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어원전+번역문

순수이성비판, 초월적 논리학 1장, 개념 분석론 2장(초판본)

이윤진이카루스 2013. 7. 5. 12:42

             개념 분석론

 

                    2

 

오성(悟性: 지성: 판단력)의 순수 개념에 대한 추론에 관하여

 

                         1

 

일반적인 초월적 추론의 원칙에 관하여

 

법학자들은, 권한과 주장에 관하여 말할 때, 소송에서 사실의 문제로부터 (quid facti) 법적인 문제를 (quid juris) 구분한다; 그리고 그들은 두 가지 모든 증명될 것을 요구하여 권한이나 법률적 주장을 서술해야 하는 후자(後者)를 연역(Deduktion)이라고 지칭한다. 우리는 많은 경험적 개념들을 어떤 사람의 반론 없이도 사용한다. 경험이란 그 개념들의 객관적 실제성을 증명하는 데 사용가능하기 때문에 우리는, 심지어 연역 없이도, 그 개념들에 의미이자 부여된 중요성을 바칠 자격이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행운, 운명과 같은 약탈된 개념들이 또한 있는데 그 개념들은 거의 보편적인 관용을 통하여 유포가 허용될지라도 때때로 법적인 문제에 의하여 도전을 받는다. 연역에 대한 이 요구로 인하여 우리는 크게 당혹에 빠지고, 경험이나 이성으로부터 도출될 수 있기 때문에, 그 개념들의 사용을 정당화하기에 충분한 법적 근거에 빠지지 않는다.

그러나 인간 지식의 매우 복잡한 거미줄을 형성하는 여러 겹의 개념들 가운데는 순수한 선험적 이용을 위하여 확실한 몇 가지 개념들이 있으며 (모든 경험으로부터 완전히 독립적으로) 그렇게 이용될 그 개념들에 대한 권한은 항상 연역을 필요로 한다; 왜냐하면 경험적 증거들은 그런 이용을 정당화하는 데 충분하지 않기 때문에 어떻게 이 개념들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험으로부터 획득하지 않는 대상들에 관련되는지의 문제에 우리는 직면하기 때문이다. 개념들이 그리하여 대상들에게 선험적으로 관련될 수 있는 방식의 설명을 나는 그 개념들의 초월적 연역이라고 지칭한다; 그리고 그 설명을 경험적 연역과 구분하는데, 경험적 연역은 개념이 경험을 통하여 그리고 경험에 대한 숙고를 통하여 얻어지는 방식을 보여주어 개념의 합법성이 아니라 개념의 시작에 대한 사실적 방식과 관련된다.

우리는 이미 두 가지의 완전히 다른 종류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완전히 선험적인 방식으로 대상들과 관련된다는 점에서 일치하는 개념들, 즉 감성의 형태로서의 공간과 시간의 개념들 및 오성(悟性: 지성: 판단력)의 개념들로서의 범주들인 개념들 지니고 있다. 그런 종류의 개념들에 대하여 경험적 연역을 추구하는 것은 헛된 노력이 될 것이다; 이유인즉 그 개념들의 특징의 차이점이, 이 대상들의 표상에서 도움이 될 수 있는 것을 경험으로부터 빌려오지 않고도 그 개념들이 자체의 대상들과 관련될 수 있다는 점에만 놓여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런 개념들의 연역이 필수불가결하다면 그 연역은 틀림없이 항상 초월적이다.

그러나 우리는 모든 지식에 관해서와 같이 이 개념들에 관하여, 그 개념들의 가능성에 대한 원칙이 아니라면, 적어도 그 개념들의 생성에 관한 기회성 원인들을 경험 속에서 발견하려고 노력할 수 있다. 지식의 전체 기능이 최초의 자극을 제공하는 감각들의 인상들을 그 개념들에게 펼쳐서 경험이 실현된다. 그 경험은 두 가지 매우 다른 요소들을 포함하는데, 즉 감각들로부터 나온 지식의 질료(質料: Materie)이고, 감각-인상들의 경우에는 최초로 실행되어 개념들을 낳는 순수 직감과 사고의 내부 근원부터 [획득된] 이 질료(質料: Materie)의 정돈을 위한 어떤 형태이다. 우리가 지닌 지식의 기능의 첫 번째 노력들에 대한 연구는, 개별적 감지들로부터 보편적 개념들로 올라가는데, 의심할 바 없이 커다란 가치를 지니고 이러한 새로운 연구 방식을 펼친 데 대하여 우리는 유명한 로크(Locke)에게 빚을 지고 있다. 그러나 순수한 선험적 개념의 연역은 그런 방식으로 실현되지 않는데 이유인즉 그런 방식으로 그 연역이 추구될 수 없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 개념들의 이후 사용과 관련하여, 그 사용은 틀림없이 경험으로부터 완전히 독립적인데, 그 개념들은 경험으로부터 나온 기원과는 완전히 다른 출생증명서를 틀림없이 보여줄 것이기 때문이다. 이 시도된 생리적 파생은 사실문제(quaestio facti)에 관련되기 때문에 정말로 연역이라고 지칭될 수 없다; 나는 그러므로 그것을 순수 지식의 소유에 대한 설명이라고 지칭할 것이다. 분명히 이 지식과 관련하여 주어질 수 있는 연역은 초월적이지 경험적이 아니다. 순수한 선험적 개념들과 관련하여 후자(後者) 연역은, 이 지식의 완전히 고유한 본성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에 의해서만 다루어질 수 있는 완전히 헛된 시도이다.

그러나 이른바 초월적 방식으로 가능한 순수한 선험적 지식의 연역의 유일한 종류가 인정된다할지라도, 연역이 필수불가결하게 필요하다는 것은 즉각적으로 분명하지 않다. 우리는 앞에서 초월적 연역을 통하여 공간과 시간의 개념들을 근원까지 추적했고, 그것들의 선험적인 객관적 유효성을 설명하여 결정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하학은 완전히 선험적인 지식으로 안전하게 나아가서, 공간에 대한 자체의 근본적 개념의 순수하고도 합법적인 근원에 대한 증명서에 관한 철학을 요구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개념은 외부의 감각 세계와 - 직감의 세계로 그 세계의 공간은 순수한 형태이다 관련하여서만 이 과학에서 사용되는데 그 세계에서는 모든 기하학적 지식이 선험적 직감에 근거하기 때문에 즉각적인 증거를 지닌다. 대상들은, 형태에 관한 한, 그 대상들에 대한 바로 그 지식을 통하여 선험적으로 직감으로 주어진다. 오성(悟性: 지성: 판단력)의 순수 개념의 경우에는 상황이 완전히 다르다; 그 개념들에 관해서 뿐만 아니라 공간에 대한 개념에 관해서도, 초월적 연역에 대한 필수적인 요구가 처음에 시작되는 것은 그 개념들을 통해서이다. 왜냐하면 그 개념들이 직감과 감성의 술어들을 통해서가 아니라 순수한 선험적 사고의 술어들을 통하여 말하기에 보편적으로 대상들에게 관련되는데 다시 말해서 감성의 모든 조건은 없기 때문이다. 또한 경험에 근거하지 않아서 그 개념들은, 모든 경험에 앞서서 그 개념들의 종합을 위한 토대로서 역할을 할 것과 같은 대상을 선험적 직감으로 보여줄 수 없다. 이런 이유들 때문에 그 개념들은 객관적 유효성과 그 개념들 자체의 이용 한계들에 관해서만 의심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공간의 개념을 감각적 직감의 조건을 초월하여 이용하는 그 개념들의 경향 때문에 저 개념을 모호하기 만든다; 그래서 이것이 정말로 우리가 앞에서 발견한 바, 저 개념에 대한 초월적 연역이 필요한 이유이다. 그리하여 독자는 순수 이성의 분야에서 단 하나의 조치를 취하기 전에 그런 초월적 연역의 필연적 필요에 대하여 확신해야 한다; 이유인즉 그렇지 않으면 그는 맹목적으로 나아가서 여러 가지로 방황한 다음에 틀림없이 자기가 출발했던 동일한 무지(無知)로 회귀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독자가 문제들 자체의 본성에 의하여 깊이 감추어진 문제들에서 모호함을 탄식하지 않으려거나 장애물의 제거에서 너무 쉽게 실망하지 않으려면 그 일의 불가피한 난관에 대하여 분명한 사전 지식을 지고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가장 유명한 분야에서, 다시 말해서모든 가능한 경험의 한계들을 초월하는 것에서 순수 이성을 판단하려는 모든 주장을 포기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이 비판적 연구를 완수해야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앞에서 별 어려움 없이 공간과 시간의 개념들이, 비록 선험적 지식이라 할지라도, 어떻게 필연적으로 대상들과 관련되어야 하는지와 모든 경험과 독립적으로 그 개념들이 어떻게 대상들에 대한 종합적 지식을 가능하게 만드는지를 설명할 수 있었다. 이유인즉 그런 감성의 순수한 형태를 통해서만 우리에게 대상이 나타나서, 다시 말해서 경험적 직감의 대상이 될 수 있어서 공간과 시간은 현상들로서의 대상들의 가능성에 대한 조건을 선험적으로 포함하는 순수한 직감이고 그 현상들 안에서 발생하는 종합은 객관적 유효성을 지니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으로 오성(悟性: 지성: 판단력)의 범주들은, 대상들이 직감으로 주어지는 조건을 우리에게 재현하지는 않는다. 그리하여 대상들은 오성(悟性: 지성: 판단력)의 기능들에 필연적으로 관련되지 않고도 우리에게 나타날 것이다; 그리고 그리하여 오성(悟性: 지성: 판단력)은 대상들의 선험적 조건을 포함할 필요가 없다. 그러므로 우리가 감성의 분야에서 마주치지 않는 난제가 여기에 제시되는데, 이른바 사고의 주관적 조건이 어떻게 객관적 유효성을 가질 수 있는지, 다시 말해서 사고의 주관적 조건이 어떻게 대상들에 대한 모든 지식의 가능성에 관한 조건을 제공할 수 있는지 이다: 왜냐하면 현상들은 오성(悟性: 지성: 판단력)의 기능들과 독립적으로 틀림없이 직감으로 주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원인의 개념을 예로 들겠는데 그 개념은 특별한 종류의 종합을 의미하고 그 종합에 의하여 A라는 것에 규칙에 따라서 완전히 다른 B라는 것이 놓인다. 왜 현상들이 이런 종류의 것을 포함해야 하는지는 선험적으로 분명하지 않으며, (왜냐하면 선험적인 개념의 객관적인 유효성이 서술될 수 있어서 경험이 이런 종류의 것에 대한 증거로 인용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런 개념이 아마도 완전히 공허하지 않아서 현상들 가운데 어느 곳에서도 대상을 지니지 않는지가 선험적으로 의심스럽다. 감성적 직감의 대상들이 정신 속에 선험적으로 놓여있는 감성의 형식적 조건과 일치해야 한다는 것은 분명한데 이유인즉 그렇지 않으면 그 대상들이 우리들에게는 대상들이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대상들이 사고의 종합적 통일성을 위하여 오성(悟性: 지성: 판단력)이 요구하는 조건에도 동일하게 일치해야 한다는 것은 전혀 분명하지 않은 근거들을 지닌 결론이다. 현상들은 아마도 그렇게 구성되어서 오성(悟性: 지성: 판단력)은 자체의 통일성에 대한 조건과 그 현상들이 일치함을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모든 것이 그렇게 혼란스러워서, 예를 들어 현상들의 연속 속에서 종합의 규칙을 산출하여 원인과 결과의 개념에 상응할 어떤 것도 제시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하여 이 개념은 완전히 공허하고 효력이 없으며 의미 또한 없을 것이다. 직감은 사고의 기능들을 조금도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에 현상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직감에 대상들을 제시할 것이다.

우리가 경험은 지속적으로 현상들의 그런 규칙성에 대한 사례들을 제시하여 원인의 개념을 도출하고 동시에 그런 개념의 객관적인 유효성을 증명하는 충분한 기회를 제공한다고 말함으로써 이 연구의 고통을 피하려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원인의 개념이 이런 방식으로 출현할 수 없다는 것을 간과한다. 원인의 개념은 틀림없이 오성(悟性: 지성: 이해력)에 완전히 선험적으로 근거하거나 단지 몽상으로서 완전히 포기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이 개념은, A라는 것이 그러해서 다른 것 BA로부터 필연적이고 절대적으로 보편적인 규칙에 따라서 귀결되는 것을 철저히 요구하기 때문이다. 현상들은, 그 규칙에 따라서 무엇인가가 일반적으로 발생하는 규칙이 얻어질 수 있는 경우들을 정말로 제공하지만 결과가 필연적임을 증명하지는 않는다: 그리하여 원인과 결과의 종합에, 경험적으로 표현될 수 있는 권위가 속하는데 즉, 결과는 원인에 누적될 뿐만 아니라 원인을 통하여 탐색되고 원인으로부터 나타난다. 규칙이 지닌 이 엄격한 보편성은 결코 경험적 규칙들의 특징이 아니다; 경험적 규칙들은 추론을 통하여 상대적 보편성만을, 즉 폭넓은 적용성을 획득할 수 있다. 그러나 이제 오성(悟性: 지성: 판단력)의 순수 개념들을 단순히 경험적 산물로 취급한다면, 그 개념들의 사용은 완전히 변할 것이다.

 

 

범주들의 초월적 추론으로의 천이(遷移)

 

종합적 표상들과 그 표상들의 대상들이 연결되어 서로 필수적인 관계를 맺어서 말하자만 서로 마주치는 두 가지 경우만 가능하다. 대상만 표상을 가능하게 만들거나 표상만이 대상을 가능하게 만든다. 전자(前者)의 경우에 이 관계는 선험적일 따름이고 표상은 선험적으로 가능하지 않다. 이것은 현상들에 관해서도 사실인데 현상 속에서 감각에 속하는 것이 그러하다. 그러나 후자(後者)의 경우에, 존재에 관한 한 표상은 본질적으로 자체의 대상을 낳지 않는데, 왜냐하면 여기서 우리는 의지(意志)를 통하여 표상의 인과성에 관하여 말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표상을 통해서만 대상으로서 어떤 것을 알 수 있다면, 표상은 대상에 관하여 선험적으로 결정된다. 그러나 그 아래서만 대상에 관한 지식이 가능한 두 가지 조건이 있는데 첫째는 직감으로 현상으로일 따름이라 할지라도 직감을 통하여 지식이 주어진다: 두 번째로 개념인데 이 직감과 일치하여 그 개념을 통하여 대상이 사고된다. 앞의 언급으로부터, 첫 번째 조건 즉, 그 아래서만 대상들이 검토될 수 있는 것은 실제로 대상들의 형식적 토대로서 정신 속에 선험적으로 놓여있다. 모든 현상들은 필연적으로 이 감성의 형식적 조건과 일치하는데 이유인즉 현상들은 그 조건을 통해서만 나타나는데, 즉 경험적으로 검토되어 주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 선험적 개념들이 그 아래서만 검토되지는 않을지라도 일반적인 대상으로서 사고될 조건들에 또한 선행하지 않는지의 의문이 제기된다. 그 경우에 대상들에 대한 모든 경험적 지식이 필연적으로 그런 개념들에 일치할 텐데 이유인즉 대상들을 그렇게 상정하지 않으면 경험의 대상으로서 가능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모든 경험은, 어떤 것이 주어지는 감각들의 직감뿐만 아니라 그렇게 주어지는 것으로서 다시 말해서 나타나는 것으로서의 대상에 관한 개념을 포함한다: 그래서 일반적인 대상들에 대한 개념들은 모든 경험적 지식의 선험적 조건으로서 그 지식의 기초를 이룬다: 결과적으로 선험적 개념들로서의 범주들의 객관적 유효성은, (사고의 형태에 관한 한) 개념들만을 통해서 경험이 가능해진다는 사실에 근거한다. 왜냐하면 그럴 경우에 개념들이 경험의 대상들과 필연적으로 그리고 선험적으로 관련되기 때문인데 이유인즉 개념들을 통해서만 경험과 관련된 여하한 대상도 사고될 수 있어서이다.

그리하여 모든 선험적 개념들의 초월적 추론에는 원칙이 있는데 그 원칙에 따라서 전체 연구가 방향을 잡고, 다시 말해서 그 개념들은 경험의 가능성에 대한 선험적 조건으로서 (경험 안에서 마주칠 직감에 대한 선험적 조건이든 혹은 사고에 대한 선험적 조건이든) 인식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경험의 가능성에 대한 객관적 토대를 제공하는 개념들은 그래서 필수적이다. 그러나 개념들을 만나게 되는 경험의 전개는 개념들의 추론이 아닌데 (개념들의 예시이다), 이유인즉 개념들은 예시에 의하여 우연적일 따름이기 때문이다. 지식의 모든 대상들이 발견되는, 가능한 경험에 개념들의 원초적 관계를 통해서가 아니면 어떤 한 가지 대상에 대한 개념들의 관계는 전혀 이해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모든 경험의 가능성에 대한 조건을 포함하고 정신의 다른 기능으로부터 즉, 감각, 상상, 그리고 통각(Apperzeption: 統覺)으로부터 추론될 수 없는 세 가지 원초적 근원이 (영혼의 능력이나 기능) 있다. 그것들에 근거하는 것은 1) 감각을 통한 이 다면체의 선험적 개요; 2) 상상을 통한 이 다면체의 종합; 마지막으로 3) 원초적 통각(Apperzeption: 統覺)을 통한 이 다면체의 통일이다. 이 모든 기능들에는, 형태만에 관련되어서 선험적으로 가능한 경험적일뿐만 아니라, 초월적인 이용이 있다. 감각에 관해서 우리는 위 1부에서 이것을 다루었다; 그러나 우리는 다른 두 가지의 본성을 이해하려고 노력할 것이다.

