하면 이 현명한 말의 후반부를 무시하는 것일 터라고 나는 느낀다.

관념론자들이 사실상 실재적 문제를 가지고 있지 않다고 말하면 불공정할 터라고 인정된다. 그들의 문제는 우리 지식에 대한 (긍정적) ‘정당화이어서 그들은 함정에 빠졌다: 실재론을 정당화하기가 불가능하다는 그들 자신의 발견에 빠졌다 W. W. 바틀리(Bartley) III세가 나에게 지적한 바에 따르면, 긍정적 정당화강령 전체를 무효한 것으로서 배척하고 그 강령을 비판의 강령에 의하여 대체하는 관점으로부터 관념론자들을 판단하면 불공정하다. (2절과 비교하라.) 나는 이 경고를 수용한다. 그러나 관념론적 철학자들 가운데서, 실재론이 참일지라도 실재론이 거짓이라면 우리가 관념론을 정당화할 수 없듯이 관념론자들의 의미에서 우리가 실재론을 정당화할 수 없다는 요점을 누가 강조했던가? 게다가 결과적으로 실재론을 정당화하기가 불가능하여 실재론의 진리가 부정된다고 언급되지 않는가? 그리고 이 상황에 의하여 그 문제의 논리적 구조가 규정되기 때문에 그 논리적 구조가 정당화될 수 없다는 사실을 ㅡ 혹은 정말로 유사한 논증을 ㅡ 실재론에 반대하는 논증으로서 사용하면 분명히 완벽하게 헛되다고 그들 중 누가 분명히 했나?

관념론자들과 감각주의자들의 논증에 있는 울화통 터지는 진부함은, 그들의 정당화주의적 강령에 있는 내재적인 논리적 한계를 그들이 알지 못한 결과이다. 그들은, 심지어 실재론을 정당화하기가 불가능하다는 논리적 증거에 의하여 실재론의 부정에 대한 정당화가 구성되지 않을 터임을 전혀 알지 못할 따름이다.

나의 논증은 유아론과 버클리식 관념론뿐 아니라 이 질병의 모든 다른 형태에도 (내가 그것들을 아는 한), 내가 다음 절에서 밝힐 것과 같이 특히 다양한 형태의 실증주의와 현상주의 및 또한 소위 윌리엄 제임스(William James)와 에른스트 마흐(Ernst Mach) 및 버트런드 러셀의 중립적 일원론(neutral monism)’에도 적용된다.

ㅡ 칼 포퍼, ‘실재론과 과학의 목적’, 2000, 82-5쪽 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