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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적 객관성은 어떻게 유지되는가

이윤진이카루스 2022. 11. 12. 1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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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학적 객관성은 어떻게 유지되는가?

 

소위 과학적 객관성은 개별 과학자들이 지니는 불편부당성의 산물이 아니라 과학적 방법의 사회적 혹은 공공적 특성의 산물이라고 일컬어질 것이다; 그래서 개별 과학자의 불편부당성은, 그것이 존재하는 한, 과학의 사회적으로 혹은 제도적으로 조직된 이 객관성의 근원이 아니라 오히려 결과이다.

칸트주의자들과 헤겔주의자 모두는 우리가 지닌 선입견들이 (그것들이 우선, 의심할 바 없이 경험을 우리가 능동적으로 만드는데 우리에게 필요한 필수적인 도구이기 때문에) 결심에 의하여 변할 수도 없고 경험에 의하여 반증될 수도 없다고 전제하는 동일한 실수를 저지른다; 모든 사고(思考)의 기본적 선입견들이기 때문에 우리의 선입견들은 이론을 실험하는 과학적 방법을 초월한다고 전제하는 동일한 실수. 그러나 과학에서 이론과 경험 사이의 관계를 오해하는 데 근거하여, 이것은 과장이다. 아인슈타인이 경험에 비추어, 심지어 공간과 시간에 관하여 우리가 지닌 선입견들도 우리가 의문시하고 수정할 것임을 밝혔을 때 우리 시대의 가장 위대한 업적 중 하나였다. 그 선입견들은 모든 과학의 필수적 선입견이라고 믿어지고 그 과학의 범주적 장치(categorial apparatus)’에 속한다고 믿어져왔던 관념들이었다. 그리하여 지식사회학에 의하여 과학에 가해진 회의적인 공격은 과학적 방법에 비추어서 무너진다. 경험적 방법은 스스로 완전히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음을 증명하였다.

그러나 우리가 지닌 편견을 모두 일시에 제거함에 의하여 경험적 방법이 스스로 완전히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경험적 방법은 우리가 지닌 편견을 하나씩만 제거할 수 있다. 이 요점에서 고전적 경우가 다시 시간에 관한 우리의 편견을 아인슈타인이 발견한 것이다. 아인슈타인은 편견을 발견하려고 시작하지 않았다; 그는 심지어 공간과 시간에 대한 우리의 관념을 비판하려고 시작하지도 않았다. 그가 지녔던 문제는 물리학의 구체적인 문제인데 이론에 비추어 서로 모순이 되는 듯했던 다양한 실험 때문에 무너졌던 이론을 다시 초안하는 것이었다. 아인슈타인은 대부분의 물리학자들과 함께 이것은 그 이론이 허위임을 의미함을 깨달았다. 그래서 모든 사람에 의하여 당시까지 자명하다고 믿어져서 그리하여 주목을 피해갔던 요점에서 우리가 그 이론을 수정한다면 난제가 제거될 수 있음을 그는 발견했다. 다시 말해서, 그는 과학적 비판과 이론의 창안 및 제거라는 방법인 시행착오라는 방법을 적용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이 방법으로 인하여 우리가 지닌 모든 편견이 폐기되지 않는다; 오히려, 오직 편견을 제거한 후에야 우리가 편견을 지니고 있었다는 사실을 우리가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주어진 여하한 순간에도, 우리의 과학적 이론은 그 순간까지 이룩된 실험 기타 등등에 의존할 뿐 아니라, 당연시되는 편견에도 의존하여 (특정 논리적 방법의 적용이 우리가 그 편견을 탐지하는 데 도움을 줄지라도) 우리는 그 편견을 의식하지 못했음이 틀림없이 인정되어야 한다. 아무튼 이 외피(外皮)와 관련하여 과학은 그 외피의 얼마간을 배울 수도 있고 부술 수도 있다고 우리는 말할 수 있다. 그 과정은 완결되지 않을 것이지만, 그 과정이 앞에서 멈추어야 하는 고정된 장애물은 없다. 원칙적으로 여하한 상정(想定)도 비판을 받을 수 있다. 그리고 누구도 비판할 것임이 과학적 객관성이다.