 

 

 

오성(悟性: 지성: 판단력)의 순수 개념들에 대한 추론

 

2

 

경험 가능성의 선험적 근거들에 관하여

 

개념이 가능한 경험의 개념에 속하지도 않고 가능한 경험의 요소들로 구성되지도 않는다할지라도, 개념은 철저히 선험적으로 생성되어 대상과 관련되어야 한다는 것은 전적으로 모순적이고 불가능하다. 이유인즉 그럴 경우에 직감이 개념과 일치하지 않아서 개념에는 내용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일반적인 직감들은, 그 직감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대상들이 주어질 수 있는데 가능한 경험의 전체 대상인 분야를 구성한다. 경험과 관련되지 않는 선험적 개념은, 어떤 것이 사고되는 개념 자체가 아니라 개념의 논리적 형태일 따름일 것이다.

그러므로 선험적 순수 개념들이 존재한다면 그 개념들은 경험적인 것을 정말로 포함할 리가 없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개념들은 가능한 경험에 대한 선험적 조건이 될 따름이고 이 토대 위에만 그 개념들의 객관적 실제성이 근거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떻게 오성(悟性: 지성: 판단력)에 대한 순수 개념들이 가능한지를 알고자 한다면, 경험의 가능성이 근거하고 경험적인 모든 것이 현상들로부터 추론될 때 그 가능성의 밑 토대로서 남는 선험적 조건이 무엇인지 우리는 조사해야 한다. 보편적으로 그리고 충분히 그런 형식적이고 객관적인 경험의 조건을 설명하는 개념은 오성(悟性: 지성: 판단력)의 순수 개념이라고 불릴 것이다. 언젠가 내가 오성(悟性: 지성: 판단력)의 순수 개념을 지닌다면 나는, 불가능하거나 아마도 본질적으로 가능할지라도 경험 속에서 주어질 수 없는 대상들을 생각해낼 수 있다. 왜냐하면 이 개념들을 결합하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연적으로 가능한 경험의 조건에 속하는 어떤 것이 생략될 것이기 때문이다 (정신의 개념에서처럼). 혹은 경험이 이해할 수 있는 것보다 순수 개념들은 더 멀리 확대될 것이다 (하느님에 대한 개념에 관해서와 같이). 그러나 모든 선험적 지식의 요소들은, 심지어 자의적이고 무의미한 허구의 요소들도 정말로 경험으로부터 도출될 수 없다할지라도 (이유인즉 그렇다면 그 요소들은 선험적 지식이 아닐 것이므로) 가능한 경험과 경험적 대상에 대하여 순수한 선험적 조건을 틀림없이 항상 포함하는데 왜냐하면 그렇지 않으면 그 요소들을 통하여 어떤 것도 사고되지 않을 것이고 그 요소들 자체는 자료가 없어서 심지어 사고에서 발생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모든 경험에 포함된 순수 사고를 선험적으로 포함하는 이 개념들을 우리는 범주들 속에서 발견한다. 그 개념들을 통해서만 대상이 사고될 수 있다는 것을 우리가 증명한다면 이것은 그 개념들에 대한 충분한 추론이 될 것이고 그 개념들의 객관적 유효성에 대한 정당화일 것이다. 그러나 단순한 사고력 이상의 그런 사고 속에서 오성(悟性: 지성: 판단력)이 활동하고 이 기능 자체가 대상들과 관련되어야 하는 지식의 기능으로서 그런 관계의 가능성과 관련하여 설명을 요구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 개념들의 경험적 특징이 아니라 초월적 특징 속에서 경험 가능성의 선험적 토대를 형성하는 주관적 근원들을 먼저 고찰해야 한다.

각각의 표상이 모든 다른 표상에 대하여 철저히 낯설다면, 말하자면 고립되어 있다면 지식과 같은 것은 발생하지 않을 텐데. 왜냐하면 지식은 표상들이 비교되고 연결되는 전체이기 때문이다. 감각은 직감을 하면서 다면체를 포함하기 때문에 나는 감각에게 개요를 귀속시킨다. 그러나 그런 개요에 종합은 항상 일치해야 한다; 수용성(受容性: die Rezeptivität)은 자발성과 결합되었을 때만 지식을 가능하게 만든다. 이제 이 자발성, 모든 지식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3중의 종합의 토대이다: , 직감하는 정신의 수정(修正)으로서의 표상들에 대한 이해, 상상하면서 표상들의 재생, 그리고 개념으로 그 표상들을 인식하기이다. 이것들은, 오성(悟性: 지성: 판단력) 자체와 오성(悟性: 지성: 판단력)의 경험적 산물로서의 모든 경험을 가능하게 만드는 세 가지 주관적 지식의 근원을 가리킨다.

 

임시적인 언급

 

범주들의 추론은 많은 난제들과 얽혀있어서 우리가 지닌 일반적인 지식에 관한 가능성의 첫 번째 토대로 깊이 우리가 침투해야 하기에, 나는 완벽한 이론을 장황함을 피하기 위하고 동시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우 필수적인 연구에서 어떤 것도 놓치지 않기 위하여 다음 네 가지 글에서 독자들을 교육시키는 것보다는 독자들을 준비시키는 게 유용함을 나는 알았다; 그래서 이어지는 세 번째 절()에서 오성(悟性: 지성: 판단력)의 이 요소들에 대한 토론이 우선적으로 제시된다. 그러므로 독자들은 앞 절의 모호함에 의하여 소외되어서는 안 된다. 그 모호함은 전에 시도된 적이 없는 일에서는 불가피하지만, 내가 희망하는 바, 언급된 절에서 최종적으로 완벽하게 통찰되어 설명될 것이다.

 

1. 직감하면서 이해하기의 종합에 관하여

 

우리가 지니는 표상들의 근원이 무엇이건, 그 표상들이 외부 물체들의 영향에 기인하건, 내부의 원인들을 통하여 생성되건, 그 표상들이 선험적으로 발생하건, 혹은 현상들이기 때문에 경험적 근원을 지니든, 그 표상들은 모두 정신의 수정(修正: Modifikationen)으로서 내부 감각에 속한다. 그러므로 우리의 모든 지식은 내부 감각의 형식적 조건인 시간에 최종적으로 종속된다. 시간 안에서 그 표상들은 모두 정돈되고 연결되고 관련된다. 이것은 다음에 오는 것을 통하여 완전히 근본적인 것으로서 기억되어야 하는 일반적인 언급이다.

모든 직감은, 정신이 인상을 연속적으로 하여 시간을 구분하는 한에서만 본질적으로 다면체를 포함한다: 이유인즉 각 표상은, 그 표상이 단 하나의 순간에 포함되어 있는 한, 절대적 통일성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직감의 통일성이 이 다면체로부터 출현하기 위해서는 (공간의 추상에서 요구되는 바와 같이) 그 다면체가 먼저 관통되고 결합되어야 한다. 이 행위를 나는 이해의 통합이라고 지칭하는데 이유인즉 그 행위가 직감을 향하여 실제로 방향을 잡고 있고 직감은 정말로 다면체를 제시하지만 그런 통합의 힘이 아니면 다면체로서 그리고 단 하나의 표상에 포함된 것으로서 표상될 수 없는 다면체이기 때문이다.

이 이해의 종합은 또한 틀림없이 선험적으로 수행되는데 다시 말해서 경험적이 아닌 표상과 관련해서이다. 왜냐하면 그 종합이 없다면 우리는 공간의 표상이나 시간의 표상을 선험적으로 경험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 표상들은 감성이 자체의 원초적 수용성(受容性: Rezeptivität)에서 제공하는 다면체의 종합을 통해서만 발생될 수 있다. 그리하여 우리는 순수한 이해의 종합을 경험한다.

 

2. 상상에서의 재현의 종합에 관하여

 

흔히 서로 추종했거나 동반했던 표상들이 종국적으로 연결되어 관계를 맺고 그 관계에 의하여 대상의 부재 속에서도 이 표상들 중 하나가 고착된 법칙에 따라서 한 정신을 다른 정신으로 천이(遷移)시키는 것은 경험적 법칙일 따름이다. 그러나 이 재생 법칙은, 현상들 자체는 실제로 그런 법칙에 종속된다는 것과 이 표상들의 다면체 속에서 어떤 법칙에 따라서 동반과 승계가 발생한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왜냐하면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상상은 자체의 능력들에 알맞은 실행 기회를 발견하지 못할 것이어서 죽어서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은 기능으로서 생각 속에 은닉되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진사(震砂: Zinnober)가 붉거나 검거나 가볍거나 무겁다면, 인간이 이런 동물의 형태나 저런 동물의 형태로 변한다면, 국가가 가장 긴 날에 과일로 뒤덮이거나 얼음과 눈으로 뒤덮인다면, 나의 경험적 상상은 무거운 진사(震砂: Zinnober)를 생각하기 위하여 붉은 색을 표상함으로써 기회를 얻지는 못할 것이다. 또한 현상들이 본질적으로 종속되는 규칙 없이, 어떤 이름이 이런 대상에 주어지거나 저런 대상에 주어지거나, 동일한 물체가 이런 방식으로 지칭되고 저런 방식으로 지칭된다면, 경험적인 재생의 종합은 발생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현상들의 필수적인 종합적 통일에 대한 선험적 토대로서 현상들의 표상을 가능하게 만드는 것이 틀림없이 있다. 현상들은 본질적인 물체가 아니가 우리의 표상의 장난에 지나지 않는 것이어서 결국 내부 감각의 결정이 된다는 것을 우리가 심사숙고할 때 그것이 무엇인지 우리는 곧 발견한다. 심지어 우리의 가장 순수한 선험적 직감들도, 그 직감들이 철저한 표상의 종합을 가능하게 만드는 다면체의 결함을 포함하는 한을 제외하고, 지식을 생성하지 못함을 우리가 밝힐 수 있다면 이 상상의 결합은 또한 모든 경험에 앞서서 선험적 원칙들에 근거한다; 그리고 우리는 상상의 순수 초월적 종합을 모든 경험의 (경험은 현상들의 재현가능성을 필수적으로 전제하는 것으로서) 가능성을 규정하는 것으로서 전제해야 한다. 내가 생각으로 직선을 그리거나 한 정오에서 다른 정오까지의 시간을 생각하거나 심지어 어떤 숫자를 내 자신에게 재현하고자 한다면, 분명히 포함된 다양한 다면체적 표상들은 연달아 사고 속에서 나에 의하여 먼저 이해되어야 한다. 그러나 내가 앞의 표상들을 항상 사고 밖으로 떨어뜨리고자 해서 (직선의 첫 번째 부분들, 시간의 앞선 부분들, 혹은 표상된 순서대로의 통일성), 이어지는 표상들로 나아가면서 그 표상들을 재생하지 않는다면, 완벽한 표상은 획득되지 않을 것이다: 앞에 언급된 모든 사고들 중에서 어떤 사고도, 심지어 공간과 시간에 관한 가장 순수하고 가장 기본적인 표상들도 발생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하여 이해의 종합은 재생의 종합과 불가분하게 결합되어 있다. 그리고 전자(前者)가 일반적인 모든 지식의 가능성에 대한 초월적 토대를 구성하기 때문에 (경험적인 지식일 뿐만 아니라 선험적으로 순수한 지식 또한) 상상의 재생적 종합은 정신의 초월적 행위에 속한다. 그리하여 우리는 이 기능을 상상의 초월적 기능이라고 지칭할 것이다.

 

3. 개념에서 인식의 종합에 관하여

 

우리가 생각하는 것이 잠시 전에 우리가 생각했던 것과 동일하다는 인식이 없다면 일련의 표상에서의 모든 재생은 무용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 재생은 현재의 상황에서 그 행위에 전혀 속하지 않을 것인 새로운 표상일 것이고 그 행위에 의하여 그 재생은 점진적으로 생성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표상의 다면체는 전체를 구성하지 못할 것인데 이유인즉 그 다면체에는 인식만이 제공할 수 있는 통일성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셈을 하면서 지금 내 앞에서 맴도는 통일성들이 연속적으로 서로에게 덧붙는다는 것을 내가 잊는다면, 통일성에 대한 이 통일성의 연속적인 덧붙음을 통하여 전체가 생성되고 있음을 나는 알지 못할 것이어서 결과적으로 숫자에 대하여 나는 무지한 상태로 남을 것이다. 왜냐하면 숫자라는 개념은 이 종합의 통일성에 대한의 의식에 놓여있을 따름이기 때문이다.

개념이라는 단어는 스스로 이런 소견을 제시할 것이다. 이유인즉 이 단위성 의식이 다면체를 결합시키는 것이고, 연속적으로 검토했던 것이고 그리하여 또한 재생하여 하나의 표상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 의식은 흔히 희미하여 우리는 그 의식을 행동 자체와 연결시키지 않을 것인데 다시 말해서 표상의 생성과 직접적으로 연결시키지 않지만 단지 결과와 연결시킨다. 그러나 이 차이점들에도 불구하고 그런 의식은, 아무리 희미하다 할지라도, 틀림없이 항상 존재한다; 그런 의식이 없다면 개념들과, 그리고 개념들과 함께 대상들에 대한 지식은 전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리고 이 시점에서 표상들의 대상이라는 표현을 통하여 우리가 의미하는 바를 우리 자신에게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현상들 자체는 감각적 표상일 따름인데 그 표상은 본질적으로 (우리의 표상 능력 외에 존재할 수 있는) 대상들로서 간주되어서는 안 된다고 우리는 앞에서 언급했다. 그렇다면 우리의 지식과 일치하여 결과적으로 또한 우리의 지식과 구분되는 대상에 관하여 말할 때 무엇이 이해될 수 있는가? 이 대상은 일반적인 것으로서 = X로 생각되어야 한다는 것은 분명히 보이는데 이유인즉 우리에게는 우리가 지닌 지식 외에는, 이 지식과 일치는 것으로서 이 지식과 대적할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상에 대한 모든 관계에 관한 우리의 사고가 필연적인 요소를 지님을 우리는 발견한다; 대상은 우리의 지식들이 무작위적이나 임의적이 되는 것을 방지하고 우리의 지식들이 확실한 정도로 선험적으로 결정하는 것으로 간주된다. 이유인즉 그 지식들이 대상과 관련되는 한 필연적으로 상호간에 일치해야 하기 때문인데 다시 말해서 그 지식들이 대상에 대한 개념을 구성하는 통일성을 지녀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표상들의 다면체를 다루어야 하기 때문에, 그리고 그 표상들과 일치하는 저 X(대상) 우리에게 아무 것도 아니기 때문에 - 이유인즉 그런 상태로 그 X는 우리가 지닌 모든 표상들과 구분되어야 하는 것이어서 - 대상이 필수적으로 만드는 통일성은 표상들의 다면체를 종합하는 데서 의식의 형식적 통일성만이 될 수 있다. 그리하여 우리가 직감의 다면체 안에서 종합적 통일성을 이룩했다면 우리는 대상을 안다고 말한다. 그러나 직감이 규칙에 따라서 다면체의 재생을 선험적으로 필수적으로 만들어서 그 재생이 결합되는 개념을 가능하게 만드는 그런 종합의 기능을 통하여 생성될 수 없다면, 이 통일성은 불가능하다. 그리하여 우리는 그런 직감이 항상 묘사될 수 있는 규칙에 따라서 세 개의 직선 구성을 의식하면서, 우리는 하나의 삼각형을 대상으로서 생각한다. 이 규칙의 통일성은 다면체 전부를 규정하고 통각(統覺: Apperzeption)의 통일성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에 그 다면체를 제한한다. 이 통일성의 개념이 대상 = X라는 표상인데 그 표상을 나는 위에 언급된 삼각형의 술어들을 통하여 생각한다.

모든 지식은, 그 개념이 정말로 철저하게 불완전하거나 모호할지라도, 개념을 요구한다: 그러나 개념은, 자체의 형태에 관하여, 항상 규칙으로서 역할을 하는 보편적인 것이다. 몸체에 대한 개념을 통하여 사고되는 다면체의 통일성으로서 몸체에 대한 개념은, 예를 들어, 외부 현상들에 대한 우리의 지식에서 규칙으로서 작동한다. 그러나 그 개념은, 주어진 현상들 속에서 직감들의 다면체의 필수적인 재생을 표상하여 그 직감들에 대한 우리의 의식 속에서 종합적 통일성을 표상하는 한에서만, 직감들에 대한 규칙이 될 수 있다. 몸체에 대한 개념은 우리 외부의 물체를 지각하는 데서 확대의 표상과 비관통성, 형태, 기타 등등의 표상을 요구한다.

모든 필연성은 예외 없이 초월적 조건에 근거한다. 그러므로 모든 우리의 직감들의 다면체의 종합 안에는 의식의 통일성의 초월적 토대가 틀림없이 있으며 그리하여 또한 일반적인 대상들에 대한 개념들의 토대와 경험의 모든 대상들의 토대가 있는데 그 토대가 없으면 우리의 직감들에 대하여 어떤 대상을 생각하는 일이 불가능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 개념은, 어떤 것에 대한 개념이 그런 종합의 필연성을 표현하는 어떤 것일 따름이기 때문이다.

이 원초적이고 초월적인 조건은 이제 초월적 통각(統覺: Apperzeption)에 다름 아니다. 내부의 인식에서 우리의 상황에 대한 결정에 따라서 자아를 의식하는 것은 경험적이어서 항상 변화한다. 이 내부 현상들의 흐름에서 고정되거나 지속적인 자신은 자체를 제시할 수 없다. 그런 의식은 통상적으로 내부의 의미나 경험적 통각(統覺: Apperzeption)으로 지칭된다. 필연적으로 숫자적으로 동일한 것으로서 표상될 수 있는 것은 그런 상태로 경험적 자료를 통하여 사고될 수 없다. 그런 초월적 요건을 유효하게 만들기 위하여, 모든 경험에 선행하고 이 경험 자체를 가능하게 만드는 조건이 틀림없이 있다.

이제 직감들의 모든 자료에 선행하고 그 의식의 통일성과 관련하여 대상들에 대한 모든 표상만이 가능한 저 의식의 통일성이 없다면, 우리에게 지식이 발생하지 않고 다른 지식에 대한 한 가지 지식의 연관성과 통일성이 발생하지 않는다. 이 순수하고 원초적이고 항구적인 의식을 나는 이제 초월적 통각(統覺: Apperzeption)이라고 지칭한다. 그 의식이 이 명칭을 받을 자격이 있다는 것은, 심지어 가장 순수한 객관적 통일성, 즉 선험적 개념의 (공간과 시간) 통일성이 그런 의식의 통일성에 대한 직감들의 관계를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사실로 인하여 명백하다. 이 통각(統覺: Apperzeption)의 숫자적 통일성은 그러므로, 공간과 시간의 다면체가 감성적 직감들의 선험적 토대인 바와 같이, 모든 개념들의 선험적 토대이다.

