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Kant

인공지능 구성의 철학/이초식

이윤진이카루스 2014. 12. 16. 15:03

인공지능 구성의 철학 (1)

- 논리실증주의와 프래그머티즘을 중심으로 -

인공지능의 철학 : 이초식, 고려대 출판부, 1993, Page 64~99

1. 철학의 철학

1-1. 비판철학과 구성철학

1-2. 칸트의 인식론과 현대 과학철학

2. 논리실증주의와 기호처리

3. 형이상학의 구문론적 분석 사례

4. 선험적 인식론과 형식주의

5. 카르납의 인공언어와 형식게임

6. 프래그머티즘과 일반문제해결

7. 퍼스의 상정논법과 가설주의

1. 철학의 철학

인공지능의 가능성을 비판하는 철학과 연결되는 현대철학으로서 실존주의, 현상학, 해석학, 생철학, 일상언어학파 등을 이미 II 장에서 다루었고 인공지능 구성의 철학으로는 I 장 서론 부분에서 논리실증주의와 플래그머티즘을 언급한 바 있다. 더욱이 우리는 인공지능의 문제들을 보다 근본적으로 검토하려면 인공지능의 바탕이 되어 온 철학의 장단점을 음미해야 할 것을 시사했다. 이처럼 철학학파들을 대상으로 하여 논의하는 철학은 일종의 '철학의 철학' 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드레퓌스는 인공지능 구성의 철학은 인간의 지능이 어떠한 원리에 의존한다고 본 소크라테스의 철학으로부터 유래되었으며 이러한 철학의 전통은 플라톤, 홉스, 데카르트, 라이프니츠 등을 거쳐 현대의 사이먼과 뉴웰에로 이어진다고 평한 바 있다."≫ (주석 : Dreyfus (1990), pp. 25~27) 그러나 우리는 인공지능의 비판과 구성에 관여된 현대철학의 학파들 전체를 검토하기 위해 그 학파들의 연원을 칸트 (I. Kant. 1724~1804) 로부터 색출해 보고자 한다. 칸트철학은 근대철학의 비판적 완결이며 현대철학의 원류로 꼽을수 있기 때문이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칸트철학에서 인식의 대상이 되는 현상의 세계는 인식할 수 없는 물자체 (物自體. Ding an sich) 의 세계와 구분되었다. 이 구분은 인공지능에 관여된 현대철학의 흐름들을 이해하는 데도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여기서는 전체 적인 추세만을 개관하고자 하기 때문에 오해의 위험을 무릅쓰고 단순화하여 말한다면, 칸트와 더불어 현상계 인식을 중시하는 철학들이 전반적으로 인공지능 구성의 철학과 연결되는 데 반해, 칸트와는 달리 물자체의 세계를 인식하려 한다든가 물자체를 철학의 중심과제로 여기는 철학들은 대체로 인공지능을 비판하는 시각을 취하였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인공지능 비판의 철학으로서의 전형은 우선 생철학이라고 하겠다. 생철학은 물자체의 세계에 속하는 근원적인 생을 밝히고자 하며 인식의 범위를 칸트적인 현상계 (現象界) 에 한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어떤 의미로는 생철학을 계승했다고 평가되는 실존철학이 문제 삼는 실존 (實存) 도 과학적 인식의 대상이 아니라는 점에서 물자체에 속한다고 하겠기에, 실존주의를 인공지능 비판의 철학에 귀속시켜도 무리가 아닐 것이다. 그러나 현상학 (現象學) 은 현상을 파악하려고 하기 때문에 우리의 분류가 잘못되지 않았느냐는 반박을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현상학에서 파악하려 하는 현상은 경험적 현상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본직적 현상이며 그런 의미의 현상은 오히려 물자체계에 속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물론, 현상학에서 엄밀한 학문으로서의 철학을 추구한 것은 그 추구 방식이 다르긴 하지만 인식적 의미기준을 추구했던 논리실증주의와 흡사하다고 하겠다. 우리가 현상학을 인공지능 비판의 철학파로 꼽게 되는 것은 관념론적 성향을 지니게 되었던 현상학이었다. 그리고 물자체를 절대 이념의 세계로 간주하고 추구했던 관념론적 변증법 철학도 인공지능에 대해서는 회의적일 것이다.

그러면 후기 비트겐슈타인과 존 썰의 철학은 어떻게 풀이되는가? 이들 철학을 현상계를 초월한 철학으로 분리시킬 수 없지 않은가? 이런 반론은 현상학이나 생철학의 측면에서도 초경험적이 아니라고 하기 때문에 있을 수 있다고 본다. 하지만 인공지능을 비판하는 이들 철학의 논지가 표현불가능한 세계의 존재를 근거로 하기 때문에 물자체와 연결된다고 하겠다. 특히 과학적 명제로 언급될 수 없는 실천적 지식이 인공지능 비판에서 강조되는 것은, 이론이성과는 구별되는 실천이성으로만 접근 가능하다고 본 물자체의 세계와 결코 무관하다고 볼 수 없을 것이다. 우리가 아무리 낙천론을 취한다고 해도, 도덕적 주체로서의 인간과 같은 인공지능이 가능하다고 전망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인공지능 구성의 철학으로 지적되어 온 논리실증주의와 프래그머티즘은 위에서 언급한 비판의 철학들과 무엇이 어떻게 다른가? 우선 이들 철학의 중요한 관심사는 감각적으로 경험되는 현상의 세계이며 현상의 인식에 치중하고 있다. 칸트가 인식할 수 있는 세계와 인식할 수 없는 세계를 엄밀히 구분했듯이, 논리실증주의에서는 인식적 유의미와 무의미를 엄밀히 구분하고자 했다. 양자는 이처럼 과제로 삼는 바가 유사할 뿐 아니라, 논리실증주의의 철학적 개념들이 칸트로부터 많이 계승되었기 때문에, 최초의 논리적 실증주의자는 칸트라고 평하는 학자도 있다.

그러나 프래그머티즘은 행동을 중시하기 때문에 오히려 실천적인 물자체에 치중된 철학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있을 수 있다. 이에 답하기 위해 우리는 퍼스 (C. S. Peirce) 가 칸트로부터 채요하였다고 하는 'Pragmatisch' 라고 말의 의미를 회고해 볼 필요가 있다. 칸트는 물자체에 속하는 도덕적 행위를 실천적 (praktisch) 이라고 하였고 이를 경험세계에서 현세적인 행복을 추구하는 프래그머티슈한 행동과 구별하고 실천이성의 명령을 의무로 삼는 도덕적 행위를 높이 평가했다. 그러나 프래그머티즘의 창시자인 퍼스는 칸트와 달리 오히려 실천적 행위를 물자체에 귀속시키지 않고 경험적 현상계에서 행복을 목표로 하는 행위를 존중했다. 그러므로 프래그머티즘이 실천을 존중하지만 현상계에 치중한 인공지능 구성의 철학이라고 할 수 있다.

칸트가 인식론에서 분석판단 (分析判斷, analytische Urteile) 과 종합판단 (綜合判斷, synthetische Urteile), 선천적 판단 (先天的 判斷, a prior Urteile) 과 후천적 판단 (後天的 判斷, a posteriori Urteile) 을 구분했던 것은 현대철학의 인식론적 논의에서도 계승되었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칸트에게 있어서 인식 현상세계에 대한 판단에 기초하므로 그 판단들을 판별하는 작업이 중요했다. 판단의 논리적 문법구조를 주어 (主語) 와 술어 (述語) 로 크게 나누어 볼 때, 주어 속에 술어가 이미 들어 있는 판단을 분석판단이라고 하며 그렇지 않고 주어 속에 없던 것이 술어가 되어 이루어진 판단을 종합판단이라고 한다. 칸트는 "물질은 연장을 지니고 있다" 는 것을 분석판단의 실례로 들고 있다. (주석 : Kant, I. (1787), Einleitung Ⅳ, "Von dem Unterschiede analytischer und synthetischer Urteile" 참조.) 좀더 우리에게 명확한 분석판단으로 바꾸어 놓으면, '그 여학생들은 여자이다' 라는 문장에서처럼 주어 속에 술어가 들어 있는 판단을 말한다. 이에 반해 '그 여학생들은 운동선수이다' 라는 문장은 주어 속에 술어가 포함되지 않으므로 종합판단이라고 하겠다.

오늘날은 분석판단과 종합판단의 구분을 좀 달리하기도 한다. 그것은 주어와 술어의 관계를 기준으로 삼지 않고 언어의 의미분석에 의해 구분하는 것이다. 현대철학에서는 '판단' 이라는 표현이 심리적 요소가 있다 하여 '명제' 나 '언명' 이라는 표현을 즐겨 사용한다. 이렇게 보면, 분석명제는 그것을 표현하는 언어의 의미만 알면 그것의 참 · 거짓을 판별할 수 있는 명제인 데 반해 종합명제는 그렇지 않다. 이 구분의 또 다른 의미는 분석명제는 사실세계에 관한 정보를 주지 못하는데 반해 종합명제는 세계에 관한 정보를 제공한다고 하겠다.

다음의 선천적 판단과 후천적 판단의 구분은 그 판단이 참인지 거짓인지를 판별하기 위해 경험이 필요한지의 여부에 따른 것이다. 선천적 판단은 생득적 판단이라는 뜻이 아니라 그것이 참임을 인식하는 데 경험이 필요하지 않는 판단이고, 후천적 판단은 반드시 경험이 필요한 경험판단을 의미한다. 이를 달리 살펴보면 선천적 판단은 확실한 판단인 데 반해 후천적 판단은 그처럼 확실한 판단이 아니다.

