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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는 고난을 당하는데 교회는 성공을 노린다

이윤진이카루스 2022. 12. 11. 1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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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는 고난을 당하는데 교회는 성공을 노린다

 

역사를 다른 관점에서 해석하는 것처럼 역사를 기독교적 관점에서 해석하는 것이 정당화될 수 있음을 나는 부인하지 않는다; 그래서 예를 들어 우리 서구적 목표들인 인도주의, 자유, 평등이 기독교 영향을 얼마나 많이 받았는지는 틀림없이 강조되어야 한다. 그러나 동시에, 심지어 자유의 역사를 향하여 유일하게 기독교적일 뿐 아니라 유일하게 합리적인 태도는, 우리의 삶으로부터 만들어내는 것에 우리가 책임을 진다는 동일한 의미에서 우리 자신이 그 역사에 책임을 진다는 것 그리고 우리의 세속적 성공이 아니라 우리의 양심만이 우리를 재판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역사에서 하느님이 스스로 현시하여 자신의 판결을 드러낸다는 이론은 세속적 성공이 최종심의 판사이며 우리 행동의 정당화라는 이론과 구별될 수 없다; 그 이론은 역사가 판결할 것이라는, 다시 말해서, 미래의 힘이 정의일 것이라는 교설과 동일하다; 그 이론은 내가 도덕미래주의라고 지칭한 것과 동일하다. 하느님이 보통 역사로 지칭되는 것에서, 국제범죄와 집단학살의 역사에서, 스스로 현시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진정으로 신성모독이다; 이유인즉 인간 삶의 영역에서 실제로 발생하는 것은 이 잔인하고 동시에 유치한 사건에 의하여 간단하게 취급되지도 않기 때문이다. 망각된 개별 인간의 삶, 알려지지 않은 개별 인간의 삶의 영역에서 실제로 발생하는 것, 그 인간의 슬픔과 그 인간의 기쁨, 그 인간의 고통과 죽음, 이것이 여러 세기를 내려오는 인간 경험의 실제 내용이다. 저것이 역사에 의하여 언급될 수 있다면, 하느님의 손가락을 그 역사에서 보는 것이 신성모독이라고 내가 말해서는 틀림없이 안 된다. 그러나 그런 역사는 존재하지도 않고 존재할 수도 없다; 그리고 존재하는 모든 역사인 위대한 자들과 강력한 자들에 대한 우리의 역사는 기껏해야 천박한 희극이다; 그 역사는 현실 배후에 있는 권력들에 의하여 연출되는 소극(笑劇)오페라이다 (인간의 투쟁 장면 배후에 있는 올림포스 신들에 관한 호메로스의 소극[笑劇]오페라에 비견될 수 있는). 그 역사로 인하여, 우리들이 지닌 최악의 본능 중 하나인 권력에 대한, 성공에 대한 우상적 숭배가 실재적이라고 우리가 믿게 된 것이다. 그래서 심지어 인간이 만든 것도 아니고 인간이 날조한 역사에서, 몇몇 기독교도들은 하느님의 손을 감히 본다니! 그 기독교도들은 자신들의 하찮은 역사해석이 하느님에게서 나온다고 할 때 하느님이 무엇을 의도하는지 자신들이 감히 이해하고 안다니! ‘반대로, 우리가 하느님이라고 말할 때 우리가 안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은 하느님에게 도달하지도 않고 하느님을 이해하는 것도 아니며.., 그것이 정신이든 자연이든 운명이든 이데아이든.. 항상 스스로-구상되고 스스로-제작된 우리 자신이 지닌 우상들 중 하나임을.. 인정함으로써 우리는 시작해야 한다라고 신학자인 K. 바르트(Barth)는 자신의 저서 사도신경(Credo)에서 말한다. (바르트[Barth]역사 속에서 하느님의 현시[顯示]에 관한 신[]-프로테스탄트적 교리인정될 수 없는으로서 그리고 그리스도의 왕좌에 대한 침범으로서 특징짓는 것은 이 태도와 일치한다). 그러나 기독교적 관점에서, 그런 시도의 기초를 이루고 있는 것은 오만뿐이 아니다; 그것은, 더 구체적으로, ()-기독교적 태도이다. 이유인즉 기독교가 세속적 성공은 결정적이 아니라고 가르치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본디오 빌라도 밑에서 고난을 당하셨다’. 나는 다시 바르트(Barth)의 말을 인용한다: ‘어떻게 본디오 빌라도는 사도신경에 들어가는가? 간단한 답변이 즉각 주어질 수 있다: 그것은 날짜 문제이다’. 그리하여 출세했던, 당시의 역사적 권력을 대표하는, 사람은 언제 이 사건들이 발생했는지를 가리키는 순전히 기술적(技術的: technical) 역할을 여기서 수행한다. 그리고 이 사건들은 무엇이었던가? 그 사건들은 권력-정치적 성공인 역사와 관련이 없었다. 그 사건들은 로마 정복자들에 대항하는 유대민족의 실패한 비폭력적 민족주의의 혁명에 (간디풍의) 관한 이야기조차 아니었다. 그 사건들은 한 인간의 수난에 지나지 않았다. 바르트(Barth)수난을 당하다(suffers)’라는 단어가 그리스도의 죽음만을 언급하지 않으며 그리스도 삶 전체를 언급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예수는 수난을 당한다. 그러므로 그는 정복하지 않는다. 그는 승리하지 않는다. 그에게는 성공이 없다.. 그는 자신이 십자가에서 처형당한 것을.. 제외하고 아무 것도 이룩하지 않았다. 그의 민족에 대한 그리고 그의 사도에 대한 그의 관계에도 똑같은 것이 언급될 수 있으리라.’ 바르트(Barth)의 말을 인용하는 나의 의도는, 역사적 성공에 대한 숭배가 기독교 정신과 양립될 수 없는 것으로 보는 나의 합리주의적혹은 인본주의적관점이 유일하지 않다는 것을 밝히려는 것이다. 기독교에 중요한 것은 강력한 로마 정복자들의 역사적 행위가 아니라 몇 명의 어부가 세상에 준 것이다 (키르케고르의 표현을 사용해서). 그러나 역사에 대한 모든 유일신적 해석은 기록된 바로서의 역사 속에서, 다시 말해서 권력의 역사에서 그리고 역사적 성공에서, 하느님 의지의 현시(顯示)를 보려고 시도한다.

