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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태 변호사의 비망록, “친구, 남쪽이라면 공안검사 했겠는걸”

이윤진이카루스 2012. 2. 11. 10:01

사설.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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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 남쪽이라면 공안검사 했겠는걸”

등록 : 2012.02.10 18:02 수정 : 2012.02.10 18:02

1989년 8월15일 판문점 군사분계선을 넘어 남쪽으로 내려오는 임수경(오른쪽)씨와 문규현 신부. 애초엔 휴전협정일인 7월27일 넘어오려 했으나 북 당국의 반대로 미뤄졌다. <한겨레> 자료사진

[토요판] 김형태 변호사의 비망록
②임수경·문규현 사건과 방북(하)
안기부는 접견을 거절했다
법원이 나서도 무시했다
그러곤 김현희를 동원했다 
임수경은 명랑함을 잃지 않

남산에 있는 안기부에서 접견을 하려면 바로 그 앞에 있는 주자파출소에 접견신청을 해야 했다. 2시 조금 전 그곳에 도착하니 파출소 순경이 나를 보자마자 대뜸 “황인철 변호사님은 안 오십니까?” 하고 물었다. 아니 황 변호사 오시는 걸 저들이 어찌 알까. 우리 쪽에서는 미리 연락을 한 적이 없었다. ‘전화를 도청하고 있구나.’

달포 전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은 청량리성당에서 전국상임위원회를 비밀리에 열었다. 그 자리에서 미국 영주권자인 문규현 신부를 임수경의 보호자 겸 동반자로 평양에 보내기로 결정했다. 문규현 신부는 임수경과 함께 휴전협정일인 7월27일 판문점을 넘어오려 했는데 북 당국이 강하게 반대했다. 군사분계선을 허락 없이 넘는 것은 정전협정 위반이라고 미군 쪽에서 항의할 경우 일이 커질 것을 우려해서였다. 일단 평양으로 돌아간 임수경은 북이 판문점 통과를 막으면 ‘고려호텔 창밖으로 뛰어내리겠다’고 배수진을 쳤다. 이런 식의 항의에 익숙하지 않은 북으로서는 크게 당황했을 것이다.

7월27일 군사분계선에 나타난 문 신부를 본 안기부는 기겁을 하여 조사 끝에 청량리성당에 모였던 남국현, 구일모, 박병준 신부를 그 다음날 구속하고, 유강하, 장용주, 윤종일 신부 등 7명은 불구속 입건했다. 그 기준으로 보면 황인철 변호사도 구속감이었다. 아마도 안기부에서 이런 움직임을 포착하고 그를 감시하고 있었던 게 아닌가 싶다.

1989년 8월15일 판문점 군사분계선을 넘어 남쪽으로 내려오는 임수경(오른쪽)씨와 문규현 신부. 애초엔 휴전협정일인 7월27일 넘어오려 했으나 북 당국의 반대로 미뤄졌다. <한겨레> 자료사진

피고인 옆에 있을 권리, 대법원까지 가다

그날 안기부는 접견을 거절했다. 변호인 접견을 시키라는 법원의 준항고 결정도 무시했다. 하긴 어디 그때뿐이랴. 법의 수호자라는 검찰도 그랬다. 2010년 용산참사 재판 때 법원은 2000쪽 분량의 수사기록을 공개하라고 했지만 검사는 끝까지 기록을 내놓지 않았다. 광우병 ‘피디수첩’ 사건 재판 때 검찰은 피디들에게 취재 테이프 원본을 왜 안 내놓는 거냐고 닦달을 했다. 양쪽 재판을 다 맡고 있던 나는, “그러는 검찰은 왜 용산참사 수사기록을 내어놓으라는 법원의 명령을 안 따르는 거냐”고 따졌다.

안기부 수사국장이던 정형근 검사는 “20일로 제한되어 있는 수사 기일을 지키기 위해 변호인 접견을 미뤄야 할 때도 있는 법”이라며 궤변을 폈다. 1997년 대선을 열흘 앞두고는 안기부 감찰실 직원 김홍석이 야당인 국민회의와 연계해서 양심선언을 하려 하자 안기부장 권영해는 그를 선거가 끝날 때까지 안기부에 감금했다. 그때 함세웅 신부 부탁으로 변호인 접견을 하려 했는데 거절당했다. 안기부장을 고소했고 법원은 ‘안기부장 권영해가 변호사 김형태의 업무를 방해했다’고 유죄 판결을 내렸다. 2004년 송두율 교수를 변호할 때는 변호인 접견권은 물론이고 수사 과정에서 변호인이 피고인 옆에 같이 할 권리가 있다고 대법원으로부터 확인받았다.