칸트 인식론의 과제는, 사실세계에 관한 정보를 제공하는 종합판단의 확실성을 의심하는 흄의 회의론을 극복하고 근대 과학적 인식의 확실성을 보장할 수 있는 인식의 기초를 확립하는 일이었다. 이러한 그의 과제는, "선천적 종합판단 (synthetische Urteile a priori) 이 어떻게 가능한가?" 라는 물음으로 제시되었다. 다시 말하면, 세계에 관한 정보를 제공하면서도 확실성 있는 판단이 어떻게 가능한가 하는 물음인 것이다. (주석 : 앞의 책 Ⅶ. "Idee und Einteilung einer besonderen Wissenschaft, unter dem Namen einer Kritik der reinen Vernunft" 참조.) 세계에 관한 정보가 경험을 통해서만 제공될 수 있다는 경험론을 취하는 한, 미래의 경험을 논하는 판단의 확실성은 보장될 수 없다. '모든 S는 P이다' 라는 전칭판단의 형식으로 표현되어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에 모두 적용되는 과학의 법칙들은 종합판단인데, 그것을 후천적인 것으로만 본다면 흄의 회의를 면할 수 없을 것이다. 즉, 그것은 과거의 경험을 통해 미래에도 그렇게 될 것으로 기대하는 심리적인 습관에 불과할 뿐 인과필연성을 확보할 수는 없다. 이에 반해 칸트는 인과필연의 개념처럼 선천적인 개념에 의해 구성되는 세계인식은 확실성이 있다고 봄으로써 선천적 종합판단이 가능함을 논하는 결론에 이른 것이다. 칸트의 선천적 종합판단론은 결국 근대 뉴턴 물리학의 인식론적 기초를 마련하려는 것이라고 하겠으며, 당시로서는 최첨단과학이 흄의 회의에 직면하여 심각한 공경에 처했음을 간파하고 새로운 근거를 모색하여 그러한 난제를 타개하려는 철학이었다.

근대 과학적 지식은 관찰, 조사, 실험들이 경험을 근거로 할 뿐 아니라 근대수학의 발달에 크게 의존하여 선천적 사고를 필수적인 것으로 삼고 이다. 뉴턴의 역학체계로 완결된 근대 과학혁명은 미적분을 비롯한 근대수학의 도움 없이는 결코 성립될 수 없었을 것이며, 그 운동법칙에서 가정하는 이른 바 '마찰 없는 공간' 과 같은 것은 현실적으로 경험가능한 것이 아니다. 이리하여 경험되진 않지만 확실한 세계인식의 근거가 필요했다. 우리는 그러한 사례들을 유클리드 기하학에서 찾아볼 수 있다. 가령, '삼각형의 내각의 합이 2 직각이다' 라는 판단은 세계에 관한 정보를 제공하면서도 참임이 확실한 판단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판단의 선천성에 관한 회의는 수학자 가우스에 의해 제기되었다. 그는 삼각형의 내각의 합이 2 직각이 되는지의 여부를 판가름하기 위해 제자들과 괴팅겐 뒷산에 올라가 측정을 해보았던 것이다. 그것이 종합판단이라면 이 지상에 그려진 삼각형이어야 하고, 그렇다면 그것이 확실하다는 것은 측량이라는 경험에 의해 확인되어야 할 것이다. 만약 그렇지 못하다면 그것은 사실세계에 관한 것이라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가 측량한 결과는 삼각형의 내각의 합이 2 직각이 아니라는 것을 입증할 만한 증거는 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가우스의 사상은 그후 비유클리드 기하학의 발생의 중요한 계기를 마련하였다. 즉 삼각형의 내각의 합이 2 직각보다 크다는 기하학도, 그리고 2 직각보다 작다는 기하학도 유클리드 기하학과 마찬가지로 정합적인 체계를 갖추고 있음이 발견되었기 대문이다. 가령, 지구의 적도선상의 두 점을 A 와 B 라 하고 그 점들로부터 직각으로 쏘아올린 빛은 북극의 N 지점에서 만나게 된다고 하자. 그러면 이 지구상에 그려진 삼각형 ABN 의 내각의 합은 2 직각보다 클 것이 틀림없다. 이것은 비유클리드 기하학의 사상을 해명하기 위한 한 가지 모델일 뿐이다. (주석 : Garnap (1874), Chapter 14. "Non-Euclidean Geometries" 참조.)

비유클리드 기하학의 등장과 그것이 거시세계에 적용되어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이 성립됨에 따라 현대의 과학적 인식론은 새로운 난관에 봉착한 것이다. 그러면 삼각형의 내각의 합은 실제로 2 직각인가 아닌가? 그것은 2 직각이든가 2 직각이 아니든가 그 둘 중의 어느 하나 이어야 할 것인데, 그 두 가지가 다 맞는다는 것은 납득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한 가지 예에 불과하지만 이와 같은 종류의 난제들이 현대과학들에서 제기됨에 따라, 과학기초의 이런 난제들을 타개하기 위해 과학자와 철학자들은 고심해 가며 토의모임들을 갖게 되었다. 그 대표적인 모임이 비엔나 서클로 결성되었고 그들의 해결방향이 '논리 싱증주의'라는 이름으로 전개되었다. 따라서 근대과학의 인과필연적 기반이 부딪친 난관을 해결하려고 한 것이 칸트의 인식론이었다면, 현대과학의 인식론적 난제를 타개하려는 것은 논리실증주의 철학이라고 하겠다. 이 철학의 목표와 방향이 오늘의 인공지능사상의 기초가 되었으며 그들의 인공언어 분석과 구성의 기술은 인공지능언어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

2. 논리실증주의와 기호처리

논리실증 주의자들은 현대과학의 인식기초에서 부딪친 철학적 난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의미 문제' 부터 밝혀야 한다고 보았다. 어떤 주장이 옳고 어떤 주장이 그르다고 하는 사상의 전위 문제를 직접 논하기에 앞서, 그들 주장이 참이 되는 조건과 거짓이 되는 조건이 무엇인지부터 밝혀야 한다는 사상이다. 주장들의 의미가 제대로 밝혀지지 않은 상태에서 어떤 것을 주장하고 그에 대해 논박하는 것은 쓸데없는 논쟁만을 반복하는 시간낭비이며 정력소모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사상의 명석화 작업을 최우선으로 삼았던 논리실증주의의 태도는 '의미는 진리에 선행한다' 라는 표어로 정리될 수 있다. 칸트가 인식가능의 영역과 인식 불가능 영역을 구분하였듯이, 논리실증 주의자들은 인식적으로 유의미한 세계와 무의미한 세계를 구분하였다. 이 구분에 따라 과학의 과학성을 확립하고 과학과 사이비 과학을 가르고자 하였다. 이러한 사상의 배경에는 과학적 지식에 대한 맹신과 오용을 경계하고 올바른 과학상을 확립하려는 의도가 담겨 있다. 앞장에서 살펴보았듯이 19 세기 후반부터 과학적 인식이 이론적으로는 많은 난제들에 부딪쳤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반인들은 과학기술의 발달로 많은 편의를 제공받음에 따라, 무엇이나 과학적인 것이라고 하면 무조건 믿게 되는 추세였다. 이와 같은 과학 맹신의 추세에 편승하여 사이비 과학자들도 많아졌다. 자기의 허무맹랑한 주장에 신빙성을 부여하려는 자들은 저마다 자신의 주장이 과학적임을 표방하여 왔다. 그러므로 논리 실증주의가 비판하는 바는 이러한 사이비 과학자들의 주장들이다.

특히 논리실증 주의자들은 2000 여 년 동안 철학의 고유영역으로 믿어왔던 형이상학을 인식적으로 무의미한 사이비 과학이라고 배제함으로써 현대철학의 새로운 쟁점을 제기하였다. 이들에게 인식적으로 의미있는 것의 기준은 논리적 정합성과 경험적 검증가능성이라는 두 가지의 원리였으며 이에 의거하여 '논리실증 주의' 라는 명칭을 취하였다고 하겠다. 어떤 주장이 주어지면 그것의 진위를 논하기에 앞서 그 주장의 언어형식이나 논리형식이 언어체계에 정합되는지의 여부를 알아보아야 한다. 그 주장이 그를 표현하는 언어의 의미에 의해서만 진위를 가릴 수 있는지, 아니면 경험에 의해 검증가능한지를 알아보아야 하겠다는 논지이다. 어떤 주장이 논리적 정합성도 없고 경험적으로 검증가능한 것도 아니라면 그런 주장은 인식적으로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논리실증 주의의 대표자인 카르납은 이와 같은 의미기준에 의거하여 칸트의 선천적 종합판단의 가능성을 부정하였다. 그는 논리적인 선천적 분석판단과 경험적인 후천적 종합판단만이 성립되고 이 세계에 관한 정보를 제공하지만 필연적인 진리라고 할 수 있는 지식은 성립될 수 없다고 하였다. (주석 : 앞의 책, Chapter 18, "kant' s Synthetic A Prion" 참조.) 이리하여 그는 위에는 논의된 기하학도 공리체계를 기반으로 성립된 논리적 · 수학적 기하학과, 측량 등의 경험을 필요로 하는 사실세계의 기하학으로 구분하고 진리도 논리적 진리와 경험적 진리로 구분하였다. 다시 말하면 분석판단은 확실하지만 전달하는 정보내용이 없고 종합판단은 정보내용을 담고 있으나 절대적인 확실성을 보장할 수 있는 것이 되지 못한다. 이런 의미기준에 의하면 형이상학은 무의미한 것으로 배격된다. 하지만 논리실증 주의자들이 반형이상학적 주장은 때때로 오해를 야기한다. 가령, "그들은 형이상학이 무의미하다고 하나, 우리는 형이상학을 통해 인생을 깊이 성찰하고 삶의 의욕을 갖기도 하며 마음의 태도를 바꾸기도 함으로써 가치있는 일을 많이 하여 왔다. 그러니 어떻게 그런 형이상학을 무가치하다고 할 수 있겠는가?" 이런 식의 반론들을 우리는 철학 개론서들 중에서도 자주 접하게 된다. 그러나 이것은 인식적 무의미와 무가치를 혼동한 오해에 기인한다. 논리실증 주의자들은 가치있는 형이상학이 있을 수 있음을 결코 부정하는 것ㅇ디 아니다. 오히려 그들에 의하면 형이상학은 가치있는 정의적 의미 (emotive meaning) 를 지닌다는 것이다. (주석 : Carnap (1932), pp.80~81.) 그들이 부정하고자 하는 것은 정의적 의미를 지닌 형이상학을 인식적 의미 (cognitiv meaning) 를 지닌 것처럼 위장하여 야기되는 혼란이다. 예컨데, 반달의 노래에서 '달에 계수나무가 있다' 는 표현은 우리의 정서나 의지를 표현하려는 것으로 보아야지 그것을 천문학적 진술로 보아서는 안된다는 말이다. '로켓을 타고 달에 가 보았더니 계수나무는 없다. 그러므로 그 주장은 거짓이다' 라는 방식으로 계수나무의 존재를 천문학의 과학적 사실언명으로 착각해서는 안되고 그것은 과학적 인식의 영역을 벗어난 세계, 시의 정의적 세계에 귀속시켜야 한다는 것이 논리실증주의 자들의 의도이다. 다만, 전통적인 형이상학자들의 주장은 시의 정의적 세계에 속함에도 불구하고 과학의 인식적 세계에 속하는 것으로 오인되어 왔음을 비판한다.