역사 속에서 하느님의 현시(顯示)라는 교설에 대한 이 공격에, 지상에서의 성공하지 못한 그리스도의 삶이 마침내 가장 위대한 정신적 승리로서 인류에게 계시된 것은 성공으로 그의 죽음 후의 그의 성공이다라고 아마도 답변될 것이다; 역사 속에서 하느님의 현시(顯示)를 증명하고 그 현시(顯示)를 정당화했으며 따라서 나중 된 자가 먼저 되고 먼저 된 자가 나중 된다라는 예언이 검증된 것은 성공인 예수 가르침의 열매였다고 아마도 답변될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하느님의 의지가 드러난 것은 기독교 교회의 역사적 성공을 통해서이었다는 것. 그러나 이것은 매우 위험한 방어 노선이다. 교회의 세속적 성공이 기독교를 선호하는 주장이라는 암시로 인하여 신앙 결핍이 명백하게 드러난다. 초기 기독교도에게는 이런 종류의 세속적 격려가 없었다. (그들은 양심이 권력을 판결해야지, 그 반대는 아니라고 믿었다.) 기독교적 가르침의 성공 역사가 하느님의 의지를 드러낸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이 성공이 실제로 기독교 정신의 성공인지를 자문해야 한다; 그리고 이 정신이 교회가 승리했을 때보다는 교회가 박해를 받았을 때 승리하지 않았던지 자문해야 한다. 어느 교회가 이 정신을 더 순수하게 구현했는가, 순교자의 교회였던가 아니면 종교재판을 실행하는 승승장구하던 교회인가?

