습작시

호모사피엔스 (수정본)

이윤진이카루스 2012. 11. 6. 21:24

호모사피엔스.hwp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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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모사피엔스

 

호박 둥근 까닭

눈 내리고 서리 돋는 토양에서

비바람에 씻기고 햇볕에 뒹굴며

자신 지키며 씨앗 키우는

생존 자세고 인간보다 오랜 역사.

 

꼬리뼈 퇴화시키고 서서 균형 잡으며

지평선과 수평선 보고 하늘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던 호모사피엔스

냉혹한 자연에서 살아남으려고

무수한 시행착오를 통해 진화했던

외로운 인간

뇌를 통해 전해진 삶 무엇?

 

호박 지나 인간 넘어

둥근 모양 아니고 직립 자세 아닌

냉엄한 세상

식물 존재할 수 없고 인간 살 수 없는

허무의 영역

인간 닮지 않고 인간에게 책임 없는

무한한 공간인 신()만 살아

명칭 무엇이라 붙이든 누가 괘념해?

 

걷기 버리고 호박처럼 살면서

사상 버리고 이념 내치고

둥글둥글 살아?

 

행복

아지랑이이고

뒤쫓는 것일 뿐

미망(迷妄)과 실존에서 오락가락.

 

유아독존 부르짖은 자

두뇌가 하얗게 되었고

군중(群衆)

이리저리 밀려다녀서

동물 떼거리인가.

나도 인간이라는* 고백

어찌할까.

 

교활

밧줄 타는 곡예사

고통 끝날 줄 모른다.

비밀 없다는데

어찌할 것인가.

 

영속

추구하면 힘들고 위태롭고

순간

도취하면 후회하는 까닭

길게 호모사피엔스로 살았다.

 

후기:

* 나도 인간이다(Homo sum).

**지혜의 본질은 현실이라는 굴레로부터 가능한 한 멀리 해방되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우리는 감각의 이기주의를 피할 수 없다. 시각과 청각과 촉각은 우리의 육체와 묶여있어서 객관화될 수 없다. 우리의 감정은 유사하게 우리 자신으로부터 시작된다. 아기는 배고픔과 불편을 느끼고 동시에 자신의 육체적 상태에 의하지 않고는 영향을 받지 않는다. 세월과 함께 점차 아기의 지평이 넓어지고 그의 사고와 느낌에서 주관성이 약해지고 되고 자신의 육체적 상태에 관심이 없어질수록 그는 지혜가 성장한다. 이것은 물론 정도(程度)의 문제이다. 세상을 완벽하게 공명정대하고 볼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래서 누가 세상을 완벽하게 공명정대하고 볼 수 있을 터라면 살아남지 못할 터이다. 그러나 한편 시공(時空)에서 다소 멀리 떨어진 사물들을 앎으로써, 다른 한편 우리의 느낌으로 그런 사물들에게 합당한 중요성을 부여함으로써 공명정대함을 향하여 지속적으로 다가갈 수 있다. 지혜의 성장은 공명정대함으로 향한 이 접근이다.

이런 의미에서 지혜가 교육될 수 있을까? 그리고 교육될 수 있다면 지혜 교육이 교육의 한 목표가 되어야 하는가? 나는 두 가지 질문 모두를 긍정으로 답변해야겠다.

ㅡ 버트런드 러셀, ‘기억으로부터의 초상(Portraits from Memory)’, 175~6쪽 ㅡ

I think the essence of wisdom is emancipation, as far as possible, from the tyranny of the here and the now. We cannot help the egoism of our senses. Sight and sound and touch are bound up with our own bodies and cannot be made impersonal. Our emotions start similarly from ourselves. An infant feels hunger or discomfort, and is unaffected except by his own physical condition. Gradually with years, his horizon widens, and, in proportion as his thoughts and feelings become less personal and less concerned with his own physical states, he achieves growing wisdom. This is of course a matter of degree. No one can view the world with complete impartiality; and if anyone could, he would hardly be able to remain alive. But it is possible to make a continual approach toward impartiality, on the one hand, by knowing things somewhat remote in time and space, and, on the other hand, by giving to such things their due weight in our feelings. It is this approach toward impartiality that constitutes growth in wisdom.

Can wisdom in this sense be taught? And, if it can, should the teaching of it be one of the aims of education? I should answer both these questions in the affirmative.

Bertrand Russell, 'Portraits from Memory', p1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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