아마도 니체의 "신은 죽었다" 라는 형이상학적 표현을 논리실증주의 자들은 배격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니체의 그 표현은 원래 서사시적으로 표현되었기 때문에 과학적인 것으로 오인될 우려가 없다. (주석 : 위의 책. p.80.) 즉, 신은 언제 어디에서 죽었으며 자살인가 타살인가의 사인을 규명해야 할 염려는 없기 때문이다. 사람이나 어떤 생명체가 죽었음을 기술하는 경우와는 달리, 신이 죽었다는 표현은 어떤 사실을 보고 하려는 것이 아니라 저자의 어떤 의도나 느낌을 상징적으로 표현하려는 것이 명백하기 때문이다. 실존철학자들의 해석처럼 그것은 신으로 상징되는 기존의 서구문명의 기본가치를 파괴하기 위해 신은 죽었다고 표현한 것으로 풀이될 수 있다. 그러나 카르납은 하이데거의 "무 (無) 가 무화 (無化) 한다" 는 것과 같은 형이상학적 표현들은 그것이 사실보고적인 것으로 위장되어 나타나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기만당하기 쉽다 하여 배격하였다. (주석: 앞의 책. pp. 69~71.) 우리가 어떤 문장에 대해 참과 거짓을 논할 수 있기 위해서는 우선 그 문장이 인식적 의미를 지녀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분명히 거짓이라고 할 수 있는 문장은 유의미해야 하며, 인식적으로 무의미한 문장이나 정의적 의미만을 지닌 문장들에 대해서는 거짓이라고도 할 수 없다. 논리실증 주의자들은 니체의 "신은 죽었다" 는 따위의 형이상학적 문장들 뿐만 아니라 '도둑직은 나쁘다' 와 같은 윤리적 문장들도 정의적 의미만을 지녔다고 보았다. 즉 그것은 '나는 도둑질을 싫어한다' 는 느낌의 표현이나 '도둑질을 하지 말라' 는 의지적 표현이므로, 참 거짓을 논할 수 있는 인식의 영역이 아니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논리실증주의는 가치를 논하는 윤리학은 인식적 의미를 지니지 못하므로 학문일 수 없다고 한다. 이와 같은 논지가 윤리학에서는 정의주의 (emotivism) 로 지칭되어 왔다. 윤리학의 학적 인식 부정론을 주장한다고 해서 그들을 반윤리적 인간으로 취급해서는 안될 것이다. 그들 중에는 칸트의 청교도적 엄격한 도덕을 존중하고 인권과 인종 문제에서 도덕적 실천에 앞장선 자들이 있으며 그런 태도와 실천은 결코 그들의 과학철학과 배치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학문이 진정으로 학문이기 위해서는 인식적으로 유의미해야 하고 오랜 전통의 형이상학과 윤리학도 그 기준으로 판단하면 학문이 아니다. 물론 이들의 의미기준은 그 동안 많은 논란의 대상이 되어 왔다. 특히 어떤 주장이 인식적으로 유의미하기 위해서는 그것은 경험에 의해 검증가능해야 한다는 검증가능성의 원리 (verifiability principle) 는 그 동안 여러 가지로 비판의 대상이 되었고 논리실증 주의자 자신들도 그 비판을 수용하여 경험적 의미기준을 수정해 왔다. 이것은 현대에 있어서 귀납과 확증가능성 (confirmability) 의 문제로 전개된다. (주석 : Hempel (1951), "Empiricist Criteria of Cognitive Significance : Problems and Changes" in Hempel (1965) 참조.) 그러나 우리가 논리실증 주의와 인공지능의 연관성을 논하기 위해서는 검증가능성의 원리보다도 인식적 의미기준의 또 다른 기준인 논리적 정합성 (logical coherence) 의 기준을 더욱 눈여겨 살펴야 한다. 왜냐하면 이 논리적 기준의 사상은 인공지능 창시자들의 사고를 지배해 온 철학적 기초이기 때문이다.

논리실증주의에 의하면 어떤 대상영역이 인식적 의미를 지니려면 그것은 언어로 표현가능해야 한다. 언표불가능한 세계는 정합성을 논할 수 없으므로 인식적 유의미성이 검토될 수 없다. 어떤 주장이 인식적으로 유의미하기 위해서는 그것은 언표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언표를 구성하고 있는 낱말들이 경험적으로 유의미해야 한다. 이는 검증 불가능한 낱말을 포함하는 문장의 진리조건을 확인할 수 없고 따라서 그 문장의 인식적 의미를 밝힐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의미한 낱말들로 구성된 문장이라고 해서 모두 의미있는 것은 아니고 그 낱말들을 결합시키는 규칙들이 해당 언어체계에 정합 되어야 한다. 다시 말하면, 인식적으로 유의미한 문장은 그것이 속해 있는 언어체계의 정형 (well-formed formula) 을 형성하는 규칙들 (formation rules) 에 알맞도록 구성되어야 한다. 이리하여 인식적 유의미성을 논하기 위해서는 정형들을 규정하는 언어체계를 전제로 한다. 그러한 언어체계가 없다면 인식적 유의미성을 논할 수 없다.

논리실증주의의 인식적 의미기준이 언어체계와 이렇게 연관되는 점은 인공지능 창시자들에게 그대로 계승된다. 인공지능이 다룰 수 있는 세계는 언표가능한 세계이며 그 언표들은 일정한 문법적 규칙들, 즉 형성규칙들에 의해 정형을 이루고 있다는 생각을 기본전제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그 정형을 구성하는 프로그램 언어의 체계부터 마련해야 했다. 이러한 인공적인 프로그램 언어를 만드는 작업에도 논리실증주의의 영향은 결정적으로 작용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인공지능사상의 역사를 소개해 온 일반적 문헌들에서는 이러한 철학적 연관성을 다루지 않는데, 이처럼 인공지능을 철학과 무관하게만 다루는 것은 인공지능을 보다 넓은 시각에서 논하고 그 실제적인 문제들을 근본적으로 개선하는 데 적지 않은 장해가 될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그러한 철학적 영향을 살피고 논리에 기초한 인공지능의 철학을 확인하기 위해, 논리실증주의의 대표자인 카르납이 철학함에 있어서 인공언어를 필요로 했던 배경과 그가 직접 구성한 인공언어들을 검토하고자 한다.

3. 형이상학의 구문론적 분석 사례

형이상학의 문제들은 구문론적으로 다룰 수 없는 것이라고 알려져 왔다. 그러나 카르납은 '형이상학적 주장들의 진위를 가릴 수 없다' 는 그 사실만은 언어의 구문론적 분석을 통해 밝힐 수 있다고 한다. 이제 우리는 형이상학적 논변에 대한 구문론적 분석의 몇 가지 실례를 살펴봄으로써 논리가 철학함에 어떻게 작용되고 있는지를 알아보고자 한다. 전통적 형이상학이 존재의 문제에 관해 혼동을 일으키고 있음을 지적하는 사례로서 카르납은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cogito, ergo sum) 를 지적한 바 있다. 존재를 표현하는 영어의 be 동사나 독일어의 sein 동사에서 '이다' 와 '있다' 가 혼동됨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특히 존재에 관한 사고의 혼란은 존재를 어떤 속성으로 생각하는 데서 비롯된다는 것이다. 우리가 술어논리의 표현을 사용한다면, '나는 생각한다' 는 'Think (Ι)' 로, '나는 존재한다' 는 'Being (Ι)' 로 표기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만약 이렇게 표현한다면 존재는 술어로 보아야 하는데 그렇게 해서는 안된다고 비판한다. 만약 우리가 존재를 술어로 간주한다면 '나는 생각한다' 로부터 '나는 존재한다' 는 결론이 도출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 카르납의 분석과 대안은 어떠한가? '나는 생각한다' 로부터 논리적으로 타당하게 도출될 수 있는 결론은 '생각하는 어떤 자가 존재한다' 로 풀이한다. (주석 : Carnap (1932), pp. 73~75.) 왜냐하면 'Think (Ι)' 로부터 '(∃x) Think (x)' 는 존재 일반화의 규칙 (existential generalization : EG) 에 의해 도출되기 때문이다. 이런 술어논리로 보건대, 존재는 한량기호 (quantifier) 임에도 불구하고 이를 술어로 취급하는 데서 전통철학의 혼란이 야기되었다고 분석한다.