기독교의 전도가 온유한 사람들에게 관련된다고 주장할지라도, 이것을 많이 인정할 터이지만 여전히 이 전도가 역사주의의 하나라고 믿는 많은 사람들이 있는 것 같다. 이 견해의 두드러진 대표자는 J. 맥머레이(Macmurray)인데, 그는 역사의 단서(The Clue to History)에서 역사관련 예언에서 기독교 가르침의 본질을 발견하며, ‘인간본성에 관한 변증법적 법칙의 발견자는 그 예언의 창립자라고 본다. 맥머레이는, 이 법칙에 따라서, 정치역사로 인하여 불가피하게 세계의 사회주의적 연방(commonwealth)’이 틀림없이 출현한다고 믿는다. ‘인간본성에 관한 근본적 법칙은 무너질 수 없다.. 세상을 물려받을 사람은 온유한 자들이다.’ 그러나 이 역사주의는, 희망을 확신으로 대체함으로써, 틀림없이 도덕미래주의를 초래한다. ‘법칙은 무너질 수 없다.’ 그래서 심리학적 근거를 토대로, 우리가 실행하는 모든 것은 동일한 결과를 초래할 것임을 우리가 확신할 수 있다; 심지어 파시즘도 결국 저 연방(commonwealth)을 틀림없이 초래할 것임을 우리가 확신할 수 있다; 그리하여 최종 결과는 우리의 도덕적 결심에 달려있지 않아서, 우리의 책임에 대하여 걱정할 필요가 없다. 과학적 근거를 토대로, ‘나중 된 자가 먼저 되고 먼저 된 자가 나중 된다확신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우리가 들으면, 이것은 양심을 역사적 예언으로 대체하는 것 외에 다른 무엇인가? 이 이론은 다음 훈계에 위험스럽게 가까이 (틀림없이 그 주장자의 의도에 반하여) 다가가지 않는가: ‘현명하게 처신하여 기독교의 창시자가 당신에게 말하는 것을 명심하라, 이유인즉 그가 인간 본성에 관한 위대한 심리학자였고 역사에 관한 위대한 예언가였기 때문이다. 때에 맞추어 온유한 자들이 타고 가는 마차에 동승하라; 그 까닭은 인간 본성에 관한 냉엄한 과학적 법칙에 따라서, 이것이 정상에 이르는 가장 확실한 길이기 때문이다!’ 그런 역사에 대한 단서는 성공숭배를 암시한다; 그 단서는 온유한 자들이 승자의 편에 있기 때문에 온유한 자들이 정당화될 것임을 암시한다. 그 단서는 마르크스주의를, 그리고 특히 내가 마르크스의 역사주의적 도덕론으로 기술한 것을 인간 본성에 관한 심리학의 언어로 그리고 종교적 예언에 관한 언어로 변환한다. 그것은 암시에 의해서 기독교의 창립자가 헤겔의 선두주자였다는 ㅡ 더 우월한 선두주자로 인정되는 바와 같이 ㅡ 사실에서 기독교의 가장 큰 업적을 보는 해석이다.