과학적 결과는 그 결과가 과학적 발전의 특정 단계에 속하는 결과물이어서 과학적 진보과정에서 대체되기 쉬운 한에서만 상대적이다 (이 용어가 조금이라도 사용될 수 있다면). 그러나 이것이 진리상대적이라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한 주장이 참이면 그 주장은 영원히 참이다. 그것은 대부분의 과학적 결과들에 가설의 특징, 다시 말해서 그 서술에 대하여 증거가 불확정적이어서 어느 때고 수정될 수 있는 서술의 특징이 있음을 의미할 뿐이다. 이 고찰은 (내가 다른 곳에서 보다 자세하게 다루었다), 사회학자들을 비판하는 데는 필요하지 않을지라도, 사회학자들의 이론에 대한 이해를 촉진하는 데 아마도 도움을 줄 것이다. 나의 주요 비판으로 돌아와서 이 고찰로 인하여 또한, 과학적 비판과 과학적 진보에서 방법의 협력, 상호주관성, 그리고 공공성이 수행하는 중요한 역할이 어느 정도 밝혀진다.

사회과학이 아직도 방법에 관한 이 공공성에 도달하지 못한 것은 사실이다. 이것은 부분적으로 지성을 파괴하는 아리스토텔레스와 헤겔의 영향 때문이고, 또한 부분적으로 과학적 객관성이라는 사회적 도구를 그들이 이용하지 못한 이유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실제로 이데올로기 총체인데, 혹은 다르게 표현하여, 몇몇 사회과학자는 공동의 언어로 말할 수 없고 심지어 그 언어로 말하려는 의지도 없다. 그러나 이유는 계급이해가 아니며, 치료법은 헤겔의 변증법적 종합도 아니요, 자기-분석도 아니다. 사회과학에 열려있는 유일한 과정은 말장난에 관하여 완전히 잊고 우리 시대의 실제적 문제를 모든 과학에서 근본적으로 동일한 이론적 방법의 도움을 받아 다루는 것이다. 시행착오의 방법인 실제로 실험될 수 있는 가설을 고안하여 그 가설들은 실제적 시험에 부치는 방법을 나는 의미한다. 그 결과가 점진적 사회공학에 의하여 시험될 수 있는 사회적 기술이 필요하다.

사회과학을 위하여 여기에 제시된 치료법은 지식사회학들에 의하여 제시된 치료법과 완전히 반대다. 이 과학들의 방법론적 난제를 야기하는 것은 그 과학들의 비실제적 특성이 아니라 오히려 실제적이고 이론적인 문제들이 사회적 및 정치적 지식 분야에서 너무 많이 얽혀있다는 사실이라고 사회학주의는 믿는다. 그리하여 우리는 지식사회학에 관한 주요 저술에서 다음과 같은 글을 읽을 수 있다: ‘정치적 지식의 특이성은, “정확한지식과 반대로, 지식과 의지 혹은 합리적 요소와 비합리적인 것의 범위가 불가분하게 그리고 본질적으로 얽혀있다는 사실에 놓여있다.’ 이것에 대하여 지식의지, 어떤 의미에서, 항상 불가분하다; 그리고 이 사실로 인하여 어떤 위험한 혼효(混淆)도 생길 필요가 없다고 우리는 답변할 수 있다. 어떤 과학자도 노력하지 않고, 흥미를 지니지 않고, 지식을 습득할 수는 없다; 그리고 그의 노력에는 보통 심지어 특정 양의 자기-이익이 포함된다. 기술자는 주로 실용적 관점에서 사물을 연구한다. 농부도 마찬가지다. 실습은 이론적 지식의 적이 아니라 이론적 지식에 대한 가장 귀한 장려책이다. 어느 정도의 초연함이 과학자에게 어울릴 것이지만, 과학자가 그렇게 초연한 것이 항상 중요하지는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많은 사례들이 있다. 그러나 과학자가 현실과, 실습과 접촉하고 있다는 것은 중요하다. 이유인즉 현실과 실습을 간과하는 과학자들은 학풍고집에 빠짐에 의하여 대가를 치러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발견한 것을 실제로 적용하는 것은, 우리가 사회과학으로부터 비합리주의를 제거할, 그리고 의지로부터 지식을 분리하려는 어떤 시도도 제거하지 않는, 수단이다.소위 과학적 객관성은 개별 과학자들이 지니는 불편부당성의 산물이 아니라 과학적 방법의 사회적 혹은 공공적 특성의 산물이라고 일컬어질 것이다; 그래서 개별 과학자의 불편부당성은, 그것이 존재하는 한, 과학의 사회적으로 혹은 제도적으로 조직된 이 객관성의 근원이 아니라 오히려 결과이다.