그러나 심지어 이 통각(統覺: Apperzeption)의 초월적 통일성도 모든 가능한 현상들로부터 형성되는데 그 현상들은 항상 한 가지 경험 속에서 공존할 수 있고 법칙들에 따른 이 모든 표상들의 결합이다. 왜냐하면, 다면체를 아는 정신이 그 기능의 일치를 통하여 한 가지 지식으로 그 다면체를 종합적으로 결합하는 기능의 일치를 의식할 수 없다면, 이 의식의 통일성은 불가능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아의 일치에 대한 원초적이고 필연적인 의식은 동시에 개념들에 따른, 다시 말해서, 규칙들에 따른 모든 현상들의 종합의 동등하게 필연적인 통일성인데 규칙들은 모든 현상들을 재생 가능하게 만들뿐만 아니라 그렇게 하면서 현상들을 직감하기 위하여 대상을 결정하는데 즉, 현상들이 필연적으로 결합되는 어떤 것에 대한 개념이다: 이유인즉 정신은 자체의 표상들의 다면체 속에서 자체가 일치시키는 것을 생각할 수 없고, 자체가 이해의 모든 종합을 (경험적인) 초월적 통일성에 복속시켜 그 표상들의 결합을 선험적 규칙들에 따라 가능하게 만드는 자체의 행위가 일치하는 것을 자체의 목전에 지니지 못한다면 실제로 이 일치시키는 것을 선험적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제 또한 우리가 일반적인 대상에 대한 우리의 개념을 더 합리적으로 결정할 위치에 있다. 모든 표상들은, 표상들로서, 자체의 대상을 지니고 있어서 스스로 반대로 다른 표상들의 대상들이 될 수 있다. 현상들은 우리에게 즉각적으로 주어질 수 있는 유일한 대상들이고 그 현상들 속에서 대상과 직접적으로 관련되는 것은 직감이라고 지칭된다. 그러나 이제 이 현상들은 본질적인 물체가 아니라 표상들일 따름인데 반대로 자체의 대상을 - 자체가 우리에 의하여 직관될 수 없는 그리하여 비경험적으로, 다시 말해서 초월적 대상 = X로 지칭될 대상 - 지닌다.

이 초월적 대상에 대한 순수 개념은 (실제로 우리의 모든 지식을 통하여 항상 동일한 것) 대상에 대한 일반적 관계에서 우리의 모든 경험적 개념들에게, 다시 말해서 유일하게 객관적 실제성을 부여할 수 있는 것이다. 이 개념은 결정된 직감을 포함할 수 없어서 대상과 관련되는 지식의 다면체 안에서 틀림없이 발견되는 저 통일성에만 관련된다. 그러나 이 관계는 의식의 필연적인 통일성일 따름이어서, 다면체를 하나의 표상으로 결합시키는 정신의 일반적인 기능을 통한 다면체의 종합과 관련된 의식의 필연적 통일성이기도 하다. 이제 이 통일성이 틀림없이 필연적으로 선험적인 것으로서 간주되기 때문에 (그렇지 않으면 지식에는 대상이 없을 것이기에) 초월적 대상 대한 관계는, 다시 말해서 우리가 지닌 경험적 지식의 객관적 실제성은 초월적 법칙에 근거하여 모든 현상들은, 그 현상들을 통하여 대상들이 우리에게 주어져야 하는 한, 그 통일성에 따라서 경험적 직감에 이 현상들의 상호관계가 가능하기만 한 종합적 통일성의 저 선험적 규칙들 하에 틀림없이 놓인다. 다시 말해서 경험 속의 현상들은, 단순한 직감 속에서 공간과 시간의 형식적 조건에 틀림없이 종속되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틀림없이 통각(統覺: Apperzeption)의 필연적인 통일성의 조건 하에 놓인다. 그렇게 함으로써만 지식이 가능하게 된다.

 

4. 선험적 지식으로서, 범주들의 가능성에 대한 임시적 설명

 

모든 감지가 일반적이고 합리적인 결합으로서 표상되는 단 하나의 경험이 있다: 현상의 모든 형태들과 존재와 비존재의 모든 관계가 발생하는 단 한 가지 공간과 시간이 있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우리가 다양한 경험들에 관하여 말할 때, 우리는 다양한 감지에 대해서만 언급하고, 그 감지 모두는 그런 상태로 동일한 일반적인 경험에 속한다. 이 일반적이고 종합적인 감지의 통일성은 정말로 경험의 형태이고, 개념들에 따른 현상들의 종합적 통일성일 따름이다.

경험적 개념들이 초월적 토대에 근거하지 않는다면 경험적 개념들에 따른 종합의 통일성은 전적으로 우연적일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현상들이 우리의 영혼 위에 몰려들어 경험을 허용하지 않는 것이 될 것이다. 보편적이고 필연적인 법칙들에 따른 결합이 부족할 것이기 때문에 대상들에 대한 지식의 관계가 폐지될 것이다. 정말로 현상들은 사고 없는 직감을 구성하지만 지식을 구성하지는 않아서 결과적으로 우리들에게는 아무것도 아닌 것과 마찬가지일 것이다.

일반적인 가능한 경험의 선험적 조건은 동시에 경험들의 대상들의 가능성에 대한 조건이다. 이제 나는 위에 언급된 범주들이, 공간과 시간이 저 동일한 경험에 대한 조건인 것과 꼭 마찬가지로, 가능한 경험에서 사고의 조건일 따름이라고 주장한다. 그리하여 범주들은 현상들에 대하여 일반적으로 우리가 대상들을 생각하는 근본적인 개념들이어서 선험적인 객관적 유효성을 지닌다; 이것이 실제로 우리가 증명하고 싶어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 범주들의 가능성이, 정말로 필연성이, 우리의 전체 감성 및 그 감성과 함께 모든 가능한 현상들이 원초적 통각(統覺: Apperzeption)에 지니는 관계에 근거한다. 원초적 통각(統覺: Apperzeption) 안에서 모든 것은 필수적으로 자기-의식의 일반적인 통일성의 조건에, 다시 말해서 종합의, 즉 그 안에서만 통각(統覺: Apperzeption)이 자체의 완벽하고도 필연적인 일치를 선험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 보편적인 기능들에 따른 저 종합의 보편적 기능들과 합치되어야 한다. 그리하여 원인의 개념은 개념들에 따른 종합일 (다른 현상들과 함께, 시간-연속에 따르는 것의) 따름이다; 그리고 자체의 선험적 규칙을 지니고 현상들을 자체에 종속시키는 그런 통일성이 없다면, 일반적이고 보편적이며 그리하여 필연적인 의식의 통일성은 감지들의 다면체 속에서 발견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 감지들은 그리하여 경험에 속하지 않을 것이어서 결과적으로 대상이 없다면, 꿈보다 훨씬 못한 표상의 맹목적인 장난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경험으로부터 이 이해의 순수 개념들을 도출하여 단지 경험적 근원을 그 개념들의 결과로 간주하는 모든 시도들은 그러므로 완전히 터무니없고 쓸모가 없다. 예를 들어 원인의 개념이 필연성의 특징을 포함한다는 사실을 나는 주장할 필요가 없는데 필연성의 특징을 경험이 제공할 수 없다. 경험은 정말로 한 가지 현상이 다른 한 가지 현상을 뒤따르는 것을 알려주지만, 이 순서가 필연적이라는 것도 또한 우리가 선행사건에서, 조건으로 간주되어, 후속 사건으로 선험적이고 완벽하게 보편적으로 논증할 수 있음도 알려주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가 일련의 사건들 중에서 모든 것이 매우 규칙에 종속되어서 어떤 것이 그것이 보편적으로 뒤따른 그것에 선행하는 한을 제외하고 어떤 일도 발생하지 않는다고 주장할 때 우리가 틀림없이 상정하는 연상(聯想: Assoziation)의 경험적 규칙에 관하여 나는 질문한다: 자연의 법칙으로서 이 규칙은 어디에 근거하는가? 그리고 어떻게 이 연상(聯想: Assoziation) 자체가 가능한가? 다면체의 연상(聯想: Assoziation) 가능성의 토대는, 대상에 놓여있는 한, 다면체의 친화력(Affinität)으로 지칭된다. 그리하여 현상들의 일반적인 친화력(Affinität)(그 현상들이 항구적인 법칙들 아래 놓여야 하는) 우리 자신에게 어떻게 이해 가능하게 만들 것인지를 나는 질문한다.

나의 원칙들에 따르면 그것은 쉽게 설명될 수 있다. 모든 가능한 현상들은, 표상들로서, 가능한 자기-의식의 총체에 속한다. 그러나 자기-의식이 초월적 표상이기 때문에 숫자적 일치가 그로부터 분리될 수 없고 선험적으로 확실한데 이유인즉 이 원초적 통각(統覺: Apperzeption)을 통해서가 아니면 우리의 지식이 될 수 있는 것은 없기 때문이다. 종합이 경험적 지식을 낳을 수 있는 한, 이제 이 일치는 필연적으로 현상들의 모든 다면체의 종합에 들어서 현상들은 선험적 조건에 종속되는데 그 조건에 현상들에 대한 이해의 종합이 완전히 일치해야 한다. 그러나 이제 보편적 조건의 표상은, 그 표상에 따라서 확실한 다면체가 (결과적으로 균등한 양상으로) 상정될 수 있는데 규칙이라고 지칭되고 그렇게 상정되어야 할 때 법칙이라고 지칭된다. 그리하여 모든 현상들은 필연적인 법칙들에 따라서 일반적으로 결합되어 결과적으로 초월적 친화력(Affinität) 속에 있게 되는데 그 친화력(Affinität)에 관하여 경험적인 것은 결과일 따름이다.

자연이 우리가 지닌 주관적인 통각(統覺: Apperzeption)의 토대에 따라서 방향을 잡고, 정말로 그 토대가 법칙과 합치되는 것에 관하여 그 토대에 의존한다는 것은 매우 터무니없고 이상하게 들린다. 그러나 이 자연이 단지 현상들의 총체이어서 본질적인 물체가 아니라 정신의 많은 표상들의 집합임을 우리가 고려할 때, 그것이 그 통일성 때문에만 모든 가능한 경험의 대상이라고, 즉 자연이라고 지칭될 수 있는 저 통일성 속에서 우리가 그 자연을 우리의 모든 지식의 근본적 기능 속에서만, 다시 말해서 초월적 통각(統覺: Apperzeption) 속에서 발견할 수 있음에 우리는 놀라지 않을 것이다; 또한 그리하여 이 통일성이 선험적으로 알려질 수 있어서 필연적으로서 알려질 수 있다고 해도 우리는 놀라지 않을 것이다. 통일성이 우리 사고의 최초의 근원들과 독립적으로 본질적으로 주어진다면 이것은 가능하지 않을 터이다. 왜냐하면 그럴 경우에 그런 보편적인 자연의 통일성을 주장하는 종합적 명제들을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여하한 근원도 우리가 알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유인즉 그럴 경우에 그 명제들은 자연의 대상들 자체들로부터 도출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이 경험적으로만 발생할 수 있어서 우연한 통일성에 지나지 않는 것만 얻어질 수 있는데 그 통일성은 우리가 자연에 대하여 말할 때 우리가 염두에 두는 필연적인 상호연결에 훨씬 미치지 못할 터이다.

 

 

개념 분석론

 

2

 

오성(悟性: 지성: 판단력)의 순수 개념에 대한 추론에 관하여

 

3

 

오성(悟性: 지성: 판단력)의 일반적인 대상들에 대한, 그리고 선험적으로 그 대상들을 아는 가능성에 관하여

 

우리는 앞 절에서 분리하여 하나씩 설명했던 것을 이제 체계적으로 상호 결합하여 표상할 것이다. 세 가지 지식의 주관적 근원이 있는데 그 근원에 일반적인 경험의 가능성과 그 경험 대상에 대한 지식의 가능성이 근거한다: 감각, 상상력 그리고 통각(統覺: Apperzeption); 이것들 각각은 경험적인 것으로서 간주될 수 있는데, 즉 주어진 현상들에 대하여 적용하면서 이다. 그러나 이것들 모두는 또한 선험적 요소들이나 토대들로서 이 경험적 이용을 가능하게 만든다. 감각은 감지에서 현상들을 경험적으로 표상하고, 상상력은 연상(聯想: Assoziation)에서 (그리고 재생), 그리고 통각(統覺: Apperzeption)은 재생된 표상들이 주어지는 현상들에 대한 재생된 표상들의 일치에 관한 경험적 의식에서, 다시 말해서 인식(Rekognition)에서.

그러나 모든 감지는 선험적으로 순수 직감에 근거하고 (표상들로서 그 감지들의 내부 직감의 형태인 시간에) 연상(聯想: Assoziation)은 상상력의 순수 종합에, 그리고 경험적 의식은 순수 통각(統覺: Apperzeption), 다시 말해서, 모든 가능한 표상들에서 자아의 일반적인 일치에 근거한다.

이제 우리가 표상들이 그 속에서 가능한 경험에 필요한 지식의 통일성을 얻을 지점까지 표상들이 연결되는 내부의 토대를 추적하고 싶어 한다면, 우리는 순수 통각(統覺: Apperzeption)으로 시작해야 한다. 직감들은 자체가 직접적이거나 간접적으로 참여할 의식 속에 포함될 수 없다면 우리에게 아무 것도 아니고 전혀 우리와 관련되지 않으면 이런 방식으로만 지식이 가능하다. 우리는, 모든 표상들의 가능성에 대한 필연적 조건으로서, 우리의 지식에 속할 수 있는 모든 표상들과 관련하여 일반적인 자아의 일치를 선험적으로 의식한다. 왜냐하면 나의 내부에서 그 표상들이, 그 표상들이 모든 다른 것들과 함께 한 가지 의식에 속하여 적어도 그렇게 연결될 수 있는 한에서만, 어떤 것을 의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원칙은 선험적으로 유효하고 우리의 표상들에서 (그리하여 또한 직감에서) 모든 다면체의 초월적 통일성 원칙으로 지칭될 수 있다. 한 가지 주제에서 다면체의 이 통일성이 종합적이기 때문에 순수 통각(統覺: Apperzeption)은 모든 가능한 직감에서 다면체의 종합적 통일성에 대한 원칙을 제공한다.

우리는 이 명제를 주시하고 더 중요시한다. 모든 표상들에는 가능한 경험적 의식에 관한 필연적인 관계가 있다: 이유인즉 모든 표상들에 이 관계가 없다면, 그리하여 그 표상들을 의식하는 일이 전혀 불가능하다면, 그것은 표상들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것에 해당할 것이다. 그러나 모든 경험적 의식에는 초월적 의식에 (모든 특별한 경험에 선행하는), 즉 원초적 통각(統覺: Apperzeption)으로서 내 자신에 대한 의식에 대한 필연적 관계가 있다. 그러므로 나의 지식에서 모든 의식이 한 가지 의식에 (내 자신의) 속해야 한다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렇다면 여기에 다면체의 (의식의) 종합적 통일성이 있는데 그 통일성은 선험적으로 알려져서, 순수 직감의 형태에 관련되는 명제들에 대한 공간과 시간이 그러한 것처럼, 순수 사고에 관련되는 종합적인 선험적 명제들에 대한 토대를 제공한다. 모든 다양한 경험적 의식은 단 하나의 자기의식에서 결합되어야 한다는 종합적 명제는 일반적인 우리 사고에 대한 절대적으로 최초이자 종합적인 원칙이다. 그러나 모든 다른 표상들과 (그 집단적 통일성을 그 표상이 가능하게 만든다) 관련한 나(Ich)라는 표상에 지나지 않는 것은 초월적 의식이라는 것은 망각되어서는 안 된다. 이 표상이 분명한지 (경험적 의식) 모호한지, 혹은 심지어 그 표상이 실제로 발생하는지는 우리와 관련이 없다; 그러나 모든 지식의 논리적 형태의 가능성은 반드시 이 통각(統覺: Apperzeption)의 관계에 기능으로서 근거한다.

 

이 종합적 통일성은 종합을 전제하거나 포함하며 전자(前者)가 선험적으로 필연적이 되어야 한다면 후자(後者) 역시 선험적이 되어야 한다. 그리하여 통각의 초월적 통일성은, 한 가지 지식에서 다면체의 모든 결합의 가능성에 대한 선험적 조건으로서, 상상력의 순수 종합에 관련된다. 그러나 상상력의 생산적 종합만 선험적으로 발생할 수 있는데 이유인즉 재생적인 것은 경험의 조건에 근거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상상력의 순수 (생산적) 종합의 필연적 통일성에 관한 원칙은 모든 지식의, 특히 경험의 가능성에 대한 토대이다.

이제 우리는, 직감의 구분 없이 다면체의 선험적 결합에만 관련된다면, 상상력에서 다면체의 종합을 초월적이라고 지칭한다; 그리고 이 종합의 통일성은, 통각(統覺: Apperzeption)의 원초적 통일성과 관련하여 선험적으로 필연적인 것으로서 표상될 때, 초월적이라고 지칭된다. 이 통각(統覺: Apperzeption)의 통일성이 이제 모든 지식의 가능성의 토대를 이루기 때문에 상상력 종합의 초월적 통일성은 모든 가능한 지식의 순수 형태이고 그 형태를 통하여 결과적으로 가능한 경험의 모든 대상들이 틀림없이 선험적으로 표상된다.