성공이 숭배되어서는 안 된다는, 성공이 우리의 심판관이 될 수 없다는 그리고 우리는 성공에 의하여 현혹되어서는 안 된다는 나의 주장과, 특히 이 태도에서 내가 기독교의 진정한 가르침이라고 믿는 것에 내가 동의한다는 것을 밝히려는 나의 노력이 오해되어서는 안 된다. 그러한 나의 주장과 나의 노력에는 내가 앞 장에서 비판한 내세적(來世的)태도를 지지하려는 의도가 없다. 기독교가 내세적(來世的)인지 나는 모르지만, 자신의 신앙을 증명하는 유일한 길은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실제적인 (그리고 세속적인) 도움을 제공함에 의해서라고 기독교는 확실하게 가르친다. 그리고 부귀영화의 의미에서 세속적 성공을 향한 최고의 유보적 태도와 심지어 경멸의 태도를 지니고, 이 세상에서 최선을 다하려는 노력 및 그 목적들이 성취되도록 만들려는 분명한 목표와 함께 자신이 채택하기로 결정한 그 목적들을 추진하는 노력하는 것은, 틀림없이 가능하다; 성공의 정당화나 역사에 의한 자신의 정당화를 위해서가 아니라, 그 목적들을 위하여.역사를 다른 관점에서 해석하는 것처럼 역사를 기독교적 관점에서 해석하는 것이 정당화될 수 있음을 나는 부인하지 않는다; 그래서 예를 들어 우리 서구적 목표들인 인도주의, 자유, 평등이 기독교 영향을 얼마나 많이 받았는지는 틀림없이 강조되어야 한다. 그러나 동시에, 심지어 자유의 역사를 향하여 유일하게 기독교적일 뿐 아니라 유일하게 합리적인 태도는, 우리의 삶으로부터 만들어내는 것에 우리가 책임을 진다는 동일한 의미에서 우리 자신이 그 역사에 책임을 진다는 것 그리고 우리의 세속적 성공이 아니라 우리의 양심만이 우리를 재판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역사에서 하느님이 스스로 현시하여 자신의 판결을 드러낸다는 이론은 세속적 성공이 최종심의 판사이며 우리 행동의 정당화라는 이론과 구별될 수 없다; 그 이론은 역사가 판결할 것이라는, 다시 말해서, 미래의 힘이 정의일 것이라는 교설과 동일하다; 그 이론은 내가 도덕미래주의라고 지칭한 것과 동일하다. 하느님이 보통 역사로 지칭되는 것에서, 국제범죄와 집단학살의 역사에서, 스스로 현시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진정으로 신성모독이다; 이유인즉 인간 삶의 영역에서 실제로 발생하는 것은 이 잔인하고 동시에 유치한 사건에 의하여 간단하게 취급되지도 않기 때문이다. 망각된 개별 인간의 삶, 알려지지 않은 개별 인간의 삶의 영역에서 실제로 발생하는 것, 그 인간의 슬픔과 그 인간의 기쁨, 그 인간의 고통과 죽음, 이것이 여러 세기를 내려오는 인간 경험의 실제 내용이다. 저것이 역사에 의하여 언급될 수 있다면, 하느님의 손가락을 그 역사에서 보는 것이 신성모독이라고 내가 말해서는 틀림없이 안 된다. 그러나 그런 역사는 존재하지도 않고 존재할 수도 없다; 그리고 존재하는 모든 역사인 위대한 자들과 강력한 자들에 대한 우리의 역사는 기껏해야 천박한 희극이다; 그 역사는 현실 배후에 있는 권력들에 의하여 연출되는 소극(笑劇)오페라이다 (인간의 투쟁 장면 배후에 있는 올림포스 신들에 관한 호메로스의 소극[笑劇]오페라에 비견될 수 있는). 그 역사로 인하여, 우리들이 지닌 최악의 본능 중 하나인 권력에 대한, 성공에 대한 우상적 숭배가 실재적이라고 우리가 믿게 된 것이다. 그래서 심지어 인간이 만든 것도 아니고 인간이 날조한 역사에서, 몇몇 기독교도들은 하느님의 손을 감히 본다니! 그 기독교도들은 자신들의 하찮은 역사해석이 하느님에게서 나온다고 할 때 하느님이 무엇을 의도하는지 자신들이 감히 이해하고 안다니! ‘반대로, 우리가 하느님이라고 말할 때 우리가 안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은 하느님에게 도달하지도 않고 하느님을 이해하는 것도 아니며.., 그것이 정신이든 자연이든 운명이든 이데아이든.. 항상 스스로-구상되고 스스로-제작된 우리 자신이 지닌 우상들 중 하나임을.. 인정함으로써 우리는 시작해야 한다라고 신학자인 K. 바르트(Barth)는 자신의 저서 사도신경(Credo)에서 말한다. (바르트[Barth]역사 속에서 하느님의 현시[顯示]에 관한 신[]-프로테스탄트적 교리인정될 수 없는으로서 그리고 그리스도의 왕좌에 대한 침범으로서 특징짓는 것은 이 태도와 일치한다). 그러나 기독교적 관점에서, 그런 시도의 기초를 이루고 있는 것은 오만뿐이 아니다; 그것은, 더 구체적으로, ()-기독교적 태도이다. 이유인즉 기독교가 세속적 성공은 결정적이 아니라고 가르치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본디오 빌라도 밑에서 고난을 당하셨다’. 나는 다시 바르트(Barth)의 말을 인용한다: ‘어떻게 본디오 빌라도는 사도신경에 들어가는가? 간단한 답변이 즉각 주어질 수 있다: 그것은 날짜 문제이다’. 그리하여 출세했던, 당시의 역사적 권력을 대표하는, 사람은 언제 이 사건들이 발생했는지를 가리키는 순전히 기술적(技術的: technical) 역할을 여기서 수행한다. 그리고 이 사건들은 무엇이었던가? 그 사건들은 권력-정치적 성공인 역사와 관련이 없었다. 그 사건들은 로마 정복자들에 대항하는 유대민족의 실패한 비폭력적 민족주의의 혁명에 (간디풍의) 관한 이야기조차 아니었다. 그 사건들은 한 인간의 수난에 지나지 않았다. 바르트(Barth)수난을 당하다(suffers)’라는 단어가 그리스도의 죽음만을 언급하지 않으며 그리스도 삶 전체를 언급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예수는 수난을 당한다. 그러므로 그는 정복하지 않는다. 그는 승리하지 않는다. 그에게는 성공이 없다.. 그는 자신이 십자가에서 처형당한 것을.. 제외하고 아무 것도 이룩하지 않았다. 그의 민족에 대한 그리고 그의 사도에 대한 그의 관계에도 똑같은 것이 언급될 수 있으리라.’ 바르트(Barth)의 말을 인용하는 나의 의도는, 역사적 성공에 대한 숭배가 기독교 정신과 양립될 수 없는 것으로 보는 나의 합리주의적혹은 인본주의적관점이 유일하지 않다는 것을 밝히려는 것이다. 기독교에 중요한 것은 강력한 로마 정복자들의 역사적 행위가 아니라 몇 명의 어부가 세상에 준 것이다 (키르케고르의 표현을 사용해서). 그러나 역사에 대한 모든 유일신적 해석은 기록된 바로서의 역사 속에서, 다시 말해서 권력의 역사에서 그리고 역사적 성공에서, 하느님 의지의 현시(顯示)를 보려고 시도한다.

