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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환기 정의’ 캄보디아 재판, 통일 후 북한에도? /한겨레신문

이윤진이카루스 2016. 9. 10. 07:28

문화책과 생각

‘전환기 정의’ 캄보디아 재판, 통일 후 북한에도?

등록 :2016-09-08 19:32수정 :2016-09-08 21:57

 

자국민 인권유린 ‘크메르 루주’
고위층 단죄과정 첫 본격 연구
통일 뒤 북한 적용 가능성 검토
유엔캄보디아 특별재판부 연구
강경모 지음/TJM전환기정의연구원·2만2000원

“지상에 천국을 건설하겠다는 시도가 늘 지옥을 만들어낸다.”

철학자 카를 포퍼가 캄보디아를 피로 물들인 ‘크메르 루주’를 겨냥해 이 말을 한 것 같지는 않지만, 그들의 오도된 이데올로기가 초래한 참혹한 결과를 표현할 이보다 더 적확한 말을 찾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크메르 루주는 실제로 공산주의에 입각한 ‘농업 유토피아’의 건설을 꿈꿨다. “대중은 그들(자본주의자와 봉건주의자)로 인하여 피흘리며 고통받고 있다. 혁명의 목표는 그들로부터 인민을 해방시키는 것이다.”

1975년 4월17일 집권 이후 크메르 루주 지도자 폴 포트는 모든 도시에서 인민을 농촌으로 소개시키고, 시장과 화폐를 폐지하며, 가정을 해체하고 사회를 협동조합 중심으로 재조직하는 내용 등을 담은 8개항 지침을 만들어 실행에 옮긴다. 부동의와 저항은 혁명과 해방의 이름으로 분쇄했다. 이들이 북베트남과 무력분쟁 끝에 다시 밀림으로 쫓겨난 1979년 1월7일까지 채 4년이 못 되는 기간 170만~220만명이 학살당했다. 당시 캄보디아 인구가 800만명쯤이었으니, 국민의 약 4분의 1이 희생된 셈이다.

“피해자들은 파헤쳐진 구덩이 끝자락에 무릎을 꿇린 상태에서 총살되거나, 삽·곡괭이 등으로 뒷머리를 가격당하거나, 비닐봉지 등으로 질식되어 살해되었다. 이들은 거대한 무덤에 100여 구 정도씩 매장되었다.”

‘킬링 필드’의 생지옥이 막을 내리고도 고위 책임자들의 단죄를 포함한 과거사 청산, 즉 ‘전환기 정의’(Transitional Justice)를 시작하기까지는 다시 한 세대가 걸렸다.

강경모 미국 워싱턴주 변호사가 쓴 <유엔캄보디아특별재판부 연구>는 크메르 루주 지도자들에 대한 최초의 형사처벌 논의부터 유엔의 결의, 실제 재판부 설치와 수사 및 기소, 공판 과정, 관할과 적용 법률 등 법정에서의 쟁점, 판결 요지, 이 재판소의 성과와 한계 등을 관련 기록과 문서를 토대로 꼼꼼히 정리하고 소개한 국내 최초의 본격 연구서다.

전환기 정의라는 개념이 낯설다면 제2차 세계대전 후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이나 도쿄 전범 재판을 떠올리면 이해가 쉬울 듯하다. 김영삼 정부의 ‘역사 바로 세우기’ 수사와 재판, 김대중·노무현 정부의 과거사 정리와 진상규명 작업도 좁은 의미에서 전환기 정의 조치에 해당한다.

크메르 루주의 잔인한 인권 유린은 행위 시점에서 국제법과 캄보디아의 실정법을 공히 위반한 것이었다. 때문에 그들이 실각하고도 30년 만인 2006년 출범한 캄보디아특별재판부(ECCC, Extraordinary Chambers in the Court of Cambodia)는 유엔이 재판의 절차와 운영을 지원하는 국제 재판소이면서 캄보디아 법원의 일부로 설치됐다. 이 ‘혼합형 재판소’의 성과와 한계는 분명하다. 국가주석을 지낸 키우 삼판, 당 2인자였던 누온 체아, ‘캄보디아판 아우슈비츠’인 투올 슬렝(강제수용소) 소장 두치 등 고위 책임자 일부를 법정에 세웠지만, 살육을 실행한 중·하위 관리들까지는 처벌 범위에 넣지 못했다.

그럼에도 지은이가 이 재판소에 주목한 이유는 북한 때문이다. “이 책은 캄보디아에서 진행 중인 전환기 정의의 이행 과정을 통해 통일 이후 북한에서 전환기 정의를 실현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는 하나의 시도다.”

유엔북한인권조사위원회(COI)가 2014년 2월 발표한 북한인권 보고서를 보면, 북한의 인권 침해 실상은 크메르 루주 시절 캄보디아와 별반 다르지 않다. 유엔이 인정한 주권 국가의 공식 대표로 집권하고 있으면서 강제수용소 등을 설치해 대규모 인권 침해를 저지른 것이나 국제정치 환경에서 묵인 또는 비호하는 강대국이 뒤를 봐주는 점 등이 그러하다. 위원회는 당시 전환기 정의를 언급하면서 ‘인도에 반하는 죄’ 등을 물어 북한의 최고위 책임자를 국제형사재판소(ICC) 또는 임시국제재판소 법정에 세울 것을 권고했었다.

“내전 종식 후 유엔의 지원으로 성립한 현재의 캄보디아 정부가 과거 캄보디아를 지배하던 크메르 루주 구성원들을 처벌한 과정은 통일 이후 북한의 인권범죄를 처리하는 데 중요한 참고자료가 될 것이다.”

10년 전 시작된 크메르 루주 재판은 지금도 진행형이다. 강제수용소 소장 두치는 35년형을 받아 복역 중인 반면, 1심에서 종신형을 선고받은 키우 삼판과 누온 체아는 무죄를 주장하며 항소했다. 이미 기소된 사람들 외에 5명의 수사가 추가로 개시됐으나, 한때 크메르 루주 구성원이었던 훈센을 수반으로 하는 캄보디아 정부의 비협조로 난항을 겪고 있다. 그보다 앞서 최고 지도자 폴 포트는 1998년 4월 병사해 단죄를 면했다.

강희철 기자 hckang@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