안기부는 임수경을 설득하려고 김현희까지 동원했다. 그는 1987년 칼(KAL)기를 폭파해서 117명을 죽게 만들었다며 사형선고를 받고도 구치소 문턱에도 안 가보고 보름 만에 사면받았다. 대선을 불과 보름 남짓 남기고 사건이 터져 노태우가 대통령에 당선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그런 그가 버젓이 안기부 지하 밀실까지 찾아와 차 마시러 자기한테 놀러 오라고 이야기하는 걸 듣고 임수경은 극심한 혼란에 빠졌다. 임수경이 김현희에게 서울 말씨를 쓴다고 하자 다음날부터는 어색할 정도로 평양 사투리를 섞어 썼다.

임수경의 기소 내용은 이렇다. ‘재미 한청련 윤한봉, 정기열 목사, 호주 민족사료실 김승일, 김진엽, 유럽민협 어수갑을 통해 북한의 지령을 받고 7월1일부터 8일까지 평양에서 열린 제13차 청년학생축전과 7월20일부터 31일 사이에 백두산에서 판문점까지 이루어진 국제평화대행진에 참가하고, 7월27일 판문점을 통해 귀환을 시도하고 여러 차례 선언, 성명, 기자회견을 하여 국가보안법상 이적죄, 지령에 의한 잠입·탈출죄, 찬양·고무·동조죄, 회합·통신죄, 금품수수죄 등을 지었다.’

문규현 신부는 1988년 6월6일 평양 장충성당에서, 남쪽 정의구현사제단과 동시에 진행된 평화통일기원미사를 집전하고, 1989년 7, 8월 임수경과 동행한 죄로 재판을 받았다.

첫 재판은 11월13일에 열렸다. 아침부터 전경 22개 중대 3천명이 동원되어 서초동 법원 안팎을 완전 봉쇄했다. 법정에 들어가는 데도 여러 차례 검문검색을 당했다. 내가 “변호사입니다” 하고 신분을 밝히자 “변호사라고 이마빡에 써넣고 다니냐”는 욕설이 돌아왔다.

왜 70명 변호인들 전원은 사임계를 냈을까

법정에는 이른 새벽부터 줄을 서서 방청권을 받은 자유총연맹 등 우익단체 사람들 50여명이 기세등등하게 자리잡고 앉았다. 대개는 노인들이었는데 법정에서 학생들을 향해 지팡이를 휘두르고 변호사들에게 욕설을 퍼부었다. 20년도 훨씬 더 지난 광우병 ‘피디수첩’ 사건 때도 이런 노인들이 법정을 메우고 기자들에게 욕을 하고, 판사가 무죄를 선고하자 고함을 치고 소란을 피웠다. 심지어 어떤 노인은 변호인석에까지 달려 나와 박용일 변호사의 멱살을 잡았다. 학생들은 박수를 쳐서 퇴정, 꽃잎을 뿌려 감치, 감치와 퇴정의 연속이었지만 폭력을 휘두른 노인들은 제재를 받은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재판부는 재판을 녹음한 테이프를 변호인들에게 주겠다고 약속을 하고도 이를 지키지 않았다.

이 재판에서 처음으로 변호인들이 피고인들 옆자리에 앉았다. 재판부는 이를 막았지만 그 무렵 개정된 형사소송규칙을 제시하자 할 수 없이 이를 허용했다. 임수경 주심 변호사로 천정배 변호사, 문규현 신부 주심으로 내가, 피고인들 옆에 나란히 앉아 외국 법정 영화에서 보듯 피고인들과 귓속말을 주고받으며 도움을 주었다. 피고인 입장에선 변호사가 바로 옆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큰 위안이 된다. 임수경이 검사 질문에 대답할 때 기억을 돕기 위해 자신의 행적을 기록한 <1995년을 통일의 원년으로>라는 책을 참고하려 하자 재판장이 이를 막았다. 폐쇄회로텔레비전(CCTV)이 설치되어 외부에서 재판 진행 상황을 지켜볼 수 있었던 걸로 기억된다.

네번째 공판에서는 아예 가족, 친지 등 30여명에게만 방청권을 발부했다. 결국 1990년 1월8일 5차 공판에서, 통일이 누구에 의해 어떻게 이루어져야 하는지를 밝히는 재판이 되어야 하는데 편파적으로 진행되고 있다는 이유를 들어 피고인들과 변호인들 모두가 퇴정했다. 그리고 70명 변호인들 전원이 사임계를 냈다. 재판부는 국선변호인을 참석시켜 한번 더 재판을 하고 모두 유죄를 선고했다. 그리고 ‘무분별한 통일논의와 모험주의적 밀입북에 대해 중형을 선고한다’며 임양에게 징역 10년, 문 신부는 징역 8년을 언도했다.