역사 속에서 하느님의 현시(顯示)라는 교설에 대한 이 공격에, 지상에서의 성공하지 못한 그리스도의 삶이 마침내 가장 위대한 정신적 승리로서 인류에게 계시된 것은 성공으로 그의 죽음 후의 그의 성공이다라고 아마도 답변될 것이다; 역사 속에서 하느님의 현시(顯示)를 증명하고 그 현시(顯示)를 정당화했으며 따라서 나중 된 자가 먼저 되고 먼저 된 자가 나중 된다라는 예언이 검증된 것은 성공인 예수 가르침의 열매였다고 아마도 답변될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하느님의 의지가 드러난 것은 기독교 교회의 역사적 성공을 통해서이었다는 것. 그러나 이것은 매우 위험한 방어 노선이다. 교회의 세속적 성공이 기독교를 선호하는 주장이라는 암시로 인하여 신앙 결핍이 명백하게 드러난다. 초기 기독교도에게는 이런 종류의 세속적 격려가 없었다. (그들은 양심이 권력을 판결해야지, 그 반대는 아니라고 믿었다.) 기독교적 가르침의 성공 역사가 하느님의 의지를 드러낸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이 성공이 실제로 기독교 정신의 성공인지를 자문해야 한다; 그리고 이 정신이 교회가 승리했을 때보다는 교회가 박해를 받았을 때 승리하지 않았던지 자문해야 한다. 어느 교회가 이 정신을 더 순수하게 구현했는가, 순교자의 교회였던가 아니면 종교재판을 실행하는 승승장구하던 교회인가?