상상력의 종합에 관한 통각(統覺: Apperzeption)의 통일성은 오성(悟性: 지성: 판단력)이다; 그리고 이 통일성은, 상상력의 초월적 종합과 관련하여, 순수 오성(悟性: 지성: 판단력)이다. 그리하여 오성(悟性: 지성: 판단력) 안에 는 모든 가능한 현상들과 관련하여, 상상력의 순수 종합에 관한 필연적인 통일성을 포함하는 선험적인 순수 지식이 있다. 이것들이 범주들, 다시 말해서 오성(悟性: 지성: 판단력)의 순수 개념들이다. 그리하여 사람에게 있는 지식의 경험적 기능은, 직감을 다만 통해서이고 상상력을 통한 직감의 종합을 다만 통해서라 할지라도, 감각들의 모든 대상들과 관련되는 오성(悟性: 지성: 판단력)을 틀림없이 포함한다. 모든 현상들은, 가능한 경험에 대한 자료들로서, 이 오성(悟性: 지성: 판단력)에 종속된다. 가능한 경험에 대한 현상들의 이 관계는 또한 필연적인데 이유인즉 그렇지 않으면 현상들이 지식을 생성하지 않아서 전혀 우리와 관련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범주들을 통한 순수 오성(悟性: 지성: 판단력)은 모든 경험들의 형식적 및 종합적 원칙이라는 점과 현상들에는 오성(悟性: 지성: 판단력)에 대한 필연적 관계가 있다는 점이 귀결된다.

이제 우리는 아래에서부터 시작하여, 즉 경험적인 것을 이용하여, 범주들로써 오성(悟性: 지성: 판단력)이 현상들과 관련되는 필연적 결합을 설명하려고 노력할 것이다. 우리에게 주어지는 첫 번째 것은 현상이다. 의식과 결합될 때, 그 현상은 감지(感知: Wahrnehmung)라고 지칭된다. (적어도 가능한 의식과의 관계가 없으면, 현상은 우리에게 지식의 대상이 될 수 없을 것이어서 우리에 아무 것도 아닐 것이다; 그리고 현상에는 본질적으로 객관적 실제성이 없고 지식 속에만 존재하기 때문에 전혀 아무것도 아닐 것이다.) 그러나 모든 현상에는 다면체가 있어서 다양한 감지(感知: Wahrnehmung)들이 정신 속에서 분리되어 개별적으로 발생하기 때문에, 감각 자체 안에서는 그 감지(感知: Wahrnehmung)들이 지닐 수 없는 것과 같은, 감지(感知: Wahrnehmung)들의 결합이 필요하다. 그리하여 우리 내부에는 이 다면체의 종합과 관련된 활동적인 기능이 존재한다. 이 기능을 우리는 상상력이라고 지칭하며, 그 기능의 행동이 감지들과 즉각적으로 관련될 때 나는 이해(Apprehension)라고 부른다. 상상력은 직감의 다면체를 모습의 형태로 가져와야 하기 때문에 상상력은 이전에 인상들을 자체의 활동 속으로 틀림없이 가져왔다, 즉 이해했다.

그러나 정신으로 하여금 정신이 당도한 후속 감지와 함께, 앞선 감지를 회복케 하여 감지들의 전체 순서를 형성하도록 하는 주관적 토대가 없다면 심지어 이 다면체의 이해만으로는 모습과 인상들의 결합을 생성하지 못할 것임은 분명하다. 이것이 상상력의 재생적 기능이고, 그 기능은 또한 경험적일 따름이다.

그러나 표상들이, 결합되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서로 구별 없이 재생한다면, 이것은 표상들의 결정적인 결합을 생성하지 않고 무작위적인 더미만 낳을 것이다; 그리하여 어떤 지식도 생성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표상들의 재생산은 규칙에 따르는데 그 규칙에 따라서 표상은 상상력으로 한 또 다른 표상에 우선하여 어떤 표상과 연결된다. 규칙들에 따른 이 주관적이고 경험적인 재생의 토대가 소위 표상들의 연상(聯想: Assoziation)이다.

그러나 이제 현상들이 이 이해(Apprehension)와 관련된 가능한 종합적 통일성의 조건 하에서가 아닌 다른 방식으로 상상력에 의하여 이해되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객관적인 토대가 또한 이 연상(Assoziation)의 통일성에 없다면, 현상들이 인간 지식의 결합된 전체에 들어맞는다는 것은 전적으로 무작위적일 터이다. 이유인즉 우리에게 감지한 것들을 연상할 능력이 있다할지라도 그 감지한 것들 자체가 연상될 수 있는지는 전적으로 불확정적이고 무작위적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감지한 것들이 연상될 수 없다면 많은 감지한 것들과 정말로 전체 감성이 존재할 것이고 그것들 안에서 많은 경험적 의식이 나의 정신 속에서 발생할 터이지만 분리 상태에서 발생할 터이고 내 자신의 의식에 속하지도 않고 발생할 터이다. 그러나 이것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내가 모든 감지한 것들에 대하여 내가 그것들을 의식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내가 모든 감지한 것들을 한 가지 의식에 (원초적 통각[統覺: Apperzeption])에 귀속시키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모든 현상들에까지 확대되는 법칙의 가능성, 아니, 필연성이 근거하는 객관적 토대가 (, 상상력의 모든 경험적 법칙들에 앞서서) - 본질적으로 연상될 수 있어서 그 재생의 일반적인 연결에 대한 보편적인 규칙들이 종속되는 감각의 자료들로서 모든 현상을 바라보도록 우리에게 강요하는 토대 - 틀림없이 있다. 이 현상들의 모든 연상(聯想: Assoziation)과 관련된 객관적 토대를 나는 그 현상들의 친화성(Affinität)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그 친화성은 나에게 속할 모든 지식과 관련하여, 통각(統覺: Apperzeption)의 통일성 원칙에서를 제외하고는 어느 곳에서도 발견될 수 없다. 이 원칙에 따라서 모든 현상들은, 절대적으로 정신 속으로 들어오거나 이해되어서 통각(統覺: Apperzeption)의 통일성과 일치한다. 현상들의 결합에서 종합적 통일성이 없다면 이것은 불가능할 터이다; 그리하여 그런 종합적 통일성 자체가 객관적으로 필요하다.

한 가지 의식 안에서의 모든 (경험적) 의식의 객관적 통일성, 즉 원초적 통각(統覺: Apperzeption)의 객관적 통일성은 그리하여 모든 가능한 감지의 필연적 조건이다; 그리고 모든 현상들의 친화성(Affinität)(가깝든 멀든) 선험적으로 규칙에 근거하는 상상력의 종합의 필연적 결과이다.

상상력 자체가 선험적 종합의 한 가지 기능이기 때문에 우리는 상상력에게 생산적 상상력이라는 이름을 부여하고, 상상력이 현상의 다면체인 것의 종합에서 필연적인 통일성만을 목표로 하기 때문에 상상력의 초월적 기능으로 지칭될 것이다. 현상들의 친화성과, 그 친화성과 함께 현상들의 연상(Assoziation), 그리고 반대로 이것을 통한 현상들의 법칙들에 따른 재생과 그리하여 경험 자체가 가능하기만 하다는 것은 정말로 이상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의 논증의 분명한 결과이다: 이유인즉 이 초월적 기능이 없다면 대상들에 대한 개념들이 단위 경험을 융합하지 못할 터이기 때문이다.

지속적이고 영속적인 나(Ich)(순수 통각[統覺: Apperzeption]), 우리의 모든 표상들을 의식하는 일이 조금이라도 가능한 한, 우리의 모든 표상들에 대하여 상관성을 형성한다. 철저히 포괄적인 순수 통각에 진정으로 속하는 모든 의식은, 모든 감각적 직감으로서, 표상으로서 순수 내부 직감에, 즉 시간에 속한다. 자체의 기능을 지성적으로 만들기 위하여 순수 상상력에 첨가되어야 하는 것은 이 통각(統覺: Apperzeption)이다. 왜냐하면 상상력의 종합이 다면체가 직감에서, 예를 들어 삼각형의 모양에서처럼, 나타나는 것에 따라서만 다면체를 결합시키기 때문에 그 종합은 선험적으로 수행된다할지라도 항상 본질적으로 감각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성(悟性: 지성: 판단력)에 속하는 개념들이 통각(統覺: Apperzeption)의 통일성에 대한 다면체의 관계를 통하여 발생하는 반면, 그 개념들이 감각적 직감에 대한 관계로 들어올 수 있는 것은 상상력을 통해서만 이다.

그리하여 모든 선험적 지식의 토대를 이루는 순수 상상력은 인간 영혼이 지닌 근본적 기능들 중의 하나이다. 그 상상력을 통하여 우리는 한편으로 직감의 다면체를 가져오고, 다른 한편으로 순수 통각(統覺: Apperzeption)의 필연적 통일성의 조건과 결합한다. 두 가지 극단, 즉 감수성과 오성(悟性: 지성: 판단력)은 상상력의 이 초월적 기능을 통하여 필연적으로 틀림없이 상호 관련된다; 이유인즉 그렇지 않다면 전자(前者)는 정말로 현상들을 야기하지만 경험적 지식의 대상들을 제공하지 않을 것이어서 결과적으로 경험을 제공하지 않을 터이기 때문이다. 이해(Apprehension)에 의하여 성립되는 실제적 경험, 연상(재생), 그리고 마지막으로 현상들의 인식은, 경험의 형식적 통일성과 그 통일성과 함께 경험적 지식의 모든 객관적 유효성(진실성)을 가능케 하는 이 경험의 단지 경험적 요소들의 최후이자 최고의 개념들을 포함한다. 이 다면체에 대한 인식의 토대들은, 일반적인 경험의 형태에 관한 한, 이제 범주들이다. 그 범주들에 그러므로 상상력의 종합에서 모든 형식적 통일성 뿐만 아니라 그 종합을 통하여 현상들과 관련된 모든 그 통일성의 이용이 (인식, 재생, 연상, 이해에서) 근거한다. 왜냐하면 이 근본적 개념들을 통해서만 현상들이 지식이나 심지어 의식에 속할 수 있어 우리 자신에게 속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현상들에서의 질서와 규칙성은, 우리가 자연이라고 지칭하는데, 우리 자신이 도입한다. 우리 자신이나 우리 정신의 특성이 원초적으로 질서나 규칙성을 현상들 속에 두지 않았다면 우리는 현상들 속에서 그 질서나 규칙성을 발견할 수 없을 터이다. 이유인즉 이 자연의 통일성은 필연적인 것이어야 하는데 즉, 현상들의 결합의 선험적인 어떤 통일성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 정신의 원초적 기능들 속에 선험적으로 포함된 그런 통일성의 주관적 토대들이 없다면 그리고 이 주관적 조건들이 경험에서 여하한 대상을 아는 가능성의 토대들인 한 동시에 객관적으로 유효하지 않다면, 그런 종합적 통일성은 선험적으로 확립될 수 없을 터이다.

우리는 이미 다양한 방식들로 오성(悟性: 지성: 판단력)을 정의했다: 지식의 자발성(Spontaneität)으로서 (감성의 수용성[Rezeptivität]과 구별하여), 사고력으로서, 혹은 또한 개념들의 기능으로서, 혹은 판단들의 기능으로서: 이 모든 정의(定義), 자세히 고찰된다면 동일한 것에 해당한다. 우리는 이제 그것을 규칙들의 기능으로 규정한다. 이 표시는 보다 유익해서 자체의 본성에 더 근접한다. 감성은 우리에게 형태들을 (직감의) 제공하지만 오성(悟性: 지성: 판단력)은 우리에게 규칙들을 제공한다. 후자(後者)는 현상들 속에서 어떤 규칙을 발견하기 위하여, 항상 현상들을 조사하느라 바쁘다. 규칙들은, 객관적인 한, (결과적으로 대상에 대한 지식에 필연적으로 의존한다) 법칙들로 지칭된다. 우리가 경험을 통하여 많은 법칙들을 배울지라도, 그 법칙들은 훨씬 더 높은 법칙들의 특별한 결정사항들일 따름이고 이것들 중 가장 높은 것들은 (그 아래 다른 것들이 모두 존재하는데) 오성(悟性: 지성: 판단력) 자체로부터 선험적으로 나온다. 그 가장 높은 법칙들은 경험으로부터 빌려오는 것이 아니고 반대로 틀림없이 현상들에게 자기들의 합법성을 부여하여 경험을 가능하게 만든다. 그리하여 오성(悟性: 지성: 판단력)은 현상들의 대조를 통하여 규칙들을 만드는 능력 이상의 것이다: 오성(悟性: 지성: 판단력) 자체는 자연에 대한 입법가인데 다시 말해서 오성(悟性: 지성: 판단력)이 없다면 자연, 즉 규칙들에 따른 현상들의 다면체의 종합적 통일성은 전혀 존재하지 않을 터이다: 왜냐하면 현상들은 그런 상태로서 우리 외부에서 발생할 수 없고 단지 우리의 감성 안에서만 존재할 수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자연은, 경험에서 지식의 대상으로서, 자체가 포함한 모든 것과 함께, 통각(統覺: Apperzeption)의 통일성 안에서 가능할 따름이다. 그리하여 통각(統覺: Apperzeption)의 통일성은 한 가지 경험에서 모든 현상들의 법칙에 대한 필연적 합법성의 초월적 토대이다. 표상들의 다면체와 관련한 이 동일한 통각(統覺: Apperzeption)의 통일성은 (통일성으로부터 자체를 결정하는) 규칙으로 기능하고 이 규칙들의 기능이 오성(悟性: 지성: 판단력)이다. 모든 현상들은, 직감들일 따름인 한 감성에 놓여있고 자체의 형태에 관하여 감성을 통해서만 가능한 바와 같이, 가능한 경험들로서 선험적으로 오성(悟性: 지성: 판단력)에 놓여있다.

그리하여 오성(悟性: 지성: 판단력) 자체가 자연법칙들의 근원이어서 자연의 형식적 통일성의 근원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무리 과장되고 터무니없다할지라도, 그런 주장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옳고 자체가 언급하는 대상 즉, 경험과 일치한다. 정말로 경험적 법칙들은, 그런 상태로, 자체의 근원을 순수 오성(悟性: 지성: 판단력)으로부터 도출할 수는 없는데 감각적 직감의 순수 형태에 관해서 현상들의 엄청난 다양성을 완전히 이해하는 것만큼 가능성이 없다. 그러나 모든 경험적 법칙들은 단지 오성(悟性: 지성: 판단력)의 순수 법칙들의 특수한 결정사항들인데 그 아래서 그리고 그 기준에 따라서, 모든 경험적 법칙들이 최초로 가능해진다. 모든 현상들은, 자체의 경험적 형태의 차이점들에도 불구하고 항상 감성의 순수 형태와 일치해야 하는 바와 같이, 그 경험적 법칙들 통하여 적법한 형태를 띤다.

그러므로 순수 오성(悟性: 지성: 판단력)은 범주들에서 모든 현상들의 종합적 통일성의 법칙이고 그리하여 경험을 자체의 형태와 관련하여 최초로 그리고 원초적으로 가능하게 만든다. 이것이 우리가 범주들의 초월적 추론에서 확보해야 했던, 즉 감성에 대한 그리고 감성을 통하여 모든 경험의 대상들에 대한 오성(悟性: 지성: 판단력)의 이 관계를 이해 가능하도록 만들어야 했던 유일한 것이다. 그리하여 순수 선험적 개념들의 객관적 유효성이 이해 가능하게 되고 그 개념들의 근원과 진실성이 결정된다.

 

오성의 순수 개념들에 관한 이 추론의 옳음과 그 추론이 가능한 유일한 추론임에 대한 요약된 표상

 

우리의 지식이 다루어야 하는 대상들이 본질적인 것들이라면, 우리는 그것들에 대하여 선험적 개념들을 가질 수 없을 터이다. 왜냐하면 어떤 근원으로부터 우리는 그 개념들을 얻을 수 있을까?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대상으로부터 그 개념들을 도출한다면 (어떻게 이 대상이 우리에게 알려질 수 있는지 여기서 묻지 않고) 우리가 지닌 경험들은 경험적일 따름이고 선험적이 아니다. 우리가 자신으로부터 그 개념들을 도출한다면, 우리 내부에만 있는 것은 우리의 표상들과 구분되는 대상의 특징을 결정할 수 없을 것인데 즉, 물체가 우리가 우리 생각 속에 지니고 있는 것에 의하여 규정되어 존재해야 하는 이유와 그런 표상이 반대로 텅 비어있지 않아야 하는 이유의 근거가 될 수 없을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우리가 현상들만을 다루어야 한다면, 어떤 선험적 개념들이 대상들에 대한 경험적 지식에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은 가능할 뿐만 아니라 필수적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감성의 단순한 수정은 우리 외부에서 발견될 수 없어서 현상들로서의 대상들은 우리 내부에만 있는 대상을 구성하기 때문이다. 이제 이 모든 현상들과 그리하여 우리가 몰두할 수 있는 모든 대상들은 내 안의 전체이다 즉, 나의 동일한 자아의 결정사항들이다라고 이렇게 주장하는 것은 동일한 통각(統覺: Apperzeption) 안에 틀림없이 그 현상들의 일반적인 통일성이 있다고 말하는 또 다른 방식이다. 그러나 가능한 의식의 이 통일성이 또한 대상들에 대한 모든 지식의 형태를 구성한다 (그 통일성을 통하여 단 하나의 대상에 속하는 것으로서 다면체가 사고된다). 그리하여 감각적 표상의 (직감) 다면체가 한 가지 의식에 속하는 방식은 모든 지식의 지성적 형태로서 대상에 대한 모든 지식에 선행하고, 모든 대상들이 사고되는 한 (범주들) 모든 대상들에 대한 형식적인 선험적 지식을 구성한다. 순수 상상력을 통한 다면체의 종합, 원초적 통각(統覺: Apperzeption)과 관련한 모든 표상들의 통일성은 모든 경험적 지식에 선행한다. 오성(悟性: 지성: 판단력)의 순수 개념들은 그리하여 선험적으로 가능하고 정말로 경험과 관련하여 필수적이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의 지식이 현상들만을 다루어야 하기 때문인데 현상들의 가능성은 우리 내부에 놓여있고 현상들의 결합과 통일성은 (대상의 표상에서) 우리 내부에서만 발견될 수 있다. 그리하여 그런 결합과 통일성은 틀림없이 모든 경험에 선행하고 경험의 형식적 면에서 경험의 바로 그 가능성에 요구된다. 유일하게 가능한 것인 이 관점으로부터 범주들에 대한 우리의 추론이 발전했다.