논리와 집합의 구문론적 분석은 반드시 형이상학을 배제하는 것에만 이용되는 것이 아니다. 때로는 형이상학적 논의들이 논리적 분석에 의해 한층 더 명석하게 될 수도 잇다. 예컨데, 바인가르트너 (P. Wein-gartner) 는 파르메니데스 (Parmenides) 의 유론 (有論) 을 다음과 같은 추론의 형식으로 간추리고 이를 집합논리적으로 분석한 바 있다. (주석: 여기에 소개되는 파르메니데스의 유론과 아리스토텔레스의 반유론에 관한 집합논리적인 논증은 바인가르트너 교수가 1974 년 잘츠부르크 대학교 철학세미나에서 발표한 것이다.)

1) 유 (有) 가 아닌 것은 비유 (非有) 다.

2) 비유 (非有) 는 무 (無) 다.

3) 무 (無) 는 존재 (存在) 하지 않는다.

4) 그러므로, 모든 것은 유 (有) 다.

이런 추리의 타당성을 검토하기 위해 유 (有) 를 S 로, 무 (無) 를 N 으로, 그리고 비유 (非有) 는 -S 로 기호화하고 집합론과 술어논리를 활용한다.

´1) (∀x) (∼(x∈S) → (x∈-S))

′2) (∀x) ((x∈-S) → (x∈N))

′3) ∼(∃x) (x∈N)

′4) (∀x) (x∈S)

앞의 언명들을 각기 이렇게 기호화하면 간접추리의 증명방식에 의해 증명을 시도해 볼 수 있다. 우선 결론의 부정을 가정하고 나서 그것이 모순임을 도출함으로써 결론을 입증하는 배리법 (背理法) 을 활용해 보기로 한다.

′5) (∃x)∼(x∈S)

′6) ∼(a∈S)

′7) ∼(a∈S) → (a∈-S)

′8) a∈-S

′9) (a∈-S) → (a∈N)

′10) a∈N

′11) (∀x) ∼ (x∈N)

′12) ∼(a∈N)

′13) (a∈N)∧ ∼ (a∈N)

: 위 결론 4) 의 부정을 가정

: ′5) E. S.

: ′1) U. S.

: ′6) ′7) M. P.

: ′2) U. S.

: ′8) ′9) M. P.

: ′3) Def.

: ′11) U. S.

: ′10) ′12) Adj.

이와같이 ′4) 의 결론을 부정한 ′5) 의 가정은 모순임이 밝혀졌으므로 결론 ′4) 는 타당한 추리의 귀결임이 입증되었다.

′14) ′5) → ′13

′15) ′4)

: ′4) 의 부정이면 모순

: 그러므로 결론 입증

그러나 파르메니데스가 모든 것은 유 (有) 라고 하는 결론을 받아들인다면 비유 (非有) 도 유 (有) 라는 모순에 빠진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반론도 다음과 같이 집합론과 술어논리로 입증하여 형이상학적 논의를 좀더 깊이 진행해 볼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반유론 (反有論)

1) 모든 것은 유 (有) 다.

2) 그러므로 비유 (非有) 도 유 (有) 다.

′1) (∀x) (x∈S)

′2) (∀x) ((x∈-S) → (x∈S))

′3) (∃x) ∼ ((x∈-S) → (x∈S))

′4) (∃x) ((x∈-S)∧ ∼ (x∈S))

′5) (a∈-S)∧ ∼ (a∈S)

′6) (a∈S)

′7) ∼(a∈S)

′8) (a∈S)∧ ∼ (a∈S)

′9) ′3) → 8)

′10) ′2)

: 1)

: 2)

: ′2) N. Def

: ′3) Imp. Def.

: ′4) E. S.

: 1) U. S.

: ′5) ′6) Con. Def.

: ′6) ′7) Adj.

: ′2) 의 부정이면 모순

: ′2) 의 입증

이런 분석의 사례들을 보건대, 언어의 구문론은 형이상학적 주장들을 명석화하는 데에도 필요함을 알 수 있다. 그리고 형이상학이 구문론적으로 정합된다면 논리실증주의의 인식적 의미기준 중의 하나는 통과했으므로 그것은 수학이나 논리학처럼 인식적으로 유의미 하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논리실증주의를 취한다고 하더라도, 모든 형이상학이 인식적으로 무의미하다고 할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그것이 검증불가능하다면 사실세계의 정보적 의미를 갖지 못한다는 것으로 수용해야 할 것이다.

4. 선험적 인식론과 형식주의

우리는 카르납의 인공언어 체계를 선험적인 인식론이라고 풀이할 수 있다. 칸트의 선험적 인식론에서 선천적인 인식능력과 인식형식을 문제 삼았듯이, 인식적 의미를 규명하기 위해서는 경험들에 앞서 있는 언어체계의 논의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칸트에게서 인식의 형식을 이루고 있는 개념들은 카르납의 언어체계에서는 여러 가지의 규칙들에 해당된다고 하겠다. 칸트의 형식주의는 주로 윤리적 논의에서 상황에 따른 특수한 내용들의 다양성을 넘어 보편적인 의지규정을 하는 선험적 형식에 의거했으나, 카르납은 인시적 의미의 일반적 기준을 마련하기 위해서 언어의 형식적 구조를 밝히고자 했다.

칸트와 카르납의 이와 같은 철학관에는 함께 지향하는 바가 있다. 철학은 개별과학들과 달리 특정한 대상영역에만 한정되지 않고 모든 인식영역에 해당되는 전체적이고 포괄적인 것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철학의 포괄성을 어떻게 확보할 수 있는가? 인식을 논하는 이론철학 분야에서 그러한 포괄성은 특정분야의 내용적 구속성을 넘어선 형식적 구조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러한 의도에서 카르납은 초기에 철학을 "언어의 논리적 구문론" 으로 규정하였다. 철학은 세계의 사물들을 직접 다루는 분과과학들과는 달리 그 과학들을 대상으로 하는 과학, 즉 과학의 과학이다. 특히 과학의 과학으로서의 이론철학은 과학들의 일반적 구조를 다루는 '과학의 논리' 로 규정되었으며 이런 과학의 논리가 과학언어의 논리적 구문론으로 간주된 것이다. (주석 : Carnap (1934), pp.277 ~ 281 참조.)

개별과학들은 서로 다루는 대상들이 다르기 때문에 그 특수대상들에 따른 다양한 연구방법들이 있을 수 있으나, 그들 모두는 또한 과학이기 때문에 과학으로서 공유하는 바가 있어야 하는데 그것을 과학의 논리라고 호칭했다고 볼 수 있다. 과학이 과학이기 위해서는 논리가 있어야 하며 논리가 없는 과학은 아무리 많은 자료들을 모아놓았어도 과학일 수 없다. 이렇게 과학이 과학이게끔 하는 과학의 논리를 과학들에 해달될 수 있는 과학언어의 논리적 구문론이라고 카르납은 생각한 것이다. 이와 같은 착상은 수학의 영역에서 모든 수학의 기초가 되는 형식적 구조를 탐구했던 힐베르트 (D. Hilbert) 의 형식주의적 메타수학 (metamathematics) 으로부터 취하게 된 것이다. 다시 말하면, 카르납은 메타수학의 사상을 확장하여 과학 전반에 적용시키고자 했으므로, 과학의 논리는 과학이론들을 대상으로 하여 연구하는 메타이론 (meta-theory) 이다.

이리하여 카르납의 관심은 과학언어 중에서도 일상언어보다는 정밀한 규칙들과 구조를 지닌 인공언어에 집중되었다. 일상언어가 제공하는 사고의 풍부한 내용보다도, 그것이 너무나 애매하고 모호하기 때문에 사고의 혼란을 일으키는 부정적 측면에 착안하여 이를 극복할 수 있는 인공언어를 필요로 했다. 그는 특히 일상언어로 진행되어 온 철학과 과학의 논쟁들에서 많은 사람들이 '형식적 화법' (formal mode of speech) 을 도외시하고 '실질적 화법' (material mode of speech) 에만 얽매여서 쓸데없는 논쟁만을 일으켰다고 비판하고 그들을 형식적 화법으로 바꿈으로써 혼란을 해소하고자 했다. (주석 : 앞의 책, pp. 302~315 참조.)

예컨데, 전통적으로 유물론과 유심론의 주장들이 대립해 왔다. 유물론적 주장은 '만물은 물질적인 원자 원소들로 되어 있다' 라고 표현되고, 유심론적인 감각주의나 현상주의의 주장은 '만물은 감각자료들로 구성되어 있다' 라고 풀이된다. 이렇게 실직적 화법으로 표현된 두 주장은 도저히 양립될 수 없다. 그리하여 양대진영은 투쟁을 계속해 왔다. 그러나 이 두 테제를 올바른 형식적 화법으로 바꾸면 그러한 형이상학적 논쟁은 해소될 수 있다고 한다. 즉 전자는 '만물에 관한 모든 과학적 명제들은 해당영역의 물리적 언명들로 번역될 수 있다' 라고 보고 후자는 '사물에 관한 모든 명제는 감각자료 언명으로 번역될 수 있다' 로 풀이하면 이들 주장은 양립가능하다.