기독교의 전도가 온유한 사람들에게 관련된다고 주장할지라도, 이것을 많이 인정할 터이지만 여전히 이 전도가 역사주의의 하나라고 믿는 많은 사람들이 있는 것 같다. 이 견해의 두드러진 대표자는 J. 맥머레이(Macmurray)인데, 그는 역사의 단서(The Clue to History)에서 역사관련 예언에서 기독교 가르침의 본질을 발견하며, ‘인간본성에 관한 변증법적 법칙의 발견자는 그 예언의 창립자라고 본다. 맥머레이는, 이 법칙에 따라서, 정치역사로 인하여 불가피하게 세계의 사회주의적 연방(commonwealth)’이 틀림없이 출현한다고 믿는다. ‘인간본성에 관한 근본적 법칙은 무너질 수 없다.. 세상을 물려받을 사람은 온유한 자들이다.’ 그러나 이 역사주의는, 희망을 확신으로 대체함으로써, 틀림없이 도덕미래주의를 초래한다. ‘법칙은 무너질 수 없다.’ 그래서 심리학적 근거를 토대로, 우리가 실행하는 모든 것은 동일한 결과를 초래할 것임을 우리가 확신할 수 있다; 심지어 파시즘도 결국 저 연방(commonwealth)을 틀림없이 초래할 것임을 우리가 확신할 수 있다; 그리하여 최종 결과는 우리의 도덕적 결심에 달려있지 않아서, 우리의 책임에 대하여 걱정할 필요가 없다. 과학적 근거를 토대로, ‘나중 된 자가 먼저 되고 먼저 된 자가 나중 된다확신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우리가 들으면, 이것은 양심을 역사적 예언으로 대체하는 것 외에 다른 무엇인가? 이 이론은 다음 훈계에 위험스럽게 가까이 (틀림없이 그 주장자의 의도에 반하여) 다가가지 않는가: ‘현명하게 처신하여 기독교의 창시자가 당신에게 말하는 것을 명심하라, 이유인즉 그가 인간 본성에 관한 위대한 심리학자였고 역사에 관한 위대한 예언가였기 때문이다. 때에 맞추어 온유한 자들이 타고 가는 마차에 동승하라; 그 까닭은 인간 본성에 관한 냉엄한 과학적 법칙에 따라서, 이것이 정상에 이르는 가장 확실한 길이기 때문이다!’ 그런 역사에 대한 단서는 성공숭배를 암시한다; 그 단서는 온유한 자들이 승자의 편에 있기 때문에 온유한 자들이 정당화될 것임을 암시한다. 그 단서는 마르크스주의를, 그리고 특히 내가 마르크스의 역사주의적 도덕론으로 기술한 것을 인간 본성에 관한 심리학의 언어로 그리고 종교적 예언에 관한 언어로 변환한다. 그것은 암시에 의해서 기독교의 창립자가 헤겔의 선두주자였다는 ㅡ 더 우월한 선두주자로 인정되는 바와 같이 ㅡ 사실에서 기독교의 가장 큰 업적을 보는 해석이다.