칸트주의자들과 헤겔주의자 모두는 우리가 지닌 선입견들이 (그것들이 우선, 의심할 바 없이 경험을 우리가 능동적으로 만드는데 우리에게 필요한 필수적인 도구이기 때문에) 결심에 의하여 변할 수도 없고 경험에 의하여 반증될 수도 없다고 전제하는 동일한 실수를 저지른다; 모든 사고(思考)의 기본적 선입견들이기 때문에 우리의 선입견들은 이론을 실험하는 과학적 방법을 초월한다고 전제하는 동일한 실수. 그러나 과학에서 이론과 경험 사이의 관계를 오해하는 데 근거하여, 이것은 과장이다. 아인슈타인이 경험에 비추어, 심지어 공간과 시간에 관하여 우리가 지닌 선입견들도 우리가 의문시하고 수정할 것임을 밝혔을 때 우리 시대의 가장 위대한 업적 중 하나였다. 그 선입견들은 모든 과학의 필수적 선입견이라고 믿어지고 그 과학의 범주적 장치(categorial apparatus)’에 속한다고 믿어져왔던 관념들이었다. 그리하여 지식사회학에 의하여 과학에 가해진 회의적인 공격은 과학적 방법에 비추어서 무너진다. 경험적 방법은 스스로 완전히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음을 증명하였다.

그러나 우리가 지닌 편견을 모두 일시에 제거함에 의하여 경험적 방법이 스스로 완전히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경험적 방법은 우리가 지닌 편견을 하나씩만 제거할 수 있다. 이 요점에서 고전적 경우가 다시 시간에 관한 우리의 편견을 아인슈타인이 발견한 것이다. 아인슈타인은 편견을 발견하려고 시작하지 않았다; 그는 심지어 공간과 시간에 대한 우리의 관념을 비판하려고 시작하지도 않았다. 그가 지녔던 문제는 물리학의 구체적인 문제인데 이론에 비추어 서로 모순이 되는 듯했던 다양한 실험 때문에 무너졌던 이론을 다시 초안하는 것이었다. 아인슈타인은 대부분의 물리학자들과 함께 이것은 그 이론이 허위임을 의미함을 깨달았다. 그래서 모든 사람에 의하여 당시까지 자명하다고 믿어져서 그리하여 주목을 피해갔던 요점에서 우리가 그 이론을 수정한다면 난제가 제거될 수 있음을 그는 발견했다. 다시 말해서, 그는 과학적 비판과 이론의 창안 및 제거라는 방법인 시행착오라는 방법을 적용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이 방법으로 인하여 우리가 지닌 모든 편견이 폐기되지 않는다; 오히려, 오직 편견을 제거한 후에야 우리가 편견을 지니고 있었다는 사실을 우리가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주어진 여하한 순간에도, 우리의 과학적 이론은 그 순간까지 이룩된 실험 기타 등등에 의존할 뿐 아니라, 당연시되는 편견에도 의존하여 (특정 논리적 방법의 적용이 우리가 그 편견을 탐지하는 데 도움을 줄지라도) 우리는 그 편견을 의식하지 못했음이 틀림없이 인정되어야 한다. 아무튼 이 외피(外皮)와 관련하여 과학은 그 외피의 얼마간을 배울 수도 있고 부술 수도 있다고 우리는 말할 수 있다. 그 과정은 완결되지 않을 것이지만, 그 과정이 앞에서 멈추어야 하는 고정된 장애물은 없다. 원칙적으로 여하한 상정(想定)도 비판을 받을 수 있다. 그리고 누구도 비판할 것임이 과학적 객관성이다.

과학적 결과는 그 결과가 과학적 발전의 특정 단계에 속하는 결과물이어서 과학적 진보과정에서 대체되기 쉬운 한에서만 상대적이다 (이 용어가 조금이라도 사용될 수 있다면). 그러나 이것이 진리상대적이라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한 주장이 참이면 그 주장은 영원히 참이다. 그것은 대부분의 과학적 결과들에 가설의 특징, 다시 말해서 그 서술에 대하여 증거가 불확정적이어서 어느 때고 수정될 수 있는 서술의 특징이 있음을 의미할 뿐이다. 이 고찰은 (내가 다른 곳에서 보다 자세하게 다루었다), 사회학자들을 비판하는 데는 필요하지 않을지라도, 사회학자들의 이론에 대한 이해를 촉진하는 데 아마도 도움을 줄 것이다. 나의 주요 비판으로 돌아와서 이 고찰로 인하여 또한, 과학적 비판과 과학적 진보에서 방법의 협력, 상호주관성, 그리고 공공성이 수행하는 중요한 역할이 어느 정도 밝혀진다.

