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은 어떻게 타락했는가
그리고 정말로 우리의 윤리 교육뿐 아니라 지식 교육도 부패했다. 그 교육은 광휘인 사물들이 언급되는 방식에 대한 찬사에 의하여 왜곡되는데 그 찬사는 언급되는 것들에 (그리고 실행되는 것들) 대한 비판적 평가의 자리를 차지한다. 그 교육은 우리가 배우인 역사의 무대가 지닌 광휘라는 낭만적 관념에 의하여 왜곡된다. 우리는 그 무대의 관람석에 목적을 두고 행동하도록 교육을 받는다.
다른 개인들의 중요성과 연계하여 자신의 중요성을 온전하게 평가하도록 사람을 교육하는 문제가 고스란히, 명성과 운명에 관한 이 윤리에 의하여 철저히 뒤죽박죽되었다. 그리고 권력의 역사에 대한 이 윤리의 낭만적 견해를 지닌 그리고 이 윤리의 낭만적인 종족적 도덕성을 지닌 고전문학에 아직도 근거한 교육체계를 ㅡ 궁극적 토대가 권력숭배인 교육체계 ㅡ 영속화하는 도덕성에 의하여 완전히 뒤죽박죽되었는데 그 낭만적인 종족적 도덕성은 헤라클레이토스(Heraclitus)에게로 거슬러 올라간다. 개인주의와 이타주의(利他主義)를 (이 표찰을 다시 사용하여) 냉정하게 결합하는 대신 ㅡ 다시 말해서, ‘실제로 중요한 것은 인간 개인들이지만, 매우 많이 중요한 것은 나다를 이것이 의미한다고 나는 생각하지 않는다’와 같은 입장 대신 ㅡ 이기주의와 집단주의의 낭만적인 결합이 당연시된다. 다시 말해서 자신의 중요성, 자신이 지닌 감정적 삶과 자신이 내놓는 ‘자기표현’에 대한 중요성이 낭만적으로 과장된다; 그리고 그것과 함께, ‘개성’과 무리인 집단 사이의 긴장이 과장된다. 집단이 다른 개인인 다른 사람들의 자리를 차지하지만, 합당한 개인 관계를 허용하지 않는다. ‘지배하라, 아니면 복종하라’가 암시에 의하여, 이 태도의 계략이다; 위대한 사람, 운명과 씨름하여 명성을 얻는 영웅이 되든지 (‘크게 쓰러질수록 명성도 크다’라고 헤라클레이토스는 말한다), 아니면 ‘대중’에게 속하여 당신 자신을 지도력에 복속시키어 당신이 속한 집단의 더 높은 대의명분에 맞추어 당신 자신을 희생하든지. 자신과 집단 사이의 긴장 중요성에 대한 이 과장된 강조에는 신경증적인, 발작증세적인 요소가 있어서, 문명의 압박감에 대한 이 반응인 이 발작증세가 영웅-숭배 윤리인 지배와 복종 윤리가 지니는 강력한 감정적 마력의 비결임을 나는 의심치 않는다.
이 모든 것의 근저에 실재적인 난관이 놓여있다. 행복, 기타 등등과 같은 ‘긍정적’이거나 ‘더 높은’ 가치를 위하여 정치가가 싸우는 대신, 사악한 일에 대항하여 싸우는 데 자신을 제한해야 함이 분명한 (우리가 9장과 24장에서 안 바와 같이) 반면, 교사(敎師)는 원칙적으로 다른 입장에 놓여있다. 교사가 자신의 ‘더 높은’ 가치 기준을 학생들에게 강요하지 말아야 할지라도, 그는 이 가치들에 대한 학생들의 흥미를 자극하려고 틀림없이 노력해야 한다. 교사는 학생들의 영혼을 돌보아야 한다. (소크라테스가 자신의 친구들에게 자신들의 영혼을 돌보라고 말했을 때, 그는 친구들의 영혼을 걱정했다.) 그리하여 정치에 들어가서는 안 되는 낭만적이거나 심미적(審美的) 요소 같은 것이 교육에는 있다. 그러나 이것이 원칙적으로 사실일지라도, 그것은 우리의 교육체계에 적용이 불가능하다. 이유인즉 그 요소가 교사와 학생 사이의 우정관계를 상정(想定)하는데 24장에서 강조된 바와 같이 어느 상대방이 자유롭게 끝낼 수 있어야 하는 관계를 상정(想定)하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동료들을 선택했고, 그 동료들은 소크라테스를 선택했다.) 바로 학생들의 숫자로 인하여 우리 학교에서 이 모든 것이 불가능해진다. 따라서 더 높은 가치를 부과하려는 노력이 성공하지 못할 뿐 아니라, 그 시도들이 해(害)를 ㅡ 목표로 정한 이상(理想)보다 훨씬 더 구체적이고 공적(公的)인 해(害) ㅡ 끼친다고 주장되어야 한다. 그래서 우리에게 맡겨진 사람들이 해(害)를 입어서는 안 된다는 원칙은, 의술에서와 마찬가지고 교육에 대해서도 바로 근본적인 것으로 우선 인정되어야 한다. ‘해치지 말라’가 (그리하여 ‘우리들로부터 독립하기 위하여, 그리고 스스로 결정할 수 있게 되기 위하여, 젊은이들에게 그들이 가장 시급하게 필요한 것을 주어라’) 우리 교육체제에 관한 매우 가치 있는 목표일 터이며, 그 목표가 소박하게 들릴지라도 그 실현은 다소 요원하다. 대신, ‘더 높은’ 목표는 ‘개성의 완전 계발’과 같은 전형적으로 낭만적이고 정말로 터무니없는 목표인데 유행이 되었다.