카르납이 형식적 화법을 통해 언어적 혼란을 제거하고 메타이론을 발전시키면서 이룩학 또 다른 업적은 대상들을 기술하는 대상언어 (object language) 와 언어에 관한 언어인 메타언어 (meta-language) 를 명확히 구별한 것이다. (주석 : 카르납이 실질화법과 형식화법을 구분하고 대상언어와 메타언어를 구분한 것은 많은 철학자들이 그의 철학의 특색으로 지적하고 있다. Stegmüller, W. (1971), "Homage to Rudolf Carnap" in Buck and Cohen (1971) L Ⅲ 참조.) 이 구분은 과학과 철학에서 많은 언어적 난제들을 해결하는 데 도움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오늘날 LISP 와 같은 인공지능의 프로그램언어에서도 가장 기본적인 식별 가운데 하나이다. 그런데 카르납은 하나의 대상언어에 대해 그것을 기술하는 메타언어를 구별해야 한다고 해서 대상언어와 메타언어의 언어체계가 반드시 달라야 한다고 본 것은 아니다. 동일한 언어체계 안에서 대상언어와 메타언어가 구별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점은 비트겐슈타인의 전기사상과 근본적으로 다른 점인 동시에, 카르납의 철학적 특색이 잘 드러나는 대목이기도 하다. (주석 : Carnap (1934), p.321 참조.)

만약 우리가 어떤 언어체계 L1을 기술하기 위해 언어체계 L2 를 도입하고 다시금 언어체계 L2 를 기술하기 위해 언어체계 L3 를 도입해서 이런 일을 계속한다면 무한소급 (無限遡及) 해 갈 것이다. 이와 같은 난관에 부딪쳐 비트겐슈타인은, 집을 지을 때 사용한 사다리를 집이 완공되면 치워야 하듯이, 철학자인 언어는 해명에 쓰일 뿐이고 해명이 끝난 다음에는 버려야 하므로 명시적으로 언표될 수 없다고 보았다. 그러나 카르납은 비트겐슈타인의 이런 생각은 형이상학에로의 복귀를 의미하는 매우 애매모호한 주장이라고 논박하고, 그 대안으로서 동일한 언어체계 안에서 자기기술의 언어가 가능함을 보이는 실례를 구성하였다. 이를 위해 그는 괴델 (K, Gödel) 의 산술화의 방법 (the method of arith-metization) 을 활용하였다. 오늘날 인공지능 언어들에서 일반화된 하나의 제어 구조로서의 회귀 (recursion) 가 바로 카르납의 그러한 사상을 계승한 기술이다. 그것은 하나의 함수가 자기 자신에 의해 정의되는 기술이며 회귀함수는 자기 자신을 부르는 함수이기 때문이다.

이 기회에 우리나라 철학개론서들에서 현대철학의 전개과정을 논할 때 자주 범하는 오해를 하나 더 지적해 두어야겠다. 논리실증주의는 비트겐슈타인의 전기사상으로부터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물론 이 말은 옳다. 가령, 철학과 구문론을 긴밀하게 연결시키고 논리의 형식적 본질을 해명한 점이라든가 철학을 언어비판으로 보고 형이상학과 윤리학을 사이비 문장으로 간주한 점 등은 카르납과 비트겐슈타인이 의견을 같이하므로 그의 전기사상의 영향은 크다고 하겠다.

우리는 비트겐슈타인의 전기철학과 논리실증주의의 대표자인 카르납의 철학과의 차이점 들을 망각해서는 안된다. 예컨데, 비트겐슈타인의 전기사상이 '언어의 그림 이론' 을 기반으로 하기 때문에, 카르납의 논리실증주의도 그림이론을 신봉한다는 따위의 오해가 그 대표적인 경우이다. 그림이론은 언어와 세계가 구조적으로 동형 (同形) 이라는 주장이기 때문에 여기서 추구하는 이상언어 (理想言語) 는 존재에 대응하는 것으로 판단되지만, 카르납을 정점으로 하는 논리실증 주의자들의 언어관은 그렇지 않다. 오히려 카르납의 인공언어 사상은 그러한 비트겐슈타인의 그림이론 사상에 반대하는 반증사례를 제시하는 데 치중하였다. (주석 : 앞의 책, p.53.) 카르납에 의하면 일상언어의 애매모호함을 극복하기 위해 이상적인 인공언어를 구성하려고 하였으나 그 이상언어는 그림이론에서처럼 존재의 실상을 반영한 유일무이 (唯一無二) 의 이상언어가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는 필요에 따라 다양한 언어를 구성하여 사용할 수 있다고 보아, 카르납은 이른 바 '관용의 원리' (principle of tolerance) 를 천명한 바 있다. 이에 의하면 우리의 과제는 금지를 명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규약 (規約) 에 도달하는 것이다. (주석 : 앞의 책, p.51.) 우리는 여러 가지 규약들로 다양한 종류의 언어를 자유롭게 구성할 수 있다. 그러므로 카르납 자신의 인공언어도 그것만을 사용해야 한다는 의미의 주장으로 제시된 것이 아니라 하나의 제안 (a proposal) 으로 내놓은 것이다. 따라서 그것의 수락 여부는 문제해결의 적합성에 크게 의존할 것이므로 그의 의도는 오히려 어용론 (pragmatics) 을 함축한 것이라고 하겠다. 이 밖에도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을 이론이 아니라 활동이라고 한 것과, 과학의 논리는 구성될 수 없다고 본 점이 카르납과 정면으로 대립된다. 비트겐슈타인은 문장의 형식에 관한 문장들은 있을 수 없기 때문에 밝힐 수 있는 것은 말해질 수 없다고 하였다. 이에 반해, 카르납은 철학적 활동의 결과는 이론으로서 제시될 수 있다고 보고 문장의 형식에 관한 문장인 구문론적 문장들은 기하학에서처럼 분석문장이나 종합문장으로 구성될 수 있다고 하였다.

카르납에 의하면 언어의 구성은 자유이다. 그러면 그가 인공언어를 구성한 까닭은 무엇인가? 특히 그가 철학해 가는 한 가지 방식으로서 언어의 구문론을 연구한 이유는 무엇인가? 그에게 철학은 포괄적 학문이기 때문에 가능한 한 넓은 영역에 적용될 수 있는 언어의 구조를, 즉, 범용 구문론(general syntax) 을 구축하는 것이었다. (주석 : 앞의 책, Part Ⅳ. "General Syntax" 참조.) 물론 이 범용 구문론은 특수한 일상언어들을 모두 참조해야 하는 어떤 이상적인 언어체계가 아니다. 그것은 어떤 언어에도 적용될 수 있는 포괄적인 구문론적 용어들을 정의할 수 있는 체계이다. 다시 말하면 언어 일반을 위한 이런 구문론은 서로 다른 종류의 언어에도 적용할 수 있으며 여러 측면에서 개선될 수도 있으나, 언어외적인 대상들로부터 독립해 있기 때문에 시공적 변화에 좌우되지 않는 순수 구문론이라고 하였다. 카르납이 이렇게 구성한 인공언어는 일종의 연상체계 (calculi) 로서 해석되지 않은 형식체계이다. 그 언어체계는,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들의 다양한 지각이나 언어행위 그리고 복잡한 사회적 연관성을 고려하지 않고 그 표현들의 의미관계들로부터도 독립한 것으로 다룸으로써, 오히려 폭 넓게 적용될 수 있는 보편성을 확보할 수 있고 따라서 선험적 인식이 가능한 것으로 평가되었다고 하겠다.

5. 카르납의 인공언어와 형식게임

일상적인 자연언어에서도 개개의 낱말이나 기호들은 단순하게 뭉쳐 있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규칙들에 의해 공인되는 문장형식들을 이루고 이들 상호간에도 어떤 규칙들이 체계를 이루고 있다. 이미 앞서도 지적되었듯이, 카르납이 구성한 인공언어도 자연언어에서처럼 기본적인 낱말들과 이들을 결합하여 공인된 문장형식을 만들 수 있는 형성규칙 (문법) 들이 명시적으로 제시되어 있다. 그러나 카르납의 인공언어가 종래 언어학자들이 발견해온 일상언어들과 근본적으로 다른 점은 복잡한 계산이나 추리를 해낼 수 있는 문장들의 추리규칙, 즉 변형규칙 (transformation rules) 을 갖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우리들은 일상언어로 상식적인 수준의 계산이나 추리를 할 수 있으나, 일상언어만으로는 여러 명제들이 복잡하게 얽힌 것을 엄밀하게 분석해서 그 타당성을 검토할 수 없다.

많은 단계를 거쳐 엄밀하게 추리해 낼 수 있는 변형규칙들을 가진 언어를 우리가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은 인간의 사고혁명을 일으키는 새로운 역사의 장이 열리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그것은 마치 고속도로를 만들어 놓고 그 위를 대량의 화물을 고속으로 운반할 수 있는 차에 엔진을 부착시킨 것과 흡사하다. 인공언어라는 고속도로는 물건들의 공간이동이 아닌 정보의 이동을 가능하게 하며 그것은 공간이동만이 아니라 과거ㆍ현재ㆍ미래를 자유롭게 왕래하는 시간이동도 가능하게 한다. 이처럼 추리는 현실의 구속성을 벗어나 자유롭게 가능세계를 질주할 수 있는 엔진역할을 하는 것이다. 성능 좋은 엔진의 발견이 산업혁명에 크게 기여했듯이 새로운 추리를 할 수 있는 논리의 발견은 예측하기 어려운 정보혁명의 초석이 되었다. 물론 인간이 의도적으로 구축한 인공언어는 고속도로와 같아서 자연히 만들어진 오솔길과 같은 자연언어의 아기자기한 맛이 없다. 고속버스가 오솔길을 달릴 수 없듯이, 인공언어를 사용한 추리가 자연언어로 수행해온 추리를 모두 대행할 수 있다고 보아서는 안될 것이다.