사회과학이 아직도 방법에 관한 이 공공성에 도달하지 못한 것은 사실이다. 이것은 부분적으로 지성을 파괴하는 아리스토텔레스와 헤겔의 영향 때문이고, 또한 부분적으로 과학적 객관성이라는 사회적 도구를 그들이 이용하지 못한 이유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실제로 이데올로기 총체인데, 혹은 다르게 표현하여, 몇몇 사회과학자는 공동의 언어로 말할 수 없고 심지어 그 언어로 말하려는 의지도 없다. 그러나 이유는 계급이해가 아니며, 치료법은 헤겔의 변증법적 종합도 아니요, 자기-분석도 아니다. 사회과학에 열려있는 유일한 과정은 말장난에 관하여 완전히 잊고 우리 시대의 실제적 문제를 모든 과학에서 근본적으로 동일한 이론적 방법의 도움을 받아 다루는 것이다. 시행착오의 방법인 실제로 실험될 수 있는 가설을 고안하여 그 가설들은 실제적 시험에 부치는 방법을 나는 의미한다. 그 결과가 점진적 사회공학에 의하여 시험될 수 있는 사회적 기술이 필요하다.

사회과학을 위하여 여기에 제시된 치료법은 지식사회학들에 의하여 제시된 치료법과 완전히 반대다. 이 과학들의 방법론적 난제를 야기하는 것은 그 과학들의 비실제적 특성이 아니라 오히려 실제적이고 이론적인 문제들이 사회적 및 정치적 지식 분야에서 너무 많이 얽혀있다는 사실이라고 사회학주의는 믿는다. 그리하여 우리는 지식사회학에 관한 주요 저술에서 다음과 같은 글을 읽을 수 있다: ‘정치적 지식의 특이성은, “정확한지식과 반대로, 지식과 의지 혹은 합리적 요소와 비합리적인 것의 범위가 불가분하게 그리고 본질적으로 얽혀있다는 사실에 놓여있다.’ 이것에 대하여 지식의지, 어떤 의미에서, 항상 불가분하다; 그리고 이 사실로 인하여 어떤 위험한 혼효(混淆)도 생길 필요가 없다고 우리는 답변할 수 있다. 어떤 과학자도 노력하지 않고, 흥미를 지니지 않고, 지식을 습득할 수는 없다; 그리고 그의 노력에는 보통 심지어 특정 양의 자기-이익이 포함된다. 기술자는 주로 실용적 관점에서 사물을 연구한다. 농부도 마찬가지다. 실습은 이론적 지식의 적이 아니라 이론적 지식에 대한 가장 귀한 장려책이다. 어느 정도의 초연함이 과학자에게 어울릴 것이지만, 과학자가 그렇게 초연한 것이 항상 중요하지는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많은 사례들이 있다. 그러나 과학자가 현실과, 실습과 접촉하고 있다는 것은 중요하다. 이유인즉 현실과 실습을 간과하는 과학자들은 학풍고집에 빠짐에 의하여 대가를 치러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발견한 것을 실제로 적용하는 것은, 우리가 사회과학으로부터 비합리주의를 제거할, 그리고 의지로부터 지식을 분리하려는 어떤 시도도 제거하지 않는, 수단이다.

ㅡ 칼 포퍼, “열린사회와 그 적들”, II, 1971, 220-222쪽 ㅡ

 

it may be said that what we call 'scientific objectivity' is not a product of the individual scientist's impartiality, but a product of the social or public character of scientific method ; and the individual scientist's impartiality is, so far as it exists, not the source but rather the result of this socially or institutionally organized objectivity of science.