플라톤에 의하여 그랬던 것처럼 개인주의가 아직도 이기주의와 동일시되고, 이타주의는 집단주의와 (다시 말해서 개인주의적 이기주의를 집단 이기주의로 대체함과) 동일시되는 것은 그런 낭만적 관념들의 영향을 받아서이다. 그러나 이로 인하여 주요 문제인 다른 개인과 관련하여 자기 자신의 중요성에 대한 온전한 평가를 어떻게 얻어내는지의 문제를 심지어 분명하게 언명하는 길이 차단된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초월하는 중요한 것이고 우리 자신을 헌신할 수 있는 중요한 것이고 우리가 그것을 위해 희생할 중요한 것을 목표로 해야한다고 느껴지고 그것이 옳기 때문에, 이것은 자체의 ‘역사적 사명’과 함께 집단이어야 한다는 결론이 내려진다. 그리하여 우리는 희생하라는 말을 들으며, 동시에, 그렇게 함에 의하여 우리는 탁월한 흥정을 실행할 것이라는 확신을 받는다. 우리는 희생을 치를 것이지만 우리는 그리하여 영예와 명성을 얻게 될 것이라는 말을 듣는다. 우리는 역사의 무대에서 ‘주역 배우들’인 영웅들이 될 것이다; 작은 위험을 감수하고 우리는 큰 보상을 받게 될 것이다. 이것이 겨우 작은 소수가 중요했던, 그리고 아무도 백성을 돌보지 않았던, 시기의 의심스러운 도덕성이다. 그것은, 정치적이거나 지적(知的) 귀족으로, 역사 교과서에 실리는 기회를 가진 사람들의 도덕성이다. 그것은 정의(正義)와 평등주의를 선호하는 사람들의 도덕성이 도저히 될 수 없다; 이유인즉 역사적 명성이란 정의로울 리가 없고 겨우 극소수에 의해서만 도달될 수 있기 때문이다. 꼭 동일하게 가치가 있거나 더 가치 있는 셀 수 없이 많은 숫자의 사람들은 항상 망각될 것이다.
더 높은 보상은 오직 자손만이 제공할 수 있는 것이라는 교설인 헤라클레이토스(Heralictus)의 윤리는, 지금 보상을 찾아보라고 우리에게 가르치는 윤리 교설보다 어떤 면에서 아마도 다소 우월하다고 아마도 인정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아니다. 성공과 보상을 거부하는 윤리가 우리에게 필요하다. 그리고 그런 윤리는 창안될 필요가 없다. 그런 윤리는 새로운 것이 아니다. 그 윤리는 기독교에 의하여, 적어도 기독교 초기에 설교되었다. 그 윤리는 다시, 우리 시대의 과학적 협력뿐 아니라 산업적 협력에 의해서 교육된다. 명성에 관한 낭만적인 역사주의적 도덕성은 다행히도 쇠퇴하고 있는 듯하다. 무명용사(無名勇士)로 인하여 그것이 밝혀진다. 희생이 익명으로 이루어질 때, 바로 그만큼 혹은 훨씬 더 많은 것을 의미할 것임을 우리가 깨닫기 시작하고 있다. 우리의 윤리교육도 그것을 뒤좇아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업무를 수행하도록 교육을 받아야 한다; 칭찬을 받기 위해서나 비난을 피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 업무를 위하여 우리가 희생하는 교육을 받아야 한다. (우리 모두에게 어떤 격려, 희망, 칭찬, 그리고 심지어 비난이 필요하다는 사실은 완전히 다른 문제이다.) 허구적인 ‘역사의 의미’에서가 아니라, 우리의 업무인 우리가 수행하고 있는 것에서 정당성을 우리가 발견해야 한다.
ㅡ 칼 포퍼, “열린사회와 그 적들”, II권, 1971년, 275-278쪽 ㅡ
And, indeed, our intellectual as well as our ethical education is corrupt. It is perverted by the admiration of brilliance, of the way things are said, which takes the place of a critical appreciation of the things that are said (and the things that are done). It is perverted by the romantic idea of the splendour of the stage of History on which we are the actors. We are educated to act with an eye to the gallery.
