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는 먹고사는 것을 노리는 것이어서
거짓말 하고 사기 치며 살아가는 방식.
“비천하지만 기댈 수밖에 없는 것이 백성.”
“나에게는 통치자란 도덕적으로나 지적(知的)으로
평균을 넘는 적이 드물며, 자주 평균 이하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나는 우리가 물론
동시에 가장 훌륭한 통치자를 얻으려고 노력해야
할지라도, 정치에서 가장 나쁜 통치자에게 가능한
한 잘 대비하는 것이 합당하다고 생각한다. 우리의
정치적 노력 모두를 우리가 우수한, 또는 심지어
유능한 통치자를 얻는데 성공할 것이라는 약한
희망에 거는 것은 나에게 미친 짓으로 보인다.”
“삶을 기뻐하는 것이 미혹이 아닌지 내 어찌 알겠소?”
공맹(孔孟)은 잘못된 곳에서 도덕을 부르짖어
상갓집 개가 되었구나.
“사람에게서 지혜와 어리석음의 상하를 구별하고,
자기들 스스로 지혜로운 위치에 서서 어리석은
백성들을 다스리려는 데 급하기에, 세상의 정치에
관계하고자 하는 마음도 역시 급하다.”
“천하에 도가 있으면, 성인은 이룩하지만
천하에 도가 없으면 성인은 살아갈 뿐.
지금 이 세상에서는 형벌을 면하는 게 고작.
행복은 깃털보다 가벼워도 담을 줄 모르고,
재앙은 땅보다 무거워도 피할 줄을 모른다.
그만두게, 그만둬.
도덕으로 사람을 대하는 짓은 위험하네.”
“하늘의 소인(小人)이 사람의 군자이고,
하늘의 군자는 사람의 소인이다.”
“전체적인 혁명의 문제점은 그 혁명이 동일한
계급을 상위에 올려놓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훌륭한 업적을 수행하는 자들은 반쯤 가서
멈출 계획을 세울 것이다.”
“인간의 지성사에는 고무적인 면과 실망스러운 면
모두가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 역사를 고집스럽고
흔히 불관용과 광신과 결합된 편견과 독단의 역사로서
간주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심지어 그 역사를
종교적이거나 유사-종교적 광란의 역사로서 기술할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겪은 가장 파멸적인 전쟁들은
종교적이거나 이념적인 전쟁들이었음이 – 아마도
종교적 관용의 전형이었던 칭기즈 칸이 벌인 전쟁들을
특별히 제외하고 – 기억되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심지어 종교적 전쟁들의 슬프고 실망스러운 모습에도 보다
밝은 면이 있다. 고대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무수한
사람들이 자신들의 신념들과 생각들 – 그들이 참이라고
믿었던 생각들 – 때문에 기꺼이 살려고 하고 기꺼이
죽으려고 했던 것은 고무적인 사실이다. 사람은 이성적인
동물이라기보다는 이념적인 동물로 보인다고 우리는
말할 것이다.”
“너는 사람의 퉁소 소리는 들어도
땅의 퉁소 소리를 듣지 못했고,
또 땅의 퉁소 소리를 듣는다 해도
아직 하늘의 퉁소 소리를 듣지 못했겠지.”
“내가 제 3세계로 지칭하는 것은 인간정신의
생산물의 세상으로서 매우 개략적으로 기술될 것이다.
제 3세계에는 건축, 미술, 문학, 음악, 학문 그리고
가장 중요하게는 과학의 문제들과 이론들과 비판적
토론들이 포함된다.”
“안회가 말했다. 「저는 얻은 바가 있습니다.」
중니가 물었다. 「무엇 말이냐?」
「저는 인의(仁義)를 잊었습니다.」
「됐다. 하지만 아직 미흡해.」 얼마 후 다른 날,
다시 안회가 만나서 말했다. 「저는 얻은 바가 있었습니다.」
「무엇 말이냐?」
「저는 예악(禮樂)을 잊었습니다.」
「됐다. 하지만 아직 미흡해.」 다시 며칠이 지난 후 다른 날,
또 안회가 만나서 말했다. 「저는 얻은 바가 있었습니다.」
「무엇 말이냐?」
「저는 좌망(坐忘)하게 됐습니다.」 중니는 놀라서 물었다.
「무엇을 좌망이라고 하느냐?」
안회가 대답했다. 「손발이나 몸을 잊고, 귀와 눈의 작용을
물리쳐서, 형체(形體)를 떠나 지식을 버리고 저 위대한 도와
하나가 되는 것, 이것을 좌망이라 합니다.」
중니가 대답했다. 「[도와] 하나가 되면 좋다 싫다가 없어지고,
변하여 한 군데 집착하지 않게 된다. 너는 정말 훌륭하구나.
나도 네 뒤를 따라야겠다.」”
“이것(지식 성장에 관한 4단계 도식) 다음에, 나는 지식에
관한 전통적 이론에 대한 비판으로 간단하게 시작했다.
그것은 주관적 지식 이론인데 여전히 폭넓게 지지를 받는다.
그 이론은 정신의 양동이 이론으로서 도식적으로 재현될 것인데
그 이론은 철학사에서 백지설, 즉 ‘텅 빈 칠판’ 이론으로서
유명하고 그 이론을 토대로 경험은 자체가 별견한 것을
새겨 넣는다. 나는 다음 도형을 그려서 그 이론을 개괄했다:
이 이론에 따르면, 도식에 재현된 네 가지 감각에 촉각을
보태면 우리가 지닌 모든 지식의 근원들이 된다. 나는
이 이론이 전적으로 틀렸다고 생각하는 몇 가지 이유를
당신들에게 제시하였다, 다른 이유들 가운데서: 우리의
지식을 구성하는 의향의 대부분이 타고난, 즉 세습된
것이라는 점이다; 타고난 것이 아닌 의향들의 대부분은
타고난 의향들을 수정한 것들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나머지는 객관적인 지식으로부터 이전된 것이어서 전혀
주관적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래서 실제로, ‘양동이 이론’으로
남는 것은 없다 – 그 이론은 완전히 오류이다.”
“그러나 나는 칸트보다 훨씬 더 나아가겠다. 나는 가령
모든 생명체의 지식 99%가 선천적이며 우리의 생화학적
몸에 포함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나는 칸트에 의하여
우리의 감각을 통하여 우리에게 주어진 후천적이고
"자료"라고 생각된 99%의 지식이 실제로 후천적이 아니고
선천적이라고 생각한다. 그 까닭은 우리의 감각은 우리 질문에
대하여 (칸트 자신이 보았듯이) 단지 긍정과 부정의 대답으로만
우리를 도울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선천적으로 상상하고
묻는 질문과 때로는 매우 정교한 질문들. 게다가, 심지어
감각으로 하는 긍정과 부정의 대답도 우리에 의하여
해석되어야 한다 - 우리가 선천적으로 미리 상상한 개념에
비추어 해석되어야 한다. 그리고 물론, 그 대답들은
자주 잘못 해석된다.”