평양축전 참가는 북한의 지령이 아니라 그 이전 여러 대학의 학생회장 선거 당시 후보들이 내건 공약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1989년 연두 기자회견에서 노태우 대통령도 “남북간 어떤 형태이든 교류를 할 것이며 이러한 입장과 정책에 따라 평양축전을 교류의 기회로 활용하겠다”고 밝혔다. 정부 차원에서 남북학생교류추진위원회를 만들고 3월에는 위원장인 단국대 정용석 교수가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 주최 공청회에 참석했으며 북쪽에 회담을 제안하기까지 했다. 그러다가 4월에 문익환 목사가 평양에 가서 김일성 주석을 만나고 돌아오는 일이 벌어졌다. 그 뒤 공안한파가 몰아치면서 정부는 스스로 추진했던 평양축전 참가를 불허하고 임수경의 참가를 지령에 의한 것으로 몰아갔다.

공개적 초청을 지령이라니? 그리고 평양축전은 북쪽이 만든 행사가 아니고 국제학생동맹 등 국제단체가 몇 년에 한번씩 이 나라 저 나라를 돌며 열어온 것으로, 평양대회는 미국, 영국, 프랑스, 일본 등 180개 나라에서 참가했다. 이 행사에 갔다 온 걸 ‘이적죄’로까지 걸었다. 세계의 이목을 받으며 판문점을 넘은 걸 ‘몰래 들어온다’는 뜻이 있는 ‘잠입’죄로 처벌한 것도 그렇다. 이어진 항소심과 대법원 역시 피고인들의 공소사실에 대해 모두 유죄라 판단했고 형량만 각 5년으로 줄었다.

‘전국교도소 밀주제조추진위원장’ 문규현

어느 땐가 이돈명 변호사를 모시고 교도소에 복역중인 두 사람을 차례로 면회 갔다. 그런데 문 신부가 얼굴이 불콰해서 나오는 터라 어찌 되신 거냐 물었다. 답인즉슨 자칭 당신이 ‘전국교도소 밀주제조추진위원장’이라 했다. 과일에 요구르트를 넣고 며칠 있으면 알코올기가 돈다. 임수경은 예의 명랑함을 잃지 않고 청주여자교도소를 꽉 잡고 있었다. 나를 보자 이랬다. “변호사님, 동생 좀 소개해 주세요.”

두 사람은 3년4개월가량 복역하다가 1992년 12월25일 성탄특사로 가석방되었다.

그들은 남쪽뿐 아니라 북에도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재기발랄하고 거침없는 임수경의 행동은 그곳 젊은이들에게 일종의 문화적 충격이었다. 문 신부는 가톨릭을 ‘제국주의 앞잡이’라고 여기던 북쪽에 민중적 통일운동을 하는 천주교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내가 북에 갈 때마다 임수경, 문규현 신부를 변론했다고 소개받으면 모여 있던 이들의 눈빛이 달라지고 큰 박수를 받곤 했다.

갈 때마다 나를 맞아주던 이는 나와 동갑이어서 서로 ‘친구먹기’로 하였는데 그는 전대협 대표 임수경을 김책공대 학생대표 자격으로 만났다. 그는 인민군에 오래 복무해서, 동갑내기인 나는 임수경의 변호사인 데 반해 그때까지도 아직 대학생으로 임수경의 상대가 되었던 것이다. 눈빛이 날카롭고 빈틈이 없는 그를 만나면 나는 이렇게 놀리곤 했다. “당신은 스타일로 보아 남에서 태어났더라면 틀림없이 공안검사가 되었을 거고 아마 임수경 수사를 맡았을 거다.”

2002년 ‘조선가톨릭교협회’ 초청으로 신부들과 평양에 가면서 그곳이 고향인 어머니, 아버지를 모시고 갔다. 평양은 6·25 때 미군 폭격으로 완전히 파괴되어 전부 새로이 건설되었다. 어머니는 옛 모습을 전혀 찾을 길이 없는 걸 아주 서운해하셨다. “모란봉과 을밀대 그리고 대동강만 옛 모습 그대로구나.”

저녁 만찬이 있었는데 나는 어찌하다 남쪽 방문단장이신 김병상 신부 옆자리에 앉게 되었다. 맞은편에 앉아 있던 장관급의 조선적십자사 위원장 겸 조선가톨릭교협회장이 일어나서 그 자리에 모인 100여명의 참석자들에게 건배를 제의했다. 그러고는 잔을 들어 나를 바라보고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김형태 변호사님은 임수경, 문규현 신부님 변론하느라 고생하셨으니 앞으로 통일되면 인민들이 크게 보답할 것입니다.” 이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처음 만수대에 참배할 때와 마찬가지로 가슴이 덜컥했다. ‘야, 이거 큰일 났구나. 북쪽이 노고를 치하한다니 남으로 돌아가면 꼼짝없이 잡혀가는 거 아니야?’ 저 멀리 원탁에 앉아 계시던 아버지, 어머니도 얼굴이 핼쑥해지셨다. ‘이제 우리 아들 큰일 났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