The whole problem of educating man to a sane appreciation of his own importance relative to that of other individuals is thoroughly muddled by these ethics of fame and fate, by a morality which perpetuates an educational system that is still based upon the classics with their romantic view of the history of power and their romantic tribal morality which goes back to Heraclitus ; a system whose ultimate basis is the worship of power. Instead of a sober combination of individualism and altruism (to use these labels again) - that is to say, instead of a position like 'What really matters are human individuals, but I do not take this to mean that it is I who matter very much' - a romantic combination of egoism and collectivism is taken for granted. That is to say, the importance of the self, of its emotional life and its 'self-expression', is romantically exaggerated ; and with it, the tension between the 'personality' and the group, the collective. This takes the place of the other individuals, the other men, but does not admit of reasonable personal relations. 'Dominate or submit' is, by implication, the device of this attitude ; either be a Great Man, a Hero wrestling with fate and earning fame ('the greater the fall, the greater the fame', says Heraclitus), or belong to 'the masses' and submit yourself to leadership and sacrifice yourself to the higher cause of your collective. There is a neurotic, an hysterical element in this exaggerated stress on the importance of the tension between the self and the collective, and I do not doubt that this hysteria, this reaction to the strain of civilization, is the secret of the strong emotional appeal of the ethics of hero-worship, of the ethics of domination and submission.
At the bottom of all this there is a real difficulty. While it is fairly clear (as we have seen in chapters 9 and 24) that the politician should limit himself to fighting against evils, instead of fighting for 'positive' or 'higher' values, such as happiness, etc., the teacher, in principle, is in a different position. Although he should not impose his scale of 'higher' values upon his pupils, he certainly should try to stimulate their interest in these values. He should care for the souls of his pupils. (When Socrates told his friends to care for their souls, he cared for them.) Thus there is something like a romantic or aesthetic element in education, such as should not enter politics. But although this is true in principle, it is hardly applicable to our educational system. For it presupposes a relation of friendship between teacher and pupil, a relation which, as emphasized in chapter 24, each party must be free to end (Socrates chose his companions, and they him.) The very number of pupils makes all this impossible in our schools. Accordingly, attempts to impose higher values not only become unsuccessful, but it must be insisted that they lead to harm - to something much more concrete and public than the ideals aimed at. And the principle that those who are entrusted to us must, before anything else, not be harmed, should be recognized to be just as fundamental for education as it is for medicine. 'Do no harm' (and, therefore, 'give the young what they most urgently need, in order to become independent of us, and to be able to choose for themselves') would be a very worthy aim for our educational system, and one whose realization is somewhat remote, even though it sounds modest. Instead, 'higher' aims are the fashion, aims which are typically romantic and indeed nonsensical, such as 'the full development of the personality'.
It is under the influence of such romantic ideas that individualism is still identified with egoism, as it was by Plato, and altruism with collectivism. (i.e. with the substitution of group egoism for the individualist egoism). But this bars the way even to a clear formulation of the main problem, the problem of how to obtain a sane appreciation of one's own importance in relation to other individuals. Since it is felt, and rightly so, that we have to aim at something beyond our own selves, something to which we can devote ourselves, and for which we may make sacrifices, it is concluded that this must be the collective, with its 'historical mission'. Thus we are told to make sacrifices, and, at the same time, assured that we shall make an excellent bargain by doing so. We shall make sacrifices, it is said, but we shall thereby obtain honour and fame. We shall become 'leading actors', heroes on the Stage of History ; for a small risk we shall gain great rewards. This is the dubious morality of a period in which only a tiny minority counted, and in which nobody cared for the common people. It is the morality of those who, being political or intellectual aristocrats, have a chance of getting into the textbooks of history. It cannot possibly be the morality of those who favour justice and equalitarianism ; for historical fame cannot be just, and it can be attained only by a very few. The countless number of men who are just as worthy, or worthier, will always be forgotten.
It should perhaps be admitted that the Heraclitean ethics, the doctrine that the higher reward is that which only posterity can offer, may in some way perhaps be slightly superior to an ethical doctrine which teaches us to look out for reward now. But it is not what we need. We need an ethics which defies success and reward. And such an ethics need not be invented. It is not new. It has been taught by Christianity, at least in its beginnings. It is, again, taught by the industrial as well as by the scientific co-operation of our own day. The romantic historicist morality of fame, fortunately, seems to be on the decline. The Unknown Soldier shows it. We are beginning to realize that sacrifice may mean just as much, or even more, when it is made anonymously. Our ethical education must follow suit. We must be taught to do our work; to make our sacrifice for the sake of this work, and not for praise or the avoidance of blame. (The fact that we all need some encouragement, hope, praise, and even blame, is another matter altogether.) We must find our justification in our work, in what we are doing ourselves, and not in a fictitious 'meaning of h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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