카르납은 《언어의 논리적 구문론》에서 언어 I 과 언어 II 를 구성하였다. 언어 I 은 한정된 개념들만을 포함하는 제한된 것이며 직관주의 수학 프로그램을 실현할 수 있는 유한한 절차를 규정한 것이다. 언어 I 에서 사용하는 기호들은 명제논리와 술어논리의 논리적 상항들 (예컨대, ~, ㆍ, ∨, ⊃, ∀, ∃ 등) 과 수학에서 사용해온 상수와 변수들이다. 기술적인 측면에서 특기할 만한 것은 술어 (predicates) 와 관항어 (關項語, functors) 를 엄밀히 구분하여 사용한 것과 특정 조건을 만족시키는 숫자를 지적할 수 있는 K-조작사 (K-operator) 를 새로 도입한 것이다.

예컨대, Blue(3) 는 '3번 위치는 푸르다' 이고 Blue(a) 는 '대상 a 는 푸르다' 이며 Wr(a, b) 는 '대상 a 는 대상 b 보다 따뜻하다' 등을 표시하는 것으로서, 여기서 'Blue' 나 'Wr' 은 각기 일항술어와 이항술어이다. 이들 술어와 위치숫자나 대상기호가 결합하면 참과 거짓을 구별할 수 있는 명제를 표시할 수 있다. 그러나 'te(3) = 5' 는 '3번 위치의 온도는 5 이다' 이고 'tdiff(3, 4) = 2' 는 '3번 위치와 4번 위치의 온도 차이는 2 이다' 라고 했을 때, 여기서 'te' 와 'tdiff' 는 관항어라고 한다. 이들은 술어와는 달리 위치숫자나 대상기호와 결합하여 명제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속성이나 관계를 나타낸다. 그리고 가령, '(Kx)9(Gr(x, 7))' 는 'x 는 7 보다 크다는 문장이 참이 되기 위한 수가 9 에까지 이르는 최소수' 를 표시하므로, 여기서 K-조작사는 문장을 나타내는 조작사가 아니라 특히 특정한 수를 지적하는 기술적 조작사 (descriptional operator) 이라 특히 특정한 수를 지적하는 기술적 조작사 (descriptional operator) 이다.

그리고 카르납의 언어 I 에는 보통 술어논리에서는 발견할 수 없는 제한한량기호 (limited operator) 가 도입되어 한정언어로서 증명이나 논박의 유한절차를 밝히는 것이 특이하다. 예컨대, (∀x)(Red(x)) 에서 개체변항 x 는 제한되지 않기 때문에 (∀x) 는 무제한한량기호 (unlimited operator) 인 데 반해, 가령, (∀x)3(Red(x)) 는 'Red(0)ㆍRed(1)ㆍRed(2)ㆍRed(3)' 을 의미하므로 여기서 '(∀x)3' 은 제한한량기호라고 한다. 그리고 언어 I 은 공리체계들에서처럼 공리에 해당하는 기본명제 1개를 설정하고 귀결규칙들을 포함해 변형규칙들을 명시적으로 규정하였다.

카르납이 구성한 언어 II 는 언어 I 을 부분언어로서 포함하는 상위언어이고 나아가 한정되지 않는 개념들도 다룰 수 있도록 무제한 한량기호를 수용하고 있다. 언어 II 는 언어 I 에 추가하여 23개의 기본명제와 15개의 규칙들을 설정했으며 이를 통해 고전수학 전반을 기술할 뿐 아니라, 이를 확장하면 물리학의 언어를 구성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와 같은 생각이 모든 과학의 언어를 물리학적 언어에로 환원하려는 환원주의적 통일과학 운동의 기초를 이루었던 물리주의의 발상임은 너무나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면 카르납의 인공언어가 인공지능과 어떻게 연결되는가? 그가 최초로 구성한 언어체계는 기본용어ㆍ형성규칙ㆍ공리ㆍ변형규칙의 요소들을 갖춘 형식체계인데 컴퓨터도 일종의 형식체계이기 때문에, 카르납의 인공언어와 같은 언어들은 컴퓨터에 적용할 수 있다. 따라서 오늘날 인공지능의 언어들이 카르납이 구성한 언어방식을 취하게 된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컴퓨터를 형식체계라고 할 때 그것이 의미하는 바를 알아보기 위해서는 형식게임 (formal games) 의 특성들을 검토하는 것이 좋다. 형식게임이란, 장기나 바둑처럼 어떤 판도에 이르기 위해 일정한 규칙들에 의거하여 말이나 돌을 움직여가는 게임을 말한다. 이것은 당구나 농구와 같은 비형식 게임 (informal games) 과는 구별된다. 형식게임을 비형식게임과 구별하는 특성은 다음의 세 가지로 지적되고 있다. 첫째는 말이나 돌과 같은 토큰을 다루는 게임이고 둘째는 수치화할 수 있다는 것이며 셋째는 놀이에 참여하는 선수가 유한하다는 것이다.

우리네 장기의 경우, 궁을 비롯해 차ㆍ포ㆍ마ㆍ상ㆍ졸 등의 말들은 형식체계의 기본용어들에 해당하는 것으로서 서로 다른 단순한 토큰들의 특성을 나타낸다. 그리고 형식체계의 공리들은 말들의 출발위치를 지적하는 것으로 볼 수 있고 정형을 형성하는 규칙들은 복합 토큰들을 만들 수 있는 규칙들을 말한다. 끝으로, 추리규칙인 변형규칙들은 하나의 위치에다 새로운 정형을 추가하는 규칙들로 풀이된다.

이와 같이 토큰을 다루는 형식게임의 규칙들은 가령, 장기의 규칙들처럼 장기놀이에만 해당하며 장기놀이 이외의 외부세계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하면, 형식체계는 자기귀속적 (self-contained) 이라는 형식적 속성을 지니기 때문에 외부세계와 관련되는 의미의 문제는 제외된다. 장기놀이의 경우, 말들을 이루고 있는 실질적인 매체가 참나무든 플라스틱이든 또는 종이이든 상관없듯이, 형식게임은 매체독립적이다. 이것은 질료의 구속으로부터 해방된 형상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당구의 경우는 당구알의 물질적 요소가 경기에 영향을 주며 권투의 경우, 어떤 글러브를 사용하느냐의 문제가 게임의 종류를 달리 할 수도 있으므로 이들은 형식게임이 아니다.

다음으로 형식게임이 디지털 시스템이라는 특성을 살펴보자. 이것은 '쓰기/읽기 돌림' (write/read cycle) 기술들의 집합을 뜻한다. 가령, 장기에서 새로이 한 수를 두는 것처럼 하나의 토큰을 쓴다는 것은 특정한 유형 하나를 산출하는 것이고, 하나의 토큰을 읽는다는 것은 새 수의 위치를 확인하는 것과 같이 산출된 유형이 무엇인지를 규정하는 것이다. 디지털 시스템은 바로 이러한 쓰기와 읽기를 반복해 돌리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디지털 시스템이라고 하면 수량화를 예상하는데 그것은 실증적이고 신뢰할 만한 기술들이 있음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가령, 우리가 2미터 길이의 나무토막을 자른다고 할 경우, 엄밀하게 해서 1미터 99센티에서 2미터 1센티 정도이면 그것을 2미터 나무로 사용할 수 있고 그렇게 자를 기술이 있다고 하자. 그러면 이런 방식으로 자르는 기술을 실증적 기술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흔히들 이 세상에는 완전한 것이 하나도 없다고 말하지만 이렇게 수치계산을 하는 디지털 시스템에서는 완전한 것이 있을 수 있다. 그리고 디지털 시스템은 재생 반복이 가능하다. 예컨대, 당구의 경우는 한번 치고 나면 꼭같은 게임을 다시 반복할 수 없고 다만 비슷하게 할 뿐이지만, 디지털 시스템으로 풀이되는 바둑과 같은 형식게임에 있어서는 정확히 일치하는 반복이 가능하다.

끝으로 형식체계는 정해진 유한한 수의 선수들이 참여하는 게임이며 그 선수들은 갖추어야 할 것들이 있다. 즉, 어떤 수를 두고자 할 때 그들은 수가 합법적인지를 판별하는 능력을 갖추어야 할 것이고 적어도 그런 합법적 수준을 산출할 능력을 갖추어야 한다. 아니면 주어진 상황에서 합법적인 수가 없다는 것을 밝힐 능력이라도 갖추어야 할 것이다. 이처럼 형식게임의 유한한 순수들이 원초적으로 갖추어야 할 능력은 '규칙을 따르는 능력' (rule-following abilities) 이다. 이 규칙준수의 능력은 알고리즘 (algorithm) 으로서 규정된다. 알고리즘은, 사전에 몇 단계라는 것이 결정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언제나 정해진 결과를 산출하는 절차가 유한단계이어야 하고, 그 유한절차를 거치면 실증적으로 성공이 보증된다는 의미에서 오류불가능해야 한다.

카르납의 인공언어와 인공지능 언어가 다 같이 형식체계이며 위에서 규정한 바와 같은 형식게임이라고 할 때 그 한계와 범위는 뚜렷해진다. 다시 말하면, 그것은 실질적 내용을 담고 있는 비형식적 게임을 할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하다. 토큰 처리 시스템이고 디지털 시스템이며 유한놀이 시스템인 형식게임이 적용가능한 영역 안에서는 인공지능도 가능하다고 하겠다. 그러므로 이러한 형식게임은 구문론에만 한정할 것이 아니라 형식적인 순수 의미론 (pure semantics) 이나 순수 어용론 (pure pragmatics) 도 가능하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실상, 카르납도 초기에는 이론철학으로 규정한 과학의 논리를 논리적 구문론에 한정하였으나 그후 순수 의미론으로 이를 확장했고 순수 어용론도 지향함으로써, 이론철학은 '과학언어의 기호론' (semiotics of scientific language) 이라고 하였다. 이와 같은 맥락과 관련해서 오늘날 인공지능이 구문론에만 한정될 수밖에 없다는 측과 이를 확장할 수 있다는 측의 논쟁을 해결할 실마리가 보이는 것 같다. 실상 인공지능 분야에서 논의되는 의미론과 어용론은 형식적인 것으로만 여겨진다.