 

 

Der transzendentalen Analytik

 

Zweites Hauptstück

 

Von der Deduktion der reinen Verstandesbegriffe

 

 

Erster Abschnitt

 

Von den Prinzipien einer transz. Deduktion überhaupt

 

 

Die Rechtslehrer, wenn sie von Befugnissen und Anmaßungen reden, unterscheiden in einem Rechtshandel die Frage über das, was Rechtens ist, (quid juris) von der, die die Tatsache angeht, (quid facti) und indem sie von beiden Beweis fordern, so nennen sie den ersteren, der die Befugnis, oder auch den Rechtsanspruch dartun soll, die Deduktion. Wir bedienen uns einer Menge empirischer Begriffe ohne jemandes Widerrede, und halten uns auch ohne Deduktion berechtigt, ihnen einen Sinn und eingebildete Bedeutung zuzueignen, weil wir jederzeit die Erfahrung bei Hand haben, ihre objektive Realität zu beweisen. Es gibt indessen auch usurpierte Begriffe, wie etwa Glück, Schicksal, die zwar mit fast allgemeiner Nachsicht herumlaufen, aber doch bisweilen durch die Frage: quid juris, in Anspruch genommen werden, da man alsdann wegen der Deduktion derselben in nicht geringe Verlegenheit gerät, indem man keinen deutlichen Rechtsgrund weder aus der Erfahrung, noch der Vernunft anführen kann, dadurch die Befugnis seines Gebrauchs deutlich würde.

Unter den mancherlei Begriffen aber, die das sehr vermischte Gewebe der menschlichen Erkenntnis ausmachen, gibt es einige, die auch zum reinen Gebrauch a priori (völlig unabhängig von aller Erfahrung) bestimmt sind, und dieser ihre Befugnis bedarf jederzeit einer Deduktion; weil zu der Rechtmäßigkeit eines solchen Gebrauchs Beweise aus der Erfahrung nicht hinreichend sind, man aber doch wissen muß, wie diese Begriffe sich auf Objekte beziehen können, die sie doch aus keiner Erfahrung hernehmen. Ich nenne daher die Erklärung der Art, wie sich Begriffe a priori auf Gegenstände beziehen können, die transz. Deduktion derselben, und unterscheide sie von der empirischen Deduktion, welche die Art anzeigt, wie ein Begriff durch Erfahrung und Reflexion über dieselbe erworben worden, und daher nicht die Rechtmäßigkeit, sondern das Faktum betrifft, wodurch der Besitz entsprungen.

Wir haben jetzt schon zweierlei Begriffe von ganz verschiedener Art, die doch darin miteinander übereinkommen, daß sie beiderseits völlig a priori sich auf Gegenstände beziehen, nämlich, die Begriffe des Raumes und der Zeit, als Formen der Sinnlichkeit, und die Kategorien, als Begriffe des Verstandes. Von ihnen eine empirische Deduktion versuchen wollen, würde ganz vergebliche Arbeit sein; weil eben darin das Unterscheidende ihrer Natur liegt, daß sie sich auf ihre Gegenstände beziehen, ohne etwas zu deren Vorstellung aus der Erfahrung entlehnt zu haben. Wenn also eine Deduktion derselben nötig ist, so wird sie jederzeit transzendental sein müssen.

Indessen kann man von diesen Begriffen, wie von allem Erkenntnis, wo nicht das Prinzipium ihrer Möglichkeit, doch die Gelegenheitsursachen ihrer Erzeugung in der Erfahrung aufsuchen, wo alsdann die Eindrücke der Sinne den ersten Anlaß geben, die ganze Erkenntniskraft in Ansehung ihrer zu eröffnen, und Erfahrung zustande zu bringen, die zwei sehr ungleichartige Elemente enthält, nämlich eine Materie zur Erkenntnis aus den Sinnen und eine gewisse Form, sie zu ordnen, aus dem inneren Quell des reinen Anschauens und Denkens, die, bei Gelegenheit der ersteren, zuerst in Ausübung gebracht werden, und Begriffe hervorbringen. Ein solches Nachspüren der ersten Bestrebungen unserer Erkenntniskraft, um von einzelnen Wahrnehmungen zu allgemeinen Begriffen zu steigen, hat ohne Zweifel seinen großen Nutzen, und man hat es dem berühmten Locke zu verdanken, daß er dazu zuerst den Weg eröffnet hat. Allein eine Deduktion der reinen Begriffe a priori kommt dadurch niemals zustande, denn sie liegt ganz und gar nicht auf diesem Wege, weil in Ansehung ihres künftigen Gebrauchs, der von der Erfahrung gänzlich unabhängig sein soll, sie einen ganz anderen Geburtsbrief, als den der Abstammung von Erfahrungen, müssen aufzuzeigen haben. Diese versuchte physiologische Ableitung, die eigentlich gar nicht Deduktion heißen kann, weil sie eine quaestio facti betrifft, will ich daher die Erklärung des Besitzes einer reinen Erkenntnis nennen. Es ist also klar, daß von diesen allein es eine transzendent. Deduktion und keineswegs eine empirische geben könne, und daß letztere, in Ansehung der reinen Begriffe a priori, nichts als eitle Versuche sind, womit sich nur derjenige beschäftigen kann, welcher die ganz eigentümliche Natur dieser Erkenntnisse nicht begriffen hat.

Ob nun aber gleich die einzige Art einer möglichen Deduktion der reinen Erkenntnis a priori, nämlich die auf dem transzendentalen Wege eingeräumt wird, so erhellt dadurch doch eben nicht, daß sie so unumgänglich notwendig sei. Wir haben oben die Begriffe des Raumes und der Zeit, vermittelst einer transzendentalen Deduktion zu ihren Quellen verfolgt, und ihre objektive Gültigkeit a priori erklärt und bestimmt. Gleichwohl geht die Geometrie ihren sicheren Schritt durch lauter Erkenntnisse a priori, ohne daß sie sich, wegen der reinen und gesetzmäßigen Abkunft ihres Grundbegriffs vom Raume, von der Philosophie einen Beglaubigungsschein erbitten darf. Allein der Gebrauch dieses Begriffs geht in dieser Wissenschaft auch nur auf die äußere Sinnenwelt, von welcher der Raum die reine Form ihrer Anschauung ist, in welcher also alle geometrische Erkenntnis, weil sie sich auf Anschauung a priori gründet, unmittelbare Evidenz hat, und die Gegenstände durch die Erkenntnis selbst, a priori (der Form nach) in der Anschauung, gegeben werden. Dagegen fängt mit den reinen Verstandesbegriffen die unumgängliche Bedürfnis an, nicht allein von ihnen selbst, sondern auch vom Raum die transzendentale Deduktion zu suchen, weil, da sie von Gegenständen nicht durch Prädikate der Anschauung und der Sinnlichkeit, sondern des reinen Denkens a priori redet, sie sich auf Gegenstände ohne alle Bedingungen der Sinnlichkeit allgemein beziehen, und die, da sie nicht auf Erfahrung gegründet sind, auch in der Anschauung a priori kein Objekt vorzeigen können, worauf sie vor aller Erfahrung ihre Synthesis gründeten, und daher nicht allein wegen der objektiven Gültigkeit und Schranken ihres Gebrauchs Verdacht erregen, sondern auch jenen Begriff des Raumes zweideutig machen, dadurch, daß sie ihn über die Bedingungen der sinnlichen Anschauung zu gebrauchen geneigt sind, weshalb auch oben von ihm eine transzendent. Deduktion vonnöten war. So muß denn der Leser von der unumgänglichen Notwendigkeit einer solchen transz. Deduktion, ehe er einen einzigen Schritt im Felde der reinen Vernunft getan hat, überzeugt werden; weil er sonst blind verfährt, und, nachdem er mannigfaltig umhergeirrt hat, doch wieder zu der Unwissenheit zurückkehren muß, von der er ausgegangen war. Er muß aber auch die unvermeidliche Schwierigkeit zum voraus deutlich einsehen, damit er nicht über Dunkelheit klage, wo die Sache selbst tief eingehüllt ist, oder über der Wegräumung der Hindernisse zu früh verdrossen werden, weil es darauf ankommt, entweder alle Ansprüche zu Einsichten der reinen Vernunft, als das beliebteste Feld, nämlich dasjenige über die Grenzen aller möglichen Erfahrung hinaus, völlig aufzugeben, oder diese kritische Untersuchung zur Vollkommenheit zu bringen.

Wir haben oben an den Begriffen des Raumes und der Zeit mit leichter Mühe begreiflich machen können, wie diese als Erkenntnisse a priori sich gleichwohl auf Gegenstände notwendig beziehen müssen; und eine synthetische Erkenntnis derselben, unabhängig von aller Erfahrung, möglich machten. Denn da nur vermittelst solcher reinen Formen der Sinnlichkeit uns ein Gegenstand erscheinen, d.i. ein Objekt der empirischen Anschauung sein kann, so sind Raum und Zeit reine Anschauungen, welche die Bedingung der Möglichkeit der Gegenstände als Erscheinungen a priori enthalten, und die Synthesis in denselben hat objektive Gültigkeit.

Die Kategorien des Verstandes dagegen stellen uns gar nicht die Bedingungen vor, unter denen Gegenstände in der Anschauung gegeben werden, mithin können uns allerdings Gegenstände erscheinen, ohne daß sie sich notwendig auf Funktionen des Verstandes beziehen müssen, und dieser also die Bedingungen derselben a priori enthielte. Daher zeigt sich hier eine Schwierigkeit, die wir im Felde der Sinnlichkeit nicht antrafen, wie nämlich subjektive Bedingungen des Denkens sollten objektive Gültigkeit haben, d.i. Bedingungen der Möglichkeit aller Erkenntnis der Gegenstände abgeben: denn ohne Funktionen des Verstandes können allerdings Erscheinungen in der Anschauung gegeben werden. Ich nehme z.B. den Begriff der Ursache, welcher eine besondere Art der Synthesis bedeutet, da auf etwas A was ganz verschiedenes B nach einer Regel gesetzt wird. Es ist a priori nicht klar, warum Erscheinungen etwas dergleichen enthalten sollten, (denn Erfahrungen kann man nicht zum Beweise anführen, weil die objektive Gültigkeit dieses Begriffs a priori muß dargetan werden können,) und es ist daher a priori zweifelhaft, ob ein solcher Begriff nicht etwa gar leer sei und überall unter den Erscheinungen keinen Gegenstand antreffe. Denn daß Gegenstände der sinnlichen Anschauung den im Gemüt a priori liegenden formalen Bedingungen der Sinnlichkeit gemäß sein müssen, ist daraus klar, weil sie sonst nicht Gegenstände für uns sein würden; daß sie aber auch überdem den Bedingungen, deren der Verstand zur synthetischen Einsicht des Denkens bedarf, gemäß sein müssen, davon ist die Schlußfolge nicht so leicht einzusehen. Denn es könnten wohl allenfalls Erscheinungen so beschaffen sein, daß der Verstand sie den Bedingungen seiner Einheit gar nicht gemäß fände, und alles so in Verwirrung läge, daß z.B. in der Reihenfolge der Erscheinungen sich nichts darböte, was eine Regel der Synthesis an die Hand gäbe, und also dem Begriffe der Ursache und Wirkung entspräche, so daß dieser Begriff also ganz leer, nichtig und ohne Bedeutung wäre. Erscheinungen würden nichtsdestoweniger unserer Anschauung Gegenstände darbieten, denn die Anschauung bedarf der Funktionen des Denkens auf keine Weise.

Gedächte man sich von der Mühsamkeit dieser Untersuchungen dadurch loszuwickeln, daß man sagte: Die Erfahrung böte unablässig Beispiele einer solchen Regelmäßigkeit der Erscheinungen dar, die genugsam Anlaß geben, den Begriff der Ursache davon abzusondern, und dadurch zugleich die objektive Gültigkeit eines solchen Begriffs zu bewähren, so bemerkt man nicht, daß auf diese Weise der Begriff der Ursache gar nicht entspringen kann, sondern daß er entweder völlig a priori im Verstande müsse gegründet sein, oder als ein bloßes Hirngespinst gänzlich aufgegeben werden müsse. Denn dieser Begriff erfordert durchaus, daß etwas A von der Art sei, daß ein anderes B daraus notwendig und nach einer schlechthin allgemeinen Regel folge. Erscheinungen geben gar wohl Fälle an die Hand, aus denen eine Regel möglich ist, nach der etwas gewöhnlichermaßen geschieht, aber niemals, daß der Erfolg notwendig sei: daher der Synthesis der Ursache und Wirkung auch eine Dignität anhängt, die man gar nicht empirisch ausdrücken kann, nämlich, daß die Wirkung nicht bloß zu der Ursache hinzukomme, sondern durch dieselbe gesetzt sei, und aus ihr erfolge. Die strenge Allgemeinheit der Regel ist auch gar keine Eigenschaft empirischer Regeln, die durch Induktion keine andere als komparative Allgemeinheit, d.i. ausgebreitete Brauchbarkeit bekommen können. Nun würde sich aber der Gebrauch der reinen Verstandesbegriffe gänzlich ändern, wenn man sie nur als empirische Produkte behandeln wollte.

 

 

Übergang zur transz. Deduktion der Kategorien

 

Es sind nur zwei Fälle möglich, unter denen synthetische Vorstellung und ihre Gegenstände zusammentreffen, sich aufeinander notwendigerweise beziehen, und gleichsam einander begegnen können. Entweder wenn der Gegenstand die Vorstellung, oder diese den Gegenstand allein möglich macht. Ist das erstere, so ist diese Beziehung nur empirisch, und die Vorstellung ist niemals a priori möglich. Und dies ist der Fall mit Erscheinung, in Ansehung dessen, was an ihnen zur Empfindung gehört. Ist aber das zweite, weil Vorstellung an sich selbst (denn von dessen Kausalität, vermittelst des Willens, ist hier gar nicht die Rede,) ihren Gegenstand dem Dasein nach nicht hervorbringt, so ist doch die Vorstellung in Ansehung des Gegenstandes alsdann a priori bestimmend, wenn durch sie allein es möglich ist, etwas als einen Gegenstand zu erkennen. Es sind aber zwei Bedingungen, unter denen allein die Erkenntnis eines Gegenstandes möglich ist, erstlich Anschauung, dadurch derselbe, aber nur als Erscheinung, gegeben wird: zweitens Begriff, dadurch ein Gegenstand gedacht wird, der dieser Anschauung entspricht. Es ist aber aus dem obigen klar, daß die erste Bedingung, nämlich die, unter der allein Gegenstände angeschaut werden können, in der Tat den Objekten der Form nach a priori im Gemüt zum Grunde liegen. Mit dieser formalen Bedingung der Sinnlichkeit stimmen also alle Erscheinungen notwendig überein, weil sie nur durch dieselbe erscheinen, d.i. empirisch angeschaut und gegeben werden können. Nun frägt es sich, ob nicht auch Begriffe a priori vorausgehen, als Bedingungen, unter denen allein etwas, wenngleich nicht angeschaut, dennoch als Gegenstand überhaupt gedacht wird, denn alsdann ist alle empirische Erkenntnis der Gegenstände solchen Begriffen notwendigerweise gemäß, weil, ohne deren Voraussetzung, nichts als Objekt der Erfahrung möglich ist. Nun enthält aber alle Erfahrung außer der Anschauung der Sinne, wodurch etwas gegeben wird, noch einen Begriff von einem Gegenstande, der in der Anschauung gegeben wird, oder erscheint: demnach werden Begriffe von Gegenständen überhaupt, als Bedingungen a priori aller Erfahrungserkenntnis zum Grunde liegen: folglich wird die objektive Gültigkeit der Kategorien, als Begriffe a priori, darauf beruhen, daß durch sie allein Erfahrung (der Form des Denkens nach) möglich sei. Denn alsdann beziehen sie sich notwendigerweise und a priori auf Gegenstände der Erfahrung, weil nur vermittelst ihrer überhaupt irgendein Gegenstand der Erfahrung gedacht werden kann.

Die transz. Deduktion aller Begriffe a priori hat also ein Prinzipium, worauf die ganze Nachforschung gerichtet werden muß, nämlich dieses: daß sie als Bedingungen a priori der Möglichkeit der Erfahrungen erkannt werden müssen, (es sei der Anschauung, die in ihr angetroffen wird, oder des Denkens). Begriffe, die den objektiven Grund der Möglichkeit der Erfahrung abgeben, sind eben darum notwendig. Die Entwicklung der Erfahrung aber, worin sie angetroffen werden, ist nicht ihre Deduktion, (sondern Illustration,) weil sie dabei doch nur zufällig sein würden. Ohne diese ursprüngliche Beziehung auf mögliche Erfahrung, in welcher alle Gegenstände der Erkenntnis vorkommen, würde die Beziehung derselben auf irgendein Objekt gar nicht begriffen werden können.

Es sind aber drei ursprüngliche Quellen, (Fähigkeiten oder Vermögen der Seele) die die Bedingungen der Möglichkeit aller Erfahrung enthalten, und selbst aus keinem anderen Vermögen des Gemüts abgeleitet werden können, nämlich, Sinn, Einbildungskraft, und Apperzeption. Darauf gründet sich l) die Synopsis des Mannigfaltigen a priori durch den Sinn; 2) die Synthesis dieses Mannigfaltigen durch die Einbildungskraft; endlich 3) die Einheit dieser Synthesis durch ursprüngliche Apperzeption. Alle diese Vermögen haben, außer dem empirischen Gebrauche, noch einen transz., der lediglich auf die Form geht, und a priori möglich ist. Von diesem haben wir in Ansehung der Sinne oben im ersten Teile geredet, die zwei anderen aber wollen wir jetzt ihrer Natur nach einzusehen trachten.

 

 

Der Deduktion der reinen Verstandesbegriffe

 

Zweiter Abschnitt

 

 

Von den Gründen a priori zur Möglichkeit der Erfahrung

 

 

Daß ein Begriff völlig a priori erzeugt werden, und sich auf einen Gegenstand beziehen solle, obgleich er weder selbst in den Begriff möglicher Erfahrung gehört, noch aus Elementen einer möglichen Erfahrung besteht, ist gänzlich widersprechend und unmöglich. Denn er würde alsdann keinen Inhalt haben, darum, weil ihm keine Anschauung korrespondierte, indem Anschauungen überhaupt, wodurch uns Gegenstände gegeben werden können, das Feld, oder den gesamten Gegenstand möglicher Erfahrung ausmachen. Ein Begriff a priori, der sich nicht auf diese bezöge, würde nur die logische Form zu einem Begriff, aber nicht der Begriff selbst sein, wodurch etwas gedacht würde.