성공이 숭배되어서는 안 된다는, 성공이 우리의 심판관이 될 수 없다는 그리고 우리는 성공에 의하여 현혹되어서는 안 된다는 나의 주장과, 특히 이 태도에서 내가 기독교의 진정한 가르침이라고 믿는 것에 내가 동의한다는 것을 밝히려는 나의 노력이 오해되어서는 안 된다. 그러한 나의 주장과 나의 노력에는 내가 앞 장에서 비판한 내세적(來世的)태도를 지지하려는 의도가 없다. 기독교가 내세적(來世的)인지 나는 모르지만, 자신의 신앙을 증명하는 유일한 길은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실제적인 (그리고 세속적인) 도움을 제공함에 의해서라고 기독교는 확실하게 가르친다. 그리고 부귀영화의 의미에서 세속적 성공을 향한 최고의 유보적 태도와 심지어 경멸의 태도를 지니고, 이 세상에서 최선을 다하려는 노력 및 그 목적들이 성취되도록 만들려는 분명한 목표와 함께 자신이 채택하기로 결정한 그 목적들을 추진하는 노력하는 것은, 틀림없이 가능하다; 성공의 정당화나 역사에 의한 자신의 정당화를 위해서가 아니라, 그 목적들을 위하여.

ㅡ 칼 포퍼, “열린사회와 그 적들” II, 1971, 271-274쪽 ㅡ

 

I do not deny that it is as justifiable to interpret history from a Christian point of view as it is to interpret it from any other point of view ; and it should certainly be emphasized, for example, how much of our Western aims and ends, humanitarianism, freedom, equality, we owe to the influence of Christianity. But at the same time, the only rational as well as the only Christian attitude even towards the history of freedom is that we are ourselves responsible for it, in the same sense in which we are responsible for what we make of our lives, and that only our conscience can judge us and not our worldly success. The theory that God reveals Himself and His judgement in history is indistinguishable from the theory that worldly success is the ultimate judge and justification of our actions ; it comes to the same thing as the doctrine that history will judge, that is to say, that future might is right ; it is the same as what I have called 'moral futurism'. To maintain that God reveals Himself in what is usually called 'history', in the history of international crime and of mass murder, is indeed blasphemy; for what really happens within the realm of human lives is hardly ever touched upon by this cruel and at the same time childish affair. The life of the forgotten, of the unknown individual man ; his sorrows and his joys, his suffering and death, this is the real content of human experience down the ages. If that could be told by history, then I should certainly not say that it is blasphemy to see the finger of God in it. But such a history does not and cannot exist; and all the history which exists, our history of the Great and the Powerful, is at best a shallow comedy; it is the opera buffa played by the powers behind reality (comparable to Homer's opera buffa of the Olympian powers behind the scene of human struggles). It is what one of our worst instincts, the idolatrous worship of power, of success, has led us to believe to be real. And in this not even man-made, but man-faked 'history', some Christians dare to see the hand of God ! They dare to understand and to know what He wills when they impute to Him their petty historical interpretations! 'On the contrary', says K. Barth, the theologian, in his Credo, 'we have to begin with the admission .. that all that we think we know when we say "God" does not reach or comprehend Him .., but always one of our self-conceived and self-made idols, whether it is "spirit" or "nature", "fate" or "idea" .. ' (It is in keeping with this attitude that Barth characterizes the 'Neo-Protestant doctrine of the revelation of God in history' as 'inadmissible' and as an encroachment upon 'the kingly office of Christ'.) But it is, from the Christian point of view, not only arrogance that underlies such attempts; it is, more specifically, an anti-Christian attitude. For Christianity teaches, if anything, worldly success is not decisive. Christ 'suffered under Pontius Pilate'. I am quoting Barth again : 'How does Pontius Pilate get into the Credo ? The simple answer can at once be given: it is a matter of date.' Thus the man who was successful, who represented the historical power of that time, plays here the purely technical role of indicating when these events happened. And what were these events ? They had nothing to do with power-political success, with 'history'. They were not even the story of an unsuccessful non-violent nationalist revolution (a la Gandhi) of the Jewish people against the Roman conquerors. The events were nothing but the sufferings of a man. Barth insists that the word 'suffers' refers to the whole of the life of Christ and not only to the His death; he says: 'Jesus suffers. Therefore He does not conquer. He does not triumph. He has no success .. He achieved nothing except .. His crucifixion. The same could be said of His relationship to His people and to His disciples.' My intention in quoting Barth is to show that it is not only my 'rationalist' or 'humanist' point of view from which the worship of historical success appears as incompatible with the spirit of Christianity. What matters to Christianity is not the historical deeds of the powerful Roman conquerers but (to use a phrase of Kierkegaard's) 'what a few fishermen have given the world' (이 문장에서 conquerorsconquerers로 잘못 쓰였다. 원문의 오류다. - 역자 주). And yet all theistic interpretation of history attempts to see in history as it is recorded, i.e. in the history of power, and in historical success, the manifestation of God's will.