Both Kantians and Hegelians make the same mistake of assuming that our presuppositions (since they are, to start with, undoubtedly indispensable instruments which we need in our active 'making' of experiences) can neither be changed by decision nor refuted by experience ; that they are above and beyond the scientific methods of testing theories, constituting as they do the basic presuppositions of all thought. But this is an exaggeration, based on a misunderstanding of the relations between theory and experience in science. It was one of the greatest achievements of our time when Einstein showed that in the light of experience, we may question and revise our presuppositions regarding even space and time, ideas which had been held to be necessary presuppositions of all science, and to belong to its 'categorial apparatus'. Thus the sceptical attack upon science launched by the sociology of knowledge breaks down in the light of scientific method. The empirical method has proved to be quite capable of taking care of itself.

But it does so not by eradicating our prejudices all at once ; it can eliminate them only one by one. The classical case in point is again Einstein's discovery of our prejudices regarding time. Einstein did not set out to discover prejudices ; he did not even set out to criticize our conceptions of space and time. His problem was a concrete problem of physics, the re-drafting of a theory that had broken down because of various experiments which in the light of the theory seemed to contradict one another. Einstein together with most physicists realized that this meant that the theory was false. And he found that if we alter it in a point which had so far been held by everybody to be self-evident and which had therefore escaped notice, then the difficulty could be removed. In other words, he just applied the methods of scientific criticism and of the invention and elimination of theories, of trial and error. But this method does not lead to the abandonment of all our prejudices ; rather, we can discover the fact that we had a prejudice only after having got rid of it.

But it certainly has to be admitted that, at any given moment, our scientific theories will depend not only on the experiments, etc., made up to that moment, but also upon prejudices which are taken for granted, so that we have not become aware of them (although the application of certain logical methods may help us to detect them). At any rate, we can say in regard to this incrustation that science is capable of learning, of breaking down some of its crusts. The process may never be perfected, but there is no fixed barrier before which it must stop short. Any assumption can, in principle, be criticized. And that anybody may criticize constitutes scientific objectivity.

Scientific results are 'relative' (if this term is to be used at all) only in so far as they are the results of a certain stage of scientific development and liable to be superseded in the course of scientific progress. But this does not mean that truth is 'relative'. If an assertion is true, it is true for ever. It only means that most scientific results have the character of hypotheses, i.e. statements for which the evidence is inconclusive, and which are therefore liable to revision at any time. These considerations (with which I have dealt more fully elsewhere), though not necessary for a criticism of the sociologists, may perhaps help to further the understanding of their theories. They also throw some light, to come back to my main criticism, on the important role which co-operation, intersubjectivity, and the publicity of method play in scientific criticism and scientific progress.

It is true that the social sciences have not yet fully attained this publicity of method. This is due partly to the intelligence-destroying influence of Aristotle and Hegel, partly perhaps also to their failure to make use of the social instruments of scientific objectivity. Thus they are really 'total ideologies', or putting it differently, some social scientists are unable, and even unwilling, to speak a common language. But the reason is not class interest, and the cure is not a Hegelian dialectical synthesis, nor self-analysis. The only course open to the social sciences is to forget all about the verbal fireworks and to tackle the practical problems of our time with the help of the theoretical methods which are fundamentally the same in all sciences. I mean the methods of trial and error, of inventing hypotheses which can be practically tested, and of submitting them to practical tests. A social technology is needed whose results can be tested by piecemeal social engineering.

The cure here suggested for the social sciences is diametrically opposed to the one suggested by the sociology of knowledge. Sociologism believes that it is not their unpractical character, but rather the fact that practical and theoretical problems are too much intertwined in the field of social and political knowledge, that creates the methodological difficulties of these sciences. Thus we can read in a leading work on the sociology of knowledge : 'The peculiarity of political knowledge, as opposed to "exact" knowledge, lies in the fact that knowledge and will, or the rational element and the range of the irrational, are inseparably and essentially intertwined.' To this we can reply that 'knowledge' and 'will' are, in a certain sense, always inseparable ; and that this fact need not lead to any dangerous entanglement. No scientist can know without making an effort, without taking an interest ; and in his effort there is usually even a certain amount of self-interest involved. The engineer studies things mainly from a practical point of view. So does the farmer. Practice is not the enemy of theoretical knowledge but the most valuable incentive to it. Though a certain amount of aloofness may be becoming to the scientist, there are many examples to show that it is not always important for a scientist to be thus disinterested. But it is important for him to remain in touch with reality, with practice, for those who overlook it have to pay by lapsing into scholasticism. Practical application of our findings is thus the means by which we may eliminate irrationalism from social science, and not any attempt to separate knowledge from 'wil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