그리고 컴퓨터의 등장으로 뚜렷한 개혁을 일으키고 있는 분야들이 있다. 예컨대 학교ㆍ은행ㆍ관청ㆍ회사 등의 각종 행정적 사무에서 업무가 신속하고 정확하게 처리되는 것은 그것들 모두가 형식게임이 적용가능한 분야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과거 정신노동으로 분류되었던 것들 중에서 많은 것이 컴퓨터에서 맡겨지고 있으며, 이것은 분명히 '사고혁명' 이라고 불릴 만한 엄청난 변화를 초래했다. 앞으로도 그러한 형식게임의 영역을 넓혀감에 따라 예측하기 어려운 변화를 일으킬 것으로 기대되는 바이다. 과거에는 형식게임이 불가능하다고 믿어왔던 많은 분야들에 그것이 적용될 수 있음을 보였다. 그렇다고 해도, 형식게임이 글자 그대로 불가능한 영역에서까지 인공지능을 적용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기는 아직 어렵다고 하겠다.

6. 프래그머티즘과 일반문제해결

서론에서 이미 인공지능 구성의 철학으로서 프래그머티즘을 언급한 바 있으며 앞에서 논한 논리실증주의의 사상들 중에서도 암암리에 프래그머티즘적인 요소들이 드러나고 있었다. 디지털 시스템의 필수적인 실증적 기술이라는 것이 실천상의 결과에 의해 평가되었으며, 언어를 그림이론에서처럼 존재론적인 것으로 보지 않고 자유로운 선택의 대상으로 보게 될 때 선택의 기준은 결국 실천의 도구적 요인과 연결되게 마련이다. 즉 여러 언어 중에서 하필이면 그 언어를 택했느냐고 물을 것 같으면, 결국 그 언어가 해당 대상영역을 잘 다룰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되기 때문이라는 논조의 답을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리고 논리실증주의의 인식적 의미기준으로서 많은 논쟁의 대상이 되었던 검증 가능성의 원리도 그 어떤 사실을 기술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서는 하나의 제안이며 그 수락 여부는 실천적 목표와 연관하여 결정될 문제였다. 이런 사실들만 보아도 논리실증주의와 프래그머티즘은 결합될 소지가 많았다고 하겠으며 실제로 이들이 결합되는 시기였던 1950년대에 인공지능이 탄생한 점도 주목할 만하다.

인공지능을 인간이 부딪친 문제들을 해결하는 도구로 간주하는 도구주의 철학은 프래그머티즘으로부터 유래되었다고 하였다. 프래그머티즘의 창시자인 퍼스 (C. S. Peirce : 1839~1914) 에 의하면, 사고는 의심의 자극을 받아 활동하게 되며 신념을 형성하는 목표에 도달하여 휴식을 취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의심이라는 말은 적든 크든 어떤 물음을 발하는 것을 가리키고 신념이라는 말로는 물음의 해결을 가리키는 것으로 사용된다. 그러므로 인간 지능에 의한 사고는 망설임이나 미결단상태 등에서 의문을 일으키는 문제상황으로부터 신념에 도달하여 의심이라는 흥분상태를 가라앉히고 안정된 휴식을 취하는 문제해결의 과정이다. 인간은 이렇게 쉬었다가는 다시금 활동하고 이를 반복해 가면서 살아간다. 사고의 유일한 기능은 신념을 확립하는 것이다. 우리는 신념을 행동의 규칙, 즉 관습을 형성하는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우리의 사고는 언제까지나 확립된 신념에 안주하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그리하여 퍼스는 신념을 가리켜, 우리의 지적 생활이라는 심포니를 구성하는 하나의 악구를 종결하는 반종지부라고 하였던 것이다.

프래그머티즘에서 사고는 의심으로부터 신념에 이르는 활동이기 때문에 행동과 분리될 수 없다. 여기서 회의는 데카르트의 방법적 회의처럼 관념의 세계에서만 이루어지는 회의가 아니라 실생활의 경험세계에서 일어나는 생생한 문제가 담긴 회의이다. 인간은 다른 생물들처럼 환경에 적응해야 하고 살아가면서 부딪치는 문제들을 본능적 충동에 의해 해결하거나 이미 문제해결의 경험으로 얻은 신념이나 관습에 의해 해결된다. 그러나 충동이나 관습에 의해 인간의 적응행위가 제대로 잘 되지 않을 경우, 발생하는 의심의 충동은 인간의 지성을 일깨워 활동하도록 한다. 과거에 그렇게 하여 왔으니 그렇게 하여야 한다는 반복의 방법이나 고집의 방법은 변화하는 자연환경, 특히 급변하는 사회환경에 적응할 수 없게 마련이다.

전체주의 사회에서처럼 하나의 가치체계가 지배하던 사회에서는 기존의 가치체계를 권위로서 받아들이고 이를 실천하는 것만이 중요했으나, 다원화된 가치체계에서는 권위들간의 마찰 때문에 권위에만 의존할 수 없다. 그리하여 무조건 권위만을 내세워 굴종을 강요해온 권위주의는 배격되어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참다운 신념의 권위나 미풍양속이라는 관습의 권위마저도 배격하는 결과를 초래해서는 안될 것이다. 권위는 분명히 인류가 오랫동안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얻은 문화전통을 단시일 내에 습득하게 할 수 있는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음을 망각해서는 안될 것이다. 물론 권위는 진리전달의 수단은 되지만 진리판별의 기준이 못된다는 점에 유의할 필요는 있다.

이리하여 퍼스는 신념을 확정하는 방법은 고집이나 권위의 방법이 아니고 과학적 탐구의 방법이라고 하였다. 특히 듀이 (John Dewey : 1859~1952) 는 탐구 (inquiry) 의 개념을 문제해결의 논리로 체계화하여 교육 분야를 비롯해 여러 분야에서 발생하는 문제해결에 활용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진리는 관념과 사실의 일치라고 보아온 전통철학의 진리대응설을 주관과 객관의 정적인 대립을 전제로 한 것이라고 해서 배격하였다. 듀이는 탐구의 맥락을 떠나 관념과 사실을 논하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보았다. 탐구의 출발은 문제상황이며 여기서 암시되는 문제들 중에서 다루어야 할 문제를 선정하여 문제정립을 해야 한다. 관념 (idea) 은 이렇게 확립된 문제와 관련하여 제기되며 다루어야 할 문제의 해결방안에서 나타나므로 일종의 가설의 성질을 지니게 된다. 문제해결의 여러 가지 아이디어들을 가설로 설정하고 나서, 우리가 지금까지 경험한 바를 음미하고 추리 검토하여 그 중에서 최선의 가설을 선택하고, 선택된 가설을 행동의 지침으로 삼아 실천에 의해 검사함으로써 문제해결에 이른다. 그리하여 듀이에 의하면 진리는 행동에 의해 보증받은 주장이라고 하였던 것이다.

듀이의 탐구의 논리는 인공지능 분야에도 여러 가지로 적용되지만 특히 일반문제해법 (general problem solver, GPS 로 약칭됨) 에서 전형적인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여기서는 문제상황을 초기상태로 하고 문제가 해결된 상태를 목표상태로 보며, 문제해결의 과정은 목표상태와 초기상태의 차이를 계산하고 이 차이를 감소 또는 제거하는 데 필요한 오퍼레이터들을 선택한다. 이렇게 차이를 감소시키는 오퍼레이터를 선택하는 절차를 수단/목표분석 (means/ends analysis) 이라고 한다.

이를 설명할 때 즐겨 사용해온 것으로 원숭이가 바나나를 손에 넣는 문제가 있다. 즉 원숭이 한 마리가 방 안에 있고 바나나 하나가 천정에서 늘어뜨려져 있다. 그리고 이 방안에는 상자가 한 개 있다. 그 원숭이는 바나나를 먹고 싶은데 직접 손으로 잡을 수 없는 높이에 있는 문제상황이 초기상태를 이루고 있다. 원숭이는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이 문제에서 주목표 (main goal) 는 원숭이가 손에 바나나를 잡는 상태라고 하면, 이 주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필수적으로 여러 가지의 종속목표들 (subgoals) 이 상정된다. 예컨대, 상자를 바나나 밑으로 옮겨 놓는 장소이동의 상태변환을 목표로 해야 하고 상자 위에 올라가는 목표와 바나나를 손에 잡는 목표 등이 주목표에 따르는 하위의 종속목표로 형성된다. 여기에 작용하는 오퍼레이터들은 '걷는다', '상자를 움직인다', '올라간다', '바나나를 잡다' 등으로서 술어논리의 술어들에 해당된다. 그리고 차이로는 '원숭이의 위치에 관한 차이', '상자의 위치에 관한 차이', '원숭이가 갖고 있는 것에 관한 차이' 등이 있으며 이들 차이는 그 중요성에 따라 순서를 정하고 그 차이표를 작성하여 문제해결에 접근해 가는 것이 GPS 의 기본이라고 할 수 있다.

GPS 가 문제해결을 시도하는 것은 프래그머티즘으로부터 이어받은 탐구의 논리라고 하겠으나 그 문제해결의 방법은 기계인 컴퓨터를 활용해야 하기 때문에 문제해결의 절차는 형식화된 알고리즘으로 만들어야 했다. 그리하여 이런 알고리즘에는 앞서 논한 논리실증주의의 기호처리의 방법, 특히 술어논리가 널리 활용되었다. 바로 이러한 일반문제해법과 같은 사례가 프래그머티즘과 논리실증주의를 결합시킨 전형이라고 하겠다.