Wenn es also reine Begriffe a priori gibt, so können diese zwar freilich nichts Empirisches enthalten: sie müssen aber gleichwohl lauter Bedingungen a priori zu einer möglichen Erfahrung sein, als worauf allein ihre objektive Realität beruhen kann.

Will man daher wissen, wie reine Verstandesbegriffe möglich seien, so muß man untersuchen, welches die Bedingungen a priori seien, worauf die Möglichkeit der Erfahrung ankommt, und die ihr zum Grunde liegen, wenn man gleich von allem Empirischen der Erscheinungen abstrahiert. Ein Begriff, der diese formale und objektive Bedingung der Erfahrung allgemein und zureichend ausdrückt, würde ein reiner Verstandesbegriff heißen. Habe ich einmal reine Verstandesbegriffe, so kann ich auch wohl Gegenstände erdenken, die vielleicht unmöglich, vielleicht zwar an sich möglich, aber in keiner Erfahrung gegeben werden können, indem in der Verknüpfung jener Begriffe etwas weggelassen sein kann, was doch zur Bedingung einer möglichen Erfahrung notwendig gehört, (Begriff eines Geistes) oder etwa reine Verstandesbegriffe weiter ausgedehnt werden, als Erfahrung fassen kann (Begriff von Gott). Die Elemente aber zu allen Erkenntnissen a priori selbst zu willkürlichen und ungereimten Erdichtungen können zwar nicht von der Erfahrung entlehnt sein, (denn sonst wären sie nicht Erkenntnisse a priori) sie müssen aber jederzeit die reinen Bedingungen a priori einer möglichen Erfahrung und eines Gegenstandes derselben enthalten, denn sonst würde nicht allein durch sie gar nichts gedacht werden, sondern sie selber würden ohne Data auch nicht einmal im Denken entstehen können.

Diese Begriffe nun, welche a priori das reine Denken bei jeder Erfahrung enthalten, finden wir an den Kategorien, und es ist schon eine hinreichende Deduktion derselben, und Rechtfertigung ihrer objektiven Gültigkeit, wenn wir beweisen können: daß vermittels ihrer allein ein Gegenstand gedacht werden kann. Weil aber in einem solchen Gedanken mehr als das einzige Vermögen zu denken, nämlich der Verstand beschäftigt ist, und dieser selbst, als ein Erkenntnisvermögen, das sich auf Objekte beziehen soll, ebensowohl einer Erläuterung, wegen der Möglichkeit dieser Beziehung, bedarf: so müssen wir die subjektiven Quellen, welche die Grundlage a priori zu der Möglichkeit der Erfahrung ausmachen, nicht nach ihrer empirischen, sondern transzendentalen Beschaffenheit zuvor erwägen.

Wenn eine jede einzelne Vorstellung der anderen ganz fremd, gleichsam isoliert, und von dieser getrennt wäre, so würde niemals so etwas, als Erkenntnis ist, entspringen, welche ein Ganzes verglichener und verknüpfter Vorstellungen ist. Wenn ich also dem Sinne deswegen, weil er in seiner Anschauung Mannigfaltigkeit enthält, eine Synopsis beilege, so korrespondiert dieser jederzeit eine Synthesis und die Rezeptivität kann nur mit Spontaneität verbunden Erkenntnisse möglich machen. Diese ist nun der Grund einer dreifachen Synthesis, die notwendigerweise in allem Erkenntnis vorkommt: nämlich, der Apprehension der Vorstellungen, als Modifikationen des Gemüts in der Anschauung, der Reproduktion derselben in der Einbildung und ihrer Rekognition im Begriffe. Diese geben nun eine Leitung auf drei subjektiven Erkenntnisquellen, welche selbst den Verstand und, durch diesen, alle Erfahrung, als ein empirisches Produkt des Verstandes möglich machen.

 

Vorläufige Erinnerung

 

Die Deduktion der Kategorien ist mit so viel Schwierigkeiten verbunden, und nötigt, so tief in die ersten Gründe der Möglichkeit unserer Erkenntnis überhaupt einzudringen, daß ich, um die Weitläufigkeit einer vollständigen Theorie zu vermeiden, und dennoch, bei einer so notwendigen Untersuchung, nichts zu versäumen, es ratsamer gefunden habe, durch folgende vier Nummern den Leser mehr vorzubereiten, als zu unterrichten; und im nächstfolgenden dritten Abschnitte, die Erörterung dieser Elemente des Verstandes allererst systematisch vorzustellen. Um deswillen wird sich der Leser bis dahin die Dunkelheit nicht abwendig machen lassen, die auf einem Wege, der noch ganz unbetreten ist, anfänglich unvermeidlich ist, sich aber, wie ich hoffe, in gedachtem Abschnitte zur vollständigen Einsicht aufklären soll.

 

1. Von der Synthesis der Apprehension in der Anschauung

 

Unsere Vorstellungen mögen entspringen, woher sie wollen, ob sie durch den Einfluß äußerer Dinge, oder durch innere Ursachen gewirkt seien, sie mögen a priori, oder empirisch als Erscheinungen entstanden sein; so gehören sie doch als Modifikationen des Gemüts zum inneren Sinn, und als solche sind alle unsere Erkenntnisse zuletzt doch der formalen Bedingung des inneren Sinnes, nämlich der Zeit unterworfen, als in welcher sie insgesamt geordnet, verknüpft und in Verhältnisse gebracht werden müssen. Dieses ist eine allgemeine Anmerkung, die man bei dem Folgenden durchaus zum Grunde legen muß.

Jede Anschauung enthält ein Mannigfaltiges in sich, welches doch nicht als ein solches vorgestellt werden würde, wenn das Gemüt nicht die Zeit, in der Folge der Eindrücke aufeinander unterschiede: denn als in einem Augenblick enthalten, kann jede Vorstellung niemals etwas anderes, als absolute Einheit sein. Damit nun aus diesem Mannigfaltigen Einheit der Anschauung werde, (wie etwa in der Vorstellung des Raumes) so ist erstlich das Durchlaufen der Mannigfaltigkeit und dann die Zusammennehmung desselben notwendig, welche Handlung ich die Synthesis der Apprehension nenne, weil sie geradezu auf die Anschauung gerichtet ist, die zwar ein Mannigfaltiges darbietet, dieses aber als ein solches, und zwar in einer Vorstellung enthalten, niemals ohne eine dabei vorkommende Synthesis bewirken kann.

Diese Synthesis der Apprehension muß nun auch a priori, d.i. in Ansehung der Vorstellungen, die nicht empirisch sind, ausgeübt werden. Denn ohne sie würden wir weder die Vorstellungen des Raumes, noch der Zeit a priori haben können: da diese nur durch die Synthesis des Mannigfaltigen, welches die Sinnlichkeit in ihrer ursprünglichen Rezeptivität darbietet, erzeugt werden können. Also haben wir eine reine Synthesis der Apprehension.

 

2. Von der Synthesis der Reproduktion in der Einbildung

 

Es ist zwar ein bloß empirisches Gesetz, nach welchem Vorstellungen, die sich oft gefolgt oder begleitet haben, miteinander endlich vergesellschaften, und dadurch in eine Verknüpfung setzen, nach welcher, auch ohne die Gegenwart des Gegenstandes, eine dieser Vorstellungen einen Übergang des Gemüts zu der anderen, nach einer beständigen Regel, hervorbringt. Dieses Gesetz der Reproduktion setzt aber voraus: daß die Erscheinungen selbst wirklich einer solchen Regel unterworfen seien, und daß in dem Mannigfaltigen ihrer Vorstellungen eine, gewissen Regeln gemäße, Begleitung, oder Folge stattfinde; denn ohne das würde unsere empirische Einbildungskraft niemals etwas ihrem Vermögen Gemäßes zu tun bekommen, also, wie ein totes und uns selbst unbekanntes Vermögen im Innern des Gemüts verborgen bleiben. Würde der Zinnober bald rot, bald schwarz, bald leicht, bald schwer sein, ein Mensch bald in diese, bald in jene tierische Gestalt verändert werden, am längsten Tage bald das Land mit Früchten, bald mit Eis und Schnee bedeckt sein, so könnte meine empirische Einbildungskraft nicht einmal Gelegenheit bekommen, bei der Vorstellung der roten Farbe den schweren Zinnober in die Gedanken zu bekommen, oder würde ein gewisses Wort bald diesem, bald jenem Dinge beigelegt, oder auch eben dasselbe Ding bald so bald anders benannt, ohne daß hierin eine gewisse Regel, der die Erscheinungen schon von selbst unterworfen sind, herrschte, so könnte keine empirische Synthesis der Reproduktion stattfinden.

Es muß also etwas sein, was selbst diese Reproduktion der Erscheinungen möglich macht, dadurch, daß es der Grund a priori einer notwendigen synthetischen Einheit derselben ist. Hierauf aber kommt man bald, wenn man sich besinnt, daß Erscheinungen nicht Dinge an sich selbst, sondern das bloße Spiel unserer Vorstellungen sind, die am Ende auf Bestimmungen des inneren Sinnes auslaufen. Wenn wir nun dartun können, daß selbst unsere reinsten Anschauungen a priori keine Erkenntnis verschaffen, außer, sofern sie eine solche Verbindung des Mannigfaltigen enthalten, die eine durchgängige Synthesis der Reproduktion möglich macht, so ist diese Synthesis der Einbildungskraft auch vor aller Erfahrung auf Prinzipien a priori gegründet, und man muß eine reine transzendentale Synthesis derselben annehmen, die selbst der Möglichkeit aller Erfahrung, (als welche die Reproduzibilität der Erscheinungen notwendig voraussetzt) zum Grunde liege. Nun ist offenbar, daß, wenn ich eine Linie in Gedanken ziehe, oder die Zeit von einem Mittag zum andern denken, oder auch nur eine gewisse Zahl mir vorstellen will, ich erstlich notwendig eine dieser mannigfaltigen Vorstellungen nach der anderen in Gedanken fassen müsse. Würde ich aber die vorhergehende (die ersten Teile der Linie, die vorhergehenden Teile der Zeit, oder die nacheinander vorgestellten Einheiten) immer aus den Gedanken verlieren, und sie nicht reproduzieren, indem ich zu den folgenden fortgehe, so würde niemals eine ganze Vorstellung, und keiner aller vorgenannten Gedanken, ja gar nicht einmal die reinsten und ersten Grundvorstellungen von Raum und Zeit entspringen können.

Die Synthesis der Apprehension ist also mit der Synthesis der Reproduktion unzertrennlich verbunden. Und da jene den transzendentalen Grund der Möglichkeit aller Erkenntnisse überhaupt (nicht bloß der empirischen, sondern auch der reinen a priori) ausmacht, so gehört die reproduktive Synthesis der Einbildungskraft zu den transzendentalen Handlungen des Gemüts und in Rücksicht auf dieselbe, wollen wir dieses Vermögen auch das transzendentale Vermögen der Einbildungskraft nennen.

 

3. Von der Synthesis der Rekognition im Begriffe

Ohne Bewußtsein, daß das, was wir denken, eben dasselbe sei, was wir einen Augenblick zuvor dachten, würde alle Reproduktion in der Reihe der Vorstellungen vergeblich sein. Denn es wäre eine neue Vorstellung im jetzigen Zustande, die zu dem Aktus, wodurch sie nach und nach hat erzeugt werden sollen, gar nicht gehörte, und das Mannigfaltige derselben würde immer kein Ganzes ausmachen, weil es der Einheit ermangelte, die ihm nur das Bewußtsein verschaffen kann. Vergesse ich im Zählen: daß die Einheiten, die mir jetzt vor Sinnen schweben, nach und nach zueinander von mir hinzugetan worden sind, so würde ich die Erzeugung der Menge, durch diese sukzessive Hinzutuung von Einem zu Einem, mithin auch nicht die Zahl erkennen; denn dieser Begriff besteht lediglich in dem Bewußtsein dieser Einheit der Synthesis.

Das Wort Begriff könnte uns schon von selbst zu dieser Bemerkung Anleitung geben. Denn dieses eine Bewußtsein ist es, was das Mannigfaltige, nach und nach Angeschaute, und dann auch Reproduzierte, in eine Vorstellung vereinigt. Dieses Bewußtsein kann oft nur schwach sein, so daß wir es nur in der Wirkung, nicht aber in dem Aktus selbst, d.i. unmittelbar mit der Erzeugung der Vorstellung verknüpfen: aber unerachtet dieser Unterschiede muß doch immer ein Bewußtsein angetroffen werden, wenn ihm gleich die hervorstechende Klarheit mangelt, und ohne dasselbe sind Begriffe, und mit ihnen Erkenntnis von Gegenständen ganz unmöglich.

Und hier ist es denn notwendig, sich darüber verständlich zu machen, was man denn unter dem Ausdruck eines Gegenstandes der Vorstellungen meine. Wir haben oben gesagt: daß Erscheinungen selbst nichts als sinnliche Vorstellungen sind, die an sich, in eben derselben Art, nicht als Gegenstände (außer der Vorstellungskraft) müssen angesehen werden. Was versteht man denn, wenn man von einem der Erkenntnis korrespondierenden, mithin auch davon unterschiedenen, Gegenstand redet? Es ist leicht einzusehen, daß dieser Gegenstand nur als etwas überhaupt = X müsse gedacht werden, weil wir außer unserer Erkenntnis doch nichts haben, welches wir dieser Erkenntnis als korrespondierend gegenübersetzen könnten.

Wir finden aber, daß unser Gedanke von der Beziehung aller Erkenntnis auf ihren Gegenstand etwas von Notwendigkeit bei sich führe, da nämlich dieser als dasjenige angesehen wird, was dawider ist, daß unsere Erkenntnisse nicht aufs Geratewohl, oder beliebig, sondern a priori auf gewisse Weise bestimmt seien, weil, indem sie sich auf einen Gegenstand beziehen sollen, sie auch notwendigerweise in Beziehung auf diesen untereinander übereinstimmen, d.i. diejenige Einheit haben müssen, welche den Begriff von einem Gegenstande ausmacht.

Es ist aber klar, daß, da wir es nur mit dem Mannigfaltigen unserer Vorstellungen zu tun haben, und jenes X, was ihnen korrespondiert (der Gegenstand), weil er etwas von allen unsern Vorstellungen Unterschiedenes sein soll, für uns nichts ist, die Einheit, welche der Gegenstand notwendig macht, nichts anderes sein könne, als die normale Einheit des Bewußtseins in der Synthesis des Mannigfaltigen der Vorstellungen. Alsdann sagen wir: wir erkennen den Gegenstand, wenn wir in dem Mannigfaltigen der Anschauung synthetische Einheit bewirkt haben. Diese ist aber unmöglich, wenn die Anschauung nicht durch eine solche Funktion der Synthesis nach einer Regel hat hervorgebracht werden können, welche die Reproduktion des Mannigfaltigen a priori notwendig und einen Begriff, in welchem dieses sich vereinigt, möglich macht. So denken wir uns einen Triangel als Gegenstand, indem wir uns der Zusammensetzung von drei geraden Linien nach einer Regel bewußt sind, nach welcher eine solche Anschauung jederzeit dargestellt werden kann. Diese Einheit der Regel bestimmt nun alles Mannigfaltige, und schränkt es auf Bedingungen ein, welche die Einheit der Apperzeption möglich machen, und der Begriff dieser Einheit ist die Vorstellung vom Gegenstande = X, den ich durch die gedachten Prädikate eines Triangels denke.

Alles Erkenntnis erfordert einen Begriff, dieser mag nun so unvollkommen, oder so dunkel sein, wie er wolle: dieser aber ist seiner Form nach jederzeit etwas Allgemeines, und was zur Regel dient. So dient der Begriff vom Körper nach der Einheit des Mannigfaltigen, welches durch ihn gedacht wird, unserer Erkenntnis äußerer Erscheinungen zur Regel. Eine Regel der Anschauungen kann er aber nur dadurch sein: daß er bei gegebenen Erscheinungen die notwendige Reproduktion des Mannigfaltigen derselben, mithin die synthetische Einheit in ihrem Bewußtsein, vorstellt. So macht der Begriff des Körpers, bei der Wahrnehmung von etwas außer uns, die Vorstellung der Ausdehnung, und mit ihr die der Undurchdringlichkeit, der Gestalt usw. notwendig.

Aller Notwendigkeit liegt jederzeit eine transzendentale Bedingung zum Grunde. Also muß ein transzendentaler Grund der Einheit des Bewußtseins, in der Synthesis des Mannigfaltigen aller unserer Anschauungen, mithin auch, der Begriffe der Objekte überhaupt, folglich auch aller Gegenstände, der Erfahrung, angetroffen werden, ohne welchen es unmöglich wäre, zu unseren Anschauungen irgendeinen Gegenstand zu denken: denn dieser ist nichts mehr, als das Etwas, davon der Begriff eine solche Notwendigkeit der Synthesis ausdrückt.

Diese ursprüngliche und transzendentale Bedingung ist nun keine andere, als die transzendentale Apperzeption. Das Bewußtsein seiner selbst, nach den Bestimmungen unseres Zustandes, bei der inneren Wahrnehmung ist bloß empirisch, jederzeit wandelbar, es kann kein stehendes oder bleibendes Selbst in diesem Flusse innerer Erscheinungen geben, und wird gewöhnlich der innere Sinn genannt, oder die empirische Apperzeption. Das was notwendig als numerisch identisch vorgestellt werden soll, kann nicht als ein solches durch empirische Data gedacht werden. Es muß eine Bedingung sein, die vor aller Erfahrung vorhergeht, und diese selbst möglich macht, welche eine solche transzendentale Voraussetzung geltend machen soll.