To this attack upon the 'doctrine of the revelation of God in history', it will probably be replied that it is success, His success after His death, by which Christ's unsuccessful life on earth was finally revealed to mankind as the greatest spiritual victory; that it was the success, the fruits of His teaching which proved it and justified it, and by which the prophecy 'The last shall be first and the first last' has been verified. In other words, that it was the historical success of the Christian Church through which the will of God manifested itself. But this is a most dangerous line of defence. Its implication that the worldly success of the Church is an argument in favour of Christianity clearly reveals lack of faith. The early Christians had no worldly encouragement of this kind. (They believed that conscience must judge power, and not the other way round.) Those who hold that the history of the success of Christian teaching reveals the will of God should ask themselves whether this success was really a success of the spirit of Christianity; and whether this spirit did not triumph at the time when the Church was persecuted, rather than at the time when the Church was triumphant. Which Church incorporated this spirit more purely, that of the martyrs, or the victorious Church of the Inquisition?

There seem to be many who would admit much of this, insisting as they do that the message of Christianity is to the meek, but who still believe that this message is one of historicism. An outstanding representative of this view is J. Macmurray, who, in The Clue to History, finds the essence of Christian teaching in historical prophecy, and who sees in its founder the discoverer of a dialectical law of 'human nature'. Macmurray holds that, according to this law, political history must inevitably bring forth 'the socialist commonwealth of the world. The fundamental law of human nature cannot be broken .. It is the meek who will inherit the earth.' But this historicism, with its substitution of certainty for hope, must lead to a moral futurism. 'The law cannot be broken.' So we can be sure, on psychological grounds, that whatever we do will lead to the same result; that even fascism must, in the end, lead to that commonwealth; so that the final outcome does not depend upon our moral decision, and that there is no need to worry over our responsibilities. If we are told that we can be certain, on scientific grounds, that 'the last will be first and the first last', what else is this but the substitution of historical prophecy for conscience ? Does not this theory come dangerously close (certainly against the intentions of its author) to the admonition: 'Be wise, and take to heart what the founder of Christianity tells you, for he was a great psychologist of human nature and a great prophet of history. Climb in time upon the band-waggon of the meek; for according to the inexorable scientific laws of human nature, this is the surest way to come out on top!' Such a clue to history implies the worship of success; it implies that the meek will be justified because they will be on the winning side. It translates Marxism, and especially what I have described as Marx's historicist moral theory, into the language of a psychology of human nature, and of religious prophecy. It is an interpretation which, by implication, sees the greatest achievement of Christianity in the fact that its founder was a forerunner of Hegel - a superior one, admittedly.

My insistence that success should not be worshipped, that it cannot be our judge, and that we should not be dazzled by it, and in particular, my attempts to show that in this attitude I concur with what I believe to be the true teaching of Christianity, should not be misunderstood. They are not intended to support the attitude of 'other-worldliness' which I have criticized in the last chapter. Whether Christianity is other-worldly, I do not know, but it certainly teaches that the only way to prove one's faith is by rendering practical (and worldly) help to those who need it. And it is certainly possible to combine an attitude of the utmost reserve and even of contempt towards worldly success in the sense of power, glory, and wealth, with the attempt to do one's best in this world, and to further the ends one has decided to adopt with the clear purpose of making them succeed; not for the sake of success or of one's justification by history, but for their own sak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