7. 퍼스의 상정논법과 가설주의

카르납의 구문론에서 추리규칙들은 전제로부터 결론을 필연적으로 도출하는 연역법이었으나, 프래그머티즘에서 문제해결에 도달하는 과정은 가설의 설정을 핵심으로 하기 때문에 연역법에만 의존할 수 없다. 그리하여 퍼스는 가설 발상의 논리로서 상정논법 (想定論法, abduction) 을 제시하였으며 이것은 오늘날 인공지능 분야에서도 널리 채용되고 있다.

퍼스 (Charles Sanders Peirce) 의 프래그머티즘 (실용주의) 은, 무조건적인 정언명법 (定言命法) 을 실천해야 하는 칸트의 도덕적 행위와는 달리, '현세적 행복의 조건이 충족된다면 추구하라' 는 형식의 가언명법 (假言命法) 적 실천에 치중한 것이다. 이와 같은 사고방식은 프래그머티즘의 과학철학에도 그대로 반영되어 가설주의 (假說主義, hypotheticalism) 를 표방하게 된다.

가설은 문제해결의 논리에서도 행동의 방향을 결정하는 지침이다. 퍼스에게서 문제해결로 간주되는 신념의 확립은 특정한 순간에 특정한 개인들이 갖게 되는 심리상태가 아니라 과학적 탐구의 결과로 얻게 된 공적인 산물이다. 따라서 과학적 탐구의 철학적 검토는 결코 경시될 수 없다. 그는 과학자들이 사용하는 일반적인 용어의 의미를 분명히 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가언언명의 형식으로 바꾸어 사용해야 한다고 보았다. 가령, '딱딱함' 이라고 하는 일반적 용어는 일상생활에서 '이것은 딱딱하다' 라는 단칭 정언언명의 형식으로 표현되어 왔다. 그러나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보다 분명히 하려면, '만약 우리가 이것을 할퀴었으면 우리는 이것에 상처를 내지 못했을 것이다' 라는 따위의 가언언명의 형식은 바꾸어야 한다는 말이다.

퍼스가 이런 가언언명을 기반으로 하였다고 해서 화이트가 퍼스의 프래그머티즘을 가설주의ㆍ조작주의ㆍ실험주의로 지칭한 것은 흥미있다. 화이트가 퍼스를 가설주의라고 하는 것은 그가 이처럼 반사실적인 조건언명으로 제시된 가설을 기반으로 하기 때문에, 그 조건언명의 전건언명은 '할퀸다' 고 하는 식의 조작을 기반으로 하기 때문에 '조작주의' (operationalism) 라고 하였고 그 후건언명은 '상처를 내지 못한다' 와 같이 검사조건이 시행되고 나서 실험자에 의해 관찰 또는 조사된 바를 말하기 때문에 '실험주의' (experientialism) 라고 호칭한 것이다.

그러면 문제에 부딪쳤을 때 그 해결의 방안으로 여겨지는 가설들을 우리는 어떻게 얻게 되는가? 가령, 어떤 사람이 비틀거리며 걸어간다고 하자. 왜 그런가? 이런 경우, 우리는 그 '왜' 라는 물음에 답하기 위해 무엇을 생각해내야 하는가? '만약 사람들은 술에 취하면 비틀거리며 걸어간다' '그러므로 그는 술에 취하였다' 라고 상정한다고 하자. 이를 도식화하면 다음과 같다.

    1. 어떤 이상한 사실 C 가 관찰되었다.
    2. 그런데 만약 가설 H 가 참이라고 하면 C 는 이상하지 않다.
    3. 그러므로, H 가 참이라고 상정할 만한 이유가 있다.

퍼스에 의하면 이런 방식으로 가설을 추측해 상정하는 것도 일종의 근거있는 추리이므로 논리라고 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이 논리는 전제가 참이면 결론이 필연적으로 참이 되는 연역법 (deduction) 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귀납법 (induction) 도 아닌 'abduction' 이라고 하였다. 이것은 '가설발상법' 이라고도 번역되어 왔으나 오늘날은 이것이 가설검사에도 채용되므로 양자를 모두 포괄할 수 있는 보다 넓은 의미에서 우리는 '상정논법' 으로 번역하기로 한다. 특히 'abduction' 은 전제가 참이지만 결론이 거짓일 수 있는 비논증적 추리이기 때문에 이를 지칭하는 넓은 의미의 귀납법에 속하며 그런 비논증적 추리의 중요한 논법중의 하나라는 의미로 상정논법이라고 한다.

오늘날 상정논법은 과학철학 분야에서 우선 검사의 논리와 관련하여 여러 가지로 논의되고 있다. 모든 과학적 지식은 경험으로부터 나온다는 경험주의 및 실증주의의 사상은 설득력있는 많은 장점에도 불구하고 경험을 떠나 있는 과학적 지식을 적절히 다룰 수 없는 한계에 부딪쳐 있다. 예컨대, 과학의 이론들은 대체로 경험을 떠난 추상적 개념들을 갖게 마련인데, 이러한 이론적 개념과 관찰경험을 어떻게 연결시킬 것인지가 문제이다. 그리하여 상정논법은 이론의 검사방법으로도 채용된다. 가령, 검사를 필요로 하는 어떤 이론 T 가 있다고 했을 경우, 'T 가 참이라면 O 가 관찰될 것이다' 를 전제하고 실제로 O 가 관찰되었다면 T 가 참이라고 상정 (想定) 할 만한 이유가 있다고 판정하는 것이 그것이다.

그러나 상정논법이 여러 가지 가설을 상정하는 논법으로서 각광을 받고 있는 것만은 틀림이 없다. 최근 논의되어 온 상정논법들로서, 단순 상정논법 (simple abduction)ㆍ존재 상정논법 (existential abduction)ㆍ규칙에의 상정논법 (abduction to rules)ㆍ유추 상정논법 (analogical abduction) 등이 있다.

가령, 저 젊이는 왜 저렇게 남루한 옷을 입었는가? 라는 의문에서, '어떤 젊은이가 록 음악을 하게 되면 남루한 옷을 입는다' 라는 전제로 그 젊은이가 록 음악을 하는 경우를 상정해 보자. 이런 종류의 추리는 단순히 어떤 개체가 어떤 성질을 가졌다는 가설을 상정하는 데 불과하기 때문에 이를 단순 상정논법이라고 한다. 상정논법은 물론 논리적 추리의 일종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의문나는 현상에 부딪쳤을 때 자연스럽게 연결되어 일어나는 심리현상으로 간주되어 학습활동에 쓰인다.

다음에, 가령 병이 번지는 현상을 연구했던 파스퇴르 (L. Pasteur) 가 확인되지 않은 전염자의 존재를 상정한 것이나, 천왕성이 예상치 않았던 궤도로 운행하는 사실로부터 알려지지 않은 어떤 행성의 존재를 상정했던 결과 해왕성을 발견한 사례들은 모두 상정논법을 특정한 존재를 발견하는 데 사용한 이른바 존재 상정논법이라고 하겠다. 이런 방식은 과학에서뿐만 아니라 어떤 형이상학적 존재를 상정하는 데도 활용될 수 있을 것이다. 만물이 어떻게 해서 나타나게 되었는가? 만약 창조주가 존재한다면 만물이 나타나게 된 것은 이상할 것이 못된다. 그러므로 창조주가 존재한다고 상정하는 것은 이유가 있다.

지금까지의 상정논법은 특정한 개체에 관한 정보를 추측하거나 짐작해 보는 것이었으나, 개별자가 아닌 일반법칙이나 규칙들을 상정하는 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법칙이나 규칙들이 체계를 이루고 있는 것이 이론이라면 이론형성의 상정논법이 가능한가? '만약 F(x) 면 G(x) 이다' 와 'G(x)' 로부터 F(x) 를 추리하는 단순한 도식이 일반적 규칙을 산출한다고 볼 수 없다. 이를 형식논리로 보면 후건긍정의 오류를 범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이론형성에 도움이 되지 않는 상정이 있을 수 있고, 상정논법과 다른 일반화들이 결합되어 법칙이나 규칙들을 산출하는 방식이 있다고 하겠다.

하나의 이론이 일단 확립되면 과학자들은 그와 유사한 방식으로 설명하려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뉴턴의 위대한 역학이론이 확립된 이래 18세기와 19세기의 과학자들이 다양한 현상들에 대해 역학의 기계론적 설명을 시도해 온 것도 바로 그러한 경향을 나타낸 것이다. 이리하여 유사성을 근거로 한 유비추리가 과학자들 사이에도 널리 채용되어 왔다. 유비 상정논법도 이러한 맥락에서 검토될 수 있다. 즉, 과거에 성공적으로 해결한 문제에 유비하여 새로운 당면문제 해결의 가설을 상정하는 논법은 경험으로부터 배우면서 그 경험을 뛰어넘는다는 의미로도 매우 중요하다. 이 추리는 '가설 H 가 C1 경우에 바른 설명을 하였고, C1 이 현재의 경우 C2 와 여러 가지 관점에서 유사하다면 H 와 유사한 것이 C2 에도 작용할 것이다' 의 형식이다. 다윈이 자연선택 (natural selection) 에 의한 진화의 이론을 발견하게 된 추리는 유추 상정논법을 기반으로 한 것이라고 한다. 다윈은 개나 비둘기 등의 품종 개량을 하는 일에 친숙했다. 가령, 어떤 특정한 품종의 개를 산출하고자 한다면 이전에 알려진 경우들로부터 도출된 규칙들을 사용하여, 원하는 개가 나올 때까지 바라는 특성들을 선택한 자들이 틀림없이 있어왔음을 암시하게 된다. 다윈은 이러한 인간의 인위적 선택의 결과로 품종이 바뀌어 왔다는 사실에서 비약하여, 자연의 품종변화도 어떤 알려지지 않은 자, 즉 자연이 선택해온 결과라고 상정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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