Nun können keine Erkenntnisse in uns stattfinden, keine Verknüpfung und Einheit derselben untereinander, ohne diejenige Einheit des Bewußtseins, welche vor allen Datis der Anschauungen vorhergeht, und, worauf in Beziehung, alle Vorstellung von Gegenständen allein möglich ist. Dieses reine ursprüngliche, unwandelbare Bewußtsein will ich nun die transzendentale Apperzeption nennen. Daß sie diesen Namen verdiene, erhellt schon daraus: daß selbst die reinste objektive Einheit, nämlich die der Begriffe a priori (Raum und Zeit) nur durch Beziehung der Anschauungen auf sie möglich sein. Die numerische Einheit dieser Apperzeption liegt also a priori allen Begriffen ebensowohl zum Grunde, als die Mannigfaltigkeit des Raumes und der Zeit den Anschauungen der Sinnlichkeit.

Eben diese transzendentale Einheit der Apperzeption macht aber aus allen möglichen Erscheinungen, die immer in einer Erfahrung beisammen sein können, einen Zusammenhang aller dieser Vorstellungen nach Gesetzen. Denn diese Einheit des Bewußtseins wäre unmöglich, wenn nicht das Gemüt in der Erkenntnis des Mannigfaltigen sich der Identität der Funktion bewußt werden könnte, wodurch sie dasselbe synthetisch in einer Erkenntnis verbindet. Also ist das ursprüngliche und notwendige Bewußtsein der Identität seiner selbst zugleich ein Bewußtsein einer ebenso notwendigen Einheit der Synthesis aller Erscheinungen nach Begriffen, d.i. nach Regeln, die sie nicht allein notwendig reproduzibel machen, sondern dadurch auch ihrer Anschauung einen Gegenstand bestimmen, d.i. den Begriff von etwas, darin sie notwendig zusammenhängen: denn das Gemüt konnte sich unmöglich die Identität seiner selbst in der Mannigfaltigkeit seiner Vorstellungen und zwar a priori denken, wenn es nicht die Identität seiner Handlung vor Augen hätte, welche alle Synthesis der Apprehension (die empirisch ist) einer transzendentalen Einheit unterwirft, und ihren Zusammenhang nach Regeln a priori zuerst möglich macht. Nunmehro werden wir auch unsere Begriffe von einem Gegenstande überhaupt richtiger bestimmen können. Alle Vorstellungen haben, als Vorstellungen, ihren Gegenstand, und können selbst wiederum Gegenstände anderer Vorstellungen sein. Erscheinungen sind die einzigen Gegenstände, die uns unmittelbar gegeben werden können, und das, was sich darin unmittelbar auf den Gegenstand bezieht, heißt Anschauung. Nun sind aber diese Erscheinungen nicht Dinge an sich selbst, sondern selbst nur Vorstellungen, die wiederum ihren Gegenstand haben, der also von uns nicht mehr angeschaut werden kann, und daher der nichtempirische, d.i. transzendentale Gegenstand = X genannt werden mag.

Der reine Begriff von diesem transzendentalen Gegenstande, (der wirklich bei allen unsern Erkenntnissen immer einerlei = X ist,) ist das, was in allen unseren empirischen Begriffen überhaupt Beziehung auf einen Gegenstand, d.i. objektive Realität verschaffen kann. Dieser Begriff kann nun gar keine bestimmte Anschauung enthalten, und wird also nichts anderes, als diejenige Einheit betreffen, die in einem Mannigfaltigen der Erkenntnis angetroffen werden muß, sofern es in Beziehung auf einen Gegenstand steht. Diese Beziehung aber ist nichts anderes, als die notwendige Einheit des Bewußtseins, mithin auch der Synthesis des Mannigfaltigen durch gemeinschaftliche Funktion des Gemüts, es in einer Vorstellung zu verbinden. Da nun diese Einheit als a priori notwendig angesehen werden muß, (weil die Erkenntnis sonst ohne Gegenstand sein würde) so wird die Beziehung auf einen transzendentalen Gegenstand d.i. die objektive Realität unserer empirischen Erkenntnis, auf dem transzendentalen Gesetze beruhen, daß alle Erscheinungen, sofern uns dadurch Gegenstände gegeben werden sollen, unter Regeln a priori der synthetischen Einheit derselben stehen müssen, nach welchen ihr Verhältnis in der empirischen Anschauung allein möglich ist, d.i. daß sie ebensowohl in der Erfahrung unter Bedingungen der notwendigen Einheit der Apperzeption, als in der bloßen Anschauung unter den formalen Bedingungen des Raumes und der Zeit stehen müssen, ja daß durch jene jede Erkenntnis allererst möglich werde.

 

4. Vorläufige Erklärung der Möglichkeit der Kategorien, als Erkenntnissen a priori

 

Es ist nur eine Erfahrung, in welcher alle Wahrnehmungen als im durchgängigen und gesetzmäßigen Zusammenhange vorgestellt werden: ebenso, wie nur ein Raum und Zeit ist, in welcher alle Formen der Erscheinung und alles Verhältnis des Seins oder Nichtseins stattfinden. Wenn man von verschiedenen Erfahrungen spricht, so sind es nur so viel Wahrnehmungen, sofern solche zu einer und derselben allgemeinen Erfahrung gehören. Die durchgängige und synthetische Einheit der Wahrnehmungen macht nämlich gerade die Form der Erfahrung aus, und sie ist nichts anderes, als die synthetische Einheit der Erscheinungen nach Begriffen.

Einheit der Synthesis nach empirischen Begriffen würde ganz zufällig sein und, gründeten diese sich nicht auf einen transzendentalen Grund der Einheit, so würde es möglich sein, daß ein Gewühle von Erscheinungen unsere Seele anfüllte, ohne daß doch daraus jemals Erfahrung werden könnte. Alsdann fiele aber auch alle Beziehung der Erkenntnis auf Gegenstände weg, weil ihr die Verknüpfung nach allgemeinen und notwendigen Gesetzen mangelte, mithin würde sie zwar gedankenlose Anschauung, aber niemals Erkenntnis, also für uns soviel als gar nichts sein.

Die Bedingungen a priori einer möglichen Erfahrung überhaupt sind zugleich Bedingungen der Möglichkeit der Gegenstände der Erfahrung. Nun behaupte ich: die eben angeführten Kategorien sind nichts anderes, als die Bedingungen des Denkens in einer möglichen Erfahrung, sowie Raum und Zeit die Bedingungen der Anschauung zu eben derselben enthalten. Also sind jene auch Grundbegriffe, Objekte überhaupt zu den Erscheinungen zu denken, und haben also a priori objektive Gültigkeit; welches dasjenige war, was wir eigentlich wissen wollten.

Die Möglichkeit aber, ja sogar die Notwendigkeit dieser Kategorien beruht auf der Beziehung, welche die gesamte Sinnlichkeit, und mit ihr auch alle möglichen Erscheinungen, auf die ursprüngliche Apperzeption haben, in welcher alles notwendig den Bedingungen der durchgängigen Einheit des Selbstbewußtseins gemäß sein, d.i. unter allgemeinen Funktionen der Synthesis stehen muß, nämlich der Synthesis nach Begriffen, als worin die Apperzeption allein ihre durchgängige und notwendige Identität a priori beweisen kann. So ist der Begriff einer Ursache nichts anderes, als eine Synthesis (dessen, was in der Zeitreihe folgt, mit anderen Erscheinungen,) nach Begriffen, und ohne dergleichen Einheit, die ihre Regel a priori hat, und die Erscheinungen sich unterwirft, würde durchgängige und allgemeine, mithin notwendige Einheit des Bewußtseins, in dem Mannigfaltigen der Wahrnehmungen, nicht angetroffen werden. Diese würden aber alsdann auch zu keiner Erfahrung gehören, folglich ohne Objekt, und nichts als ein blinden Spiel der Vorstellungen, d.i. weniger, als ein Traum sein.

Alle Versuche, jene reinen Verstandesbegriffe von der Erfahrung abzuleiten, und ihnen einen bloß empirischen Ursprung zuzuschreiben, sind also ganz eitel und vergeblich. Ich will davon nichts erwähnen, daß z.E. der Begriff einer Ursache den Zug von Notwendigkeit bei sich führt, welche gar keine Erfahrung geben kann, die uns zwar lehrt: daß auf eine Erscheinung gewöhnlichermaßen etwas anderes folge, aber nicht, daß es notwendig darauf folgen müsse, noch daß a priori und ganz allgemein daraus als einer Bedingung auf die Folge könne geschlossen werden. Aber jene empirische Regel der Assoziation, die man doch durchgängig annehmen muß, wenn man sagt: daß alles in der Reihenfolge der Begebenheiten dermaßen unter Regeln stehe, daß niemals etwas geschieht, vor welchem nicht etwas vorhergehe, darauf es jederzeit folge: dieses, als ein Gesetz der Natur, worauf beruht es, frage ich? und wie ist selbst diese Assoziation möglich? Der Grund der Möglichkeit der Assoziation des Mannigfaltigen, sofern es im Objekte liegt, heißt die Affinität des Mannigfaltigen. Ich frage also, wie macht ihr euch die durchgängige Affinität der Erscheinungen, (dadurch sie unter beständigen Gesetzen stehen, und darunter gehören müssen,) begreiflich?

Nach meinen Grundsätzen ist sie sehr wohl begreiflich. Alle möglichen Erscheinungen gehören, als Vorstellungen, zu dem ganzen möglichen Selbstbewußtsein. Von diesem aber, als einer transzendentalen Vorstellung, ist die numerische Identität unzertrennlich, und a priori gewiß, weil nichts in das Erkenntnis kommen kann, ohne vermittels dieser ursprünglichen Apperzeption. Da nun diese Identität notwendig in der Synthesis alles Mannigfaltigen der Erscheinungen, sofern sie empirische Erkenntnis werden soll, hineinkommen muß, so sind die Erscheinungen Bedingungen a priori unterworfen, welchen ihre Synthesis (der Apprehension) durchgängig gemäß sein muß. Nun heißt aber die Vorstellung einer allgemeinen Bedingung, nach welcher ein gewisses Mannigfaltige, (mithin auf einerlei Art) gesetzt werden kann, eine Regel, und wenn es so gesetzt werden muß, ein Gesetz. Also stehen alle Erscheinungen in einer durchgängigen Verknüpfung nach notwendigen Gesetzen, und mithin in einer transzendentalen Affinität, woraus die empirische die bloße Folge ist.

Daß die Natur sich nach unserem subjektiven Grunde der Apperzeption richten, ja gar davon in Ansehung ihrer Gesetzmäßigkeit abhängen solle, lautet wohl sehr widersinnig und befremdlich. Bedenkt man aber, daß diese Natur an sich nichts als ein Inbegriff von Erscheinungen, mithin kein Ding an sich, sondern bloß eine Menge von Vorstellungen des Gemüts sei, so wird man sich nicht wundern, sie bloß in dem Radikalvermögen aller unserer Erkenntnis, nämlich der transzendentalen Apperzeption, in derjenigen Einheit zu sehen, um derentwillen allein sie Objekt aller möglichen Erfahrung, d.i. Natur heißen kann; und daß wir auch eben darum diese Einheit a priori, mithin auch als notwendig erkennen können, welches wir wohl müßten unterwegs lassen, wäre sie unabhängig von den ersten Quellen unseres Denkens an sich gegeben. Denn da wüßte ich nicht, wo wir die synthetischen Sätze einer solchen allgemeinen Natureinheit hernehmen sollten, weil man sie auf solchen Fall von den Gegenständen der Natur selbst entlehnen müßte. Da dieses aber nur empirisch geschehen könnte: so würde daraus keine andere, als bloß zufällige Einheit gezogen werden können, die aber bei weitem an den notwendigen Zusammenhang nicht reicht, den man meint, wenn man Natur nennt.

 

 

 

Der Deduktion der reinen Verstandesbegriffe

 

Dritter Abschnitt

 

Von dem Verhältnisse des Verstandes zu Gegenständen überhaupt und der Möglichkeit diese a priori zu erkennen

 

Was wir im vorigen Abschnitte abgesondert und einzeln vortrugen, wollen wir jetzt vereinigt und im Zusammenhange vorstellen. Es sind drei subjektive Erkenntnisquellen, worauf die Möglichkeit einer Erfahrung überhaupt, und Erkenntnis der Gegenstände derselben beruht: Sinn, Einbildungskraft und Apperzeption; jede derselben kann als empirisch, nämlich in der Anwendung auf gegebene Erscheinungen betrachtet werden, alle aber sind auch Elemente oder Grundlagen a priori, welche selbst diesen empirischen Gebrauch möglich machen. Der Sinn stellt die Erscheinungen empirisch in der Wahrnehmung vor, die Einbildungskraft in der Assoziation (und Reproduktion), die Apperzeption in dem empirischen Bewußtsein der Identität dieser reproduktiven Vorstellungen mit den Erscheinungen, dadurch sie gegeben waren, mithin in der Rekognition.

Es liegt aber der sämtlichen Wahrnehmung die reine Anschauung (in Ansehung ihrer als Vorstellungen die Form der inneren Anschauung, die Zeit,) der Assoziation die reine Synthesis der Einbildungskraft, und dein empirischen Bewußtsein die reine Apperzeption, d.i. die durchgängige Identität seiner selbst bei allen möglichen Vorstellungen, a priori zum Grunde.

Wollen wir nun den inneren Grund dieser Verknüpfung der Vorstellungen bis auf denjenigen Punkt verfolgen, in welchem sie alle zusammenlaufen müssen, um darin allererst Einheit der Erkenntnis zu einer möglichen Erfahrung zu bekommen, so müssen wir von der reinen Apperzeption anfangen. Alle Anschauungen sind für uns nichts, und gehen uns nicht im mindesten etwas an, wenn sie nicht ins Bewußtsein aufgenommen werden können, sie mögen nun direkt oder indirekt darauf einfließen, und nur durch dieses allein ist Erkenntnis möglich. Wir sind uns a priori der durchgängigen Identität unserer selbst in Ansehung aller Vorstellungen, die zu unserem Erkenntnis jemals gehören können, bewußt, als einer notwendigen Bedingung der Möglichkeit aller Vorstellungen, (weil diese in mir doch nur dadurch etwas vorstellen, daß sie mit allem anderen zu einem Bewußtsein gehören, mithin darin wenigstens müssen verknüpft werden können). Dies Prinzip steht a priori fest, und kann das transzendentale Prinzip der Einheit alles Mannigfaltigen unserer Vorstellungen (mithin auch in der Anschauung), heißen. Nun ist die Einheit des Mannigfaltigen in einem Subjekt synthetisch: also gibt die reine Apperzeption ein Prinzipium der synthetischen Einheit des Mannigfaltigen in aller möglichen Anschauung an die Hand*.

* Man gebe auf diesen Satz wohl acht, der von großer Wichtigkeit ist. Alle Vorstellungen haben eine notwendige Beziehung auf ein mögliches empirisches Bewußtsein: denn hätten sie dieses nicht, und wäre es gänzlich unmöglich, sich ihrer bewußt zu werden; so würde das soviel sagen, sie existierten gar nicht. Alles empirische Bewußtsein hat aber eine notwendige Beziehung auf ein transzendentales (vor aller besondern Erfahrung vorhergehendes) Bewußtsein, nämlich das Bewußtsein meiner selbst, als die ursprüngliche Apperzeption. Es ist also schlechthin notwendig, daß in meinem Erkenntnisse alles Bewußtsein zu einem Bewußtsein (meiner selbst) gehöre. Hier ist nun eine synthetische Einheit des Mannigfaltigen, (Bewußtseins) die a priori erkannt wird, und gerade so den Grund zu synthetischen Sätzen a priori, die das reine Denken betreffen, als Raum und Zeit zu solchen Sätzen, die die Form der bloßen Anschauung angehen, abgibt. Der synthetische Satz: daß alles verschiedene empirische Bewußtsein in einem einigen Selbstbewußtsein verbunden sein müsse, ist der schlechthin erste und synthetische Grundsatz unseres Denkens überhaupt. Es ist aber nicht aus der Acht zu lassen, daß die bloße Vorstellung Ich in Beziehung auf alle anderen (deren kollektive Einheit sie möglich macht) das transzendentale Bewußtsein sei. Diese Vorstellung mag nun klar (empirisches Bewußtsein) oder dunkel sein, daran liegt hier nichts, ja nicht einmal an der Wirklichkeit desselben; sondern die Möglichkeit der logischen Form alles Erkenntnisses beruht notwendig auf dem Verhältnis zu dieser Apperzeption als einem Vermögen.

Diese synthetische Einheit setzt aber eine Synthesis voraus, oder schließt sie ein, und soll jene a priori notwendig sein, so muß letztere auch eine Synthesis a priori sein. Also bezieht sich die transzendentale Einheit der Apperzeption auf die reine Synthesis der Einbildungskraft, als eine Bedingung a priori der Möglichkeit aller Zusammensetzung des Mannigfaltigen in einer Erkenntnis. Es kann aber nur die produktive Synthesis der Einbildungskraft a priori stattfinden, denn die reproduktive beruht auf Bedingungen der Erfahrung. Also ist das Prinzipium der notwendigen Einheit der reinen (produktiven) Synthesis der Einbildungskraft vor der Apperzeption der Grund der Möglichkeit aller Erkenntnis, besonders der Erfahrung.

Nun nennen wir die Synthesis des Mannigfaltigen in der Einbildungskraft transzendental, wenn ohne Unterschied der Anschauungen sie auf nichts, als bloß auf die Verbindung des Mannigfaltigen a priori geht, und die Einheit dieser Synthesis heißt transzendental, wenn sie in Beziehung auf die ursprüngliche Einheit der Apperzeption, als a priori notwendig vorgestellt wird. Da diese letztere nun der Möglichkeit aller Erkenntnisse zum Grunde liegt, so ist die transzendentale Einheit der Synthesis der Einbildungskraft die reine Form aller möglichen Erkenntnis, durch welche mithin alle Gegenstände möglicher Erfahrung a priori vorgestellt werden müssen.

Die Einheit der Apperzeption in Beziehung auf die Synthesis der Einbildungskraft ist der Verstand, und eben dieselbe Einheit, beziehungsweise auf die transzendentale Synthesis der Einbildungskraft, der reine Verstand. Also sind im Verstande reine Erkenntnisse a priori, welche die notwendige Einheit der reinen Synthesis der Einbildungskraft, in Ansehung aller möglichen Erscheinungen, enthalten. Dieses sind aber die Kategorien, d.i. reine Verstandesbegriffe, folglich enthält die empirische Erkenntniskraft des Menschen notwendig einen Verstand, der sich auf alle Gegenstände der Sinne, obgleich nur vermittelst der Anschauung, und der Synthesis derselben durch Einbildungskraft bezieht, unter welchen also alle Erscheinungen, als Data zu einer möglichen Erfahrung stehen. Da nun diese Beziehung der Erscheinungen auf mögliche Erfahrung ebenfalls notwendig ist, (weil wir ohne diese gar keine Erkenntnis durch sie bekommen würden, und sie uns mithin gar nichts angingen) so folgt, daß der reine Verstand, vermittelst der Kategorien, ein formales und synthetischen Prinzipium aller Erfahrungen sei, und die Erscheinungen eine notwendige Beziehung auf den Verstand haben.

Jetzt wollen wir den notwendigen Zusammenhang des Verstandes mit den Erscheinungen vermittelst der Kategorien dadurch vor Augen legen, daß wir von unten auf, nämlich dem Empirischen anfangen. Das Erste, was uns gegeben wird, ist Erscheinung, welche, wenn sie mit Bewußtsein verbunden ist, Wahrnehmung heißt, (ohne das Verhältnis zu einem, wenigstens möglichen Bewußtsein, würde Erscheinung für uns niemals ein Gegenstand der Erkenntnis werden können, und also für uns nichts sein, und weil sie an sich selbst keine objektive Realität hat, und nur im Erkenntnisse existiert, überall nichts sein). Weil aber jede Erscheinung ein Mannigfaltiges enthält, mithin verschiedene Wahrnehmungen im Gemüte an sich zerstreut und einzeln angetroffen werden, so ist eine Verbindung derselben nötig, welche sie in dem Sinne selbst nicht haben können. Es ist also in uns ein tätiges Vermögen der Synthesis dieses Mannigfaltigen, welches wir Einbildungskraft nennen, und deren unmittelbar an den Wahrnehmungen ausgeübte Handlung ich Apprehension nenne*. Die Einbildungskraft soll nämlich das Mannigfaltige der Anschauung in ein Bild bringen, vorher muß sie also die Eindrücke in ihre Tätigkeit aufnehmen, d.i. apprehendieren.

 

* Daß die Einbildungskraft ein notwendiges Ingredienz der Wahrnehmung selbst sei, daran hat wohl noch kein Psychologe gedacht. Das kommt daher, weil man dieses Vermögen teils nur auf Reproduktionen einschränkte, teils, weil man glaubte, die Sinne lieferten uns nicht allein Eindrücke, sondern setzten solche auch sogar zusammen, und brächten Bilder der Gegenstände zuwege, wozu ohne Zweifel außer der Empfänglichkeit der Eindrücke, noch etwas mehr, nämlich eine Funktion der Synthesis derselben erfordert wird.

Es ist aber klar, daß selbst diese Apprehension des Mannigfaltigen allein noch kein Bild und keinen Zusammenhang der Eindrücke hervorbringen würde, wenn nicht ein subjektiver Grund da wäre, eine Wahrnehmung, von welcher das Gemüt zu einer anderen übergegangen, zu den nachfolgenden herüberzurufen, und so ganze Reihen derselben darzustellen, d.i. ein reproduktives Vermögen der Einbildungskraft, welches denn auch nur empirisch ist.

Weil aber, wenn Vorstellungen, sowie sie zusammengeraten, einander ohne Unterschied reproduzierten, wiederum kein bestimmter Zusammenhang derselben, sondern bloß regellose Haufen derselben, mithin gar kein Erkenntnis entspringen würde, so muß die Reproduktion derselben eine Regel haben, nach welcher eine Vorstellung vielmehr mit dieser, als einer anderen in der Einbildungskraft in Verbindung tritt. Diesen subjektiven und empirischen Grund der Reproduktion nach Regeln nennt man die Assoziation der Vorstellungen.

Würde nun aber diese Einheit der Assoziation nicht auch einen objektiven Grund haben, so daß es unmöglich wäre, daß Erscheinungen von der Einbildungskraft anders apprehendiert würden, als unter der Bedingung einer möglichen synthetischen Einheit dieser Apprehension, so würde es auch etwas ganz Zufälliges sein, daß sich Erscheinungen in einen Zusammenhang der menschlichen Erkenntnisse schickten. Denn, ob wir gleich das Vermögen hätten, Wahrnehmungen zu assoziieren, so bliebe es doch an sich ganz unbestimmt und zufällig, ob sie auch assoziabel wären; und in dem Falle, daß sie es nicht wären, so würde eine Menge Wahrnehmungen, und auch wohl eine ganze Sinnlichkeit möglich sein, in welcher viel empirisches Bewußtsein in meinem Gemüte anzutreffen wäre, aber getrennt, und ohne daß es zu einem Bewußtsein meiner selbst gehörte, welches aber unmöglich ist. Denn nur dadurch, daß ich alle Wahrnehmungen zu einem Bewußtsein (der ursprünglichen Apperzeption) zähle, kann ich bei allen Wahrnehmungen sagen: daß ich mir ihrer bewußt sei. Es muß also ein objektiver, d.i. vor allen empirischen Gesetzen der Einbildungskraft a priori einzusehender Grund sein, worauf die Möglichkeit, ja sogar die Notwendigkeit eines durch alle Erscheinungen sich erstreckenden Gesetzes beruht, sie nämlich durchgängig als solche Data der Sinne, anzusehen, welche an sich assoziabel, und allgemeinen Regeln einer durchgängigen Verknüpfung in der Reproduktion unterworfen sind. Diesen objektiven Grund aller Assoziation der Erscheinungen nenne ich die Affinität derselben. Diesen können wir aber nirgends anders, als in dem Grundsatze von der Einheit der Apperzeption, in Ansehung aller Erkenntnisse, die mir angehören sollen, antreffen. Nach diesem müssen durchaus alle Erscheinungen, so ins Gemüt kommen, oder apprehendiert werden, daß sie zur Einheit der Apperzeption zusammenstimmen, welches, ohne synthetische Einheit in ihrer Verknüpfung, die mithin auch objektiv notwendig ist, unmöglich sein würde.

Die objektive Einheit alles (empirischen) Bewußtseins in einem

Bewußtsein (der ursprünglichen Apperzeption) ist also die notwendige

Bedingung sogar aller möglichen Wahrnehmung, und die Affinität aller

Erscheinungen (nahe, oder entfernte) ist eine notwendige Folge einer

Synthesis in der Einbildungskraft, die a priori auf Regeln gegründet

ist.

Die Einbildungskraft ist also auch ein Vermögen einer Synthesis a priori, weswegen wir ihr den Namen der produktiven Einbildungskraft geben, und, sofern sie in Ansehung alles Mannigfaltigen der Erscheinung nichts weiter, als die notwendige Einheit in der Synthesis derselben zu ihrer Absicht hat, kann diese die transzendentale Funktion der Einbildungskraft genannt werden. Es ist daher zwar befremdlich, allein aus dem bisherigen doch einleuchtend, daß nur vermittelst dieser transzendentalen Funktion der Einbildungskraft, sogar die Affinität der Erscheinungen, mit ihr die Assoziation und durch diese endlich die Reproduktion nach Gesetzen, folglich die Erfahrung selbst möglich werde: weil ohne sie gar keine Begriffe von Gegenständen in eine Erfahrung zusammenfließen würden.

Denn das stehende und bleibende Ich (der reinen Apperzeption) macht das Korrelat um aller unserer Vorstellungen aus, sofern es bloß möglich ist, sich ihrer bewußt zu werden, und alles Bewußtsein gehört ebensowohl zu einer allbefassenden reinen Apperzeption, wie alle sinnliche Anschauung als Vorstellung zu einer reinen inneren Anschauung, nämlich der Zeit. Diese Apperzeption ist es nun, welche zu der reinen Einbildungskraft hinzukommen muß, um ihre Funktion intellektuell zu machen. Denn an sich selbst ist die Synthesis der Einbildungskraft, obgleich a priori ausgeübt, dennoch jederzeit sinnlich, weil sie das Mannigfaltige nur so verbindet, wie es in der Anschauung erscheint, z.B. die Gestalt eines Triangels. Durch das Verhältnis des Mannigfaltigen aber zur Einheit der Apperzeption werden Begriffe, welche dem Verstande angehören, aber nur vermittelst der Einbildungskraft in Beziehung auf die sinnliche Anschauung zustande kommen können.

Wir haben also eine reine Einbildungskraft, als ein Grundvermögen der menschlichen Seele, das aller Erkenntnis a priori zum Grunde liegt. Vermittelst deren bringen wir das Mannigfaltige der Anschauung einerseits, und mit der Bedingung der notwendigen Einheit der reinen Apperzeption andererseits in Verbindung. Beide äußerste Enden, nämlich Sinnlichkeit und Verstand, müssen vermittelst dieser transzendentalen Funktion der Einbildungskraft notwendig zusammenhängen; weil jene sonst zwar Erscheinungen, aber keine Gegenstände eines empirischen Erkenntnisses, mithin keine Erfahrung geben würden. Die wirkliche Erfahrung, welche aus der Apprehension, der Assoziation, (der Reproduktion,) endlich der Rekognition der Erscheinungen besteht, enthält in der letzteren und höchsten (der bloß empirischen Elemente der Erfahrung) Begriffe, welche die formale Einheit der Erfahrung, und mit ihr alle objektive Gültigkeit (Wahrheit) der empirischen Erkenntnis möglich machen. Diese Gründe der Rekognition des Mannigfaltigen, sofern sie bloß die Form einer Erfahrung überhaupt angehen, sind nun jene Kategorien. Auf ihnen gründet sich also alle normale Einheit in der Synthesis der Einbildungskraft, und vermittelst dieser auch alles empirischen Gebrauchs derselben (in der Rekognition, Reproduktion, Assoziation, Apprehension) bis herunter zu den Erscheinungen, weil diese, nur vermittelst jener Elemente der Erkenntnis und überhaupt unserem Bewußtsein, mithin um selbst angehören können.

Die Ordnung und Regelmäßigkeit also an den Erscheinungen, die wir Natur nennen, bringen wir selbst hinein, und würden sie auch nicht darin finden können, hätten wir sie nicht, oder die Natur unseres Gemüts ursprünglich hineingelegt. Denn diese Natureinheit soll eine notwendige, d.i. a priori gewisse Einheit der Verknüpfung der Erscheinungen sein. Wie sollten wir aber wohl a priori eine synthetische Einheit auf die Bahn bringen können, wären nicht in den ursprünglichen Erkenntnisquellen unseres Gemüts subjektive Gründe solcher Einheit a priori enthalten, und wären diese subjektiven Bedingungen nicht zugleich objektiv gültig, indem sie die Gründe der Möglichkeit sind, überhaupt ein Objekt in der Erfahrung zu erkennen.

Wir haben den Verstand oben auf mancherlei Weise erklärt: durch eine Spontaneität der Erkenntnis, (im Gegensatze der Rezeptivität der Sinnlichkeit) durch ein Vermögen zu denken, oder auch ein Vermögen der Begriffe, oder auch der Urteile, welche Erklärungen, wenn man sie bei Licht besieht, auf eins hinauslaufen. Jetzt können wir ihn als das Vermögen der Regeln charakterisieren. Dieses Kennzeichen ist fruchtbarer und tritt dem Wesen desselben näher. Sinnlichkeit gibt uns Formen, (der Anschauung) der Verstand aber Regeln. Dieser ist jederzeit geschäftig, die Erscheinungen in der Absicht durchzuspähen, um an ihnen irgendeine Regel aufzufinden. Regeln, sofern sie objektiv sind, (mithin der Erkenntnis des Gegenstandes notwendig anhängen) heißen Gesetze. Ob wir gleich durch Erfahrung viel Gesetze lernen, so sind diese doch nur besondere Bestimmungen noch höherer Gesetze, unter denen die höchsten, (unter welchen andere alle stehen) a priori aus dem Verstande selbst herkommen, und nicht von der Erfahrung entlehnt sind, sondern vielmehr den Erscheinungen ihre Gesetzmäßigkeit verschaffen, und eben dadurch Erfahrung möglich machen müssen. Es ist also der Verstand nicht bloß ein Vermögen, durch Vergleichung der Erscheinungen sich Regeln zu machen: er ist selbst die Gesetzgebung für die Natur, d.i. ohne Verstand würde es überall nicht Natur, d.i. synthetische Einheit des Mannigfaltigen der Erscheinungen nach Regeln geben: denn Erscheinungen können, als solche, nicht außer uns stattfinden, sondern existieren nur in unserer Sinnlichkeit. Diese aber, als Gegenstand der Erkenntnis in einer Erfahrung, mit allem, was sie enthalten mag, ist nur in der Einheit der Apperzeption möglich. Die Einheit der Apperzeption aber ist der transzendentale Grund der notwendigen Gesetzmäßigkeit der Erscheinungen in einer Erfahrung. Eben dieselbe Einheit der Apperzeption in Ansehung eines Mannigfaltigen von Vorstellungen (es nämlich aus einer einzigen zu bestimmen) ist die Regel und das Vermögen dieser Regeln der Verstand. Alle Erscheinungen liegen also als mögliche Erfahrungen ebenso a priori im Verstande und erhalten ihre formale Möglichkeit von ihm, wie sie als bloße Anschauungen in der Sinnlichkeit liegen, und durch dieselbe der Form nach, allein möglich sind.

So übertrieben, so widersinnig es also auch lautet, zu sagen: der Verstand ist selbst der Quell der Gesetze der Natur, und mithin der normalen Einheit der Natur, so richtig, und dem Gegenstande, nämlich der Erfahrung angemessen ist gleichwohl eine solche Behauptung. Zwar können empirische Gesetze, als solche, ihren Ursprung keineswegs vom reinen Verstande herleiten, so wenig als die unermeßliche Mannigfaltigkeit der Erscheinungen aus der reinen Form der sinnlichen Anschauung hinlänglich begriffen werden kann. Aber alle empirischen Gesetze sind nur besondere Bestimmungen der reinen Gesetze des Verstandes, unter welchen und nach deren Norm jene allererst möglich sind, und die Erscheinungen eine gesetzliche Form annehmen, sowie auch alle Erscheinungen, unerachtet der Verschiedenheit ihrer empirischen Form, dennoch jederzeit den Bedingungen der reinen Form der Sinnlichkeit gemäß sein müssen.

Der reine Verstand ist also in den Kategorien das Gesetz der synthetischen Einheit aller Erscheinungen, und macht dadurch Erfahrung ihrer Form nach allererst und ursprünglich möglich. Mehr aber hatten wir in der transz. Deduktion der Kategorien nicht zu leisten, als dieses Verhältnis des Verstandes zur Sinnlichkeit, und vermittelst derselben zu allen Gegenständen der Erfahrung, mithin die objektive Gültigkeit seiner reinen Begriffe a priori begreiflich zu machen, und dadurch ihren Ursprung und Wahrheit festzusetzen.

 

Summarische Vorstellung der Richtigkeit und einzigen Möglichkeit dieser Deduktion der reinen Verstandesbegriffe

 

Wären die Gegenstände, womit unsere Erkenntnis zu tun hat, Dinge an sich selbst, so würden wir von diesen gar keine Begriffe a priori haben können. Denn woher sollten wir sie nehmen? Nehmen wir sie vom Objekt (ohne hier noch einmal zu untersuchen, wie dieses uns bekannt werden könnte) so wären unsere Begriffe bloß empirisch, und keine Begriffe a priori. Nehmen wir sie aus uns selbst, kann das, was bloß in uns ist, die Beschaffenheit eines von unseren Vorstellungen unterschiedenen Gegenstandes nicht bestimmen, d.i. ein Grund sein, warum es ein Ding geben solle, dem so etwas, als wir in Gedanken haben, zukomme, und nicht vielmehr alle diese Vorstellung leer sei. Dagegen, wenn wir es überall nur mit Erscheinungen zu tun haben, so ist es nicht allein möglich, sondern auch notwendig, daß gewisse Begriffe a priori vor der empirischen Erkenntnis der Gegenstände vorhergehen. Denn als Erscheinungen machen sie einen Gegenstand aus, der bloß in uns ist, weil eine bloße Modifikation unserer Sinnlichkeit außer uns gar nicht angetroffen wird. Nun drückt selbst diese Vorstellung: daß alle diese Erscheinungen, mithin alle Gegenstände, womit wir uns beschäftigen können, insgesamt in mir, d.i. Bestimmungen meines identischen Selbst sind, eine durchgängige Einheit derselben in einer und derselben Apperzeption als notwendig aus. In dieser Einheit des möglichen Bewußtseins aber besteht auch die Form aller Erkenntnis der Gegenstände, (wodurch das Mannigfaltige, als zu Einem Objekt gehörig, gedacht wird). Also geht die Art, wie das Mannigfaltige der sinnlichen Vorstellung (Anschauung) zu einem Bewußtsein gehört, vor aller Erkenntnis des Gegenstandes, als die intellektuelle Form derselben, vorher, und macht selbst eine formale Erkenntnis aller Gegenstände a priori überhaupt aus, sofern sie gedacht werden (Kategorien). Die Synthesis derselben durch die reine Einbildungskraft, die Einheit aller Vorstellungen in Beziehung auf die ursprüngliche Apperzeption gehen aller empirischen Erkenntnis vor. Reine Verstandesbegriffe sind also nur darum a priori möglich, ja gar, in Beziehung auf Erfahrung, notwendig, weil unser Erkenntnis mit nichts, als Erscheinungen zu tun hat, deren Möglichkeit in uns selbst liegt, deren Verknüpfung und Einheit (in der Vorstellung eines Gegenstandes) bloß in uns angetroffen wird, mithin vor aller Erfahrung vorhergehen, und diese der Form nach auch allererst möglich machen muß. Und aus diesem Grunde, dem einzigmöglichen unter allen, ist dann auch unsere Deduktion der Kategorien geführt worden.

 

 

순수이성비판 개념분석론 2장.hwp

순수이성비판 개념분석론 2장.hwp
0.17M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